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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8강. 인간이 감당 할 수 없는 예수님 (요 7:25-30)

by coroa 2021. 5. 25.

 

[48강. 인간이 감당 할 수 없는 예수님 (요 7:25-30)]

-.정낙원 목사

 

오늘본문도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충돌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는 꼭 선문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동문서답식입니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자기들이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말을 하는데 유대인들은 땅에 말로 해석을 하니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모르는 자들이 아는 자를 밀어내요.

이 세상은 피조물이 창조주를 죽이는 곳이에요.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실상은 몰라요.

그들은 다른 하나님을 알고 있었어요.

유대인들은 힘 있는 하나님을 알고 있어요.

마귀를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마귀라고 알려 준 겁니다.

너희는 어둠에 속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누구입니까?

죄인 아닙니까?

순순히 응하면 죄인답지가 않지요.

죄인은 하나님께 반항하여야 죄인다운 겁니다.

죄인은 한 고집하거든요.

그래서 예수 니가 뭔데! 하고 죽인 겁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어둠에 비취되 알지 못하더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지요.

이는 세상의 본질이 어둠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어둠이 자체적으로는 빛에 관하여 알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빛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도 어둠이라고 합니다.

어둠이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몰라본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를 알면 빛에 속한 자이고 예수를 모르면 어둠에 속한 자로 구분이 되지요.

유대인은 자신들에겐 율법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빛인 줄 알았어요.

자신들은 하나님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 증표가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을 마귀 자식이라고 조롱하고 경멸하였어요.

그런데 그 조롱을 지금 예수님에게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것은 예수님은 율법으로 빛과 어둠을 가르지 않고 예수님 자신으로 갈라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은 졸지에 빛에서 어둠으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이방인과 동등한 부류로 전락하고 말았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죽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마귀에게 속한 것임이 더욱 더 분명해 졌어요.

 

예수님께서 그러시지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죄인이 아니라고 하니 소경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알았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텐데!

너희는 율법을 가지고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까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동일하게 소경이란 말입니다.

 

이방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죄를 고발하는 율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가지고도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유대인은 이방인과 동류가 되는 것입니다.

 

당달봉사란 말이 있지요.

눈을 훤히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잖아요.

유대인이 지금 당달봉사에요.

율법을 들고도 그게 뭐하는 것인 줄 몰라요.

 

이건 유대인만 그런 게 아니고 온 세상이 그래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이 그러해요.

아무리 말해 줘도 몰라요.

예수님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무슨 말인지를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백성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건 지금도 동일해요.

교인들이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십자가 의미를 몰라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 줄 몰라요.

영적인 일은 시대를 초월해서 항상 동일해요.

 

이는 세상이 한 지평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지평이란? 구조가 같은 층이란 말입니다.

같은 운명 같은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태양과 지구와 같아요.

태양과 지구는 구조도 다르고 지평 즉 궤도도 달라요.

태양에서 지구를 보면 한 덩어리에요.

지구 안에선 너와 나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지구 밖에서 보면 구분이 안 돼요.

한 운명 안에 있는 겁니다.

지구가 날아가면 모두가 날아가요.

 

하늘나라와 세상은 지평이 달라요.

태양과 지구처럼 달라요.

태양은 태양에서 통용하는 원리가 있고 지구는 지구에서 통용되는 원리가 있어요.

이 둘은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예수님과 유대인은 다른 동네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세계와 유대인의 세계가 이처럼 다른 구조로 짜여져 있는 다른 지평입니다.

그러니 비록 예수님이 땅에 말로 이야기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하늘 이야기이지 땅에 이야기가 아니에요.

 

하지만 인간들은 예수님의 말을 땅 이야기로 해석을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요.

자기들 생각으로 해석해서 틀렸다고 죽여 버린 겁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누구신지 가르치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천국이나 영생이나 구원을 가르치면 알 것이라고 믿잖아요.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은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르쳐서 구원시키지 않고 거듭나게 해서 구원하는 겁니다.

거듭나는 것을 위로부터 난다고 합니다.

위로부터 난다는 말은 하늘에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거듭 난다는 것은 새로 창조한다는 말입니다.

전혀 다른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비록 육신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자기들과 동일하다고 보지만 전혀 다른 동네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창세전에 이미 구원 받기로 작정 된 자들을 찾아서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려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만물을 창조하신 장본인인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겁니다.

만물은 예수님이 창조했지요.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을 광의적으로 말하면 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만물을 의인화 할 땐 인간으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를 창조한 예수님을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지요.

 

그래서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소경이란 말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당연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요?

하나님 아들이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 눈엔 예수님은 감추어진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은 사람들에겐 당달봉사와 같이 눈을 뻔히 뜨고서도 몰라보는 겁니다.

 

예수님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부대끼고 살아도 알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동생들이 이를 잘 증거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영과 육은 하나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영이 육이 되고 육이 영이 되는 것은 없어요.

