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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 4강.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롬 1:3-4)

by coroa 2024. 2. 29.

 

4강.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롬 1:3-4)

롬 1:3-4=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靈)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시편 2편에 보면 인간들이 듣기에 아주 거북스러운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포고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 포고령의 내용이 뭔고 하니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냈는데 누구든지 이유 불문하고 그 아들에게 입을 맞추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죽이겠답니다.

일방적인 통고입니다.

 

아니! 하나님이면 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이건 독선이고 독재이고 폭력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입을 맞추고 안 맞추고는 그 사람의 자유이잖아요.

이게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에요.

 

입을 맞춘다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이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랑은 그냥 생기는 거예요.

이상하게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어요.

그냥 좋아요.

누가 왜? 좋은데 라고 물으면 설명 할 수가 없어요.

몰라!

그냥 좋아요!

사랑은 설명이 안 되어요.

그냥 좋다니까요.

 

하는 행동도 예쁘고!

목소리도 예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뻐요.

심지어 남들에겐 흠으로 보이는 것도 그 사람에겐 흠으로 보이지 않고 예쁘게 보여요.

 

자나 깨나 늘 그와 함께 있어요.

눈을 감아도 보이고 눈을 떠도 보여요.

귓가엔 달콤함 목소리가 물결처럼 여울져서 울려와요.

이건 그냥 자연적으로 일어나요.

강제 할 수가 없어요.

 

이게 사랑이에요.

사랑은 강제로 하라고 해서 해 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어요.

불가능한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흔하디 흔한 말이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가장 곡해 되어서 사용되어지고 있어요.

사랑이란 말을 사전적 의미로 한번 찾아보았어요.

사랑이란? “아끼고 위하며 한 없이 베푸는 일”, “동정하여 너그럽게 베푸는 일이나 마음” 이라고 합니다.

 

어원적으로 정의하면 사랑이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대방을 위하는 것이에요.

한마디로 내가 죽고 네가 살으라는 겁니다.

자기희생으로 상대방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건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에요.

피조물은 흉내 낼 수가 없어요.

 

이런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인간에게서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란? 마치 엄마가 어린 자식을 바라보는 것과 같아요.

엄마에게 자식이란 사랑스러움 그 자체에요.

이는 엄마와 자식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엄마에게 어린 자식은 그냥 예뻐요.

이리 봐도 예쁘고 저리 봐도 예뻐요.

 

이걸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합니다.

맞아요.

사랑은 눈에 콩깍지가 씌운 거예요.

 

사랑은 이유가 없어요.

그냥 좋은 것이에요.

이유나 조건이 붙으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거래에요.

사랑엔 일절 조건이 없어요.

그래서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주는 일방적인 겁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고 싶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뭔가 해 주고 싶어져요.

상대방을 위하여 배려하게 되어요.

그냥 그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은 겁니다.

아프거나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와 나를 하나로 보는 겁니다.

그 사람이 행복해 하면 나도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희노애락에 동참하게 되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기분이 나쁘면 나도 나쁘고 그 사람이 기분이 좋으면 나도 덩달아 좋아져요.

그래서 그 사람을 위하여 뭔가 해 주고 싶어지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천년을 빌려 준다면” 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가 사랑에 대하여 잘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인용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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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사랑하고

정말 정말 사랑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당신을 위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어

만약에 하늘이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 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소

 

당신을 사랑하고

너무 너무 사랑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당신을 위해

원하는 것 다해주고 싶어

만약에 하늘이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 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소

만약에 하늘이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 준다면

그 천년을 당신을 위해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모두 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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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렇게 고백 할 수 있을까요.

이는 그 사람이 내 기쁨이고 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년을 빌려 준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해주고 싶고 아낌없이 다 주고 싶고 사랑을 위해 모두 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랑은 인간에겐 나올 수가 없는 사랑이에요.

하지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대중가요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강요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해요.

이런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에서 찾아 볼 수가 있어요.

특히 엄마들의 사랑은 아들에게 더하잖아요.

 

엄마가 갓난 아들 귀저기 갈아 채우면서 토실토실한 불알을 만지고 고추를 위로 쓰담으면서 훅~ 하고 바람을 불면서 얼마나 행복해 합니까!

엄마는 그저 그런 아들을 바라만 보아도 좋아요.

똥 싸는 것도 예쁘고, 트림하는 것도 예쁘고, 방귀 뀌는 것도 예뻐요.

엄마에겐 어린 아들은 예쁨 그 자체에요.

보면 볼수록 흐뭇하고 행복해요.

 

갓난아기를 키워보면 그렇잖아요.

아이가 옹알이 하나만 해도 엄마는 자지러지잖아요.

회사에 있는 남편에게 아이가 옹알이 했다고 전화하고 난리잖아요.

아기의 손짓 하나, 발짓 하나, 옹알 옹알거리는 소리 하나가 다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잖아요.

 

이게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에요.

이러한 모성애적 사랑이 진짜 사랑의 본질이에요.

물론 이런 사랑도 자식이 커 가면서 변하지만 말이에요.

암튼 사랑이란? 강요로 되어지는 갓이 아니고 본능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이러할 진데도 하나님은 지금 그 아들을 사랑하래요.

사랑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답니다.

세상에 이런 횡포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니 어떻게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하라고 하느냔 말입니다.

 

사랑이란? 하나님이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공갈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횡포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해요.

아무리 상대방이 나를 좋다고 따라 다녀도 내가 싫으면 사랑 할 수가 없어요.

 

상대가 싫어하는데도 사랑한다고 따라다니는 것은 스토커에요.

스토커는 일종의 정신병이에요.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스토커처럼 말씀하고 있어요.

 

야~ 정낙원이!

너 내 아들 사랑해!

그럼 저는 하나님 전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요!

전 싫은데요!

우린 사랑하는 대상이 따로 있어요.

그럼 시편의 포고령에 의하면 우린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해요.

하나님이 사랑하라고 한 그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죄로 말이에요.

 

여기서 집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것을 모르실까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마음을 모르고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지으신 분입니다.

마음을 지으신 분이 어찌 우리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어요.

다 헤아리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가능한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죄인들이 사랑하는 대상이 따로 있어요.

그가 누군가 하면 마귀에요.

우리는 마귀를 사랑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우리가 마귀와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한 통속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마귀가 너무도 편해요.

 

마귀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다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린 마귀를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마귀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주어요.

마귀는 항상 육체의 쾌락을 주기 때문에 우린 마귀를 떠날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린 일평생 이러한 것들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요.

이처럼 마귀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하는데 어찌 싫어하겠어요.

도리어 마귀를 부르고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틈만 나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우상이 자기 마음에 딱 들기 때문입니다.

자기들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이에요.

우상은 편하고 사귐이 자연스러워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상 숭배 한다고 아무리 두들겨 패도 그 때 잠시 뿐 또 다시 우상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의 아내 고멜과 같아요.

이방 남자가 좋아요.

그러니 붙잡아 오면 또 나가고 붙잡아 오면 또 나가는 겁니다.

사사기 속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이 바로 고멜이에요.

사사기의 역사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어요.

고멜이 바로 우리이고 사사기 속의 이스라엘이 곧 나에요.

이게 우리 인간이에요.

 

인간은 왜? 하나님을 떠날까요.

그야 하나님이 우릴 편하게 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에요.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담아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잘 해 주세요.

최상의 것으로 주세요.

