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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7강. 비둘기 눈과 백향목 궁전 (아가 1:15-17)

by coroa 2020. 10. 3.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7강. 비둘기 눈과 백향목 궁전 (아가 1:15-17).-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이 말씀을 상고 할 수 있도록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는 주께서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그러니 종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사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옵소서. 성령의 감동으로 솔로몬과 술람미의 마음을 허락하셔서 아가서가 나의 아가서가 되게 하시고 이 설교를 듣는 모든 성도들 또한 자신들의 아가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가서는 하늘나라 사랑이야기입니다.

하늘나라 사랑을 왕과 노예를 가지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왕은 예수님을 상징하고 노예는 우리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 사랑 이야기는 육적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아가서는 인간들 상식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 상식이란? 인간 중심의 율법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사랑이야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부득불 인용함을 양해 바랍니다.

어떤 분이 전화를 해 오셨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씀을 드립니다.

전화를 주신 분의 말씀에 의하면 제가 아가서를 해석하는 것은 기존 목사님들이 해석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고 합니다.

 

제가 설교한 아가서를 읽으면 맞는 것 같은데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목사님들과 비교하면 전혀 다르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슷해야 하는데 전혀 다르니까 헷갈린다고 합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기존에 아가서들은 인간 중심으로 보았고,

저는 철저히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서 예수님의 구속사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앞선 시간에 인간 중심으로 보는 것을 역사적 해석이라고 했습니다.

역사적 해석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바탕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해석법이 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의 성경해석법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모두가 반율법적이고 비상식적으로 보여요.

율법 파괴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을 죽이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어요.

 

바울은 이 사실을 이 세상 관원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유대인의 상식으로 보면 예수는 이단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성경을 유대인들의 상식인 전통으로 내려오던 방식으로 이해하고 유대인의 정통적인 해석법으로 예수님이 하는 일을 판단했어요.

유대인 해석법으로 보니까 예수쟁이들은 이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꺼꾸러 유대인들의 정통적인 해석법인 율법적 해석은 예수를 죽이는 이단적인 해석임을 알았어요.

유대인들의 정통적인 해석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역(逆)으로 구약의 율법을 예수님 이야기로 재해석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전부 예수님 이야기로 풀려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 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라고 선포하기 시작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율법을 지킬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칵 뒤집어진 것입니다.

졸지에 바울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바울도 예수님처럼 이단으로 정죄 당하고 유대인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고 급기야는 죽임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기존의 형제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여서 결국에는 죽임을 당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으니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들이 할 일이 없다고 하면 인간의 행함에도 의가 있다고 하는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 전화를 한 분도 아가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너무도 생소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아가서의 설교나 주석이나 강해 집을 보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전부 성도들에게 이렇게 하라는 식의 성화이야기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시종일관 전부 창세전 언약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을 하고 있으니까 놀랍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가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오는지 희한하다는 것입니다.

 

이건 어쩌면 알레고리가 아니냐! 라고 트집을 잡고 싶은데 잡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증거되는 알레고리 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알레고리로 풀겠다고 했어요.

알레고리란? 비유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어 있어요.

바울도 구약을 영적으로 해석했어요.

영적 해석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두 아내를 두 언약으로 풀었잖아요.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로 풀었잖아요.

베드로도 노아 홍수 사건을 세례로 풀었어요.

이게 모두가 알레고리에요.

 

알레고리는 원래 성경 해석의 한 방법이었어요.

그런데 이단들이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풀면서 나쁘게 전락한 것입니다.

이단들이 그르게 해석한다고 해서 알레고리 해석을 터부시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가서를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푸는데 알레고리 라고 비판을 한다면 달게 받겠다고 했어요.

 

이게 중요한 이야기인데 참고 하세요.

아가서를 솔로몬과 술람미의 남녀 간에 에로스적인 사랑이야기로 풀면 역설적이게도 성경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진짜 이단들이 즐겨 쓰는 알레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대로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로 해석한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이단적인 알레고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이지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가 아니에요.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술람미를 가지고 연기를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에 포카스에 맞추어져 있으면 안 되고 그 속에 담겨진 영적인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이 그러해요.

예를 들어서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님입니다’ 라고 하면 바울이 말한 성경적인 좋은 알레고리 해석이 되어요.

그런데 구약의 ‘안식일이 신약의 주일이므로 주일을 지킵시다!’ 라고 하면 그건 진짜 나쁜 알레고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인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에요.

 

예수가 안식일의 주인이고,

예수가 율법을 완성하셨고,

예수가 흠 없는 짐승의 실상이에요.

 

성경 해석의 포카스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느냐가 중요해요.

 

복음은 단순해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요.

아주 단순하잖아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하면 복잡해지는데 예수 믿으면 구원받아요.

 

이것도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에 한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로 주어지잖아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단순해요.

그냥 믿어지니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복잡해집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으면 방법론을 찾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제 주장은 복음은 하나님께로 난 자를 겨냥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어요.

어차피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알 수가 없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 수 없다고 했어요.

이는 하늘의 말은 인간들에게는 알아먹을 수 없는 방언(方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육으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방언이에요.

비밀(秘密)이에요.

 

고린도전서 2장을 봅시다.

 

고전 2:1-10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바울은 십자가를 인간의 지혜로 전할까봐서 경계했어요.

예를 들어서 자기 학식이나 자기 조건으로 이해를 시킬 까봐서 염려했어요.

바울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최고로 유명한 신학교 출신이에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바울은 박사 학위를 7개 정도로 받을 수 있는 천재였어요.

