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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6강. 예수님의 때와 초막절 (요 7:6-13)

by coroa 2021. 5. 9.

 

[46강. 예수님의 때와 초막절 (요 7:6-13)]

-.정낙원 목사

 

오늘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 때'와 '너희 때'를 구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 볼 말씀은 “때” 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때” 란? 정해 놓은 시간표를 말합니다.

세상에선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라는 6하 원칙으로 그 사건을 접근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라는 말 속에는 즉흥적으로 일하시지 않고 이미 정해진 순서에 따라서 일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정해진 틀 속에서 일하는 것을 약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언약을 고집하는 이유도 그 언약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의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일컬어 약속의 책이라고 하는 이유도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뭐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이 어떤 것이냐를 알아야겠지요.

무슨 약속을 어떻게 하셨고!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가 되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에수님을 일컬어 약속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약속을 따로 오신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삭과 같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그럼 그 약속은 언제 세웠는가요?

창세전이지요.

예수님의 이야기는 창세전에 세워진 약속에 따라 드라마의 대본처럼 단락 단락이 되어서 배경이 바뀌고 구성이 바뀌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연출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펼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연출하는 장엄한 대하드라마가 바로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오심에서부터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재림까지 모두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각본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정해 놓은 뜻대로 사는 것을 종속적 삶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종의 삶이라고 합니다.

 

종이란? 주인의 지시대로 사는 자입니다.

지시(指示)란? 주인이 시키는 때를 말합니다.

종에겐 “자기 때” 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의 때” 에 맞추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버지의 종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을 때부터 이미 아버지의 종으로서 오셨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하기 위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한 때” 에 맞추어서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때가 찼다” 라고 합니다.

 

갈 4:1-5=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때가 차매” 라는 말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 “정해진 때” 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미 계획 되어진 시간에 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노아 시대나, 아브라함 시대나, 열왕 시대에 오시지 않은 것도 아직 오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나설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인간의 죄악이 관영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다는 말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다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시대나 모세 시대나 열왕 시대에는 예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죄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는지 알 때가 아직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흑암이 깊음 중에 있을 때 오십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는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하나님과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이 되어 흑암이 깊음 중일 때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 때처럼 빛과 어둠을 갈라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하늘 백성과 땅 백성을 갈라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드라마로 이야기 한다면 마지막 클라이맥스 때입니다.

마지막 때 예수님이 투입이 되어서 모든 사건을 종결시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 2절에선 예수님의 오심을 “모든 날 마지막 때”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를 다른 말로 “종말”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세상은 “종말 모드” 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이를 종말론적이라고 합니다.

이제 끝장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정한 시간표대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을 세상 마지막 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마지막 때의 모습이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습니다.

 

노아의 때 모습이 어떠했는가요?

구약의 증거를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들을 좋아했다고 하지요.

이건 교회의 타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에게서는 이방신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노아의 때를 정의 하기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하는 육신의 일에만 몰두 하는 모습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이걸 야고보서에선 세상과 간음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간음이란? 남편을 두고 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이라는 남편을 두고 세상이라는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하늘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 나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봅니다.

 

딤후 3:1-4=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바울은 말세의 특징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 사랑에 빠져서 쾌락을 좇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가장 실감나는 부분이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다 보니 돈에 취하고!

물질만능 시대에 돈은 힘이니까 돈을 가지면 자긍하고 교만해집니다.

돈을 신으로 섬기고 사니까 교만하고 안하무인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도 몰라보고 기고만장 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에선 아시아의 일곱 교회 모습에서 말해주었습니다.

맨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 속에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 담겨져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는 곤고하고 가난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이 이와 똑 같습니다.

돈 좀 있다고 온갖 건방을 다 떨고 있잖아요.

하나님도 두렵지 않아요.

교회에 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목사들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온갖 치부를 다 드러내고도 부끄러운 줄 몰라요.

마치 여자 연예인들이 돈 앞에 발가벗는 것과 같아요.

지금은 돈 앞에 수치도 없어요.

이 시대는 모든 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시켜서 일반 가정집 아낙네들도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몇일 전엔 네이키드 뉴스란 것이 한국에 상륙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생소한 말이라 도대체 뉴스면 뉴스지!

무슨 놈에 네이키드 뉴스가 다 있나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더니 여자 아나운서가 발가벗고 뉴스를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에서는 일상이라고 합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예전엔 아나운서라면 신비스러운 영역으로 여겼어요.

가장 지적이고,

가장 인품이 좋고,

가장 고상하다고 여긴 영역이었어요.

 

그런데 이젠 수치를 드러내는 것으로 역발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신비를 돈에 팔겠다는 것입니다.

그 뉴스는 돈을 내고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돈 앞에 발가벗는 겁니다.

돈 있는 놈들은 돈 몇푼 집어 주고 쾌락을 즐기겠지요.

 

그래서 바울은 말세를 일컬어 고통하는 때라고 말한 겁니다.

