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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강해

50강. 에서의 길과 야곱의 길 (창 27:30-40)

by coroa 2021. 6. 19.

 

 

[50강. 에서의 길과 야곱의 길 (창 27:30-40)]

-.정낙원 목사

 

세상에서 사람들은 각자 팔자대로 산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사람들은 태어날 때 각자 받은 팔자가 있다고 합니다.

팔자를 다른 말로 하면 운명입니다.

그래서 흔히들 사람의 성패를 가지고 “모두가 다 자기 팔자인 걸 어쩌겠나!” 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이 그러해요.

하나님이 팔자대로 각 사람을 간섭하는 내용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태어날 때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팔자가 정해져 있었어요.



근데 이 둘이 세상 적으로 보면 안 맞아요.

팔자대로라면 에서는 못나고 야곱은 잘나야 해요.

왜냐하면,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말은 큰 놈이 작은 놈 도움으로 살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러자면 작은 놈이 형보다 잘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와 반대에요.



큰 놈이 잘났고 작은 놈은 못났어요.

작은 놈이 큰 놈에게 빌붙어서 살아야 해요.

에서는 잘났고 야곱은 못났어요.

근데 하나님은 에서의 팔자를 야곱을 섬기게 하였어요.



이러한 에서와 야곱의 팔자는 하나님이 정해 주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을 장자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일을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인간의 생각을 비껴가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우리 생각과 다른 반이성적으로 하세요.

왜, 그렇게 일을 하시는가 하면 이는 인간들의 죄 성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는 것은 이성을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식으로 읽으면 안 되어요.

그럼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습의 신앙생활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들이 생각하는 복과 하나님이 준비한 복은 다르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이 생각했던 복은 아버지 유업을 이어받아서 집안에서 평안하게 사는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준비한 복은 집에서 쫓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육적인 아버지 집을 떠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가지고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와서 축복을 받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인생을 은퇴할 시기가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식들 중에서 똑똑한 놈에게 가문을 물려주고자 합니다.



평상시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눈 여겨 보았어요.

야곱은 미약하고 에서는 출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가문을 이어받는 위임식을 한다고 알려줍니다.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받으려면 별미가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서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어머니 리브가가 들었어요.

리브가가 들어보니까 자기가 계시를 받은 것과 다른 겁니다.



리브가는 에서와 야곱을 잉태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알려 준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이는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근데 지금 이삭은 에서에게 가문을 넘겨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리브가는 야곱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말하고는 네가 장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야곱에게 에서의 옷을 입혀서 야곱을 에서로 변장을 시켜서 들여보냅니다.

그러자 야곱이 놀라면서 싫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알다시피 형하고 나하고는 생김새부터가 다르잖아요.

형은 털이 많고 나는 매끈매끈한데 어떻게 속입니까?

아버지가 단번에 알아버릴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두려우니 나는 싫습니다! 라고 거절을 합니다.



이에 리브가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

“만약에 들켜서 저주를 받으면 그 저주는 내가 다 받을 테니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리고는 리브가는 집안에 있는 에서의 옷을 꺼내어 입히고 염소 가죽으로 야곱의 매끈매끈한 부분들을 감추어서 들어가게 합니다.



그러면서 당부하는 것이 너는 지금 야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에서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절대로 아버지에게 야곱이라 하지 말고 에서라고 말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에 야곱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에게 나아갈 때에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 소이다” 하고 나갑니다.



이삭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목소리가 야곱의 음성인 겁니다.

그런데 에서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가까이 오라고 합니다.

손을 만져보니 털도 있는 게 에서인 겁니다.



그리고 이삭은 에서가 늘 입고 다니던 옷에 냄새를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야곱이 입고 온 옷에서 에서의 냄새가 나는 겁니다.

이에 이삭은 야곱이 입은 에서의 옷의 향취를 맡고서 축복을 합니다.

이삭은 야곱을 축복한 것이 아니고 에서의 옷을 입은 자를 축복했어요.



에서의 옷이란? 장자의 옷이에요.

그러니까 이삭은 장자를 축복한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이삭은 야곱인줄 알고서도 에서의 옷 때문에 축복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속에 복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저주 받아야 할 야곱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벗어준 자신의 옷을 입혀주었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수님의 옷을 입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옷이란? 수치를 가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은 자기의 수치를 장자의 옷으로 가린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옷 입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되었어요.

하나님은 그 죄를 가죽 옷으로 가려 주셨어요.



가죽 옷이 장자의 옷인 겁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 옷을 입어야지만 하나님 앞에 죄의 수치가 가려진 자로서 나아갈 수가 있어요.

아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이 입혀 주신 가죽 옷을 벗지 않고 입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을 예수 믿음으로 두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죄의 수치를 가리는 가죽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요.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하늘에 시온 산에 구원 받은 144.000명이 어린 양과 함께 서 있어요.

