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창세기 강해

48강. 언약 가문의 장자가 되는 길 (창 27:1-29)

by coroa 2021. 6. 3.

 

[48강. 언약 가문의 장자가 되는 길 (창 27:1-29)]

-.정낙원 목사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성경 속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내용이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그 내용이 야곱이 별미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가서 장자권의 축복을 받는 사건입니다.



성경은 모두가 복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차자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도 신약적인 의미에서 성도의 구원이야기인 것입니다.

장자가 아버지 유업을 이어 받는 것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장자권은 신약의 구원권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은 차자인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사건을 통하여서 신약의 자기 백성들이 어떻게 구원이 주어지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도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장자권이 어떻게 바뀔 수가 있느냐?

의아해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자와 차자는 태어나는 순서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장자는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장자권이 바뀌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장자가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라 장자의 명분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장자가 부실하니까 차자에게 집안을 맡긴 것과 같습니다.

호적상으로는 장자는 영원한 장자이지만 그 명분은 차자에게 넘어 갈 수가 있습니다.

조선 시대 태종 이방원이 장자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똑똑한 4남인 세종에게 물려 준 것과도 같습니다.



요즘 재벌 회장들이 자식들 중에서 똑똑한 놈에게 기업을 물려주는 모습을 통해서 흔히 볼 수가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건 구약의 이스라엘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역대상 5장을 봅시다.



대상 5:1-2=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2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야곱의 장자는 르우벤입니다.

그런데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육적으로는 르우벤이 야곱의 장자이지만 야곱의 집안은 언약의 가문이므로 그 언약의 대통을 이어가는 실제적인 장자는 요셉이라는 뜻입니다.



이러면 이스라엘 속에는 육적 맥이 있고 영적 맥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육맥은 겉으로 드러난 장자이지만 영맥은 감추어진 장자입니다.

육적 장자는 육적 집안을 유업으로 이어가지만 영적 장자는 영적인 언약을 이어갑니다.



에서는 육적 장자이고 야곱은 영적 장자인 겁니다.

차자인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은 성경의 중심사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교리를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어떻게 성취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이 차자가 장자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차자인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은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성경 전체의 비밀이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사건이 주는 본질적 의미는 놓치고 표피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가지고 복 받는 비결로 설교가 되어 지고 있습니다.

부흥사들이 흔히 별미를 바치면 복은 받는다는 내용으로 설교를 합니다.

이는 육적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는 것은 육적인 복을 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건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들 구원이야기입니다.

죄인이 어떻게 의롭다 여김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속사이야기입니다.



백보 양보해서 부흥사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별미를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면 야곱의 인생이 승승장구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와 정반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고백 하였습니다.

직설 화법으로 말하면 죽을 고생하였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받아서 육신적으로 득을 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복은 고사하고 도리어 집에서 쫓겨나는 일들을 당하였습니다.

야곱은 평탄한 인생을 살지 못했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야곱과 같은 인생을 살라고 하면 살겠습니까?

못 삽니다.

우리는 에서의 인생을 살고 싶어하지 야곱의 인생은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적으로 보면 에서는 평안한 인생을 살았고,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부흥사들이 흔히 말하는 이 세상에서 잘되는 복은 에서가 받았어요.

부흥사들의 이러한 설교를 교인들이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부흥사도 소경이고 그걸 아멘으로 받는 교인들도 소경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므로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동안 부흥사들은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설교들을 해왔습니다.

이들의 문자적 설교가 기독교를 땅에 복을 주는 값싼 땅에 종교로 전락을 시키고 물신주의 기복 신앙을 낳게 하고 만 것입니다.

야곱이 받은 복을 살펴보세요.

이게 육에 복인지 아니면 영에 복인지를 알 수가 있어질 것입니다.



본문을 봅시다.



27-29=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 맞추니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삭이 야곱이 입고 온 옷의 향취를 맡고서 축복합니다.

옷의 향취가 여호와의 복 주신 밭의 향취라고 합니다.

그 밭에는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 풍성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열국이 굴복하고 형제들의 주가 된다고 합니다.



이걸 아브라함 언약으로 이해해 보세요.