이것도 영적으로 고통이지 육적으론 고통이 아니라 쾌락입니다.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종말이 있고,

하나님이 있고,

천국이 있겠어요.

여기가 천국인데,,,

더 더군다나 십자가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가난하고 힘들 땐 교회 나와서 육적이든지 기도하고 충성했어요.

본질이야 어떻든 간에 교회에 열심을 냈어요.

그러나 교인들이 돈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이젠 교회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교회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교회를 가까이하기도 하고 멀리하기도 합니다.

가난하면 교회를 찾고, 부자가 되면 멀어집니다.

교인들이 교회 오는 횟수가 줄어들면 세상과 돈에 취하여 있다는 증거입니다.

 

돈이 있으면 천국도 아쉽지 않습니다..

구원도 필요가 없습니다.

복음은 무슨 빌어먹을 복음이에요.

등 따습고 배부른데!

 

과거 가난 할 땐 교회에서 교인들이 식사당번을 정해서 순번으로 구역별로 돌아가면서 봉사를 했어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교회에 봉사를 했다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돈이 있다가 보니 교회에서 하는 봉사가 사라졌어요.

모든 것을 돈으로 때워요.

 

심지어 주일날 예수를 믿지 않는 파출부를 불러서 식사하고 설거지를 시켜요.

이미 몇 년 전에 삼산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교차로에 광고를 냈더라고요.

“주일날 교회에서 일할 파출부를 구합니다” 라고 말이에요.

전도도 일당을 주고 고용해서 전단지를 뿌리게 해요.

 

이 시대 교회는 사창가에요.

매음굴이에요.

세상 가치가 그대로 자리 잡아 버렸어요.

그러니 교회나 세상이나 똑 같아요.

돈이면 다 되는 그런 곳이 바로 교회에요.

 

지금은 이구동성으로 말세라고 합니다.

복덕방 아저씨도 말세라고 하고,

시장에 콩나물 파는 할머니도 말세라고 하고.

우리 역시도 말세라고 해요.

 

맞아요.

말세에요.

하나님께서 말세가 되면 이런 셋트를 만들어요.

이런 일이 일어나거든 말세인줄 알라는 겁니다.

 

마치 연극 무대가 한 단막마다 바뀌듯이 하나님도 예수님 중심으로 무대의 그림들을 바꿔요.

지금은 온 세상이 총체적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무대 셋트로 전환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셋팅을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큐 싸인만 내면 되어요.

배경 음악이 흐르고 등장인물들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어요.

예수님이 나올 조건을 성숙시키고 있어요.

조금만 있으면 무대가 올라가고 짠하고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라는 무대를 만들어 가시고 계신 겁니다.

그리곤 하나님께서 때를 정하시고 역사를 써 내려 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도 무작정 일하시지 않고 때를 맞추어서 일을 하기 때문에 내 때를 언급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연기할 때를 정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하나님이 정한 각본대로 사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아버지의 시간표대로 오셨고 가신 것도 시간표대로 가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도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오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잖아요.

그렇다면 성도가 구원되는 일도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지겠지요.

이게 얼마나 복된 말인지 몰라요.

 

우리가 지금 이 시대 여기서 예수를 믿는 것도 다 하나님이 정한 때에 따른 결과입니다.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고!

믿기 싫다고 해서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 경우로 이야기할게요.

제가 하나님의 때를 인정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요.

내 신앙이 여기까지 오는데 내 뜻대로 흘러오지 않았어요.

한 번도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거든요.

 

과거 율법 아래서 내 열심과 충성으로 예수를 믿고자 할 때는 믿어지지 않았어요.

그 땐 하나님 저 예수 믿고 싶습니다!

나! 예수 믿겠습니다!

예수 좀 믿게 해 주세요! 라고 했어요.

밤마다 믿음을 주세요! 라고 얼마나 기도로 데모를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를 못 믿었어요.

믿는 척 했을 뿐이에요.

밤마다 기도하고,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를 잘하니 사람들 눈엔 믿음이 좋은 집사로 보인 겁니다.

 

내 원함과 상관없이 교회에선 믿음이 좋다고 소문이 나고 만 겁니다.

이젠 교회에서 충성된 일꾼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선 믿는 척 하여야 했어요.

믿는 척하는 저를 목사님이나 교인들이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는 것은 그들도 나처럼 믿음이 없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니 저의 믿는 척하는 믿음에 속은 거지요. 

원래 가짜 일수록 진짜처럼 행세하잖아요.

믿음이 없을수록 믿는 척 많이 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구태여 자기 믿음을 있는 척 드러내지 않아요.

 

믿음이 없으니 입만 열면 믿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연발하는 겁니다.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난 믿음이 없으니 열심을 낸 건데 남들은 다 정낙원 집사는 믿음이 좋다고 했어요.

속은 거지요.

물론 겉으로 나타난 열심과 충성과 헌신으로 본다면 믿음이 좋은게 사실이에요.

