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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47강. 율법과 예수님 (요 7:14-24)

by coroa 2021. 5. 20.

 

[47강. 율법과 예수님 (요 7:14-24)]

-.정낙원 목사

 

몇 년 전에 어느 집사님을 만나서 나눈 대화 내용이 생각납니다.

집사님이 저에게 목사님은 요한계시록 설교를 합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그럼 하지요.

 

그러자 조금 의외란 반응으로 말하는 겁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이 그러는데 요한 계시록은 함부로 손대면 큰일 난다고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 그게 성경에 나와 있습니까?

성경에 목사만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였습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요한계시록을 전문으로 신학(神學)을 하신 목사님들이라야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을 할 수가 있을게 아닙니까?

 

집사님 성경은 누가 기록했습니까?

제자들이지요.

제자들이 자기 지식으로 기록했습니까?

아니지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지요.

 

성경이 자증하기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다고 하잖아요.

그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경을 다 이해 할 수가 있겠지요.

논리적으로 보면 그렇잖아요.

 

집사님 성령을 받았습니까?

그럼 집사님은 집사님이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하는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라야 맞지요.

그런데 지금 집사님에 저에게 하는 말은 집사님이 안 믿어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저는 집사님이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몰라요.

안 믿어지는데도 자존심 상해서 믿는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믿어져서 믿는다고 하는지 몰라요.

 

집사님은 예수가 믿어지십니까?

제가 믿어지십니까? 라고 묻는 것은 믿습니다! 라는 것과 믿어지십니까? 는 다르기 때문이에요.

믿습니다! 라는 것은 아무나 고백할 수 있어요.

믿습니다! 는 자기 믿음이에요.

그러나 믿어지십니까! 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은 이성적으로는 믿어지지가 않는데 이상하게 믿어져요.

분명히 안 믿어져야 하는데 믿어진단 말입니다.

이 믿음은 특징이 있어요.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막말로 다른 사람이 다 이단이라고 해도 염려가 안 돼요.

내 행실을 보면 형편없는데도 이상하게 난 구원 받았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럼 다시 묻습니다.

집사님은 예수가 믿어지십니까?

예수님께서 집사님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어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세요?

예수님의 피가 집사님의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렇게 물으니 대답을 못하겠네요.

믿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믿는 것 같기도 하네요. 

아주 극단적으로 말해서 혹시 집사님이 앞으로 살면서 살인을 하거나 강도짓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속된 말로 타락된 삶을 산다고 해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어지십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사정으로 인해서 교회도 안 다녔다고 합시다.

그래도 구원을 받는다고 믿어지십니까?

 

대답을 못하겠지요.

대답을 못하는 것은 확신이 없어서 그래요.

한마디로 안 믿어지기 때문인 겁니다.

 

예수는 누구를 위해서 믿어주는게 아닙니다.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에요.

믿어지느냐!

아니면 믿어지지 않는데도 믿는 척 하느냐! 는 전혀 다른 문제에요.

 

믿어지면 믿어진다!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 하세요.

괜히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속지 않아요.

 

스스로를 속이지 마세요.

예수가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교회 다니는 것은 취미 생활하는 겁니다.

마치 동호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과 같아요.

 

난 취미상 절에 가는 것보다 교회가 좋습니다!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요.

그건 신앙생활이 아니고 취미로 종교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에 탓할 이유는 없어요.

하지만 교회 다니는 것을 예수 믿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건 문제가 복잡해 져요.

신앙은 마음으로 믿어져야지만 할 수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믿어지지도 않는데도 교회를 다니는 것은 체면 때문입니다.

남의 이목(耳目) 때문에 하는 위선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남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눈치도 살필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은 목사들만 깨닫는 전유물이 아닙니다.

목사들은 특별히 다른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집사님이 성령을 받았다면 그 성령이 요한계시록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집사님이 받은 성령이 요한계시록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누가 썼나요.

사도 요한이 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지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도요한이 천국에 올라가서 천국에 모습을 보았지요.

그럼 사도요한이 천국에 올라간 겁니까?

성령이 데리고 간 겁니까?

성령이 데리고 갔지요.

 

그럼 사도요한을 천국으로 데리고 간 성령이 지금 집사님에게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집사님도 천국을 볼 수가 있겠지요.

지금은 성령이 오면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이 믿어지게 하세요.

