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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9강. 하나님의 장자로 사는 길 (창 27:15-29)

by coroa 2021. 6. 13.

 

[49강. 하나님의 장자로 사는 길 (창 27:15-29)]

-.정낙원 목사

 

오래전 제가 아는 어떤 권사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암으로 돌아 가셨어요.

권사님이 사경을 헤매니까 가족들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라고 이야기를 하였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말이 너희들이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느냐?



니들이 죽어 봤냐?

천국을 가 보았느냐? 라고 하면서 역정을 내시더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충격을 받고서 저에게 심방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리곤 얼마 후에 돌아 가셨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합니다.

예수나 천국이나 부활이나 하는 영적인 일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믿을 수가 있고 그렇게 믿어지는 사람은 그곳을 소망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얼마든지 다닐 수가 있어요.

목사도 하고 장로도 하고 권사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은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사람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부께서 심지 않는 것은 다 뽑힌다고 하셨지요.

이는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믿겠다고 쫓아 다녔지만 정작 예수를 믿는 사람은 천부께서 심은 사람만이 믿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종교 생활과 신앙생활은 달라요.

종교 생활은 취미이지만 신앙생활은 삶 그 자체에요.

우리가 삶을 대충 대충 살 수가 없듯이 신앙생활도 대충 대충 할 수가 없어요.

교회 생활을 동호회 모임 하듯이 할 수가 없어요.

만약에 교회 생활을 동호회 모임 하듯이 한다면 그 사람은 지금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지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는 생명 바쳐 믿는 것이에요.

대충 대충 믿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지 않은 자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생명 다하여 예수를 믿진 않아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칭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취미 생활 하듯이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스스로 확인해 보세요.

난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가?

정확하게 말해서 예수가 믿어지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세요.

이게 안 믿어지면 권사님처럼 죽을 때 예수를 부인 할 수 밖에 없어요.



씨뿌리는 비유를 보세요.

모두가 다 처음에는 싹이 나서 자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자라가면서 환란이나 세상 염려나 일락에 막혀서 죽어 버립니다.



왜 중간에 죽어 버립니까?

이는 관리하는 농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실하는 밭은 농부가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자기 밭에 곡식만 관리해요.

즉 자기 백성만 관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씨뿌리는 비유에서 믿다가 중간에 포기 되어지는 사람들은 천부께서 심지 않는 자들로서 종교 생활하는 자들이고 끝까지 결실하는 사람들은 천부께서 심으셨기 때문에 끝까지 지키시고 관리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인간의 의지나 각오나 노력으로 믿지 못해요.

오로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고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자기 백성들을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다스려 가십니다.

창세전 언약은 마치 드라마의 시나리오와 같아요.

드라마의 시나리오에는 다양한 사건들이 담겨져 있어요.

그 사건들이 드라마를 통해서 보따리가 풀려 지듯이 풀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가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을 당할 수가 있어요.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일락을 당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성도는 끝까지 완주해요.

넘어 질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은 우리들의 신앙생활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구름 기둥 불기둥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갔습니다.

구름이 떠올라서 앞서서 진행을 하면 이스라엘도 따라서 진행하였고 구름이 어디에든지 멈춰 서면 이스라엘도 그 곳에 멈추어서 진을 치고 살았습니다.



가고 서고를 이스라엘 뜻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구름 기둥이 주장하였어요.

구름 기둥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발걸음을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가는 길이 평탄치 않았어요.

그럼에도 약속의 땅으로 무사히 들어갔어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의 인생을 간섭해 가십니다.

우리의 인생도 드라마의 시나리오처럼 다양한 사건으로 전개가 되어져요.

희노애락이 교차하여서 전개가 되어요.



밋밋한 드라마는 없어요.

성도가 써 가는 구원이라는 드라마는 스펙타클해요.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는 것과 같아요.

이를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성경을 왜 이스라엘 민족의 일대기로 기록해 놓은 줄 아세요.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속에서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오뚝이처럼 넘어져도 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넘어지게도 하시고 일어서게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성경 속에 하나님과 달라요.

우리도 앞서 말한 권사님처럼 교회에 다니면서 학습으로 알아진 것으로 입술로는 수없이 천국에 대하여 예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여 왔어요.

하지만 막상 믿어야 하는 때에는 믿지 않아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다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은 사람은 이원론 신앙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로는 산을 옮길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는 못하는 중풍병자들과 같아요.

실제로 하나님이 내 인생을 간섭하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아요.

그러므로 아픈 일들이 일어나면 신앙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의 하나님을 경험 한 적이 없으니까 이스라엘을 간섭하신 하나님은 알겠는데, 내 인생을 개입 하는 하나님은 믿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 뭐냐?

성경 속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일컬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어요.



이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간섭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을 나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각자 만난 하나님이 있어요.

반드시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벧엘 광야에 나온 야곱을 찾아 가서 만나 주셨듯이 반드시 찾아 와서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흰 도포 자락 펄럭이면서 찾아오신다는 뜻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을 간섭하셨듯이 내 인생도 간섭하신다는 것이 믿어져요.

믿어지니까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은사에요.

은사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서 믿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산다는 말이 아니고 그 반대로 하나님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으로 산다는 말이에요.

내가 믿으면 행함이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은사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은사에 속한 것이고 은혜이고 선물이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주어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게 해주시면 평생교회를 다녀도 믿고자 다녀요.

