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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16강.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들 (계 4:1-11)

by coroa 2020. 10. 24.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6강.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들 (계 4:1-11)

-.정낙원 목사

 

 

 

창세기를 서론이라고 한다면 요한계시록은 결론입니다.

서론은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하여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뭔가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언약하신 내용이 그대로 다 응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24 장로들의 모습 속에서 구원의 결과를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24 장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드신 목적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한 목적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라”

 

교회란? 구원 받은 자들이 예배로 모이는 곳입니다.

예배 속에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도 있고 성도간의 교제도 있습니다.

이걸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온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을 말할 때 해함이나 상함이나 아픈 것이나 사망이 없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사랑뿐이라고 합니다.

이는 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아픔과 상함과 사망을 몰고 왔습니다.

죄가 우리를 너와 나로 갈라놓고 반목과 갈등과 다툼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죄가 사랑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서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되 찾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상의 24 장로들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되찾음 입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죄가 사해지고 사랑이 되찾아지니까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그 자리입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의 내용입니다.

창세전 언약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거룩하고 흠에 없게 하신 것은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예배에요.

오늘도 예배하면서 사도요한이 본 천국을 맛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하십니다.

그리곤 천국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곳을 보니까 예수님도 계시고 구원 받은 성도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12장에서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그 증인들이 그곳에 다 계신 겁니다.

이들이 24 장로들입니다.

 

24 장로들은 구원 받은 성도를 대표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대표한다는 말은 24 장로들 속에 모든 성도들이 다 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24장로들의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이고,

24장로들이 하는 일들이 곧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24장로들은 모두가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천국에서는 금 면류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비참하게 살았지만 천국에서는 영광된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걸 보여주면서 무얼 말씀하고 계십니까?

야! 요한아!

너도 이리로 오게 되니까 힘내라는 소리입니다.

아시아의 일곱교회를 향한 소리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모습을 보고 와서 소망 중에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천국을 보여주신 것은 소망과 위로를 주기 위함입니다.

사도 요한은 지금 고난 중에 있어요.

밧모섬이 유배당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내일 죽을 사람에게 소망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그건 죽음 후에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사도 요한에게 죽음 후에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모습이 어떤가요?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과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건 왕의 모습이에요.

예수님께서 일찍이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셨어요.

 

마태복음 19장을 봅니다.

 

마 19:2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가 옵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하면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를 따르는 12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보좌에 앉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케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성도가 왜? 고난을 당하느냐?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자로 세움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린 모두가 예수님의 팔자로 이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고난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12 제자는 신약이고, 이스라엘의 12 지파는 구약이에요.

12 제자는 새 언약 안에 있고, 이스라엘의 12 지파는 옛 언약 안에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12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심판한다고 합니다.

이는 곧 새 언약이 옛 언약을 고발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옳았고, 너희는 틀렸어! 라고 말이에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상징하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했어요.

그런데 살아나셔서 만유의 주가 되고 만왕의 왕이 되셨어요.

결국 예수님이 옳았고 구약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상징하는 율법주의가 틀린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누구를 심판 할 자들이 아니에요.

우린 예수로 살다가 심판을 당해요.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옳다고 해 주세요.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옳은 자로 드러나게 해 주셔서 우리를 틀렸다고 심판하던 자들을 도리어 심판하는 형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의 12 제자들이 구약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심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심판한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어요.

이건 전쟁에서 이기고 졌다는 말이 아니고 너희들이 옳았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이걸 시편 기자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고 합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죽였는데,,

나중에 보니까 원수 들 앞에서 하나님과 겸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하나님도 보좌에 앉아 계시고 24 장로들도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한 마디로 겸상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에 의하여 죽임 당한 자들이 말이에요.

이게 예수를 죽이고 성도를 죽인 율법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모습입니다.

 

예수와 성도를 누가 죽였나요?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죽였어요.

결국 구약 이스라엘이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를 보세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누가 핍박을 했나요?

율법주의자들이에요.

이들을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12지파들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어요.

복음을 방해 했어요.

사도 요한도 지금 그 연장선상에서 밧모섬에 유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그림은 로마가 유배시킨 것이지만 실제로는 유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고소당하고 유배당한 것이에요.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신앙을 가지고 핍박하지 않아요.