이들을 흠 없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어요.

이는 어린 양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갈 때 “아버지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줄을 알면서도 우리가 입고 간 예수의 옷을 보시고 하늘나라 장자로 인정을 해 주세요.

이게 구원이에요.



암튼 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나아가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버지 앞에서 나왔어요.

이 축복이 끝난 후에 에서가 돌아왔어요.



그런데 에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자신이 사냥해서 온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서 아버지에게 나아갑니다.

에서가 아버지에게 나가서 축복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깜짝 놀라는 겁니다.



33절에 보면 이삭이 크게 떨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야곱에게 속아서 분해서 떨었다기보다는 자신의 잠시 하나님의 뜻을 잊고 인간적인 생각을 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알다시피 에서와 야곱은 기도로 얻은 자식이에요.

리브가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었어요.

이삭이 간구하지 하나님이 리브가의 태를 열어서 아들을 주십니다.

이 때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을 알려 주십니다.



리브가는 살면서 남편인 이삭에게 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이삭은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이삭의 가문을 이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인간적인 입장에서 가문을 지켜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이삭이 눈이 어두웠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은 인간적 입장에서는 힘 있는 자가 가문을 이어가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야곱보다 출중한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삭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눈이 어둔 이삭의 불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이삭의 불신앙적인 태도에 반기를 들고 야곱에게 장자의 옷을 입혀서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가 들어오고 난 후에 깜짝 놀란 것입니다.

이삭의 지금 뭔가 에게 압도당하여 두려워하는 모양입니다.

만약에 이삭이 자기 맘대로 축복하였다면 얼마든지 번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하나님이 개입한 것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삭이 에서가 와서 항의하여도 번복하지 않은 것은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이삭에게 야곱이 그 동안 자기에게 한 짓을 낱낱이 고하면서 야곱에게 한 축복을 번복하고 자기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번복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37-40절을 보세요.



창 27:37-40= “이삭이 에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으며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38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 39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40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이삭은 에서에게 야곱을 너의 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는 번복이 되지 않는 것이므로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비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으로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언약을 주시고 언약이 그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있는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빼냅니다.

그리고 언약하십니다.



이 때는 아브람의 후손은 한 명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하신 언약의 내용은 그 후손들을 이방에 객이 되게 하였다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언약을 하시고 이삭을 주시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12 아들을 낳고 12 아들을 통하여 큰 민족이 되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사건은 나중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기 전 엄마 뱃속에서 야곱이 장자가 될 것을 언약 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비록 차자로 태어났지만 장자가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시작하면서 팔자 이야기를 하였지요.

야곱은 장자가 될 팔자이고 에서는 차자가 될 팔자에요.

그런데 세상 속에는 에서가 장자로 태어났고, 야곱은 차자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이 둘이 관심사가 달라요.

에서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고,

야곱은 장자권을 탐냈어요.



탐냈다는 말은 훔쳤다는 것이 아니고, 장자권을 위하여 살았다는 뜻입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경홀히 여겼다는 것도 장자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보다 팥죽이 더 중했어요.

그러나 야곱은 아니에요.

팥죽보다 장자권이 더 중했어요.



그래서 에서는 팥죽을 얻고자 장자권을 팔아 버렸고,

야곱은 장자권을 얻고자 팥죽을 팔아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각자가 받은 팔자대로 그들 속에 원함을 주어서 각자 받은 것을 쫓아가도록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 안에는 장자권을 위하여 살아가는 야곱과 떡을 위하여 살아가는 에서가 있어요.

복음을 위하여 사는 자는 성도이고, 떡을 위하여 사는 교인들이에요.

성도는 하늘에 장자이고, 교인은 땅에 장자에요.



성도는 복음을 얻고자 떡을 버리고, 교인들은 떡을 얻고자 복음을 버려요.

각자 받은 운명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각자 정해진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을 자가 따로 예정이 되어 있어요.

구원 받을 자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장자라고 해요.



이 말은 곧 구원 받지 못할 자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지 않은 자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 녹명이 되었으면 구태여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아요.

말할 필요가 없어요.



다 구원 받는데 뭘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예수를 믿더라” 라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까?

작정이다, 예정이다, 녹명이다, 라는 말은 그 반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심판주세요.

아버지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었다고 하지요.



심판이란? 갈라내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와 되지 않은 자를 갈라내는 것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하지요.

이는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을 한다는 뜻입니다.



영생 주시기로 녹명 되지 않은 자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에요.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은 이미 창세전에 결정이 되었어요.

결정이 된 채로 이 세상에 보내어진 것입니다.

