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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25강. 흙을 먹는 뱀 (창 3:14-15)

by coroa 2021. 1. 14.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강. 흙을 먹는 뱀 (창 3:14-15).-

-.정낙원 목사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각자에게 먹어야 할 양식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어떤 짐승은 고기를 양식으로 주셨고,

어떤 짐승은 풀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짐승임에도 초식동물이 있고, 육식동물이 있습니다.

동일한 새들임에도 풀을 먹는 새가 있고, 고기를 먹는 새들이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들에게 각자가 먹을 양식을 지정해 주셨다는 것은 각자의 생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각자 지정해 주신 것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송충이는 솔잎을 먹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송충이가 솔잎을 먹지 않고 햄버거를 먹게 되면 죽어버립니다. 

 

고기를 먹어야 할 사자가 풀을 먹으면 죽고,

풀을 먹어야 할 소가 고기를 먹으면 죽게 됩니다.

 

예전에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왜 소가 미치는가요?

이는 풀을 먹어야 할 소에게 고기를 먹였기 때문입니다.

 

소가 광우병에 걸리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게 주신 각자의 양식을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하는 양식을 먹을 땐 어떤 현상이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소에게만 국한 된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 양식을 먹지 않으면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죄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인간도 먹어야 할 것을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게 됩니다.

아담이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과를 양식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먹어버렸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아담은 미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은 먹지 말아야 할 양식을 먹고 나타난 미친 결과가 아담 혼자에게 머물지 않고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끼쳐서 온 세상이 미치고 만 것입니다.

 

미치면 눈에 뵈는게 없습니다.

안하무인이 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이건 마치 술을 쳐 먹고 부모도 몰라보고 행패를 부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한 짓이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피조물이 어찌 창조주를 대적한단 말입니까?

이건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홍수 속에서 살려 주었으면 감사하여야지 어찌 대적을 한단 말입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미친 짓이고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부모를 대적하고 폭행하는 자식을 금수만도 못한 패륜아(悖倫兒)라고 합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게 해(害)를 가하는 것은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술을 처먹고 미쳤든지, 마약을 처먹고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는 부모를 대적하는 자를 패륜아라고 낙인을 찍어서 이건 인간이 할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를 낳아준 하나님에게 패륜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인간들에게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괜찮고,

인간들이 부모에게 패륜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다운 아주 고약한 이율배반적이면서도 이분법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생명은 양식을 찾게 되고 양식은 생명을 자라게 합니다.

산 자는 양식을 먹고 양식이 사람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양식은 분리 될 수가 없는 하나인 것입니다.

 

흔히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수고가 많으십니다’ 라고 하면, ‘다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응대를 합니다.

맞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먹거리를 그렇게 신경을 씁니까?

이는 먹거리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황우장사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배가 고파도 아무 것이나 먹지 않습니다.

각자 먹어야 할 것을 찾아서 먹게 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각각에게 먹거리에 대한 본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먹어야 할 양식을 정확하게 찾아서 먹는 것입니다. 

이건 본능적인 것입니다.

본능이 자기 먹거리를 찾게 만듭니다.

 

성도에게 있어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성도들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면서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창조가 된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하기 이전에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인가를 먼저 헤아려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게 되면 자기 딴에는 충성하였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잘 보여주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가인이 분노하면서 하나님에게 예쁨을 받은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셨나요?

이는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러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게 되면 가인처럼 왜 내 제사는 받지 않느냐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율법 지킴을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하신다는 것을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 초림 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구약 내내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서 늘 반복하여서 일어났던 일인 것입니다.

 

호세아 4장을 봅시다.

 

호 4:6-7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 6: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 선지자는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도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면서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번성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더욱 더 범죄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서 행하면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죄가 더욱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열심은 하나님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은 열심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아는 앎입니다.

 

앎이 먼저이고,

제사는 나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스스로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정작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가난하고 헐벗고 가련한 소경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서 예수님이 있을 공간이 없어서 문 밖으로 다 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착각은 자유이겠지만 그 데미지는 엄청나게 큽니다.

 

마태복음 7장을 봅시다.

 

마 7:22-23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종말의 심판 때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주의 이름으로 각양의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면서 불법을 행하였다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열심히 한 것이 불법이라고 합니다.

이건 청천벽력과 같은 말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시간도 없습니다.

저주 중에서 이런 저주는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열심과 충성으로 행한 것인데,

정작 하나님은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일이 하나님을 대적한 불법이라고 합니다.

