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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창세기 1~3 강해

♣(창세기 강해) 12강.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1-3)

by coroa 2022. 11. 10.

 

 

12강.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1-3) //창 2:1-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창새기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12강.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 2:1-3)

창 2:1-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정낙원 목사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고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이 되어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 면서 끝을 맺습니다.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이 세상에서의 창조의 일이 마감을 합니다.

이를 모든 일을 다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라고 합니다.

 

시작하신 날이 있고 마치시는 날이 있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세상에서의 일하심은 시작과 끝이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건 시작과 끝이 있는 시간으로 구성이 된 역사의 구조 때문입니다.

역사를 시간의 구조로 두신 것은 역사 자체가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이는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유래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보이는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복사본인 것입니다.

원본은 보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상이란? 역사에서 볼 수 없다는 뜻이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이 세상 바깥에도 세상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나라를 일컬어 태초부터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영원한 나라에서 시작과 끝이 있는 나라가 나온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영원 속에서 계획한 일을 역사 속에서 펼쳐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어떤 목적에 의하여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 목적이 다하면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장소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하시고자 하신 일들을 다 하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을 다 하고 나면 쉼을 가지게 됩니다.

쉼이란? 역사 속에서 할 일을 다 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창조가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을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 이후에는 여덟째 날이 있습니다.

이 세상 역사는 일곱째 날로 마감을 하지만 하나님은 여덟째 날로 존재하십니다.

여덟째 날은 시간이 없는 영원한 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날로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이를 오늘 날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안식일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하고 저녁이 되면 퇴근을 합니다.

출근하는 것은 회사에서 일을 하기 위함이고,

퇴근하는 것은 집에서 쉬고자 함입니다.

 

안식은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쉼은 수고한 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쉼을 누리자면 먼저 수고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쉬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쉬운 예로 말합니다.

요즈음은 실업자 대란 시대입니다.

일을 하고 싶은데 일 할 자리가 없어서 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은 이들을 백수라고 합니다.

 

백수는 일하지 않고 매일 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쉬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 보세요.

그럼 그들은 쉬는 게 아니라 지옥이라고 합니다.

일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쉼이란? 일을 한 사람들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에게 하루의 쉼은 안식이 되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쉬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역설적으로 일하는 것이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엿새를 일한 사람에게는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이 되지만 엿새를 아무 일도 하자 않고 노는 사람에게는 일곱째 날은 동일하게 노는 날입니다.

백수에게 노는 날은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고통스러운 날입니다.

 

안식은 엿새 동안 일한 사람만이 누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만이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하라고 하신 일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 6: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일곱째 날이 천국에서 쉼을 누리는 안식일이 되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쉼을 누리는 날이 아니고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날이 됩니다.

 

안식이란 사전적 의미로는 쉬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서는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사에서 퇴근하면 회사에서의 업무는 끝이 납니다.

그러나 집에서의 일이 있습니다.

 

회사와 집은 다른 세계입니다.

회사에서의 업무는 회사의 일이지만 집에서의 일은 나의 일입니다.

회사에서의 일을 일이지만 집에서의 일은 일이 아니고 쉼입니다.

회사에서의 일은 수고이지만 집에서 하는 일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기쁨을 느끼고 행복해 합니다.

 

몸이 쉰다고 쉬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쉼을 누려야 합니다.

마음에 쉼은 자기만족에서 주어집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을 때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미흡하면 마음에 쉼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완벽하게 이루어졌을 때 다 이루심에 대한 성취감에 기뻐하면서 행복해 하고 쉼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들 봉사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을 하고 난 후에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보람이란 자기만족이고 자기 기쁨입니다.

자기 성취감에서 오는 행복함입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보람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일은 수고하는 것이 아니고 기쁨인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 회사에 출근은 하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등산하고,

어떤 사람은 낚시를 가고,

어떤 사람은 스포츠를 즐기면서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쉼을 누리는 것입니다.

 

회사에 다니는 분들이 일요일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마음에 쉼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땀 흘리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함으로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쉬는 날이 아니고 기쁨을 누리는 날입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에 대하여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마치 아무 것도 안하고 쉬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아무 것도 안하고 쉬는 날이 아닙니다.

