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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 5강. 부르심과 순종 (롬 1:1-7)

by coroa 2024. 3. 12.

 

5강. 부르심과 순종 (롬 1:1-7)

 

롬 1:1-7=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오늘 분문을 보면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입었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이란? 내가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와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함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럼 아브람에게 일어난 사건은 모든 성도에게 일어날 사건의 표상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 속에는 우리의 뜻은 전혀 없고 오직 부르신 하나님의 뜻만 담겨져 있습니다.

 

부르심이란? 난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야! 정낙원이 너! 이리와~ 그러는 겁니다.

구원 속엔 난 가만히 있음이 깔려 있어요.

오직 하나님 홀로 다 하심만 담겨져 있습니다.

부르심 속에는 인간의 의(義)는 끼어들 틈이 없어요.

 

이걸 해학적으로 “얼떨리우스”라고 해요.

난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야! 너 이리와!

그래서 얼떨결에 예!~에! 하고 붙잡혀 나온 겁니다.

 

붙잡혀 나와 보니 그곳이 천국인 겁니다.

천국에 와보니 내가 지금까지 지옥에 있었다는 것이 보여지는 겁니다.

이게 부르심이에요.

 

우린 다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래서 우린 원래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났다 함은 저주 받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한 저주 받아 태어났다는 것은 지옥으로 가기로 작정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택하심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택하심은 묵시에서의 예정하심이고!

부르심은 묵시에서 예정된 것이 역사 속에서 사건화 되어서 나타난 구원을 말합니다.

택하심은 창세전 일이고 부르심은 현재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시고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미리 아심은 창세전 있었던 일이고!

부르심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영화로움은 장래 주어질 일입니다.

 

성도의 구원이란?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난 것도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일입니다.

역사란? 창세전에 예정된 사건들을 이루어 내는 캔버스에요.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운 언약을 하나 하나 채워가는 곳입니다.

마치 천지에 만물을 채우듯이 말입니다.

우리 몸은 역사에 속하였어요.

그러므로 우리 몸에 창세전 언약이 삶으로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화가가 자기 머릿속에 있는 것을 캔버스에 그림으로 그려내듯이 하나님이 창세전에 세운 언약을 역사라는 우리 몸에 그려가는 것입니다.

즉 자기 백성들을 부르심으로 구원을 해 나가신다는 말입니다.

 

이런 부르심이라는 구원의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세요.

각 사람마다 각자 태어 날 때와 예수를 믿는 때가 정해져 있어요.

포도원 품꾼들을 부르시는 것처럼 부르심을 입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모태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어떤 이는 청년기에 부르심을 입고!

어떤 이는 황혼기에 부르심을 입어요.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곧 예수가 믿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자기 백성은 한 알갱이라도 버려지지 않고 다 찾아냄을 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십니다.

이게 부르심이고 구원이에요.

 

그런 뜻에서 오늘 본문에서도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믿어 순종케 되었다”는 말입니다.

“믿어 순종케 되었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믿어 순종케 하셨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아들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겁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그 아들이 바로 예수이고 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해요.

여러분 복음이 뭔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란 뜻입니다.

구원자란 말이에요.

왕이란 뜻입니다.

그럼 예수가 왕이고 구원자란 말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요.

알다시피 헤롯은 유대인들의 왕이에요.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그 유대인의 왕에게 가서 지금 유대인의 왕이 나셨는데 어디서 난 줄 모릅니까? 라고 묻고 있어요.

이 말은 넌 왕이 아니거든!

넌 가짜거든!

그러는 말입니다.

 

이건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인자(人子)라고 하지요.

인자란?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너희는 인간이 아니야 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인간도 아닌 것들이 인간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 입장에선 굉장히 불쾌하고 기분이 나빠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자기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긍정의 힘으로 살아가요.

남에게 인정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자살을 통해서라도 나 여기 있다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넌 뭐냐! 라면서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만 생명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은 가짜란 뜻입니다.

예수 이외는 다 죽은 자에요.

우린 분명히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를 생명으로 보내서 너희는 몽땅 죽은 자라고 정죄해 버립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반발을 해서 하나님이 보낸 자를 죽여 버리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동방박사들을 보내서 헤롯에게 통고 하는 겁니다.

넌 가짜거든!

넌 왕이 아니거든!

그러나 듣는 헤롯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헤롯은 야! 임마!

내가 유대인의 왕이야!

그런데 어느 놈이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느냐! 그 놈은 가짜야!

그 놈은 자칭 유대인의 왕 행세를 하는 놈이야!

그래서 예수님이 태어난 기점에 태어난 아이들을 다 죽인 겁니다.

 

이건 헤롯만이 그런 것이 아니에요.

유대인들도 그랬어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 때 그 명패에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자 군중들이 우리의 왕은 가이사 라고 했어요.

