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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룻기 강해

3강. 자기 팔자대로 이끌려가는 인생 (룻 1:6-18)

by coroa 2020. 8. 25.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정낙원 목사

-.3강. 자기 팔자대로 이끌려가는 인생 (룻 1:6-18).-

 

 

 

성경은 인간의 영웅담을 기록한 위인전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에게 포카스를 맞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오미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나오미는 신앙이 대단한 여인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처럼 저기 몸뚱이 하나 살고자 하나님을 버린 그런 여자입니다.

자기 살 궁리 밖에 하지 않았던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등 떠밀려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니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살아갔을 뿐이에요.

그러니 나오미를 본받자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죄인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라는 것과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와 긍휼로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백성을 은혜로 지켜 오셨다” 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본문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찾아내야지 인간의 자랑거리들을 찾아내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것 중에도 룻과 오르바 라는 두 여인을 가지고서도 봐라 룻처럼 해야 한다거나 또는 오르바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의 각오나 다짐을 이끌어 내고자 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룻기서의 주제는 룻의 신앙을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오르바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오미를 쫓아간 룻은 신앙이 좋고 나오미를 떠난 오르바는 신앙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의 의지나 각오나 결단을 요구하기 위해서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인간의 의지나 각오나 결단이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비껴가시면서 일을 하신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동일한 상황에서 어째서 한 사람은 나오미를 따라가고 한 사람은 떠나가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똑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동일한 조건에서도 각기 다른 두 반응이 나타나는가 입니다.

이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를 떠나고 붙좇는 것을 인간의 의지나 각오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일하심에 두어야 합니다.

 

떠나는 사람은 왜? 떠났고 좇는 사람은 어째서 좇았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룻과 오르바 라는 여인들을 보지 말고 이 여인들 뒤에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구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영광만 오롯이 남게 됩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나오미가 모압 땅에 가서 알아진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서 알게 된 하나님은 죄인을 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여기서 죄인을 친다는 말은 싸운다는 말입니다.

왜? 싸웁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인간을 사용하시고자 하는데 인간이 순순히 응하지 않아서 하나님과 충돌이 일어나니 싸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을 장악하자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뜻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옵니다.

찾아 와서 원래 창조의 목적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자니 자연히 인간의 뜻을 기각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과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죄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가요?

이는 인간의 창조 목적이 인간이 행복하게 잘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예수님을 만유의 주가 되는 일에 도구로 사용하려고 창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진노의 그릇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토기장이의 필요에 의해서 각각 만들어진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간은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 지음 받은 용도대로 살다가 가면 됩니다.

 

악인은 악한 날을 위해서 창조를 하셨고 선인은 선한 날을 위하여 창조 하셨습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기르시고 입히시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거지 역할을 맡기셨으면 나사로처럼 일평생 거지로 살아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인간들의 삶에 질 입장에서 보면 거지로 산 나사로가 불행하게 보일지 몰라도 그 배역을 맡기신 하나님의 일하심 입장에서는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지으심에 합당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익한 종의 비유를 하십니다.

어떤 집에 종이 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이제 막 잠 자리에 들었습니다.

한참 곤하게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주인이 출타를 하였다가 새벽녘에 돌아 왔습니다.

종은 얼른 일어나 주인의 발을 씻기고 밥상을 차려줍니다.

그렇다고 주인이 종에게 사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을 시키려고 종을 값 주고 사서 자기 집에 들여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불평 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자신이 한 일을 가지고 주인에게 칭찬을 받고자하지도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걸 아는 것이 종의 지혜로움입니다.

 

종이 주인에게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매사에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찰 것입니다.

왜? 날 알아주지 않는 거야!

왜? 내 입장을 고려해 주지 않는 거야!

항상 얼굴을 찌푸리고 불만이 가득한 모습으로 주인을 대할 것입니다.

 

주인은 이런 종은 쫓아냅니다.

지옥에 누가 가느냐! 하면 이렇게 자기 주제를 모르는 종들이 갑니다.

천국엔 누가 가느냐! 하면 자기가 종인 것을 아는 자들이 갑니다.

천국엔 자기 인생에 불평조차 할 수 없는 자들이 갑니다.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이는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였단 자가 사도가 되었습니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자를 사도로 삼았어요.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든지 쓰다 달다 불평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많은 환란 속에서도 감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불평과 감사는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자기가 종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감사가 되고 못 깨달으면 불평이 나옵니다.

자기가 종인 줄 알면 감사가 되고 모르면 원망이 나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집에 종입니다.

 

바울은 큰 집에 여러 가지 그릇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금 그릇도 있고, 질 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도 있습니다.

