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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14강. 이 일 후에 (계 4:1)

by coroa 2020. 9. 29.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4강. 이 일 후에 (계 4:1).-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논쟁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부득불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앞으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이 들어서 언급하고 가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전혀 다르게 해석이 되어지게 됩니다.

 

어떤 분이 저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강해를 보고서 세대주의 해석이 아니냐고 물어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 2장 3장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강해하면서 세대주의에서 말하는 연대기적인 교회사로 해석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아마도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연대기적으로 해석하면 세대주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물론 세대주의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가지고 신약의 교회사를 일곱 시대로 나누어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세대주의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역사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 세대주의적 관점만이 아니란 뜻입니다.

역사기적 전(前)천년설을 주장하시는 많은 분들도 동일하게 해석을 해요.

그러므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연대기적인 의미에서 일곱 교회사로 해석하는 것은 세대주의 해석이라고 단정 지으면 안 되어요.

 

얼마 전에 개혁주의 입장에서 요한계시록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라는 포럼이 서울에서 있었는데 거기서 발제자로 나선 신학자와 목사님들이 이구동성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이 분들이 그랬다고 하여서 따르는 것은 아니에요.

 

제가 성경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맞는 해석이기 때문에 취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는 신학이 무가치 하다는 뜻이 아니고 신학자들의 말은 참고하는 것이지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저는 모든 성경을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해석을 합니다.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이 세상에 나타나는 교회사적인 것으로 이해가 되어요.

반드시 그렇게 이해되어야만 해요.

 

그래서 제가 요한계시록을 처음 시작 할 때에 요한계시록은 어느 한쪽의 학설에 치우치면 안 되고 각 학설의 좋은 부분들은 이용하는 의미로 종합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어요.

각 학설마다 장단점이 있고 유용한 것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어떤 해석을 이단에서 사용한다고 해서 그걸 사용하면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소아적인 발상이에요.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해석을 하면 마땅히 탄핵을 하여야 하지만 그것이 언약적으로 영적인 의미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 이단이다 삼단이다 따질 것이 아니라 필요하면 인용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괜히 신학에 매몰되어서 교각살우(矯角殺牛)하면 안 되어요. 

이는 교단의 교리를 수호하고자 성경의 진의(眞意)를 놓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요한계시록 해석을 난해하게 만든 것이 모두가 교단의 신학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다양한 해석들을 하게 되고 급기야는 이단들이 이상하게 해석을 하는데도 미혹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신학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학문이에요.

인간들이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서 틀을 만든 겁니다.

이게 근본주의다, 개혁주의다, 세대주의다, 혹은 칼빈주의다, 알미니안주의다, 라는 식으로 각양의 주의(主義)로 나타난 것입니다.

 

신학이 교파를 낳고 교단을 낳았어요.

결국 자기들이 만든 그 틀로 편 가르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면 자기들이 만든 틀 속에 가두어져 버렸어요.

그 틀을 벗어나면 이단으로 치부해요.

 

틀에 가두어지면 다름을 수용하지 못해요.

남이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 교단의 사상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못해요.

결국 다리오 왕처럼 자기들이 만든 법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어리석음이에요.

 

한국교회 정서는 자기하고 다른 교파나 교단은 이단의 범주 안에 있어요.

자기하고 다른 생각을 하면 심정적으로 이단이라고 해요.

이게 모두가 교권주의와 교회 성장주의가 몰고 온 병폐에요.

교권주의자들이 교회 부흥이라는 명제에 가두어져서 자기 교단의 교리만이 절대적인 것이고 옳은 것이라고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심찮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심정적으로 이단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나 또한 내 생각과 다른 누군가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해석상의 차이 때문입니다.

성경을 신천지와 같이 개인주의로 풀거나 자기 조직을 위하여 해석한다고 하면 당연히 탄핵당하여야 할 이단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관점에서 조금 다른 해석을 한다고 하면 지켜볼 여유도 좀 필요해요.

성경을 보는 큰 틀에서 궤를 같이 한다고 하면 각론에서 조금 다르더라도 이해하여야 해요.

심판은 주께 맡기고 상대를 통하여서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있는지 자기 성찰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나 아니면 다 틀렸어 라는 흑백논리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신앙이 너무도 가난한 것입니다.

신학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편협해졌고 가난해졌어요.

넉넉함과 관대함이 없고 모두가 싸움닭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는 신학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구하여야 할 때입니다.

 

미리 당부 드리지만 신학의 다름으로 인하여 정죄하지 마세요.

모두 다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어요.

그러므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단시 하면 안 되어요.

특히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에서는 교리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어요.

 

하지만 그들의 순수한 신앙마저도 의심하거나 정죄하고 심판해서는 안 돼요.

그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부인하기 이전에는 우린 그의 신앙을 정죄하거나 선악 간에 심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성경을 온전하게 다 아는 사람은 없어요.

다 부분적으로 알아요.

