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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24강.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6-13)

by coroa 2021. 1. 12.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4강.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6-13).-

-.정낙원 목사

 

 

 

구원은 하나님이 찾아가심으로 주어집니다.

 

아담을 찾아가고,

아브라함을 찾아가고,

베드로를 찾아가고,

바울을 찾아가고,

우리를 찾아오심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실상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는 것은 그림 속에는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는 실상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림자는 실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나타난 아담과 하나님 이야기는 신약에서 성도와 예수그리스도 이야기로 나타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심 속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복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는 이야기를 성도의 구원하는 이야기로 살펴봅니다.

 

아담 속에는 두 가지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은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담은 예수그리스도를 표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 죄가 온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담은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면 아담은 성도를 표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는 것은 아담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죽은 자가 되니까 하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기 전까지는 아담은 두려움에 떨면서 나무사이에 숨어서 살았습니다.

 

아담의 인생을 세 구분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1기 인생은 선악과를 먹기 전이고,

2기 인생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이고,

3기 인생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의인도 아니고 죄인도 아닌 상태입니다.

그냥 ‘네페쉬 하야’ 라는 ‘산 존재’였습니다.

‘네페쉬 하야’는 각종 생물들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은 논할 때 항상 창세전 언약에서 출발을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창조 자체가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10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창세전이라는 말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합니다.

이를 요한복음 1장 1절에서는 태초라고 합니다.

그 태초는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만물 밖에 있습니다.

이를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라라고 합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은 만물이 창조 되기 전에 세운 언약입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일을 한다” 라고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다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내가 너를 복의 조상으로 만들어 줄게 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복의 조상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조상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너 복의 조상 해 그래서 복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얼떨결에 복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창조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창조주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모두가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입에서 뱉어진 말씀은 반드시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 뭔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죄에서 속량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무얼 하는가?

그의 나라에서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아들의 나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만유의 주가 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라 시인하면서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언약입니다.

 

만물이 이 창세전 언약 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창조라는 말의 뜻이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인이 먼저이고 창조가 나중입니다.

원인이 언약이고 창조는 나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예수그리스도가 만유의 주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만물은 이를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3-18절.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잘 보시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그의 사랑의 아들이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흑암의 나라에서 아들이 나라로 옮겨주신 분이 누구인가 하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분으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포착이 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에게 포착되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피조물에게 포착이 되는 모습의 형상으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피조물이 아니고 창조주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창조주 하나님이 그 아들을 피조물의 모습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보이는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세상 속에서 창세전에 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그가 창조하였고 그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선다는 것은 그가 만물을 존재케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를 머리라고 하고, 근본이라고 하고, 으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머리니 근본이니 으뜸이라는 말은 만물을 존재케 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만물 속에는 예수그리스도 충만합니다.

만물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설명하려고 만물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은혜를 받으면 그렇게 보여집니다.

모든 만물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직접 본다는 말이 아니고 그의 일하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만물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담도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가 된 자입니다.

아담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창조가 된 아담은 죄인도 아니고 의인도 아닌 그냥 산 존재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아담은 빈 그릇과 같습니다.

그 안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아담의 존재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갓 창조가 된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맙니다.

반드시 먹으라고 한 생명과는 먹지 않고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한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아담은 자기 안에 선악과를 담고 말았습니다.

 

선악과는 죽음의 과실입니다.

결국 아담은 죽은 자가 되고 맙니다.

이건 아담이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아담은 최초의 죄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하나의 수순이었던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명을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불순종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먼저 명령을 하셔야 합니다.

그 명령이 아담에게 선악과는 먹지 말고 생명과는 먹으라고 하는 것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맙니다.

아담 스스로가 죄 아래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아래 떨어진 아담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도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구원이어야 합니다.

 

창세전 언약에서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아담에게 흠 없는 짐승을 잡아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히는 것으로 죄의 수치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로 죽은 아담이 흠 없는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 전반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흠 없는 짐승의 죽음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흠 없는 짐승의 죽음으로 죄에서 벗어난 아담의 모습은 그림자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는 성도의 구원이 실상인 것입니다.

 

그럼 범죄한 아담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지 살펴봅시다.

 

날이 서늘할 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십니다.

그러자 아담은 발가벗은 것이 두려워서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누가 너의 벗었음을 고하였느냐고 합니다.

 

너~ 설마,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느냐고 합니다.

아담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주길래 먹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대답하기를 ‘뱀이 나를 꾀므로 먹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아담이 발가벗음이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은 사건 속에 담겨진 복음의 비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담이 왜 숨었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한 죄가 그 마음속에서부터 두려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두려움을 몰고 왔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해 입었습니다.