이런 충격이 또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열심 이전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먼저인 것입니다.

이럴 때 아는 것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친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을 우리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갖다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시간 시간 모였고 바리 바리 갖다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인의 제사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을 봅시다.

 

사 1:10-14절.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시간 시간마다 소를 잡아 바치고 양을 잡아 바치곤 하였습니다.

안식일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대회 때마다 틈만 나면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 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발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언제 이런 걸 원했느냐고 합니다.

마음에도 없는 것을 받기에 지쳤고 이젠 지겨우니까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서 이스라엘의 외식 신앙에 역겨움을 드러내셨다.

얼마나 역겨웠으면 이스라엘을 유황불로 저주를 받았던 소돔 고모라 사람과 같은 인간들이라고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섬뜩해지는 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 정도 되면 하나님 앞에 나아 왔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는지를 아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판입니다.

 

예수님도 요한계시록 3장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 하시기를 토해 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종말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를 지금 우리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을 헤야 할까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요?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알고 난 후에 열심도 충성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 본다면 하나님 어떤 제사를 원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이 채소를 좋아 하는지,

아니면 양고기를 좋아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괜히 하나님의 식성도 알지 못하면서 상을 차려 놓았다가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헛된 제물을 드리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난 죽도록 충성을 했는데 하나님은 받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평생 충성한다고 했는데, 그 날에 하나님이 난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딴에는 엄청난 일을 했다고 자랑하는데 정작 주님은 모른다고 하시면 어찌 될까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이 그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일컬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눅 16장 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돈을 좋아하니까,

예루살렘 성전을 온통 돈 천지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을 확대 해석하여서 백성들로 하여금 죄 아래 가두어서 제물을 바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서 제물들을 강탈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을 확대 해석을 하여서 안식일에는 밥도 짓지 못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밥을 짓기 위해서 불을 지피는 것도 노동이라고 해서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되도록 했고,

아이가 놀다가 옷이 터져서 바느질을 해도 안식일을 범한 죄가 되기 때문에 제물을 가져다가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여행을 가도 자신들이 정해 놓은 길이를 벗어나면 안식일을 범하였다는 죄목으로 제물을 갖다 바쳐서 속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성전에는 백성들이 바친 제물로 차고 넘쳤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바친 속죄 제물로 이익을 챙겼던 것입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율법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까 백성들은 안식일이 돌아오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안식일이 즐거운 날이 아니고 고역의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안식일이 돌아오는 것이 마치 며느리들이 명절날 돌아오는 것처럼 싫은 날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잘못을 하여서 속죄 제사를 지내려고 해도 본인이 제물을 준비하면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지정해준 업자로부터 구입을 해야 했습니다.

업자들이 준비한 양이라야 거룩해서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가르쳐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서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파는 장사하는 자들과 돈을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거룩을 판단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제사장의 말을 안 듣고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이 얼마나 역겹고 화가 났으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지옥에 갈 독사 새끼들이라고 저주를 퍼 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백성들에게 돈만 밝히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가르쳐 놓았으니 백성들이 하나님을 좋아 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아주 나쁜 하나님을 가르쳐 놓은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성도들의 신앙을 돈으로 평가하는 목사들과 같은 것입니다.

소경인 교인들은 목사들이 말을 듣고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는 분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돈만 갖다 바치면 사해주는 그런 하나님으로 가르쳐 놓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을 봅시다.

 

마 23:16-33절.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하나님은 종교 지도자를 소경된 인도자라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교인들은 소경이고 목사들은 강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서기관, 제사장, 율법사)들고 백성들을 한 통속으로 묶어서 소경들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을 돈의 가치로 척도를 삼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신들은 지도자(목사)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고 합니다.

결국 백성들은 소경에게 인도를 받아서 함께 망하게 된 것입니다.

소경을 인도자로 두었다는 것은 자신도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경을 소경에게 붙여서 함께 지옥으로 데리고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돈 버러지와 같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 들이라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마 23:33절.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돈을 좋아한다고 가르치는 자들을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이 시대도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로 신앙을 판단하는 목사들도 뱀 새끼들인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뱀 새끼인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우리의 신앙을 달아 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돈을 좋아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 돈을 좋아하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돈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인간은 뱀 새끼들인 것입니다.

아니 역설적으로 말하면 우린 모두가 뱀 새끼들이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니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여도 우리는 그 악의 뿌리인 돈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는지를 추적해 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돈을 밝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많은 짐승들도 있는데 굳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을까요?

