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9강. 육으로 알 수 없는 나라 (요 7:31-36)

by coroa 2021. 5. 31.

 

[49강. 육으로 알 수 없는 나라 (요 7:31-36)]

-.정낙원 목사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를 보면 유대인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을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치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것과 같아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서 오셨는데 겉보기엔 인간의 모습과 똑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복잡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만약 공상과학 영화에 나오는 외계인과 같은 E. T 처럼 이상한 분으로 오셨으면 다른 말을 하여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이 외계(外界)에서 오셨음에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에요.

인간들이 볼 때는 전혀 다르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 입장에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나와 너희는 다르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靈)이고, 인간은 육(肉)입니다.

세상은 어둠에 속하였고, 예수님은 빛입니다.

이는 전혀 성질이 다른 세계에 속하였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다르다는 말은 인간 쪽에선 이해불가(理解不可) 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예수님 앞에선 당달봉사와 같아요.

뻔히 보고도 알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동생들과 친척들이 그랬어요.

30년 동안 동거동락(同居同樂) 했어도 예수님을 몰랐어요.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서 설교를 하니 군중들이 그러잖아요.

 

27절에 보면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안다” 는 겁니다.

 

군중들 속에 아마도 예수님을 잘 아는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성전에서 성경을 가르치니 놀라는 겁니다. 

아니! 저 사람은 갈릴리에 사는 목수가 아니냐!

우리가 이 사람을 아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 에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아닌데,

어떻게 지도자들을 제쳐 놓고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느냐? 입니다.

당시에는 성전에서 성경을 강론 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어떻게 평신도가 목사를 제체 놓고 설교 할 수 있느냐 라는 말과 같아요.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는 그리스도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온다고 생각 했었습니다. 

군중들의 생각은 그리스도는 신비한 모습으로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뭔가 인간들과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또한 그리스도가 나타나도 혜성처럼 나타나야 된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신비롭고 초월적이라야 그리스도답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야 하지 않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의 생각이 맞는다고 한다면 지금 자신들도 다 아는 촌 사람인 예수님이 성전에서 성경을 가르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떻게 당국자들이 저지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느냐!

이건 뭔가 이상하다고 수군거리고 있는 겁니다.

 

군중들은 당국자들도 이 예수가 그리스도인줄 생각하는가 보다! 라고 술렁거렸어요.

당국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으니까 저렇게 성전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도 제지하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국자란? 종교 지도자들을 말하는 겁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묵인하면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군중들이 수군거림에 바리새인들과 대 제사장들이 가만있을 수가 없지요.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칠 때는 뭔가 보이지 않는 권세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서 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군중들이 수군거리니 방치 할 수도 없는 노릇인겁니다.

 

방치 하다간 군중들이 진짜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큰일 나잖아요.

그러면 자기들이 살아갈 입지가 흔들려요.

그래서 수하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붙잡아 오도록 한 겁니다.

수하들이 당국자들의 명을 받고 예수님을 붙잡고 당국자들에게 가자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과 조금만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테니 그냥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나 있는 곳에 올 수도 없다고 합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러지 않아도 예수님의 말을 알아먹지 못하고 헷갈리는데 더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의 주제가 뭔가요?

빛이 어둠을 비취되 어둠이 빛을 몰라보더라는 거잖아요.

영과 육의 차이를 말하고 있잖아요.

 

다른 말로 세상이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거잖아요.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님 생각이지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이신 에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모른다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안다고 합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아는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왜곡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다른 방법이 없어요.

모른다고 알려 주는 수 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낸 겁니다.

 

예수님을 보내서 봐라! 너희들이 나를 몰라보잖아! 라고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봐라! 너희들이 예수가 내 아들인걸 몰라보잖아!

그러니 너희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소경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몰라본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너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가짜라는 겁니다.

너희가 잘못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모두가 죄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세상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어디 순순히 그래 우리가 어둠이고 소경이네! 라고 시인 하는가요?

도리어 우리가 왜? 어둠이냐!

왜? 우리가 소경이냐!

이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지 않느냐? 라고 바락 바락 덤빕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몰라보니 소경이 아니냐.

소경이니 나를 몰라 보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빛에 속하였고 하나님께 대한 눈이 떠져 있다고 한다면 나를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로 알아보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자 유대인들은 아니! 니가 갈릴리에 사는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만인(萬人)이 다 아는데 어째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 라고 하느냐에요.

