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창세기 강해

53. 우물가에서 만난 신랑 (창 29:1-15)

by coroa 2021. 6. 28.

 

 

[53. 우물가에서 만난 신랑 (창 29:1-15)]

-.정낙원 목사

 

오늘은 야곱과 라헬의 만남 속에 예수님과 우리와의 만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라헬을 가지고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의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이 우물가에서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만나고,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고,

모세가 우물가에서 십보라를 만나고,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고,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고,

바울이 브리스길라 아굴라를 만나고,,,,

이들의 만남 속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속사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만남의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해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남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아와서 만나주시면 인생이 바뀝니다.

기존으로부터 떠나는 인생이 시작이 됩니다.

내 인생이 예수님의 인생으로 차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우리 인생이 나의 것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난 후로는 우리 인생은 우리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여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 속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하심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우연이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다스림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누가 창조하셨나요?

요한복음 1장 3절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럼 우리의 인생도 예수님 수중에 있음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서 사용하십니다.

신앙은 이 바탕 위에서 시작이 됩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주께서 우리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을 해 놓았다고 합니다.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이란 말은 우리가 생겨나기 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영화를 만들기 전에 어떤 배우는 무엇을 하고 어떤 배우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시나리오에 다 써놓은 것과 같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시나리오에 적힌 대로 연기를 하여서 영화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독은 시나리오대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배우들은 시나리오대로 연기만 하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창세전에 계획하셨던 언약을 드라마처럼 그려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그려진 그림이 있고,

현재 그려가고 있는 그림이 있고,

장차 그려갈 그림이 있습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 이야기로 하면 과거 구원과, 현재 구원과, 미래 구원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이미 받은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장차는 이루어가는 구원이 완성의 지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왜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로 이야기 하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이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구원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도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로 출생을 하여서 청년으로 자라가고 청년이 어른이 되고 어른이 노인이 되어서 종국에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신앙을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라는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도 신앙이란 서투름에서 완숙함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완숙함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아는 자리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완숙함을 신앙으로 이야기하면 “나의 나 된 것은 모두가 주의 은혜입니다” 라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만물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을 알고 내 인생의 주관자가 예수님이심을 알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로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갔다고 합니다.



우린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출연한 배우들입니다.

각자 맡겨진 배역을 하다가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진 배역대로 사용하시다가 데려 가십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은 그 아들을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하고 언약의 후손과 비 언약 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므로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수곤거리면서 떠나갑니다.

반면에 제자들은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있사온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릅니다.

왜 동일한 이야기로 두 부류의 사람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이는 이 세상에는 예수를 따를 사람과 예수를 배척하는 두 부류의 인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두 부류로 판단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자로 구분을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자기 백성이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를 마귀 백성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신자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자를 불신자라고 합니다.

신자를 천국 백성이라고 하고, 불신자를 지옥 백성이라고 합니다.



천국 백성의 주인은 예수이고, 지옥 백성의 주인은 마귀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 나타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영에 속한 자 또는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하고,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육에 속한 자 또는 땅에 거하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찾아서 천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을 쫓아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구원을 받고 난 후에 내가 누구인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내 존재가 어떤 자인지를 알게 되었고 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오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내가 무엇을 할까”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가” 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무슨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희들을 어떻게 구원을 하셨고 어떻게 간섭하고 다스리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리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이렇게 구원을 했다”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너희 자식들에게 출애굽의 역사를 가르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먼저 우리가 어떤 자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너희들은 죄와 사망의 종이었는데,

지금은 의와 생명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가 피를 흘려주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에 포카스를 맞추지 말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포카스를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뭘 하라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까 로 접근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구원을 따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 백성을 찾아가서 구원을 해 내시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내가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법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습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펴면 본능적으로 어떻게 할까 로 접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건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홍해를 우리가 가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떻게 가르셨는지 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고 살아왔구나,

그래서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성경 속 인물들을 남으로 보지 마세요.

내가 이런 은혜를 입고 있구나 를 보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살펴보는 야곱과 라헬의 만남 사건도 우리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야곱을 타자로 보지 마시고 내 자신으로 보아야 합니다.



야곱의 일생을 통하여서 우리의 일생을 봐야만 합니다.

그럴 때 성경 속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하여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간섭 해 가는지 알려줄까?”

야곱을 봐라!

라헬을 보라! 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야곱이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고 쫓겨났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끌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어디로 이끌고 갔느냐 하면 한 돌에게 이끌어 갔습니다.

그런데 그 돌은 그냥 광야에 널려 있는 그냥 돌이 아닙니다.

하늘의 문이었습니다.

보통 돌이 아니었습니다.

하늘로 가는 사닥다리가 세워지는 돌이에요.



야곱이 그 돌을 베게하고 잠을 잘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서 이 돌을 일컬어 하늘의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늘이 열릴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돌을 베게하고 잔 것은 예수와 함께 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이 돌을 베고 잠을 잤다는 것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잠이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지금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 안에서 난 죄인인 야곱이 죽은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나니까 하늘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건 에덴동산의 문이 열린 것과 같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에덴동산의 몸은 잠겼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기 전에는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문이 야곱이 예수와 함께 죽으니까 열린 것입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은 예수와 함께 죽은 자들에게 열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걸 야곱은 돌을 베게하고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서 하늘에 장자는 옛 사람이 예수 안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광야에서 자기가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야곱이 장자가 되고 싶어 한 것은 아버지 가문을 이어받고자 함이었습니다.

