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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55강. 예수님의 피로 모이는 곳 (히 10:19-25)

by coroa 2021. 5. 21.

 

[55강. 예수님의 피로 모이는 곳 (히 10:19-25)]

-.정낙원 목사

 

어떤 분이 전화로 상담을 하면서 자기 심경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게 왜 이리 힘드냐는 겁니다.
목사님 시키는 대로 하자니 힘이 들고 안 하자니 마음이 찜찜하고 교회 생활이 즐겁지가 않고 무거운 짐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다니니까 힘이 든다고 했어요.
예수를 믿는 것하고 교회를 다니는 것의 차이를 한참 설명을 해 주었더니 자기는 지금까지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다녔다고 고백을 하는 겁니다.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의 의식 속에는 교회 다니는 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저 교회 다니는데요! 라고 합니다.
물론 그 말의 의미는 제가 알아요.
 
한국교회 풍토에선 교회 다니는 것은 곧 예수 믿는 것이다! 라는 공식으로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나 교회 다니는 것하고 예수 믿는 것은 엄연히 달라요.
이건 마치 교인과 성도의 차이와 같아요.
교인은 교회에 회원으로 등록을 하면 주어지지만 성도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야지만 되어요.
그러므로 교회 다니는 것은 종교 생활이에요.
하지만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종교 생활은 인간들이 원하면ㅁ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종교 생활의 주체는 인간이에요.
종교 생활은 마음만 먹으면 그 누구라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하게 해 주어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예수는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신앙생활의 주체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아무나 할 수가 없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종교 생활은 신(神)을 믿는 주체가 자기 자신이에요.
내가 신(神)을 선택해요.
내가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어요.
 
신앙생활은 주체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그러니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교회는 내가 다니고 싶으면 다니고, 다니기 싫으면 안 다녀요.
그러니 교회 다니는 것을 종교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는 우리 의지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교회 다니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대 다수 교인들은 교회 다니는 것을 신앙생활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교회를 다니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니까 힘이 든다고 말을 한 겁니다.
예수가 믿어지지도 않으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종교생활이라고 해요.
종교 생활은 어느 특정한 단체에 가입을 하고 정한 날짜에 정한 장소에서 정한 시간에 모여야 가능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장소나 시간이나 모임에 매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모임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것을 초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면 꼭 교회 안가도 되겠네! 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전 개인적으로 교회 안 다니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제 견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이는 모임을 귀히 여기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도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모임이에요.
그러므로 온전한 신앙은 반드시 교회에 모이는 생활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있어요.
이건 잠시 후에 더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암튼 제가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 믿으라는 말은 종교 생활하지 말고 예수 믿으라는 말로 들으시길 바랍니다.
예수 믿으면 교회 생활이 힘들지 않아요.
그러나 믿음이 없이 교회를 다니게 되면 의무와 책임을 감당하여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조직의 일원으로서 다니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그래요.
 
쉽게 말할게요.
내가 뭔가 하여야 한다고 하는 사고로 교회에 다니면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이 다 하셨습니다! 라고 감사해서 교회에 다니면서 봉사하고 헌신하며 충성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도 믿음을 받지 않으면 못 알아들어요.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교회에서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면 교회에서 충성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뭔가 하여야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예수 믿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고!
제자들은 율법적 사고로 하나님 일을 생각하고 물은 겁니다.
율법식의 하나님 일은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제사는 자신이 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그냥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믿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에는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교회도 가지 않고 집구석에서 빈둥거리고 놀면서 아무 것도 안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는 구원이 내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주어지기 때문에 내가 이것하고 저것하고 쫓길 일도 없고 불안해 할 일도 없다는 의미에서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잘 새겨서 들으세요.
 
교회에 회원으로 다니면 교회가 여러분을 가만 두지 않아요.
전도해라!
봉사해라!
기도해라!
헌금해라!
이것해라!
저것해라!
자꾸만 뭘 하라고 해요.
 
마치 주인 마님처럼 종에게 요구하는 것처럼 많아요.
마당 쓸어라!
새끼줄을 꿔라!
장작을 패라!
물을 길어 와라!
하루 종일 뭘 시켜요.
 
요즈음 교회들을 보면 바빠요.
무슨 예배도 왜 그리 많은지!
거기다가 다양한 제목의 헌금들이 그리도 많은지요?
또한 기도회는 얼마나 많습니까?
 
저희 교회 주변에 있는 교회들은 겨울철엔 붕어빵 전도 한다고 난리입니다.
집사님들이 대여섯 명이 어깨띠를 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붕어빵을 나누어준다고 바빠요.
아침 일찍 아이들 학교 보내고 나와서 충성한답시고 열심을 내고 있는 겁니다.
 
교회마다 서로 좋은 길목을 차지하고 너도 나도 붕어빵 굽기 시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길거리마다 교회 띠를 두르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행인가 보아요.
제 아내가 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가 잠시 신호대기에 걸렸는데 여 집사님들이 우르르 버스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치 잔치 집에서 음식 봉지에 담아 나누어주듯이 붕어빵을 주길래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저와 교제하는 어떤 목사님도 부 목사님인데 아파트에서 붕어빵 굽는다고 정신이 없답니다.
담임 목사가 하라고 하니 안 할 수는 없고 해서 하면서도 야! 내가 이 짓을 언제까지 하여야 하나 고민이랍니다.
담임 목사가 시키니 안 할 수는 없으니 죽겠답니다.
 
붕어빵을 구우면서 야! 이거 내가 붕어 빵 구우려고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가 되었는가? 라는 회의가 든다는 겁니다.
회의가 들만도 하지요.
그 비싼 돈으로 7-8년 동안 신학교 다니고 목사 면허 딴다고 죽을 고생을 했는데!
기껏 돌아오는 것은 추운 겨울날 개털모자 쓰고서 벌판에서 붕어빵을 굽고 있으니 신세가 처량할 만도 하지요.
 
지금은 체력이 약한 사람은 교회도 못 다녀요.
봄 가을엔 커피 배달해야지!
여름엔 팝콘 튀겨야지!
겨울엔 붕어빵 구워야지!
어지간한 체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워요.
 
이런 일들이 자행되어지고 있는 것은 열심과 충성을 신앙이라고 가르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인간의 정성을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이는 절간하고 똑 같아요.
그러니 믿을 것은 없고 할 것만 잔뜩 숙제로 남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지요.
 