그런데 우린 그 잘해 주심이 잘해 주심으로 다가오지 않고 불편함으로 다가와요.

날 괴롭히는 것으로 비춰진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잘 해주는데도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아요.

 

죄인의 세계에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보여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날 죽이는 것으로 다가오고 마귀가 주는 죽음은 날 살리는 것으로 다가와요.

하나님이 주는 복(福)은 독(毒)으로 보이고 마귀가 주는 독(毒)은 복(福)으로 보여요.

이걸 예수님은 영생으로 가는 길은 좁고 협착하다고 하고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편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길을 택하라고 하면 모두가 멸망으로 가는 길을 택해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개입하면 좁을 길로 인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린 하나님의 사랑이 좋아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가까이 하기 싫어요.

가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거북해요.

피하고 싶어요.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에 박수를 쳐 주어야지 좋아하지 잔소리 하면 싫어요.

마귀는 늘 우리가 하는 일에 박수를 쳐주지만 하나님은 늘 태클을 걸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다가오면 우린 삽십육계 출행랑을 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북스럽고 싫은 존재에요.

죄인들에겐 하나님은 본능적으로 싫어요.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동일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싫어요.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건 우리더러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릴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우릴 죄 아래 가두고 심판 하겠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불가능한 명령을 주고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에요.

 

우린 이 말씀 앞에 모두 죽은 자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을 사랑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은 우릴 불순종 가운데 가두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 가두어 놓고 하나님께서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셔서 살려내시는 겁니다.

이는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은혜만 고스란히 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희들! 내 은혜로 살고 있는 줄 아느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이야기를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 비유로 말씀하셨어요.

왕이 포고령을 내립니다.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가 있으니 온 백성은 다 참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필 왕의 아들과 같은 날짜에 혼인을 하고 신혼여행을 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침 그 날에 외국에 바이어가 와서 큰 계약을 체결하게 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부득불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 참석치 못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집안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참석치 못했어요.

모두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화가 나서 자기 아들에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군사들을 보내서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이유는 단 하나에요.

왜? 내 아들에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느냐 입니다.

 

모두가 합당한 사정이 있어서 참석치 못했어요.

그런데 왕은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다 죽여 버립니다.

아니 무슨 이런 왕이 있습니까?

 

어떻게 왕이라는 작자가 백성들의 사정은 일절 헤아려주지 않나요.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본의 아니게 왕의 명을 거역 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 내 아들이 혼인 하는데 그걸 미루고 왕의 아들에 혼인식에 참석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왕의 아들만 중요합니까?

내 아들도 중요해요.

백성들 입장에선 얼마든지 이렇게 항의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못된 왕을 예수님은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하나님은 우리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왕은 우리 입장을 헤아려 주는 왕입니다.

우린 날 편하게 해 주는 왕을 원해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인간의 입장은 전혀 고려치 않고 당신의 뜻만 고집하는 악한 왕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하다는 것은 순전히 우리 입장에서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악한 겁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전혀 고려치 않고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들은 이런 생각을 할까요?

이는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을 내 세운다는 것은 독자적인 인생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면 다냐!왜? 내 사정을 고려치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 사정에 나 인생을 동참시키라고 하느냐고 반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이 어째서 백성들의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고를 할까요?

이는 백성은 왕의 수하에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백성은 왕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보세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를 만들었다고 하잖아요.

우린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에요.

이걸 아는 것이 신앙이고 모르는 것이 불신앙이에요.

 

지금 왕이 그러는 겁니다.

너희들은 내 덕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명령을 들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스스로 산다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 왕의 명령을 횡포라고 생각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내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왕은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명(命)을 거역한다는 것은 내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저주 받아야 할 죄 인겁니다.

죄란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도록 주장을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왕(신)이 되었어요.

죄가 자기 생각을 갖게 만든 겁니다.

죄가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생각하게 만든 겁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은 자기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자기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곧 왕(신)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원래 피조물은 자기 생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살았어요.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후 독자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어요.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창조주만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에요.

그래야 창조주 뜻대로 다스려져요.

 

그렇지 않고 피조물이 자기 생각을 갖게 되면 창조 원리를 훼손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합니다.

죄란? 자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신앙을 순종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 생각을 배제하라는 말입니다.

우리 생각은 필요 없고 하나님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순종이라고 해요.

그런데 죄가 자기 생각을 갖게 만들었어요.

그러니 죄인은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말할 때 불순종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왕의 혼인잔치 비유에서 왕이 명령 한 것은 스스로 왕의 은택을 입고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을 구분키 위함입니다.

왕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왕의 초청에 자기 사정을 버리고 참예할 것입니다.

하지만 왕의 은혜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왕의 명령 보다 자기 사정이 우선이기 때문에 따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에요.

피조물이란? 창조주에 의하여서 사는 자란 말입니다.

나로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에요.

생명이라는 말이 하나님께서 살으라고 명령을 하여서 살고 있는 것을 말해요.

내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려 주심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생명이에요.

 

우린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린 내 필요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살아야 해요.

이게 피조물의 삶이에요.

그러니 내가 사는 것에 내 뜻이 전혀 개입할 여지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면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합니다.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이 없이도 잘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물을 만들었습니다.

왜? 만들었는고 보니 아들을 위하여 만드셨다고 합니다.

아들을 만물의 주(主)가 되게 하시려고 만드셨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아들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린 아들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린 우리 삶이 없어요.

오로지 아들의 삶만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보다 아들을 위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야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했어요.

피조물에겐 어느 것이 주를 위한 삶이고 어느 것이 내 삶이란 것이 성립 될 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무용수와 춤을 따로 구분 할 수가 없는 것과 같아요.

무용수의 행동 하나 하나가 곧 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우리 삶 따로 예수님 삶 따로 구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직장생활도 신앙생활이고 가정생활도 신앙생활이고 교회생활도 신앙생활이에요.

이걸 예수 안에서 한 몸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삶이 곧 예수님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정상이에요.

이걸 왕과 백성들에게 적용하면 왕과 백성은 하나에요.

백성들의 삶이 곧 왕의 삶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는 백성은 왕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이걸 알았을 것 같았으면 왕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고 하면 두말없이 예~ 하고 참석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백성들에게 왕과 자신들은 별개라고 생각하게 만든 겁니다.

비정상으로 만들어 놓았어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 왕의 명령이 자신을 구속하는 말로 들리는 겁니다.

 

죄가 내가 왜? 왕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라고 토를 달게 만들었어요.

죄가 하나님이 하는 일에 왜? 라는 토를 달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하면 죄가 없었다면 예! 하고 입을 맞추었을 겁니다.

그런데 죄가 왜? 내가 아들에게 입을 맞추어야 하는데요? 라고 토를 달게 만들었어요.

 

이건 마치 아이들이 머리가 커 가면서 부모의 말에 왜? 라고 토를 다는 것과 같아요.

아이들이 자아가 발달하면서 부모의 말에 토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부모의 말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부모에게 반항하고 어긋나가기 시작하잖아요.

 

아이들이 자기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 때부턴 자식이 아니라 웬수에요.

품 안에 자식이지 크면 자식이 아니고 원수에요.

하나님은 이런 원수를 자식으로 두게 하여서 내가 하나님 앞에 원수임을 알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식이 속을 썩여야 비로서 하나님을 찾게 되어요.

 

백성들이 왕의 말에 왜? 라는 토를 달게 되면 설령 왕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할지라도 그건 순종이 아니고 왕이라는 힘 앞에 굴복 한 굴종인 겁니다.