 

소 대가리들아!

말 대가리들아!

돼지 대가리들아!

아니면 코끼리 새끼들아!

이 더러운 바퀴벌레 새끼들아! 라고 하지 않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선악과로 미혹을 한 뱀의 행사머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뱀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뱀이 어떤 놈인지를 살펴봅시다.

 

창 3:1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고 되어 있습니다.

“간교하다” 라는 말은 어감 자체가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간사스러운 사기꾼 같다” 또는 “비열하고 얍삽한 놈” 과 같은 뜻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간교하다” 는 원문의 뜻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나쁜 뜻이 아니라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교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문으로는 “아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의 “아룸”이라는 말을 신약 성경의 헬라어 70인 역에서는 “프로니모스(frovnimos)”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교활” 이나 “간교하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 반대로 “지혜롭다”는 뜻이고, “슬기롭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개역 성경에서도 역시 “슬기롭다”, “사려 깊다”, “신중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말 개역 성경에서도 “아룸”이라는 단어를 사람을 대상으로 쓰여 질 때는 “지혜”로 사용하였습니다.

 

그 몇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잠 12:16절.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 13:16절. “무릇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행하여도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니라”

 

잠 14:8절.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니라”

 

잠언에서 사용하는 “슬기롭다”라는 말은 창세기 3장 1절의 “아룸”과 일점일획도 다르지가 않습니다.

이처럼 “아룸”을 사람에게 사용 할 때는 “슬기롭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독 뱀에게는 “간교하다”고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일한 단어를 가지고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반칙입니다.

뱀에게는 나쁜 의도로 사용하고,

인간에게는 좋은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뱀에게는 간교니 교활이니 해 놓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슬기니 지혜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인간들이나 할 법한 일입니다.

참으로 죄인다운 이율배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인간의 뻔뻔스러움과 추악함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정서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뱀을 ‘지혜롭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뱀을 나쁘게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 모두가 뱀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편견입니다.

 

예수님도 과연 우리들처럼 뱀의 지혜를 편견으로 나쁘게 보았을까요?

 

마 10:16절.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님께서는 뱀을 인간들처럼 편견으로 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뱀을 있는 그대로 지혜로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오히려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뱀처럼 지혜로우라는 단어가 바로 구약 히브리어로 “아룸”입니다.

신약 헬라어로는 “프로니모스(frovnimos)”인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한 말을 창세기 식으로 번역을 하면 너희들은 “교활하라” “간사스러워라” 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야비하고, 얍삽하고, 교활하고, 사기꾼처럼 간사스럽게” 행동하라고 하였겠는가?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절대로 그렇게 말씀 하실 리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편견이 예수님은 좋은 말만 하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뱀 때문에 인류가 죄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뱀을 죄의 원흉인 마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면 뱀은 죄를 짓게 하지 않았습니다.

 

뱀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선악과가 지니고 있는 정보를 사실 그대로를 알려 주었을 뿐입니다.

굳이 뱀의 잘못을 따진다면 인간들에게 알려주지 말아야 할 정보를 알려준 것뿐입니다.

 

이건 마치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 될 나쁜 영화를 보여준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나쁜 영화를 보고서 따라한 아이들이 잘못이지 나쁜 영화를 보여준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보면 왜 그딴 것을 보여 주었느냐고 책망은 들을 수는 있어도 보여준 것으로 죄를 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뱀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따진다면 너무 올바르게 알려 준 것이 죄라면 죄인 것입니다.

뱀은 선악과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뱀은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여자에게 알려 준 것입니다.

 

창 3:1-6절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뱀은 여자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선과 악을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심판하는 권세인 것입니다.

 

뱀의 말대로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고 선과 악에 대한 눈이 밝아졌습니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자기들의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눈을 가지게 되자 자기들 생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하신 일도 자기들 눈으로 판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발가벗음으로 살게 한 것을 수치라 여기고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기들 생각을 섞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발가벗음을 아름다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발가벗고 살아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발가벗고 사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 같으면 하나님이 먼저 치마를 해 입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가벗은 그 상태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발가벗음이 수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은 성경을 보는 관(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소경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눈으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다른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다른 신앙을 낳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을 크게 오해를 하였도다” 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오해란? 다른 해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뱀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케 보게 한 것입니다.

다른 눈으로 보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도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지혜로 성경을 해석케 합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 성경을 인간의 이성을 바탕을 한 인문학인 해석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이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원어 풀이입니다.

