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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15강. 하늘에 열린 문(門) (계 4:1)

by coroa 2020. 10. 11.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5강. 하늘에 열린 문(門) (계 4:1).-

 

-.정낙원 목사

 

 

 

오늘은 하늘에 열린 문(門)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하늘에 문(門)이 열려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가 오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평상시에는 하늘 문이 닫혀 있다는 뜻이겠지요.

 

문(門)이 있다는 것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통제한다는 뜻입니다.

국가와 국가 간에 경계를 정하고 국경에 보초를 세워서 지키게 하는 것은 타국인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고자 함입니다.

 

이 그림은 에덴동산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 바깥으로 좇아내 버립니다.

그리고는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들에게 그 문(門)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담이 쫓겨난 땅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한 번도 에덴동산의 문(門)은 열린 적이 없습니다.

또한 그리로 들어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요한에게 오픈이 되었습니다.

에덴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하늘에 열린 문(門)을 통하여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이건 놀라운 축복입니다.

 

베일에 가려졌던 하늘나라가 드디어 오픈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 요한은 하늘나라 비밀을 맡은 자가 됩니다.

그 비밀은 마땅히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하실 일을 사도 요한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마땅히 될 일을 보고 듣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 공유하고자 편지를 써서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지금 우리가 읽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운행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무엇인가요?

성도의 구원입니다.

심판이 주제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심판 속에서 구원해 주신다고 하는 것이 주제에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구조는 하늘에 모습과 땅에 모습을 교차하여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늘에 모습을 보고서 위로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될 일을 보여주시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성도들은 천국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살아간다는 약속입니다.

그 실상을 4장과 5장에서 24장로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24장로는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24라는 숫자는 구약의 12 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들을 합한 숫자입니다.

그러므로 4장과 5장에 나타나는 24 장로는 구약과 신약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24장로들입니다.

사도 요한이 땅에 있는 24 장로를 대표해서 하늘에 열린 문(門)을 통하여 올라간 것입니다.

하늘은 사도 요한과 같은 성도들에게 오픈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왜? 사도 요한에게 하늘 문(門)을 열고 하늘나라를 공개하셨을까요?

이는 결론을 보여주고 현재를 소망가운데 이기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사정들이 어떠한가요?

모두가 고난 속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빌리면 후욕을 당하고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고 빼앗기고 만물의 찌끼같이 사람들이 구경거리로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 소망을 주시고자 성도들에게 하늘 문(門)을 여시고 구원이 완성 된 천상(天上)에 모습들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조금 흥분 되는 내용입니다.

그 흥분과 설레임이 하나 되어서 맛보고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말씀을 양식이라고 하는 것은 먹고 배부름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사건들을 실제로 경험하라는 뜻입니다.

 

경험이 되는 사람에게는 성경이 자기에게 주어진 약속이라는 것으로 받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들려집니다.

그럴 때 사도 요한이 경험한 오늘 본문 이야기도 자기 것으로 들려지고 맛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듯이 성경의 이야기도 내 것이 되어야 맛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열린 문을 알자면 창세전 언약부터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천상의 모습은 창세전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4장과 5장은 창세전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는 그림이기 때문에 오늘은 만물의 시작과 끝 전부를 훑어야 하니까 조금은 지루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 동안 듣고 또 듣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하여도 복습 한다고 생각하시고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가 되었는지 그 근원부터 탐사해 봅시다.

 

창세전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합니다.

이는 어느 시대이고 항상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때고 항상 계시다는 말은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셔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어떻게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역사 속에서 말이에요.

 

언약을 이루는 차원에서 보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는 말은 그 때마다 언약을 이룰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이룬 언약이 있고,

현재 이루어 가는 언약이 있고,

장차 이루실 언약이 있다는 말입니다.

 

언약이란? 자기 백성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미 이룬 구원이 있고,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이 있고,

장차 이룰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 3 시제(時制)로 말을 합니다.

 

너희가 “구원은 받았느니라” 라고 하면서 "과거(過去) 시제"로 말하고,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고 하면서 "현재(現在) 시제"로 말하고,

너희는 “구원을 이룰 것이라” 고 하면서 "미래(未來) 시제"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건 구원이 3종류라는 말이 아니에요.

구원은 하나에요.

그럼에도 구원을 3 시제로 말하는 것은 구원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관을 가지고 있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3 시제로 말한다고 하여서 구원이 다르다거나 또는 구원이 중간에 취소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모든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세요.

 

하나님은 식언치 않고 거짓말 하시지 않아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구원은 중도에 포기 되거나 취소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에 의하여 취소되지가 않습니다.

 

애초부터 구원은 우리의 조건과 상관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건으로 구원이 취소되는 일도 없습니다.

속된 말로 너 그 따위로 하면 지옥에 가!

그런게 없어요.

 

지옥 갈 놈은 애초부터 지옥 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는 겁니다.