굴종은 언젠가는 자기 힘이 생기면 왕의 명령에 반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식들이 그러잖아요.

내가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만 부모 밑에서 잔소릴 듣겠다고 하잖아요.

머리 굵어서 순순히 부모의 말을 듣는 인간이 없어요.

이게 인간이에요.

 

그럼 시편 2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포고령은 곧 하나님의 명을 듣기 싫어하는 우리 인간들의 죄를 끄집어내기 위한 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지 않을 줄 뻔히 알고 영을 내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내리신 영은 곧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려주는 영이 되고 맙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애당초 인간의 순종을 바라지 않았어요.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도록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했어요.

그럼에도 명령을 내리신 것은 순종을 끌어내기 위함이 아니고 너희는 내 말에 순종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되었을 것 같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지 않았어요.

우리더러 예수 믿으라고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독자적으로 구원받으라고 했을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 행함으로 구원을 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을 하십니다.

이는 모든 인간을 예수 안에 가두어서 통일시키기 위함입니다.

이를 두고 만물이 예수 안에서 충만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예수 안에서만 존재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일컬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아담 안에서 나온 여자가 다시 아담 안으로 들어가는 혼인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원이 뭐냐!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나왔던 곳이 있어요.

거기가 어딘가 하면 예수 안이에요.

우린 모두가 예수 안에서 나왔어요.

그리고 예수 안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게 중요한데 잘 이해하세요.

 

예수님이 우릴 어떻게 내 보냈는줄 아세요.

자신의 죽음으로 내 보냈어요.

이 그림을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 담아 놓았어요.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서 옆구리에서 하와는 빼내지요.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해요.

이게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하와는 아담의 죽음으로부터 나온 겁니다.

 

아담의 죽음은 곧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아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죽음을 말해요.

하나님으로서의 죽음을 상징해요.

잘 이해하세요.

 

하나님은 영이세요.

영은 고정된 몸이 없어요.

필요 따라서 몸을 입기도 하고 안하기도 해요.

몸이 없다는 말은 어디에 가두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계실 때는 영으로 계셨기 때문에 무소부재하시고 온 세상에 편재 하셨어요.

그런데 몸을 입으신 후에는 육신 안에 가두어지게 되었어요.

무소부재하시고 편재하시는 것을 상실했어요.

이건 영이신 하나님으로서의 죽음을 상징해요.

 

예를 들어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만약에 갈릴리에 계시면 울산엔 안 계세요.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으로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는 성령으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선 주 앞에 모셔 섰는 일곱 영이라고 하는 겁니다.

일곱 영이신 성령이 어린 양의 명령을 받들고 온 세상에 보내심을 입고 예수님을 대신하여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젠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서 일을 하세요.

성령은 육신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 대신 무소부재하시고 편재하시면서 예수님 대신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시고 성령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관리하게 하신 겁니다.

성령을 자기백성 안에 상주하게 하셨어요.

성령의 오심은 곧 예수님의 오심과 동일해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왜? 영이신 하나님을 포기하고 자신을 육신으로 가두게 하셨나요?

이는 육신에 속한 자기 백성들을 구원키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들을 살리려고 자신의 몸을 속전으로 내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 속에서 누가 나왔는가 하면 성도가 나왔어요.

이건 마치 아담의 죽음 속에서 하와가 나온 것과 같아요.

 

그럼 신앙생활은 뭔가 하면 자기가 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사는 겁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예수 안에서 산다고 했어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고 했어요.

내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것으로 산다는 것을 알면 시편 2편에서 말한 왕의 포고령에 순종이 되어요.

왕의 아들에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왕의 명령에 순종 할 수가 있어요.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면 순종이 되어요.

 

그런데 우린 이 사실을 잊고 살아요.

죄가 자꾸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미혹한단 말입니다.

그럼 우린 예수님의 것으로 살지 않고 내 것으로 산단 말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우릴 툭 툭 간섭하는 겁니다.

너 왜? 예수의 몸을 가지고 네 몸으로 사느냐고 간섭해요.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요.

 

이를 두고 징계라고 합니다.

말이 좋아 징계이지 이건 여간 아픈 것이 아니에요.

때론 고난으로 다가오고 때론 핍박으로 다가와요.

하나님이 우릴 간섭하면 우리 삶 속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져 나와요.

내 인생이 나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요.

이럴 때 자기 부인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 아들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아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우릴 대하시는 것이 달라요.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나 그 아들에겐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니 늘 우리는 얻어터지는 수 밖에 없어요.

 

성도가 성경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관심사를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를 우리도 공유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아들을 위해서 창조 했는데 우리가 그 아들의 피에 무관심 한다고 하면 그거야 말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죄란? 하나님의 관심사에 무관심 한 겁니다. 

그러므로 죄는 항상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귀는 자기가 살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마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 살아가는 일에 정신을 쏟게 만들었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어요.

내 코가 석자입니다.

 

내 가정, 내 가족, 내 행복을 챙기기가 바빠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내 육신이 행복하게 잘살까 입니다.

자기 육신을 이길 장사는 없어요.

내 몸 이외 더 귀한 것이 없어요.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는 그냥 노래이지 삶이 아니에요.

삶은 “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에요.

 

인간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처음 창조한 인간은 분명히 이렇지 않았어요.

에덴동산에선 이런 근심 걱정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죄가 이렇게 만들었어요.

죄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도록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니 인간은 눈만 뜨면 자기 인생 챙기기에 바쁜 겁니다.

 

이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를 없애지 않고서는 아무리 제발 자기 몸뚱이 챙기려 하지 말고 예수를 생각하라고 하여도 안 되어요.

그건 소 귀에 경 읽기에요.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안 되어요.

다 죄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죄를 죄인인 우리가 해결할 수가 없어요.

죄와 상관이 없는 분이 해결해 주어야만 합니다.

죄와 상관이 없으려면 죄의 세상 밖인 하늘에서 와야 합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동네에서 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영이신 그 아들을 인간의 육신의 몸을 입혀서 이 세상으로 보낸 겁니다.

인간과 동일한 몸으로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들어봅시다.

 

빌 2: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하지요.

이는 하나님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버리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영이신 것을 포기하고 육신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종의 형체란 육신을 말해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종이라는 것과 형체란 말입니다.

종이란? 주인에게 복속이 된 자를 말해요.

그럼 여기서 주인이란?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버지의 종이란 뜻입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는 자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을 하였다고 합니다.

 

복종이란? 주인의 말해 자신을 죽임당한다는 의미에요.

즉 주인의 말을 그대로 자기 몸으로 담아낸다는 뜻입니다.

이건 순종과 또 달라요.

순종이란? 자발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복종은 절대적인 의미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은 피조물처럼 낮아졌다는 의미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피조물처럼 낮아지는 줄 아세요.

이는 피조물인 자기 백성들과 동등되어 그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이 하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어요.

자기백성들이 원래 아버지 명령에 복종하고 살아야 하는데 죄 때문에 복종치 못하고 거역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백성들을 대신하여 대표로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을 하신 겁니다.

 

봐라!

아버지가 처음 창조한 인간은 바로 이런 인간이다! 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인자(人子)란? 진짜 사람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진짜 사람이란? 죄 없는 인간을 말해요.

죄 없는 인간이었으면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을 완전히 망가뜨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백성들의 죄를 십자가에서 다 속량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도가 천국에 가면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절대 복종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속에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에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럼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아버지께 순종하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이 땅에서 잠깐 동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라!