원어로 풀이 한다고 하면서 공교하게 지은 말로 해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도를 깨우치는 것으로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삶으로 표현이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은 불교처럼 어떤 도리나 이치를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구주가 되기도 하지만 우리가 본을 받아야 할 형제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고자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신앙을 도 닦는 것으로 변질을 시켜 놓았습니다.

마치 도사가 되어서 신선놀음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도를 깨달으면 마치 고급 신앙인 것처럼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미혹을 당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심오한 도를 깨우치는 식으로 이해하여서 문자풀이를 하고 그 뜻을 깨달으면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머리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몸뚱아리는 자리에 누어서 손과 발은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들과 같습니다.

 

중풍 병자들은 머리로 축구하는 자들입니다.

머리로는 공을 차기만 하면 골인이 됩니다.

뒷발로 차도 골인이 됩니다.

그러나 몸뚱이는 스스로 밥도 떠먹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신앙을 일컬어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는 입으로 믿는 것입니다.

머리로 도를 깨우치는 것도 아닙니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서 예수로부터 받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귀신의 신앙입니다.

뱀 신앙인 것입니다.

 

뱀은 항상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선악의 지혜로 인간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선악의 지혜는 선악에 머물게 할 뿐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아무리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여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자랑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나 이만큼 깨달았다,’ 고 자랑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 자랑하는 것이 ‘난 이만큼 아는데’, ‘넌 모르지’, 라고 사람 간에 우열과 서열로 줄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자는 마치 득도한 신선처럼 행세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는 저급하다는 식으로 폄훼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원어로 해석하는 것을 가지고 진리를 안다 모른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선악의 지혜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지적유희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피 흘리기까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없이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뼛속 깊이 절감을 하고 그리하여 십자가의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뱀은 인간을 선악과의 지혜에 머물러 두게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자기 자신에게 빠지게 합니다.

복음을 깨닫는 자신에게 취하게 합니다.

 

마테복음 7장을 보면 종말의 심판을 말할 때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이러 저러한 능력을 행하였다고 자기 자신들이 행한 업적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면서 내게서 따라고 합니다.

 

그들은 분명이 주의 이름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할까요?

이는 이들은 주의 이름으로 무엇인가 행하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복음 아는 것으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알아진 복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대신하여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 나 밥 많이 먹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밥을 먹은 것은 일을 하기 위함이지 빈둥거리고 놀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은 그 복음을 힘으로 삼아서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나 뱀은 복음 아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선악의 지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은 선악의 지혜이고,

복음 아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은 생명의 지혜입니다.

아는 것은 선악의 지혜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은 생명의 지혜입니다.

 

뱀은 예수그리스도를 지식으로 아는 것에 머물게 하여서 생명의 삶을 가리게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희노애락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뱀은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과를 가리는 작전을 구사합니다.

뱀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였느냐 라고 함으로서 인간의 관심사를 먼저 먹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돌려버리는데 성공을 합니다.

 

만약 뱀이 인간에게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실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다면 인간은 당연히 생명과로 눈이 고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생명과를 따 먹었을 것입니다.

그럼 선악과를 따 먹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뱀은 이를 잘 알고 인간의 눈을 선악과에 붙잡아 두는데 작전을 펼친 것입니다.

인간이 관심사가 선악과에 고정되는 순간 인간은 선악과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는 인간의 마음을 단박에 빼앗을 만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할 만한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마음속에 먹어야겠다는 그림이 그려지게 되면 인간의 모든 신경은 먹고자하는 쪽으로 동원하여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뱀은 선악과에 인간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성공 하였습니다.

이러면 이미 게임은 끝났습니다.

언제 따 먹느냐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뱀의 잘못은 인간의 눈을 선악과로 빼앗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의 길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뱀이 저주를 받은 것은 인간에게 알려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 준 것 때문입니다.

피조물에게는 선악을 아는 일은 해(害)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어른이 어린 청소년에게 소화하지도 못할 성인비디오 내용을 알려 준 것과 같습니다.

성인비디오는 그것을 소화 할 수 있는 성인에게는 전혀 해(害)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성(性)을 모르는 어린 청소년이 보게 되면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어린아이가 성인비디오를 보지 못하도록 꼭꼭 감추는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지혜는 예수님처럼 온전하신 분이 가지고 있으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 가지게 될 때는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피조물 입장에서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만든 것도 피조물 입장에서 좋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강한 경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들은 모든 것을 인간 중심에서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모두가 선한 것인데도 피조물인 인간들이 자기 생각으로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여서 판단한 것입니다.