그러니 사도요한처럼 천국에 안가도 사도요한이 본 천국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천국이 믿어지는 사람은 더 이상 날 천국을 보게 해 주세요.

그러지 않아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는 것이 성경 해석하는 자격증이 아니에요.

목사라는 직에 현혹당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비밀은 인간의 지혜나 지식으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목사나 신학자들에게 기(氣)가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신학에 매몰이 되면 성경을 해석하는데 방해가 되어요.

신학을 하게 되면 하나의 관(觀)이 생깁니다.

관(觀)이란? 보는 눈을 말하는데 이는 마치 안경을 쓴 것과 같습니다.

노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노랗게 보이고!

검은 안경을 쓰고 보면 검게 보이듯이 그럽니다.

 

이 시대 목사님들마다 성경 해석이 제 각각인 것은 신학교에서 전부 성경을 해석하는 안경 하나씩 받아 와서 그럽니다.

교단마다 신학이 다 다릅니다.

어느 신학이 맞습니까? 라고 물으면 없습니다.

이 세상엔 성경적으로 맞는 신학이 단 한 군데도 없어요.

다 틀려요.

 

하나님은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경을 깨닫도록 하신 겁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는 성경의 해석은 모두가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을 해요.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약속이 옛 언약과 새 언약 두 개라고 했지요.

성경을 구약과 신약이라고 합니다.

구약과 신약이란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옛 것은 지나간 것이고, 새 것은 새로운 것입니다.

그럼 새 언약이 진짜가 되겠지요.

새 언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피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모든 성경을 예수님 중심으로 해석을 하도록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의(義)로 결론을 맺으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것을 말하면 전부 가짜들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했지요.

맞아요.

예수님의 피로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의 종점입니다. 

성령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은 모두가 한결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말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왜? 서두에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이 이런 사상을 잘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초막절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때” 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은 “내 때” 가 아니라고 하신 것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직 죽을 때가 아니란 차원에서 그리 말씀하셨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으로 죽어야 하기 때문에 유월절에 죽어야 합니다.

유월절은 봄 절기이고 초막절을 가을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죽을 때가 아니기 때문에 내 때가 아니라고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에 올라가라고 할 때는 내 때가 아니라고 하며 안 올라가실 것처럼 말씀을 하시고선 오늘 본문을 보면 올라가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용납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엔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율법사와 서기관들이 즐비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신학박사들이 있었습니다.

 

말씀(율법)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전유물입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한 영역입니다.

백성들도 당연하게 생각하여서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무식한 분입니다.

요즘 말로 무자격자에요.

신학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목사라는 자격증도 없습니다.

촌 놈과 같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니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니 전문적으로 배우지도 아니한 사람이 어찌 가르치느냐 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전도사(傳道師)와 강도사(講道師)와 목사(牧師)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전도사는 신학교에 다니는 신학생들이 전도사 고시를 보아서 자격을 줍니다.

전도사에겐 말씀을 가르치는 권한은 없어요.

하지만 주일학교나 청년부에겐 한시적으로 허락해요.

 

흔히 말하는 주일 대 예배나 오후 예배같이 장년들을 위한 설교를 하려면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도사 고시를 보고 합격을 하여야 합니다.

강도사란 말씀을 강론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의 장로교 교단의 헌법에 의하면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은 강도사부터 주어집니다.

 

당시 유대사회도 이런 신학교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랍비라는 유명한 스승 밑에서 배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가말리엘이라는 교법사가 나오지요.

이 사람이 그 당시 최고로 유명한 랍비였습니다.

사도바울도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문하생이라는 것이 지금 식으로 하면 어느 신학교 출신이냐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서도 누구한데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신학교도 안 나온 사람이 성경을 가르치고 있어요.

이건 그 당시 정서로는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일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은 구약 성경입니다.

그런데 구약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했어요.

 

아람어는 바벨론어입니다.

유대인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는 생활 속에서 사라지고 문서로만 남았어요.

율법은 문서이니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시절에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과거 일제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말을 사용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이젠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습니다.

로마는 헬라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는 아람어와 헬라어를 혼용하여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알다시피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져 있으니 히브리어를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율법사와 서기관들을 두어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을 해서 백성들에게 가르친 것입니다.