주인이 때에 맞도록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하여 주인이 장만한 그릇들입니다.

그 그릇들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나오미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위하여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오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뜻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회수해 가시는 방식으로 간섭하십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 앞에선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참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모압에서 직접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남의 이야기로만 듣던 그 하나님을 모압이라는 타관객지에서 자기가 직접 만났습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집에서 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배운 하나님입니다.

남의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벧엘 광야에서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고 이삭의 하나님이었는데 이젠 나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젠 남으로부터 들은 하나님이 아니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직접 만난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을 두렵다고 고백을 합니다.

 

야곱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고 갑시다.

 

창 28:10-21=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17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18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9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 가듯이 집에서 쫓겨난 야곱을 찾아 갑니다.

집안에선 만나 주지 않다가 집에서 쫓겨나자 찾아오십니다.

그리곤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건 야곱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을 통해서 할 일을 다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두려워합니다.

이제 내 인생 종 쳤구나!

이제 죽었구나! 라는 뜻입니다.

이게 바로 죄인을 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린 모두가 하나님이 허락한 미션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 미션을 다 이루기까지 하나님이 가만 두지 않습니다.

반드시 다 이루십니다.

이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에게 다가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이런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귀로만 듣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가 직접 만났습니다.

그리곤 야곱처럼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룹니다.

하나님을 떠난 징계로 정신없을 정도로 몰아침을 당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은 당신의 미션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뜻을 철회시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뜻을 강탈해 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풍족하던 것을 빈손으로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이라고 간증을 합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을 잃고 나서 죄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죄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분명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손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모압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성경을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를 바탕으로 기록한 것도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함입니다.

우리의 삶 깊숙이 개입하셔서 간섭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은 만물을 붙잡고 계신다고 합니다.

이는 만물을 다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 되셔서 하나 하나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남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간섭하고 계십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생성되는 과정에서부터 그들이 살아온 모든 여정들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일하심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과 동행한 역사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서 일하심을 드러내는 역사가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해 놓았고!

신약 성경에는 교회라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소설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을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하나님이 경험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고백을 통해 나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워야 합니다.

남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경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이야기가 됩니다.

나의 주시여! 나의 하나님이여가 되어야 합니다.

 

전 과거에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이야기로만 읽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나는 남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보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 라고 욕을 했습니다.

내가 아니고 남이기 때문에 욕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은혜를 입고 보니 이스라엘이 곧 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내 이야기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내 자신이라는 것이 보여지기 시작하니 욕이 쑥~ 들어가고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가 되는 겁니다.

과거엔 이스라엘을 두들겨 패라고 했는데 이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참으로 간사스럽지요.

남의 이야기로 보일 때는 죽여 죽여 했는데!

내 이야기로 보여지기 시작하니 불쌍히 여겨주소서! 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는 이유도 성경이라는 문자 속에 가두어진 하나님을 우리 삶 속에서 만나기 위함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된 앞선 믿음에 사람들이 만났던 그 하나님을 지금 우리 삶 속에서 만나야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다스렸듯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약 3000 년 전에 나오미를 다스리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를 다스립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나오미가 만난 그 하나님을 만나서 우리 입에서 나오미가 고백한 그 신앙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은 나오미가 모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작정을 하고 두 며느리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약 10년을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두 아들을 장가보내는 기쁨도 있었고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슬픔도 맛보았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약 10여 년 동안 살면서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자식 장가보낼 때는 천국이었는데 남편 잡아먹고 두 아들을 잡아먹을 때는 지옥이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돈을 쓸 때는 천국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돈 떨어지자 지옥에서 삽니다.

나오미도 잠시 천국처럼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좌우지간 나오미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삶 속에서 이젠 더 이상 모압에서 살지 못하겠다고 하고선 예루살렘으로 귀향하기를 마음을 먹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나자 그 동안 잊고 살았던 예루살렘이 생각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큰 며느리는 오르바라고 하고 작은 며느리는 룻이라고 합니다.

둘 다 모압 여인입니다.

 

두 여인도 나오미처럼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이 죽자 두 며느리에게 각 자가 갈 길을 가라고 권면합니다.

과부로 살지 말고 자기 살 길을 찾아 가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날 보지 못했느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 분명히 잘 보았지 않느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은 한마디로 인간이 섬길 만한 신(神)이 아니란 것입니다.

 

나오미가 간증하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13절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도다”

20절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21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죄인을 치는 하나님이고!

괴롭히고 징벌하는 하나님이고!

풍족한 것을 빈 털털이로 만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찌 믿고 따르겠느냐?