영은 영으로 창조가 되고 육은 육으로 창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육을 영으로 만들고자 온 것이 아닙니다.

육에 속한 자를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나는 방법으로 영으로 창조하는 겁니다.

육을 어떻게 좀 교육을 해서 영을 만들면 되겠는데 그게 안 되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설득하지 않고 너희와 나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안다고 하지만 실제론 모른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마음만 먹으면 예수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건 그들의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함부로 다루실 분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만 다룰 수가 있는 분이에요.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마음대로 예수님을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 이러라”

 

예수님을 잡고자 하나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은 아직 예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란 겁니다.

속된 말로 인간들 마음먹은 대로 예수님을 요리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죽일 궁리를 했어요.

그런데 그들 뜻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이라고 해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그러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여야 죽는다고 하지요.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성경에 나와 있으니 생각 없이 해요.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합니다.

 

물론 말로는 믿는다고 해요.

그러나 그건 관념이지 실제 믿음이 아니에요.

참새 한 마리도 죽고 사는 것을 하나님이 결정하는데 우리는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엔 그리 생각하지 않잖아요.

 

예수님께서 참새 이야기를 왜? 하셨습니까?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누구 앞에 서든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잖아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말씀을 한번 봅시다.

 

마 10:28-33=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10장은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로 양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제자들과 만나는 사람들이 이리(마귀) 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가서 천국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핍박당하고 잡힐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너희 목숨을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애들아!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죽으라고 해야 죽는단다!

너희들은 참새 보다 더 귀한 존재들이 아니냐!

그러니 세상에 가서 내 말을 전하다가 누가 죽인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들 목숨은 하나님이 쥐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말을 하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네가 이단 소리를 듣고 핍박을 당해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 목숨을 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혹시 죽더라도 하나님께서 죽으라고 해서 죽는 것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죽는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께서 이제 그만 세상에서 졸업하라고 죽이는 것이니 절대로 슬퍼하거나 낙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진실로 믿어진다면 어떤 자세로 살겠습니까?

세상을 담대하게 살겠지요.

타협하지도 않고 오로지 복음만 전하겠지요.

그러나 실제론 그렇게 못합니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곧 우리에게 한 말 이예요.

지금 성경을 통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야! 너희는 참새보다 훨씬 귀한 존재들이다!

내가 너희들 목숨을 쥐고 있으니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살다가 오너라!

그 말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 말을 하면서도 믿지 못하고 살잖아요.

조금만 어려워도 죽니 사니 합니다.

그러니 우리 믿음은 늘 허구인 겁니다.

믿음이 허구이다 보니 항상 하나님 일은 뒷전으로 밀려 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입술에만 있지 마음엔 없잖아요.

그러니 교회보다 세상과 가깝게 지내는 것 아닙니까?

 

속된 말로 주일날 교회 와야 하는데 무슨 핑계거리만 생기면 안 나오잖아요.

교회 오려는 핑계거리를 찾지 않고 안 오려는 핑계거리를 찾잖아요.

말씀을 듣기 싫어하잖아요.

그러니 교회 오는 날보다 안 오는 날이 많은 겁니다.

설사 교회에 왔다고 해도 온통 세상에서 성공할 궁리만 찾잖아요.

 

죽은 믿음이니 교회 오는 것조차도 감당하지 못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이럴 순 없거든요.

믿음은 하늘에 것을 사모하게 하지 땅에 것을 사모하지 않게 하거든요.

하늘로 온 믿음이 아니니 땅 강아지 같이 땅에 것에 코를 박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상태를 방탕과 방종에 방임한다고 했어요.

방임이 뭔 줄 아세요.

그냥 육신에게 내 맡기는 거예요.

마치 죽은 물고기가 물결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아요.

 

이 시대 대다수 교인들이 다 죽은 물고기와 같아요.

그 증거가 우리들 신앙생활 모습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그러니 피곤하면 안 오고,

잠 잔다고 안 오고,

볼 일 있다고 안 오고,

결혼식 간다고 안 오고,

놀러 간다고 안 오고,

회사 간다고 안 오고,

이래서 안 오고, 저래서 안 오고,

그러다가 심심하면 한번 오잖아요.

꼭 사월 초 팔일 날 절간에 가는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성경은 분명히 믿음은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데!

성경은 틀릴 리가 없으니 우리가 가짜인 거지요.

이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쁘지요.

  

제가 깨달은 것인데 말이죠.

과거 제가 제 인생을 책임지고자 살 때는 항상 불안했어요.

그땐 무슨 일을 해도 살아야겠다는 쪽으로 움직였으니까요.

교회도 부흥시켜야 하고 세상적으로도 인정받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스스로를 갈고 닦았어요.

한마디로 목사 티를 내고자 했어요.

말과 행동 모두 누가 봐도!

아! 저 양반은 목사 맞아! 라는 말을 듣고자 이미지 관리를 했어요.

