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 3강. 미리 약속된 아들 (롬 1:1-2)

by coroa 2024. 2. 23.

 

3강. 미리 약속된 아들 (롬 1:1-2)

롬 1:1-2=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지난 시간 우리는 종(從)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고 미리 약속된 아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종에겐 자기 인생이 없습니다.

주인의 소유물이고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종이 아니고 주인으로 살고자 합니다.

인간들에겐 종은 수치스러운 겁니다.

세상에선 자기가 종이라는 것은 사람들 앞에 감추고 싶은 신분이에요.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인간의 상식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어요.

왜냐하면! 그 당시의 사회적인 정서로서는 죽임 당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철저히 주인의 명령에 따라 살고 죽습니다.

주인의 운명과 함께해요.

예를 들어서 주인이 충신(忠臣)으로 영광을 받으면 종도 영광을 받고 주인이 역적(逆賊)으로 몰려 처형당하면 종도 역적이 되어 처형을 당하게 되어요.

그러니 종은 주인의 신분이 어떻느냐 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자기 주인이 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영웅이라고 한다면 떳떳이 나는 그 분의 종이라고 자랑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역적이라고 한다면 숨겨야 해요.

그건 자기 목숨이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영웅이 아니고 유대인들에게는 역적이에요.

유대교에서는 이단이에요.

 

현실이 이러함에도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십자가에 죽인 그 죄인인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고 있어요.

이 말이 그 당시에는 얼마니 큰 충격적인 말인지 몰라요.

이건 마치 과거 우리나라가 36년 동안 일제 식민지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나는 친일파(親日派) 라고 자랑하는 것과 같아요.

 

당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유대인들에겐 민족의 반역자들이에요.

유대민족 입장에선 예수는 유대교를 무너뜨리는 이단이었어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들이라고 정죄를 받아서 철저히 응징 당하는 대상이었어요.

 

이러한 유대인들이 정서는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뜬 청년의 아비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뜬 소경의 아버지는 아들이 예수에 의해서 눈을 떴다고 하면 출교를 당한다고 하여서 밝히지도 못하였어요.

그만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겐 대 놓고 믿는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기피의 대상이었어요.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온 민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이 금하는 성전을 모독하고 안식일을 범하고 유대교에선 죄인이라고 하여 상종도 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반 율법적인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했어요.

이는 율법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합법적으로 종교재판을 거쳐서 예수는 유대교를 허무는 이단이라고 하여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당시 죄인을 십자가에 죽이는 사형(死刑)법은 하나님을 모독한다든가 민족의 반역자라든가 아니면 사회적으로 큰 악행을 저지른 죄질이 아주 나쁜 사람들에게만 허용하였어요.

십자가 형(刑)은 사람을 십자가에 달아서 서서히 피를 빼서 죽이는 잔인한 극형이에요.

최고의 고통을 가해서 죽임으로서 사람들에게 이런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보통 이틀이나 사흘간 극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미쳐서 죽는다고 합니다.

이건 그 당시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으로 죽이는 사형법 이었어요.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겐 그 어떤 죄인이라도 십자가 형(刑)을 금지했어요.

십자가 형(刑)은 미개인들이나 죽이는 것이지 일등 시민인 로마 인들에겐 행하여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그만큼 십자가 형(刑)은 최악의 사형법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어요.

그만큼 유대민족에겐 예수님은 악질분자란 말입니다.

저주의 대상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유대교에선 로마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예수쟁이들은 민란을 일으키는 반역자들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 옥에 가두거나 가산을 적몰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위험한 일이었어요.

그러니 바울처럼 난 예수의 종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것과 같아요.

그럼에도 바울은 지금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자랑스럽게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을까요?

이는 자신은 하나님께 저주 받아 죽어도 마땅한 자였는데도 용서 받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하나님의 원수에요.

예수쟁이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찾아와 다 용서하시고 도리어 사도로 삼은 것입니다.

이런 황감 할 때가 어디 있겠어요.

 

이러한 일은 율법아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율법은 보복의 법이에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았어요.

 

율법대로 라면 바울은 예수를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으니까 자신도 마땅히 돌로 쳐 죽임을 당하여야 했어요.

하나님이 만약에 바울을 율법대로 하였다면 바울은 십자가에 달아서 죽어야 할 정도로 아주 극형으로 다스려야 할 죄인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만큼 더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바울은 처형은 고사하고 은혜로 용서받고 사도가 되었어요.

죄인 중에 괴수를 최고로 영광된 사도로 삼아 주셨다구요.

그냥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은혜인데 사도가 되었으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러니 백골난망(白骨難忘)인 겁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깨닫고 보니 상상 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이에 바울은 난 이제 바울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바울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나는 예수님의 소유물이라는 뜻에서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내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대신하는 인생을 산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다메섹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원수였던 사울은 죽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혀서 예수의 종인 바울로 거듭나게 하신 겁니다.

바울은 예수 안에서 다시 살아났어요.

이제 바울의 몸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담고 있는 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몸으로서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증거하는 자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받은 용서로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하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한 것을 이웃에게 되갚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모든 자들에게 빚진 자라고 했어요.

모든 사람에게 예수의 사랑을 증거하여야 된다는 자세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성경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과거 바리새인으로 있을 땐 율법 통하여서 예수를 보았어요.

율법을 통하여서 예수를 보니 예수는 율법을 허무는 이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들을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일말의 양심에 가책도 없이 행하였습니다.

그것도 대단한 자부심으로 아주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면서 말이에요.

 

율법 아래선 예수쟁이들을 없애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인 줄 알았어요.

율법을 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이므로 이들을 죽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도리어 율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원수이고 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건 기절초풍할 일이에요.

 

이젠 반대로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주어진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이제는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다닌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구약 성경인 율법을 통하여서 예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전엔 율법으로 예수를 보아서 예수를 이단이라고 하여 죽였는데!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율법을 다시 보기 시작하니까 율법 신앙이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이단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젠 적극적으로 율법신앙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는 안목이 완전히 뒤 바뀌었어요.

바울은 다메섹 이후로부터 성경을 거꾸러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율법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온 율법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완전히 유대교와 다른 성경 해석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건 그냥 해석이 다른 것이 아니라 유대교가 이단인 거에요.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예수를 통해서 율법을 보니 자기 민족들이 하나님의 원수이고 이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고 죽였으니 이를 어찌 해야 합니까!

