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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 2강.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 (롬 1:1)

by coroa 2024. 2. 14.

 

2강.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 (롬 1:1)

롬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의 핵심 주제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합니다.

율법 외에 다른 의(義)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입니다.

전반부인 1장에서 11장까지 믿음으로 난 의(義)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고,

후반부인 12장에서부터 16장까지는 믿음으로 난 의(義)가 어떤 식으로 삶을 통하여서 나타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의(義)를 만드는 자가 아니라 의롭다 여기심을 입고 그(義)로 사는 자입니다.

죄의 나라에서 어떻게 마귀의 참소로부터 해방되어 사는지 로마서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능력(能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능력이란?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 같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모습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복음이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것은 세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니 뭐 저런 놈들이 다 있어!

야! 우리는 감당이 안 된다고 두 손을 들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어떻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이 나오느냐 에요.

어떻게 죽음을 불사하고 사자 굴에 들어가고 풀무불 속에 들어가느냐 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 세상 관점으로는 이해불가 라는 겁니다.

 

복음은 역설적입니다.

역설적이라 함은 인간의 본성과 상식에 반(反)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불합리하게 보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이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합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은 왜? 이런 식으로 일을 하실까?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기 생각과 맞지 않고 자기에게 피해가 오면 적개심이 듭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道)가 멸망하는 자들에겐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道)가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미련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로부터 죄사함이 나오고 영생이 나오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느냐 입니다.

어떻게 율법대로 산 것이 의가 되지 않고 예수를 믿는 것이 의가 되느냐 입니다.

 

복음이 미련하게 들리는 것은 인간들이 복음에 대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관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들 기준에 맞추어 보니 하나님이 주신 것이 틀렸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아니란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기준은 인간의 가지고 있는 기준을 고발하면서 주어지게 됩니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이 충돌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지가 사건입니다.

 

그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어떤 것입니까?

율법으로 만든 의(義)입니다.

하나님은 율법 외에 의(義)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럼 율법 외에 다른 의(義)는 율법에 의(義)를 고발하게 되겠지요.

알다시피 율법에 의(義)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만든 의(義)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의입니다.

 

그럼 율법 외에 의(義)는 어떤 것인가요?

이는 예수님으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의(義)입니다.

인간이 만든 의(義)가 아니고 예수님이 만든 의(義)에요.

예수님이 만든 의(義)가 인간이 보기엔 우습게 보여요.

그러니 인간들이 외면하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인간들의 눈에 우습게 일을 하실까요?

이는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세상에서 총명하다고 하는 자들의 총명을 폐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감추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죄인은 감지(感知) 할 수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하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을 비켜 가면서 일을 하실까요?

복음이 왜? 역설적으로 주어질까요?

이는 복음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늘나라에서 온 겁니다.

 

하늘나라와 이 세상은 원리가 달라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원리에요.

아주 쉬운 말로 하늘나라는 주는 원리이고 이 땅은 받는 원리에요.

서로 역설적이에요.

 

땅은 하늘에서 주는 것을 안 받으면 죽어요.

독자적으로 살려고 하면 죽어요.

죄가 뭐냐 하면 하늘에서 주는 것을 거부하는 겁니다.

거부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살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독자적으로 생명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선 죽이는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 속에 생명이 있다고 해요.

그러니 땅에 생명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내가 죽는 것은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아니 목숨을 버리면서 어떻게 목숨을 다시 얻는다고 합니까?

땅은 육에 몸을 심고 영에 몸으로 살아나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 육에 몸을 안 죽이려고 하는 겁니다.

오래 사는게 복이라고 하지 주 안에서 일찍 죽는게 복이라고 하지 않아요.

 

하나님은 이 땅에서 하늘나라 방식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이사야는 이를 생소한 방언이라고 했어요.

 

방언(方言)이란? 특정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토속 언어란 뜻입니다.

그 지역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복음을 하늘나라 방언이라고 한다면 복음은 하늘나라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란 말입니다.

자연히 하늘나라 사람만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이야기를 제자들에게만 알려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로 난 사람만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늘나라 사람만이 받을 수가 있어요.

이걸 비밀(秘密)이라고 해요.

 

하늘나라는 이 땅에선 낯선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 하는 일이 세상에선 기이(奇異)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천국의 모습을 겨자씨나 가루 서말 속에 감추어진 누룩으로 비유했습니다.