이렇게 되면 입증할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우리가 왜? 어둠이고 소경이며!

왜? 우리가 악이고 죄인이냐! 라고 성질을 내면서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예수를 죽임으로서 저절로 예수와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만 겁니다.

이런 것을 성경은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어리석음을 스스로 드러낸다고 합니다.

 

예수를 이해시켜서 믿을 분이 아니에요.

인간의 지식으로 예수를 아무리 분석해 보세요.

하나님이라는게 안 나와요.

 

예수는 그냥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에요.

우리와 똑 같이 밥도 먹고 똥도 싸고 트림도 하고 씻지 않으면 고약한 냄새도 나는 인간이에요.

이런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이라고 믿는단 말입니까?

안 믿는 것이 정상이고 믿는 자들이 이상한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도 못 알아 먹고 예수님이 하는 행동도 못 알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내가 가는 곳은 육으로 알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자 기껏 이해한다는 것이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모든 사람들은 각자가 만들어 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자기와 같은 동질성은 선호하고 자기와 다른 것은 배척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서로 같은 사람들끼리 유유상종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동호회라는 것이 참 많이 있지요.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거잖아요.

동호회로 모이면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오로지 자기들이 공유하는 이야기만 합니다.

 

동호회 모임을 즐기는 것은 자기라는 존재를 남에게 인정을 받을 때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여러 사람들 숲에서 존재에 의미를 찾고 또한 그 속에서 쉼을 얻고자 해요.

그래서 자기를 인정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귀면 기분이 좋아지는 겁니다.

자기와 생각이 같고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야 편하고 좋아요.

반대로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왠지 거북스럽고 불편한 마음이 들어 본능적으로 기피하게 됩니다.

 

이건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해요.

저도 복음이 같은 사람을 만나면 편한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요.

일가친척 부모형제라도 불편해요.

자식조차도 싫어요.

 

이처럼 인간의 본성이 자신과 다른 것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일단 배척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일이든, 취미이든지, 아니면 신앙이든지 간에 모든 부분에서 일어나요.

이 모두가 자아중심으로 움직이는 본성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마련된 세계관을 일컬어 선입견(先入見)이라고 합니다.

또는 선입관(先入觀)이라고도 합니다.

선입견 또는 선입관이라는 말은 이미 정해진 사고를 말해요.

한마디로 고정된 사상이고 틀이에요.

 

마치 붕어빵 틀에 밀가루 반죽을 넣으면 붕어빵이 찍혀 나오듯이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보면 다 그렇게 보여요.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선입관을 가지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살아가요.

그래서 붕어빵 틀과 같이 붕어빵을 찍어 내듯이 자기 사고로 판단하는 겁니다.

 

이러한 선입견은 신조차도 자기가 생각해 놓은 범주 안에서 이해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신도 자기 생각에 맞는 신이라야 섬깁니다.

만약 자기 생각에 맞지 않은 신은 거부감이 생기고 신으로 인정하기가 싫어요.

 

죄인들 세계에선 신은 인간들의 취사선택에 의해서 신이냐! 아니냐! 로 판단이 되어요.

신이 인간의 처분을 기다려야 하는 적반하장의 처지가 되고 말았어요.

인간이 신을 판단하는 세상이 바로 죄인의 세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 손에 밥술이라도 얻어먹고자 한다면 인간들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해요.

인간들 비위를 거스르면 국물도 없어요.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인간들 소원을 들어주고 섬김을 받는 겁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들 비위를 안 맞추어 주니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로 단 한 번도 인간들 손에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참 하나님을 거부하고 몰아냈어요.

 

이게 죄인들이 세상에서의 신관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인정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준은 자기의 유익에 따라서 결정을 해요.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신이라면 좋은 신이고!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해를 끼치는 신은 나쁜 신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참 신이라고 하여도, 자기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 신이라면 인정하고 싶지가 않아요.

이러한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은혜를 받는 것도 자기가 생각하는 현상이 일어나야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자기 생각의 범주에서 벗어난 일들은 은혜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겁니다.

 

유유상종이라 무당 같은 목사들에게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본인도 무당이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무당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니 무당의 말에 은혜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생명에 따라서 받는 은혜가 달라요.