그러니 미치고 환장하겠는 겁니다.

 

바울은 자기가 은혜를 입고 보니 자기 동족들이 너무도 불쌍한 겁니다.

유대교 속엔 자기 가족들도 있고 친척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이웃도 있어요.

이들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아니 너무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아픈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하나님! 차라리 내가 이단이고 맙시다.

내가 틀렸고 자기 동족들이 맞는 것으로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바울은 자기 하나 지옥에 가는 것이 낫지 저 많은 민족들이 지옥에 가면 안 되지 않습니까! 라고 탄원했어요.

 

이게 예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죄에서 구원을 받은 예수의 종들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요.

죄를 용서받고 긍휼을 입은 자들의 당연한 마음이고 삶에 모습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심정과 같아요.

 

성도들 속엔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은 죄인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나와요.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신도 용서받은 자임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명은 용서와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이렇게 하여야 한다는 강요가 아니라 은혜를 받으면 이런 마음이 자연히 생겨요.

 

무엇이든지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항상 아는 자가 고통스러워요.

모르는 자는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안타까움도 고통도 없어요.

부모와 자식 간에 누가 더 공부에 대하여 심각한 줄 아세요.

부모에요.

 

부모는 자식이 공부를 안 하면 나중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든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니 자식이 공부를 안 하면 부모가 속이 터지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공부하는 당사지인 자식들보다 부모가 더 공부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이런 부모의 심정을 몰라요.

 

부모는 그 과정을 거쳐 왔기 때문에 알고 자식은 안 거쳤기 때문에 모르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몰라요.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가 인생에 전부입니까! 라고 주접을 떨어요.

그러면 부모들은 이 새끼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느냐 라고 하면서 너 죽고 나 죽자고 하면서 자식과 싸우는 겁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이런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중에 자기가 결혼해서 자식을 키워보면 그 때 그 심정을 알고 자기 자식에게 자신의 부모님이 한 그대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그런 겁니다.

바울은 예수를 안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저주인 줄 알아요.

하지만 자기 동족들은 몰라요.

그냥 이대로 놔두면 지기 동족들은 전부 지옥으로 가야합니다.

그럼에도 자기 동족들은 이런 사실도 모른채 천국에 간다고 굳게 믿고 있어요.

그러나 바울이 미치고 팔짝 뛰겠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차라리 날 지옥으로 보내고 저들을 천국으로 보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서 역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에요.

 

바울은 누구에게도 부모와 같은 심정으로 다가갔어요.

어찌 하든지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살리려고 했어요.

그러니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할례자든 무할례자든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까 염려하면서 다가갔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비교하면 천지차이가 나지요.

우리는 나는 복음 안다고 하면서도 이런 애절함이 없잖아요.

내 가족 내 형제 내 친구 내 이웃에게 넌 복음도 모른다면서 냉소적으로 대하잖아요.

나는 복음 아니 천당에 가고, 복음을 모르는 너희들은 지옥으로 가라고 그러고 있잖아요.

 

우리는 복음 모르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않으려고 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거드름이나 피우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만 있잖아요.

복음을 아는 자로서 안타까움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넌 복음 모르니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하면서 교제를 끊고 있잖아요.

그러니 바울이나 사도들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릅니까!

 

복음을 아니까 복음을 모르는 교회에 가서 전도 하여야 할 것 아닙니까!

바울처럼 복음을 아니까 이방인이든 교회 안이든 다가가야 할 것 아닙니까!

가서 아는 자로서 모르는 자를 위하여 섬겨야 할 것 아닙니까!

 

바울이 그러잖아요.

혹시 네 아내나 남편이 복음을 모르더라도 혹시 너 때문에 알게 될지 어떻게 아느냐!

그러니 이혼하지 말아라!

복음을 아는 자로서 참아주고 용서하고 인내하면서 주께 받은 사랑을 베풀라고 하잖아요.

이혼할 생각을 하지 말고 섬기라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왜? 나를 복음을 모르는 이 사람하고 살게 하였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왜? 이런 인간하고 살아야 하느냐 라고만 한탄하고 있잖아요.

뭐라고 하면 마귀새끼가 핍박을 한다고 하면서 성질만 부리잖아요.

그러니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가 예수 믿는 인간들이 왜? 그러느냐고 힐난하는 것입니다.

 

우린 복음 안다고 하면서 우리끼리만 히히거리고 있어요.

자기가 깨달은 것 마냥 자랑하고 있어요.

복음을 마치 지식을 쌓듯이 습득하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잖아요.

모여서 한다는 짓이 고작해서 누군 어떻고 누군 저떻고 비판이나 할 줄 알지 복음에 빚진 자로서의 삶이 없어요.

 

그렇다고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전도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아는 자로서의 삶에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합니다.

빛은 어둠을 위하여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너희 빛을 등경 위에 두어서 사람들에게 비추라고 하신 겁니다.

빛끼리 모여서 야간 경기 하라고 하지 않고 어둠에 비추라고 했어요.

 

마치 예루살렘 교회가 모여서 니편 내편으로 나누어서 쌈박질이나 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을 일으키게 하여서 다 흩어버리신 겁니다.

하나님이 어둠 속에 들어가 빛으로서 복음을 증거하라고 흩어버린 것입니다.

가만 두면 싸움질이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개그콘서트에 두 분 토론이라는 코너에서 여자가 사치만 즐기고 일만 만드니 남편이 하는 말이 당신이 그렇게 싸돌아다니면 소는 누가 키우느냐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싸움질을 하면 복음은 누가 전하느냐 란 말이에요.

 

빛이 복음이라고 한다면 복음 전하지 않는 교회는 어둠이에요.

그럼 그 어둠인 교회에 가서 그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증거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서 어둠에 오셨어요.

그래서 어둠인 유대교 안에서 이게 천국복음이다 라고 전했어요.

 

그럼에도 우린 빛을 등경 위에 두어서 교회 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말 속에 가두고 있어요.

나가던 교회도 끊고 집안에 놀고 있잖아요.

복음 안다는 영적 나르시즘에 빠져서 포도주에 취하여서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고 있어요.

 

마치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안 것이 마치 큰 득도라도 한 것처럼 여기고 유유자적하고 있어요.

집 안에서도 복음을 모르는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 형제들을 더 살갑게 대하고 사랑으로 다가가야 함에도 도리어 복음을 모른다고 벌레 보듯이 하고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사람하고 살게 하였는지!

