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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계시록 강해

11강.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3:1-6)

by coroa 2020. 8. 31.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11강. 사데 교회에 보내는 편지 (계 3:1-6).-

 

-.정낙원 목사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주는 책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나로부터 출발을 합니다.

내가 있고 신도 있어요.

 

그러나 성경을 펴면 나 있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 하였다고 합니다.

창조라는 말은 원인에 의한 결과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창조가 된 배경에는 그 목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창세전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만드신 것은 창세전에 감추었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자기 백성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역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이 구원받는 대하(大河) 드라마와 같이 전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시나리오에 근거하여서 시작에서부터 끝을 향하여 한 회 한 회씩 찍어갑니다.

예수님의 구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는 것으로 전개가 됩니다.

 

드라마의 각 회마다 내용에 따라서 셋트가 달라지듯이 역사의 모습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한 사람의 일대기를 드라마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성장기에 따라서 세상 모습도 달라지고 또한 거기에 동원되는 사람들도 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구속사가 연속극과 같이 시작과 끝이 있는 것으로 전개가 된다는 것은 이 역사도 거기에 맞게 변해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이 세상 역사도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질수록 거기에 맞는 사회 환경이 조성이 되어가고 사람들도 종말의 모습으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 받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끝을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심판하는 것으로 말씀 하셨습니다.

또한 양과 염소를 갈라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0-11=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요한계시록 22장은 성경의 맨 마지막 장입니다.

성경의 결론입니다.

그 결론을 뭐라고 하는가요?

 

두 부류로 말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럼 종말에 인간들의 모습이 양극단으로 나타나겠지요.

이걸 신앙으로 이야기하면 두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아도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합당한 자라고 합니다.

 

그럼 그 외에 사람들은 합당치 않다는 말이겠지요.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은 그 시대의 신앙적인 풍조에 합류하지 않고 다른 가치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을 하십니다.

공의로 심판을 하신다는 말은 심판의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 근거를 토대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세상에 제시한 심판의 근거가 무엇인가요?

 

시편 2편입니다.

 

시 2:6-12=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12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서 시온에 왕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왕이 누구인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철장으로 심판을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군왕과 관원들에게 그 아들에 교훈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의 교훈을 받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합니다.

이게 이 세상에 던져진 하나님의 명령(命令)입니다.

 

하나님의 주사위는 던져 졌습니다.

이제 이 근거로 심판 하십니다.

그 아들의 교훈을 받는 자는 살아나고 받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그 아들을 표상하는 인물들을 세상에 주셨습니다.

인류 최초의 심판 때 모습을 봅시다.

노아 시대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심판과 구원의 예표적인 인물로 세우셨습니다.

누구든지 노아의 말을 들으면 살고 듣지 않으면 죽습니다.

노아의 삶에 동참 하면 살고 동참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노아 때의 세상 모습이 어떠했는가요?

 

창 6:2-7=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 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취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고 육체의 쾌락을 좇아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 지음을 한탄하사 심판을 하셨다고 합니다.

왜? 한탄하십니까?

이는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을 보고 갑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님이 만물을 창조를 하셨습니다.

왜? 창조 했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이는 곧 만물은 예수님을 위하여 존재하도록 창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만물은 의인화 하여서 인간이라고 보세요.

구체적으로 성도라고 보세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이걸 교회로 이야기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세상은 자기 방식대로 산다고 하여도 교회는 세상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교회의 존재 목적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지만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살면 되어요.

하지만 교회는 세상 가치로 살면 안 됩니다.

세상과 다름의 가치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의 타락이란? 세상 가치가 지배 할 때입니다.

 

이를 노아 시대의 말로 표현을 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께서 장차 재림 하실 때의 모습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교회의 모습이 세상의 가치에 함몰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드라마를 교회를 통해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그냥 교회가 아니라 예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그 비밀을 교회에 담아 놓았습니다.

드라마는 주인공이 죽으면 끝이 나듯이 이 세상 역사도 만물의 주인인 예수그리스가 오시면 끝이 납니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비밀을 교회에 두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역사는 교회로 시작하여서 교회로 끝이 나게 됩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이 세상의 시간표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예언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곱 교회를 가지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 교회마다 그 시대를 보여주는 그 시대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흐름을 보면 이 역사의 경점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에베소 교회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를 거쳐서 사데까지 왔습니다.

일곱 교회 중에서 다섯 번째 교회인 사데 교회에 왔습니다.

일곱 교회를 7부작 연속극으로 본다면 5회까지 왔으니까 중반부를 지나서 이제부터는 후반부로 들어서서 막바지로 나아가게 되는 셈입니다.

 

연속극을 보면 중반을 거치면서 흐름이 바뀌듯이 교회사 역시도 사데 교회를 기점으로 교회사는 커다란 변곡점(變曲點)을 맞이하게 됩니다.

초대교회가 시작이 되고 난 후 엄청난 박해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마귀가 물리력을 동원하여서 외부적인 핍박으로 교회를 공격하였습니다.

물리적인 핍박을 가하자 교회는 지하로 숨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마귀는 유화책을 강구합니다.

교회를 로마 국교화를 만들어서 평화를 주어버립니다.

그러자 지하에 숨어 있던 교회가 밖으로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교회가 밖으로 나오자 마귀는 교회에 세상의 달콤함을 주기 시작합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들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교회가 달콤함에 금새 취하고 맙니다.

싸우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말았습니다.

 

힘들 땐 믿음을 지켰는데 편해지니까 믿음을 다 버린 것입니다.

등 따습고 배가 부르기 시작을 하면서 세상과 하나 되기 시작을 합니다.

급기야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두아디라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중세 암흑시대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두아디라 시대의 마지막 때인 오늘 사데 교회에 나타나셔서 너희는 교회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니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합니다.

 

속된 말로 무늬만 교회이지 그 속은 절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절간이 된 교회를 깨트립니다.

그리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십니다.

이름하여 종교 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사데 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사데 교회는 중세 암흑시대를 끝장내는 시대이고 새로운 교회 시대를 여는 교회입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사데 교회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종교 개혁을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사데 지역의 시대상을 통해서 말씀 하시는 영적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데는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산 위에다 성(城)을 쌓고 만든 도시로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도시입니다.

산 아래로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도시 자체가 요새화가 된 것입니다.

주변이 절벽으로 이루어져서 들어가는 입구의 성문만 걸어 잠그면 그 누구도 들어 올 수가 없는 그야 말로 철옹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철옹성과 같은 사데가 역사 속에서 두 번의 멸망당한 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저히 멸망 당 할 수 없는 조건임에도 두 번 무너진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이건 교회사를 통한 예언적 의미에서 보면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어요.

 

하나님께서 중세 암흑시대에 사데 교회를 배치해 둔 이유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에베소 교회 이외는 성경 속에 없는 교회들입니다.