이걸 야곱과 에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자는 야곱처럼 장자권을 위하여 살아가고, 구원 받지 못할 자는 에서처럼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떡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이 복을 받고 에서가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야곱과 에서의 선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에요.

창세전에 결정이 되었어요.



창세전에 야곱 속에는 장자권을 쫓아가는 프로그램을 내장시켜 놓았고,

에서 속에는 떡을 쫓아가는 프로그램을 내장시켜 놓은 것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해서 야곱 속에는 예수를 믿는 칩을 심어 놓고,

에서 속에는 예수를 거부하는 칩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에서는 떡을 쫓아가는 프로그램에 의해서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권을 경홀이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장자권을 쫓아가는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었기 때문에 차자로 태어났지만 팥죽을 주고 장자권을 사게 된 것입니다.



에서가 못난 것도 아니고 야곱이 잘난 것도 아니에요.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를 주가 되게 하시려고 에서와 야곱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장자권은 신약의 구원권과 같아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예수를 믿는 자와 예수를 거부하는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언약대로 세상을 이끌어 가세요.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을 세운 것을 그려가는 도화지와 같아요.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자들은 몰라요.

자기 인생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살아가요.

우리도 다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다메섹에 바울을 찾아갔듯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이에요.

그러자 이제는 이 땅에서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천국이 믿어지니까 떡 보다 예수를 더 귀히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일컬어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기의 전 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샀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시작과 끝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의 시나리오대로 이 세상 역사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대로 이 세상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언약이 역사 속에 펼쳐 질 때는 시작하는 모습으로 환경을 조성하시고,

언약이 끝이 날 무렵에는 언약이 완성되어 가는 모습으로 조성해 가시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가 회 차를 거듭하면서 내용이 정점을 향하여 가듯이 이 세상 역사도 언약이라는 시간표에 따라서 세상 환경이 조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걸 징조라고 합니다.



징조란? 싸인 이에요.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역사의 시간을 알리는 싸인 이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어떤 일이 있느냐고 물을 때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설명하였어요.



처처에 기근과 지진과 온역과 난리와 난리 민족과 민족이 싸우고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교회를 타락케 하고 신자들을 미혹케 할 것이라고 하였어요.

이 모두를 징조라고 하였어요.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천기를 분별하듯이 이 시대의 징조를 보고 시대의 때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잘 때인지 깰 때인지 알라고 하셨어요.



이 시대 왜 인간들이 이렇게 강포해 졌나요?

이는 종말이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되면 과실이 그 모습을 완연하게 드러내듯이 인간들도 종말이 가까워지면서 죄악의 관영함을 드러내는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모습은 옛날 시대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옛날에 서부 영화를 보면 총잡이들이 사람 하나를 죽이고 나면 자책하여서 총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영화가 그려졌어요.



그 때는 낭만이 있었어요.

인간미가 있었어요.

그러니 지금 이 시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죽여요.

폭력적이 되었어요.

다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라야 흥행이 되어요.



이는 인간들의 마음이 짐승이 되어간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악한 모습들을 영화와 같은 사회현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좀비 영화나 음행하는 영화가 난무하는 것도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시아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가지고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어요.

교회는 그 시대상을 보여주는 자화상이에요.

사회의 타락과 함께 교회의 타락이 주어져요.

왜냐하면, 교회는 그 시대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치관을 보면 그 시대 인간들의 가치관을 알 수가 있어요.

이 시대는 물질만능 시대에요.

물질이 곧 신이에요.

이게 그대로 교회 안에 가치로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이 복음을 버리고 떡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버리고 떡을 택하였어요.

에서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야곱처럼 떡을 버리고 복음을 쫓아간다는 것은 희귀하고 희소해요.

그만큼 작다는 뜻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구원 받는 무리들은 작았어요.



하늘나라 장자는 야곱처럼 집에서 쫓겨나고 나그네로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살아야 해요.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서 돈에 가치를 좇지 않고 산다는 것은 그 자체가 순교에요.

아사아의 일곱 교회 중에 맨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세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완전히 물질의 가치에 푹 빠져 있어요.

육적으로 아쉬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돈이 있으니까요.



근데 예수님은 눈멀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영적으로 소경이고 죽어 있다는 뜻입니다.

겉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썩어서 냄새가 난다는 말입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교회가 아니라 절간이라는 뜻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간판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이지만 그 속에서 증거되는 내용은 대한 불교 조계종에서 증거되는 말들이 선포가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지 않고 뱀의 말이 증거가 되고 있어요.

성경을 가지고 하늘에 소식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땅에 소식을 전하고 있어요.

그래서 종말의 교회를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 신앙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 스스로는 믿음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존경하나 마음은 예수에게서 멀리 떠나 있어요.

예수를 통하여 땅에 것을 버리고 하늘에 것을 취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를 이용하여서 땅에 것을 움켜잡고 있어요.