 

랍비는 히브리어에 능통하여서 구약의 율법을 잘 아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문하에서 배웠는가 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겁니다.

각 종파(宗派)들 사이에서도 나는 누구의 문하생이다! 라는 식의 계보가 형성이 되어서 서로 경쟁하고 자기의 전통들을 내세우곤 했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하게 누구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도 사람들을 가르치니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이 사람이 도대체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 하면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것이 범상치 않아요.

요즘말로 기존 목사들이 가르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신선하지만 정통이 아니니 혼란스러운 겁니다.

 

7장 7절에 보면 예수님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틀렸다고 한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유대인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반면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악함을 고발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 지킨 것을 의라고 여기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동일한 율법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지적하는 그 악함을 오늘 본문에선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건 마치 바울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였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았다면 거짓 종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이런 맥(脈)은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목사가 있어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의 영광거리로 삼고 있는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구하라고 주신 율법으로 어떻게 하나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구할 수 있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그 교훈이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누구 영광을 구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낸 자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스승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종인지 그들이 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말씀을 핑계 삼아 자신의 입신양명을 꿈꾼다면 그건 가짜라는 겁니다.

 

지금 식으로 해석하면 성경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면 하나님의 종이고!

인간들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가르치면 마귀 종이란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땅에 일이란? 먹고 사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 목적이 육신의 배부름에 있다면 십자가의 원수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이라면 마귀 새끼란 말입니다.

 

이 시대 십자가의 원수가 누군가 하면 자기 배를 위하여 신앙을 이용하는 자입니다.

기복사상을 주장하는 목사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이 됩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에 제사장만 2만 명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그 당시 유대인들의 숫자는 약 10만 명이라고 합니다.

당시 인구 밀도로 본다면 5/1이 제사장이었어요.

이들이 성전을 고수하고 율법 신앙을 고수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율법 신앙이 곧 그들의 밥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건 지금도 동일합니다.

우리나라로만 비교한다면 목사들이 차고 넘쳐요.

한 해에 수천 명씩 신학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왜? 신학교에 갈까요?

목사가 매력적인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교회 하나만 꿰차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잖아요.

그야말로 신의 직장인 겁니다.

 

이들에겐 사도바울의 말대로 배가 곧 신인 겁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예수는 이용대상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목사 노릇하는 것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겁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살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은 동일해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과 그 형제들을 통해서 영과 육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세상을 보는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이고, 반대로 예수님의 형제들과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자 하는 자들은 육입니다.

영과 육은 서로의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에는 항상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육은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 것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육은 신앙조차도 세상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에게 유대로 올라가라고 한 것도 결국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 것을 얻고자 하는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7:5절에서는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고 하여 예수님의 생각과 그 형제들의 생각은 다르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들에 마음은 곧 마귀의 마음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이 유대인과 충돌하지 말고 잘 어울려 살기를 바랐어요.

그러자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져야하지요.

타협이란? 다름 아닌 유대인의 악함을 고발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신앙이 틀렸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보낸 신 것은 유대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이사야 8장을 봅니다.



사 8:13-15절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14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15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보낸 거룩한 분은 이스라엘에게는 거치는 반석이 된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거민에겐 함정이고 올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려 넘어진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율법주의인 유대교를 허물기 위해서 작정을 하고 예수님을 보낸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의 신앙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신앙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부수어 버리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율법신앙이 옳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율법 신앙이 옳다고 여긴 것은 조상들의 유전(遺傳)으로 배워왔고 그 배움에 기초하여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기득권층으로서 모든 분야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받아 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신앙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고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이 시대적으로 말하면 마치 교단에서 정통이라고 하면 정통이고 이단이라고 하면 이단이 되는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신앙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그건 예수의 지나치게 주관적인 판단이고 독선이라고 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열등감으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렇다고 본 겁니다.

 

이러한 일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처럼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교회를 비판하면 왜? 그렇게 피해의식이 많으냐고 합니다.

바른 말을 하면 열등감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냐고 말해요.

 

예수님 편에 선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만 증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이 시대 율법신앙인 성화주의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성화주의를 율법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율법 신앙이 자기 영광을 구하듯이 성화신앙도 자기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신앙을 비판하니 왜? 비판하느냐 라고 죽이고자 하였듯이,

지금도 성화를 공격하면 왜? 틀렸다고 하느냐 라고 난리를 치는 겁니다.