땅에 속한 사람은 땅에 말을 해 주어야 은혜 받았다고 하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말을 해 주어야 은혜를 받았다고 해요.

 

스스로가 확인해 보세요.

어떤 말씀을 좋아하는가?

목사가 무슨 설교를 해 주어야 좋아 하는지 보면 그 사람의 실체가 드러나요.

영인지 육인지 분명하게 나타나요.

본질은 속이지 못해요.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어도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면 은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결국 은혜도 자기 가치관으로 취사선택하여 선별적으로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란?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 가치관으로 판단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에 이런 자아 중심의 가치관 자체가 틀렸어요.

인간 자체가 가짜에요.

인간이 가짜이기 때문에 가짜를 선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는 가짜다! 라고 나와야 해요.

 

모든 인간은 사이비에요.

가짜 인간이란 말입니다.

원래 창조가 된 인간이 아니에요.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진짜 하나님을 가짜라 하고 가짜 하나님을 진짜로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가짜이기 때문에 신도 가짜 신을 원하고, 진짜 신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면 진짜로 다가오니 가짜인 인간들과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은 거짓인데 참으로 다고오니 거북스러워서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였지요.

그러니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 속엔 이미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본성이 있어요.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은 스스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계가 뭡니까?

나라란 말이지요.

그래요.

인간들은 자신이 꿈꾸는 나라가 있어요.

그 나라를 위하여 일평생 살아가는 겁니다.

 

죄가 무엇이냐?

독자적인 나라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자기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이 되는 그런 왕국을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이 시대 목사들을 보세요.

전부 교회를 자기 왕국으로 만들잖아요.

자기 말이 법이 되어서 통용되는 그런 교회를 만들고 있잖아요.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다 좇아 내잖아요.

 

반대파는 무조건 숙청대상이에요.

그 커다란 음녀 같은 조직에서 기관장이라는 작은 왕 노릇이라도 하고 싶으면 큰 왕인 목사에게 절대 복종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조직에서 살아남아요.

 

이게 가정에서도 그대로 일어나요.

남편들은 가정에서 절대 군주로 군림하고 싶어 하잖아요.

아내들은 그 절대 군주를 자기 손 아귀에 넣고 조몰락거리잖아요.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 신이 되어서 다 왕 노릇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선 인간들 수만큼 신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에 신이 800만개가 있다는 말이 각자 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각자가 신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독립된 세계관으로 사는 겁니다.

피조물이 독립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창조주와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자기 세계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세계관을 갖는 겁니다.

독자적으로 살던 자가 하나님 안으로 귀속된다는 말입니다.

죄가 독자적으로 살게 하였는데 구원을 받고 난 후엔 하나님께 종속되어집니다.

 

이를 성경에서 나는 죽고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해요.

나는 난데!

이젠 내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나에요.

예수 안에서 나는 없는 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세계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원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실제로는 내 세계관과 예수님의 세계관이 늘 우리 안에서 충돌해요.

이를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두 법이 있다고 했어요.

두 법이 항상 하나님 말씀을 앞에 두고 충돌을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법이 내 법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겁니다.

즉 내 법과 하나님 법이 싸우면 내 법이 이겨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제어가 안 되어요.

그러니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내 법이란? 내가 주인이고, 하나님 법은 하나님이 주인이에요.

원칙적으로라면 내가 내 법을 버리고 하나님 법에 굴복하여 하나님 꼬붕이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내 법이 하나님 법을 이겨서 내가 하나님 상전이 되어서 사는 겁니다.

 

성도는 이러면 안 되는 줄 아는 자들이에요.

죄라는 것을 알아요.

이게 죄라는 것을 아니 얼마나 괴롭겠어요.

 

흔히들 건방진 놈들을 안하무인이라고 하잖아요.

속된 말로 계급장 떼고 맞먹는다고 하잖아요.

맞아요.

죄가 하나님과 맞먹게 만들었어요.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도 안하무인이에요.

 

원래 창조주와 피조물은 주인과 종이라는 상하 수직적 관계에요.

그런데 죄가 주인과 맞먹게 수평적 관계로 만들어 버렸어요.

수평적 관계가 되면 위 아래도 없어지고 너나 나나 동등하다고 맞장을 뜨자고 해요.