그러나 제 마음에는 예수가 안 믿어졌거든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영적 우울증과 신앙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시간이 흐를수록 도저히 스스로를 속이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자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진리 때문에 괴로워지면 사람이 살 의욕이 없어진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어요.

그 땐 환장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려고 굶어 죽기로 작정하였어요.

그런데 막상 죽고자 하니 못 죽겠더라고요.

죽는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죽지 못하고 폼만 잡다가 그만 뒀어요.

 

그렇다고 믿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택한 것이 신학교에 간 겁니다.

신학교에 간다고 어디 예수가 믿어집니까?

신학교에 가서 배워서 예수가 믿어진다면 다 신학교에 가야지요.

그러나 예수가 안 믿어지는 것은 신학교에 가나 안 가나 똑 같아요.

 

세월이 흐르다 보니 예수도 안 믿으면서 목사가 되고 만 겁니다.

자연히 교회도 개척하게 되었고!

그냥 목사들이 가는 수순대로 흘러 온 겁니다.

 

목사도 몇 년 하고 나니 재미도 없고 지치더라고요.

나름대로 율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어요.

그러나 내 안에 진리에 대한 갈급함과 그 딜레마는 가시지 않아요.

그러니 괴로운 거지요.

 

이거 이런 식으로 목사 계속하여야 하나 마나!

그러다가 한 달 금식까지 하게 되었어요.

혼자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물론 제 아내는 몰라요.

 

목사를 그만 둬도 명분이 있어야 하잖아요.

전 아내가 반대 하는데 신학교에 갔거든요.

그런데 몇 년 안하고 그만 둔다고 하면 어찌하겠어요.

 

아무도 몰라요.

겉으론 더 열심을 내었으니 남들은 모르지요.

교인들도 모르고 제 아내도 모르고 혼자 끙끙 거리고 있었어요.

제 심정적으로는 이미 목회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어요.

 

그러다 은혜를 입었어요.

은혜를 입고 보니 성경이 전해 새롭게 보여지더라고요. 

야! 이거 였구나!

맞아!

내가 지금까지 찾고 찾던 것이 이것이었어!

세상에 십자가가 깨달아지기 시작하니 그냥 일사천리로 풀리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은혜가 저에게 덮쳐 온 겁니다.

이건 내가 정한 때가 아니에요.

 

과거 율법 아래서 열심이 특심 할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하여 눈을 가려 놓으시더니 이제야 눈을 열어서 깨달아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원할 땐 법 아래 가두어서 종노릇하게 하더니, 나의 원함과 상관없이 지금은 은혜 아래로 몰아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전 어떻게 보면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오후 5시쯤에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아침이었을 때는 율법 아래 두시더니 오후가 되어서야 은혜 안으로 밀어 넣으신 겁니다.

늦게나마 은혜 안으로 밀어 넣어 주신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몰라요.

어느 때에 들어 왔느냐 보다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임하여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우리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관리 하에 움직여 질 뿐입니다.

과거엔 몰랐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 이런 게 깨달아지더라는 겁니다.

이처럼 때란? 우리가 관리 하는 게 아니란 것을 말하고 싶은 겁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주인이 먼 타국으로 떠나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맞기지요.

그리곤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떠나 버립니다.

그러면 종의 입장에선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주인이 있는 것처럼 열심히 살아야 올바른 정신을 가진 종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없다고 야! 이제부터 자유다!

그러면서 게으름을 피우면 이는 악한 종입니다.

이 악한 종은 자기 계산을 하고 있는 거예요.

“때” 를 자기가 정해 놓고 사는 겁니다.

 

아마도 자기가 생각 해 볼 때 주인이 오래 있다고 올꺼야!

먼 타국에 갔으니 최소한도 얼마는 걸릴거야? 라고 혼자 머리를 굴리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은 게으름을 피워도 돼!

그래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겁니다.

일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인들이 취미생활하듯이 신앙생활을 한단 말입니다.

나중에 잘 믿으면 되지 그러면서 말이에요.

그 때 가면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때를 자기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때를 자기가 쥐고 있으니 예수 믿는 일에 긴장감이 없어요.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이 되어버렸어요.

교회 오는 것이 동호회 모임처럼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교회도 그리우면 왔다가 싫어지면 떠나가는 손님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교인들이 주인이 아니고 손님이에요.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해요.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오늘 밤 하나님이 영혼을 데려 갈 줄 모른다는 겁니다.

이 사람은 목숨을 자기가 관리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앞으로 몇 년을 살테니!

그러니 지금은 내 볼일 다 보고 예수는 시간 날 때 그 때 가서 믿지! 라고 해요.

 

지금 차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을지!

아니면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르면서도 자기 시간표를 정해 놓고 살아가고 있어요.

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입니까?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 사고를 접하면서 자기 일로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데 남의 일로 치부해요.

에이! 저 사람은 재수 더럽게 없네!

왜? 하필이면 저렇게 사고를 당한단 말인가? 라고 측은해 하고 혀를 차고 있어요.