십자가 중심의 신앙의 끝에는 예수님이 있지만 성화주의 신앙의 끝에는 자신과 교회가 있어요.

 

여기서 영과 육의 차이점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의 중심엔 예수님이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의 중심엔 자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에겐 내가 곧 신(神)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지요.

이는 자기를 위해서 예수를 믿지 말란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무엇을 해도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래 하려고 해요.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테니 복을 달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줄 테니 복을 달라는 거예요.

 

무슨 일을 해도 조건을 걸어요.

이게 육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게 악한 거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도 자식들에게 이런 거래를 합니다.

공부 잘하면 뭐 사준다고 하잖아요.

그러면 아이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게 위해서 공부를 합니다.

공부해서 엄마가 바라는 점수를 따면 당당하게 요구하잖아요.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법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본성이 법에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늘 흥정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항상 이런 본성을 가지고 예수를 믿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늘 충돌이 일어나는 겁니다.

 

바울이 자기 배를 위해서 믿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지요.



이렇게 되면 우린 모두가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경고가 곧 나를 위한 경고인 겁니다.

우린 이 경고에 손을 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잘 할께요” 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가 나와야 해요.

 

하나님께서 아무리 배를 위해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고 하여도 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난 십자가의 원수일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갈 데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해요.

 

앞으로 잘 할께요! 는 제사이고,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은 긍휼을 구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해요.

긍휼은 못난 사람이 구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잘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못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을 원해요. 

천국엔 잘난 사람은 못가요.

자기가 못난 사람임을 아는 자가 가요.

 

앞으로 잘 할께요!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원함은 죄를 이기고 싶지만 육신이라는 놈이 죄를 못 이겨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에겐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본성을 이기려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의 뜻은 알아요.

잘 믿고 싶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하는 것도 알아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마음이지 그대로 살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진 못해요.

 

율법 중에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것이 된다는 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최선을 다했으니 봐 달라고 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상참작이 없어요.

 

하나님 뜻대로 완전하게 살았느냐 못 살았느냐만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다면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없는 본성을 가진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본성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에 본성을 이길 수 있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 뜻대로 살면 됩니다.

내 의지와 각오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되니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본성이 변하지 않습니다.

본성이 변하지 않고 예수를 따른다면 반드시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성령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본성은 자기 유익을 구하라고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성령이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예수를 믿는 것이 죄라고 지적을 해요.

여기서 성도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요.

 

구약에 보면 다윗이라는 믿음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일컬어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합니다.

 

행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마음에 합한 자라는 것은 마음에 쏙 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일컬어 내 뜻을 다 이루게 한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다윗은 무흠한 사람처럼 들려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다윗은 간음한 자요 살인한 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합니다.

무엇이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한 것이었을까요?

 

시편 51편을 보면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시 51:1-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6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7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 시(詩) 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완전범죄를 꾀하려고 충신인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죽이고 난 후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죄를 고발당하고 난 후의 심경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의 간음하고 자기 죄를 감추려고 충신 우리야를 죽였어요.

우리야는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희생당한 의로운 자입니다.

지금 이런 일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라고 하는 다윗 왕에 의하여서 말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 사건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방법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을 인간들이 말하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흠이 없는 온전한 인간을 만들고자 하였다면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을 겁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기 전에 네 이놈! 하고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야를 죽일 때에도 막아주어야 했어요.

미리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너 왜? 충신인 우리야를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 할 때부터 우리야를 죽이기까지 처음부터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다윗이 완전 범죄로 가장하여 이제 다 되었다 싶을 때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모든 죄과를 낱낱이 고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이런 고발을 당하고 난 후에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1절에 뭐라고 합니까?

긍휼을 구하지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으로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지요.

그러면서 자신은 죄악 중에 출생 하여서 죄를 이기지 못하는 종자라는 것을 실토하고 있어요.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합니다.

이는 죄가 다윗을 끌고 다닌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다윗이 죄를 범한 것은 곧 죄라는 놈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건 회피하거나 핑계 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실존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거예요.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은 의지가 약하거나 각오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죄를 이길 수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지은 죄를 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슬초로 씻겨서 정하게 해 주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죄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어야지만 된다는 겁니다.

