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50강. 배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 (요 7:37-44)

by coroa 2021. 6. 4.

 

[50강. 배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 (요 7:37-44)]

-.정낙원 목사

 

이스라엘에게는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에 지켜지는 큰 명절이 세 개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이 있습니다.

명절마다 지키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사역을 예표적으로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구약의 율법 속에 담긴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은 장래 오실 예수님에 대한 그림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결국 절기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간단하게 봄 여름 가을 절기를 예수님과 비교해 봅시다.

 

봄 절기는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상징하고,

무교절은 무덤 속에 계신 것을 상징하고,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절기를 역사적 의미로 보면 봄 절기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사건을 예표합니다.

그러니 봄 절기는 초림을 상징합니다.

 

봄은 씨앗을 뿌리고 파종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니 봄 절기와 같은 유월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생명의 씨앗을 뿌린 것과 같아요.

역사적인 면에선 봄 절기는 예수님의 과거 사역이 되겠지요.

 

물론 예수님은 과거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도 계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셔서 하신 일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한다면 봄 절기에 속한 유월절은 예수님의 과거 십자가에 죽으심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름절기인 칠칠절엔 첫 곡식을 따서 새 소제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께 흔들어서 드리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는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민족이 살아날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새 소제가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입니다.

이 때 떡 두덩이를 만들어 하나님께 흔들어 바쳤는데 이는 성령 안에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성령 안에서 거듭나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의미입니다.

 

여름 절기는 칠칠절과 넉 달 농사 기간입니다.

이는 성령 강림으로 온 세계에 하나님의 구원 농사가 지어진다는 뜻입니다.

 

농사가 다 끝나면 가을에 곡물을 추수하여 곡간에 들이고 긴 안식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겨울엔 절기가 없는 겁니다.

이는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가을절기는 나팔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이 있어요.

가을 절기는 한 해 농사를 마치고 축제를 벌이는 절기입니다.

 

나팔절이 되면 제사장이 나팔을 불면 전부 성전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 때 백성들은 각자 농사를 지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와서 잔치를 벌립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이 천사장의 나팔소리로 강림하는 것을 상징해요.

나팔소리로 불러 모아진 백성들은 초막절을 축제 가운데 지내게 됩니다.

 

초막절이 되면 7일 동안 광야에 나가서 종려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고 불을 환하게 밝히고 불 잔치를 하면서 축제를 벌이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들은 봄 여름 가을 삼차씩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하여야 한다는 강제성을 뛴 율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소를 불문하고 이 세 절기 때에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초막절은 가을 절기로서 우리나라 식으로 하면 추석과 같아요.

초막절은 모든 추수를 마치고 모이는 절기라서 기쁨이 최고조로 달한 축제의 절기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유대인들이 연례적으로 하는 세 가지 종교적인 행사가 있습니다.

 

초막절은 7일 동안 지켜졌는데 매일 같이 동일한 의식들을 행하다가 8일째에는 대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께 화제를 드림으로 모든 행사를 마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지금까지 살던 집을 나와 광야에 나가서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초막을 짓고 온 사방에 불을 환히 밝혀 놓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지냈습니다.

요즘 식으로 하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것과 같아요.

 

과거사적으로는 애굽에 생활을 청산하고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와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의 인도로 살았던 40년의 장막 생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미래적 의미로는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성도를 애굽과 같이 멸망 받은 이 세상으로부터 빼내 천국으로 인도하여 들일 것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럼 초막절에 7일 동안 행하여지는 다른 의식들을 살펴봅시다.