아버지 가문을 이어받으면 백배나 축복을 받은 아버지 재산이 다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계산이 빠른 자에요.

그래서 장자가 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장자의 복을 받자 하나님이 아버지 집에서 이끌어 낸 것입니다.

너는 이 땅에 장자가 아니고 하늘에 장자라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사닥다리 위의 하늘을 보여 준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 속에는 아직도 아버지 집이 탐나는 것입니다.



야곱은 여전히 땅의 복을 추구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하늘의 것을 심어 놓았는데 야곱은 반대로 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야곱의 그 야무진 꿈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일생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야곱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 한다 해도 그건 립서비스에요.

입술로는 천국을 말하는데 몸은 땅에 것을 움켜잡고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세상의 복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육신이라는 구조가 땅에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땅에서 낫기 때문에 땅의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은 땅에 것을 먹어야 행복해 합니다.

이게 우리 몸의 한계에요.



아무리 하나님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하여도 우리는 예 하고 대답은 해도 몸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쫓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정답대로 살아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정답대로 살 수 없는 몸인 줄을 알면서도 정답대로 살라고 합니까?

이는 우리 실존을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아!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는 죄인이구나!

이걸 알면 긍휼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실존을 알면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탄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끝에는 긍휼의 자리여야 합니다.



“하나님 저 잘하고 있지요” 라고 나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열심과, 정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기를 바라십니다.

신상의 열심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란 뜻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음을 깨닫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 은혜가 너무도 커서 나타나는 열심이고 정성이고 감사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끝에는 감사와 찬송이 나와야 합니다.

감사와 찬송을 하려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감사는 깨달음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을 광야로 불러내고 이걸 깨닫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과 동행하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땅 사람 야곱을 하늘에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야곱의 이야기 속에는 두 가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야곱이 하란에 가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야기입니다.

이럴 때는 야곱이 예수님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사건을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보아야 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14년 종살이 한 것은 값을 치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 몸을 값으로 주고 우리를 구원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값을 주고 산 라헬을 고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야곱을 우리의 인생으로 보아야 합니다.

야곱을 우리 인생으로 본다면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은 정반대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조상의 땅으로 가서 혼인하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서 혼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조상의 땅인 천국이 이 땅에서는 교회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야곱이 조상의 땅에서 아내를 맞이한 것은 성도가 교회에서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하란으로 인도하여 라헬을 만나게 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주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몸 된 교회가 우리 조상이 있는 고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 속에는 두 가지 계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인물들 특히 족장들을 볼 때에는 이중계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메시야 적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성도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으로 하여금 조상의 땅에 가서 야곱의 아내를 찾으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지 말고 조상의 땅에 가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장자 되어서 이 땅에 창세전에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시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에게 네 아내는 이 땅에서 구하지 말고 조상의 땅에 가서 구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면서 아무나 찾지 말고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백성들만 찾으라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 할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만 찾아가서 하늘에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야곱을 이끌고 아내가 있는 자리로 끌고 가시는 것을 보루수가 있습니다.



창 29:1절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야곱이 발행하여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여기서 발행이라는 말을 주석한 것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발행이란? “이사라글라우” 라고 하는데 이는 “들어 올리다” 라는 동사인 “나사”의 미래형(의미는 과거)과 “발”을 뜻하는 “레겔”에 3인칭 접미어가 합쳐져 “그의 발을 들어 올렸다” 라는 말입니다.“ 라고 호크마 주석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야곱의 발걸음을 인도하였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마치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시키실 때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출애굽을 시켰다고 하신 표현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방 사람의 땅이란? 영적으로 경건한 사람들이 사는 땅이란 의미입니다.

동방이란? 최초에 나타난 곳이 창세기 2장인데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야곱에게 조상의 땅으로 가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하였는데 그 땅이 바로 동방 사람들이 사는 땅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동방 사람이 사는 땅은 최초의 사람이 살던 땅인 에덴동산이라고도 할 수가 있습니다.



욥기에 보면 욥을 동방의 의인이라고 하지요.

이는 동방에 사는 욥이란 뜻입니다.

욥기에서 동방이란 의인이 사는 땅이란 뜻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자 이삭과 리브가가 가나안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고 조상의 땅에 가서 아내를 맞이하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가나안 땅은 이방인이 사는 비거룩의 땅을 상징하고, 조상의 땅은 거룩을 상징하는 땅으로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경건의 후손입니다.

그럼 경건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야 합니다.

그 경건한 사람이 사는 땅을 동방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의 발걸음을 인도하여서 그 땅에 이르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땅에 이르렀다는 말은 마침내 당도 하였다는 뜻입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야곱과 동행하시겠다고 약속 하였습니다.

그럼 야곱이 동방 사람들이 사는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이 인도 하셨다는 증거가 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누가 누구를 만나고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만나게 된다고 하였지요.