 

그래서 남 앞에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온화하게 웃었습니다.

속으로 욕이 나와도 참고 삭혔어요.

속으론 부글부글 끓어도 목사가 그러면 되나!

스스로 최면을 걸고 참고 또 참았어요.

 

누구 말대로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하도록 사랑과 희락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절제와 오래 참았어요.

누르고 또 누른 겁니다.

마치 스프링을 누르듯이 나를 눌렀어요.

신앙의 이름으로 눌렀어요.

그 땐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다고 믿었어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는 식으로 지키고 또 지키면 못 지킬 것이 없다는 식으로 수행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말씀대로 살면 마음에 쉼이 있고 평강이 있어야 하잖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없어요.

도리어 천근만근 같은 중압감만 쌓여가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진짜 은혜가 덮쳐 오니 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 보여지는 거예요.

야! 내가 지금까지 예수는 안 믿고 날 믿었구나! 라는 것이 깨달아진 겁니다.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수양한 겁니다.

성경이 나를 갈고 닦고 수양하는 도덕책이 되고 만 겁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날 용서 했다는 것은 없고 온통 내가 지켜야 할 것으로만 보였으니 구원이야기가 아니고 내 행실을 바르게 하고 개과천선시키는 도덕책이었지요.

하나님 말씀이 날 구원하신 이야기가 되면 감사가 되고 평안이 있는데 지켜야 할 것으로 보이니 짐스러워지는 겁니다.

 

내가 가짜라는 것이 들통 나고 나니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요.

마치 여름철 오리털 파카 입고 땀 뻘뻘 흘리고 있다가 벗어던진 것과 같았어요.

내가 나쁜 놈이라고 커밍아웃을 하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라요.

지금까지 남에 이목을 살피면서 신앙 연기를 한 겁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외식 신앙을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했잖아요.

속엔 시체가 썩고 더러운 냄새가 풀풀 나는데도 겉엔 잔디를 입혀 놓아 단장을 해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책망하셨잖아요.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이 저주를 끌어 붓고 있는 바리새인이 바로 저였어요.

바리새인이 바울인척 하고 살았으니 얼마나 가증스러웠어요.

 

제가 그 때 깨달은 것이 신앙의 연기를 하면 본인이 피해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행하는 순간부터 본인은 그 거짓 때문에 정신적으로 육적으로나 엄청 피해를 당해요.

정신적으로 남을 속여야 하니 힘들고, 육체적으로는 열심과 충성으로 믿음 있음을 증명해야 하니까 피해인거지요.

속이지 않으면 기도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는데, 남에 눈을 속여야 하니 기도하기 싫어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겁니다.

 

물론 속이고자 한 것은 아니에요.

그때는 그게 신앙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내 스스로가 속은 것입니다.

복음을 알고 보니 내가 스스로 속았다는 것을 안 것뿐입니다.

 

산 기도 가 보세요.

밤에 산 기도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지 아세요.

겉으론 남에겐 안 무섭다고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아요.

두려움은 항상 있어요.

산 기도 가서 소리치는 것은 나 두렵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 두려움을 좇으려고 고래 고래 소리 지르는 겁니다.

 

물론 어떨 땐 두려움이 생기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러나 늘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산 기도 안가면 교회에서 철야라도 해야 해요.

강단에서 자더라도 자야해요.

그래야 안심이 됩니다.

 

흔히 카리스마 있는 목사라고 자랑하는 목사들이 다 이런 부류들입니다.

가짜들은 항상 자기 힘을 자랑해요.

365일 철야한다거나 사십일 금식한다거나 해요.

교인들이 쉽게 할 수 없는 것을 함으로서 자기 힘을 자랑하는 겁니다.

까불지 말라는 거예요.

 

거룩한 종교성으로 자기 몸을 학대해야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을 해요.

교인들은 자기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야 능력 있다고 생각하고 말을 들어요.

목사님 말에 불 순종했다가 혼 날까봐서 듣는 척 하는 겁니다.

이게 다 힘의 논리로 무장하여서 힘 대 힘이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법에 속하여서 그래요.

법은 힘에 중량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기 때문에 목사가 능력을 가져야 교인들이 순종해요.

 

법에 속한 자는 다 거짓이에요.

연기하는 겁니다.

거짓을 감추려고 하자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믿음이 없는데도 믿음 있는 척 하려니 거짓으로 살아야 하잖아요.

이게 엄청난 스트레스에요.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뭘 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다 이루신 것을 깨닫고 감격하며 감사하고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가 싸울 일이 없어요.

우린 예수님께서 싸워서 이긴 전리품들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이긴 것으로 사는 자에요.

예수님의 이김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전리품이 자기가 싸워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자기를 거룩하게 만들고 온전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은 바보짓이에요.

그냥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이 거룩하고 온전하다고 인정을 해줘요.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것이지 우리가 거룩해지고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에요.

