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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26강.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전쟁 (창 3:13-15)

by coroa 2021. 2. 9.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26강.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전쟁 (창 3:13-15).-

-.정낙원 목사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뱀과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둘 다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아냈습니다.

에덴동산 바깥이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원수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전쟁터인 것입니다.

왜 세상이 전쟁터가 되었느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이 서로 싸우는 것은 서로의 성질이 극과 극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생명에 속한 자이고,

뱀의 후손은 사망에 속한 자입니다.

 

여자의 후손을 빛에 속한 자이고,

뱀의 후손을 어둠에 속한 자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하늘에 속한 자이고,

뱀의 후손은 땅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뱀의 후손은 사단에게 속하였고,

여자의 후손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였습니다.

 

빛과 어둠이 하나 될 수가 없고,

하늘과 땅이 하나 될 수가 없고,

산 자와 죽은 자가 하나 될 수가 없고,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두 세력 간의 전쟁터인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가 온 세상에 다양한 것으로 퍼져 있습니다.

종교에서부터 정치와 문화 예술에 편만하게 퍼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분야에 좌우 대립 구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국가 안에서도 진보와 보수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들이 서로 싸우는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전쟁에서 기인 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을 이런 구조로 만들어 놓았을까요?

이는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자기 백성은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을 말하고,

자기 백성 아닌 자는 벰의 후손으로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를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말하고,

뱀의 후손은 마귀에게 속한 자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을 서로가 원수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선악의 구조는 인간들 속에서도 두 사상과 이념으로도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과 이방인으로 나타나고,

신약에서는 신자와 불신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비기독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념적으로는 진보와 보수로 나타나고,

사상적으로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항상 싸워왔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둘이 같이 사이좋게 살면 되지 않느냐?

왜 꼭 그렇게 싸워야 하느냐? 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이 다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서로를 배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충돌을 하는 것입니다.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서도 서로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논쟁하고 다투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는 사고 자체가 좌(左)와 우(右)처럼 접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것을 가지고도 서로가 서로에게 너는 왜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이렇게도 생각 할 수가 있지 않느냐 라고 하면,

그럼 상대방은 너는 왜 그렇게만 생각을 하느냐

이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지 않느냐 라고 반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역사는 전쟁으로 시작하여서 전쟁으로 끝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조를 한 집안 속에 배치해 두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속에서는 형제 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집안 속에도 약속으로 난 자와 육으로 난 자가 있습니다.

 

아담의 집안에서는 가인과 아벨로 나타났고,

아브라함 집안에서는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나타났고,

이삭의 집안에서는 에서와 야곱으로 나타났으며,

야곱의 집안에서는 요셉과 그 형제들로 나타났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나타나고,

교회적으로는 율법교회와 은혜교회로 나타납니다.

언약적으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족장들의 집안은 신약적으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집안에서 일어난 형제간의 싸움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자기 힘으로 살고,

영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핍박을 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가 강하고 인간의 힘으로 사는 자가 약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실제적으로 그 반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들이 인간의 힘으로 사는 자들에게 죽임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이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속에서 버려지고 실패한 모습으로 두신 것입니다.

이들을 구약에서는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로 상징화 하여서 보여주었습니다.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들처럼 힘없고 의지할 데가 없는 자들의 모습처럼 있다는 뜻입니다.

 

이들을 “하삐루” 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남은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힘이 없으니까 자신들을 핍박하는 원수들과 싸우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갚아 달라고 탄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앙이라고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후손들에게 믿음으로 간섭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들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선진들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언약의 후손들은 그 믿음에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말씀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간의 전쟁이야기입니다.

 

전쟁은 성질이 다른 두 세력 간의 다툼입니다.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척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와 다른 세력을 두고서는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죽여서 없애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은 예수를 그대로 두고서는 자신들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의 전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간의 전쟁이 마귀와 성도 간의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계 12:1-17절.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3.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4.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 이백 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 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찐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13.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 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4.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에 두 가지 큰 이적을 보았습니다.

 

첫째 이적은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는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둘째 이적은 한 큰 붉은 용이 있는데 그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인 것입니다.

그 일곱 머리에는 일곱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놈이 그 꼬리로 하늘의 별을 삼분지 일을 땅에다가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용이 여자가 아이를 낳자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합니다.

이는 용이 여자가 낳은 아이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용이 죽은 그 아이를 하나님 보좌 앞으로 올라오게 하십니다.

이는 그 아이가 죽었다가 부활을 하여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하늘에 올라가자 하늘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미가엘이 용과 더불어서 싸웁니다.

용의 이름을 옛 뱀 마귀라고 합니다.

