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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아가서 강해

6강. 몰약 향낭 같은 신랑 (아가 1:12-14)

by coroa 2020. 9. 22.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6강. 몰약 향낭 같은 신랑 (아가 1:12-14).-

 

-.정낙원 목사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종이 지혜를 구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옵소서. 지혜의 말씀에 은사와 지식에 말씀에 은사를 주셔서 아가서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풀어내게 하옵소서. 솔로몬에게 성령을 감동케 하셔서 아가서를 쓰게 하셨듯이 지금은 종에게 솔로몬에게 임하셨던 그 성령의 감동이 임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솔로몬이 왜? 이러한 말을 술람미에게 하였고 술람미 또한 무슨 의미로 이런 노래를 하였는지 깨닫게 하옵소서. 인간의 언어로 풀어내되 하늘에 소리로 들려지게 하시고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야기로만 들려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넘쳐서 마음이 높은 자는 낮아지게 하시고 상하고 상처 받아 낮아진 자는 높아지게 하옵소서. 광야처럼 가물어 메마른 심령들이 물댄 동산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풍성해지게 하옵소서. 술람미처럼 솔로몬께 받은 온전한 사랑으로 환경을 이기게 하고 주변의 핍박을 이기게 하였듯이 우리들도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주신 그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아는 은어로 주고 받은 비밀 언어입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아가서를 온전하게 해석 할 수가 없어요.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아가서도 성경이에요.

그럼 아가서도 예수님 이야기로 풀면 다 이해가 되겠지요.

 

예수님은 묵시에 속한 분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십니다.

창조에 속한 분이 이 세상에 오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제로 하는 성경이야기는 이 세상 밖 이야기겠지요.

이렇게 되면 기존에 인간의 해석 방식으로는 성경을 이해 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상식이나 신학으로는 해석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세상 밖 묵시적인 방식으로만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 밖 묵시적 방식이란 창세전 언약적 관점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영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된 것도 다 창세전 언약 차원으로 해석을 하고 세상 방식으로는 해석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경을 창세전 언약으로 해석하게 하세요.

창세전 언약의 핵심이 예수님 피로 자기 백성을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영적 해석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를 강해하면서 우리의 구원은 공짜로 얻은 거룩이라고 했습니다.

 

거룩은 구원을 말하는데,

그 구원은 공짜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 방식이에요.

 

하나님의 구원이 공짜로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마귀적인 인본주의 구원은 어떤 식으로 나타날까요?

구원을 인간들의 노력한 댓가로 얻고자 하는 식으로 나타나겠지요.

자기 조건에서 구원의 방법을 찾게 되겠지요.

 

마귀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성에 흠집을 내려고 해요.

그래서 인간 쪽에서 구원을 받는 방식으로 접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구원을 받는 방식으로 접근 한다는 것은 인간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고가 저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난 구원 받아야 돼,

난 천국 가야 해,

난 영생을 얻어야 해,

 

이게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고 믿었어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원래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자기가 구원받을 필요성을 느낀 자인가요?

구원이 뭔지도 모르고 산 자입니까?

모르고 살았지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데 무슨 구원을 생각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찾아가서 불러냅니다.

기존의 인간 노선에서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기존의 인간 노선은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죄를 알려만 반드시 하나님이 개입을 하여야 해요.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나려면 누가 등장해야 합니까?

의로우신 분이 등장하여야겠지요.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등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때부터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합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야겠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렇게 살았나요?

아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꾸만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넌 죄인이야,”

“넌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놈이야,” 라고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 반대로 불순종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만들어요.

그 결정판이 바로 이스마엘과 이삭을 낳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듣지 않고 생산한 놈이고,

이삭은 준다고 하니까 못 믿겠다고 하면서 싫다고 하여서 생산된 놈이에요.

이스마엘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했고,

이삭은 하라고 했는데 싫다고 불순종 한 것의 증거예요.

이스마엘이나 이삭은 둘 다 불순종의 결과물이에요.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하나님이 이삭을 주겠다고 할 때 비웃었어요.

이는 안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이삭을 볼 때마다 자기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은 죄인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아브라함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일컬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지요.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아브라함은 은혜의 조상이라고도 할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 민족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후손이지요.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한다면 어떤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합니까?

은혜이지요.

 

은혜가 은혜 되려면 자기들은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자라고 드러나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반대로 생각했어요.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복을 받고 구원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산 것입니다.

그래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이방인들을 깔보고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자체가 아브라함 정신에 위배되어요.

아브라함에게는 선민정신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이에요.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 후손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와야 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혈통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조상이 하나님 백성이니 나도 당연히 하나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이 사라지고 난 아브라함 후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조건을 들고 교만으로 나아오게 된단 말입니다.

 

죄가 뭐냐?

난 구원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가 바로 유대인들의 사고에요.

 

성경은 묵시에 속한 것이라고 했지요.

묵시에 속하였다 함은 기존에 역사를 죄로 들추어내면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유대인들처럼 자기가 죄인인줄도 모르면서 당연히 사랑받고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면 당연히 저주받아야 할 자로 나아와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럼에도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이런 사고를 깡그리 죄로 들추어내고 있어요.

아가서에 보면 두 부류의 여자들이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여자와 술람미에요.

 

이 둘은 아주 대조적이에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친정의 가문이 화려한 잘난 여자들이고,

술람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름 없는 들풀과 같은 천한 여자에요.

이 둘은 솔로몬이라는 왕을 가운데 두고 서로 사랑싸움을 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자기들 조건으로 자신들은 당연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술람미는 사랑은 고사하고 저주 받아야 할 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솔로몬은 사랑 받을 자격도 없는 술람미를 사랑해요.

당연히 사랑 받아야 한다고 하는 예루살렘 여자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어요.

 

이건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유대인과 이방인 같아요.