그만큼 많이 배우고 똑똑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똑똑함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였어요,

인간의 똑똑함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만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까 자기가 자랑하던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는 원수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세상 지혜가 복음을 전하는데 도리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가문이나 학벌이나 인간의 자랑거리는 모두가 배설물처럼 버려야 할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 학문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하고 바울은 달라요.

 

사울이 죽고 바울이 되었어요.

사울은 옛사람이고 바울은 새사람이에요.

사울은 아담 안에 사람이고, 바울은 예수 안에 사람이에요.

사울은 율법으로 예수를 해석했지만, 바울은 예수로 율법을 해석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사울은 정통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정통 신학을 배설물로 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율법을 해석했어요.

사울 신학과 바울 신학은 하늘과 땅만큼 완전히 달라요.

 

사울은 인간의 지식과 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했고,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경을 해석했어요.

사울은 십자가 밖에 사람이고, 바울은 십자가 안에 사람이에요.

 

인간 쪽에서 거룩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성화주의 목사들은 다 사울 계통이에요.

사울식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바울식 신앙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에요.

 

저도 과거에는 사울 식으로 성경을 해석했어요.

그래서 교인들에게 열심과 충성을 강조하고 성화하여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인간의 행함을 강조했어요.

그러나 저에게도 바울처럼 다메섹 사건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지금은 부족하지만 모든 성경을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십자가가 안 보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십자가만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니까 십자가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도 미흡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어요.

성경 해석은 성령만이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성령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셨어요.

일차적으로 모든 성도는 성경을 해석 할 수가 있어요.

원칙론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어요.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자로 세우고,

어떤 사람은 섬기는 자로 세웠어요.

가르치는 자에게는 지혜의 말씀에 은사와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주셨어요.

이건 세상 학벌과 상관없어요.

 

쉽게 말할게요.

지식의 은사란? 원리를 깨닫는 거예요.

지혜의 은사란? 원리를 잘 작용하는 거예요.

흔히 재주가 좋은 아이들을 보면 ‘야! 그 녀석 지혜롭다’ 그러잖아요.

반대로 뭘 많이 알면 ‘그 녀석 지식이 많네!’ 라고 하지요.

 

예를 들어서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성경을 보는 안목이 탁월해요.

성경 전체의 흐름을 예수님의 새 언약 중심으로 풀어요.

한마디로 성경의 원리를 잘 가르쳐요.

 

그러나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원리를 잘 풀어서 이해를 시켜요.

지혜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설교하는 것을 보면 쉬워요.

귀에 속속 들어와요.

 

지식은, 음식 재료와 같고,

지혜는, 그 재료로 맛나게 요리하는 것과 같아요.

신학자는 레시피를 가졌고, 성령의 감동을 입은 목사는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식이라면,

십자가 안에 담겨진 의미를 성도들의 구원이야기로 잘 풀어주는 것은 지혜에 속한 것입니다.

목사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쉽게 잘 풀어주는 사람이에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이에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요.

인간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일을 가늠 할 수가 없었어요.

최고의 지혜자들이 모여서 한 일이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의 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오로지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성도만이 알아먹을 수 있어요.

자기 백성들에게만 성령을 주어서 알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만 알아먹게 하려고 비밀로 하였어요.

이건 만세전부터 이미 예정된 것이에요.

 

성경은 비밀이에요.

비밀이라는 말은 감추어졌다는 뜻입니다.

누구에게 감추어졌나요?육(肉)입니다.

 

십자가 이야기는 육으로는 알 수가 없는 방언이에요.

방언은 성령께서 통역을 해 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어요.

성령께서 아가서를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통역을 해 주세요.

 

지금 제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아가서를 예수님 이야기로 통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게 주신 성령의 지혜와 지식의 은사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를 예수님이 성도를 구원하는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말씀의 홍수 시대입니다.

하루에도 인터넷에 수많은 설교들이 쏟아지고 있어요.

홍수 속에 생수가 없듯이 설교의 홍수 속에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이상한 십자가이고 이상한 예수에요.

인간 입장에서 바라본 예수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라요.

십자가를 말하는데 십자가의 의미를 몰라요.

습관처럼 예수님 사랑을 말하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희귀해요.

예수를 오래 믿을수록 예수를 닮는 게 아니고 마귀를 닮아가고 있어요.

 

교회가 클수록 절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 했으면 요한계시록 18장에서는 종말의 교회를 음녀라고 하면서 각종 귀신의 영들이 모인 귀신의 처소라고 말하겠어요.

교회가 성도들의 피에 취하여 있다고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은 구중궁궐과 같아요.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신앙적인 말과 세상에서 사용하는 말이 따로 있어요.

종교적인 말을 하여야 신앙이 있는 것처럼 되었어요.

성경적인 말을 사용하면 거룩이고 세상적 언어를 쓰면 비거룩이라고 여겨요.

 

제가 아가서를 쓰면서 가장 난감한 것이 언어 문제에요.

어떤 말로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할지 난감 할 때가 많아요.

아가서는 사랑이야기잖아요.

사랑이야기는 남녀 간의 적나라한 말들이 오고 갈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남녀 간에 속삭이는 달콤한 사랑의 언어들을 쓰면 ‘너무 세속적 표현이 아니냐’ 라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쓰는 말은 밀어(密語)에요.

꿀처럼 달콤한 말이에요.

타자가 들으면 오글거려요.

둘만이 쓰는 은어이다 보니까 오글거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남녀 간에 달콤한 언어를 쓰기가 민망한 것입니다.

꼭 삼류 에로소설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요.

가능하면 억제를 하고자 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이야기를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처럼 사실감을 드러내려고 하자니 어쩔 수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움이 될까 해서 인용합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면 귀족 출신의 여자와 부두 노동자 청년과의 사랑 이야기가 나옵니다.