그럼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만난 것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야곱을 동방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인도하고 라헬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만나러 갈 때 아브라함이 그럽니다.

하나님이 앞서서 이삭의 아내가 될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엘리에셀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리브가를 만나고 난 후에 엘리에셀이 하나님께서 순적히 만나게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러면 야곱이 라헬을 만난 것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성도의 구원을 이해하려면 드라마를 보라고 하는 이유가 드라마가 전개되는 것이나 성도의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나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서는 각본이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언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라헬이 있는 곳으로 인도한 것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야곱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한 수순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나 라헬이나 그들의 운명은 언약에 의하여 이끌려가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지칭 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야곱 속에 언약을 심어 놓고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야곱과 동행하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언약을 심어놓고 그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어가십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 역사 속에서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것으로 수평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도 시간의 흐름처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로 흐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심겨진 언약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은 시작은 하였으되 아직 완성은 아니고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언약이 시작이 되면 반드시 완성이 됩니다.

지금 비록 역사 속에서는 미 완료의 모습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는 완성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 인생을 걸쳐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 자체가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의 삶입니다.

구원의 종착점은 천국입니다.

우린 역사적인 시간관으로 볼 때 과거에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장차 완성이 되어집니다.



구원을 미완료 시제로 말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부족하거나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완성 되었습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홍해는 건너서 광야로 나오는 구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과거 시제의 완성된 구원은 존재론적인 구원입니다.

이것은 율법 아래 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진 것으로 말합니다.



이제 광야에 나왔으면 언약의 약속된 지점을 향하여 가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광야 40년으로 나타납니다.

광야 40년은 약속된 지점으로 가는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현재 시제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 라고 합니다.



이제 정한 때가 되면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지점에 도달합니다.

이걸 현재 시점에서는 장차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미래 시제로 말을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으며, 장차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그 속에 심겨진 성도는 중간에 구원이 취소되거나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우리의 행위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구원이 우리 행위나 조건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행위와 조건에 따라서 실패하거나 잘려 나갈 수가 있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이 창세전에 이미 약속하신 언약에 의하여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취소되거나 실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이건 단회적인 사건으로 과거 구원을 말합니다.

두 번 창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끝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조성하신다고 합니다.



조성이란? 만들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가지고 뭔가 하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십니다.



창조 하신 이도 하나님이고,

지명하여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고,

조성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조성을 하셨으면 완성이 있겠지요.



창조는 아이가 출생을 하듯이 단회적이고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성은 출생한 아이가 자라가듯이 많은 시간을 두고서 이루어져 갑니다.

때가 되면 인생을 마감하고 돌아갈 때가 옵니다.



창조는 “이미”이고 죽음으로 안식하는 것은 “아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이미와 아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야곱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조성해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라고 한다면 구원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완성이고 완료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 구원이 있고, 현재 구원이 있고, 미래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확실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게 믿어져야 합니다.

이게 안 믿어지면 구원의 확신이 아침저녁으로 롤러코스트를 타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행위로 천국에 갔다 지옥에 갔다 그래요.

분명히 말하지만 구원은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졌어요.

그러므로 우리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8-39=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0절을 보세요.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셨다고 하지요.

언제 정했나요?

창세전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신다고 하지요.

의롭다 하신다는 것은 정죄하지 않고 옳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의롭다 하시는 가요?

부르심으로입니다.

부르심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부르시면 그 즉시로 의로운 자가 됩니다.

천천히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단번에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마치 아이가 온전한 사람으로 출생을 하듯이 우리의 의로움도 그러합니다.

아이가 천천히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의로움도 천천히 만들어져 가지 않습니다.

단번에 의롭게 되었습니다.



의로움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구원과 같습니다.

의로움 우리 행위로 된 것이 아니고 부르심으로 된 것이므로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 하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송사 하리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자는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3장에서 야곱에 너는 내 것이라고 하면서 물이 너를 엄몰치 못하고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이 우리에겐 엄청 아픔이고 역설적이에요.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지명하여 부르심을 입은 자인지를 가려내기 위해서 물 속에도 집어넣고 불 속에도 집어넣는 것입니다.

물 속에 들어가고 불 속에 들어가 보아야 누가 진짜로 부르심을 입었는지 가짜로 부르심을 입었는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35절부터 보세요.



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인가 하면,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로부터 끊어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면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은 이러한 고난이라는 구조 속에 넣어짐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걸 씨 뿌리는 비유에서 잘 말해주었어요.

길가 밭이나, 돌작 밭이나, 가시 밭이나 처음에는 말씀을 다 받아요.

잠시 동안은 믿음 있는 척 해요.

겉으로는 다 신자인 것 같아요.



그런데 환란이나 핍박이나 어떤 상황에 던져지면 다 넘어져요.

신앙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을 입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파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신자도 지옥 갈수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흔히 성화주의자들이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신자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에서 짤린다고 공갈을 칩니다.

이들은 이러한 말씀의 진의를 몰라요.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부르심 없이 스스로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자들인 겁니다.

진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좋은 밭처럼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가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옛 말에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합니다.

좋을 땐 간신들이 우굴 거려요.

이건 정치권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 신앙도 동일합니다.