열심히 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쳐 놓았으니 복을 받으려면 마음에도 없는 열심을 내야지요.
그래야 하나님이 가상히 여겨서라도 복을 주시지 않겠어요?
이런 것들이 작금에 한국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의 모습들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죽을 지경인 겁니다.
 
복음을 모르면 신앙생활이 힘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복음 없는 신앙생활의 바탕엔 인간의 열심과 정성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 믿고 교회를 다녀야 하니 힘들 수밖에 없지요.
 
제가 과거에 교회 다니는 종교생활을 했어요.
그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믿음 있는 척 하려니까 매일 연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예수 하는데 마음속에는 예수가 없어요.
 
안 믿어지는데 어쩝니까?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잖아요.
수십 년 동안 습관처럼 교회를 다녔는데 안하면 더 이상해요.
교회 안가면 괜히 불안해요.
 
이건 예수가 믿어지느냐 안 믿어지느냐와 상관없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가야해요.
그동안 배워 왔던 신앙은 말 안 들으면 하나님이 저주한다고 들었잖아요.
그러니 비록 마음으로는 예수가 믿어지지는 않지만 교회 안 갔다가 진짜 벼락이라도 맞으면 어쩔까 하는 겁도 나잖아요.
 
신명기 28장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봄 가을 대 심방 때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었잖아요.
순종하면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지만!
불순종하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는다고 얼마나 많은 공갈을 들었습니까?
그러니 억지 춘향으로 웃으면서 교회에 다닌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고백과는 정 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바울은 겉으론 우겨쌈을 당하여도 속으론 기쁨이 충만 했는데!
저는 겉으론 기쁨이 충만 한 척하는데 속으론 죽을 지경인 겁니다.
속으론 탄식하며 주여! 하면서도, 겉으론 천사처럼 안녕하세요! 그랬다니까요.
여러분은 안 그랬는지 몰라도 전 그랬어요.
 
요상한 것이 사람은 가짜라도 늘 갖고 있으면 나중에는 그것이 진짜인줄 착시 현상을 일으켜요.
연기하는 배우들이 드라마 속에서 공주 역할을 오래도록 하다가 보면 자기가 진짜 공주인줄 착시현상을 일으킨다고 해요.
그래서 드라마 밖에서도 공주 행세를 한다는 것입니다.
 
못난 사람도 거울 앞에서 자꾸만 예쁘다고 하면 자기 최면에 빠져서 착시 현상을 일으켜요.
전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 거울 앞에 서면 참 소 도둑놈 같이 생겼다고 스스로를 비하(卑下)했어요.
 
그러다가 은혜를 받고 난 후로는 소망이 생기니까 자신감이 붙어요.
그래서 거울 앞에 서면 너 참 잘 생겼다!
넌 어쩜 그렇게 멋있냐! 라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젠 진짜 잘 생긴 사람이 거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느껴요.
 
이게 자기 최면이에요.
그러듯이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다고 하면 믿음이 좋은 줄 알아요.
이렇듯이 저도 과거에 믿음이 없으면서도 그랬어요.
하도 사람들이 제 열심과 충성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니 믿음이 좋은 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안에 공허함이 밀려오는 겁니다.
어느 날 내 믿음이 허구임을 알고 깜짝 놀랐어요.
내 속에 예수가 없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늘 일상처럼 해오던 연기 신앙으로 겉으론 웃고 속으론 우는 생활을 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이 든 겁니다.
 
저에게 상담을 하신 그 분도 이 딜레마에 빠져든 겁니다.
과거 저의 모습과 같아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왜 이리 힘이 듭니까? 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겁니다.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도 대단한 용기에요.
대 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고백조차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전 이런 고민을 하게 한 것이 하나님이 그 분을 간섭한 증거라고 믿고 싶어요.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이런 고민도 고백도 할 수가 없어요.
자기 이미지에 손상이 가는데 누가 이런 말을 하겠어요.
특히 목사들은 불가능해요.
하나님께서 간섭해야지만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세요.
 
어차피 이 시대 교회라는 곳은 대 부분 종교적인 위선자들만 모인 곳이에요.
신학교는 구약의 궁중선지자들을 양성하는 양성소와 같이 목사라는 직업인을 양성하는 양성소와 같은 곳이 되고 말았어요.
직업 목사들이 교회를 차지하고 있으니 교회마다 종교 장사꾼들이 모인 곳이 되고 말았어요.
교인들도 동일해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하면서 서로 영광을 돌리고 살잖아요.
 
이 모두가 교회가 걸어놓은 열심과 충성이 믿음이라는 집단 최면에 걸려서 자기가 믿음 없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이 시간 시간마다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현란하게 종교적인 화술(話術)로 최면을 거니 깨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의 영광을 취하다 보니 서로가 믿음이 있는 줄 착시 현상에 빠져 있는 겁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게 어떤 형식이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예수 잘 믿습니까? 라고 방법론을 요구해요.
꼭 물어도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해요.
방법을 몰라서 못 믿지 방법만 알면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못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방법이 없기 때문에 못 믿는 겁니다.
믿음은 선물이라서 방법이 없어요.
 
예수 믿는 것은 어떤 방법이 없어요.
그냥 믿어져요.
믿어지면 그 믿음으로 살면 되어요.
믿음으로 살으라는 말은 마음으로 믿어지는 것으로 살으라는 말이에요.
 
성경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요.
마음으로 믿어지면 입으로 시인이 되어요.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믿어지게 해 주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에요.
 
이 의를 받은 사람은 입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고백이 아주 자연스럽고 쉽게 나와요.
구원 받은 사람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고백이 토해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새겨 듣고 이해하세요.
 
사람들은 주일날 교회 가고!
수요일 저녁에 교회 가고!
금요일 철야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매일 성경을 읽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건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이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것을 근거로 믿음이 있다고 확정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은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 40여 년 동안 이 짓을 했어요.
예수가 안 믿어져도 그냥 교회 다녔어요.
그러면서 나 신앙생활 한다!
그랬다니까요.
남들도 내가 신앙생활 잘 한다고 칭찬 했어요.
어쩜 그렇게 신앙이 좋으세요!
그랬다니까요.
 
이처럼 예수 안 믿어도 교회 다니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타고난 종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이런 우상성이 자기 열심이라는 종교성을 신앙이라고 둔갑을 시켜 놓은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내 열심이 있으면 신앙생활 한다고 믿는 겁니다.
 