 

가장 쉬운 예로 보면 인간들은 자연을 보호 한답시고 자연을 훼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 보호는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자연을 잘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발 내가 창조한 그대로 가만 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닙니다, 우리가 좋게 만들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면 안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먹어가지고 이런 난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감당하지도 못할 선악의 지식을 가져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과유불급이라고,

넘침은 모자람만 못한 것입니다.

지혜도 절제하지 못하고 넘치게 사용하면 뱀처럼 화를 입게 됩니다.

반대로 아담처럼 지혜가 부족하여 자기 뜻대로 판단하는 것도 화를 입게 됩니다.

 

뱀은 지혜가 넘쳐서 망하였고,

인간은 지혜가 부족하여서 망하였습니다.

둘 다 지혜를 잘못 사용하여서 함께 저주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였던 것입니다.

 

뱀은 인간에게 선악과의 비밀을 알게 해준 죄로 저주를 받았고,

인간은 지혜가 부족하여 뱀의 술수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은 죄로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뱀과 인간에게 떨어진 저주가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 해 버리십니다.

아담이 살아갈 땅은 저주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뱀과 죄인을 둘 다 저주의 기운을 뿜어내는 흙에 가두어 버리셨습니다.

 

창 3:14절.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8-23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 ~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뱀은 흙을 먹게 하셨고,

인간은 일평생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여서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도록 하셨습니다.

뱀과 인간은 흙을 근거로 살아가는 한 통속이 되고 만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뱀이 인간보다 한 수 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뱀은 죄인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을 지배하고 신(神)이 된 것입니다.

뱀은 흙에 속한 것으로 인간들을 다스립니다.

 

뱀은 마귀이고 사단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미혹한 뱀이 곧 마귀이고 시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2장에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용을 일컬어 옛 뱀 마귀 사단이라고 동의어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종신토록 흙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뱀이나 인간은 흙을 떠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뱀은 비록 배로 기어 다니기는 하지만 흙을 먹지 않습니다.

이 땅에 그 어떤 뱀도 문자대로 흙을 퍼먹고 사는 뱀은 없습니다.

뱀이 종신토록 흙을 먹는다는 것은 비유이며 상징인 것입니다.

 

흙이란? 아담을 만들 때 사용한 재료입니다.

그렇다면 뱀이 흙을 먹는다는 것은 곧 인간을 먹는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흙에 속한 자들을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흙에 속한 자는 육이라고 합니다.  

 

육은 영의 반대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영(靈)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영의 나라라고 합니다.

 

영은 하늘이라고 하고, 육은 땅이라고 합니다.

영은 거룩이라고 하고, 육은 비거룩이라고 합니다.

영은 생명이라고 하고, 육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영이라고 하고, 인간들의 세계를 육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한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죄인들의 임금인 것입니다.

이 모두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죄 아래 있는 세상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마귀의 권세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조차도 땅에 것으로 미혹하여서 자기 수하에 두려고 시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사십일을 굶주린 예수님을 찾아가 시험을 합니다.

 

눅 4:1-13절.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마귀는 사십일을 굶은 예수님에게 먹을 것으로 시험을 합니다.

육신은 떡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항우장사라도 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떡을 먹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마귀는 몸에 필요한 떡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마귀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십일을 굶으셨습니다.

당연히 몸이 요구하는 대로 떡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먹을 양식은 떡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은 떡을 안 먹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존재 양식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떡의 가치로 사는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사는 자들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떡을 먹고 배부름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귀는 온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그럼 내가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모든 권세를 줄 테니 그것으로 이루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유를 지으시고 다스리는 분이 무엇이 아쉬워서 세상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느냐고 하면서 마귀를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데에는 세상의 힘은 필요치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서 네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붙잡아 줄 것이니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으로 능력을 보여 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야 임마! 하나님의 아들이 뭐가 부족해서 인간들에게 나 하나님 아들이니 나 좀 알아 달라고 할 필요가 있느냐,

인간들이 알아주면 하나님이 아들이 되고 인간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하나님 아들이 안 되는 것이냐,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하나님의 아들인데 뭘 기적을 동원해서 나 좀 알아 달라고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 없으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져 라고 합니다.