천국가기로 작정이 되었닥 중간에 잘못 하여서 지옥 가는 것은 없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 천국 백성을 찾으로 오신 것이지 지옥 백성을 천국 백성 만들려고 오지시 않았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설령 성경이 잘못하면 구원이 짤릴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가 지식들에게 너희들 말을 안 들으면 죽인다 라고 화를 내는 것과 같아요.

말 안 듣는다고 자식 죽이는 부모는 없어요.

부모와 자식은 법적 관계가 아니고 사랑의 관계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사랑 안에는 잘려 나감이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무사히 그 나라에 까지 안착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대박이고 안 믿어지면 꽝인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3 시제로 이루고 계세요.

과거에 이루셨고, 현재 이루고 계시며, 장차 이루실 것입니다.

과거에는 어떻게 이루셨고,

현재는 어떻게 이루어가고 계시며,

장차는 어떻게 완성 하실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구원이란? 단회적이면서 점진적이에요.

단회적이라 함은 마치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거듭나는 것을 말해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고 우리를 낳아 주신 것을 말해요.

이걸 위로부터 거듭났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세요.

 

점진적이라 함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제부터 어머니의 보호 아래서 자라가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이것을 현재 시제로서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이루어 가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같아요.

그래서 성경은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자들은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셔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걸 장차 이룰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예수님이 하세요.

우린 그냥 예수님이 이루어 가는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시지요.

그럼 성도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사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영생하시는 예수님을 이제와 전에와 장차라는 역사의 시간관으로 존재한다고 말을 하는가요?

이는 역사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생에 관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일을 이미 하셨고, 현재도 하고 계시며, 장차도 하실 것입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말합니다.

 

성도의 구원은 마치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과 같아요.

자동차는 처음에는 형체가 없었어요.

그런데 컨베어 벨트에 틀이 올려지면 그것이 벨트에 이끌려 가면서 완성이 되어져 가요.

컨베어벨트가 자동차에게는 창세전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창세전 언약이라는 컨베어벨트에 올려져 있어요.

그러므로 중간에 포기 되는 것이 없이 반드시 완성품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하신 예수님이 그렇게 이루어가세요.

 

예수님은 태초(太初)에 계셨습니다.

 

태초(太初)란? 세상 바깥을 말합니다.

세상 바깥에 계시던 그 분이 현재라는 역사에 오셨어요.

왜? 오셨는가?

 

이는 현재라는 역사 속에서 창세전에 하셨던 언약을 성취하는 일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창세전 언약을 전에도 하셨고, 이제도 하시고 계시며, 장차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라는 3직을 감당하십니다.

 

과거에는 선지자로 일을 하셨고,

지금은 제사장으로 일을 하시고 계시며,

장차는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물론 어느 때이고 3 직을 감당하시고 계세요.

다만 시간적인 의미로서 구분을 한다면 3 시제로서 3직을 감당한드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을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사시는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해요.

예수님을 현재성으로 말하는 것은 항상 존재하시는 영생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제도 계시고” 라는 현재 시제를 먼저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오늘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구원도 현재 누리는 것이란 뜻입니다.

구원은 현재 누리는 것이지 장차 누릴 것이 아니에요.

또한 과거에 누린 것도 아니에요.

구원은 지금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동일해요.

신앙생활은 지금 하는 것이에요.

옛날에 잘 했는데는 소용없어요.

나중에 잘 할게요 도 소용없어요.

지금 잘 하셔야 해요.

 

성도는 오늘날로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날이란 묵시에 속한 날을 말해요.

성도는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사는 자들입니다.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산다는 것은 세상 가치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가치로 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는 떡이지만 하늘에 가치는 언약이에요.

이걸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걸 말씀해 주셨어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함은 언약의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언약의 후손이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창세전 언약을 담고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과 같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애굽이에요.

 

이스라엘은 언약의 후손임에도 애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애굽적 사고로 살았어요.

애굽적 사고란? 떡에 가치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서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려내고 출애굽을 시킵니다.

 

출애굽 한 자들은 모두가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난 것은 소용이 없어요.

왜냐하면!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산다는 것을 아는 자가 진정한 이스라엘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주어진 것이에요.

이렇게 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구원이 주어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알려 주십니다.

이를 하늘에서 만나를 주심으로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는 하늘로서 주어진 언약이 너희를 살게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만나는 떡이 아니에요.

만나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양식이에요.

여기서 말하는 양식이란? 우리 육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이끄는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 하신 땅은 가나안입니다.

그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만나로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만나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그치지요.

이는 만나가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그 땅까지 인도하는 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자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해 보세요.

우리도 언약의 후손입니다.

우리 안에는 창세전 언약이 “메모리 칩” 처럼 내장 되어 있어요.

그 언약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이끌어요.

만나가 가나안으로 이끌었듯이, 언약이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어요.

우리가 지금 여기까지 이끌려 온 것도 창세전 언약이 우리를 이끌고 왔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모세를 애굽에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보내어 구원을 해냈어요.

모세는 언약 백성들을 출애굽을 시키고 가나안까지 인도했어요.

여호수아가 가나안까지 인도 했지만 여호수아는 모세의 몸 종이므로 모세가 인도한 것과 마찬가지에요.