그게 곧 잠시 후에 자기가 닥칠 일인데도 말이에요.

 

성도라고 한다면 타자(他者)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내 사건화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 불의에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면

야! 내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오늘이라는 날 동안 진짜 예수 잘 믿어야겠구나! 라고

오늘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더 잘 믿어야겠다고 해야 해요.

 

오늘 밤 죽는다 하여도 주님 앞에 설 자세로 살아야겠구나! 라는 자세로 산 자들이 바로 달란트 비유에서 이문을 남긴 충성된 종들인 겁니다.

종들에겐 내일이란 없는 날입니다.

오직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종이 자기 시간표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종의 삶이란? 그 날 그 날 주시는 은혜로 살아야 해요.

무슨 큰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며 살란 말입니다.

이걸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이 세상은 종말 모드로 전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손에 키를 들고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십니다.

곡식과 가리지를 구별해 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갈라집니다.

육에 속한 자는 육에 안목으로 육적 가치관으로 예수를 믿고,

영에 속한 자는 영적 안목과 가치관으로 예수를 믿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님은 육으로는 알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친 형제들 조차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육으로만 알았어요.

그래서 형에게 시골에 머물지 말고 큰 무대로 나아가서 형님의 능력을 보여 보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서 큰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살리고 싶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유대인들의 수군거림을 압니다.

 

유대인들이 수군거림이 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요 7:1절 “이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늘 그들의 위선과 악을 고발하니 좋아 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예수는 조상들이 전해준 율법을 폐하는 혹세무민하는 자라고 선동하여 이단으로 내 몬 겁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보아도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7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동생들이 잘 압니다.

아마도 이웃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족들을 염려하여서 그 당시의 소문들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야! 종교 지도자들이 너희 형을 죽이려고 한다더라!

그러니 조심 시켜라!

우리가 보아도 너희 형님이 너무 과격하더라!

 

그냥 병자나 고치고 귀신이나 쫓아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 좋은데!

왜? 성전에 들어가서 뒤집어엎고,

안식일을 범하고,

율법을 범하는지 모르겠더라!

그건 우리가 지키는 율법 신앙과도 반(反) 하는 것이므로 위험한 일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형에게 사람들 분위기도 좀 알려주고 살 길을 모색하도록 해 줘라!

이런 내용은 얼마든지 유추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친 형제들 입장에선 어떤 대책을 강구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의 가족은 목수 일로 근근이 연명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어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30살이 되자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아버지가 하는 목수 일을 도와서 집안에 장남답게 가업에 충실하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율법 신앙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혁파하는 일을 하십니다.

성전을 뒤집어엎는가 하면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율법사들과 충돌을 벌립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그룹과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육적으로 보면 도무지 이해 불가능합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랍비들로부터 정규적으로 율법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대 최고로 인정받는 지식층들과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충돌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틀렸다고 탄핵하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무식한 사람이 대학 교수와 변론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구구단도 못 외우는 사람이 수학교수와 논쟁하는 것과 같습니다.

 

서기관이나 율법사나 제사장들은 모두가 최고의 율법 선생들입니다.

요즘 식으로 신학 교수들이란 말입니다.

그런 그들을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예수님이 시비를 걸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그들을 틀렸다고 하면서 마귀 새끼들이라고 저주 하면서 말이에요.

 

누가 봐도 예수님을 옳다고 할 수가 없어요.

설령 예수님이 옳다고 하여도 대 놓고 옳다고 할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의 율법신앙을 부정하면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 집니다.

유대교가 뿌리째 뽑히게 되어요.

그러니 예수를 살려 둘 수가 없는 겁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다고 하여서 예수는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이 된 겁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준 사건이 있었지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몰아치자 그 눈을 뜬 소경의 부모가 출교 당할까봐서 차마 예수님이 고쳐주었다고 말을 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했지요.

 

어쩌면 지금 예수님의 가족들이 그런 형국에 처한 겁니다.

예수님의 과격한 행동 때문에 출교 당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족들 입장에선 불안 불안 한 겁니다.

 

이웃 사람들이나 일가친척들도 예수님의 행동이 너무도 과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정신 가잔 사람이라면 저런 짓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미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남이야 예수님의 행동이 미친 행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솥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는 형제들 입장에선 남들 앞에선 남의 이목 때문에 예수를 미쳤다고 하였지만,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형님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골에서 피신시키기 위할 맘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있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 마치 초막절이고 하니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거기 가서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서 살아갈 길을 모색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형제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난 안 올라가겠다고 합니다.

안 올라가는 이유는 아직 “예수님 때” 가 아니라고 합니다.

 

요 7: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너희 때는 늘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아직 내 때는 아니라고 합니다.

때가 아직 차지 않았고,

내가 아직 나설 때가 아니란 뜻입니다.

 

동생들 입장에선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뜬금없는 때 입니까?

또 너희 때는 준비 되었지만 내 때는 아니라는 말은 뭡니까?

