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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54강. 공짜로 주어진 거룩 (히 10:8-18)

by coroa 2021. 5. 18.

 

[54강. 공짜로 주어진 거룩 (히 10:8-18)]

-.정낙원 목사

 

오늘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연애편지와 같아요.
이는 대상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각종 서신서를 보낼 때도 수신자는 “주께 사랑을 입은 성도” 에요.
그러니 성경은 성도만이 알 수가 있는 비밀의 책인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께서 감동으로 기록케 하신 이유도 자기 백성들만 알아먹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는 열린 문서이지만 타인에게는 닫힌 문서에요.
이러면 자기 백성들과 타인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다르겠지요.
자기 백성들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해석을 하는데 타인들은 인간들 이야기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이 천국 이야기를 말씀 하실 때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희에게는 비밀이라고 하였어요.
예수님께 선택을 입은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은 허락이 되었지만 예수님의 선택을 입지 않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 받지 않은 자들에게 아무리 예수님을 이야기 해줘도 못 알아들어요.
 
예수를 누가 가장 핍박을 했나요?
서기관과 율법사들이에요.
이들은 전문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이에요.
당시에는 율법을 필사하면서 연구하는 서기관들도 있었고!
율법을 강론하는 율법사도 있었고!
백성들을 가르치는 랍비들도 있었고!
제사장들이 수두룩했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나 목사들이 즐비 했어요.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전혀 감(感)을 잡지도 못하고 이해 할 수가 없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들에게는 성경을 해석하는 틀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기들만의 신학이 있었어요.
 
유대교 신학이 율법이에요.
율법은 인간 쪽에서 행하여야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든 율법을 인간이 행하여야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는 율법을 전혀 다르게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문자 속에 담겨진 진정한 의미인 율법 정신을 끄집어내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을 한 것입니다.
 
유대교 식으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면 안 되어요.
병자는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고쳐야 해요.
안식일은 그냥 병에 시달리고 있어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병으로부터 자유케 하여 주신 것입니다.
병으로부터 자유케 되니까 병자가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러한 것을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자기들이 배워온 신학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를 하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나 말씀을 해석하는 것에 사사건건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산상보훈이 그 대표적인 말씀이에요.
산상보훈을 보면 예수님이 그럽니다.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이건 기존에 해석하는 것을 부정하는 말씀이에요.
너희는 이렇게 가르쳤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을 한다는 것은 유대교의 율법적 신학을 완전히 깨트리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말씀을 해석하는 구조(형식) 자체가 달랐어요.
유대인들은 옛 언약이라는 구조로 해석했지만, 예수님은 새 언약이라는 구조로 해석했어요.
옛 언약은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해석이지만, 새 언약은 인간은 죄인이라서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말씀은 오직 예수님만이 지킬 수 있다는 해석이에요.
 
옛 언약의 구조는 인간들이 쌓아온 역사(경험)를 바탕으로 해석하였어요.
이걸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합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역사적 해석이에요.
쉬운 말로 전통과 정통 신앙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너희가 장로들의 유전으로 가르치니까 하나님을 헛되이 섬긴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는데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외식으로 섬긴다고 하였어요.
 
외식이 뭐냐?
마음에는 하기 싫은데 법으로 하라고 하니까 마지 못해서 하는 거에요.
이건 마치 고약한 며느리가 시집에 가기 싫은데 명절이니까 어쩔 수없이 마음에도 없이 주둥이 내 밀고 가는 것과 같아요.
 
이런 것을 제사만 지내고 긍휼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제사라는 형식은 가지고 있지만 정작 제사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하는 긍휼의 마음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제사 지냈잖아요 만 있었지,
왜 제사를 지내는지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겁니다.
 
백성들은 문자적으로 했어요.
하나님이 제사 지내라고 해서 제사를 지냈잖아요.
뭐가 문제인데요,
 
하나님이,
내가 언제 제사를 지내라고 했느냐,
긍휼을 배우라고 했지,
 
하나님 ; 너희들 왜 제사지내는데,
백성들 ; 하나님이 죄 지으면 지내라고 했잖아요,
하나님 ; 그럼 제사를 어떤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데,
상한 마음으로 애통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하잖아,
그런데 너희들은 그런 마음이 없잖아,
하나님이 제사 지내라고 해서 지냈으니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라고 지랄을 떨잖아,
그딴 제사는 다시는 지내지 마,
다시는 내 앞에 이떤 것들 가지고 오지마,
나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게 이사야 1장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문자로만 이해하였어요.
문자는 내용을 담는 기호에요.
그릇과 같아요.
유대인들의 제사는 제사라는 그릇만 있지 그 안에 내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외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담 안에서 바라보는 구조에요.
알다시피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법 아래 가두어졌어요.
선악의 법은 죽음의 법이에요.
그러니 아담의 해석은 “죽은 자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죄인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므로 틀린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선악의 법으로 해석했어요.
그러므로 유대인의 성경 해석으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죽음이 역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곳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예수님은 생명의 법으로 살아가십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법으로 율법을 해석하였어요.
예수님의 성경 해석과 유대인들의 성경 해석이 달랐어요.
그래서 율법 해석에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인간들이 고수하는 신앙을 깨트리면서 일을 하십니다.
이게 구약에서는 선지자들의 출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선지자가 출현했다는 것은 기존의 신앙이 틀렸다는 겁니다.
선지자의 출현 자체가 기존 신앙을 부정하는 것을 깔고 있어요.
 
당시엔 궁중선지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선지자로 세워요.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는 기존의 신앙을 부정하면서 다가와요.
 
궁중선지자들은 조상들이 해석한 틀로서 하나님의 뜻을 해석했어요.
한마디로 정통 신학으로 해석을 하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은 정통 신학을 부정해 버려요.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게 틀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궁중선지자는 땅에 노선이고,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는 하늘에 노선이에요.
땅의 노선은 땅 차원으로 해석하고, 하늘의 노선은 하늘 차원으로 해석해요.
하늘의 노선이 땅에 침투하면 반드시 땅의 노선을 깨트리면서 와요.
 
