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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5강. 바로의 병거의 준마 (아가 1:9-11)

by coroa 2020. 9. 12.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5강. 바로의 병거의 준마 (아가 1:9-11).-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성령의 지혜를 구합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향하여 부르는 노래가 예수님께서 성도를 향한 노래로 들려지게 하옵소서.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의 현장에 우리를 참여케 하셔서 솔로몬의 아가서가 나의 아가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가서는 한 편의 시에요.

솔로몬 왕과 술람미의 사랑을 시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둘 만이 알 수 있는 은어(隱語)에요.

시적 언어 속에는 갖가지 의미가 함축 되어 있습니다.

제 삼자는 그냥 주어도 몰라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제가 김 집사님에게 편지를 보냈어요.

그럼 그 편지의 내용은 김 집사님과 나만 아는 이야기에요.

둘 만이 공유된 이야기이므로 다른 사람들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몰라요.

 

오늘 동계올림픽에서 피겨 선수인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 금메달은 김연아에게만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제가 그 금메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건 나에게는 그냥 장식용일 뿐이에요.

금메달은 경기를 해서 금메달을 받은 사람에게만 영광이고 의미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구경거리에요.

 

아가서가 그래요.

아가서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보낸 노래에요.

술람미 이외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왜냐하면,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한 노래이거든요.

내가 술람미 라고 한다면 이 아가서는 나의 연애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술람미가 아니라면 그냥 남의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 이야기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하여도 나의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도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분명하게 수신자가 있어요.

그럼 그 수신자는 아가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아무리 비밀스러운 은어로 말을 하여도 둘만이 아는 것을 은어로 주고받은 것이니까 이해하는데 어렵지가 않겠지요.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해석 할 것이 없어요.

 

여러분이 아내나 남편에게서 편지를 받으면 그걸 남에게 해석해 달라고 하진 않잖아요.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술람미라고 한다면 솔로몬이 한 이야기를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러니 아가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인간의 지식이 필요치 않겠지요.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실 것이잖아요.

인간의 신학이나 사상이 개입되면 자기 뜻으로 풀어내요.

세상 학문은 해석을 하는 틀이 필요해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어요.

그러므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만 해석 할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셨어요.

그럼 성령을 받은 성도는 성경을 이해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요.

 

아가서도 성경이에요.

성경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구원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야기도 당연히 예수님과 성도 간에 구원이야기로 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구원이야기로 깨닫게 해 주세요.

내가 성령의 감동으로 솔로몬이 되고 술람미가 되어야 왜 서로가 은유와 상징으로 말을 했는지를 알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4강을 강해했는데 감사하게도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과 성도간의 구원이야기로 잘 풀어주셨어요.

물론 제 생각이지만 말이에요.

저는 흡족해요.

 

글을 쓰는 저나 글을 읽는 여러분이나 항상 성령께 지혜를 구하여야 함은 이 아가서가 예수님과 우리 이야기로 들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서로 기도하면서 들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를 해석하는데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 이 말이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한 말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한 말인가?

아니면 술람미가 한 말인가?

헷갈려요.

 

이걸 그래도 잘 분리한 성경 번역본이 표준 새 번역본이에요.

하지만 이것도 제 마음에는 흡족하지 않아요.

잘못 읽어내는 부분들이 많아요.

특히 오늘 살펴볼 내용 중에 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두 사람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두 사람이 때로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 의인화 하여서 말할 때가 있어요.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우리” 라는 말이 나옵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우리” 라고 복수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단수(單數)로 “나” 라고 말을 하면 되는데 왜 복수(複數)로 “우리” 라고 말을 할까요?

 

“우리” 라는 말은 창세기 1장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고 할 때 삼위 하나님이신 그 “우리”에요.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말해요.

솔로몬은 지금 예수님 입장에서 술람미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러니 솔로몬이 “우리” 라고 하는 말은 다른 여자가 아니고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표준 새 번역에서는 이걸 놓치고 있어요.

“우리”를 하나님으로 보지 않고 술람미 친구들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입장에서 “우리”라고 말을 하는데 표준 새 번역은 다른 여자들이라고 해석을 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술람미에게 말을 한 것을 여자들이 한 것으로 오역(誤譯)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간들이 하여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전혀 다른 해석을 낳게 됩니다.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면 은혜가 되는데,

인간들이 하는 것이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해 주신 것은 은혜가 되지만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은 행위가 되어요.

이건 옛 언약과 새 언약 즉 율법과 은혜의 차이처럼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 아니면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행위냐 로 달라지게 되어요.

 

제가 아가서를 강해하면서 인터넷에 올려진 여러 목사님들의 살교와 시중에 나와 있는 아가서 설교집을 여러 권을 구입해서 참고를 하는데 전부 인간의 행함으로 풀어놓았어요.

성화해야 한다는데 포카스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의 사랑을 지켜야 한다는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건 주객을 전도하는 것이에요.

아가서의 주제는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술람미의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 왕이 비천한 한 여인을 사랑하는 은혜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술람미는 죄인을 상징해요.

죄인은 사랑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지 사랑을 할 위치에 있지 않아요.

 

어디 비천한 노예가 만왕의 왕을 사랑한단 말입니까?

비천한 자는 왕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다른 말로 죄인이 아무리 열심을 다하여 성화해도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술람미가 사랑을 받은 것은 백 프로 솔로몬으로부터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람미 쪽에서 사랑 받을만한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중에 나와 있는 아가서를 보면 술람미 쪽에서 사랑 받을 짓을 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해 놓았어요.