 

이게 신약으로 오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언약하신 백성들을 구원하고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처럼 우리를 바로 왕이라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출애굽을 시켜주셨어요.

그리고는 성령이 여호수아처럼 우리를 약속의 땅인 천국으로 인도하세요.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 두 지도자가 있는데 이것은 신약에서 두 보혜사로 나타납니다.

육체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도 우리의 보혜사이고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신 분도 보혜사에요.

 

여호수아를 모세의 몸종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말하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몸에서 나왔다는 의미에요.

그러니까 모세가 육체로 오신 예수라고 한다면 여호수아는 성령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출애굽을 시키면 성령이 천국으로 인도 하세요.

영적으로 그렇다는 뜻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 하세요.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보아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간섭하셨듯이 지금도 우리를 간섭하고 계세요.

어디로 간섭을 하시느냐 하면 천국에 들어가도록 간섭을 하세요.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사도 요한이 하늘 문을 통하여서 하늘나라에 입성하는 것은 곧 우리가 하늘나라 입성하는 것의 모형이에요.

사도 요한 속에 우리도 포함 되어 있어요.

사도 요한은 지금 우리를 대표해서 천국에 입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하늘로 이끌어 올린 것은 언약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언약의 후손인 우리도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하셨던 것처럼 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사도 요한이 경험한 것을 내가 한 것처럼 믿어지게 해 주세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사도 요한이 맛 본 그 경험들을 맛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경험 되어져야 해요.

이걸 경험하는 사람이 성도에요.

성경은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에요.

사실이고 실제에요.

 

어떤 사람은 성경을 소설로 읽어 추상으로 알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사실로 보고 실제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소설로 읽는 사람은 육에 속한 교인이고,

성경을 자신의 이야기로 실제로 여기는 사람은 영에 속한 성도에요.

 

교인과 성도는 달라요.

교인은 육으로 난 이스마엘과 같고,

성도는 영으로 난 이삭과 같아요.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는 유업을 주지 않았어요.

이삭에게만 주었어요.

우리가 받을 유업은 천국이에요.

 

그러므로 천국은 이삭처럼 영으로 낳아진 자들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으로 낳아진 자들이 바로 사도 요한과 같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에 열린 문을 통하여 하늘나라로 이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영으로 난 자들은 반드시 하늘로 이끌어 주세요.

즉 사도 요한이 본 것을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성도들은 요한계시록의 이야기들을 상징으로만 여기지 않고 실제로 일어날 사건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 할 때가 가장 신이 나요.

왜냐하면! 그 창세전 언약 속에서 나의 구원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건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맛 보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연애편지에요.

성경을 자기의 연애편지로 받는 사람들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설레임을 맛보게 되어 있어요.

이걸 성경이 꿀 송이처럼 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환상들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먼저 지상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장 3장의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입니다.

요한이 본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모두가 전쟁을 하고 있었어요.

 

어떤 전쟁인가 하면 복음 때문에 핍박당하는 전쟁이에요.

이름하여 영적인 전쟁인 것입니다.

교회마다 거짓 선지자들이 들끓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교회마다 그 상황에 맞는 주(主)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거짓 세력들과 싸우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언약적인 의미에서 주(主)란? 대신 싸워 주시고 책임져 주시는 분을 말해요.

 

교회는 예수님의 간섭 아래서 전쟁을 치릅니다.

그리고 이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마다 이기는 자들에게 천상에 것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이긴 자들이 천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를 4장과 5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4장과 5장의 내용은 전쟁을 하고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위로하기 위하여 보여 주신 장면입니다.

 

봐라!

너희들의 모습이 이러하다!

너희는 비 진리와 싸우지만 필연적으로 이기게 되어 있다!

이는 나 예수가 이긴 자로서 너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자이다!

살아서 이렇게 천상에서 만물을 다스리고 있지 않느냐!

내가 만왕의 왕으로서 너희들을 보호하고 있으니 낙심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장 5장은 사도 요한에게 교회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에 보면 이기게 되어 있어요.

 

성도의 운명은 마치 드라마의 주인공과 같아요.

드라마는 주인공이 죽으면 안 되어요.

주인공은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에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쓰시고자 하는 드라마는 창세전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이라는 드라마의 시나리오는 주인공이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면서 결국에는 이긴 자들이 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는 반드시 이기고 요한계시록의 4장과 5장의 그 자리로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세요.

그 머리 되신 예수님이 교회가 겪어야 할 일을 먼저 겪으셨어요.

그리고 이기셨습니다.

그럼 머리에 붙은 몸은 자연히 머리에 따라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그의 종 요한에게 미리 알려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비밀(秘密)을 보았어요.

그 사실을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십니까?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계획이 된 일이에요.

 

그럼 창세전 언약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성취가 되는지 그 근원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하신 그 언약을 위하여 만물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성경은 창조를 말 할 때 언약을 성취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창조는 뭘 만드는 것으로 이해를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걸 창세기 1장에서는 갈라내고 채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어요.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이 됩니다.