예수는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믿는 겁니다.
예수는 교회 다니기와 상관없이 믿어야 해요.
예수는 교회 가도 믿고 안 가도 믿어야 예수 믿는 겁니다.
이런 믿음은 믿음을 하나님께 선물로 받아야 믿어져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믿는다는 것을 정형화시키지 않아요.
나 이렇게 했으니 예수 믿는다 라고 하지 않아요.
자기 조건에서 믿음을 찾지 않아요.
그냥 믿음으로 살아요.
 
그 믿음이 주일날 교회로 가게도 하고!
그 믿음이 교회에서 봉사도 하게 하고!
그 믿음이 연보도 하게 하고!
그 믿음이 자꾸만 뭔가 하게 해요.
그 믿음이 누구를 섬기게도 해요.
 
믿음이 역사하면 자꾸만 뭔가를 하고 싶어지게 만들어요.
속된 말로 안 하던 짓을 해요.
믿음이 하게 하는 것은 전혀 어렵고 힘들지 않아요.
재미있고 기뻐요.
이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해요.
 
교회 오란 말을 하지 않아도 오게 되어 있고!
교회 충성하란 말을 하지 않아도 하게 되어 있고!
감사하란 말을 하지 않아도 감사하게 되어 있고!
기뻐하란 말을 하지 않아도 기뻐하게 되어 있어요.
 
늘 여일(如一)하지는 않지만!
자기 안에 믿음이 이런 것들을 유출시켜요.
토해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하지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몰라요.
 
복음을 안다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입니다.
교회 가서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고 교제해 보세요.
얼마나 기쁜데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는 것은 거기에 우리의 형제가 있기 때문이에요.
한 성령을 마신 형제자매가 있잖아요.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 언약 공동체에 연합이 되어요.
언약 공동체에서는 동일한 사고를 하게 되어 있어요.
 
서로 같은 사고를 가지고!
서로 같은 말을 하고!
서로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줄 아세요.
말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엄청 기쁜 일이에요.
 
여러분이 집에서도 그러지요.
좋아하는 사람과 전화 통화라도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잖아요.
전화기 붙잡으면 놓기 싫잖아요.
하하~ 호호~ 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잖아요.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통하기 때문에 그래요.
 
교회도 이런 곳이어야 해요.
평일엔 모두가 생활 전선에서 바쁘게 산다고 못 만나다가 주일 날 교회에서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쁩니까!
얼마나 주일이 기다려지겠어요.
 
거기다가 목사님이 증거하는 예수님 복음이야기도 듣고 하니 일석이조(一石二鳥)이지요.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잖아요.
금상첨화(錦上添花)에요.
 
이런 재미가 있는데 왜 주일날 교회에 안 가겠어요.
예수님의 피라는 복음 안에서 세워진 교회라면 이렇다는 말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다면 말입니다.
 
복음을 알면서 교회 안가고 세상 친구들 만나 보세요.
가치관도 다르고 대화가 안 되는 사람들과 있는 것은 고문당하는 것과 같아요.
말이 안 통해 보세요.
부모 형제간에도 말이 안 통해 보세요.
답답하잖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말이 통하지 않으면 굳이 스님들이 하안거(夏安居)나 동안거(冬安居)에 묵언(黙言)수행 들어가지 않아도 명절날이 되면 무거운 침묵속의 묵언(黙言)수행을 하게 되잖아요.
 
전 과거에 알고 지내던 목사님들과는 교제가 전부 끊겼어요.
만나면 대화가 안 되어요.
관심사가 다르니 소통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한쪽에선 은혜를 이야기 하는데 한 쪽에선 행위를 이야기 하고!
한 쪽에선 하늘 이야기 하는데 한쪽에선 땅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럼 숨이 턱턱 막혀요.
 
만나면 첫 인사가 교회 부흥 많이 되었나!
새로운 교인들 많이 왔느냐고 묻잖아요.
어디 형편 좀 나아지셨습니까! 라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먹고 살만 하느냐!
이 말이에요.
 
개척 교회 목사들이 이것 이상 화젯거리가 없어요.
새로운 손님이 온 사람은 기분이 좋지만 있는 손님 다른 교회로 간 사람은 죽을 맛이에요.
전에 복음을 몰랐을 땐 매일 전화하고 호형호제(呼兄呼弟)하고 지냈어요.
그땐 같은 생각 같은 가치였기 때문에 불편함 없이 만나고 교제 했어요.
그땐 죽이 척척 맞았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 죽이 안 맞아요.
 
짜증이 나요.
관심사가 달라요.
대화가 빗나가요.
그러다가 다투어요.
그래서 교단도 탈퇴하고 노회도 탈퇴하고 말았어요.
 
그리곤 말이 통하는 분들과 교제하게 되었어요.
복음이 사람을 사귀게도 하고 끊게도 만들어요.
복음을 알고 난 후 새로운 동무들이 생겼어요.
 
이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요.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는 동무들을 만나면 편해요.
동무는 편한 사람이에요.
 
전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분들을 동무라고 해요.
동무란 말이 뭔 줄 아세요.
함께 춤을 추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동무란 철이 없어서 발가벗고 이해타산 하지 않고 뛰 놀던 사이란 말입니다.
발가벗는다는 것은 자기를 감추거나 위장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동무는 계산적으로 만나지 않아요.
그러니 편한 겁니다.
이런 동무 한 둘만 있어도 행복해요.
 
누군가가 자기가 목사라는 것에 의미를 두거나!
목사라는 것을 내 세워서 목사가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되는 냥 자랑하는 자는 복음을 모르는 목사라고 보면 틀림없어요.
 
복음을 아는 목사라고 한다면 목사가 무슨 특별한 하나님의 종이라도 되는 냥 자랑하지 않아요.
목사를 자랑하는 사람은 목사가 아니고 사기꾼이에요.
목사는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이지 자기가 목사인 것을 자랑하는 사람 아니에요.
복음을 아는 목사는 복음을 자랑해요.
 
복음 안에서 만나는 동무들이 그래요.
자기를 위장하지 않거든요.
난 목사입네 하지 않아요.
목사나 집사나 차별이 없어요.
그냥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에요.
복음 안에서 자유하므로 목사 자신이 위장을 할 필요가 없으니 대화가 되고 교제가 되는 겁니다.
 
사람이 사귀는 것도 우열을 가리고 너와 나는 다르다는 식으로서의 차별적으로 서로 계산적으로 만나면 피곤해요.
저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찾아왔지!
왜 보자고 했지!
왜 전화 했지!
 