이게 모두가 인본주의 입장에서 성화라는 신학을 바탕으로 해석하여서 그런 겁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지는 해석이 안 되니까 인간들의 이성을 바탕으로 만든 신학이라는 틀 속에서 해석을 하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반대의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바울이 다메섹 이전에 자기 딴에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한 것과 같아요.

잘못된 앎은 반드시 잘못된 신앙을 낳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사에 방점이 있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지 않아요.

그리고 성경에는 성화라는 말이 없어요.

마치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는 것과 같아요.

그건 인간들이 만든 거예요.

 

흔히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거룩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껏 해서 만든 거룩이 인간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산 것으로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인간의 거룩이지 하나님의 거룩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께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거룩이 나오지 않아요.

인간이 아무리 깨끗하게 산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기 때문에 더러운 걸레와 같은 것입니다.

 

거룩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거룩하라는 말은 예수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이에요.

예수 안에 거하고 예수가 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구속주이고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이에요.

 

인간의 착함을 거룩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인본주의 해석이에요.

성경을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해석을 하다가 보니 이런 말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삼위일체니 성화니 하는 말을 하거든 너나 잘하세요,

댁이나 그렇게 믿으세요, 그러라구요.

 

성화(聖化)가 뭡니까?

문자적 의미로 본다면 거룩하게 변화한다는 말이잖아요.

이게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하면 마치 강아지 보고 사람 행세 하라는 것과 같아요.

성경은 우리더러 변화하라고 하지 않아요.

 

변화가 가능하면 예수가 죽을 필요도 없고,

우리가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어요.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내가 거룩해지면 되니까요.

죄 아래서 난 몸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이루어 낼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온전한 거룩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그 법을 지켜 낼 수 없는 자신을 보고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고 탄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주었어요.

그러니 거룩하게 성화하여야 한다는 것은 인본주의(人本主義) 신앙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가서도 술람미가 사랑을 지켜야 한다는 식의 인간의 행위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꼬리 삼년 묻어두었다가 꺼내도 개 꼬리이듯이 죄인이 백년을 변해도 죄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의롭다고 여겨서 구원을 해 주는 겁니다.

인간에게 뭔가 가능성을 두는 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러니 속지 마세요.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제부터 서로가 서로를 교차하면서 칭찬하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가 주고받고 하는 식으로 전개 하다가 뜬금없이 제 3의 인물이 툭툭 나와서 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간파 잘하여야 합니다.

 

제 해석이 다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깨닫는 것은 이렇다” 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성경을 창세전 언약인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적 관점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제 설교를 맞다 틀리다 정답 맞추는 식으로 접근하지 말고,

예수님과 성도 간에 이런 사랑이 있구나 로 이해하면서 들으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정답 맞추기로 씨름하지 마세요.

 

이건 누구 설교를 듣더라도 마찬가지에요.

각 사람마다 받은 은혜가 달라요.

깨닫는 부분이 다르니까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의 차이가 날 수가 있어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벽한 설교는 할 수가 없어요.

 

만약 자기 해석이 완벽하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교주가 되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지도 않았어요.

보통 이단들이 성경을 자기만 다 아는 것처럼 해서 교인들을 유혹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단들은 비유나 상징들을 기본교리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동원되는 성경이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과 아가서 같은 것들이에요.

다니엘이나 요한계시록이나 아가서는 상징이 많으니 그냥 보아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단들은 자기만이 하나님의 특별한 영(靈)이 임하여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어리석은 교인들은 기존 교회에서 들어보지 못하던 말들을 하니까 거기에 어떤 큰 비밀이 있는 줄을 알고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존 교회에서 듣지 못하던 생소한 말을 들으니까 호기심이 발동하여서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 안에 진리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쉽게 그들의 비밀 교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의 설교를 듣더라도 어떤 사람을 추종케 하면 그건 이단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어요.

자기 해석만이 절대적인 것처럼 말하는 자들을 조심하세요.

저 역시도 예외일 순 없어요.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구속사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어요.

그렇다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이 되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어진 언약으로 일어난 사건이에요.

그럼 창세전 언약인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해석을 한다면 미흡하더라도 귀를 기우려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귀를 닫지 말고 들을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지향하는 맥(脈)이 같다고 한다면 아? 이렇게도 볼 수가 있구나, 하고 넘어가세요.

틀렸다면 성령께서 교정을 시켜 주실 것이니까요.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성령이 스승이 되셔서 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세요.

들으면 성령이 알아서 옳고 그름을 분별해 주세요.

그러니 주께 맡기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밥에 티가 있다고 밥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음이에요.

밥을 먹다가 티나 돌이 나오면 골라내고 밥을 잡수시면 되어요.

그렇지 않고 돌을 붙잡고 야, 너는 누구냐,

시비 걸면 안 되지요.

그건 지혜롭지 못한 겁니다.

 

저의 아가서 해석도 오류가 있을 수 있어요.

왜냐하면, 상징들을 제가 받은 은혜로 풀어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차후라도 성령께서 더 좋은 깨달음을 주신다면 교정하면 되어요.

 

그럼 오늘 본문도 제가 받은 은혜로 풀어봅시다.

 

본문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말입니다.

 

아 1:9-17절.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10.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11.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12.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15.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16.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17.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이건 칭찬이에요.

겉으로 드러난 것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칭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는 솔로몬과 술람미가 서로를 찬양하는 내용이에요.

주거니 받거니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는 내용인 겁니다.

 

쉽게 말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칭찬을 하면 여러분이 저를 칭찬하는 것과 같아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목사님 어쩜 그렇게 설교를 잘 하세요’ 라고 하면

그러면 저는 ‘집사님은 어쩜 그렇게 믿음이 좋으세요’ 라고 화답을 하는 것과 같아요.