귀족 출신의 여자는 정해진 틀 속에서 조신한 숙녀로 길들여지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자유라곤 찾아 볼 수가 없어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으로 위선으로 길들여진 절제된 답답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부두 노동자인 남자는 매사에 자유분방하게 살아갑니다.

 

두 사람이 우연히 갑판에서 만나게 됩니다.

남자가 침을 뱉는데 그 모습을 여자가 봅니다.

여자가 지금까지 배워온 귀족의 법도에 의하면 남자의 그러한 행위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더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자유분방한 그 남자의 모습이 너무도 부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를 눈치 챈 남자가 여자에게 자기처럼 침을 뱉어 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러한 짓은 귀족 여인네들의 법도에 어긋난다고 망설이다가 남자가 자꾸 권하니까 마지못하여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동안 억눌렸던 자유를 맛보게 해 준 것입니다.

그 후 위선의 격식을 벗어버리고 그 남자와 함께 자유분방한 행동을 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사랑을 하게 됩니다.

여자는 남자를 통해서 그 동안의 화석화 된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위선으로 가득한 재벌의 약혼자를 버리고 자유분방한 부두 노동자를 택하게 됩니다.

 

귀족으로 훈련을 받을 때는 지옥이었는데,

귀족의 위선의 옷을 훌훌 벗어 버리고 나니까 천국인 것입니다.

침 뱉는 것조차 맘대로 할 수가 없던 법에서 벗어나니까 천국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를 그렇게 믿고 있어요.

교인들이 교회의 법도(法道)에 매여 버렸어요.

마치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는 신앙에 가두어져서 화석화된 신앙생활을 하던 것처럼 이 시대 교인들도 교회의 전통(傳統)과 유전(遺傳)에 가두어져 버렸어요.

 

틀에 박힌 종교적 언행심사에 가두어져서 신앙이 화석화 되어 있어요.

그러다 보니 언어 구사도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하는 것입니다.

그게 거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언행과 교회 밖에 하는 것이 너무도 달라요.

성경적 언어는 성(聖)이고,

세상 말은 속(俗)이아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말도 속된 말과 거룩한 말로 구분을 해 놓았어요.

 

살아가는 모든 것을 구획정리하듯이 성과 속으로 구분했어요.

그러다 보니 유행가라도 하면 무슨 염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쳐다보는 것입니다.

전부 인간의 행동을 성과 속으로 구분을 해 놓아서 그래요.

노래방이라도 가면 타락했다고 해요.

맥주라도 한 잔 마시면 무슨 벼락을 맞는 줄 알아요.

 

회식자리에 가서도 사이다를 마시면 성이고 맥주를 마시면 속이에요.

찬송가는 성이고 유행가는 속이에요.

노래방에 가서도 찬송가를 불러야지 유행가를 부르면 안 되어요.

이런 것은 모두가 목사들이 율법적으로 성과 속을 분리시켜서 가르쳐 놓았기 때문이에요.

 

교회는 성이고, 교회 밖은 속이에요.

직업도 성과 속으로 구분해 놓았어요.

교인들이 하는 식당에서 술을 안 팔면 성경적이고, 술을 팔면 세속적이라고 여겨요.

기독교 서점을 하면 성스러운 직업이고, 술을 파는 식당이라도 하면 속되다고 여겨요.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직업을 가질게 없어요.

장로나 권사가 되면 전부 기독교 서점을 하려고 해요.

 

거룩은 이 땅에 없어요.

인간에게는 거룩이 안 나와요.

예수님만 거룩이에요.

예수님만 죄가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오로지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예수님은 욕을 해도 성(聖)이고, 창기들과 어울리고 포도주를 마셔도 성(聖)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거룩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이고 속(俗)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밖은 다 죄인이므로 다 속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는 다 선이고 예수 밖에서는 다 악인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지요.

감사함이란?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여기라는 말입니다.

우상의 제물도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면 우상의 제물이 아니고 그냥 음식이에요.

우상은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우상이에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흔히들 교인들은 제사 음식은 우상의 제물이라고 안 먹잖아요.

그래서 교인들은 제사상에 올려지지 않은 음식을 먹어요.

똑 같은 음식인데도 제사상에 올려지면 속된 것이고,

제사장에 올려지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말해서 제사를 지낸 음식을 그 사람 몰래 아니라고 하면서 먹으라고 하면 거리낌 없이 먹어요.

반대로 제사상에 올려지지 않은 음식도 제사 음식이라고 하면 더럽다고 안 먹는 것입니다.

음식 자체는 변한 게 없는데 자기 생각에 의해서 성과 속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본인이 우상이냐 아니냐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우상이라고 보면 다 우상이고 아니라고 보면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마음껏 먹은 것입니다.

다만 건덕상 연약한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서 가려서 먹었어요.

 

누가 물어요.

목사님 술 먹어도 됩니까?

그건 본인 마음대로 하세요.

술 먹는 것을 죄라고 여기면 죄이고 아니라고 여기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가 중요치 않고 어떤 정신으로 사느냐가 중요해요.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의식하고 감사하면서 살면 되어요.

 

유행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으면 훌륭한 찬송이 되어요.

반대로 찬송가도 은혜를 모르고 부르면 유행가가 되어요.

찬송가를 불렀느냐 유행가를 불렀느냐 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마음으로 불렀느냐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부르면 다 찬송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 이지 어떤 노래를 불렀느냐가 아니에요.

 

유행가를 불렀느냐 찬송가를 불렀느냐가 본질이 아니고,

내가 죄인인줄 알고 나에게서는 의가 없음을 알고 예수 안에서만 의가 된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고 살면 되어요.