 

첫 번째 의식으로는 낮에 행하여지는 물 잔치가 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제사장들이 낮에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 성전의 제단에 있는 그릇에 갖다 붓는 헌수 식을 합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 아침이 시작되면 제사장들은 그릇을 하나씩 들고 성전에서부터 줄을 서서 실로암 못까지 나팔소리에 맞추어 행진을 하는데 이 때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할렐루야” 라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제사장들은 나팔소리와 찬송소리 속에서 엄숙하게 물을 길어서 성전의 제단에 있는 그릇에다가 실로암 못에서 길어온 물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역사적인 의미에선 과거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내어 40년 동안 반석에서 물을 내어 먹게 해 주신 것을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과거에는 물이 없는 광야에서 고생을 하였지만 지금은 항상 마르지 않는 실로암의 샘물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식으로는 밤에 하는 불 잔치가 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밤에는 일곱 촛대에 촛불을 켜서 성전을 밝게 비추는 촛불 집회를 하는 겁니다.

밤이 되면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 마련된 네 갈래로 갈라진 일곱 촛대에 촛불을 붙여서 성전 안을 환하게 밝힙니다.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찬양을 하고 성전 밖에 있는 순례 객들은 피리 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추며 노래하면서 밤새도록 즐거워하였습니다.

이는 과거 조상들이 광야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 밤마다 하나님께서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던 것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의식입니다.

한마디로 초막절은 어둠이 없는 절기입니다.

 

세 번째 의식으로는 새벽에 하는 해맞이가 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새벽마다 성전의 동쪽 문을 활짝 열고 뜨는 해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이는 거룩한 하나님이 성전의 동쪽 문으로 들어오신다는 선지자의 예언 때문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성신에 감동이 되어 성전의 동쪽 문은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곳이라고 말해주었어요.

 

겔 43:1-5=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성전의 동쪽 문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의 동쪽 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출입하는 문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평상시엔 성전의 동쪽 문은 굳게 닫아놓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리로 출입을 하지 못했어요.

 

겔 44:1-2=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 동향한 바깥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히었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성전의 동쪽 문은 육일 동안 닫아 두었다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안식일이나 또는 성회로 모이는 월삭 때에는 문을 열고 이스라엘의 왕 이하 모든 제사장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대망하며 하나님께 경배를 했습니다.

 

겔 46: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안 뜰 동향한 문을 일하는 육일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에도 열고 왕은 바깥 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 벽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그래서 이스라엘은 초막절 절기 때마다 새벽마다 제사장들이 성전의 동쪽 문을 향하여 뜨는 해를 보면서 메시야를 고대하는 의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초막절에 행한 세 가지 의식은 곧 메시야에 대한 계시사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은 초막절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를 바라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초막절 마지막 날에 성전에서 설교를 하는데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전 제단에 붓는 의식을 가지고 이는 성도들 속에서 성령이 생수가 되어서 흘러넘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들을 땐 해괴한 말입니다.

어째서 초막절에 실로암 못의 물을 성전에 붓는 일이 성도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는 일로 해석을 하느냐 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근거로 초막절에 실로암 못에 물을 성전 제단에 붓는 일이 성도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치는 사건과 같은지 살펴봅시다.

성경에는 생명수 사건이 네 군데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그럼 제일 먼저 기록이 된 사건부터 살펴볼까요.

 

창세기 2장입니다.

 

창 2:10-14=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고 세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네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네 갈레로 갈라져서 흐른다고 하지요.

여기서 강물은 생명을 말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선 생명수 강이라고 합니다.

 

차근 차근 살펴봅니다.

 

먼저 살펴 볼 것은 에덴과 동산입니다.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증거는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라고 되어 있어요.

에덴과 동산을 분리해서 말하고 있지요.

 

이는 생명수 강물의 근원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의 근원이 에덴이란 말입니다.

근원이란? 뿌리란 말입니다.

 

물의 근원이 에덴이라고 하지요.

근원이란? 시작이란 말입니다.

공급원이라는 말이에요.

에덴에서 흐르는 물이 생명수이니 이는 곧 생명의 근원이 에덴이라는 말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럼 에덴과 동산을 구분한다고 하면 에덴은 하나님 보좌를 말하고 동산은 하나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에덴동산을 국가로 이해해 봅시다.