그러니 너희들이 섬기던 신(神)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과거 김용옥 교수가 강의 중에 종묘사직(宗廟社稷)을 갈아엎으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종묘(宗廟)란? 조상 신(神)을 말합니다.

사직(社稷)이란? 땅 신(神)을 말합니다.

종합하면 나에게 유익을 주는 신(神)을 말합니다.

 

종묘사직을 갈아엎으란 말은 내게 유익을 주지 않는 조상이나 신(神)은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신(神)을 섬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내게 유익을 줄 때 조상이고 신(神)이지 내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신(神)은 신(神)이 아니란 말입니다.

조상이나 신(神)이 중요하지 않고 내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아주 실용주의적이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인간은 자기 몸 중심으로 호불호(好不好)를 정합니다.

내게 유익되면 우호적이 되고 내게 해를 주면 적대적이 됩니다.

 

오로지 나입니다.

내가 신(神)이고 내가 왕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합니다.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나 자기 밖에 없어요.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으로 보면 주객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죄가 주객을 전도시켜 놓은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걸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성이란? 내게 유익을 주는 신(神)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종묘사직을 갈아엎으란 말은 우상성을 바탕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죄인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말입니다.

 

지금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김용옥 교수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神)은 인간의 생각은 전혀 고려치 않고 자기 밖에 모르는 아주 고약한 신(神)이니 그러니 이런 신(神)은 버리고 너희들 소원을 들어주는 신(神)을 찾아 가라고 합니다.

나오미는 간절한 마음으로 며느리들이 자기 곁을 떠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과부가 과부 심정을 안다고 험한 세상 속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죽는 일입니다.

그러니 빨리 살 길을 찾아서 가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잊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입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에게서 각기 다른 반응들이 나타납니다.

 

13-17=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 시모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神)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오르바는 살 길을 찾아 떠납니다.

하지만 룻은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의미에선 오르바가 훨씬 지혜롭습니다.

룻은 미련합니다.

 

그런데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오르바는 그 신(神)에게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신(神)이란? 예전에 섬기던 신(神)이란 말입니다.

예전에 섬기던 신(神)이란? 마귀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우상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르바는 살고자 신(神)을 바꾸었다가 살기 힘드니 예전에 섬기던 신(神)을 다시 찾아 간 것입니다.

종묘사직을 갈아 엎은 것입니다.

신(神)을 바꿔 보아도 소용이 없더라!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더라는 식으로 옛 신(神)을 찾아간 겁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런 사람들을 언급하셨습니다.

길가 밭이나, 돌짝 밭이나, 가시 밭처럼 잠시 믿다가 넘어지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떡을 쫓아다니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욕해선 안 됩니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내가 살아야 신(神)도 있지 내가 죽고 나면 신(神)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김용옥 교수처럼 내 삶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종묘사직을 갈아엎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룻입니다.

룻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일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룻은 기어이 나오미가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망하는 길을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았어요.

그럼에도 그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이건 제 정신이 아닙니다.

뭔가 단단히 씌었어요.

그러니 죄인을 치시고 괴롭히고 빼앗아가는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지요.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룻은 본성에 반하는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룻의 결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결과입니다.

이 부분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여기서 룻기의 전체 구조를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래야 룻기의 중심사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룻기는 하나님을 모르던 룻이라는 이방 여자가 하나님을 섬기던 나오미의 도움으로 보아스를 만나서 자식을 낳아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간다는 내용입니다.

이건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룻기를 보면 1장에서 나오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2장 이후로는 나오미는 뒤로 빠지고 룻이 주인공으로 나타납니다.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일에 돕는 자로 나타납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 자식을 낳습니다.

룻이 나오미의 닫혀진 가문을 일으켜 세워준 것입니다.

그래서 룻의 자식이 아니라 나오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야곱과 요셉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만나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이건 옛 사람 야곱이 죽고 새 사람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거듭난 인생을 요셉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의 약전(이력서) 속에 요셉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야곱의 거듭난 이스라엘의 현현(顯現)인 겁니다.

야곱이 옛 사람이라고 한다면 요셉은 새 사람입니다.

요셉은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로 거듭난 인생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요셉이 낳은 자식을 자신의 아들로 입적을 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에 내려가 망한 것은 나오미의 죽음과 같습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부러져 의지할 근거를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가 의지할 남편을 잃은 것은 야곱의 환도뼈가 위골된 것과 같습니다.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이 나온 것처럼 나오미가 버려지는 망함(죽음) 속에서 룻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죽고 룻으로 거듭난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는 옛 사람을 상징하고 룻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나오미라는 옛 사람이 죽고 룻이라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남편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꼭 우리 성도들의 모습과 방불합니다.