 

사이다를 마셨느냐 맥주를 마셨느냐가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가 중요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평생 맥주 마시고도 천국에 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서 평생 사이다만 마신 사람은 지옥에 갑니다.

 

‘난~ 죄인일 뿐이고!’

‘예수 안에서 의인이 되었어!’ 라고 사시면 되어요.

이런 정신으로 마음대로 사세요.

그게 아주 훌륭한 신앙생활이에요.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알고 살면 모든 것이 성이고 모르고 살면 모든 것이 속된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장황하게 하는가 하면 아가서를 강해하면서 언어 문제 때문에 힘들어서 그래요.

사랑이야기를 하는데 있어서 노골적이냐 아니냐가 본질이 아니고 왜 이런 말을 하느냐를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점잖은 말이 복음적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복음이에요.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을 아가서에서는 솔로몬과 술람미라는 사랑을 표현하잖아요.

부부간의 사랑이야기로 말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언어가 노골적인 것입니다.

 

사랑을 더 세심하게 느끼라고 노골적인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부부간의 사랑이니 앨범 속에 있는 빛바랜 사진처럼 오래된 경험을 되살려서 뼈를 세우고 살을 입혀서 리얼하게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해하고 들으세요.

 

언어를 트집 잡지 말고 그 언어가 토해내는 의미를 붙잡으세요.

그래서 주님과의 깊은 사랑 속으로 빠져 드세요.

그리고 느끼세요.

 

바람결에 피부가 파르르 떨리듯이 주님의 사랑을 손으로 만진바가 되고 눈으로 본 바가 되고 귀로 들은 바가 되세요.

만물을 통하여서 오감(五感)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 보세요.

느껴보세요.

그리고 토하여 내세요.

 

‘나의 주시여!’

‘나의 신랑이시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나도 향을 토해내세요.

 

메마른 심령 속에 아가서가 이슬처럼 촉촉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내려서 부드러워지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기를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기를 바래요.

 

주님의 사랑으로 좀 넉넉해지세요.

 

좀 흐믈흐믈 해지고!

좀 나긋나긋해 지시고!

좀 말랑말랑 하시고,

좀 살랑살랑해 지세요.

 

주님과 사랑 좀 하세요.

그래야 술람미가 솔로몬의 몰약 향낭을 품고 솔로몬의 사랑을 토해 내듯이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토해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솔로몬과 술람미가 서로를 어떻게 칭찬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노래에요.

 

아 1:15절.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공동번역

솔로몬이 감탄을 합니다.

술람미를 바라보니 너무도 예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 예쁘냐고 감탄을 하고 있느느 것입니다.

 

‘야! 어쩜 저렇게 예쁠까!’

‘보면 볼수록 예쁘단 말이야!’

‘세상에서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없어!’

‘수많은 여인 중에서 당신이 최고야!’

‘그대가 정녕 내 여자란 말이야!’

‘너 내꺼 맞지!’

 

최고의 수식어를 동원하여서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복하여 감탄하고 또 감탄하는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빠져 드는 것입니다.

 

왜 만왕의 왕이 가장 비천한 여인에게 빠져 들까요?

빠져들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닙니까?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이유는 술람미 속에 온통 솔로몬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에 푹 빠져 있어요.

술람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술로몬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하고 있어요.

어디를 보아도 솔로몬의 사랑이 배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의 눈에 더 없이 예쁜 것입니다.

 

‘이리 보아도 내 사랑이고!’

‘저리 보아도 내 사랑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 이스라엘의 결혼풍습을 통하여서 신부는 신랑이 보낸 옷과 빙폐물로 단장을 한다고 했잖아요.

술람미가 솔로몬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하디 천한 노예가 무슨 단장 할 것이 있겠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준 것으로 온 몸에 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 의(義)를 버리고 예수님의 의(義)로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나를 감추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염소 털로 매끈매끈한 곳은 보이지 않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고 합니다.

 

레 2:13절.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모든 소제 물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전체를 말해요.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성도의 삶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을 산 제물이라고 했어요.

 

이를 언약의 소금이라고 합니다.

모든 소제물에 소금으로 맛을 내듯이 성도의 모든 삶에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묻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산다는 감사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화하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은 자기에게서 예수님의 흔적이 많이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많이 토하여 내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내가 약할 때가 가장 강함이라고 하지요.

나의 무너짐 속에서 예수님의 살리심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강하게 하지 않아요.

약하게 하세요.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에서가 아니라 엄마 없인 못살아서 엄마 치맛자락만 붙잡고 사는 야곱으로 만들어요.

그래서 늘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고 해요.

내가 약할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강할수록 멀어져요.

 

술람미도 약하니 솔로몬을 더 사모하는 것입니다.

술람미처럼 예루살렘 여자들로부터 천대받고 멸시받고 조롱을 당하지만 솔로몬의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인내하면서 약속하나 붙잡고 사는 것이 강함이에요.

 

솔로몬의 눈에는 그 모진 핍박 속에서도 자신이 한 약속 하나 믿고 살아가는 술람미가 그렇게 예쁜 것입니다.

그러니 감탄하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자기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예쁜 것입니다.

술람미는 자기 능력으로 핍박을 이겨낸 것이 아니에요.

솔로몬의 사랑의 힘으로 버텨낸 것입니다.

바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살기 때문에 예쁜 것입니다.

 

율법 신앙은 내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율법 신앙을 좋아하는 것은 믿음이 없이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신앙은 자기의지만 강하면 얼마든지 할 수가 있어요.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하면 할 수가 있어요.

마음도 마인드 컨트롤로 다스려요.

 

성화주의자들 보세요.

마치 수절과부가 밤마다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끓어오르는 욕정을 이기듯이 성화주의 율법주의자들도 마음을 다스리고 또 다스려요.