그럼 사데 교회 말고 다른 이름의 교회를 여기에 배치해 둘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울산목양 교회라든가 아니면 모퉁이 돌 교회라든가 등등 다른 이름으로도 얼마든지 말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데 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배치한 것은 사데를 통하여서 장차 일어날 교회들에게 뭔가 이야기를 해 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꼭 사데 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건 잠시 후에 설명할게요.

 

사데는 상업도시로서 무역업으로 활발했습니다.

사데는 과거 루디아 왕국의 수도로서 엄청 부요했어요.

그 이유는 땅이 비옥하고 특히 사데를 감싸고 흐르는 강에서 사금(砂金)이 엄청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들어서 사용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데를 일컬어 금의 도시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데 사람 그러면 통상적으로 아!~ 그 부자 동네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불렀습니다.

 

금을 많이 생산하다가 보니까 자연히 돈이 많고 부유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부(富)는 사치와 향락을 몰고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이 사데 지역은 사치와 쾌락으로 흥청망청 하였어요.

 

생각해 보세요.

돈이 많겠다!

그런데 그 당시 신전의 신앙들은 음행을 종교의식화 해 놓았어요.

자연히 사회분위기 자체가 사치와 쾌락을 좇아가는 타락 문화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정신이 육체의 향락을 좇는 것이었어요.

 

사데의 모습이 마치 이 시대 서울의 강남의 밤 문화와 같았어요.

인류 역사를 보면 인간들의 가치는 오직 하나에요.

육체의 쾌락이에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은 육신의 쾌락을 삶에 목적으로 두고 살았음을 보게 됩니다.

 

결국 인간들은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사는 짐승들인 겁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타락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국의 흥망성쇠도 타락으로 얼룩져 있어요.

예수님의 초림 당시의 로마의 사회가 퇴폐와 타락을 일삼았듯이 예수님의 재림 때의 사회적 분위기도 로마 때와 똑같이 타락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사 속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후 교회는 정체성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어요.

핍박을 받을 때는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등 따습고 배가 부르자 하늘나라가 사라져 버렸어요.

오로지 이 세상의 쾌락만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께서 교회에 나타나셔서 강력하게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데 교회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다.

 

1절을 봅시다.

 

계 3:1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예수님의 나타나심 자체가 계시라고 했습니다.

즉 나는 이런 일을 하겠다는 자기 계시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다.

 

예수님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건 어디서 본 그림입니다.

맞습니다.

계시록 1장에서 본 그림입니다.

 

계 1:20절=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른 손으로 일곱 별과 일곱 교회를 붙잡고 계십니다.

 

이건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모습과 같습니다.

 

계 2: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를 예표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이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것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하였고!

일곱 별은 일곱 교회 사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초대 교회를 세우실 때 주의 종들을 오른 손에 꽉 붙잡고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 예수님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곧 사데 교회 때도 예수님께서 주의 종들을 오른 손으로 꽉 잡고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교회의 태동을 알리는 싸인인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사데 교회 때에 교회사의 큰 변혁이 일어납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기독교인 개신교가 탄생을 하게 됩니다.

 

왜? 교회를 새로 세우십니까?

이는 지금 있는 로마 카토릭은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껍데기는 교회인데 그 속 내용은 세상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으로 사데 교회에 일곱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는 일곱 별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일곱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십니다.

붙잡는 것하고 가진 것하고는 다릅니다.

 

“가진” 이라는 말은 “에콘”이라고 합니다.

“에콘” 이라는 말은 내 것이라는 소유개념이에요.

왜? 내 것이라는 소유에 의미로 말하는가 하면 가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고 난 후 마귀가 교회를 소유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카토릭은 마귀가 거짓 종들을 세워서 교회를 사유화 하였어요.

이러한 때 예수님께서 아니다 그 속에 내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내 것은 손대지 마!”

“그들은 내 것이야!” 라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인가 하면 새로운 교회를 세울 종들이에요.

이건 마치 예수님의 초림 때 옛 언약에 속한 구약 교회를 무너뜨리고 새 언약에 속한 신약 교회를 세울 때 12제자들을 꽉 붙잡고 사용하신 것과 같아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수님이 12제자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초대교회를 세우셨어요.

이와 같이 사데 교회에도 예수님께서 자기 종들을 꽉 붙잡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을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로마 국교가 되고 난 후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 했어요.

교회가 세상 가치로 세워져 갔어요.

인본주의 사고로 가득했습니다.

이름만 교회이지 그 내용은 뱀 사상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래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난 후 나타난 교회의 모습이에요.

카토릭은 인본주의 사고로 세워졌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본주의 사고로 세워져가는 교회를 폐하시고 성령으로 신본주의 사고를 가진 교회로 세워 가시겠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게 종교 개혁이에요.

왜? 종교 개혁이 일어났습니까?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입니다.

이러한 기치 아래 세워진 교회를 일컬어 개신교(改新敎) 또는 개혁(改革) 교회라고 합니다.

 

카토릭에서는 교황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였고!

인간의 선행이 의로운 것이라고 가르쳐졌고!

믿음 대신 행함이 가르쳐졌어요.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일어나서 이건 아니다 라고 외친 것입니다.

다시 성경적인 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친 겁니다.

 

이게 사데 지역의 화폐의 도안(圖案) 속에 그대로 그려져 있었습니다.

 

사데 지역의 화폐는 “두루마리”로 도안(圖案)이 되어 있었어요.

“두루마리”란? 성경을 말해요.

이는 사데 교회 시대가 되면 잃어버린 성경을 다시 찾는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사도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쓸 당시는 사데 교회는 없었어요.

이건 장차 역사 속에 일어날 교회였어요.

그 교회가 하여야 하는 일들을 사데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예언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데 지역의 화폐 속에 성경을 의미하는 두루마리 그림을 숨겨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가지고 장차 역사 속에서 일어날 교회들을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데 지역의 사회상을 가지고 로마 카토릭을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데 지역의 사회상이 곧 로마 카토릭의 모습입니다.

사데 지역은 돈은 차고 넘쳤어요.

그러다 보니까 삶에 가치가 쾌락주의에 두고 살았어요.

잘 먹고 잘 살자 라는 현세적이었어요.

 

이게 로마 카토릭의 모습이었어요.

교회가 로마 카토릭이 되고 나서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사라졌어요.

오로지 현세적인 것이었어요.

왜냐하면! 부와 사치와 쾌락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일곱 영으로 꽉 붙잡고 타락된 교회를 허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이를 사데 지역의 화폐 속에 담아 놓은 것입니다.

 

하루 하루 쾌락을 삶에 가치로 여기고 살던 도시의 화폐에 성경을 상징하는 두루마리를 도안(圖案)해 넣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데 교회가 해야 할 일을 화폐를 가지고 알려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입니까?