우린 저 놈을 왕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의 왕이시여” 라고 하면서 열렬히 환영을 했어요.

자기 옷을 벗어 영접 했다구요.

앞서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자 예수님을 왕으로 삼겠다고 했어요.

그런 자들이 돌변하여서 이젠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저런 힘 없는 놈이 우리 유대인의 왕이면 유대나라의 수치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던 왕은 힘 있는 왕이에요.

세상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줄 그런 왕을 기다렸어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메시야이즘에 찬물을 끼얹었어요.

백성들의 기대를 산산이 깨트린 것입니다.

사람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게 되어 있습니다.

실망하면 분해서 적개심이 들어요.

그래서 죽이는 겁니다.

 

예수님이 갖가지 기적을 행할 때 백성들은 야! 이런 분이 유대인의 왕이 되면 로마 식민지로부터 해방을 시키고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어서 로마를 도리어 식민지로 삼아서 유대인이 세계의 주인이 되게 해 줄 메시야라고 꿈이 부풀어 있었어요.

 

그런데 비참하게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로마 병사들에게 잡히자 십자가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못난 사람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자기들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게 그 당시 유대인들의 정서에요.

예수에 대한 평가에요.

 

그런데 이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고요.

이건 천부당만부당한 말입니다.

설령 예수가 메시야 라고 하여도 감추어야 할 형편입니다.

당시 정서가 그랬다구요.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것은 수치 중에 수치인 겁니다.

 

바울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신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예수 믿고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대인과 동일해요.

자신이 초라하면 창피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잘 살면 교회 와서도 큰 소리 치고 사업이 망하고 창피한 일이 생기면 교회에 안 오잖아요.

이건 세상 가치로 신앙을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조건으로 희비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만사형통한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이즘과 같은 사상이에요.

예수를 이용하여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꿈을 실현시켜 주시기에는 한 없이 부족한 분입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원이란 세상에서 빼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속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떠남이 있고 버려짐이 있어요.

그러므로 인간의 상식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 순종케 되었다고 합니다.

믿어 순종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셨다는 겁니다.

내가 생각해 보고 믿을 만 해서 믿었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서 믿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그 믿음은 내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준 믿음인 겁니다.

에베소서 2장에선 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선물인 것입니다.

 

왜? 믿음을 선물로 줍니까?

못 믿으니 믿으라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도 없고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의 능력이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어떻게 힘없이 죽은 그 사람이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 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웃음거리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전서 2장에서 십자가 도는 세상 사람들에겐 미련한 것이라고 했어요.

미련하다는 말은 어리석은 비웃음거리란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만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라고 하는 겁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만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르심으로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 사람이 바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요.

강도는 같이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어요.

미친 사람 헛소리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어요.

그래서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 라고 했어요.

 

이게 이해가 됩니까!

함께 죽어가는 사람에게 당신의 나를 구원하실 구주이십니다 라고 했다구요.

아니 살려 달라고 하려면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군사들에게 살려 달라고 해야지요.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없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지금 강도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그 믿음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도는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입어 믿어진 자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걸 믿게 하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겁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으면 예수가 믿어집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고 믿어져요.

 

믿어지니 믿는 겁니다.

믿어지니 순종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준 사람에게 나타나는 반응이 순종케 되는 겁니다.

순종(順從)이란? 뜻을 따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게 중요해요.

순종이란? 언뜻 들으면 내가 결정해서 따른다는 말 같지만 실상은 그와 반대입니다.

순종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하게 하세요.

믿음이 내 안에서 순종하게 한단 말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믿음이 생겨요.

믿음이 있다는 말은 곧 그 안에 성령이 와 계신단 말입니다.

성령과 믿음은 분리할 수가 없어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생기면 또한 순종이 일어나요.

순종이란? 믿어지는 것을 삶으로 그려낸다는 말입니다.

관념이 아니고 실제란 말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손해를 보아도 믿어요.

매를 맞아도 믿고!

옥에 갇혀도 믿고!

조롱당하여도 믿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이단이라고 욕을 먹어도 믿어요.

 

이게 순종이에요.

그러므로 순종은 믿음이 일으키는 능력인 겁니다.

예수님이 그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고 불이익을 당하여도 그 믿음을 포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그 믿음을 예수님이 관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만약 우리가 관리를 한다고 하면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의 길가 밭이나 돌짝 밭이나 가시떨기 밭처럼 잠간 믿다가 다 넘어져요.

환란이나 유혹이나 세상의 재리나 쾌락에 기운이 막혀서 다 죽어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우리에게 관리하게 하시지 않고 예수님이 직접 하시기 때문에 좋은 밭처럼 끝까지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것은 우리 힘으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켜 낼 수가 없기 때문에 그걸 지켜주시려고 와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당신의 생명을 씨처럼 뿌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농부가 되셔서 당신께서 뿌려 놓은 그 믿음을 지켜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란이나 곤고나 위험이나 칼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받은 구원을 빼앗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그 누구도 아버지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신 겁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구원은 부동이고 확정적인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다른 보혜사가 오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다른 보혜사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세요.

