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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 (창세기 강해) 11강.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 (창 2:1-2)

by coroa 2022. 8. 27.

성경구절

 

 

 

 

 

 

11강.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 (창 2:1-2)

창 2:1-2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정낙원 목사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이 납니다.

창세기는 시작을 알리고 요한계시록은 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을 창조 7일로 본다면 창세기는 첫째 날이 되고 요한계시록은 일곱째 날이 됩니다.

 

첫째 날은 창조의 시작을 알리고 있고,

일곱째 날은 창조의 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 시대는 요한계시록이 응해져 가는 시대가 됩니다.

 

첫째 날이 역사의 시작이라고 하고,

일곱째 날이 역사의 끝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이니까 실제 역사는 여섯째 날이 마지막 날이 됩니다.

 

일곱째 날 안식하는 날은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주어지는 날입니다.

그럼 지금은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시기이므로 여섯째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는 사회 전반에서 여섯째 날의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짐승과 사람의 창조가 일어난 날입니다.

짐승은 땅에 속한 자를 상징하고 사람은 하늘에 속한 자를 상징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는 땅에 속한 자들과 하늘에 속한 자들의 그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종말은 모든 일의 정체성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참과 거짓이 드러나게 됩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대입니다.

땅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가 그 정체성을 확연하게 드러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을 성도의 구원으로 본다면,

창세기는 구원의 시작이고 요한계시록은 구원의 마지막이 됩니다.

그럼 지금 이 시대 성도들의 신앙은 요한계시록적인 신앙관으로 살아가야 하는 때입니다.

 

요한계시록적인 신앙이란? 종말론적 신앙을 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 끝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이 세상은 멸망하고 언약의 후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식으로 말하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면서 기도하여야 하는 때입니다.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때입니다.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신경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찾아야 할 때입니다.

 

종말은 심판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이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 속에는 이 세상 것은 없습니다.

믿음 속에는 하늘에 것만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가치로 살지 않고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이 가치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니라 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니라 는 계획된 일을 모두 마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면 우리의 구원이 완성의 수준으로 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열매가 다 익어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 신앙이 아니라 어른의 신앙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종말은 추수하는 시기입니다.

농부는 잘 익은 열매를 추수합니다.

그럼 우리의 신앙도 확인하여야 합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인지 아니면 열매를 맺고 있는 나무인지 확인하여야 합니다.

 

창조 7일은 역사 전체를 조감하고 있습니다.

7일 동안 일어나는 창조 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가는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원이 시작 되었습니다.

 

첫째 날은 예수님의 오심이 되고,

일곱째 날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됩니다.

이를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심이라고 합니다.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은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언약적으로 말하면 창세전 언약이 완성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완성이 되면 이 세상은 철거가 되고 태초의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면 모든 성경 이야기는 완성이 됩니다.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진행이 되어서 그 끝을 다하게 됩니다.

 

시간의 끝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종말은 또 다른 시작을 몰고 옵니다.

종말과 창조는 동시적으로 일어납니다.

 

십자가는 죽음이면서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십자가는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시작이기도 합니다.

마치 씨앗이 죽어서 새로운 싹을 내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은 흙에서 난 사람의 종말입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는 영원히 갈라지는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천국으로 가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천국과 지옥은 영원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죽음은 종말이면서 영원으로 나아가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종말은 시간의 세상은 끝을 내고 시간 바깥의 영원이라는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영원에서 나왔다가 잠시 시간 속에서 존재하다가 다시 영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영원과 영원 사이에 역사가 점처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 역사는 한 경점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간 바깥에 게시는 분입니다.

시간 바깥 영원에 계시던 하나님이 왜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의 세상을 만들었을까요?

이는 시간 속에서 창세전에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일을 이루시고자 하심입니다.

이름하여 창세전 언약입니다.

 

세상 역사는 때를 따라서 변해갑니다.

마치 씨앗을 뿌리면 처음에는 싹을 내고 자라가면서 모양을 달리하듯이 이 세상 역사도 끝을 다하여 가면서 종말의 모습들을 드러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종말은 항상 타락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종말은 생명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그 시작은 아름답지만 끝은 추해집니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하듯이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그러합니다.

 

피조물들은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전개가 됩니다.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습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태어나면서부터 소멸되어가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꽃도 봉오리에서 만개하여 피었다가 시들어서 떨어집니다.