자기가 기뻐하는 일을 하는 날입니다.

 

성도에게 기쁜 일이란 무엇일까요?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동안 흩어져 있던 성도들과 만나서 교제를 하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일요일에 교회로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주의 날로 지키는 것은 그것이 기쁨이고 즐거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기쁨이 아니고 억지가 되면 남의 일처럼 수고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나의 일처럼 행복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수고가 아니고 기쁨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여서 갖가지 일을 합니다.

교회에서의 일이 남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수고하는 것이고,

교회에서의 일이 나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동일한 것도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수고입니다.

 

교회는 천국을 예표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에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아들로서 쉼을 누리는 것이고,

교회에서 하는 일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종으로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안식이냐! 수고이냐! 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쉼을 누리면 안식하는 것이고,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하면 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안식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을 하셨다고 합니다.

잘 보시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만드시던 모든 일’을 다 마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창조하시고 만드시는 두 가지 성격의 일이 있습니다.

 

“창조하신” 일은 “바라” 라고 합니다.

 

“바라”는 무(無)에서 유(有)를 불러내는 일을 말합니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 갈라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짓는 것은 채우기 위함입니다.

집을 짓는 일과 채우는 일은 성격이 다릅니다.

 

“만드시던” 일을 “아싸” 라고 합니다.

 

“아싸”는 유(有)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목적에 맞도록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말하면 죄에서 건져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재 창조라고 합니다.

이는 집을 다 짓고 집 안에 필요한 물건들로 채우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짓고 집 안에 필요한 물건들을 다 채우고 나면 이제 그 안에서 쉼을 누리게 됩니다.

이를 일곱째 날에 안식한다고 합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은 일곱째 날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을 위하여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에 모든 일을 다 하시고 안식하시니라가 되는 것입니다.

 

창조는 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집을 짓는 것이고,

둘째는, 집안에 세간들을 채우는 것이고,

셋째는, 완성된 집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집을 짓고 집안에 세간들을 채우는 것은 그 집에서 살아가고자 함입니다.

이를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고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안식은 만들어지고 채워진 집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라”는 천지를 창조한 것이고,

“아싸”는 만물을 창조한 것입니다.

“바라”와 “아싸”가 끝이 나면 안식을 하십니다.

 

이를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합니다.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룬다는 말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완성은 안식하는 것까지입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을 말합니다.

이는 공간을 말합니다.

천지(天地)를 공간으로 말하면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을 뜻합니다.

 

공간은 채움을 위하여 존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공간에 채우는 일을 하십니다.

그것이 천지 속에 만물을 채우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천지라는 공간에 채우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천국과 지옥이라는 공간 속에 채움을 입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양과 염소를 심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양과 염소에게 각각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합니다.

양은 영생의 나라를 상속 받고, 염소는 영벌의 나라를 상속을 받습니다.

영생의 나라는 천국이고, 영벌의 나라는 지옥입니다.

각자 상속 받은 나라로 갈라져 채워지면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심이 됩니다.

 

창조는 천지(天地)라는 공간 속에 만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천지라는 공간 속에 채워지는 만물을 “차바” 라고 합니다.

“차바”는 “무리” 또는 “군대” 라는 말입니다.

“차바”라는 만물을 의인화 하면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합니다.

만군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만군의 여호와라고 합니다.

만군이란? 수많은 군대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할까요?

이는 예수님이 수많은 천국 백성을 다 찾아내서 채우는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는 말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들을 갈라내서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심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구원은 영적으로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것이고,

언약적으로는 율법이라는 옛 언약에서 은혜라는 새 언약으로 옮겨지는 것이고,

종말론적으로는 죄악 된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이를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구원의 서정을 보면 첫째 애굽에서 광야로 빼내심을 입고, 둘째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성전을 짓고 집을 지어서 살아갑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에서 살아난 자들입니다.

이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빼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 빼내심을 입은 자들을 가나안이라는 장소적인 곳으로 인도 하십니다.