그러니 성령이 오신 것은 곧 예수님이 오신 것과 같은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오셨어요.

그러니 성령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곧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가 믿어져요.

이 믿음이 순종케 하십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믿음을 지켜내세요.

이게 믿음이 지켜내는 순종이에요.

그러니 믿음이나 순종이나 같은 말이에요.

같은 뜻이에요.

 

야고보서에서 믿음과 행함을 말하지요.

믿음엔 반드시 행함이 있다고 하잖아요.

이건 구분할 수 없다는 겁니다.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믿음은 반드시 어떤 역사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가시적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알다시피 믿음이란 추상명사에요.

믿음은 보이지 않아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에요.

마치 생명과 같아요.

 

생명이란? 보이지 않아요.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아요.

생명이란? 살아 움직이는 겁니다.

 

믿음이 살았다고 하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활동을 한단 말입니다.

반대로 죽음이란? 활동하지 않는 겁니다.

움직임이 없고 활동이 없는 것은 죽은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귀신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러지요.

믿어 순종케 되었다고 하지요.

믿음이 오니 그 믿어지게 하는 것에 대하여 반응하고 움직이게 되더라는 겁니다.

예수가 고백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 유대인들이 너희들 예수 믿으면 죽인다고 하여도 그래 죽일 테면 죽여라!

너희가 비록 죽인다 하여도 난 예수를 부인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이 놈들이 낮술을 처먹어서 돌았다고 했다구요.

이게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에요.

 

그래서 믿음을 움직이는 능력이라고 해서 동사(動詞)로 사용하는 겁니다.

동사(動詞)란? 말이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살아서 활동을 해요.

말씀이 사람 안에서 움직여요.

그럼 말씀에 붙좇는 삶이 나타나요.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고 하지요.

이는 말씀이 아브라함을 끌고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아브라함을 질질 끌고 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아브람은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어요.

그 당시 아브람은 믿는 하나님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분이 찾아와서 내가 하나님이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합니다.

전혀 낯선 곳으로 떠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군소리 하지 않고 그 말씀에 따랐어요.

 

본토친척 아비집이란? 보호막이에요.

떠나라는 것은 그 보호막을 걷어 내라는 겁니다.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아브람은 예! 하고 떠났어요.

 

우리는 이런 것을 일컬어 귀신이 씌었다고 합니다.

누가 이상한 짓을 하면 이 놈이 귀신이 씌었나 라고 하잖아요.

아브람의 부모나 형제 친척들 입장에서 보면 귀신에 씌인 겁니다.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그리고 말렸을 겁니다.

아니 어느 부모가 자식이 집을 떠나 사지(死地)로 가는데 허락하겠어요.

그럼에도 아브람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쫓아서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났어요.

 

이는 하나님 말씀이 아브람의 모가지를 잡고 이끈 겁니다.

소 고삐처럼 붙잡고 이랴~ 하고 이끈 겁니다.

아브람은 벧세메스로 가는 두 마리 암소처럼 울면서 끌려 간 것입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법궤가 끌고 간 겁니다.

법궤가 암소 등에 타서 이랴~ 하고 끌고 갔어요.

가서 결국 번제물로 죽임 당하게 하였어요.

 

신앙생활이 뭐냐?

말씀에 질질 끌려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걸 순종이라고 해요.

그러므로 성경에서 순종이라고 할 때는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순종의 본을 보여준 사람이 이삭입니다.

자기를 불 태울 나무를 자기 등에 짊어지고 가는 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이 순종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실제화 하여서 본을 보여주신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도록 이끄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인생살이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삶에 적용해서 살펴봅시다.

믿음은 추상적인 겁니다.

이 추상이 실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행함이에요.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행함이라고 합니다.

 

십자가 도는 추상이에요.

십자가 도가 어떻게 생겼습니까?

크기는 얼마나 하고

무게는 어느 정도이며 가늠이 되는 가요?

안 되어요.

 

십자가 도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붙잡을 수도 없어요.

그런데 믿음이 오면 십자가 도가 삶으로 나타나요.

움직임으로 나타나요.

바람이 지나가면 나뭇가지에 흔들림이 있듯이 믿음이 어떤 움직임을 일으켜요.

말씀에 반응을 일으켜요.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대접을 받으셨던 모습으로 나타나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당하신 대접을 한마디로 말하면 버려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신 믿음을 받으면 우리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처럼 버려짐을 당하는 삶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부인하고자 해서 부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부인되는 인생을 살도록 이끄세요.

부인되는 인생이란? 세상에서 세상사람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산다는 것은 죽는 겁니다.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빼내심을 입는 겁니다.