가루 서말 속에 감추인 누룩은 은닉(隱匿)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누룩처럼 감추어져 있습니다.

누룩처럼 활동하고 있어요.

 

그럼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일은 은닉성 또는 은폐성을 띠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지혜로는 포착 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감지되지 않아요.

 

사도행전 28장을 보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여도 사람들이 알아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이를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였어요.

이 백성을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이는 철저히 자기 백성들만 알아먹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 됩니다.

예수를 알아보는 사람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예수를 중심으로 둘로 쫙 갈라집니다.

너희와 저희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좌우편에 두 강도가 이를 상징적으로 말해 줍니다.

한 쪽 강도는 예수를 알아보았고 다른 쪽 강도는 예수를 몰라보았어요.

 

창세 이래로 이 세상에서의 천국운동은 이처럼 비밀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세상 지혜와 역설적으로 전개되어져 왔습니다.

세상 지혜로는 해석이 안 되도록 은폐되어서 활동하였어요.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도록 전개되어 왔어요.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이상한 꿈입니다.

아주 건강하고 살찐 암소 일곱 마리가 갈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아주 평화로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아주 흉악하고 비리비리한 암소 일곱 마리가 하수에서 또 올라오는 겁니다.

먹지 못해서 피골(皮骨)이 상접합니다.

그러더니 비리비리한 놈들이 살찐 소를 잡아먹습니다.

 

바로가 또 꿈을 꿉니다.

이번에 아주 잘 여물고 알이 꽉 찬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후에 또 빈껍데기처럼 바짝 마른 일곱 이삭이 나옵니다.

그런데 늦게 나온 마른 일곱 이삭이 먼저 나온 일곱 이삭을 삼켜 버립니다.

 

두 꿈은 같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세상 적으로는 아주 역설적입니다.

 

이 세상은 힘의 논리로 다스려집니다.

힘의 논리는 양육강식의 법칙이 통합니다.

인간의 상식은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잡아먹습니다.

하지만 바로가 꾼 꿈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잡아먹었습니다.

 

그럼 바로가 꾼 꿈은 이 세상의 꿈이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의 꿈이라고 한다면 힘 있는 놈이 힘 없는 놈을 잡아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가 꾼 꿈은 세상 원리와 반대로 힘 없는 자가 힘 있는 자를 잡아먹었습니다.

 

힘 있는 놈을 살아 있는 놈이라고 하고, 힘 없는 놈을 죽은 놈이라고 합시다!

힘 있음을 생명이라고 하고 힘 없음을 죽음이라고 합시다!

힘 있음을 진리라고 하고 힘 없음을 비 진리라고 합시다!

힘 있음을 하나님이라고 하고 힘 없음을 인간이라고 합시다!

힘 있음을 진짜라고 하고 힘 없음을 가짜라고 합시다!

그럼 진짜가 가짜에게 잡아먹힌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에게 심판 받고 죽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맞습니다.

바로가 꾼 꿈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꿈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이 세상에 주어질 때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잡아먹힘을 당하는 것처럼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죄인이 살아나는 것을 씨눈처럼 담아 놓은 것입니다.

 

요셉은 이 꿈을 해석하고 총리가 되었어요.

총리란? 다스리는 자입니다.

다스린다는 것은 이긴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12 제자들에게 장차 12 고을들을 다스리는 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이는 천국은 이긴 자가 유업으로 받는 것이란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제자들이 한 고을씩 맡아서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고 천국에서 이긴 자로서 영광스럽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12제자는 모든 성도의 표상입니다.

그럼 12제자 속엔 모든 성도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이긴 자라고 합니다.

그럼 천국에선 모든 성도가 총리와 같습니다.

 

물론 요셉이 감옥에서 꿈을 해몽하고 애굽에 총리가 된 것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여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으로서 다스리고 계심을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성도는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성도에게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역설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성도는 이긴 자로서 하늘나라 백성입니다.

역설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동참 하는 자가 이긴 자이고 성도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야 이해가 됩니다.

오늘은 종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가능하면 간략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스스로를 예수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종(從)이라고 합니다.

이건 세상적 가치관으로서는 충격적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가치관과는 반(反)하기 때문입니다.