 

그러지 않아도 형님에 대하여 썩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터에 이런 뜬금없는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다 올라가는 초막절인데 무슨 자기 때가 있다고 합니까?

동생들로서도 도통 알아먹지 못하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예수님의 때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한 시간표대로 움직인다고 했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왜? 보냈습니까?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라고 보냈지요.

자기 백성들을 어떤 식으로 구하는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바름의 사건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리허설로 보여줬어요.

이제 예수님이 유월절 이린 양의 실상이 되어서 구해 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양처럼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해 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신 겁니다.

유월절 어린양이란? 죄인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희생제물이에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의 일생은 모두가 하나님의 속죄 사역을 이루기 위하는데 모든 삶에 일정이 맞추어져 있어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오신 것도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서 오셨다고 했어요.

 

중요하니 다시 한 번 봅시다.

 

갈 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서 났다고 하지요.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아래이지요.

 

율법이 자기 백성들을 붙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죄와 사망 권세라고 합니다.

이는 곧 율법은 죽음의 권세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에요.

율법도 좋은 것이에요.

율법도 구약 입장에선 복음이에요.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오해하여서 잘못 사용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율법이 악한 것으로 둔갑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라도 율법 신앙은 죄에요.

왜냐하면! 율법대로 사는 것은 곧 인간의 의를 축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잘 보여 주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율법대로 산 것 때문에 예수를 배척했어요.

예수님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였고 지옥에 가라고 하였어요.

 

율법은 좋은 것인데 율법 신앙을 붙잡을 땐 죽음이고 악이 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율법 신앙 속에 갇혀 있는 자기 백성들을 건지러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서 났다는 것은 율법의 정한 시간대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야 할 율법의 정한 시간표가 바로 절기 속에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초막절은 아직까지 예수님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말한 겁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구약의 모든 절기는 다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골로새서 2장을 봅니다.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은 모두가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하지요.

이는 절기는 장래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을 그림자로 보여 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는 때에 관한 비밀은 구약의 절기 속에 이미 담아 놓았어요.

 

구약의 절기는 예수님 일생을 보여주는 사진과 같아요.

예수님이 하실 일을 보여주는 사진과 같아요.

이제 사진의 실체인 예수님이 왔어요.

 

절기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부터 재림이 들어가 있어요.

예수님의 때를 십자가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십자가가 모든 역사의 전환점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터닝 포인트에요.

과거로부터 단절이고 현재로부터의 시작이 십자가로부터 출발을 해요.

 

예수님이 율법 아래서 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을 속량키 위함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십자가는 율법을 도말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금 내 때가 아니라고 한 것은 구약의 절기상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시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7대 절기를 보면 유월절로 시작해서 초막절로 끝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아직 내가 나설 때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때 나타내서 십자가에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에는 죽을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간략하게 7대 절기를 살펴봅시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는 크게 세 구분의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라는 봄 절기와,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고 하기도 하는 여름 절기와,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하는 가을 절기가 있어요.

이를 일컬어 7대 절기라고 합니다.

 

레위기 2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7대 절기를 율법으로 주면서 반드시 지키도록 명령을 했어요.

절기를 안 지키면 이스라엘에게서 끊어져요.

하나님은 절기 속에 각양의 의미를 담아 놓았는데 모두가 예수님에 대한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7대 절기 속에 장차 오실 예수님의 일생을 담아 놓고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 이스라엘은 절기를 지키면서 예수를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절기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으니 법으로 절기를 지키라고 명한 것은 곧 예수 안 믿으면 죽이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7대 절기와 예수님의 일생을 비교해 보면 절기가 담고 있는 뜻을 안다고 했지요.

예수님의 일생을 절기를 가지고 구분해 본다면 크게 봄 절기와, 여름절기와, 가을절기 세 구분으로 나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을 일컬어 그리스도라고 하지요.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인데 이는 직분을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삼직과 연관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삼직이란? 선지자직과, 제사장직과, 왕직을 말합니다.

선지자 직은 죄를 지적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역을 말하고,

제사장직은 성도를 돌보는 사역을 말하고,

왕직은 심판과 다스리는 사역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선지자직은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말하고,

제사장직은 부활하여 승천하셔서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심을 말하고,

왕직은 장차 재림하셔서 만왕의 왕이 되어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봄절기에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레위기 23:4-5절에 보면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레 23:4-5=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어린양의 피를 문과 설주에 발라서 하나님의 죽음에 재앙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를 일컬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낸 어린 양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고전 5장 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렇다면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상징하는 절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날에 자신이 유월절 양으로 오셨음을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포도주와 떡을 가지고 유월절을 지킨 것은 이제부터 유월절은 예수님의 피와 살로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젠 죽음을 예수님의 피가 막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양이 죽는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마태복음 26:2절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의 실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 26: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그리고 레위기 23:6-8절에는 무교절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레 23:6-8=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무교절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절기인데,

이 때에는 집안에 있는 모든 누룩을 땅에 묻어 두고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을 먹었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이란? 고난의 떡을 말하는데,

이는 마치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피는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먹으면서 이때 필히 누룩 없는 떡을 함께 먹었습니다.