이럴 때 구원이 완성됩니다.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도 천국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 동안에는 이동하는 성막에서 하나님께 예배하였지만,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고정된 성전을 짓고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광야는 이 세상을 상징하고 가나안은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첫째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빼내심을 입습니다.

둘째로, 세상에서 교회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빼내심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광야와 같고 천국은 가나안과 같습니다.

교회로 부르신 것은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교회로 부르시고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만 부르시고 데리고 가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자기 백성이라 함은 자기 백성 아닌 자들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말씀 하시면서 너희에게는 허락하였으나 저희에게는 허락 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신 것은 심판입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갈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이 된 ‘너희는’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를 말하고, 천국의 비밀이 감추어진 ‘저희는’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를 말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선택을 입은 자들만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택을 입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천국 복음은 모두가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선택을 입은 자들에게만 들려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생 하셨을 때 천사들이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하고자 그 아들을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만 죄에서 구원을 해 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부르신 것입니다.

이들이 12 제자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12제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12 제자들이 바로 너희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을 비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택한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밀은 자기편에게만 알려져 있습니다.

천국복음은 들을 귀를 받은 자만이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하시면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만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다 예수를 믿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모든 사람이 다 듣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창세로부터 결정이 되었으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은 너무도 억울하고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열려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정은 인간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언약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 입장에서 이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원의 주체가 아닙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피조물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이 하는 일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인간 입장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불합리하다고 여기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구분해 놓은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예정을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게 죄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안 믿어질까요?

믿음을 선물로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창세전에 예정이 되었다는 말이 기쁨으로 들리지 않을까요?

이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을까요?

이는 예수를 믿을 사람들이 따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않을까요?

이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받은 사람들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교회로 오지 않을까요?

이는 예수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이 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를 믿을 자와 믿지 않을 자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을 한 자와 녹명 되지 않은 자로 구분해 두신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새 언약의 복음을 듣고 교회에 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인간들이 선택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결정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싶다고 해서 믿고 내가 예수 믿기 싫다고 해서 안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결정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 우리가 결정했나요.

여러분은 결정해서 믿었을런지는 몰라도 저는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어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영적인 일에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은 무용합니다.

인간은 영의 지배를 받는 자이지 영을 지배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을 인간의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사단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손상케 하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행위를 섞어서 부패케 합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갈 영광을 인간이 가로채게 합니다.

이를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강탈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을 봅시다.

 

마 12:28-29절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니까 예수를 비방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라고 합니다.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고서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라가 분쟁하면 어찌 설 수가 있겠느냐,

즉 귀신끼리 싸우면 어떻게 사단의 나라가 서겠느냐 황폐하고 말지,,

 

예수님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내가 귀신보다 강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 오려면 먼저 그 주인을 결박하고 난 후에야 빼앗아 오게 된다고 합니다.

내가 귀신을 쫓아 낸 것은 내가 귀신의 왕을 결박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귀신의 왕인 사단에게 붙잡혀 있던 자들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단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사단을 결박하고 난 후에 우리를 꺼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언어로 구원은 하나님의 폭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폭력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이 우리를 구원해 내신 것이지 우리 스스로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폭력)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한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가 어떻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까?

어불성설입니다.

이건 교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싶어도 사단을 이기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단을 결박하고 우리를 꺼내 주어야지만 합니다.

그럴 때만이 예수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스스로 무덤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나사로는 사망에 결박을 당하고 무덤에 갇혀 있었습니다.

사망에 결박당한 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너라 고 해야지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단의 결박을 풀어 주어야지만 무덤에서 나와서 다닐 수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온 것이 구원입니다.

나사로가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자들은 인간은 죄로 죽은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결정해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예수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은 인간의 힘으로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로 올라가고자 하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들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결정하는 것에 사용하는 말이지 하늘에 속한 영적이고 신령한 일을 결정하는데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지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이래라 저래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전에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죽은 것입니다.

그 때는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갔습니다.