 

이 전쟁에서 미가엘이 승리를 합니다.

그러자 용은 하늘에 있을 자리가 없어서 땅으로 쫓겨납니다.

용은 하늘에서 쫓겨난 것을 아이를 낳은 여자에게 분풀이를 하면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의 전쟁이 이 땅으로 전선이 이동이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신자와 불신자 간의 전쟁은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의 대리전 성격을 가진 전쟁인 것입니다.

마귀는 불신자인 적그리스도 세력을 가지고 싸우고 예수그리스도는 성도들을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말이 싸움이지 여자의 후손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은 인류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서 예표적으로 이미 있어 왔던 것들입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선악과로 타락케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에덴동산 바깥인 이 역사 속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전쟁이 확대 되어서 신자와 불신자의 전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집안에서는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나타나고,

이삭의 집안에서는 에서와 야곱으로 나타나고,

야곱의 집안에서는 레아의 후손과 라헬의 후손으로 나타나고,

국가가 형성이 되면서는 사울 왕과 다윗 왕으로 나타나고,

국가가 형성이 되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라는 민족 전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와 속하지 아니한 자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먼저 나온 자가 가짜이고 강함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나온 사람은 가짜이고, 나중에 나온 사람이 진짜입니다.

먼저 나온 가짜가 강하고, 나중에 나온 진짜가 약합니다.

그리고 먼저 나온 자가 나중에 나온 자를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가 가짜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바로의 꿈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파리한 소가 살찐 소를 잡아먹는 것으로 보여 주었고,

충실한 곡식이 세약한 곡식을 먹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정상적이라고 한다면 살찐 소가 파리한 소를 이기고,

충실한 곡식이 세약한 곡식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보여주신 꿈은 정반대입니다.

 

이를 역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 있는 세상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망이 생명을 삼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항상 가짜가 진짜를 죽이는 것으로 역사가 전개 되어온 것입니다.

이 전쟁이 종말에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 마귀에게 속한 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고서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가짜가 승리한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진짜가 가짜를 이깁니다.

사망이 생명을 삼킨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생명이 사망을 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약함으로 강함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겉으로는 뱀이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뱀의 머리를 깨트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트리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발꿈치를 물게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문다는 것은 잠시 핍박을 주고 상처는 줄 수는 있어도 이기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트린다는 것은 여자의 후손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 시키고 이긴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성도들의 신앙으로도 나타납니다.

 

우리에게도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는 형제가 있습니다.

육으로 난 사람과 하늘로서 난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으로 난 옛 사람이 먼저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나중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두 법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우리 안에 선(善)과 악(惡)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선은 하나님의 법을 쫓아가고자 하고, 악은 죄의 법을 쫓아가고자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롬 7:18-25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우리 안에는 옛 사람이 있고, 새 사람이 있습니다.

옛 사람은 마귀에게 속하였고, 새 사람은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

옛 사람은 죄의 법을 쫓아가고자 하고, 새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쫓아가고자 합니다.

이 둘은 서로 몸을 차지하고자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우리 몸은 종노릇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죄의 법을 쫓아가고자 하는 옛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쫓아가고자 하는 새 사람을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쫓아가고 싶은데 정작 몸뚱이는 죄의 법을 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정답은 알겠는데 정답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중풍병자처럼 머리로는 뻔히 알겠는데 몸뚱이가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저 줄꼬’ 라고 구원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몸을 사망의 몸이라고 합니다.

사망을 잡은 자가 자기 몸을 주장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 몸을 주장하는 이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나를 좀 건져 줄 자가 없느냐고 하나님께 읍소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알려 주십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사망의 몸에서 해방 시켜주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롬 8:1-4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이 연약하여서 할 수 없는 것을 하셨는데,,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그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서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대신 담당해 주는 것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우리가 담당해야할 것을 그 아들에게 담당을 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고 합니다.

해방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되니까 다른 사람이 와서 대신 적을 물리쳐서 꺼내 주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 주는 것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구원해 주신 분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걸림돌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즉 자기 꼬라지를 보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롬 8:5-7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바울은 자기 꼬라지를 바라보고 사는 것을 일컬어 죄와 사망의 법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육신을 쫓는 것이라고 합니다.

육신을 쫓게 되면 자기 행위로 인하여 춤을 추게 됩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희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법으로 살아가게 되면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때는 행복한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우울하고 공황장애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꼬라지를 보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대신 담당케 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꼬라지로 희비하게 되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통해서 하신 일이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헛것으로 돌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자기 꼬라지로 희비(喜悲) 하는 육신의 법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 꼬라지로 희비 하느냐?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 행위에 따라서 희비하는 인과응보의 신앙으로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게 되는 것입니다.