또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 안에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멸치 말라!근심치 말라는 것은 소멸케 하는 세력 근심케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력이 바로 육신의 소욕이에요.

 

바울은 이 세력을 자기 안에 또 다른 법이라고 했어요.

이 놈들이 누군가 하면 가나안 7족속이에요.

성도의 몸이 가나안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의 몸에 약속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 약속의 땅에 가나안 7족속이라는 원주민이 살고 있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주민이 살고 있는 땅으로 인도하지요.

빈 땅이 아니라 강대한 원주민이 있는 땅으로 인도했어요.

이는 우리 안이 그렇다는 겁니다.

성도의 심령이 가나안 땅이에요.

그런데 비어있지 않고 옛 사람이라는 아주 강한 놈이 버티고 있어요.

이런 땅에 성령이 오셨어요.

그래서 우리 안에서 가나안 전쟁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세요.

 

출애굽을 할 때는 모세를 통해서 합니다.

홍해 바다를 건널 때 모세에게 속하여서 건넜지요.

홍해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했어요.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했어요.

홍해 바다를 건넌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을 상징해요.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에서 죽음이라는 바다를 건너왔어요.

 

죽음이라는 바다를 건너온 것이 목적이 아니고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에요.

그런데 가나안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들어가요.

광야는 이 세상을 상징하고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해요.

모세는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여호수아는 성령을 상징해요.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은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죽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으로 인도하세요.

성령이 우리 안에 천국을 몰고 오신 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들어가 전쟁을 벌리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전쟁을 벌리는 것과 같아요.

우리 안에 가나안 7족속과 같은 옛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이 뭔지 알려 주셨어요.

 

마 15:11-20=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의 초대를 받았는데 그만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더러운 놈들이라고 트집을 잡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더러운 것은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 행위가 아니고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러운 것이란 바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이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라고 했어요.

사람 속에 7 가지 더러운 것이 있는데 이는 곧 가나안 7 족속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7 가지 더러운 것은 인간들 속에 있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에요.

그러니 7가지 죄만 있는 것이 아니고 수만 가지가 있어요.

이건 모두가 사람을 헤치는 것들입니다.

 

이 놈들은 바로 죄의 모습들이에요.

감기 걸리면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죄가 다양한 모습을 토해내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몸을 가지고 이러한 각양의 모습에 범죄를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육신의 소욕이라고 해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다툼과 악행과,,,,

좌우지간 수만 가지 육신의 소욕들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서 이런 육신의 소욕이라는 죄와 싸우게 하신 겁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여호수아처럼 전쟁을 치르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과 싸우는 거에요.

성령이 이기면 우리 몸은 의(義)에 병기로 사용이 되어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고!

육신이 이기면 불의(不義)에 병기가 되어서 육신의 열매들이 나타나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7 족속을 다 물리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조금 남겨두게 하셨어요.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을 시험키 위함입니다.

 

사사기를 봅시다.

 

삿 3:1-6=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 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 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6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하나님이 일부러 가나안 족속들을 조금씩 남겨 두었다고 하지요.

왜냐하면! 시험키 위함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란? 인간의 본질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살려면 가나안 사람들 방식으로 살아야 해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원주민들과 혼인하고 그들에 신(神)들을 섬기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건 몸뚱이를 끌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은 타락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는 죄 아래서 태어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은 어쩔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늘 하나님께 범죄하면 적국에 붙여서 포로로 잡혀가면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누군가가 대신 싸워서 찾아오게 하신 겁니다.

이들이 바로 사사들이에요.

그러니 사사들은 모두가 예수님을 모형하고 있어요.

 

이걸 신약식으로 우리에게 적용을 해 봅시다.

우리 안에 가나안 원주민처럼 옛 사람이 자리 잡고 있어요.

이러한 몸에 성령이 들어오세요.

성령이 들어와서 여호수아처럼 가나안 전쟁을 벌립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서 죄를 완전히 뽑아 내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을 받으면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가 된다고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성령은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오신 분이 아니에요.

도리어 우리 몸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세요.

이걸 시험키 위함이라고 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 몸에 예수님의 피 뿌림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남기고자 함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에요.

그래야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창세전 언약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기 위하여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구약 이스라엘처럼 가나안 7 족속을 조금 남겨 두어서 기어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신(神)을 섬기게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야! 우리는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놈이라는 것을 알게 하세요.

그리곤 그들 위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덮쳐옴으로서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 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비록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 와 계셔도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능력이 모자라서 죄를 못 이기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서에요.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을 예수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우린 날마다 예수님의 건저 주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로 오신 것입니다.

종의 형체를 입었다는 것은 이젠 하나님과의 동등됨에서 떨어졌다는 말이에요.

종의 형체란 육신이라고 했어요.

육신이라는 몸을 입었으니 하나님과 동등함에서 떨어진 것이지요.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으로 전락하신 겁니다.

이를 자기를 비우고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합니다.

이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육신을 입은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신세가 된 겁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일을 자처 하셨을까요?

이는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에요.

창세전 언약에 의하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득불 그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자기를 비워서 영에서 육신으로 낮추신 것입니다.

그리곤 십자가에 죽어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내신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면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의 초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아들을 보내서 해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창세전 언약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 창세전 언약을 말해주고 있어요.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오신 분이라는 것을 다윗 언약을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다고 하지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입니다.

성령으로 잉태 하셨다는 것은 인간의 혈통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는 몸은 몸인데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성령으로 잉태를 하신 겁니다.

 

언약을 위한 몸은 흠 없는 몸으로서 피를 흘려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몸으로 오신 겁니다.

죄 없는 몸으로 오셔야 하기 때문에 부정모혈로 오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겁니다.

하나님께 바쳐질 죄 없는 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말은 혈통적인 가문으로 오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는 다윗 언약으로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럼 다윗 언약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무엘하 7장입니다.

 

삼하 7:1-17=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 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다윗 언약이 주어진 배경부터 먼저 알아야 이해가 쉬워집니다.

다윗이 오벧오돔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서 휘장 가운데 두었습니다.

이 때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입니다.

다윗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은 화려한 궁궐에서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마치 대감 집 안방에 보면 병풍이 쳐져 있는데 그 뒤에 안치가 되어 있는 것처럼 휘장 안에 초라하게 안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다윗이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나단선지자에게 야! 이건 내가 너무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내가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할 집을 지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나단 선지자가 그럼 왕은 하나님과 소통이 잘 되는 분이시니 하나님께 기도한 번 해 보세요! 라고 했어요.

 

그리곤 나단 선지자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서 말합니다.

야! 이 놈아!

내가 언제 인간들이 지은 집에 거한 적이 있더냐!

내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내가 줄 곳 회막에서만 거하지 않았느냐!

 

이건 내가 집에 거하지 못하여서가 아니라 이는 내가 이 세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만든 집에 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만약 집이 필요 했으면 어느 지파에게 명령해서 진즉에 내가 거할 집을 지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는 다윗에게 가서 꼴깞 떨지 말라고 알려 주라고 하십니다.

 

다윗이 내 집을 지을 것이 아니고 내가 다윗의 집을 지어준다고 말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내가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칠 때 불러서 이스라엘의 왕을 삼아주셨는데 내가 그 놈에게 받으면 뭘 받겠느냐 입니다.

