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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24강. 화목 제물의 피와 구속 (롬 3:23-26)

by coroa 2022. 8. 1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4강. 화목 제물의 피와 구속 (롬 3:23-26)

롬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엿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를 역(逆)으로 되짚어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게 하고 자기 영광을 좇게 한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위하여 창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죄가 개입하면서 이 목적이 헝클어지고 말았어요.

이게 죄에요.

 

이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모든 신앙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에요.

 

죄가 뭐냐?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위배가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집안 일을 시키고자 값을 주고 종으로 사 온 놈이 주인 행세를 한단 말입니다.

이건 주객이 전도가 된 것입니다.

 

이걸 역리(逆理)라고 해요.

다른 말로 죄라고 합니다.

죄가 뭐냐? 역리 현상으로 사는 것이에요.

역리(逆理)란? 목적이 뒤 바뀌어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지음을 받았는데 자기가 찬양을 받고 있어요.

예수를 믿으라고 믿음을 주었더니, 예수 믿는 자기를 자랑하고 있어요.

복음을 증거하라고 은혜를 주었더니, 복음 전하는 자기를 자랑하고 있어요.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라고 은혜를 주었더니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있어요.

이걸 하나님 것을 도적질했다고 합니다.

 

영광(榮光)이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를 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에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은 하나님을 기분 좋게 하라는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언제 기분이 좋은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든 상태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걸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옳음이라고 하고 의(義)라고 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되려면 우리가 설치면 안 되어요.

우리가 설치면 설칠수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훼손당해요.

우리가 보기에 좋았더라가 되어요.

이게 죄에요.

 

신앙생활에 가장 나쁜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자기가 뭔가를 해서 변개 시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흔적이 훼손당해요.

하나님의 은혜성이 날아간단 말입니다.

이걸 하나님 영광을 가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섞이지 않은 상태를 거룩이라고 하고 섞인 상태를 타락이라고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혼합하고 섞지 못하도록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통하여서도 율법으로 금지를 시켰던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결혼하지 못하게 하였고!

소와 나귀를 겨리로 밭 갈지 못하게 하였고!

두 가지 재료로 된 옷을 입지 말라고 하였고!

한 밭에 두 가지 종자를 뿌리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건 거룩성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그대로 잘 보존 하려면 어찌하여야 할까요?

이는 자기 생각이 없으면 됩니다.

 

내 생각이 없으면 하나님이 하신 그대로 두게 되어요.

내 생각이 개입되는 순간 하나님이 하신 일에 순수성은 날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에 싸움은 하나님의 것에 우리 것이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개입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예로 들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에 속한 모든 것은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죽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사울 왕은 자기 생각으로 좋고 실한 것들은 살려 두었어요.

그것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친다는 명목으로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뜻에 사울 왕의 생각이 개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다” 고 한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 있어 신앙이란? 하나님이 죽이라고 하면 죽이고 살리라고 하면 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그러지 않았어요.

자기 생각으로 판단했어요.

 

이러한 사고가 사울 왕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에게 나타나고 있어요.

그 속에 죄가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신앙으로 비유하면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꾸만 우리 행함을 끼워 넣고자 한단 말입니다.

 

믿음 속에 행함도 들어가 있는데 우리는 자꾸만 믿음 따로 행함 따로 구분해서 챙기고자 한단 말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행하게 되어 있어요.

행함이 없으면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누가 행하지 않으면 그냥 믿음이 없나 보다! 라고 하면 되는데 우린 자꾸만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강요하여서 도출된 행함은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행함이에요.

이런 행함은 반드시 자기를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분명히 말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반드시 그 믿음이 일으키는 행함이 있어요.

이런 행함이 없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고 종교인이에요.

예수를 믿는 자가 아니고 믿는 척 하는 자에요.

신자 아닌 자를 자꾸만 신자 티를 내게 하지 마세요.

안 움직이면 그냥 내비 두세요.

 

어차피 인간은 자기 믿음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토하여 내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 속에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날 것이고 그 속에 예수님이 안 계시면 마귀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포도나무는 반드시 포도 열매를 맺어요.