자칭 예수 믿는다고 하는 육에 속한 교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요.

이들이 이스라엘의 12 지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사도 요한에게 예수 때문에 죽임 당한 자들이 하늘 보좌에 앉아서 하나님의 영광중에 거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이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나타난 니골라당이나 발람의 교훈이나 이세벨의 가르침이나 하는 것들은 모두가 거짓 선지자들을 말하고 이들을 통칭하여 "자칭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들을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의 싸움은 형제 싸움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형제들과 요셉,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 싸워요.

 

누가 누구를 핍박했나요?

먼저 나온 자들이 나중에 나온 자들을 핍박했어요.

이건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 새 언약에 속한 자들을 핍박한다는 뜻입니다.

육으로 난 자들이 영으로 난 자들을 핍박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0:35-36=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걸 언약적으로 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충돌한다는 뜻입니다.

24 장로들은 옛 언약에 의하여 죽임 당한 성도들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이긴 자들로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알려주고자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천상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엄청난 위로와 소망을 주는 책인 것입니다.

 

천국이 오픈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놀라움을 알자면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하나님은 천국을 예표 하는 것으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어요.

거기에 아담을 두셨어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지요.

그러자 하나님은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추방해 버립니다.

 

왜? 추방합니까?

이는 거룩과 비거룩이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범죄한 아담은 죽은 자이고 비 거룩한 자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한 천국을 상징하는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을 추방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얼씬 하지 못하도록 천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셨어요.

죄인은 들어 올 수 없도록 문을 꽁꽁 걸어 잠근 것입니다.

 

아담 이래로 에덴동산은 공개 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 에덴동산의 실상인 천국이 최초로 사도 요한에게 공개가 된 것입니다.

이는 이제 에덴동산의 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왜? 문을 열어주셨을까요?

이제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죄 문제를 해결 했는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해결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24 장로들이 천국에서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 하시지요.

그리고는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6일은 세상의 전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요.

6일 창조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창조에 속한 역사에서 엿새 동안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실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6천년 속에 있어요.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가 대략 2천년이에요.

또한 아브라함에서 예수님 초림까지가 대략 2천년이 되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대략 2천년으로 잡고 있어요.

아담 이후로 지금까지가 대략 6천년이 흐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합니다.

 

벧후 3장 8절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무슨 말인가요?

하루는 묵시적 개념이고 천 년 이란 역사적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천 년이란 묵시 안에서는 하루와 같아요.

이러면 창조의 6일은 역사의 6천 년과 같은 것이 됩니다. 

즉 창조의 6일은 이 세상의 전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엿새에 속한 날이에요.

이렇게 되면 두 가지의 시간 개념이 생기게 됩니다.

역사적 시간 개념과 묵시적 시간 개념이 있게 됩니다. 

성경은 왜?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묵시에 속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도 역사적 구원과 묵시적 구원이 있어요.

이를 육적 구원과 영적 구원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두 가지 개념의 구원이 있다는 뜻입니다.

 

육적 구원은 역사적 개념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고,

영적 구원은 묵시적 개념으로 구원을 이루었어요.

우리는 영적으로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육적으로는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어요.

 

사도 요한이 지금 이 두 구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24장로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나 육신은 여전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 세상 속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몸에 구속이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자신은 몸에 구속을 기다린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우린 모두가 몸에 구속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 몸에 구속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늘에 장막을 덧 입는 것으로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속에서 몸에 구원을 이루어가는 자기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영적으로 이미 이룬 구원을 누리고 있는 천상의 세계로 사도 요한을 성령의 감동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본 그 천국을 성령의 감동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이 세상에서 몸으로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본 그 천국을 통해서 위로와 소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역사 속에서는 죽음을 향해서 진행되어 가고 있어요.

육신의 죽음을 지나서 하늘에 몸을 받으면 우리의 구원은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몸에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할게요.

하나님은 땅에서 살아갈 몸과 하늘에서 살아갈 몸을 따로 준비해 두셨어요.

땅에서 살아갈 몸은 시작과 끝이 있는 공간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태어남과 죽음이 있는 몸을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어도 이 땅에서는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역사 바깥으로 나가게 되어요.

즉 천국에 간단 말입니다.

천국은 영생하는 곳이므로 태어나고 죽는 그런 몸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어요.