왜? 나를 복음을 모르는 이런 집안이라는 구조 속에 혹은 교회라는 구조 속에 집어넣어 주셨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난 너희와 다르다는 것만 구분하고 있잖아요.

복음 아는 것만 있지 복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없어요.

바울처럼 동족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우린 그렇지가 않아요.

도리어 귀찮아하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이는 우리가 그만큼 복음 속에 담긴 풍성함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 속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도 담겨져 있지만 죄사함이 주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삶도 있어요.

모든 것을 가진 자로서의 관대함과 여유로움도 있어요.

그러니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이 우린 너무도 약한 겁니다.

 

누구에게 말하기 이전에 제 자신이 그러고 있어요.

이 설교를 쓰는 저 자신부터 주님께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음에도 토해내는 것은 인색해요.

그러니 내 심령이 참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느껴요.

설교를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주께 긍휼을 구하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저 역시도 복음을 모르는 부모형제들에게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라고만 하였지 그들을 위하여 진심으로 다가가지 않고 있어요.

자기 동족을 위하여 애타하는 바울의 심정이 없어요.

그들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이건 측은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해요.

내가 지옥에 갈테나 당신들이 천국에 가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 나도 복음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설교하는 제 자신이 얼굴이 화끈거려요.

성령이 저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을 느껴요.

그러니 우린 주께 긍휼을 구하고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탕자가 아버지께 용서를 받았으면 어떤 자세로 살았을까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아버지가 탕자를 용서한 것이나 율법 아래 있던 우리를 은혜 아래로 불러 주신 것과 같아요.

모두가 아버지께 은혜를 받았어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으면 주여! 저들에게도 주께서 나의 마음을 열어서 예수님의 피가 믿어지게 해 주셨듯이 저들에게도 믿어지는 은혜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에이~ 저 사람들은 복음도 모르는데 라고 무시하고 있잖아요.

 

바울과 비교하면 얼마나 다릅니까?

결국 우린 바울의 이런 말에 우리 죄가 고발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엔 성령의 법과 육신의 법이라는 두 법이 있어요.

성령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법이고 육신의 법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싫어하는 법이에요.

 

원래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 싫어하는 법 아래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게 하는 성령의 법을 심어 놓은 겁니다.

이 두 법은 우리 몸을 놓고 늘 싸워요.

성령의 법이 주장하면 바울처럼 나는 저주를 받아도 좋으니 자기 동족들은 천국에 보내 달라고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우린 이런 선한 싸움을 하여야 해요.

물론 죄 아래 팔린 몸으로서는 온전하게 하나님 뜻대로 살아 내지를 못해요.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고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욱 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어요.

 

성령은 우리 안에서 육신의 소욕을 버리고 성령의 소욕으로 살라고 하세요.

성령의 소욕이 우리를 장악하면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호수의 물이 넘침과 같이 여울처럼 우리 안에서 출렁거리고 흘러넘쳐 나와요.

이러한 상태를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는 금지 할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주어져요.

그러니 이런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메섹 사건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출렁거리고 흘러나와야 합니다.

마치 에스겔 성전의 문지방에서 나오는 생수가 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듯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생수처럼 흘러나올 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혜택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머금어져 있으면 바울처럼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는 일을 사모하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의 눈에 비늘이 떨어진 것처럼 우리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서 율법적 사고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다가가서 이해하고 용서하고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신앙의 옳고 그름의 판단과 심판은 오직 주님께 맡기고 우린 복음에 빚진 자로서 섬기고 살아야 합니다.

 

스데반처럼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여 그럽니다! 라는 기도가 나와야 해요.

이건 예수의 살과 피를 마신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도이고 뱉어 낼 수 있는 생명이에요.

 

십자가가 나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쪽으로 역사해요.

바울의 고백처럼 저주는 내가 받고 영생은 너희가 받으라는 식으로 나타나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바로 마신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랬어요.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일한다고 했어요.

이게 바로 스데반의 기도이고 예수님의 기도인 겁니다.

 

그 어떤 복음적인 말을 하여도 우리 안에서 정죄와 심판이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올바른 복음이 아니에요.

마귀적인 거에요.

 

야고보서를 봅시다.

 

약 3:13-18=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여기서 지혜와 총명이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을 받은 자가 누구냐 라는 말입니다.

복음을 안다고 한다면 그 복음에 합당한 행함을 보이라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행함이란? 생명을 아끼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아주고 용서하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보이라는 거에요.

 

물론 사도들의 서신서가 율법적 기능을 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는 것은 맞아요.

우린 말씀 앞에서 우리 죄를 지적 받고 하나님 앞에 입을 닫아야 합니다.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어지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하게 됩니다.

우린 온전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말씀의 첫째 기능은 말씀이 문자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요.

이는 우리의 죄를 고발하여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세워서 죽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위한 요구가 아니라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일을 하십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 하면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선택을 입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어서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입을 막게 하여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세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아! 우리는 저주 아래 있구나!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케 하심으로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하고 흠이 없어집니다.

이러면 창세전 언약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쉽게 설명 할게요.

여기 창세전 언약이 있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죄에서 해방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창세전 언약이 시작이라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끝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창세전 언약과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가두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창세전 언약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햄버거의 양 쪽에 빵과 같아요.

인간은 그 빵 가운데 끼인 햄과 같구요.

 

창세전 언약이 자기백성들은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죄 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피로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그럼 율법은 죄를 지적하여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백성들은 율법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피 앞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래야 율법을 바로 지킨 것이 됩니다.

 

이건 신약에서도 동일해요.

신약의 말씀도 율법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럼 성도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인간의 심령골수 속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어서 인간을 발가벗긴다고 했어요.

심령골수 속에 죄를 끄집어낸다는 말은 인간 전체가 죄 덩어리란 말입니다.

큰 죄 작은 죄가 없어요.

무엇이 죄(罪)고 무엇이 의(義)고도 없어요

몽땅 죄에요.

 

그런데도 인간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죄 아닌 것이 있는 줄 알아요.

착하게 살면 죄가 아닌 줄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는 몽땅 죄인이라고 까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도는 그 어떤 말씀 앞에서도 죄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덥석 물었는데 도리어 말씀이 인간을 물어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말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은 자로 드러나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창세전 언약인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성도가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하여서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버리고 죽은 자로 만들어 버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전 언약인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럼 성도는 모든 말씀을 문자적으로 먼저 받아야 해요.