이걸 다른 예수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복음이 곡해되어서 복음 안 다음부터 신앙이 개판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복음 복음하면서 실상으로는 반 복음적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복음을 알면 세상과 멀어져야 하는데 도리어 복음 안다는 것을 핑계대고 세상에 취하여 있어요.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신자인지 이방인인지 구분 할 수가 없게 되었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사변적으로 흐르고 있어요.

그러니 말쟁이들이 되고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는 중풍병자들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은 시작이에요.

신앙생활이란? 아는 복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지식이 되다가 보니까 신앙의 단들을 다 무너뜨린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종처럼 일했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섬기고 봉사했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모두 다 버렸어요.



복음을 모를 때도 일을 했는데,

복음을 알면 더 잘해야 하잖아요.

더 기쁘게 감사하고 봉사해야 하잖아요.

교회 생활을 더 충실하게 하여야 하잖아요.



옛날에는 종으로서 남의 일을 하였지만,

이제는 아들이 되어서 내 일을 하잖아요.

남에 일을 할 때도 죽기 살기로 했으면서,

왜 아들이 되어서 내 일인데 죽기 살기로 안하고 농땡이를 칩니까?

더 잘해야지요.



옛날에는 종으로 아버지 집을 섬겼어요.

그러니 이제는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 집을 섬기고 있어요.

아들이면 더 잘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이건 뭔가 잘못 되었어요.

복음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지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손과 발이 움직이지 않고 앉은뱅이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못 만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일어나 걷고 뛰면서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여야 해요.

기쁨이 주체 할 수가 없어서 가만있지를 못해요.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를 보세요.

나사렛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어떻게 하던가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은과 금을 구했지만 예수를 만나고 난 후로는 은과 금을 구하지 않고 성전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미하였어요.



이게 복음을 올바로 만난 사람들이 모습이에요.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행태를 보면 차마 눈뜨고 못 보겠어요.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같아요.

스스로는 복음에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복음과 상관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산 사람을 가만있지 않고 움직여요.

그러나 죽은 사람은 움직임이 없어요.

그 속에 예수를 품고 사는 성도는 예수의 생명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주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 속에 예수가 있으면 반드시 예수의 생명이 토해지게 되어 있어요.

이걸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토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 속에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이에요.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성도는 뭔가를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가 반드시 은혜를 토해 내도록해요.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이래로 은혜를 받은 성도는 가만있지를 못하고 받은 은혜를 토해내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만 하고 일하지 않은 고린도 교회 안에 일부 그릇된 신자들을 행하여서 내가 너희의 말을 달아 볼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달아 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어요.

이는 말로만 하는지 실제로 몸이 일을 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법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법이 없는 데서는 은혜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하여 율법적인 행함을 쫓아가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 와서는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종처럼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탕자는 은혜를 종처럼 일을 함으로서 토해내는 것입니다.



탕자가 예전에 집을 나가기 전에는 아버지가 일을 시키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때는 빈둥거리고 놀았어요.

그러나 집 떠나 개고생하면서 아버지 집의 소중함을 알았어요.



아버지 집에서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돌아 올 때는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에 버거우니까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하면서 돌아 온 것입니다.

비로서 아버지의 고마움을 안 것입니다.



탕자는 죽도록 일을 해도 자랑하지 않아요.

자랑 할 수가 없어요.

아버지 집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러해야 합니다.



복음을 몰랐을 때는 억지로 했지만,

이제는 복음을 알기 때문에 더 감사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진짜 복음을 알고 은혜를 아는 사람은 율법주의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때 율법주의와 달라요.



그 때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하여 종처럼 일하였지만,

이제는 예수그리스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행하는 것은 율법주의 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 들어와서 그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하기에 내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 집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는 자들이 있어요.

교회에 모이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고, 봉사나 섬김이나 연보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복음 안대요.



이게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진짜 믿음이 있는지 안약을 사서 발라보라고 하십니다.

그 안약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믿음에 선진들의 발자취를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느냐?

오순절 성령 받은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느냐?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살았느냐?



성경 어디를 봐도 복음 안다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복음이 그렇게 놔두질 않아요.

복음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도록 간섭을 하세요.

마치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 언약이 이끌려서 살아갔듯이 성도들도 복음을 받으면 그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그리스도의 운명으로 이끌고 가세요.



그래서 진짜 복음을 받은 성도는 더욱 더 감사하고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에 선진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하늘에 허다한 증인들이 나옵니다.



이 증인들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이끌려서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선취 적으로 살았던 구약의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12장에서 그 믿음에 선진들을 하늘에 허다한 증인이라고 하면서 그 증인의 첫 번째 주자를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어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는 말은 예수님이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반드시 걸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드시 그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이는 창세전에 그렇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약에 의하여 이끌려 가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처럼 말이에요.