참으로 대단해요.

 

인간적으로 이건 인정해 주자고요.

하지만 이건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이 아니에요.

신앙은 아니더라도 그들의 노력은 인정하자고요.

 

율법 신앙은 자기 보람이 있어요.

뿌듯함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 긍정이 있으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모두가 화려한 친정집 가문의 후광을 입고 있어요.

모두가 호족들의 딸이라서 정략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친정이 든든해요.

그러니 자기 능력으로 단장을 하고 솔로몬에게 나아오는 것입니다.

자기 것으로 단장을 하니 스스로 얼마나 예쁘다고 하겠어요.

자기가 장만한 온갖 장신구로 단장을 하잖아요.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합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모두가 솔로몬이 준 것으로 치장을 했어요.

술람미는 온 몸에 솔로몬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걸이도 솔로몬이 준 것이고,

귀걸이도 솔로몬이 준 것이고,

팔찌도 솔로몬이 준 것이고,

옷도 솔로몬이 준 것이고

신발도 솔로몬이 준 것이에요.

 

복음적인 의미로 보면,

술람미는 예수님의 의(義)로 나오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은 율법의 의(義)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자들이 외출을 할 때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보고 하잖아요.

장롱 속에 있는 옷을 다 입어보잖아요.

옷 하나 입는데 한 시간이 걸려요.

거기다가 머리단장 하는데 한 시간!

화장하는데 한 시간!

화장도 했다가 고치고!

그렸다가 지우고!

아이라인 하나 삐뚤면 그것하나 30분 그려요.

자기 마음이 들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치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지 남편의 마음에 드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화장을 하고 옷을 입는 것은 상대방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하는 거잖아요.

상대방이 예쁘게 보아야 예쁜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명품을 걸치고 랑콤으로 떡칠을 해도 상대방이 싫으면 소용없어요.

헛수고요.

 

여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자기가 예쁘면 남편도 예뻐하는 줄 아는 거예요.

아니에요.

남편은 남편이 바라는 것을 할 때 이뻐해요.

 

남자 입장에서 말합니다.

 

남편이 옷도 이게 좋겠는데 그러면 알았어! 하고 입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러면 꼭 당신은 패션 감각이 없어!

그러면서 꼭 자기 고집대로 입어요.

그리곤 나 예뻐!

그런다고요.

그럼 말하기 싫어서 그냥 가자 그래요.

말하면 짜증내잖아요.

말을 해 보아야 듣지도 않으니 싸우기 싫으니 건성 건성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좋은데 남편은 싫어요.

남편은 말을 듣는 것을 바라지 자기 색깔 내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아내는 남편의 마음에 들도록 해야지 다른 사람의 이목에 집중하고자 하면 안 되어요.

이건 아내나 남편이나 동일해요.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해요.

그래서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자신이 판단능력이 상실되어 있어요.

 

그러나 상대방은 제 삼자 입장에서 보잖아요.

그러니 상대방이 코멘트가 맞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느 인간도 상대방의 코멘트를 듣지 않아요.

자기고집대로 해요.

그러니 상대방으로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여자와 술람미가 그래요.

술람미는 자기 생각이 없어요.

솔로몬이 입으라고 하는 옷을 입고 신랑이 하라는 것을 해요.

그러니 솔로몬의 눈에는 최고로 예쁜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자들은 고집이 쎄요.

자기들이 좋은 것으로 치장을 했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자는 순종하는 여자를 좋아해요.

제일 싫어하는 게 고집이 센 여자에요.

 

사랑받은 여자는 사랑받을 짓을 하고,

미움 받는 여자는 미움 받을 짓을 해요.

사랑하고 미워하는 대상이 솔로몬이면 솔로몬이 기뻐하는 짓을 하면 되는데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고집이 쎄기 때문에 자기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율법 신앙은 자기 고집이 살아 있으니 남편의 말을 안 들어요.

예수님이 내가 다 해줄게 그러잖아요.

그런데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제가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겠습니다.

그러고 있어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스스로에게 흐뭇해하고 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옛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의 모형이고,

술람미는 새 언약 아래 있는 성도의 모형이에요.

 

성도는 자기 것이 없어요.

자기 생각도 없어요.

예수님이 준 것으로 치장을 해요.

그러니 예수님이 성도를 보면 기쁜 것입니다.

 

‘어이쿠~ 저 녀석! 내가 준 것으로 치장을 했네!’

‘아이고~ 이뻐라! ’

 

보면 볼수록 예뻐 죽겠는 거예요.

솔로몬이 술람미가 얼마나 예뻤으면 네 번씩이나 찬사를 보내겠어요.

 

‘야! 예쁘다!’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답냐!’

‘눈이 부시게 화려하다!’

‘와~ 매력이 넘친다!’

‘보면 볼수록 예뻐 죽겠어요!’

 

여자에게 있어 남자가 ‘예쁘다’ 라고 하는 말은 최고의 찬사에요.

여자는 남편의 사랑을 먹고 살아요.

한 남자의 사랑을 받고 사는 여자는 행복해요.

이게 평범한 것 같지만 이런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아요.

 

모든 여자(인간)는 사랑을 받고 싶어 해요.

항상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고 살아가는 존재들이에요.

그래서 사랑에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해요.

 

아내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으로 단장하면 되어요.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되어요.

상대방이 바라는 것에 순종하면 되어요.

그게 사랑받는 조건이에요.

 

지금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가 그래요.

그러니 환장하는 것입니다.

 

‘당신 한 번 돌아봐!

그러면서 ‘야! 내 색시 예쁘네!’