사라진 성경을 다시 찾아 준다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슬로건이 뭔 줄 아세요.

 

오직 말씀!

오직 믿음!

오직 은혜였어요.

 

왜? 이러한 슬로건을 내 걸었을까요?

이는 그 당시 신앙의 기준을 하나님의 은혜에 두지 않고 인간의 선행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선행도 의(義)가 된다고 가르쳐졌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방 종교의 사고에요.

 

이방 종교는 인간의 가치를 신앙의 근본에 두고 있어요.

그래서 종교마다 선행을 의(義)라고 가르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도 그랬어요.

인간의 선행을 구원의 길로 포장해 놓았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선행은 마치 구원의 보증 수표라도 되는 줄 착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에 예수님께서 아니다 라고 합니다.

누가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이 주어진다고 하느냐?

성경은 그렇게 약속 한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만약 그러한 사고를 신앙으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모습을 “너희가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계 3:1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무엇을 안다고 합니까?

네 행위이지요.

어떤 행위인가요?

구원받고자 하는 선행입니다.

 

너희들은 선행이 구원의 길이라고 하지만 아니라고 합니다.

그건 인간들의 가르침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합니다.

즉 인간의 행위는 의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신앙을 허락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니 실상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는 교회를 철저하게 정치에 이용했어요.

정치에 이용하려면 사람들을 다스려야 해요.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하면 정부 정책에 호응을 하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여기에 선행 사상을 신앙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교회에 정한 제도의 순응하고 따르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황의 말이 진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교황무오설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2절을 봅시다.

 

계 3:2절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이는 잠자는 자들을 깨우라는 말입니다.

이건 과거 사데 지역의 멸망 사건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과거에 사데는 스스로 난공불락이라고 여기고 경계를 게을리 하고 잠을 자다가 하룻밤 사이에 망했던 두 번의 멸망 사건이 있었어요.

이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멸망도 사데의 몰락과 같이 언제 도적같이 이를 줄 모르니 자만하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 자만은 금물이에요.

이 정도 되었으면 되겠지 라는 생각은 금물이에요.

언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자기 행위를 의미로 둘 때에요.

우리는 본능 속에 자기 애(愛)가 있어요.

이 자기 사랑이 자기가 행한 것을 의미로 붙잡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이 선한 사업을 많이 하였어요.

하지만 그게 의가 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카토릭은 그 선행을 의가 된다고 가르쳤어요.

 

천주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부정해요.

속죄는 선행과 기도와 고해성사로 이루어진다고 해요.

그래서 선행을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신부에게 죄를 고하면 죄가 사해진다는 고해성사가 성행하였어요.

또한 성당을 짓기 위하여 기금을 마련하고자 죽은 가족을 위하여 연보를 하면 천국으로 간다고 면죄부를 팔기 시작했어요.

 

사제들이 면죄부를 가지고 어느 성에 가서 깃발을 내 세우면 사람들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그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만 사면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죄를 탕감 받는다고 했어요.

그러니 돈을 가진 자들은 앞 다투어 면죄부를 사고자 줄을 섰던 것입니다.

 

돈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었어요.

 

“돈이 상자 속에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순간 고통당하는 영혼은 연옥에서 구원 받습니다.”

 

이 장사가 얼마나 잘되었는지 돈을 갈고리를 긁어모았다고 합니다.

왜? 장사가 잘 되었을까요?

이는 교회의 가르침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식으로 목사들이 교회에 충성하고 성화하여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거부하십니다.

네 행위 속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째서 인간의 선행 속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합니까?

이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봅시다.

 

계 3: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게 너희가 어떻게 복음을 들었는지 생각하라고 합니다.

복음이 과연 그러한 것인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복음 속에 그러한 것이 있는지 성경을 상고해 보라는 말입니다.

 

이 성경이 어떻게 주어졌으며!

그 성경 속에 카토릭의 교훈이 들어 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성경에 죽은 자를 위하여 연보를 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면죄부나,

신부에게 죄를 고하면 죄가 사해진다고 하는 고해성사나,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상고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건 카토릭이 지어낸 말이에요.

 

성경은 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사해지고!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앞에 의는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에서만 주어진다고 해요.

 

그러므로 무엇이 너희로 하여금 이러한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하게 하였는지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옛날 사데가 하룻밤 사이에 멸망을 당한 것 같이 주께서 도적같이 임하여서 너희도 멸망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4절을 봅시다.

 

계 3:4절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이 있다고 합니다.

인본주의가 진리처럼 가르쳐 질 때에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무리들이 나타났어요.

카토릭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자들이 일어났어요.

이들을 일컬어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란 몇 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천년 묵은 이무기인 로마 카토릭을 무너뜨릴 주의 종들이에요.

이름하여 종교 개혁자들입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로마 카토릭의 교훈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믿음을 지켜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이고 그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남겨 두셨어요.

이들을 일컬어 “남은 자”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그루터기” 라고 해요.

이렇게 “남은 자”들을 가지고 썩은 고목들을 무너뜨렸어요.

 

“사데”라는 이름이 주는 영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데”라는 이름은 “사르데신”이라고 합니다.

이는 “남은 자” 또는 “남아 있는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산스크리스트 어로는 “새로 태어나다” “새롭게 되다” 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적인 의미로는 “거듭나다” “새로 시작하다” 라는 말로서 “종교개혁(改革)”을 의미합니다.

 

313년 콘스탄틴 대제 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화가 되고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종교 개혁 때까지 약 1200년 동안 교회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을 하였어요.

교회가 완전히 귀신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어요.

 

1200년 동안 교회는 하나님 말씀은 사라지고 전통을 고수해 왔어요.

갖가지 의식 종교로 변질이 되고 말았어요.

이 시대 카토릭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각양의 의식들이 다 그 시대의 산물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수도사이며 대학의 신학 교수였던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속죄의 효력에 관한 95개 조문을 발표하였어요.

이것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됩니다.

 

독일의 루터에 의해서 개혁의 불씨가 붙여지면서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프랑스의 칼빈에 의해서 강력하게 추진이 되어 집니다.

유럽 전역에 반 카토릭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반 카토릭 운동이란? 카토릭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당시 카토릭에서는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어요.

여기에 개혁주의자들은 무슨 말이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다! 라고 반박을 합니다.

 

인간의 선행은 의가 되지 않으며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교회와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만이 신앙의 규범이 되고 성경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고 하였어요.

또한 교황이나 신부가 제사장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제사장이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외친 것입니다.

 

성경은 신부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이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신부들이 소유하고 독점하고 있던 성경을 일반 성도들에게 되 돌려주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하나님 말씀이 성도들 손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카토릭이라는 거대한 고목이 사데의 남은 자들인 종교 개혁자들이 손에 무너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사데가 하룻밤 사이에 멸망당한 것과 같아요.