이를 우리는 성부(聖父) 하나님과 성자(聖子)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만물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말씀이신 하나님입니다.

 

왜? 창조를 예수님이 하셨다고 할까요?

이는 만물의 창조 목적이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이루실 분이 예수님이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만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도 증거해 주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그에게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인가요?

말씀이신 하나님입니다.

즉 예수님이세요.

 

그가 왜? 만물을 창조 했다고 합니까?

그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만물의 존재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만물의 존재 목적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만물을 가지고 무언가 하실 일이 있어서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오셨나요?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0-14=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가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이는 만물의 주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이 그 주인을 몰라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물이란? 인간들을 지칭합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예수님이 자기를 낳아준 주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소경인 것입니다.

왜? 몰라볼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가 자기 주인을 몰라보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죄를 없이 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두의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창세로부터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의 죄만 사해 주세요.

 

광의적인 의미에서는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기 때문에 온 세상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이 맞아요.

하지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자기백성들만 믿어요.

예수님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믿을 수 있어요.

그러므로 구원은 자기 백성들만 받게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을 이 세상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보내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사함을 이루어 주신 것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만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만 성령을 보내서 믿어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이 자기의 주인임을 압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죄 사함을 받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나의 원함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내 열심과 노력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내 정성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는,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지금 우리가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를 빋은 것입니다.

이것 이상 더 큰 복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복으로 여기지 않아요.

세상의 가치의 복을 좇고자 해요.

 

그러니 예수를 믿어도 하나 기쁘지 않은 겁니다.

머리로는 천국 천국 하는데 몸은 세상으로 세상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신머리를 환기 시키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고난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안하니까 하나님께서 강제 집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아들에게 징계한다고 합니다.

우린 징계를 당하고 나서야 돌이켜요.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보세요.

전부 고난 가운데 있어요.

그래서 신앙의 결국인 천국을 보여 주시고는 하늘에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아시아의 일곱 교회 대표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의 처지가 어떤가요?

밧모섬에 유배당하여서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어요.

성도는 영적으로 밧모섬에 유배당한 신세에요.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던져 놓고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로 이끄셔서 이기고 벗어난 자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영광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천상에 펼쳐지는 모습을 보고서 황홀했어요.

얼마나 기쁜지 천사들에게 절을 하고자 하였다니까요?

 

그러니 오늘 우리는 사도 요한이 교회의 대표로서 성령에 이끌려서 하늘에 올라가서 보고 온 그 세계를 통하여서 소망을 삼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주신 목적이에요.

 

우린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이 하나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우리 자신을 이입시켜서 보세요.

그러면 엄청난 희열을 느끼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중요하니 지금까지 한 말을 간단하게 다시 정리하고 갑시다.

 

예수님이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 만물은 곧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왜? 만드셨는가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어떤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까?

이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물의 주라고 고백을 합니까?

죄 사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누가 죄사함을 입었습니까?

창세로부터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의 호적에 올려진 자들입니다.

 

언제 호적에 올려졌습니까?

창세전입니다.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이걸 야곱 식으로 말하면 어미 태로부터 나오기 전에 이미 택정함을 입은 것입니다.

야곱은 만들어지기 전에 사랑을 입기로 작정이 되었습니다.

이 작정을 입고 어미 태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누가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창세로부터 사랑 입기로 작정이 된 자이기 때문에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사랑이 먼저입니까?

약속이 먼저입니까?

약속이 먼저입니다.

 

약속이 야곱을 주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을 일컬어 묵시가 역사를 주도한다고 합니다.

야곱은 우리의 모습이에요.

 

이렇게 되면 야곱과 같은 성도는 시간을 꺼꾸러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창세전이라는 묵시에서 나온 역사 속에서 창세전 언약에 이끌려 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창세전 언약에 조정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야곱이 사랑 받기로 작정이 되고 태어나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간섭을 당하는 인생을 살았던 것과 같은 인생을 성도들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역순(逆順)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비록 역사라는 세상에 살지만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태초로 돌아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합니다.

영화를 찍기 전에 먼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영화는 시나리오를 사건으로 담아 놓은 활동하는 그림입니다.

 

그럼 찍어 놓은 영화를 꺼꾸러 돌리면 어찌 될까요?

시나리오 속으로 회귀하겠지요.

책 하나만 남겠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천상에 보니까 책 하나만 달랑 있는 것입니다.

책을 펼치면 역사가 나오고!

책을 닫으면 역사가 책 속으로 들어가요.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마지막 때에 이 세상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처럼 세상이 책 속으로 말려들어가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나요.

 

앞서서 만물이 어디서 나왔다고 했나요?

창세전 언약에서 나왔다고 하였지요.

만물은 원래 창세전 언약 안에 있었어요.

 

창세전이란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을 말합니다.

그럼 만물이 창조가 되기 이전에는 만물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언약 속에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언약이 먼저입니까?

만물이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언약 속에 있던 만물을 역사라는 공간을 만들고 사건화 시키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자 언약 속에 존재하던 만물들이 역사라는 공간 속에서 실제적으로 사건화 되어서 나타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걸 창조라고 합니다.