앞에서 말한 그 권사님처럼 교회 마당을 수십 년 드나들면서도 끝에 가서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예수를 믿고자 하였지만 끝내 믿지 않았어요.

믿고자 하니까 막상 죽음이 다다르니까 두려운 겁니다.

두렵다는 것은 온전한 사랑 안에 거하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이 한걸음씩 다가오자 나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을 못 믿는다고 자신의 믿음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 안 믿어지니까 죽어 봐야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알면 늦었어요.

천국은 죽기 전에 믿어야 해요.

근데 이 천국은 우리 노력으로 믿어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목사 노릇을 하고 장로나 권사 노릇을 하여도 믿어지게 해주시지 않으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청산유수처럼 말은 할 수는 있어도 안 믿어요.

그러니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보이는 이 세상 힘을 의지 하고 사는 것입니다.

천국을 위하여 살지 못하고 이 세상 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원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져야 해요.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수가 없어요.

사람 앞에서는 믿음 없어도 믿음 있는 척 좋은 척 할 수는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되고 진솔해야 합니다.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 하셔야 합니다.

기도 하셔야 해요.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신앙을 점거해야합니다.

나는 지금 믿는 척 하고 있는지?

아니면 믿어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는 솔직하세요.



설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을 “나는 이렇게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나 주셨습니다” 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가는 곳마다 자기가 만난 예수를 증거했어요.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분이시다” 라고 간증했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간섭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어떻게 간섭하고 계신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유숙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야곱을 찾아 가서 만나주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벧엘 광야에서 유숙하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가서 만나주십니다.

야곱이 기도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 오셔서 '나 다' 하고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신앙고백이 달라지게 되었어요.

그동안 귀로만 듣던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게 되었어요.

그 동안 부모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이었어요.

그런데 집에서 쫓겨나니까 하나님이 찾아 와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난 이런 하나님이다” 라고 말이에요.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이제부터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동안 조상을 간섭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부터는 야곱을 간섭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야곱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찾아 오셔서 스스로를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비로서 자기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조상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계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 주어야지만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모든 성도를 대표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을 알리는 일들을 하십니다.



자기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을 경험적으로 만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과 상관이 없어요.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흰 도포자락 휘날리면서 찾아 와서 “나 다” 라고 얼굴과 얼굴을 보고 만난다는 말이 아니고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준 사람들은 이상하게 성경 속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믿어져요.

성경 속의 이야기가 전부 자기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약속들이 자기에게 한 약속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성령의 증거라고 합니다.

증거는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어 놓게 되어 있어요.

성령께서 믿어지게 해 주는 사람은 믿어지는 것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하게 해 주셔서 하는 고백입니다.



성령께서 믿어지게 해 주는 사람은 예수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아요.

교회에 모이고 봉사하고 섬기고 연보하는 것들이 어렵지 않아요.

자연스러워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일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힘,

교회에 다니는 힘,

봉사하는 힘,

연보하는 힘,

섬기고 나누고 베푸는 모든 힘을 하나님이 주세요.



이걸 은사라고 합니다.

이 은사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하는 것이므로 어떤 일을 하고 나서도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장자의 축복 속에 담긴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축복이란? 반드시 이렇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 가문의 장자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축복하는 겁니다.

이삭은 하나님 입장에서 야곱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하신 축복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서 집에서 쫓겨나서 광야에 나오니까 하나님이 찾아 와서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광야로 쫓겨나니까 하나님이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나타나서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을 책임져 줄게 라고 약속 하신 것과 같아요.



야곱이 집에서 쫓겨난 것은 하나님이 옛 조상의 집으로부터 빼 내신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을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빼낸 것과 같아요.

집을 나온 야곱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장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 장자와 다른 모습입니다.

세상 장자는 이 땅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지만 하나님의 장자는 이 땅을 떠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나그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일평생 떠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야곱 속에는 성도의 모습이 담겨져 있어요.

성도들도 야곱처럼 간섭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장자가 받은 복이에요.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란? 육신적인 것입니다.

육신적인 것이라 함은 현세적인 것이고 물질적인 것이고 이 땅에 대한 것들이란 뜻입니다.

이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전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에요.



우리는 복 이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육신적으로 부요해지고 몸이 편해지는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세상 적으로 잘 풀리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 그대로 증거되고 있어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아사아의 일곱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 이 역사 속에 존재하는 교회를 시대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일곱 교회는 어느 시대이고 존재하고 있어요.

하지만 교회사 적으로 보면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하여서 라오디게아 교회로 끝이 납니다.

에베소 교회가 예수님 초림으로 시작한 초대 교회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 재림 때 나타나는 종말 교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비진리와 싸우는 전투적인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 것에 취하여서 무장해제 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이것은 세속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종말의 교회는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어 있어요.

물질적 가치로 복을 판단하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 한 자가 차별이 되고 가진 바는 복을 받았다고 하고 가난 한 자는 복을 받지 못한 자로 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베소 교회로 교회의 시작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 왜 교회의 시작을 에베소 교회로 할까요?

이는 교회가 역사 속에서 어떤 사상과 싸워야 하는지를 말해주고자 하심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자 하심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면 우상의 도시에 세워진 교회에요.

이것은 이 세상 속에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우상의 도시에요.

다니엘을 보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제국들을 우상의 신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이 우상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에베소는 동양과 서양을 이어주는 항구 도시로서 상업과 교통과 종교와 문화를 모두 받아 들여서 종교적으로는 혼합 종교로 나타났습니다.

