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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9강.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아가 2:3-4)

by coroa 2020. 11. 11.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9강.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아가 2:3-4)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가서를 통하여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과 우리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관념적이고 희미하였는데 점차적으로 맛보아지고 실제화 되어가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더욱 더 주님의 사랑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고 삶으로 느껴지게 하옵소서. 아가서의 사랑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고 계심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더 깊이 맛보고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랑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몸도 하나가 되고 마음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한데,

마음이 하나 된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몸은 강제적으로라도 하나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강제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쉬운 말로 누가 좋고 누가 싫은 것은 우리 마음이 결정을 해요.

좋은 사람은 그냥 좋고 싫은 사람은 그냥 싫어요.

 

왜 좋고,

왜 싫으냐, 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그냥 좋고 그냥 싫어요.

그냥 어떤 사람은 좋고 어떤 사람은 싫어요.

 

이걸 영적으로 말하면 영이 같으면 좋고, 영이 다르면 싫어요.

한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좋고 한 성령이 아닌 사람은 싫어요.

교회 안에는 종의 영을 받은 사람과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이 있어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종의 영을 받았고,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아들의 영을 받았어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과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교제가 안 되어요.

서로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영이 다르면 아무리 사랑하고 싶어도 안 되어요.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의 지배 아래 있어요.

이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펴시고, 땅에 터를 세우시고, 사람의 안에 심령을 지으셨습니다.

 

슥 12:1절.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

 

하늘도 땅도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세요.

이건 마치 인간들이 컴퓨터 안에 각종 프로그램을 깔아 놓고서는 인간들이 마음대로 조정하는 것과 같아요.

컴퓨터가 움직이는 것 같아도 실제로 인간들이 작동을 하고 있어요.

 

인간의 마음은 컴퓨터의 각종 프로그램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각양의 성품과 성향들을 심어 놓았어요.

그리곤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은 악신으로 다스리고 다윗은 성신으로 다스리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예수님께서 때가 되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죽지 않게 막아 주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실존을 알려 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뭔가 크게 착각을 하고 있는데,,

그건 네가 각오를 다지고 의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귀가 지금 널 밀 까불듯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마귀가 베드로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밀 까불듯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럽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간섭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마음에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원래 인간의 마음은 마귀가 장악했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마귀의 통일천하였어요,

그런데 성도의 마음에 성령이 오셨어요.

성도 안에는 두 집 살림이 시작된 겁니다.

 

다른 말로 성도의 마음에는 두 법(法)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두 법은 두 주인(主人)이에요.

마귀와 성령이 서로 우리 몸을 지배하고자 다투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이기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마귀가 이기면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니까 다윗을 죽이려고 하고,

다윗에게는 성신이 임하니까 원수까지 용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은 하나에요.

둘 다 우리의 모습이에요.

사울은 우리 옛 사람의 모습이고 다윗은 우리 새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도 어떨 땐 천사 같기도 하다가도, 어떨 땐 마귀 짓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 입니까?

둘 다 나에요.

우린 두 사이에 끼어서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괴물이에요.

 

우리 생각에는 성령이 마귀를 박살내고 우리를 장악하면 인 되느냐고 하잖아요.

그런데 성령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아요.

성령이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몸에 예수그리스도의 흔적들을 새기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 몸에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때문에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드러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린 죄인입니다.

죄인이면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인에게 예수님의 사랑이 임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죄사함을 주어졌어요.

그리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은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은 것을 우리 몸에서 늘 드러나게 하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은 죄를 이기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역설적으로 죄에게 지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고 산다는 것을 드러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넘친다고 해요.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 덕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이 아니에요.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사는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신앙이란? 우리 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담아 낼 수가 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복음 복음 하면서 이 부분을 오해하고 있어요.

말은 복음이라고 하는데 뚜껑을 열어 보면 신자다움에 방점을 두고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만 인간의 행위에 포카스가 맞추어져서 설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예수 믿는 거에요.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못 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원함은 있는데 그 원함대로 살아내지를 못하니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니까 쪽 팔려서 못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알려 주시길 ‘야! 이놈아 그래야 네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 것이 아니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나는 네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잘난 척 하는 인간을 만들고자 온 것이 아니고 네가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하심으로 사는지 알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계신 성도는 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공로로 산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발 맏아들 만들지 마세요.

그렇다고 탕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에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긍휼의 자리에서 주를 바라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젖먹이가 어미의 젖을 사모 하듯이 주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여 나를 도와 주소서

‘주여 고맙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피 공로로 용서받고 삽니다!’ 라고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방치 한다는 말이 아니에요.

죄를 짓지 않도록 간섭을 하세요.

그러나 강제로 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려고 하면 네 이 놈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바울이 그러잖아요.

정답을 알겠는데 그 정답대로 살아 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미치겠네’ 라고 하면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줄꼬’ 라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두 법이 충돌하고 있는 겁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육신이 끄는대로 살라고 합니다.

이걸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싸운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성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 육신이 우리 마음먹은 대로 살도록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아요.

그 반대로 역사 한단 말입니다.

마치 바이러스 걸린 컴퓨터처럼 우리가 원치 않는 일들을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탄식한 내용이에요.

우리 육신(肉身)이 그래요.