고난이 닥쳐 보아야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내가 믿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것인지는 씨뿌리는 비유에서처럼 말씀으로 인하여 어떤 고난이 닥쳐보아야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가 있지요?

언제 정하시었나요?

창세전이죠?



그런데 그를 언제 부르셨나요?

현재지요?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미래지요?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이루고,

구원을 이룰 것이에요.



구원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분이 그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럼 그 구원을 주신다고 언약하신 분이 누구신가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우리 몸을 통하여 이루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가 언약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심으로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난 도저히 구원을 받고 구원을 이룰 수가 없는 자인데 구원을 받게 되면 그 구원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은혜 언약인 창세전 언약이 이 땅에서 자기 백성들 몸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새겨진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언약을 누가 이루었나요?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우리가 혜택을 입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전리품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예수님이 마귀와 전쟁을 하고서 찾아 온 전리품이에요.

이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아버지로부터 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에게 생명책을 주시고서는 이 놈들이 지금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으니까 네가 마귀와 전쟁을 하고서 찾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게 야곱이 라헬을 찾아서 벧엘로 돌아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생명책을 주어서 자기 신부들을 찾아오라고 하였듯이 이삭도 야곱에게 조상의 땅에 가서 라반의 딸을 아내로 데리고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구원을 되찾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전쟁을 하여서 포로로 잡혀 있던 조카 롯을 구해서 돌아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찾아서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찾아옵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축복을 하면서 이 전쟁의 성격을 설명해 줍니다.



네가 전쟁에서 이기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 십일조가 나중에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자들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초태생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초태생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에서 살아난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고 있어요.

초태생은 전리품과 같아요.

이 초태생이 바로 십일조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십일조인 것입니다.



십일조는 수입의 돈의 십분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100만원 벌면 10만원 드리는 그런 개념이 아니에요.

십일조는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전리품이고,

전리품은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구원을 받은 성도가 전리품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어서 마귀와의 전쟁을 하시고 사망에 포로로 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찾아오셨어요.



이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나고 예수님이 부활 후에 이들을 데리고 하나님께 드린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성도가 십일조에요.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사망에 가두어진 우리를 찾아와서 전리품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로 드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22-24=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장차 예수님이 나라를 아버지께 바친다고 하지요.

그 나라가 성도에요.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모든 성도들을 데리고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가서 보고 할 겁니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께서 분부하신 것을 무사히 잘 마치고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다 찾아 왔습니다” 라고 보고 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수고했다고 하면서 큰 잔치를 배설하십니다.

이것이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은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잔치를 하는 것으로 말씀해 주셨어요.

목자가 양을 찾아내요.

양이 목자를 찾아 가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이 홀로 이루어 내시는 은혜의 산물인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찾아서 집에 가면 하나님이 큰 잔치를 배설해 주세요.

이 때 잔치에 참예한 모든 사람들은 목자가 양을 찾은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걸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중에 천국에 가면 예수님의 기쁨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걸 이 땅에서는 매 주일마다 여호와의 안식일인 일곱째 날을 기념하는 뜻으로 교회에 모여서 구원해 주신 그 은혜를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천국에 모이는 것을 리허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허설은 캐스팅이 된 사람들만이 해요.



교회의 모임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러므로 천국 백성들은 교회로 모이는 것을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임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은 올바로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이들은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자들이에요.

예수를 구경한 자들이지, 단언코 예수를 만난 자들이 아니에요.

예수를 만난 성도는 절대로 교회 생활을 건성 건성으로 할 수가 없어요.



어떤 구원인데,,,.

교회가 어떤 곳인데,,,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그랬잖아요.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를 더욱 힘쓰라고,,

교회는 하늘나라 백성들이 모여서 위로 받는 곳이에요.



그래서 저는 교회의 모임을 폐하는 자들을 구원 받은 성도로 보지 않아요.

그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의 모임을 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찾아짐을 당한 것이 없기 때문에 구원 받음이 기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이 기쁘지 않으니 교회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예수님이 날 찾아 주지 않았으면 어찌 할 뻔 했나요?

끔찍한 생각이 들지요.

찾아 주신 것이 너무도 고마워서 감사로 교회로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 본문에서는 우물가로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지요.

우물가에 라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발걸음을 우물가로 인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예수님 입장이고, 라헬은 성도 입장이에요.



예수님이 구약 교회에 찾아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셨어요.

지금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그림을 잘 보세요.



하나님이 그랄 땅에서 야곱을 하란으로 인도합니다.

거리상으로는 그랄과 하란은 수백 km 떨어져 있어요.

이건 마치 하늘에 계시던 예수님이 이 땅으로 오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약 교회로 보내신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신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물이 어떤 곳입니까?

목마른 자들이 목마름을 해갈하고자 물을 길러 오는 곳입니다.

갈증을 해결하러 오는 곳이 우물이에요.

모든 인간들은 목마른 자로 태어납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목마름으로 태어나요.

구원 받고자 하는 목마름이에요.



구약의 율법을 보세요.

예수님 앞에 율법사가 찾아와서 묻습니다.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물었나요?

율법사에요.

율법사가 무엇에 목말라 하는가요?