이를 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결정 권한이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행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자유의지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자력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이라는 말 자체가 타자에 의하여 건져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행위가 아니고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자유의지는 구원 받은 후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악을 멀리하고 선을 쫓아가는 것에 자유의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 자유의지가 통용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는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온전이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자유의지는 죽은 것이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데 있어서는 자유의지를 발동하여서 선택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로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자유의지를 고집한다고 하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발동을 하고, 녹명되지 않은 자들은 거부하는 쪽으로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니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을 자들을 미리 정해 놓았습니다.

이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구원 받을 자는 미리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정한 법칙이고 스스로에게 하신 언약이고 확정적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영화의 시나리오와 같습니다.

영화를 찍기 전에 먼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감독은 영화를 시나리오대로 찍습니다.

시나리오는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들이 찍는 영화의 시나리오는 경우에 따라서 수정이 되고 바뀔 수가 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상황에 따라서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은 불변하는 것이고 확정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께서 정하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무나 내게 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로 이끄는 사람만이 올 수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봅시다.

 

요 6:35-4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42. 가로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그리고는 떠나갑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고 나를 믿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된다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를 믿게 해 주는 자들만이 예수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들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믿을까 말까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모르는 놈은 쥐어줘도 모르는 것처럼 창세전에 선택을 입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알려주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이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천부께서 심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천부께서 심지 않은 자들은 다 뽑힌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가 아닌 자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십니다.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십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계획도 하나님이 세우셨고,

그것을 역사 속에서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그 일을 완성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만물이 주로 말미암고 주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자들은 인본주의자들입니다.

인본주의란?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정권을 인간이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알미니안 계통의 성화주의자들이 이들입니다.

이들은 인간 쪽에서 예수를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 결정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인간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도 내가 마음을 열어서 받아 들여야 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들이 의지적으로 판단하고 결정을 하여서 수용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어서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부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은혜를 받을 수도 있고 거부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분만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들의 주장대로 라고 한다면 인간의 결정에 따라서 천국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천국과 지옥은 인간이 결정하여서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면 구원도 내 의지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결정을 해 놓아도 인간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구경꾼에 불과 합니다.

인간들의 처분에 따라서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들에게만 예수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들이 가고 싶다고 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의 주인이 오라고 해야 갈 수가 있습니다.

천국의 주인은 아무나 부르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백성들만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교회에게만 주었습니다.

교회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버지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가 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만세로부터 감추인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곳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인 것입니다.

십자가 도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자들로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것이 12 제자로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12 제자들이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12 제자들의 신앙고백이라 터 위에 하나님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을 부르셔서 서로와 서로를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벽돌처럼 사용하여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을 집을 짓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는 창세전 계획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 하셨습니다.

창조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로 나타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원인이 먼저이고 사건은 나중입니다.

 

사건은 원인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원인이 다하면 사건은 종결이 됩니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은 멸망 할 것을 창조 하셨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니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태초에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두셨고 하늘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멸망할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 세상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옷처럼 점점 낡아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낡아진다는 것은 기능을 점점 상실해 간다는 뜻입니다.

수명을 다해 간다는 뜻입니다.

수명을 다한다는 말은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 기한에 따라서 점점 후패해져 가는 것입니다.

 

만물은 우리 몸과 같습니다.

우리 몸은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시간이 갈수록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망가져 가는 것을 늙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끝에는 죽음으로 이생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죽음 후에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이는 영생으로 살아가고, 어떤 이는 영벌로 영원히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피조 된 세상이 그러합니다.

만물도 우리 몸과 같이 후패해져 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 속한 모든 피조물들은 이 과정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지구는 사용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점점 그 기한을 다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가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각종 천재지변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천재지변은 지구가 기능을 점점 상실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 몸처럼 늙어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신 것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천지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세전 언약은 죄 아래 있는 자기 백성들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그의 나라에서 세세토록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언약이 완성 된 상태를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셨다고 합니다.

첫째 날부터 시작된 천지를 만들고 만물을 채우는 일이 여섯째 날까지 다 이루십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안식합니다.

마치 집을 짓고 세간들을 다 채우고 집들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가 창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에 다 하므로 안식하셨다고 합니다.