유대인은 당연히 하나님께 사랑 받고 구원받아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이방인은 마치 술람미와 같이 구원에 대하여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어요.

 

그런데 솔로몬은 전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이방인과 같은 술람미를 사랑했어요.

이렇게 되면 술람미는 솔로몬의 은혜를 옴팡 뒤집어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것과 같아요.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어요.

그러니 세리와 창기들은 술람미와 같고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여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면 아가서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감(感)이 잡히겠지요.

아가서는 당연히 사랑받아야 한다고 하는 인간은 저주 받을 자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사랑은 고사하고 당연히 저주받고 지옥에 가야할 죄인임을 아는 자들은 예수님이 구원을 해 주신 사랑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 이야기가 된단 말입니다.

아가서도 다른 성경과 같이 예수님 이야기에요.

그렇다면 아가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야기로 풀면 이해가 되겠지요.

아가서 속에서도 예수님의 피 이야기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해석이 되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이것이 왕이 자기를 비워 천민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솔로몬이 술람미를 사랑한 것은 예수님이 자기 몸을 버려 죄인을 사랑한 것과 같아요.

아가서에서 십자가 정신은 왕이 자기 신분을 낮추어 비천한 여인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서의 핵심은 솔로몬 왕의 낮아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구속(救贖) 받은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우리 기분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한 것은 하나님이 찬송을 받고자 함이에요.

이사야 선지자가 이 사실을 잘 말해 주었어요.

 

사 43: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보세요.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塗抹)한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성도의 죄를 도말해 주셨어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기쁘기 위해서 성도가 기쁨조로 투입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 자신과의 약속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구원해 달라고 한 적이 있나요.

없어요.

우린 원래 없던 자였어요.

그런데 하나님과 그 아들 간에 맺은 창세전의 언약을 위하여 생겨났어요.

 

우리의 창조 자체가 하나님과 아들간의 언약 때문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창조가 된 것입니다.

마치 목수가 장롱을 만들기 위해서 오동나무를 키운 것과 같아요.

오동나무를 키워서 장롱을 만들고 목수가 야, 잘 만들었다, 라고 흐뭇해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나 구원 받았다 자랑하지 말고,

날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자랑하세요.

술람미처럼 천하디 천한 나를 사랑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찬미하여야 해요.

성도가 천국에 가서 세세토록 할 일이 이 일이에요.

 

야곱을 보세요.

태어나기도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을 했잖아요.

야곱은 하나님께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야곱을 구원하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태어났어요.

 

구원이란?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을 잃어버려졌다가 다시 찾는 받은 형국으로 몰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을 고향을 떠나게 하였다가 귀향을 하도록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장자권의 축복이 단초가 되어 나타납니다.

야곱은 장자권을 받으면 팔자가 피는 줄 알았어요.

만약에 야곱이 장자권을 받으면 집에서 쫓겨나고 형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면 야곱의 성격상 장자권을 주어도 싫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오해한 것입니다.

죄가 오해케 한 겁니다.

그래서 덜컹 장자권을 훔치다시피 하여서 받아 냅니다.

그런데 돌아온 건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에요.

이건 야곱이 바라던 것이 아니에요.

 

이런 대본은 하나님이 쓰신 것입니다.

암튼 야곱은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적힌 대본에 따라서 집에서 쫓겨난 잃어버려진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라면 장자의 축복을 받게 했으면 집에서 쫓겨나지 말고 천년만년 잘살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 신세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그네 신세가 되어야 하는 것이 언약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미 짜여진 대본대로 움직여지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모두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대본에 따라서 여기까지 흘러왔어요.

앞으로도 차질 없이 대본대로 우린 천국에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고 사세요.

 

암튼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나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어요.

모든 것이 장자권 때문입니다.

구약의 장자권은 신약에서 구원권을 말해요.

그러니까 야곱의 일생은 성도의 일생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을 받기 전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부모님 밑에서 알콩달콩 잘살았어요.

그런데 장자의 축복을 받고 난 후 졸지에 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집에서 쫓겨난 놈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야곱아 내가 너를 지켜 줄게” 그런다구요.

 

아니 지켜줄거면 집에서 쫓겨나게 하지 말아야지요.

이건 병 주고 약주는 거예요.

아주 갖고 노는 것입니다.

 

지켜 준다고 했으면 외삼촌 집에서도 개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머슴살이 할 때는 모른 척 하다가 이제 겨우 살만해서 귀향을 하는데 얍복 강에서 나타나서 허리를 분질러 병신을 만드는 것은 무슨 놈에 심보입니까?

어디 정착해서 살만하면 떠나라고 합니다.

 

무슨 하나님이 그래요.

하나님은 야곱을 들들 볶지 못해서 안달이 난 분 같아요.

야곱은 아마도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매사 하는 일마다 태클을 걸고 있잖아요.

그리곤 잊으려고 하면 나타나서 ‘야곱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고 있어요.

어휴, 징그러워요.

우린 이런 사랑을 받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마치 아빠가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수염이 난 얼굴로 아이의 볼을 부비는 것과 같아요.

아이는 수염에 찔려서 아프다고 하는데 아빠는 좋다고 더 비벼요.

그럼 아이는 기겁을 하지요.

하나님이 지금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고 계세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는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집착이에요.

늘 감시한다고요.

오죽했으면 하나님을 감찰하는 하나님이라고 하겠어요.

여러분들도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일상을 감시하잖아요.

감시하고 싶어서 감시하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그 사람으로 꽉 채워져 있어서 그래요.

 

‘어디에 갔었어’

‘뭐 했어’

‘왜 전화 안했어’

 

청문회 하듯이 미주알 고주알 꼬치 꼬치 캐묻잖아요.

이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을 별개로 분리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게 안 될 땐 화가 나요.

 

‘왜 간섭하는데’

그러면 그 사랑은 깨져요.

이게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지금 그러고 계세요.