도적같이 이른다는 말은 사데의 역사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데는 역사적으로 두 번 망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엔 엄청난 영적 비밀이 숨어져 있어요.

사데의 두 번 멸망한 사건 속에는 교회의 두 번 멸망 사건이 담겨져 있어요.

그 영적 비밀을 사데의 멸망 사건으로 살펴봅시다.

 

첫 번째는, 주전 549년경에 루디아 왕국 때 바사 왕 고레스에게 멸망당한 사건입니다.

 

사데는 루디아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당시에는 크로에수스(Croesus) 왕이 통치하는 시기였는데 사데의 황금 시기였다고 합니다.

가장 전성기를 맞이하였어요.

 

비옥한 땅과 풍부한 자원과 활발한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금을 생산하는 도시로서 엄청난 부와 사치를 누렸어요.

인류 최초로 금화를 생산한 곳이었느니까 그 부귀영화는 대단했었어요.

그래서 부자들을 “크로에수스(Croesus) 처럼 부유하다” 라는 것으로 회자 되었다고 합니다.

 

이 때 바사 왕 고레스가 루디아 왕국을 공격하여 14일간 사데 성을 포위하고 있었어요.

도무지 성문으로는 들어 갈 수가 없어서 성 주변을 정찰 했어요.

고레스가 궁여지책으로 부하들에게 누구든지 저 성 안으로 침투하여서 성문을 열면 큰 상급을 내린다고 하였어요.

 

그러던 중에 한 병사가 성벽을 주시하고 있다가 성 위에서 사데의 한 병사가 성벽에서 자기 철모를 성 벽 아래로 떨어뜨려서 성벽 길을 따라 내려와서 주어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 병사가 그 길을 정탐을 해 보니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었어요.

 

이를 고레스에게 알려 주었어요.

이에 고레스는 소수의 특공대를 구성해서 올라가게 하여서 성문을 열게 하고 하루 밤 사이에 점령을 해 버린 것입니다.

 

사데에서는 누가 그 길로 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보초도 세우지 않고 자만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자만이 결국은 하루 밤 사이에 그 화려하던 루디아 왕국은 망하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게 사데의 1차 멸망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에 200년 후에 또 다시 재현되어서 나타났어요.

 

제국들의 흥망성쇠에 따라 사데를 지배하던 바사가 헬라에게 정복을 당하고 맙니다.

자연히 사데는 헬라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헬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사데는 또 다시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자 헬라가 네 조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 때 셀류쿠스 제국의 안티오쿠스가 주전 218년에 정적(政敵)인 아케우스가 사데에 숨어서 통치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안티오쿠스가 일 년 동안 성을 포위하면서 침공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침공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년 전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하여 루디아 왕국이 하루 밤 사이에 점령당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에 안티오쿠스가 용맹한 병사 15명을 특공대로 뽑아서 밤에 그 절벽 길로 보내서 성문을 열고 정복해 버립니다.

 

안티오쿠스는 역사의 교훈을 얻어서 고레스가 루디아를 점령한 그 방법 그대로 점령하였어요.

그러나 아케우스는 자만에 빠져서 200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교훈 삼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하룻밤 사이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 후 사데는 로마가 통치하던 주후 17년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납니다.

이 때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맙니다.

이 후로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사데 시를 재건하고자 5년 동안 지원을 해 주었지만 사데의 옛 명성은 회복하지 못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사데의 두 번 망한 사건 속에는 교회사적인 의미로 보면 의미심장한 사건이 들어있어요.

 

사데 교회는 교회사 적으로 종교 개혁시대를 상징한다고 하였습니다.

철옹성과 같던 로마 카토릭이 루터와 같은 몇 사람에 의하여 무너졌어요.

이건 마치 루디아 왕국의 사데가 고레스의 특공대 몇 명에 의하여 무너진 것과 같아요.

 

로마 카토릭은 313년 국교화가 되고 난 후 1517년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약 1200여 년 동안 난공불락의 도시인 사데처럼 번영과 부요와 사치를 누렸어요.

교회가 세상과 짝하여 음녀가 되어서 왕 노릇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중세 암흑시대를 마감하고 맙니다.

이건 마치 사데의 1차 무너짐과 같습니다.

 

2차의 무너짐은 종말에 나타날 것입니다.

 

종교 개혁으로 카토릭이 사데의 1차 무너짐과 같이 무너지고 개혁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으로 인하여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가 엄청난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이 때는 그냥 예수 천당만 외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이건 사데가 헬라의 지배 하에서 두 번째 번영의 시기를 맞이하였던 것과 같아요.

 

그런데 개신교회가 부흥을 하면서 다시 카토릭화 되기 시작했어요.

기독교가 들어가면서 가난이 사라지고 부요를 누리게 되었어요.

역사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부와 함께 들어갔음을 보게 됩니다.

 

이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이 우리나라를 보면 알아요.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았어요.

그러다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개화기를 맞이합니다.

백성들의 눈이 떠지기 시작을 하였고 삶에 질이 개선되기 시작을 하였어요.

 

세계사를 보면 기독교가 들어가는 나라마다 부흥을 했어요.

유럽이나 미국을 보세요.

미국은 청교도들의 신앙으로 세워졌어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근본으로 가지고 건국하였기 때문에 세계의 제일 강국으로 발돋움한 것입니다.

그 짧은 역사를 가지고서도 세계 최강이 되었어요.

이 모두가 기독교 신앙 때문이에요.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도 기독교로 인하여 엄청난 부의 번영을 누리게 됩니다.

 

국가의 번영과 동시에 교회도 덩 달아서 부를 누리게 됩니다.

교회 안에 돈이 쌓이기 시작을 합니다.

또한 교인들의 주머니도 돈으로 채워지기 시작을 하였어요.

그런데 등 따습고 배가 부르기 시작을 하자 하나님을 슬슬 떠나기 시작을 합니다.

속된 말로 유럽 교회는 이미 하나님이 떠났고, 미국은 떠나고 있으며, 한국은 보따리 싸고 있다고 해요.

 

이는 배 부름으로 하나님은 잊기 시작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교회 역시 돈이 쌓이면서 세속적 가치가 성경의 가치를 밀어내기 시작했어요.

인본주의가 신본주의를 밀어냈어요.

인간의 말들이 교회 안에서 힘을 쓰기 시작을 했어요.

 

이 시대 교회는 카토릭화 되었어요.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서 판을 치기 시작한 지가 오래 되었어요.

복음이 가려지기 시작을 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외면해요.

완전히 중세 암흑시대와 같아졌어요.

사데 지역처럼 홀연히 멸망이 임하는 줄도 모르고 신앙의 깊은 잠에 빠져 버렸어요.

 

이러한 때에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과 같은 종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인본주의로 세워져 가는 이 시대 교회에 성령에 사로잡힌 종들이 일어나서 십자가 복음을 외칠 것입니다.