오늘은 9-11절까지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칭찬하는 것만 살펴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장점만 보여요.

단점도 좋게 보여요.

지난 시간 사랑은 콩깍지가 씌우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이는 겁니다.

 

사랑은 나로 행복하게 해 주어요.

사랑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모든 것들이 예뻐 보이는 겁니다.

남의 자식이 잘못하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라고 욕을 하지만,

내 자식이 잘못하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이해하고 감싸 주는 것과 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랑은 살리는 일을 하고, 미움은 죽이는 일을 하기 때문이에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미움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에요.

사랑은 살리는 것이에요.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일은 다 좋게 보이는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최고로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사랑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솔로몬이 먼저 술람미를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먼저 내 사랑아,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솔로몬이 술람미를 바라보면서 그윽하게 부르는 소리에요.

영어 성경에는 마이~ 달링(My Darling) 이라고 합니다.

 

마이~ 달링(My Darling),

 

당신은 너무 예뻐,

어쩌면 저렇게 예쁠까,

어쩌면 저렇게도 사랑스러울까,

이리 보아도 예쁘고 저리 보아도 예뻐,

보고 또 보아도 예뻐 죽겠어,

바라만 보아도 좋아,

그래서 그윽하게 바라보면서 다정하게 ‘내 사랑아’ 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부를 때 어떤 수식어를 붙여서 부르는 것과 같아요.

 

저는 제 아내를 부를 때 수야, 라고 해요.

그럼 응~하고 대답해요.

이거 남사스럽네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좀 리얼하게 느끼라고 하는 겁니다.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이 지금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하는 거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절 보고,

원아,~ 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왜요?

무슨 볼 일이 있습니까?

퉁명스럽게 대답하진 않겠지요.

 

원아, 그러면 예~ 주님,

제가 술람미가 되어서 예~ 서방님,

그럴 것 아닙니까?

연애할 때 기분을 좀 소환을 하여서 들어보세요.

그래야 이런 말이 실감이 나요.

 

소 닭 보듯 하지 말고,,,

좀 느끼세요.

무덤덤하지 말고,

뭘 하고 삽니까?

처음 사랑을 다 까먹었으니 어떻게 연애 했더라 기억에서 가물가물하지요.

 

에이구~,

이 몹쓸 사람들아,

그러고도 신자라고 합니까?

예수를 믿는다면서요.

그러면 예수님과 사랑을 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암튼 솔로몬이 다정한 목소리로 술람미야,

그러니 술람미가 배시시 웃으면서 예~ 서방님,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솔로몬이 술람미에 대하여 칭찬을 하기 시작합니다.

 

오, 그대여,

그대는 바로의 병거의 준마 같구려,

당신의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매력이 철철 넘치고,

그대의 목은 금 목걸이처럼 빛을 발하는구려,

우리가 거기다가 더 완벽하도록 금 사슬에 은구슬이 박힌 귀걸이로 코디를 해 주겠소,

그러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살펴봅시다.

 

먼저 9절입니다.

 

아 1:9절.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솔로몬이 술람미를 애굽의 바로 왕이 타고 다니는 병거의 준마와 같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왜 술람미를 애굽의 바로 왕이 타고 다니는 병거의 준마라고 할까요?

이는 솔로몬이 바로 왕이 타고 다니는 마차의 말들을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바로의 준마가 너무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술람미의 아름다움을 바로의 병거의 말에 비교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의 병거를 끄는 준마(駿馬)가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그 당시 애굽 산 말은 최고로 취급했어요.

훌륭한 말이었어요.

그래서 각국에서 수입을 해 갔어요.

수입해서 왕들이 타는 병거와 마차를 끄는 말로 사용을 하였어요.

요즈음 말로 하면 대통령이 타는 최고급 외제 승용차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병거와 마차도 애굽의 말들이 끄는 것으로 타고 다녔어요.

 

왕상 10:26-29절.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28.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왔으니 왕의 상고들이 떼로 정가하여 산 것이며 29. 애굽에서 내어 올린 병거는 하나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일백 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도 그 손으로 내어왔더라”

 

솔로몬의 왕궁에는 병거가 1400이고 마병이 1만 2천이 있었어요.

이건 모두가 애굽에서 수입을 해 왔어요.

당시 애굽의 말은 세계 최고의 최상품 이였어요.

 

애굽에는 좋은 말들이 많이 있었어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이고 최고로 좋은 것들은 왕에가 바쳤어요.

이걸 왕에게 바치는 진상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왕은 그 나라에서 나는 최고의 것만 사용했어요.

 

솔로몬이 타고 다니는 마차를 끄는 말들도 이스라엘에서는 최상이기는 하지만 애굽의 바로 왕의 말과 비교를 한다면 한 등급 아래에요.

그래서 솔로몬은 술람미를 자신이 타는 병거의 말로 비유하지 않고 애굽의 왕인 바로가 타는 준마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세계에서 가장 최상급이란 말입니다.

 

애굽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어요.

그 중에서 최고를 뽑아서 바로 왕이 타고 다니는 병거의 말로 사용했어요.

그러므로 왕의 수레를 끄는 말들은 최고의 대접과 사랑을 받았어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를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여인으로 의인화 하고 있으니 다른 말들도 여자가 되겠지요.

솔로몬의 왕궁에도 수많은 여인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술람미를 바로 왕의 준마로 비유함으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름답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면 술람미는 리무진인데 예루살렘 여자들은 티코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는 온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가장 돋보이는 여인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히 콩깍지가 씌웠다는 말이 맞지요.

 

애굽은 당대 최고의 강국이에요.