에베소에는 각양의 우상의 전들로 가득하였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신전이 “아데미” 신전이었습니다.



아데미 신전은 여러 신전들 중에서도 가장 큰 신전이었어요.

그 당시 역사 속에 나타난 것 중에 제일 컸어요.

크다는 것은 그만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데미는 여신으로서 앞 가슴에 유방이 24개나 달려 있어요.

마치 돼지의 젖꼭지처럼 많았어요.

이는 풍요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아데미 신전에는 항상 수많은 참배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어요.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았습니다.



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까요?

이는 인간들이 가장 바라는 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최고의 복은 떡이에요.

떡 속에는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모든 권세와 영광이 다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복은 떡이에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구조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떡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인간들에게는 떡을 주는 신이 최고의 신이었어요.



사람들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번성하는 것을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아데미 여신이 인간들에게는 먹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떡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 것이나 섬길 자세가 되어 있어요.



울산 간절곳에 가면 매년 새해 첫 날이 되면 해맞이 축제를 합니다.

그때에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하나같이 몸 건강히 잘살고 자식들 잘되고 돈 많이 벌게 해 달라고 기원합니다.

바라는 것들이 모두가 땅에 것이고 육신 적인 것이고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우리도 예전에 예수를 몰랐을 때는 세상 것을 구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세상 것 달라고 구하고 찾고 두드렸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 입니다.

야곱도 장자의 복을 받으면 세상에서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장자의 개념은 아버지의 유업을 잇는 것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이삭은 거부입니다.

그랄 땅에 기근이 들 때에 하나님은 이삭에게는 백배나 축복을 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로 부자였습니다.

요즘 말로 재벌입니다.

이런 부잣집에 장자가 되면 어찌 되겠어요.

재벌 회장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걸 노린 겁니다.

야곱은 이제 장자의 축복을 받았으니까 회장이 될 것이라고 믿었어요.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욕심이 가득한 사람이었어요.



야곱이라는 이름이 “약탈자”에요.

그 이름에 걸맞게 장자권을 약탈하다시피 빼앗았어요.

야곱이 장자권을 탐 낸 것은 형에게 돌아가는 복을 자기가 차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장자의 축복을 받자 상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진 꾀를 기각을 시켜버리고 하나님이 준비한 진짜 하나님의 장자가 받는 그 복을 주시는 일을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서 오히려 손해를 보았어요.

세상 적으로 보면 복을 받은 게 아니고 도리어 망한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재산을 유업으로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돌아 온 것은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건 야곱이 바라던 것이 아니에요.

정반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일을 누가 했나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을 하실까요?

이는 하나님의 장자는 세상 장자와 다름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의 복을 보면 이 땅의 축복이 아니었어요.



27-29절을 봅시다.



창 27:27-29=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을 보세요.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을 준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보면 땅에서 거부가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성경의 중심 사상으로 보면 이삭이 야곱에게 한 복은 땅에 복이 아니라 하늘에 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 하나님은 그들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은 기름진 땅인데, 아담아 쫓겨나서 살아갈 땅은 저주의 땅이에요.

저주 받은 이 땅은 그 어디에도 기름진 곳은 없어요.



성경은 가나안 땅을 일컬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았어요.

도리어 애굽 땅이 가나안 땅보다 휠씬 좋은 땅이었어요.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고서 도착한 땅이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요.

애굽에 내려가서 자기 마누라를 팔아먹고는 재물을 모아서 가나안으로 올라옵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 기름진 땅이 아니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이슬이 내리는 기름진 땅의 복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천국의 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만민의 주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승승장구하여 이 땅에서 왕 노릇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야곱은 만만의 주가 된 적이 없어요.

도리어 쫓겨 다니면서 유리방황 하면서 살았어요.



만민의 주가 된다고 하는 복은 장차 하나님께서 진짜 만민의 주가 되시는 분을 야곱의 후손으로 이 땅에 보내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이게 요셉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셉은 장차 오실 진짜 만민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장자로 선택이 된 것과 같아요.

온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아브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입고서 하나님의 장자가 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실 때 후손을 주겠다고 합니다.



알다시피 아브람은 복의 조상으로 선택을 입었어요.

그럼 그 후손도 복의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장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장자는 이삭이었고,

이삭의 장자는 야곱이었고,

야곱의 장자는 요셉이었고,

요셉의 시대가 되어서 야곱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룹니다.



한 집안이 출애굽 할 때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제 온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장자 국가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아브람 언약 속의 그 후손이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의 맥으로 예수님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의 조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만민의 주가 된다고 한 축복이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메시야의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역사를 다루어가는데 예수라는 한 사람 중심으로 다루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세요.

이는 역사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주께로부터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이건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유지 되다가 예수로 끝이 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속에서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드러내고는 끝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남기고 싶은 사람은 한 남자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 안에서 한 민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걸 야곱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은 야곱 속에서 한 민족이 나오고, 그 민족 속에서 그 민족을 다스리는 주가 나온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을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야곱에게 형제는 에서 하나뿐이에요.

근데 이삭은 형제들이라고 합니다.

형제들이라는 말은 여럿이라는 뜻입니다.



에서 한 명이면 그냥 단수로 형제라고 하면 되어요.

그런데 복수로 형제들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것은 형제들이 많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너는 만만의 주가 된다고 축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할 때에 너를 복의 조상이라고 하셨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과 저주는 구약시대에는 아브람 한 사람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복이란? 하나님 자체입니다.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브람만이 하나님을 만났어요.