 

그래서 죄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에서 벗어나 스스로가 신의 위치에 앉아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입맛에 맞는 신을 자기들이 고르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건방진 일입니까?

 

하늘에 태양이 둘이 있을 수 없듯이 에덴동산에도 주인이 둘이 있으면 못 살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맞먹고자 하는 인간을 에덴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에덴 밖 세상에서 하나님처럼 살라고 좇아낸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인간은 세상에서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사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이 되었어요.

자기들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자기들의 세계관으로 판단합니다.

선과 악도 자기들이 정한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자기들과 다르면 거부하고 결국에는 죽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선 신이 둘이 있으면 안 되거든요.

자신이 신이니 다른 신을 인정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죄를 유대인들을 통하여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이게 된 것은 자기들이 생각하던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야상이 있어요.

 

철저하게 자기들 편을 들어주는 메시야에요.

하나님이 인간이 범죄하자 흙으로 돌아가라고 했지요.

이는 인간들의 주소지는 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평생 흙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게 하나님이 죄인에게 준 법이에요.

그러니 인간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흙에 소원을 들어주는 메시야인 겁니다.

세상에서 잘 되게 해 주는 메시야 라야 해요.

 

돈이 필요한 사람에겐 돈을 주고!

병든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고!

수험생에겐 시험 점수 잘 나오게 해 주고!

사업하는 사람에겐 사업을 번창케 하주고!

시집 못간 노처녀에겐 백마 탄 왕자를 보내 주고!

정치인에겐 권력을 주는 그런 메시야 라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대접을 못 받아요.

 

요즘 젊은 며느리들처럼 돈이 필요하면 돈을 주는 그런 시어머니를 원하지 잔소리나 해대고 귀찮게 하는 그런 시어머니는 원치 않아요.

누구라도 날 귀찮게 하고 힘들게 하면 싫어요.

그게 신이라 할지라도 배척의 대상입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지극히 세상적이고 육적인 메시야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세상 나라의 으뜸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었어요.

유대인들의 착각은 이 세상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란 것을 모른 겁니다.

이 세상은 철거가 되어질 가건물인줄 몰랐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 말은 이 세상은 가건물이란 말입니다.

진짜건물은 하늘에 있으니 가짜 건물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미련두지 말라는 겁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걸 알리가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자기들의 꿈을 깨트리니 죽인 거예요.

 

자 보세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하늘나라 백성이니 세상에 미련두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러자 유대인들은 무슨 소리 하느냐?

여기가 우리나라인데 어디로 간단 말이냐?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고 꺼져!

그러면서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지금도 그러잖아요.

눈만 뜨면 세상 것 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허구입니다.

실상은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사세요.

그러면 염세주의 이단이라고 욕을 하잖아요.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라고 하여도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랐기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죄인들의 악함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부딪치면 인간들의 생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밀어낸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유대인의 자존심을 뭉갰기 때문이에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잘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지금은 비록 범죄해서 로마의 식민지 생활하면서 징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이 화가 풀리면 메시야를 보내서 로마도 작살내고 유대나라를 세상 으뜸으로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과거 출애굽 때처럼 모세 같은 메시야가 와서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나라를 작살을 냈듯이, 로마도 작살을 내 준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바라는 메시야는 자기들 “화풀이” 해 주는 메시야인 겁니다.

자기들 체면 세워주는 그런 영웅이라 해요.

이러니 자연히 육적인 안목에서의 영웅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라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와 같이 평범한 촌사람으로는 오실 리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체면과 위신을 고려해 볼 때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위신과 체면을 생각하면 예수는 아니란 겁니다.

아무리 보아도 메시야는 아니란 거예요.

자기들이 예수의 산상명세를 쫙 꿰고 있는데 이건 아니란 겁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인물이 없어서 목수의 아들을 메시야로 보냈겠느냐 에요.

 

저런 사람을 유대인들의 메시야라고 인정한다면 로마 사람들이 믿겠느냐 인 것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죄인들과 친구가 되어 노는 예수가 오히려 창피스러웠어요.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의 죽임에 앞장섰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에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고 만 겁니다.

자신들이 미친놈이라고 죽인 그 예수가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 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어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생각과 다른 메시야를 보낸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 다른 죄라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죄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해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다가 오면 너희들이 지금 믿는 예수는 가짜 라고 고발해요.