우리 생각에는 몸뚱이가 하나님의 뜻에 순순히 따라주면 얼마나 좋겠느냐 라고 합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생각뿐이지 우리 몸뚱아리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우리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아요.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난 죄의 종이에요.

우리 몸은 죄를 짓는데 최적화가 된 몸이에요.

죄가 장악하고 있는 몸(땅)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러자 둘이 충돌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게 가나안 전쟁이에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하면서 가나안 원주민을 다 쫓아내지 않았어요.

조금 남겨 두었어요.

이는 이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시험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삿 3:1-6절.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 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듯한 인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너희는 반듯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로 살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긍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나안 원주민들을 가지고 시험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이 바로 우리 옛 사람이에요.

5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마침내’ 가나안 사람들과 혼인을 하여서 그들의 신을 섬겼더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라는 말은 ‘기어코’ 라는 말과 같아요.

‘그럼 그렇지 네가 별 수 있겠느냐’ 라는 말과 같아요.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는 뜻입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 것이 무엇인가요?

죄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좋아하는 게 있어요.

그것은 죄 짓는 겁니다.

죄인이 죄 짓는 것 이상 재미있는 게 없어요.

죄 짓는 것은 너무도 쉬워요.

왜냐하면, 죄 아래서 난 몸은 자동적으로 죄 짓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죄 짓는 것은 누어서 떡 먹기에요.

 

성령이 능력이 없어서 죄를 못 짓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령은 ‘너 그러면 안 돼’ 라고 싸인을 보내요.

경고음을 보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우리 몸은 ‘나 좋아하는 것을 할거야’ 라고 반발을 해요.

그럼 성령이 ‘너 그러면 혼난다.’

그럼 우리 몸은 ‘그래도 할거야’ 라고 하면서 육신의 소욕들을 좇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수수방관 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성령이 태클을 걸어요.

태클을 걸면 그 순간은 멈칫하면서 안 해요.

물론 그 순간뿐이에요.

 

그 때는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이러한 때를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안하던 짓을 해요.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이웃 사랑도 하고,

말씀도 지키고,

열심히 교회에 충성도 해요.

항상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말이에요.

 

성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령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어야 해요.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게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그 사랑은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을 어떻게 하게 하는지 살펴봅시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제일 먼저 아담에게 알려 준 것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왜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는 아담이 아직까지 영생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영생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지 영생하는 자로 창조가 되지 않았어요.

아담은 영생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아담은 자기 안에 영생을 담을 때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부러 영생하지 않은 자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담이 영생하는 자가 되도록 계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갓 창조가 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는 자가 되라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왜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하였을까요?

이는 영생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부는 신랑과 동격이에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영생하는 분이에요.

그렇다면 그에 신부도 당연히 영생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동질이고 동격이 되어서 혼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서 동질과 동격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하신 언약이에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아담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갖 창조가 된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일러 준 겁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는 말은 넌 아직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미 영생하는 자로 창조가 되었을 것 같으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하라고 말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러니 넌 생명과를 먹고 영생 하여야 한다고 알려 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은 생명과를 먹고 한 단계 거듭남이 있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 드러나지요.

 

누가 거듭나게 해 주나요?

생명과이지요.

생명과가 아담을 영생하는 자로 거듭나게 해 주잖아요.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옵니다.

아담을 영생하게 하는 것은 생명과에 있어요.

생명과를 먹어야 영생한다고 하였으니 생명과 속에 영생이 있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4절에 보면 예수님 안에 생명에 있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어요.

이를 거듭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영생하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아담은 예수님의 생명을 상징하는 생명과를 먹고 예수님과 같은 영생하는 존재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신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부로서 한 몸이 되어서 살아갈 수가 있어요.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과는 자연히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은 실체라고 합니다.

무엇을 위한 모형인가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모형이에요.

생명과는 모형이고 예수님이 실체에요.

 

쉽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먼저 창조하신 후 생명과와 선악과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고 난 후에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빼내서 창조했어요.

하와는 늦게 창조가 되었어요.

 

성도를 예수님의 신부라고 하지요.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 위치에 있고 아담은 성도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와가 창조되기 전에 아담 혼자 있을 때의 아담은 예수님의 신부 입장이에요.

여호와 하나님(예수님)은 신랑이고 아담은 신부에요.

 

이 그림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들 세계에 그려 놓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가지고 신랑과 신부를 표상적으로 그려놓았어요.

어떻게 그려 놓았는가 하면 아담을 신랑인 예수님 위치에 두고 하와를 신부 입장에 둔 겁니다.

 

원래 신랑과 신부는 한 몸이었어요.

한 몸이 잠시 분리 되었다가 합치는 것입니다.

이게 결혼이에요.

 

골로새서 1장 16절을 보면 만물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합니다.

 

골 1:16-17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리고 만물이 예수님 안에서 섰다고 합니다.

섰다는 말은 온전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만물을 의인화 하여서 아담(인간)으로 보세요.

그럼 아담은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고,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된 것이 되겠지요.

그래서 아담은 예수님 안에서 온전해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를 만물이 주께로 나오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구원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자기 몸을 찾아 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부부는 서로 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식으로 말하면 사랑이에요.

 

예수님과 성도를 신랑과 신부라는 이 원리를 아담과 하와라는 모형에게 적용해 봅시다.