이 누룩 없는 떡을 무교병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 고난의 떡이라고도 합니다.  

누룩은 죄를 상징하는 것인데,

이는 곧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무덤에 묻힌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23:10-14절을 보면 초실절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레 23:10-14=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 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초실절은 무교절 다음날

그러니까 유월절 이후 삼일 째 되는 날인데,

이 날은 첫 열매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절기입니다.

 

초실절이 되면 제사장은 첫 곡식을 한단 묶어서 하나님께 요제로 바쳤습니다.

요제는 흔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초실절은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것을 상징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27:50-5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 무덤 속에 잇던 성도들을 데리고 나오셨지요.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구약의 성도들을 무덤에서 데리고 나온 겁니다.

아벨로 시작하여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이때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데리고 천국에 간 겁니다.

 

이는 마치 초실절 날 제사장이 곡식 한 단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린 것과 같은 의미에요.

예수님께서 친히 제사장이 되셔서 구약의 성도들을 살아나게 하신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죽어서 구약에 성도들을 전부 데리고 천국으로 간 겁니다.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은 예수님의 초림으로 오셔서 육체로 하신 사역입니다.

 

그리고 레 23:15-21절에서 칠칠절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레 23:15-21=“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수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또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며 일년된 어린 수양 둘을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이 날에 너희는 너희 중에 성회를 공포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칠칠절은 초실절을 지낸 후 50일째가 되면 지키는데,

이 때에는 첫 곡식으로 만든 떡을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면서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떡 두 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상징해요.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후 50일 때에 성령의 강림하심으로 이스라엘과 이방인이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셨지요.

성령이 오시면 예수 안에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면 성령이 오실 것을 말해주셨습니다.

 

요 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준다고 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성령님은 다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면서 내가 오겠다고 하신 것은 성령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기 때문에 곧 예수님 자신이 온 것으로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칠칠철이 초실절 이후 50일째 지키는 절기라고 했지요.

그리고 초실절이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였지요.

그럼 절기의 순서대로라면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째가 되면 성령님이 오셔야 하지요.

 

사도행전 1:3절을 보면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고 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을 이 세상에 계셨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40일 동안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리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신 약속을 믿고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예수님의 약속이란? 성령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정확하게 열흘 후에 즉 초실절이 지난 후 50일째가 되는 날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행 2:1-4=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 보면 “오순 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고 되어 있지요.

이는 '기약대로 그 날'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날'입니다.

 

그런데 갑자가 하늘로부터 성령이 불 같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방언을 말합니다.

여기서 방언이란?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에요.

 

방언이란? 따따따따가 아니라 예수님 이야기에요.

하늘나라 이야기가 바로 방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의로워 진다는 말이 생소한 방언인 겁니다.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겐 예수 믿어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낯선 이야기에요.

말 같지 않은 괴변이에요.

 

암튼 요한복음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다른 보혜사로 오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칠칠절도 성취가 된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을 절기인데 가을절기는 칠칠절이 지난 후 넉 달 동안 기다렸다가 7월 1일부터 15일까지 지내는 절기입니다.

 

가을절기를 다른 말로 7월 절기라고도 합니다.

가을 절기의 특징은 주로 큰 잔치를 치르는 절기들입니다.

한 해 농사를 다 끝내고 즐기는 절기에요.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모든 일을 끝내고 천국에서 안식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레위기 23:23-25절을 보면 나팔절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 23:23-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 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나팔절이 되면 제사장이 성전에서 나팔을 불게 됩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넉 달 동안 지은 농산물을 성전에 가지고 와서 제사장에게 바칩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하는 절기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되면 하늘에서 나팔이 울려 퍼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팔절은 예수님의 재림하는 절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7절에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살전 4:13-17=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나팔절에 제사장이 성전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팔을 부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나팔은 잠자던 자들을 깨우는 기상나팔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무덤가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외친 주님의 음성과 같습니다.

그러면 잠자던 성도들은 다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도가 죽으면 잔다고 하는 것도 다 이 나팔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168장 나팔 불 때” 찬송가를 불러 보세요.

온 몸이 짜릿 짜릿 할 겁니다.

 

성도는 이미 묵시적으로는 나팔절이 이루어졌어요.

하지만 묵시가 성도의 이 땅에 삶에선 역사로 전개 됩니다.

그러니 역사적인 의미에선 아직까지 나팔절은 소망으로 남아 있는 때인 겁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맛을 보고 살지만 육적으로는 신랑을 기다리듯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신랑을 기다린다는 것은 현재를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건 마치 연말 보너스 타 오는 신랑을 기다리는 아내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월급이 통장으로 들어오니 월급날의 감흥이 없어요.

 

과거엔 월급봉투를 가지고 왔어요.