우슬초로 정결케 한다는 것은 의로운 제물의 피를 뿌려서 죄를 사해주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의미심장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시 51:8-15=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14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비록 자신이 죄를 지었지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해달라는 겁니다.

즐겁고 기쁜 소리란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뭔가 보니 “주께서 꺾으신 뼈”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꺾으신 뼈란? 우리야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야의 죽음을 주께서 죽게 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건 놀라운 고백입니다.

 

우리야는 분명히 다윗이 죽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곤 우리야를 하나님이 죽였다고 합니다.

이건 문자적인 의미나 내용상으로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자 보세요.

다윗이 우리야를 죽였어요.

그래 놓고선 그 우리야의 죽음을 즐겁고 기쁜 소리로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로 인하여 우리야를 죽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야는 다윗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충신 우리야를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뻔뻔한 고백입니까?

 

다윗이 하는 말이 내 죄 때문에 우리야가 죽었으니 나는 그 우리야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즐겁고 기쁜 소식이 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죄가 사해질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한 말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과 같이 범죄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대신 죽였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여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어주신 예수님을 보시고 용서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고백입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뻔뻔하지요.

아니 자기가 죽여 놓고선 그걸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보니 자기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 다윗의 이 고백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령으로 이 사실을 미리 내다 본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는 것과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마음으로 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비밀을 알게 해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죄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해 준다는 것을 아는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지요.

구원이란?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김 받는 거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 달라는 겁니다.

 

신약식으로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 달라는 겁니다.

믿어지게 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사실을 온 백성들에게 가르치겠다고 합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 죄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용서 해 준다는 사실을 널리 선포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을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시 51:16-19=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주께는 제사를 원치 않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원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합니까?

유대인들에게 하지요.

 

그럼 유대인들이 지금 다윗과 같은 심정이란 말입니까?

아니면 다윗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입니까?

모른다는 말이지요.

 

지금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제사 지내기에 바쁘잖아요.

제사를 열심히 지내면 하나님이 기뻐 할 것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다고 가르치잖아요.

그러니 다윗과 정 반대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듣고 자기 죄를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일어나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였잖아요.

그런데 그 다윗 왕의 후예(後裔)들이라고 자칭하는 자들이 율법을 통하여서 죄를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함에도 이 놈들은 율법으로 제사를 지내고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으로 제사 신앙이 나오면 완전히 헛 다리 짚는 거예요.

율법으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나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율법으로 자기 영광이 나오면 안 됩니다.

율법으로 하나님 영광이 나와야 합니다.

 

그럼 율법이 어떻게 하나님 영광이 나오는지를 살펴봅시다.



먼저 하나님 영광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봅시다.

마귀가 요구하는 영광과 하나님이 바라는 영광이 무엇인지 봅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기 영광을 구한다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책망 받는 것은 그들이 하는 짓이 곧 마귀 짓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지금도 광야에 계신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미혹하였던 것 같은 방법으로 성도를 미혹해요.

마귀는 성도들에게 세상 영광을 차지하라고 미혹을 합니다.

 

마 4:8-9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안한 것은 멋지게 세상에서 성공하여 자기 이름을 드러내 보라는 겁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이 정도 되어야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마귀의 말 속엔 인간들이 바라는 하나님의 아들다움이 들어가 있어요. 

마귀가 바라는 하나님의 아들다움은 세상에서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그럽니다.

하나님이 누구냐?

만유를 지으신 분이 아니냐!

그럼 만유를 지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만유 속에서 영웅이 되어야지 그렇게 굶어서 되겠느냐 고 미혹합니다.

 

마귀가 세상에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은 영웅입니다.

절대로 십자가에 힘없이 죽어가는 그런 나약한 자가 아니에요.

마귀적인 신앙관은 십자가에 죽는 것은 실패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교인들에게 성공신화를 쓰라고 부추깁니다.

 

교회도 크게 짓고 부흥시켜서 이름을 떨쳐 보라고 속삭입니다.

마귀에게 미혹당하면 십자가를 지는 길로 가지 않고 십자가를 이용해서 영웅이 되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버림당하는 길로 가지 않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교회 부흥에 관한 신학은 있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비우고 죽이고자 하는 십자가의 신학은 부재한 것입니다.

교회 부흥 세미나는 있는데, 예수님과 같이 죽자는 세미나는 없어요.