종은 비천한 자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볼 땐 실패한 자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종이 되고자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종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인이 되고자 하지 종이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지 꼬리가 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으로 남고 싶어하지 못난 사람으로 남고 싶어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린 성경을 보아도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는 말을 좋아해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 하리라” 는 말씀을 좋아해요.

이런 말씀이 부적처럼 교인들 가정에 잘 모셔져 있어요.

그만큼 우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과 반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어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죽임 당했는데!

우린 그 예수님을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해요.

그러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줄 몰라요.

입술로는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정작 삶은 십자가와 원수 되어 살고 있어요.

 

그만큼 우리 신앙은 허상을 쫓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관념으로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모두가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앎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복음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아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고 있어요.

이건 지적 유희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즐기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의 백성들처럼 선지자에게 나아가 오늘은 무슨 새로운 말씀이 나오나 들으러 가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겁니다.

새로운 것을 수집해서 지식으로 담아 두고 아는 척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성경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신앙생활인줄 알아요.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 구절 외우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으로 사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십자가 도(道)를 수학공식 외우듯이 외우는 것이 아니고 그 십자가 도(道)에 자기 인생을 함몰당해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믿음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차압당하여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끌려 다녔어요.

이는 믿음이 살아서 성도를 이리저리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이런 증거가 없으면 가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은 반드시 성도를 십자가 길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영문 밖으로 끌고 가서 주를 만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십자가 영이에요.

그러므로 반드시 성령은 성도를 십자가로 인도해요.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밀어 넣는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반(反) 복음 적인 삶을 살고 있어요.

이는 모두가 거짓된 복음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 바울은 경고했어요.

 

골 2: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에 속지 말라고 했어요.

철학이란? 인간을 학문화한 이론이에요.

한마디로 인간이 살아가는 근본 원리를 학문화 한 것이 철학이에요.

인간론을 해부한 학문이에요.

 

세상에선 철학을 통하여서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있어요.

철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맞아요.

그래서 철학을 사람의 유전과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철학으로 복음을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단 말입니다.

바울이 철학을 경계시키는 것은 철학이 복음으로 둔갑되어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철학으로 성도들이 노략질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경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철학으로 복음을 위장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 속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다 속아 넘어 가는 겁니다.

철학 사상을 복음처럼 교묘하게 둔갑을 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 도를 지식화 하여서 신앙생활을 이원화 시키고 있단 말입니다.

 

복음은 은사에요.

은사는 배워서 터득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거짓 선지자들은 인간이 깨달은 학문을 복음인냥 증거한단 말입니다.

역사는 늘 반복되어요.

그러므로 바울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그 때도 철학으로 복음을 가렸다면 지금도 철학으로 복음을 가려요.

 

철학자들은 인간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학문화 시켜놓았어요.

철학으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는 알아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사변적으로 또는 과학적으로 분석해 학문화 시켜 놓은 것이 철학이에요.

 

오고 오는 세대 속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있었어요.

모두가 인간을 연구하고 연구했어요.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고 행동을 연구했어요.

심리가 이럴 땐 어떤 행동을 하고 저럴 땐 어떤 행동을 하는가 연구했어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연구했어요.

 

바울 당시에 철학자들이 인간을 분석한 결과 인간의 육신은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므로 악한 것이고 우주의 원리를 깨닫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정신은 선한 것이라고 생각 했어요.

그래서 깨달음이 곧 구원이라고 했어요.

여기에 나타난 것이 이원론 사상이에요.

 

이원론 사상이란? 몸과 정신을 구분하는 겁니다.

인간의 몸은 속된 것이고 정신은 성스러운 것이라는 겁니다.

이게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서 머리는 진리를 추구하면서 몸은 쾌락을 추구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초대교회 안에 신앙으로 자리 잡고 횡행했어요.

교회마다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개판으로 사는 인간들이 일어난 겁니다.

사도들이 이들과 싸웠어요.

그래서 바울은 교회마다 책망을 하고 경고를 하는 겁니다.

 

사도들의 서신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하면서 그 십자가 도를 성도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는 것은 다 이 때문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서 복음을 오용하여 쾌락을 추구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윤리 도덕을 가르치고자 함이 아니에요.

복음은 육신의 소욕을 죽이게 하는 것이지 부추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복음이 윤리성을 뛸 수밖에 없는 것이 죄가 인간의 육신을 볼모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철학을 헛된 속임수이니 속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마다 이런 사상이 팽배해 있었어요.

