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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13-2강.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3:14-22)

by coroa 2020. 9. 19.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3-2강.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3:14-22).-

 

-.정낙원 목사

 

 

 

= 2부 =

 

 

이제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덮쳐 오는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에서 찾아보십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이 한 마디도 없어요.

책망만 있어요.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칭찬이 없는 교회에요.

 

다른 교회들은 책망과 칭찬이 함께 주어졌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책망으로 가득해요.

이는 그만큼 타락하였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노아 시대 때처럼 죄악이 관영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럼 주님의 눈에 비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십시다.

 

15-17절입니다.

 

15-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예수님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노니” 라는 말은 하나님의 통찰력으로서 우리 속을 다 꿰뚫고 있다는 뜻입니다.

네가 날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다 안다고 합니다.

너희들이 왜? 그런 행위를 하는지 다 안다고 합니다.

속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인가요?

네가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합니다.

차라리 차든지 덥든지 하라고 합니다.

 

이 말을 알려면 라오디게아 지역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는 엄청난 부자 도시인데 한 가지 단점이 물이 부족했어요.

마치 사막 지대에 있는 도시 같았어요.

 

사막은 물이 없으면 죽어요.

지금 라오디게아가 그래요.

자체적인 수자원이 없어서 이웃 도시에서 물을 길어서 사용을 했어요.

 

라오디게아에서 약 16km 떨어진 히에라볼리 라는 곳에 뜨거운 온천수가 나왔어요.

또한 골로새 지역에는 차가운 생수가 나왔어요.

라오디게아는 이 두 도시로부터 물을 공급받고 살았는데 긴 수로(水路)를 따라서 물을 공급해 오다가 보니까 물이 미지근해지는 것입니다.

 

문헌에 보면 물에 석회질이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미지근하면 마시지 못하였다고 해요.

그냥 마시면 구토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끓여서 뜨겁게 마시든지 아니면 차갑게 마시든지 하였다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미지근한 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대번에 알아먹었어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야! 예수님이 지금 우리의 신앙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한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는 소리로 알아들었어요.

 

이건 종말의 교회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신앙생활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동호회 모임처럼 하고 있어요.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이 되고 말았어요.

여가 활동이 되고 말았어요.

적당주의로 하고 있어요.

 

신자도 아니고 불신자도 아니에요.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방인과 다를바가 없어요.

또한 교회 생활하는 것도 불교 신자나 다를 바가 없어요.

그 내용이 같다는 말입니다.

 

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이 17절에 나왔습니다.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였어요.

무역업이 활발하여서 돈이 많이 돌았어요.

그래서 은행업이 가장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시에 돈이 넘쳐났어요.

 

얼마나 돈이 많았는가 하면 AD 17년에 소 아시아 지역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도시마다 초토화가 되었어요.

이 때 모든 도시들은 로마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복구를 하였어요.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로마의 중앙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복구를 하였어요.

이는 그만큼 돈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로마 정부로부터 지원을 거부한 것은 영적으로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는 것과 같아요.

왜? 도움을 거절 합니까?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자체적으로 물을 생산 하지 못했어요.

외부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데 돈이 많다고 하면서 교만했어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물의 공급을 끊으면 목말라 죽으면서도 돈이 있다고 큰 소리치고 산 것입니다.

이게 로마 정부로부터 주어지는 지원을 거절하는 모습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상징하는 종말의 교회들이 그런 겁니다.

하나님이 공급하는 은혜로 살아가는 곳이 교회에요.

그런데 교회가 돈이 차고 넘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산다고 하고 있어요.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돈에 힘으로 살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해 하지 않아요.

어리석은 부자처럼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걸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의지할 것이 있으면 라오디게아처럼 도움을 거부해요.

 

생각해 보세요.

라오디게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어요.

로마가 주인이고 라오디게아는 종이에요.

그런데 종이 주인의 도움을 거절하고 주인의 호의를 업신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입고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난 하나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어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라오디게아의 모습이 곧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고 교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시대마다 시대정신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그 시대마다 세상의 흐름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까 그 시대정신을 비껴가지를 못해요.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시대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신앙의 기본이 다 무너졌어요.

신앙이 편의주의로 빠지고 말았어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교회란 이런 곳이다! 라고 표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날마다 모여서 교제하였어요.

또한 말씀을 들었어요.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찬미하였어요.