일곱째 날 안식하는 것까지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까지 다 이루어지면 여덟째 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곱째 날 안식이 있고 여덟째 날 안식이 있습니다.

 

일곱째 날 안식은 피조 세계에 속하였고,

여덟째 날 안식은 역사 바깥에 있습니다.

역사 바깥을 묵시라고 합니다.

묵시는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천국이라고 합니다.

창세전 언약의 완성지점은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하는 것까지입니다.

역사 바깥 천국에서의 안식은 역사 속에서 일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 속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긴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지옥을 경험한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죄 아래서 건짐 받은 자에게 주어집니다.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일을 누가 하셨나요?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구원은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을 일컬어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이야기 하고 구원을 그 잔치에 초대 받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자기백성들을 구속하는 일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7일 동안의 창조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조는 구원과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첫째 날입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첫째 날 참 빛이신 예수님이 흑암과 혼돈과 공허한 어둠의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의 아들들을 불러내고 그들 속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다 채워지면 추수하여 곡간에 들이십니다.

이것이 일곱째 날 안식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이야기는 우리의 구원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시작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을 옮겨지게 된 것입니다.

어둠의 나라에서 낮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 합니다.

 

첫째 날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곱째 날까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삼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라는 과거 시제와,

“구원을 이루라”는 현재 시제와,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는 미리 시제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받은 구원은 죄와 사망에서 빼내심을 입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단회성으로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이를 ‘구원을 받았다’ 라고 과거 시제로 말합니다.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은 의와 거룩으로 채움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사람으로 충만하게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는 광야 40년과 같습니다.

현재 구원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시제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현재 이루어가는 구원이 끝이 날 때가 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것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므로 미래 시제로 ‘구원을 이룰 것이다’ 라고 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야 하는 구원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이를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부에게 결혼은 가장 영화로운 날입니다.

어린 양의 신부가 되어서 천국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생명의 자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깊이가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을 이루어 간다고 합니다.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 창조의 일인 것입니다.

 

창조의 일이 있으므로 안식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 하라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하여 살지 말고 하늘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라질 것이고 하늘나라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인가요?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떡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세상을 위하여 살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일컬어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영생의 나라입니다.

안식의 세계입니다.

 

성도에게 일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일곱째 날 여호와의 안식과 여덟째 날 안식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살면서 세상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을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살아가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하지 않았으니까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 나라에 살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하늘나라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세상에서는 자연히 외국인과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삶이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일을 하느라고 세상에서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엿새 동안 땀 흘려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렸으니 기쁨으로 단을 거둘 때가 옵니다.

그 때가 예수님이 재림 하시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일곱째 날 안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그동안 누리지 못한 것들을 천국에서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장차 올 영광은 현재의 영광과는 족히 비교 할 수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성도는 장차 올 영광을 위해서 현재의 고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을 슬퍼하지 말라고 합니다.

고난은 감추인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창조 7일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여섯째 날과 다릅니다.

둘 다 역사에 속하였지만 그 성격은 다릅니다.

 

여섯에 속한 날은 일하는 날이지만,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날입니다.

여섯에 속한 세상과 일곱에 속한 세상은 살아가는 원리가 다른 세상입니다.

 

여섯에 속한 날은 예수를 믿는 일을 하는 날이지만,

일곱에 속한 날은 예수를 믿는 일을 한 자들이 쉼은 누리는 날입니다.

예수와 함께 살아가는 날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쉬는 일곱째 날은 역사 속에서 모든 일을 다 마치고 영원한 안식으로 나아가는 여덟째 날을 예표하고 있는 날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 안식일 속에 여덟째 날 안식의 세계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일곱째 날 안식을 여덟째 날 안식을 예표적으로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중 계시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여덟이라는 말의 의미는 새로운 세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팔일에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는 죽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덟째 날에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난 것입니다.

 

여덟째 날은 예수님이 부활 하신 날입니다.

여덟째 날은 역사에 속한 일곱째 안식 후 첫 날입니다.

이는 역사 바깥에 있는 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여덟째 날은 성령 안에서 평강을 누리는 날입니다.