이런 사상이 십자가 도(道)는 머리로만 알고 있고 삶은 여전히 이방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욕을 당한다고 했어요.

 

바울의 서신 서를 보면 이런 자들을 준엄하게 책망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은 십자가 도를 훼방하는 자라고 했어요.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들은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했어요.

어떻게 그런 자를 보고도 통한히 여기지 않느냐고 책망했어요.

 

십자가 신앙은 머리로 깨우치고 도(道)를 닦는 것이 아니에요.

불교는 깨우치는 종교이지만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사람들을 쭉 언급하고선 12장에선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보고 있으니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어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선진들이 가만히 앉아서 도를 깨우친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길로 몰아침을 당하고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 피 흘려가면서 살았어요.

 

이들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道)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위하여 싸울 것이 없어요.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행위와 상관없어요.

하지만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싸울 것이 있어요.

그게 서신 서들을 통하여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인간의 몸을 타고 역사를 해요.

 

갈 5:13절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죄는 항상 육체를 즐겁게 해 주겠다고 다가와요.

자기 몸을 섬기게 만들어요.

자기 몸을 위한 복음으로 만들어 버려요.

어느 시대이고 마귀에게 미혹 당한 자들은 복음을 빙자하여 육체를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 자신도 자기 몸을 쳐서 복음에 합당한 모습으로 복종시키며 살았어요.

그러면서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자유함이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했어요.

너희들이 안다고 하는 그 자유가 연약한 형제를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했어요.

 

고린도전서 8장을 봅시다.

 

고전 8:9-13=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바울은 복음으로 사는 자유자였어요.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가 있었어요.

우상의 제물도 먹었어요.

그러나 자신의 자유함이 다른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합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이 시대 모든 삶이라고 생각해서 적용해 보세요.

세상 사람들의 삶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럼 바울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술도 먹을 수도 있고!

춤을 출수도 있고!

도박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행여 자신의 자유함이 복음을 가리는 것이 될까봐서입니다.

 

자신이야 우상의 제물을 먹을 자유함이 있지만 혹시라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자신의 자유함을보고 넘어질까봐 조심한 겁니다.

이는 자신의 먹고 마시는 자유보다 형제가 실족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입니다.

내 자유함이 상대를 넘어지게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을 받은 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에 자세에요.

 

세상 적인 죄를 지었다고 구원에서 짤려 나가지 않아요.

바울이 짤려 나갈까봐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 몸에서 구원에 합당치 못한 모습들이 드러날까봐서 쳐서 복종한 겁니다.

복음이 훼손당할까봐 염려하는 겁니다.

 

왜? 몸을 쳐서 복종 할까요?

이는 마귀가 육신의 소욕으로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려고 싸웠어요.

 

이건 의(義)를 만드는 싸움이 아니에요.

의(義)로 사는 싸움이에요.

그래서 성도에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이지만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자유함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내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는 겁니다.

 

고전 10:29-33절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행여 나의 자유함이 사람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것이 될 수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겁니다.

이건 의(義)냐 아니냐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싸움이에요.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므로 그 어떤 것으로도 정죄당하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 안에서 살아야 할 삶이 있어요.

 

그 삶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남의 유익을 구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양심은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양심엔 거리낌이 없지만 타인이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나처럼 자유치 못할 땐 내 자유함이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므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사는 것을 보고 복음 아는 사람이 왜? 그러느냐고 할 땐 복음 안다는 그것으로 복음을 모르는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므로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내 자유가 남에게 시험을 주지 않을까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 안에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복음을 가렸어요.

복음으로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삶을 살지 않고 자기 육신의 쾌락을 위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안다는 것은 지식이에요.

하지만 신앙생활은 삶이에요.

신앙생활은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운동이에요.

야고보서에선 믿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일컬어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어요.

 

그래서 바울은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고 한 겁니다.

키 크듯이 자라가라는 말이 아니고 너희가 어디서 건짐을 받았는지 알라는 겁니다.

왜? 구원 시켜 주었는지 알라는 겁니다.

너희가 전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보라는 겁니다.

내 마음대로 살라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구원했음을 알라는 겁니다.

너희는 너희 마음대로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것을 오늘 본문에선 바울은 종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삶이 없다는 말입니다.

난 나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종이란? 노예입니다.