 

저는 이걸 신앙의 삼대 요소라고 합니다.

기본과 같은 것입니다.

이 기본 위에 신앙의 내용을 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이 세 가지가 다 무너졌어요.

 

모이는 것도 무너졌고!

말씀 듣는 것도 무너졌고!

기도하는 것도 무너졌어요.

 

이건 마치 엘리야 시대에 단이 무너진 것과 같아요.

엘리야는 무너진 단을 수축하고 언약의 하나님을 구하였어요.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 엘리야의 제단의 제물들을 태우시고 하나님이 흠향하셨어요.

 

모이고 말씀 듣고 기도하는 것은 신앙의 외적 형식이에요.

이 속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내용을 담습니다.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로 모이기를 폐하였어요.

교회의 모임을 우습게 여기기 시작했어요.

이걸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인간들의 행위 차원으로 전락 시켜서 유야무야시켰어요.

그것도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교회에 모이질 않는 겁니다.

우리 생각에는 복음을 아니까 더 모이고 더 감사하고 더 충성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반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복음 알았기 때문에 교회에 갈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등한시 하고 놀러 다녀요.

기도하는 일도 폐하였어요.

봉사와 충성과 헌신하고 연보하는 일도 폐하였어요.

마치 이런 것을 안 하는 것이 복음적으로 산다고 생각을 해요.

 

이게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간에 번지는 풍조에요.

교회 안에 시대정신이 되고 말았어요..

전부 니골라 당의 교훈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이용하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으로 아주 편하게 살고 있어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이미 배부르고 이미 왕노릇 하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있어요.

 

지금은 엘리야처럼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고 외칠 때에요.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에요.

신앙의 형식을 갖추라고 할 때에요.

 

형식을 버리면 내용도 날아가요.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과 같아요.

이를 알고 마귀는 형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하도록 하였어요.

그래서 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서 신앙의 형식들을 버리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담을 내용도 사라진 것입니다.

내용이 사라지니까 이방인과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떠나 감각 없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방탕과 방종과 방임으로 자기를 내어 맡기고 말았어요.

 

이러한 것을 일컬어 예수님은 귀신을 좇아냈더니 그 집이 비어있어서 일곱 귀신을 데리고 와서 처음 형편보다 더 나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을 알고 난 후 더 패역해졌어요.

 

강퍅해졌어요.

차가워졌어요.

심령들은 냉골이에요.

그러다 보니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악독이고 저주에요.

감사와 기쁨과 은혜가 사라졌어요.

 

이건 아니에요.

성도로서의 삶에 자세가 아니에요.

돌이키셔야 해요.

처음 사랑을 회복하셔야 해요.

무너진 믿음의 단을 수축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는가요?

너희들은 자칭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데 내 눈에는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총체적 난국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식으로 말하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다 상하였다고 합니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이상을 보았어요.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소돔과 고모라 같다고 합니다.

목사들은 소돔의 관원 같고 교인들은 고모라 사람들 같다고 합니다.

전부 육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산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성전이 매매하는 강도의 굴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도 성전이 강도의 굴혈이었어요.

성전 안에서 매매했어요.

매매란 파는 자와 사는 자 간의 거래에요.

제사장들은 팔고 백성들은 샀어요.

 

이 시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목사들은 세상에서 잘 된다는 복(福)을 팔고 있고, 교인들은 사고 있어요.

너도 나도 하나님 이름을 빙자하여 거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데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가련하고 헐벗고 가난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있어요.

 

교회는 그 시대의 자화상(自畵像)이에요.

 

시대와 교회는 함께 가요.

그러니까 시대를 보면 교회가 보이고 교회를 보면 시대가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였다는 것은 그 시대도 타락하였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발가벗어 수치를 드러내고 있다면 그 시대의 시대상도 발가벗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라오디게아는 돈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 당시 신전의 신앙들은 음행을 종교의식화 해 놓았어요.

자연히 사회분위기 자체가 사치와 쾌락을 좇아가는 타락 문화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정신이 육체의 향락을 좇는 것이었어요.

 

이건 마치 이 시대 한국의 밤 문화가 같아요.

이 시대 한국의 밤 문화는 향락이에요.

그래서 “불금”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어요.

 

불금이란? 불타는 금요일이라는 말입니다.

뭘 불태웁니까?

육체의 쾌락을 불태우는 거에요.