 

우리나라로 본다면 에덴은 대통령이 사는 청와대와 같아요.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이에요.

모든 지시가 대통령으로부터 나오지요.

그러면 그 지시대로 온 나라가 다스려지는 겁니다.

 

그러니

에덴은 청와대와 같은 곳입니다.

에덴엔 누가 계시느냐?

하나님이 계세요.

하나님이 생명을 온 동산으로 퍼져 나가게 하는 겁니다.

동산은 에덴이 공급해 주는 생명수로 살아요.

 

사도요한이 천국의 모습을 보았어요.

그럼 사도요한이 본 천국의 실상을 봅시다.

천국이 어떤 모습인가?

 

계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자 보세요.

생명수 근원이 어디인가 보세요.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생명수가 생명나무에 과실을 달마다 맺게 한다고 합니다.

이는 항상 생명의 흘러넘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선 물의 근원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에덴이라고 했지요.

그럼 에덴은 어린 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란 말이 되지요.

 

에덴이 어디라고요?

어린 양의 보좌가 있는 곳이에요.

어린 양의 보좌는 곧 하나님 보좌를 말해요.

왜? 어린 양의 보좌라고 하느냐 하면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아들을 위해서 천국을 만들었거든요.

 

창세기의 에덴동산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천국은 실상이에요.

물론 요한계시록도 인간의 언어로 천국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실제 모습이 아니에요.

 

사도 바울이 그러지요.

삼층천을 보았는데 인간의 말로는 감히 표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요.

천국은 인간의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천국을 인간들 상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누가 천국 갔다 왔다고 간증을 하면 액면 그대로를 믿지 마세요.

 

요한계시록의 보석으로 지어진 하늘 예루살렘 성을 어린 양의 신부로 표현하는데 실제로 보석으로 지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귀하고 값진 것으로 표현 할 것이 보석이 최고이기 때문에 표현한 것뿐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보석을 좋아하지 않아요.

만약 천국이 진짜 보석으로 지어졌다면 전 별로 흥겹지 않을 것 같아요.

요즘 찜질방에 가면 보석으로 지은 방이 있잖아요.

여러분 그런 집이 탐납디까?

전 안나요.

그러니 전 천국이 보석으로 지어진 곳이 아니라 말로 형언 할 수 없는 영광된 곳이라고 믿고 있는 겁니다.

 

말이 잠시 엇나갔는데!

다시 생명수 강물의 근원인 에덴과 어린 양의 보좌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에덴은 창세기식의 천국에 표현이고,

어린 양의 보좌는 요한계시록 식의 표현입니다.

 

역사 선상에서 보면 창세기가 지나간 과거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장차 도래할 미래에요.

그럼 현재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현재 천국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생명수의 근원을 가지고 보면 현재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왜냐하면! 생명수의 근원이 하나님 보좌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이 천국이니까요.

그럼 지금 하나님 보좌가 어디에 있는지 알면 현재 천국도 알 수가 있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천국이 뭡니까?

하나님 나라이지요.

세례요한이 그러지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잖아요.

 

세례요한이 말한 천국은 예수님을 말해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을 천국이 왔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하나님 나라인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인 겁니다.

맞아요.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천국은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다고 하지요.

천국이 성도들 마음에 와 있어요.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자 보세요.

그 날에는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그 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날이란? 정해진 그 날이란 뜻입니다.

그 날이 언제 어떤 날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는 날을 말해요.

즉 성령이 임하는 날을 말하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고 하지요.

오순절은 성령이 강림 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초실절을 기점으로 하여 오십일 째가 되는 날입니다.

 

초실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후 오십일 째가 되는 날이 오순절이란 말입니다.

오순절이 되면 성령이 강림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 날이 이르매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을 하신 것입니다.

 

이 날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그 날인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 사실이 믿어져요.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신다는 것이 믿어져요.

 

이건 이성으로 이해 할 문제가 아니고 믿을 일이에요.