그곳에는 영생하는 몸으로 살아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몸이 죽으면 하늘에 몸을 덧입혀 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몸은 죽음이 없는 몸이에요.

영생하는 몸이에요.

여기서 잠깐 두 가지 몸에 대하여 살펴보고 갑시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시다.

 

고후 5:1-9=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사도바울이 셋째 하늘에 갔다 왔습니다.

셋째 하늘이란? 천국을 말해요.

창세기 1장을 보면 궁창 위가 있고 궁창 아래가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궁창을 가운데 두고 윗동네가 있고 아랫동네가 있다는 말입니다.

윗동네와 아랫동네를 경계하고 구분하는 궁창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궁창이라는 하늘이 있는데 그 아랫동네를 땅이라고 하고 윗동네를 하늘이라고 해요.

그래서 천지(天地)라고 하는 겁니다.

천(天)은 궁창 윗동네인 하늘이고, 지(地)는 궁창 아랫동네인 땅이에요.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 속한 새가 날아다니고 비행기가 다니는 하늘을 첫째 하늘이라고 하고,

그리고 하늘과 땅을 가로 막고 있는 궁창이라는 하늘은 둘째 하늘이라고 하고,

하늘과 땅을 가로막고 있는 궁창이라는 하늘 윗동네를 셋째 하늘이라고 해요.

 

궁창이라는 하늘 윗동네가 셋째 하늘로서 천국이에요.

사도 요한이 지금 그곳에 간 것입니다.

바울이 갔던 셋째 하늘에 간 겁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천국에서 살아갈 몸을 주세요.

그래서 땅에 있는 육신이라는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장막을 덧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모습을 보고 와서는 빨리 가고 싶다고 합니다.

 

8절을 보세요.

자기는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고 싶다고 하잖아요.

이 말은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에요.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세월의 흐름은 구원의 완성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늙어감이 축복이고 죽음이 축복인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오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아요.

도리어 빨리 죽는 것을 복이라고 해요.

 

나이가 들고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은 이 역사 속에서 졸업을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장막이 죽는 것을 슬퍼하면 안 되어요.

이는 성도에게 있어 죽음이란 축복이지 결코 저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하지요.

그 꿈이 바로 천국의 꿈이에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천국을 사모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는 영생이라는 칩이 내장 되어 있어요.

그게 부활의 영이신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부활을 약속하시고서는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어요.

 

우리 안에 성령이 왔다는 것은 너는 하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늘 백성은 영생하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 백성들에게 영생케 하는 영이신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 몸이 죽으면 하늘에서 살아갈 영생의 몸으로 살려 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봅시다.

 

고전 15:35-49=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 40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 4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어떤 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끝이라고 하자.

바울이 무슨 소리 하느냐?

성도의 죽음은 씨를 땅에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농부가 씨를 땅에 뿌리는 것은 씨 속에 있는 나무를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도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는 땅에 속한 형체가 씨앗처럼 죽으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 넘기우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땅에 속한 형체를 죽이면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형체로 살려내세요.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구원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 만약에 안 죽으셨으면 천국에 가셨을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죽지 않았으면 여전히 이 세상에서 생고생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어떤 기도를 하셨나요?

십자가를 안 지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어요.

 

이것은 우리의 심정과 똑 같은 겁니다.

우리도 머리로는 천국을 그리면서 실제로 몸이 죽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어려운 일이 닥치면 살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돕게 합니다.

 

어떻게 돕습니까?

십자가를 지도록 돕습니다.

왜? 십자가를 지도록 돕습니까?

이는 십자가에 죽어야 하늘로 가기 때문입니다.

 

우수겟 소리로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래 살고자 하니까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서 빨리 데려 오라고 하신 거에요.

이 땅에 오래 사는 것만큼 고생이에요.

그러니 더 이상 고생하지 말고 데리고 오라고 천사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는 길로 인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죽어서 천국으로 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창세전에 가졌던 그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건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도 이 땅에 오래 살고자 해요.

그러자 하나님이 빨리 세상을 떠나도록 사건들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에게는 아픔이지만 실상은 축복이에요.

 

사도요한이 천국을 보고 온 후에 어떤 생각이 들었겠어요.

자기도 빨리 동료들이 있는 천국으로 가고 싶었겠지요.