 

롬 8:8-9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성도는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비록 몸으로는 죄를 짓고 살지만 성령이 우리의 죄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속량해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죄로 인하여 죽은 그 몸도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다시 살려 내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롬 8:10-14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면 우리 몸의 행실은 죽은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우리 몸에게 요구하는 것을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영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으로 사는 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 몸의 행실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저지른 것을 우리가 책임지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시선을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떼려는 것입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되겠느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지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을 내가 지켰다고 하느냐?

그건 말이 안 되지?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받으면 마귀의 말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행한 것으로 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믿음으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날 보지 말고 주 예수를 보라고 합니다.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에게 대신 하라고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이를 믿고 살아가는 것을 영으로 산다고 합니다.

 

마귀는 내가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성령은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말씀을 지켜주었으니 그걸 믿으라고 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마귀의 논리가 바로 육신대로 사는 것입니다.

 

마귀의 논리를 이기고 사는 것을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논리인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고 성령의 논리인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이루어 주셨다고 하는 영적 원리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마귀는 내 행위로 살라고 하고,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성도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를 양자의 영이라고 합니다.

왜 양자의 영이라고 하는가 하면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영이기 때문입니다.

 

롬 8:15-17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나로 하여금 양자되게 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서 존재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세상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놓여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세상에서 성령의 법으로 살면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육신의 법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지른 죄는 내가 갚아야 하는 법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 죄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인과응보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자들이 우리 죄는 우리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책임을 져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의 법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법으로 살면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의 질서가 깨어집니다.

이는 믿음의 법이 세상의 인과응보의 법도를 깨트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둘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가 살아가는 존재 양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믿음의 법으로 살고 세상 사람들은 행위의 법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송사하고 정죄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변호사가 되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온전치 못하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롬 8:33-39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마귀는 욥을 시험하듯이 환경으로 힘들게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시험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환경이나 고난 가운데서도 성도의 구원은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날마다 도살당하는 양과 같은 운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성도의 일생은 고달프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선택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예수의 것으로 선택을 입은 것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됩니다.

이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 신은 마귀입니다.

마귀와 예수님은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마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선택을 입었다는 것은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이 가는 곳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떻게 가느냐?

마귀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 너머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죽음인데 그 뒤편에는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으로 가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서 찾는 이가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죽임 당하는 일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세상과 다른 가치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성질이 다른 두 과실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의 구조를 보면 셋으로 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 2:8-10절.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십니다.

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에덴에서 강이 발원하여서 동산을 적시고 사방으로 흘러감을 보게 됩니다.

 

그림으로 그려보면 맨 위층이 에덴이고 중간층이 동산이고 맨 아래층이 사방인 것입니다.

아담이 살아가는 곳이 중간층인 동산입니다.

하나님은 동산인 중간층에 두 과실을 두었습니다.

 

두 과실 속에는 각각의 생명을 담고 있습니다.

 

선악과는 죽음을 담고 있고,

생명과는 영생을 담고 있습니다.

 

먹으면 에덴으로 올라가는 과실이 있고,

먹으면 세상으로 내려가는 과실이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동산 밖 아래층으로 내려가게 되고,

생명과를 먹으면 동산 위층인 에덴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구원은 동산에서 생명과를 먹고 위층인 에덴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에덴으로 올라오라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여자(뱀)의 말을 듣고는 선악과를 먹고 동산에서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고 만 것입니다.

이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는 두 가지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교회로 세팅을 해 놓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과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에덴동산의 두 과실을 두 가지 의로 세팅을 해 놓으신 것입니다.

 

죽이는 의가 있고,

살리는 의가 있습니다.

 

붙잡으면 죽는 의가 있고,

붙잡으면 사는 의가 있습니다.

 

붙잡으면 죽는 의는 선악과이고,

붙잡으면 사는 의는 생명과입니다.

 

붙잡으면 죽는 선악의 의를 율법이라고 하고,

붙잡으면 사는 생명의 의를 은혜라고 합니다.

 

선악의 의는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고,

생명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를 행위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행위로 나아오면 죽고,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나오면 삽니다.

 

인간의 의를 붙잡으면 지옥으로 내려가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하늘로 올라갑니다.

 

인간의 행위로 나아오는 것을 율법신앙이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나오는 것을 은혜와 믿음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행위냐!

믿음이냐! 입니다.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선악에 속한 자들과, 생명에 속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 사는 사람과,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악에 속한 자들은 인간의 의로 살고, 생명에 속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삽니다.

 

선악과의 의는 율법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생명과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발생을 합니다.