그래!

믿자!

믿어야지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자연히 믿어져요.

 

성령이 임하면 우리 안에 천국이 있다는 것이 믿어져요.

하나님 보좌가 우리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중요하니 잘 정리하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이 어디입니까?

몸을 한 번 해부해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볼까요?

머리에 있습니까?

뱃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심장 속에 있습니까?

오장육부를 해부해도 마음이란게 없어요.

 

마음이란? 장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은 보이는 육체가 아니에요.

몸뚱아리가 아니면서 몸뚱아리에 있어요.

.마음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분명하게 있어요.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흙으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흙에 생기를 불어 넣었지요.

생기가 들어가니 흙덩어리가 갑자기 움직이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겁니다.

그럼 생기가 빠져 나가면 다시 원래 흙덩어리로 돌아가겠지요.

그렇다면 말하고 움직이고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요?

생기 속에 있지요.

 

생기란? 생명을 감지(感知)하는 능력이에요.

문자적으로 말하면 생명을 감지하는 기운이라는 말입니다.

흙 속에 생기가 들어오자 흙이 생령이 되었지요.

 

생기를 받아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영생을 알아보는 인간이란 말입니다.

영생하는 자가 아니고 영생을 알아보는 인간이에요.

(이건 창세기 강해 란에 생기와 생령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으니 참고하세요.)

 

그럼 우리 인간은 생명을 알아보는 능력이 어디에 있나요?

마음에 있지요.

그럼 생기가 곧 마음과 같아요.

이건 분석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믿을 일이에요.

 

그럼 지금 여러분이 느끼고 생각하고 믿고 의식하는 것은 어디입니까?

마음이지요.

마음이란? 자각하고 깨닫고 믿는 의식이에요.

딱히 마음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분명히 있어요.

 

하나님이 흙 속에 불어 넣은 생기를 만지고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이건 감지되는 것이 아니에요.

감지되진 않지만 분명히 있어요.

그 증거가 내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에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순 없지만 분명히 있어요.

성령이 마음에 임하면 하나님을 알아보아요.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이 되었는데 성령이 임하자 눈이 떠져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된 겁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지요.

할례란? 잘라내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게 오장육부처럼 몸에 딱 보이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니 어떻게 잘라냅니까?이건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말이지요.

다른 말로 거듭나라는 말이잖아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집니까?

성령이 임하면 달라져요.

성령이 어디에 오는가 하면 마음에 와요.

 

성령이 마음에 오면 거기가 성전이 되어요.

성전이란? 예수님이 거하는 곳이에요.

다른 말로 보좌에요.

 

자 보세요.

예수님이 초막절에 성전에 붓는 물을 성령이라고 하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고 하잖아요.

뱃 속이란 마음을 말해요.

 

그럼 성령이 임하면 성도의 마음이 뭐가 된다는 말입니까?

생수가 솟아나는 성전이 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보좌가 성도의 마음속에 생긴다는 말이에요.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 성전을 어디다 짓는가 하면 성도들 마음속에 지어요.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지어요.

누가 짓느냐 하면 성령이 지어요.

 

성령이 짓는 성전이 어떻게 지어지는지를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어요.

 

에스겔 37장을 보면 해골들이 있는 골짜기가 나와요.

이는 이스라엘을 상징해요.

이스라엘이 지금 전부 해골처럼 죽었어요.

그런데 그 해골 골짜기에 생기가 불어서 죽었던 해골들을 다 살려냅니다.

그러자 죽었던 해골들이 생기로 살아나서 큰 군대가 되었어요.

 

재미있는 것은 이 해골들을 살려 놓고 하나님이 막대기 둘을 취하여서 분열되었던 유다와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들어요.

이는 성령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된다는 것을 상징해요.

 

이렇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새 이스라엘 위에 다윗이 왕이 되어요.

다윗은 이미 죽었어요.