 

그래서 제가 말씀대로 살아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보면서 왜? 나는 온전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죄인인가를 알아야 해요.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음이 복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쳐버리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냥 추상적으로 알아요.

 

죄를 추상적으로 알게 되면 복음도 추상적으로 남게 되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그림의 떡으로 가지고 있으면 그 피 속에 담겨진 풍성한 은혜와 감사가 나타나지 않아요.

신앙생활이 화석화 되어 역동성이 사라지게 된단 말입니다.

 

말씀을 모르면 죄를 알 수가 없어요.

죄는 항상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말씀이라도 먼저 문자적으로 받아야 해요.

내 가능성으로 먼저 받아서 실천해 보아야 합니다.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발가 벗겨야 해요.

마치 거울을 들고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듯이 말씀으로 자신을 비춰 보아야 해요.

과연 이 말씀을 내가 지켜 낼 수가 있는지 없는지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말씀을 지켜 낼 수 없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바울이 동족을 위한 기도가 우리의 기도이어야 하기도 하면서 또한 바울의 기도가 말씀이 되어서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기도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이 다 그러해요.

우리가 지켜야 하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죄를 고발하는 말씀이기도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이 두 가지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살아서 좌우에 날선 검처럼 우리의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어서 발가벗게 하여서 하나님 앞에 세운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한번 볼까요.

 

히 4:12-16=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   

 

보세요.

말씀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마음에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하지요.

이는 인간 자체를 해부한다는 말입니다.

찔러 쪼갠다는 것은 죄를 고발한다는 말입니다.

왜? 죄를 고발합니까?

대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요.

결국 말씀으로 예수님 십자가를 바로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의 끝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보여야 해요.

그래야 말씀을 바로 본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모든 말씀은 우리 입을 막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거든요.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려고 주신 말씀이에요.

그러니 나 말씀대로 살았다가 나오는 것은 반칙이에요.

도리어 나는 말씀대로 살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나와야 해요.

그래야 그 사람에게 예수님의 피가 뿌려져서 살려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입을 막고자 죄인들이 지키지도 못할 말씀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오직 복음으로 남게 하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이 복음으로 남게 되어요.

 

유대인들이 잘못한 것은 율법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하는데 도리어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나 괜찮지요 라고 나온 것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바울이 자기 동족들에게 이게 바로 죄라고 고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바울의 말을 알아듣지를 못했지만 말이에요.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에겐 예수님의 십자가는 악세셔리에 불과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고 주의 십자가 앞에 감사가 나오고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을 먼저 문자적으로 받으란 말입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 속에 이러한 것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또 다른 법이 자리 잡아서 못하게 하여서 탈이지 우린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중에 믿음 있는 자가 누구냐?

하늘에 지혜를 받은 자가 누구냐?

예수의 생명을 받은 자가 누구냐?

말만 하지 말고 행함으로 그 믿음을 보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 믿음 하면서 너희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고 합니다.

마귀로부터 온 것은 다투고 시기하고 죽여요.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면서 맨 날 다투고 요란하고 시끄러운 것은 그건 마귀적인 거라는 겁니다.

그런 복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게 바로 죄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로 난 믿음은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이 있어요.

한 마디로 남을 나 보다 낫게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으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는 거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로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용서와 긍휼로 나타나지 않는 지혜(복음)는 가짜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이렇게 살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난 지혜는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에겐 이런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럼 넌 어떻느냐를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그럼 우린 이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린 야고보서가 살라고 하는 대로 살지 않고 반대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우리 안에서 삶으로 나타날 때는 쓴 잔으로 나타나요.

복음은 들을 땐 달콤하지만 그것이 소화하여 삶으로 나타날 때는 엄청 써요.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작은 책과 같이 입에는 다나 배에서는 쓰게 되는 것입니다.

 

계 10:7-11=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게 하였어요.

작은 책이란? 영원한 복음을 말해요.

새 언약을 말해요.

작은 책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 창세전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새 언약이 영원한 복음인 겁니다.

하나님은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과 같은 새 언약을 먹였어요.

그리고 다시 예언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을 “다시 예언 한다!” 는 말입니다.

 

“다시” 란? 말은 이미 하였던 곳에서 다시 전하라는 말이에요.

두 증인들이 어디서 예언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였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가서 하라는 말입니다.

옛 언약이 증거 되었던 곳에서 새 언약을 증거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지요.

이는 이스라엘 속에서 진짜 이스라엘을 찾으란 말입니다.

옛 언약 안에 있는 자들 중에서 새 언약으로 불러내라는 말입니다.

 

지금은 교회가 전도하여야 할 곳이에요.

물론 교회 밖에도 전도하여야 해요.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할 복음인 겁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을 바탕으로 주어졌어요.

새 언약과 옛 언약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요.

그러므로 새 언약과 옛 언약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겁니다.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주어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옛 언약이 껍데기 즉 그릇이라고 한다면 새 언약은 알맹이 곧 내용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을 모르는 옛 언약에 속한 교회에 가서 새 언약은 이런 것이다! 라고 다시 예언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구약 교회는 적이다!

그러니 박살을 내야 한다! 라고 하지 말고 그 속에서 다시 예언하여 그들의 죄를 고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이를 겨냥하고 뿌려진 것입니다.

죄인을 위하여 예수님은 죽으셨어요.

그러므로 옛 언약에 속한 교회에 가서 새 언약을 다시 예언함으로서 예수님이 왜?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를 알게 하여야 합니다.

누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는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죽인 바울에게 자신의 피를 뿌려서 옛 언약이 증거되는 곳에서 새 언약을 증거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알았으면 집에 있지 말고 복음을 모르는 교회에 가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받은 자로서 전도하고 봉사하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건져 낼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속에 있다가 건져 냄을 당하였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그 속에 들어가 다시 예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알아서 그 중에서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주선 하였듯이 만남의 사건을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없으면 어둠 속에 빛으로 홀로 있으면서 어둠을 어둠이라고 고발하면 되어요.

가서 싸우라는 말이 아니고 그냥 복음을 받은 자로서 봉사하라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신 뜻이에요.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은 싸우라는 말이 아니에요.