 

성도가 예수님에게서 나왔다고 했지요.

그럼 아담은 예수님의 모형이니까 아담의 몸에서 성도의 모형이 나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그럼 아담의 몸에서 누가 나왔습니까?

하와가 나왔지요.

여자가 나왔잖아요.

 

그럼 하와는 예수님에게서 나온 성도의 모형이 되겠지요.

하와는 성도의 표상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를 전부 여성(女性) 명사로 쓰고 있는 겁니다.

 

아담 속에서 여자가 나왔지요.

그럼 아담과 여자가 온전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담 속으로 들어가야 온전해지겠지요.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하겠지요.

이걸 한 몸이라고 하고 통일이라고 해요.

이런 상태를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건 아담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담은 예수 안에서 나왔지요.

그럼 아담도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구원을 아가서에서는 사랑이라고 하고 있어요.

부부관계를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둘로 갈라졌던 몸이 사랑으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랑을 함으로서 한 몸으로 원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하와가 원래 있었던 아담 속으로 들어가야 온전해지는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골로새서에서는 그 안에서 선다고 합니다.

‘선다’는 말을 다른 말로 ‘온전해 진다’는 뜻입니다.

이해되시지요.

 

이런 사랑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도록 해 주셔야 해요.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로 완전(完全)해지게 해 주세요.

 

구원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원래의 자리는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을 일컬어 어린 양의 혼인잔치 하는 곳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것을 안식한다고 해요.

안식을 잔다고 하지요.

부부간에 사랑하는 것도 잔다고 하잖아요.

여보! 우리 자자!

그 말은 여보! 우리 사랑하자! 그 말이에요.

 

자고 싶으면 자기 혼자 자면 되지!

뭣 하러 여보! 우리 자자! 그럽니까!

부부간에 ‘자자’ 라는 말은 ‘우리 한 몸으로 합치자’ 라는 말과 같아요.

참 오글거린다!

 

‘안식이나!’ ‘사랑이나!’ ‘자는 것이나!’ 다 같은 말이에요.

동의어에요.

다 알면서.... 모른 척 합니까?

 

이걸 오늘 술람미와 솔로몬의 사랑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먹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술람미가 사과를 먹는다고 합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하나 된다는 말이에요.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솔로몬을 향하여 부르는 노래에요.

 

아 2:3절.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지난 시간에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당신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고 했지요.

이에 술람미가 화답하기를 솔로몬 당신은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라고 합니다.

자신은 그 그늘에서 기쁨을 얻었고 그 실과가 너무도 달콤해서 먹고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는 자신은 솔로몬 왕으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생명을 주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풀과 사과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해서 말하고 있어요.

그럼 수풀도 사람이고 사과나무도 사람이겠지요.

솔로몬을 사과나무라고 했으니 솔로몬 이외에 다른 사람은 수풀이란 말입니다.

수풀은 왕궁에 있는 남자들을 말해요.

 

솔로몬 왕궁에는 수많은 남자들이 있어요.

왕궁에는 수많은 문무 대신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울창한 수풀이에요,

 

그 많은 수풀 가운데 솔로몬만 사과나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술람미를 멸시하고 천대를 하였지만 솔로몬만 술람미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자신을 덮고 있는 기(旗) 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旗)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술라미는 솔로몬의 그 사랑이 사과처럼 달콤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란? 먹고 배부름을 주는 나무에요.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생명나무에서 열두 가지 실과가 맺힌다고 하지요.

그러니 사과나무는 생명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수풀은 실과를 맺지 않는 나무에요.

실과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왕궁에 수많은 남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모두가 생명이 없는 자들이에요.

솔로몬만 생명을 가진 사람이에요.

솔로몬만이 술람미에게 생명을 줄 수가 있어요.

 

이걸 복음적으로 말하면 솔로몬은 예수님을 상징하니까 예수님이 사과나무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에게만 생명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건 예수님만이 ‘참 신(神)’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인간들이 만든 수많은 신들이 있어요.

무당들을 보세요.

옛날의 유명한 장군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어요.

 

예수 이외 다른 신들은 모두가 다 가짜에요.

다른 신들은 수풀과 같이 울창하여서 사람들 눈에는 보기에는 좋지만 생명이 없어요.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란 말입니다.

 

구원은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생명을 주는 구원을 줄 수 있는 참 하나님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예수 이외는 천하 만민에게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어요.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지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이에 제자들이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레미야라고도 하도,

어떤 사람들은 선생이라고도 한다고 했어요.

 

모세나 엘리야나 예레미야나 선생들은 다 아담 안에서 난 죽은 자들이에요.

세상에 그 어떤 도인(道人)이나 지혜(知慧)자나 철학자(哲學者)라도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이들은 모두가 아담 아래서 나왔기 때문에 죽은 자에요.

 

석가모니도 아담 안에서 나왔고,

마호메트도 아담 안에서 나왔고,

공자도 아담 안에서 나왔고,

문0명이나,

이0희나,

정0석이나,

 

수많은 이단의 교주들도 다 아담 안에서 나왔어요.

모두가 과실을 맺을 수 없는 수풀이에요.

이들에게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꾼들이 있어도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어요.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죽은 것입니다.