주 5일 근무를 하면서부터 금요일 밤부터 휴일이 시작이 되니까 불타는 금요일이 된 것입니다.

 

과거 살기 어려울 때는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고 온 밤을 지새웠어요.

쉬는 날 없이 밤새워 땀 흘려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이젠 부요해졌어요.

먹고 살만 하게 되었어요.

 

먹고 살만 하니까 이제는 쾌락으로 온 밤을 지새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 전체가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타락의 극치를 달리고 있잖아요.

이건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에요.

전 세계가 그러해요.

 

온 세계가 향락으로 치닫고 있어요.

TV를 틀면 반라(半裸)의 여자들이 나와서 문화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해서 음란과 타락을 합리화 시켜 놓았어요.

 

이젠 벌거벗고 다니는 것이 수치가 아니에요.

서로 벗기기 경쟁을 합니다.

TV에서는 여자들을 벗기는 경쟁을 하고 있어요.

노래하는 가수도 그렇고 연기하는 배우도 그렇고 가정 주부도 벗어요.

 

성경은 여자를 교회로 표상합니다.

이 시대 여자들의 모습이 곧 교회의 모습인 겁니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발가벗는다는 것은 교회가 수치를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뭐라고 하는가요?

발가벗었다고 하지요.

이는 신앙의 수치를 다 드러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수치를 드러낸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발가벗음을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가렸어요.

그러자 하나님은 그것을 벗겨내고 가죽 옷으로 입혀 주었어요.

 

수치는 가죽옷으로만 가릴 수 있어요.

가죽 옷의 실체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것은 인간의 행함을 말해요.

인간의 행함을 의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교회는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다가 망했어요.

 

예수님은 인간의 행함을 의지하는 구약 교회를 깨트리고 예수님의 행함인 십자가 도를 의지하는 신약의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교회가 지향하던 인간의 행함을 의로 여기던 신앙을 걷어내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의롭게 된다는 신약 교회를 세우셨어요.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수치를 가림 받고서 출발한 신약 교회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어서 다시 구약 교회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예수그리스도의 의가 사라지고 인간의 의가 대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는 인간들의 자랑거리들로 난무해요.

이게 바로 발가벗은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 바깥에서는 여자들이 발가벗고 수치를 드러내고 있고!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는 교회들은 인간들의 가치와 자랑거리들로 예수님의 의를 벗어내고 발가벗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시대의 징조를 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창세전 언약이라는 각본에 따라서 다스려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시려면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셔야만 하는 당위성을 세상이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려가는 감독으로서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을 하여서 역사의 종말을 찍어야 하는 마지막 한 장면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라는 셋트를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야하는 것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징조로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의 징조로 보여주시는 모습이 여자들은 발가벗고 교회는 수치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죽 옷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걷어 내는 것이 발가벗는 것이에요.

교회 안에서 인간들의 행위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 보다 더 가치 있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교회가 발가벗고 수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너희가 어떻게 병들어 있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그 처방전을 주십니다.

어떻게 회복시키는지를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처방전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권면과 책망을 하십니다.

권면과 책망을 한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18-20절입니다.

 

18-19=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합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서 발가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합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고 합니다.

 

눈여겨보아야 하는 대목이 “사서” 라는 말씀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고!

흰 옷을 사서 발가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서 네 꼬라지가 어떤지 올바로 보라고 하십니다.

 

“사서” 라는 말은 값을 치루고 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누구에게 사라고 하는가 하면 “내게서” 라고 합니다.

“내게서 사라” 는 말은 예수님의 것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엄청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라고 하니까 우리가 열심히 해서 취하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정 반대의 말입니다.

 

도리어 우리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것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치장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것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 의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를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가 어떻게 있습니까?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스스로 자긍하고 자고하고 자만하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러고 있습니까?

자기 것으로 그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야 이놈들아! 천국은 너희들 것으로 가는 곳이 아니고 내 것으로 가는 곳이므로 너희들 것을 버리고 내 것을 붙잡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이 말씀을 꺼꾸러 해석하고 있어요.

주님은 우리 것을 버리라고 하는데 목사들은 도리어 더 열심히 하라고 가르칩니다.

더 노력하고 분발하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더욱 더 수치를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인본주의로 가득 채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움을 입어야 하는데 인간의 의로 채워지고 있어요.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 도만 자랑 되어져야 하는데 인간의 열심과 충성이 자랑 되어지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듭니다.