그런 나라에 왕이 타는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면 최고이겠지요.

그래서 왕의 병거를 끄는 준마는 왕이 누리는 모든 영광을 누렸어요.

 

준마는 왕의 상징과 같은 것이었어요.

그래서 준마만 특별히 담당하는 마부가 따로 있었어요.

그만큼 귀한 존재에요.

그래서 왕의 준마에게는 왕처럼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을 했어요.

 

준마는 왕이 어디로 가든지 항상 따라 다녔어요.

왕의 분신과 같아서 준마를 애인이라고도 불렀어요.

그래서 왕이 죽으면 준마도 같이 순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준마는 왕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어요.

 

지금 솔로몬의 눈에 술람미가 그렇게 보여요.

자신의 운명과 같이 할 자기 분신(分身)으로 본 것입니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겁니다.

바라만 보아도 황홀해요.

 

야, 예쁘다,

어쩜 저렇게 잘 생겼을까,

저 오뚝한 콧날 하며,

앵두 같은 저 입술하며,

저 맑은 하늘같은 눈망울하며,

어쩜 그대는 그렇게 아름답소,

보면 볼수록 아름다워요.

황홀해요.

 

오늘 김연아 선수가 동계 올림픽 피겨스케이트에서 금메달을 땄어요.

시상식을 하는데 너무 아름답더군요.

우리나라 국민은 기분이 좋을 겁니다.

왜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딴 것이 기분이 좋을까요?

나와 같은 국가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기분이 좋고 아름다워 보이는 겁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나와 관련이 되면 아름다워 보여요.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가 김연아를 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자랑스럽고,

예쁘고,

대견스럽잖아요.

그러니 어쩔 줄 모르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그렇게 보고 계세요.

예수님의 눈에는 성도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고 우리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예수님의 피가 적셔져 있어요.

 

이건 마치 엄마가 자기자식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요.

너무너무 예뻐요.

아름다워요.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어요.

보면 볼수록 좋아요.

모든 것에 자기 흔적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자기 눈에는 최고로 예쁜 겁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하는 것은 술람미 속에 자기 것이 옴팡 담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정의가 생겨요.

 

사랑이란? 자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 피와 땀이 서려 있는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분신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은 예수님의 것으로 치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은 간단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가 예수님의 것으로 치장하면 예수님이 사랑하세요.

죄사함도 예수님의 피로서 받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살아가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럼 사랑을 받아요.

 

반대로 미움은 자기 것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내 열심과 충성으로 나오는 거예요.

내 노력과 내 잘남으로 나아오는 거예요.

자기 것으로 나아온 바리새인들은 독사새끼라고 미움을 받았어요.

 

반대로 예수님의 것으로 나아온 세리와 창기들은 사랑을 받았어요.

우린 세리와 창기 같은 탕자에요.

탕자가 걸치고 있는 모든 것은 아버지 것이에요.

 

옷도 아버지 것이고,

신발도 아버지 것이고,

밥도 아버지 것이고,

타고 다니는 말도 아버지 것이에요.

자기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요.

아버지 눈에는 자기 것을 걸치고 살아가는 탕자가 사랑스러워요.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생명까지 주셨어요.

그냥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으로서 우리인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우리 꼬라지로 자꾸만 판단하기 때문이에요.

이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안 믿고 있기 때문이에요.

새 언약 안에선 우리 꼬라지를 볼게 없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꼬라지로 실망하는 겁니다.

 

술람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기는 비록 게달의 장막처럼 볼품이 없지만 솔로몬이 자신을 최고로 예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믿고 있었어요.

 

술람미는 솔로몬의 말을 믿었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안 믿고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술람미처럼 행복하지 않고 곤고한 것입니다.

 

이 시대 대 다수의 교인들이 자기 행위를 근거로 기뻤다가 슬펐다가 해요.

내 행위가 자기 마음에 괜찮다 싶으면 행복한데 미흡하다고 생각되면 우울한 겁니다.

결국 자기 행위가 믿음의 근거인 셈이에요.

그러니 조석지변으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제발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세요.

믿음이란?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일만 보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행위에요.

 

술람미는 자기 자신을 보지 않고 솔로몬의 약속을 믿었어요.

솔로몬이 넌, 최고로 예쁘다고 한 말을 믿었다구요.

예루살렘 여자들 눈에는 술람미의 이러한 확신은 망상 환자처럼 보이지만 술람미는 솔로몬이 거짓말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솔로몬의 말을 믿고 행복해 한 겁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지금 하나님도 성도들을 술람미처럼 보고 계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신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말해주었어요.

 

사 43:1-4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4.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야곱은 저와 여러분을 말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보세요,

 

야곱아,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내가 너를 조성하였고,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합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했어요.

이게 무진장 중요한 말이에요.

 

창조했다,

조성했다,

구속했다,

불렀다,

 

이런 말은 전부 완료형이에요.

변할 수 없이 이미 결론이 났다는 말입니다.

변화하는 게 아니고 이미 완료되었어요.

 

야곱이 한 것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 가운데서도 불 가운데서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고 지금도 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질 수가 없는 겁니다.

구원은 우리 조건으로 취소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이게 믿어져야 해요.

이게 믿어지면 물 가운데서도 안심 할 수가 있고,

불 가운데서도 안심 할 수가 있어요.

물과 불은 고통스러운 환경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면 살아가는 환경으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잘 그러잖아요.

제발 구원에 대하여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그건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고,

구원 문제는 우리 영역 밖이에요.

 

이건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우리의 출생과 같아요.

우리가 엄마 아빠에게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엄마 아빠가 사랑해서 내가 태어났어요.