목사들이 마귀가 가르쳐준 부흥에 신학을 가지고 목회를 하니 모든 성도들에게 세상의 출세와 영광을 잡아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와 같은 생각으로 목회를 하는 목사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성도들은 세상 것을 잡으려는 탐욕에 사로잡혀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통 다고! 다고!

새벽부터 밤까지 주세요! 주세요! 뿐이에요.

 

창세기 3: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고 하였지요.

 

가장 “간교하다” 라는 말은 가장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무엇에 다하여 가장 지혜로우냐 하면 육에 대하여 가장 지혜롭다는 말입니다.

뱀이 가장 지혜롭다고 한 것은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 줄 인간보다 마귀가 더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마귀가 바보가 아닙니다.

마귀는 인간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아요.

 

그러니 사십일을 주리신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떡을 주고 세상 영광을 준다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와요.

그러면서 그냥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동원하면서까지 세상 영광을 차지하라고 다가와요.

 

이게 굉장히 중요한 말이에요.

 

사람들은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라고 하는 줄 알아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고 가르치는 줄 알아요.

그러나 정 반대에요.

 

마귀는 항상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다가와요.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유혹하였던 것을 잊어선 안 돼요.

마귀가 예수님에게 하나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시험했어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치 말라고 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 하나가 나옵니다.

마귀는 하나님 말씀을 자기 영광을 위하는데 사용하라고 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 영광을 위하여 도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귀가 하나님 말씀을 자기 영광을 구하는데 사용한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할 테이니 자기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면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고 했으니 내가 말씀대로 살테니 복을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 시대 TV에 나오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모두가 이러한 류의 설교들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설교를 좋아하는 것은 바라는 것들이 같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에요.

서로가 그리는 그림이 같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열광하는 겁니다.

 

모두가 육이기 때문에 그래요.

육에 사람이 소원을 빌면 육에 것 밖에 빌지 못해요.

육에 사람이 영에 것을 빌 수는 없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모두가 율법을 이렇게 적용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한 겁니다.

 

19절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느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의 목적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복을 얻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복을 얻는다는 것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면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지만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 생각했어요.

 

알다시피 복이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잖아요.

일한 것이 없는데도 보너스를 받을 때 복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된 생각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율법을 안 지킨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세상 영광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오직 하나님에 영광을 드러내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는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요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분이라고 하지요.

이는 예수님 안에 아버지의 영광이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 속에 하나님 영광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언제 영광을 받느냐 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영광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예수를 영접하려면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영접할 수가 있게 됩니다.

자기기 죄인인줄 모르고서는 예수를 영접할 이유가 없어요.

마치 아픈 사람이 병원을 찾듯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예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키 위함이잖아요.

구약 식으로 보면 자기 백성은 유대인입니다.

지금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자가 영적으로 유대인이에요.

예수님은 유대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은 어디에 있어야 합니까?

죄에 갇혀 있어야 하지요.

자기가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예수님이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영접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이 작전을 펼치려고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주어서 너희가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라고 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고도 자기들이 죄에 갇혀 있다는 것을 몰랐어요.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주신 거잖아요.

 

갈라디아서를 봅시다.

 

갈 3:19절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율법은 인간들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더해진 것이라고 하지요.

더해졌다는 말은 추가 되었다는 말이에요.

무엇 때문에 추가 되었는가 하면 죄 때문에 추가 된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죄가 없으면 법이 필요가 없어요.

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법이란? 죄가 없는 곳에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이 만약 죄를 짓지 않았으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굳이 율법을 주실 필요가 없었어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미 죄 아래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다! 라고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을 봅시다.

 

롬 3: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려고 주어졌다고 하지요.

죄인에게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죄인에게 율법을 준 것은 입을 막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죄인인데 죄인이 아니라고 하니 율법을 주어서 이래도 죄인이 아니냐! 라고 주둥이를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그 입 다물라!

 

그럼 율법을 제대로 아는 자는 어떻게 하겠어요.

주둥이를 닫겠지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여야겠지요.

율법이 죄인을 드러나게 하는 문제지 라고 한다면 정답은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가장 잘 지킨 사람은 누구냐 하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율법의 조항을 지켰다고 자랑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의 조항들을 지켰다고 자랑하고 있어요.