 

쉬운 말로 어느 회장님이 자기 옆집에 실업자가 반둥거리고 노는 것이 불쌍해서 자기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었는데 그 사람이 내가 돈 벌어서 회장님 집 지어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아니 회장님이 맨 날 빈둥거리고 노는 몸이 불쌍해서 취직시켜 주었는데 그 놈에게 뭐가 아쉬워서 집 지어달라고 하겠느냐 에요.

 

이건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도 이야기 했어요.

 

행 7:46-50=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되었어요.

그럼 다윗이 하는 모든 일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 있음이 드러나면 안 되고 못남이 드러나야 해요.

힘 없음으로 나타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고백되어져야 해요.

 

그런데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가 갚겠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생각이야 가상하지만 그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에요.

다윗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갚고자 하면 안 되어요.

그 은혜를 고스란히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백성들 앞에서도 자신은 늘 하나님의 도움을 입고 사는 모습으로 비추어져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자기가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을 짓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악이고 죄에요.

죄는 항상 자기 힘을 근거로 하나님의 은혜성을 훼손하는 식으로 역사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을 자기 지식을 근거로 가두어서 은사로 주어지는 것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은 은사에 속한 것이에요.

그렇다면 은사로 주어지는 복음을 받은 사람은 복음을 아는 것을 자랑할 수가 없어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이 시대 목사들 중에서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 복음을 마치 자기가 깨달은 것인 냥 꼴값을 덜면서 항상 선생 노릇하려고 하는 인간들이 너무도 많아요.

 

이게 다윗처럼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교만이에요.

물론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고자 하나님 집을 짓겠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가 바로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에요.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갚겠다는 식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해지고 싶은 겁니다.

이게 죄에요.

 

인간이 뭘로 당당해 집니까?

자기가 한 일로 당당해 지는 것입니다.

나 이 정도 했잖아요! 라면서 모가지를 세운단 말입니다.

이건 죄인의 세계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어요.

 

가정이든 교회이든 조직이든 항상 자기 공로를 바탕으로 자기주장을 하게 되어 있어요.

자식이 잘난 일을 해 보세요.

그 잘난 일을 근거로 부모에게 목을 세우잖아요.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아는 자식은 부모에게 목을 세우지 않아요.

부모에게 대적하는 놈은 항상 잘난 놈들이에요.

 

그래서 제가 자식 똑똑한 것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 잘난 자식 때문에 피 눈물을 흘려요.

효도는 조금 모자란 듯한 자식이 하지 잘난 놈이 하지 않아요.

그래서 옛말에 등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자란 듯한 자식이 부모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이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항상 열심과 충성과 헌신이 특심한 사람들이 가시 노릇을 해요.

일하지 않는 사람은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아요.

자기가 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겁니다.

인간이란? 항상 자기 힘을 근거로 활동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인간의 반역 뒤엔 반드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에요.

그 조직을 위해서 공로라도 세우고 돈이라도 듬뿍 내 보세요.

그럼 대번에 주류가 되어서 이래라 저래아 한다구요.

자기 말이 신청되지 않으면 떠나버려요.

인간이란? 항상 자기 힘을 근거로 자기 입지를 넓혀가려고 해요.

거기서 왕 노릇하고 싶어 해요.

 

열심과 충성과 헌신이 특심한 것은 귀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이에요.

그런데 마귀는 그 귀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서 당당해지라고 한단 말입니다.

처음엔 은혜로 시작을 해요.

그런데 마귀는 그 은혜로 한 것을 육으로 거두게 한단 말입니다.

자기 공로를 첨가시킨단 말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항상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교만케 하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게 만들어요.

다윗이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 그만 뒤라!

그건 네가 할 일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이라고 합니다.

넌 그냥 수한대로 살다가 죽으면 내가 네 자식에게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서 그 나라를 견고케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하나님은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해 주신답니다.

 

그리고 그는 내 아들이 되고 나는 그 아비가 되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 이후에 한 왕을 세워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그 왕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육적으로는 솔로몬을 지칭하지만 영적으로는 장차 오실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이걸 묵시에 속한 일이라고 하면서 다윗에게 고하였다고 합니다.

묵시(黙示)에 속한 일이란? 창세전 언약이란 말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시나리오에 적힌 대로 말해 주었어요.

 

다윗 언약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이 다윗을 일컬어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아서 그 이름을 존귀케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주권자란? 왕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언약을 하셨어요.

언약이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에게 한 것이에요.

그러니 그 언약은 언약을 하신 하나님이 지켜내세요.

 

이건 다윗에게만 국한 된 말이 아니에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린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릴 부르셨어요.

 

부르심을 입고 보니 우리 안에 하나님이 언약을 심어놓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심어놓은 사람은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인생을 간섭하시는 겁니다.

예레미야를 봅시다.

 

렘 1:4-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어느 날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찾아옵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선지자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건 예레미야의 의지와 상관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만든 겁니다.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와서 예레미야의 인생에 개입을 하기 시작을 하신 겁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까지 다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할 말을 알려 주는 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준 것이 복음이에요.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성령의 은사로 복음을 깨닫게 해주세요.

지금 예레미야에게 은사로 할 말을 알려주고 있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레미야 입에 하나님 말씀을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시키는 말이 아주 맞아 죽을 말인 겁니다.

가서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듣기 싫어하는 망한다는 말을 하라는 거에요.

그러니 두렵고 하기 싫은 겁니다.

하지만 안 할 수가 없어요.

안 하면 자기 안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말 하면 욕을 먹을 텐데 라고 하면서도 바른 말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언약을 심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레미야의 인생에 개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아브라함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요셉도 그랬고, 여하튼 언약의 후손들은 모두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간섭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해요.

그러니 하나님이 자꾸만 우리 인생에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시니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의 도구로 사용이 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언약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요.

그래서 우리 삶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이 자꾸만 발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우겨쌈을 당하고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데도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린 죽을 맛이에요.

 

이처럼 다윗에게도 하나님이 언약을 심어 놓은 겁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야! 내가 널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만들어 줄게 그랬어요.

그럼 하나님이 다윗 가문을 이스라엘의 왕가(王家)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언약이 주어지면 다윗의 가문에 조건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다윗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언약대로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윗에게 주어진 다윗 언약이에요.

 

그런데 다윗 언약 속에 보면 의미심장한 것이 담겨져 있어요.

언약을 보면 범죄가 나오고, 막대기가 나오고, 인생 채찍이 나오고, 징계가 나옵니다.

 

삼하 7:14-15=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범죄니, 막대기니, 채찍이니, 징계라는 말은 징벌이에요.

죄를 지으면 그 죗값을 치루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범죄한 사람을 교도소에 일정기간 가두는 것과 같아요.

 

이건 버림이 아니고 사랑이에요.

너는 내 것이라는 소유의 표시에요.

그래서 간섭하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울 왕과의 차별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내가 버렸지만 넌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네가 비록 사울처럼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두들겨 팰지언정 잘라내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윗 언약은 긍휼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가문을 지켜주겠다는 언약이기 때문이에요.

 

다윗이나 사울이나 동일한 죄인이에요.

죄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은 둘 다 도낀 개낀 거기서 거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달리 대우하세요.

마치 야곱과 에서처럼 말입니다.

 

사울은 법대로 대했지만 다윗은 은혜로 대하시겠대요.

그래서 다윗에겐 은총을 빼앗지 않고 대신 막대기로 두들겨 패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은총을 빼앗는다는 것은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두들겨 팬다는 것은 간섭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럼 잘못하면 은총을 빼앗는 것하고, 두들겨 패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인간들에게 좋은 줄 아세요.