천국을 보고 오니까 빨리 가고 싶은 겁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보았던 그 천국을 우리도 동일한 성령으로 그 천국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본 그 천국이 보여지고 믿어지는 사람은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아요.

아! 나도 가고 싶다 그 천국!

그러고 살아가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어요.

 

잠이란? 죽음을 말해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깨우러 간다고 하지요.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였어요.

자고 있기 때문에 무덤에서 예수님이 소리 지르면 듣고 깨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잠자는 자들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이는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는 것이 아니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이걸 안식이라고 합니다.

안식이란? 모든 수고를 그치고 편안하게 쉬는 쉼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세상에서의 수고를 그치고 쉬게 하시려고 죽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죽음은 세상에서 하늘로 이사 가는 것이니까요.

사도 요한이 지금 그걸 보고 있는 겁니다.

24 장로 중에는 일찍 목베임을 당한 사도들이 있어요.

 

12 사도들 중에서 사도 요한이 제일 오래 살았으니까 천국에 있는 24 장로들 속에는 앞서 간 사도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들과 미팅하고 왔어요.

아마도 서로 알아보고 격려하고 위로했을 겁니다.

 

여기서 잠깐!

다른 사도들은 다 죽어서 천국에 갔는데 왜? 사도 요한만 살아서 천국에 갔는지 그 영적 의미를 살펴보고 갑시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에는 11 사도들은 다 죽었고 사도 요한만 살아 있었어요.

11 사도는 죽어서 천국에 간 겁니다.

그런데 11 사도들은 죽어서 간 그 천국을 사도 요한은 지금 살아서 간 것입니다.

 

이는 곧 장차 요한계시록이 다 응해지는 때에 사는 성도들은 모두가 살아서 주님을 영접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일이라도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때 살아 있는 성도들의 몸은 홀연히 변화하여 하늘에 몸으로 바꿔치기 당해요.

 

그래서 바울은 성도는 살아도 주와 함께 있고 죽어도 주와 함께 있는 것이므로 자기는 사나 죽으나 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살아 있을 때 주님이 재림 하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요.

 

성도는 이 땅에서 이중적인 구조로 살고 있어요.

그 이유는 죽을 몸 속에 영생의 몸을 담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루 속에서 천 년을 살고 있고, 천 년 속에서 하루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지요.

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할까요?

이는 이중 구조로 사신다는 뜻이에요.

 

이 말이 참 어려운데 잘 이해하시고 들으세요.

 

예수님은 영생 하시는 분이에요.

그런 분이 역사 속에 오셨어요.

영생의 나라에는 오늘과 내일이라는 날이 없어요.

항상 오늘 날이에요.

이걸 하루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루라는 말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라는 개념에서의 하루가 아니에요.

그냥 항상이라는 의미에서의 하루에요.

예수님은 항상 계시는 분이에요.

 

항상 사시는 분이 천 년이라는 숫자가 통용되는 역사 속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영생 하시는 예수님에게는 역사라는 천 년도 하루에 속한 것이에요.

그래서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묵시적 존재이면서도 이 땅에서는 역사적 존재로 사셨어요.

이걸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산다고 합니다.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에요.

그럼 예수 안에 거하는 성도도 묵시적 존재이면서 역사적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땅에서는 비록 구원을 받아야 하는 몸으로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이미 구원을 받은 천국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나 사도 요한에게 천국으로 올라오게 하셨던 것은 너희들의 몸은 비록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살고 있지만 묵시 안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은 천국백성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고난당하고 있으니까 결론을 보여주시고 위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에 가니까 예수님이 계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도 요한과 똑 같은 몸을 입고 사셨어요.

그리고 죽었어요.

 

그런데 천국에서 보니까 살아계신 것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 믿다가 죽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살아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같이 보좌에 앉아서 말이에요.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의 보좌와 24 장로들이 앉은 보좌가 어떤 의미인지 살펴봅시다.

 

2-3절입니다.

 

계 4:2-3=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사도 요한이 하나님이 이리로 올라오라는 명을 받잡고 열린 문으로 하늘로 올라갑니다.

가서 보니까 보좌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25개가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한 가운데는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는 그 주변을 빙 둘러서 24 장로들이 금 면류관을 쓰고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마치 24 장로들이 하나님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것과 같아요.