그럼에도 다윗이라 함은 다윗언약을 따라서 오신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여기서 다윗이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리곤 에스겔 40장부터 성신(聖神)이 성전을 짓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성전에 여호와가 들어와요.

여호와가 임한 성전을 일컬어 “여호와 삼마” 라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란? 여호와가 가운데 계신다는 뜻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여호와가 성도들 가운데 보좌를 틀고 계세요.

이렇게 되면 에스겔이 말하는 성신에 의하여 지어진 성전이 곧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선 성령이 임한 성도를 일컬어 성전이라고 하잖아요.

성령이 임하면 성도의 마음속에 성전이 지어져요.

그러면 성도의 마음속엔 어린양의 보좌가 놓여진 겁니다.

이해되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설교한 생수를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신이 지은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이 임하면 배에서 생수가 흘러넘친다고 하지요.

생수가 넘친다는 것은 생명의 역사나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건 살펴보아야 합니다.

 

에스겔 47장입니다.

 

겔 47:1-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자 보세요.

성신께서 지으신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지요.

이는 곧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강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생수가 이젠 성도의 뱃속에서 넘친다고 해요.

예수님이 그 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시면 우리 마음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시다.

 

창세기에선 생명수의 근원이 에덴이라고 하였고,

에스겔에선 강물의 근원이 성전이라고 하였으며,

요한계시록에선 생명수 강의 근원이 어린양의 보좌라고 했으며,

오늘 본문에선 예수를 믿는 자들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에덴이나,

에스겔서의 성전이나,

요한계시록의 어린양의 보좌나,

성령이 임한 성도의 마음이 모두가 예수님이 계신 곳임 알 수가 있지요.

 

중요한 것은 현제 예수님이 어디 계시느냐 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성전은 성령이 짓는다고 했잖아요.

그럼 성령이 지은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들 마음입니다.

 

그럼 생수 이야기를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로 보면 안 되겠지요.

내 이야기가 되겠지요.

우리 안에서 일어나겠지요.

지금 현재 성도들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성령이 성도들 안에서 어떤 사건을 일으킵니까?

생명의 역사를 일으켜요.

강물을 통해서 각종 생명의 살아난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죄인들의 구원에 역사를 일으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날 실로암 물을 성전 제단에 붓는 것을 가지고 성도의 뱃속에서 흘러넘칠 성령으로 말하고 있잖아요.

그럼 실로암 물은 성령의 상징이 되지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실로암 물로 생명을 살려낸 사건이 있어요.

이는 장차 성령이 임하면 나타날 상징적인 계시에요.

 

요한복음 9장을 살펴봅시다.

 

요 9:1-7=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에게 침으로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소경이 예수의 말대로 실로암 못에서 씻었더니 눈이 떠졌어요.

예수님께서는 소경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받는 사건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심으로서 자신이 행하여야 할 일을 단면적으로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인 것입니다.

표적이란 싸인이란 말입니다.

장차 성령이 오시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싸인인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라는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말입니다.

눈이 떠지고 보니 예수가 보인 겁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죄를 사해 주는 예수에요.

성령으로 눈을 뜨고 보니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성령이 거듭나게 해 주니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나라를 알게 된 겁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은 소경으로서 바라보는 세상이 있었어요.

소경은 죄인을 상징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말해요.

 

그럼 죄인이 알고 있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율법으로 알고 있는 세상이 있겠지요.

유대인들이 지금 율법 아래 있어요.

율법으로 모든 것을 판단했어요.

 

율법은 고발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 속에선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율법은 죽이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지은 성전도 죽은 곳이란 말입니다.

거기선 생명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죽은 성전에 산 예수님이 들어오신 겁니다.

 

왜? 죽은 성전에 산 예수님이 들어 왔을까요?

이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주느냐 하면 실로암 못의 물을 통해서 가르쳐 주는 겁니다.

 

아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실로암 못에 물로 씻음으로 했다고 했지요.

실로암 물이 눈을 뜨게 해 주었어요.