이게 아브람이 받은 복이에요.



이제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는 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복의 조상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가기 전에는 그들이 믿고 있는 신이 있었습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사람들은 죄가 주는 정보로 알고 있는 하나님이 있어요.

이걸 다른 신이라고 하면서 우상이라고 합니다.



아브람도 우상을 섬겼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 갑니다.

최초로 하나님이 세상에 공개가 된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만 참 하나님을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만 내가 참 신이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아브람이 아는 신 이외에는 모두가 가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참 하나님을 알게 된 복을 받은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도 지으시고 저주도 지으셨어요.

하나님을 만난 자는 복을 받은 자이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는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아브람만 복을 받았어요.

그래서 아브람을 복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세상에 복과 저주의 대상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브람이 아는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통하여서 온다는 것이 아니고 아브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통하여 복이 오고 저주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람이 알고 있는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고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것을 애굽의 바로를 통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사래를 겁탈하고 혼이 나지요.

그러자 아브람이 기도하자 저주가 풀립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앞에 아브람을 복과 저주의 기호로 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 언약이 이삭에게 넘어갔을 때에 그랄 왕 아비멜렉을 통하여서 또 보여주었어요.

아비멜렉이 리브가를 겁탈하려고 하다고 혼쭐이 나지요.

이게 야곱에게로 나타나는데 요셉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온 세상이 기근으로 죽어 갈 때 요셉이 온 세상의 주로 서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요셉에게 무릎을 꿇으면 살고 무릎 꿇지 않으면 죽었어요.



신약에 오면 아브라함의 위치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만민의 기호인 것입니다.

예수를 통하여 복이 오고 저주도 오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을 봅시다.



시 2:7-11=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명을 하나 내렸습니다.

그 영이 무엇인고! 하니 내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낼 터인데 그 아들을 영접하면 복을 받고 영접치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제시한 이 땅의 복과 저주에요.

하나님은 이 원칙을 가지고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정한 기준이므로 피조물은 왈가왈부 할 수가 없어요.



이건 인간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횡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 아들을 믿으면 복을 주고 안 믿는다고 저주를 하느냐 말입니다.

아들을 영접하면 복을 준다는 것은 이해하겠어요.

그건 자기 마음이니까.



하지만 영접하지 않는다고 저주하는 것은 인정 할 수가 없어요.

그건 우리가 영접 할 수도 있고 영접 하지 안할 수도 있잖아요.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이게 죄라는 겁니다.



이게 왜 죄가 되는고 하니 피조물은 자기 생각을 가져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왜 자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까?

이는 피조물은 창조주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내가 로봇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놈이 내 뜻대로 안 움직이는 겁니다.

이걸 고장이라고 합니다.

고장 난 놈은 폐기해야 해요.

고장 난 놈을 가지고 놀면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짜증이 나요.

그래서 고쳐서 쓰든지 아니면 폐기 처분하는 겁니다.



죄를 불순종으로 말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는 했는데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산단 말이에요.

그래서 죄인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죄란?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안 믿는 것이 죄인 줄 몰라요.

사람들의 생각은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않는 자는 저주 한다는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면 다냐?

내가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는 것이지,

자기 아들 안 믿는다고 저주한다는 것은 인정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비유하셨지요.



어떤 고을에 왕이 있었어요.

왕의 아들이 혼인 잔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왕이 고을 사람들에게 기별해서 다 참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 어떤 사람들이 자기 볼 일이 있다고 하면서 참석치 않았어요.

그러자 왕이 대노하면서 참석치 않은 자들을 진멸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걸 천국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느끼나요?

왕은 사람들 입장을 고려치 않지요.

왜 사람들 입장을 고려치 않는 겁니까?

이는 왕이 필요해서 그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는 왕이란 고을을 지켜주는 분이에요.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켜주는 자에요.

왕이 자기 사병으로 고을 사람들을 지켜주고 있어요.

왕은 고을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어요.

왕의 명령을 거역한다는 것은 왕의 은혜를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왕의 은혜를 모르는 자는 그 고을에서 살 자격이 없어요.

그래서 왕은 군사들을 보내서 자기 볼 일로 인하여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치 않은 자들을 진멸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어요.

선악과를 먹으면 어찌 된다고 하였나요?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였지요.

이는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심판자가 되면 하나님의 눈에는 보시기에 좋은 것이 자기 눈에는 보기에 좋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보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게 되어요.

그럼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자기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그냥 두면 에덴동산을 자기 보기에 좋았더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심판 권세를 가지고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심판은 하나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입장에서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게 잘 해줄 것 같으면 좋은 사람이고 내게 잘못하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죄는 자기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신앙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합니다.

목자가 양을 치는데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두 가지 상반된 환경을 가지고 칩니다.

양의 입장에서 보면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면 좋은 목자이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면 나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도 감사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로 인도해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목자가 나를 다스리고 있고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때입니다.



성경은 “너는 생각하지 말라, 생각은 하나님이 한다”

“너는 내 뜻에 따르라” 고 합니다.

이것이 믿어진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경과 역경을 가지고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가세요.

이는 창세전 언약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 언약이 이방의 객이 되었다가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종살이 시키고 빼내시는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려 가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세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세요.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세요.



하나님은 양극단의 환경으로 자기 백성들을 다스려 갑니다.