저 역시도 쬐금 알아요.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조금 차이나는 것이 있다고 하여서 이단이라 배척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본분을 해석하는 데에는 세대주의 신학과 상반된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득불 그들의 오류를 지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전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혹여 세대주의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분들이 오늘 말씀을 보신다고 하면 서로 성경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비판하는 것이니 양해하시고 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말씀도 어떤 주의(主義)나 학설(學說)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게 되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진의(眞意)를 놓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주의(主義)와 어느 학설(學說)이라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면서 무엇이 창세전 언약에 근거한 해석인지를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난제(難題) 중의 하나 입니다.

그 이유는 “이 일 후에” 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개혁주의와 세대주의로 나누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역사기 전(前)천년설과 세대주의 전(前)천년설로 양분화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해석법이 있어요.

 

요한계시록은 장차 일어날 일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미래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과,

계시록은 그 당시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 당시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과,

온 세계에 흩어진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므로 온 세계 교회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과,

요한계시록은 전부 상징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과,

상징이지만 그 속에 영적인 것이 있으므로 영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과,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이니까 문학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과,

이 모두를 다 참고하여서 해석하여야 한다는 종합적인 해석이 있어요.

 

저는 종합적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그 시대에 주신 말씀이면서 온 세계 어느 시대이고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일차적으로는 그 시대 상황을 말하면서도 종말에 되어질 일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종말적으로도 이해하여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상징이이라는 기법으로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 일어날 일을 기록해 놓았어요.

이건 요한계시록 자체가 그것을 증거해 주고 있어요.

 

1장 1절에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 이라고 했고!

19절에서는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 이라고 했고!

오늘 본문 1절에서도 “마땅히 될 일”이라고 했어요.

 

모두가 될 일이에요.

일이란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 상징이 의미하는 것이 역사 속에 어떤 사건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실재(實在)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실재가 없으면 상징으로 말할 이유가 없어요.

상징은 실재를 설명하고자 도입하는 것입니다.

 

상징이 실제(實際)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영적으로 해석하여야 하지만 상징이 실제로 나타날 때에는 영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어요.

이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들도 실제로 일어날 일들이지 상징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경이 실제적으로 응해지고 있는 시대에요.

과거에는 상징으로만 보았던 것들이 이제는 실제로 나타나고 있고 일어나고 있어요.

 

그럼에도 과거 우리 선배들이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우리도 그들처럼 보아야 한다는 해석에 가두어져서 현실 속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건을 상징으로만 보거나 영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 가능성을 열어 놓고 보아야 해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크게 개혁주의와 세대주의로 나눕니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영적으로 보는 반면에 세대주의는 문자적으로 보아요.

큰 의미에서 개혁주의는 성경을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보는데 세대주의에서는 인류 전체를 일곱 시대로 나누어서 각 시대마다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요한계시록의 해석에 있어서 극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세대주의에서는 종말에 큰 환란이 일어날 것인데 이를 7년 대 환란이라고 합니다.

이건 개혁주의의 역사기 전(前)천년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도 동일하게 말해요.

 

그런데 세대주의에서는 7년 대 환란이 있기 전 예수님의 공중 재림이 있고 이 때 교회가 공중으로 이끌려 올라가는 휴거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7년 대 환란 기간에는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해요.

그리고 7년 대 환란 이후에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대주의는 예수님의 재림이 두 번 있다고 해요.

 

7년 대 환란 전에는 공중 재림이 있고,

7년 환란 후에는 지상 재림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7년 대 환란 전에는 이방인 교회를 위하여 재림을 하고,

7년 대 환란 후에는 유대인을 위하여 재림한다고 주장을 해요.

 

이게 모두가 오늘 우리가 살펴볼 요한계시록 4장 1절의 “이 일 후에” 라는 말씀의 해석 때문에 갈라지는 것입니다.

 

이건 잠시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개혁주의 안에서도 천년왕국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진 여러 가지 학설들을 먼저 살펴보고 갑시다.

 

전(前)천년주의 해석이 있고!

후(後)천년주의 해석이 있고!

무(無)천년주의 해석이 있어요.

 

전(前)천년주의와,

후(後)천년주의와,

무(無)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나누어져요.

 

전(前)천년주의는, 예수님이 재림 하시고 난 후에 천년왕국이 있다는 것이고!

후(後)천년주의는,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재림 하신다는 것이고!

무(無)천년주의는, 천년왕국이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다 장단점이 있어요.

학설은 다르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각각 취할 것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말고 좋은 것은 취하면 되어요.

나하고 다르다고 하여서 나만 옳고 너희는 다 틀렸어! 라고 하는 것은 교만이고 어리석음이에요.

 

지금은 후(後)천년주의를 주장하는 분들은 거의 없어요.

후(後)천년주의는 이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서 점점 살기 좋아져서 천년 동안 천국과 같은 나라가 있고 난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타나는 이 세상의 현실이 살기 좋은 천국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악해져 지옥이 되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후(後)천년설은 감추어져 버렸어요.

 

남은 것은 전(前)천년설과 무(無)천년설입니다.

이 두 주장은 팽팽해요.