 

치마를 해 입으면 두려움이 사라질 줄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두려운 것입니다.

여전히 두려움은 그대로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산 나무사이에 숨어버린 것입니다.

 

아담은 왜 벗었음을 두려워했을까요?

선악과가 발가벗고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두려운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만든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입니다.

불순종을 죄입니다.

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죄가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리게 하고 만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숨어 버린 것입니다.

아담이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은 본능적으로 행동한 것입니다.

 

죄는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두려워지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서 숨어버리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았다고 합니다.

이를 막힌 담이라고 합니다.

죄가 담을 쌓아놓은 것입니다.

이 담이 허물어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 담은 죄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지만 허물어집니다.

그런데 죄를 인간 쪽에서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가해자이고 하나님은 피해자입니다.

죄는 피해자이신 하나님이 가해자인 아담을 용서해 주어야지만 해결이 됩니다.

 

가해자인 아담은 하나님의 선처만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막힌 담을 헐어 버린 것입니다.

이를 화목 제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 문제가 해결이 되니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안에 죄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은 아담들은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안에서 죄 문제가 해결이 된 아담들만 만나 주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아담들은 두려움으로 살지 않고 평안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믿어지지도 않는 것을 배우들처럼 믿는 척 연기(演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연기(演技)로는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평안은 그 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이 믿어지는 믿음이 있어야지만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속인다고 해서 마음속에서부터 일어나는 두려움은 퍼 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셔야 합니다.

믿음을 달라고 하셔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여야 합니다.

 

소경거지 바디메오처럼 사람들의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여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나를 도와주소서’ 라고 소리쳐야 합니다.

신앙에는 사람의 체면이 필요가 없습니다.

절박해야 합니다.

 

‘주여 살려주세요’,

‘주여 믿고자 합니다’,

‘믿음을 더하여 주옵소서’ 라고 외치셔야 합니다.

우셔야 합니다.

 

음욕과 간음 그리고 이혼이라는 설교를 하면서 우리는 모두가 틈만 나면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가는 고멜이라고 하였더니 어떤 분이 이런 댓글을 달았습니다.

 

“내가 고멜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고멜에 해당되는 사람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동안 부끄럽기가 한량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답글을 달았습니다.

 

모두가 남을 정죄하기에 바쁜데,

말씀 앞에서 내가 참 나쁜 인간이라는 것이 보여진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양파처럼 까도 까도 죄는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양파처럼 숨기고 또 숨기고 살아가고 있지요.

우리는 누가 죄의 모습을 드러내면 본능적으로 손가락질 하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하면서 스스로 의인인체 하고 있습니다.

‘넌 그렇지만 난 아니야’ 라고 하는 위선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고멜은 애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고멜보다 몇 갑절 더 더러운 창기들입니다.

이런 창기가 구원을 받았다! 이런 기적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말 같지도 않은 그 말을 우리는 오늘도 진리로 듣고 또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여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하면서 눈물로 주님을 바라봅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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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복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가 누구인지를 고발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3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다고 합니다.

살았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가 하면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발가벗겨서 죄를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발가벗긴다는 것은 우리가 입고 있는 것들을 다 걷어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벗겨낸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입고서는 하나님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입고 온 자는 만나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발가벗고 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그 모습 그대로 오라고 합니다.

본래 창조한 모습이 바로 죄가 없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는 하나님이 만드신 원래의 모습입니다.

 

구원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본래 자리가 어떤 곳인가요?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계입니다.

이는 죄와 상관없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왔을 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미의 피로 범벅이 된 상태로 태어난 그 모습이 바로 발가벗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 창조가 된 상태가 바로 갓난아이가 발가벗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발가벗음이 바로 어미의 피가 발라진 상태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이 오롯이 담겨져 있는 상태입니다.

어머니의 희생이 오롯이 담겨져 있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발가벗고 옆구리에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물과 피를 십자가 아래 있는 마리아들에게 쏟으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마리아들은 예수님의 피를 옴팡 뒤집어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창조가 된 아담의 발가벗은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피를 쏟아 부은 것입니다.

이 모습은 어미가 아이를 낳는 모습입니다.

아이는 어미의 피를 옴팡 뒤집어쓰고 태어납니다.

이 모습이 바로 발가벗은 모습입니다.

 

아이의 몸에 어미의 피가 몸에 발라져 있는 상태가 수치가 없는 발가벗음이 되고,

아이의 몸에 어미의 피가 씻겨져서 사라진 상태가 바로 수치로 인하여 무화과나무의 치마로 만든 옷을 입는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뭔가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는 것이 바로 아담이 원래의 창조 상태인 발가벗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본래의 자리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옷을 발가벗기는 곳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세상의 옷을 발가벗김 당하는 것이 창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발가벗기는 일을 하십니다.