너도 죽은 자이고 나도 죽은 자에요.

그 누구도 죽음에서 부활하지 못했어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뿐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과 한 몸으로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어요.

 

요 1: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이 죽은 세상에 생명으로 오셨어요.

죽은 자기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로 오셨어요.

 

두 종류의 나무가 있어요.

 

먹고 배부름을 주는 과실을 맺는 유실수(有實樹)가 있고,

관상용으로 눈으로 바라만 보는 관상수(觀相樹)가 있어요.

예수님은 유실수이고, 영웅호걸들은 관상수에요.

 

과실을 맺는 나무들은 하나 같이 볼품이 없어요.

가지들이 구불구불하고 못났어요.

그런데 거기서는 맛난 괴실들을 맺어요.

 

하지만 관상수는 전부 멋있어요.

쭉쭉 뻗어서 보기가 좋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먹을 것이 없어요.

 

관상수는 보기에는 좋아도 배부르게 하지는 못해요.

세상에 영웅호걸들은 멋있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없어요.

그들은 구원을 주지 못해요.

세상에 영웅호걸들은 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관상수에요.

 

눈으로 보아서 배가 부르지 않아요.

콩 한 알이라도 입으로 먹어야 배가 불러요.

산 사람에게는 입에 넣고 먹는 실과가 필요하지 눈으로 보는 멋이 중요하지 않아요.

 

이걸 가정주부에게 비유해 봅시다.

엄마는 자식들 입에 좋은 반찬 하나 더 먹이려면 손톱에 매니큐어 바를 시간이 없어요.

매니큐어 바른 손은 보기에는 좋아도 그 손으로 밭을 일구고 농사를 짓지 못해요.

 

과거 6.25 전쟁당시 인민군들이 공무원들을 찾아 낼 때 손을 만져보고 찾아냈다고 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 손은 굳은살이 박여서 투박해요.

그러나 공무원들은 펜만 굴리다 보니 손이 고와요.

공무원들은 고운 손을 가진 사람들을 지식층이라고 구별을 하고서는 그들은 부르조아 사상으로 물들었다고 하면서 숙청을 했다고 해요.

 

솔로몬의 눈에도 밥만 먹으면 손 가꾼다고 매니큐어나 바르고 소일하는 왕궁의 왕후들 손보다 포도원에서 일을 한다고 거칠어진 술람미의 손이 아름다워요.

술람미의 투박한 손으로는 먹고 배가 부를 양식이 생산 되지만 왕후들의 매끈한 손에서는 투기가 나와서 사람을 할퀴어요.

 

복음 전하는 목사들은 엄마처럼 멋을 내지 않아요.

그러나 세속적인 목사들은 겉만 뻔지르르해요.

세상 것으로 나 이런 목사라고 자랑해요.

세상 경력 내세우는 목사를 경계하세요.

 

학벌 자랑하고,

교회 큰 것 자랑하고,

무슨 무슨 단체 회장이니 라는 식으로 나 이런 목사요 라고 하는 자들 말이에요.

이런 것을 목사의 자랑으로 내어놓는 자들은 거듭나지 않은 목사들이에요.

거듭나고 하늘에 복음을 아는 목사는 이런 것을 자랑하지 않아요.

 

세상의 것들은 모두가 배설물과 같아요.

세상 것으로는 생명을 낳을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신앙에는 세상 것을 자랑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자라지 못해요.

생명은 거름더미에서 자라요.

자기 자랑이나 하는 목사 입에서 생명의 복음이 나오지 않아요.

 

하나님은 생명을 화려한 곳에서 자라게 하시지 않았어요.

곧고 쭉쭉 뻗은 눈에 보기 좋은 나무에게 과실을 맺히게 하지 않았어요.

배부르게 못할 것들은 화려함은 있지만 생명이 없어요.

하지만 배부르게 할 것들은 볼품은 없어도 생명이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에요.

 

이걸 말씀으로 풀어 봅시다.

생명나무 과실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이신 하나님으로 계셨어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나무 과실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두 말씀이 있어요.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이 있고,

밥처럼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어요.

하늘의 말과 땅의 말이 있어요.

하늘의 말 속에는 생명이 있고, 땅의 말에는 생명이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생명이 있지만 인간의 윤리 도덕은 생명이 없어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윤리 도덕적으로 착하게 산다고 해서 구원이 주어지지 않아요.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이 주어졌다는 것은 새 언약으로서 하늘의 말이고,

빛과 소금처럼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옛 언약으로서 땅의 말이에요.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에는 수많은 선생들이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옛 언약이라는 땅의 말로 선생노릇을 하고 있었어요.

모두가 유창하게 말을 했어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라서 논리적이고 듣기 좋아요.

듣기 좋도록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다 사용하여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어요.

 

거짓 종들은 사람들이 가능성을 부추기고 듣기 좋은 말을 해요.

그러나 그들의 말은 죽은 말이에요.

그들의 말 속에는 생명이 없어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인정머리가 없고 수술하는 칼처럼 날카롭고 아파요.

인간의 자존심을 뭉개 버려요.

예수님 말씀은 한마디로 정나미가 뚝 떨어져요.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데 누가 듣기 좋아 하겠어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요소가 없어요.