내가 나를 위하여 간여한 일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아버지와 아들 간에 하신 언약 때문이에요.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세울 때 생겨나지도 않았어요.

그러니 구원 문제를 우리가 신경 쓸 이유가 하나도 없지요.

설령 신경을 쓴다고 해서 달라지지도 않아요.

 

그러니 내가 태어난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키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사세요.

부모에게 고민하고 불평한다고 작은 키가 커지지도 않고 작은 눈이 커지지도 않아요.

그냥 주어진 대로 주께서 주신 것이라 감사하고 사세요.

 

어떻게 하면 코를 키우고 눈을 키우고 키를 키울까 궁리 할 것이 아니라,

이런 조건으로 얼마나 자신 있게 감사하고 사느냐를 궁리하세요.

그렇지 않고 맨날 거울 앞에 서서 짜증낸다고 달라지지 않아요.

 

짜증내는 여러분을 보는 거울도 피곤해요.

아휴, 저 인간이 또 내 앞에서 지랄을 떠네,

거울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여러분만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암튼 하나님께서 야곱을 창조하고, 조성하고, 구속하고, 부르셨어요.

그런데 엄청난 댓가를 지불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주었다고 합니다.

애굽과 구스와 스바는 온 세상을 말해요.

그러니 온 세상을 주고 우리를 샀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속전(贖錢)으로 주셨어요.

나 같은 거지발싸개 같은 죄인을 위해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보좌를 버리셨다고요.

이런 인간을 살리려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구요.

뭘 좀 아세요.

 

솔로몬이 술람미를 위해서 왕이라는 신분을 버렸어요.

사랑은 신분으로 하지 않아요.

솔로몬은 왕으로서 술람미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왕으로 사랑하면 술람미가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왕이 자기를 낮추어서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신랑이신 예수님이 그러했어요.

우리와 격을 맞추기 위해서 하늘보좌를 버리고 낮아지셨어요.

죄인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랑해 주신 겁니다.

 

사랑은 배려에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는 거예요.

비록 사랑하는 사람이 부족하더라도 그 부족함이 마음에 상처가 되지 않게 하려고 배려하는 거예요.

행여 마음에 상처를 입을까봐 노심초사하잖아요.

 

예를 들어서 많이 배운 남편과 못 배운 아내가 같이 부부로 산다고 하면 남편은 아내 앞에서 어려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에요.

혹시라도 아내가 배우지 못한 것에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배려하는 것과 같아요.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은 아픔이고 희생이고 자기 비움이에요.

그래서 사랑은 아픈 거라고 하는 겁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금기하여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련한 여자는 자꾸만 남편을 다른 남편과 비교해서 기를 죽어요.

누구 신랑은 어떻고,

누구 신랑은 저떻고,

이런 여자는 평생 가야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해요.

 

남자도 마찬가지로 다른 아내랑 비교해요.

그래 보세요.

맨 날 먹다가 남은 찌개가 아침저녁으로 올라오지요.

뭐가 예쁘다고 맛난 반찬을 해 주겠어요.

속으로 그래요.

주는 대로 처먹고 돈이나 벌어 오라고 해요.

 

이게 모두가 사랑이 결여되어서 그래요.

그러니 서로 서로가 싸늘한 겁니다.

사랑이 없으니 배려가 안 나오는 겁니다.

 

사랑하면 배려심이 나타나요.

상대방이 상처 받지 않도록 배려해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그러고 있어요.

왕이라고 뻐기지 않았어요.

같이 놀아주었어요.

 

여러분들이 자식을 그렇게 대하잖아요.

자식 앞에서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는 부모는 없어요.

자식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놀아주잖아요.

왜 그런가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하여튼 솔로몬은 술람미를 애굽에 바로 왕의 준마와 같이 최고로 사랑했어요.

계속해서 솔로몬이 술람미를 칭찬하는 것을 살펴봅시다.

 

아 1:10절.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술람미는 머리카락을 땋아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어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아무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술람미도 머리를 땋아서 손질을 해서 얼굴을 살짝 가린 겁니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는 말은 아무나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내 님에게만 보여준다는 말이에요.

‘난 주인이 있는 여자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내 남편 뿐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이러한 풍습은 이스라엘 속에 잘 나타나 있어요.

 

창세기 25장을 보면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맞이하는 내용이 나와요.

 

창 24:65절. “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뇨 종이 가로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우더라”

 

리브가가 이삭을 처음 만날 때 얼굴을 면박으로 가립니다.

그러자 이삭이 사라의 장막에 들어가 리브가를 아내로 취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면박을 올려주는 겁니다.

이제부터 이 얼굴은 신랑만 볼 수가 있다는 뜻이에요.

 

지금도 율법을 교리로 믿고 살아가는 이슬람교에서는 여인들은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도록 법으로 엄격하게 규정해 놓았어요.

아내의 얼굴은 오로지 남편만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입니다.

 

여자들이 결혼식 때 면사포를 쓰는 이유도 여기서 유래되었어요.

남편이 면사포를 올려주잖아요.

이는 면사포를 올려준 사람이 이 여자의 주인이란 말입니다.

 

흔히들 여자가 결혼하면 남자가 머리를 올려 준다고 하지요.

이는 남편에게만 얼굴을 공개한다는 의미에요.

여자의 얼굴은 남편만 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여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얼굴을 가리는 겁니다.

 

이러한 상징으로 여자는 머리털을 기르게 한 겁니다.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여인에게 있어 긴 머리는 남편의 권세 아래 있다는 표가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잘 말해주었어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여자는 머리에 모자를 쓰라고 하지요.