 

그럼 지금부터 타락과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하여 상고해 봅시다.

 

발가벗고 살던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발가벗음을 수치로 여겨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들어 입은 치마를 어떻게 벗겨내어서 원래 창조의 모습인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은 상태로 구원을 해 내는지를 역순으로 추적하여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갓 창조가 된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발가벗고 살았습니다.

발가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의 미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은 하와가 들고 온 선악과를 아담도 먹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이상 징후가 일어납니다.

 

갑자기 발가벗은 것이 수치로 보이기 시작 하였습니다.

발가벗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책망 할 것만 같고 급기야 하나님이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게 됩니다.

하지만 두려움은 사라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사이에 숨은 것입니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자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두려워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누가 너더러 발가벗음을 수치라고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이에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그렇게 되었다고 이실직고를 하고 맙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이 두렵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발가벗은 몸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두려운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아담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발가벗음을 수치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발가벗음이 수치로 보이는 것입니다.

 

수치로 보이니까 가려야 합니다.

그런데 수치를 가려도 두려움을 사라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괜찮다 하여도 아담은 괜찮지가 않은 것입니다.

본인이 괜찮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본인이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 방법으로 두려움을 해소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수치를 가리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생각으로 수치를 가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로 만들어 입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로 만들어 입고 있는 아담의 모습이 불편한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그려 놓은 그림에 아담이 자기 마음대로 덧칠을 해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발가벗고 있을 때가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든 그대로의 모습이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 마음대로 해 놓은 것입니다.

 

서로의 생각에 충돌이 일어나고 만 것입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서는 함께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함께 살면 사사건건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하나님과 불화하게 만든 것입니다.

 

죄가 뭐냐?

하나님과 불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하고서는 하나님과 같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편해 하는 아담을 에덴동산 바깥으로 내어 보낸 것입니다.

 

죄는 본능에 속한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을 두렵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숨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하였을 때 안으로부터 몰려오는 두려움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도 같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지 않고 법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 안에 있으면 두려움이 없는데 법 아래 있으면 두려움이 들게 됩니다.

법이 아담으로 하여금 죄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도록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한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십니다.

그런데 선악과가 법의 하나님으로 보이도록 아담의 눈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아담은 부모와 자식과 같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사랑의 관계로 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가 법의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하지만 법은 모든 허물을 드러내게 합니다.

아담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괜찮다고 하여도 아담이 불편한 것입니다.

 

법이 아담으로 하여금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법 아래 놓여진 아담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고도 그 두려움은 사라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무 뒤에 숨어버린 것입니다.

 

선악과의 눈으로 본 하나님은 심판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법이 아담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인식케 한 것입니다.

자기 눈에 하나님이 심판하는 하나님으로 보이면 숨게 되어 있습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잘못을 하고 난 후 부모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안에 법이 두려움을 일으켜서 부모를 두려운 분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걸 죄라고 합니다.

 

법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쉼은 법에서 해방이 될 때 누릴 수가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사랑 안에서 살았습니다.

발가벗고서도 쉼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법 아래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법이 아담 안에서 발가벗음이 수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법이 발가벗음이 수치라는 생각이 들게 하니까 도무지 발가벗고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수치를 가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방법으로 의를 만들어 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떳떳해지려고 합니다.

자기들 방식으로 떳떳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율법 신앙이라고 합니다.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율법 아래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심판하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 하나님을 보게 되면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아담은 율법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니까 치마를 해 입고도 두려운 것입니다.

 

뱀이 선악과로 아담을 두려움의 자리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의 자리로 이끕니다.

그것이 이 시대는 율법 아래 머물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하나님은 상선벌악 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그럼 인간들은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자기 행위로 아담처럼 치마를 해 입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율법 신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은 헛된 일이라고 하면서 아담이 만든 치마를 벗겨버립니다.

그리고 흠 없는 짐승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옷을 해서 입혀 주십니다.

이것은 죄의 수치는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가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수치를 가리는 방식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인간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이 있습니다.

인간의 방식은 자기들이 치마를 만들어서 수치를 가리는 것이고,

하나님의 방식은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수치를 가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입는 것을 율법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입혀주는 것은 은혜라고 합니다.

 

율법이냐!

은혜이냐!

 

신앙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의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라고 합니다.

우리의 방식은 율법지킴이라는 방식입니다.