우린 여기서 반발하는 겁니다.

좋은 환경은 ‘아멘’ 하겠는데, 나쁜 환경은 ‘노멘’ 이에요.

좋은 환경 일 때는 할렐루야 하다가도 나쁜 환경이 닥치면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 냅니다.

그만큼 우리 몸뚱이는 몸이 불편한 환경을 싫어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가다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해서 원망하고 불평 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었어요.

몸이 불편한 환경이 되면 원망과 불평으로 우리 안에 죄가 토설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그렇게 일을 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살기 좋을 땐 다 믿음이 좋아 보여요.

우리는 등 따시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요.

하지만 어려우면 하나님을 미워해요.

우리 몸의 컨디션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다가도 미워해요.



우리의 믿음은 조석으로 변해요.

우리 생각에는 믿음 잘 지켜서 훈장 받고 천국에 당당하게 입성하고 싶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반대로 다스려 가십니다.



우리가 천국에 완장차고 올까봐서 완장을 다 압수하는 일을 하세요.

우리 잘남을 깡그리 뭉개버리고 못남으로 데리고 가세요.

다윗의 말년을 보세요.



사무엘하 24장을 봅시다.



삼하 24:1-25=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2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3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 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11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12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14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15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16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 17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18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19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20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21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22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23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다윗이 늙어서 인구 조사를 합니다.

이건 자기 업적을 자랑하고자 함입니다.

이걸 요압이 알고 “왕이시여 왜 이러십니까? 이건 옳지 않습니다” 라고 반대 하였어요.

요압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더욱더 창대케 해 주실 텐데 뭘 이것 가지고 자랑할게 있느냐고 반대 하였어요.



그럼에도 다윗은 강행합니다.

이 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대노하십니다.

이에 다윗이 큰 잘못을 저지른 줄 알고 회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갓을 다윗에게 보내서 세 가지 재앙을 보여주고서 선택하라고 합니다.



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일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이 삼 일 동안 온역을 달라고 하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역에 온역을 보내서 7만 명이 죽게 만듭니다.

그리고는 아라우나 타작마당에 제사를 지내게 해서 용서해 주십니다.



사무엘상에서는 다윗의 죄를 고발하고 끝이 나요.

그리고 사무엘하에 가서는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잘난 다윗으로 데려가지 않고 못난 다윗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천국은 우리 잘남으로 가는 곳이 아니고 용서 받은 자로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이 땅에서 다스려 가실 때 잘난 자로 다스려가지 않고 못난 자로 다스려 가는 것입니다.

긍휼의 자리에 앉게 하여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게 은혜에요.



다윗의 이러한 일을 누가 주도하였나요?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감동케 하여서 하였다고 합니다.

역대상 21장을 보면 사단이 일어나서 다윗을 유혹 하였다고 합니다.



대상 21:1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긍휼의 자리로 내려가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너 잘나서 이렇게 부국강성한 나라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네가 이렇게 못난 놈인데도 이 나라가 이렇게 유지되는 것은 너의 잘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인생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고 있어요.

그럼에도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좋은 신앙은 이걸 알고 긍휼의 자리에 앉아서 범사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됩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이 되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은 하란에서 거부가 되어서 귀향합니다.

그동안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금의환향하고 있어요.

이 때 하나님이 얍복강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야곱이 20년 동안 피 땀 흘려 번 재산들을 강 건너 보내 놓고 하나님이 야곱 하나만 막아서고는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이룬 업적을 자랑하고자 하는 야곱을 죽여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얍복강 씨름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얍복강에서 세상 힘을 의지하고 살던 야곱을 죽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이스라엘로 만들어 버립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말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그게 지팡이를 의지하고 사는 야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력서에 요셉을 등재하는 것입니다.



창 37:2-4=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4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야곱의 약전은 이러하니라”

그리고 요셉 이야기를 하지요.

약전이란? 이력서입니다.



야곱의 이력서를 볼 것 같으면 야곱의 일생이 적혀져야 하는데 요셉의 이력이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야곱의 인생을 대신 사는 자라는 뜻이에요.

요셉은 야곱의 2기 인생인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지고 지팡이를 의지하는 이스라엘로 사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그 이스라엘의 삶을 요셉이 사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분신이며 아바타인 것입니다.



야곱으로 하여금 만민이 복을 받고 형제들의 주가 되는 축복을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이 되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셉의 때에 가서 비로소 야곱이 받은 장자의 축복이 성취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았어요.

장자라는 것은 가문을 책임지는 자예요.

자기 가족을 책임지는 자라는 뜻입니다.

장자를 다른 말로 “주”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주란? 나를 책임져주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나의 주여” 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은 나를 대신 책임져 주시는 분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야곱이 어떻게 주가 되었나요?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던 야곱이 죽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스라엘(요셉)이 되어서 주가 되었어요.



요셉도 야곱처럼 죽었다 살아나는 과정을 겪게 되었어요.

형제들로부터 구덩이에 버려짐을 당한 것은 죽음에 넘겨진 것과 같아요.

감옥에서 살아난 것도 마찬가지에요.



주가 되는 코스가 버려짐과 되찾음을 경험하게 되어 있어요.

야곱이나 요셉은 장차 오실 진짜 주 되신 예수님의 인생을 선취적으로 경험한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통과하여야 하는 길이에요.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님을 만민의 주가 되게 하는 언약을 맺었어요.