 

그건 은총을 빼앗는 것이 훨씬 편해요.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왕처럼 살고 싶어하는 본성으로 태어나요.

그래서 누구에게 간섭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건 갓난아기 때부터 나타나요.

간섭 하면 울어요.

울음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하도록 내 버려두라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니 인간적으로 보면 사울이 훨씬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을 하지 않으니 자기 뜻대로 살수가 있잖아요.

나중에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은 둘째 문제에요.

당장 살아가는데에는 이처럼 좋은 것이 없어요.

 

인간이란? 저승보다 이생이 더 좋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고 하는 겁니다. 

사울이 지금 그런 은택(?)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나 이제부터 널 간섭 안 할 테니 네 마음대로 살으라고 내쳐 버린 겁니다.

그래서 결국 사울은 자기 마음대로 왕처럼 살다가 죽었어요.

 

여러분 죄인을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세요.

그냥 죄 짓다가 지옥으로 가요.

간섭하지 않으면 좋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죄인에게 있어 복이란? 자기를 간섭해 주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식들을 왜? 간섭합니까?

그냥 두면 부랑자가 되기 때문이에요.

자식들이 하고 싶은대로 내 버려두면 거렁뱅이가 되어요.

인간은 가만 두면 거렁뱅이가 될 수밖에 없어요.

부모들은 이걸 알기 때문에 자식들을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은 부모의 간섭을 복이라고 여기는 놈들은 단 한 놈도 없어요.

이게 인간의 어리석음이에요.

 

이를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에겐 막대기로 채찍으로 간섭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을 간섭한다는 것은 죽을 맛이에요.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냥 못 본 척 넘어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미주알 고주알 간섭하면 이건 돌아 버립니다.

 

사람이 돌아버리면 눈에 뵈는게 없어요.

부모도 자식도 안 보여요.

그러니 입에 게거품 물고 죽이겠다고 덤비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일을 방해하면 하나님도 눈에 안 봬요.

죽여요.

 

그래서 발생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누구 손에 죽임 당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베푼 자기 백성들 손에 죽임 당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이 자꾸만 귀찮게 하니까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왜? 죽였는가요?

그건 예수님이 자꾸만 싫은 소리를 하면서 간섭하니까 죽인 겁니다.

그냥 자기들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내 버려두면 아무 탈 없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틀렸다고 간섭하는 겁니다.

그러니 뿔따구가 나서 죽였어요.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은 자기 백성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지 이방인에게서 일어나지 않아요.

이방인은 하나님이 니들 마음대로 살라고 유기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없어요.

이방인들은 인과응보식 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책임지는 식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일 일이 없어요.

그런데 자기백성들은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일을 하시는 줄 아세요.

자기백성들에게 은혜를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은혜가 은혜로 드러나게 하려면 죄가 더욱 더 드러나야 하니까요.

죄와 은혜는 비례해요.

죄를 많이 알수록 은혜가 더욱 빛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간섭하심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희는 날 미워하고 죽일 수 밖에 없는 놈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넌 저주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꾸만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을 일으키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좋으면 안 되어요.

싫어야 해요.

신앙생활이 신나고 재미있으면 안 되어요.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소처럼 울면서 하여야 합니다.

싫어서가 아니라 늘 우리 본성과 반하는 사건들을 만나기 때문에 아픈 겁니다.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매를 맞고 굶고 옥에 갇히고 쫓겨 다닌 것이 어디 웃음이 나올 일입니까?

나오느니 한숨이고 원망이에요.

물론 성령이 순간순간 간섭을 할 때는 감옥에서도 찬송이 나오고 기도가 나왔지만 그런 일이 늘 일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바울도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고 고백하고 있어요.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예수님이 그랬잖아요.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것으로 택함을 입은 고로 미움을 받는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아니할 수가 없어요.

우린 살면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 난 죽어도 싸다는 것을 인지하게 만들어요.

 

이럴 때 막대기와 채찍과 징계가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임을 알게 되어요.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서 망함 속에서 감사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 일생이 고달픈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고달픈 인생을 벗어나고자 일평생 하나님과 싸우는 모습으로 점철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순순히 응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순순히 응할 수 있는 인간들이 아니에요.

 

우린 눈만 뜨면 하나님과 싸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이름도 하나님과 싸우는 이스라엘인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씨름하고 얻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씨름 했다는 것은 하나님과 싸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좋은 이름이 아니고 넌 꼴통이라는 이름이에요.

불순종을 바탕한 이름입니다.

넌 하나님을 죽이는 죄인이라는 이름인 겁니다.

 

그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바로 우리 성도들의 이름인 겁니다.

그러니 우린 날마다 하나님과 샅바 싸움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라고 악악대잖아요.

우린 눈만 뜨면 왜?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느냐고 악악댄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죄인의 본성을 유감없이 다 털어 내라고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엘림의 달콤한 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라의 쓴 물을 주는 것과 같아요.

마라의 쓴 물을 먹고 안에 있는 것을 다 토해 내라는 겁니다.

즉 애굽에 사고방식을 다 토해 내라는 거에요.

너희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토해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예수 잘 믿는 자가 아니라 예수 안 믿는 자라는 것을 드러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제 고백입니다.

전 처음엔 예수를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괜찮은 인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아가면 갈수록 난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라는 것을 폭로당하고 있어요.

내가 진짜 나쁜 죄인이라는 것을 실감해요.

이 모두가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앞으로 광야라는 인생길을 가면서 더 많이 내 죄를 까발림 당할 것입니다.

 

광야 길은 애굽에 사고방식으로는 갈수가 없어요.

원망 할 수밖에 없어요.

광야 길을 애굽에 사고를 버리지 않으면 사사건건 하나님과 싸워요.

왜냐하면! 사사건건 하나님이 우리 생각과 다르게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만나를 주시는 것도 보세요.

우리는 만나를 주어도 모아두어야 안심이 되어요.

하루치씩 매일 같이 하루 하루 받는 다는 것은 불안해요.

언제 하나님의 마음이 변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건 인간의 생각이 언제 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자기 생각과 같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 이왕 줄거면 하루치씩 주지 말고 한 달 치씩 달라는 겁니다.

이게 애굽식 삶에 방식이에요.

 

한 달 치 줘보세요.

인간의 본성상 양식이 떨어질 때까지 하나님 안 찾아요.

하나님은 인간의 체질을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만나를 하루치씩만 주는 겁니다.

너희는 날마다 내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날마다 내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을 죽기 살기로 하지 않는 것은 먹고 살기가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급한 것이 없어요.

말로는 하나님 은혜로 산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우린 우리 힘을 의지하고 살아요.

그 모습이 보이는 것을 붙잡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떠난 삶이에요.

 

그럼 언젠가 하나님이 심방을 오실 겁니다.

면회 좀 하자고 할 것입니다.

그 땐 인생살이가 좀 복잡해집니다.

이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미워하는 분노를 격발시키기 위함이에요.

복잡한 사건이 터지면 그땐 하나님 죽이겠다고 달려 들 것입니다.

그래 놓고선 봐라! 넌 날 사랑하지 않잖아 라고 고발한다니까요.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이 하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사건 속으로 몰아넣으실 것입니다.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에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것으로 다가와요.

반드시 난 예수를 죽일 수 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어요.

 

그게 뭔가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을 때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어주셨다는 것이 복음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음을 통해서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날마다 죄를 짓고 살잖아요.