보통 보면 연락을 하지 않던 친구들이 전화하면 십중팔구 돈 빌려달라는 말을 하거나!
보험 들어 달라는 말이거나!
그도 아니면 다단계 비슷한 것 하면서 물건 사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러니 평상시 연락하지 않던 사람이 연락하면 반갑기보다 경계하게 되지요.
그게 형제이든 일가친척이든 친구이든 상관치 않고 그렇지요.
이는 모두가 발가벗고 춤 출 수 있는 동무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계산적으로 만나기 때문이에요.
 
이게 신앙에 그대로 묻어나요.
예수 믿는 사람은 계산을 하지 않아요.
자기 이미지 관리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바탕에서 만나기 때문에 이해타산할 일이 없어요.
 
여러분 교회가 뭔가요.
예수님이 교회의 정의를 말씀해 주셨어요.
 

마태복음 16장을 봅시다.
 
마 16:15-19절.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예수가 누구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어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 라고 아는 고백이 천국 열쇠에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이 천국 문을 여는 암호에요.
 
교회가 뭐냐?
예수님이 교회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에요.
 
그리스도의 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임이에요.
교회란? 좁은 의미에선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신앙 고백하는 사람이고 넓은 의미에선 같은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개인이나 무리를 교회라고 해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은 한 성령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한 핏줄이란 말이에요.
한 핏줄이니 통하는 겁니다.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교회고 두 사람도 교회에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에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이 모인 그리스도의 몸이에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이든 둘이든 열이든 백이든 만이든 한 몸이에요.
 
마치 물방울이 하나 하나 떨어져 있어도 개체이고 여럿이 하나로 모여도 하나의 개체가 되듯이 그래요.
이걸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건물의 벽돌처럼 하나하나가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어 간다고 했어요.
 
에베소서 2장입니다.
 
엡 2:13-22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원래 유대인과 이방인은 상종을 못했어요.
율법이 금했어요.
율법 아래선 유대인은 거룩한 사람이고 이방인은 부정한 사람이었어요.
부정 탄다고 서로 악수도 안 해요.
율법이라는 담으로 가로 막혀 있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로 율법을 깨트렸어요.
율법이라는 담을 허물어 버렸어요.
이젠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다 차별이 없어요.
인간의 조건을 다 무너뜨린 겁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겁니다.
 
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벽돌처럼 연결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성전으로 지어져 가요.
성질이 같으니 하나가 되는 겁니다.
이젠 한 권속이에요.
이게 교회에요.
 
이 모두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신앙고백이라는 터 위에 세워져 가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는 사람은 한 형제에요.
그런데 이런 고백은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셔야지만 할 수가 있어요.
결국 교회는 하나님이 세운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뭐냐?
동일한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에요.
어쩌면 교회는 동호회와 같아요.
 
동호회 회원들끼리 모이면 반갑잖아요.
월례회로 모이든지 하면 미리부터 마음이 들뜨잖아요.
마치 여행가는 사람들같이 일찍 일찍 서두르잖아요.
교회오는 게 그래야 해요.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하는 성도가 평일엔 산다고 세상에서 바쁘게 살다가 주일날이면 예배당이라는 한 처소에서 모이잖아요.
한 주일동안 보지 못하였으니 보고 싶잖아요.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가는 겁니다.
 
얼마나 반갑겠어요.
가서 손 마주 잡고 안부를 묻고 맛난 밥도 먹고 얼마나 좋아요.
이래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하지만 이 시대 교회는 이런 곳이 아니에요.
목사들은 수금하기 바쁘고!
교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이리 빼고 저리 빼고 해요.
마음에도 없는 충성을 해야 하고 봉사를 해 보세요.
짜증나지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반복 해 보세요.
주일이 돌아오는 게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는 것처럼 넌더리가 나요.
벌써 주일이냐!토요일만 되면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와요.
그냥 지근 지근이 아니고 아주 찌끈 찌끈 아파요.
또 다시 장롱 속에 넣어 두었던 직분이라는 옷을 꺼내 입어야 하잖아요.
 
성가대원이라는 옷을 입고!
주일학교 교사라는 옷을 입고!
집사라는 옷을 입고!
구역장이라는 옷을 입고!
마음에도 없는 봉사위원이라는 옷을 입고!
여전도회 회장이니 총무니 하는 옷을 입고 마음에도 없는 천사표로 연기하여야 하잖아요.
 
그래도 여전도회 회장이라도 되고 장로라도 되면 사람들 한데서 인사 받는 재미라도 있어서 덜하지만 집사나 총무나 빛이 나지 않는 시다바리가 되어 보세요.
미칠 지경입니다.
억지 춘향도 하루 이틀이지!
 
거기다가 행여 대표 기도라도 걸려 보세요.
하늘이 노랗잖아요.
야! 이거 하자니 머리가 하얗고 안하자니 믿음 없다는 소리를 들을 거고!
그래서 종이에 써서 하는데 읽는 것도 안 돼요.
기도 끝나면 누가 수군거리는 것 같고 예배 시간 내내 뒤 꼭지가 누가 당기는 것 같잖아요.
 
이러면 신앙생활이 짐이 되고 말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교회 안 가려고 하고!
늦게 가려고 하잖아요.
교회 안 갈 핑계거리라도 생기면 앗싸! 하잖아요.
이게 무슨 예수 믿는 겁니까?
이건 아니에요.
 
여러분 집안에 꼴 보기 싫은 사람과 있어 보세요.
숨이 탁탁 막히잖아요.
그런 환경에 오래 있으면 질식해서 죽어요.
교회가 그렇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교회에 가기가 싫고!
가면 빨리 오고 싶어요.
솔직히 교회 가기 싫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안 갈 궁리를 하고!
마지못해서 가야한다면 가도 늦게 가려고 하고!
가면, 빨리 집으로 오고 싶어지는 겁니다.
오래 있으면 숨이 막혀서 그래요.
 
원래 교회는 천국이에요.
생명이 넘치는 곳이에요.
평화가 있고!
만남이 있고!
아름다운 교제가 있는 곳이에요.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헤어지면 만나고 싶은 곳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이런 교회였어요.
성령이 임하고 나니 전혀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이 되었어요.
예수 안에서 너도 없고 나도 없는 우리로서의 가족이 새로 생겨났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구성체로서 하나가 되었어요.
 
여기에 무슨 상하(上下)가 있고,
우열(優劣)이 있고,
차별(差別)이 있어요.
 
예수 안에서 한 형제인데!
어떻게 구분이 되어요.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았어요.
 