그 언약을 아브라함 언약 속에 담아 놓았어요.

아브라함 언약이 이삭에게서 야곱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천지 창조로 시작하여서 요셉이 죽어 입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아담에서 요셉까지가 전 인류사를 축약해 놓은 것입니다.

아담부터 요셉의 이야기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창세기를 펼쳐 놓은 것이 성경이에요.



출애굽기부터는 아담에서 요셉 이야기를 온 세상에 확대하여서 확 펼쳐놓은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족속들을 핍박하고 괴롭혔던 부족 국가들이 출애굽기부터는 커다란 제국들로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오면 예수그리스도의 신앙을 핍박하는 적그리스도 세력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만민의 주가 되는 이야기는 예수그리스도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주가 되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책임져 주는 것으로 구속사가 전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요셉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 때문에 애굽에 내려갔고 요셉 때문에 극진한 대접을 받았어요.

요셉의 형제들이 한 짓은 요셉을 팔아먹은 것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요셉이 주가 되는 코스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기가 애굽에 팔려 오고 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도리어 두려워하는 형제들을 위로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요셉이 겪었던 그 코스를 그대로 겪었어요.

예수님도 요셉처럼 자기 백성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셔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전에 세운 만유의 주가 되는 코스예요.



그러므로 예수에게서 나온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이 코스를 밟게 되어있어요.

그래야 하늘에 장자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하나님의 장자들의 총회가 있어요.

거기에는 진짜 장자로부터 나온 자들이 하늘나라 장자들이 총회에 참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짜 장자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장자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나온 자들도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왕대 밭에서 왕대가 나온다는 말과 같아요.



성도들은 예수님과 동일한 운명으로 살아가요.

이 땅에서 버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아브람 식으로 하면 본토친척 아비 집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 식으로 하면 집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 식으로 하면 형제들로부터 버려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5편을 봅시다.



5-19=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14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편은 이스라엘의 시작과 끝을 하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생겨나게 된 배경은 아브라함 언약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에 의하여 애굽에 내려갔고 출애굽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언약을 하셨고,

이삭에게는 맹세를 하셨고,

야곱에게는 율례를 정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성부의 위치에 있고,

이삭은 성자 위치에 있고,

야곱은 성령의 위치에 있어요.



이 말은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약속을 하셨고,

아들이신 예수님이 약속을 이루셨고,

성령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자기 백성들 속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들 속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적용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걷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에서는 요셉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자기 백성들이 이방나라에서 객이 되었다가 사대 만에 돌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근이 오기 전에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내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요셉이 자발적으로 내려 간 것이 아니라 형제들로부터 버림당하여서 내려갔습니다.

구원은 버려진 자가 용서하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용서가 되려면 형제들로부터 죽임 당해야 해요.

그래서 야곱은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죽임 당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혀서 다른 자식들보다 더 사랑하였어요.



이것이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결국 형제들은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립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근이 오기 전에 한 사람을 먼저 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통하여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십니다.

요셉은 자기 힘으로 총리가 된 것이 아니에요.

바로의 꿈을 통해서 총리가 된 것입니다.



꿈이란? 하나님의 계시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꿈을 통해서 온 세계를 기근에서 살려내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온 세계를 요셉의 발 앞에 무릎을 끓게 합니다.

요셉이 만민의 주가 된 것입니다.



요셉이 왜 기근을 대비하여 창고를 짓고 곡식을 쌓아놓았는가요?

궁극적으로는 자기 형제들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형들에게 쫓겨난 것이 재수 없이 쫓겨난 줄 알았어요.



그러나 막상 총리가 되고 보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꿈처럼 형제들의 주가 되게 하시려고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나게 하였고,

형제들은 기근으로부터 살리기 위하여 양식을 창고에 들이는 일들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제들을 살리기 위하여 요셉을 희생 제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예수를 보내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짐승 같은 우리들을 사람 만들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시었어요.



우리들은 구원 앞에 서서 “이 벌레 같은 나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군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기들이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요셉이 모두 준비해 놓은 것을 값없이 혜택을 입었습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구원이란?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하여 혜택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귀하여 한 것이 전혀 없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믿을 뿐이에요.

그것도 믿어지게 해 주어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조차도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이 준비해 둔 것으로 혜택을 입는 것과 같아요.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죽인 것뿐이에요.

그런데 요셉은 그들을 살리는 일을 하였어요.

이게 장자의 복을 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자세에요.



하나님은 예수 라는 장자를 죽이고 수많은 장자들을 만들어 내셨어요.

예수로 낳아진 자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장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죄인을 용서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욕을 해도 우리는 욕을 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우리를 핍박해도 우리는 핍박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용서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용서를 세상에 보이라고 하세요.

그것이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도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토해 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사랑했는데,

요셉이 형제들을 사랑할 때 야곱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형제들을 용서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저 녀석이 내 사랑을 온전히 알고 있구나 하고 기뻐하였어요.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해요.

우리가 주님의 혜택을 입고 산다는 것이 깨달아지면 신안생활이 감사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감사와 찬송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가 너희를 위하여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

“너 하나를 위하여 창세전에 계획을 세웠고”

“그 창세전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가 와서 너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은 것을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시어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들을 믿어지게 하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자는 감사와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일들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끝나면 안 되고 우리에게까지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장자로 살게 하세요.

그게 용서하고 섬기는 자로 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내 나라가 임할 때에 너희들이 열 두 방백을 다스린다고 하지요.