그럼 이삭의 축복이 하늘에 것인지 땅에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 하신 땅이 어디인가요?

가나안 땅입니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하다가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 언약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실제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에요.

기름진 곳이 아니에요.



기름진 땅은 애굽의 땅이지 산악지대인 가나안 땅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것은 천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여호와의 복이 있는 땅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늘에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 풍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천국을 말해요.



그러니까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은 이 땅에서 승승장구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땅이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 날 때 하나님이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하셨어요.



이 세상은 아담이 살아갈 저주 받은 땅이에요.

가시와 엉컹퀴가 나는 땅이에요.

이 세상 어디에도 기름진 땅은 없습니다.



기름진 땅은 에덴동산이에요.

에덴동산은 여호와의 복이 있어요.

이것은 천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니까 그곳이 아름답고 풍성한 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을 것 같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갔음에도 그곳이 기름진 땅이 아니고 농사짓기 힘이 드니까 그곳 원주민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신을 섬겼을까요?이는 가나안 땅에서는 가나안 신을 섬겨야 잘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의 성질을 가나안 백성들이 잘 알아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친근히 지낸 것입니다.



요즘에 귀농을 많이 합니다.

도시에서 시골로 귀농을 합니다.

귀농하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하는 이유는 그 곳의 기후와 토질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하여서는 그곳 토착민들에게 배워야 해요.



이스라엘이 가나안 신들을 섬기고 그들과 쉽게 동화되어서 사는 것은 그 땅에서 잘 살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니까 무조건 농사가 잘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어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사들이 별미를 바치면 복을 받는다고 하니까 교인들은 과연 그것이 어떤 복이냐 생각해보지도 않고 감사헌금을 하고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이 땅의 것을 복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흔히들 구약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 거부가 되었다고 하니까 그걸 가지고 복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아니에요.



구약은 신약을 설명하기 위한 시청각 교제와 같아요.

우리가 가야할 땅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천국이에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말씀을 쫓아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그 땅을 주지 않고 너에게 약속한 땅은 하늘에 있다고 알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후손들과 가나안에서 장막 생활을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부 하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 세상 언어를 가지고 하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저주 받은 땅에서 하늘로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이스라엘에게는 열 가지 재앙이 내리는 애굽에서 빼내심을 입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땅의 사고들이 깨어져야합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이 세상 것들을 구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본성적으로 눈만 뜨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사람들 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몸뚱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의 반대 것을 구해요.

구하라고 하는 것은 안 구하고 구하지 말라는 것은 구해요.

그러므로 우린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성경은 적극적 사고 방식을 가지라고 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걸 죄라고 해요.

그런데 이 시대는 “할 수 있다” “해보자”

적극적 사고 방식을 가지라고 합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건 아니에요.



우린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야 해요.

외람된 말이지만 죄인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그 말씀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죄인인줄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본성에 반하는 말씀을 주셔서 너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발당한 자들은 예수님의 피 흘림으로 죄 용서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씀대로 안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에요.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지향성은 가지고 살되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상한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긍휼을 구하여야 해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삭이 나이가 137세입니다.

이스마엘이 죽었던 나이가 137세입니다.

이삭은 형님이 죽는 것을 보고서 자기도 죽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삭은 그 후에도 50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삭은 형의 죽음을 보고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서 가문을 장자에게 넘기고자 합니다.

그것이 장자의 축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본문은 가문을 장자에게 넘기는 위임식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삭은 장자인 에서에게 집안에 가장 자리를 넘겨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웠다고 합니다.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삭이 영적 분별력이 상실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눈이 어둡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단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이삭의 가문은 언약의 가문입니다.

그럼 가문을 이어갈 장자도 언약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하면서 이 집안에 장자는 야곱이라고 알려줍니다.



리브가는 아는데 이삭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권 위임식을 준비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걸 눈이 어두웠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영적 계시가 단절이 되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 힘이 좋은 에서에게 집안을 맡기고자 한 것입니다.

에서가 집안을 이어가면 언약의 집안이 아니고 육에 집안이 되어요.

언약의 집안은 하나님 힘으로 세워 가야 하는데,

이삭은 지금 언약의 가문을 인간의 힘으로 이어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 힘이 있으니까 인간의 힘으로 집안을 이어가는데 적합한 인물이에요.