너도 용서 받고!
나도 용서받았어요.
그래서 우린 예수 안에서 한 형제이므로 차별이 없어요.
 
누가 크고!
누가 작은 게 없어요.
이런 분위기를 평화라고 해요.
 
천국이 이런 곳이에요.
교회가 이런 곳이어야 해요.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라면 매일 모이고 싶겠지요.
그러니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이고 했어요.
마치 큰 집 사랑방에 모여서 날 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듯이 오지 말라고 해도 모였어요.
 
전혀 누가 강요하지 않았어요.
모두가 자발적으로 모였어요.
이게 바로 예수 믿는 겁니다.
이런 예수를 믿는데 왜 힘이 들고 어렵습니까!
 
예수 믿는 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믿음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 믿는 걸 오해하고 있어요.
뭔가 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이 든 겁니다.
모이기가 싫은 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하지요.
 
24-25절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지요.
바울이 히브리서를 쓸 당시에 어떤 사람들은 모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본받지 말라고 하지요.
 
왜 안 모이겠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싫으니 안 모이는 겁니다.
 
교회오기가 왜 싫습니까?
싫어서 그래요.
좋아 보세요.
오지 말라고 해도 와요.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지요.
사랑은 혼자 할 수가 없어요.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어요.
 
그럼 사랑하려면 모여야겠지요.
모여서 만나야 사랑을 하든지 싸우든지 할 것 아닙니까?
여러분 사랑이 뭔 줄 아세요.
만나는 거예요.
사랑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와 함께 나누는 것이에요.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고 하지요.
이는 만나야 사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실체에요.
머리로 하는 것은 상상이고 관념이에요.
만나서 하는 것은 실체에요.
 
사랑은 스킨십이에요.
만나서 부비고 만지고 느끼는 거예요.
모여서 서로 돌아보고 사랑하라고 하는 겁니다.
 
만나서 서로 격려하고!
만나서 서로 사랑하고!
만나서 서로 돌아보고!
만나서 서로 짐을 지라는 겁니다.
만나지 않으면 사랑이 안 되어요.
 
이 만남을 예수님이 만들어 주셨어요.
서로 남남이었던 자들은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어 주셨어요.
이걸 화목케 하였다고 합니다.
무엇으로 화목케 하였는가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셨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새롭고 산 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하나 만들어 주셨어요.
 
무슨 길입니까?
성소에 들어갈 길이라고 하지요.
그 길을 어떻게 만들었다고 합니까?
자기 몸을 찢어서 만들었다고 하지요.
이걸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의 몸이 휘장처럼 찢어져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 주신 겁니다.
 
이로 보건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알 수가 있어집니다.
예수님은 길을 만들어 주시려고 오셨어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말이에요.
그냥 하늘에서 야! 이리로 올라와라!
그러지 않고 자신이 내려 와서 길을 만들어 주셨어요.
 
왜 길을 만들어 주셨나요.
하나님 만나라고 만들어 주셨어요.
하나님과 교제하라고 만들어 주셨어요.
서로 사랑하라고 만들어 주셨어요.
 
아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막힌 담을 허셨다고 하였잖아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막힌 담도 허물었지만!
하나님과 죄인이라는 막힌 담도 허셨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의 막혔던 담이 허물어진 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겁니다.
성도 간에도 서로 만나 교제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열어 놓은 길이 있다면 여러분들도 하나님과 시시콜콜 말하세요.
예수님이 하나님과 말하라고 길을 터 주셨잖아요.
그러니 교제하여야지요.
 
길을 가면서도 말하고!
운전하면서도 말하고!
설거지 하면서도 말하고!
사랑은 말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하나님과 말을 하라고 길을 열어 주신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쫓겨나서 하나님과 만나지 못했잖아요.
말하지 못했잖아요.
 
하나님과 한 번도 직접적으로 말해보지 못했잖아요.
선지자들에게만 말했어요.
마치 부부싸움하고 난 후 직접 말하지 않고 아이보고 야! 니네 아빠 밥 먹으라고 해라!
그러는 것과 같이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에덴동산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어요.
이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럼 해외근무 마치고 돌아와서 만난 부부처럼 이러쿵 저러쿵 할 말이 많을 것 아닙니까.
살면서 느낀 희노애락(喜怒哀樂) 모두를 말하잖아요.
 
하나님에게도 그렇게 하세요.
예수 믿으면서 당하는 갖가지 희노애락을 말하셔야지요.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만들어 주셨는데도 묵언수행을 하면 안 되잖아요.
그건 사랑하는 게 아니지요.
 
사랑하면 말이 많아져요.
부부간에도 금술이 좋은 사람은 말이 많아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 줄 몰라요.
이런 말을 하라고 예수님이 길을 열어 주셨어요.
 
길이 열렸으면 하나님 하고도 말하고!
한 복음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말하세요.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하여야 맛이에요.
예쁘면 예쁘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세요.
여러분 마음에 이러한 소통의 길이 열렸는가요?
 
올해 유난히 눈이 많이 왔지요.
제 처 조카 녀석이 군대를 갔어요.
처남의 아들놈인데!
 
이 녀석은 울산에서만 살았어요.
알다시피 울산엔 눈이 거의 안와요.
와도 빗자루로 쓸 정도로 밖에 오지 않아요.
제가 울산에 와서 산지가 35년이 되었는데 눈이 많이 왔다고 생각이 드는 때가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해요.
그만큼 눈이 안 오는 곳이에요.
 
그런데 조카 놈의 병영이 파주에 있어요.
지난번에 3박 4일 휴가를 나왔는데 이젠 눈이 징그럽다고 해요.
눈이 오면 항시 출동 준비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길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는 졸병이니 눈 치우는 담당이래요.
바닥에 눈이 쌓이면 혼난대요.
그러니 시간 시간 눈이 내리는 족족 쓸어야 한다는 겁니다.
길을 내 놓아야 한다는 겁니다.
“길!”
 
예수님이 그러지요.
하늘로서 내려온 자 이외는 하늘로 갈 자가 없다고 하셨지요.
아버지께 갈 자가 없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안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따라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어요.
다른 놈 따라가면 안 되어요.
 