이는 실로암 못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내용이에요.

 

“실로암 못” 이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의 못” 이라는 말입니다.

 

직역하면 실로암 물은 보내심을 받은 자가 주는 물이란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부터 생수가 나올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로부터 성령이 오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지요.

 

결국 실로암 물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실 성령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지금 초막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한 말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에스겔서를 보면 물이 성전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온 세상에 생명을 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막절에는 성전에서 물을 흘러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실로암 못에 물을 길어서 성전에 갖다 붓고 있어요.

이건 에스겔 성전과 정 반대 현상입니다.

 

에스겔 성전에선 성전 문지방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와 세상으로 가잖아요.

그런데 초막절 행사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은 바깥 실로암 못에서 물을 끌어 오고 있어요.

그러니 에스겔 성전과 꺼꾸러인 겁니다.

 

그럼 예루살렘 성전은 성전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짜란 말이에요.

예루살렘 성전은 율법으로 지어진 성전이에요.

모형이에요.

에스겔이 말하는 성전이 아니에요.

에스겔이 말하는 성전은 성령이 지은 성전인데 지금 유대인들과 예수님께서 초막절 행사를 하고 있는 성전은 율법으로 세워진 성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가짜인 겁니다.

 

가짜이기 때문에 장차 실로암 못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메시야가 오시면 이 가짜 성전에 생명 수를 공급해 줄 것이라는 의미로 지금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암 못에 물로 가짜 성전에 생명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암이 뭐라고 했습니까?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했지요.

그럼 실로암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으신 분이 되겠지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이잖아요.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가짜 성전에 서서 내가 너희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실로암 물을 성전에 갖다 붓는 것은 곧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율법으로 지어진 성전에 생명을 공급해 주고 있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생명을 준다고 믿고 있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생명을 공급해 주어야 비로서 성전이 된다는 겁니다.

 

이 땅에 성전에선 생명이 안 나와요.

생명은 이 땅에 없어요.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에게서만 나옵니다.

이걸 포괄적으로 말하면 땅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을 공급 받아야만 산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실로암 이라는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실로암의 물은 그냥 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럼 실로암 물을 성전 제단에 갖다 붓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땅에 있는 성전에 성령을 주셔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까?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생수를 주시려고 성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진짜 성전이라면 에스겔의 성전처럼 물이 나와서 온 세상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여야 해요.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엔 물이 안 나와요.

도리어 실로암 못의 물을 길어다가 성전에서 나오는 것처럼 퍼포먼스하고 있는 겁니다.

쇼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성전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생수가 나오지 않는 성전은 가짜란 말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나온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너에게 물을 준다고 하지요.

 

요한복음 4장을 살펴봅시다.

 

요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얻어 잡수어야 하는데 도리어 예수님께서 물을 긷고 있는 여인에게 물을 주겠다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물은 그 속(배)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게 하는 샘물이 된다고 하지요.

예수님이 주신다는 샘물은 다른 아닌 성령이에요.

샘물이 어디서 솟아난다고 합니까?

그 속이라고 하지요.

 

그 속이란? 마음을 말해요.

그럼 예수님께서 수가성 여인 속에 성전을 지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에스겔의 성전이 됩니다.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이 생수 이야기를 하니 그럼 그 샘물처럼 마르지 아니하는 생수가 솟아나는 성전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입니까?

그리심산 성전입니까? 라고 묻지요.

알려 주면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그리심산 성전도 아니랍니다.

그 성전은 네 마음속에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거야 그리스도가 와야 되는 것 아니냐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 그리스도야!

내가 바로 성도들 마음속에 성전을 지어줄 그리스도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수가성 여인이 난 이제 살았다!~나 메시야를 만났다고 펄떡 펄떡 뛰잖아요.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마음에 성전이 지어집니다.

그럼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교제 할 수가 있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 눈에 보이는 성전은 전부 가짜임이 드러난 겁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에게 저기 보이는 성전들은 전부 가짜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성도는 보이는 성전을 성전이라고 믿지 않아요.