그럴 땐 회사 월급날이 되면 온 동네 아내들이 다 신랑을 기다리잖아요.

퇴근 시간이 되면 집집마다 아내들이 대문 밖에서 머리를 내 밀고 신랑을 기다려요.

그 기다리는 시간은 기쁘고 행복해요.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엄마가 기뻐하니 덩달아 기뻐하면서 기다리지요.

 

그 날 만큼은 맥주도 받아 놓고 맛난 음식도 해 놓고 말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아내들의 얼굴을 보면 기쁨으로 들뜨고 흥분이 되어 상기 되어 있어요.

성도가 나팔절을 이런 마음으로 기다려야 해요.

 

그리고 레위기 23:26-32절에는 속죄일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레위기 23:26-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아무 일이나 하는 자는 내가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구일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속죄일에는 대 제사장이 모든 민족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다른 때에는 일반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례 하였지만 이 날 만큼은 대 제사장이 직접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의 죄를 다 씻어서 천국에 데려 간다는 말입니다.

 

이는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대 제사장이 되셔서 예수님께서 구속한 성도들의 죄를 속하여서 하나님께 바치는 날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22-2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정사와 권세를 멸하시고 성도들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했습니다.

 

고전 15:24=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모든 정사와 권세를 멸하신다는 말은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멸하신다는 말입니다.

죄를 속량하신다는 말입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깨끗한 자들로 아버지께 바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1장의 원래 창조된 인간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레위기 23:33-36절에 초막절을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레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십오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칠일 동안 지킬 것이라 첫날에는 성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칠일 동안에 너희는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요 제 팔일에도 너희에게 성회가 될 것이며 화제를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초막절은 광야에 나가서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물과 불로서 축제를 벌리는 날입니다.

이는 애굽에서 광야로 나온 것을 기념하는 것인데!

이는 성도가 죄악 된 세상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하며 사는 것의 모형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절기는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을 드러내라고 하자 아직 내 때가 아니라고 거절하신 이유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막절이지요.

초막절이란? 모든 절기의 끝으로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 사건의 완성시기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재림 때의 일을 하실 것이 아니라 먼저 유월절의 대속 제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여야 할 때입니다.  

초막절의 실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유월절과 같은 십자가에 죽음이 선행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으로 올라가려면 봄 절기인 유월절 때 올라가야 해요.

 

그러므로 초막절인 지금은 아직 내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을 완성하려면 먼저 유월절부터 시작하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도 예수님께서는 동생들의 제안에는 거절하면서도 초막절에 올라간 이유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엔 이스라엘의 남자는 의무적으로 봄, 여름, 가을 절기에는 성전에 올라가야 해요.

 

신명기 16장을 봅니다.

 

신 16:16-17=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찌니라”

 

율법엔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봄, 여름 , 가을에 한 번씩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남자인고로 지금 율법에 순종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입장에서 올라가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는데도 받으신 것은 다 율법을 완성키 위함입니다.

할례는 육신의 아비로부터 태어나야 하는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오신 분이잖아요.

예수님은 아담의 죄와는 상관이 없어요.

그렇다면 당연히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의 완성을 위해서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렸을 때부터 절기 때만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정한 절기를 지켰습니다.

이 모두가 율법에 완성자로서 지킨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올라가라고 할 때는 내 때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나중에 올라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맞추어 유월절을 겨냥하여서 죽음의 길로 한 걸음씩 내 디디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죽으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죽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면 그들에게 미움을 받아야 해요.

 

그래서 죽여 달라는 의미에서 유대인들의 행사를 악하다고 고발을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의 화를 돋우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죽일 구실을 만들어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육에 속한 예수님의 형제들은 유대인과 예수님이 화해를 시키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이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너무 유대인의 심기를 자극하지 말고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과 하나가 될 수가 없어요.

왜?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하나 될 수가 없습니까?

이유는 영과 육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영에 속한 자들과 육에 속한 자들은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세속화되어 타락하고 썩었다고 하면 너무 까발리지 말라고 합니다.

적당히 모르는 척하라고 합니다.

같은 목사끼리 너무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이름은 같을지 몰라도 영과 육이라는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동류의식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동일합니다.

성도는 새 언약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이지 새 언약을 벗어나 있는데도 하나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정(情) 문제가 아니에요.

마치 예수님과 형제들의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정이 없어서 형제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육은 하나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타락상을 너무 폭로하지 말라는 말은 마치 예수님의 형제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기존 목사들과 적당히 동업자 의식으로 살아가라는 말이에요.

그러면 핍박은 없겠지요.

이단 소리는 안 듣겠지요.

 

그러면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영에 속한 사람은 육을 고발해 주어야 해요.

어둠에 빛으로 보낸 것은 고발하라는 것이지 같이 놀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유대교를 책망하다가 죽었다면 지금은 성도들이 타락한 교회를 비판하다가 죽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 초두에 살펴보았지요.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율법 아래 오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키 위함이라고!