너희들이 아는 하나님은 다른 신이다 라고 말해요.

 

인간은 자고 일어나면 다른 신을 만들어요.

자기를 위한 신을 만들어요.,

이건 복음을 아는 성도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육신은 늘 육신을 위한 신을 찾게 되어 있어요.

 

저 역시도 복음을 전하면서도 늘 나를 위한 하나님을 조합해 내요.

야! 오늘은 어떻게 좀 해 주시겠지! 라고 바래요.

야! 오늘은 새로운 신자를 좀 보내주겠지!

오늘은 성도들이 빠지지 않고 다 나오겠지!

 

물론 지나고 나면 헛된 꿈인 줄 알면서도 늘 그런 망상에 사로잡혀요.

다시는 이런 망상을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어느새 보면 헛된 꿈이 꾸어지고 있어요.

이 놈은 가라고 해도 안 가요.

항상 나에게 붙어서 다른 신을 만들어 내요.

 

어떤 분이 메일을 보냈어요.

제 블로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는다고 해요.

그러면서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데 너무 살기 어렵다는 겁니다.

돈 때문에 부부간에 다툼이 잦고 죽겠다고 해요.

이런 메일을 이따금씩 받아요.

 

그래서 제가 저도 돈 없어서 죽겠다고 했어요.

나도 돈을 벌어주지 못해서 눈치 밥 먹고 산다고 했어요.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을 벌어주지 못하는 남편이나 아빠는 계륵이에요.

두자니 골치 덩어리이고 버리자니 아쉽고 그래요.

지금 제 신세가 그래요.

 

이걸 수욕이라고 생각하면 못 살아요,.

돈 못 벌어주는 사람이 받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눈치 밥이라도 얻어먹고 산다는 것을 감사하여야지요.

 

돈 못 벌어주는 죄로 쥐 죽은 듯이 살아야 해요.

하지만 어디 자존심이 그렇게 허락을 하나요.

꼴에 남편이라고 얻어먹고 사는 주제에 자존심을 살아 있어서 늘 티격태격해요.

이게 인간입니다.

 

직장 생활하는 남편들도 마찬가지에요.

지금은 직장 생활이 전쟁이에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백수 같은 남편을 먹여 살린다고 아내는 세상에서 온갖 수욕을 당하면서 돈을 벌어 오잖아요.

돈을 어디서 그냥 주어 오지 않잖아요.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자존심도 다 버리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면서 일하잖아요.

그러면 자기 대신 돈 벌어 오는 아내에게 바가지 정도는 긁혀 주어야지요.

그것도 안한다면 강도이지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불뚝 성질을 참지 못해서 늘 마음 아프게 하고선 돌아서고 나면 미안하다고 하고!

늘 그렇게 살아요.

 

목사라고 해서 이슬 먹고 살지 않아요.

밥을 먹어요.

밥을 먹자면 돈이 있어야 해요.

그럼 목사가 돈을 벌자면 교인들이 있어야 하는데!

 

교인들을 붙잡아 두려면 교인들을 기쁘게 해 줘야 해요.

교인들이 뭘 기뻐하겠어요.

잘한다! 잘한다 해 줘야지요.

복 받고 잘 산다고 해 줘야지요.

 

말로는 천국을 말하지만 천국 생각하고 사는 교인들이 없어요.

그런 교인들은 박물관에나 있지!

전부가 몸 따로 마음 따로에요.

 

목사는 이걸 죄라고 말해주라고 세움을 입었어요.

그러니 복음을 전하려면 돈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해요.

돈을 못 벌어다 주니 천덕꾸러기이지요.

여기에 만약 자존심을 세우면 다른 신이 튀어 나와요.

복음 빙자해서 돈 달라고 해요.

 

하나님 앞에 따지지요.

하나님 정말 이럴 겁니까?

교인들 좀 안 보내 줄 겁니까?

그나마 남아 있는 교인들이라도 다른데 가면 안 되니 단속을 해야지요.

비위를 맞추어주어야지요.

이게 다른 신을 찾는 수순이에요.

 

이러면 마귀가 배시시 웃어요.

그래 너도 별수 없지!

진작 그렇게 나와야지!

그러니 우리는 늘 복음! 복음 하면서도 다른 신을 찾고 섬기고 있는 겁니다.

 

신앙을 장담하지 마세요.