 

바울이 그랬지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의 죄를 고발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배제하니까 듣기 싫은 겁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의 공로는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아요.

오로지 어린 양의 공로로서만 세워지는 나라에요.

인간의 공로는 도리어 저주의 대상이에요.

예수 믿어서 좋은 교회를 만들고 좋은 가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인본주의 성화주의자들은 창세전에 구원 받기로 이미 예정이 되었다는 창세전 언약을 전하면 공격을 해요.

이미 예정이 되었으면 할 일이 없겠네 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조롱해요.

왜 성도의 행함을 무시하느냐,

창세전에 예정이 되었다고 가르치면 누가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을 내고 헌금을 내겠느냐,

그래 가지고 교회가 운영이 되겠느냐는 겁니다.

 

결국 신앙의 목적이 교회를 유지하고 보수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교회를 교회로 붙잡겠다는 겁니다.

이게 마귀의 생각이거든요.

 

마귀의 종들은 인간들이 흠모할 만한 것들로 치장을 했어요.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세상 것으로 유혹을 해요.

예수님의 초림 당시 마귀의 종들은 너무너무 화려했어요.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요.

예수님은 외모로는 촌사람이에요.

나사렛 촌놈이에요.

매력이 없어요.

 

마치 유실수 포도나무나 사과나무처럼 볼품이 없어요.

그러나 그 속에는 생명이 있었어요.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살아나요.

예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리고 상한 심령을 치료하고 유쾌하게 해 주세요.

듣기에는 거북스러워도 먹으면 힘이 생겨요.

 

술람미가 사과나무 그늘에서 쉼을 얻었듯이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의 그늘에서 쉼을 얻었어요.

예수님께서 율법이라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수풀이고 예수님은 사과나무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땅에 있는 자를 선생이라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너희의 선생은 오직 하늘에 있다고 했어요.

이는 예수님 자신이 선생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선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사과나무가 되고 자칭 선생이라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전부가 수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진짜이고 나머진 모두가 가짜란 말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은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남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그늘에 앉아서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쉼을 얻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의 조롱과 핍박을 솔로몬의 사과를 먹고 이겨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입만 열면 이것 지켜라 저것 지켜라 닦달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넌 그저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

‘내 품에서 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쉼을 얻으라’고 했어요.

 

예수님께서 쉬게 해 준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으로부터 쉬게 해 준다는 말인가요?

율법이지요.

율법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완성했어요.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아요.

예수 안은 율법으로부터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이에요.

예수 안에서는 율법이 힘을 쓰지 못해요.

 

술람미는 오빠들이 자신을 포도원으로 보내서 일을 시켰다고 했지요.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했지요.

이는 곧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한 것과 같아요.

그러나 이제는 솔로몬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복 오빠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가 없어요.

왕의 성은을 입었기 때문에 간섭할 수가 없어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모든 수고로부터 쉼을 준 예수님이라고 말한다면 술람미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운 오빠들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백성들을 강제 노역을 시켰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으로 강제노역을 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해방시켰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멍에인 십자가를 메고 쉼을 얻으라고 한 겁니다.

십자가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이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주는 은혜는 꿀처럼 달아요.

얼음골 꿀 사과처럼 달아요.

맛있어요.

시원해요.

 

한번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요.

다른 것은 못 먹어요.

그래서 그 맛을 또 찾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 피의 복음을 들은 성도는 율법 설교를 못 들어요.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고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는 은혜의 말씀만 들어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의 말씀을 찾아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이 주는 은혜를 알기 때문에 다시 천한 초등학문과 같은 인간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율법신앙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도 이 달콤한 맛 때문이에요.

솔로몬이 주는 자유와 안식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달콤한 실과란 솔로몬의 사랑을 말해요.

그래서 술람미는 그 사랑이 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자신을 잔치 집으로 인도하고 자기에게 사랑의 기(旗)를 꼽았다고 합니다.

 

아 2:4절.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旗)로구나”

 

이게 무지 무지하게 중요한 말입니다.

잘 들으세요.

 

잔치집이란? 큰 연회를 말해요.

원문에는 ‘포도주의 집’이라는 뜻이에요.

이는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증거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포도주의 집은 국빈을 모시고 큰 잔치를 배설하는 그런 자리를 말해요.

공개된 연회로서 가장 큰 잔치가 열리는 곳을 말해요.

외국에서 국빈이 오면 모든 문무(文武) 대신들을 모으고 만찬을 하잖아요.

 

마치 대통령 만찬 자리와 같아요.

그런데 솔로몬이 수많은 귀빈들이 있는 잔치 자리에서 술람미에게 솔로몬의 기(旗)로 덮었어요.

쉽게 말해서 왕의 망토로 덮어 주었단 말입니다.

요즘 식으로 솔로몬의 코트를 술람미에게 입혀준 겁니다.

 

만인(萬人) 앞에서 코트를 입혀주었다는 것은 ‘이 사람은 내 사람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즉 사랑을 표현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내 여자입니다’ 라고 표(表)를 해 준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흥분되지 않나요.

생각해 보세요.

글을 읽으면서 머리로 그림을 그려보세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요.

솔로몬 대통령의 만찬 자리에요.

온 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만 초청을 받은 곳이에요.

 

이제 만찬 시작 시간이 다 되었어요.