 

선악과의 의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인간의 행함으로 얻어내는 것이고,

생명과의 의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의란? 옳음입니다.

 

인간들의 옳음이 있고,

하나님의 옳음이 있습니다.

인간들의 옳음은 인간들이 정한 기준에 합당 할 때이고,

하나님의 옳음은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합당 할 때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옳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의라고 여기는지에 늘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성도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님이 무얼 기뻐하는지,,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라는 놈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것으로 나아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이게 구약의 율법신앙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라는 말은 자기 가능성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방법만 알려 주시면 내가 그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면’ 이라는 명제에서 벗어나 ‘나를 쫓으라’고 하십니다.

영생은 인간 쪽에서 발생된 의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에서 “주 예수를 쫓는(믿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내 쪽에서 발생 되는 행위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주는 것으로 바뀐 것입니다.

율법에서 은혜로 바뀐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을 새 포도주라고 합니다.

새 포도주인 예수그리스도를 쫓는 믿음을 헌 부대인 율법 신앙에 담지 말라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은 새 언약을 담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찢어져서 둘 다 버리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새 술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믿음이라는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율법 신앙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율법 신앙 속에 자기 의(義)와 자기 자랑과 자기 영광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영화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의는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 때문에 인간들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율법의 의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가리게 합니다.

 

율법의 의는 인간의 행함으로 나오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믿음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로 나오는 것을 불의라고 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오는 것을 의라고 합니다.

 

왜 인간의 의로 나오는 것을 불의(不義)라고 하는가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부정한 것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롬 6: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죄의 몸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의 몸으로 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의 행위로 인하여 율법으로부터 참소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은 죄인의 몸으로 행한 것을 참소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죄의 몸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죄의 몸이 죽었기 때문에 율법은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의 몸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몸으로 행한 것을 참소하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롬 6: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망은 죄의 몸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몸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성도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입니다.

이 말은 율법이 죄를 가지고 참소하는 것으로부터 자유 하였다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성도의 몸으로 행한 것을 이러쿵저러쿵 참소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라’는 말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러한 것으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죄인으로 여기지 않고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가 우리 몸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성도의 몸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가 더 이상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의의 병기’라고 합니다.

 

롬 6:12-14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의의 병기라고 하는 말은 우리 몸은 의를 보여주는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을 보여주는 그릇인 것입니다.

이를 ‘긍휼의 그릇’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안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담아 놓았습니다.

성도의 몸을 푹 찌르면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의의 병기’라고 합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났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함은 율법의 참소로부터 자유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성도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게 하고 마귀는 불의의 병기로 드리게 합니다.

 

의(義)의 병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보여주고,

불의(不義) 병기는 인간의 공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의 병기는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하고,

불의의 병기는 인간의 행위를 자랑합니다.

 

성령은 은혜로 살게 하는데 마귀는 법으로 살게 미혹을 합니다.

 

마귀는 신앙을 우리의 행함에 두고,

성령은 우리의 신앙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두게 하십니다.

 

교회 안에는 율법의 종도 있고 은혜의 종도 있습니다.

율법의 종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은혜의 종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둘은 서로 대척점에 서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이라고 고발을 합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과 유대인의 충돌로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로 예수그리스도를 이단이라고 정죄하고서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죽인 예수그리스도를 살리셨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가 맞고 유대인이 틀렸다는 것을 고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임하고 난 후에 사도들이 너희가 이단이라고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이는 이단이 아니고 정통이라고 살려 주셨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주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유대인들 중에서 ‘어찌 할꼬’ 회개하는 자가 일어나는가 하면 분개하면서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가는’ 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두 부류로 쫙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자와 배척하는 자로 갈라진 것입니다.

이 둘 간에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전쟁’인 것입니다.

 

의의 전쟁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지만 우리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입니다.

 

우리 옛 사람은 율법의 의로 살게 하고,

우리 새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탄식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8장에서 그 해답을 알려주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은 존재 양식이 다릅니다.

 

옛 사람은 아담 안에서 흙에서 났고,

새 사람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늘로부터 났습니다.

 

옛 사람은 흙에 속하였으므로 떡으로 살고,

새 사람은 하늘에 속하였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옛 사람은 땅의 것인 육신의 소욕을 쫓아가고,

새 사람은 하늘의 것인 성령의 소욕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전쟁을 하게 됩니다.

 

옛 사람은 육적 가치로 살아가고,

새 사람은 영적 가치로 살아갑니다.

 

이것은 삶의 가치관과 지향성에 대한 싸움입니다.