우린 늘 물가에 세워 놓은 어리아이들이에요.

언제 마귀와 악수 할지 몰라요.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가 먼저 마귀에게 타협을 하자고 손 내밀지 몰라요.

 

그렇다고 기죽지 마세요.

이렇기 때문이 우리 행위로 구원하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와 악수 했다고 자살하진 마세요.

우린 늘 그럴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런 죄인이 오늘도 주님의 용서하심을 산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신앙생활은 우리 힘으로 단 한 시간도 할 수가 없어요.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는 겁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선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 때문에 죽을 고비 속에서도 항상 피할 길을 열어 두시고 몰아치시는 겁니다.

적당하게 밀고 당기고 하시는 겁니다.

 

죽겠다! 죽겠다 하여도 다 살만 해요.

마음 하나만 낮추면 감사가 되도록 간섭하신단 말입니다.

사람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높은 데 마음을 두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변에 자기보다 못한 어려운 사람을 보면 지금 현실도 복에 겨운 거라는 것이 보여요.

 

그런데 인간이 어디 그런가요?

항상 높은데 마음을 품고 살잖아요.

그러니 늘 불행하다고 느끼는 겁니다.

아니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보고 사는데 어찌 불평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면 내가 보여요.

내가 보이면 남과 비교하게 되고!

남과 비교하면 결핍을 느끼고!

결핍을 느끼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상에 주소를 두고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이길 수가 없어요.

세상 사람들은 세상 살아가는 데에는 도사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가 따라 잡지 못해요.

 

돈을 벌자만 돈과 가까이 지내야 얻을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도는 예수 믿는다고 세상 사람들만큼 돈과 가까이 하지 못해요.

그러니 그들을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이길 수 없는 그들과 비교하면 실망하고 급기야는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요.

세상이 눈에 들어오면 이길 재간이 없어요.

마음속에 세상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무슨 수로 세상을 이기겠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불평이 사라져요.

아! 내가 또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깨달아져요.

또 십자가 원수 짓을 했구나! 라고 회개하게 되요.

 

피 뚝뚝 흘리는 예수님 앞에서 돈 달라는 말이 나오겠어요.

날 행복하게 해 달라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아니겠지요.

 

그래서 성도에겐 십자가가 복인 겁니다.

십자가는 죄사함을 주고 영생을 주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세상 근심 걱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능력이기도 해요.

세상의 근심걱정을 벗어나게 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이기게 하기 때문에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작아 보여요.

십자가 안에서 보면 육신은 허구라는 것이 보여요.

세상은 철거가 될 허상이라는 것이 보여요.

그러니 세상을 이길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떠나면 세상이 커 보입니다.

 

이 사실을 마귀가 알기에 마귀는 어찌하든지 성도들 눈에서 십자가를 가리려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눈에 안 보이면 세상만 보여요.

그러면 허상에 불과한 세상 것을 붙잡고자 분주해져요.

세상 것이 보이면 육신의 정욕들이 마음을 지배하여 지옥으로 만들어요.

 

지금 유대인들이 육적인 메시야를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 세상에서 이기게 해 주는 메시야를 바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만약 하늘나라에서 세상을 보았으면 유대나라의 회복을 꿈꾸지 않았을 겁니다.

하늘나라에서 보면 유대나라는 허구에요.

모두 안개 같고 풀 같이 사라질 것들이에요.

 

그랬다면 로마 식민지로 있다는 것을 애통해 하지도 않고 도리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더 간절하게 바랐을 겁니다.

자신들을 세상에서 빼내 줄 메시야를 기다렸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았던 하늘에 있는 본향을 몰랐어요.

 

예수님은 지금 그 곳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 눈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있다고 합니다.

내가 잠시 후면 거기로 가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니 예수님과 유대인의 대화를 이해 할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가시겠다고 하는 곳이 어디인줄 알아요.

그래서 우리도 그 곳을 사모하고 사는 겁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교회에 와서 하늘나라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교회에 왔으면 하늘을 보아야지요.

교회에서 세상을 보면 안 돼요.

교회는 세상과 다른 동네에요.

지평이 달라요.

 

세상이 1층이라면 교회는 2층이에요.

1층은 세상이고 2층은 하늘이에요.

1층의 예수와, 2층의 예수는 달라요.

1층의 예수는 적 그리스도라고 하고 2층의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해요.