한국교회 안에 개혁주의에서도 두 부류로 갈라져 있어요.

같은 교단이라도 어느 분은 전(前)천년설을 주장하고 어느 분은 무(無)천년설을 주장해요.

과거 우리의 선배 목사님들은 칼빈도 요한계시록을 강해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요한계시록 해석이 금기시 하던 시대가 있었어요.

 

그 때는 무(無)천년설이 우세하였어요.

그러나 지금은 많은 분들이 요한계시록을 강해하기 시작을 했어요.

요한계시록이 강해가 되면서 전(前)천년설이 힘을 얻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전(前)천년설이 우세해요.

저도 전(前)천년설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전(前)천년주의도 두 부류로 구분을 해요.

 

역사기적 전(前)천년주의가 있고,

세대주의 전(前)천년주의가 있어요.

복잡하지요.

신학으로 성경을 접근하면 이렇게 복잡해요.

 

역사기적 전(前)천년주의와 세대주의 전(前)천년주의의 차이는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으로 나누는 것으로 달라져요.

앞서 잠간 살펴본 것처럼 7년 대 환란 전에 교회가 휴거하느냐 아니냐 로 달라집니다.

 

역사기적 전(前)천년주의는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을 구분하지 않아요.

하지만 세대주의 전(前)천년주의는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을 나누어요.

이게 4장 1절의 “이 일 후에” 라는 것의 해석의 차이 때문입니다.

 

세대주의에서는 4장 이후로는 성경에 교회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7년 대 환란 전에 이방인 교회는 휴거하였다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7년 환란 기간에는 유대인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요한계시록 7장에서 나타나는 144.000명 인치는 사람들은 모두가 유대인이라고 해요.

 

세대주의는 교회는 환란 전에 휴거를 하기 때문에 환란을 당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성경은 도리어 성도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한다고 하였어요.

 

마태복음 24장을 봅시다.

 

마 24:1-13=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의 계시록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께서 종말에 일어날 징조에 대하여 말씀 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징조(徵兆)란? 어떤 조짐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기 전에는 어떤 조짐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 조짐이 뭔고 하니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인간들이 포학해지고!

종교적으로는 각양의 이단들이 창궐하여서 혹세무민한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세요.

 

3절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라고 묻지요.

즉 어떤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징조들을 이야기 해 주십니다.

난리와 전쟁과 기근과 지진과 온역과 다양한 천제지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가 환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환란을 면하게 해 준다고 하지 않고 환란을 당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세대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환란 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환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이중계시가 담겨져 있어요.

1절 2절을 보면 성전이 무너질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3절에서 세상 끝 날에는 이러한 징조가 있다고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성전이 무너지면 끝이에요.

성전은 율법 신앙의 총화에요.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곧 율법 신앙의 종말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을 품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AD 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화가 되었어요.

완전히 무너져 내렸어요.

예수님의 예언대로 성전에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져 내렸어요.

실제로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로마 군대가 성전에 불을 질러서 성전의 금이 녹아서 돌 사이에 끼었어요.

이것을 빼 낸다고 성전의 벽돌 하나 하나를 걷어내고 금을 캐냈어요.

그리고는 육적 유대인들은 온 사방으로 흩어지고 큰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이건 육적 이스라엘의 환란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구약 이스라엘의 종말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영적 이스라엘의 종말이에요.

신약 교회에 대한 종말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도 환란을 거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7년 대 환란이라는 것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있어요.

종말에 7년 대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다니엘의 70 이레를 근거해서 하는 말이에요.

70 이레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도래 한다고 하였어요.

그런데 70 이레 중에서 69 이레는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졌어요.

 

1 이레가 역사 속에 감추어져 버렸어요.

이게 종말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1 이레란 7년이에요.

그래서 7년 대 환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70 이레에 대하여는 제 요한복음 강해를 참고 하세요.

<요한복음 75강.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70이레>

이건 반드시 꼭 보셔야 해요.

진짜 보셔야 합니다.

 

암튼 세대주의에서 7년 대 환란 전에 교회가 휴거 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틀린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이건 해석의 오류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수용하고 있어요.

 

왜? 이런 해석법들이 있을까요?

이는 서로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관점이 다르니까 다른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학설(學說)이란? 그냥 학문적으로 정해 놓은 설(設)이에요.

자기들끼리 성경을 이렇게 해석하자! 라고 정해 놓은 규칙이에요.

이게 교파를 낳게 된 것입니다.

 

알다시피 교파마다 신학이 달라요.

이 시대 교파는 수 없이 많아요.

교파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게 어떤 폐해를 낳는가 하면 서로가 다름을 배척하게 되고 급기야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하면 적대감을 갖고 이단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자기하고 다르면 이단이라고 해요.

이게 모두가 교권주의가 낳은 폐해(弊害)입니다.

 

제가 과거에 종말론에 심취한 적이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종말론적 신앙관으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역사기적 전(前)천년설을 따랐어요.