이들이 이 시대 남은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들이 나옵니다.

두 증인은 광의적으로는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언적인 의미에서는 종말에 나타날 종들이에요.

타락한 교회에 복음을 들고 외칠 종들이에요.

 

하나님은 이 두 증인들에게 먼저 작은 책을 먹여요.

그 작은 책을 일컬어 영원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교회로 보내서 다시 예언하라고 합니다.

이들은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회개를 촉구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을 봅시다.

 

계 10:7-11= “7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천사의 손에 작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을 먹이십니다.

작은 책을 먹이고 다시 예언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다시 예언”하라는 말씀에 귀를 기우리세요.

다시 예언한다는 것은 이미 전에 예언된 것이란 말입니다.

교회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중세암흑시대에 종교개혁을 주도한 종들이 초대교회에 외쳐졌던 그 복음을 외쳤어요.

다시 예언이 된 셈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다시 한 번 재현이 될 것입니다.

마치 사데가 망하였다가 다시 부흥하였다가 망한 것과 같이 로마 카토릭이 망하였다가 개신교로 부흥하다가 다시 사데의 망함과 같이 망하게 될 것입니다.

종말에 두 증인들이 작은 책을 먹고서 다시 예언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작은 책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창세전에 감추었던 그 복음이란 뜻이에요.

쉬운 말로 창세전 언약을 말해요.

 

이 복음이 어디서 외쳐지는가 하면 교회에요.

하나님께서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입니다.

그리고는 타락한 교회로 보냅니다.

 

계시록 11장을 봅니다.

 

계 11:1-11=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두 증인들이 지팡이 같은 갈대를 받습니다.

갈대란? 캐논인데 이는 성경을 말해요.

성경을 가지고 성전을 척량하라고 하십니다.

 

왜? 성경을 가지고 성전을 척량하라고 할까요?

이는 교회가 성경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성경을 버리면서 나타나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구약 교회의 타락을 뭐라고 하셨나요?

너희가 장로의 유전으로 하나님 말씀을 버렸다고 하셨어요.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니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중세 암흑시대 로마 카토릭에서 행하여지던 모습입니다.

카토릭은 사람의 유전으로 성경을 버렸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이 종말 교회에 또 다시 재현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과 유전이 성경을 감추어 버렸어요.

목사들이 성경을 학문화 하여서 가르쳐지고 있어요.

이름하여 신학입니다.

 

신학은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밖에 알 수가 없어요.

신학으로는 영감 된 설교가 나오지 않아요.

 

성경은 학문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성경은 논리적이지 않아요.

성경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록한 책입니다.

즉 사건을 기록해 놓았단 말입니다.

 

사건은 논리적이지 않아요.

논리적일 수가 없어요.

사건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요.

 

시도 바울이 복음을 뭐라고 했나요?

성도에게는 능력이지만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했어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들린다고 했어요.

 

이 시대 설교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다 보니까 상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거부해요.

그럼에도 인간들이 이해를 구하고자 목사들이 설교를 상식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감추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에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작은 책이라는 영원한 복음을 들고 교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광의적으로는 온 시대 온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언적으로는 종말에 되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두 증인을 광의적으로 말하면 온 시대에 걸쳐서 말씀 운동을 일으키는 주의 종으로 볼 수가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 그치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자체가 예언서이기 때문에 예언적인 의미로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언적 의미로 종말의 교회에서 외쳐져야 하는 말씀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증인을 마지막 때 복음 운동을 일으키는 종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버렸어요.

성경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을 보는 눈이 없어요.

 

이걸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는 스스로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예수님 눈에는 가련하고 곤고하고 눈 멀고 발가벗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소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안약을 사서 발라 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누구를 괴롭게 하는가 하면 땅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인본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세속적 가치로 사는 자들을 말합니다.

 

창세 이후로 마귀는 항상 인간들을 땅에 붙잡아 두고자 미혹하였어요.

땅에 것으로 말이에요.

인간들이 마귀의 미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은 마귀의 말이 흙에서 난 인간들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난 인간들에게는 마귀의 말은 거부 할 수가 없는 달콤한 말이에요.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요.

그래서 마귀는 항상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상식으로 해석을 하게 하여서 땅에 붙잡아 두는 일을 하였어요.

 

타락이란? 하늘에 것인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하는 자들이 땅에 것인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언약을 위하여 살 자들이 자신의 몸뚱이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은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에 것을 바라보라고 하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현실적인 것을 말하라고 하는 거에요.

당장 세상사는 것이 힘이 드니까 현실에 맞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가난하면 기복주의를 좇아간다고 하는데!

아니에요.

인간은 단 한 순간도 기복주의를 벗어난 적이 없어요.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복 받고 잘 살기를 바라고!

부자이면 부자로서 복 받고 잘 살기를 바래요.

 

부자들에게 물어보세요.

더 부자 되고 싶어 해요.

죄인의 탐욕은 무저갱과 같이 끝이 없어요.

부자이든 가난 하든 인간들에겐 기복주의는 영원한 소망이에요.

그러므로 인간들에게 있어 예수 믿고 복 받고 잘 산다는 말은 영원한 복음인 것입니다.

 

마귀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대이고 교회의 타락은 항상 세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반드시 타락을 몰고 왔어요.

 

예수님이 언재 재림 하시는 줄 아세요.

가장 살기 좋을 때에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홀연히 멸망의 날이 이르러요.

 

우리가 흔히 그러잖아요.

사람이 살기 좋을 만 하니까 죽는다고!

맞아요.

 

살기 좋을 만 할 때에 종말이 다가와요.

그러므로 신앙의 가장 큰 위기는 평안할 때입니다.

이 시대가 그러한 때에요.

 

사데가 망한 것은 평안에 도취되어 경계를 게을리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야 말로 사데의 평안 할 때에요.

역사의 교훈을 잊고 살고 있어요.

이 시대 교회가 교회사의 교훈을 잊으니까 중세 카토릭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데의 두 번 멸망 사건은 교회사적으로 두 번 망함의 역사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참 감람나무 접붙임의 비유로 살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종말이 되면 이방인 교회가 타락하여 잘려 나갈 것을 예언하였어요.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11-25=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 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바울이 자기 동족들이 예수를 죽이고 잘려나간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어요.

그러다가 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긍휼로 이방인을 구원하고자 하심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데 한 가지 법이 있어요.

그것이 뭔고 하니 하나님의 긍휼이에요.

이는 구원하심 속에 인간의 자랑거리를 배제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남기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긍휼을 남기는 일을 하십니다.

이 일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 주셨어요.

구약 이스라엘은 긍휼로 구원을 입은 자들이에요.

그런데 이들이 긍휼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하였어요.