 

여섯에 속한 날은 우리가 태어난 이 세상에 속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합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이 세상 바깥 여덟째 날을 예표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곱째 날 안식을 통해서 여덟째 날 안식을 미리 맛보기로 지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 안식을 이 세상에서는 주일로 담아 놓았습니다.

주일은 일곱째 날 안식을 예표하고 일곱째 날 안식은 여덟째 날 안식을 예표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일곱째 날 안식과 여덟째 날 안식을 동시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모여야 합니다.

주일에 모여서 일곱째 날 안식을 미리 맛본 자들에게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일곱째 날 안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천년 왕국이라고 합니다.

일곱째 날 안식은 천년왕국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년 왕국은 역사에 속한 곳입니다.

하지만 역사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에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간 곳이 없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창조 7일로 보면 여섯과 일곱은 같은 날입니다.

같은 영역에 속하였다는 뜻에서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미적으로는 여섯은 일하는 곳이고 일곱은 안식하는 곳입니다.

일하는 것과 안식하는 것에서는 다른 날인 것입니다.

이럴 때는 여섯은 이 세상이 되고 일곱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에 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역사라는 곳에 속한 것이지만 의미적으로는 여섯에 속한 이 세상과 다른 곳입니다.

이는 일곱째 날 속에는 이 세상 바깥의 날인 여덟째 날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년 왕국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나라이지만 역사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 때 몰고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이 살았던 에덴동산인 것입니다.

에덴동산도 역사 속에 있는 땅입니다.

첫 아담은 역사 속에 실존한 인물입니다.

그럼 첫 아담이 살던 에덴동산도 역사 속에 실존하는 땅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아담을 에덴동산 바깥에 있는 땅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에게 에덴동산은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아담이 쫓겨나서 살아가는 땅이 지금의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에덴동산 바깥에 있는 땅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이 살아가는 땅을 저주 하셨습니다.

그 땅이 바로 이 세상인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이 에덴동산과 땅을 격리를 시키고 에덴동산을 감추어버린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감추어진 에덴동산이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서 몰고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도 역사에 속한 피조 세계입니다.

 

에덴동산은 죄 없는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죄 있는 자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에덴동산에서 살아갈 수 있는 몸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우리의 몸이 홀연히 변화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몸이 죄 없는 몸으로 바꿔치기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우리의 몸은 변화를 입게 됩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몸으로 입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몸으로 천년 왕국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에게 명령하신 에덴동산을 다스리라는 말씀이 완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년왕국에서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담이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루지 못한 일을 예수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에서의 삶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로 말하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새로운 몸을 입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인 천년 왕국에서는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사망이 다시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죄와 상관없는 몸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 몸이 온전하게 구속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알고 사도 바울은 구원의 완성을 우리의 몸이 구속 받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몸이 구속을 받는다는 것은 온전한 몸으로 변화를 입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두 단계를 거쳐서 완성이 되어 집니다.

 

정혼의 단계와 결혼의 단계가 있습니다.

정혼의 단계는 약속의 단계입니다.

신랑이 신부에게 값을 치루고 사는 단계입니다.

 

신랑은 아내를 위하여 결혼 지참금을 주고서 계약을 맺습니다.

이렇게 되면 혼인 언약이 성사가 된 것입니다.

비록 함께 살지는 않지만 실제 부부로서 언약이 맺어진 것입니다.

언약을 맺고 난 후에 대략 약 1년 후에 데리러 오겠다고 하고선 자기 집으로 떠나갑니다.

 

이스라엘은 정혼 단계부터 실제로 여깁니다.

비록 몸으로 함께 하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혼한 여자는 비록 친정집에서 살아가지만 남편 있는 몸으로서 몸의 행실을 바르게 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준 빙폐물로 몸을 단장하고 신랑을 기다리게 됩니다.

 

정한 때가 되면 남편이 와서 신랑의 집으로 데리고 갑니다.

신랑의 집에서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그 동안 정절을 잘 지켜 준 것에 대하여 고맙다고 하면서 곡간 열쇠를 주고서 집안의 주인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신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신분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시집의 가풍에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친정에서의 법도는 잊어버리고 시집의 법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결혼 풍습은 성도의 구원과도 같습니다.