 

하지만 제가 창세전 언약을 깨닫고 요한계시록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니까 각각의 학설마다 부분 부분적으로 취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참고하되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어요.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가장 조심하여야 하는 부분이 선입견(先入見)입니다.

 

선입견(先入見)이란?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선입견이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신학에서 생겨요.

어느 교파에 속하였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달라요.

 

신학이란? 성경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마다 성경을 이해하고 보는 관점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서 신학이 분류가 되어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를 듭니다.

 

과거 7-80년대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으로 한창 이민을 갈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회자 되는 말이 있었어요.

어떤 말인가 하면 공항에 누가 배웅을 나왔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국 생활이 달라진다고 하였어요.

 

공항에 세탁소 하시는 분이 나오면 그 사람도 세탁소 할 경우가 많고!공항에 장사하는 분이 나오면 그 사람도 장사하기 쉽다는 말이 있었어요.

공항에 건축일 하는 분이 나오면 그 사람도 건축 일을 할 확률이 높다고 하였어요.

 

이걸 신학으로 이해하면 이래요.

그 사람이 어느 신학교에 가느냐에 따라서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져요.

장로교 신학교를 가면 개혁주의 종말론 안경을 쓰게 되고!

순복음 신학교에 가면 세대주의 종말론 안경을 쓰게 되어요.

 

장로교 신학교를 가면 개혁주의 신앙을 표방하게 되고!

감리교 신학교를 가면 알미니안주의 신앙을 표방하게 되어요.

이처럼 신학교는 안경을 씌워주는 곳이에요.

 

지금은 교단의 벽이 많이 허물어져서 개혁주의 신학교를 나왔어도 세대주의를 따르는 사람도 있고,

세대주의 신학교를 나왔지만 개혁주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아요.

교단과 신학의 벽이 많이 허물어졌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그 잔재가 남아 있어요.

 

한국에는 다양한 교단이 있고 신학교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누구의 설교를 들어도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을 하고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자기 하고 다른 말을 하면 색안경을 쓰고 보게 되고 급기야는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하면 배척하고 종국에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어느 주의(主義)가 맞고!

어느 신학(神學)이 무오하고 옳은 것인가요?

어느 교단이 정통인가요?

없어요.

 

만약에 장로교가 정통이라고 한다면 타 교파는 다 이단이에요.

감리교가 정통이라고 하면 장로교는 이단이에요.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는가요?

아니지요.

 

옛날에 떠 돌던 이런 예화가 있었어요.

감리교 창시자 라고 하는 ‘존 웨슬레’이가 잠을 자다가 천국에 가는 꿈을 꾸었어요.

감리교는 알미니안 주의이고, 장로교는 칼빈주의에요.

칼빈주의는 예정설을 주장하고, 감리교는 만인구원론을 주장했어요.

 

당시 영국에서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서로 정통이라고 싸웠어요.

그러던 차에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레이가 천국에 간 겁니다.

존 웨슬레이가 천국에서 주님에게 여기 감리교인들이 얼마나 왔습니까?

또 장로교 교인들은 얼마나 왔습니까? 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주님이 그런 놈들 없어!

여긴 감리교인이나 장로교인들이 오는 곳이 아니고 예수 믿는 자들만 오는 곳이야!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그냥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시사하는 바가 커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요?

신학으로 신앙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잣대로 믿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신학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리 그럴싸하고 좋은 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믿음을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믿음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신학에 영향을 받지 않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신학을 몰라도 예수를 믿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는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저절로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성경을 신학으로 이해하지 않아요.

그냥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는 것으로 믿어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지는 것이에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깨닫는 성도들은 신학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신학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성경 해석의 절대 가치로 두는 그 사고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시골에 어떤 할머니가 있어요.

이 분은 신학이 뭔지도 몰라요.

그런데 예수가 믿어지고 성경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에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내가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고!

에이~! 나 예수 안 믿을래! 라고 한다고 해서 안 믿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주권에서 벗어나 있어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시면 믿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안 믿어지게 해 주시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어요.

 

예수 믿는 것은 우리의 의지나 각오나 노력과 상관없어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해요.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고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섣불리 남을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4장 1절입니다.

 

계 4: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일 후에” 라는 말은 2장 3장에 이어서 보았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까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의 일곱 교회 환상을 다 보고 난 후에 갑자기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거기서 나팔소리 같은 음성이 나면서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시간의 순서로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 후에 벌어지는 일이 맞게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적 연속성을 말하는 “이 일 후에” 가 아니에요.

아사아의 일곱 교회를 본 후라는 말은 맞지만 이것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연결 지어서 일어나는 시간적인 연속성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건 다른 장면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역사주의에서는 “이 일 후에” 를 다른 장면을 보여주는 사건의 변화로 해석을 해요.