어떤 분이 자기는 여전도 회장을 하고!

전도와 봉사를 얼마나 열심히 했으며!

헌금을 많이 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또한 자기 교회는 누가 나오고!

자기 교회 목사는 박사 학위를 받았고!

자기 교회 교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시대 대부분의 목사나 교인들이 자랑하는 것들입니다.

교회 사이즈를 자랑하고!

신앙 연조를 자랑하고!

교회에 출석하는 유명인들을 자랑해요.

 

이러한 모습이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이에요.

이 시대 교회들이 자랑하는 것은 예수님 앞에서는 배설물과 같아요.

예수님은 이런 것을 원치 않아요.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에요.

교회의 자랑거리는 예수님이어야지 인간의 것이 되면 안 되어요.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그 은혜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사랑을 찬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아들로서만 영광을 받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님의 것이어야지 자기들이 행한 것이 자랑되면 안 되어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기들이 뭔가 한 것을 가지고 거드름을 피우면 안 된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러는 겁니다.

너희들이 뭘 믿고 큰 소리 치느냐?

무슨 근거로 부자라 하고 부요하다고 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느냐?

 

천국은 너희 열심으로 가는 곳이 아니고 내 믿음으로 가는 곳이 아니더냐!

그런데 너희들은 내 믿음은 없고 너희들이 쬐금 한 것을 가지고 자고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을 믿음으로 내어 놓지 말고 내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믿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으로 이해해 봅시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보면 정혼 단계가 있고 결혼 단계가 있습니다.

정혼이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약혼식을 말하는데 이 때 신랑이 신부에게 빙폐물을 줍니다.

그 빙폐물 속에는 옷에서부터 장신구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신랑은 정혼을 하고서 떠나갑니다.

가서 신부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정혼 단계부터 법적으로 실제 부부로 인정을 해요.

만약에 신랑이 정혼을 하고서 떠나갔다고 하여서 외간 남자와 바람을 피우면 돌에 맞아 죽어요.

 

신부는 신랑과 정혼 한 순간 과거의 그 어떤 잘못도 모두가 덮음바 되어요.

신랑은 과거의 잘잘못을 추궁하지 않아요.

과거의 잘잘못을 알고 정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는 신랑이 다시 데리러 올 때까지 신랑이 정혼 때 주고 간 빙폐물로 단장을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면서 신랑 집에서 살아가는 가풍을 배우게 됩니다.

나중에 신랑이 와서 자신이 준 빙페물로 단장을 한 신부를 영원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제 곧 신랑이 오십니다.

그럼 신부인 교회들은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는가 하면 신랑이 준 빙폐물로 준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에게 빙폐물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신랑의 빙페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령이 신부 단장을 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용서라는 빙페물을 주었습니다.

우린 이 땅에서 신랑이 주신 은혜와 긍휼과 용서라는 빙페물로 단장을 하고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신랑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신랑이 준 빙페물을 전부 빼앗겨 버렸습니다.

 

믿음도 팔아먹었고!

소망도 팔아먹었고!

사랑도 팔아먹었습니다.

 

세상 것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꿈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살았습니다.

 

예수라는 신랑이 눈에 안 보이니까 세상과 간음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안에 은혜가 사라지고 긍휼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심령이 강팍해지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따뜻하지 않고 찬 바람이 부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안약을 사서 발라보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물이 귀하여서 도시 자체가 건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눈병이 많았습니다.

눈병이 많다 보니까 치료약이 개발이 되어서 상대적으로 안약이 유명했습니다.

의과 대학에서 나오는 유명한 안약이 있었습니다.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는 것은 병든 눈을 치료하라는 말입니다.

눈이 병들면 분간하지 못합니다.

구덩이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소경을 인도자로 세웁니까?

자신이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소경이면 소경인 지도자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경이라는 말은 단순하게 앞을 못 보는 정도의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근본(根本)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모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앞을 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적인 눈이 떠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이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트집을 잡습니다.

왜? 안식일에 눈을 뜨게 해 주느냐고 따집니다.

 

이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너희의 양이나 소가 구덩이에 빠지면 건져 주지 않느냐.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가 앞을 못 보는데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 라고 하십니다.

 

사울이 다메석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소경이 됩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사경을 헤맵니다.

이 때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에 아나니아가 사울을 안수하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서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사울은 율법 아래 있던 자입니다.