 

뱀이 선악과로 미혹을 하였듯이,

마귀는 인간을 율법이라는 동네에 붙잡아두고자 합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관심사를 율법에 붙잡아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가 되므로 숨어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시선이 고정이 되면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럼 자기 힘으로 수치를 가리는 방식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불의라고 합니다.

 

불의는 법적 관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법적 관계 속에 묶어두고자 합니다.

법적 관계 속에서는 쉼이 없고 수고와 슬픔만 있습니다.

율법 아래는 쉼이 없고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선악의 동네에서는 하나님은 두려운 분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분주히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 두려움을 쫓아 낼 수도 없는 치마를 만드는 헛수고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살려면 먼저 선악과가 몰고 온 눈을 버려야 합니다.

선악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아담의 눈에서 선악의 비늘이 떨어져야지만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눈에서 선악의 비늘이 떨어져야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뭐냐?

아담의 눈에 선악의 비늘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으면 그 첫째 현상이 눈에서 율법의 비늘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하였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눈에 비늘이 떨어졌습니다.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보니까 자신이 그 동안 율법으로 치마를 해 입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난 후 즉시로 율법으로 치마를 해 입던 것을 중지하였습니다.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눈에서 율법의 비늘이 떨어지고 나니까 본래의 눈을 갖게 된 것입니다.

본래의 눈은 은혜의 눈입니다.

은혜의 눈으로 보니까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는 것은 그 눈에 비늘을 떨어지게 하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언제 찾느냐 하면 서늘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고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서늘할 때에 찾습니다.

 

“서늘할 때”를 “루아흐” 라고 하는데,

이는 “바람이 불 때” 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루아흐”는 창세기 1장 2절의 수면 위에 운행하는 하나님의 신을 뜻하기도 합니다.

“루아흐”는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 골짜기에 생기가 불어서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것으로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날이 서늘할 때라는 말을 영적인 의미로 보면 신약에서 성령이 역사 할 때라고도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역사 속에 운행을 하는 때를 종말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이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게 구속사 적으로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을 찾으시는 ‘날이 서늘할 때’는 죄인을 구원하는 때입니다.

구원이 시작 되는 때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 아담이 얼마나 숨어 지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정황을 유추하여서 보면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아담은 한 동안 하나님을 떠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는 일을 하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날이 하루인지 이틀인지를 몰라도 일정한 시간 동안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은 율법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아담이 무화과나무로 치마를 해 입는 기간은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율법시대를 상징하는 구약 시대 전체를 총칭한다고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날이 서늘할 때 아담을 찾는 것은 구약 시대의 끝이 되는 것으로도 유추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로 사셨던 3년 반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은 구약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종말인 3년 반 동안에 12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찾아가서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날이 서늘 할 저녁때에 아담을 찾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구약의 마지막 때 찾으신 것이나 하나님이 아담을 날이 서늘한 저녁때에 찾는 것이나 그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로 보면 범죄한 아담을 하나님이 저녁에 찾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일컬어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3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옛적에 선지자들로 그 아들에 관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날 마지막 때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날이 서늘할 때에 아담을 찾으신 하나님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그 아들을 통해서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오심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란 저녁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종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끝에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무화과나무 사이에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내고자 하심입니다.

 

무화과나무 치마는 율법을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오신 때는 율법의 마지막 때가 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날이 서늘할 때에 무화과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아담을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부르신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이을 아들이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두셨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회사를 물려받을 회장님 아들이 회사를 경영하기에 앞서서 회장님이 잠깐 동안 그 아들을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게 한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정한 때가 되면 아들을 사장으로 불러 올려서 회사를 운영하도록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아들들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얻을 아들이 정한 때까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보내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아들들을 속량하기 위함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던 자들을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을 아들의 영으로 보내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고서도 두려워서 무화과나무 사이에 숨어 있던 아담을 하나님이 찾아가서 부르신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는 것은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아담이 입고 있던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벗겨내고 가죽 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수치를 가리려고 치마를 해 입는 것은 율법 아래서 인간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구약 교회의 모습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의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아담에게 피 묻은 가죽 옷을 입혀준 것과 같습니다.

 

신약에서의 구원 사역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가 바로 날이 서늘할 때와 같은 것입니다.

종말은 시대가 바뀌는 때입니다.

구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도래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구약에서 신약으로 시대가 바뀌게 된 것입니다.

 

구약은 육이고 신약은 영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육의 시대는 끝이 나고, 영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혈통적 이스라엘은 끝이 나고, 성령으로 거듭난 영적 이스라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봅시다.