그러니 하늘 노선의 선지자가 출현했다는 것은 기존 것은 다 틀렸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땅에서 정통이라고 자부하던 기존의 궁중 선지자들이 극렬하게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선지자들은 이들의 손에 죽임을 당해요.
여기서 발생 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선취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지자들의 맥(脈)을 따라 오셨어요.
선지자들과 같은 사상으로 말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세상 끝 날까지 쭈욱~ 이어져요.
요한계시록에서 이들을 일컬어 두 증인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이러한 사건은 늘 반복하여서 일어나고 있어요.
복음이 비 복음으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의 맥을 따라서 오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해석하였지만 난 너희들이 해석해 온 것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너희들이 해석하는 그것이 죄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 해석이 틀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종교지도자들이 가만 두면 안 되니까 극렬하게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가만 두면 자기들 밥그릇이 다 날아가는데 누가 좋아라 하겠어요.
그래서 죽인 겁니다.
 
이러한 맥(脈)은 지금도 내려오고 있어요.
땅에 속한 자들은 자기들이 배워온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선지자들과 같이 하늘에 속한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을 합니다.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면 정통 신학에 어긋난다고 반발을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들마다 자기 신학이 있어요.
보수주의는 보수주의에서 배운 신학이라는 틀로 성경을 해석하고!
진보주의는 진보주의에서 배운 신학이라는 틀로 성경을 해석해요.
그러니 다 달라요.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제 입맛대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딱 하나 통일되는 것이 있어요.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고자 하면 하나로 똘똘 뭉쳐서 덤벼요.
서로 신학적인 것으로 싸우다가도 교회를 건들거나 목사의 권위나 지위에 손상을 가하는 일을 하면 미친개처럼 달려들어서 물어뜯어요.
 
이건 마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평상시엔 서로 으르렁 거리면서 앙숙으로 지냈지만 예수님을 죽일 때는 하나가 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율법 신앙의 상징인 성전을 건든다는 것은 공동의 이익이 무너지기 때문에 가만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야합(野合)해서 예수를 죽인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이게 모두가 성경을 자기 밥벌이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다 용남해도 자기 밥그릇을 빼앗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건들다가 죽임 당했어요.
예수님이 성전을 헐라고 했어요.
이건 하나님의 집이 아니고 강도의 굴혈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뚜껑이 열린 겁니다.
넌 뭔데!
너 어디서 공부를 했어!
너 어느 신학교 출신이야!
왜 우리 하고 달라!
너 이단이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정통 칼빈주의에서 벗어난다고 해요.
칼빈 신학이 무슨 무오(無誤)한 것처럼 생각해요.
장로교에선 칼빈을 장로교 창시자라고 추종하지만 감리교와 같은 알미니안 계통에선 칼빈을 기독교 신자로 보지 않아요.
그만큼 신학이 달라요.
그러니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해답이 없어요.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 신학과 바리새인 신학이 달랐어요.
그러나 예수를 죽이는 데는 같았어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그 당시 양대 산맥이었으니 모든 유대신학이 다 예수를 죽이는데 합세 했다고 보면 됩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신학을 문제 삼고 넌 누구냐!
어디서 배웠느냐!
너 어디서 그런 해석법을 배웠느냐! 고 따집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
이 성경은 모두가 나에게 대하여서 말하고 있다!
이 성전을 헐어라!
그럼 내가 사흘 만에 짓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온 교회가 교파를 초월하여서 똘똘 뭉친 겁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자기들의 밥 그릇을 다 빼앗기게 생겼어요.
그래서 이단이라고 정죄하여 죽인 겁니다.
 
지금도 이런 일은 반복해서 일어나요.
십자가를 말하면 공격을 해요.
여기서 집고 넘어 가야 할 게 있어요.
 
목사들 치고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다 십자가를 말해요.
하지만 십자가를 가지고 자기 존립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해요.
이런 십자가는 가짜에요.
 
그러니 십자가를 가지고 교회부흥을 외치고 있는 겁니다.
자기 조직을 관리하는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를 이용하여서 자기 탐욕을 챙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정신과 전혀 다른 교회나 조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뭔가 살 궁리를 하고자 하는 것은 가짜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그건 십자가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자기 탐욕을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를 말하면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고자 한다거나,
자신이 속한 조직을 사수하고자 한다거나,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한다거나,
그건 십자가 정신과 반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어요.
 
십자가는 우리 존립 기반을 허물어요.
날마다 나를 해체시키고 내가 쌓아온 것을 허물어 버려요.
우리의 업적은 인정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 이외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무지하게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십자가는 반드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교회를 치게 되어 있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이용하여서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하고자 해요.
눈만 뜨면 십자가를 이용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사고를 허물어 버리는 일을 하세요.
그것이 교회이든 조직이든 개인이든지 깨부수어요.
허문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본성은 자기 흔적을 쌓아가고자 하기 때문이에요.
 
죄인은 습관적으로 하나님도 자기 역사(경험) 속에 가두어 두고자 해요.
그리하여 내 하나님을 만들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는 인간은 보이는 신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신을 원한다는 말은 예측 가능한 것을 바란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시켜서 섬기고자 한단 말이에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은 낯선 하나님은 싫어해요.
자기가 경험된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이런 사고가 비결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은혜 받는 비결!
축복 받는 비결!
은사 받는 비결!
구원 받는 비결!
 
비결이 뭡니까?
틀이에요.
이렇게 하면 반드시 된다는 법칙이잖아요.
이 시대 목사들이 그러잖아요.
 
구원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십시오.
은혜 받고 싶습니까?
저렇게 하십시오.
축복 받고 싶습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이런 것을 성경은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어떤 사람이 병이 걸렸어요.
병원에 가서도 못 고칩니다.
그러다가 금식기도를 해서 병을 고쳤어요.
그러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하나의 경험으로 가지고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하였더니 병을 고쳤다는 하나의 방법을 소유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병이 들면 금식을 합니다.
왜냐하면! 금식기도를 해서 병을 고침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컬어 자기 계시라고 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렇게 일하셨다는 자기 신앙의 역사에요.
 
이렇게 하면 응답을 받는다는 틀(공식)이 하나 생긴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의 고정된 틀을 형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병들면 금식 기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을 이러한 틀에서 해석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복 사상이 나오고 귀신론이 나온 겁니다.
이런 사고가 갖가지 비결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런 비결(틀)에서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병들었습니까?
사업이 망했습니까?
금식 기도 하세요.
그런단 말입니다.
결국 금식기도는 병을 고치는 길이 된다는 하나의 비결을 갖게 된 것입니다.
 