 

여기서 엄위란? 법에 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율법 지킴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행함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행함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은혜와 감사가 날아가 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엄위에 거하는 자들을 잘라내 버린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을 속아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긍휼로서 이방인들을 접을 붙인 것입니다.

이게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가 접을 붙였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은혜와 긍휼이라는 나무를 한 그루 심었어요.

그 나무가 구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이고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이 긍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그 아브라함 후손이 이스라엘이에요.

그럼 하나님의 긍휼로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진액처럼 흘러야 해요.

자신들이 사는 바탕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모습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거하지 않고 율법지킴이라는 법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율법을 지켰다는 행위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브라함 언약 정신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 정신을 모르는 자들을 솎아 냈어요.

이걸 참 감람나무의 가지 하나가 겪어서 잘라냈다고 합니다.

참 감람나무 가지 하나가 궐이 생긴 겁니다.

 

그 궐이 난 자리에 이방인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이 세월이 지나면서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모르면 성도가 아니에요.

교회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방인 교회가 엄위에 거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엄위에 거한 이방인 교회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다시 예전에 엄위에 거하다가 잘려 나갔던 유대인들을 인자와 긍휼로 접붙임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참 감람나무는 인자와 긍휼의 나무로서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무엇과 같은고 하니 로마 카토릭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타락을 하니까 잘라내고 그 자리에 개신교를 세운 것과 같아요.

그런데 개신교가 로마 카토릭화 되었어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 사라졌어요.

 

믿음 대신 행함이 자리 잡고 있고!

은혜 대신 법이 자리 잡고 있고!

말씀 대신 교단의 전통과 유전이 자리 잡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카토릭화 된 개신교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잘려 나간 유대인들을 붙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이 지금 저 중동 지역의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유대인들 속에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건 범상한 일이 아니에요.

이것은 엄위에 거하던 이방인은 잘려나가고 유대인들이 접붙임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차 간다는 뜻입니다.

 

중요하니 다시 설명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와 긍휼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는 은혜와 긍휼을 모르면 살 수가 없어요.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은혜와 긍휼로 부르셨어요.

그런데 그 속에 법에 속한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법에 속한 유대인들을 잘라냅니다.

이건 구약 교회의 망함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죽이고 난 후 유대인들은 형벌의 기간으로 들어가고 이방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에 거하던 유대인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긍휼로 이방인을 접을 붙인 것입니다.

이제 이방인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건 마치 교회사적으로 보면 로마 카토릭이 무너지고 개혁교회가 탄생한 것과 같습니다.

 

개혁교회가 부흥을 합니다.

카토릭의 멸망은 사데의 1차 멸망과 같아요.

멸망한 것 같던 사데가 다시 부흥을 합니다.

이는 사라져 버린 것 같던 교회가 개혁교회를 통해서 다시 부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부흥한 사데가 앞서 멸망한 것을 교훈 삼지 못하고 그 전철을 그대로 밟다가 2차로 망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다시 부흥을 한 개혁교회가 앞서 멸망한 카토릭의 멸망을 교훈 삼지 않다가 다시 타락의 늪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로마 카토릭의 멸망 사건과 같이 마지막 때 두 증인들을 일어나게 하셔서 카토릭의 길을 걷는 개혁교회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이 일을 로마서 11장의 참 감람나무 비유에서는 유대인이 교만하여 잘려나간 자리에 이방인을 접붙였는데 이 이방인들이 예전에 잘려나간 유대인들처럼 교만하자 잘라내 버리고 예전에 잘려 나간 유대인들을 그 자리에 접을 붙이는 것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저 중동지역의 이스라엘에 이상힌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요.

어떤 일인가 하면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일어나고 있어요.

2천년 동안 듣도 보지도 못하던 일들이 지금 유대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 초림 당시의 사건을 보는 것과 같아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초림 때처럼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어요.

그럼에도 그 믿음을 지키고 있어요.

이는 유대인들에게 내려진 형벌의 기간이 끝나간다는 뜻입니다.

 

2천 년 전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죄값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졌어요.

이걸 바울은 로마서에서 참 감람나무 가지 하나가 잘려나간 것으로 비유하였어요.

그런데 그 잘려나갔던 유대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시작을 한단 말입니다.

이건 예언적으로 엄청난 징조에요.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왜? 잘려 나갔나요?

은혜에 거하지 않고 엄위에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행위에 가치를 둔 율법 신앙을 고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걸 로마서 10장에서는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하나님의 의를 힘써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행위에 의지하던 자들을 잘라내고 그 자리에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이방인들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접붙임을 입은 이방인들이 예전에 유대인들처럼 자기 의를 세우고 있어요.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이 사라지고 있어요.

 

인간의 가치가 의로 자리 잡기 시작을 하였어요.

교회들이 로마 카토릭처럼 인간의 선행을 의라고 가르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외쳐지기 보다는 인간의 선행이라는 간증들이 설교를 대신하여지기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 증인들에게 영원한 복음이라는 작은 책을 먹이고 타락한 교회로 보내서 복음에 횃불을 높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겨자씨 같이 눈에 안 보이지만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몇 명이 있었듯이 감추어진 종들이 있어요.

복음을 증거하는 종들이 있어요.

이들이 마지막 때 두 증인으로서 사용이 되어질 남은 자들인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누구를 책망합니까?

땅에 거하는 자들을 책망해요.

땅에 거한다는 말은 세상 가치로 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세상 가치를 좇아가고 있어요.

모두가 정체성을 상실했어요.

돈에 맛이 들었고 세상 쾌락에 맛이 들었어요.

속된 말로 돈 맛을 안 겁니다.

돈 맛이 선악과처럼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들이 세상 것을 좇아가면 죽는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럼 돈 맛을 알고 돈 많은 자들이 화를 내요.

교회 크게 지어놓고 거기서 일락을 즐기고 있는데 두 증인들이 밥맛 떨어지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돈 맛을 아는 교회들이 복음 전하는 종들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죽이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 일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은 곧 주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데 교회에 남은 자들을 가지고 중세 암흑시대를 끝을 냈듯이 이 마지막 때에도 타락한 교회를 다시 원래의 자리인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회개 운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들이 종말의 두 증인들이고 남은 자들이에요.

 

이 시대 교회들이 어쩌면 중세 암흑시대와 같아졌어요.

교회들이 사데와 같이 돈이 많아서 주의 재림은 생각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고 쾌락을 좇아가는 짓들을 하고 있어요.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교인들의 가치관이 그렇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노아의 때와 같아요.

교인들의 사고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일이 삶에 의미가 되고 말았어요.

교인들이 세상과 간음하고 있어요.

 

저는 사데 교회를 통하여서 이 시대 다시 한 번 종교 개혁시대가 일어난다고 보아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사데 교회를 통해서 이미 계시해 주셨다고 보아요.