 

고전 11:3절.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고전 11:10절.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찌니라”

 

고전 11:15절.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하지요.

여자는 남자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그 머리에 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긴 머리는 모자를 대신해요.

그래서 장소를 불문하고 여자에게 모자를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집안에서 모자를 써도 결례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고전 영화를 보면 여자들이 긴 모자를 쓰고 파티에 참석하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특징이 모자를 벗지 않아요.

실내이든 실외이든 항상 모자를 쓰고 있어요.

 

이는 모자를 씀으로서 “난 주인이 있는 사람입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난 임자 있는 몸입니다” 라는 뜻이에요.

모자가 없으면 긴 머리카락으로 가려요.

 

지금 술람미가 그러고 있는 겁니다.

“난 임자가 있는 몸이랍니다”

“내 서방님은 솔로몬입니다” 라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서 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정결한 여인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눈에는 술람미가 머리를 땋아서 얼굴을 살짝 가린 모습은 솔로몬을 향한 믿음에 정절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과거에는 여자가 머리를 짧게 자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머리를 짧게 자르면 난 주인이 없는 여자라는 표시에요.

그래서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머리를 잘랐던 것입니다.

 

목걸이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아 1:10절. “네 목은 구슬꿰미로 아름답구나”

 

성경은 목을 교만함과 연관하여서 말을 합니다.

흔히들 교만한 사람을 일컬어 목이 곧다고 하지요.

목이 곧다는 것은 고집(固執)이 세다는 겁니다.

순종치 않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구약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거역한 것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이 백성은 목이 곧다고 책망을 한 것입니다.

 

결혼을 할 때 신랑이 신부에게 목걸이를 빙폐물로 주는 것은 신랑의 권위 아래서 순종하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주는 것입니다.

신부가 남편이 준 목걸이는 하는 것은 “당신은 내 생명입니다” 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목걸이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신랑의 생각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의미로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목걸이를 해 준 것은 내가 당신의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여자가 목걸이를 하는 것은 소에 멍에를 씌우는 것과 같아요.

이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그러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지요.

 

한번 찾아봅시다.

 

마 11: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릅니다.

여기서 짐은 율법 아래서 수고하는 신앙을 말해요.

내가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사는 것을 말해요.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고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죄인이 누굽니까?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는 자이잖아요.

달리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 뜻에 순종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죄인이에요.

그런 죄인이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에도 없는 순종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겹고 고통스럽겠어요.

 

실제로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온 유대인들은 율법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어요.

하고 싶은 것은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라고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하라고 하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그렇다고 안하면 과거처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면 어쩝니까?

그러니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마음에도 없는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고 애를 썼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지긋 지긋한 율법이라는 짐을 벗겨준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유전에 따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은 신앙이라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마치 이 시대 한국교회 교인들과 똑같아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예수를 믿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하면 되어요.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부터 자유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둘 다 하겠대요.

이건 둘 다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것 다 치우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를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한다는 것으로부터 쉼을 얻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짐을 벗겨주는 것이 참으로 이상해요.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멍에란 십자가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메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가벼워진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말은 율법은 십자가 안에서 완성이 되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키 위함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했다고 했어요.

율법을 확 찢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계약서를 찢어버렸단 말입니다.

마치 전세 계약서를 돈을 다 받은 뒤에 찢어 버린 것과 같아요.

 

율법이 뭡니까?

죄를 지적하는 거잖아요.

따라다니면서 닦달을 합니다.

 

너 이것 했어,

너 저것 했어,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어,

그러니 넌 죽어야 해, 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야, 그 아이들 그냥 내비 둬,

내가 저 아이들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었잖아,

저 아이들이 율법대로 살지 못하였으니 그 죄값을 내가 대신 갚아 줄게,

십자가를 지시면서 나 죽는다,

율법에게 이제 됐지,

그러곤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어요.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괴롭히는 율법의 요구를 자기의 죽음으로서 해결했어요.

 

그리곤 사흘 만에 부활하셨어요.

부활하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알려 줍니다.

앞으로 누가 너희들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산다고 공갈을 치는 놈들이 있으면 그 놈들에게 내 십자가를 내 보여줘,

우리 주님이 다 지켰잖아,

큰 소리 치란 말이야,알았지,

 

그리곤 이게 믿어지라고 성령을 보내 주셨어요.

성령을 받은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성령이 믿어지게 해줘요.

이상하게 믿어진다니까요.

 

그러니 십자가를 믿으면 율법의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 안은 은혜의 나라이기 때문이에요.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예수 안에서는 율법이 힘을 쓰지 못해요.

왜냐하면 예수 안에서는 율법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와 함께 활동하기 때문이에요.

 

예수 안은 율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있어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에요.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은 죄와 상관없는 세계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았어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어떤 율법적 요구에 따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 했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이 믿음이 있으면 쉼을 얻어요.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쉼을 얻지 못하는 것은 율법이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불안한 겁니다.

내가 이래서 되겠나,

이러고도 내가 천국 가겠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자기 행함을 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자기 행함에 따라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이는 성령이 그 안에 없다는 말이에요.

한마디로 예수 안 믿는다는 겁니다.

예수 밖에 있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의 멍에를 안 메고 따른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율법이 자꾸만 참소하는 겁니다.

 

너 그 따위로 살래,

너 말씀대로 살았어, 안 살았어,

너 성경 보았어, 안 보았어,

너 기도했어, 안했어,

너 충성했어, 안했어,

 

자기 안에 율법이 살아 있으면 쉼을 얻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지요.

이 말을 오해하여서 별 희한한 십자가를 다 만들어 냈어요.