그러니 남에 신앙을 내가 이러쿵 저러쿵 관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교회 다니는 것으로 예를 들어 봅시다.

교회가 좋은 사람은 교회에 오지 말라고 해도 오고!

교회가 싫은 사람은 오라고 강요해도 안 와요.

그러니 오라 말라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간섭하시겠지 두고 보세요.

그렇다고 무관심 하란 말이 아니에요.

원리를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의(義)란? 하나님이 하신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상태를 말하고!

죄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변개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의(義)에 상태에요.

 

그러므로 피조물 속에 하나님이 하신 일이 손상이 가지 않고 그대로 잘 보존이 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됩니다.

그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 참 잘 만들었다! 라고 하면서 그것을 만든 주인으로서 영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은 단 하나에요.

간단해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대로 순수하게 있는 겁니다.

뭔가 섞이면 안 되어요.

그럼 순수성이 날아가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수박을 만들었으면 수박으로 있으면 되어요.

수박에다 호박을 접붙여서 개구리 수박을 만들면 안 되어요.

하나님께서 개구리 수박이 필요했을 것 같으면 처음부터 개구리 수박을 만들었어요.

수박에다 호박을 접붙이는 것은 창조 질서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왜? 수박에다 호박을 접붙여서 개구리 수박을 만들까요?

 

이는 모두가 인간의 탐욕 때문입니다.

죄가 탐욕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타락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타락이란? 원래의 상태를 상실케 하고 변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우리에게 적용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있어요.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단 말입니다.

그게 뭔가 하면 믿음이에요.

 

그런데 마귀는 믿음에다 인간의 것을 섞으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행위를 섞으라고 해요.

여기에 미혹 당하면 믿음에다 자기 행함을 섞어요.

은혜에다가 자기 행함을 섞는다는 것은 자기 가치를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왜? 하나님의 은혜에 자기 행함을 섞고자 하는가 하면 행함 속에는 자기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예수 믿으면 되는데!

우리는 꼭 예수를 믿는 나도 좀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냥 복음 전하면 되는데!

복음 전하는 나도 좀 알아 달라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나 예수 믿잖아요!

나 복음 전했잖아요!

나 교회에 왔잖아요!

꼭 내가 했다는 것을 끼어 놓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 전하는 자신을 자랑하고 있어요.

이게 부정당하면 화를 내요.

인간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요.

본능적으로 반발해요.

이는 자기의 없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죄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밀어내고 자기 이름을 새기도록 해요.

그런데 성령은 자기를 부정하고 부인하라고 해요.

내 생각을 죄라고 합니다.

 

여기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고난인 것입니다.

달리 고난이 아니에요.

자기 본성에 거스리는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라고 하고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상고해 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후에 인간에게 명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봅시다.

 

창 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는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시지요.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임을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서 만물을 경영(經營)하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이 만드신 회사를 인간에게 경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럼 인간은 만물을 어떻게 경영하여야 할까요?

이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경영해야 합니다.

만물을 다스리되 자기 마음에 맞도록 다스리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다스려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형상(形狀)이라는 말은 모양을 새겨 넣었다는 뜻이에요.

문서화 하였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형상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몸에 그려 놓았다는 의미가 있어요.

인간의 몸에서 하나님이 뜻이 나타나야 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쉬운 말로 하나님 마음이라고 이해하여도 되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한 것은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은 것과 같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형상이에요.

자식 속에 부모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부모의 거울과 같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았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곧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기뻐 할 때가 언제인가요?

그것은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의 경영을 맡겼어요.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만물을 다스려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선악과를 먹어선 안 된다고 했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독자적인 눈과 독자적인 생각을 갖게 되어요.

독자적인 눈과 독자적인 생각을 갖게 되면 독자적인 심판의 기준을 갖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처럼 심판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타락이고 악이에요.

 

피조물이 심판자가 되면 안 되어요.