 

그럼 또 묻습니다.

창조가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입니까?

언약이 먼저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창조를 말 할 때 원인에 의한 결과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말미암아” 라고 합니다.

이게 우리의 구원에 그대로 도입이 되어서 나타나요.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있기 전에 그리스도가 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낳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난다고 하지요.

태어난다는 말은 태(胎)에서 나온다는 말이에요.

태(胎)란? 생명을 담고 있는 주머니에요.

 

생명 주머니가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모든 생명을 담고 있는 태(胎)에요.

우리는 예수라는 생명의 주머니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이걸 예수가 낳았다고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은 것도 어머니가 물과 피를 쏟고 아이를 낳은 것과 같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낳았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하심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롬 11: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는 주가 시작을 하셨고,

주가 이루어가고 계시고,

주가 성취하신다는 말이에요.

 

렘 33장 2절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예수그리스도가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 하면 자기 백성을 낳기 위해서에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를 낳으셨어요.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자기 안에 있는 수많은 밀알을 낳기 위하여 자기를 죽이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한 알이 밀알이 되어서 죽으셨어요.

그러자 그 속에서 수많은 밀알들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이제 쏟아진 밀알 들을 찾고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이 낳아준 자들을 찾아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시는 이유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어서 낳은 자기 백성들을 찾고자 하심이에요.

 

이렇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기로 작정이 된 상태에서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되어서 이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죄 아래 나서 죄 아래 가두어진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자를 예수님이 빼내 주세요.

 

왜? 죄 아래 먼저 가두고 빼내주시는가요?

이는 그 안에 은혜를 담기 위함이에요.

쉬운 말로 죽었던 자를 살려 주어야 주님 고맙습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전 언약의 궁극적인 목적이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고 갑시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1:4-7=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어떤가 하면 흠 있는 모습입니다.

즉 죄인의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피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자들은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 안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 언약이 역사 속에서는 사건화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은 애굽이라는 나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장자들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권세로부터 건짐 받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이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예수님은 초림 때 오셔서 영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권세로부터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옛 언약에서 새 언약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잘 보세요.

구약의 출애굽은 육적 출애굽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출애굽은 영적 출애굽입니다.

 

구약에서 구원은 실제적으로 애굽이라는 국가로부터 탈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의 구원은 영적으로 죄와 사망이라는 마귀의 권세로부터 탈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구원과 같이 육적인 로마라는 나라로부터 구원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오면 로마라는 국가로부터 빼내 주실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로부터 구출해 주신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구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의 나라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재림 때에는 두 가지가 다 나타납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실제 세상 나라로부터 빼내심을 입고, 또한 거짓 종교인 음녀로부터 빼내심을 입게 됩니다.

영육간에 구원을 받아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사건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요한계시록은 영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적 해석과 육적 해석을 동시에 하셔야 해요.

비록 상징이라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상징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장차 될 일이니까 속단하지 말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고 조심스럽게 지켜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은 육적인 것이었고!

초림의 출애굽은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에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영적으로는 음녀로부터 출애굽하는 것이고 육적으로는 이 세상으로부터 출애굽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사건들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동시에 들어가 있어요.

육적 사건 안에 영적 사건도 함께 담아 놓았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육적 사건을 통해서 영적 사건을 읽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사건화 되어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내용이 역사 속에서 사건화 되어서 나타날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될 일이고!

속히 될 일이고!

반드시 될 일이고!

마땅히 될 일입니다.

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은 2장 3장에서 신약의 전 역사를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이건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쓸 당시로서는 장차 일어날 예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 하신 후에 요한계시록 2장 3장에서 예언하셨던 그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이 역사 속에서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땅에서 일어날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에 환상을 보여주시고자 땅에 있는 요한을 하늘로 이끌어 올리십니다.

그것을 하늘 문(門)을 통하여서 이리 올라오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요한계시록은 두 그림이 함께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2장 3장에서는 땅에 그림을 보여주고 있고!

4장 5장에서는 하늘에 그림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그림과 땅에 그림이 겹쳐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뭔가요?

천상(天上)에서 구원 얻은 성도들이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미하는 것이지요.

그럼 요한계시록 4장 5장은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된 그림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들이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창세전에 언약하신 것이 완성 된 모습들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4장 5장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로와 감동과 기쁨과 감사케 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자 지금까지 진부하게 이 세상이 어떻게 왜? 창조가 되었는지 그 배경 설명을 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믿어지면 엄청난 희열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모든 성경이 자기 이야기로 들려질 것이고 그럼 성경 이야기가 꿀 송이처럼 달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시간마다 창세전 언약을 이야기하는 것은 창세전 언약이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이 근본이 부실하면 무너져요.

집을 지을 때 터를 깊이 파고 주초를 든든하게 하는 것은 이 근본 위에 집을 지어야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항상 창세전 언약이라는 이 근본에서부터 출발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창세전 언약을 가지고 일을 하세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시던 하나님이 왜?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이는 창세전 언약에 기록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을 가지고 거기에 녹명된 자들을 찾아가서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걸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이 땅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말은 지금도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시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창세전 언약이라는 복음을 증거하여야 해요.