야곱이나 에서는 각자 받은 분복대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닫으면 우리는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면 내 인생은 없고 오직 주의 뜻을 위한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그랬어요.

애굽에서 난 자들은 자기들 인생이 하나님의 것인 줄 몰랐어요.

그런데 모세가 와서 너희들은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가나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어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가라고 하였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을 혼내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린 것은 애굽을 징벌한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애굽의 신(神) 보다고 더 큰 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에 내린 재앙을 일컬어 애굽에 신들을 혼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러는 겁니다.

너희는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종살이하였고,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출애굽을 하게 된 것이라고 알려 주었어요.



신약의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이스라엘이에요.

언약에 의하여 생겨났고,

언약에 의하여 간섭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 먼저이고 우리는 나중입니다.

언약이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언약이 담고 있는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 차압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언약에 의한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도 언약을 위한 것이며,

여러분이 교회를 섬기는 것도 언약을 위한 것이에요.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큰 집에는 각양의 그릇들이 있다고,,

그릇마다 사용하는 용도가 달라요.

그 그릇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걸 직분이라고 합니다.



이걸 고린도전서 12장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이라고 하였어요.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도 각각 맡은 직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성막의 각양의 그릇들을 만들어서 사용하였듯이 지금은 교회에 각자에게 직분을 맡겨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다 언약의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일부 복음을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서 성도가 행하는 것은 무가치하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폐한 자들이 있어요.



그래서 교회의 모임도 폐하고,

설령 교회에 와서도 섬김도 봉사도 헌금도 안 해요.

예배도 안 드려요.

성도의 교회 생활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겁니다.

이건 악이에요.



성경을 곡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구원을 자기 몸뚱이 챙기는 것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에서의 계통이에요.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어요.

이 말은 초대교회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바로 복음을 헬라 철학으로 이해하여서 복음을 깨닫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고 몸은 쾌락을 쫓아갔어요.



이들을 영지주의자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이런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였어요.

지금도 영지주의자들이 있어요.



복음을 철학으로 이해하여서 신앙을 사변적으로 흐르게 하고 있어요.

이들은 신앙을 성경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누가 누가 더 많이 아느냐? 라는 것으로 경쟁을 해요.

말쟁이들이에요.



그리고는 복음을 자기 게으름을 합리화 시키는데 악용하고 있어요.

머리로는 하늘을 이야기 하는데 몸은 땅을 지향하고 있어요.

결국 복음으로 자기 몸뚱이 편한 쪽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에서의 길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말이 에서의 계통에 있는 자들에게는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달콤하게 들려요.

그래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일어나는 것도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에는 반드시 거짓 것들도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복음은 심판성을 담고 있어요.

양과 염소를 갈라내요.

그러므로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에는 반드시 복음에 합한 자들과 복음에 반하는 자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에는 한 집안에서 형제 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신앙은 적(敵)은 항상 교회 안에 있어요.

마귀가 교회 안에 가라지를 뿌려 놓았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한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게 교회 안에 그대로 배치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배치 해 두었어요.

왜냐하면, 이들을 가지고 언약을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 몸을 가지고 언약을 이루어가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언약을 이루기 위한 광야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것이에요.

예수님은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고분고분하지 않아요.



광야 이스라엘처럼 불평하고 원망해요.

이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죄가 드러난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요.



결국 우리의 인생길은 죄가 드러나는 인생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인생인 것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에게 야곱이 자기 복을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야곱에게 복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서 미워하는 겁니다.

아니에요.



그건 에서의 착각이에요.

에서는 원래 복을 안 받게 되어 있었어요.

엄마 복중에서 이미 장자의 복은 야곱이 받기로 되어 있었어요.

원래 장자의 복은 야곱에게 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에서는 자기는 장자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로마서 9장을 봅시다.



롬 9장 9-13=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리브가가 잉태하였을 때에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큰 자는 에서이고, 작은 자는 야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에서가 못났고 야곱이 잘나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만드셨는데 한 사람은 사랑의 그릇으로 만들었고 한 사람은 미움의 그릇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한 사람은 사랑의 그릇으로 만들고 한 사람은 미움의 그릇으로 만들었는가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는 일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심판주가 되는 일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부류의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한 사람은 복에 사람으로 한 사람은 저주의 사람으로 만든 겁니다.



이어서 로마서를 봅시다.



롬 9:14-2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이 두 그릇을 만들었다고 하니까 그릇이 반발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사랑을 받고, 누구는 진노를 받는단 말입니까?”

“이건 불공평합니다!” 라고 따지는 겁니다.



이에 하나님이 야 이놈들아 토기장이가 자기가 사용하려고 그릇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따질 수 있단 말이냐?