그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피조물 입맛에 맞도록 개조시켜 버려요.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세상이 자기가 보기에 좋은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피조물인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독자적인 눈과 생각을 가지고 심판자가 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심판자가 되면 만물을 하나님 마음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어요.

이건 창조의 목적에서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걸 과녁에서 이탈하였다고 하여서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가 무슨 훈장님 꿀단지 같아서가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유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심판하는 권세는 오로지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의 목적대로 만물이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뱀의 꾐에 넘어가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하나님의 마음을 상실하였어요.

이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독자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심판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독자적인 존재는 살 수가 없어요.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마음과 피조물의 마음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입장에서 모든 만물을 다 돌아보시는데 인간은 자기 입장에서 돌아보아요.

 

그럼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라가 세워져요.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고 독자적으로 심판하는 마음을 가진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한 것입니다.

그리곤 인간의 본래 자리인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어요.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시 90:3-4=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 임이니이다”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티끌로 돌아가라는 말입니다.

티끌이란 없다는 말이에요.

그러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너라는 존재는 원래 없던 자였으므로 그 없음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네 생각이 없는 자리로 돌아가란 말입니다.

 

원래 인간은 없음으로 창조가 되었어요.

자기 생각이 없었어요.

여기서 없음으로 창조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기 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 없음에서 있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가 없음을 있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놈을 그냥 살려 두면 안 되잖아요.

살려 두면 계속해서 자기 생각으로 자기 세계를 확장하고자 꿈꾸게 될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 나라를 확장하고자 할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야! 너희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그러신 겁니다.

이걸 죽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법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 속에는 인간은 백날 해도 흙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어요.

독자적으로 흙을 벗어 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에서 사람을 만들었잖아요.

흙에서 사람이 되었지요.

그런데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나자 하나님이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흙이 된 것입니다.

 

그럼 흙으로 돌아간 자들이 다시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어야 하겠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던 대로 새롭게 창조를 해 주셔야지 인간이 되겠지요.

여기에 흙에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구원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흙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주실 하나님이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에요.

 

요한복음 20장을 봅시다.

 

요 20:19-23=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에서 흙에다 생기를 불어 넣는 것과 같아요.

 

영적으로 말하면 흙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죽은 자가 산 자가 된 것이에요.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모두가 살아나지요.

비로서 흙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아담이 범죄로 상실한 것을 다시 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창조주로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하나님은 사람에서 흙이 되어버린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아버립니다.

그리곤 그들이 살아갈 땅을 저주해 버립니다.

저주 받은 곳에서 니들 마음대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인간들은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세상을 인간이 보기에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시작을 합니다.

자기 마음에 들도록 다 뜯어 고치기 시작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라를 건설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광의적인 의미에서 온 세계를 말하지만 영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말해요.

우리가 세상이에요.

우리 안에 천지 만물이 있어요.

 

우리는 우리 몸을 우리 뜻대로 살고 있어요.

원칙적으로 우리 몸은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창조가 된 몸이에요.

그런데 죄가 우리 몸을 우리 마음대로 살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어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걸 바로 잡아 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우리 것으로 살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의 본체(本體)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 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곧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철저히 아버지 뜻에 따라 사셨어요.

 

쉬운 말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예수님의 독자적인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종속된 인생을 사신 것이에요.

예수님 마음으로 산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마음으로 사셨어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그 원리를 그대로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 성도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가지라고 했어요.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지요.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가요?

이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자기를 비워 종이 되어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한 마음이에요.

이건 자기 생각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자기를 비웠다” 는 말입니다.

자기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이게 원래 창조의 모습이에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기 전에 마음이에요.

 

자기 생각이 없으니 죽으라고 하니 예! 하고 죽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있었으면 안 죽었을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을 순종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첫 걸음이 뭔 줄 아세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잖아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지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자기 생각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없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다 주의 뜻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경지로 나아가게 되어 있어요.

나중엔 에이구~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나님 마음대로 하이소 라고 하게 된다니까요?

이게 언제 되는가 하면 하다가 하다가 안 되면 그렇게 되어요.