율법을 근거로 예수 믿는 자들은 이단이라고 정죄하고서 죽이고 옥에 가두는 일을 했습니다.

 

이게 소경입니다.

예수를 몰라보는 것이 소경입니다.

사울은 아나니아로부터 안수를 받고 난 후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난 후 즉시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사울은 율법 아래서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율법적으로 자긍하고 자만하고 자고하고 자랑하던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가련하고 헐벗고 벌거벗은 눈 먼 소경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율법으로 치장한 것이 수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 눈이 떠지고 난 후 즉시로 우리의 신앙은 율법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니고 주 예수를 믿음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증거 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지금 라오디게아 교회가 율법 아래 있는 사울과 같습니다.

소경입니다.

무엇을 모르는 소경입니까?

자기를 존재케 해 주는 근본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창조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미가 5장을 봅시다.

 

미 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근본이 상고(上古)이고 태초라고 합니다.

근본이 상고이고 태초라는 말은 원래부터 계시던 분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왜? 태초에 계시던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까?

이는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알려주시고자 하심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자기를 존재케 하는 그 근본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 근본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뭐냐?

근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를 존재케 하는 근본이 무엇인가요?

창세전 언약입니다.

 

우리는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태어났고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 의미는 창세전 언약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시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자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어떻게 의롭다 함을 받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소경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너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어떻게 결론을 맺습니까?

집 짓는 비유로 하셨습니다.

어떤 집이냐 따지지 않고 어디에다가 지었는지를 그 주초(柱礎)를 보시겠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네 근본이 어디인줄 알고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근본이란? 존재케 하는 것입니다.

국가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우리의 신앙이든 이 근본을 허물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우리 되게 하는 것은 근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무를 지탱하는 것은 뿌리라고 합니다.

가지는 뿌리로부터 공급되는 진액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나를 존재케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라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뿌리는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핏값으로 세워졌습니다.

예수의 피가 교회를 존재케 하는 근본입니다.

 

그런데 종말의 교회를 상징하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이것을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자기를 존재케 하는 근본을 허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피를 제거하고 인간의 의를 덧칠하고 있습니다.

믿음보다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법이 난무합니다.

 

교회 안에 성공주의 사고가 자리 잡고서 물량적 가치로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진 자들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 버렸습니다.

믿음보다 돈의 가치가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보고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부요하게 하라고 합니까?

금입니다.

금은 믿음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부요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세상과 간음하다가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제 그 믿음을 예수님께서 찾아 주실 것입니다.

어떻게 찾아 주시는가 하면 예수님의 고난 속으로 집어넣어서 찾아 주십니다.

금을 불에 집어넣어서 불순물을 제거하여 정금으로 제련을 하듯이 우리의 믿음도 불같은 시련에 집어넣어서 제련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3-7=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고자 하십니다.

천국은 그 아들을 믿음으로만 갈 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국을 유업으로 이을 자들에게 온전히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그들 속에 있는 믿음을 방해하는 불순물들을 빼내는 일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불순물이란? 세상 것들입니다.

적가치입니다.

인간의 의입니다.

또한 세상의 가치와 세상으로 향하는 마음입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은 역설적입니다.

부요하면 타락하고 고난 속에서 믿음이 회복 됩니다.

인류의 역사는 항상 부요함으로 망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요함(돈)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평화로운 가정도 돈 때문에 불화가 생깁니다.

은혜로운 교회도 돈 때문에 반목과 갈등이 생깁니다.

돈은 분쟁을 유발케 하고 사람과 사람을 원수 되게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타락한 것은 돈이 많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으니까 나는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교만을 떠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돈이 행복을 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돈의 힘이 하나님보다 다 강합니다.

돈을 믿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돈이 주인이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돈의 가치로 판단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도, 자식도, 부부도, 돈의 가치로 매겨집니다.

교회에서도 부(富)의 척도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지고 발언권이 주어집니다.

교회가 세상의 배설물로 뒤덮여 있습니다.

교인들도 세상의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십니다.

고난 속에 던져서 세상의 불순물들을 제거하는 일을 하십니다.

고난 속에 던져서 예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천국을 소망 삼게 하십니다.

 

호세아 2장을 봅시다.

 

호 2:4-17=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5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6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7 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11 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12 저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연애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로 먹게 하리라 13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그들의 어미가 행음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어미는 교회를 말합니다.