이 놈이 아주 악한 놈이네,

그래서 진노를 퍼 붓는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들은 토기장이의 뜻에 아멘 이라고 하는데,

진노의 그릇들은 “이건 토기장이의 횡포입니다” 라고 하면서 토기장이를 악한 자로 만들어 버리고 자기들은 옳은 자로 나서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하는 일에 반대함으로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대적자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짝이에요.

서로를 드러내기 위한 짝입니다.

사랑과 미움은 짝이에요.



마치 빛과 어둠처럼 흰색과 검은색처럼 짝이에요.

사랑은 미움으로 드러나고 미움은 사랑으로 드러나요.

사랑을 드러나기 위하여 미움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이 땅에는 구원받은 백성과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있는 겁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신자를 통하여 사람 받기로 작정이 된 것에 감사하여야 해요.



구원받은 성도들은 “아~ 우리가 과분한 은혜를 입었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가 구원을 받았어”

“내가 긍휼의 그릇이라니”

“주여 왠 은혜이고, 왠 사랑입니까” 라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에서가 복을 빼앗겼다는 것은 에서의 착각입니다.

원래 장자의 복은 야곱에게 가게 되어 있었어요.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고 에서에게 장자의 복을 주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막아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리브가를 통하여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셨지요.

그런데 2절을 보면 이 땅은 흑암과 혼돈으로 뒤죽박죽이 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3절부터 혼돈된 세상을 하나님이 정리 정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마치 이삭이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막아서서 올바로 잡아 주는 것과 같아요.



창조란?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눈이 어두운 이삭의 정신이 바로 혼돈 된 땅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에 반하는 에서에게 축복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삭의 가문의 장자는 야곱으로 계획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리브가를 가지고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도록 일을 하신 것입니다.

리브가를 통해서 제 자리로 찾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하셨어요.

사랑이 사랑으로 드러나려면 사랑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사랑을 받아야 해요.

미움이 미움으로 드러나려면 미움 받을 일을 하지 않았음에도 미움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야곱은 사랑 받을 만한 구석이 없음에도 사랑을 받았고, 에서는 미움 받을 구석이 없음에도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릇으로 택함을 입었으니까 야곱이 잘난 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못난 자인데도 사랑을 받아야 사랑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잘 살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반대에요.



야곱은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자기 뜻을 펼치고자 하였어요.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였어요.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 할 때도 자기에게 복을 주지 않으면 안 보내겠다고 했어요.

야곱이 하나님에게 바란 것은 에서가 자기에게 굴복하는 것이었어요.



에서가 지금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찾아오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에서에게 나타나서 야곱에게 무릎을 꿇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뿌려뜨려서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에서에게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야곱은 절름발이가 되어서 에서를 주라고 했어요.



야곱은 하나님의 장자는 이 땅에서도 떵떵거리고 호령하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세상의 장자 개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장자는 호령하고 떵떵거리는 것이 아니고 낮은 자로 섬기고 베푸는 자에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뜻을 기각시키고 야망들을 깨뜨리는 일을 하셨어요.

그리고 긍휼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였어요.

높은 자가 아니라 낮은 자로 만들어 가셨어요.

그래서 야곱이 지팡이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장애의 몸으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이는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그릇으로 선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도 긍휼의 그릇으로 선택을 입었어요.

그러므로 긍휼을 입는 모습으로서의 간섭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성공자로 세우지 않고 실패자로 세워서 하나님의 긍휼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세요.

어쩌면 이 시대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영악스러워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잘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해요.



이 세상에서도 천국으로 살고 죽어서도 천국 가겠다고 해요.

얼마나 이기주의입니까?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욕을 하고 교인들을 싫어하는 겁니다.

오죽하면 개독교 라고 하겠어요.



세상 사람들 말이 맞아요.

우린 그들보다 더 악당들이에요.

이런 악당들이 이렇게 살고 있어요.

뻔뻔스럽게 살고 있어요.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안한 맘을 가지고 살아가야 해요.

절간에 다니는 불자들과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을 비교해 보세요.

누가 인간적으로 나은가요.

절에 다니는 분들이 교인들보다 더 나아요.

인정머리가 더 있어요.



야곱은 잘난 놈이 아니에요,

야곱은 언약에 따라서 복을 받았을 뿐이에요.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잘난 형과 늘 비교를 당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잘난 형 옆에다 못난 야곱을 세워 놓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으로 하여금 “잘난 형이 있는데도 못난 내가 복을 받고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구나”를 깨닫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의 무엇입니까?

나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는데,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림으로 용서를 받고 살고 있네요.