그럼 이삭의 집에는 인간의 영광이 드러나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가 없어요.

이게 바로 이삭의 눈 어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을 보면 마지막 사사인 엘리 시대의 모습이 나옵니다.



삼상 3:1-2=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이 때를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다고 합니다.

엘리의 눈이 어두웠다고 합니다.

눈이 어두우니 자식들이 행하는 일들을 제어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영적으로 소경이니까 자식들의 죄를 책망치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걸 집안이 망조가 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법궤를 이방인에게 빼앗기는 일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법궤를 빼앗겼다는 말은 하나님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의 두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법궤를 빼앗긴 소식을 엘리의 며느리가 듣고 해산을 하여서 아들을 낳고는 그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이가봇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저주의 말로 짓는다는 것은 집안이 망했다는 뜻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영적으로 어두우면 세상 방식으로 살고자 해요.

목사도 영적으로 눈이 어두우면 세상 방식으로 교인들을 끌고 가요.

이걸 소경이 소경은 인도한다고 합니다.



결국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교회가 귀신의 처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집안은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잘나고 똑똑한 놈에게 가문을 맡깁니다.

세상은 힘 있는 자를 장자로 삼습니다.



지금 이삭도 눈이 어두워서 세상 방식으로 힘 있는 놈에게 집안을 맡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막아 버린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삭은 죽은 자와 같은 몸에서 태어난 자입니다.



아버지인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고 어머니인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어요.

남자의 할례는 남자 구실을 못한다는 의미이고, 여자가 경수가 끊어진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죽은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죽은 몸에서 이삭이 태어났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삭을 낳게 하였어요.

이삭의 집은 하나님이 세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서 세상 방식으로 집안을 세워가려고 하니까 리브가가 태클을 걸어버린 것입니다.

리브가는 야곱과 에서를 잉태하였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계시입니다.



이것은 이 집안의 장자는 차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차자가 장자가 되려면 장자가 차자로 바꿔치기 당하여야 하겠지요.

장자에게 결격사유가 발생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이삭의 가문이 언약의 가문이니까 가문을 이어갈 장자의 결격 사유는 비언약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에서의 이러한 행동을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는 망령된 것이라고 합니다.

망령되다는 말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뜻입니다.

귀신에 사로잡히니까 장자권을 떡과 바꿔 먹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에서는 스스로는 비 언약 백성임을 드러내는 일을 이방 여자인 헷 족속과 결혼하는 것으로 보여주었어요.

에서가 이방 여자와 결혼한 것을 가지고 이삭과 리브가는 마음이 근심이 가득했어요.

쉬운 말로 회사를 물려받아야 하는 장자가 맨 날 술집에 가서 흥청망청 놀고 있는 겁니다.



이건 장자로서의 결격사유에요.

이걸 리브가는 눈여겨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삭이 젊어서 총기가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나이가 들고 눈이 어둡자 총기가 사라져서 망령된 짓을 하고 다니는 에서에게 회사를 맡기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막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대로 차자에게 장자권을 맡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차자를 장자를 만드느냐?

차자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서 만드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야곱을 에서의 옷을 입히고 몸도 에서의 몸처럼 꾸며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이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서 들고 가라고 합니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가 꾸며 주는 대로 하고 갔어요.

리브가가 야곱에게 너는 야곱이 아니고 에서라고 알려줍니다.

네가 비록 야곱이지만 에서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야곱이 아니라 에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야곱이라 하지 말고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하고 나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하고 나아갔습니다.



이삭이 뭔가 이상한 겁니다.

목소리는 야곱인데 에서라고 하는 거에요.

그래서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손도 만져보고 얼굴도 만져보니까 에서인 거에요.

결정적으로 야곱이 입은 옷이 평상시에 에서가 입던 옷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옷의 향취를 맡고서 야곱을 장자로 축복을 해 버립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삭이 속은 것 같지만 아니에요.

이삭은 야곱인 줄 알았어요.

겉은 꾸며서 속일 수 있어도 음성은 속이지 못해요.