그러니 야곱으로서는 미칠 지경인 것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날 사랑하지 마세요.

제발 날 포기하세요.

 

떠나가시면 얼마나 좋겠어요.

떠나가시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고 합니다.

이건 24시간 감시한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죽었다고 곡소리하세요.

 

에이~ 재수 없게 걸렸다고 하나님께 원망하세요.

괜히 사랑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에요.

하나님은 우리가 속으론 엄청 욕하면서 겉으로 사랑한다고 알랑방귀 뀐다는 것을 다 알아요.

하나님이 우리 속을 훤히 알고 있어요.

 

우리가 원망해도 하나님은 ‘아니다 난 널 사랑한단다’

‘내 아들과 창세전에 약속을 했단다’

‘그래서 난 널 포기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아요.

이 집요함 때문에 우리는 차질 없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 속에 하나님이 일한 증거물로 꽉꽉 채우는 것입니다.

마치 만두 속을 채우듯이 야곱의 모든 일생에 하나님의 흔적들로 채우고 또 채우는 것입니다.

그리곤 야곱을 보면서 하나님이 흐뭇해합니다.

‘야~ 저 녀석을 보면 기쁘단 말이야’

야곱은 상처뿐인 영광이에요.

 

야곱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기 전처럼 하나님 모르고 살 때가 훨씬 좋았어요.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그 시절에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거리낌이 없었어요.

우린 모두가 잃은 양처럼 자기가 잃어버려진 줄도 모르고 잘 살고 있었어요.

의(義)가 뭔지도 모르고 영생(永生)이 뭔지도 모른 채 조금도 불편함 없이 잘 살았어요.

 

의가 뭔지 모르니 의에 대하여 갈급함도 모르고,

구원이 뭔지 모르니까 구원에 대한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인간은 태어나고 죽는가 보다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았어요.

죄가 뭔지도 모르니까 죄 가운데서 잘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보니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구원을 받고 보니 나를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도 알았어요.

구원을 받고 보니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도 알았어요.

구원을 받고 보니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도 알게 되었어요.

 

‘휴~ 다행이다’

‘이거 엄청나구나’

‘세상에 이런 축복이 어디 있나’

 

뒤 늦게 깨닫고는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주제를 파악하고 난 후에야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들으려고 우리를 구원했어요.

 

이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미(讚美)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지 않는 자는 구원받은 자가 아니에요.

 

신앙의 본질은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나 구원받았네’ 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주의 피로 내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가 고백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어요.

그러므로 ‘내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바울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풀풀 나오게 하려고 죄인 중에 괴수인 바울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풀풀 나와야 해요.

 

예수님 피 때문에 용서받고 삽니다.

예수님 생명으로 삽니다.

탕자처럼 모든 것이 아버지 것이라고 자랑하듯이 우리도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증거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 인생사에서 예수님그리스도만이 자랑되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아가서를 살펴보면서도 이 중심사상을 놓치면 안 됩니다.

아가서는 술람미의 노래가 아니에요.

솔로몬의 노래에요.

솔로몬을 찬양하는 노래란 말입니다.

비록 술람미에게 하는 노래이지만 그것은 비천한 여인을 사랑한 솔로몬의 사랑을 노래한 거예요.

 

그러므로 술람미를 향한 노래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솔로몬이 솔로몬 자신에게 향한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노래를 들을 자격이 없어요.

 

이걸 예수님과 우리들의 구원이야기로 살펴보면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은 우리 속에 주님의 흔적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되어요.

맞아요.

우린 주님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에요.

우리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행여 술람미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받은 자기 자신을 자랑한다고 한다면 잘못이에요.

술람미는 자기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되어요.

솔로몬으로부터 사랑받은 것조차도 자랑해서는 안 되어요.

자랑은 솔로몬을 자랑해야 해요.

 

구원은 구원받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구원해 주신 분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공짜로 받았어요.

그러니 ‘나 구원 받았네’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아가서의 주인공은 술람미가 아니라 솔로몬인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천한 여인을 보듬어준 솔로몬의 낮아지심을 찬양하는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모든 포카스는 솔로몬에게 맞추어져 있어야 해요.

 

솔로몬은 예수님의 표상으로 있어요.

아가서를 통하여서 나타난 솔로몬은 성령의 감동으로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을 찬양하지 말고 솔로몬이 표상하는 예수님을 찬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되어서 술람미를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장차 예수님이 개 같은 이방인인 저와 여러분을 사랑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솔로몬을 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신분임에도 거지같은 여자를 사랑하는 인간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 동화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솔로몬과 술람미가 만물을 가지고서 서로를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만물을 가지고 찬양을 할 때 그 만물 속에 담겨진 특성을 은유(隱喩)적으로 찬양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그 은유를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 이야기로 읽어내야 해요.

그럴 때 웅숭깊은 사랑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14절까지는 술람미가 솔로몬에게 하는 노래에요.

먼저 12절을 봅니다.

 

아 1:12절.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아가서를 처음 시작하면서 입맞춤으로 했지요.

입맞춤은 두 사람이 하나 됨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술람미는 그 첫 번째 입맞춤을 잊지 못해서 두 번째 입맞춤을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그 사모함을 저는 한(恨)으로 묘사했어요.

 

어떤 분들은 이걸 한풀이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기독교는 한풀이 종교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우리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것이 아니에요.

 

한이 되려면 먼저 경험된 것이 있어야 해요.

자신이 잃어버려진 자라는 것을 알아야 잃어버려진 것이 한이 되지요.

한이 쌓이려면 먼저 자기가 천국에서 쫓겨난 자임을 알아야 해요.

마치 부자로 살다가 망해야지 가난이 한이 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죄인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죄인에게 구원에 대한 한이 생길 이유가 없어요.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데 무슨 한이 쌓이겠어요.