 

율법을 바로 알았다면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 율법 지켰으니 칭찬해 주세요! 라고 말할 수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누가 누가 율법을 더 많이 잘 지키나 경쟁하고 있었어요.

서로가 자기가 지킨 말씀으로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나 기도했다!

나 전도했다!

난 봉사했다!

난 성경 봤다!

난 주일 안 빠졌다!

난 이만큼 성화했다!

우리교회는 너희 교회와 다르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세요!

다 그런 거잖아요.

하나님이여! 난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살았나이다!

그러니 복을 저에게 주십시오! 라고 자랑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지옥에 가라고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너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진짜 율법을 제대로 보았다면 나를 영접하였을 것이란 말입니다.

날 몰라보는 것을 보니 너희는 마귀새끼들이고 저주 받은 인간들이란 겁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이라는 거울을 주어서 자기 꼬라지를 살피라고 주었어요.

얼굴에 때가 묻어서 거울을 주어서 보라고 했더니 “나 이뻐” 하면서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예수님이 보시기에 유대인들이 지금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율법을 더 많이 잘 지켰느냐 하면서 서로 다투고 있으니 예수님께서 마귀새끼들이라고 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교회들의 모습들이 꼭 유대인들과 같아요.

하나님 말씀으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설치고 다녀요.

 

예수를 믿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난리인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게 아니라고 하니 너는 뭔데 하면서 이단이라고 덤비는 겁니다.

너만 옳고 잘 낫느냐 라고 하면서 덤비고 핍박하는 겁니다.

 

알미니안식 화주의를 외치고 개혁을 외치는 자들이 그래요.

이건 누가 잘나고 못나고의 싸움이 아니고 옳고 그르냐를 지적하는 것임에도 유대인과 같은 사고를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틀렸다고 한다고 화를 내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받은 복이란? 율법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율법이라는 거울을 받은 겁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이라는 거울을 못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줄 알 길이 없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어요.

이것 자체로 엄청난 축복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유대인을 선택하여 율법을 주었어요.

그러면 유대인들에겐 이방인에게서 나올 수 없는 고백이 터져 나와야 해요.

주여 우린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에겐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은 나오지 않아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은 오직 율법을 받은 자만이 토해 낼 수가 있는 고백입니다.

 

이 시대 성도라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겁니다.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논할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가 죄인이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행실엔 하나님이 바라는 선(善)이 없습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해서 되느냐 그러면 안돼요.

그건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그게 하나님 앞에 의(義)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착해지라고 율법을 주시지 않았어요.

인간에게선 선이 없다는 것을 알라고 주셨어요.

세상 사람들에게 죄에 개념을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왜?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죄인가를 알려 주어야 해요.

그게 성도가 할 일입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하나님께선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죄라고 하지 않아요.

이건 인간의 행위가 죄가 아니란 말이 아니고 인간의 행위은 죄인의 몸짓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이건 죄이고 저건 죄가 아니다 라는 식으로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는 모두가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알려 주시려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십계명에 하지 말라는 것은 넌 이런 자라는 것입니다.

너는 살인자이고 도적놈이고 남의 아내를 탐하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넌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지!

너 십계명대로 살아라! 라는 말이 아니에요.

목적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막 살아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고자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의 실존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양 같아서 다 그릇 행하여 각각 제 길로 가는 자들입니다.

양이 제 길로 가면 어디로 가는 줄 아세요.

죽는 곳으로 가요.

꼭 가시덤불 시궁창으로 가요.

 

죄인이 가장 잘 하는게 뭔 줄 아세요.

죄 짓는 겁니다.

이건 아주 쉬워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나와요.

본능이 척척 알아서 해요.

 

죄 짓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아세요.

스릴이 넘치고 짜릿해요.

몰래 먹은 떡이 맛이 있고 도적질 한 물이 달다고 한 것은 금지된 것을 행할 때 오는 그 짜릿함을 말하는 거예요.

 

성경을 밤새도록 읽는 사람은 없어요.

아마도?

그러나 게임은 밤새도록 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에요.

도박하는 사람은 몇몇일 씩 밤새워가도 피곤한 줄 모르고 해요.

그러나 예배 두 시간 드리라고 하면 난리가 납니다.

10분만 지나 보세요.

벌써 몸이 배배꼬이고 속이 뒤틀리잖아요.

 

이게 다 죄성 때문입니다.