비서가 ‘대통령님이 입장 하십니다’ 라고 알립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起立)을 합니다.

그리곤 대통령이 들어오는 문을 행하여 일제히 모든 시선이 쏠립니다.

 

그런데 솔로몬 대통령이 술람미에게 자기 코트를 입힌 채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을 마치고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문이 열리자 대통령과 그 영부인이 손을 흔들고 나오는 것과 같아요.

 

솔로몬이 짠~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 이 사람이 내 여자입니다’

그러면서 사랑스럽게 감싸 안습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순간입니까!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나요.

어휴! 떨려!

짜릿해!

휴~

 

만찬장에는 일천 명의 왕후들도 있어요.,

수많은 왕족들도 있어요.

모두가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가들이에요.

이들은 술람미를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핍박을 했어요.

그런데 솔로몬이 술람미의 손을 잡고 자기 망토를 감싼 채 손을 흔들면서 들어오고 있어요.

 

술람미도 모인 군중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건 마치 시편 기자의 말대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고 계신 겁니다.

 

‘너희들 봐라!’

‘너희들이 핍박하던 그 여자다!’

‘이 여자가 바로 내 여자다!’

 

앞으로 이 여인에게 손을 대면 내가 너희들을 용서치 않겠다고 공표하고 있는 겁니다.

 

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신나지 않나요.

구원의 감동을 자식으로만 갖고 있지 말고 가슴 속으로 좀 느끼세요.

 

예수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신나는 일이에요.

그 어떤 놈도 손대지 못해요.

예수님이 그러셨다구요.

 

‘넌~ 내꺼!’

 

우리 꼬라지가 이래도 천사들도 흠모하는 어린 양의 신부에요.

그러니 좀 당당하세요.

징징거리지 말고!

세상 것이 없다고 기죽지 마세요.

 

믿음은 관념이 아니에요.

예수는 역사 속에서 지나간 위인이 아니에요.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세요.

 

성경은 옛날이야기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지금도 초대교회 성도들과 동행했던 것처럼 동행하고 계세요.

지금도 우리 현실 속에서 사도행전은 써지고 있어요.

 

어떤 분이 아가서를 통해 기쁨을 얻고서 그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댓글을 달아 놓으셨어요.

너무 감동적이라서 그대로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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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ko (2010.03.23 19:00)

 

오늘은 제가 혼자 꼬라지가 많이 났었어요.

30여 년 동안 교회 문턱을 넘나들면서도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으니 꼬라지가 날 수 밖에요.

목사님은 이렇게 살아라!

저것은 하지마라!

예수님은 금고 속에 가두어놓으셨는지 통 말씀 안하시고....

그러니 율법에 얽매여 꼼짝 달싹 하지 못하고 징징거릴 수밖에요.

이거는 아니다 싶어 서적도 읽어보고 인터넷 설교도 들어보고...

성경은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환장할 지경이었어요.

그런데 성령님께서 정 목사님을 만나게 해 주셨어요.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를 읽고 나서

아하! 이거구나!

너무 기뻐서 눈물이 다 났습니다.

숙제가 풀렸어요!

목사님을 통해서 말씀이 눈에 보여요.

귀에 들려요.

이제 성경이 읽혀져요.

이제 하나님이 저에게 직접 말씀하셔요.

이제 예수님과 사랑에 빠졌어요!

밤늦께 까지 데이트해요.

헤어지기 싫어요.

새벽 일찍 또 만나요.

지하철 출근길에도 꼭 같이 손잡고 출근해요.

일하다가도 시간만 나면 같이 있어요.

아니 24시간 내내 제 곁에 있어요.

전에는 주일날 오전 11시에만 살짝 만날려고 해도 만나주지 않았거든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예수님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인도해주시니

이런 맛에 목회 하시는 것 아닌가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는데 목사님 땡 잡으신 겁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건져 내셨으니!

감사합니다.

이단이면 어떻고 삼단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로만 제대로 가고 있으면 그만이지요.

예수님이 믿어주시잖아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따블로 감사드려요.

말로만 해가지고는 않 될 것 같은데 시간되면 식사라도 대접해야 될 텐대요.

언젠가 만날 날이 오겠지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나의 영혼의 아버지시여!

정 목사님 그대가 날 낳으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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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산 예수를 만났어요.

땡 잡았어요.

술람미가 된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만인이 보는 앞에서 여기 이 여인은 내 여자입니다! 라고 공표를 하셨듯이 예수님도 우리를 세상에다가 이 사람은 내 것이라고 공표하셨어요.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어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마귀 앞에서 여기 정낙원이 넌 내 꺼! 라고 공표했다고요.

그래서 저는 그 공표를 믿고 당당하게 사는 겁니다.

제가 큰 소리 치는 것도 이 사실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넌 내 꺼!’ 라고 깃발을 꼽아 주셨는데 내가 왜 기(氣)가 죽습니까.

비록 교회의 모습이 초라하고 교인들의 수가 적어도 낙심치 않고 큰 소리치고 사는 것도 다 든든한 예수님의 빽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나를 점령하고 넌 내 꺼! 라고 깃발을 콱 꼽아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 깃발이 보이지 않으세요.

창세전 언약이라는 이 깃발 말이에요.