문00 따라가도 안 되어요.
이00 따라가도 안 돼요.
유00 따라가도 안 돼요.
정00 따라가도 안 돼요.
안00 따라가도 안 되어요
 
이놈들 따라가면 지옥으로 가요.
천국은 오직 예수님만 따라가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다른 놈들은 왜? 길이 될 수가 없으며 예수님만 길이 될 수 있습니까?
이는 다른 놈들은 전부 땅에서 낳고 예수님만 하늘에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가는 길은 하늘에서 사셨던 예수님만 알아요.
길은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야 알아요.
하늘나라는 예수님 동네에요.
예수님은 천국으로 가는 내비게이션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데리고 오라고 하셨어요.
 
왜 자기백성들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을까요?
그야 사귐을 갖고자 함이지요.
만나서 사랑하려고 그래요.
만나서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래요.
 
이걸 이 세상에선 교회에서 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라고 하는 겁니다.
천국에서 교제하듯이 교제하라는 겁니다.
한 형제로서 사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명절 때 부모님 계신 집에 가지요.
흩어져 있던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이지요.
원근각처에 각자 흩어져 살던 형제들이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모이잖아요.
모이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요.
부모님은 자식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만 보아도 흐뭇해요.
어휴!~ 저것들이 나 내 새끼들이구나! 하고 흡족해 하세요.
 
부모님 하고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형제들끼리는 밤새도록 놀잖아요.
고스톱도 치고!
노래방도 가고!
윷놀이도 하고 그러잖아요.
 
이런 것이 모두가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아무리 마음에 굴뚝같아도 만나지 않으면 공염불에 불과해요.
아무리 전화로 형님아 사랑한다!
동생아! 사랑한다! 하여도 만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입으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몸과 몸이 마주치면서 하는 거예요.
몸과 몸의 부딪침이 없는 사랑은 관념이에요.
관념은 수고나 아픔이나 희생이 필요 없어요.
 
만나지 않고는 서로 돌아보고!
서로 격려하고!
서로 짐을 대신 져주고!
서로 도닥 거려주고!
서로 보듬어 주지 못해요.
 
사랑엔 반드시 수고가 따르고!
희생이 따르고!
아픔이 따라요.
 
예수님이 입으로 길을 내 주지 않았어요.
자기 몸을 찢어서 내 주셨어요.
그러므로 성도도 자기 몸을 찢는 아픔이 있어야 해요.
자기 몸으로 수고하고 아파하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요.
 
이건 제가 행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엔 반드시 토해내는 행함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몸으로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한 겁니다.
말로 하는 사랑은 귀신의 사랑이란 말입니다.
 
교회로 모이지 않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인 것입니다.
말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서로 만나서 하는 거예요.
몸과 몸이 부대껴야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사건이 터져요.
 
그래서 제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집구석에 혼자 있지 말고 교회에 가라고 하는 겁니다.
가까운 곳에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있다면 당연히 거기 가서 형제들과 교제하여야지요.
하지만 주변에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다고 한다면 내가 복음 전도자가 되어서 섬겨야지요.
복음이 맞느냐!
안 맞느냐!
따지지 말고 주께 받은 은혜를 보이셔야지요.
 
내 안에 성령이 계시면 비 진리는 듣지 않을 것 아닙니까?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을 할 것 아닙니까?
내가 눈을 떴으면 소경에게 인도함을 받지 않아요.
그러니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그들의 장단에 춤추지 않으면 되어요.
성전 건축한다고 돈 내라고 하면 돈 내지 말고!
요즘처럼 절기를 만들어서 사순절이니 하면서 금식 기도하려고 하면 기도하지 말고!
어깨에 띠를 띠고 전도하라고 하면 안하면 되어요.
붕어빵 구우라고 하면 싫다고 하세요.
 
그러면 주변에 교인들이 당신은 왜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느냐고 시비를 걸면 저건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안한다고 하세요.
저 목사는 복음 전하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고 하세요.
그러면 욕을 먹을 겁니다.
욕을 하면 욕먹으세요.
 
그러면서 예수님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셔서 당하신 아픔을 아셔야지요.
야! 이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구나! 를 알지요.
복음을 아시니까 더욱 더 가야지요.
가서 어둠 속에 빛으로 서 있어야지요.
그 속에서 이것은 진짜 거짓은 가짜라고 말하세요.
 
가서 예수님이 당하신 아픔에 동참하세요.
가서 내가 만난 예수님은 이런 예수님입니다!
제가 깨달은 복음은 이런 것입니다! 라고 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해주어야지요.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해야지요.
예수의 피로서만 성소에 들어갈 담력이 된다고 말해주어야지요.
 
오늘 본문이 그러지요.
예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맞아요.
하늘나라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들어갈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들어간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들어간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피로서만 죄사함을 받는다는 그 믿음 말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어떠함을 보시지 않아요.
우리가 앞세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만 보아요.
우리가 들고 오는 것이 무엇인지만 보아요.
 
복음을 아신다고 한다면 집에 있지 말고 교회에 가서 교인들이 뭘 들고 있는지 보아야지요.
엉뚱한 자기 열심이나 충성을 들고 있으면서 천국 간다고 하면 그건 아니라고 말해주어야지요.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피로서만 갈수 있다고 말해주어야지요.
이걸 증거하라고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어요.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셨다구요.
그래야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기적 중에 기적임을 알게 될 겁니다.
 
빛은 어둠 속에 필요한 것이에요.
어둠 속에 빛으로 사세요.
빛으로 살면서 욕도 먹어 보아야 아~ 예수님이 이래서 죽으셨구나! 를 알게 됩니다.
애매히 고난도 당해 보아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는 아픔도 맛을 보게 되어요.
 
그럼에도 에이~ 복음 전하지 않는 교회에 다녀 보아야 뭐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지 라고 생각하고 집에서 TV는 나의 목자시니 하고 있는 것은 교만이에요.
그건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일신상의 편함을 추구하는 악이에요.
신앙생활이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이지 복음 핑계대고 노는 게 아니에요.
 
인간이란 자기 합리화 시키는데 달인들이에요.
바빠서 못 나왔다고 해요.
모두가 핑계가 있어요.
오늘 날 다들 사는 게 바빠요.
우린 당장 눈 앞에 닥친 일들이 급해요.
 
자식 좋은 대학에 넣어야 하고!
사업 번창시켜야 하고!
결혼식에도 참석해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회사 생활하려면 회식자리도 참석하여야 하고!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등산도 가야하고!
할 일이 바빠요.
복음을 들을 시간이 없어요.
 
복음은 당장 듣지 않아도 죽지 않지만 회사에 짤리면 당장 굶어야 하잖아요.
그러니 복음은 항상 맨 뒷전으로 밀려나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예수는 내 일들을 다 처리하고 난 다음에나 생각을 합니다.
시간 나면 그때야 심심한데 교회나 한번 가 볼까! 한다니까요.
 