 

이건 엄청 중요한 그림이니까 다시 설명합니다.

 

한 가운데 하나님의 계십니다.

그 모습이 벽옥과 홍 보석 같습니다.

그런데 녹보석 같은 무지개가 그 보좌를 빙 두르고 있습니다.

마치 무지개가 아우라(aura) 처럼 하나님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하나님의 보좌에 무지개가 둘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무지개 속에 감싸여져 있어요.

무지개가 왜? 하나님을 두르고 계실까요?

이는 하나님이 완성 된 무지개 언약 안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후손들인 24 장로들이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창세기 1장을 보면 6일 동안 창조를 하시지요.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십니다.

안식은 모든 일을 다 마쳐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범하였어요.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깨어지고 만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의 안식을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여호와의 안식을 깨트린 원흉인 마귀를 박살내라고 하시고,

또한 마귀로 인하여 죄를 범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서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안식을 하실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여호와의 안식을 되찾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신 겁니다.

그 일이 바로 죄 아래 사로잡힌 자기 백성들을 놓아주는 일입니다.

이걸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좇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으로 보여 주신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어요.

그리하여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을 다 살려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비로서 하나님이 안식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무지개에 둘러 있고,

또한 구원 받은 성도들을 총칭하는 24 장로들이 하나님을 감싸고 계신 것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명절날 집 떠나 살던 자식들이 모두 귀향하여서 부모님을 둘러싸고 희락을 누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에요.

 

무지개는 언약을 상징해요.

이 땅에 무지개는 반쪽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한 동그라미로 있어요.

이는 천국은 언약이 완성 된 곳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땅에서의 언약은 천국에서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언약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을 상징하는 24 장로들이 하나님 보좌를 빙 둘러서 하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4 장로들은 언약을 다 이룬 자들이 되어서 무지개처럼 하나님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24 장로들이 어떻게 언약을 다 이룬 자들이 되었는가요?

이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입니다.

 

언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알다시피 무지개 언약은 노아 언약이에요.

노아가 홍수 후에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냅니다.

이 때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제물을 흠향하시고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십니다.

 

이게 노아의 무지개 언약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정결한 재물이 죽어서 부정한 자가 살아난다는 언약이에요.

이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어요.

예수님이 정결한 재물이 되어서 죽으신 것입니다.

 

왜? 죽었느냐?

부정한 자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입은 자들이 24 장로들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24 장로들이 하나님을 감싸고 계시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감싸고 있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24 장로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언약을 다 이루어 주심으로서 구원을 이룬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도 요한이 본 천상의 모습은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된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이후 이 땅에 남기고자 하신 것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부정한 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심입니다.

성도들은 이 사실을 알아요.

 

그래서 성도들은 사나 죽으나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그 바탕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해요.

이 기억으로 감사하고 살면 24 장로로 살고 있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시는 배경을 보세요.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한 모습을 보고 심판을 단행하십니다.

이 때 노아에게 심판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이 방주입니다.

 

노아가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방주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고자 내리는 저주의 비를 방주가 대신 받았어요.

노아는 방주 안에서 살아남았어요.

이건 성도가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홍수 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은 방주로 인하여 심판 속에서 살아난 노아에게 방주의 실체를 알려주십니다.

그게 노아의 제사 속에 나타납니다.

 

노아는 정결한 짐승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이를 하나님이 흠향하십니다.

흠향 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어째서 하나님이 옳다고 하십니까?

이는 노아의 제사가 창세전 언약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부정한 자들을 살리기 위하여 정결함 자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홍수 속에서는 방주가 노아의 식구들을 감싸 안고 심판의 비를 대신 받았고,

홍수 후에는 정결한 재물이 부정한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었습니다.

노아 대신 비를 맞은 방주나 부정한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은 정결한 재물이나 모두가 흠 있는 자기 백성들을 살리고자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노아의 식구들을 예수님 안에서 구원을 해 주신 것입니다.

이 그림을 정결한 제물의 희생 제사 속에 담아놓으신 것입니다.

그럼 홍수 후를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노아의 정결한 제물의 희생 제사라는 그림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아야 합니다.

이 그림을 볼 수 있는 자가 신자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또 죄를 짓지요.

포도주에 취하여 수치를 드러내잖아요.