신앙이 어떤 비결이라는 고정화 된 틀이 형성되면 하나님은 그 틀 속에서 움직여 주어야 해요.
이게 구약 시대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전쟁터에 메고 간 것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스라엘을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 성(城)도 허물고 요단강도 건넜어요.
이스라엘백성들 속엔 법궤를 앞세우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사고가 팽배했어요.
한마디로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는 마법(魔法)의 상자인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블레셋과 전쟁을 하다가 지고 말았어요.
이스라엘이 전쟁에 패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그래서 낸 결론이 아! 여호와의 법궤를 앞세우지 않아서 졌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에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전쟁터에 메고 옵니다.
그러자 군사들이 사기가 충천합니다.
또한 블레셋 사람들도 이 법궤를 앞세우고 여리고도 허물고 요단강도 건넜다는 소문을 들은 터이라 이제 우린 죽었다고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나 블레셋 사람들은 똑같이 생각하고 있어요.
법궤를 앞세우면 전쟁에 이긴다는 법칙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 받는 비결이니!
구원받는 비결을 알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전쟁을 하자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법궤가 힘을 한 번 쓰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거에요.
예전과 같으면 법궤를 앞세우면 어떤 능력이 나타나서 적군을 초토화 시켜주어야 했어요.
그런데 이번은 그렇지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겨 버립니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상상치 못할 일이에요.
물론 블레셋도 마찬가지에요.
 
왜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법궤가 힘을 쓰지 못하였을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앞세우면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한다는 틀을 고수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이 틀대로 움직이면 법궤는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이 틀에 가두어지면 무슨 문제가 생기면 법궤를 앞세우면 다 해결을 해주어야 하고 말아져요.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조정당하고 있는 꼴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틀을 깨트리는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예측으로 가늠 할 수가 없도록 하신 겁니다.
예측이 가늠 할 수 없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움직일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예상치 못한 법궤를 이방인인 블레셋에 빼앗기는 일을 당하고 만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선 야! 법궤도 이젠 약발이 다 떨어 졌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법궤를 잘 보관 할 이유도 없네!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는 블레셋도 마찬가지에요.
괜히 쫄았네!
전쟁에서 힘 한번 쓰지 못한 법궤이니까 우습게 여기게 된 겁니다.
 
그래서 법궤를 아스돗이라고 하는 동네의 다곤의 신당에 처박아 놓았어요.
그러자 이제부터 법궤가 살아서 펄펄 뜁니다.
법궤가 다곤 신의 두 손 모가지와 머리통을 작살을 내서 전부 부러져 있는 겁니다.
그러자 아스돗 사람들이 야! 이 물건은 재수 없는 물건이라고 다른 동네로 옮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가드로 옮겼는데 거기서는 온 성읍에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빠지는 겁니다.
이에 가드 사람들도 법궤를 에그론으로 보냅니다.
에그론에도 동일한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젠 법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러자 법궤가 소 두 마리 등에 타고 이랴~ 하면서 자기가 갈 길을 찾아 갑니다.
법궤 스스로가 이스라엘로 돌아 온 겁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모두 간섭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아니 전쟁에선 힘 한번 쓰지 않던 법궤가 왜 이방인들에겐 힘을 발휘합니까?
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 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앞세우면 전쟁을 이긴다는 고정된 틀을 가졌고!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은 야! 이 법궤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법궤가 능력의 상징이라는 고정화된 틀을 깨려고 응답하지 않았고!
블레셋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궤라고 여긴 그 틀을 깨기 위해서 살아서 역사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법궤가 능력 있는 줄 알고 앞세웠는데 죽었고!
이방인은 법궤가 죽었다고 우습게 여겼는데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방법이 없어요.
법궤가 자기 마음대로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게 일을 하고 계신 겁니다.
이는 곧 하나님은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게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가늠 할 수가 없어요.
이 시대 갖가지 비결이라는 신앙은 전부가 점쟁이 신앙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의 고정화된 틀을 깨트리기 위해서 역사를 초월한 묵시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겁니다.
묵시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지금까지 인간들이 틀을 형성해 왔던 것이 죄로 규정이 되어 버려요.
 
인간의 본성은 자기 경험을 신앙으로 붙잡고자 해요.
예를 들어서 내가 오늘은 새벽기도 했더니 일이 잘 풀리더라!
그러면 이 사람은 새벽기도를 자기 일이 잘 풀린다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새벽기도가 하나의 주술이 되고 말아요.
이러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새벽기도를 하면 일이 안 되는 쪽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럼 이 사람은 어! 왜 그러지!
내가 새벽기도를 적게 해서 그런가? 라고 방법론을 모색하게 됩니다.
30분 기도하던 것을 1시간 늘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방법을 강구하게 되어요.
이게 우상성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사고가 죄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도리어 기도하면 잘 되던 일도 안 되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목사가 밤마다 철야하고 기도하면 새로운 교인이 옵니다.
그러면 이 목사는 야! 철야하면 교회가 부흥이 되는구나! 라는 공식을 가져요.
이게 자기 계시에요.
목사들이 그래요.
교회 부흥 안 되면 금식기도 해보라고 해요.
금식기도가 교회부흥을 주는 비결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그랬어요.
제 경험이에요.
철야하고 산기도 하는 것이 교회 부흥을 위한 한 방법론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철야하고 산기도 하면 교인들을 다른 교회로 옮겨 버려요.
나의 우상성을 깨트리기 위함입니다.
 
그럼 에라~ 모르겠다 기도 안 해요.
이러면 또 교인이 와요.
그럼 어라~ 가만있으니 교인들이 오네!
그래서 그냥 놀아요.
그러면 또 나가요.
 
이러면 종잡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께 그럼 날 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따져요.
그럼 하나님이 그래요.
방법이 없어! 그럽니다.
 