 

이걸 흔히 칭의라고 하잖아요.

칭의란? 의롭다고 인정해 주는 겁니다.

즉 죄가 있어도 죄가 없다고 간과해 주는 거예요.

여기엔 반드시 보증인을 보고서 간과해 주어요.

당신이 죄인 맞지만 예수님의 피를 보고서 용서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의롭다고 인정해 준다는 것은 실제론 의롭지 않다는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해 주는 것입니다.

진짜로 의로우면 인정해 달라고 할 필요가 없어요.

구차하게 인정해 주십시오!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냥 의로움으로 나아가면 되요.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는 거잖아요.

나를 갈고 닦는 것이 아니잖아요.

누구를 믿는다고 할 때는 나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전제가 되어 있어요.

내가 안 되니 널 믿는다 라는 것이 성립이 되어요.

 

내가 할 수 있으면 누굴 믿고 자시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내 능력으로 하면 되니까요.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믿음 속에는 우리가 지키고 행하여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을 예수님이 나 대신 다 했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겁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할 것이 남은 것으로 만들어요.

너도 뭔가 해야 되지 않느냐 라고 속삭여요.

그래서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것을 훼손시키고자 합니다.

이걸 포도주에 물이 섞였다고 해요.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부패합니다.

 

예수님이 다 하신 것이 안 믿어지면 성경은 내가 지키고 갚아야 할 채무 문서가 됩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온통 해야 할 것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에 짐이 되는 겁니다.

이러면 예수 믿는다는 것이 고행이 되고 자기 학대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전 제가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깨달은 제 나름의 신앙을 판단 할 때 기준이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안다면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고마워져요.

신앙생활을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하면 믿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봐요.

구원이란?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거든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이 되 찾김 당하고 얼마나 주인에 대한 감사가 넘쳤겠어요.

찾김 받은 안도감에 얼마나 감격하겠어요.

쉼을 얻고 목자에 대한 고마움으로 살겠지요.

 

탕자가 아버지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하고 살았겠어요.

탕자가 비록 죽도록 일을 한다고 하여도 그게 어디 일이라고 하겠어요.

일이 아니라 용서 받음에 대한 감사의 행동이지요.

용서 받음을 안고 사는 사람은 일하면서 불평불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제 개인적 생각으로는 예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헌신치 않는 사람은 올바른 은혜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면 자학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죄인이다!

난 이런 악당이다! 라고 하면서 마치 죄인 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소리치고 있어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가 봐요.

마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신이시여 이래도 내 정성을 안 받아 주시렵니까? 라고 시위하는 것 같아요. 

진짜 자기가 악당이고 탕자이고 죄인인줄 아는 사람은 자기를 학대하지 않아요.

신앙을 그런 식으로 표출하지 않아요.



신앙생활이란? 난 죄인이다 남에게 소리치는 것이 아니고 용서 받음에 감사하며 사는 거예요. 

옥합을 깨트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해야 해요.

마리아는 자신이 용서 받았다는 것이 너무도 감격스럽고 감사하여서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붇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겁니다.

마리아는 누구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마음에서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우러나와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죄 용서 받음이 너무 너무 고마워서 자기 모든 것을 드려서 표현한 것뿐이에요.

난 더러운 년이었어요! 라고 하지 않았어요.

감추고자 함이 아니라 자기 추한 것을 떠벌리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이런 추한 인간을 용서해 주신 것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감사하기에 바빴어요.

 

용서받음이 감사로 우러나지 않으면 이상한 거예요.

용서받음이 감사로 나타나지 않고 그래 난 죄인이다! 라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치 강도를 용서 해주었더니 하는 말이 그래 난 강도였다! 어쩔래! 그러는 것과 같아요.

그건 용서 받은 강도가 할 짓이 아니에요.

 

용서 받았으면 용서 받음을 삶 속에서 감사함으로 토해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조용히 용서 받음에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용서 받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거예요.

난 그래 나쁜 놈이다! 라고 떠벌리라고 용서 해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가만있지 못하고 용서 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자랑하고 살라고 용서해 준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도대체 예수님의 피 뿌림 속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저 사람은 저런 환경 속에서도 저렇게 기뻐하며 감사하고 사는가! 라고 보여주어야 해요.

인위적으로 남에게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감사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단 말입니다.

 

흔히들 사도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것을 가지고 나도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라고 자랑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바울이 자학하는 의미에서 죄인 중에 괴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자가 용서 받았다는 것에 감사의 표현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런 나를 용서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이 아니냐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 말이에요.

그 용서받음이 너무도 커서 감사로 자기 몸을 복음을 위한 제물로 드린 겁니다.

 

그러니 진정한 용서 받음은 삶에 모든 부분 속에서 사골 곰국을 푹 고아서 뼈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빠져나와 국물을 시원케 해 주듯이 범사에 감사가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용서 해 주신 분의 은혜성이 감사로 푹 고아져 나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덮치면 형편과 상관없이 감사가 생겨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가 되는 겁니다.