 

목사는 이 땅에 성전은 가짜라고 알려 주어야 해요.

이 시대 교인들이 말하는 교회라는 성전은 전부 가짜에요.

그냥 건물이에요.

 

그럼에도 이 시대 목사들이 성전 건축을 한다고 지랄을 떨잖아요.

교인들은 성전 건축하면 복 받을 것이라고 돈을 갖다 바치잖아요.

이게 모두가 유대인들과 같은 소경이라서 그래요.

 

보이는 성전은 진짜 성전은 따로 있다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있어야 해요.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초막절에 실로암 못의 물을 성전에 갖다 부으면서 장차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가 오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성전을 지어 주실 것이라고 가르쳐야 했어요.

 

그러나 제사장들은 보이는 성전이 마치 생수가 흘러넘치는 곳인 것처럼 사기를 친 겁니다.

의식 자체에 의미만 두었지 그 의식 속에 담긴 계시는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소경이라서 모른 겁니다.

소경이니 실로암 물을 갖다 부으면서도 생명이 외부에서 공급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는 교회를 교회라고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아요.

목사들이 소경이니 교회를 성전이라고 하는 겁니다.

소경 같은 목사나 교인들은 교회가 무슨 신령한 집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전부 교회를 성황당 같이 신당을 만들어 버렸어요.

무식하면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해요.

 

그럼 마지막으로 에스겔이 말하는 성신으로 지어지는 성전이 어떻게 어떤 흐름으로 지어지는지 살펴봅시다.

 

에스겔 성전이 언제 세워지느냐 하면 곡과 마곡을 다 박살내고 지어집니다.

에스겔 37장엔 해골골짜기 이야기가 나오고!

38장 39장은 곡과 마곡의 전쟁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40장 이후부터 성신이 성전을 짓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가 됩니다.

 

곡과 마곡은 사탄의 세력을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이 놈들을 전부 이스라엘을 치라고 불러 들였어요.

미끼를 던진 겁니다.

그래 놓고선 하나님이 몽땅 한방에 작살을 내 버려요.

 

그리고 40장부터 48장까지 성신이 새로운 성전 짓고 여호와 삼마로 끝이 나요.

이는 곧 성신으로 지어질 성전은 사단의 세력이 박멸하고 난 다음에 지어진다는 말입니다.

악의 세력이 궤멸당하고 난 후에 성신이 성전을 짓는단 말이에요.

 

자 이걸 예수님에게 적용해 봅시다.

 

성도들 안에서 에스겔 성전을 지을 성령이 언제 오느냐!

곡과 마곡과 그 주변에 악한 세력들이 다 박멸당하고 난 후에 와요.

즉 마귀의 권세가 다 깨어지고 난 후에 온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언제 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난 후에 오시지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곡과 마곡을 박살내는 전쟁과 같지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박살내도록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온 세상이 합세했지요.

로마와 유대종교가 합세 했지요.

예수를 죽일 땐 정치와 종교가 하나 되었어요.

 

이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총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곡과 마곡을 이스라엘로 불러들이듯이 사단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일에 합세 하게 만들었어요.

그리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사단의 권세를 초토화 시켜 버린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서 뱀의 머리를 한방에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다 끄집어 낸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에스겔 식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을 치려던 곡과 마곡의 세력들이 모두 다 죽었어요.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났어요.

이젠 땅에 사람이 아니고 하늘에 사람이에요.

하늘에 사람이 아니니 보이는 성전에 매일 필요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내 주셔서 마음속에 성전을 짓게 하신 겁니다.

성신이 짓는 성전은 죄를 이긴 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어요.

다른 말로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은 성도들에게만 성전이 지어지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로 죄사함이 주어진다고 생각했어요.

짐승의 피가 죄사함을 준다고 믿었어요.