아름다움에서 추함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짐승도 새끼 때는 귀엽다가 장성하면 포악해지고 늙으면 힘없이 죽어가게 됩니다.

 

사람도 갓난아이의 귀여움으로 시작하여서 점점 자라면서 인간의 추악한 본성들을 뿜어내다가 늙어서는 기력이 쇠잔하여서 추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젊음이 영원한 것 같지만 바람처럼 금방 지나갑니다.

 

성경은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망자(亡者)의 주검 앞에서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찰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이렇게 죽을 터인데 오늘이라는 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찰을 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이고 죽음 이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죽음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잊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고 내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내생은 이생에서의 삶으로 결정이 납니다.

이생은 내생을 준비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를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우린 죽으면 끝이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내생이 있다고 알려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면 늙은이는 꿈을 꾼다고 합니다.

 

꿈은 소망을 말합니다.

늙은이에게 소망이란 무엇인가요?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첫 열매로 보여 주었습니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후패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의 죽음을 썩을 것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소망을 가지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돌아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죽으려면 점점 쇠잔해 가야 합니다.

망가져 가야 합니다.

 

망가져 감이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망가져 간다는 것은 새로운 세상이 가까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늙고 병듦이 저주가 아니라 새로운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역사는 사 계절과 같이 흘러갑니다.

처음 시작이 된 세상은 봄처럼 살기 좋은 세상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겨울로 나아갑니다.

점점 살기 나쁜 환경으로 바뀌어져 갑니다.

 

인간들도 과거에는 순수함도 있었고 착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흉악해지고 패역해지고 인간성을 상실하고 악해져 갑니다.

인간이 짐승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들이 서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가 할 수 있을 정도로 악해져 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창조 7일 중에서 여섯째 날에 짐승과 사람이 창조가 됩니다.

이는 사람과 짐승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짐승과 사람의 창조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 나타나고,

어떤 사람은 마귀에게 속하여서 마귀의 형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삶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과 짐승의 모습으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0-12절.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봉하지 말라는 것은 숨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상을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고 합니다.

종말에 인간들의 모습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불의에 속한 자는 불의가 더욱 더 드러나게 될 것이고,

의에 속한 사람은 더욱 더 의로움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각자의 속성을 가을철 열매처럼 각자의 모습으로 확연하게 드러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드러나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의 형상으로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 짓을 하고,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면 각자 일한대로 갚아 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하듯이 양은 천국으로 염소는 지옥으로 분리하게 됩니다.

 

지금은 역사의 종말입니다.

여섯째 날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와 짐승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종말에는 항상 악이 선을 이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거짓이 참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인간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고 뱀의 말로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짜는 적고 가짜가 많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는 진짜는 항상 핍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이 되면 더욱 더 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짐승들이 창궐하는 시대입니다.

죄악이 관영해지는 때 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왜 이리 광포해지고 인간들이 왜 이리 악독해집니까?

모두 그 끝이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룬다는 말은 열매가 다 익었다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익어가고,

나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익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가 되어서 사람 농사를 짓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그 아들을 한 알의 밀알처럼 씨로 뿌렸습니다.

그런데 원수가 하나님의 농사를 방해하려고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세상 속에 두 씨가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씨와 마귀의 씨가 함께 자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친구처럼 지냈는데 시간이 갈수록 각자의 속성들을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에게 속한 자는 예수의 생명으로 드러내고,

마귀에게 속한 자는 마귀의 속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농사를 지을 때는 곡식과 가라지를 함께 두었지만 종말에는 추수하여 분리를 시킵니다.

 

곡식과 알곡은 천국이라는 곡간에 넣고,

쭉정이와 가라지는 지옥이라는 불 못에 집어넣습니다.

세상 속에서는 함께 있었지만 추수 때가 되면 영원히 갈라지게 됩니다.

 

각자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종말은 창조를 몰고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종말은 새로운 세계로 이동케 합니다.

곡식들은 천국으로 옮겨져서 영원으로 살아가게 되고,

가라지는 지옥으로 옮겨져서 영원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곡식인 성도에게는 종말은 기쁨의 날이고,

가라지들에게는 종말은 저주의 날이고 슬픔의 날입니다.

그래서 가라지들은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더 오래 살고 싶어하고 영속하기를 꿈꾸는 것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서 천국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가라지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의 삶을 연장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가라지들의 본능 속에는 이 세상이 다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이 예수님이 오시니까 왜 왔느냐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자기들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들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싫어합니다.