영생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영생을 목말라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 속에 영생에 대한 갈증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율법을 받으면 영생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세례요한의 출현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세례 요한은 율법을 상징해요.

세례요한을 일컬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하지요.

이는 주에게로 인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세례요한을 따라가면 누가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와요.

율법을 따라 가면 예수님이 나와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일컬어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율법을 받은 민족은 이스라엘뿐이에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처럼 언약의 후손들에게만 구원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는 메시아로 오신 것입니다.



율법은 영생을 주지 않아요.

영생에 대한 목마름을 주어요.

영생을 주실 분을 찾아 가게 한단 말입니다.

율법사가 지금 율법으로 영생을 주시는 분 앞에 나온 것입니다.



우물에 누가 나오는가요?

목마른 자들입니다.

목말라 하는 여자들이 물을 길러 나옵니다.



여자에게 있어 목마름이란 신랑입니다.

신랑에 대하여 목말라 하는 여인들이 있는 그 우물에 누가 찾아가는가 하면 신랑이 찾아갑니다.

우물에서 신랑과 신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어 가세요.

우물가에서 남자와 여자가 정분이 나도록 말이에요.

신약에 보면 신랑으로 인하여 목마름을 가진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다름 아닌 남편을 여섯이나 갈아치운 수가성 여인입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참 신랑으로 찾아 가십니다.

이 그림을 야곱과 라헬을 통하여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 받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목마름이란? 구원이고,

사망에 놓인 인간에게 목마름이란? 영생입니다.



수가성 여인에게 있어 목마름이란? 신랑입니다.

인간들은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과학과 문명을 발달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과학이나 문명도 영생에 대한 목마름을 줄 수가 없습니다.

과학은 구원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원초적인 목마름을 해결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우물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물은 목마른 자들이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모이는 곳이에요.

야곱이 우물가에 와서 라헬을 만난 것이나,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난 사건이나 같은 내용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나 사건은 그림자적 사건이고,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만난 것은 실제적 사건입니다.

그럼 야곱이 라헬을 우물가에서 만난 사건을 밑바탕으로 하여서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 구원해 내는 그림으로 완성해 보십시다.



요한복음 4장을 봅시다.



요 4:1-26=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15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그림을 잘 보세요.

지금 예수님이 유대로부터 사마리아로 갑니다.

이것은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로 가는 것을 반대했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는가 하면 변절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원수 같은 자들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의 정서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 이후에 통일 왕국이 솔로몬의 두 아들로 인하여 남과 북으로 분열이 됩니다.

마치 우리나라와 같이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남쪽은 적통자로서 르호보암이 왕이 되고, 북쪽은 반역자인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습니다.

적통자인 르호보암은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반이 따르고,

반역자인 여로보암에게는 10지파 반이 따르게 됩니다.



르호보암은 남쪽인 예루살렘 중심으로 살았고,

여로보암은 북쪽 사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세운 나라라고 하여서 남쪽 유다라고 하고,

북쪽 다수의 지파들이 세운 나라로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면 자신을 떠날까봐서 벧엘에다가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해서 가짜 성전을 지었어요.

그리고는 레위 사람이 아닌 일반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우고 이스라엘의 절기와 비슷한 절기를 만들어서 지켰어요.

짝퉁 이스라엘을 만든 것입니다.



남쪽 유다 사람들에게는 기절초풍 할 일이에요.

그래서 남쪽 유대인들에게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보다 더 미워하는 대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남쪽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였을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우리도 성전 건축을 돕겠다고 하니까 남쪽 유다 사람들은 우리는 개 같은 너희들의 도움은 안 받겠다고 할 만큼 그들을 미워했어요.



암튼 북쪽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 보다 먼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민족성을 말살하려고 혼혈 정책을 편 것입니다.

이방인과 이스라엘 사람들을 결혼하여서 이스라엘의 순수 혈통을 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사람들이 사마리아 지역에 살았어요.

그래서 순수 혈통을 상실하여 타락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마리아 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 땅은 저주의 땅이었어요.

한마디로 재수 없는 땅이에요.

그 땅에 사는 사람도 재수 없는 저주 받은 사람들이구요.

그래서 상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도 섞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으로 통행도 하지 않았어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목에 사마리아가 있었어요.

사마리아를 지나서 가면 지름길로 사흘이면 갈 수가 있는데 유대인들은 저주 받은 곳이라고 하면서 빙 둘러서 엿새 길로 다녔어요.

그만큼 사마리아 사람들이 보기 싫고 상종하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그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펄쩍 뛰면서 안 된다고 하여도 예수님은 가신 것입니다.

왜 가셨는가 하면 거기에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예수님의 신부가 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수가성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서 추수를 하신 것입니다.



추수란?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뽑아내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본토친척 아비 집에서 뽑아내서 벧엘로 데리고 오는 것과 같아요.



“수가”라는 말이 “값을 주고 사다” 라는 뜻입니다.

이러면 뭔가 감이 오지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아버지가 아들의 신부감을 미리 점지해 둡니다.

이건 창세전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신부가 될 사람을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해 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때가 차면 아들은 신부가 있는 곳으로 보냅니다.