물론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 그 순간은 격동하고 하지만 금새 하나님의 은혜가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괜히 격동 했구나 라는 마음을 갖게 하고 주님의 뜻으로 보고 이겨내게 해줘요.

 

완벽하게 산다는 말이 아니고 감사 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가 우러나오지 않는 신앙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가 옥합을 깬 사건을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말하라고 하지요.

이는 돈 빼 내라는 말이 아니고 옳은 죄사함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인 겁니다.

 

이걸 이용해서 사기 치는 놈들이 많아서 문제이긴 하지만!

예수님의 뜻은 성도에게 열심과 충성심을 끄집어내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오면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런 현상이 안 나타나면 믿음을 재고 해 보아야 해요.

왜? 내겐 감사가 없는가?

무엇이 문제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생활이란? 난 죄인이다 를 떠벌리는 것이 아니에요.

난 이만큼 내 죄를 안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에요.

신앙은 성경 지식 쌓기가 아니에요.

누가 누가 더 많이 아느냐의 싸움이 아니에요.

누가 더 큰 은혜를 입었는가 경쟁하는 것도 아니에요.

 

받은 은혜가 사무치도록 고마워서 마음 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감사로 며칠 동안 사골 고운 국물처럼 구수한 맛이 우러나와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모진 핍박 가운데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던 겁니다.

싸울 땐 싸워도 상대방을 죽이고자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주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럽니다! 라는 용서가 나와야지!

주님 저 놈들 때려잡으세요! 가 나오면 안 돼요.

죄를 고발하되 심판은 주께 맡겨야 해요.

 

어떤 분들은 교회 안에서 마귀를 때려잡는다고 난리를 쳐요.

아니 그 마귀도 하나님이 필요해서 둔 것이란 것을 왜 모르세요.

마귀가 없으면 하나님 일이 안 돼요.

 

마귀는 반드시 있어야 해요.

그래야 죄가 드러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드러나게 되어요.

마귀를 다 쫓아내서 무공해 교회로 만들고자 하지 마세요.

그런 교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어요.

 

오순절 성령 강림의 놀라운 역사로 세워진 초대교회 안에도 아나니아 삽비라가 일어난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이에요.

교회 안에서 히브리 파다, 헬라 파다 분쟁이 생기게 한 것도 하나님이에요.

이런 분쟁을 통하여서 죄를 드러내고 계신 겁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 타락하였다고 숫제 교회 가기를 포기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는 옳은 것이 아닙니다.

혼자 있으면 죄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잘 몰라요.

교회 안에서 싫은 사람도 만나야 내 속에 미움이 있고 악함이 있다는 것이 나오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부대낌 속에서 자기 안에 죄를 토해 내면서 자기 악함을 알고 이런 악한 자를 값없이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싫은 사람이 있다고 교회 가기를 포기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복음으로 담고 있으려면 내 죄를 알아야 합니다.

내 죄를 깊이 알수록 예수 안에서 용서 받았다는 것이 커 보이게 되는 겁니다.

교회는 인간의 죄가 터져 나와서 인간이 왜? 죄인인가를 알게 하고,

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복음이 되는지를 성도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여야 하는 곳이에요.

 

흔히들 교회를 천사들만 있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마귀가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발생해요.

그러니 교회 안에서 마귀가 열심히 일하도록 내버려두세요.

그건 우리가 싸울 일이 아니고 주께 맡기세요.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에요.

 

칼빈처럼 자기 교리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교회에서 좇아내고 죽이면 안 돼요.

한국교회는 칼빈주의라서 그런지 몰라도 칼빈처럼 전부 심판권을 행사하고 있어요.

칼빈이 행한 죄악사를 보면 이 사람은 신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자기 반대편은 처절하게 응징을 했거든요.


진정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아는 자라면 이런 행동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칼빈은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어요.

오죽 했으면 칼빈을 살인마라고 했겠어요.

 

블로그에 올려진 기독교 죄악사를 보세요.

칼빈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칼빈의 좋은 면도 많아요.

칼빈도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이지만 너무 심했어요.

 

칼빈의 오류가 무공해 청정 교회를 만들고자 한 거예요.

교회 안에서 마귀를 다 내어 쫓고자 한 겁니다.

이게 하나의 사상이 되어서 칼빈주의가 생겨난 겁니다.

아주 나쁜 사상이에요.



한국교회는 칼빈주의가 무슨 진리가 되는 줄 알아요.

칼빈을 공격하면 무슨 예수님의 적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이 시대 한국교회의 분쟁을 보면 칼빈이 행사하던 것과 너무도 닮았어요.

 

죄와 싸우되 의분에 넘쳐서 내가 마귀새끼를 때려잡겠다고 해서는 안 돼요.

마귀는 예수님이 때려잡도록 두세요.