이걸 그대로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난 옛 사람과 예수 안에서 난 새 사람이 있습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의 죽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옛 사람의 죽음에 바탕에는 예수라는 신랑의 죽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죽고 거듭나는 것은 나오미가 모압에서 신랑의 죽음으로 룻이라는 며느리를 앞세우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쉬운 말로 룻은 나오미의 새 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예루살렘에 올라온 후에는 나오미는 룻의 삶 속에 감추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모압은 옛 사람 나오미의 활동 무대였다고 한다면 예루살렘은 새 사람인 룻의 활동 무대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룻이 전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룻이 전면에 나타나지만 그 속엔 나오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룻이 낳은 아들을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저주 받은 가문을 룻을 통해서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고 룻은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보아야 룻이라는 이방여자가 기어코 하나님을 붙좇겠다고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치는 하나님이고!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하나님이고!

풍족하던 것을 빈손으로 만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떠나라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어찌 섬기겠느냐!

내가 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들 살 궁리하고 너희가 전에 섬기던 그 신(神)을 찾아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련 없이 떠납니다.

하지만 룻은 죽어도 못 떠난다고 합니다.

나오미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룻이 나오미의 인생에 연합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건 정상적인 인간이 내 뱉는 말이 아닙니다.

뭔가 홀린 겁니다.

누군가가 룻 속에 들어가서 내 뱉는 말입니다.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기가 살고자 하나님도 버리는 것이 죄인입니다.

그런데 룻은 난 죽어도 좋으니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이건 반(反) 본능적입니다.

어째서 룻은 반(反) 본능적인 행동을 할까요?

 

룻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룻 1:16-18=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룻의 고백입니다.

룻은 시 어머니에게 날 가라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가는 곳에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어머니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이는 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어머니의 운명과 함께 하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어머니의 하나님을 떠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해 버립니다.

 

이 고백은 곧 나오미의 고백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 징벌을 받고서도 난 하나님을 떠날 수 없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오미는 매를 맞으면서도 매를 대시는 그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룻의 고백이 그러합니다.

죽는 줄 알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치 나오미가 룻 속에 들어가서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나오미는 2장부터는 룻 속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 속에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오미는 룻을 돕는 보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성도에게 적용합니다.

우리는 나오미처럼 하나님이 어떤 분 인줄 압니다.

그럼에도 떠나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 안에 보혜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로 오신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얻어맞으면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처럼 얻어터질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룻에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어떻게 룻이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 그 고백의 출처를 추적하여야 합니다.

룻의 이런 고백 속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이나 열심에 초점이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초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어떤 사건이나 어느 한 사람의 신앙 속에서도 그 사람의 열심이나 충성심을 찾아내고자 해서는 안 되고 그 열심과 충성을 일으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셔야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안타깝게도 룻기(모든 성경)를 해석하는데 있어 나오미가 회개하였다느니 아니면 룻(인간)의 열심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가 되어지고 있습니다.

성경 책 속에 룻기를 간략하게 주해를 해 놓은 것을 보아도 룻의 신앙심에 포카스를 맞추어서 말하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성경의 중심 사상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설교의 끝에 가면 하나님의 은혜는 간 곳 없고 인간의 열심과 충성과 각오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성으로 변질되고 마는 겁니다.

 

이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해석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말씀을 강론한다고 하여도 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만 오롯이 남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룻의 열심이나 정성에 포카스를 맞추지 않고 룻을 룻 되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포카스를 맞추어서 해석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주 받은 이방여자를 어떻게 은혜로 간섭하셔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올라가게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룻이 당당히 올라가 있어요.

룻기 마지막에도 이 족보를 말하고 있어요.

룻기를 먼저 읽고 마태복음을 읽어보세요.

 

룻기 마지막과 마태복음 1장을 살펴봅시다.

 

룻 4:18 베레스의 세계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았고

룻 4: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룻 4: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룻 4: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룻 4:22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마 1:5-6=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보세요.

룻의 이야기가 예수님 이야기로 나아가지요.

이렇게 되면 룻기는 예수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자 룻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지 룻을 통해서 미리 맛보기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룻을 통해서 우리 구원을 보게 됩니다.

 

이건 참고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룻이 예수님 계보를 형성하고 있으니 룻을 예수님으로 해석해 봅시다.

나오미의 무너진 가문에 대를 룻의 희생으로 이어가잖아요.

 

이렇게 되면 룻은 예수님이 되고 나오미는 곧 우리 성도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나오미는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이제 가문(家門)을 닫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희망이 없습니다.