이삭은 눈이 어두워도 에서의 음성과 야곱의 음성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야곱이 에서라고 하자 “야 이놈아! 네 음성은 야곱인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알고 있다는 증거에요.



자식을 축복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예표해요.

하나님이 성도가 속인다고 해서 속아 주실 분입니까?

하나님은 우리 생각까지 통찰하시는 분이에요.

그런 분이 옷 바뀌 입고 왔다고 모르겠어요.

다 알아요.

알면서도 언약 때문에 우리가 입고 온 예수라는 옷을 보고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삭은 지금 하나님 입장에서 성도를 축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알면서도 속아준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속아준 것이냐 하면 장자인 에서의 옷 때문이에요.



이삭이 야곱을 축복 할 때 에서의 옷의 향취를 맡고 축복했다고 하지요.

이것은 아버지의 축복은 장자의 옷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지 않았어요.

장자의 옷을 입은 자에게 축복을 한 겁니다.



이삭의 집안은 언약의 집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야곱이에요.

저주 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옷을 우리에게 입혀 주셨어요.



우린 지금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벗어준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줄 알아요.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옷을 입고 나아오니까 하나님은 그 예수님의 옷에 향취를 맡고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으로 주어진 구원이에요.



그러니까 구약 마당에 이삭의 집안에서 행하여지는 사건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구속사적인 사건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와 야곱이 장차 예수님이 자기 백성 구원하는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언약의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은 신약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같습니다.

구약의 장자권 축복은 신약의 구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사건 속에는 신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이 주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시청각교제와 같은 것입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야곱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이 주어집니다.

언약적으로 보면 구약은 장자이고 신약은 차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장자로서 에서와 같습니다.

이게 율법 신앙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율법 지킴을 의로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하여 언약이 바뀝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바뀌어 버립니다.



율법을 옛 언약이라고 하고 은혜를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대표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물론 신약의 성도의 죄도 함께 지셨습니다.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들입니다.

이는 온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육적으로는 구약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신, 구약 모든 성도들의 죄를 위한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을 일컬어 하나님의 장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신약의 성도는 예수라는 하나님의 장자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겨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우리를 보지 않고 우리가 입고 있는 예수의 의를 보세요.

이것이 야곱이 장자의 옷을 입고 나아가자 이삭은 야곱인줄 알면서도 야곱이 입고 온 옷의 향취를 맡으시고 장자의 축복을 해 주신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차자가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아담 안에서 난 우리 옛 사람은 장자이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난 새 사람은 차자에요.

그런데 하늘나라 유업은 차자인 새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에서와 야곱은 한 사람인 겁니다.

이걸 쌍둥이로 보여주신 겁니다.

우리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동시에 있는 쌍둥이에요.

우리 옛 사람은 에서이고, 새 사람은 야곱이에요.



옛 사람 에서는 떡의 가치로 살고자 하고, 새 사람 야곱은 언약의 가치로 살아갑니다.

이 둘이 우리 안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걸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은 에서처럼 장자로서 이 땅에 가치를 추구하였어요.

그래서 로마로부터 해방을 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하지만 영적 이스라엘은 차자로서 야곱처럼 하늘에 가치를 추구해요.



그래서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은 이 세상으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야를 소망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승승장구하게 해 주는 메시야는 적그리스도에요.

그러나 참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빼내는 메시야입니다.



이삭의 가문은 언약의 가문으로서 장자는 아브라함 언약 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이 지나가심으로서 하나님의 희생으로 지켜내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리브가는 염소 떼 중에서 좋은 놈을 잡아서 별미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염소의 죽음을 통해서 축복을 해 주겠다는 뜻입니다.

염소는 죄인을 위하여 대신 희생당한 대속제물을 상징해요.

이것은 리브가가 희생당한 염소 털로 야곱의 맨 살들을 가리는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자신은 매끈 매끈하여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에 리브가가 염소 털로 야곱의 매끈매끈한 부분들을 다 가려줍니다.

야곱은 염소 때문에 저주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보면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저주를 면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염소 고기의 별미를 들고 염소 털로 가린 것은 신약적인 의미에서 죄인이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예수님의 의에 옷을 입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리브가가 야곱에게 염소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준 것과 염소 털로 가려준 것으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장자가 된 것이 아니에요.