열 두 고을을 다스리라는 것은 곧 왕 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라는 뜻이에요.

어째서 주의 자리에서 다스린다고 하나요?

이는 왕은 예수의 삶을 대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밀알을 낳았어요.

밀알 속에서 나온 자는 밀알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예수님이 주이시면 주님 안에서 나온 자들도 주가 되는 것입니다.



주란? 책임지는 자에요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그들을 대신 책임져주는 자로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위하여 울지 않아도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울어야 해요.

세상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아도 우리는 세상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이걸 교회식으로 이야기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목사가 주의 위치에 서서 섬기게 되겠지요.

목사가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겠지요.

목사가 주라는 말이 아니고 직분적으로 보면 주의 위치에 있다는 말입니다.



직분의 높을수록 주의 위치가 되므로 기도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주의 자리에 서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주가 되는 것이에요.

부모가 자식의 주가 되어서 섬기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는 다스리는 자가 아니고 섬기는 자입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 놓고 형제를 살리는 자에요

성도들은 그래서 늘 가족들을 향하여 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저들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주의 모습이에요.



그 주의 모습으로 산 자가 요셉이에요.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하나 때문에 애굽에서 왕 노릇하고 살았어요.

왕족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그놈들이 애굽에서 살다보니까 언약을 다 잊고 살아간 것입니다.



요셉이 죽을 때가 되어서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형님들! 형님들은 여기서 살지 말고 떠나세요!” 라고 합니다.

형님들이 살 곳이 여기가 아니고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가나안 땅이니 그리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죽거든 내 시체를 여기다 장사하지 말고 아브라함과 약속한 그 땅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합니다.



근데 형제들은 요셉이 죽고 나서도 애굽을 떠나지 않았어요.

왜 안 떠났나요?

요셉의 후광으로 귀족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장자로서의 삶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장자는 집에서 쫓겨나게 나게 되어 있어요.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이 집이 되어 버렸어요.

호사를 누리는 집이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저들을 주가 걸어가는 코스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을 알지 못한 새 왕을 일으켜서 요셉의 형제들이 누리던 기득권들을 다 빼앗아 가게 한 것입니다.

요셉의 특권을 다 거두어 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종노릇을 하게 합니다.



종살이 하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장자가 걸어갔던 그 코스대로 걸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왜 교회 안에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섬기는 줄 아세요.

그게 형제들을 섬기는 장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삶을 살라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광야 길이에요.

광야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하는 것을 배우는 장소에요.

모세는 광야 40년을 추억하면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에요.

이는 자기 힘으로 사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땅이란 말입니다.

가나안은 자기 힘으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파종을 하고서는 하늘을 쳐다보고 살아야 해요.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그럼 그 약속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만약에 약속을 믿지 못하고 가나안 사람들처럼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면 쫓겨나게 되어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이 땅에서 하늘에 방식으로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게 떡에 가치로 살지 않고 언약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가치로 살지 말라고 간섭하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세상 가치로 사는 것이에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눈만 뜨면 본능적으로 땅의 것을 찾습니다.

위엣 것을 찾아야하는데 아랫것을 찾으니까 자꾸만 간섭해서 우리 인생을 흔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징계예요.



히브리서 12장에 징계는 다 있는 것이로되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지요

하나님은 아들에게 징계를 하세요.

그 징계는 바로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입니다.



신앙이 언제 가장 좋아지느냐?

내가 연약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입니다.



신앙이 언제 타락 되느냐?

등 따시고 배부를 때 가장 타락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등 다시고 배부른 것을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원함과 다른 모습으로 간섭을 하여서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교정시키는 일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이게 장자의 복에 담긴 내용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도 우리의 분깃은 땅에 없고 하늘에 있습니다, 라고 하면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은 맞는데 동의하기 힘들어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예수 이용해서 잘살고 싶어 하는 탐심 때문입니다.

우상성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리는 자는 천국 못가요.

천국은 지옥을 경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는 이 땅에서 지옥을 철저하게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자 집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복으로 이 세상에서 연락하고 싶어 했어요.

그런데 돌아 온 것은 그 반대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길을 가도록 간섭을 하시겠다고 벧엘 광야에 사닥다리 타고 내려온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옵니까?

이제 야곱의 등에 업혀서 야곱의 인생을 개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아직까지 이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몰랐어요.

살아가면서 처절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 인생이 차압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성도들을 철저하게 이 세상이 싫어져야 해요.

우리 자신들이 미워야 해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죄가 고발당하고 내 실존에 대하여 미움이 생겨야 해요.

진짜 내 꼬라지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가야 해요.



하나님은 그렇게 만들어 가세요.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내 꼬라지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말은 적어지고 손발이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은혜 앞에 감격해요.

주여 나 같은 것이 ...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기백성들을 탕자 되는 곳으로 집어넣어요.

망하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어요.

할 말이 없게 만드세요.

그리하여 아들이 아니라 종의 심정으로 아버지 앞에 서게 만듭니다.



탕자를 보세요.

아버지에게 자기 분깃을 달라고 하니까 아버지는 두 말하지 않고 분깃을 나누어 줍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서는 아버지 집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 보아야 감사를 몰라요.

고마움을 몰라요.