집안에 남자가 없다는 것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룻이 자기희생을 통하여서 무너진 가문을 일으켜 세웁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을 안겨 줍니다.

 

이건 마치 저주 받아 끝장이 나야 할 우리 인생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살려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 버릴 풀과 같은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 왔습니다.

그리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땅에 풀 같은 존재들을 하늘 예루살렘 성전의 보석으로 만들어 줍니다.

 

늙어 소망 없는 나오미에게 룻이 아들을 낳아 준 것은 소망 없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신 것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룻을 예수님 계보에 올려놓은 겁니다.

나오미에겐 룻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석하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해석은 없어요.

그 속에 다양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담아 놓았습니다.

그러니 룻을 우리 성도로 해석 할 수도 있고 예수님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기록이 된 것들은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걸 이중계시라고 합니다.

 

제가 성경을 다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지혜는 제한적이에요.

우리가 받은 은혜도 극히 한 부분이에요.

하나를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 속에는 다양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를 가지고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아직 다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안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듭니다.

하나님이 홍수 후에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시지요.

무지개는 일곱 색깔입니다.

일곱 색깔을 일곱에 의미라고 합시다.

그럼 일곱 색깔 속에는 일곱에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의 의미를 안다고 하여서 다 아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하나 속에 일곱에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그러나 하나로서는 일곱 속에 담긴 풍성한 것을 몰라요.

이 사실을 안다고 하면 하나를 안다고 해서 다 안다고 하지 않겠지요.

그렇습니다.

진짜로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하지 않아요.

 

노아의 무지개 언약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해 봅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일곱 말씀을 하셨습니다.

흔히들 가상칠언(架上七言)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첫 번째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두 번째는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세 번째는 “여자여 아들이니이다”

네 번째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다섯 번째는 “내가 목마르다”

여섯 번째는 “다 이루었다”

일곱 번째는 “아버지 손에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이 일곱 말씀 속에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원수를 용서하는 용서도 담겨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도 담겨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 됨도 담겨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담겨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의에 주리고 목 마름도 담겨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심도 담겨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김도 담겨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도 설교 할 수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천국에 가는 설교 할 수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아들 됨도 설교 할 수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자기 부인도 설교 할 수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하여서 설교 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율법의 다 이루심도 설교할 수가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의 의탁하는 것도 설교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는 옛 사람의 죽음에서부터 새 사람으로서의 삶 전부를 이야기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십자가로 죄사함 받은 것만 말하면 안 되어요.

그게 전부라고 말하면 안 된단 말입니다.

 

십자가는 옛 언약인 율법의 완성적인 의미에선 다 이루심이 되지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새 언약의 삶으로서는 시작입니다.

마치 홍해바다가 가나안의 시작인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 할 때는 죄사함 받아 새 사람이 되어서 누려야 할 풍성한 것들까지 말해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 어느 하나라도 가볍게 여기면 안 되어요.

예수님이 일곱 말씀 전체가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을 말할 때는 이 모두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성막을 보면 뜰이 있고 성소가 있습니다.

뜰에서는 죄사함의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성소에는 죄사함 받은 자가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의 뜰은 예수님의 육체적인 사역인 십자가에 죽으심을 의미하고 성소 안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뜰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성령으로 오심은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기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신 성도는 뜰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만을 말 할 것이 아니라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 하여야 합니다.

 

뜰은 종처럼 일하는 곳이지만 성소는 아들로서 아버지와 떡을 먹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입니다.

성령을 아들에 영이라고 하는 것은 성소 안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소 안에서 하늘로 부르심에 영광과 기업에 풍성함을 누리고 맛보고 즐기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로 오신 예수도 알아야 하지만 성령으로 오신 예수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초림도 알아야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도 알아야 합니다.

초림만 말하지 말고 재림도 말해야 합니다.

초림이 시작이라고 한다면 재림은 끝이에요.

시작하신 예수님도 알아야 하고 끝내시는 예수님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구원주 되신 예수님도 알아야 하고, 왕으로 오시는 심판주 되신 예수님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믿음을 받고 보니 천국에 대한 소망도 생깁니다.

이 소망이 종국엔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 사랑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나 소망은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 속에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십자가가 그리 단편적이지 않아요.

그 속엔 엄청난 것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므로 우린 어느 한 부분을 안다고 해서 다 아는 척 해선 안 된단 말입니다.

한 부분을 알면서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교만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안다고 예수에 대하여 다 안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에요.

무슨 의미로 이러한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세요.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에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능력행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방언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이에게는 방언 통역하는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각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어요.

혼자 다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습니다.

 

내가 받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받았어요.

반대로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내가 받았어요.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각 사람에게 각각의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가 받은 은사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입니다.