순전히 은혜로 되었어요.

이삭도 은혜로 태어났어요.

그러므로 이삭의 가문도 은혜로 유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힘이 있는 에서가 장자에서 기각당하고 힘이 없는 차자인 야곱이 가문을 이을 장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져 가는 세상에서 힘이 없는 야곱이 가문을 이어간다는 것은 어느 순간에 멸문지화를 당할지를 몰라요.



육적으로 보면 야곱은 가문을 이을 재목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이삭의 장자로 삼아 버립니다.

이것은 이삭의 가문은 인간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가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다가 하나님을 알리고 싶은 겁니다.

힘의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에 힘이 없으면 분명히 망해야 하는데 유지되고 있단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저 집안은 힘이 없어서 분명히 망해야 되는데 망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저 가문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집안은 힘 있는 자가 장자가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힘 없는 자가 장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리브기는 알고 있었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삭의 가문을 세상의 방식으로 세워 갈 것 같았으면 야곱을 잘난 자로 만들고 에서를 못난 자로 만드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에서는 강한 자로 태어나고 야곱은 유약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가지고 장자를 만드는 진의가 무엇일까요?



이는 언약의 가문은 인간의 힘으로 다스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려진다는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걸 먼저 리브가에게 알려 주었어요.



리브가는 늘 이 마음으로 살았어요.

그래서 리브가는 유약한 야곱을 사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이 사실을 모르고 세상 방식대로 가문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힘 있고 잘난 에서에게 가문을 물려주려고 별미를 만들어 와서 장자의 축복을 받으라고 에서에게 알려 준 것입니다.

이 사실을 리브가가 들었어요.

리브가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하나님의 계시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이삭이 언약을 버리고 세상의 순리대로 하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언약대로 차자를 장자로 바꿔치기 하는 작전을 시행한 것입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줍니다.

야곱아! 너의 아버지가 지금 네 형에게 장자권을 넘겨주는 위임식을 하려고 한단다.

그래서 니 아버지가 네 형에게 들에 가서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했단다.

네 형은 지금 사냥하러 들에 갔단다.

그러니 너는 형이 사냥해서 돌아 올 동안 내가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를 만들어 줄 테니까 그걸 가지고 가서 장자의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엄마 나는 매끈매끈하고 형은 털이 많은데 아버지가 속겠어?

괜히 들어갔다가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두렵다고 싫다고 합니다.

그러자 리브가가 야곱에게,

아들아! 그 저주는 내가 감당할 것이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리브가가 염소 고기로 별미를 만들고 염소 털로 야곱을 코디해서 장자의 옷을 입혀서 아비지께 나아가게 합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당부하기를 너는 지금 야곱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에서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아버지 앞에 나아 갈 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 로소이다” 하고 나아가라고 합니다.

내가 지금 너를 에서로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넌 지금 에서의 옷을 입었고 에서처럼 염소 털로 털 사람으로 만들어졌어!”

“넌 지금 야곱이 아니고 에서야”

그러므로 “아버지 나는 ‘에서’ 입니다” 라고 나아가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이에 야곱이 리브가가 시키는 대로 염소 고기로 만든 별미를 들고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 로소이다” 하면서 나아갑니다.



그러자 이삭이 놀라는 겁니다.

아니 네 음성이 야곱인데 어찌 에서라고 하느냐!

내 앞으로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야곱이 입고 온 옷의 냄새를 맡습니다.



그 옷의 향취가 장자의 옷인 겁니다.

이건 자기가 에서에게 입혀준 옷인 겁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 옷을 근거로 축복을 합니다.



여기에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장자의 옷을 입고 온 자를 축복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은 무슨 옷을 입느냐의 싸움으로 귀결이 됩니다.

내 꼬라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지금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에서의 이름으로 받았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껍데기는 에서에요.

야곱은 에서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창세전 언약의 구원의 모습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구원 받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우리는 예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예수의 옷을 입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고 예수를 보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로 보여주셨어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러 갈 때 하나님께서 저 애굽에 있는 자들은 내 아들들이고 내 장자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이니까 내어 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장자를 만드셨나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만들었어요.