그래서 아버지는 집을 나간다고 하니까 붙잡지 않은 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망해 보니까 비로서 아버지 집의 고마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강도를 만나서 인생을 망하고 보니까 인생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 올 때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감당 할 수가 없으니까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걸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자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고마움을 모르던 자는 죽었고, 아버지의 고마움을 아는 자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 코스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 인장 반지를 끼워주고 가문을 맡기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은 은혜의 집이에요.

은혜를 알려면 법으로 살던 자가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해요.

탕자가 집을 떠나기 전에는 법으로 살았어요.

아버지의 말이 다 잔소리로 들렸어요.

그래서 집을 나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집을 나가 망하고 나서 법에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 집이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잔소리 하던 아버지가 은혜의 아비지로 보이는 것입니다.

은혜의 아버지로 보이니까 이제는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내려가서 섬기게 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장자 모습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집안에 있던 장자가 훨씬 나아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하나도 어김없이 지켰어요.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아버지의 뜻에 도전하는 의가 되었어요.

자신이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고 산 것을 무기로 해서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틀렸다고 탄핵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첫째 아들은 세상의 장자 모습이에요.

법 아래 있는 자들이 모습이에요.

첫째 아들에게는 은혜가 없어요.

그러니 은혜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장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니까 돌아온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용서 받은 것이 없으니까 용서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은혜가 나오지 않고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법을 토해내는 것은 그동안 법으로 살았다는 증거에요.

그 속에 법이 가득하니까 법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이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집을 맡겨 놓으면 은혜의 집으로 세우지 않고 법의 집으로 세워갈 것입니다.

법의 집이 되면 자기와 다르면 다 잘라내요.

아버지도 동생도 다 죽여요.



탕자 비유에서 아비지 집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탕자같이 아버지 집을 떠나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달을 자가 가는 곳이에요.

아버지로부터 용서 받은 자가 가는 곳이에요.

진짜 장자는 아버지 집에 돌아 왔을 때에 아버지의 아들로 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종으로 돌아오는 것이에요.



그 사람은 종으로 돌아 왔지만 아버지는 종으로 대하지 않고 아들로 대해요.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가 스스로 종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아들 대우를 하는 곳이에요.

진짜 아들은 아버지 앞에 종의 심정으로 살아가요.



내가 아버지에게 얻어먹는 모든 것이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 집에 거할 자격이 없는 자인데 아버지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긍휼과 은혜로 사는 것을 알기에 감사와 찬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은 모두 다 이 과정을 겪게 하세요.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고서는 아버지 집에 유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집에서 쫓겨나서 아버지의 유업을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구조 속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장자가 받은 복이에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장자에요

우리도 원하든 원치 안든 필연적으로 야곱이 걸어간 그 코스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컨베어 벨트에 올려져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하는 길을 먼저 가신 선배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당한 것을 그대로 당하게 되어 있어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자 궁중에서 도망을 갑니다.

그 때에 시므이가 따라 오면서 욕을 합니다.

신하들이 저 놈을 당장 죽이자고 합니다.



이 때 다윗이 그만 두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시므이를 통하여 나에게 수욕을 주게 하는 것이니까 가만있으라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고 은혜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성도에게 우연은 없어요.

모두가 필연이에요.

하나님의 뜻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어서고 누움을 다 아세요.

우리의 생각까지 다 통촉하세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다 감찰하세요.

그러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사건 배후를 보세요.

사건이 일어나면 하나님이 이런 일을 통해서 무얼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엎드리세요.

지혜를 구하세요.

모두가 다 하나님이 나를 하늘나라 장자 만들기 프로젝트 속에서 집어넣고서 간섭하고 있구나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에는 시므이 같은 자들도 필요해요.

욕하는 사람들도 필요해요.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저 사람은 악역을 담당하라고 하신 것이구나 생각하세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인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 사람도 또 그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니까요.

그런 것들을 알면 우리가 원망하고 그럴 필요가 없지요.



저는 과거에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열심이 특심하여서 모두에게 칭찬을 들었어요.

욕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 난 후로는 칭찬은 고사하고 욕먹기가 일쑤입니다.

처음엔 욕을 들으면 화가 나서 분해서 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런데 세월이 가면서 면역력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는 누가 욕을 해도 그려러니 해요.

몰라서 그러는데 어찌 하겠어요.

이제는 누가 욕을 하면 순간적으로는 섭섭하지만 이내 주여 저 사람도 나처럼 복음이 들려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게 되어요.

이건 내가 잘나서가 아니에요.

내가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고 복음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이에요.



누가 복음을 모른다고 하면 그 사람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면서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복음을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서 복음이 들려지게 하고 깨달아지게 하셨어요.

복음 아는 것이 우리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이니까 자랑 할 수가 없어요.

또한 누가 모른다고 타박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맘 속에 긍휼이 나와야합니다

기도해야 해요.



하나님! 나의 눈을 열어 보여지게 하시고 귀를 열어 들려지게 하시고 마음을 열어 믿어지게 해 주셨듯이 저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셔야 해요.

그게 장자에요.

그것이 주가 되는 코스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장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장자훈련을 이 땅에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을 때는 아프고 힘들어요.

하지만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장자의 길이 고달프더라도 앞서 가신 믿음의 선진들의 결말을 보시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늘나라 장자 삼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비록 장자로서 사는 길이 고달프고 힘이 들더라도 잘 이겨내게 해 주세요. 죽어가는 스데반의 눈을 열어서 주님을 보게 하였듯이 어려울 때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장차 올 영광을 바로보고 이겨내게 해 주옵소서. 주께서 힘을 주시고 위로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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