지체마다 하는 일이 다르듯이 각각 받은 은사마다 하는 일이 다릅니다.

지체를 하나로 모으면 몸이 됩니다.

은사도 하나로 모으면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러니 지체에게 주신 은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서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것을 모아서 하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체는 다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의 목적을 두고 움직입니다.

각자의 기능이 다르지만 몸을 위한다는 것은 다 같습니다.

 

어느 것 하나 가치적으로 차별이 없고 중하고 경함이 없어요.

모두가 귀합니다.

다 중수가 같습니다.

즉 각각의 가치로 따질 수 없단 말입니다.

 

손은 손으로서 가치가 있고!

발은 발로서 가치가 있고!

눈은 눈으로서 가치가 있고!

코는 코로서 가치가 있어요.

이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니 몸에 지체는 우열(優劣)을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성막의 성소 안에 사용되어지는 기구들이 다 정금으로 만들어졌듯이 성도들이 받은 각양의 은사들도 모두가 정금(正金)처럼 귀한 것들입니다.

각양의 은사들을 모으면 예수가 나와요.

 

쉬운 말로 모든 성도를 한약 달이듯이 달이면 예수가 나와요.

한약 탕기에 각양의 재료를 넣고 달이듯이 각각의 성도들을 교회라는 탕기에 넣고 달이면 예수가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 속에선 나만 다 안다는 것이 성립 될 수가 없어요.

나만 다 안다고 하는 그 놈은 이단입니다.

마귀에요.

예수 자리에 앉아서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 있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도 다 알지 못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읽어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자신도 예수라는 몸에 한 부분 속에 지체로서 포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섣불리 성도들을 맞다 틀리다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가 할 몫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안다고 하는 인간들이 왜? 그렇게 많은 줄 몰라요.

다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다르면 다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기만 다 안다고 하는 자들이 진짜 이단이에요.

 

자기 주제를 모르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조금 안 것을 가지고 전부를 아는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교만을 떠는 겁니다.

다 안다고 하면서 남의 말을 안 들어요.

무슨 말을 하면 마치 카드회사 ARS 틀어 놓은 것과 같아요.

늘 동일한 말을 해요.

어리석은 자는 남에 말은 안 듣고 귀를 닫아 버려요.

 

피조물은 절대로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일하심도 다 읽어내지를 못해요.

안다고 하여도 그건 극히 일부분이고 제한 적입니다.

자기 수준에서 아는 것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에도 지극히 제한 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넘칩니다.

 

어떤 사람은 발목이 잠겨 있고!

어떤 사람은 무릎에 잠겨 있고!

어떤 사람은 허리에 잠겨 있고!

어떤 사람은 가슴에 잠겨 있고!

어떤 사람은 온 몸이 푹 잠겨 있습니다.

 

이건 우리 개인에게도 적용 할 수가 있습니다.

 

발목의 깊이에서 깨닫고 아는 것이 있고!

무릎의 깊이에서 깨닫고 아는 것이 있고!

허리의 깊이에서 깨닫고 아는 것이 있고!

온 몸이 푹 잠겨서 깨닫고 아는 것이 있어요.

 

이걸 사람으로 비유할 수가 있어요.

어린 아이 때 아는 것이 있고!

청소년 때 아는 것이 있고!

장성하여서 아는 것이 있고!

늙어서 아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읽어내고 인생을 읽어내는 깊이가 어린아이와 어른은 달라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깨닫는 것도 이와 같아요.

초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깊이와 오래 된 신자가 깨닫는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살아오면서 하나님과 부대낌을 당한 성도와 이제 막 예수를 믿는 성도가 하나님과 부대끼는 깊이는 달라요.

 

그래서 바울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의 풍성함을 더 많이 더 깊이 더 길게 더 넓게 더 높이 알기를 바랬어요.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나아가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은 이 충만함으로 사람들을 대하였어요.

 

이방인도 하나님 마음으로 대하였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 마음으로 대하였고!

은혜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 마음으로 대하였어요.

마치 하나님이 악인이나 선인이나 다 대하시고 다스리듯이 말이에요.

 

행여 스님들이 시주하러 오면 화를 내지 말고 시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나 예수 믿어요! 그러지 말고!

더운데 고생이 많습니다!

잠간 쉬었다 가세요! 라는 여유로움을 가지세요.

이건 스님도 하나님이 다스리는 장중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보란 말입니다.

아니 마귀도 하나님이 사용하고 있잖아요.