자기 인생이 박탈당하고 예수님의 인생으로 이입(移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냥 부르심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생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내 마음대로 살던 곳에서 예수의 종으로 살도록 옮겨진 겁니다.

죄에서 자유케 된 것이 구원입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자유에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우린 원래 나에게 갇혀 있었어요.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은 내가 내 안에 가두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자아를 위하여 살도록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항상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유익이 되는 것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도 자기 유익으로 섬기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을 일컬어 우상숭배자라고 하는 겁니다.

우상숭배란 나를 믿는 겁니다.

 

우린 이 우상숭배에서 벗어 날수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벗어나게 해 주었어요.

십자가에서 나를 섬기던 나를 죽여버린 겁니다.

나로부터 자유케 해 준 겁니다.

이젠 내 마음대로 살던 나로부터 자유케 된 겁니다.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죄 아래서 내 마음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곳으로 옮겨 주신 겁니다.

예수님의 종으로 옮겨주셨어요.

이젠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곳으로 옮겨졌어요.

이걸 예수님의 종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를 위한 삶이 없어요.

오직 예수를 위한 삶만 있어요.

그래서 성도가 행하는 모든 행동 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이 성도 안에 오신 겁니다.

성령이 내 마음대로 살지 말고 예수님의 소원으로 살라고 간섭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 속엔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없어요.

 

자기를 위하여 산다고 한다면 아직 죄 아래 가두어져 있는 겁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나는 죽었다고 하잖아요.

나는 예수 안에서 사는 나 라고 하잖아요.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잖아요.

그러므로 나는 이제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위하여 산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산다거나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이 없는 겁니다.

오직 예수를 위하여 사는 것만 있습니다.

 

이걸 예수의 종이라고 해요.

우리는 우리의 삶이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것으로 차압당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린 사도들과 반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이건 악이에요.

 

사도들이 싸운 것이 있어요.

초대교회 당시 교회를 어지럽히고 복음을 가리는 세 가지 사상이 있었어요.

“율법주의”와, “갈라디안식 신앙”과, “영지주의”에요.

 

율법주의란? 인간의 행함으로 의로워 지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율법사와 같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묻지요.

이게 율법주의에요.

 

어떻게 하면 되느냐 라는 말은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나오는 겁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만 알려 주면 그렇게 해서 영생을 따 내겠다는 발상입니다.

이게 죄인의 사고에요.

 

성경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합니다.

그러자 인간들은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겠다고 합니다.

나 예수 믿을 게요! 그럽니다.

예수 믿어 주었잖아요!

나 예수 믿었으니 천국 보내 주세요! 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은 구원은 예수 믿음 속에 있다는 말이지 우리더러 예수 믿어서 구원을 받으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더러 예수 믿어서 구원을 따 내라는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해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신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몰라서 그래요.

죄인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죄인인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 할 수 있다면 죄인이 아니에요.

 

죄인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자기중심으로 이해를 합니다.

내가 믿어져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믿음이 아니에요.

이건 자기 이성으로 알아진 인식론이에요.

내 생각에 맞아 떨어지니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란? 반드시 믿지 못함으로부터 확인이 되어 집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믿을 수 있으면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상식으로 예수를 믿을 수가 있다면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실 필요가 없어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일한 끝자락엔 우리의 불신앙 즉 믿음 없음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으로 산 증인들은 모두가 믿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이들을 모두가 믿음으로 이렇게 저렇게 살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가 믿음으로 살지 않았기에 믿음으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으로 살았다는 것은 믿음이 견인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가 히브리서 11장의 주어(主語)로 쓰여진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이처럼 믿음이란 반드시 믿음 없음을 전제로 역사합니다.

난 안 믿었는데 믿습니다! 라고 할 때 믿음이 역사한 겁니다.

안 믿었는데 는 내 것이고, 믿습니다! 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활동을 하면 반드시 우린 믿음 없음이 들통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오롯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만 보여지게 되는 겁니다.

 

갈라디안식 신앙은 구원을 예수를 믿어서 받고 율법을 지켜서 온전해지자는 겁니다.

예수만 믿어서는 안 되고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일명 성화주의에요.

이렇게 되면 신인협동이 되어야 온전해져 지는 것입니다.

이건 온전이나 거룩을 오해하여서 그럽니다.

온전이나 거룩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겁니다.

 

온전이나 거룩은 의인에게만 통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니 죄 아래서 난 인간들에겐 적용되지 않아요.

오직 죄 없는 예수님에게만 적용이 되어요.

예수 안에서 온전하고 거룩해져요.

온전이나 거룩은 영역의 문제이지 인간의 가치나 자질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말씀을 지켜서 온전하고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은 비복음인 겁니다.

 

갈라디안식 신앙이 매력이 있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긍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내 가치를 삭제하고 예수님의 가치만 남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다 하셨다 를 남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만 남기자만 나는 자연히 부정당하여지요.