출애굽 할 때 하나님은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장자들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애굽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장자의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가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장자 대신 유월절 어린 양을 바치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피를 이스라엘의 집 문에다가 바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죽음의 천사들이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은 넘어 가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살아난 자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내 장자라고 합니다.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장자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사람이든 짐승이든 초태생은 모두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죽음으로 생겨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린 양으로 옷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양이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장자는 이스라엘이 아니고 어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어린 양이 예수님으로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로서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 하여서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은 감싸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고 나아갑니다.

나아가면서 우리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아버지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하면서 말이에요.



구약에는 어린 양의 피를 발랐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피를 바릅니다.

이렇게 피를 바른 것을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장자 만드는 창조의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참 장자인 예수님을 한 알의 밀알처럼 죽여서 그 죽은 자리에서 수많은 장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맏아들이 되게 하시고자 하심입니다.



맏아들이란? 장자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는 것은 예수로 낳아진 자들음 모두가 예수님처럼 장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에게 맏아들이신 예수님의 옷을 입혀서 장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천국을 일컬어 장자들의 총회라고 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낳아진 자들이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모두가 하늘나라 장자들입니다.

장자라고 하는 것은 유업을 이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들은 진짜 하나님의 장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장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걷어내면 안 됩니다.

예수를 걷어내면 우린 여전히 죄인입니다.

리브가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히고 장자의 이름으로 나아가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절대로 야곱이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넌 에서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브가의 말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에 야곱이 리브가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자기 양심상으로 나아갔다고 한다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생활은 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정체성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정체성을 잊으면 우리의 신앙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세상의 잣대인 인간의 윤리도덕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는 선악의 법에 가두어지게 됩니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에게 있어 의는 에서의 옷을 입고 사는 것이고,

불의는 에서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에게 의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어진 의에 옷을 입고 사는 것이고,

불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주어진 대속의 옷을 벗고 자기 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옷을 벗어 주셨습니다.

그 옷을 4깃으로 나누어서 제비 뽑아서 입지요.

4는 온 세상을 의미해요.

그리고 제비를 뽑는 것은 선택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온 세상에 선택을 입은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온 세상에 예수님의 옷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옷을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별미를 앞세우고 나아갔지요.

여기서 별미란? 평상시에 먹는 음식이 아니고 특별할 때 먹는 음식이에요.

장자를 축복할 때 먹는 것입니다.



별미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이에요.

여기서 아버지를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이 좋아하는 별미가 뭘까요?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몸이에요.



히10:1-10=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일반 음식이에요.

짐승의 제사로는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어요.

장자의 축복을 주는 제사는 아버지가 좋아하는 한 몸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는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니고 죄를 기억하게 하는 제사에요.

그러니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별미가 아닌 것입니다.



장자의 축복은 예수님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별미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별미로 드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과 같이 언약의 후손들은 예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옷을 벗어준 것은 야곱과 같은 자들을 위해서입니다.

이들이 바로 제비 뽑아서 옷을 차지한 자들인 겁니다.



구약에서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선택을 입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벗어준 옷을 누가 입느냐 하면 제비 뽑힌 자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가 입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을 입은 자들은 리브가의 뱃속에 차자와 같은 자입니다.



야곱과 같이 힘이 없고 유약하여서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강한 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자로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잘난 자들이 일을 하면 그 사람이 드러나지만은 못난 자가 일은 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는 잘난 자로 이어져 오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역사가 순교의 역사로 점철이 된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지하여 오셨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힘을 가질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힘을 가지면 하나님을 떠납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타락하느냐 하면 교회가 물질적 가치로 세워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이삭과 같이 세속적 가치로 힘 있는 자를 장자로 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한국교회 교단들이 얼마나 못 났으면 말로는 서로가 장자 교단이라고 하면서 장자 교단의 자격을 교단 산하에 교회의 숫자 많은 것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단의 교회는 몇 천개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은 교단들은 여기에 지기 싫어서 몸집을 부풀리려고 군소 교단들끼리 이합집산으로 모여서 대형교단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면 이런 짓을 하고 있겠어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수에 영향 받지 않아요.