 

성도들의 구원도 두 단계를 거쳐서 주어지게 됩니다.

먼저 정혼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인침으로 보증을 받는 단계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 값으로 우리를 샀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이 와서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령으로 거듭남과 동시에 예수님과 정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습니다.

임자 있는 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믿음의 정절을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땅에 지체를 죽이고 하늘에 신령한 것을 쫓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을 소욕을 쫓아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이게 거룩한 전쟁입니다.

거룩한 전쟁은 역사 속에서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루어집니다.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을 봅시다.

 

롬 8:29-30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들을 일컬어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은 의롭다 여겨 주십니다.

의롭다 여겨 주신다는 것은 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것을 인(印)을 쳐 준 것입니다.

이게 정혼의 단계입니다.

 

정혼한 자에게 성령의 은사들을 주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정혼한 성도들은 이 땅에서 엿새가 차기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을 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일컬어 엿새 동안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정한 때가 되면 자기 신부들을 데리러 오십니다.

자기 피 값을 주고 산 신부들을 데리러 재림하시는 것입니다.

정혼한 신부들은 신랑의 재림을 손 꼽아가면서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한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안식을 준비해 두신 것입니다.

그것이 일곱째 날 안식일입니다.

 

여섯에 속한 세상은 우리가 태어나서 자란 친정집과도 같습니다.

여자가 어려서는 친정집에서 살다가 장성하면 남편을 따라서 시집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시집으로 가면 친정에서의 모든 삶은 청산을 합니다.

시집에서는 친정의 것은 필요가 없어집니다.

 

시집에는 시집의 것들이 있습니다.

시집의 문화가 있고 시집의 가풍이 있습니다.

이제는 친정집에서의 삶은 다 잊고 시집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시집에는 남편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남편의 가족이 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가족 관계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누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 형제들이 오는 것을 보고서 네 가족들이 온다고 하니까 땅에 있는 자가 내 가족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자가 내 가족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여자가 남편을 따라서 시집을 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시면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친정집을 떠나게 됩니다.

신랑의 집으로 영원히 이사를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린 양의 혼인 잔치라고 합니다.

 

일곱째 날은 신부가 신랑 집에서 결혼하는 날입니다.

가장 기쁜 날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을 복된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복을 주셨습니다.

이는 일곱째 날에 참석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수고했으니 이제 평안히 쉬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이 날이 약속 되어 있기에 견디어내는 것입니다.

 

정혼을 한 여자가 친정에서 정절을 지키고 사는 일은 고난이고 아픈 일입니다.

주변에 늑대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깥나들이도 조심하고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가 정조를 지키는 일이 아픔이듯이,

성도가 믿음의 정절을 지키는 일은 고난입니다.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미혹합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것을 불같은 시험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5-7절.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말세에 나타나기로 한 구원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주어지는 구원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신랑의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입니다.

 

신랑 집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삶이 잠간 근심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정혼을 하였기 때문에 당하는 아픔들인 것입니다.

영광의 아픔인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역사가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보호하심도 강하게 작동을 하십니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이렇게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이 능력으로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을 봅시다.

 

딤후 4:17-18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은 수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핍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을 능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지켜 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악한 일에서 건져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천국에도 넉넉히 들어가도록 구원을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 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핍박과 고난을 이겨 낸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고,

욕을 먹고 조롱을 당하고 수치를 견뎌 낸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고난과 안식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모습은 다르지만 하나입니다.

안식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약속이 없다면 아무렇게나 살면 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안식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우리 안에서 너는 예수그리스도와 정혼한 자라고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 예수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처럼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절제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고난입니다.

장차 주어질 안식을 위한 고난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을 봅시다.

 

살후 1:5-12절.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 6.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데살로니가 교회는 재림 신앙으로 무장이 된 교회였습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이 가장 강한 교회였습니다.

그 이유는 상대적으로 환난이 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할 때는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차 안식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견뎌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에게 고난을 가하는 자에게는 그 날에 내가 반드시 환란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고난당한 너희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아 주신다고 합니다.