하나님이 너는 왜 자꾸만 나를 네 속에 가두려고 하느냐! 라고 책망을 합니다.
내가 왜 네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느냐! 라고 책망을 해요.
내가 너 시다바리냐! 라고 꾸짖어요.
이걸 나중에 한 참 후에 알았어요.
그래서 깨달은 것이 하나님은 우리 생각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그러니 이젠 어떤 기대를 하지 않는 겁니다.
저는 제 신앙의 역사를 계속 연결시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은 내가 지금까지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역사를 깨부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제 생각에 가둘 수 없는 분이란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에요.
 
인간은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세계관을 넓혀 가려고 해요.
이건 복음을 알아도 변하지 않아요.
복음을 알아도 자기 역사를 끌고 가고자 해요.
그래서 하나님도 이용하고 십자가도 이용해요.
십자가를 앞세우고 자아를 확장해 나간단 말입니다.
 
이게 개인이든 보이는 교회이든 조직이든 동일해요.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자아확장을 꿈꾸는 것을 죄라고 공격을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을 깨트린단 말입니다.
 
이걸 구약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잘 말씀해 주셨어요.
 
렘 1:9-10절.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입에 말씀을 넣어 줍니다.
어떤 말씀을 넣어 주셨는가 하면!
부정적인 것이에요.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며!
넘어뜨리고!
건설하며!
심게 하는 말씀을 주셨어요.
 
기존에 것을 폐하고 새로운 것을 세운단 말입니다.
예수님 식으로 말하면 옛 언약은 폐하고 새 언약을 세운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육신은 옛 언약식 신앙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식 신앙을 고수하는 이유는 옛 언약은 인간을 긍정하기 때문이에요.
나를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주체로 인정해 준단 말입니다.
 
율법 아래선 인간의 자랑거리가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만큼 자기 흔적이 쌓이는 겁니다.
날마다 자기 신앙의 이력서에 칸이 채워진단 말입니다.
이걸 목사들은 자기 지경을 넓힌다고 해요.
 
난 목사다!
난 장로다!
난 여전도회 회장을 했다!
난 20년 예수 믿었다!
난 50년 예수 믿었다!
난 헌금 얼마큼 했다!
인간은 이런 자기 역사를 힘으로 삼아요.
 
이걸 사도바울은 자기 의(義)를 쌓는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기 경험(역사)을 신앙의 틀로 붙잡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역사를 폐기하는 쪽으로 일을 하세요.
 
예를 들어서 20년 동안 한 번도 주일 예배를 빠지지 않고 지켜온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주일 지킴이 그 사람에겐 의가 되고 그 의를 힘으로 삼기 때문에 주일에 교회에 못가는 사건을 일으켜서 지금까지 주일을 지켜왔다는 의를 깨트려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기존에 자랑하던 것들을 훼파시키는 일들을 하는 겁니다.
성전 앞에 가서 여기는 성전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런 일을 예수님이 하셨어요.
안식일을 범하고!
성전을 훼파하고!
십자가에서 이런 인간 역사를 송두리째 폐기시켜 버렸어요.
새 언약은 인간의 역사는 인정 안 해요.
예수님의 역사만 인정해요.
 
새 언약에선 인간은 자기 흔적 남기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이 되었어요.
하지만 인간의 육신은 자기 역사를 고수하고자 해요.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육신의 소욕과 수시로 충돌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자기 공로로 남기고자 하고!
교회를 통해서도 자아 확장을 꿈꿔요.
그래서 좋은 교회 만들기와 좋은 신자 되기 운동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만 자랑되어져야 할 교회에 예수님이 자랑되어지지 않고 인간의 업적이 자랑되고 인간의 잘남이 자랑되어져요.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성도들 안에서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그 꿈을 박살을 내는 겁니다.
무엇으로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넌 이미 죽은 자라고 공격하는 겁니다.
 
교회를 깨부순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나를 부순단 말입니다.
교회는 성도 자신이에요.
성령이 임한 성도는 다 교회에요.
이런 성도가 혼자 있어도 교회이고 둘이 있어도 교회이고 만 명이 있어도 교회에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두가 한 몸이에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하면 성도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존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또 어려운데!
성도는 이미 죽었어요.
그러니 “나” 라는 존재는 없어요.
예수 안에서 내가 존재해요.
이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린 육신이라는 괴물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틈만 나면 “나”를 만들어요.
이 괴물은 십자가를 이용해서 “나”를 만들어요.
그러니 날마다 예수를 이용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건 성령을 받아도 변하지 않아요.
육신이 있는 한 “나”는 없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우리 안에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켜요.
나는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알려주어요.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고후 4:10-11절.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진다고 하지요.
이는 나는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죽은 내가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에요.
 
무슨 말인가 하면!
난 예수님 때문에 삽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산다는 말이에요.
그럼 역설적으로 난 예수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지요.
난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명이 내게 덮쳐 와서 살고 있습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산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고 한다면 나는 죽어야 하잖아요.
나는 부인 되어져야 하잖아요.
그래야 내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산 자와 상대하지 않고 죽은 자와 상대 한다고 했어요.
죽은 자를 살려내야 예수님이 하신 흔적이 남지요.
 
이걸 바리새인과 세리와 창기들로 비유하면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잘나서 살았다고 하는 자에요. 그러나 세리와 창기는 스스로 못난 자라서 죄인이라고 생각해요.
죄인이라 생각한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은 자라고 생각하는 세리와 창기들에게 예수님의 생명을 주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세리와 창기들 속엔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요.
죽은 놈을 살려내야 예수님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져 있지요.
스스로 살았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뭘 해 보세요.
그러면 자기들이 했다고 하지 예수님이 했다고 하지 않아요.
 
이 시대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를 이용하여서 자기 괜찮음을 남기고자 하는 겁니다.
이건 이단이에요.
이걸 모르니 어떤 사람들은 광명의 천사처럼 난 죄 안 짓고 산다고 교만을 떠는 겁니다.
 
저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성화주의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해서 신봉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원수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바울이 다메섹 이전엔 율법이 정통이라고 믿고 예수쟁이를 죽이다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이젠 도리어 율법주의가 이단이라고 한 것과 같아요.
제가 꼭 그 꼴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해야 한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야! 그건 이단이라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기가 찬 겁니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싶겠지요.
그래서 저는 누가 저를 보고 이단이라고 하는 것을 욕할 생각이 없어요.
그 분들이 왜 그러는 줄을 이해가 되기 때문이에요.
제가 은혜를 받지 않았으면 나도 그들과 동일한 말을 했을 테니까요.
 