이 사실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주여 나 같은 죄인이 오늘도 용서받고 살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탕자 비유에서 보면 하나님은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못난 탕자를 원하지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잘 난 맏아들 같은 자를 원치 않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집을 은혜를 아는 탕자에게 맡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맏아들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맏아들에게는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잘났으니까요.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잘난 자들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 오지 않았어요.

항상 부족하고 못난 자들을 사용하였어요.



과거에 제가 아는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신 목사님 한 분이 계셨어요.

그 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하라고 할 때에 이 목사님은 이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몇 목사들은 “야 그런 것 오면 믿음으로 이기면 되지”라고 큰소리 빵빵 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일본 순사가 칼을 들이대며 신사참배 하라고 하니까 그렇게 큰 소리치고 호언장담하던 목사들이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하더랍니다.

그 당시 한국교회의 각 교단들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에 아니라고 총회에서 결의해서 교회에다 강요를 했어요.



목사들이 신사참배는 하나의 문화행사라고 호도했어요.

그런데 믿음으로 살던 분들은 신사 참배를 신앙 행위로 보고 반대했어요.

반대했지만 막상 그걸 이겨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워 가면서 기도했다고 해요.



그랬더니 큰 소리 치던 사람들은 다 신사참배를 하는데 기도하던 분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르면서 이겨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을 해 나가시느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남기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에 논리고 따지면 마땅히 사라져야 하는데 사라지지 않고 버티고 있어요.

교회 문을 닫아도 벌써 닫아야 하는데 이렇게 유지하고 있어요.

우리도 예수를 버려도 벌써 버려야 하는데 이렇게 믿고 있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겁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두 가지 그릇을 만들어 놓았어요.



하나는 긍휼을 보여주는 그릇이고,

다른 하나는 진노를 보여주는 그릇입니다.

긍휼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긍휼의 선택을 입은 자들에게는 자기 힘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힘이 있으면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 줄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기 위하여 긍휼의 그릇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세상에서 잘난 자로 있지 않고 못난 자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논리대로 한다면 야곱이 태어나기를 강하게 태어나야하고 에서가 비실비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에서가 “나는 비실비실하니까 이 가문을 이어갈 장자가 되면 안 되니까 아버지가 힘이 있는 야곱이 우리 집안을 이어갈 장자가 되게 하셨구나” 라고 순응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서는 아무리 봐도 자기가 야곱보다 나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한단 말입니다.

수긍이 안가는 겁니다.

그러니 따지는 겁니다.



에서는 장자의 복은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야곱에게 돌아갔어요.

그러니 적개심이 드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그래서 아버지께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난 아버지 뜻을 따를 수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예요.



죄란? 자기가 잘났으니까 장자의 복은 당연히 자기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긍휼을 보여주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그것을 비켜가는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잘난 자에게 장자의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못난 자에게 장자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기 잘남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이게 에서의 후손들이에요.



지금도 교회 안에서는 이삭의 집안에서 일어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교회 안에는 열심히 행한 사람이 있고 열심히 행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목사가 열심히 행한 자들은 돌아보지 않고 약한 사람을 돌아볼 것 같으면 열심히 행한 사람들이 삐지잖아요.

왜 우리에게 관심을 안 갖느냐고 하면서 말이에요.



장자란? 부모를 대신하는 자에요.

맏이는 부모가 되어서 동생들을 돌보아야 해요.

그래서 부모들은 형이 동생을 괴롭히면 형을 혼내는 겁니다.

너는 왜 형이 되어서 동생을 돌보지 못하느냐고,,,



하나님의 심정이 그래요.

못난 야곱을 가만두면 스스로 살아 갈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돌보아 주지 않으면 죽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사랑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남기고 싶은 것은 딱 하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나요?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대신 하여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장자가 하는 일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지 않아도 됩니다.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없는 예수님이 죽었어요.

그것도 우리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인간 같지도 않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어요.

이게 은혜에요.



이건 장자 감이 아닌 야곱이 장자가 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고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 땅에 남기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걸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훼손시킬 때에 화를 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도의 신앙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두신 것입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긍휼을 보여주는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야곱의 일생은 험악한 일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험악하다는 말은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언약에 이끌려서 살아왔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에 에서의 일생이 복 받은 인생이었어요.



에서는 인간들이 바라는 일생을 살았어요.

잘난 인생을 살았어요.

하나님 도움 없이도 잘 살았어요.



그러나 야곱은 늘 위태위태한 삶을 살았어요.

풍전등화 같은 인생을 살았어요.

이러한 야곱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셨다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잡초처럼 밟히면 일어나고 밟히면 일어났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역전의 용사로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야곱은 이 믿음을 근거로 하여서 죽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들을 축복을 합니다.

이 때 지팡이를 의지하고 장자와 차자에게 손을 어긋맞게 축복을 합니다.