 

술람미도 솔로몬의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두 번째 입맞춤을 해 달라는 한이 쌓이지 않아요.

한번 달콤한 맛을 보여주고 떠났기 때문에 한이 되어서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감미로운 키스를 받아 보세요.

그 달콤한 키스를 잊지 못해요.

늘 기억 속에 남겠지요.

잊지 못하니 다시 맛보고 싶어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맛 보고 싶은데 현실은 님은 떠나가 있어서 할 수가 없으니까 그리움으로 쌓이고 한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한은 원통함이 아니고 간절함 또는 사모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수 갚겠다는 한이 아니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제가 한을 님을 사모하는 그리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경험된 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리움 때문에 한이 되는 것입니다.

그 그리움과 사모함이 한이 되어서 주변의 핍박도 이겨내게 한다고 했어요.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힘으로 주님을 기다리면서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 받은 사랑이 한이 되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술람미가 솔로몬 왕과 식사를 하던 것을 회상하면서 하는 노래입니다.

지난 날 솔로몬 왕과의 식탁에서 일어났던 그 사랑을 회상(回想)하는 것입니다.

이건 한 식구가 되어서 밥을 먹는 것입니다.

이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왕의 상이란? 문자적인 의미로는 식사하는 자리입니다.

마치 청와대 만찬에 초대 받은 것과 같아요.

그런데 술람미가 솔로몬 왕 옆자리를 차지했어요.

솔로몬 품에 안겨서 식사를 했어요.

 

이스라엘의 식사 문화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서 합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장면을 연상해 보시면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이 때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 있지요.

다른 제자들은 멀찍이 있는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 품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이건 사랑의 행위에요.

 

술람미가 사도 요한과 같이 솔로몬 왕의 품에 안겨 있었어요.

그래서 그 때를 회상하면서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멀찍이 식사를 했는데 술람미는 솔로몬 품에 안기어 사랑을 했어요.

 

예루살렘 여자들은 밥을 먹었지만, 술람미는 사랑을 했어요.

저는 서로 떨어져서 밥을 먹는 것과 솔로몬의 품에 안겨서 식사를 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으로 말하고 싶어요.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달라요.

 

솔로몬은 왕후들과는 정략결혼을 했어요.

정략결혼은 거래에요.

그러나 술람미와는 일방적인 사랑이에요.

술람미는 일체의 거래가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왕후들과는 형식상 밥을 먹었고, 술람미는 품에 안고 사랑을 한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서 이해를 합니다.

정략적으로 결혼을 한 왕후들과는 형식적인 사랑 행위인 몸만 섞은 거예요.

아니 정략적이든 뭐든 결혼을 했으니 잠은 잤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몸은 섞은 거지요.

몸만 섞었으니 좋아하는 거지요.

 

하지만 솔로몬은 술람미에겐 마음과 마음으로 사랑을 했어요.

그래서 솔로몬은 왕후들과는 밥을 먹었지만 술람미는 품에 안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새겨들으세요.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달라요.

 

사랑하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지만,

좋아하는 것은 육체적으로 하나 되는 거예요.

저는 이걸 교미(交尾)와 사랑으로 표현을 합니다.

조금 자극적인 이야기라도 복음을 쉽게 이해하려고 하는 말이니 타박하지 마세요.

 

교미와 사랑은 달라요.

교미는 그냥 숫컷과 암컷이 만나서 종족을 번성하고자 하는 행위에요.

육체와 육체의 만남이에요.

그래서 짐승들은 교미한다고 하지 사랑한다고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랑은 몸과 마음이 어우러져서 너와 나가 우리가 되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율법 아래서는 겉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였지만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몸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아요.

 

교미는 몸만 주지만 사랑은 몸과 마음을 다 주는 거에요.

교미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사랑은 마음으로 하는 거예요.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고 지켜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 주는 거예요.

 

흔히들 바람을 피운다고 하잖아요.

이건 성적욕구를 해소하기 위하여 교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바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몸만 주지 마음은 주지 않아요.

바람을 피우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교미하는 것이에요.

 

교미와 사랑의 원리로 본다면 솔로몬과 술람미의 사랑을 이해 할 수가 있겠지요.

술람미는 솔로몬을 사랑을 했고, 예루살렘 여자들은 솔로몬을 좋아했어요.

솔로몬과 예루살렘 여자들과는 교미를 한 것이고,

솔로몬과 술람미는 사랑을 한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곧 내 자신이기 때문에 아끼고 배려하고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를 비워서 술람미의 눈높이에 맞추어 준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왕의 상은 일차적으로 왕의 식탁에서 일어나는 교제를 뜻하지만 더 깊은 의미로서는 침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표준 새 번역에선 침실로 번역을 했어요.

아주 잘 번역을 했어요.

이 부분은 문자적으로 보지 않고 영적으로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아주 잘 했다고 칭찬하고 싶어요.

 

술람미가 그 때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아, 그 때가 그립다’

‘아, 따뜻한 님의 품이 그리워’

‘아, 님과 나눈 그 때 그 사랑을 잊을 수가 없어’

‘그 황홀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어’

‘다시 사랑하고 싶어’

 

‘님의 그윽한 그 눈빛’

‘카푸치노와 같은 달콤한 키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주던 그 떨림’ 을 잊을 수가 없어요.

 

사랑을 하면서 느낀 잔상(殘像)들을 하나하나 떠오르면서 온 몸을 전율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만나면 더욱 더 사랑하리라고 소망하면서 모진 핍박을 이겨내고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과의 사랑이 너무너무 황홀해서 그만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고 말았어요.

 

술람미는 솔로몬 품에서 자신의 나도 향을 토하였다고 합니다.

 

아 1:12절.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향이란? 사랑의 황홀함으로 토해지는 것을 표현하는 은유에요.

문자적으로는 사랑하면서 토해내는 교성일 수도 있어요.