 

No cross, no crown

 

‘노 크로스 노 크라운’입니다.

 

고난이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영광은 고난 뒤에 숨어 있습니다.

십자가 뒤에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십자가 너머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나야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여자가 평생 자라온 친정집을 떠나는 것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프고 고통스러운 길을 지나고 나면 기쁘고 영광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결혼을 세상에서 가장 축복된 것으로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의 반대는 수고와 슬픔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율법을 지나서 은혜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게 하셨습니다.

때가 되면 은혜 아래로 옮겨주십니다.

 

마태복은 11장을 봅시다.

 

마 11: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심으로서 언약의 후손들을 율법의 요구로부터 자유케 하시고 쉼을 주셨습니다.

 

율법 아래서는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율법의 요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이 안식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 주신 것입니다.

 

왜? 안식일을 영원한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는가요?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안식이 곧 창세전 언약의 완성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영원한 언약의 표징으로서 행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연습은 실제가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실제가 없는 사람은 연습하지 않습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는 모든 삶을 올림픽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매일 연습합니다.

 

실제가 있기 때문에 죽도록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는 사람은 연습하지 않습니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가 없으니 연습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교회로 모이는 것은 실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가 없는 사람은 모이지 않습니다.

실제가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모이지 않습니다.

실제를 약속으로 받은 사람은 모이고 실제를 약속으로 받지 않은 자는 모이지 않습니다.

이를 각각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합니다.

 

마귀는 실제를 가려서 구원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을 합니다.

 

마귀는 율법을 가지고 인간을 참소하는 일을 합니다.

여기에 걸려들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마귀는 우리의 구원을 빼앗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케 하는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꾸만 법 아래 두고자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그것이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율법이고 생명과는 은혜입니다.

선악과 속에는 우리 자랑거리가 있고,

생명과 속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자랑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귀의 미혹에 자주 넘어지는 것은 마귀가 제시하는 선악과 신앙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럽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뿌듯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상징하는 율법 신앙 속에는 우리 의가 있고 우리의 자랑거리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악과 신앙을 쉽게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 주변을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안에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마귀의 미혹으로부터 이겨내게 하십니다.

 

내 꼬라지를 보면 법에 걸려들어 두려워지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쉼을 누립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선악과로 안식을 잃어버리게 하였듯이,

지금도 마귀는 율법으로 우리의 안식을 빼앗아가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지 말라고 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알려주시고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재 안식을 누리고 지키는 것입니다.

현재 안식은 예수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아들이 되어서 여호와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영적인 안식을 주셨고,

예수님의 재림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누림을 갖는 실제적인 안식을 주십니다.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가 지은 은혜의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신부들에게 은혜의 장막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름하여 심령의 성전입니다.

현재의 안식은 심령에 성전이 이루어진 자만이 누릴 수가 있습니다.

 

마음 속에 율법의 참소를 받으면 안식하지 못합니다.

마음 속에 법이 작동 하면 지옥이 되고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율법의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만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인 새 언약으로만 죄와 사망의 법인 옛 언약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현재의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하여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안식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셔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도말하신 것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안식은 영적으로 누리고,

장래의 안식은 천국에서 실제로 누리게 됩니다.

현재 안식을 누리는 성도에게 미래 안식이 주어집니다.

현재의 안식은 장차 주어지는 안식의 보증금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안식을 예표 하는 현재의 안식을 주일을 통해서 미리 맛보시길 바랍니다.

현재의 안식을 통해서 미래의 안식을 미리 맛 본 자들이 장차의 안식도 소망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미래의 약속을 현재 속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안식을 일컬어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맛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차 주어지는 안식을 예표하는 현재 주일의 모임 속에서 장차 주어지는 일곱째 날 안식일을 맛보면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합시다.

아버지 하나님, 안식일을 영원한 표징으로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일을 통해서 누리는 현재의 안식을 장차 주어지는 영원한 안식으로 미리 맛보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신 안식을 빼앗기지 않고 잘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서 굳게 잘 지키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일곱째 날 안식을 소망하면서 현재를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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