하나님이 진짜와 가짜를 드러내려고 마귀를 넣어 두었는데 쫓아내면 어찌합니까?

좋은 교회를 만들고자 하지 마세요.

 

좋은 교회란? 죄인들끼리 싸워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음이 흘러나오는 곳이에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에요.

죄인이 모인 곳인데 어찌 문제가 없을 수 있겠어요.

그건 사기에요.

서로 잘났다고 싸우면서 죄가 터져 나오고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그 죽으심 때문에 너나 나나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이 흘러나오면 좋은 교회인 겁니다.

 

교회란? 성자를 양성하는 천사 양성소가 아니에요.

죄인들의 모임이에요.

교인들마다 예수님의 피가 흥건히 발라져 있어야 해요.

너도 예수의 피로 용서 받고 나도 예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이 있어야 해요.

그래서 감사가 나오고 예수님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교인들에게선 왜? 예수님으로부터 용서 받음이 유출되지 않을까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이에요.

교회가 죄를 감추고 전부 의로운 자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잘남은 있는데 죄용서 받음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고 만 겁니다.

너무 잘나서 자기 자랑 할 것은 많은데 용서 받은 것이 없어요.

그 속에 용서 받음이 없기 때문에 나올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 받음이 지식이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감격스러운 것이 안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참소치 말라고 한 것은 그 여인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에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의 죄성은 우리 안에도 있어요.

지금은 숨어 있지만 우리도 그런 상황이 되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간음 중에 잡힌 여자나 우리나 똑 같아요.

그 여인을 주장하는 죄가 우리도 주장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정죄하자 말라고 한 겁니다.

우린 누구를 정죄할 자격이 없어요.

그가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범죄하거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해요.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의 모습이 내 모습으로 보일 때 비로서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저 사람과 달라 라는 식으로 타자로 두고 심판을 행사하면 지금 내가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내가 나중에 심판을 당해요.

 

우린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정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용인하라는 말이 아니고 죄인을 단죄하고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가를 통해서 이런 불가능한 용서를 하나님께서 해 주셨다는 것에 놀라고 감사하여야 하는 겁니다.

허물진 사람을 곁에 두고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듬고 가는 아픔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않는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이런 마음을 알기 위해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라는 겁니다.

 

제발 나 죄인입니다 를 떠벌리지 말고 죄 용서 받은 자로서 사세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감사하게 먹는 개처럼 사세요.

제발 잘난 척하지 말고!

여러분이 난 죄인입니다!

소리치지 않아도 여러분이 고약한 죄인인 줄 다 알아요.

그러니 떠벌리지 말고 입 닫고 마리아처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세요.

용서 받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교회를 돌아보라는 말입니다.

 

그래 난 죄인이다 소리치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이런 죄인이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하고 심판은 하나님 몫으로 남겨두고 용서 받은 자로서 남도 용서하고 사세요.

하나님께 용서 받은 자는 용서를 토해내고, 용서 받지 못한 자는 법을 토해내요.

용서는 살리는 것이지만 법은 정죄하고 심판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성도는 은혜에 속한 자들입니다.

용서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모든 삶 속에서 감사로 토해내세요.

때로는 예수의 피를 가리는 것에 대한 의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한없는 고마움에 눈물 흘리며 예수님의 발을 씻는 마리아가 되어서 연약한 형제를 돌아 볼 수가 있어야 해요.

 

삶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만 하면 그 어떤 어려움도 배부른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가 흘러나오게 되어져요.

살고자 하지 말고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서 사세요.

주여 종을 불쌍히 여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그 어떤 재물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감사하는 것을 찬미의 제사라고 하는 겁니다.

 

다시 본문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본문을 보면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일까 하는 사람들이 예수가 성전에서 버젓이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데도 잡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지요.

분위기가 이는 마치 뒤에서는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도 막상 앞에 맞닥뜨리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한다면 지금 잡아 죽여야 합니다.

핑계도 얼마나 좋습니까?

말씀을 가르칠 수도 없는 무자격자가 성경을 강론하고 있으니!

그것도 조상대대로 내려온 신앙을 틀렸다고 부정하고 있으니 얼마든지 백성들에게 죽여도 합당하다는 핑계거리가 확실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행하는 일련의 일들은 신성모독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중에선 예수를 잡아 죄를 묻는다 하여도 억울해 하거나 원망할 사람이 없어요.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보아선 예수님의 행동이 너무도 과격한 것이었으니까요.

엄연히 성전에서 수종드는 사람들이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예수님은 월권을 하였어요.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이와 같아요.

예를 들어서 어떤 큰 교회 주일 날 대 예배 시간에 당회장 목사가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가 다른 교회에 다니는 평신도가 올라와서 당회장 목사를 제쳐놓고 묻지도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설교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러면서 당회장 목사를 이단이라고 한다면 그걸 보고 가만 둘 사람이 없을 겁니다.