황홀한 사랑으로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 너무 너무 좋아’

‘아, 너무도 행복해’

‘구름 위를 나는 것 같아’

‘아, 사랑해’

 

나도 향을 토해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쏟아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술람미를 향해 ‘오,~ 마이~ 달링’ 이라 하고,

술람미도 솔로몬에게 ‘오,~ 마이~ 달링’ 이라고 했어요.

 

품에 안긴다는 것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말이라고 했잖아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함은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는 말이기도 해요.

서로와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되니 서로의 생각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침실에 누어서 사랑하면서 도란도란 이야기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자식들 이야기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며,

시집이나 친정집 이야기며,

신앙이야기이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잖아요.

 

중요한 이야기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먹고 마시는 거예요.

남자는 여자를 먹고 여자는 남자를 먹어요.

서로가 서로를 먹음으로서 행복해 하는 거예요.

 

교미는 일방적인 것이지만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없어요.

사랑은 반드시 두 사람이 서로가 좋아야 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사랑은 반드시 서로가 서로에게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서로가 서로의 몸을 먹고 마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는 것을 양해하세요.

사랑의 언어는 노골적으로 말해야 사실감이 더해요.

예수님과 성도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부부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아가서도 부부간에 나눈 사랑이야기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성년자는 아가서를 보지 못하게 하였어요.

결혼을 해서 부부관계를 해 보아야 실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적나라한 표현을 해도 이해하세요.

 

부부간에 사랑을 서로가 서로를 먹는 것이라고 한 것을 복음적으로 풀어봅시다.

예수님과 성도간의 사랑이야기로 풀어봅시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누구든지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식으로 오셨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식탁으로 초대했어요.

구원은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날 먹으라고 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영생을 얻으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우리가 밥을 먹으면 그 밥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아요.

밥이 나를 살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밥을 먹은 것이 아니고 밥이 나를 먹은 꼴이 되는 것입니다.

밥이 힘이 되어서 나를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구원 할 때 제자들이 빵을 사 가지고 와서 잡수시라고 할 때 예수님은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을 먹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먹는 거예요.

역설적으로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의 양식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여인의 양식이 되어서 수가성 여인 속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한 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랬지요.

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고’ 했지요.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서 먹힘 당하면 가능해져요.

예수님이 밥이 되어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예수님이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짐승의 밥통에 나셨는지 아세요.

짐승의 밥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짐승 같은 우리에게 밥이 되셔서 먹힘 당함으로서 우리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오니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지요.

만나가 어디에서 어디까지 내립니까.

광야에서 가나안까지 내리지요.

가나안에 들어가니까 만나가 멈추지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에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성도가 세상에서 건짐을 받고 천국에 가는 것의 모형이에요.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뭐로 출애굽 합니까?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하잖아요.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빠져나오는 것과 같아요.

 

출애굽 할 때 어린 양의 피로는 문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 먹지요.

고기가 양식이지요.

이제 피로 죽음으로부터 나왔어요.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 하늘에서 만나가 내립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먹어야 할 새로운 양식인 것입니다.

이 만나가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만나를 졸졸 따라가다가 보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살펴봅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어요.

그리고 교회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교회는 구약의 광야와 같아요.

그래서 스데반이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광야교회에 있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광야에 나오니 만나가 내렸지요.

그럼 신약에서도 교회에 오면 만나가 내리겠지요.

그 만나가 바로 창세전 언약이라는 영원한 복음이에요.

콕 찍어서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는 복음이에요.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지요.

모든 말씀이란 성경이에요.

다른 말로 복음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하면서 이걸 기념하라고 하지요.

떡은 예수님의 살이고 포도주는 피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만 먹으면 안 되어요.

살도 먹고 피도 마셔야 해요.

마치 유월절 양고기도 먹고 피도 발라야 하는 것과 같아요.

 

피가 죄사함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살은 그 능력으로 살아가게 하는 밥이에요.

예수님의 피가 구원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살은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는 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로 구원 받은 자는 반드시 말씀을 먹어야 해요.

복음을 들어야 해요.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죽은 사람이에요.

죽은 사람은 배고픔을 몰라요.

그러니 말씀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말씀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성도로 안 보아요.

그건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에요.

종교인이에요.

 

성도는 반드시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어요.

성도는 말씀이 양식인 것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하나님과 교제가 되어요.

말씀을 먹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요.

 

이걸 아까 침실의 대화라고 했어요.

침실의 대화가 곧 기도에요.

그래서 술람미는 식탁에서 솔로몬과 사랑을 하면서 자기 품 속에 감추었던 나도 향을 토해낸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감사와 찬송을 토해낸 것입니다.

나도 향은 영적으로 기도를 말하기도 하고 감사와 찬송을 말하기도 해요.

 

요한계시록 5장과 8장을 보면 성도들의 기도를 향이라고 하지요.

그러니 술람미가 토해낸 나도 향은 기도일 수도 있고 감사일 수도 있어요.

솔로몬에 대한 사랑의 반응이라고 보면 되어요.

솔로몬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보니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다 토해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마치 오르가즘과 같아요.

사랑의 반응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해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거예요.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자 중요합니다.

우리는 원래 사랑 할 수가 없는 자에요.

자기 밖에 몰라요.

무엇이든지 움켜잡고 안 내어 놓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나면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이게 뭐와 같은가 하면,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마중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지하수 펌프에 물을 끌어 올리려고 먼저 물을 한 바가지를 붓지요.

그러면 그 물이 펌프 속에 있는 물을 끄집어 올리는 것입니다.

 

지금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사랑이라는 물 한 바가지를 부었어요.

그러자 술람미가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그게 나도 향이에요.

사랑을 주니까 사랑이 토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신약에 마리아에게서 일어났어요.

 

마리아가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니 자기 안에 있는 나도 향이 든 옥합을 깨트린 것입니다.

