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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27강. 여자의 길과 남자의 길 (창 3:14-19)

by coroa 2021. 2. 10.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27강. 여자의 길과 남자의 길 (창 3:14-19).-

-.정낙원 목사

 

 

 

오늘은 여자의 길과 남자의 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는 여자의 신앙과 남자의 신앙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한 몸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는 여자이면서 남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어떤 때는 여자로서의 신앙생활이 있고 어떤 때는 남자로서의 신앙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습이 여자의 성향과 남자의 성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형벌은 죽임에 목적이 있지 않고 교정(깨닫고 돌이킴)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형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므로 저주가 아니라 복인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모든 것은 사랑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사랑이 때로는 징계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아들들에게는 반드시 징계가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징계하는 것은 참 아들로 대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하나님이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사랑 하듯이 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고난인 것입니다.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절히 담겨져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고난이지만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가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하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렘 29:11-1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백성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고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말을 백성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때리는 것이 어떻게 사랑이냐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점차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철들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이 복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는데 고난을 통해서 올바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게 더 넓게 더 높이 더 많이 알아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는 일에 어른이 되어 가라는 것입니다.

 

엡 3:14-19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많이 알아가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는 것만큼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이 깨닫는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깨닫는 자는 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에 비례하여서 사랑의 농도가 차이 나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명의 자람과 같습니다.

생명이 어린아이로부터 시작하여서 어른으로 나아가듯이 우리의 신앙도 어린아이 같이 출발하여서 장성한 자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부터 시작하여 은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린아이처럼 강요에 의하여 행하는 신앙이고,

은혜는 장성한 자로서 스스로 알아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장성한 어른이 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간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이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철 들어가는 것이 인생이듯이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마음을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전수전을 겪는다는 것은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에 믿음의 사람들은 수많은 고난을 겪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물른 겉으로 드러난 것은 고난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을 야곱과 요셉을 들 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기 전까지는 집안에서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나자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으면 아버지 집을 유업으로 받아서 행복하게 잘 살아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나자 돌아온 것은 아버지 집을 유업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야곱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말년에 스스로의 인생을 평가하기를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 세상에서 험악한 인생을 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에 이끌려 다니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인생을 차압당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인생이 차압당할 때마다 엄청난 아픔을 겪었습니다.

자기 꿈이 깨어지는 아픔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인생이 인생을 마감할 즈음에 가서 보니까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에서의 인생은 승승장구 일취월장 만사형통하였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에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고 야곱은 실패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에서는 행복하였고 야곱은 불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에서는 미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은 합환채로 낳아진 자입니다.

이는 형제들과 다른 존재로 출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가문을 이어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요셉을 야곱의 약전에 기록을 한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고 급기야는 죽임을 당하는 구조 속으로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아서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예수님에게로 집약되어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다.

유대인들 속에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천명을 합니다.

그러자 돌아오는 것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죽였듯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건 12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제자들은 자기 동족들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방불할 정도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바울의 인생은 전도가 유망했습니다.

꽃길만 걷도록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는 인생의 굴곡이 시작되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하였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은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를 만난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인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 있는 것이라고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보배를 질그릇에 담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안에 만유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담고 있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한편이라는 것 때문에 당하는 것이니까 행복하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 감옥에 들어가서도 찬송과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형제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복음을 전하면 교회로부터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단이라는 소리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한 역설입니다.

 

왜 성경은 인간들의 이성에 반하는 이야기들로 기록이 되어 있을까요?

왜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버림을 당하게 될까요?

이는 죄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습니다.

죄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빛이 어둠에 비취니까 어둠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미워하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빛과 어둠이 하나 될 수가 없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미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세상을 떠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유념해야 하는 것은 성경을 쓴 저자인 하나님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자기 백성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녹아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인간들 입장에서는 고난으로서 역설적이라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마치 부모의 사랑이 자식에게는 잔소리로 들리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그 아이가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키울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내가 부모가 되어서야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한 잔소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부모로부터 받은 그 사랑을 자기 자식에게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식은 내가 아이일 때 부모의 말을 사랑으로 듣지 못하고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처럼 듣게 됩니다.