죄 지으라고 하면 몇 날 몇 일 씩 밤새워가면서도 지겨워하지 않고 해요.

결혼 생활을 오래한 남편들을 보면 내 마누라에겐 인색해도 남의 마누라에겐 어찌 그리 자비롭습니까?

내 마누라가 싫어서가 아니라 신선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일평생 금지된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가 훨씬 잘나고 아름다운데도 남의 남편 남의 아내를 기웃거리는 것은 모두가 죄가 금지된 것을 소망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면서 남에 것을 도적질 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한 겁니다.

 

이건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것 보다 너는 이런 종자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받기 전에는 내가 이런 종자인줄 몰랐는데 율법을 받고 보니 내가 이런 종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바리새인들이 정죄를 하자 예수님이 땅에 글씨를 쓰시면서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지요.

이는 너희들이 율법을 알았다면 이 여인을 정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도 똑 같은 놈이란 겁니다.

너희 속에도 음욕이 가득하지 않느냐 이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너희가 이 여인을 정죄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애초부터 지킴에 목적을 두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율법 지킴을 가지고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은 악한 것이 되는 겁니다.

이 악이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사건으로 발전하게 되었어요.

 

결국 인간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죽이는 일을 하는 종자들인 겁니다.

나 살기 위해서 하나님도 죽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독사새끼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라고 했지요.

독사는 살모사(殺母蛇)를 말해요.

살모사(殺母蛇)란 어미 잡아먹는 놈이란 뜻입니다.

이는 부모 잡아먹는 놈들이라는 말입니다.

 

맞아요.

인간은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준 어미를 잡아 먹는 새끼들입니다.

새끼들을 키워보면 알잖아요.

새끼들이 가장 만만하게 보는게 누군가 하면 엄마에요.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여야 할 엄마를 가장 우습게 봐요.

 

새끼들이 엄마에게 대드는 것을 보세요.

우리들의 자식들을 보세요.

이게 다 살모사(殺母蛇) 새끼라서 그래요.

우리도 그렇게 살아왔어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엄마가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을 가장 잘 사랑하고 살아야 할 성도들이 가장 속 썩히고 있어요.

참으로 이상한 것은 복음을 아는 것과 게으름이 비례되어 나타나요.

 

교회 안에서 보면 복음을 안다고 하면 율법 아래 있을 때보다 더 잘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가 않아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더 뺀질거려요.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뭐라고 하면 행함으로 구원 받나요! 하면서 염장을 질러요.

 

주일날 교회오고 교회에 연보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면 뭔가 손해보고 바보짓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안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무슨 놈에 신앙인지 모르겠어요.

 

복음을 알면 더 모이고,

더 사랑하고,

더 봉사하고,

더 열심을 내어야 하는데 실상은 정 반대로 나타나요.

이건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기 영광을 구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복음을 자기 편한 쪽으로 사용하는 것은 율법을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과 같아요.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에 죽고 살아나야 해요.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나를 십자가에 넘겨주고 예수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나로 살아나야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자기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겠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것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해서 자기를 쳐서 복음 앞에 복종케 하는 삶을 살고자 했어요.

자기의 종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과거엔 내 영광을 위하여 살았지만 이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것은 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좀 깊이 깨달으라는 뜻으로 말하는 겁니다. 

충성을 끄집어내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감사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용서받고 사는 것은 모두가 이런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의 대속하심에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를 주장 할 때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감사치 못하는 것은 아직 복음이 주는 풍성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은혜는 술처럼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요.

술 취한 사람이 근심 걱정 하는 것 보았나요?

없어요.

술 취하면 세상 근심 걱정을 잊어 버려요.

그러려고 술을 마시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 받은 것을 낮 술에 취한 모습으로 묘사한 것은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모습과 방불한 모습들이 나타나기 때문이에요.

두려움도 근심 걱정도 다 잊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얻은 구원의 기쁨과 천국에 대한 소망이 그들의 마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물질을 초월하고 세상권세에 대한 두려움도 초월하고 날마다 모이고 기쁨으로 교제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기분 좋게 해 줘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나를 삼층천으로 데리고 갑니다.

삼층천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해요.

 

삼층천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시시하게 보여요.

없음 속에서도 감사가 나와요.

이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능력인 겁니다.

 

부디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항상 넘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기쁨을 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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