만약 그 사람을 강단에서 끄집어내고 교회에서 쫓아낸다고 하여도 누구 하나 잘못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없어요.

 

지금 초막절인 예루살렘 성전 분위기가 그래요.

온 세계에서 유대인의 남자들이 올라와 절기를 지킨다고 발 디딜 틈이 없이 복잡해요.

성전에 종사하는 자들에겐 대목이에요.

마치 부처님 오신 날 절간과 같아요.

 

대 제사장이나 일반 제사장이나 성전에 종사하는 자들에겐 자기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유대교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아 잡아 죽이고자 하는 원수 같은 자가 성전에서 버젓이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이건 아무리 보아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그 누구도 예수를 제지하거나 말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겁니다.

아니 이 사람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토록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 아니냐!

그런데 왜? 지도자들이 예수가 설교를 하는데도 막지 않고 방치 해 두느냐 라며 수군거려요.

 

군중들이 급기야는 성전 종사자들 즉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보니 제사장들도 예수가 메시야 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이라고 술렁거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전 종사자들에게 저기 말씀을 강론하는 예수님이 진짜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그래서 설교하라고 그냥 두시는 겁니까? 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상식적으로라면 교인들이 이런 말을 하면! 손 사래질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하느냐? 라고 하면서 강단에서 끌어 내리고 성전에서 쫓아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무도 그런 일을 하고자 하지 않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단 말입니다.

이상하지요. 

왜? 예수님을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합니까?

이는 예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붙잡고 아무도 손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강단에서 끌어 낼 수 없도록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권세에 압도당하게 하신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앞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성도가 죽고 사는 문제는 모두가 하나님이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때를 정하셔서 일을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을 위한 도구들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위하여서 시용되어 질 때는 죽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나 사명을 다 감당하면 죽게 하세요.

 

드라마에 출연하는 탤런트의 수명은 드라마를 찍는 감독이 쥐고 있어요.

1회 출연할 것인지, 10회 출연할 것인지, 마지막 회까지 갈 것인지 감독이 결정해요.

물론 작가가 글을 쓰지만,,,

 

이처럼 하나님 앞에선 예수님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투입된 탤런트인 겁니다.

예수님이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결정해요.

그런데 초막절인 지금은 예수님이 죽을 때가 아니에요.

 

지금은 모든 눈과 귀가 예수님에게로 집중이 되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때에요.

예수님에 의해서 죄가 까 발라져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태클을 걸라고 보냈으니 다 넘어지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신앙이 가짜라는 것이 백일하에 다 드러나야 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나는 하나님을 아는데 너희는 모르지!

나를 보내신 분이 참 하나님인데 너희들은 그 분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나는 하나님께로 왔는데 너희는 마귀로부터 왔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선 의도적으로 유대인들과 전쟁 구도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이 마귀에게 속하였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배후에 있는 마귀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원수임이 드러나야 세상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곳이란 것이 밝혀지지요.

그래야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는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밝혀져야 시편 136편의 찬양이 이해가 되어져요.

 

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4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5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 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1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 홍해를 가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4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5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6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7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8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9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0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1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2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3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4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5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26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모두가 선하시고 인자한 일이라고 감사하라고 하지요.

우리 생각엔 선하시고 인자한 일이라고 하면 오냐 오냐 해주고 우리 비위를 맞추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시편기자가 바라본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원수를 죽이는 거라고 합니다.

 

보세요.

10절부터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자들을 응징하는 것을 인자하심이라고 감사하라고 하잖아요.

애굽에 장자를 죽이시고,

애굽에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시고,

가나안 원주민을 쓸어내고,

남에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잖아요.

 

지금 중동지역에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어서 그래요.

전쟁을 붙여 놓으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에요.

 

지금 예수님이 시편 136편처럼 하고 있는 겁니다.

유대인과 전쟁을 도모하고 있는 겁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의 배후에 숨어 있는 마귀를 불러내고자 함입니다.

마귀야! 나와서 한판 붙자는 겁니다.

넌 날 죽여야 한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마귀의 손에 죽임 당하여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요.

마귀가 죽인 예수의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뿌릴 수가 있어요.

그래야 자기 백성들이 죄가 사해져요.

그리고 마귀가 예수님을 죽여야 마귀를 유황불 속에 집어넣을 수가 있어요.

 

지금 예수님과 유대인은 하나님과 마귀 간에 대리전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편이고 유대인은 마귀편이에요.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분으로 나타나고 인간은 마귀에게 속한 자로 드러나야 해요.

 

이런 구도가 지금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에서 마귀를 몰아내려고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을 계속해서 핍박을 해줘야 해요.

핍박당한 성도는 하나님께 탄원해야 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예루살렘 성에 아벨의 피로부터 의인 사가랴의 피가 뿌려졌다고 하지요.

이는 아벨로부터 사가랴 까지 모두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말이에요.