노예란? 사람이 아니고 재산이었어요.

짐승처럼 일하기 위해서 사고 팔았어요.

당시의 노예는 시장에서 사고 파는 물건이었어요.

 

그럼에도 바울은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자신은 팔려온 자라고 하고 있어요.

아주 당당하게 말입니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말이에요.

이건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종은 주인에게 복속되어 있어요.

자기 주권이란 없습니다.

종의 생사여탈권은 주인에게 달려 있어요.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죽어야 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를 주인이 결정을 해요.

 

그런데 이게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난 예수의 종이다! 라고 말하는 겁니까?

난 내 마음대로 산다가 아니고 난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난 내 꼴나는대로 살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우리하고 다릅니까?

 

우린 말로는 예수님의 종이라고 하면서 주인으로 살고 있잖아요.

자기 편한 대로 살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 유익을 위하여 살고 있잖아요.

낸 몸뚱아리 편하면 그만이라고 하잖아요.

몸은 세상 쾌락이 푹 빠져 있으면서 입으로만 십자가를 주술처럼 외우고 있잖아요.

 

그러니 바울이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하는 말은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말인 겁니다.

이런 말씀 앞에 우린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야~ 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지 않고 내 육신의 종으로 살았구나!

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낸 몸뚱아리 편하게 색욕거리로 삼고 있구나 를 깨달아야 합니다.

 

알다시피 종이란? 육신이 볼모가 된 자에요.

주인은 종의 육신을 필요로 해요.

주인은 종을 살 때 일을 시키기 위해서 육신이 건장한 놈으로 사와요.

머리보고 사오지 않고 몸보고 사와요.

종은 머리 똑똑 한 놈은 필요 없어요.

몸이 건강해야 해요.

주인에겐 주인이 시키는대로 순종 할 놈이 필요한 겁니다.

 

종에게 자기 머리가 있으면 안 되어요.

자기 생각이 있으면 주인이 시키는 일에 반발해요.

주인의 명을 따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주인이 시키는 일은 항상 종을 힘들게 하고 귀찮게 하는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의 삶을 예수님께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7장입니다.

 

눅 17:7-10=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어떤 집에 종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집에 돌아 왔어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주인이 밥을 먹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종은 얼른 부엌으로 가서 밥을 지어 주인에게 드립니다.

 

주인이 밥을 다 먹으면 또 따뜻한 물을 길어서 주인의 발을 씻어 드려야 해요.

그렇다고 주인이 이런 종에게 사례를 하느냐 하면 안 해요.

이건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종을 일컬어 무익한 종이라고 합니다.

무익하다는 것은 자기를 위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인의 명을 자기 목숨보다 더 중시하는 자란 뜻입니다.

이게 종의 운명이에요.

주인은 종의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인의 필요에 의해서 사용하세요.

 

그런데 지금 바울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아주 자랑스럽게 말이에요.

어째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을 자랑 할까요?

 

지금부터 중요한 말이지 귀담아 들으세요.

 

인간은 종으로 출생을 합니다.

인간은 원래 없던 자였어요.

이 세상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이걸 창세전이라고 합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이 계셨어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셨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에 나라를 만들기로 작정을 했어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만물을 만든 겁니다.

만물은 아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어요.

그러므로 아들은 만물의 주인이고 만물은 아들의 종인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창조 될 때부터 아들을 위한 종으로 창조가 된 것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아들을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 43:7절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라고 하지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하지요.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다고 하지요.

 

인간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형상이란? 이미지입니다.

그럼 인간에겐 하나님의 이미지가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 속에 하나님의 아름을 담아 놓았어요.

이름을 담아 놓았다는 것은 이름을 주신 자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넌 너의 것이 아니고 너에게 이름을 주신 분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인간의 이름으로 창조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창조를 하였다는 것은 인간을 만들 때부터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속엔 인간의 영광이 담겨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영광(榮光)이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 속엔 하나님의 손 때가 묻어 있는 겁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이에요.

손 때가 묻어져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은 인간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기쁜 겁니다.

애초부터 인간 속엔 인간의 기쁨이 없어요.

그런데 죄가 이 창조 원리를 바꿔 놓은 겁니다.

 

사 42:8절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죄가 인간 속에 담아 놓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 간 겁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 자가 자기를 위하여 살고 있는 겁니다.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죄가 인간의 기쁨으로 살도록 바꿔버린 겁니다.