하지만 그 자식이 나처럼 어른이 되어서 자기 자식을 키우면서 내가 한 그 잔소리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 세상은 늘 이렇게 돌고 돌아서 운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지금 있는 일이 이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인간 세상은 늘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전 1:3-11절.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5.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6.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7.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8.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9.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10.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해 아래 새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하는 일들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 세대 사람들이 다 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이고 인간은 변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고 인간들이 행하는 그 일도 동일한 것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을 미워하였다고 한다면 지금도 그 일이 반복하여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인간들의 거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답습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그 인간에 그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유전자가 같기 때문입니다.

 

아담 시대 인간이나, 노아 시대 인간이나, 아브라함 시대 인간이나, 예수님 초림 때 인간이나, 지금 인간이나 동일합니다.

문명의 발달로 살아가는 환경만 조금 다를 뿐이지 인간들이 하는 일들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다루어 가는 방식도 같다는 뜻입니다.

구약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 육적 형제들에게 핍박과 고난을 받았다고 한다면 지금도 동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들이 육적 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을 핍박하던 자들이 한 집안에 식구들이었듯이 지금도 한 교회 안에 형제라고 하는 자들이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늘 이렇게 살아 왔고,

현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 모두가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시대를 초월하여서 항상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늘 우리에게는 미움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우릴 미워하느냐고 따집니다.

이는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부모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미움으로 여기게 합니다.

죄가 부모인 하나님께서 간섭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부모인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개입하는 것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곡해를 하여서 하나님을 미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부모와 자식은 전생의 원수라고 할까요?

부모인 하나님은 자식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곡해하여서 미워한다고 하여도 그 사랑을 그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식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식이 커서 어른이 되면 알게 될 테니까 지금은 이해가 안 되어서 부모를 원망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그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구별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간섭하십니다.

그런데 그 간섭하심이 이스라엘에게는 엄청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간섭 없이 살아오던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간섭 당하는 것 자체가 고난 인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과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간섭 당할 때는 엄청 아팠는데 그 간섭하심으로 인하여 고난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고난이 아니라 평안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종살이 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에 포로로 살면서 그동안 엄청난 은혜를 입고 살았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과거를 하나 하나 추억하면서 그 때가 참으로 행복했었다는 것을 알고 고난 속에서 감사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미리 앞서서 축약해서 보여준 시대가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는 은혜와 타락 그리고 징벌과 회개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징벌을 통하여서 회개하여 회복을 입게 되면 얼마가지 않아서 또 다시 타락하여서 징벌을 당하는 구조 속으로 밀려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매번 그렇게 간섭을 하셨습니다.

이는 죄인은 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은 불순종하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항상 채찍질을 하신 후 회개케 하여서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대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우리 인간들의 범죄를 이기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형벌은 회개와 교정을 위한 것입니다.

 

성도는 형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형벌은 반드시 정한 기간 동안 징계를 당하다가 풀려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아담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타락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십니다.

그리고 아담을 거기에 두십니다.

모든 것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 안에서 여자를 빼내시고 배필로 주십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먹으라고 한 것은 먹고,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안 먹으면 되는 일입니다.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죄는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생명과는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담을 하나님 앞에 순종의 관계로 두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두고자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먹게 하고서는 달랑 선악과 하나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 지키기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담은 모든 걸 다 먹으라고 한 것은 먹지 않고 달랑 하나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거하기 싫고 독자적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천상에서 천사가 저질렀던 죄입니다.

천상에도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천사들을 창조하여서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천사들 중에서 찬양을 맡은 우두머리 천사가 교만하여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다가 이 세상으로 쫓겨난 것입니다.

 

그 놈이 바로 마귀입니다.

그 마귀가 지상의 에덴동산에 뱀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놈의 속성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싫어하는 속성을 가진 자입니다.

반역의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뱀이 여자에게 다가와서 자기의 주특기로서 미혹을 한 것입니다.

뱀은 여자에게 선악과가 담고 있는 비밀을 알려주었습니다.

여자가 선악과가 담고 있는 비밀을 알고 나자 갑자기 그 과실이 보아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것입니다.

 

먹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 먹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곤 자기 남편 아담에게 주어서 먹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을 어긴 자들과는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뱀과 함께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 버렸습니다.

말을 안 들으니까 집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제일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당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살기 좋은 곳에서 말입니다.