알다시피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면 하나님 도성이에요.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곳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죽임을 당했어요.

 

이는 곧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죽임 당하는 것과 같아요.

인간은 하나님을 죽인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인 하나님이 가해자를 용서 해주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하심 안에서 살고 있는 구도로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용서 받은 자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모든 만물이 예수께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이 이를 증거하고 있어요.

 

빌 2:6-1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자 보세요.

하나님이 만든 드라마 내용이에요.

드라마 주제는 모든 만물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무릎을 꿇게 하시는가 하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는 방법입니다.

 

인간은 예수를 죽인 가해자가 되고 예수님은 피해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피해자인 예수님을 가해자인 인간들을 용서 해 주심으로서 용서 받은 인간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로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게 완성 된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그래서 천국엔 만물이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양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일을 지금은 교회에서 행하고 있어요.

마귀가 예수님께 속한 자들의 죄를 끄집어 내 줘야 해요.

그래서 자신이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긍휼을 구하게 되고 자신이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이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용서 받은 자의 삶이 나옵니다.

이러할 때 스데반 집사처럼 자기는 비록 죽임 당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 할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참 재미있지요.

 

성도는 예수님처럼 마귀에게 속한 자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만들고, 죽어가는 성도는 자신이 예수의 피로 용서 받음을 자기를 죽이는 자를 용서함으로서 토해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림을 교회 안에 그려 놓은 겁니다.

 교회란? 예수의 피로서 용서 받은 자들이 마귀에게 죽임당하면서 원수를 용서함으로서 예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는 곳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 13:12-15=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았다고 하지요.

성문 밖이란?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났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성이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요.

 

유대인들이 마귀의 종이 되어서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에서 좇아낸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기들이 추구하는 신앙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두고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했어요.

 

예루살렘 안에 있는 종교인들이 짓고자 하는 율법 신앙엔 예수님이 합당치 않아서 영문 밖에서 죽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교회 안의 전쟁에서 예수님이 진 것입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죽임 당함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난 겁니다.

예수님을 좇아낸 도성(교회)을 어찌 하나님의 도성(교회)이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여기는 영구한 도성(교회)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온전치 못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엔 온전한 교회가 없어요.

온전한 교회를 꿈꾸는 것은 이상이에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았어요.

 

이 세상의 교회는 역설적으로 참 교회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지요.

교회는 이 세상은 허구라고 알려주어야 해요.

온전한 교회는 세상에 없고 오직 하늘나라에만 있습니다 라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들끼리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고 싶어하는 거예요.

천사 같은 의인들만 있도록 만들고자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피 뿌림이 필요가 없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겁니다.

 

성화주의는 인간을 완전한 자로 만들고자 하니 이단이고,

교회개혁을 외치는 자들은 교회에서 마귀를 몰아내고자 하니 이단인 겁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안에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을 둔 것을 몰라요.

이스라엘에 안에 표면적 이스라엘과 이면적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두었어요.

두 싸움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속한 자가 마귀에게 속한 자들로부터 죽임 당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지신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라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건축자들이 버림당한 돌이 되어서 오라는 거예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성화주의자들이 만들고자 하는 신앙에 거치는 자가 되어 그들로부터 버림 당하라는 말입니다.

교회 개혁으로 온전한 교회를 꿈꾸는 자들에겐 교회를 헤치는 자로 낙인찍혀 버림 당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도 마귀의 노림수이고, 성화도 마귀의 노림수라고 말하다가 쫓겨나야 합니다.

누가 당신은 왜? 이단이라고 낙인 찍혀서 버림 당하였느냐 라고 물으면 예수님 십자가를 말하다가 버림 당하였다고 증거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버림 당한 것을 찬미의 제사라고 합니다.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참으로 해괴하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처럼 십자가 사건이 터지게 하십니다.

진짜 성도가 가짜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진짜들은 하나님께 탄원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원수 갚는 것은 내게 맡기고 예수님처럼 죽임 당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마귀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증거하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해요.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의 몸이라고 하고,

또는 종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당한 일을 성도가 대신 당하도록 선택이 되어진 겁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재현되는 겁니다.

이 비밀을 뉘라서 알겠어요.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이고,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인 겁니다.

이런 비밀이 깨달아져야 환란 속에서도 기뻐하게 되요.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를 일컬어 만세전에 감추었던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비밀이라고 하지요.

만세 전에 감추인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겁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해주는 그런 나라 말입니다.

 

마치 요셉이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용서해 주는 그런 나라에요.

이런 나라를 일컬어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이름하여 천국이에요.

 

지금 이 세상에 천국은 역설적으로 와 있어요.

육에 속한 자들은 몰라보아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아까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치면 시험에 들고 신앙생활이 힘들어진다고 한 겁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기게 하는 능력이에요.

 

부디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비밀을 아는 영안들이 열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해 주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을 알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 비밀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으로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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