야! 임마! 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화하여야 한다고 했잖아!
맞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화하는게 신앙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예수님이 날 찾아와서 성화하지 말고 예수 믿으라고 하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알려주었어!
예수님이 다 하셨기 때문에 내가 뭘 할 것이 없다고 하셨어!
그래서 이젠 성화주의가 이단이라고 하는 거야!
 
조금 전엔 예수님이 날 간섭하지 않았고!
이젠 간섭하신 겁니다.
그러니 완전히 다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를 만난 사람과 못 만난 사람의 차이에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않아요.
그러나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가 예수를 믿어야 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의미를 두게 되는 겁니다.
 
또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니 예수를 못 만난 사람들은 난 자기를 부인한다! 그래요.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으니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겁니다.
 
그럼 자기를 부인한다는 그 자기는 또 누구입니까?
여전히 자기에요.
그럼 결국 자기가 그대로 남잖아요.
자기를 부인 했다고 하는 자기가 그대로 있잖아요.
그럼 자기가 부인이 안 된 거지요.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생각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아!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으니 나를 부인하면 되겠구나!
그래서 나는 나를 부인하고 삽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산 놈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어요.
지금은 성화주의자이고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자기들이 지킬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을 자기 식으로 이해하여서 자기를 부인합시다! 자기를 부인합시다! 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이라야 지킬 수가 있어요.
그 어느 인간도 지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자기부인이 안 된다는 겁니다.
맞아요.
우리는 자기부인을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쫓으라는 말은 너희는 날 믿을 수 없다는 말이에요.
그럼 어떻게 예수를 믿습니까?
인간에겐 방법이 없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그 믿음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지요.
 
육신은 죄를 못 이겨요.
그래서 의롭다 여겨서 구원해 주는 겁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에요.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뿐이에요.
성령을 받아도 의롭다 여김을 받아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지 우리가 죄를 안 짓는 의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 부분을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착각을 해요.
자기가 의인인줄 알아요.
아니에요.
우린 여전히 죄인이에요.
다만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에요.
예수 안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말을 놓치지 마세요.
 
우리는 자기를 부인 할 수가 없어요.
도리어 눈만 뜨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해요.
그래서 뭐든지 자기를 긍정하는 쪽으로 채우고자 하는 겁니다.
심지어 성경을 아는 것까지!
예수를 믿는 것까지 자기 실력으로 자기 잘남으로 챙겨두고자 하는 겁니다.
 
그 모습이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러잖아요.
복음 조금 아는 것으로 잘난 척 하잖아요.
이게 모두가 복음을 아는 것으로 자아를 살리고자 하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를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교회라는 조직이 그걸 가리고 있어요.
교인들의 눈에는 예수는 안 보이고 보이는 거대한 교회를 보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예수를 대체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이란? 교회가 불태워져도 예수 안에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와 교인들은 교회가 무너지면 죽는 줄 알고 교회 사수작전에 올인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인간의 탐욕을 채우고자 붙잡는 교회를 우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시대 교회는 우상이 되어 버렸어요.
목사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강도의 소굴이 되었어요.
 
제가 지금 교회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의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관을 깨부수는 겁니다.
 
성령이 시간 시간마다 우리가 조합해낸 교회와 믿음을 깨부수는 일을 하는 겁니다.
“나” 라는 존재를 죽이는 쪽으로 일을 하세요.
“너”는 “너”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나” 라고 알려주어요.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를 우리 안에서 만들어요.
날마다 성령 안에서 새로 세워진다는 말이에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것들을 부정하면서 성령이 예수의 몸으로서의 교회로 세워가는 겁니다.
아까 예레미야가 말한 거예요.
허물고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날마다 회개하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이용하여서 뭔가를 꾸미고자 하는 것이 죄로 발각이 되어서!
주여! 제가 또 주님을 이용하고자 했군요!
주여! 주의 인자를 쫓아서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고백이 나온단 말입니다.
이걸 다윗은 상한 심령의 제사라고 했어요.
 
교회를 허문다는 것을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로 적용시켜 봅시다.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이 알고 있는 교회는 건물을 말해요.
그러니 붙잡고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자기교회를 손대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으르렁 거리는 겁니다.
 
누구든지 자기교회 교인을 빼 가면 그놈은 이단이에요.
그래서 교회마다 자기들만이 성채를 쌓고 있어요.
이건 교회가 크든 작든 똑같아요.
대형교회만 그렇지 않고 5명이 모인 교회도 똑 같아요.
교회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크고 적음에 상관치 않고 그 본질은 같기 때문에 유유상종(類類相從)이고 초록은 동색(同色)인 겁니다.
 
이게 모두가 십자가를 몰라서 그래요.
십자가는 “나”를 인정하지 않아요.
내 교회를 인정하지 않아요.
십자가 안에는 “너”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만 있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 로 있어야 하니 “나” 라는 “나”는 죽여야지요.
이 일을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걸 사도바울은 “나” 는 날마다 죽는다고 한 겁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나” 로 날마다 살아난다고 했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나” 는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리” 로만 있어요.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세요.
 
그럼 이걸 오늘 본문에 적용해 봅시다.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이 있지요.
구약은 옛 언약이라고 하고, 신약은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새 언약은 믿음 또는 은혜라고 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오늘 본문에선 첫 것과 둘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폐할 것이 있고 세울 것이 있다고 합니다.
첫 것은 폐하고 둘째 것은 세운다고 하지요.
이 말은 첫 것은 둘 째 것이 오면 사라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어떤 사람이 미리 만나기 전에 사진을 보내주었습니다.
사진을 보고 어떤 분을 만난다고 생각을 합시다.
실물을 만나기 전에는 사진으로 상상을 합니다.
아! 이렇게 생겼구나!
 
사진은 실물을 위해서 주었어요.
그럼 사진을 받은 사람은 사진으로 장차 만나야 할 분에 대한 정보를 얻습니다.
사진의 목적은 실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선 사진이 귀한 것이에요.
하지만 실물은 만나면 사진의 용도는 다하였어요.
실물을 만나게 해 주었으니 사진으로서는 자기 사명을 다 한 겁니다.
 