하지만 세대주의에서는 시간의 연속성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 후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대주의에서는 4장을 2-3장과 연결해서 교회의 휴거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휴거로 보는 근거로 이 일 후에 사도 요한을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아시아의 일곱 교회 후에 성령이 사도 요한을 하늘로 올라오게 한 것은 교회가 휴거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대주의에서는 구원을 이방인 교회의 구원과 육적 이스라엘인 유대인 구원을 나누어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이 일 후에” 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라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4장 이후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에 요한계시록은 시간 순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고 사건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일곱 인이니 일곱 나팔이니 일곱 대접은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을 말해요.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순서적으로 해석하면 안 되어요.

사건으로 보셔야 해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각장 마다 “본다” 는 말을 합니다.

 

내가 보니!

내가 또 보니!

또 내가 보니! 라는 식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기저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보았다가!

서쪽으로 보았다가!

남쪽으로 보았다가!

북쪽으로 보았다가 하는 것과 같아요.

 

사도 요한이 볼 때마다 다른 그림이 보이는 것입니다.

천상(天上)의 모습과 지상(地上)의 모습이 교차하여서 보이는 것입니다.

 

이쪽을 보니 하늘에 모습이 보이고!

저쪽을 보니 땅에 모습이 보이고!

이쪽을 보니 안식하는 모습이 보이고!

저쪽을 보니 고난 받는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대전에 있는 독립박물관에 견학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인상 깊게 보았던 것이 옴니버스 영화입니다.

영화관 전체가 스크린인 겁니다.

천장과 사방의 모든 면에서 영화가 상영이 되어요.

그런데 다 다른 영화에요.

 

동쪽으로 보면 한국의 절경이 나오고!

서쪽으로 보면 미국의 그랜드 캐넌이 나오고!

남쪽으로 보면 호주의 오페라 하우수가 있는 아름다운 해변이 나오고!

북쪽으로 보면 알라스카의 얼음 속에서 사는 모습이 나와요.

 

영화 전체는 지구촌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그림마다 다 다른 사건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지붕 안에서 온 세계의 이야기들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쪽 동네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고!

서쪽 동네에선 저런 일이 일어나고 있고!

남쪽 동네에선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고 있고!

북쪽 동네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을 보는 것과 같았어요.

사도요한이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인류 전체를 다 본 것입니다.

이게 묵시문학의 특징이에요.

 

동쪽 동네는, 봄이라서 씨를 뿌립니다.

서쪽 동네는, 가을이라 추수하고 있어요.

남쪽 동네는, 여름이라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고 있어요.

북쪽 동네는, 겨울이라 눈밭에서 스키를 타고 있어요.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지구라는 한 땅 덩어리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지구를 가지고 갖가지 사건들을 연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사건마다 다양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한쪽에선 씨 뿌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른 쪽에선 추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천상에서는 즐겁고 안식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지상에서는 환란 속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내려다보니 미국에선 가뭄이 일어나고 있고!

태국에선 홍수가 일어나고 있고!

한 쪽에선 먹지 못해서 굶어 죽어 가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선 너무 먹어서 죽어 가고 있는 것과 같아요.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지구 구석 구석마다 다양한 모습들이 사건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게 묵시적 구조에서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소설 읽듯이 문자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계시의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지상과 천상의 모습이 오버랩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계시란? 사건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어요.

성경 전체를 보면 전체의 내용이 하나의 이야기이지만 그러나 내용 속에는 각각의 사건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건 속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천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여러 가지 그림으로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지상에서 전쟁하는 교회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천상에서는 승리하신 모습이 복선(複線)으로 교차하여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사아의 일곱 교회는 비록 이 땅에 속하여서 고난 가운데 있지만 실상은 천상에 이긴 자로서 존재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후의 전리품으로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지상(地上)과 천상(天上)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2장 3장에서는 지상의 교회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4장에서는 천상의 구원 받은 무리들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상의 구원 받은 무리는 세대주의자들처럼 교회가 휴거 하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완성된 교회의 모습이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자들은 4장 이후로는 교회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4장 이전에 교회는 이미 휴거하고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4장 이후로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해요.

 

과연 그러한가요?

4장 이후에 교회라는 말이 없는가요?

살펴봅시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교회들을 위하여 이것들을 증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들이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합니다.

1장에서부터 22장까지 요한계시록 전체를 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장에서 3장까지만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고,

1장에서 22장 전부를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예수님은 분명히 나 예수는 지금까지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모든 것들을 교회들을 위하여 주신 것이라고 하시잖아요.

그런데 세대주의에서는 1장에서 3장까지는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4장 이후는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말이 맞는가요?

예수님 말씀이 맞는 말인가요?

누구 말을 들어야 할까요?

여러분이 판단해 보세요.

 

세대주의에서 왜? 이런 해석을 하는가 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세대주의 해석으로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는 어떤 목사님은 하늘나라 하고 천국이 다르다고 해요.

문자로 보니까 다르다고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와 천국은 동의어에요.

같은 말이에요.

 

스데반은 성령의 충만으로 설교 할 때 구약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에 있었다고 했어요.

유대인도 교회이고 이방인도 교회에요.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다르지 않아요.

다 같은 교회에요.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유대인들은 혈통 중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만 구원 받는다고 해요.

하지만 성경은 혈통 중심의 구원을 말한 적이 없어요.