마리아가 깨트린 옥합의 향유가 바로 나도(나드) 향이에요.

 

한번 살펴봅시다.

 

막 14:3-9절.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4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베다니라는 동네에 전에 문둥이었던 시몬이라는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리아가 이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가 평생 동안 모아온 나드 향유가 가득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씻는 것입니다.

 

그러자 곁에서 지켜보던 제자들이 분개합니다.

이게 돈이 얼만데 발을 씻는데 사용하느냐 라고,

그래서 예수님과 여자를 싸잡아서 욕을 합니다.

 

아니, 예수님도 참 딱하십니다.

이 여자가 미친 짖을 하는데도 어떻게 그냥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예수님도 알다시피 이 나드 향유가 얼마나 비싼 겁니까?

이런 귀한 것을 발을 씻는데 사용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차라리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얼만 좋겠느냐고 몰아 부칩니다.

한마디로 지랄을 떠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도 기가차서 일갈 합니다.

‘야, 이 놈들아’

‘니들 눈에는 이게 돈으로 보이냐’

‘너희들 눈에 이 여자가 허비하는 것으로 보이냐’

‘너희들은 내가 와도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향수로 내 발을 씻기고 있어’

‘지금 이 여자는 내 장사를 준비하고 있어’

‘이 등신 같은 놈들아’

‘뭘 알기나 하고 지랄을 떠니’

 

‘이 여자는 내가 베푼 그 사랑으로 내 속을 알고 있는 거야’

그러나 너희들은 나와 그렇게 다니면서도 내 속을 모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내가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자기 안에 있는 사랑을 다 쏟아내고 있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과는 말을 많이 하지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해도 해도 끝이 없잖아요.

말을 많이 하다가 보니 상대방의 마음을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다 말해주고 싶잖아요.

 

이걸 성도에게 적용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그만큼 주님과 멀어져 있다는 증거에요.

멀찍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기도합니까?

기도가 낯설지 않습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산 기도하고 교회 가서 철야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기도는 대화에요.

속에 있는 것을 조근 조근 토해내는 것입니다.

기도를 정형화하지 마세요.

 

무시로 하세요.

길을 가면서도 하시고,

설거지 하면서도 하시고,

일하면서도 하시고,

운전하면서도 하세요.

 

그냥 곁에 예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하세요.

주절주절 떠들란 말이 아니고 머릿속에 예수님을 늘 그리고 살란 말이에요.

그러면 예수님과 늘 대화를 할 수가 있어요.

 

전 특별하게 기도를 하지 않아요.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생각 할까봐서 조심스러운데,

저는 자면서도 예수님과 대화 할 때가 많아요.

 

욥기를 봅시다.

 

욥 33:14-18절.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15.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16.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 치듯 교훈하시나니 17.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 18. 그는 사람의 혼으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으로 칼에 멸망치 않게 하시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은 잠을 자는 자에게도 인 치듯이 교훈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러한 일을 많이 경험해요.

잠을 자면서도 대화를 많이 해요.

제가 이상한가요.

신비주의 같은가요.

 

솔직히 말해서 신앙은 신비주의에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신비주의에요.

그래서 저는 신비롭게 늘 예수님과 대화해요.

 

기분이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하고,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말해요.

누가 저를 욕하면,

주님 저 인간이 지금 저를 욕하는데요.

조치 좀 해 주세요, 라고 일러바쳐요.

그럼 주님이 알아서 처리해요.

지나고 나면 이상한 일이 벌어져 있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성경을 보다가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요.

지금은 아가서 때문에 비상입니다.

이건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주시지 않으면 풀어내지를 못해요.

물론 모든 성경이 다 그렇지만 특히 아가서는 아주 난해해요.

그래서 아가서를 강해하기 전에 미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뭔가 깨달음을 주세요.

예수님과 때로는 연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말을 많이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려 주세요.

 

요 15: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보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제는 종이 아니고 친구라고 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종이지만 은혜 아래서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종에서 친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친구에게는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많이 알려준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도 친구처럼 사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과의 사귐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기도를 많이 했다고도 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합니다.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말이 됩니다.

제자들은 적게 사랑을 받은 것이 되지요.

 

이 말은 예수님이 차등해서 사랑 했다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깨닫는 깊이를 말해요.

예수님은 마리아나 제자들이나 다 동일하게 사랑을 했어요.

그러나 그 사랑을 사람마다 깨닫는 것이 달라요.

 

마치 하나님이 악인이나 선인이나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데 이걸 아는 사람이 있고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아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도 이 사랑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알았어요.

 

솔로몬의 왕궁에는 수많은 왕후들이 있었어요.

모두가 다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니 왕궁에서 사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하루 식사량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식탁에서 밥을 먹었는지 알 수가 있어요.

 

왕상 4:22-23절. “솔로몬의 일 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23.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

 

하루에 밀가루가 90가마이고, 소를 30마리를 잡고, 양을 100마리를 잡고 거기다가 사슴이며 노루며 살찐 새 까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완전히 큰 동네잔치 집과 같아요.

그만큼 많은 왕후들이 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는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솔로몬 왕에게 나도 향을 토해내지 않았어요.

왕의 사랑을 받고도 사랑인줄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자신들은 당연히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략적으로 결혼을 했으니 자기 조건으로 왕과 대등하게 놀고자 하였어요.

그러니 솔로몬과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어도 황공함도 없고 감사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람미는 감히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천하디 천한 종이에요.

죄인이에요.

그런 그가 왕의 식탁에 초대 받고 그것도 왕의 품에 기대어 사랑을 나누었어요.

그러니 어찌 감사치 않겠어요.

그래서 자기 품속에 있는 모든 것을 왕의 품에다 쏟아내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술람미가 솔로몬의 품에 안겨서 그 사랑이 너무도 귀하고 큰 것임을 알고 나도 향을 토해내는 것과 같이 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럽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반드시 마리아의 옥합을 깨트린 사건을 증거하라고 합니다.