죄는 가장 살기 좋은 곳에서 발생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이 이스라엘 역사 전반에 걸쳐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은 가장 살기 좋을 때 항상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신 31:14-2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죽을 기한이 가까왔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렀더라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 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19.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신 32:15-17절.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백성들에게 노래를 하나 지어서 가르쳐주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마귀를 섬기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뽑혀서 이방 나라에 포로가 되어서 고난당할 것을 미리 내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래를 지어서 가르치면서 난 너희들이 망할 것을 미리 알고 있다고 합니다.

 

모세의 예견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망하고 맙니다.

그것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바벨론으로 쫓겨난 것은 에덴동산에서 이 세상으로 쫓겨난 것의 반복인 것입니다.

 

천상에서 천사가 타락하여서 이 땅으로 쫓겨난 것이나,

아담이 타락하여서 에덴동산에서 이 세상으로 쫓겨난 것이나,

이스라엘이 타락하여서 가나안에서 쫓겨나 바벨론으로 포로 잡혀 간 것이나 그 영적 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쫓아내 버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타락한 자들을 에덴동산 바깥 동네에 살게 하시고는 그들이 살아갈 땅을 저주해 버리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그 땅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인 것입니다.

죄인들이 살아가는 이 땅이 지옥입니다.

 

지옥이란? 땅의 감옥이라는 뜻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께 반역한 무리들을 가두는 곳입니다.

그 첫째가 타락한 천사로서 마귀입니다.

이 마귀를 요한계시록 12장에선 옛 뱀 마귀 곧 사단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하와를 타락케 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흙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그 흙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저주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이 세상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뱀을 일컬어 이 세상 신이라고 합니다.

뱀은 이 세상 임금입니다.

흙에 속한 자들을 세상 것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터인데 그가 오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더 이상 마귀가 성도들에게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도들의 왕이 되어서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구원이 뭐냐?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 받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흙의 기운으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귀는 이 세상 신입니다.

흙으로부터 난 것들을 가지고 흙에 속한 자들을 다스립니다.

흙에서 난 자들은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흙에서 난 자는 흙에서 난 것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흙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구약 이스라엘을 흙에 속한 먹거리로 미혹하여서 하나님을 떠나도록 하였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상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땅에 것이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내가 존재하는 양식은 하늘의 것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인류 최초로 뱀의 미혹으로부터 이긴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기심을 자기 백성들에게도 적용을 하십니다.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하늘에 속한 자가 됩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난 새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난 성도들은 존재 양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흙의 가치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흙에서 난 자가 죽고 하늘로 난 자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에게 이미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아 낼 때에 뱀과 아담에게는 다르게 저주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뱀에게는 종신토록 흙에 가두었지만,

아담에게는 뱀의 머리를 깨트릴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뱀은 영원토록 용서치 않지만 뱀에게 미혹당한 아담은 여자의 후손을 보내서 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아담에게는 복음이고 희망인 것입니다.

아담은 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독자적으로 흙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빼내 주셔야지만 합니다.

 

아담은 정한 기간 동안 형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땅에서 빼내 주실 구원자를 보내주십니다.

그가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인 것입니다.

 

아담을 구원할 여자의 후손은 하늘로서 오셔야지만 합니다.

그래야 아담을 땅에서 하늘로 뽑아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 되어서 오신 것입니다.

 

아담에게 이 세상은 교도소와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이 세상이라는 교도소에서 가두신 것입니다.

정한 기간을 두고 가두신 것입니다.

정한 때가 되면 여자의 후손을 보내서 빼내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저주 땅에서 자신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갈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아담은 세상이라는 감옥에서 빠져나갈 날만 소망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옥에서 천국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지옥의 고통 속에서 천국을 소망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보니까 에덴동산이 얼마나 귀한 곳인 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고난이 클수록 에덴동산은 더욱 더 그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에덴동산을 그리워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면 고난이 복인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고난이지만 그 속에 담겨진 내용은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린 형벌 속에 어떤 복이 담겨져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각각의 형벌을 내립니다.

 

남자와 여자에게 내리신 형벌이 다릅니다.

형벌 속에는 신앙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각각의 형벌 속에는 복음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왜 여자와 남자의 형벌이 다를까요?

이는 여자로서의 신앙이 있고 남자로서의 신앙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로서 행하여야 하는 일이 다르고, 남자로서 행하여야 하는 일이 다른 것입니다.