이 때 신부의 아버지에게 줄 결혼 지참금을 주어서 보냅니다.

그러니까 신랑이 신부를 값을 주고 사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자기 피값으로 우리를 마귀로부터 구원해 주신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 수가성에 예수님이 값을 주고 산 신부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의 신랑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이 어디에 있나요?

우물가에 있지요.

그 우물은 야곱이 세겜 사람들로부터 값을 주고 산 우물이에요.

그래서 야곱의 우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값을 주고 산 우물을 누가 먹나요?

수가성 여인이 먹고 있어요.

이것은 영적으로 수가성 여인이 야곱의 아내란 말입니다.



야곱의 아내가 누구인가요?

라헬이지요.

이러면 예수님은 야곱의 입장에 있고 수가성 여인은 라헬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야곱이 라헬을 만난 사건을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으로 재현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체에요.

라헬은 그림자이고 수가성 여인이 실체에요.

야곱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실체에요.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일부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 여인이 바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예수님의 신부 될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수가성 여인을 그 시간에 딱 배치를 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물가로 보내신 것이구요.

하나님이 감독이 되셔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를 찍고 계신 것입니다.

멋지지요.



드라마를 보세요.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장면들을 보세요.

감독이 남녀 주인공을 만나게 할 때 남자 주인공은 동쪽에서 오게 하고 여자 주인공은 서쪽에서 오게 하여서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만나게 하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라헬로 하여금 우물가에서 야곱을 만나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지금 드라마를 찍고 계세요.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영생에 목마른 자들이 우물가에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우물가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느냐?

구약교회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물은 구약교회와 같은 곳이에요.

구약교회는 율법교회에요



율법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을 찾아다녀요.

그런 의미에서 목말라서 물 길러 온 수가성 여인은 율법 아래 있는 자와 같아요.

구약 교회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구약 교회에 가서 물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 교회에 가서 영생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율법 아래 있는 구약 교회를 상징하는 수가성 여인이 하는 말이 이 우물은 너무 깊어서 물을 길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을 길러온 여인이 이 우물은 깊어서 물을 뜰 그릇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 우물을 덮고 있는 큰 돌을 옮겨서 라헬이 몰고 온 양 떼에게 물을 먹이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라헬이 양떼에게 물을 주려고 옵니다.

그런데 그 우물이 돌에 덮여 있어요.

이 돌은 그 우물의 주인인 남자가 옮겨주어야 해요.

그래서 야곱이 우물을 덮고 있는 돌을 옮겨주는 것입니다.



지금 수가성 여인이 찾아온 우물이 누구의 우물인가요?

야곱의 우물이에요.

이 우물은 야곱만이 열 수가 있어요.

야곱이 우물의 주인이니까 야곱이 우물을 덮고 있는 큰 돌을 옮겨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수가성 여인도 그 물을 먹을 수가 있어요.



수가성 여인이 야곱의 우물에 간 것은 이 여인의 남편이 야곱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의 우물에 물을 길러 가는 사람은 야곱의 아내만 갈 수가 있어요.

근데 우물을 덥고 있는 큰 돌을 옮겨줄 신랑인 야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니까 자기는 물을 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은 이 우물의 주인이 와서 우물을 열어 주어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걸 우물이 깊어서 물을 뜰 그릇이 없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야곱의 우물의 주인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야곱의 실체가 되어서 가신 것입니다.

구약의 우물은 신약의 예수님이 열어 줄 때 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자에게 내가 너에게 물을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은 물을 얻고자 함이 아니고,

그 반대로 예수님이 물을 주실 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가 너에게 목마르지 아니 하는 생수를 주고자 왔다고 합니다.

이에 여인이 그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느닷없이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합니다.

이에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말이 맞다고 하면서 그 여자의 과거 남편들을 이야기 합니다.

네가 과거에 섬기던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여섯이나 둔 여자입니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한 것은 이 우물을 네 남편이 와서 열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자기는 남편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너에게 남편이 있지만 그 남편들은 이 우물을 열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우물은 우물의 주인인 야곱이 와서 열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신랑들은 야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야곱이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야곱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은 네가 지금까지 먹었던 땅에 있는 우물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쉬운 말로 구약의 야곱은 땅에 있는 물을 주었으면 신약의 야곱은 하늘의 물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수를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생수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여 성령으로 다시 오시면 자기 백성들 속에서 흘러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오셔서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우리 안에서 구원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그 속에서부터 솟아나기 때문에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주는 생수를 먹게 되면 목마름이 사라지므로 다시는 이런 우물에 물을 길러 올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한 일을 야곱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찾아 와서 우물의 뚜껑을 열고 물을 먹이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야곱이 라헬에게 하신 일을 수가성 여자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구약을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추수이야기로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추수란? 밭에서 뽑혀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던 밭에서 뽑혀서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추수하러 간 것입니다.

20년 후에 야곱은 라헬을 추수하여서 라반의 집으로부터 뽑아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을 한 것입니다.



라헬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친정집에서 야곱의 집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이 주는 물을 먹고 살았어요.

율법이 주는 물은 늘 목말라요.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지킬 그 때만 쉼을 주어요.