그러니 우린 날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야 용서와 은혜가 덮쳐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광야 길은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행할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는 사건들이에요.

우리도 지금 광야 길에 하나님을 원망하던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을 죽어야만 해요.

아니 죽일 수 밖에 없어요.

그게 죄인의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자기 안에 죄가 더 드러나는 일들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감추어 두었던 비상금이 적발 되듯이 꼬깃 꼬깃 감추어 두었던 것들이 죄라고 발각당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종국엔 바울처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나와야 제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 겁니다.

야곱처럼 참 더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여야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내 죄가 적나라하게 깊이 발각당하면 당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깊이만큼이나 더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비로서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 지옥 갈게요! 라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까지 간섭하시는 겁니다.

유구무언을 만들어 버려요.

하나님은 이런 고백이 나올 때까지 계속하여 우리를 열심히 간섭하세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법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겐 아픔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치 얍복강에서 야곱에 허리를 분지르듯이 말이에요.

야곱은 온갖 술수로 세상말로 성공을 해서 금의환향 하려고 하였어요.

자기 인생을 자랑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짓궂게도 얍복강에서 한 순간에 그 꿈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결국 야곱은 지금까지 쌓아온 영광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하고 얍복강에서 병신이 되고 맙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보니 자신이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야곱은 모든 재물을 다 버리고 벧엘로 다시 올라가게 됩니다.

벧엘은 아버지 집에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을 만났던 광야에요.

돌 베게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와서 앞으로 내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하나님이 야곱에게 함께 한다는 약속은 네 꾀로 살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책임져 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지금까지 자기 꾀로 살았어요.

자기 꾀로 재물을 모았어요.

야곱은 그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인 줄 알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게 아니란 것을 얍복강에서 깨우쳐 줄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얍복강에서 야곱이 쌓아온 모든 것을 일거에 허물어 버리는 일들을 벌리신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야곱은 후일에 알고 바로에게 축복을 하면서 내 인생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험악한 세월을 산 인생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런 것이라고 알려 준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윗에게도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막대기로 채찍질하면 징계하겠다고 하십니다.

이 약속에 의하여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겉으로 보기엔 다윗의 가문은 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장차 다윗의 위에 앉은 한 왕이 오실 것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 왕이 오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수축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증거하였어요.

 

행 15:15-18=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행전 15장은 사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되는 현상을 가지고 어떻게 볼 것인가를 회의하는 예루살렘 공의회 모습이에요.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자 그 증거를 받은 많은 이방인들이 주 예수를 믿는 일이 일어났어요.

 

사도들은 이러한 일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수축하는 일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었어요.

즉 다윗 언약의 성취로 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다윗 언약의 성취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윗의 위에 앉아 다스릴 이스라엘 왕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문을 열면서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윗 언약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일컬어 육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혈통이란? 가문을 말하는데 이는 핏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윗 가문에 주어진 언약의 맥을 말합니다.

다윗 가문에 주어진 언약의 맥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 왕위를 계승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들도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수축하는 분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란? 다윗 왕권을 말합니다.

무너졌다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무너진 장막을 다시 수축한다는 것은 그걸 다시 찾는다는 말입니다.

 

다윗 왕권은 세상의 왕권이 아니에요.

다윗 왕권은 하나님 나라에 왕권의 모형이에요.

하나님 나라에 왕의 실제는 예수님이에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인간의 혈통으로 오시지 않았어요.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에요.

그러니 핏줄로는 다윗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럼에도 성경은 예수님을 다윗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윗 언약을 따라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를 말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 이전에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후손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후손이라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구약의 선지자들은 기묘자라고 말했어요.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다윗의 위에 앉기 위해 오실 분은 기묘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9장을 봅시다.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아기를 주셨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이고, 모사고,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는 아버지이고, 평강의 왕이라고 합니다.

곧 왕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기묘자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한 분이란 말입니다.

이는 인간은 인간인데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기묘자인 겁니다.

 

기묘(奇妙)자란? 이 세상 밖에 속한 분이란 뜻이에요.

기이한 분이란 말입니다.

세상 말로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어요.

친 형제들도 몰라보았어요.

오죽했으면 일가친척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기묘하게 오신 예수님을 모사라고 합니다.

모사(謀士)란? 가르치고 훈계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분이란 말입니다.

이는 사람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다스리되 이 세상 방식이 아닌 하늘에 방식으로 다스려요.

 

이 세상 방식은 법으로 다스려져요.

법은 우열이 있고 차등이 있고 서열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 세상과 달라요.

차등이 없고 공평해요.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이사야 11장을 봅시다.

 

사 11:1-10=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보세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한다고 하지요.

이새의 줄기에선 나온 한 싹은 다윗을 말해요.

그런데 그 뿌리에서 한 가자가 나서 결실을 합니다.

이는 다윗 언약을 근거로 해서 오신 분이 다윗 언약을 성취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의 맥을 따라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그 한 싹이 만민의 기호로 선다고 합니다.

기호란? 중심이란 말입니다.

근거란 뜻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새로운 나라를 만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나라는 원수가 없는 나라라고 합니다.

힘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에요.

그러므로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놀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가 사자와 함께 하며, 어린아이가 독사들과 장난을 치는 그런 나라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이 세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어린아이들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나라에요.

그런데 그런 동화 속의 나라를 예수님이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약육강식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운 나라는 공평한 나라에요.

이름하여 천국이고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세운 나라는 더 이상 다툼이나 싸움이 없는 나라에요.

 

인간의 신분이나 지위로 인한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나라를 만드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몸은 죽고 성령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드십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을 모사(謀士)라고 했지요.

모사란 나라를 세우고 다스리고 경영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는 나라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백성도 하늘에 방식으로 만들어지겠지요.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는 것도 세상 방식이 아닌 하늘에 방식으로 만들어 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이 세상으로 오실 때의 방식인 겁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지만 성령으로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다고 하는 겁니다.

이는 성령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케 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분이라는 것을 확증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분이 바로 성령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확증해 주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루실 두 가지 기능을 요단강 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두 가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두 가지 세례는 곧 예수님의 두 가지 사역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란 연합을 말해요.

 

예수님이 죄인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은 의인이 죄인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는 의로운 분이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할 속죄 제물로서의 연합이에요.

세례요한은 이를 알고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죄를 대신 담당하라고 제물로 죽이는 양이에요.

하나님이 어린 양에게 자기 백성들이 모든 죄를 다 전가시켜서 죽인 것입니다.

이 일을 상징적으로 죄가 없는 의인이신 예수님이 죄인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요.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지요.

그럼 성령 세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세례인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셨다고 하잖아요.

이는 물세례는 죽음을 상징하고 성령 세례는 새로운 사람으로서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럽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 낸다는 뜻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두 가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는 대속제물의 일을 하여 죄사함을 주시고,

둘째로는 죽은 자기 백성들을 성령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십니다.

즉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려내는 일을 하세요.

정확하게 말해서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이 일을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을 했습니다.

에스겔 37장을 봅시다.

 

겔 37:1-13=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주셨어요.

한마디로 죽은 해골인 겁니다.

해골이라 함은 완전히 부패한 상태를 말해요.

그래서 자기 백성들이 지금 무덤에 있다고 합니다.

 

무덤이란?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 속에 생기가 불어옵니다.

그러자 무덤 속에 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요한복음 5장 28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음성이 들릴 때가 온다고 했어요.