항상 우선순위는 내가 사는 일이지 예수님 일이 아니에요.
그러면서 우린 예수 믿는다고 합니다.
어디서 이런 믿음이 생겼는지 몰라요.
전 이런 믿음을 중국산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중국산은 짝퉁이라고 하니 그럽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이런 믿음은 없어요.
성경 어디에도 이 시대 교인들처럼 예수 믿고 산 사람이 없어요.
자기 볼일 다 보고 시간 나면 예수 믿은 사람이 없다구요.
그러니 한국교회 믿음은 짝퉁인 겁니다.
중국산이에요.
 
설령 교회에 와도 정신이 다른데 가 있어요.
왜 앉아 있는지 몰라요.
그냥 관성의 법칙에 따라서 와 있는 겁니다.
마치 김유신 장군의 말이 습관적으로 천관녀의 집으로 찾아가듯이 교인들의 발걸음이 저절로 찾아 온 것과 같아요.
 
교인들에게 왜 예수 믿습니까?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수십 년 믿어도 성경 이야기를 하면 숨이 탁 막혀요.
그동안 뭘 들었는지 할 말을 잊게 만들어요.
도무지 성경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요.
 
열심히 교회 다닌 것은 있는데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빈 깡통이에요.
시계불알처럼 왔다 갔다 했어요.
교회 문턱만 밟고 다녔어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하나님 없어도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 연관을 지어서 해석했어요.
비가 안 와도 하나님께 기우제를 지냈고!
흉년이 들어도 하나님을 생각했고!
가정에 우환이 들어도 하나님을 생각했고!
 
옛날에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삶에 개입을 한다고 믿었어요.
그래서 범사에 신을 섬겼어요.
지금 생각하면 물론 우상이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들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옛날에 일식이 생기면 신이 노했다고 굿을 하고 난리를 쳤어요.
주몽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일식이 생기자 신이 노했다고 온 나라가 난리잖아요.
 
그런데 이젠 과학으로 태양이 달에 가려서 어두워진 것이란 것을 알았어요.
그러니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살아요.
옛날에 하늘에서 천둥 번개가 치면 신이 노했다고 했는데!
이젠 피뢰침을 건물 꼭대기에 달아서 번개를 잡아 버렸어요.
 
과학이 하나님을 잊게 만들었어요.
하나님은 더 이상 믿을 대상이 아니에요.
이제는 옛날처럼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가 아니에요.
그냥 취미삼아서 한번 찾아가 주면 되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마치 이 시대 부모와 같아요.
뼈 빠지게 공부시켜 놓았더니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힘이 생겼어요.
부모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찾는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평상시엔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요.
그러다가 명절 때나 굴비 하나 사들고 돈 몇 푼 들고 가서 인사하고 오면 되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상 만물은 하나님이 직접 섭리하신다고 믿었어요.
그러나 이제는 과학의 발달로 내 인생의 관리도 내 손으로 넘어 왔어요.
아프면 병원 가면 되고!
돈 없으면 열심히 돈 벌러 나가면 되고!
이제는 하나님 없어도 상관없는 시절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 없이도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믿고 있어요.
합리적인 사고가 그렇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 과거처럼 목숨 걸고 주일을 지킬 이유도 없는 겁니다.
주일 안 지켜도 벼락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겁니다.
 
이젠 주일에도 교회 올 필요가 없어요.
인터넷으로 설교 들으면 되니까요.
교회마다 얼마나 서비스를 잘 해 줍니까?
그냥 손가락 하나 까닥하면서 골라가면서 보잖아요.
기분 나쁜 말을 하면 안 보고 기분 좋은 말을 하는 목사들 설교만 골라 들으면 되잖아요.
 
그러니 누가 교회 오겠어요.
앞으로 건물 중심의 교회는 사라질 겁니다.
교회에 모이지 않을 날들이 올거에요.
왜냐하면! 육신은 편할 걸 좋아하므로 신앙생활도 편의주의로 흐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에요.
예수는 엑스트라에요.
내가 주인공이 되는데 예수는 도움만 주면 되어요.
내가 필요할 때 이용만 하면 되어요.
예수님은 시다바리에요.
자기 볼일 다 보고 난 후에 시간이 나면 믿어주는 그런 예수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이 동호회 모임처럼 시간이 나면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하는 꼴이 되고 만 겁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를 믿는데요.
본인이 예수를 믿는다는 데서야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그럼 믿는가 보다! 라고 해야지요.
 
어쩌면 바울은 이런 일이 닥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오늘 본문 말씀을 기록한 것 같아요.
때가 되면 모이기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열면 아무리 바빠도 모여서 하나님 말씀을 좀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좀 알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찢어서 하늘 가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집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늘에 들어갈 길을 열어 놓았다는 말은 이 땅은 떠날 곳이란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집으로 이사 갈 준비를 하라는 말이에요.
 
세상 사람들 눈에는 하늘에 길이 안 보이지만 성도들 눈에는 보여요.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자 하늘이 확 열렸어요.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는데 예수님이 여신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열어 놓은 이 길을 따라 하나님 집에 가라는 겁니다.
 
하늘에 하나님 집이 있어요.
장자들이 모이는 총회가 있어요.
하늘 나라 교회에요.
우리도 장차 그리로 들어가야 해요.
그 모임에 참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 집에 모임은 예수님 피를 앞세우고 들어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무슨 집이 피를 들고 들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피를 들고 간다는 것은 죽음을 들고 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근거로 하나님 집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 집에 예수님의 피를 들고 들어가야 합니까?
이는 창세전에 약속을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들고 오는 사람만 거룩하다고 인정해 주시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피는 그냥 피가 아니고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해 주는 피에요.
죄를 사해주고 의롭게 해 주는 피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피에요.
 
알다시피 인간은 죄인이에요.
죄인이란? 죄 아래 눌려있다는 말이에요.
죄가 마음을 꽉 누르고 있어요.
 
마치 헤비급 프로 레슬러가 우리를 헤드락(목조르기)를 하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우린 못 빠져 나와요.
목이 졸려서 캑~ 캑~ 거린다구요.
빨리 항복해야지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고생이에요.
 