지키고 나면 또 다른 율법 조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요.

율법의 조문들은 지켜도 지켜도 계속하여 지켜야 할 것이 남아 있어요.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는 쉼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쉼을 얻을 수가 있느냐?

율법이라는 동네에서 이사를 가면 됩니다.

이사를 가자면 값을 지불해야 해요.

그 값을 예수님이 지불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값을 지불하고 산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탈북하신 분들을 북한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 정죄 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율법으로부터 정죄 당하는 목마름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상징하는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목말라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남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다섯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째 남편하고 사는데 지금 남편에게도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목말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오에 물 길러 온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가성 여인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말고 우리 이야기로 이해해 보세요.



우리가 바로 수가성 여자에요.

우리의 욕심은 밑 빠진 독이에요.

체워도 채워도 만족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바로 수시로 신랑을 바꿔치기 하는 수가성 여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 온 것입니다.

찾아 오셔서 하늘에 것을 주십니다.

하늘에 것으로 땅에 것으로부터 해갈케 해 주셨습니다.

성령이 하늘에 것으로 땅에 목마름을 해갈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걸 언약으로 이해해 보세요.

우리의 신앙은 율법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항상 목이 말랐습니다.

쉼이 없었습니다.



율법은 항상 지키라고 쫓아옵니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의 신앙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안 하면 마음이 쉼을 얻지 못하니까요?

율법의 요구는 끝이 없어요.

율법 아래서는 쉬고 싶어하는 목마름이 늘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과정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마름을 먼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율법 아래 두셨어요.

그리곤 때가 차매 은혜 아래로 옮겨주십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먼저 목마름의 구조 속에 집어넣고 생수를 주신단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9=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우리는 원래 아들이에요.

그런데 잠깐 동안 종의 자리에 두셨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서 우리를 종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옮겨주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 아래 가두었다가 예수님을 통해서 건져주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성도의 구원을 이렇게 일을 하십니까?

이는 창세전 언약이 죄에서 건짐 받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에게 왜 어떤 식으로 일을 합니까? 물어야지요.

그럼 하나님이 너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고 은혜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세요.

자비나 은혜나 사랑은 그 반대의 상황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역설을 통해서 정설이 드러나요.



사랑을 어떻게 설명 합니까?

미움을 통해서 설명이 되어요.



은혜가 어떻게 설명이 됩니까?

법을 통해서 설명이 되어요.



자비는 어떻게 설명 됩니까?

무자비를 통해서 설명이 되어요.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나님 나라에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이에요.



천국을 설명하고자 천국과 반대 되는 지옥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설명하고자 이 세상 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무한한 영원한 생명을 설명하기 위하여 유한한 죽을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끝이 어디인가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여정이 있지요.



죄 아래 있다가 의 아래로 옮겨지고,

의 아래 옮겨진 자들이 천국으로 가고,

천국에 간 자들이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법을 알지 못하면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지 못해요.

하나님이 준비한 것은 은혜인데 그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먼저 율법 아래 잠시 던져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어요.

왜 예수그리스도의 피 로서만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오롯이 남기를 원해요.



우리 몸에 예수님의 공로를 새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 아래 두었다가 은혜 아래로 옮겨주는 것입니다.

목마른 물을 주었다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는 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두루 다 거쳐 보아야 해요.



율법적 신앙생활도 해보고,

성화주의 신앙생활도 해보고,

기복주의 신앙생활도 해보고,

은사주의 신앙생활도 해보고 다 해 봐야 해요.



그리고 어 이거 아닌데! 라고 목마름을 느껴야 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참 복음을 만나게 되면 복음 이외 모든 것은 다 배설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복음만이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참 생명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주 장사같이 좋은 진주를 만나면 모든 재산을 팔아서 그 진주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마치 교육 과정과 같아요.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와, 중고등 학교와, 대학교 과정을 이수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은 이 과정을 거치도록 하세요.

그래서 신앙생활은 수많은 산전수전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 봐야 해요.

이 과정이 없으면 예수님의 의가 주는 고마움을 몰라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소중함을 몰라요.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해 보아야 복음이 주는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엄청난 축복임을 알게 하시려고 율법 아래 두어서 영생을 얻어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율법사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선생이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은 영생에 대한 목마름이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간절함이 예수님 앞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복음의 소중함도 율법 아래 종살이 해 본 사람이라야 알아요.



율법 아래서 종 살이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은 관념이에요.

지식으로는 복음이 어떤 것인 줄을 알 수가 있지만 실제화 하지 못해요.

애굽에 종살이를 하지 않고서는 출애굽의 귀중함을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에게 40년 광야 생활을 하게 함으로서 애굽의 종 살이를 경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1 세대들에게는 광야는 애굽과 다른 세계이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에게는 광야는 애굽과 같고 가나안이 다른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인데,

율법 아래서 신앙생활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면 거의 다 지식으로 흘러요.

율법 아래 있다가 복음을 접한 성도들은 그 은혜에 고마움으로 감사하는 자리로 나아가는데,

율법 아래서 종살이 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복음을 자기의 악함과 게으름을 합리화 하는데 악용을 해요.