 

1층의 예수는 먹고 죽을 것을 주지만, 2층의 예수는 먹고 영생할 것을 주어요.

1층의 예수는 지옥으로 끌고 가지만, 2층의 예수는 천국으로 끌고 가요.

1층 사람들은 2층 예수를 몰라요.

1층 사람들은 2층의 말을 몰라요.

못 알아들어요.

 

마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유대인들처럼 예수의 말을 못 알아먹어요.

십자가 밖은 1층이고, 십자가 안은 2층이에요.

십자가 밖에선 아무리 성공하고 잘살아도 지옥이에요.

그러나 십자가 안에선 망하고 거지같이 살아도 천국이에요.

 

1층은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는 곳이에요.

누가 대신 책임져 주는 것이 없어요.

그러나 2층은 내가 책임질 것이 없어요.

모두가 예수님이 책임져 주세요.

 

십자가 안을 안식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파도가 치지 않아요.

세상 파도가 넘실거리지 않아요.

 

이를 요한 계시록에선 유리바다라고 해요.

유리바다란 파도가 없다는 말입니다.

명경같이 잔잔하고 고요해요.

 

그러니 성도가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는 영과 육을 아울러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에요.

십자가는 죄에서 구원을 주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인 겁니다.

 

제가 왜? 그토록 십자가만을 증거하는지를 알겠습니까?

십자가 안에 들어가면 성화하는 것도 없어요.

개혁하는 것도 없어요.

 

내가 없으니 성화 할 것이 없고,

교회가 없으니 개혁할 것이 없지요.

성화니 개혁이니 하는 것은 전부 1층에 속한 것들이에요.

 

2층엔 교회가 없어요.

2층은 신랑과 산부가 사는 신혼집이에요.

2층엔 교인도 없어요.

 

2층엔 신랑 신부만 있어요.

신혼 생활하는 곳이에요.

십자가 안은 예수라는 신랑과 안식하는 곳이지 내가 갈고 닦고 할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을 신랑이 다 장만해 놓았어요.

 

지난번 아는 사람 결혼식을 참석했는데 신랑 신부가 혼수 장만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신랑이 다 장만 한다는 겁니다.

신부는 몸만 가면 되요.

물론 예단이니 혼수는 조금 준비하지만 대 다수를 신랑이 장만한다고 해요.

 

딸을 시집보낸다고 하고, 며느리를 맞이한다고 하지요.

신앙적으로 보면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보여요.

성도는 신랑 집으로 가는 거예요.

신랑인 예수님은 신부인 성도를 맞이하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엔 신랑이신 예수님이 다 장만해 놓고 신부를 데리고 가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지요.

내가 가서 너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온다고 하잖아요.

이걸 세상 말로 하면 집 장만하러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는 것을 말해요.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을 처소를 마련하러 간다고 하나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야지 신부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이에요.



신부의 죄가 사해지지 않으면 2층으로 갈 수가 없어요.

2층은 죄와 상관이 없는 자만이 갈 수가 있는 곳이에요.

 

1층은 죄의 세상이지만,

2층은 죄가 없는 곳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2층에서 오셔서 1층에 있는 자기 색시들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대신 다 치르시고 자기 색시들을 죄 없는 자로 만들어서 2층으로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간 사람은 더 이상 성화 할 것이 없어요.

이미 신랑의 피로서 거룩해졌어요.

 

이 사실을 알리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그러니 성령이 오셔서 자기 호적이 2층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더 이상 성화하여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신랑이 십자가에서 입혀준 의에 옷을 입고 살아가요.

 

아직도 거룩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에게 시집간 사람이 아니에요.

호적이 1층에 있어요.

땅에 족보에 속한 사람이에요.

그러니 1층 사람들처럼 땅 강아지 같이 흙만 퍼먹고 사는 겁니다.

 

제가 성화주의를 왜? 그토록 거부하는지 알겠습니까?

성화주의는 십자가에서 눈을 떼게 하고 자기를 바라보라고 하기 때문이에요.

2층 사람을 자꾸만 1층으로 끌어 내리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물론 2층 호적 올라간 사람은 내려오지 않아요.

 

성화주의는 족보가 1층 족보이면서 2층에서 놀려고 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을 1층으로 끌어 내리는 일을 하는 차원에선 감사할 일이에요.