그런데 실물이 왔는데도 사진만 붙잡고 있다면 그 땐 사진이 실물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어 버려요.
실물이 왔다면 사진 신앙은 비켜주어야 해요.
사진은 아무리 정교해도 사진이에요.
사진이 실물일수는 없어요.
 
율법은 사진과 같아요.
실물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면 율법이라는 첫 것은 폐하여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가 있다고 합니다.
이 제사는 장차 한 몸으로 오실 분을 보여주기 위하여 드려지는 것이에요.
이제 한 몸이 왔어요.
한 몸으로 오신 분이 제사를 드렸어요.
 
그럼 이젠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사라져야 해요.
사라지지 않으면 이 때 부턴 사기를 치게 되어요.
실물을 가리고 사진에 붙잡아 두는 사기를 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을 속이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진짜가 왔으면 빨리 가짜가 사라져 주어야 사람들이 진짜를 만나지요.
그럼에도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이젠 걸림돌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더러 야! 이제 그만 꺼져! 그러는 겁니다.
직역을 하면 한마디로 하나님이 율법은 싫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제사와 번제와 속죄를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을까요?
그건 폐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폐기해야만 하는가요?
이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은 가짜란 말입니다.
 
가짜는 진짜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어요.
진짜가 오면 가짜는 빨리 자취를 감추어 주어야 사람들이 속지 않아요.
진짜가 왔는데도 가짜가 버젓이 있으면 이건 진짜를 가리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저주스러운 것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 신앙을 폐한 겁니다.
 
이게 적절한 비유가 될 것 같아서 인용합니다.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었지요.
그 때 노무현씨를 대통령으로 만든 단체가 노사모에요.
일등공신이지요.
 
암튼 노사모의 힘으로 대통령이 되었어요.
노사모는 노무현씨를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조직이에요.
그럼 노무현씨기 대통령이 되었으면 사라져 주어야 해요.
노무현씨도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 해체 하라고 했어야 했어요.
노사모의 존재 목적이 노무현씨를 대통령 만드는 거니까 대통령이 되었으면 빨리 해체하여서 노무현 대통령이 일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끝까지 남았어요.
이렇게 되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요.
아니나 다를까 노사모가 권력이 되고 말았어요.
노무현 대통령 주변에 사람들이 노사모 눈치를 보기 시작했어요.
예상대로 걸림돌이 되고 만 겁니다.
사라져 주어야 할 것은 빨리 사라져 주어야 하는데 끝까지 남아서 훼방을 하고 만 겁니다.
 
지금 박사모가 하는 꼴이 그래요.
이 사람들은 선거도 하기 전에 이미 대통령 자리에 앉아 버렸어요.
불 보듯 뻔해요.
만약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박사모는 노무현 대통령 때보다 더 심할 것 같아요.
이미 권력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박사모 회장이라는 사람이 하는 꼴을 보세요.
이명박 대통령보다도 더 높아졌어요.
이 사람들은 벌써부터 통제 불능이 되고 말았어요.
박근혜씨가 노사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텐데 지금으로서는 영 아니올시다로 보여요.
 
노사모나 박사모를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말하는 것이 아니고 페하여 질 것과 세울 것을 말하고자 비유로 말한 겁니다.
사라져 주어야 할 것은 빨리 사라져 주어야지 그렇지 않고 남아 있으면 헤치는 것이 되어 버려요.
 
지금 히브리서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은 율법을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고 했어요.
폐한다는 것은 사라지란 말입니다.
 
오늘은 공짜로 얻은 구원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공짜를 누가 가리는가 하면 율법이 가려요.
율법이 공짜로 주어지는 구원을 가리는 일을 해 버려요.
여러분 공짜 좋아하지요.
길거리를 가다가 돈을 주워보세요.
기분 좋지요.
 
저는 이따금씩 아내와 마트에 갈 때가 있어요.
운전수 노릇을 해야 하니 시간이 나면 따라가는 겁니다.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쇼핑을 하다가 보면 그날 기획 상품으로 덤으로 주는 물건들이 있어요.
호객용으로 하는 이벤트 상품 중에 1+1 하는 거 있잖아요.
그럼 전 얼른 사라고 해요.
하나가 공짜잖아요.
인간은 공짜를 좋아해요.
 
그런데 딱 한 가지 공짜를 싫어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이에요.
천국에 공짜로 가는 것을 그렇게 싫어해요.
참 이상하지요.
왜 세상 것은 공짜를 좋아하는데 하늘에 것은 싫어할까요?
 
왜 그런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죄 때문이에요.
죄는 독자적으로 살고자 하는 성향을 갖고 있어요.
자기 영광을 챙겨요.
그래서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해요.
 
위에서 말한 것으로 자기 역사로 구원을 이루고자 한단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의 도움으로 산다는 것을 수치라고 여겨요.
도움을 받으면 꼭 그 사람에게 진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진다고 생각되면 자존심이 상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에게 대접을 받으면 나도 그 사람을 언젠가는 대접을 해야 하는 부채(負債)로 떠 안고 사는 겁니다.
언젠가는 갚아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자 합니다.
떳떳해 지려는 겁니다.
 
이처럼 빚지고는 못사는 자존심이 신(神)을 섬기는 것에도 그래도 나타나 있어요.
인간들은 신도 인간들 입장에서 이해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신도 인간들 생각으로 섬기는 겁니다.
신에게 가서 도움을 구해도 공짜로 가서 달라고 하면 체면이 안 서니까 정성을 쏟고서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을 섬겨도 그냥 섬기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름하여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한다는 겁니다.
세상 종교는 다 이 사상을 가지고 있어요.
지극히 인간적이거든요.
 
그런데 이러한 것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 받고!
축복은 열심과 충성으로 받아내자고 합니다.
하나님은 열심 있는 자에게 복을 준다는 겁니다.
 
어떤 교회는 노골적으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플랜 카드를 붙여 놓았어요.
이건 아주 노골적으로 “여기는 절간입니다” 라고 광고하고 있는 겁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은 전부가 불자(佛子)들이에요.
그러니 그런 플랜카드를 버젓이 붙여 놓았는데도 낯부끄럽지 않게 다니는 겁니다.
 