그럼 무덤 속에 있던 자들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실제로 언제 일어났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일어났어요.

 

마태복음 27장 50-53절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자 무덤이 열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 무덤 속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살아나서 거룩한 성에 들어갔어요.

여기서 거룩한 성이란? 천국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으시자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지요.

이는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죽음으로 천국의 길이 열린 겁니다.

이건 실제적인 의미로서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음부에 있던 자들이 살아나 천국에 들어간 것을 말해요.

 

그러나 영적인 의미로는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죄 아래서 죽었던 성도가 복음으로 살아나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 에스겔 골짜기에 있던 해골들에게 생기가 불어 닥친 것과 같아요.

 

실제로 이 사건이 오순절 날에 일어났어요.

성령이 강림하자 죄 아래 있던 자들이 구원을 받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령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과 새로운 언약을 세운다고 약속하였어요.

 

렘 31: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제 성령에 의하여 살아난 자들은 새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새로운 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법이란? 새 언약을 말해요.

 

새 언약이란?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책임져 주는 인생으로 산다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하고만 상대 하겠다는 법이에요.

그러니 새 언약에선 우린 죽은 자에요.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 감추어져 있어요.

 

예수 안에는 차별과 차등과 서열과 우열이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피로서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 안에선 목사나 성도나 차별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다 안다고 하면서 독점적으로 선생 노릇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람들 위에서 높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 밖에 있기 때문에 상좌에 앉고자 하고 선생노릇을 하면서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자자의 예언에 의하면 생기로 살아난 해골들을 하나님께서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든다고 합니다.

 

겔 37:15-28=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6 인자야 너는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고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고 17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 22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 24 내 조상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리니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그들이 내 규례를 준행하고 내 율례를 지켜 행하며 25 내가 내 종 야곱에게 준 땅 곧 그 열조가 거하던 땅에 그들이 거하되 그들과 그 자자손손이 영원히 거기 거할 것이요 내 종 다윗이 영원히 그 왕이 되리라”

 

그 막대기로 둘을 연합하게 한다고 하지요.

그리곤 다윗이 그들의 왕이 되어서 다스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막대기는 십자가를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한 민족을 만든다는 말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것을 말하고,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하나 되는 것을 말하고,

종이나 자유자나 세상의 가치와 신분의 벽이 허물어져 진정으로 예수 안에서 차별이 없는 그런 나라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이러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어요.

예수 안에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 겁니다.

세상 가치가 아닌 하늘에 가치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가 태동되었어요.

교회 안에는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않아요.

그러므로 종이나 자유자라는 세상 신분의 벽이 허물어지게 되어 한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므로 교회가 되었어요.

그럼 우린 세상 가치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의 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상의 빈부와 귀천과 신분과 혈통과 민족과 나라를 허물어 버린 것입니다.

비로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사자와 어린 양이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노는 그런 나라가 만들어 진 것입니다.

 

성령이 이런 나라를 우리 안에 만들어 가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아요.

세상 가치관으로 대하지 않아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원수를 만들지 않아요.

원수가 생기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죄에 대하여 깨닫게도 하시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하세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사함을 주신다고 하면!

성령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세요.

성령은 그 십자가의 용서하심으로 주어지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들을 깨닫게 하여서 사랑의 빚진 자로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기를 부인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은 성령의 각양 은사들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면 옛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이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품어지면 예수님의 성품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창조된 세상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로 쌓여 있습니다.

 

이 때 빛이 등장하여서 갈라내는 일을 합니다.

빛이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궁창 아래와 궁창 위를 갈라내고!

땅과 바다를 갈라내지요.

그리곤 그 갈라낸 곳에다가 각양의 것들로 채우지요.

궁창에다 채우고!

땅에다 채우고!

바다에다 채우는 일을 하시잖아요.

 

이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우리 안에 죄로 어둠이 가득해요.

어둠이 가득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언약이 심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빛으로 오셔서 우리 안을 갈라내는 것입니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을 갈라내고!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들로 갈라냅니다.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 갈라내세요.

그리곤 성령의 각양 은사들로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베드로후서 1장을 보면 택하심과 부르심이 있는데 예수의 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케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의 성품이 뭔고 하니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어요.

 

이건 한마디로 성령의 열매들이에요.

이걸 우리 안에 가득 채우라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이러한 것들이 와 있어요.

선물로 주어졌어요.

바울은 이걸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고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어요.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 채워지는 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창조인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택하심을 받은 성도는 이러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로 비유하면 택하심은 출애굽을 말하고 부르심은 가나안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출애굽은 옛 사람의 죽음을 말하고 가나안은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말해요.

 

새 사람의 성품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고 신의 성품인 겁니다.

이러한 것은 옛 사람의 성품과 반대되는 새 사람의 성품들입니다.

성도에겐 반드시 이러한 것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고 어둠에 있는 자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하여서 성령이 그 안에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성품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안에서 나타나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않고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겁니다.

우리 안이 가나안이고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우리 안에 천국이 이루어져요.

그 순간은 원수가 사라지고 미움이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요.

 

그 때가 바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예수님의 성품들이 뿜어져 나오고 천국의 맛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안에서 어린양과 사자가 뛰놀고 어린아이가 독사들과 놀듯이 이웃 사랑이라는 모습들이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항상 늘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맛들을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가나안 7 족속을 물리치는 그런 맛을 보게 되어요.

 

그렇다고 가나안 7 족속이 다 물리쳐지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 옛 사람의 성품들이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7 족속을 조금 남겨 두었듯이 우리 안에도 성령이 임하여도 옛 사람의 소욕은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그래서 우린 늘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반면에 우리 마음속에선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몸에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어요.

죄 아래서 태어난 몸이 죽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몸을 덧입게 되면 그땐 우리 안엔 예수님의 성품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천국이에요.

이 땅에서는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서 천국의 맛을 잠깐 잠깐씩 맛보게 하고 누리게 해 주세요.

 

성령이 육신의 소욕과 싸워서 이기면 우리 안에서 천국의 맛을 보게 됩니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에요.

천국을 맛 보게 되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원수는 내가 손해보고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하면 생겨나잖아요.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내가 가해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세요.

나 때문에 저 사람이 힘들구나!

나 때문에 저 사람이 고생 하는구나!

내 욕심 때문에 상대방이 손해를 본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모두가 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긍휼의 마음이 든다구요.

 

예전엔 내가 저 사람 때문에 손해를 본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나 때문에 상대방이 손해를 보고 아파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미안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마음이고 삶에 자세에요.

 

그리하여 내가 아주 나쁜 인간이고 악당이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럴 때 잠깐이지만 상대를 용서하고 긍휼의 마음으로 섬기고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면 십자가에 용서가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다가오게 되어요.

내가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알 때 비로서 남을 미워 할 수가 없고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나쁜 인간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면 남을 판단하고 미워할 수가 없어요.

 

이러한 용서의 나라!

긍휼의 나라!

평화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은혜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 받기를 사모하라고 한 겁니다.

이런 나라가 우리 안에서 확장되려면 날마다 가나안 족속인 우리 옛 사람들을 죽이는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에 품어지기를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내가 엄청난 은혜를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범사가 감사가 되어지고 예수의 맛을 내는 삶을 살아 갈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 안에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며 어린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당하지 않는 그런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존귀한 자리를 버리고 비천한 종의 형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어주신 그 예수님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이루어 주신 그 천국을 마음껏 누리며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그 언약이 있기 때문에 실패 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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