 

이건 아무렇게 살으란 말이 아니고 내 행함에 의미를 두지 말란 말입니다.

성도가 행하는 행함은 성도의 것이 아니고 성령이 성도 안에서 행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의 행함인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안식 신앙은 이단인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영지주의에요.

영지주의는 영과 육을 구분합니다.

영은 선한 것이고 육은 악한 것이라고 하여서 신앙은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하여서 지식으로 두는 것입니다.

육체는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든지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쾌락주의였어요.

이러한 사상이 교회마다 엄습해서 성도들을 미혹했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성도들의 삶을 간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방탕과 방임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처럼 살지 말라고 싸웠어요.

거기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또 그런 삶을 사느냐고 책망했어요.

 

성경은 인간을 영과 육으로 구분하지 않아요.

동일하게 보아요.

당연히 영만 구원받고 육은 버려지는 것도 아니구요.

예수님은 우리 몸을 구원했어요.

우리 몸을 피로 값주고 사셨어요.

예수님이 우리 몸에 와 계세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시는데 어떻게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잖아요.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에요.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마음대로 살게 내 버려두지 않아요.

 

만약에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한다면 그 사람 속엔 성령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이걸 간과하지 마세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어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구요.

시내산 위에 하나님이 율법으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셨어요.

이제 동행하자는 겁니다.

너희를 간섭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셨어요.

 

성도의 삶을 간과해서는 안 되어요.

예수님은 우리 몸을 필요로 해요.

그래서 우리 몸을 구원한 겁니다.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것을 그려내고자 하세요.

그러므로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 속에는 내 인생이 없어요.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없어요.

믿음 속에는 내 인생에 유익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고 하지요.

어부란? 고기를 바다에서 잡는 자입니다.

고기 입장에선 어부에게 잡히는 순간 자기가 태어나고 살던 본토친척 아비집인 바다 라는 곳으로부터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바다에서 살던 생명이 죽는 겁니다.

 

고기가 바다에서 분리가 된다는 것은 고기로서의 인생이 끝장 난 겁니다.

이걸 어찌 복이라고 할 수 있나요.

고기 입장에선 저주에요.

 

그런데 어부에겐 기쁨입니다.

어부 입장에선 횡재인 겁니다.

어부 입맛대로 요리해서 먹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걸 구원이라고 했어요.

 

결국 구원이란? 고기처럼 어부의 밥상에 차려진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밥상에 차려지는 반찬들입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을 구원하시곤 내 양식이라고 하셨지요.

내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지요.

아버지의 뜻이 바다에 살던 고기를 잡아서 아버지 밥상에 올려드리는 겁니다.

 

결국 구원이란? 바다에서 잡힌 고기처럼 내 인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없으니 자연히 내 마음대로 사는 것도 없는 겁니다.

고기는 어부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겁니다.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어부의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이란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한 구원입니다.

왜? 예수님을 위한 구원인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야 창세전 언약대로 만유의 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만유의 주가 되기 위하여 창조가 된 소품들인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드라크마 비유와 잃은 양 비유가 나오지요.

주인이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주인이 즐거워서 잔치를 벌입니다.

결국 주인이 잃어버려진 것들을 찾아낸 것은 주인이 기쁘고자 한 일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이사야 43장을 봅시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나 곧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한다고 하지요.

여기서 나 란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너란 이스라엘을 말해요.

곧 우리를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허물지고 죄 아래 빠져 있어요.

우리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었어요.

하나님이 아비가 되어서 이 꼴을 두고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편치 않는 겁니다.

그래서 건져내는 겁니다.

 

성도를 일컬어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자기백성이란 자기 아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죄와 사망에 가두어져 있어요.

아버지가 안식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서 빼내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안식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자기 새끼들을 다 빼내 놓고선 야~ 이제 되었다 하고선 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이게 천국이에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백성을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다 찾아내곤 이제 끝났다 하면서 잔치를 벌리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뻐서 죄를 도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죄인을 두고선 하나님이 안식할 수가 없으니 죄를 도말해 주시는 겁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탕자를 용서한 것은 아버지를 위한 용서에요.

그 자식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편하기 위해서 용서해 준겁니다.

이걸 잊지 마세요.

 

구원은 주님을 위한 구원이지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에요.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구원한 것이지 나를 위하여 구원한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구원을 주님의 핏값으로 산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주님이 값을 치렀어요.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주님이 값을 치른 겁니다.

그래서 성도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겁니다.

너를 위하여 부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불렀으니 까불지 말라는 겁니다.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종은 독자적인 기쁨이 없어요.

종은 주인의 기쁨에 동참하는 자이지 독자적으로 기쁨을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우린 종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마귀의 종이든지 예수의 종이든지 종이에요.

 

우린 죄 아래서 나를 위하여 살았어요.