쉬운 말로 떡의 가치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살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을 주리신 후에 마귀와 이 싸움을 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떡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떡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가는 것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다시 시험하기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서 천사들로 하여금 너를 보호하여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내 능력을 증명해 보여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자랑키 위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귀가 다시 천하만국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천하만국의 부귀영화와 권세를 얻어서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고 오직 아버지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기 위하여 왔다고 합니다.

 

마귀는 세상에서 영웅호걸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성도들로 하여금 흙에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를 땅에 것을 쫓아가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인간들이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인간들은 배가 부르면 반드시 하나님을 떠난다는 사실도 잘 압니다.

그래서 마귀는 떡으로 하나님을 떠나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신 32:15-34절.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 32. 그들의 포도나무는 소돔의 포도나무요 고모라의 밭의 소산이라 그들의 포도는 쓸개포도니 그 송이는 쓰며 33.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악독이라 34. 이것이 내게 쌓이고 내 곳간에 봉하여 있지 아니한가”

 

옛 사람은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새 사람은 하늘이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육신은 세상 것을 가질 때 행복해 하고,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행복합니다.

 

우린 모두가 땅에 것으로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것으로 영혼의 즐거움으로 살아가는 자들로 새롭게 거듭났습니다.

 

우리가 비록 하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죄 아래서 난 몸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이 약점을 마귀는 잘 압니다.

그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 것으로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미혹당하면 어리석은 부자처럼 재물을 모으는데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재물로 쉼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물로는 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것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아담이 살아갈 땅을 저주 하였습니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저주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것은 아무리 많이 소유하여도 쉼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를 어리석은 부자로 비유해 주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출이 많아서 창고를 늘렸지만 그 안에서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해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속에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 거하면 사라집니다.

그것이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죄와 사망이 주는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께 부요치 못하고 재물을 쌓은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늘의 것에만 있습니다.

마음의 안식은 하늘의 것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언약 안에 있으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로부터 자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청년이 자기 형에게 이야기 하여서 자신에게 돌아올 유업을 좀 나누어주게 해 달라고 청을 할 때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하신 겁니다.

 

왜 어리석은 부자라고 합니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안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관계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라고 합니다.

 

거짓 종들은 떡을 소유함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라고 미혹하여서 성도의 눈을 떡에 머물게 하여서 관심사를 땅의 것에 두게 합니다.

떡에 가치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떡의 가치로 사는 것을 땅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빌 3:18-19절.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땅의 일을 한마디로 떡을 쫓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의 신(神)은 배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구약은 땅을 차지하는 전쟁이지만,

신약은 몸을 차지하는 전쟁입니다.

 

우리 몸은 도구입니다.

영적 싸움을 하는 병기입니다.

 

육신의 소욕이 우리 몸을 장악하면 마귀의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고,

성령의 소욕이 우리 몸을 장악하면 예수그리스도의 도구로 사용이 되어집니다.

 

육신의 소욕이 우리 몸을 주장하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구하게 되고,

성령의 소욕이 우리 몸을 주장하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됩니다.

 

마귀가 이기면 우리 몸은 불의의 병기로 드려집니다.

그럼 우리 몸은 이 세상의 떡을 쫓아가게 됩니다.

 

성령이 이기면 우리 몸을 의의 병기로 드려집니다.

그럼 우리 몸은 하늘의 신령한 말씀을 쫓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에 우리 몸도 가 있게 마련입니다.

마음에 떡이 그려져 있으면 몸은 세상과 짝하고 있을 것이고,

마음에 언약이 그려져 있으면 몸은 교회와 가까이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땅의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골 3:1-5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지 않았느냐,

그럼 하늘에 것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신데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나와서 땅에 것을 달라고 할 수가 있느냐,

그건 아니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땅의 지체를 쫓아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떡을 위하여 예수를 찾는 것은 우상 숭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에게 나아왔다고 한다면 그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세상 것을 얻는 수단으로 이용한단 말이냐,

그건 예수를 두 번 죽이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도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돌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세상 것을 쫓아가면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죽는 날까지 두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떡이냐?

말씀이냐?

 

성령의 소욕을 쫓을 것인가?

육신의 소욕을 쫓을 것인가?

 

인간의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율법의 의를 붙잡을 것인가?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을 것인가?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은 죄가 주관하지 못하도록 싸우십시오.

우리 몸을 육신의 소욕이 지배하지 않도록 싸우십시오.

 

율법의 의와 육신의 소욕이 이기게 되면 우리 몸은 지옥이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와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천국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누가 이기느냐에 따라서 지옥으로 살기도 하고 천국으로 살기도 합니다.

 

천국으로 살 것인가?

지옥으로 살 것인가?

 

천국은 전쟁에서 이긴 자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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