이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는 반드시 토해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술람미가 토해낸 나도 향은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토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는 거예요.

사랑해 보세요.

다 주고 싶어져요.

 

누군가에게 뭔가 해 주고 싶다면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그 사랑하는 대상에게 자기 것을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보여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은 용서를 토해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토해내고,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를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용서해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용서받은 자는 반드시 용서를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것을 보니 용서 받음을 아는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입니다.

남을 정죄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정죄하는 법아래 있기 때문에 정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은 은혜를 쏟아내요.

 

사랑은 줘도 줘도 부족하다고 느껴요.

사랑하는 사람에겐 아까운 것이 없어요.

항상 부족하다고 여겨요.

더 잘해 줄 걸,

더 못해줘서 아쉬워해요.

 

사람과의 사귐도 마찬가지에요.

누군가와 사귐을 갖잖아요.

사귐을 지속하다가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가 있어져요.

 

저는 교인들에게 신앙을 강요하지 않아요.

사랑의 원리를 알면 그 사람의 신앙상태를 가늠 할 수가 있어요.

자발적으로 하면 아, 저 사람은 지금 은혜 받고 있구나,

억지로 하면 아, 자 사람은 은혜 받고 있지 않구나, 를 알아요.

어떤 사람은 기쁨으로 하고 어떤 사람은 억지로 해요.

 

어떤 이는 교회 오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해요.

얼마나 싫으면 저럴까?

마치 밥 먹기 싫은 놈을 밥상머리에 앉혀 놓은 것과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힘이 들어요.

하나님 말씀 듣기가 저렇게 싫어서야 어쩌누,

불쌍해요.

 

제자들이 마리아의 향유를 돈으로 환산 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예수님에게 향유를 붓는 것을 허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질은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하는 가늠자에요.

 

은혜를 받았을 땐 연보가 아깝지 않았는데,

은혜가 떨어지면 아깝게 느껴져요.

은혜가 충만하면 교회 오는 것도 신이 나는데,

은혜가 떨어지니 교회 오는 것이 힘이 들어요.

 

마리아가 예수님 발에 부은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는 돈이 아니고 사랑이었어요.

사랑은 돈으로 환산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아가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값어치를 따진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 연보하지 마세요.

힘들다고 생각 되면 교회도 오지 마세요.

마음에도 없는 것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 한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자 해요.

난 이만큼 했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연보는 마음으로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하였어요.

 

연보는 돈이 아니고 사랑이에요.

사랑을 돈으로 환산 할 수가 없어요.

사랑을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은 사랑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하고서 아내에게 돈을 준다고 해 보세요.

얼마나 모욕적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물질로 가늠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니 억지로 하지 말고 마음에 정한대로 인색함 없이 하시면 되어요.

과부의 두 렙돈은 돈이 아니고 사랑이었어요.

돈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헌신이든 봉사든 형제사랑이든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공급하는 은혜로 하란 말입니다.

 

몰약 향낭을 살펴봅시다.

 

아 1:13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낭이요”

 

술람미는 솔로몬을 자기 품 가운데 있는 몰약 향낭이라고 합니다.

몰약 향낭이란? 여인들이 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향수와 같은 것입니다.

당시 여자들은 몸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몰약 향낭을 가슴 속에 넣고 다녔어요.

마치 조선 시대 여염집 아낙들이 사향(麝香) 주머니를 저고리 속에 품고 다닌 것과 같아요.

 

이게 중요한 말이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이 자신의 가슴 품에 몰약 향낭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술람미는 자기 몸에서 솔로몬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냄새는 없고 오직 솔로몬의 냄새를 간직하고 산다는 말이에요.

 

결국 자신의 더러운 것을 솔로몬이 감추어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술람미는 스스로를 냄새나는 여인으로 간주하고 있어요.

이는 자기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천하디 천한 죄인을 솔로몬의 사랑으로 가려주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우리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과 같아요.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주세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몰약 향낭과 같아요.

 

몰약은 시신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한 방부제에요.

예수님이 죽으시자 니고데모가 몰약으로 예수님을 장사했지요.

이는 썩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 술람미가 솔로몬을 일컬어 자기 가슴 속에 몰약 향낭이라고 함으로서 솔로몬은 자기의 썩은 마음을 깨끗케 해주는 분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였어요.

더러운 마음을 솔로몬이 몰약처럼 정결케 해 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약식으로 봅시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서 정결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피 뿌림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고 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는 성도에게 있어 몰약 향낭과 같아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린 비록 죄로 인하여 죽은 시체들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살아났어요.

이제는 죽은 송장이 아니라 산 자에요.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몸에서 흘러넘친다고요.

마치 술람미의 몸에서 술로몬의 향기가 나오듯이 말이에요.

 

우린 비록 술람미처럼 천한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받았어요.

그러니 더러운 송장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지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냄새를 풍기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예수님의 냄새를 토하여 내게 만듭니다.

우리는 입만 열면 더러움을 쏟아 내는 자들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기 피로서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의 이런 악함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고 자랑하게 되어요.

우리는 감히 뱉어 낼 수가 없는 하늘에 이야기를 한단 말입니다.

성령이 예수의 피로서 죄사함 받고 산다는 것을 자랑하게 만들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영생을 말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몰약 향낭으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말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도 예수님이 몰약 향낭처럼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받았어요.

사람의 본능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대하는 법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므로 누가 나를 욕하면 나도 욕을 하게 됩니다.

 

그럼 술람미도 예루살렘 여자들의 따돌림에 반발하여 그들에게 독설을 퍼붓고 싸워야 해요.

하지만 술람미는 그들과 대적하지 않았어요.

이는 솔로몬에게 받은 사랑이 몰약 향낭처럼 자기 가슴 속에서 폴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원수를 용서해 주는 것과 같아요.