그러자 마귀가 나 살다가 살다가 별 희한 놈 다 보겠네 라고 궁시렁 거리면서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떡을 거부한 것은 떡의 가치로 사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뜻도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난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난 떡 먹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이 세상에 천년만년 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만 다 이루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마귀와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마귀가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과 예수님이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이 다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은 떡을 위해 살고 이 세상에 영웅호걸이 되어서 모든 권세를 가지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자기 이름을 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아들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는 자입니다.

부자 되는 것도 원치 않고,

세상 권세자가 되는 것도 원치 않고,

특별한 능력을 행하여서 자기 이름을 내는 영웅호걸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아버지 뜻대로 살아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욕심도 없고 미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세상 사람들과 존재 양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수님과 같은 존재양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귀와의 시험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아들은 장차 이 땅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살아갈 희한한 족속들이 출현할 것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요?

바로 말씀으로 난 성도들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과 같은 사고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로 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영웅호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가치로 살지 않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살아갑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창궐하고 있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하는 기복주의와,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출세하고 높아진다고 하는 영웅주의와, 예수 믿으면 기적을 행하고 갖가지 능력을 행한다고 하는 신비주의는 모두가 마귀에게 미혹을 당하여서 나타난 현상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교회 대형화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미혹당한 교인들은 마치 교회가 크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누가 신기한 능력을 행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입은 특별한 종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러한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러한 것을 쫓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신앙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시대이고 참 성도는 적고 가짜 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처럼 가짜들은 온 세상을 뒤덮는데 진짜들은 7천명처럼 미미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세상 것으로 미혹합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세상 것으로 흙에 속한 자들을 추수하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흙에 속한 자들은 마귀의 말을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쫓아가는 사람은 마귀의 제안을 거절 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의 최고의 가치들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매력적인 것들인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들은 눈만 뜨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쫓아갑니다.

그 속에 육신의 쾌락과 자기 영광과 자기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이러한 것을 더 갖고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경주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가져야 성공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흙의 생명으로 살지 않고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가십니다.

하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예수님에게 있어 흙에 영광이란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빌립보서 3장을 봅시다.

 

빌 3:5-11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세상의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족보와 가문과 학벌과 율법 아래서의 열심과 특심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보니까 그동안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이 전부 배설물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배설물처럼 비렸다고 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보니까 세상 것은 전부 똥처럼 무가치한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자랑 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담겨진 보화를 보고 나니까 세상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의 영광을 배설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배설물은 똥입니다.

똥은 가까이 두지 않고 멀리 버립니다.

가까이 두면 악취를 풍겨 온 집안을 더럽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똥을 향수로 둔갑을 시켜 놓았습니다.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 똥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에 다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마귀에게 미혹을 당한 자들은 똥을 향수처럼 뿌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똥을 많이 쌓는 경쟁을 벌리고 있습니다.

똥을 많이 쌓아놓은 놈이 신령한 목사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포복절도할 일들이 지금 이 순간도 한국교회 안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세상 가치를 외치니까 교인들은 그 장단에 맞추어서 서로 서로 더 많은 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충성 경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똥을 많이 주세요!

불철주야로 밤낮을 잊은 채 산에서 들에서 굶어가면서 달라고 외쳐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광명의 천사처럼 마귀가 주님으로 위장하고 다가와서 오냐 여기 있다! 라고 한 움큼 집어 줍니다.

 

그러면 축복 받았다고 온 동네방네 다니면서 간증을 합니다.

목사들을 그런 사람들을 초청해서 간증을 시켜서 자기 교회 교인들도 더 많은 똥들을 모아 오라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기독교 방송은 한 술 더 떠서 생방송에다 위성 중계방송까지 한다고 지랄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절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는 주지승이고 교인들은 보살들인 것입니다.

뱀이 교회를 절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절간에서는 보살들이 “나미아불타불 관세음보살, 부처님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고 있고,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할렐루야! 아멘,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뱀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흙에 붙잡아 두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타깃을 목사와 교인들로 바꾸어서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뱀 보다 더 지혜로우셔서 뱀의 달콤한 속삭임을 단호하게 거절하시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마귀를 쫓아버리셨습니다.

하지만 뱀보다 지혜가 부족한 인간들은 뱀이 천하만국에서 영웅이 되게 해 주겠다는 말에 현혹되어서 마귀에게 넙죽 절을 하고 땅 강아지 마냥 흙 파먹기에 열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은 결국 흙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뱀의 독(毒)을 마신 증거입니다.