그러니 죄인은 항상 자기 기쁨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몸이 우상인 겁니다.

죄가 자기 몸을 위하여 살도록 역사를 하기 때문에 자기 몸뚱이가 우상인 겁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 팔린 자들은 항상 몸으로 죄를 토해내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다른 신(神)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한 인간을 말해요.

우상이란? 자기를 위한 신(神)을 말해요.

인간이 섬기는 신(神)이란? 영에 속한 천사들이에요.

하나님 앞에선 천사도 신(神)이 아니고 피조물이에요.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천사들을 신(神)으로 섬기기 시작한 겁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영에 속하였고 인간은 육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육에서 보면 영은 신(神)들의 세계에요.

그러니 인간들이 천사를 보고 신(神)처럼 섬기는 겁니다.

 

사도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천국을 보았어요.

 

계 22:8-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9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사도요한이 천국에 가보니 천사들이 하나님께 수종 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엎드려서 큰 절을 합니다.

천사님 고맙습니다! 라고,,,,

그러자 천사가 깜짝 놀라면서 아니~ 사도님! 왜? 그러세요!

이러면 아니 되옵니다! 라고 얼른 일으켜 세웁니다.

자신은 경배 받을 자가 아니라 종이라고 합니다.

 

마귀도 천사에요.

그러니 마귀도 섬김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 세계에선 천사가 신(神)으로 대접받고 있어요.

육 입장에선 영에 속한 것은 천사들이 신(神)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을 도와주겠다고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은 자기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니 마귀를 신(神)처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영) 안에 들어오면 천사가 수종 드는 종이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천사를 섬길 이유가 없는 겁니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 안에 들어오고 보니 마귀도 피조물인 걸 알았어요.

그래서 세상엔 신(神)이 없다고 한 겁니다.

그러니 우상에게 바친 제물도 거리낌 없이 먹었던 겁니다.

 

바울에겐 하나님 이외는 신(神)이 없었어요.

그러니 우상의 신전에 올려진 절간의 음식도 마음껏 먹었던 겁니다.

교인들이 절간을 기피하는 것은 그만큼 우상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겐 우상이란 없어요.

우상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만 우상인 겁니다.

 

전 개인적으로 절간에 가서 음식을 먹어요.

하지만 누가 절간의 음식을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면 안 먹어요.

그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람은 아직 절간의 음식을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에겐 절간은 여전히 우상의 신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제가 절간에서 음식을 먹으면 시험에 들어요.

그래서 안 먹는 겁니다.

 

바울이 그랬어요.

세상엔 신이 없다!

예수 안에선 신이란 없다!

그러니 묻지 말고 먹어라!

단 그 음식이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먹지 말라고 합니다.

 

성도에겐 신에게 바쳐진 우상의 제물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것인 예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감사하고 먹으면 되어요.

 

이건 각자의 믿음에 따라서 달라요.

우상을 인정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에 따라서 달라요.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연약하여 우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앞에선 신(神,우상)은 없어요.

오직 하나님만 신(神)이에요.

원래 신(우상)이란 없었는데 인간이 범죄하고 만든 겁니다.

죄인이 자기를 위해서 만든 겁니다.

 

죄가 가짜 신(우상)을 만들어 버린 겁니다.

죄는 하나님과 떨어져 독자적으로 살게 만들었어요.

그러니 죄인에겐 우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유익을 위하여 찾으면 모든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예수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만약에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자기 육신을 위해서 살면 그게 바로 우상 숭배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아요.

인간의 교활함을 아세요.

복음 핑계 대고 자기 육신의 소욕을 쫓고 있음을 다 알아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이런 악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우상)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인간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찬송을 인간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죄가 자기 영광을 구하게 하였으니 그 죄를 없애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성도의 죄를 도말해 주시는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사 43:25절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4:22절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보세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우리 죄를 도말시켜 주신다고 하지요.

인간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려고 죄를 없애 주신다고 하는 겁니다.