말쟁이가 되고 교회의 거치는 자가 되어요.



복음을 말하면서 이방인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요.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이 훼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지식이 되면 복음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영적 깡패 노릇을 해요.

어떤 사람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복음으로 교회를 헤치고 남을 넘어지게 해요.



복음은 참과 거짓을 갈라내는 자정 능력이 있어요.

입술로는 복음을 말하나 삶은 반 복음적으로 나타나는 자들은 복음이 너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말하면서 반 복음적인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에 합한 사람은 복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데,

복음에 반하는 사람은 복음으로 남을 시험 들게 하고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 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복음이 나로 하여금 어느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삶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된 세상에 두시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천국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 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를 믿는 것은 이 땅에서 눈물 흘리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평탄한 길로 우리를 데리고 가지 않아요.

꼬불꼬불한 길로 인도하세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셨던 그 아픔들을 다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를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도의 운명을 도살당하는 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구비 구비 가면서 율법아래서 시달리게 되어 있어요.

시달림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굴복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한 번에 열려지지 않아요.

때를 따라서 조금조금 알아가게 하세요.



어떤 분들이 어떻게 하면 복음을 알 수가 있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한마디로 방법론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어떻게 하면 어른이 될 수 있어요 라는 말과 같아요.



복음을 알아가는 것은 어린아이의 자람과 같아요.

아이가 자라가면서 세상의 이치를 더 많이 더 깊이 깨달아 가듯이 우리가 복음을 알아 가는 것도 산전수전을 겪어 가면서 조금씩 깊이 있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아는데 왕도는 없어요.

복음은 과외 공부 하듯이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공부를 하면 답을 알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인생이 답으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듯이 복음도 영적 생명이므로 점차적으로 점진적으로 깊이를 더하면서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한 번에 어른이 되는 법은 없어요.

인생은 30년 살면 30년만큼 인생을 알고,

50년 살면 50년만큼 인생을 알고,

80년 살면 80년만큼 인생을 알아요.



30년 산 사람이 지식으로 분석하여 80년 산 사람을 이론적으로 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지식이지 실제는 아니에요.

80세의 인생은 80년을 살아 보아야 알 수가 있어요.

80세 노인의 인생은 30세의 젊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를 못해요.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간이 필요해요.

우린 일평생 하나님을 알아가다가 천국으로 가요.

금방 예수 믿는 사람하고 10년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요.

같을 수가 없어요.



내공이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듯이 신앙의 능력도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아요.

이것은 교회 오래 다닌 사람이 예수를 잘 믿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수가성 여인은 선전수전을 겪어 온 여자입니다.

바로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도 산전수전 겪어 오면서 목말라 하고 있어요.

그러한 곳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럽니다.

그동안 목마름을 해결해 줄 것이 있는가 하고 이리 저리 쫓아다닌다고 힘들었지!

이 신랑이 해결해 줄까!

저 신랑이 해결해 줄까!



돈이면 될까!

권세면 될까!

명예면 될까!

부귀영화이면 될까!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쫓아다녔어요.



그러나 마음에 평화는 얻지 못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목마르지 않게 해 주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네 신랑이 되어 줄게”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일곱째 남편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물가로 일곱째 날에 속한 신랑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일곱째 날인 여호와의 안식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비로소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물가는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곳입니다.

신랑이 우물가에 있는 아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물은 신부들이 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라헬을 우물가로 인도하시고 야곱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부가 있어야 하는 곳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교회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다가 천사들을 보내서 신랑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예수님의 신부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신부가 있어야 할 자리는 교회입니다.

그만큼 교회가 중요해요.



교회가 어떤 곳인데,,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데,

이걸 알면 교회 생활을 무시할 수가 없어요.

교회 생활 올바르게 하지 않는 사람치고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를 떠난 자들은 물을 떠난 고기와 같아요.

잠시는 살아 있는 것 같아도 금방 죽어요.

교회는 성도에게 엄마 품과 같아요.

그 어떤 말로 교회의 모임을 우습게 여기고 교회를 떠나게 하는 것은 뱀의 말이에요.

절대로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되어요.

우리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교회에서 신부를 만나 주세요.



모든 성경은 신랑이 신부 찾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살펴본 야곱과 라헬이 우물가에서 만난 사건도 예수님이 교회에서 우리와 만나는 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야곱과 라헬을 우물가에서 만나게 하신 사건을 교회 안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일으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에도 신랑이 오신다는 소식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다가 주신 것입니다.

우린 교회에서 신랑의 소식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신랑이 우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어떤 일을 하셨고,

현재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장차는 어떻게 하시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일을 하십니다.

아들의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일을 하십니다.



야곱의 발걸음을 라헬에게 인도하였듯이 지금도 신랑의 발걸음을 신부에게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가 복음을 깨닫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우리의 발걸음을 교회로 오게 하여서 복음 안에서 교제케 하신 것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중단 없이 우리의 구원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꿋꿋하게 이겨 내시기를 바랍니다.

신랑이 곧 데리러 오십니다.

우물가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소망으로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의 신부로 간택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늘에 생수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하늘에 생수를 먹고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위로부터 내리시는 신령한 그 세계를 바라보고 소망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