내가 주인이었어요.

그래서 내 인생을 나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았어요.

내가 나를 부리고 살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이젠 널 위해 살지 말라고 합니다.

죄에서 끄집어내신 겁니다.

그리곤 이제부터 너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 살으라고 합니다.

예수의 종으로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면 고기처럼 끝장나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간섭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인생을 종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도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성도들도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어요.

 

구약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에 순종을 보여주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이 사람들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다니지요.

믿음이 마치 성도를 소고삐처럼 끌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누가 무슨 일을 하였고 누가 어떤 일을 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 인생이 차압당하는 겁니다.

그리곤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야금야금 끌어 당겨요.

그러니 세상에서 자꾸만 버려지고 빼앗기고 실패하는 모습으로서의 삶이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죽을 맛인 겁니다.

 

이렇게 죽을 맛을 안겨 주는 일을 바로 믿음이 하십니다.

믿음이 가만히 있지 않고 누룩처럼 자꾸만 우리 안에서 부풀게 합니다.

나는 점점 누룩에게 잠식당하는 겁니다.

말씀에 잠식당합니다.

말씀에 잠식당하는 것을 순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자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믿음과 어떻게 일을 해 가는지 살펴봅시다.

 

창세전에 아버지는 계획을 세우시고 그 계획을 아들에게 위임했어요.

이걸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도 그 아들에 말을 들으라고 했어요.

 

기독교는 아버지를 믿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어니고 아들이 구원을 하십니다.

그래서 아들이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것입니다.

 

그럼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획을 명령합니다.

말씀하신단 말입니다.

누구에게 하는가 하면 성령에게 하세요.

그럼 성령이 그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마치 회장님이 사업 계획을 구상해서 사장에게 전달하면 그 사장은 부하직원들에게 하달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부하직원들이 그 일을 합니다.

실제 일하는 것은 부하직원들이에요.

사장은 일하는 자가 아니고 지시하는 자에요.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시스템도 그래요.

아버지는 회장님처럼 계획을 세우고 아들에게 전합니다.

그런 아들이신 예수님이 성령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럼 성령이 예수님의 명령을 시행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신 겁니다.

그럼 성령은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예수가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라도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일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 하시면 그 말씀을 성령이 이루어내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 안에 성령이 와 계신다고 하는 겁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세요.

순종케 하세요.

 

성령이 마음으로 예수가 믿어지게 하시면 우리 몸은 입으로 예~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예수를 시인한다는 말은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와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순종이라고 하는 겁니다.

다른 말로 행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이런 행함이 없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죽은 믿음이란? 움직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움직임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순종이 없는 믿음은 가짜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믿음에 따른 행함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믿음이란?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주셨어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했잖아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 우리 삶은 없는 겁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의 삶은 드러나고 내 삶은 쪼그라드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반발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그럼 난 뭐냐? 라고 따집니다.

그래서 원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린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맨 날 내 인생을 빼앗아 가기 때문입니다.

왜? 날 달달 볶느냐고 원망하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은 자신에게 침 삼킬 틈도 주지 않는다고 했어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가요.

힘이 빠져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꼭 우리 인생 같아요.

 

우리 인생은 창대하다가 점점 쪼그라들어가요.

인간은 자라가면서 영웅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만유를 호령하면서 품을 듯이 기세를 올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노년에 이르면 점점 쇠약해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나중엔 숟가락 들 힘도 없어서 죽게 됩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나중은 점점 쪼그라들어요.

이게 인생이에요.

 

이걸 신앙으로 적용하면

율법 아래 있을 땐 만유를 움직일 것 같았는데 은혜 안에 들어와서 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갈수록 실감하게 되어요.

처음엔 죄인이라는 말이 그냥 립 서비스로 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이제는 진정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겁니다.

 

야! 난 진짜 나쁜 인간이구나!

내가 이렇게 악한 자이구나!

내 안에 선이라곤 파리똥만큼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입이 점점 닫아 지는 것입니다.

유규무언이 되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되어요.

예전엔 추상적으로만 느껴지던 하나님의 은혜가 이젠 실상으로 눈에 보여요.

 

하나님의 은혜가 보인다니까요!

허! 참!

욥이 흠씬 깨지고 난 후에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다고 했어요.

사도 요한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었다고 고백하였어요.

실패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안목이 깊어지고 넓어져요.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에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울어요.

지난번에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불렀어요.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울었어요.

왜? 웁니까.

뭔가 심금을 움직이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임재범씨는 자기 인생을 그 노래에 담아서 부른 겁니다.

그러니 그가 노래를 부르면 그냥 노래가 아니라 인생이 느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추적해 보면 눈물골짜기로 통행한 인생입니다.

그러니 노래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한(恨)이 서려 있는 겁니다.