이건 죄를 의미해요.

 

그럼 홍수 후에 노아가 사는 길은 누군가가 노아의 죄를 대신 담당해 주어야 합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정결한 제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노아는 정결한 제물의 희생을 잊으면 안 되어요.

이걸 잊지 말라고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무지개 언약 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짐승을 새로운 양식으로 주십니다.

홍수 전까지만 해도 짐승을 먹지 않았어요.

홍수 전에는 하나님께서 씨 맺는 채소를 양식으로 주셨어요.

 

그런데 홍수 후에는 짐승을 식물로 주십니다.

짐승을 식물로 주시면서 한 가지 금령을 주십니다.

피 채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피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너희는 짐승의 대신 죽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를 생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무지개 언약 속에 담아 놓았어요.

 

그럼 노아를 비롯하여서 그 후 모든 사람들은 무지개를 보면서 자신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게 홍 수 이후의 신앙이에요.

이걸 알면 신자이고 모르면 불신자입니다.

 

무지개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하고 있어요.

 

창세전 언약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줌으로서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으로 거룩해진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24 장로들이 예수님의 대신 죽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하늘나라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예수님의 대신 죽음으로 자기 백성들이 살아난다는 창세전 언약을 그려주고 있는 무지개가 하나님 보좌를 둘려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 완성 되었다는 뜻으로 무지개가 반쪽이 아니고 완전한 모습으로 둘러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 할 때 이기는 자는 하나님 보좌에 앉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계 3:21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아시아의 일곱 교회마다 이긴 자들이 있지요.

천국은 이긴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기고 벗어난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면류관은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에요.

 

어떻게 이겼나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이기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능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새 언약이 그들 속에 심겨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더러 보좌를 빼앗아서 앉으라고 하지 않고 주께서 앉게 해 주세요.

구원은 예수님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전리품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걸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전쟁에서 구출해 오다가 멜기세덱에게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십일조로 바치는 것으로 보여주셨어요.

십일조는 구원 받은 성도를 말해요.

 

십일조가 어떻게 유래되었나요?

그 유래를 알면 십일조에 의미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최초의 십일조를 아브라함이 했어요.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서 돌아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맞이하고서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어진 전리품 중에서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새 언약 안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어요.

아브라함이 한 일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처럼 마귀와 전쟁을 하고 죄와 사망으로 포로 잡힌 자들을 찾아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립니다.

그리고는 자던 자들이 일어나 거룩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거룩한 성이란? 천국을 말해요.

 

이들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죄와 사망이 이들을 무덤 속에 가두어두고 있었어요.

이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습니다.

그리고는 무덤 속에 있던 자들을 데리고 나옵니다.

 

이들은 전리품이에요.

예수님은 이 전리품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그리고는 이들을 하늘 보좌에 앉게 하셨어요.

이들이 24장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24장로들은 모두가 예수님께서 이기게 해 주어서 이긴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24 장로를 왜? 구원했나요?

창세전에 하신 언약 때문이에요.

그래서 천국에는 24장로들이 무지개처럼 하나님 보좌를 빙 둘러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좌에 둘려 있다”는 그 “둘려” 라는 말은 “퀴클로덴” 이라고 합니다.

“퀴클로덴”은 “퀴클로”에서 유래가 된 말이에요.

그런데 이 “퀴클로”라는 말은 서로 연결이 되어서 원처럼 동그랗게 빙 둘러져 있다는 뜻입니다.

이건 마치 동그라미 하나 하나가 서로 고리가 되어서 연결이 되어 목걸이를 만든 것과 같아요.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24장로들이 무지개 언약 안에서 모두가 서로 서로 고리처럼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벽돌과 벽돌이 서로 맞물려서 집을 지어가는 것처럼 24장로가 벽돌처럼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여서 하늘나라의 집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거에요.

 

에베소서 2장을 봅시다.

 

엡 2:14-22=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린 원래 원수들이었어요.

나 밖에 모르는 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걸 막힌 담을 헐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한 권속이 된 것입니다.

권속들이 모여서 집을 세운 겁니다.

이게 교회에요.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를 일컬어 건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퉁이 돌이 예수에요.

그러니까 교회란? 예수님을 모퉁이 돌로 하여서 서로 서로 벽돌처럼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이 거하는 집을 지어간다는 뜻입니다.