거기서 아벨처럼 피 흘리고 죽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 피는 곧 예수님의 피와 같은 것입니다.

그럼 스데반을 죽였던 사울이 바울로 거듭났듯이 하나님께서 양을 죽인 자들 속에서 바울처럼 거듭나게 하실 것입니다.

 

양이 이리 가운데서 사니 죽을 지경인 겁니다.

서로 다르니 우겨쌈을 당하고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두 증인들이 먹은 작은 책처럼 배에서 쓰다고 하는 겁니다.

바울이나 12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어요.

우겨쌈을 당하고 욕을 먹고 핍박을 받으면서 살았어요.

그럼에도 그들을 깔보거나 원망하지 않고 복음에 빚진 자라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섬겼어요.

 

바울을 핍박한 사람들이 이방인이 아니에요.

모두가 유대인들이었어요.

왜?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 합니까.

다시 예언하기 때문이에요.

옛 언약이 증거되는 곳에서 새 언약을 증거하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왜? 다른 말을 하느냐고 공격을 하는 겁니다.

 

두 증인들을 누가 죽이는 줄 아세요.

이방인이 아니에요.

땅에 속한 자들이에요.

땅에 속하였다는 것은 육적 신자들이란 말입니다.

즉 옛 언약에 속한 자들이에요.

 

계 11: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지금 식으로 말하면 기존 교회에 가서 십자가 피를 증거하면 넌 뭐냐!

왜? 다른 말을 해! 라고 핍박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두 증인들에게 굵은 베 옷을 입히고 다시 예언케 하는 겁니다.

 

굵은 베옷이란? 상주(喪主)들이 입는 옷이에요.

상주는 죽은 자를 위하여 애곡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럼 두 증인들은 상주가 되어서 옛 언약에 속하여 죽은 자들을 위하여 곡(哭)을 하는 겁니다.

이를 교회에서 다시 예언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다시 예언 한다는 것은 이 교회 안에 죽은 자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자기들은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칭 산 자라고 여기고 있는데 왠 놈들이 상복을 입고 아이고~ 아이고~ 너희들은 가련하고 헐벗고 발가벗은 소경이고 귀머거리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쾌하고 황당하겠어요.

그래서 뭐 이런 놈들이 있어!

그러면서 죽이는 겁니다.

 

두 증인들을 작은 책을 먹여서 하나님 성전에서 다시 예언하라는 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청소하는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율법대로 잘한다고 하는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이건 틀렸다고 하면서 상을 뒤집어엎고 사람들을 내어 쫓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니가 뭔데!

율법을 훼방하고 성전을 허무느냐!

그래서 에라이~ 너 이단이지! 라고 하면서 죽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내서 복음을 증거케 하였듯이 지금도 새 언약이라는 작은 책을 먹은 성도들을 두 증인으로서 기존의 교회에 보내서 다시 예언케 하십니다.

 

이걸 “다시 예언” 한다고 하는 겁니다.

다시 예언 속에는 죽임당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작은 책은 사약(死藥)인 겁니다.

하나님이 두 증인들에게 죽으라고 예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이라는 사약(死藥)을 한 사발씩 먹인 거에요.

 

두 증인들은 조선시대 충신들처럼 간교한 자들로부터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임금이 내리는 사약을 들이키면서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하여 절을 하면서 전하! 소신의 불충함을 용서 하소서! 라고 하면서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야 하는 자들이에요.

오해하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새 언약을 받은 자는 옛 언약 안에서 다시 예언하기 위하여 남겨진 자들이에요.

다시 예언을 잊지 마세요.

우린 다 작은 책이라는 사약(死藥)을 먹었어요.

우리에게 다시 예언하라고 새 언약이라는 예수님의 피를 마시게 하신 것입니다.

 

어디에서 다시 예언하라고 합니까?

교회에요.

교회!

우리가 복음도 모른다고 깔보고 무시하는 그런 교회란 말이에요.

그들 속에 들어가서 새 언약을 증거하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빼낼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印)을 치지요.

각 지파 중에서 12.000명씩 12 지파 속에서 144.000명에게 하나님의 인(印)을 치잖아요.

이들은 모두가 각 지파 중에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모든 지파가 다 인(印)을 맞는 것이 아니고 각 지파 중에서 12.000명씩 빼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인(印)을 쳐요.

이게 중요해요.

 

12 지파는 구약교회 전체를 말해요.

이건 이 시대 교회 전체와도 같은 의미에요.

그러니 전 세계 교회 안에서 인(印) 맞을 자들을 따로 빼내는 것입니다.

각 지파 속에서 정한 사람에게만 인(印)을 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다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천국 비유를 하면서 바다에 그물을 치고 그 속에 들어온 고기 중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갈라내는 것으로 말씀하셨어요.

광의적인 의미에선 바다는 온 세상을 말하고 그물은 교회를 말해요

그럼 교회라는 그물 속에 들어 온 고기는 교인들을 말하고 그 고기 중에서 좋은 고기는 새 언약 안에 있는 영에 속한 자이고 나쁜 고기는 옛 언약 안에 있는 육에 속한 자인 겁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는 겁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에게 있는 이삭과 이스마엘이라는 두 자식과 같아요.

이삭은 약속으로 난 자이고 이스마엘은 육으로 난 자에요.

그러나 유업은 이삭에게만 주어져요.

그물 속에 들어온 좋은 고기들도 마치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오직 약속으로 난 자만이 아브라함의 씨라고 칭함을 받는 것과 같아요.

 

표면적 이스라엘 속에 이면적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육적 교회 속에 영적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육적 이스라엘 속에서 영적 이스라엘을 빼내고 육적 교회 속에서 영적 교회를 빼내는 것입니다.

우린 그들이 누구인줄 모르잖아요.

 

그러니 아무에게나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각 지파 중에서 두 증인들이 전한 다시 예언을 통해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에요.

빼내서 그냥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를 두 증인이 되어서 그 속으로 보내심을 받아요.

그럼 우리가 증거한 복음으로 인하여 빼내심을 입을 자들이 또 있는 겁니다.

 

우린 조금 먼저 빼내심을 입었을 뿐이에요.

마치 장터에 놀다가 주인으로부터 포도원에 들어가는 일꾼들처럼 부르심을 입었어요.

어떤 사람은 아침에 부르심을 입었고,

어떤 사람은 낮에 부르심을 입었고,

어떤 사람은 저녁 때 부르심을 입었을 뿐이에요.