‘당신은 어여쁘고 어여쁘다’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눈을 쳐다봅니다.

 

술람미의 눈을 비둘기의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 1:15절.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술람미의 눈을 보니까 그 속에 솔로몬이 보이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의 눈동자 속에 비췬 자기 모습을 보면서 ‘야! 당신은 어쩌면 당신 눈 속에 나만 담아 두었어!’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둘기 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을 비둘기의 눈이라고 한 것은 비둘기의 눈에 특징을 가지고 하는 말이에요.

비둘기 눈의 특징이 있겠지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잖아요.

그러면 성경 속에 비둘기가 나오겠지요.

비둘기가 바라본 눈이 있을 것 아닙니까?

 

성경에 보면 최초로 비둘기가 나타난 사건이 있어요.

창세기 8장을 보면 노아가 홍수 후에 방주에서 물이 감했는지 알려고 두 새를 내어 보냅니다.

먼저 까마귀를 내 보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썩은 시체 먹는다고 오지 않았어요.

 

그러자 노아가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냅니다.

비둘기는 아직 물이 감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 방주로 돌아옵니다.

7일을 기다린 후에 비둘기를 다시 내어 보냅니다.

이번에는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것입니다.

7일을 기다린 후에 다시 비둘기를 내어 보내었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비둘기가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온 것입니다.

심판 후의 새로운 세상은 평화의 세상인 것입니다.

은혜의 세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했지요.

“성하다” “밝다” 라는 말은 ‘올 바로 본다’ ‘하나만 본다’ 라는 뜻입니다.

올바로 본다는 말은 새로운 세계를 본다 라는 뜻이에요.

 

심판 후에 열린 세상은 새로운 세상입니다.

홍수가 끝난 땅은 하나님의 은혜를 머금고 있는 땅입니다.

비둘기가 새로운 세상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비둘기가 노아에게 새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어다 준 것입니다.

 

새 감람나무란?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나무에요.

옛 것은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는 말이에요.

감람나무는 평화를 상징해요.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는 평화의 시대란 말입니다.

다시 심판이 없는 세상이에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어요.

하나님이 그 제물을 흠향하시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고 언약을 했어요.

흠 없는 제물의 피를 보시고 언약을 한 것입니다.

이게 노아 언약입니다.

 

누구든지 흠 없는 제물의 피로 인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 사실을 아는 자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자에요.

이런 사람에게는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나 흠 없는 제물의 희생을 모르는 자는 홍수 이전의 인간과 동일한 인간으로 취급을 당하여 징벌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홍수 이후의 세상은 평화의 세상이에요.

그 평화는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 평화의 세상을 비둘기가 전해 주었어요.

 

그래서 비둘기를 평화의 새라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의 눈을 비둘기의 눈이라고 하는 것은 술람미는 평화를 아는 눈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자신이 누리는 평화가 솔로몬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진 것을 알아요.

그러니까 술람미는 솔로몬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비움입니다.

이를 낮아짐입니다.

솔로몬의 낮아짐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과 같아요.

솔로몬은 왕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술람미를 사랑해 주었어요.

이건 자기희생이에요.

 

술람미는 이런 솔로몬의 낮아지심으로 자신을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왕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사랑해 주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므로 자신이 누리는 이 사랑은 솔로몬의 피 흘림(낮아지심)으로 주어진 것임을 알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술람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자기 눈에 솔로몬만 담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자기 눈 속에 솔로몬만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솔로몬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을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서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너의 눈은 비둘기의 눈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 복음으로 살펴봅시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평화를 얻었다는 것을 보아야 해요.

내가 지금 누리는 이 안식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산물이에요.

그가 찔림으로서 우리가 나음을 입었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다고 하지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의 눈은 비둘기와 같은 눈을 가졌어요.

비둘기 같은 눈을 가진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인하여 내가 구원을 받았고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마귀의 참소가 빗발치더라도 예수님의 피로 당당히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건 내 신랑이 나를 위하여 흘린 피라고 당당히 말한다고요.

성도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보여요.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둘기의 눈은 하나의 사물만 본다고 합니다.

 

술람미의 눈에는 솔로몬만 보여요.

일편단심이에요.

술람미에게는 오직 한 사람 솔로몬만 보이는 것입니다.

 

눈은 거울(窓)이에요.

솔로몬은 술람미의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눈을 보면 그 눈 속에 사랑이 담겨져 있어요.

 

여러분도 사랑을 해 보셨잖아요.

눈과 눈이 마주치면서 사랑을 했잖아요.

서로의 눈 속으로 빨려드는 사랑 말이에요.

 

사랑을 하면서 그윽한 눈으로 사랑에 넘치면서 바라보는 그 시선을 기억하시나요.

사랑하면서 얻어지는 만족과 행복함으로 서로의 눈 속으로 빨려들잖아요.

자기야! 사랑해! 하면서 빨려들잖아요.

사랑하는 님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

 

이게 바로 비둘기의 눈이에요.

술람미가 지금 솔로몬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어요.

 

미움은 미움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아요.

미운 놈은 하는 짓마다 밉게 보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는 짓마다 사랑스럽게 보여요.

미움과 사랑은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사랑하는 눈으로 보면 더 사랑스러워져요.

그러니 더욱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랑을 쏟아부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찬사를 보내는 거예요.

 

사랑을 하면 그 사람의 눈에는 사랑하는 사람만 담겨져 있어요.

 

길을 가도 눈에 선하고!

일을 해도 눈에 선하고!

잠을 자도 눈에 선해요.

 

그 사람의 눈빛과 몸짓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잖아요.

그러면서 사랑의 달콤함을 회상하면서 느끼잖아요.

눈으로 선명하게 그리잖아요.