사람들이 데모한다고 해서 진리가 비진리로 바뀌거나 비진리가 진리로 바뀌지 않아요.

진리는 사람의 수와 상관없이 진리이고, 비진리는 사람의 수와 상관없이 비진리에요.



인간들이 총궐기를 해보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바뀌는가?

안 바뀌어요.



진리에 속한 사람은 사람의 수와 상관없이 진리를 말하지만, 비진리에 속한 사람은 사람의 반응에 따라서 수시로 바꿔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을 말할 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어요.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어요.



신앙은 언약을 믿고 사는 겁니다.

언약이 그러하면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 언약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리브가처럼 말이에요.

리브가는 에서는 잘났고 야곱은 못난 줄 알고 있어요.



리브가도 사람 볼 줄 알아요.

집안을 일으키려면 야곱보다 에서가 훨씬 낫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야곱을 도운 것은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남편이 잘난 자식인 에서에게 집안을 맡기려고 하자 리브가가 이건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므로 막아 버린 것입니다.



리브가는 사람의 잘남과 못남을 보지 않고 언약을 보았어요.

그래서 에서보다 한참 모자란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일에 도운 것입니다.

이삭은 리브가의 뜻대로 야곱인줄 알면서도 장자의 옷에 향취를 보고서 축복을 합니다.



이삭은 야곱의 음성을 알고 있어요.

77년을 한 솥밥을 먹으면서 키웠는데 그걸 모르겠어요.

그러니 야곱이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하자 야 아놈아 너 야곱이잖아!

음성이 야곱인데 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을 축복을 한 것은 야곱이 들고 온 별미와 야곱이 입고 온 옷이 장자의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지 않았어요.

장자를 축복했어요.

그래서 성경은 야곱이 에서의 이름으로 나아갔고 이삭은 장자의 옷에 향취를 맡고서 축복을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우리가 복은 받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으로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장자인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지 않아요.

예수를 축복하세요.



예수님은 이걸 아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옷을 입혀준 것입니다.

옷을 입혀주시고는 하나님에게 나아 갈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고 하잖아요.



이는 하나님은 우리와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하고만 상대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 앞으로 나아갈 때는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나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아버지의 큰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나아가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 보면 하늘의 시온 산에 144000명이 서 있는데 모두가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의 시온산인 천국은 어린 양의 공로로 간다는 뜻입니다.

이걸 이 세상에서는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야곱의 옷이 좋고 털이 많이 나고 멋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서의 옷으로 꾸미고 나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옷을 입고 자기 이름으로 당당하게 나아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 같은 털도 없고 에서의 옷과 같이 좋은 옷도 없었어요.

그래서 형의 옷을 몰래 입고 형처럼 염소 털로 수치를 가리고 나아간 것입니다.



야곱이 잘났으면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했어요.

못났기 때문에 받은 겁니다.

이건 못난 자는 다 하나님의 장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장자는 이 세상에 힘 없는 모습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못났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게 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를 믿는 것입니다.

잘났다면 예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게 바리새인으로 나타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의를 준다고 하여도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십자가 도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눈에는 예수님은 보잘 것 없었어요.

그래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불렀어요.

나사렛 사람이란 촌놈이라는 뜻이에요.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도 저런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하면서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뜻으로 참람죄로 죽였어요.



그래서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후에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세상 지혜로는 알지 못하게 해 놓으셨어요.

사람들은 하나님은 크고 성공된 모습으로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큰 교회는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부흥을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부흥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큰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인간들이 생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의 말은 신청되지 않았어요.

수가 작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적은 예수님의 의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에다가 자기 의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을 섞이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구원은 섞임에서 분리 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듭니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골동품을 주었습니다.

골동품의 가치는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될 때에 가치가 드러납니다.

골동품의 가치를 아는 자는 외부의 어떤 것들이 덫 칠이 안 되도록 합니다.



구원 받은 자들이 싸워야 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이 섞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마귀는 예수님의 의에다가 우리 의를 섞게 만들어요.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합니다.

음행의 포도주라고 해요.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 이름으로 나가지 말고 자기 이름으로 나가라고 해요.

우리 업적을 들고 나아가라고 합니다.

“나 이만큼 했어요” 라고 말이에요.