자녀는 성도를 말합니다.

 

교회가 타락을 하니까 교인들도 타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타락하였는가 하면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타락을 한 것입니다.

모두가 돈이 있어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돈줄을 막아 버립니다.

가시와 담으로 막아 버립니다.

질병으로 막고,

실패로 막아 버립니다.

 

지옥 같은 환경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자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지옥에서 천국을 소망하게 하십니다.

이름하여 불 같은 시험 속에서 제련이 되어 정금 같은 믿음으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부요하면 타락하고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난을 복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설적이게도 고난당할 때 가장 좋아집니다.

반대로 평안 할 때 가장 타락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질의 부요로 인하여 타락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시켜서 주님을 향한 믿음을 불로 연단한 금처럼 만들어 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는 것은 주께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게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의지적 말씀이지 우리더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라고 하여도 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정답을 알려 주어도 그 정답대로 살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강제적으로 예수님의 고난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예수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고난 속에서 불순물이 제거가 된 자들이 입는 옷이 바로 흰 옷입니다.

 

흰 옷으로 무얼 하라고 합니까?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하지요.

무엇이 수치입니까?

믿음 없음이 수치입니다.

그 믿음을 어떻게 회복시켜 주십니까?

 

요한계시록 7장을 봅시다.

 

계 7:9-17=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10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11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흰 옷 입은 자들이 무엇이라 고백을 합니까?

구원하심이 어린 양에게 있다고 하지요.

그리고는 어린 양에게 세세토록 찬송을 드리지요.

 

이들이 어떻게 이러한 고백을 하고 찬송을 하게 되었습니까?

이는 큰 환란을 통해서입니다.

큰 환란 속에서 자기들이 의지하고 믿어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불로 연단한 금을 갖게 된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이란? 정금 같은 믿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을 흰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흰 옷을 어디에서 입었다고 합니까?큰 환란입니다.

그래서 흰 옷 입은 무리들이 큰 환란에서 나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종말에 일어날 환란을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아니에요.

저주가 아니고 복입니다.

환란은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의 표현법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자식 입장에서는 아픔이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사랑입니다.

그 자식이 나중에 커서 부모가 되고 나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그렇게 다루어 오셨어요.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시는 모든 말씀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말이 저주라 할지라도 사랑이에요.

사랑을 곡언법(曲言法)으로 저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전무후무한 큰 환란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기 백성들에게 덖지 덖지 붙어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세탁 작업입니다.

환란 속에 집어 넣고 빨래 빨듯이 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3장을 봅시다.

 

말 3: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언약의 사자가 임한다고 합니다.

이건 초림과 재림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두 번 오세요.

초림은 육적 이스라엘을 세탁하려고 오셨고,

재림은 영적 이스라엘을 세탁하고자 오십니다.

 

언약의 사자가 어디에 임한다고 합니까?

주의 전에 임한다고 하지요.

주의 전이란 신약적으로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에 임해서 무얼 한다고 합니까?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한다고 하십니다.

금은 믿음을 상징하고, 은은 구속의 의를 상징해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다는 믿음을 가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누구에게 한다고 합니까?

레위자손이지요.

레위자손은 제사장들이에요.

신약에 제사장들이 누구인가요?

성도들이에요.

 

성도들을 일컬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여서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의로운 제물을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도를 자기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언제 일어납니까?

예수님의 재림 때 일어납니다.

초림 때는 육적 이스라엘을 드렸고,

재림 때에는 영적 이스라엘을 드립니다.

 

어떻게 깨끗케 하신다고 합니까?

금을 불 속에서 연단하듯이 하고 물로 빨래 빨듯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난이 축복이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믿음이 언제 가장 좋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까?

부요할 때인가요?

아니면 고난 가운데 인가요?

 

성경의 증거를 보시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제 타락하던가요?

부요할 때입니다.

 

그리고 언제 하나님을 찾던가요?

고난 속에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 역시 부요하면 하나님을 떠나고 고난당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에게 있어 고난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함이 유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타락 원인은 부요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타락 원인은 부흥이고 교인들의 타락 원인은 풍요입니다.

우리는 조금 부요해 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했어요.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급속도록 타락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대형 교회를 누가 만들었습니까?

우리가 만들었어요.

교회를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욕하여야 해요.