24장로가 바로 그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12가지 보석들로 하늘 예루살렘 성을 지어진 것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보좌를 빙 둘러서 있는 24장로가 21장에서는 각양의 보석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석이면 성도도 보석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보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12가지 보석으로 지어졌어요.

그 보석으로 지어진 집 안에 진짜 보석이신 하나님이 보좌를 베풀고 좌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보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보좌라는 말은 “드로노스”라고 하는데 그 뜻은 왕이 앉아서 집무하는 자리라는 뜻이에요.

그림을 그려보세요.

한 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빙 둘러서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뭘 할까요?

어전 회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어전 회의에서 무엇을 하는가요?

 

예레미야 23장을 봅시다.

 

렘 23:16-22=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18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뇨 19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 것이라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 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21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 ~ 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던 시기에 예언을 한 선지자입니다.

왜? 포로로 잡혀갑니까?

이는 언약 안에 머물지 않아서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환상을 보게 합니다.

예레미야가 환상으로 천국을 보니까 하늘에서 어전 회의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 백성들을 미혹하였다는 것에 대하여 응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미혹하는 겁니다.

어떻게 미혹하는가 하면 땅에 평안으로 합니다.

땅에 평안을 준다고 하니까 백성들이 그들의 말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그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과 같아요.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 어떠한가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요.

한마디로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고 있어요.

 

그런데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그놈들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런 평안을 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산다는 그런 약속을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모두가 거짓 선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악한 길과 악한 행위란? 비언약적 사고로 사는 것이에요.

성도의 소속은 하늘이에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이 땅에 것으로 땅에 묶어 두고자 해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와서도 땅에 것을 좇아간단 말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 편에 서서 말을 해요.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 한다고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몽사를 얻었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요.

몽사(夢事)란? “할람”이라는 말인데 이는 지어낸 이야기를 뜻합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듣기 좋도록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거짓말이란? 땅에 거하게 하는 것이에요.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 위를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데 거짓 선지자들은 땅을 바라보게 해요.

관심사를 땅에 붙잡아 둔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저주했습니다.

이는 땅에 기운으로 살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은 땅에 것으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왜?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할까요?

이는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은 땅에서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옮기는 일을 하세요.

그런데 뱀의 종들이 땅에 것으로 미혹하여서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한단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를 말씀 하실 때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은 거짓 신자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려고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많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아요.

내 양은 내 음성을 안다고 하셨어요.

타인의 음성은 모르는 고로 도망한다고 하였어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짓 것을 믿도록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세요.

 

열왕기상 22장을 봅시다.

 

왕상 22:19-23=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는데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1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3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가장 악한 왕이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적 그리스도와 같은 자입니다.

그 아내가 유명한 이세벨이에요.

 

이들은 종말의 거짓 선지자들을 예표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합의 심판은 장차 종말에 이루어질 적그리스도 세력들의 심판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이스라엘을 타락케 하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놈들을 죽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을 어떻게 죽이는지를 살펴봅시다.

 

아람과 이스라엘 간에 전쟁이 끊이지 않았어요.

잠시 소강상태로 있다가 다시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 때 남쪽 유다 왕 여호사밧이 원정을 하여 도웁니다.

 

여호사밧이 아합 왕에게 이번 전쟁이 어떠한지 하나님께 물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합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400명을 불러서 이번 전쟁에서 이기겠는지 지겠는지 점을 쳐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400명의 선지자들은 하나같이 이번 전쟁을 아합이 대승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점괘가 좋게 나온 겁니다.

그러자 왕이 기분 좋아합니다.

 

이에 여호사밧이 한 번 더 점을 쳐 보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기 있는 선지자 말고 다른 선지자는 없느냐 라고 아합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아합이 미가야 라는 놈이 한 명 있기는 한 데 이놈은 자기에게 늘 나쁜 말만 한다고 하면서 싫어합니다.

 

여호사밧이 그래도 데리고 와서 한 번 물어 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내시를 보내서 미가야 선지자를 데리고 오게 합니다.

내시가 미가야 선지자를 데리고 오면서 400명의 선지자들이 모두가 이번 전쟁에서 아합이 이긴다고 점괘를 내어 놓았으니 미가야 선지자도 그냥 좋다고 하라고 합니다.