 

속 섞이는 자식이 있으면,

아이쿠~ 저 새끼가 내 십자가야,

 

술주정뱅이 남편이 있으면,

어이쿠~저 인간이 내 십자가야,

 

살기 힘들면 십자가라고 하잖아요.

그건 십자가가 아니고 팔자에요.

다른 말로 분복이에요.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으라는 말이에요.

믿음으로 따르라는 겁니다.

 

자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누구를 위해 죽었나요.

자기 백성들의 죄 때문이지요.

내 죄 때문이잖아요.

 

그럼 이 사실을 믿어야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사람마다 달라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어야 믿을 수가 있어요.

아무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속해 주었다고 해도 믿어지는 사람만 믿을 수가 있어요.

믿음을 받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안 믿어져요.

 

이 시대 대다수의 교인들이 이것이 안 믿어지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한다고 해서 믿어지지 않아요.

믿음이 오면 성화와 상관없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은 믿음을 받은 사람만 따르라는 말이에요.

그래야 쉼을 얻지요.

 

이 믿음이 술람미에게 목걸이 인 겁니다.

목걸이는 멍에와 같아요.

멍에는 믿음과 같아요.

그러니 술람미는 솔로몬이 준 목걸이를 함으로서 “나는 솔로몬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신랑이 날 사랑한다고 했단 말이야’ 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가 자기 약속을 믿고 있다는 표시로 목걸이를 한 것을 보니 너무 예쁜 겁니다.

세상에 자기 꼬라지 보지 않고 솔로몬의 약속만 굳게 믿고 있으니 얼마나 귀엽겠어요.

이런 모습이 솔로몬에겐 너무도 아름다운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런 술람미에게 뭔가 더 해 주고 싶은 겁니다.

더 예쁘게 가꾸어 주고 싶은 겁니다.

마치 바로 왕의 준마에 화려한 장신구들로 꾸며서 아름답게 하듯이 해 주고 싶은 겁니다.

솔로몬은 술람미가 자기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이 너무 예뻐서 금 사슬에 은 구슬을 박은 귀고리를 만들어 주었어요.

 

아 1:11절.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 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귀고리는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하는 선물이에요.

귀는 말씀을 듣는 기관이에요.

그러니 귀에 구멍을 뚫고 귀걸이를 해 준다는 말은 솔로몬의 음성만 들으라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 보면 주인이 종의 귀를 뚫곤 했어요.

이는 주인의 말만 듣는다는 의미에서에요.

그런 의미로 술람미에게 귀걸이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지요.

이는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기관이 이미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듣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음성은 성령으로만 들을 수가 있어요.

이를 귀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하시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걸 알려면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은 부모가 결정을 해요.

이스라엘은 연애 결혼이라는게 없어요.

부모가 정해준 대로 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백성을 예정한 것과 같아요.

예수님은 아버지가 정해준 신부를 구원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에 아버지께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성도를 찾으러 왔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왔다고 한 겁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다 살려 낸다고 했어요.

 

암튼 양가 부모들끼리 혼인 약속을 합니다.

결혼할 때가 되면 신랑 집에서 가장 똑똑한 종이나 아니면 신랑 친구를 신부 쪽으로 보내요.

이건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맞이할 때 엘리에셀을 보내는 모습에서 잘 나와 있어요.

 

알다시피 신랑과 신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몰라요.

그럼 신부는 신랑의 친구가 주는 정보로 신랑을 이해를 해요.

신랑의 목소리에서부터 신랑이 좋아하는 음식에서부터 좌우지간 신랑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알려주어요.

그럼 신부는 신랑 친구가 알려준 정보를 귀에 잘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 신랑의 음성을 듣고 맞이해야 하는 겁니다.

 

이걸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니 자기는 친구로서 기뻐한다고 했어요.

세례 요한은 예수라는 신랑의 친구로서 성도들을 소개시켜주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나를 보지 말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을 보라고 한 겁니다.

 

이 일을 지금은 누가 하는가 하면 성령이 하세요.

성령이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다 알려주세요.

성령이 성도를 신랑에게 인도해 주세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귀고리는 솔로몬이 만들어 주지 않고 “우리”가 만들어준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라는 말은 예수님과 동격인 다른 어떤 분이란 말이에요.

그럼 예수님과 동격인 다른 분이 누구인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이라야 하겠지요.

그럼 예수님의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되겠지요.

 

성부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계시고 성령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시니까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성령님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할례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귀가 할례 하는 것이 귀고리를 해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표준 새 번역에선 이 부분을 오역을 하였다고 했어요.

표준 새 번역에선 술람미 친구라고 했어요.

술람미 친구가 아니고 솔로몬의 친구에요.

완전히 다르지요.

 

술람미 친구들은 솔로몬에 대하여서 몰라요.

그러니 술람미의 친구들이 귀고리를 해 준다는 것은 틀린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표준 새 번역본에서 우리를 술람미 친구라고 한 것은 영적인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히브리어 헬라어를 잘 몰라도 괜찮아요.

성령이 성경의 영적의미는 알게 해주세요.

성경은 지식으로 접근하면 해석 할 수가 없어요.

성령이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믿어지게 해 주시면 다 이해가 되어요.

 

암튼 성령이 귀고리를 해 주는 것은 신랑의 말을 들으라는 의미에서 해 주는 겁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예수님과 성도의 구원이야기라고 했지요.

그럼 예수님을 영접케 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성령이지요.

성령이 성도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세요.

이걸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는 겁니다.

 

우린 예수님의 음성을 몰라요.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라요.

성령님이 알게 해 주세요.

 

그러니 술람미에게 귀고리를 해 주는 우리는 솔로몬의 친구인데 신약적으로는 성령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과 같은 동격의 복수로서 우리라고 하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되시지요.