 

포도원을 교회라고 합시다.

그럼 어떤 사람은 처음 교회 다니면서부터 복음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교회에 10년 다니다가 깨닫게 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30년 다니다가 빼내심을 입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빼내심을 입을 사람도 있어요.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세요.

저 같은 경우는 약 40여 년 동안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어요.

그러니 지금 복음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도 내일이라도 하나님께서 귀를 여시고 눈을 열어서 여러분들이 증거하는 다시 예언이 되어지는 새 언약을 듣고 믿어질 수가 있는 겁니다.

지금 모른다고 판단하면 안 되어요.

 

그러니 우린 때를 가리지 말고 새 언약을 증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예언하여야 합니다.

이게 복음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몫이에요.

이 일을 하다가 예수처럼 죽임 당하고 오라고 세상에 남겨 둔 것입니다.

 

이걸 지금 식으로 본다면 그럼 각 지파는 기존의 교회가 되는 것이고 그 속에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이 144.000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시온 산에서 어린 양과 더불어 함께 살아갈 구원받은 천국백성들이에요.

시온 산에 서 있는 144.000명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인을 맞아서 어린 양의 이름 적혀 있어요.

 

그러니 두 증인들이 다시 예언 한다는 것은 각 지파 속에서 예언 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각 지파는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들이에요.

그 중에서 빼내야 할 자들이 있어요.

이들은 두 증인들이 새 언약으로 다시 예언하는 증거를 듣고 빼내심을 입어요.

 

며칠 전에 경기도에 계시는 조규용이라는 분이 전화를 했어요.

이 분은 약 1년 전에 저에게 전화를 해서 엉엉 우는 겁니다.

전화로 방성대곡하면서 약 5분을 운 것 같아요.

왜? 우는가 하면 제 블로그를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되어서 너무도 기쁘다는 겁니다.

이러한 분들이 꽤 많아요.

고평규 집사님이라는 분도 예전에 전화를 해서 엉엉 울어서 한참동안 침묵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 분들은 교회 안에서 알게 모르게 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어요.

블로그에 설교를 프린트를 하거나 책으로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 전화 하신 분은 장인어른이 전주에서 목회하는 목사님이고 아버지는 장로님이세요.

그런데 이 분들에게 제 설교를 프린트해서 드린다고 해요.

아버지는 너무 좋다고 하면서 기뻐한다고 합니다.

자신은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출석을 하는데 그 교회 안에서 설교를 프린트해서 교인들에게도 드리고 목사님에게도 드린다고 합니다.

 

김효은 집사님은 서울에서 제법 규모가 큰 교회에 다녀요.

그런데 김 집사님이 교회 안에 전도를 한다는 겁니다.

담임 목사님이 병환으로 입원을 하셨는데 복음전하는 기회로 삼고 정성으로 돌 보면서 조심스럽게 복음에 관한 책을 드렸더니 그 책을 읽고 고맙다고 하시면서 지금까지 거짓말만 했다며 병상에서 일어나면 이 복음만을 증거하겠다고 하더랍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두 증인들이 작은 책을 먹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다시 예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이 분들이야 말로 부르심을 입고 작은 책을 먹고 보내심을 받아 다시 예언하는 두 증인들인 겁니다.

이런 분들은 귀하게 여기고 격려하여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이름을 밝힙니다.

이런 분들이 많이 일어나야 해요.

 

빛은 어둠에 필요한 것이에요.

빛이 한군데 모여 있으면 빛이 바래요.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욱 더 빛이 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교회에서 전도하여야 합니다.

 

신천지라는 이단들도 이걸 알고 교회마다 추수꾼을 심어서 추수한다고 난리잖아요.

그런데 우린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잠자고 있어요.

그저 내 몸 하나 편하면 된다는 식으로 놀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 것입니까?

 

전도란? 구약 교회에서 복음으로 신약 교회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불러냅니까?

새 언약으로 불러내요.

그러니 옛 언약이 증거되는 교회 안에서 새 언약으로 다시 예언하여서 진짜 교회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게 전도에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회당에 다니면서 전도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는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유대교나 이방인이나 영적인 의미에선 동일해요.

그러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핍박하면 나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하신 겁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내심을 입었는데 그 이스라엘을 온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광의적인 의미에선 온 세상이지만 예언적인 의미에선 교회를 말해요.

그래서 두 증인들에게 작은 책을 먹여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다시 예언하라고 하신 겁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증거하지요.

유대인은 율법에 의(義)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그거 아니거든!

율법지킴이 아니고 예수 믿음이거든 했어요.

이걸 다시 예언한다고 해요.

 

하나님이 바울을 율법에 의(義)를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보내서 예수의 의(義)를 증거했어요.

옛 언약 아래 있는 교회에서 새 언약을 전했어요.

율법에 의(義)를 의(義)라고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 그건 아니거든!

진짜 의(義)는 예수님 피에 있거든! 이라고 다시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에 의(義)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이리처럼 달려들면서 넌 누구냐?

왜? 우리 신앙을 틀렸다고 하느냐! 라고 죽이는 겁니다.

12 제자들이 이렇게 파송을 당하여서 다시 예언을 하다가 다 죽임 당했어요.

 

요한계시록 6장을 보면 순교자들이 하나님에게 세상을 빨리 심판해서 우리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자 하나님이 아직까지 너희들처럼 죽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너희들처럼 다시 예언하다가 죽임 당할 동무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죽임 당하여야 할 동무들인 겁니다.

누구에게 죽임 당합니까?

옛 언약 안에 있는 교회에요.

그러니 새 언약이라는 작은 책을 먹었다는 것은 곧 죽음에 넘기워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야속하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야속해요.

하나님은 우리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우리를 소모품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 사실을 알고 살아야 인생살이가 가벼워져요.

우린 세상에 악함을 고발하기 위하여 미끼로 사용되어지고 있어요.

미끼는 먹힘 당하라고 던져 주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다 죽임 당함으로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에 넘기워지는 것이에요.

그러니 복음을 받는 순간 우리는 기존 교회라는 이리 가운데로 보내심을 입게 되어 선지자들처럼 다시 예언하여야 하는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주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을 땐 달콤하고 기쁘지만 그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쓴 잔인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새 언약의 복음을 듣는 것은 달콤하고 기뻐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을 들을 땐 그 피에 복음이 꿀 송이처럼 달콤해요.