 

스님을 형제로 영접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악인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란 말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척을 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린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줄 책임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도 그들 중에 있다가 부르심을 입어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은 이삭을 핍박해도 이삭은 이스마엘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 했지만 요셉을 그들을 불쌍히 여겼어요.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여유로움입니다.

 

제발 신앙생활을 편협하게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자기 안에 가두지 마세요.

광대하게 보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넓고 크게 보세요.

성경을 보는 폭을 넓히란 말입니다.

 

전 제 성경 해석이 절대적이거나 옳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전 이렇게 깨닫고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말할 뿐입니다.

전 항상 귀를 열어 놓고 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를 늘 듣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다른 분들이 깨달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거울들입니다.

그래서 서로의 거울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더 많이 더 넓게 알아가야 해요.

이런 안목을 가질 때 악인과 선인에게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기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이런 저런 해석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해석하는 것만 정답이다! 라고 하여 배타하지 말고 남이 깨닫는 것도 수용하세요.

그 사람이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형제로 받으세요.

그 사람의 신앙까지 우리가 판단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시 룻을 성도의 구원 이야기로 살펴봅시다.

 

룻은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이미 작정이 된 여자입니다.

그런데 저주 받은 이방인으로 태어났어요.

이건 지난 시간에 갈라디아서 4장에서 유업을 이을 아들이 잠시 종처럼 율법 아래 태어나서 후견인 아래서 종노릇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율법 아래는 저주예요.

율법 아래 난 것은 마치 저주 받은 이방인으로 태어난 것과 같아요.

우린 모두가 율법 아래서 저주 받은 자로 태어납니다.

이는 룻처럼 이방인으로 태어난 것과 같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나오미 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룻은 뜻하지 않게 나오미의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나오미의 집안으로 연합이 됩니다.

나오미의 인생으로 편입이 되고 맙니다.

나오미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룻은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만나게 됩니다.

 

룻이 나오미가 떠나라고 하여도 떠나지 못하는 것은 나오미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연합이란 말은 강력 본드로 붙여 놓았단 말입니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떨어지면 둘 다 손상을 입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붙여 놓은 겁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룻에게 오르바처럼 자기 신을 찾아 가라고 하여도 가지 않고 따르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나오미를 떠난다는 것은 연합이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떠나가고 갈라지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갈라진다는 것은 붙어 있지 않았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붙여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붙어 있지 않으니 자기 유익을 쫓아서 가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씨 뿌리는 비유에서 잠시 믿다가 뿌리가 없어서 말라 죽는다고 합니다.

 

암튼 룻은 나오미가 떠나라고 하여도 떠나지 않고 시어머니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저주의 땅인 모압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세상에서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저주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옵니다.

그리곤 율법 아래서 빼내주십니다.

어떻게 빼내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빼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우리의 저주를 끊기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나오미가 죽어야 할 자리에 남편이 죽었듯이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죽어주신 것입니다.

 

우린 예수님의 대신 죽어 주심으로 저주로부터 풀려났습니다.

이건 마치 저주 받은 이방인인 룻이 남편에 죽음으로 이방인에서 이스라엘로 귀속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특징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그 아들의 피로 자기백성이 흠 없는 거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백성은 예수님의 죽음의 바탕에서 생겨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저주 아래 갇힌 자기백성들을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한 아들의 죽음을 바탕으로 많은 아들들을 만들어 내신 겁니다.

이걸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상징하는 남편의 죽음 속에 나오미의 구원도 있고 룻의 구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룻의 이야기는 곧 우리들 구원 이야기인 겁니다.

예수님이 이방인인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내시는가를 룻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룻은 곧 우리이고 룻의 이야기는 곧 모든 성도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나오미 역시도 나의 이야기인 겁니다.

 

나오미와 룻을 구분하지 말고 그냥 한 사람이라고 보세요.

나오미와 룻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나오미는 옛 사람을 상징하고 룻은 새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나오미나 룻 모두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룻은 때론 둘이었다가 때론 하나였다가 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때론 예수이기도 하고 나 이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둘이 하나이면서 또 하나이기도 하는 것과 같아요.

 

오르바와 룻을 가지고 우리 성도의 이야기로 풀어봅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만드셨습니다.

이 두 그릇은 오늘 본문에선 두 며느리입니다.

오르바와 룻입니다.

 

한 사람은 진노의 그릇이고 한 사람은 긍휼의 그릇입니다.

진노의 그릇은 저주의 자리로 내려가고, 긍휼의 그릇은 복에 자리로 밀려 올라갑니다.

오르바는 진노의 자리로 내려갔습니다.

자기 신(神)을 쫓아갔다는 것은 마귀 아래로 갔다는 말입니다.