우리는 대형 교회에 다니면 마치 다 가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잖아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 모두가 물질적 가치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가치를 한마디로 하면 떡에 가치에요.

인간들에게는 떡이 최고의 가치에요.

 

떡을 많이 가진 자를 부자라 하고 떡을 가지지 못한 자를 가난하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큰 교회라고 하고 적게 모이면 작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량적 가치로 크다 작다 부자다 가난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큰 자이고 물질적 가치로 사는 자는 작은 자에요.

복음으로 세워져 가면 숫자가 적더라도 큰 교회이고!

물질적 가치로 세워져 가면 수만 명이 모여도 작은 교회에요.

 

물량적으로 작으면서 영적으로 큰 교회가 있는가 하면,

물량적으로 크고도 영적으로 작은 교회가 있어요.

물질적으로 가난하면서 영적인 부자가 있는가 하면,

물질적으로 부자이면서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있어요.

 

예수님의 눈에는 떡으로 부를 누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얘들아! 떡에 가치로 사는 너희들이야 말로 참으로 헐벗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일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의 떡에 가치로 사는 자들에게 말씀에 가치로 사는 예수님의 밥상으로 초대하시겠다고 하십니다.

 

20절입니다.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잘 보세요.

예수님이 떠나가시지 않고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시지요.

왜? 안 떠나가십니까?

자기 피를 흘려서 낳은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밥 안 먹고 방안에 있는 자식을 엄마가 밥상 차려 놓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밥상을 차려 놓은 것은 먹이기 위함입니다.

엄마는 반드시 자식에게 밥을 먹이고야 맙니다.

이게 엄마에요.

 

구약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문에다가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 양고기는 불에 구워서 먹이지요.

왜? 먹입니까?

이제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시 후면 영원한 출애굽을 할 때가 됩니다.

우린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 창세전에 약속한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떠나기 전에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밥을 든든히 먹이십니다.

 

이러한 것은 구약에도 있었고 신약에도 있었어요.

구약에는 엘리야를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으로 인도하기 전에 숯불에 구운 떡을 먹였어요.

그리곤 하늘로 데려갔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가서 숯불에 구운 떡과 생선을 먹이시고 구약의 율법 교회로부터 탈출을 시키셨어요.

 

장차도 예수님 재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예수님의 밥상에 우리를 초대하셔서 배부르게 하신 후에 영원한 출애굽을 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 속에서 믿음을 회복하고 흰 옷을 입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밥상으로 초대하시고자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은 자들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됩니다.

 

21-22절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신부로서 앉게 된다는 뜻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동격(同格)으로서 동석(同席)에 앉아요.

이는 그 영광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대통령의 부인을 영부인이라고 합니다.

영부인은 대통령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과 나란히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모두가 장차 천국에서 일어날 일들을 예표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장차 너희들이 12 고을을 다스린다고 하셨지요.

이는 왕 노릇한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은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말할 때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왕의 왕이라고 하지요.

만왕의 왕이란? 왕들 중에서 왕이란 뜻입니다.

그럼 왕들은 누구인가요?

이긴 자들이에요.

 

성령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어요.

그래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귀 있는 자란?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는 음성을 듣게 되어 있어요.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입니다.

예수님이 문 밖에서 두드리고 있는 시기입니다.

복음을 듣는 자들이 곧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의 발달로 과거 100년에 하던 것을 하루에 다하고 있어요.

그만큼 왕래가 빠르고 지식에 지식이 더하는 시대에요.

지금 이 설교를 실시간으로 온 세계에서 보아요.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는 성경이 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예언하였지요.

종말의 모습을 사람들의 왕래가 빠르고 지식에 지식이 더하는 때라고!

 

다니엘의 예언은 과거에는 상징으로만 보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상징으로 볼 수가 없어요.

모두가 그대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말하는 것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종말을 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보시고 시대의 징조를 보세요.

그럼 하나님의 예언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젠 세상에서 퇴근 할 준비를 하여야 할 때입니다.

서서히 준비를 하십시오.

땅 강아지같이 흙만 퍼 먹지 말고 하늘에 만나를 잡수세요.

 

주님 오실 때가 곧 되었습니다.

만물이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부디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하여서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과 귀를 여시고 마음을 열어서 시대의 징조를 통하여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세상의 역사와 시대의 영적 비밀을 알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루 하루를 종말이라는 자세로 그 나라를 소망 삼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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