 

그러나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쓰디쓴 잔이에요.

바울은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 사도들은 만물의 찌기와 구경거리로 두었다고 했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는 것이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십자가 도(道)는 말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십자가 도(道)로 살아가는 것은 다메섹 사건이 일어난 성도에게만 가능해요.

옛 언약 하에서 빼내심을 입은 성도만이 가능해요.

자신이 예수를 죽인 자인데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서 율법을 보았기 때문에 이런 용서와 긍휼의 마음이 나왔던 것입니다.

자기들도 율법 아래선 하나님의 원수였는데 십자가의 피로 용서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이에요.

 

십자가 없이 율법을 보았을 때는 전부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이는 법으로 작용을 하였는데!

이젠 십자가 안에서 율법을 보니 정죄하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용서와 긍휼이라는 은혜가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서 율법을 보았을 때는 율법 안에서 마땅히 정죄 받아 죽어야 하는 죄인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고 나서 율법을 보니 그 속엔 전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담겨져 있더라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여 저들이 알지 못하여서 그러하니 저들을 용서 하옵소서! 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바울이 다메섹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에요.

다메섹 이전엔 법대로 죽여라! 죽여라 했는데!

이젠 주여 저들이 몰라서 그러니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이전과 이후는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되었어요.

다메섹 이전엔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이는 일을 했는데 다메섹 이후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리는 일을 하였어요.

 

바울은 다메섹 이후에 성경을 보는 눈만 바뀐 것이 아니라 마음도 바뀌었어요.

예전엔 자기 안에 율법이 자리 잡고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하였지만 이젠 은혜가 자리 잡고 있어서 율법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바뀐 은혜의 마음으로 로마서를 쓰고 있는 겁니다.

자신도 옛 언약 속에서 새 언약 안으로 빼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영원한 복음인 새 언약이라는 작은 책을 먹었어요.

그러니 두 증인으로서 당당하게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빼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가 이렇게 용서 받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데 감출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용서 받음을 자랑하는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이 예수를 핍박하던 자도 용서를 받았는데 그 누구인들 용서 받을 수 없겠느냐 에요.

예수를 핍박하던 자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예수 때문에 핍박을 당한다 하여도 억울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삶이에요.

예수의 피를 증거하기도 하여야 하지만 그 피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이에요.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신 아픔을 그대로 당하며 살아가는 삶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복음에 실체인 그 아들에 관하여서는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들이 미리 증거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증거(證據)란? 삶으로 증명하였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삶으로 증거하였어요.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을 미리 받았어요.

누가 그렇게 하였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영(靈)이 하셨어요.

 

베드로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벧전 1:10-12=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보세요.

베드로는 성령이 구약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케 하였다고 했어요.

성령이 구약의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미리 증거하였다고 하잖아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靈)에 이끌려서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살았어요.

 

구약에 그리스도 영(靈)이나 신약에 성령은 동일해요.

그럼 구약시대 선지자들에게 임한 성령이 지금은 성도들에게 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성령이 성도들에게 이미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과 영광 속으로 밀어 넣어요.

그러므로 어느 시대이고 성령을 받은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운명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운명적인 삶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삶이에요.

종과 주인은 한 몸이에요.

같은 운명으로 취급을 받아요.

 

요한계시록 12장을 보면 여자가 낳은 아들과 뱀이 싸우는데 아들이 뱀을 이겼어요.

그러자 뱀이 하늘에 있지 못하고 땅으로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이에 뱀이 화가 나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여자가 낳은 아들에 후손들을 핍박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은 뱀의 후손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의 종들이 당하는 고난인 겁니다.

 

예수님은 그냥 우발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었어요.

선지자들이 삶으로 미리 증거하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은 구약에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선지자들이 살았던 그 삶에 연장선상에서 사셨어요.

이러한 증거가 예수님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이제는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를 아시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하였을 터이나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 너희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거든 그건 모두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라고 하셨어요.

 

이걸 역설적으로 말하면 예수 믿다가 고난 받지 않으면 가짜란 말입니다.

마귀는 누가 예수쟁이인줄 알아요.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봅니다.

마귀는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핍박하지 않아요.

 

이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있어요.

이 둘은 서로 상극이에요.

 

이러한 일들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있어 왔던 일이에요.

구약 시대도 이미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과 마귀에게 속한 사람이 있었어요.

이 둘을 항상 충돌 했어요.

여자의 후손들은 뱀의 후손들에게 핍박을 당하였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에게 속한 선지자들이 이미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면서 장차 오실 그 아들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약속(約束)이란? 실체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실체는 나중에 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약속이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이라고 하면 반드시 미래에 관한 일을 담고 있어요.

장차 주어질 것을 담고 있어요.

 

제가 만약에 아이에게 내일 돈 줄게 그러면 그 돈은 지금 그 아이 손에는 없어요.

내일이라야 돈이 그 아이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약속인 겁니다.

지금 돈을 준다고 하면 그건 약속이 아니에요.

 

그럼 현재 주어진 약속 속에는 장차 미래에 주어질 것들이 예표적으로 담겨져서 삶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들이 쭈~욱 나옵니다.

 

히 11:39-40=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이들은 모두가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증거(證據)와, 약속(約束)이 나오지요.

증거는 현재를 말하고 약속은 장차를 말하는 것입니다.

증거란? 장차 오실 약속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고난을 현재 체휼하는 것이고,

약속이란?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이에요.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가 장차 약속으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증거는 약속 어음과 같아요.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약속 어음이 약속을 드러내는 증거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걸 약속을 미리 선취적으로 살아간 삶이라고 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재 속에서 미래의 것을 선취적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 아들에 관한 것들을 삶으로 미리 살아 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장차 오실 그 아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선지자들은 그 아들의 삶에 동참케 한 것입니다.

 

이걸 히브리서 11장에선 믿음으로 누구는 이렇게 살았고 누구는 저렇게 살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각 사람들을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삶을 맛보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음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녔는데 이걸 신약에서 보니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당하실 삶을 미리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둘러싼 하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누구를 바라보았다고 합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다고 하잖아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한 복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靈)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실 고난을 미리 맛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성령이 감당케 하신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라고 하여 믿음이 이들을 십자가의 고난 속으로 인도하였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아들의 죽음에 관한 약속이란 말입니다.