 

성경은 언약중심의 구원을 말하고 있어요.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은 여기 있는 돌들을 가지고서도 아브라함 후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으로 나누어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아브라함 언약으로 구원을 하셨고 신약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의 언약이 신약에서 실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예수님의 새 언약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은 새 언약을 겨냥하여서 주어진 것이에요.

 

그러므로 세대주의에서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으로 나누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1,2,3장은 이방인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고, 4장 이후는 유대인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구분하는 것도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세대주의의 주장처럼 구원을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나눈다고 한다면 성경 전체를 이러한 시각으로 보아야 해요.

요한계시록만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어요.

모든 성경은 동일한 구원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성경 전체가 언약을 말해주고 있어요.

언약은 창세전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해석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으로 나누지 않아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구원 하나 밖에 없어요.

언약 안에서는 하나의 구원만 있어요.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분 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이방인 구원과 유대인 구원으로 나누는 것은 비 언약적인 것입니다.

 

세대주의의 주장처럼 2장 3장과 4장을 시간적 연속성으로 보아서 이방인 교회가 휴거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럼 이방인 교회에 속한 우리들은 더 이상 요한계시록은 해석할 필요가 없어요.

그건 우리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린 유대인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방인 교회에 속한 자들이에요.

세대주의 논리대로라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웃기는 것이 세대주의 해석을 따르는 분들이 요한계시록에 대하여 더 열을 올려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

4장 이후는 이방인 교회는 휴거 하고서 세상에 없다면서요?

4장 이후는 유대인에게 주신 말씀이라면서요?

 

그런데 뭘 베리칩이 666이니 받으면 안 된다고 합니까?

666은 13장에 나오잖아요.

4장 이후는 유대인에게 주신 말씀이라면서요.

 

설령 베리칩을 666이라고 합시다.

그럼 유대인들에게 베리칩이 666이니 받지 맙시다 라고 하여야 해요.

이건 우리가 싸울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데 666 가지고 싸우고 있거든요.

 

베리칩이 666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대 부분 세대주의 해석을 따르는 분들이에요.

세대주의 논리에 따르자면 13장에 나오는 666은 이방인 교회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런데 왜? 그걸 가지고 싸웁니까?

유대인들에게 싸우라고 주어야지요.

 

정작 유대인들은 요한계시록을 신경 쓰지도 않고 있어요.

왜? 4장 이후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방인 교회에 속한 세대주의를 따르는 분들이 종말이 어떻고 7년 대 환란이 어떻고 소리친단 말입니까?

 

세대주의 논리대로라고 하면 요한계시록 4장 이후는 한국교회에서 설교 할 필요가 없어요.

왜냐하면! 한국교회는 유대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교회에 속한 한국교회는 3장에 휴거하고 없어요.

그러므로 4장 이후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해괴하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지요.

억지 논리인 것 같지요.

결국 세대주의는 스스로 논리적 모순에 빠지고 만 겁니다.

 

우리도 이 부분이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의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이건 자기 신앙이 아니고 남의 신앙을 구경하는 것이 되고 말아요.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유대인 구원과 이방인 구원이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으면 어째서 같은지 증거를 대시고!

다르면 어째서 다른지 증거를 대셔야 해요.

누가 그러는 데는 소용없어요.

누가 그러더라는 것은 누구라는 그 사람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에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신앙입니다.

남이 어떻다! 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나는 이렇다! 를 내어 놓으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더냐?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이야기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나 선지자로 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제 제자들이 그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알아진 것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물음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십시요.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합니까?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는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요?

스스로 답을 하셔야 합니다.

 

남이 말하는 예수는 소용없어요.

나의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남의 신앙고백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이 저에게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 대하여 평을 해 달라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어요.

그럼 제가 그럽니다.

본인이 분별이 안 되면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제 평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본인이 분별하고 판단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고 정낙원 목사가 그러는데 라는 식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면 그것은 정낙원 목사의 판단이지 그 사람의 판단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가 어느 분에 대하여 물으면 답을 해 주지 않습니다.

 

신앙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에요.

본인이 분별하고 판단하지 못한다고 하면 남이 해 주는 판단은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남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분별하고 판단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걸 분별하고 판단 할 때 까지 기다려야지요.

 

성경이 안 깨달아지면 안 깨달아지는 대로 두세요.

억지로 깨닫고자 하지 말고!

읽다가 보면 깨달아질 때가 있어요.

 

쉬운 예로 어린 아이에게 30세 인생을 가르칠 필요가 없어요.

그건 그 아이가 30세가 되면 자연히 알아져요.

7살짜리 아이가 30세 인생을 학습으로 안다고 하여도 7살 수준으로 아는 것이지 30세로 아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다 때가 있어요.

때가 되면 다 알려 주세요.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는 반드시 성경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도록 해 주세요.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때를 따라서 우리를 다스려가기 때문입니다.

 

내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건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인간들의 지혜와 지식으로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함이에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어요.