그림을 좀 그려 보세요.

소 닭 보듯이 그러지 말고,

감정을 좀 느껴보세요.

 

아가서가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느끼는 거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사랑을 표현하잖아요.

꿀 사과처럼 맛있다고 하잖아요.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주님 고맙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해 보세요.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사랑은 표현하는 거예요.

 

이걸 신약 식으로 풀이 합니다.

 

신약의 깃발은 성령이에요.

 

제자들이 예수님이 죽자 기(氣)가 죽었어요.

전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어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다고 알려줍니다.

그리곤 승천하시면서 내가 아버지께 도착하면 성령을 보내준다고 합니다.

 

예수를 죽인 놈들은 기고만장 합니다.

이제 예수는 끝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주 생경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혀 같이 생긴 불덩이가 제자들이 있는 머리 위에 덮칩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뭔가에 붙잡힌 것처럼 이상한 말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쇼킹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꼭 술취한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들 낮 술 먹었느냐고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일어났어요.

이건 은밀한 일이 아니고 공개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 천하에 알려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리곤 사흘 만에 부활을 했어요.

이 사건으로 온 유대인들은 혼란이 휩싸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 년에 삼차씩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헸어요.

이건 하나님이 법으로 정해 놓았어요.

 

봄 절기인 유월절에 모이고,

여름 절기인 오순절에 모이고,

가을 절기인 초막절에 모였어요.

 

이 세 절기 때는 예루살렘은 천하각국에서부터 올라온 유대인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어요.

이런 모습은 지금은 이슬람교에서 라마단이라고 하여서 성지순례를 하는 것과 같아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었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죽였어요.

그리곤 50일이 지났어요.

 

오순절이란? 유월절을 지난 50일째 되는 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맥추절이라고도 해요.

암튼 이 때는 천하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 남자들은 다 예루살렘 성에 모입니다.

 

사람들은 모이면 이슈거리들이 있어요.

당시 이슈거리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어요.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하면 제제를 가했어요.

 

그런 상황에 오순절이 이르러 사람들이 모인 겁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지난 유월절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합니다.

여기저기 웅성거리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실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에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이름하여 성령 강림사건입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불의 혀 같은 것이 임하더니 각 사람마다 이상한 방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방언으로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치고 사람들에게 이 병은 나사렛 예수가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이런 일들을 행하고 있다고 거침없이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가 부활을 했다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하도록 엄중조치를 해놓았는데 갑자가 성령의 강림으로 온 나라가 예수님의 부활이야기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갖가지 기적을 행하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종교지도자들은 혼비백산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예수가 살아서 제자들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죽어서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임을 만천하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망토를 입혀주어서 ‘이 여자는 내 여자’라고 만인들 앞에서 공포를 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너희는 내 것이다!’ 라고 공포를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깃발을 꼽아 준 겁니다.

온갖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받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일거에 높여준 겁니다.

완전히 원수들 앞에서 상을 베풀어주고 계신 겁니다.

 

기(旗)를 꼽았다는 말은 표시한다는 말입니다.

 

민수기 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 지파마다 기(旗)가 있었어요.

그 깃발을 중심으로 이동하고 모이고 하였어요.

성막을 중심으로 사면으로 각 지파별로 진을 형성하는데 그 때 깃발을 세워서 자기 지파를 모으곤 했어요.

 

기(旗)는 자기 소속의 표식인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표식을 했다는 것은 ‘당신은 내 여자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넌 내꺼야!’

‘넌 내 소유야!’ 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국 중에서 자기 소유로 삼으셨어요.

 

신 7:6절.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시 135:4절.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사 43:1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보세요.

하나님이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서 넌 내 것이라고 했다고 하잖아요.

특별한 소유로 삼았다고 합니다.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지명하여 불렀다고 하잖아요.

 

솔로몬이 만인이 지켜보는 잔치 집에서 술람미를 자기 소유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 중에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특별한 소유를 삼으신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신 겁니다.

 

‘넌 내꺼!’ 라고 지명했어요.

술람미가 솔로몬이 자신을 잔치 집에서 자기에게 깃발을 꼽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의 깃발을 흔들고 있는 겁니다.

 

‘나는 솔로몬 왕의 여자야!’

‘나는 예수의 피로 구원받았어!’

 

남자가 여자에게 깃발을 꼽는 일은 이스라엘 풍습 속에도 있어요.

당시 풍습에는 남자가 신부가 될 사람을 정하면 그 집에 신랑의 깃발을 꼽아 놓았다고 합니다.

30년도 지났는데 제가 과거 사우디아라비아에 근무 할 때 본 기억이 있어요.

도시에선 이런 모습이 없는데 시골에선 그 당시엔 아직까지 이런 모습이 남아 있더라고요.

어떤 집에 흰 깃발이 펄럭이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집엔 붉은 깃발이 있어요.

 

꼭 우리나라 점집에 대나무에 흰 천을 걸어 놓은 것과 같아요.

이상해서 물으니 흰 깃발은 과년한 딸이 있다는 증표라고 합니다.

즉 우리 집에 혼기가 찬 딸이 있으니 사 가라는 말입니다.

물건 팔듯이 판다는 뜻이래요.