 

애초부터 아들이 죽어야 할 것을 약속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던져주신 약속이란? 그 아들의 죽음이에요.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항상 의로운 제물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통하여서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그 아들의 죽음을 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아들의 피가 어떻게 흘리는지 에덴동산에서 죄인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희생당한 양을 통하여서 씨눈처럼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대신 희생당한 제물의 희생이 율법 속에서는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 죄사함이 이루어지는 제사 제도에 담아 두었고, 역사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가 죽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이 아벨을 시작하여서 노아를 거치고 아브라함을 거치고 요셉을 거치고 다윗을 거치고 하는 식으로 나타나서 예수그리스도에게로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란? 예수님의 족보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으로 시작을 하여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지요.

이 족보를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희생당한 흔적들을 지니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담고 있는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은 언약의 민족이에요.

언약의 민족이란?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생성하는 과정 속에도 예수그리스도의 흔적이 담겨져 있어요.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요.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에겐 어린 양의 피 뿌림이 주어져요.

이걸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애굽에 바로에게 잡혀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아래서 태어나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 아래 가두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 권세 아래 가두어져 있어서 그 누구도 독자적인 힘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누군가가 빼내 주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어요.

 

여기에 등장한 사람이 모세에요.

모세는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이에요.

모세는 나일 강 물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살아났어요.

이는 죽음에서 살아난 것과 같아요.

그러니 모세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에서 살아난 자가 하나님 백성을 빼내는 겁니다.

이는 곧 장차 자기백성을 구원할 메시야도 죽음에서 살아나서 자기 백성을 빼낸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출애굽 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빼내주는 것의 모형인 것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예표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빼 오게 합니다.

이 때 그냥 빼 오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의 피를 뿌려서 빼내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뿌려서 죽음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러니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그냥 죽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자기들 대신 어린 양의 죽음을 근거로 나왔어요.

그들은 어린 양의 피가 감싸고 있는 겁니다.

 

이게 진정한 이스라엘이에요.

어린 양의 피로 빼내심을 입은 이스라엘 속엔 아브라함의 후손도 있지만 이방인도 있어요.

반면에 빼내심을 입지 못한 자들 중에도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있어요.

그러니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어린 양의 피 뿌림을 입은 자만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혈통적으로는 애굽인이라 할지라도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출애굽한 자는 아브라함 언약의 후손으로 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장차 이방인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이방인도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하나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 이스라엘을 통하여서 장차 생겨날 영적 이스라엘을 보여주고 계셨던 겁니다.

 

이게 신약에서 이방인도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서 언약의 후손이 되는 것으로 실상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없어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었느냐 아니냐만 있어요.

그 누구라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만 입으면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등재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라는 것은 혈통적인 의미가 없다는 뜻이고!

할례자나 무할례자 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는 뜻이고!

종이나 자유자 라는 것은 인간의 신분과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는 인간의 조건은 따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조건이 따져지지 않으니 구원 속엔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인 거에요.

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만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게 약속의 후손들을 감싸고 있는 구조에요.

출애굽한 민족이 이 구조 안에 있는 겁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 생겨난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니 이스라엘 속에서 어린 양의 피로 새로운 이스라엘이 생겨난 겁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가 감싸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피의 민족이에요.

그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생겨난 민족이에요.

이제부터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에 의미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구분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기준이 마련 된 것입니다.

 

이걸 언약적으로 풀어 봅시다.

애굽에선 혈통적으로 아브라함 후손으로 구분했어요.

이건 옛 언약을 상징해요.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구분해요.

이건 새 언약을 상징해요.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기 전까지는 아브라함이라는 혈통 안에 있는 자와 아닌 자로 하나님 백성이냐 아니냐 로 구분을 했어요.

이걸 육적 이스라엘이고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혈통적인 것으로 이스라엘이냐 아니냐 로 구분 했어요.

 

그런데 어린 양의 피 뿌림으로 출애굽을 하면서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혈통적 의미는 사라졌어요.

오직 어린 양의 피가 뿌려졌느냐 아니냐 로 구분이 되어요.

그러니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한 백성들은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들과 같은 겁니다.

무슨 말이지 잘 이해하세요.

 

그러니 구약 속에도 이미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씨눈처럼 심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 뿌림 안에 있으면 구약에 살았지만 이미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로서 신약의 사람인 겁니다.

반면에 어린 양의 실체인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밖에 있는 사람은 신약 시대에 살고 있어도 그 사람은 옛 언약에 속한 구약사람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복음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약속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미리 약속 된 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즉흥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전부터 약속이 된 분이란 겁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아들의 피를 세상에 확 뿌려 놓으신 겁니다.

언약의 후손들을 그 피를 뒤집어쓰고 세상에 던져졌어요.

예수님은 그 피를 뒤집어쓴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피를 뒤집어쓰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피를 뿌릴 아들을 보내준다고 약속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아들이 약속대로 오셨어요.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서 십자가에 죽으셨어요.

약속대로 자기 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셨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구원해 내실 것입니다.

 

그 피 바름을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들어간 사람은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가 없어요.

그 안에는 우리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을뿐더러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도 못해요.

 

그래서 바울은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했어요.

이게 믿어져야 해요.

그래야 그 어떤 환경이나 조건 속에서도 안심하고 살수가 있어요.

이게 안 믿어지면 맨 날 자기 행위로 인하여 천당 갔다! 지옥 갔다! 그래요.

 

그러면 신앙생활에 편안함과 관대함이 묻어 나오지 않고 짜증스러운 겁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신앙생활은 늘 곤고해요.

사는 것도 피곤해요.

 

우리가 그 아들의 피로 구속을 받은 것은 창세전에 이미 약속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기도 전에 이미 약속 했어요.

우리가 나기도 전에 약속을 하였다는 것은 우리 행위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한 약속이기 때문에 우리의 조건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죽었고!

자기백성들도 약속대로 그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었어요.

이제 거룩한 예수님의 피가 자기백성들을 감싸고 있어요.

그러니 그 피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행위와 상관없이 구원은 확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피가 인간의 행실이라는 조건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약속대로 그 피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시려고 성령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이기게 하는 것은 우리의 행실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라는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에 있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약속이 되신 우리의 구주이심을 믿습니다.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직 자기 피로서 자기백성을 구원 하셨사오니 이 피 뿌림이 우리에게 능력으로만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