이는 성령의 감동 없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성경은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절대로 성경을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성경이 깨달아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수준에 맞추어서 성경이 깨달아지게 해 주세요.

우리가 자식 공부 시키듯이 성령께서 그 때 그 때 알아서 깨닫게 해 주세요.

그러니 난 성경 모르는데 라고 걱정하거나 염려해 하지 마세요.

 

부모가 알아서 때를 따라서 유치원에 보내고 초등학교에 보내고 대학을 보내세요.

6살짜리를 대학에 보내지 않고,

20살짜리를 유치원에 보내지도 않아요.

부모가 알아서 다 맞게 보내세요.

 

우리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세요.

자기 백성들을 우리가 자식을 키워가듯이 키워가세요.

공중 나는 새를 보고 들에 백합화를 보고 배우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세요.

이걸 믿으십니까?

아니~! 믿어지는가요?

믿어지시면 걱정 하지 마세요.

 

나 성경 모르는데요? 라고 염려하지 마세요.

성경을 알아야 구원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세요.

 

조급하게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다가 이단에 빠져요.

우리 주변에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 이 조급증 때문에 빠졌어요.

택한 백성이라고 한다면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나중에 빠져 나오게 할 것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신앙은 공유할 수가 없고!

형제간에도 공유할 수가 없고!

부부 간에도 공유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서로 성경을 깨닫는 것으로 인하여 다투지 마세요.

한 두번 이야기하고 못 알아들으면 그냥 두시고 기도만 하세요.

긍휼의 마음으로,,,

 

그럼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요한계시록을 말할 때 실재(實在)가 아니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것들을 실재(實在)로 보면 안 된다고 해요.

그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싸한 말인 것 같아도 이것도 모순이에요.

 

상징이 뭔가요?

뭔가를 설명하고자 도입된 것이지요.

분명히 있는 것인데 그걸 은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상징이에요.

 

없는 것은 상징으로 말할 필요가 없어요.

있기 때문에 상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상징으로 이야기 한다는 것은 실재(實在)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실재(實在)합니까?

안 합니까?

실재(實在) 하지요.

 

그럼 묻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천국은 실재(實在)합니까?

안 합니까?

실재(實在)해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천국을 상징으로 말하고 있어요.

 

그럼 또 다시 묻습니다.

상징이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실재(實在)하는 것을 다르게 표현을 하는 것입니까?

실재(實在)하는 것을 다르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요한계시록은 실재(實在)하는 것을 상징이라는 기법으로 다르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상징으로만 해석하면 안 되어요.

 

비록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상징이지만 그 속에 실재(實在)가 담겨져 있어요.

내용이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상징을 통해서 실재(實在)가 주는 그 의미를 역사 속에서 실제(實際)로 경험하게 되고 맛 보게 되어 있어요.

 

역사 속에서 묵시는 모두가 상징에 불과해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4장에서 하나님을 보석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보석인가요?

아니지요?

 

그럼에도 하나님을 보석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보석이 담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 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보석은 상징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보석이라는 상징을 통해서 실재하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상징에 불과하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상징이지만 실재(實在)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상징을 가지고 실재(實在)하는 것을 실제(實際)적 사건으로 접근해 가야한단 말입니다.

 

실재(實在)를 실제(實際)적 사건으로 경험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고 하면!

천국은 실재(實在)하는 곳입니다.

우린 장차 그 실재(實在)적인 천국으로 가요.

환상이 아니고 실제(實際)로 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재(實在)하는 천국을 우리가 역사 속에서 실제(實際)로 맛을 보게 하세요.

어떻게 맛을 보게 하는가 하면 영적으로 맛 보게 하세요.

우린 영적으로 천국을 실제(實際)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재(實在)와 실제(實際)를 이해하세요.

실재(實在)는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말하고!

실제(實際)는 존재하는 그것을 영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말해요.

 

알다시피 요한계시록에서는 실재(實在)하는 천국을 상징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를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에서 상징으로 말하는 실재(實在)인 천국을 역사 속에서는 영적으로 실제(實際)로 맛보고 경험케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상징을 통해서 실재(實在)하는 천국을 보게 되고, 그 실재(實在)하는 천국을 이 세상 속에서는 영적으로 실제(實際)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요한계시록의 아시아 일곱 교회는 사도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본 환상이에요.

 

환상인데 역사 속에서 실재로 과거 일어났고 현재 일어나고 있으며 장차 일어날 일들이에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환상으로 보았지만 실재(實在)로 역사 속에 나타났어요.

그러므로 아사아의 일곱 교회는 영적으로 보면 안 되어요.

실재(實在) 교회 이야기로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실재(實在)가 없는 의미는 말 장난에 불과해요.

의미는 실재(實在)로 바탕으로 할 때 유효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영적 의미만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실재(實在)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징이라는 기법으로 실재(實在)하는 것을 실제(實際)로 느끼라고 주신 말씀이에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다녀왔습니다.

실재(實在)하는 곳을 실제(實際)로 다녀왔어요.