그럼 지금도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해야 되어요.

 

이 시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입니다.

교회를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막지 않도록 개혁하여야 한다고 외치는 인본주의 개혁주의자들이에요.



인본주의자들은 죄관을 세상이 말하는 죄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를 세상 관점에서 보기 좋은 교회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와 타락은 율법적 행함을 붙잡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윤리 도덕적 행위를 가지고 타락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벗어나 있는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언약을 세웠는데 옛 언약을 고집한다면 타락인 겁니다.

 

지금도 율법적 행함을 신앙이라고 말하면 타락한 자입니다.

제가 인간의 행함을 의롭다고 하는 인본주의 성화론자들과 개혁주의자들과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이들이 성화나 개혁으로 새 언약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돌리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여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감사가 되는데!

이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겨서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요.

인본주의 자들은 인간의 가치를 챙겨주고 있어요.

 

마치 압살롬처럼 준수한 외모와 인정으로 사람들이 마음을 도적질 하고 있는 겁니다.

백성들이 마음이 다윗에게로 가게 하여야 함에도 자기가 중간에서 가로채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엔 반역을 하잖아요.

 

이게 죄가 노리는 거에요.

마귀는 예수의 피로서만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의 피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멀어지게 하느냐?

자기 행함을 붙잡도록 하는 것입니다.

괜찮은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아버지 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맏아들이 되라고 하는 거예요.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이 바로 아버지 명을 어기지 않고 살았다는 자기 행함 때문이에요.

결국 자기 행함이라는 의가 아버지를 탄핵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인간은 자신이 부족하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절대로 굽히지 않아요.

이게 죄의 본성이에요.

지금은 교회가 종교가 되면서부터 교인들을 전부 맏아들 만들고 있어요.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심이 필요가 없는 교인들로 만들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마다 인간들의 자랑거리들로 난무하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관이 엄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교회라는 조직을 운영하기 위하여 교인들 간에 경쟁을 붙여서 누가 누가 잘하나 신앙의 그래프를 만들어서 경생심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동물을 사육하는 것과 같아요.

 

이걸 제가 이 시대 선악과라고 했어요.

선악과의 특징이 뭐라고 했나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다고 했지요.

 

성화주의자들은 영적 나르시즘에 빠졌어요.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 너무 아름다워요.

아! 고상한 나여!

 

이것도 지켰고!

저것도 지켰고!

요것도 지켰네!

누가 감히 날 따라 오겠어! 라고 자화자찬하고 있어요.

 

그 성화라는 거울을 깨트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괴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십자가라는 거울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서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식겁을 하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십자가라는 거울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상함 심령이 일어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만들어야 해요.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 주신 예수님의 피가 영원한 복음으로 남게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은 은혜 받을 때라고 한 겁니다.

지금은 말씀을 지키는 때가 아니에요.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한 때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이에요.

 

지금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 시키셨어요.

예수님이 다 이루셨어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안은 예수님이 대신 다 이루신 세계이고,

십자가 밖은 인간이 이루어야 하는 세계입니다.

십자가 안은 신약이고,

십자가 밖은 구약입니다.

 

나는 신약 사람입니까?

구약 사람입니까?

신약 사람은 쉬는 사람이고,

구약 사람은 일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일이란? 내가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성도는 율법 아래서도 종이고 은혜 아래서도 종이에요.

은혜의 종으로 살아야지요.


은혜를 보여주는 종으로서 말이에요.

그것이 자신이 받은 그 은혜를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날마다 모여서 떡을 떼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교제한 것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가 아니라 감사로 말이에요.

 

성경을 보라는 것은 우리 대신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을 보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지독한 사랑에 감격하고 또 감격하고 또 감격하여서 입에서 감사가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천국은 구원 받은 아들로서 감사하는 곳이지 종처럼 구원 받기 위하여 일하는 곳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예수 안에서 안식하는 곳입니다.

성령이 성도의 심령 속에 천국을 이루어 주신 것은 감사하고 찬양하고 살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을 지켜서 성화하여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그 속에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아직도

나! 예수 믿게 해 주세요!

나! 예수 믿고 싶습니다!

나! 천국가고 싶습니다! 라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이건 마치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같이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달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이 안 믿어지기 때문에 자기가 거룩하여야 하고, 자기가 온전해 져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신랑을 맞이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과 더불어 휘파람 불고 놀고 있어요.

누가 이런 기쁨을 빼앗기고자 하겠어요.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다 이런 기쁨으로 살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주신 안식을 누리고 사는 겁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어!

먹어 보지 않았으면 말을 하지 말어!

 

지금은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때가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신 은혜를 받을 때인 겁니다.

예수님의 의를 입을 때에요.

 

고후 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이 “때” 를 놓치지 마세요.

초막절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속이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정한 시간표대로 저희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안이 안식이기 때문에 저희도 안식하고 삽니다. 부디 이 안식을 빼앗기지 않고 살도록 주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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