복을 받는데서야 부처면 어떻고 예수면 어떻습니까?
그러니 교인들은 하나님께 잘 보여서 복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충성하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이고 거래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복이란? 거저 주는 겁니다.
인간의 노력이 전혀 가미 되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물이에요.
그러니 인간 쪽에서 무엇을 해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전부 우상인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우상이 교회 안에서 횡행하는 것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인간들 생각으로 신앙도 만들어서 하는 겁니다.
 
구원도 은혜이고!
믿음도 은혜이고!
거룩도 은혜에요.
은혜란 공짜란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공짜 신앙이에요.
모든 게 공짜에요.
공짜를 모르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에요.
 
구원과 믿음과 거룩이 은혜란 것은 이러한 것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위하여서는 인간 쪽에서 할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합니다.
여러분! 구원 받기 위해서 아무 것도 노력하지 마세요.
믿음을 위해서 애쓰지 마세요.
거룩해지려고도 갈고 닦지도 마세요.
구원이니 믿음이니 거룩과 같은 이 모두는 하나님이 공짜로 주십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주어요.
이 말은 내가 구원 받고 싶고,
예수를 믿고 싶고,
거룩해 지고 싶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어요.
본문을 봅시다.
 
히 10:8-14절.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오셨잖아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면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첫 것이란?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에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를 폐하기 위해서예요.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란 인간의 행함 신앙을 말해요.
율법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이 말씀을 지켜서 의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신앙을 깨트리기 위함이라는 말이 되지요.
맞아요.
예수님은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죄라고 지적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죄인 만들기 위해서 오셨어요.
아니지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오셨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의지하고 나온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했어요.
이 원칙은 지금도 유효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는 독사의 자식이에요.
 
이렇게 되면 죄가 어떤 식으로 역사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죄는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식으로 일을 합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천주교 신학이에요.
 
천주교 신학은 인간은 비록 죄인이긴 하지만 그래도 선한 양심이 남아 있어서 이를 잘 개발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이게 지금은 기독교 안에 그대로 들어와 있어요.
성화주의도 이 범주에 속한 겁니다.
신자가 되었으면 신자답게 살아야 하지 않느냐 입니다.
신자다움을 세상에서 지탄 받지 않는 깨끗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겁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말이에요.
그런데 이건 하나님이 바라보는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규정합니다.
죄인에게선 하나님의 의가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갈고 닦아서 의인이 되라고 하지 않아요.
이걸 피부가 검은 사람이 씻는다고 해서 그 피부가 하얗게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마귀는 검은 피부와 같은 죄를 비누로 씻는 것처럼 성화해서 거룩해 지라고 해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첫 것에 속한 겁니다.
예수님이 이걸 깨트리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첫 것을 깨트리고 둘째 것을 세우려고 오셨어요.
둘째 것이 무언가 하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서 성도가 거룩을 입는 겁니다.
 
자 중요합니다.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겁니다.
무엇을 근거로 주어지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을 근거로 주어졌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주어져요.
그래서 본문에서 “거룩을 얻었다”고 합니다.
 
“얻었다”는 말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내 노력으로 따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위로 인하여 공짜로 얻은 겁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우리가 거룩해 진 겁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죽었는데 성도가 거룩해 질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건 창세전에 맺은 언약이 그러하기 때문이에요.
 
창세전으로 돌아가 봅시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太初)가 나오지요.
태초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해요.
즉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 나라에 보니 하나님이라는 하나님과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계셨어요.
여기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신 분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라고 합니다.
암튼 이 성부 하나님과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태초에 어떤 약속을 합니다.
 
이걸 에베소서에선 창세전 언약이라고 합니다.
 
엡 1:4-10절.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자 봅시다.
창세전에 성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를 택한 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가 하면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예정하셨다고 합니다.
예정했다는 말은 이렇게 일을 하기로 작정을 하셨다는 말이에요.
 
태초에 인간은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거룩이 주어질 것을 예정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피로 거룩이 주어질 것을 미리 예정하셨어요.
이런 작정에 의하여 만물을 만드셨어요.
만물 속에서 창세전 언약을 그려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그 뜻을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창세전부터 인간은 독자적으로 거룩해 질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해 질 것을 예정했어요.
그 일을 지금 예수님이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정된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거룩이란? 의(義)에요.
구원이에요.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근거로 거룩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거룩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을 때만 거룩해 진다는 말이지요.
독자적인 거룩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에요.
 
이걸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로 말씀했어요.
 
요 15:1-6절.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아버지는 농부에요.
예수님은 포도나무에요.
우리는 가지에요.
 
가지란? 나무에 붙어서 사는 자라는 뜻이에요.
인간은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가지인 우리는 나무인 예수님이 공급해 주는 생명으로 사는 자에요.
 
생명을 거룩이라고 합시다.
그럼 거룩은 예수님이 공급해 주는 거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죄가 어떤 것이 될까요?
예수님이 주는 것을 거부하는 거지요.
자신이 거룩을 만들고자 하는 거겠지요.
 
이걸 가지가 나무에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성화해야 한다는 것은 거룩이라는 나무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말이에요
농부는 이런 가지는 낫으로 다 제하여요.
독자적으로 거룩해지려는 자는 진노의 대상이에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천국을 말할 때 왕의 아들에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이라고!
임금이 사람들을 청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사정을 들어서 거절하지요.
이건 임금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에요.
 
죄란? 임금의 호의를 무시하는 거예요.
이는 임금이 공급해 주는 생명에서 떠나 있다는 뜻이에요.
이건 저주의 대상이에요.
 
죄란? 포도나무가 주는 거룩을 거부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주는 거룩을 거부 했어요.
바리새인들은 독자적으로 거룩을 만들고자 했어요.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준다는 거룩(의)을 거절한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거(居)한다” 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라고 하지요.
“거(居)한다” 는 말은 집 안에서 산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집으로 묘사하는 겁니다.
이걸 예수 안이라고 해요.
 
신앙생활이 뭐냐?
예수 안에서 사는 겁니다.
신앙의 본질은 집 안에 있느냐!
바깥에 있느냐! 에요.
이걸 출애굽 시에는 유월절 피 안에 있느냐!
바깥에 있느냐! 에요.
 