그 한이 노래로 토해져 나오니 사람의 심금을 후벼 파는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부른다면 그냥 노래에요.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윤향기씨가 작곡을 할 때 자기 동생인 윤복희씨가 이혼을 하고 힘들어 할 때 동생을 위로하기 위해서 작곡했다고 합니다.

그 여러분이 인간이 아니고 주님이라는 뜻으로 했다고 해요.

주님이라는 가사를 쓰면 대중음악에 맞지 않기 때문에 주님 대신 여러분이라는 가사로 대체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이라는 노래는 사연이 없는 사람이 부르면 그냥 노래에 그쳐요.

그러나 사연이 있는 사람이 부르면 그 사연이 노래에 담겨져 고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 골짜기로 통행한 성도가 주여~ 라고 부르는 것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은 달라요.

지옥을 맛본 성도가 천국을 이야기하는 것과 지옥을 맛보지 않는 사람이 천국을 말하는 것을 달라요.

율법 아래서 지독하게 종노릇해 본 성도가 십자가가 주는 자유함을 맛본 성도와 율법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그냥 지식으로 십자가 도를 알아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달라요.

 

자신이 죄인 중에 죄수임을 깊이 아는 사람과 그냥 지식으로 아는 사람은 그 은혜를 맛보는 것이 달라요.

신앙은 부대낌이에요.

많은 부대낌을 당한 성도는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깊이가 달라요.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을 한 사람은 힘이 빠져 있어요.

흐믈흐믈해요.

 

하나님과 많은 사귐을 갖게 되면 사람이 유해져요.

이것도 은혜이고!

저것도 은혜이고!

이것도 감사이고!

저것도 감사이고!

예전에 감사거리를 찾았는데 이젠 범사가 감사거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요.

감사는 죄의 깊이를 아는 것에 비례하여 나타납니다.

 

그러니 은혜의 깊이가 더할수록 감사가 더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그냥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이 모두가 믿음이 누룩처럼 우리 안에서 부풀어서 나를 잠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길과 같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옛 사람은 날이 갈수록 다 죽어지고 예수 안에서 나온 새 사람이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고 사랑으로 채워지고 긍휼로 채워져요.

믿음이 자꾸만 자기를 부인하게 하시기 때문에 비워지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하는 겁니다.

 

순종이란? 도를 깨우치는게 아니고 삶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득도 하는 것이 아니고 삶이에요.

득도하는 것은 영지주의에요.

불교는 득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기독교는 삶이에요.

 

삶이란 희노애락이 있단 말입니다.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어요.

산다는 것은 몸으로 체휼되어지는 겁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믿음으로 현실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고난인 겁니다.

 

예수님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필요에 의해서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 인생이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위한 삶이 없고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래야 창조 목적에 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려지는 것을 삶으로 해석되어지게 되어 있어요.

신앙이 예수님처럼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어요.

 

그러므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성도는 에수님의 운명으로 초대가 되어지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그리로 인도 하세요.

이 사람들이 바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으로 산 성도들이에요.

 

신앙고백이 삶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도의 생명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왔듯이 십자가의 생명을 받은 성도의 삶은 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려내는 삶으로 초대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삶으로 번역되어지지 않고 지식으로 남게 되는 것은 가짜에요.

그런 십자가는 교만으로 남게 되어요.

지식으로 알아진 십자가 도는 반드시 영적인 교만을 낳게 됩니다.

지식은 반드시 교만케 합니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식으로 가지고 있게 되면 자기 의를 쌓는 죄를 짓게 되어 있어요.

안다는 것으로 마귀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짓을 하게 되어요.

만약에 내가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데 내 주변에 사람들이 나를 기피를 한다고 하면 난 지금 십자가를 삶으로 살고 있지 않고 지식으로 쌓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딛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십자가를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자는 말과 행동이 달라요.

이는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이 아니고 지식이라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아는 것하고 사는 것이 다르게 나타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은 현란한데 그 속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글을 보아도 글 속에서 긍휼과 사랑이 나오지 않고 패역과 강포가 나와요.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져요.

이게 모두가 신앙을 지식으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이만큼 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음을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식으로 쌓고 있으면 건방져요.

한 마디로 맛대가리가 없어요.

건방지고 무례해요.

남을 우습게 여기고 자기만 혼자 다 아는 것처럼 꼴값을 떨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피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삶 속에서 덕으로 사랑으로 은혜로 나타나야 하는데 도리어 재수 없음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건 지식이에요.

그러니 예수의 생명이 유출하지 않고 아담의 추악한 교만과 죽음이 유출되고 있는 겁니다.

마귀적인 모습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내 삶이 십자가로 해석당하고 풀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만 보면 슬금슬금 피해요.

재수 없는 인간으로 생각해요.

그러니 자기를 잘 살펴보세요.

난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있는지 관찰해 보세요.

 

어떤 사람들은 복음은 달달달 외우는데 만나면 재수가 없어요.