 

구원은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흙에 속한 사람이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흙에 속한 사람이 살아가는 존재 양식과 하늘에 속한 사람이 살아가는 존재 양식은 다릅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떡을 위해서 살아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육적 가치를 쫓아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영적 가치를 쫓아갑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자기 세계를 확장해 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갑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아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세상 것을 움켜잡고자 살아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세상 것을 버림으로 살아갑니다.

 

흙에 속한 사람은 흙의 기운으로 살아가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하늘은 창조주의 세계이고 땅은 피조물의 세계입니다.

창조주는 생명을 주는 분이고, 피조물은 생명을 받아야 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모습을 남자와 여자로 두신 것입니다.

 

남자는 생명을 주는 자이고, 여자는 생명을 받는 자입니다.

남자는 하늘이고, 땅은 여자인 것입니다.

흙에 속한 자는 여자이고, 하늘에 속한 자는 남자입니다.

 

구원이 땅에서 하늘로 옮겨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가 하늘에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흙에 가치로 살아가던 사람이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살려내는 방식으로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있고 남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여자이면서 남자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여자이면서,

세상 속에서는 하늘에 사람으로 구원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하는 남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이지만,

세상 앞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남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두 가지 형벌을 주셨습니다.

 

창 3: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 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첫째는, 남자로부터 씨를 받아서 잉태하여 해산하는 고통을 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잉태하여서 해산하는 고통은 옛 사람의 죽음을 뜻합니다.

구원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은 여자이고 새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남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은 아들의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여자에서 남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성도를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반드시 옛 사람의 죽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여자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남자가 되는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합니다.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는 것은 자기 안에 새로운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남편으로 받은 생명입니다.

 

성도의 남편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 속에 자기의 생명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럼 성도들은 예수님이 심어준 생명을 낳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여서 낳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는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동반이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서 물과 피를 쏟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고 죽으신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자기 안에 심겨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낳는 일은 여자가 물과 피를 쏟고 아이를 낳은 해산의 수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자는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딤전 2:15절.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 안에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심어집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심겨지면 임신한 여자들처럼 몸에 이상 반응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임 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을 장악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면 모든 몸의 구조가 아이를 위한 삶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여자로서의 삶은 후패해집니다.

아이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여자로서의 죽음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의 인생도 바뀌게 됩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삶에 궤적이 바뀌게 됩니다.

가치관이 바뀌고 지향하는 곳이 바뀌게 됩니다.

 

옛 사람은 죽어지고 하늘에 사람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그럼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을 박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사라지고 하늘에 대한 소망이 날로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일컬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아이처럼 자라가면서 점점 더 충만해져 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모습이 희미하고 더디다 할지라도 생명의 자람처럼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가면서 부모의 모습을 닮은 것과도 같습니다.

갓난 아이 때 모습은 부모와 온전하게 닮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자라가면서 부모의 모습들이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행동이나 버릇이나 하는 모든 일들이 아빠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씨 도둑질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자식은 반드시 아버지를 닮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이나 예수님의 삶의 모습들을 그려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라는 생명을 받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것이 해산의 고통이고 자식을 낳는 일인 것입니다.

 

첫 번째 형벌인 것입니다.

첫 번째 형벌은 인생을 예수그리스도에게 차압당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차압을 당하면 두 번째 형벌이 기다립니다.

 

둘째는, 남편(메시야)을 사모하며 다스림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16절.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성령이 임하면 하늘에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그럼 우리 안에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심어 주시고는 다시 온다고 약속을 하고는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럼 여자는 자기 안에 심겨진 아이를 키우면서 남편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를 남편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편을 사모한다는 것은 남편이 떠나 있음을 전재로 하는 말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은 여자는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기다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받고 난 후에 오매불망 남편이 다시 올 날을 소망하면서 사모하고 기다리고 살아갔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오로지 그 약속을 받은 자들만이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만이 남편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성도만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이 새 사람에게 본능으로 담아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은 일차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아담과 하와는 여자의 후손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분은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을 주실 남자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생명과를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아담도 여자의 후손으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인 것입니다.

그럼 아담이나 하와는 동일하게 여자의 모습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편을 사모하라는 말씀 속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을 아담과 하와의 남편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 생명을 심어 주셨습니다.