 

눈은 마음의 창(窓)이에요.

사람은 마음에 거리낌이 있으면 눈으로 나타나요.

미워하면 눈을 마주치지 못해요.

본능적으로 동공이 흔들리고 눈을 피하게 되어 있어요

 

범죄자를 잡아내는 수사기법 중에서 대질 신문이 있어요.

대질해서 서로의 눈과 눈을 마주보게 하면 진실을 알아내게 되어요.

인간의 본능은 속이지 못해요.

눈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동공이 커지거나 흔들려요.

그래서 욕을 하고 뒤에서 흉을 보는 사람은 만나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해야만 눈을 마주볼 수가 있어요.

그러니 사람의 눈을 보면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가 있어요.

사람과 사람의 사귐에서도 눈을 똑 바로 쳐다보지 않고 눈을 감는 사람은 진실성이 없어요.

이건 참고적으로 말하는 것인데 누군가와 말을 할 때 눈을 피하거나 하는 사람과 특히 눈을 감고 말을 하는 사람은 경계를 해야 해요.

이건 본능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를 하면서도 은혜를 받는 사람은 눈으로 빨려 들어가요.

저는 그런 사람하고만 눈을 마주치면서 설교를 해요.

눈을 마주보고 할 땐 그 순간 말씀 안에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땐 말씀이 더 힘이 있어지고 새로운 성령의 영감들이 떠 올라요.

그래서 눈을 바라보는 사람을 보면서 설교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람 뒤에 숨어요.

눈을 마주치지 않아요.

이런 사람은 거의가 설교를 듣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을 보다간 설교자가 말씀을 놓쳐버려요.

그러면 준비한 말씀도 다 까먹고 깜깜해져요.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들은 눈길을 주지 않아요.

설교 시간에 딴 짓을 하는 사람이나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람이나 숨는 사람은 다 건성으로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가 지겹게 들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꼭 트집을 잡아요.

신기할 정도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귀에 거슬리는 것만 잡아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에요.

꼭 밥에서 티를 찾아내고 밥숟가락을 놓는 사람과 같아요.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주일날 예배 마치고 같은 방향이라서 차를 같이 타고 가는데 차에 타는 순간부터 목사를 그렇게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트집 잡는데요.

전혀 트집 잡을 내용이 아닌데도 트집을 잡는다는 거예요.

말씀을 꺼꾸러 듣는다는 거예요.

그 사람 입에서 단 한 번도 좋은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 사람의 차를 타지 않는다고 해요.

 

이게 바로 눈이 어두워서 그래요.

그러니 온 몸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러니 매사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목사를 힘들게 하려고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럽니다.

목사가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합니다.

목사가 싫으면 그 어떤 설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그러면 둘 다 상처를 받아요.

그러니 자기 귀에 들어오는 설교를 하는 목사를 찾아 가라고 해요.

 

왜 허송세월 합니까?

그 귀한 시간을 내어서 교회에 와서 싸움을 하고자 합니까?

그런 사람은 불쌍해요.

 

한 성령 안에 있으면 비록 목사가 책망을 하여도 아멘으로 받아요.

성령은 우리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고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은혜를 드러내요.

그러니 어떤 말씀을 증거하더라도 시험에 들지 않아요.

그러나 마음이 어두우면 미움으로 가득해서 그 어떤 말을 하여도 시험에 들어요.

그래서 목사가 미우면 다른 교회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은 성도와 사랑하는 거예요.

너와 나가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주 안에서 하나가 된다고 해요.

 

그만큼 눈은 사람과 사람의 교감을 불러일으켜요.

여러분 사랑은 눈으로 하는 거예요.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잖아요.

보면 볼수록 빠져들잖아요.

 

술람미가 지금 솔로몬을 바라보는 눈이 그런 눈이에요.

그윽하게 ‘님이시여!’

‘그대가 정녕 나의 님이시란 말인가요!’

그러면서 솔로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쁘지 않겠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의 발 앞에서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같아요.

예수님의 눈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먹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뻤겠어요.

아마도 마리아는 눈으로 예수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랑의 보금자리인 침실을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침실이야기에요.

 

아 1:16-17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침실은 사랑하는 곳이에요.

둘만의 은밀한 공간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에요.

 

‘침상이 푸르다’고 하지요.

이는 생명이 흘러넘친다는 말입니다.

부부간에 나누는 사랑은 생명의 교감이에요.

사랑 속에서 생명이 싹터요.

봄에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듯이 사랑을 하면 생기가 돌아요.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예뻐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쁨이고 행복한 것입니다.

부부간에 소원한 일도 사랑을 하고 나면 다 사라져요.

옛 말에 부부는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각방을 쓰지 말고 한 이불 덮고 자라고 합니다.

이는 그 어떤 문제도 사랑으로 해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사랑은 지친 몸과 마음을 활력소를 주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현실을 바라보면 낙망할 것 밖에 없어요.

안팎으로 예루살렘 여자들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어요.

거기다가 오빠들의 미움으로 포도원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어요.

현실은 한숨과 절망뿐이에요.

기뻐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그냥 죽고 싶어요.

우울해요.

 

그러나 그 어렵고 힘든 현실을 이겨내게 하는 것은 솔로몬과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사랑을 나누었던 그 침실을 그리는 것입니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매서워도 남편의 사랑만 있으면 이겨낸다고 하듯이 술람미도 그 모진 핍박도 솔로몬과의 사랑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솔로몬과의 사랑을 회상하면 다시 힘이 솟았어요.

다시 만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들이 사랑을 나누는 집은 백향목 들보에다 잣나무 서까래로 지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우리 집은 백향목 기둥에다가 잣나무 서까래와 판자로 지붕을 만든 집에 둘만이 사랑하는 침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백향목 기둥과 잣나무 서까래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살펴봅시다.