하나님 앞에선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요.
다만 누구 집에서 사느냐를 묻고 있어요.
 
사도바울은 이를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로 말했어요.
다른 말로 아담의 집에 사느냐!
예수님의 집에 사느냐!
아담도 집이고 예수님도 집이에요.
 
아담의 집은 죄의 집이고,
예수님은 거룩한 집이에요.
아담의 집은 하나님의 진노(震怒)가 내리고,
예수님 집은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내려요.
 
아담은 죄(罪)의 조상이고!
예수님은 의(義)에 조상이에요.
결국 어떤 조상 아래 있느냐!
네 조상이 누구냐를 묻고 있는 겁니다.
 
그럼 신앙의 싸움은 어떤 식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느냐 없느냐의 싸움으로 나타나겠지요.
예수 안이냐!
바깥이냐!
 
다른 말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조건은 배제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였느냐! 라는 것에 눈길을 빼앗기지 말아야겠지요.
 
성도라면 나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나는 이런 자입니다! 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 아래 있습니다! 를 말해야지요.
구원 받은 나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분을 자랑하여야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우리를 구원한 아들을 찬미케 하고자 함입니다.
천국은 아들을 찬미하는 곳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아들을 찬미케 하려고 자기 피로 자기백성들을 자기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얻게 해 준다고 했어요.
 
마귀는 이 원리를 자꾸만 바꿔놓아요.
구원 받은 자기에게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그래서 나를 존재케 하는 분을 잊게 만들어요.
결국 예수 없이 독자적으로 살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 시대 성화주의로 나타나는 겁니다.
성화주의자들은 사람의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나오는 것은 받지 않아요.
인간 쪽에서 나오는 것을 폐하려고 예수님이 오셨어요.
 
이걸 시온에 거치는 반석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인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오셨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선 첫 것을 폐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마귀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신앙을 몰고 가겠지요.
그러면 자연히 예수님을 근거로 거룩을 주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마귀는 항상 인간의 행함을 신앙의 패(牌)로 들고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자연히 내어 놓는 패가 행함이겠지요.
 
우리 인간들은 날 때부터 마귀와 친구로 태어나요.
마귀가 달콤하게 속삭여요.
그게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는 거예요.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아가게 해요.
 
마귀는 항상 인간을 격려해요.
너는 할 수 있어!
너 대단하다!
자긍심을 불어 넣고!
영웅심을 심어 주어요.
 
신앙에 있어 가장 나쁜 말이 인간에게 가능성을 안겨 주는 겁니다.
성화주의가 나쁜 것은 인간에게 가능성을 열어 주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는데 공짜로 받은 구원에 대한 감사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나아가야 하는데!
하나님 죄송합니다! 라고 나아간단 말입니다.
자기 행함을 근거로 당당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는 겁니다.
이건 신앙이 아니고 종교에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경건주의로 표방하는 성화론자들이 이 패를 들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입만 열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패를 들고 있었어요.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 할 때 이 패를 내어 놓고 기도했어요.
 
금식 했고!
전도 했고!
구제 했고!
봉사 했고!
이웃 사랑했고!
전부 자기가 뭘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한 근거로 복을 달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구원해 달라는 거예요.
하지만 거룩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것이라고 했잖아요.
거룩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넌 부정하다는 말이잖아요.
그러니 거룩을 받으라고 하지요.
 
누구로부터 받아야 된다는 말은 자기 무능함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무능하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잖아요.
그래서 거저 주는 거룩이 싫은 겁니다.
내가 얻어낸 거룩이 훨씬 가치 있어 보이고 폼이 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 예수님이 찾아가는 것으로 말해요.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찾아 가지요.
38년 된 병자가 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곤 38년 된 병자의 의중과 상관없이 고쳐주었어요.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것을 통해서 구원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신 겁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주셔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노력할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거룩이란? 구원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니 인간 쪽에선 할 일이 없어요.
만약에 인간의 노력으로 거룩해 진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댓가에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넌 꺼져!
그러는 겁니다.
듣는 인간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공짜로 주어지는 구원을 싫어하는 겁니다.
자기 체면에 손상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공짜로 뭘 받으면 미안하다고 여깁니다.
이게 체면이거든요.
 
사람이 체면이 있지 어떻게 공짜로 천국에 간단 말인가?
그래도 뭔가 해야지!
그래요.
이게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의 본성이에요.
그래서 구원 받음에 뭔가 보태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성화주의이거든요.
 
그냥 미안한 마음으로 살면 되는데 자존심이 하락하지 않는 겁니다.
피조물은 자존심이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러면 창조주가 주는 것이 감사가 안 되어요.
 
매일 만나를 주면 고맙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러면 되어요.
그냥 먹으라고 공짜로 주었어요.
하나님께 미안한 마음으로 살라고 공짜로 준다니까요.
제발 미안하게 사세요.
 
예수 믿는 것은 미안한 거예요.
천국은 미안함을 아는 자가 가는 곳이에요.
그래서 세세토록 어린 양에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찬양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 노력의 대가로 천국에 간다면 어린양에게 감사와 찬송할 이유가 없지요.
자기 노력으로 받았는데 왜 감사하고 찬송합니까?
이걸 역으로 말하면 성도가 되어서 감사와 찬송이 없다는 것은 공짜로 받은 구원이 없다는 말이 되지요.
 
맞아요.
감사치 못하는 신앙은 가짜인 겁니다.
아주 간단해요.
거저 받은 구원을 소유한 성도는 반드시 감사하게 되어 있어요.
 
왜 감사가 안 나올까요?
이는 안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공짜로 거룩을 주었다고 해도 안 믿어지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성도에겐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성령은 예수님의 공로로 거룩이 주어진다는 것이 믿어지도록 마음 판에 새겨 놓았어요.
이 법이 새겨진 성도는 감사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공짜를 감사하세요.
하나님이 차려 놓은 것을 먹으면서 야 맛있다! 라고 하세요.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하세요.
이것 이상 더 좋은 신앙은 없어요.
 
부디 하나님께 공짜로 얻어먹고 미안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공짜로 주어진 거룩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진 구원을 기쁨으로 누리고 살게 도와주옵소서. 제발 하나님 앞에서 잘난 자가 되지 말고 못난 자로서 빚진 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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