2층에 올라가 있는 자기 친구들을 1층으로 내려오라고 하니 감사한 일이지요.

 

성화주의가 땅 사람이 하늘 사람으로 위장한 사람들을 끄집어내는 차원에서 본다면 감사해요.

하늘 사람은 성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눈길을 주지 않지만, 땅 사람은 눈길을 주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는 나를 바라보도록 하지만, 십자가는 나로부터 눈을 떼게 해요.

성화는 세상이 보이게 하지만, 십자가는 세상으로부터 눈을 멀게 만들어요.

내가 보이고 세상이 보이고서야 이길 재간이 없어요.

 

육은 흙으로 낫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가 없어요.

육은 흙에 갈증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육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영이 되는 것 밖에 없어요.

육을 영으로 만드는 것이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1층 사람을 2층으로 만들어요.

1층 사람을 죽이고 2층 사람으로 창조하는 것이 십자가에요.

그러니 십자가를 거치게 되면 하나같이 1층 사람은 죽고 2층 사람으로 거듭나는 겁니다.

2층 사람으로 창조가 되어서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아야 시시하게 보여요.

세상 것이 시시하게 보여야지 세상 것 때문에 울고 불고 하지 않는 겁니다.

 

말씀을 늘 가까이 하라는 것은 말씀이 2층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2층 변화산으로 끌고 올려줘요.

변화산이 2층이거든요.

거긴 오직 예수 밖에 안 보여요.

 

여러분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난다고 하지요.

이는 믿음은 말씀과 함께 일한다는 말이에요.

믿음과 말씀은 하나에요.

샴쌍둥이 같이 붙어 있어요.

 

그러니 믿음을 받는 사람은 말씀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말씀 밖으로 나가 놀게 되는 겁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죽은 거예요.

가짜 믿음이기 때문에 말씀 듣는 것이 싫은 겁니다.

 

성경이 성도의 거듭남을 썩지 아니할 말씀을 낫다고 하지요.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을 씨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씨가 썩지 아니할 씨라고 합니다.

이는 살아 있다는 말이에요.

 

말씀으로 난 사람은 본질이 말씀이기 때문에 말씀을 찾게 되어 있어요.

말씀 속에서 생명을 공급 받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에게 세상 것을 주지 않고 말씀을 주는 겁니다.

 

이걸 에베소서에서는 하늘에 신령한 복이라고 했어요.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하늘에 신령한 복을 주셨어요.

신령한 복을 탁 하고 깨 보니 거기서 하나님 약속이 튀어 나와요.

무슨 약속인고 보니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약속이에요.

 

여기서 “예수 안에서” 가 중요해요.

왜? 예수 안이 중요한가 하면! 예수 안이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면 예수 밖은 자연히 비 거룩한 곳이 되고 말지요.

 

예수 밖에서 거룩을 만들 수가 없어요.

거룩은 예수 안에 들어가면 그냥 주어집니다.

그러니 거룩이란? 우리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역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이란? 영역을 말해요.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십자가 안이냐! 십자가 밖이냐!

 

성도는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창조 되는 거예요.

창조는 점점 더 온전해져가는 것이 없어요.

단번에 거룩한 자로 창조가 되어지는 겁니다.

 

1층이 점점 노력해서 2층이 되는 것이 아니고 2층은 다른 세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은 내가 가는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동네이기 때문에 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거기는 죽어야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품에 안겨서 가는 곳이에요.

누구를 품에 안느냐 는 전적으로 예수님에게 달렸어요.

그런데 에베소서에서 하늘에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 예수의 품에 안겨서 간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고 보니 바로 우리가 예수의 품에 안겨서 2층으로 이사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땅에 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젠 시집살이를 배워야지요.

은혜가 풍성하신 시아버지에게 많은 은혜를 받아서 세상을 넉넉하게 이겨야지요.

 

신앙생활이란? 시집살이 하는 것과 같아요.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하여야 해요.

법에 사람이 은혜의 사람으로 적응해야 해요.

성도가 살아갈 시집은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를 배워야 해요.

 

시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가 풍성하신 분인가를 배워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해요.

그게 전도이고 증거입니다.

그러니 부디 십자가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그 곳을 우리는 갈 수 있도록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계신 2층에서 시집살이를 잘 배워 나가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