그럼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그 복음을 듣고 구원 얻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에는 창세전 언약을 몰랐어요.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았어요.

땅 강아지 마냥 흙만 파 먹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리 귀에 창세전 언약이 들려지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들려지자 우리의 시선이 이 세상 바깥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너머에 있는 태초라는 그 세계로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대표로 하여서 보여 주셨어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종말에 심판 모습을 양과 염소를 심판하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은 천국으로 염소는 지옥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국은 예수님께서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신 하늘나라는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보여 주신 나라가 바로 우리가 가야할 나라인 것입니다.

그럼 사도 요한이 어떻게 그 나라를 가게 되었는지 봅시다.

사도 요한은 지금 밧모섬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門)을 여시고 요한을 이끌어 올리십니다.

 

그럼 요한이 통과한 그 문(門)이 어떤 문(門)이지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1절을 봅시다.

 

계 4:1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요한은 성령에 이끌려 하늘에 열린 문(門)을 통하여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에 문(門)이 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경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분명히 경계가 있어요.

 

창세기 1장을 봅시다.

 

창 1:6-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하늘 위와 하늘 아래를 나누실 때 그 중간에 궁창을 만드셨어요.

그래서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궁창 위는 하늘나라이고 궁창 아래는 세상 나라에요.

그러니까 궁창이 하늘과 땅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궁창을 하늘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궁창이 문(門)과 같은 것입니다.

궁창이 찢어지면 문(門)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궁창이 찢어지는 것은 하늘이 찢어지는 것과 같아요.

 

이 하늘이라는 궁창을 누가 찢고 문(門)을 내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셨어요.

예수님의 몸이 찢어진 것은 하늘이라는 궁창이 찢어진 것과 같아요.

이건 잠시 뒤에 살펴봅시다.

 

문(門)이란?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에요.

문(門) 안과 문(門) 밖은 다른 세상이에요.

문(門) 안을 천국이라고 하면, 문(門) 밖은 지옥이에요.

 

이 그림은 에덴동산의 그림과 같습니다.

아담이 범죄 하자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쫓아내시고 범죄 한 아담이 에덴동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한 것과 같습니다.

이게 문(門)이에요.

 

왜? 문(門)을 만들었을까요?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만 들어 갈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 문(門)으로 들어갈 수 있나요?

사도 요한과 같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이 사실을 구약에서는 야곱을 통해서 예표(豫表)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 구약 마당으로 가서 하늘 문(門)이 언제 어떻게 열렸는지를 살펴봅시다.

 

창 28장입니다.

 

창 28:10-22=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 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 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고 집에서 쫓겨납니다.

이건 버림당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버림 당한 야곱을 하나님이 찾아오십니다.

 

야곱이 집을 떠나 벧엘 광야에서 한 돌을 취하여 베개를 하고 잠을 잡니다.

그리곤 꿈을 꿉니다.

꿈에 보니까 사닥다리 하나가 땅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어요.

사닥다리가 궁창을 확 찢고 하늘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 꼭대기 끝을 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닥다리는 하늘나라로 연결하는 문(門)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사닥다리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내가 바로 너희 조상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사닥다리로 하늘에 올라갔고, 하나님을 보게 되었어요.

그래서 야곱이 잠을 깨고 난 후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합니다.

벧엘이란? 하늘에 문(門)이란 뜻입니다.

 

원래 그 동네 이름은 루스였어요.

루스라는 말은 놀이터라는 뜻이에요.

놀이터가 야곱의 사닥다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전(殿)이 되고 하늘에 문(門)이 된 것입니다.

 

그럼 이것을 신약적 의미로 살펴봅시다.

구약은 장차 신약에서 일어날 것은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므로 야곱이 보았던 하늘에 열린 문(門)을 신약적으로 해석을 하여야겠지요.

 

신약적으로 해석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 이야기로 풀어 본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므로 야곱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야곱의 벧엘 사건을 어떤 식으로 그려내셨는지를 봅시다.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마 3:13-17=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 일을 시작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첫 시작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세례 요한은 예수님 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습니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엄마 뱃속에서 벌써 인사를 나눈 사이입니다.

세례 요한은 엄마 뱃속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30년 동안 둘 사이에 이렇다 할 만한 일이 없었어요.

성경 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엄마 뱃속에서 만나고 난 후 이제 처음 만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묵시 안에서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역사 속에서는 처음 만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창세전 언약 안에서는 예수님을 만났지만 역사 속에서는 처음으로 만나는 것과 같아요.

 

역사 속에서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봅시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찾아 가십니다.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이 거부합니다.

 

거부하는 이유는 예수님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인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옳지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라고 하면서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네가 나에게 세례를 주어야 하나님의 의(義)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나를 보낸 것은 너에게 세례를 받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고 하니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죄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창세전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세례란? 세례를 받는 자가 세례를 주는 자에게 연합이 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로 연합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인이 죄인에게 연합하는 것을 말해요.