 

사데 교회 안에서도 몇 명이 그 옷을 더럽히지 않았어요.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시대 로마 카토릭의 신앙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들이 중세 암흑시대를 끝장낸 종교 개혁자들이에요.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아요.

 

실제로 종교 개혁을 앞장 선 하나님의 종들은 몇 명에 불과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곱 별을 일곱 영으로 꽉 붙잡아 주셔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하게 보이던 것을 가능케 하셨어요.

1200년 묵은 카토릭이라는 이무기를 꺼꾸러트린 것입니다.

 

마치 소년 다윗이 거구인 골리앗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물맷돌로 꺼꾸러뜨린 것과 같이 종교개혁도 독일에서는 루터가 프랑스에서는 칼빈이 영국에서는 위클립이 스코틀랜드에서는 존낙스가 보헤미아에서는 존후스가 이태리에서는 사보나롤라가 스위스에서는 쯔빙글리와 같은 지극히 미미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으켰어요.

 

실제로 종교 개혁을 선봉한 사람들을 얼마 되지 않아요.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들이 다윗과 같이 볼품이 없었지만 거대한 골리앗 같은 1200년 묵은 괴물인 로마 카토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지금도 적은 무리이지만 시대정신을 역행하면서 오직 복음만 외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누가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어서 갈 교회가 없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복음 아는 여러분이 두 증인처럼 복음 없는 교회로 가셔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합니다.

다 타락한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 속에 롯처럼 상한 심령으로 아파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중세 시대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믿음에 선진들은 죽음을 내어 놓고 복음을 전했어요.

이 시대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을 받으면 죽을 자리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시대 어떤 분들은 복음 안다고 하면서 자기 입신양명을 꿈꾸는 자들이 있어요.

복음 아는 것으로 비판과 정죄를 일삼으면서 선생 노릇하고자 한단 말이에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복음 안다는 것으로 희희낙락하고 있어요.

이건 아니거든요.

 

여러분의 말대로 한국교회가 다 타락을 했습니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은 복음을 알았어요.

하나님께서 다 타락한 그 속에서 여러분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그들 속에서 끄집어내 주셨어요.

 

그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복음이 들려지게 해 주셨고!

왜? 율법 교회로부터 끄집어 내 주셨을까요?

복음 아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라고 복음을 주셨을까요?

 

아니에요.

그런 복음은 없어요.

사데 교회 안에 몇 명처럼 중세 암흑시대를 몰고 온 카토릭이라는 거대한 세력과 싸우게 하시고자 함이에요.

 

지금은 현대 암흑시대에요.

복음이 사라졌어요.

교회마다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해방신학이라는 인본주의가 외쳐지고 있어요.

설령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도 은혜니 믿음이니 라고 하면서 게으름을 피우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쾌락주의를 낳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에 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붙잡고 나타나신지 아셔야 합니다.

타락한 교회를 깨우기 위한 불 쏘시개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우리 힘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붙잡고 일곱 영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자기들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에요.

일곱 영 되신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일곱 영으로 그들을 꽉 붙잡아 주셨기 때문에 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곱 영은 성령이에요.

종말에도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종말에 일어날 일곱 영에 대하여 잠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농사를 짓는데 있어 두 비가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신다고 하셨어요.

비는 성령을 상징해요.

 

신명기 11장을 봅시다.

 

신 11:8-15=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을 것이며 9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0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빼내서 가나안에 집어넣습니다.

모세는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에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애굽에서는 떡으로 살았지만 가나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애굽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애굽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애굽식 신앙은 자기 열심과 각오와 의지로 하지만 가나안 신앙은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서만 할 수가 있어요.

이걸 때를 따라서 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애굽과 다른 땅이에요.

애굽은 평지로서 나일 강물로 농사를 지었어요.

나일 강물은 항상 있으므로 애굽에서의 농사는 언제든지 씨를 뿌리고 물을 길어서 지었어요.

이건 인간의 열심을 말해요.

 

그러나 가나안은 산악지대에요.

산악지대는 물을 가둘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가나안에서 농사를 짓고 살자면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야 해요.

이건 은혜를 말해요.

 

하나님은 가나안에서 씨를 뿌릴 때와 추수하기 전에 비를 주셨어요.

씨를 뿌리고 나서 내리는 비를 이른 비라고 하고!

추수하기 전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합니다.

 

이른 비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난 후 그 씨가 발아하여 잘 자라도록 내려주는 비를 말합니다.

이 이른 비를 “요레”라고 하는데 이는 부드러운 비를 상징해요.

마치 화초에 물을 줄 때 흩뿌리듯이 부드럽게 뿌리는 비를 말해요.

 

이건 마치 오순절 성령 강림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옛 언약에 속한 구약의 율법 교회를 폐하셨어요.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새 언약 안에서 은혜로 세움을 입은 새로운 신약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건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농부 되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신약 교회라는 씨를 뿌리신 것입니다.

이 때 내린 이른 비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교회를 돌아보고 감싸 안고 위로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어요.

서신서를 보세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신약의 교회 시대가 열립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요.

시작을 성령이 하셨으니까 끝도 성령이 하세요.

 

하나님께서 교회를 시작하면서 이른 비로 오순절 성령 강림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렇게 시작이 된 신약 교회는 예수님께서 재림 하시면 끝이 납니다.

교회 시대가 끝이 난다는 것은 열매가 익어서 추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의 구원 농사를 다 짓고 추수할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열매가 맛이 들도록 하기 위하여 추수하기 전에 비를 주세요.

이 비를 일컬어 늦은 비라고 합니다.

 

늦은 비는 강한 소나기와 같아요.

씨를 뿌리고 봄에 내리는 부드러운 비가 아니에요.

늦은 비 성령은 이른 비 성령과 같이 위로하고 감싸는 것이 아니에요.

잘라낼 것 잘라내고 새길 것은 새기는 일을 하세요.

심판의 성격을 담고 있어요.

 

이건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으로 이해하면 쉬울 겁니다.

초림으로 오신 예수님은 씨를 뿌리러 오셨어요.

그래서 죄인들과 친구가 되고 용서하고 보듬어 안는 일을 하셨어요.

 

그러나 재림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분으로 오세요.

농사 지은 것을 추수하러 오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재림하시는 주님은 백마를 타고 전쟁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추수하기 전에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했습니다.

이 늦은 비는 “말코시”라고 하는데 이는 강한 비를 상징해요.

이 비는 열매의 상품을 높이기 위한 비에요.

즉 열매의 맛을 내기 위한 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늦은 비 되신 성령도 강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는 이 늦은 비를 맞아야 텁텁한 맛이 사라지고 달콤해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의 농사를 지을 때도 추수하기 전에 태풍을 한 번씩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태풍이 늦은 비와 같아요.

열매는 늦은 비를 맞고서 맛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농사짓는 것을 자기 백성 구원이야기로 말하고 있어요.