남편의 씨를 몸에 지닌 여자는 남편의 것입니다.

이제부터 남편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다스림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남편의 다스림을 받도록 하였는가요?

이는 에덴동산에서 여자가 남편인 아담을 떠나 독자적으로 있다가 뱀을 만나서 미혹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남편을 떠나면 뱀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능력으로는 뱀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남편의 다스림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남편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죄는 남편(예수그리스도)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악이고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남자에게 내린 형벌 속에 담긴 의미를 살펴봅시다.

 

남자는 생명을 주는 자입니다.

생명을 받는 자는 여자이고 생명을 주는 자는 남자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하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은 여자는 이제부터 그 생명을 키워 가는데 있어서는 남자로 살아야 합니다.

 

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면 온 몸을 다해서 자기 안에 아이를 키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남자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임신한 여자는 남편에게는 유약한 여자이지만 뱃속의 아이에게는 강건한 남자입니다.

 

그래서 여자는 약하나 엄마는 강하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남자에게 내려진 형벌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남자에게 내린 형벌은 저주 받은 땅을 개간하여서 식물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 3:17-19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여자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남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세상 속에서는 믿음이 강건한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부터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자란? 여자를 위하여 희생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해산한 여자는 남자처럼 아이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게 됩니다.

남자로서의 삶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한 것은 세상에 속한 자는 죽이고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는 흙에 기운으로 사는 여자로서의 삶은 죽이고 하늘의 기운으로 살아가는 남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십자가의 흔적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몸에 그 아들의 형상을 새기는 일을 하십니다.

아담의 속성을 제하시고 예수님의 속성을 채우시는 일을 하십니다.

남자로서의 삶은 전쟁입니다.

 

구원 속에는 두 가지 싸움이 있습니다.

 

땅을 차지하는 싸움과 그 땅의 신과의 싸움입니다.

땅을 차지하는 전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이제 그 땅에서 살아가는 전쟁은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행하십니다.

 

두 싸움은 마치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전투와도 같습니다.

여리고 성은 죄와 사망의 싸움이고,

아이 성 전쟁은 육신의 소욕과의 싸움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철옹성과도 같은 죄와 사망이라는 사단의 권세인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전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우리 안에 시날 산 외투와 은과 금을 탐하는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아이 성 전쟁을 하십니다.

 

범죄 한 아담의 몸에는 죄의 소욕들이 있습니다.

이름 하여 가시와 엉겅퀴들입니다.

아담은 종신토록 자기 안에 죄의 소욕이라는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남자에게 내린 형벌은 땅에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고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 채소를 얻어서 식물을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땅은 죄의 몸을 뜻합니다.

 

성도의 몸은 가나안 땅과 같습니다.

가나안 땅은 네피림이라는 거인 족속이 원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옛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 옛 사람은 가나안 칠 족속들처럼 장대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하늘의 남자가 되어서 땅의 옛 사람을 죽이는 싸움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의(義)의 싸움입니다.

인간의 의를 죽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율법의 의냐!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율법의 의는 법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는 은혜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신앙을 선악의 법아래 두고자 합니다.

선악의 법이 작동을 하면 복음 아는 것이 힘이 되어서 정죄와 심판을 행사하게 됩니다.

 

법으로 살면 지옥이고,

은혜로 살면 천국입니다.

 

마귀는 법으로 살게 하여서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도 안에서 보혜사가 되어서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법은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고,

은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행위이냐!

믿음이냐!

 

행위 속에는 내 영광이 있고,

믿음 속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습니다.

 

행위는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습니다.

율법 신앙은 우리의 자랑거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에 매력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포도주의 물을 섞도록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인본과 신본을 혼합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썩어버립니다.

그 맛을 잃어버립니다.

 

이것을 갈라디안식 신앙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기 + 율법 지킴 + 온전한 신앙

 

갈라디안식 신앙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에다가 인간의 공로를 섞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이 이 시대 알미니안 계통의 인본주의 성화주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주의가 되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의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 뿐입니다.

의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여서 그것은 의가 되지 않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성향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과 땅에 지체를 죽이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되는 성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정답을 아는 것과 정답대로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정답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그 정답대로 살아내지를 못합니다.

 

죄 아래서 난 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 아래 있는 몸입니다.