 

미가야가 오다가 보니까 성문 광장에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유다의 여호사밧이 보좌에 앉고 그 앞에 400명의 선지자들이 서 있는 것입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이 한 목소리로 이번 전쟁은 아주 대승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미가야 선지자가 400명의 선지자들과는 전혀 다른 점괘를 내어 놓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아합 왕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 아합 왕 입장에서는 아주 재수 없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아합 왕이 뿔따구가 나서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따집니다.

 

이에 미가야 선지자가 본 것을 이야기합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하늘에 어전 회의를 보았어요.

무슨 회의인가 하니 아합을 죽일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야! 저기 저 아합을 어떻게 죽일까?

 

그러자 한 영(靈)이 여호와 앞에 서서 자기가 하겠다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할거냐? 라고 묻자!

내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서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거짓말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거짓 선지자들 입에 넣어서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00명의 선지자들이 전부 거짓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합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전쟁에 나갔다가 죽고 맙니다.

 

이건 장차 종말에 일어날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미가야가 본 하늘에 어전 회의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24 장로들과 함께 보좌에 앉아서 회의하는 것과 같아요.

이는 종말에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은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지금 누구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까?

적그리스도 세력입니다.

적그리스도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고 있어요.

 

적 그리스도 세력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교회 안에 있어요.

예레미야가 거짓선지자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을 한다고 하지요.

누가 성도들을 미혹하는가 하면 목사들이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24 장로들과 하늘에서 어전 회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 세력을 어떻게 징벌하고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구원하실 것인지를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적 그리스도 세력은 반드시 멸망을 당하고 또한 성도들은 반드시 구원 받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그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온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하늘에서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들립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성을 상징해요.

언약의 후손들에게는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알리는 소리이지만 비 언약 백성들에게는 심판의 소리에요.

 

번개와 뇌성이 치는 것은 이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번개처럼 신속하게 임하고 뇌성처럼 강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개가 될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심판이 일어날 때마다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동반하여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악의 세력은 강하게 응징한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이 극도로 화가 났다는 말입니다.

이젠 용서치 않겠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악해져요.

인간들의 죄악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사단은 점점 더 미혹을 해요.

 

이 시대 교회가 왜? 이렇게 어지러운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 거짓 신자들을 추수하고자 거짓 선지자들 입에다가 거짓말 하는 영을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재림 예수이고, 자기가 보혜사이고, 자기가 구원주 라고 하는 별 희한한 작자들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교인들이 믿고 따르고 있어요.

유유상종이고 부창부수에요.

별 희한한 놈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별 희한한 교인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에 아니 어떻게 저런 설교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고 뻔뻔스럽게 할 수가 있으며,

또한 그 소리를 어떻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듣고 있느냐? 라고 하여도 거짓선지자들에게는 자기가 하는 소리가 진리인줄 알고 또한 거짓 신자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처럼 들려요.

그러니까 거짓종들은 성경을 자기 맘대로 설교 하는데도 거짓 신자들은 은혜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17-18장을 보세요.

음녀가 나오지요.

그 음녀가 종말의 교회 모습이에요.

 

그런데 그 음녀가 있는 곳을 귀신의 처소라고 해요.

이는 교회가 귀신의 말로 난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별 이상한 목사들이 나타나고 별 이상한 교회들이 일어나고 별 이상한 교인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미혹당하면 백약이 무효에요.

귀에 귀머거리 독사가 붙어 있으면 그 어떤 말을 해도 안 들어요.

그래서 제가 한 두 번 말해보고 안 들으면 그냥 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설득해서 들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믿어달라고 강요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고 들려지게 해 주셔야지만 들려지고 믿어져요.

그래서 구원이 선물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들을 타박해선 안 되어요.

그들을 통해서 내가 받은 그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 줄 알아야 합니다.

어쩌자고 내 귀에 복음이 들려지고 예수가 믿어지는지 그 은혜에 감사하여야 해요.

성도는 감사 밖에 할 것이 없어요.

 

24 장로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보세요.

그리하고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감사가 될 것입니다.

그 감사함으로 하루를 천 년처럼 천 년을 하루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열어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게 하시고, 귀를 열어서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고, 눈을 열어서 천국을 보여 지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심 안에서 하루 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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