솔로몬은 백향목과 잣나무로 성전을 지었어요.

백향목은 레바논의 헐몬 산에 이슬을 먹고 자란 나무에요.

 

헐몬 산의 이슬은 성령을 상징해요.

 

시 133:3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이란 ‘거룩하다’는 뜻이에요.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해요.

거룩한 산은 하나님 나라를 말해요.

 

헐몬산의 이슬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헐몬산의 이슬로 자란 백향목으로 성전을 지었다는 것은 성령이 성전을 지었다는 말이에요.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성도의 심령에 성전을 지어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지어준 집이 신약식으로 말하면 성령의 전인 것입니다.

 

백향목은 해발 약 3천 고지에서 자라는 나무인데 붉은 색으로 독특한 향이 나서 벌레를 쫓아내고 내구성이 강해서 끝까지 향을 뿜어낸다고 합니다.

백향목이나 잣나무는 아주 강한 향이 나서 해충들이 달려들지 못해요.

그래서 성전 안에는 해충과 벌레들이 없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항상 향기가 나는 것입니다.

 

또한 백향목이나 잣나무는 내구성이 강해서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요.

천년을 간다고 해요.

이는 한번 지으면 끝까지 원형이 보존이 된다는 말이에요.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내가 네게 준 사랑은 성전과 같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이는 술람미를 향한 사랑은 백향목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랑이 중간에 취소되거나 변개되지 않고 유효하다는 말이에요.

백향목의 냄새가 해충이나 벌레를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듯이 솔로몬의 사랑이 그 어떤 벌레나 해충과 같은 것으로부터도 지켜준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괴롭히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호하고 지켜준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술람미를 괴롭히는 해충들이에요.

벌레들이에요.

솔로몬이 이들로부터 술람미를 지켜 주었어요.

 

특히 잣나무는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사용한 나무에요.

잣나무로 판자를 켜서 역청을 발라서 바깥의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했어요.

잣나무는 물에 썩지 않아요.

 

또한 잣나무 편자처럼 그 어떤 물속에서도 썩지 않듯이 그 어떤 예루살렘 여자들의 참소에서도 다 지켜준다는 말입니다.

왕궁의 중신들의 상소가 빗발쳐도 솔로몬의 술람미에 대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걸 복음적으로 해석을 해 봅시다.

백향목 기둥과 잣나무 서까래로 지은 성전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성전을 말해요.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지은 성전은 예수님의 피로 백향목의 향기처럼 그 어떤 사단의 권세로부터 지켜주어요.

예수님의 피로 세운 성전은 그 어떤 마귀의 권세로도 무너뜨릴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은 그 어떤 마귀의 참소로부터도 무너지지 않아요.

 

한마디로 백향목과 잣나무로 지은 술람미와 솔로몬이 사랑을 하는 침실이 있는 집은 예수님의 피로 세운 교회와 같아요.

성도들 심령 속에 세운 성령의 전이에요.

성령이 성도들 안에 지은 심령 성전에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있어요.

 

성도는 새 언약 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쉼을 얻어요.

솔로몬의 침실이 항상 푸르듯이 새 언약 안에서는 항상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흘러넘쳐요.

항상 기쁨이 있고 범사에 감사함이 있어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 있으면 그 어떤 이단 교리도 달려들지 못해요.

철학과 헛된 속임수나 간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요.

사람의 궤술이나 풍조에 밀려 떠내려가지 않아요.

 

성화하여야 한다느니!

교회를 개혁하여야 한다느니!

성전을 지어야 한다느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영광 돌려야 한다느니 라는 것들과 같은 거짓말에 속지 않아요.

 

그 어떤 참소로부터도 끄떡없어요.

 

‘너 그따위로 예수 믿을래!’

‘너 그러고도 천당에 갈 수 있느냐!’

‘너 그러고도 신자냐!’

 

예수님의 피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넉넉히 이기게 해주세요.

마귀는 날마다 율법으로 성도를 참소해요.

말씀대로 살았느냐!

갖가지 성경의 조문들을 들고 와서 닦달을 해요.

 

이럴 때 성령께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율법적 요구를 완성했다고 알려주어요.

그러면 성도는 이 믿음으로 마귀의 참소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는 백향목과 잣나무로 지은 성전과 같아요.

성도는 이 피가 주는 자유함 속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비진리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요.

이렇게 해야 한다느니!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갖가지 이설(異說)들이 난무해요.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게 해주세요.

 

노아 방주는 교회와 같아요.

비 진리를 이기는 교회는 잣나무로 지은 노아의 방주처럼 예수님의 피로 도배를 해야 해요.

성도의 심령은 예수님의 피가 발라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 진리에 넘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가 밝히 보이는데 왜 다시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는 것은 종들이 지키는 초등학문이에요.

 

이제 말씀을 마칩시다.

우린 술람미처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약속을 받았어요.

성령이 보증으로 와 계세요.

 

성령이 와 계시다는 것은 입맞춤을 받았다는 말이에요.

입맞춤을 받았기 때문에 새 언약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지금 성령이 우리 안에 보혜사가 되셔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어요.

그러니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마세요.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흔들리지 마세요.

우린 헐몬 산에 이슬로 자란 백향목 궁전에 살고 있어요.

성령이 거하는 전이에요.

예수님의 피가 백향목의 향기가 되어서 그 어떤 해충으로부터 넉넉하게 지켜 줄 것입니다.

 

부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안심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우리 안에 백향목 궁전을 지어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지어주신 침실에서 마음껏 주님과 사랑을 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고 마음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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