자기들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죽음을 싫어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루라도 더 연명하고자 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영벌의 세계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자녀들은 과학을 동원해서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자 분주합니다.

생명을 연장하려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끝나면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세상의 수고를 그치고 눈물 없고 고통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사망이 없는 안식하는 나라로 이사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종말은 복된 날이고,

어떤 이에게는 종말은 저주의 날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는 말씀은 곡식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지만 가라지들에게는 슬픈 소식인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는 성도들에게는 모든 수고를 그치게 하는 날입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는 복음인 것입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시작한 때가 있으면 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구원의 시작이 있으면 구원의 끝도 있습니다.

 

성경을 열면 맨 처음 하는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운을 뗍니다.

그리고 성경의 맨 마지막에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막을 내립니다.

이를 창세기에서는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나라입니다.

이를 하늘나라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란? 육의 반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육의 나라는 피조 세상을 말하고, 영의 나라는 창조 세계를 말합니다.

 

영의 나라인 창조 세계는 하나님이 사는 세계입니다.

피조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로 생겨난 세상입니다.

피조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의 나라로서 영물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피조물인데 영물입니다.

영물이란 신적 존재를 말합니다.

이를 천사라고 합니다.

 

천사는 피조물입니다.

천사는 영물로서 신적 존재입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인데 신적 존재로서의 피조물입니다.

천사들은 신의 나라에서 수종을 드는 신적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창조하여서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두셨습니다.

그 모습이 에스겔 2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스겔 28장은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28장을 봅시다.

 

겔 28:11-19절.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2.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 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 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 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17.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 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 18. 네가 죄악이 많고 무역이 불의하므로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어 너를 사르게 하고 너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너로 땅 위에 재가 되게 하였도다 19. 만민 중에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임이여 네가 경계거리가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로다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습니다.

천사들 중에서 찬양을 맡은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를 일컬어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고 합니다.

덮는 그룹은 성막을 보면 지성소에 법궤를 지키는 수호천사를 말합니다.

 

덮는 그룹은 마치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경호 실장을 합한 위치와 같습니다.

천사들 중에서 으뜸의 천사인 것입니다.

수많은 천사들로부터 부러움의 대상의 자리입니다.

이를 천사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놈이 교만하였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천사들이 많으므로 교만하여 하나님 행세를 한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 자리까지 넘보게 된 것입니다.

피조물이 신이 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최초로 죄의 모습이 드러난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자리를 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자기가 영광을 받고자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리를 탐하는 자들을 땅으로 쫓아내십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 14장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14장을 봅시다.

 

사 14:12-15절.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5.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에스겔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고 했습니다.

덮는 그룹을 이사야에서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라고 합니다.

이를 ‘루시퍼’ 라고 합니다.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인 사단을 말합니다.

 

루시퍼가 무슨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 쫓겨났습니까?

하늘에 올라서 하나님의 뭇별 위에서 보좌를 틀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죄라고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그늘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다서에서는 이것을 자기 지위를 떠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의 위치를 벗어나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루시퍼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음부로 던져 버렸습니다.

에스겔에서는 땅으로 던졌다고 합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난 땅을 신약의 유다서와 베드로후서에서는 흑암과 지옥이라고 합니다.

 

유 1:6절.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벧후 2:4절.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 나라에 천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영적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이 사는 하나님의 동산인 에덴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천사들이 범죄하자 땅으로 쫓아냈습니다.

천사들이 쫓겨난 땅을 지옥이라고도 하고 음부라고도 하고 흑암이라고도 합니다.

영적 의미에서는 흑암이나 음부나 지옥이나 땅은 같은 뜻입니다.

모두가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곳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살아가는 나라가 있고, 타락한 천사들이 살아가는 나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가는 나라를 천국이라고 하고,

타락한 천사들이 살아가는 곳을 땅이라고도 하고 지옥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에서 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천지란? 하늘과 땅입니다.

하나님이 하늘나라도 창조 하셨고 땅 나라도 창조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영적 존재인 천사들이 살아가고,

땅 나라는 육적 존재인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천사들을 땅으로 쫓아낸 것은 육적 존재들과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들이 육적 피조물 속에서 기생하게 된 것입니다.

타락한 천사들인 귀신은 육적 피조물과 운명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사람)에게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라고 미혹을 하였다가 아담과 함께 에덴동산 바깥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하늘나라에서 하던 짓입니다.