이렇게 되면 죄 없는 예수가 세례 요한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하나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됩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례 요한과 같은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저희 죄에서 구원을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것으로 하십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자기 백성들의 죄를 예수그리스도가 대신 짊어지는 것으로 언약을 세우셨어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하나님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의인 되는 걸 원치 않아요.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어야 해요.

우리가 스스로 의인이 되면 천국에 가서 잘난 척 꼴값을 떨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잘난 척 꼴값 떠는 것을 보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의인이 되는 일을 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어야 해요.

그래야 천국에서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됩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세례 요한의 죄를 대신 짊어지라는 뜻으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알다시피 세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을 대신 하여 죽는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면 세례 요한은 이제부터 예수 안에서는 죄가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의인이 되면 이제 천국에 갈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는 사건을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합니다.

 

잘 보세요.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올라오시자 하늘에 열리지요.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하늘이 찢어지고 길이 하나 생겼다는 말이에요.

 

세례를 무엇이라고 했나요?

죽음이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늘이 찢어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으로 하늘을 확 찢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가는 문(門)을 하나 내신 것입니다.

이게 십자가에서 일어났어요.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곧 하늘에 문(門)이 열린다는 뜻이에요.

 

하늘에 문(門)이 어떻게 열려집니까?

이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실 때 열립니다.

그래서 야곱이 광야에서 한 돌을 취하여 잠을 잘 때 사닥다리가 땅 위 서서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잘 보세요.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고 땅에서 올라갔어요.

이것은 곧 천국의 문(門)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서 열려진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고 난 후에 광야에서 한 돌을 베개하고 잘 때에 사닥다리로 하여금 하늘에 문(門)이 열리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상징해요.

그럼 야곱의 사닥다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잠을 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구요.

그러니까 지금 야곱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자 하늘에 문(門)이 열리고 그 사닥다리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천국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성소의 휘장을 찢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내셨다고 합니다.

 

길이란? 문(門)을 말해요.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의 피로 성소에 들어갈 길이 생겼다고 하지요.

그 길은 예수님이 자기 육체로 열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하늘로 가는 문(門)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성막에 보면 뜰과 성소와 지성소가 있어요.

뜰은 세상을 말하고,

성소는 교회를 말하고,

지성소는 천국을 말해요.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성소란 지성소를 말해요.

 

우리는 뜰과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소라는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교회는 예수의 피를 힘입고 지성소로 들어가게 하는 곳이에요.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찢어졌어요.

이는 예수의 피로 교회 안에 들어온 자들에게는 하늘 문(門)이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예수의 피로 하늘을 들락날락 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늘을 오르락내리락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실제로 나타났어요.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지요.

그리고는 땅이 진동을 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지요.

이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가 깨어진 것을 말합니다.

 

사망 권세가 깨어지니까 무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무덤이 열리자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광의적으로는 모든 성도가 일어나는 것을 예표(豫表)하지만 실제 적용에서는 구약의 성도들을 말해요.

 

구약에는 모든 성도들이 죽으면 열조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열조(烈祖)란? 조상을 말해요.

구약 이스라엘의 조상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 살면서 값을 주고 산 것이 딱 하나 있어요.

그것이 막벨라 굴이에요.

그 굴을 무덤으로 삼았어요.

그래서 자신도 그 무덤에 들어갔고 그 후손도 그리로 들어갔어요.

죽으면 열조로 돌아간다는 말은 아브라함 품으로 간다는 뜻이에요.

 

이걸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 하셨어요.

 

누가복음 16장입니다.

 

눅 16:19-25=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부자와 나사로가 죽자 어디로 갑니까?

아브라함 품으로 가지요.

이것은 구약의 성도들이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산 그 무덤으로 들어간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면서 그 무덤 문(門)을 여신 겁니다.

그러자 언약의 후손들이 다 무덤을 열고 나와서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성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거룩한 성이란? 하늘나라를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셔서는 구약의 성도들을 데리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이제 재림 하시면 신약의 성도들을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럼 신약의 성도들은 어디에 있나요?

교회에 있어요.

교회는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곳입니다.

 

마태복음 27장을 봅시다.

 

마 27:3-8=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버립니다.

그리고는 양심의 가책을 박고 그 예수님의 핏값을 성전에 던집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하나 삽니다.

그 밭 이름을 피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밭으로 나그네들의 무덤을 삼아 버립니다.

 

누가 나그네인가?

성도들이 나그네에요.

성경은 성도들을 일컬어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핏값으로 이 땅에 외국인과 나그네들이 쉴 곳을 하나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이 교회에요.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천국백성들이 안식하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신약에서 예수님의 핏값으로 산 교회는 구약의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산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구속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들에게 하늘 문(門)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이 나다니엘과 니고데모에게 알려 주셨어요.

 

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나다니엘에게 야곱의 사닥다리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야곱의 사닥다리로 오르락내리락 했어요.