만약에 짐승의 피가 죄사함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 이미 성령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새 성전을 지어 주었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짐승의 제사로 성신을 받은 사람은 없어요.

이는 성신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근거로 주어지는 분이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한 후에 죽은 해골과 같은 성도들에게 임하여서 새사람으로 살려내고 그 속에 새 성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이 오심으로 살아났어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백성들을 몽땅 안고 죽였어요.

그러자 성령은 예수님이 죽인 자들을 살려 내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만 십자가에서 함께 죽여요.

그리곤 승천하셔서 성령을 자기가 죽인 자기백성들에게 보내서 살려내는 것입니다.

살려내서 하나님이 거할 성전으로 만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신 것이에요.

처소란? 성전입니다.

예수님은 이 처소를 성령이라고 했어요.

 

다른 보혜사가 오면 예수님이 그들 속에 거한다고 하셨어요.

성령은 예수님과 성도를 거하게 하는 전을 만들어서 영원히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성도를 일컬어 성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세요.

성령이 언제 온다고 합니까?예수님이 영광을 받고 난 후에 온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해서 성령이 오지 아니하였다고 하지요.

성령이 언제 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아야 해요.

그럼 예수님은 언제 영광을 받았나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받았어요.

 

그럼 성령은 언제 온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오신 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해요.

 

피 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 앞에서 피는 어떤 피 입니까?

의로운 제물의 피 이지요.

 

구약 율법에서 말할 때 인간의 죄를 의로운 제물의 희생으로 사해지지요.

이는 죄인은 의로운 분이 대신 죽어 주어야 생명을 공급 받을 수 있단 말입니다.

죄인은 희생 제물의 생명을 공급받은 셈입니다.

마치 수혈 받는 것과 같아요.

 

성령이 짓는 성전은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지어져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 속에서만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땅에 쏟으신 것은 땅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땅이란? 자기 백성들을 말합니다.

 

초막절에 실로암의 물을 성전에 갖다 붓게 함으로서 죄인이 죄사함을 입는 생명의 역사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자로부터 일어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이 성전을 지어준 성도는 보이는 성전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아요.

초막절에 실로암 못에 가서 물을 길어 성전에 부을 필요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성령을 구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구한다고 오는 분이 아니에요.

 

자기백성이면 자동적으로 오세요.

오셔서 그 속에 성전을 지어 주어요.

이렇게 성전이 자기 안에 지어진 것을 아는 성도는 예수님(하나님)을 밖에서 찾지 않아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누가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여도 나가지 말고 골방에 있다고 하여도 가지 말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성도 안에 계세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세요.

 

성도는 자기 안에서 예수님이 공급해 주는 생명으로 살아요.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요한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뿌리가 공급해 주는 생명의 진액이라고 했어요.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요.

누구에게 지시 받을 필요도 없어요.

누구에게 지시를 받아서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의심해 보아야 해요.

 

목사가 잔소리 하면 하고!

잔소리 안하면 안하는 것은 종교 생활하는 것이지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에요.

또 목사가 성도를 시켜서 하라고 하는 것도 반칙이에요.

 

강요할 필요가 없어요.

복음만 전하면 그 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성도는 스스로 알아서 해요.

그러니 스스로 확인해 보세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너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가 스스로 확증하라고 했잖아요.

만약 그리스도가 없으면 버리운 자라는 겁니다.

가짜란 말입니다.

자기 안에 생명이 없는 가짜이니 타율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예수를 믿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안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칩니까?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생명의 냄새를 풍기고 다닙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풍기지 않으면 여러분은 가짜입니다.

스스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수의 강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몰고 다녀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생명을 살려내는 능력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음속에 성령이 지은 성전이 이루어져서 생수가 흘러넘치는 성도는 예수의 피를 토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안에 성령이 거하십니까?

당신은 성전이십니까?

예수가 있습니까?

그럼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생수가 넘치는 성전을 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날마다 찬양합니다. 이 찬양이 세세토록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