 

행 2:17-1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末世)에 내가 내 영(靈)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靈)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베드로는 성령 강림을 말세라고 합니다.

성령 강림을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말하기를 말세(末世)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면 육체의 시대는 끝이 나고 영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육체적으로는 이방인이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것입니다.

성령의 오심으로 육체의 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고 영의 시대가 돌입이 된 것입니다.

 

육체의 시대가 끝이 난다는 것은 죄인의 시대가 끝이 난다는 뜻입니다.

율법으로 대함 받던 시대가 끝이 났다는 뜻입니다.

성령 강림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바뀐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찾기 전까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기 전까지는 율법의 의로 치장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의다 불의다 하면서 살았습니다.

 

아담은 내면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죄 아래 있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인간들을 본능적이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들의 내면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을 해소하려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내면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종교를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최초로 홍수 후에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간들은 성과 대를 하늘 꼭대기까지 오르고자 쌓았습니다.

이것은 홍수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창세기 11장을 봅시다.

 

창 11:1-4절.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바벨탑을 쌓을 때 인간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성과 대를 쌓아서 하늘에 닿자고 합니다.

탑을 하늘에 닿도록 쌓아서 홍수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내면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을 없애고자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 입던 것이 홍수 이후 인간들에게는 바벨탑을 쌓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죄인들의 본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일평생 마음으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합니다.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모습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인간들이 힘이라고 여기는 것을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물질을 모으는 것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율법사와 같이 영생을 얻고자 일평생 인간의 선한 행실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몸을 쳐서 고행을 행함으로서 죄책으로부터 해방을 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술에 취하고 마약을 하는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허함을 잊기 위함입니다.

여자들이 세상의 각종 화려한 것으로 치장하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밀려오는 공허함과 두려움을 해소하고자 함입니다.

 

인간들은 정치로 예술로 종교로 경제로 자기 안에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벗어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더 가두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한 후에는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우울해 하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두려움을 없애고자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해소하지 못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가 두려움을 해소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죄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을 봅시다.

 

히 2:14-18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인간들은 일평생 죽음이라는 두려움에 종노릇 하고 살았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해 입어도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죽음에 가두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냈습니다.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들을 놓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언약의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고 살아갑니다.

 

죽음의 두려움은 인간 쪽에서는 해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백약이 무효합니다.

죽음이 두려움을 오직 하나님께서 해소시켜주어야지만 합니다.

그것이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죄가 주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입혀주는 옷을 입어야지만 사라집니다.

그것이 세상 마지막 때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옷을 벗어주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창세전에 계획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봅시다.

 

엡 1:3-7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 소식을 들었습니다.

성령께서 사도 바울에게 알려주신 창세전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되는 방법이 독특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서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된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힌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입혀준 가죽 옷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예수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 강림 후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죽 옷을 입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니다.

 

벧전 1:18-21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것은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합니다.

말세란? 세상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가 바로 하나님이 서늘할 때 아담을 찾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마지막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십니다.

이를 자기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부르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24-29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무덤 속에 있던 자들이 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합니다.

그럼 두 가지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선에 속한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고,

악에 속한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옵니다.

 

선에 속한 사람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말하고,

악에 속한 자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들을 말합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의로 살아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것은 가죽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고,

자기 의로 살아가는 자들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만든 치마를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무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덤 속에는 죽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자들은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속에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담에 네가 어디에 있느냐’ 라고 부르시는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나사로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나사로는 무덤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무덤에서 나온 것은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세상에서 교회로 불러내심을 입은 것과 같습니다.

 

언약적으로는 율법 아래 있던 자들을 은혜 아래로 불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으로는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영적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장차 역사적으로는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로부터 울려 퍼지는 천사장의 나팔소리를 듣고 이 세상 바깥으로 빼내심을 입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무덤입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십니다.

그것이 이 시대는 복음으로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날이 서늘 할 때입니다.

저녁 때입니다.

예수님이 문 앞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찾으십니다.

 

요한계시록 3장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십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고 소리치고 계십니다.

그 음성을 듣고 영접하면 더불어 먹고 마시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저녁을 먹자는 소리입니다.

저녁을 먹으면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혀 주신다고 합니다.

이는 천국에서 안식을 말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잠을 잡니다.

잠자는 것은 안식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서늘할 때에 아담을 찾으신 것은 저녁을 먹이고 잠을 자게 하시고자 함입니다.

 

저녁을 먹고 잠잘 시간이 가까이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퇴근할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들 더 정리하시고 홀가분하게 퇴근하여서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 잘 잡수시고 평안하게 주무실 준비를 하십시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

 

어서 퇴근 할 준비해야지!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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