 

야고보서 5장을 봅시다.

 

약 5:7-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은 농부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 마음을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농부가 무얼 기다린다고 합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에요.

씨를 뿌리고서는 이른 비를 기다려요.

이 이른 비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주어졌어요.

 

이제 추수하기 전에 내리는 늦은 비가 있어요.

농부들은 이걸 알아요.

농부는 이걸 기다리는 것입니다.

 

농부란? 주의 강림하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에요.

이들이 남은 자들이에요.

남은 자들은 이 사실을 알아요.

 

아모스 4장을 봅시다.

 

암 4:1-9=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 6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매 8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 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경고합니다.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의 암소라고 하지요.

바산은 요단 강 동편의 헬몬 산과 길르앗 산지 사이에 위치한 기름진 땅으로 목축을 하기에 매우 좋았으며 그곳의 초장은 아름답고 살진 소와 양이 생산되는 곳으로 대표되었어요.

 

이 말은 교회가 부흥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돈이 흘러넘친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마리아 산에 거한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가 혼합주의로 이방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기독교가 로마 국교화가 되어서 이방화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혼합주의로 타락한 목자를 사마리아 산의 바산의 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무슨 짓을 하는가 하면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드리는 예물을 착취하고 있어요.

쉬운 말로 성도들의 주머니를 강탈해서 회의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비를 그치게 합니다.

그리하여 기근이 들게 하였어요.

이건 마치 엘리야가 백성들이 두 사이에 머뭇거리자 3년 6개월 동안 비를 그쳐서 가뭄이 들게 한 것과 같아요.

 

요한계시록 11장을 보면 두 증인들이 예언하는 날 하늘을 닫아 비 오지 못하게 하지요.

이는 한시적으로 말씀에 기갈을 당할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타락을 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숨겨 버리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힘으로 사는 자와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를 가려내기 위함입니다.

 

말씀에 기근을 일으키면 세상 힘으로 사는 자는 갈급함을 못 느끼고 살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자들은 갈급함을 느끼고 하나님 말씀을 찾아 나섭니다.

추수하기 석 달 전이란 말은 주의 재림이 가까와질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어떤 성읍에는 비가 오게 하고 어떤 성읍에는 비가 내리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교회가 다 타락의 길을 가도 그 중에 어떤 이들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 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말씀에 기갈을 당하지 않아요.

중세암흑시대에 다 타락을 하였어도 종교개혁을 주도한 종들은 말씀에 기갈을 당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비를 주셨어요.

 

하늘을 닫고 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엘리야나 두 증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성경은 엘리야나 두 증인이 기도하니까 가뭄이 들고 다시 기도하니까 비가 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떤 성읍에는 말씀이 있고, 어떤 성읍에는 말씀이 없어요.

겉으로는 교회가 다 타락한 것처럼 보여도 소수의 무리이지만 복음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종들이 있어요.

 

이들은 하나님께서 남겨 놓은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이들에게 흰 옷을 입혀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게 하십니다.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김 받은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는 몇 명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이긴 자들이에요.

 

그래서 이긴 자들에게는 사데에 남아 있는 몇 명과 같이 남은 자들에게 입혀 주었던 동일한 흰 옷을 입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봅시다.

 

계 3:5절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흰 옷은 의와 거룩을 상징합니다.

흰 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는 의를 입는다는 의미에요.

이건 법정적인 용어에요.

죄 없다고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스가랴에 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더러운 옷이란? 죄를 상징합니다.

이 때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여호수아를 참소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천사에게 여호수아에서 흰 옷을 입혀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죄의 더러움을 덮어준다는 말입니다.

이게 의로 옷 입는다고 합니다.

 

성도를 일컬어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덮으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의 죄에 수치를 가죽옷으로 가려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죄 용서함을 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죄 용서 함을 입은 자들에게 입혀 주는 옷이 있어요.

그 옷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때 입는 신부들이 입는 옷이에요.

 

계시록 19장을 봅시다.

 

계 19:7-9=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하지요.

이는 곧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 하시면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에 어린 양의 신부들에게 흰 옷을 입게 하고서는 대기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이에요.

 

흰 옷은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에만 입혀 주세요.

그래서 흰 옷을 입은 자들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기억하고 계신다는 강조형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을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그 날에 예수님이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저 아이가 내 것입니다!” 라고 말씀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너희를 몰라준다고 하여도 낙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너희를 이단이라고 하여도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는 옳은 자였다고 확증을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인정을 받고자 세속을 따랐지만 너희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지 않고 오직 나 예수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하여 살았기 때문에 내가 반드시 너희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였다가 아버지 앞에서 손을 들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에요.

그 날에는 예수님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세요.

예수님이 생명책을 가지고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의 이마에 인(印)을 쳐 놓은 것입니다.

새 이름을 새겨 놓으신 것입니다.

 

새 이름을 새겨 놓은 증거가 바로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지켜낸 것입니다.

모두가 다 타락의 길을 가는데 그 길을 역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실력이 아니에요.

주께서 그들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하면 종말의 시험을 이깁니까? 라고 걱정을 해요.

이건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에요.

시험은 우리 힘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는 반드시 이기게 해 주십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마다 이긴 자들이 나오지요.

이들은 그들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이기게 해 주셔서 이겼을 뿐이에요.

 

중세 암흑시대 종교 개혁자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들이 잘나서 개혁을 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개혁 할 때가 이를 것입니다.

 

난공불락과 같던 사데가 하루 밤 사이에 특공대 15명에 의하여 두 번씩이나 점령당하였듯이!

1200년 동안 철옹성과 같던 로마 카토릭이 종교개혁자 몇 명에 의하여 1차로 무너져 내렸고!

종교 개혁 이후 500여 년 동안 지나오면서 다시 혼합주의에 빠져 버린 개신 교회를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작은 무리를 가지고 2차로 무너뜨릴 것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지났어요.

근신하고 기도 할 때에요.

때를 분별하여야 합니다.

 

눅 21: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역사의 시계 바늘은 종말로 향하고 있어요.

이제 곧 그 날이 이릅니다.

주께 소망을 둔 자들은 설레임으로 그 날을 기다릴 것입니다.

우리는 소풍 가는 날을 기다리는 아이들같이 주의 재림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모든 성경이 응해진 때에요.

종말의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어요.

성경을 상고해 보세요.

그럼 잘 때인지 깰 때인지 때를 분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잠시잠간 후면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시던 말씀대로 “내가 간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그 때가 곧 일어날 것입니다.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그 몇 명의 무리가 있었듯이!

지금도 시대에 편승하지 않고 오직 새 언약의 복음만 증거하는 작은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 무리들 속에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시대를 분별하고 때를 아는 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를 잠에서 깨우시고 머리를 들게 하여서 우리의 구속이 가까움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악한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바 되게 하여서 주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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