뱀의 독에 마비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뱀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없는 귀머거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목사는 소경이고 교인은 귀머거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들이 예수를 이용해서 세상에 영웅이 되라고 소리치면 교인들은 할렐루야 아멘 하면서 화답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예수 믿는 자들이 세상에서 으뜸이 되고 영웅이 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귀머거리 소경인 교인들은 그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세상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앵벌이 하는 아이들처럼 개 발에 땀이 나듯이 새벽부터 뛰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 한다

그러니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하나님 집에 곡간을 채우겠다고 합니다.

아~! 이 갸륵함을 어이할꼬!

이 정성은 부처님도 하나님도 외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 성전이 장사꾼의 소굴이 되었고 강도의 굴혈이 되었듯이

예수님의 재림 때가 가까운 이 시대 교회들도 구약 교회와 똑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사들은 강도짓을 하고 있고 교인들은 장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설교를 하면 순진한 교인들은 집을 팔아서 바치고 전세금 빼내서 바치면서 그것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가 되어서 돌아 올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돈 놓고 돈 먹기입니다.

 

사실이 이러 할진데도 이 시대 무지한 교인들은 복채를 들고 뱀의 종들에게 찾아가서 천하만국에 영광을 달라고 기도해 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세상에서 으뜸만 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럼 복채를 두둑이 받은 뱀 새끼들은 사업을 성공하게 해 준다고 하고, 하는 것마다 만사형통하게 해 준다고 기도해 주겠다고 합니다.

삼중축복이니 오중복음이니 라고 하면서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 되어서 만사형통하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수험생들에겐 좋은 대학 보내 주겠다고 하고,

직장인들에게는 승진을 시켜 준다고 하고,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번창하게 해 준다고 하고,

혼기를 앞둔 처자들에겐 좋은 혼처를 만나 결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합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만 정성을 쏟아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성경 구절이 적힌 부적들을 줍니다.

 

“네 시작은 미역하였으니 나중은 창대 하리라”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리라”

“주여 종의 집에 영원히 복을 주옵소서”

 

무식한 교인들은 목사가 들고 온 이런 액자를 부적처럼 사업체마다 식당마다 가게마다 집집마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신주단지 모시듯이 걸어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우짜든지 돈 많이 벌어서 하나님 집을 채우게 해 달라고 합니다.

 

사도요한은 세상에 푹 빠져 있는 종말의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하였습니다.

 

계 17:2-5절.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왜 교회를 음녀라고 할까요?

음녀의 서방은 누구입니까?

세상이고 뱀입니다.

그래서 음녀를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 것에 취하여 땅에서 임금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은 경쟁적으로 세상에서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목사들은 마귀의 자리에 앉아서 교인들에게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했던 말로서 미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으뜸이 되어서 하나님 아들다움을 보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자가 거지같이 살면서 어떻게 전도를 하겠느냐,

잘 살아야 전도가 될 것이 아니냐!

거지같이 되어서 하나님 망신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가난은 죄악입니다.

작은 교회는 하나님을 망신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목사나 교인들의 논리대로라면 초근목피하면서 살았던 12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완전히 하나님을 망신시킨 자들이 되고 맙니다.

가난하게 십자가 도만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망신시키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교회가 크면 자랑스러워하여도 교회가 작은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목사들은 교인이 없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기는 항상 부요할 때입니다.

 

계 3:14-22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종말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 것으로 취하여 있습니다.

스스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신앙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습니다.

즉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닌 상태입니다.

절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닌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문 밖으로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 안에 뱀이 주인으로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뱀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아니라 뱀이 목자입니다.

 

종말은 여호와의 부재시대입니다.

이를 흑암이라고 합니다.

마치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여호와의 계시가 단절이 된 400년 암흑기처럼 지금 이 시대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말씀들이 감추어진 기근의 시대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서 주림을 당하는 시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가진 자들이 너무도 미미하여서 엘리야 시대 7000명처럼 감추어져 있는 때입니다.

겨우 하나님의 등불이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흑암의 때입니다.

 

구약 교회의 마지막 흑암의 때에 세례요한을 보내서 주의 길을 예비케 하였듯이 신약 교회의 마지막 때인 이 시대도 재림하시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종들이 일어나서 엘리야가 두 사이에 머뭇거리는 백성들을 바알에게서 여호와에게로 돌이키게 하였듯이 물질적 가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돌이키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예수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가요?