 

마귀가 영적 세계에서 하던 짓을 육적 세계에서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대상이 육적 피조물인 인간인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자신이 하나님 자리를 탐하였고,

세상 나라에서는 인간들을 하나님 같이 되라고 꼬셨던 것입니다.

 

인간이 뱀(마귀)의 미혹에 넘어가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하나님은 뱀과 함께 범죄 한 인간을 에덴동산 밖 저주 받은 땅으로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땅을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에스겔 28장과 이사야 14장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상에서는 영적 피조물인 천사들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다가 땅으로 쫓겨났고,

지상에서는 육적 피조물인 인간들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다가 땅으로 쫓겨났습니다.

 

천사들이 쫓겨난 땅이 지옥이듯이,

인간들이 쫓겨난 땅도 지옥입니다.

이 모습이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창 1: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3:17절.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1장 2절의 타락된 땅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땅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범죄한 아담이 살아갈 땅과도 같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은 3장의 땅과 같은 이중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천상에서 마귀가 쫓겨난 땅이기도 하고, 아담이 쫓겨난 땅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책을 쓸 때 제일 앞에 책의 전체 내용을 이야기하는 목차가 있습니다.

목차의 내용이 책 전체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순차적으로 서론 본론 결론이라는 것으로 마감을 합니다.

 

성경이 그러합니다.

창세기 1장은 성경 전체의 목차와 같습니다.

1장 속에 성경 전체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이야기를 2-3장에서 아담과 하와를 가지고 축약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 4장 이후 온 인류 역사에 걸쳐서 확대 되어서 나타납니다.

4장 이후의 인류 역사를 꺼꾸러 되돌리기를 하면 창세기 1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천지를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천지란 하늘과 땅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하늘은 사라지고 땅만 나타납니다.

2절에 나타난 땅의 모습이 바로 천사들이 쫓겨난 땅인 음부와 흑암과 지옥의 모습인 것입니다.

천사들이 쫓겨난 땅이 창세기 1장 2절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라는 말씀은 두 세계의 창조가 일어났음이 됩니다.

천(天)이라는 하늘나라와,

지(地)라는 땅 나라를 창조하신 것이 됩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처음 창조된 세상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된 세상이 하늘과 땅으로 나타납니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5-17절.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창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보이는 곳은 땅이고, 보이지 않는 곳은 하늘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창조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은 하늘에서 살던 천사들이 쫓겨난 땅인 것입니다.

천사들이 쫓겨난 땅을 음부라고 하고 흑암이라고 하고 지옥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2절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중에 있는 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놓여 있는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영적 의미에서 창세기 1장 2절의 땅의 모습은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아담이 쫓겨나서 살아가는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땅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창조하시니라” 는 영적인 의미에서 천사들이 살아가는 천(天)이라는 하늘나라와, 인간들이 살아가는 지(地)라는 이 땅을 창조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2절부터는 하늘은 사라지고 땅만 나타납니다.

 

땅에서 창조가 일어납니다.

이는 땅에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창조인가 하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 구원하는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 예수님께서 일하심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예수님의 구속사 이야기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합니다.

 

어둠에 비췬 빛을 일컬어 참 빛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참 빛이십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이 죄악 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서 첫째 날 빛으로 나타났습니다.

흑암 속에 빛이 비췬 것은 죄악 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구원이라는 창조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참 빛이 흑암에 비취자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가 갈라집니다.

흑암 속에서는 하나였는데 빛이 비취자 둘로 갈라집니다.

예수라는 참 빛을 통해서 빛에 속한 자와 어둠에 속한 자가 분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첫째 날 참 빛이신 예수님이 흑암의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이라는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를 거쳐서 여섯째 날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 창조가 됨으로서 창조의 완성이 되어집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는 예수님께서 죄 아래 있던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내시고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채워 가시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이를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니라 라고 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시니라” 는 창조가 완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곱째 날 안식하게 됩니다.

일곱째 날이 다하면 창세전에 하신 언약이 이 역사 속에서 다 이루심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를 창조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천지 만물의 창조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구속사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 안에서 이루시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창조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천지와 만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창조의 첫 순서는 갈라냄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갈라낸 곳에 채워짐이 일어납니다.

천지는 갈라짐이고 만물은 채워짐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구원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먼저 갈라지는 구원이 주어지고,

나중에 채워짐의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갈라내는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건져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회적인 것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졌습니다.