전혀 어렵지가 않지요.

 

그럼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부모가 아들의 아내가 될 신부가 정해지면 나중에 결혼식 때 사용할 모든 물건을 보냅니다.

거기엔 옷과 각종 장신구들이 있어요.

 

이걸 빙폐물이라고 해요.

빙폐물은 신랑이 신부 될 여자에게 보내요.

신부가 될 여자가 준비 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몸만 오면 되어요.

 

이건 마치 우리가 구원을 받게 위해선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어요.

예수를 믿으려고도 노력하지 마세요.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성령이 믿게 해 주세요.

성령이 믿게 해 주면 예수를 믿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아요.

 

빙폐물을 들고 간 종들이 신부에게 신랑이 언제쯤 신부를 데리러 가겠다고 기별을 해요.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을 해서 제 시간에 가지만 옛날엔 걸어서 가기 때문에 확실한 날짜를 알 수가 없어요.

가다가 변고가 생기기도 했어요.

그러니 확실한 날짜를 알 수가 없어요.

대충 언제쯤 도착하겠구나! 짐작만 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식은 밤에 이루어져요.

그러면 신부는 신랑이 올 때쯤 되면 등불을 환히 밝히고 기다리는 겁니다.

신랑이 보내준 옷과 빙폐물로 단장을 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신부의 친구들이 들러리로 똑 같이 등불을 들고 기다려주어요.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는 이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풍속을 보면 들러리가 많으면 20여명이나 된다고 해요.

이건 그 집안의 형편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친구들이 떠나가는 신부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들러리로 함께 서 주는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들러리나 신부는 기다릴 때 모두가 얼굴에 면사포를 쓰고 얼굴을 감추어요.

그러면 신랑이 그 많은 여자들 속에서 자기 신부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 때 찾아내는 방법이 자기가 보내준 옷과 빙폐물로 찾아내는 겁니다.

 

신부는 신랑이 보낸 옷을 입고 장신구로 단장을 하였으니 신랑은 아무리 많은 들러리가 있어도 그 속에서 자기 신부를 알아 볼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보내준 빙폐물로 단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은 자기 신부를 찾아서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올려 주어요.

비로소 신랑과 신부가 대면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걸 성도의 구원이야기로 봅시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예수님과 성도의 구원을 보여주는 시청각 교제에요.

이스라엘의 결혼에 있어서 신부는 준비 할 것이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신랑 집에서 신부를 사 오기 때문입니다.

 

이걸 결혼 지참금이라고 해요.

왜 신랑 쪽에서 신부 쪽에 지참금을 주느냐 하면 당시에 여자는 재산이었어요.

십계명에 보면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그 외에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고 했어요.

 

아내를 남편의 소유물로 말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결혼 지참금으로 산 아내는 남편의 재산인 것입니다.

돈을 주고 사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랑 쪽에서 신부 쪽에 결혼 지참금을 그 부모에게 주고 사오는 것입니다.

당시는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손을 데리고 오는 것이고 신부 집에서는 일손 하나를 손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을 주고 사오게 되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성도를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마귀의 수중에 있던 자기백성들을 예수라는 값을 치루고 사 온 겁니다.

그래서 성도를 값으로 산 자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이사야서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이 다 했잖아요.

 

신부가 신랑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하듯이 성도도 예수님이 준 것으로 단장을 해요.

하나님께서 예수의 신부로 단장을 하라고 성령의 은사들을 주셨어요.

성령이 신랑의 친구가 되어서 다 알려주어요.

신부단장을 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랑이 준 옷으로 단장 시켜요.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면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니 세마포 옷을 입혀준다고 하지요.

신랑이 백마를 타고 피 뿌린 옷을 입고 오세요.

그럼 성령도 신부에게 신랑이 준 피 뿌린 옷을 신부에게 입혀서 기다리게 해요.

옷이란 의이고 믿음이에요.

 

신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신랑의 것으로 단장을 해요.

지금 저와 여러분이 누리는 모든 것은 신랑 것이에요.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살고 있어요.

그러니 사나 죽으나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다시 말합니다.

성도는 구원을 위하여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에요.

술람미처럼 솔로몬의 약속을 믿고 살면 되어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성도는 이 사실이 믿어짐으로 감사하고 살게 되는 겁니다.

 

아가서가 지금 예수님과 우리의 구원 이야기를 솔로몬과 술람미가 주고받는 빙폐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랑으로부터 빙폐물을 받았나요.

 

성령의 은사를 받았지요.

예수님이 다 해 주셨다는 것이 믿어지는 은사를 받았지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는 예수기 믿어지도록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 믿음이 성령의 은사에요.

 

예수가 믿어지세요.

그럼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귀고리를 해 주셨어요.

그러면 안심하고 사세요.

 

예수님이 너는 내 것이라고 하는데 무슨 걱정입니까.

이게 믿어지는 사람은 그 누가 뭐라고 하여도 안심하고 살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이 사실을 믿어지게 만들어요.

 

저는 이 사실을 믿고 살아요.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야, 정낙원이 넌 내꺼야,

예, 서방님,

저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내 꺼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너 믿음 되게 좋다고 해요.

그럼 나는 그 믿음을 예수님이 주셨잖아요.

이렇게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여러분도 이렇게 하고 살지요.

그럼요.

그렇게 사셔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솔로몬의 칭찬의 소리가 들려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할 것이라고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믿습니다. 이 믿음이 굳건한 반석이 되어서 그 어떤 물결들이 들이닥쳐도 반석 위에 세운 집처럼 끄떡없이 지켜지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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