땅의 흙을 먹고 사는 인간들에게 하늘의 먹거리가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짐승의 밥통에 나신 것은 흙을 먹고 살아가는 짐승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먹고 하늘나라 사람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눅 2:5-7절.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자기백성들의 양식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짐승의 밥통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백성들의 먹거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를 먹고 하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요 6:47-58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52.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늘의 양식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자 사람들은 정신 나간 말을 한다고 하면서 다 떠나가 버립니다.

아니 사람이 식인종도 아닌데,,,

어떻게 사람을 먹는단 말인가? 라고 수군거리고 다 떠나갑니다.

 

요 6:52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 6:60-61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가라사대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요 6:66절.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맞는 말입니다.

어찌 예수가 양식이란 말인가요?

사람이 떡을 먹고 살지 어떻게 예수를 뜯어 먹고 산단 말인가요?

 

그럼 누가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양식이라는 것을 안단 말인가요?

이는 하나님께서 알게 해 준 사람만이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예수님은 수군거리면서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갈래!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떡)이신데 우리가 어찌 예수님을 떠날 수가 있겠느냐고 하면서 우린 안 떠나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요 6:65-70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양식임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떠나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제자들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이는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려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알려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는 것은 모두 아버지께서 너희를 나에게 이끌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흙에서 나는 양식을 먹고 사는 자와,

하늘에 양식을 먹고 사는 자가 있습니다.

 

흙에서 난 자는 흙에서 난 양식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고,

하늘로서 난 자는 하늘에 양식을 먹고 살다가 하늘로 돌아가게 됩니다.

 

뱀이 주는 양식을 먹는 자는 흙으로 돌아가고,

예수님이 주신 양식을 먹은 자는 하늘로 돌아갑니다.

 

흙에 속한 자는 뱀이 주는 양식인 떡의 가치로 살아가고,

하늘에 속한 자는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살아갑니다.

 

성도의 육신은 비록 땅에서 난 음식을 먹지만,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임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삽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니 하늘에 가치로 살라고 합니다.

 

골 3:1-5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땅에 지체를 죽이라는 것은 떡의 가치로 살지 말고 말씀의 가치로 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가치로 살지 말고 영생의 가치로 살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가치로 살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를 일컬어 이 세상에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합니다.

나그네는 어디를 가든지 곧 떠나야 할 자세로 살아갑니다.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살아갑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 일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 것은 다 지나가는 형적이기 때문입니다.

다 흙에 속한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이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요일 2:15-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저주 받은 흙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주의 기운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흙의 기운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하늘의 기운으로 사는 자입니다.

뱀이 주겠다고 하는 떡은 흙의 기운을 주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의 기운을 줍니다.

흙의 기운은 땅으로 끌어당기고,

하늘의 기운을 하늘로 끌어당깁니다.

 

성경은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간 인생 유전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아벨이 그러하였고,

에녹이 그러하였고,

노아가 그러하였고,

아브라함이 그러하였습니다.

 

히 11:13-16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장은 이 세상에서 떡의 가치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말씀의 가치로 살아간 자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인생 유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하늘에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첫 주자를 예수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선취적으로 사셨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증인들입니다.

이들은 모두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산 사람들입니다.

이들 속에 우리도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뒤에 우리의 이름을 적어 놓으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 뒤에 우리의 이름이 적혀져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자들은 세상을 살아가기가 힘이 든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의 기운으로 살지 않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가 있습니다.

 

소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고기를 먹지 않고,

사자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풀을 먹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와 흙에 속한 자는 먹거리가 다릅니다.

흙에 속한 자가 예수를 먹거리로 삼지 않듯이,

하늘에 속한 자도 뱀의 말을 먹거리로 삼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아담을 선악과로 미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뱀의 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는 마귀가 떡으로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마귀의 말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뱀의 말이 아무리 달콤하게 들려도 하늘에 속한 자는 듣지 않습니다.

하늘에 속한 성도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만 듣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누구든지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예수그리스도가 양식이 되어서 먹고 마시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계 3:20-22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긴 자들입니다.

 

과거에도 이겼고.

지금도 이기고 있으며,

장차도 이길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보면 세상이 커 보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보면 세상은 작아 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허리에 진리로 띠를 띠고,

손에 언약의 말씀에 지팡이를 들고,

달음질 하는 신발 끈 단단이 조여 매고,

유월절 어린 양을 숯불에 구워 먹고 출애굽을 하십시다.

 

잠시 후면 주님이 오십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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