갈라짐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는 채워짐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점진적인 것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으로서 하늘에 신령한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갈라짐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요?

 

장소적으로는 세상에서 교회로 부르심을 입는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는 세상의 가치를 몰아내고 하늘의 가치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의로는 인간의 의를 몰아내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채우심을 입는 것입니다.

언약적으로는 율법이라는 옛 언약으로부터 빼내심을 입고 은혜라는 새 언약 안으로 옮겨짐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죽은 자였습니다.

우리는 사망이라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왔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짐을 당하였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 것입니다.

 

이제 구원의 시작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에서 죽은 자로 살았지만,

이제는 산 자가 되어서 빛의 나라인 교회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천지의 갈라짐과 같습니다.

 

이제 산 자로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라감이 있습니다.

새 사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성령은 새 사람 속에는 하늘에 것으로 채우십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하십니다.

이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일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이라는 어둠에서 나왔습니다.

갈라짐을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집을 짓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오실 때 하늘에 신령한 것들을 가득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를 성령의 각종 은사들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은사들은 집안의 살림살이들과도 같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인 새 집에다가 하늘에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다 채우고 나면 집들이를 합니다.

그것이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 사람과 같습니다.

새 사람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납니다.

우리는 옛 사람으로 있을 때는 죽음의 향기만 토하고 살았습니다.

 

옛 사람은 법으로 살았습니다.

내 의로 살았습니다.

떡의 가치로 살았습니다.

 

옛 사람은 움켜잡고 살았습니다.

상좌에 앉고자 하였습니다.

섬김을 받고 살았습니다.

 

옛 사람은 나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내 영광을 구하고 살았습니다.

내 세계를 확장하고자 살았습니다.

 

옛 사람의 삶을 땅의 삶이라고 합니다.

땅은 받는 것입니다.

움켜잡는 삶입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하늘의 삶을 삽니다.

하늘은 주는 삶입니다.

손을 펴는 삶입니다.

 

새 사람은 예수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가 내 역사를 지우고 예수그리스도의 역사를 새기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의 생명을 토하면서 살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예수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성령은 법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내 의로 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게 하십니다.

떡의 가치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로 살게 하십니다.

 

성령은 움켜잡고 모으고 살지 말고 손을 펴고 나누고 살라고 하십니다.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하십니다.

섬김 받고자 하지 말고 섬기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나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라고 하십니다.

내 영광을 구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고 살라고 하십니다.

내 세계를 확장하고자 하지 말고 예수그리스도의 세계를 확장하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나의 자리에 예수그리스도를 두게 하십니다.

나는 없고 예수그리스도만 남기게 하십니다.

옛 사람은 제하시고 새 사람은 새기십니다.

이것이 아픔이고 전쟁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주도권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을 누가 차지하느냐의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 몸(아담)은 원래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고 난 후 마귀가 우리 몸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의 주인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를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목자는 자기 양을 찾아서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왜 잃은 양이라고 할까요?

원래 자기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께서 자기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7절.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는 원래 유업을 이을 아들입니다.

그런데 잠시 종노릇하도록 두셨습니다.

마치 회장님이 아들을 말단 직원으로 둔 것과 같습니다.

장차 기업을 이어 받을 아들이지만 잠시 동안 기업을 어떻게 경영을 할 것인지를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은혜를 알게 하시려고 법 아래 두신 것입니다.

 

법 아래서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종으로 살면서 아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잃어버려진 상태로 두었다고 합니다.

 

정한 때가 되면 찾으십니다.

정한 때까지 잠시 청지가 아래 종으로 두었습니다.

정한 때가 되면 찾아가서 유업을 얻을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구원의 여정이 먼저 버려짐을 당하는 것이고,

나중에 찾아짐을 당하는 것으로 전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찾아짐을 당하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걸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언약의 후손임에도 정한 때까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한 때가 되어서 모세를 보내서 찾아짐을 당하고 종노릇하던 곳으로부터 출애굽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입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어린 양이 주인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하늘의 시온 산에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힌 144000명이 있는 것입니다.

 

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적혀 있는가 하면 마귀에게 값을 지불하고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의 피 값을 주고 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법정적 선언입니다.

“너는 이제부터 종이 아니고 자유인이다” 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가 갚아야 할 값을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종으로 살던 자들을 아들로 회복 시켜주신 것입니다.