이건 장자가 차자가 되고 차자가 장자가 되게 하는 축복입니다.



왜, 이러한 축복을 지팡이를 의지하고 할까요?

이는 얍복강에서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거기서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하나님은 새롭게 태어난 야곱인 이스라엘의 인생을 요셉으로 하여금 살게 하십니다.

야곱의 인생을 요셉이 대신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의 약전은 이러 하니라” 고 하면서 요셉의 일생을 야곱 속에 끼워 넣는 것입니다.



요셉은 요셉의 일생이 없이 야곱의 인생을 산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이 장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장자의 삶을 요셉이 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때에 받은 복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주란? 장자로서 형제들을 살려내는 자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기근을 당한 형제들을 다 살려내는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출생부터가 다릅니다.

요셉은 본래 태어나지 못하는 자였어요,

라헬이 합환채를 먹고 낳았습니다.

합환채는 신약적으로 보면 성령을 상징합니다.

요셉은 합환채(성령)를 먹고 낳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낳아진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을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그릇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주의 모습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서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살려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장자인 주가 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형제들에게 죽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살려 내십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은 만유의 주가 되어서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구약에서 요셉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요셉이지만 실상은 야곱입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야곱의 약전을 대신사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가지고 야곱에게 언약하신 긍휼의 그릇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을 주십니다.

자기의 곡식 단이 서 있는데 형제들의 곡식단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꾼 꿈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내가 너를 그렇게 다뤄 가시겠다고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언약이 요셉을 주가 되는 코스로 끌고 갑니다.

그것이 죽고 살아나서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것을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나님의 요셉을 단련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먼저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사건화 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요셉처럼 다스려 가십니다.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우리기 위하여 사건을 벌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은 우리가 원치 않는 곳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심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가 원치 않는 사건과 사고 속으로 자꾸 말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영웅호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간들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한 아픔들을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구조 속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세요.

그게 야곱처럼 인생이 차압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끌려가는 것이 할렐루야 찬송하고 아멘 하면서 가는 길이 아니에요.

끌려 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가 터져 나와요.



죄가 발산되는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는 법대로 할 것 같으면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이지 않고 보듬고 가십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이 땅에서 역설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야곱의 인생 이력서는 이 땅에서 잘되는 것으로 쓰여 지는 것이 아니고 안 되는 것으로 쓰여 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받은 분복대로 간섭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은 우리의 원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고 구원하기로 작정했다고 했습니다.



때가 되어서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고,

때가 되어 예수를 믿게 하시고,

때가 되어서 그 예수의 운명 속으로 우리의 삶이 전개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보면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고 합니다.


여기에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이방인 중에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야곱과 같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같이 언약이 심겨진 자들에게 복음이 들려지게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믿고 영생주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일하시는 방법은 창세전에 작정된 대로 일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가 믿어지도록 해 주셨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어도 못 믿습니다. .

하나님께서 마음을 열어서 믿어지게 해주어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주어야 알아지고 들려지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려진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귀를 쫑긋 세워서 들으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게 해 주실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이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귀를 받은 성도는 만물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구원하십니다.

구원을 우리가 염려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써 복음이 들려지는 것이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은 잘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합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것을 철회 할 수가 없다고 하니까 에서가 말합니다.



“아버지여 내게 줄 복이 이것 밖에 없습니까?”

그러자 이삭에 에서에게 말합니다.



“너는 이 땅에서 활을 믿고 살 것이다”

야곱에게는 하늘의 이슬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은혜로 간섭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에게는 기름진 땅도 없고 이슬도 안준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간섭하지 않고 유기를 시켜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는 칼을 믿고 살듯이 자기 힘을 믿고 살아가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야곱의 계열이 있고 에서의 계열이 있습니다.

야곱과 같이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사는 자가 야곱의 계열이고,

에서처럼 칼을 의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사는 자들은 에서의 계열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에서와 같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 온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은혜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이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어 가신다면 우리는 에서처럼 자기 힘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서처럼 자기 힘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우리 힘을 빼앗아 가는 식으로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서 때로는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을 발생시켜서 은혜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야곱의 계통은 하늘로 가는 레일 위에 올려놓고 가도록 하고,

에서의 계통은 땅으로 가는 레일 위에 올려놓고 가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끝에는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연으로 보지 말고 언약적 관점에서 보세요.

그럼 이해가 됩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 인생을 보십시오.

그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끝까지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야곱처럼 반드시 복을 받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 어떤 환경에서든지 낙망치 말고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원래 에서와 같은 자였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약을 주셔서 그 언약이 우리를 이끌어가서 야곱의 자리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비록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험악한 세월을 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할 찌라도 그 모두가 내 인생의 주관자 되신 예수님이 나를 끌고 간다는 것이 깨달아져서 그 속에서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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