성도가 예뻐서가 아니라 죄를 그냥 두면 자꾸만 하나님 영광을 가로채고 우상 숭배를 하기 때문에 죄를 없애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도말해서 우상에게 빼앗겼던 찬송을 다시 찾아오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성도의 죄를 도말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라고 창조를 하였는데 죄가 인간을 위하여 살아가게 하였으니 인간 속에 있는 죄를 도말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죄가 자기를 위하여 살도록 종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이제 그 죄를 빼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본래의 자리로 돌이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정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주인처럼 사는 것을 못 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이 꼴값 떠는 것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의미심장하지요.

 

아까 인간은 애초부터 종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했지요.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으니 예수님의 종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죄가 예수님의 종으로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게 만든 겁니다.

하나님은 이 꼴을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려고 죄를 없애준 겁니다.

 

저에게 적용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야! 정낙원이 너 왜? 네 마음대로 살어! 그럽니다.

그러자 제가 죄가 내 마음대로 살게 하는데요! 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그래! 그럼 내가 죄를 없애주지! 라고 하면서 죄를 도말시켜 주었어요.

그리곤 너 앞으로 너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 살어! 라고 합니다.

 

예전에 복음을 몰랐을 땐 나를 위해 살았어요.

내 영광을 위하여 살았어요.

무슨 일을 해도 항상 내 영광을 챙겼어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 내 영광을 위한 것이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전엔 죄로 알지 못했는데 이젠 알아요.

이젠 내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이게 죄라는 것을 안단 말입니다.

내 육신은 늘 내 영광을 추구해요.

그러니 늘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앞서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 뿌림 안으로 도피하여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 살라고 속삭여요.

자기를 위하여 살면 자기 종인 겁니다.

마귀가 예수를 위하여 살지 말고 자기를 위해 살라고 하니 모두가 마귀의 종인 겁니다.

인간은 일평생 자기 종으로 살아요.

자기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자기 종인 겁니다.

자기를 벗어나지를 못해요.

 

죄의 사람이 죽지 않으면 자아라는 주인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자아는 항상 자기 몸을 끌어 안아요.

자기 몸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먹고 살아요.

그러니 육신은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벗어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성령이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겁니다.

넌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왜? 또 세상에서 살고자 하느냐고 책망해요.

이 책망을 들을 땐 화들짝 놀라서 발을 뺍니다.

하지만 또 세상을 바라보아요.

이 싸움은 단회성이 아니고 늘 반복하여 일어나요.

 

사도바울도 이러한 곤고함이 몰아 칠 때마다 주를 바라보았어요.

로마서를 쓴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고백하고 있어요.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해 주실까 탄식했어요.

그때 성령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게 하셨어요.

그 피를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원리적으로는 성도는 자기를 위한 인생이 없어요.

자기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겁니다.

예수님의 인생으로 사는 겁니다.

 

이게 믿어지면 인생이 가벼워져요.

성령이 날마다 그렇게 간섭 하세요.

우리가 깨닫는 것이 둔해서 그렇지요.

너무 둔하면 어떤 사건을 일으켜서 깨닫게 해요.

성령이 성도 안에서 이 사실을 늘 인지하게 하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란 것이 믿어지고 깨달아지면 가벼워져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복음이 믿어지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요.

이 세상이 가벼워 보여요.

 

바울은 십자가 안에서 바라보니 자신은 이미 천국에 가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보니 자신은 그리스도의 종인 겁니다.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어요.

그러니 얼마나 기쁩니까!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질 것이 없는 본래의 종의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기쁜 겁니다.

 

죄 아래 있을 땐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진다고 두려워하며 살았어요.

그러나 이젠 그리스도의 종에 자리로 돌아왔으니 그 두려움이 없다는 겁니다.

예수라는 주인 아래 있으니 자기가 책임질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원래 창조의 목적대로 예수의 종으로 되돌려 놓았으니 기뻐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혜택이 아무나에게 주어지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택정함을 입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겁니다.

 

야! 나 같은 자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종으로 택정함을 입었단 말인가!

신기하고 놀랍다는 거에요.

그래서 모든 편지를 쓸 때마다 난 그리스도의 종이다! 라고 자랑하면서 쓰는 겁니다.

 

바울만 종이 아니고 우리도 종입니다.

이게 믿어져야 바울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됩니다.

이러한 바울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의 종 된 고백이 우리의 고백으로 남게 하옵소서! 바울이 그토록 그리스도의 종을 자랑스러워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종이 자랑스러워지게 하옵소서! 바울의 그 감동! 바울의 그 기쁨! 바울의 그 환희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정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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