오르바가 자기 신(神)을 찾아 가는 것을 보니 진노의 그릇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오르바나 룻은 동일한 모압 여자입니다.

모압은 저주의 땅입니다.

그럼 둘 다 저주 아래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구원을 길로 나아가고 하나는 저주의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하나는 진노의 그릇이고 하나는 긍휼의 그릇이란 말입니다.

진노의 그릇은 저주의 길로 나아가고 긍휼의 그릇은 구원의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그 안에 본성이 자기 길을 찾아 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비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갑니다.

마귀가 아비인 자는 마귀에게 나아가고 하나님이 아비인 자는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나오미는 그들 앞에 두 길을 열어 놓습니다.

각자 갈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살고자 자기 신(神)을 찾아 떠납니다.

그러나 룻은 죽더라도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오르바는 모압으로 내려갔고 룻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모압은 땅을 상징하고 예루살렘은 하늘을 상징합니다.

모압의 신(神)은 땅 신(神)입니다.

땅 신(神)은 마귀입니다.

결국 오르바는 땅 신(神)인 마귀를 찾아 간 것입니다.

 

오르바는 땅에서 살기 위해서 땅 신(神)을 찾아 간 것입니다.

오르바에겐 땅에 생명이 우선이었습니다.

자기가 사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내가 있고 신(神)도 있습니다.

내가 살아야 신(神)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다릅니다.

죽는 길을 택합니다.

죄인을 치시고 죽이는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이건 내가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게 이들의 본질(本質)이고 본성(本性)입니다.

오르바의 아비는 마귀이고 룻의 아비는 하나님입니다.

오르바가 세상 신(神)인 마귀를 쫓아가는 것을 보니 마귀 자식이고, 룻은 하나님을 쫓아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나오미는 분명히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오르바는 나는 하나님이 싫습니다! 하고 자기 신(神)을 찾아 갔습니다.

하지만 룻은 난 하나님이 좋습니다! 하고 하나님을 따릅니다.

하나님께선 룻은 끌어 당겼고 오르바는 밀어낸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했고 에서는 미워한 것과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지 않았어요.

다만 야곱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다 저주 아래 있는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끌어 당겨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룻처럼 예수 믿으면 고난당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믿고 있습니다.

이걸 세상 말로 팔자라고 합니다.

 

성도는 야곱처럼 구원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해 주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르바가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신(神)을 찾아 갔다고 해서 비난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룻이 하나님을 따른다고 칭찬해서도 안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각자 갈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앉고 일어섬을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지 우리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르바와 룻을 교회 이야기로 해 봅시다.

 

두 며느리는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성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 며느리를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룻이라고 한다면 룻이 걸어간 길을 가게 되어 있고, 오르바라고 한다면 오르바가 걸었던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각자 팔자대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우리의 원함이나 간청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집니다.

구원의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면 그 무엇으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이나 정성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택한 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은혜로 붙잡아 주십니다.

룻처럼 죽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가게 하십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은혜가 룻을 간섭하기 때문에 룻의 생각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고난의 길을 자처하고 나서게 된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보면 고난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아무나 고난 받지 않습니다.

오직 택한 백성들에게만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지금 룻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겁니다.

그러니 나오미가 자기 신(神)을 찾아 가라고 하여도 안 가고 죽을 길로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도 룻처럼 예수 믿지 말라고 고난을 주는데도 우린 꾸역꾸역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팔자입니까?

 

한 번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따르자 돌아가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는 길이라고 합니다.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제발 떠나라고 합니다.

 

이건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명령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떠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떠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를 만나면 택한 자와 불 택자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택한 자는 하나님을 찾게 되지만 불 택자는 하나님을 떠나 버립니다.

 

오르바가 나오미를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시어머니를 간섭하는 하나님을 보니 인간이 믿을 만한 신이 못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다가는 인생 망치겠다고 생각하여 일찌감치 봇다리를 싼 것입니다.

 

반면에 룻이 나오미를 통하여서 발견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은 끝까지 간섭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끝까지 찾아가 가만 두지 않고 간섭하는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도망을 칠 수 없다는 것을 안 겁니다.

자신의 운명도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효도하기 위해 쫓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좇은 것입니다.

그러니 죽더라도 나오미를 따라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린 룻처럼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여기까지 밀려 온 것입니다.

여기까지 밀고 오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천국까지 밀어 넣어 주실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이가 끝날 까지 이루실 줄을 믿고 넉넉하게 세상을 이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 아래 있던 이방인이었던 우리를 예수와 혼인을 시켜 하나님 가문에 입적 시켜 주심을 감사합니다. 입적을 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끝 날까지 책임져 주실 것이란 것이 믿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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