이 만큼 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이 만큼 한 것을 의지하고 나온 것이 잘못이에요.



비유적으로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사람이 누구인줄 아세요?

일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시끄럽게 하지 않아요.

문제를 일으키지 않아요.



교회의 분란은 항상 자기 의가 많은 사람들이에요.

자기 의로 발언권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 이만큼 했잖아” 라면서 말이에요.



열심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힘으로 작용하면 하나님의 교회와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가 되어요.

일은 하되 그것을 의로 삼지 않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십시오.

하지만 그 열심을 힘으로 삼지 마세요.

그 은혜에 감사하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여서 난 장자라고 하면 안 되어요.

장자는 부모의 심정으로 집안을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장자는 종의 자리로 내려가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제자들이 발을 씻어 주시면서 나는 너희를 섬기는 자로 왔다고 합니다.

장자가 아닌 자가 장자의 복을 받았기 때문에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에서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섬기는 자의 자리로 내려갔어요.

이게 하나님 나라의 장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섬김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섬기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왕노릇 한다고 하니까 이 세상의 왕처럼 군림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 왕은 군림하지만 천국의 왕은 예수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섬김과 이 세상에서의 섬김은 역설적이에요.



천국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기지만 이 세상은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기고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구조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시절을 쫓아서 가난 한 사람이 부한 사람에게 선물을 하고,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선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천국의 원리로 사는 나라를 하나 만들었어요.

그게 이스라엘이고 교회에요.

교회는 장자가 섬기는 나라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섬기려고 자기 재산을 내어 놓습니다.

이건 율법 아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그들 속에서 주가 되어서 섬기니까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은혜 받는 자들이 장자가 되어서 은혜 받지 못하는 자들을 섬기데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낮아지고,

은혜를 못 받을수록 상좌에 앉고자 해요.

은혜는 종의 자리에서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천국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은혜를 많이 받을수록 육적으로 손해를 많이 입게 되는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더하게 되고,

봉사를 해도 더 하게 되고,

열심을 내도 더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계산적이 되어요.

눈치를 보게 되어요.

자기 이름이 나고 생색이 나는 일은 서로 하려고 하지만 생색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아요.

오죽하면 물질과 은혜는 비례되어서 나타난다고 하겠어요.



성도는 야곱입니다.

장자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땅에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장자로 서 있습니다.

하늘나라 장자이기 때문에 이 땅에 분깃이 없는 것입니다.

분깃이 없으므로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 집에서 쫓겨나 나그네 인생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을 의지하는 야곱을 얍복강에서 죽이시고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나라의 장자들은 하나님이 야곱과 같이 간섭을 하십니다.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빼는 일을 하십니다.

세상의 힘을 차압하고 하늘에 은혜를 주십니다.



야곱은 장자가 되고서 아버지의 유업을 한 푼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이치로 본다면 장자라고 하면 아버지의 유업을 물려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분깃하나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집에서 쫓겨난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하나님이 힘이 되어 주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면 이 땅에서 승승장구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은 힘을 삼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우리가 야곱입니다

우리는 본래 저주받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시고 예수님이 입으신 옷을 우리에게 입혀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장자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린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자들입니다.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나고가 없습니다.

다 예수님이 벗어주신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로 모일 때 사람 간에 차별치 말고 모여야 합니다.

또한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예수의 피 뿌림으로 죄사함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꼬라지가 어떠하든 간에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아와야 합니다.



야곱처럼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서이다 라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가죽옷으로 죄의 수치를 가리우심을 입고 살아갔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주어진 대속의 옷을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이 입혀준 옷을 벗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옷을 벗는 순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온전한 모습으로 살지 못한다 하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법대로 하면 마땅히 나는 저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저주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예수님이 입혀주신 그 옷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나온 자는 축복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었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그 언약 안에서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의 놀라운 비밀들을 야곱의 장자 축복을 통하여서 오늘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본질적으로 야곱과 같이 빤질빤질한 놈입니다. 저주받아야 마땅한 놈입니다. 그런데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린 그 옷을 우리가 지금 입고 의롭다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 믿음이 흔들리지 말게 하시고 굳게 하여서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이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