죄의 몸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았다고 합니다.

 

질그릇은 우리의 몸이고 보배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질그릇이 보배를 담았다고 해서 질그릇이 보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질그릇은 여전히 질그릇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귀히 여기는 것은 그 속에 보배인 예수그리스도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배가 없으면 그냥 깨어져 버려질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원님 태운 나귀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원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지 나귀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귀는 원님을 태우고 있을 때 영광을 받는 것이지 원님을 태우지 않으면 그냥 짐을 지고 다니는 가축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님을 태우지 않은 나귀가 ‘에헴’ 하면서 ‘이리 오너라’ 라고 돌아다니면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왜 보배를 담은 질그릇을 보배로 만들지 않고 질그릇 그대로 두셨을까요?

이는 질그릇이 존재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보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심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품고 살아갈 때 귀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없으면 금방 돌에 맞아 죽을 나귀와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산다고 하여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지옥으로 들어갈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는 성도는 설령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여도 그것을 의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안 살고와는 상관없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간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모든 일들은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 한 것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빠지면 그냥 흙입니다.

질그릇입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 예수그리스도를 담고 있으면 보호해 주시지만 그 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불에 태워 버립니다.

그러니 질그릇인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쓸 문제가 아니고 자기 안에 담고 있는 보배에게 신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질그릇을 금그릇으로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보배를 담고 사는 질그릇으로 살면 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살면 됩니다.

그러지 않고 자신이 변화 된 것을 자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면 되는 것이지 자기가 존귀해 지려면 안 됩니다.

 

무수리가 왕에 씨를 받았다고 해서 왕비 노릇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여전히 왕의 성은을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씨가 사라지면 그냥 무수리입니다.

 

씨가 무수리로 하여금 왕의 여인으로 살아가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수리는 씨와 운명을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씨 없이 독자적으로 어떤 인간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러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씨를 몸에 담고 있습니다.

그 씨 때문에 성도라는 존귀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는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예수그리스도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싸움입니다.

 

둘째,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입니다.

땅에 것으로 살고자 하는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으로 하늘의 것으로 살아가려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마귀는 세상 것으로 하늘에 것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아간처럼 시날 산 외투와 은과 금을 탐하도록 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아간을 죽이는 일을 하십니다.

 

마귀는 예수님에게 세상 것으로 미혹을 하였듯이 성도들을 미혹합니다.

 

마 4:1-11절.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요일 2:15-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던 것들은 이 세상 것들입니다.

 

떡을 위해서 살라고 하고,

영웅호걸이 되라고 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라고 합니다.

 

이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라고 합니다.

이는 모두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세상의 가치들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이러한 세상의 가치를 쫓아갔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다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율법을 잘 지키면 이러한 것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이러한 것들이 도리어 발목을 잡습니다.

하늘로 가는 길에 방해거리들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러한 것들을 제거하는 일들을 하십니다.

이것은 땅의 지체를 죽이는 일입니다.

 

골 3:1-10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성도는 날마다 땅에 지체를 죽이는 싸움을 하게 됩니다.

육신의 소욕과 싸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게 가나안 전쟁입니다.

남자의 길입니다.

 

구약에서는 땅을 빼앗는 전쟁이지만,

신약에서는 성도의 몸을 빼앗는 전쟁인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전쟁을 하여야 합니다.

세상 것이 제거 당하는 전쟁은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일은 죽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됩니다.

성령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예수그리스도의 병기로 드려지고,

육신의 소욕이 이기면 우리 몸은 마귀의 병기로 사용이 되어집니다.

 

또한 자기 안에 법을 죽이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법은 은혜로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성도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자기 안에 법이 작동하면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서 자기도 찌르고 남도 찌르게 됩니다.

성도는 은혜로서 마음을 굳게 하여야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지 못하도록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개간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 채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남자는 예수님처럼 은혜를 주는 사람입니다.

남자답게 강건하게 사는 것은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여서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에게 내려진 형벌의 길은 천지(天地)와 만물(萬物)을 이루는 일과 같습니다.

 

여자의 길은 천지로 나누이는 일이고,

남자의 길은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일입니다.

 

이는 단번에 주신 구원을 날마다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채워서 나를 정복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이 일이 다 끝이 나면 일곱째 날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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