아주 기분 나쁜 인간이 있어요.

입만 열면 남을 판단하고 정죄해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에요.

이런 사람은 왠지 가까이 하기 싫고 대화하기 싫어요.

그건 죽은 냄새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식으로 쌓고 있는 자들의 특징이 부정적이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 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는 겁니다.

 

물론 십자가는 우리를 부정해요.

그러나 십자가로 자기가 부정당한 성도는 부정으로 쏟아내지 않고 예수의 생명으로 은혜로 용서와 긍휼로 토해내게 되어 있어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내가 십자가에서 부정당하고 이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은 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그 자리에 남을 살리는 모습으로서 사용이 되어져요.

이게 십자가 도를 풀어내는 삶이에요.

 

그렇지 않고 십자가를 공부하듯이 지식으로 알아진 것은 반드시 마귀적인 행동들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로 자기가 판단 받고 정죄당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자기가 쌓은 지식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악을 도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가 지식이기 때문에 삶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이걸 영지주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성도의 삶을 그토록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으라고 하는 겁니다.

십자가란? 예수와 함께 내가 죽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버려짐이고 낮아짐이고 빼앗기는 것입니다.

내가 부인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이고 고난인 겁니다.

신앙생활이 고난인 것입니다.

 

죄란? 창조 목적에 위배된 것입니다.

창조 목적에 위배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바뀌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란? 이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어그러진 삶에서 돌이켜 원래 창조의 목적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순종이라고 합니다.

 

예전엔 나를 위하여 살았는데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이는 온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가는 삶에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성도로서의 정체성과 왜? 부르셨는가 라는 삶에 지향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한다면 늘 나는 왜? 사느냐? 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나를 위하여 살고 있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위하여 살고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나 복음 안다고 자랑하지 말고 그 복음 아는 것으로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나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그럼 여전히 우린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나의 주인입니다.

우린 단 한 번도 내가 주인의 자리를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장차에도 없을 겁니다.

이건 죄 아래서 태어난 몸뚱아리를 갖고 사는 한은 안 됩니다.

 

우리 몸은 죄를 이기지 못해요.

그래서 성도는 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죄를 못 이긴다고 하니 죄 짓고 사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란 말이 아니에요.

이건 죄와 우리 몸의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린 늘 예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하여 살고 있음을 깨닫고 통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믿음 하면서도 여전히 우린 죄의 소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깊어질수록 예수 잘 믿는 내가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 예수를 이용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어요.

지독히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내가 점점 더 악당임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는 겁니다.

야~! 지독히도 나는 예수님을 싫어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생활 인 것입니다.

죄의 깊이를 많이 알아가면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감사하게 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공로가 남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일하심만 남기를 바래요.

예수 때문에 구원 받았음을 남기세요.

어떻게 남기는가 하면 우리 안에 죄를 더 들추어내서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받고 산다는 것으로 남기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끝에는 난 죄인 중에 괴수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이란? 어디로 가야 하는 목적지가 있다는 말이고!

빼내심을 입었다는 것은 어딘가에 가두어져 있다가 해방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을 예로 든다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부르심을 입은 겁니다.

출애굽한 것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포함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 시킨 것은 가나안에 넣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말할 때 출애굽만 말하면 안 되고 가나안 까지를 말해야 합니다.

광야에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가나안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광야에 나오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앞 뒤로 가로 막고서 밀어붙이는 겁니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하는 것입니다.

 

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말까요?

이는 순순히 안 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하나님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서 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 우린 늘 얻어터지는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말을 안 들었으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구원엔 하나님의 일하심만 가득히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린 반대로 불순종한 흔적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럴 때 천국에서 유구무언이 되어서 오직 어린 양에게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니 구원이란? 우리가 이룰 몫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실 몫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장에서 예수님을 일컬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신 겁니다.

 

이를 만물이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시고 예수님이 다 이루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오롯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예수님의 은혜임이 남아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어떻게 증거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로 하여금 하셨다는 것이 간증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이 하신 흔적들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하였으니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것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려나가십니다.

은혜와 긍휼을 그려나가십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토하게 하시고!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를 토하게 하시고!

긍휼을 받았으니 긍휼을 토하게 합니다.

 

우리 몸에서 은혜와 긍휼이라는 그림이 그려질 때마다 나는 부인되어지고 내 행위는 기각 당하여집니다.

그러니 우린 원망과 한숨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입니다.

 

모세가 구약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하길 너희는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하고 배반한 자라고 합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죽일 놈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버리지 않고 가나안으로 들이는 것은 하나님 자신과의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내가 너를 복주고 복 주리라고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 속엔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불신과 불신앙 속에서도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부르심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담겨져 있습니다.

이 부르심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부르심으로 그리스도의 것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 부르심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게 하시고 삶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또한 나는 나를 위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나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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