우리가 만약 죄를 이길 수 있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 피 앞세우고 천국에 갈 이유가 없어요.
그냥 우리가 쑥 밀고 들어가면 되어요.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예수 믿으면 죄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속에서 미움이 생기면 미움을 뽑아내려고 합니다.
탐심을 버리라고 하니 탐심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안 버려져요.
인간 자체가 탐심덩어리에요.
인간 자체가 미움과 시기 덩어리에요.
푹 쑤시면 미움이 나오고 탐심이 나와요.
마치 이불 속에 청국장을 띄우는 것처럼 풀썩거리면 청국장 냄새가 진동을 해요.
 
우리는 움직일 때마다 냄새가 풀풀 나요.
 
미움이라는 냄새!
시기라는 냄새!
질투라는 냄새!
입에서 냄새가 나듯이 나요.,
 
그러니 너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하지요.
무덤 속엔 송장이 썩고 있어요.
그럼 우리 속에 송장이 썩고 있어요.
 
성령이 오신 것은 너희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예요.
너희는 갈고 닦아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요.
우리 속에 악함을 빼내고 착함만 남겨두자 그러지 않아요.
 
바울이 그러지요.
내 속에 죄가 있는 줄 몰랐는데 율법이 주어지니 죄가 툭 하고 튀어나오더라는 겁니다.
율법이 야! 너 탐내지 마라!
그러니 죄라는 놈이 탐을 내려고 고개를 내 밀더란 말입니다.
어! 내 속에 이런 것이 있었나!
이 놈이 언제 들어 왔지!
 
죄라는 놈이 탐내면 어때!
그러는 겁니다.
죄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면!
하면 어떤데! 라는 식으로 반발을 해요.
왜 그런가 하면 죄가 하나님께 반발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거든요.
이런 죄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반발하는 식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죄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어서 왔어요.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하지 말라!
그러면 하면 어쩔 건데!
그러고 기어이 하고 말아요.
이걸 인간은 금지하는 것을 소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하지 말라고 하면 기어코 하고야 말아요.
이게 죄에요.
항상 하나님의 명령을 반대로 움직여요.
자식을 키워보면 알잖아요.
한 놈도 말 잘 듣고 큰 놈이 있나요?
없어요.
 
솔직히 여러분 예수 잘 믿고 싶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지요.
마음은 훤한데 막상 하고자 하면 안 되지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 마음을 죄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 시대 교인들이 착각하는 게 뭔가 하면 우리가 의지가 약해서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각오만 단단히 먹으면 죄를 안 지을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의지를 다지고 각오를 새롭게 하자고 해요.
성화주의자들이 그래요.
성령이 그렇게 해 준다고 가르쳐요.
 
그러나 반대에요.
성령은 율법처럼 죄를 더 드러나게 만들어요.
우린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그래서 우리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세요.
내가 완전히 썩은 놈이라는 것을 알려주세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 집에는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대 제사장이 무엇을 합니까?
대신 제사를 지내주시는 분이에요.
 
일 년에 단 한번 백성들을 대신하여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분이에요.
가서 하나님께 죄 문제를 일괄 처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 대제사장이 자기 피를 앞세우고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고 하잖아요.
자기의 죽음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합니다.
 
그 대 제사장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젠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합니다.
지금은 교회에 예수의 피를 앞세우고 나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만 있으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겠답니다.
 
어떤 유행가를 들어보니 이런 가사가 있어요.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그래요.
하나님이 어떻게 살았느냐 묻지를 않아요.
너 왜 그 모양이니 묻지 않아요.
 
그냥 예수님의 피가 묻은 옷만 입고 가세요.
그리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아버지 저 왔어요!
그러세요.
그럼 아버지가 왔냐!
버선발로 나와서 맞아 주세요.
그래 밥은 먹었고!
어디 아픈 데는 없냐!
 
탕자를 보듬어 안은 아버지를 생각해 보세요.
아버지는 아들이 몸을 먼저 살피지 어떻게 살았느냐 묻지 않아요.
그동안 먹지 못한 것으로 인하여 야윈 얼굴을 부여잡고 아파하지 왜? 말을 안 들었느냐고 타박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빈손 들고 오는 것을 미안해 할까봐서 미리 알고 예수님의 피를 들고 오라고 준비해 두셨어요.
그것도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들고 오게 하셨어요.
그러니 아버지가 주신 예수님 피 들고 아버지 저 왔어요.
그러세요.
 
하나님이 이웃집 아저씨가 아니에요.
아버지에요.
아버지!
 
돌아온 탕자를 옷 입히고 소를 잡아 몸 보신을 시켜 주시는 아버지란 말입니다.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 했느냐고 몸부터 챙기시는 아버지라구요.
 
317장 찬송가는 이럴 때 부르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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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멋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가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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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있는 그대로 오세요.
예수님 피 들고 아버지 저 또 왔어요!
그러세요.
에이~ 사람이 체면이 있지!
지난번에도 용서 받았으면 되었지!
어떻게 이제 또 용서 해달라고 한단 말인가 하지 말고!
그냥 매일 매일 오세요.
 
와서 변론하세요.
좀 뻔뻔해 지세요.
뻔뻔함이 믿음이에요.
아버지 앞에서 무슨 자존심이 필요합니까?
못난 그대로 오세요.
교회엔 잘난 모습으로 잘난 사람이 오는 곳이 아니에요.
 
349장 찬송은 잘 부르잖아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라고!
그래요.
하나님 앞에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라고 나오세요.
단 하나 예수님 피만 들고 오세요.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피만 앞세우고 오세요.
목사가 뭐라고 하든지!
교인들이 수군거리든지 개의치 말고 예수님 피만 들고 있으세요.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 말라고 하셔야지요.
 
교회란 서로 못난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런 죄인을 용서해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는 곳이에요.
이런 못난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이 살을 찢기고 피를 흘려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하는 곳이에요.
 
부디 잘난 사람으로 아버지께 오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나아오세요.
야곱처럼 장자의 옷을 입고 아버지 맏 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나아오세요.
그럼 아버지가 축복을 해 주세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다 아시면서 우리가 입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보시고 아들로 대우해 주신단 말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만들어 놓은 천국의 모델하우스에요.
그러니 예수의 피로 모이는 연습들을 하셔야 해요.
예수 안에서 만난 형제들과 오순도순 장차 가야할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갑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에게 빈손 들고 오는게 미안해 할까봐서 예수님 피를 선물로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주신 예수님의 피를 앞세우고 당당하게 나아오겠습니다. 교회에 모일 때도 예수님의 피로 모이게 하시고 성도 간에 교제를 할 때에도 예수님의 피로 교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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