그런데 신약에서는 인자 위로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니고데모에게는 인자가 광야의 뱀처럼 높이 들리면 자기 백성들을 하늘로 이끈다고 하셨어요.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늘에 문(門)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하늘에 문(門)이 열렸어요.

 

하늘에 문(門)은 예수님이 열어 놓으셨어요.

그래서 하늘에 문(門)은 이미 열려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늘에 문(門)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이긴 자들에게 열려져 있어요.

 

열린 문(門)이란? 장차 열려질 문(門)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문(門)이라는 뜻입니다.

 

어째서 열려 있는 문(門)이라고 합니까?

이는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그 문(門)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어떻게 들어가느냐?

그 피를 앞세우고 들어갑니다.

이걸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들어간다고 하셨지요.

이 말은 천국은 자기 백성들에게 열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천국은 자기 백성들에게 침노해 왔습니다.

 

천국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알아야 해요.

현재 천국이 있고,

미래 천국이 있습니다.

현재 천국은 영적인 것으로서 예수그리스도 안이 천국이에요.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자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국 안에 있습니다.

 

지금 방영이 되는 “왕의 얼굴”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 임금이 한양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파천(播遷)을 합니다.

이 때 모든 신료들이 다 따라 갑니다.

그리곤 의주에서 집무를 봅니다.

의주가 곧 도성(都城)이 되는 것입니다.

 

파천(播遷)이란? 뿌리를 옮긴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임금이 국가의 뿌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움직이는 것은 곧 국가가 움직이는 것이에요.

그럼 임금이 있는 그곳이 곧 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이에요.

그럼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천국이 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실제로는 천국에 계시지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성도들 안에 계세요.

 

요한복음 14장을 봅시다.

 

요 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오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분명이 성령이 오셨어요.

그런데 내가 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동등하게 말씀하셨어요.

 

이는 성령과 예수님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성령의 능력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동등한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성도는 성전이 되었어요.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는 집이에요.

하나님이 거하는 곳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미 천국 안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광야에서 사닥다리로 하늘 문(門)을 열고서는 그 곳을 벧엘이라고 하였지요.

 

벧엘이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첫째는, 하나님의 전(殿)이라고 하고,

둘째는, 하늘에 문(門)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예수님에게 적용이 되어요.

예수님은 스스로를 성전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하늘에 문(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양의 우리의 문(門)이라고 하셨어요.

양의 우리는 천국을 말해요.

그런데 양들이 들어가는 그 천국이라는 문(門)이 예수님이세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예수가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께 나아가요.

이걸 히브리서 10장에서는 그 피를 앞세우고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담력이 생겨요.

왜냐하면! 성령은 아들에 영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에 영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어 있어요.

그것도 담대히,,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아버지의 맞아들 에서로소이다 라고 당당하게 나아갔던 것처럼 나아가게 되어요.

야곱은 장자의 옷을 입고 나아갔어요.

 

우리도 예수라는 장자의 옷을 입고 나아가요.

그래서 성도를 양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양자란 원래는 아들이 아닌데 아들로 인정해 주는 것을 말해요.

우린 원래 아들이 아니에요.

그런데 예수님 때문에 아들로 여기심을 입게 되었어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라고 성령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내 주신 성령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의 관계에요.

언제든지 교제 할 수 있는 문(門)이 열려져 있어요.

아무 때도 아버지 하고 나아가면 되어요.

누굴 앞세우고 나아간다고 했나요?

예수 이름에요.

 

“아버지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나아가면 되어요.

주저하지 마세요.

당당하세요.

 

그럼 하나님이 야! 이 놈 보게!

속은 죄인 정낙원인데 겉은 내 아들 예수의 옷을 입고 왔네!

이 놈 참 믿음 좋네!

그러면서 축복을 하세요.

그래 내가 내 아들 예수의 옷을 보고 너를 축복해 준다고 하면서 축복을 해 주세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몸을 밟고 나아가라고 하세요.

예수가 열어놓은 그 문(門)으로 들어가라고 하세요.

그럼 하나님을 만나요.

그것이 창세전 언약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는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도 요한을 하늘에 열린 문(門)을 통하여 올라오게 하신 것은 사도 요한이 예수의 증거와 환란에 동참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의 환란에 동참한 자들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 속에 있는 이긴 자들입니다.

 

누가 이긴 자이냐?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늘에 문(門)은 열려져 있습니다.

 

이제 성령께서 열린 문(門)을 통하여서 하늘에 비밀들을 알게 해 주세요.

그 비밀은 예수처럼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일들이 닥친다 하여도 놀라거나 낙망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열린 문(門)을 통하여서 보니까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나서 만왕의 왕으로 계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앞서서 믿음으로 살다간 믿음에 선진들도 예수님처럼 살아서 왕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그 모습을 보고서 너무도 기뻤어요.

24장로들이 전부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보좌에 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에 비밀을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을 여셔서 하늘에 열린 문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리로 오르락내리락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문(門)으로 들어가며 나아가며 하늘에 신령한 꼴을 얻고 이 세상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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