비록 죄의 몸이지만 아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이란?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약속을 믿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몸은 죄 아래서 난 그 몸이지만 법적으로는 죄에서 해방을 맞은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우리를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법정 적으로 너희는 의롭다고 선포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걸 실제로 적용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비록 몸은 죄를 짓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가 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가 되어야 안식이 주어집니다.

믿음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의로 살면 일곱째 날로 살아 갈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의 땅의 모습은 마귀에게 장악당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은 성도 안에서 일어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가 두 구조로 나타나는 것은 성도의 구원이 두 가지 모습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갈라내는 창조가 있고 채우는 창조가 있듯이,

구원도 갈라내는 구원이 있고 채워지는 구원이 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갈라내는 구원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하시고,

의와 거룩으로 채우는 구원은 성령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십니다.

이럴 때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심이 되는 것입니다.

 

천지(天地)는 그릇과 같고,

만물(萬物)은 내용물과 같습니다.

천지를 집이라고 한다면 만물은 세간들입니다.

 

예수님은 엿새 동안 성도의 몸을 가지고 천지와 만물을 이루는 일을 하십니다.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만들어 가듯이 제할 것은 제하고 새길 것은 새겨 가십니다.

성령이 육신의 것은 제하고 신령한 것은 새겨 넣으십니다.

세상 것은 제하시고 하늘의 것을 채우십니다.

이를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간다고 합니다.

 

구원이란? 죄에서 빼내는 것만 있지 않고 의와 거룩으로 채우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심층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미리 아심은 창세전이고,

부르심은 과거이고,

의롭다 하심은 현재이고,

영화롭게 하심은 미래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 시제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구원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셨고,

현재 구원은 부활 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이루어가고 계시며,

미래 구원은 예수님이 장차 재림 하여서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현재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창조 이야기에서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하늘에 신령한 것으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케 하는 일을 하십니다.

시간이라는 역사 속에서 현재라는 시제로 우리 몸을 정복하는 일을 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옛 사람은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리십니다.

세상 것은 빼내시고 하늘의 것은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제하시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게 하십니다.

 

육체의 일인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같은 것들은 제하시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엿새가 차기까지 마귀의 형상은 찍어내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새겨 가십니다.

이 일을 우리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새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일이 다 이루시면 안식을 하십니다.

 

복음 속에는 제하는 것과 채우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복음 운동은 예표적인 것에서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육적 이스라엘을 통해서 육적인 표상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예레미야 1장을 봅시다.

 

롐 1:4-10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8.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합니다.

어떤 말씀인가 하면 자기 백성들을 넘어뜨리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뽑으며 파괴하며 넘어뜨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건설하고 심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먼저 뽑고 파괴하고 넘어뜨리는 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당하고 무너질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세워진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의 말대로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가서 70년을 종살이 하다가 70년 후에 다시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게 됩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 초림 때 다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바벨론에서 해방이 되어서 다시 지은 성전에서 또 다시 죄를 짓습니다.

400년 후에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셔서 다시 성전을 허물어 버립니다.

그리고 온 사방으로 포로로 팔려가게 하십니다.

그것이 신약의 전 기간입니다.

 

예수님 초림 후 약 2000년이 지났습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가 가까워지자 바벨론에서 해방을 시켜서 고토로 돌아가게 하셨듯이 다시 세계에서 유리방황 하던 자들을 고토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1945년에 온 세상에 흩어져 있던 백성들을 고토로 불러들여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그 땅에 심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반드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육적인 표상입니다.

실제는 신약교회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신약의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도 핍박으로 인하여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신약의 2000년 동안 온 세계에 교회 시대가 전개가 됩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온 세계에 흩어진 자기 백성들을 한 곳으로 모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천년 왕국입니다.

천년 왕국이 이루어지면 역사 속에서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이 이루어집니다.

천년동안 일곱째 날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천년이 끝나면 역사 속에서 창조 7일이 완성이 됩니다.

역사 속에서 창조 7일이 끝이 나면 피조 바깥의 하나님 나라인 묵시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 날을 여덟째 날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이 때가 되면 역사 속에서의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이 되고 영원한 안식의 세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은 성령 강림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실제적인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영적으로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여서 이루시는 실제적인 천지와 만물의 다 이루심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하나로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곧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 날을 소망하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어 가심의 그 날이 가까워 옴을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서 시대를 볼 수 있게 하시고 때를 아는 지혜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늘의 소망으로 이겨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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