영적 의미로 다녀 온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의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럴 때 동원 되는 것이 상징이고 비유에요.

요한계시록의 내용이 그러해요.

 

요한계시록은 세상에 있는 교회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교회는 영적 의미로 있는 것이 아니고 실재(實在)로 존재하고 있어요.

교회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요?

세상 속에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환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를 위로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을 천상으로 올라오게 하여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있는 교회를 어떻게 위로하고 보호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2장 3장에서 이 땅에 일어날 교회에 대하여 환상으로 보았어요.

하나님은 환상 속에서 보여주신 것이지만 반드시 역사 속에서 일어날 일들이고 속히 될 일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세요.

 

계 4:1절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여준다고 하지요.

이 후(後)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 신약의 전 역사를 말해요.

사도 요한이 이 환상을 보는 그 때로부터 장차 역사 속에 나타날 일들을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교회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그 시대마다 교회가 존속하여야 하잖아요.

그래서 각 시대에 맞는 교회들이 이 세상에 실재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환상을 보는 때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교회사 적으로 보면 초대교회를 상징하는 에베소 교회에 해당이 되어요.

에베소 교회 이후로는 장차 될 일이고, 속히 될 일이고, 마땅히 될 일이에요.

 

될 일이란? 실제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본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역사 속에서 실재(實在)적으로 예언 된 그대로 교회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실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환상 속에서 상징으로 보여주시고 말씀 하신 것들을 역사 속에서는 상징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사건으로 그대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실재(實在)적으로 보아야지 상징으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2장 3장에서 말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실제적으로 세상에 나타났지요.

그럼 4장 이후도 어떤 모습으로든지 나타나겠지요.

 

아니 2장 3장은 실제로 나타났는데!

4장 이후는 영적이다 그러면 안 되지요.

영적이면 다 영적이어야 하고 실재이면 다 실재에야 해요.

될 일이란? 실재란 말이지 영적이란 말이 아니에요.

 

요한계시록은 사건을 말해주고 있어요.

우리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실재(實在)로 사건화 하여서 실제(實際)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상징으로 보지 않고 실재(實在) 역사 속에서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교회사 적으로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에 속한 이야기를 땅에 언어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성경 속에 나타나는 사건들마다 하늘에 속한 이야기와 땅에 속한 이야기 두 가지 이야기가 동시에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그러해요.

하늘에 모습과 땅의 모습 두 가지가 복선(複線)으로 흐르고 있어요.

사건 속에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담겨져 있어요.

육에 속한 것을 가지고 영에 속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요한계시록을 시작 할 때 요한계시록은 시간 순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고 사건 중심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시간의 순서적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역사 속에서 일어날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대하여 2장 3장에서 환상으로 먼저 보여 주셨어요.

그리고는 다른 환상을 4-5장을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걸 “이 일 후에” 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일 후에” 라는 말은 시간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화면으로 바뀌었다는 뜻이에요.

다른 그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지상(地上)에서 고난 받은 교회를 보여주시고는 천상(天上)에 수고를 마치고 안식하는 교회를 보여주신 것은 역사 속에서 수고하는 교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에요.

우리는 천상의 모습 속에서 우리를 보아야 해요.

24 장로가 우리의 모습이에요.

장차 우리가 할 일들을 24장로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마다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들이 있지요.

그 약속들은 모두가 천상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24 장로들이 면류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왜요?

이기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낙심하지 말고 힘 내라고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반드시 이 자리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약속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지금 지옥에 있어요.

환란 가운데 있습니다.

교회마다 이단이 설치고 원수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당한 그 아픔을 그대로 당하고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너희는 나와 함께 고난 중에 있지만 실상은 이긴 자들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긴 자들에게 주겠다고 한 그 약속들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하면서 4장과 5장에서 천상의 모습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일 후에” 가 주는 의미에요.

우리는 지상에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지상에서 싸우고 이긴 자들이 천상에서 누리는 영광을 동시에 보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의 그림을 보고 땅에서 이긴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후에는 저기 가는 것이구나!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힘내자 라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 하여야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땅에 이야기와 하늘에 이야기를 교차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가 힘들지요.

맞아요.

힘들어요.

 

신앙이란 힘든 거에요.

전쟁이란? 피 흘리고 아픔을 당하는 것이에요.

상처 없는 전쟁은 없어요.

 

신앙생활은 죽기 살기로 하는 것이에요.

취미생활 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전쟁을 치르고 온 자들에게 주어지는 유업이지 빈둥거리고 놀다가 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린 지금 전쟁 중에 있어요.

그러나 기억 할 것은 그 전쟁은 이미 이긴 전쟁이에요.

우린 이미 이긴 자에요.

그러니 서로 격려하고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여러 가지 학설에 미혹당하지 말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경을 볼 때마다 성령께서 스승이 되셔서 가르쳐 주옵소서. 남의 눈에 티를 보지 말고 내 눈에 들보를 보게 하여서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을 입은 자로서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말씀을 통하여 위로받게 하시고 현실 속에서 당하는 아픔들을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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