 

남자는 흰 깃발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가 여자를 보고 흥정을 하고 혼인이 성사가 되면 빙폐물을 주고 그 깃발을 내리고 신랑이 준비한 붉은 깃발을 꼽는다고 합니다.

빙폐물을 주면 약혼한 겁니다.

 

신랑의 깃발이 꼽히면 그 때부터 이 여인은 남자에게 팔린 몸으로서 임자 있는 여자로서 행실을 하여야 해요.

조신하게 행동하지 않고 음행을 하거나 하면 돌에 맞아 죽어요.

동네 청년들도 찝쩍거리지 못해요.

그러다간 돌에 맞아 죽어요.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약혼과 동시에 사실혼으로 간주가 되었어요.

약혼 할 때 혼인 성사의 증표로 빙폐물을 주어요.

그러니 약혼을 하면 그 증표로 깃발이 꼽아서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어요.

이 여자는 임자 있는 몸입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손대지 마세요! 라고 했어요.

 

알다시피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브라함의 서자(庶子)인 이스마엘의 후손들이에요.

이들은 코란이라는 경전을 사용하는데 그 코란의 내용이 율법이에요.

지금도 율법대로 시행하면서 살아요.

그러니 이들의 풍습 속에도 이스라엘의 풍습이 그대로 배어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깃발을 꼽았어요.

수많은 중신들과 왕후들 앞에서 이 여자는 내 것이다! 라고 공포를 한 겁니다.

이 여자는 내 것이니 누구든지 손대지 말라고 엄포를 내리고 있는 거예요.

 

마치 전쟁터에 고지 하나를 점령하면 자기 부대의 깃발을 꼽아서 소유를 표시하듯이 표시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에게 깃발이 꼽음으로서 솔로몬의 보호 아래 둔 겁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旗)를 주셨다고 했어요.

 

시 60:4절.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旗)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셀라)”

 

이게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기(旗)를 꼽아주세요.

그 깃발이 바로 성령이에요.

성령을 보증이라고 하지요.

이는 빙폐물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아들의 신부 감으로 성도를 샀어요.

핏값을 주고 샀어요.

그리곤 이 사람은 값을 주고 샀으니 손대지 말라고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어요.

마귀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손 못대요.

 

값으로 샀다는 것은 자기 소유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소유라는 뜻으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어요.

성령을 보증으로 받으면 이 때부터 사실혼 상태로 돌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주의 사랑을 입은 자에게 깃발을 꼽는다고 한 겁니다.

장차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천사들이 이 깃발이 꼽혀 있는 성도는 모두 구원하세요.

 

마귀는 성령을 받은 성도를 알아보아요.

사도행전을 보면 스게아의 일곱 아들이 바울의 흉내를 내려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려고 하다가 혼쭐이 나지요.

귀신이 그러잖아요.

 

야! 이놈들아!

나는 바울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너희들은 어디서 굴러먹다가 온 개 뼉따구들이냐! 라고 흠씬 두들겨 패지요.

 

하나님의 깃발이 꼽힌 성도는 마귀도 손을 못 대어요.

다만 하나님이 허락 하에 손을 대요.

욥을 보세요.

하나님이 마귀에게 손을 대되 생명을 손대지 말라고 하잖아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안 죽는다고 하셨어요.

성도는 마음대로 죽지 않아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해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늘은 더 진도 나가기가 싫네요.

흥이 깨질까봐서 이 단락으로 마쳐야겠어요.

진도 좀 빨리 나갈까 생각했는데 깃발에서 그만 걸리고 마네요.

 

자 정리합시다.

오늘 본문은 술람미가 솔로몬을 자랑하는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수풀가운데 사과나무라고 하면서 모든 남자들 중에서 최고라고 합니다.

남자 중에 남자라고 합니다.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수풀이고 예수님은 사과나무입니다.

예수님만이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구원자 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구원은 사과처럼 너무도 달콤합니다.

예수를 먹으면 힘이 생겨요.

예수님의 피에 복음은 사과처럼 달콤해요.

먹으면 살아나요.

 

술람미가 그 사과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솔로몬이 술람미를 자기 잔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것도 그냥 초대하는 것이 아니고 황후로서 초대합니다.

왕의 옷을 입혀서 말이에요.

만장(滿場)한 문무대신들 앞에서 소개를 합니다.

 

‘내가 영(令)을 전하겠소!’

‘여기 이 술람미는 내 여자입니다!’

‘내 사람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제 입술을 통하여서 여러분들을 세상에 공표(公表)하라고 합니다.

여기 십자가 피를 바른 이 성도들은 예수님의 신부라고!

예수의 여자들이라고!

천사들이 환호성을 보냅니다.

 

이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이승기가 부른 노랫말이 생각나네요.

 

누난 내 여자니까!

누난 내 여자니까!

너 라고 부를래!

누난 내 여자니까~아!

 

예수님이 그럽니다.

 

‘너는 내 꺼!’

‘정낙원이는 내 꺼!’

 

여러분의 이름 위에 예수님의 깃발이 휘날리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술람미 같이 천하디 천한 죄인을 너는 내 것이라고 깃발을 꼽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변할 수 없는 찜 당함을 그 어떤 것으로도 변개할 수가 없다는 것을 굳게 믿고 당당하게 감사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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