 

인간적으로 보면 술람미는 자기를 미워하는 그들을 향한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쏟아 낼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솔로몬의 사랑이 술람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술람미는 솔로몬으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냈어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관대해져요.

너그러워지고,

이해하고,

참아지게 되어요.

 

관용이니 관대함은 가진 자만이 토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용서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동족들로부터 핍박을 받아도 용서 할 수가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자신도 과거에는 그들과 같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에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친바 되어 용서 받았기 때문에 용서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잘나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바울 안에서 용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용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으로 용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도 그들 속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사랑 받고 용서 받았어요.

그렇다면 우리를 욕하는 그들에게 욕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으면 나도 그들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도적질 한 자이면 도적질 한 사람을 용서 할 수가 있고,

내가 간음한 자이면 간음한 사람을 정죄할 수가 없어요.

용서 받음이 용서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용서는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에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서 용서 받았어요.

그렇다면 용서 받은 자로서 남도 용서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용서 받은 자라고 할 수 있어요.

결국 술람미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솔로몬의 사랑이 용서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건 바로 솔로몬이 술람미 마음속에 몰약 향낭처럼 향기를 토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를 살펴봅시다.

 

아 1:14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엔게디는 사해바다 서쪽에 있는데,

해발 4000미터나 되는 고지에 있는 산성과 같은 곳이에요.

이곳을 요새라고 해요.

솔로몬은 이곳을 개간하여서 무릉도원처럼 정원을 만들고 포도원으로 개간을 했어요.

그러니 엔게디는 천국의 모형이기도 해요.

 

포도원이 고산지대라서 고산지대에만 자라는 꽃인 고벨화를 심었어요.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는 천상에 피는 꽃과도 같은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흰색으로 보이고 가까이 가면 세 가지 색이에요.

고벨화는 노랑, 빨강, 하얀 세 가지 색으로 피어요.

이를 예수님의 선지자직과 왕직과 제사장직 삼직을 비유해서 일명 메시야의 꽃이라고도 했어요.

 

엔게디는 다윗이 사울왕의 핍박을 피해 도망을 간 곳이에요.

다윗이 사울왕의 핍박을 피해 엔게디로 도망한 것은 요새로 도망친 것입니다.

 

삼상 23:29절.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

 

요새란? 하나님의 품을 상징해요.

시편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의 피할 바위’ 라고 하지요.

이는 모두가 도피처란 말입니다.

 

엔게디는 영적으로 도피처와 같은 곳이에요.

술람미는 솔로몬을 엔게디 포도원으로 말하는 것은 솔로몬을 도피처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숨어야 할 곳이란 말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피할 품이에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당하지 않아요.

성도를 괴롭히는 것은 마귀에요.

 

마귀는 율법으로 참소해요.

이런 마귀의 참소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요.

예수님의 피만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보호해 주세요.

그러니 이 시대 엔게디 포도원은 예수님 안이 되는 것입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없으랴 ~

~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

~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 가리~

 

알다시피 술람미는 솔로몬의 사랑을 독차지 한 관계로 수많은 여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어요.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천대를 받았어요.

그래서 솔로몬의 품으로 도망가고 싶은 것입니다.

 

술람미가 솔로몬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핍박을 받았듯이,

지금도 십자가 피에 복음을 받으면 핍박을 받아요.

술람미를 예루살렘 여자들이 핍박을 했듯이,

지금도 율법 교회들이 핍박을 해요.

 

하나님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주어요.

복음과 고난은 한 셋트에요.

마치 햄버거에 햄과 버거가 한 셋트이듯이 그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하늘에 있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약속을 받으면 세상으로부터 떠나도록 요구받게 되어요.

하나님이 세상에 뿌리를 박지 못하도록 자꾸만 흔들어요.

 

이런 삶을 산 사람들이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 숲에 우리도 끼어 있어요.

만약 히브리서 11장이 계속하여 쓰여진다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의 이름도 적혀 있을 것입니다.

이게 성도의 팔자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에 복을 안 주는 대신 하늘에 소망을 주어요.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게 만들어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주시곤 땅에선 나그네로 몰아내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주는 것은 천국을 사모하게 하기 위함이에요.

이 세상이 살기 힘들어야 천국을 사모하지요.

세상에서 안락하게 살아보세요.

천국을 사모할 사람은 단 하나도 없어요.

 

술람미는 우리 대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아픔을 미리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누릴 사랑을 미리 누리고 있어요.

 

우리는 술람미처럼 왕의 사랑을 받았어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왕후들처럼 잘난 척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어요.

십자가 복음이 깨달아진다는 것은 엄청난 복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하늘의 로또 복권에 당첨이 된 거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자 하여도 믿지 못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예수가 믿어져요.

이건 엄청난 행운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미혹당하고,

성화한다고 부르짖고,

교회 개혁 하여야 한다고 외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된다고 외치는 시대에,

아무 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공짜로 구원해 준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더 이상 여러분을 가둘 수가 없어요.

그 무엇으로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어요.

이것이 믿어진다면 술람미처럼 나도 향을 토해내세요.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껏 먹고 마시세요.

 

십자가 피가 주는 자유를 빼앗기지 마세요.

왕의 식탁에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 구속받은 말씀들로만 가득합니다.

그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신다고 합니다.

 

우린 이미 이긴 자에요.

우겨쌈을 당해도 쌓이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고,

핍박을 당하여도 버린바 되지 않아요.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셨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승리케 하세요.

 

그러니 누가 위협을 하고 공갈을 쳐도 흔들리지 마세요.

주께서 우리의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송이시니 안심하세요.

주께서 이기셨습니다.

그러니 이기신 주 안에서 평안하세요,

 

주님의 이기심 안에서 안식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 중에 괴수였던 우리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이 사실이 몸서리 쳐질 정도로 기쁨으로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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