자기 고집대로 해 보다가 안 되면 자포자기(自暴自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순종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순종하게 만든 것이지요.

 

순종은 자기 생각이 있으면 못해요.

순종은 반드시 자기 부인을 전재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자기 부인이란?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주를 위해 살으라는 말입니다.

즉 창조의 목적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구원해 주셨는지 알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놓치고 있어요.

그러니 구원을 자기 것으로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구원을 해 주었는데 우리는 나를 위해 구원을 챙기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 다닐 필요도 없다고 해요.

이건 자기를 왜? 구원을 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죄에요.

이런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아니에요.

 

천국에 가면 성도는 예루살렘 성전에 보석들이에요.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성전에 벽돌이라고 합니다.

이는 독자적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사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일컬어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란?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한 성도들이 모여서 벽돌처럼 서로 연합하고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는 곳입니다.

교회로 모여서 자기 부인을 배워가고 이 싸움을 통해서 자기 안에 죄가 고발당하고 예수님의 피 뿌림 안에서 용서 받은 자로서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모이기를 힘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귀히 여기게 되어 있어요.

자기를 위하여 사는 구원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방치 해두지 않아요.

반드시 우리 인생을 차압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인생을 살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구원이란? 내 생각대로 사는 자를 내 생각을 차압하고 하나님 생각으로 사는 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사는 구원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셨어요.

 

예수님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서 표상적으로 보여 주셨어요.

이건 또한 예수님이 성도를 이러한 자로 창조하시겠다는 의지적인 고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성도를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 앞에서 자기 생각을 버리는 자로 간섭을 하겠다는 외침이기도 해요.

 

구원이란? 예수님의 몸에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즉 내 몸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이입이 되는 것이에요.

연합이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왜? 예수님의 몸에 연합을 시킵니까?

이는 죄로 인하여 자기를 위하여 살던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를 하여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시편 104편을 봅시다.

 

시 104:29-31=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지요.

이걸 시편 기자는 주께서 낯을 숨기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숨은 이유는 죄가 의(義)와 함께 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면 죽어요.

 

그래서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은 것은 인간과 격리하셨다는 말이에요.

다른 말로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곤 호흡을 취하십니다.

호흡을 취하였다 함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원래의 자리란? 흙이에요.

그래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살리는가 하면 주의 영(靈)을 보내서 살리십니다.

이는 곧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하신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 하신 것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살아가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갑니다.

내 생명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성도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삶들이 툭툭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자적으로 살던 나를 죽이고 예수 안에서 살도록 새롭게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삼아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해 주시고 의롭다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피로 우리 죄를 사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되는가요.

그건 창세전 언약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거룩해지는 것이잖아요.

의로워지는 것이잖아요.

이런 언약을 하나님이 세우셨어요.

 

그런데 그 일이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삼으신 그 목적을 다 이루신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기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란 말입니다.

 

성도란 이러한 사실을 믿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이 믿어지도록 믿음을 선물로 주셨어요.

그럼 그 믿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넌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원은 하나님과 성도 간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예수님의 피로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게 해 주셨어요.

하나님의 백성은 노력하지 않아도 이것이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것을 가지고 나 믿는데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아니 이걸 우째 알았지! “너 참 똑똑 하다” 그런다고요.

 

이걸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이 이르게 하나니”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견인을 해서 믿어지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의로워지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피 때문입니다.

의(義)를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외부로부터 주어져요.

예수님이 주세요.

그래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의(義)가 아니기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든 의(義)라고 하면 그냥 나 의로워요 라고 하면 되어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의(義)를 받아서 의로워진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 여김을 받았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하신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해요.

예수님의 인생을 살도록 간섭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그 안에서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에요.

 

예수님이 값으로 샀어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이사를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거처로 삼아서 주인으로 행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우고 간다고 하셨어요.

 

쉬운 말로 성도의 몸에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목줄이 매여져 있어요.

그 언약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 때문에 자기가 원치 않는 길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이 사람들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사용이 되어져요.

이렇게 사용되어지는 삶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 된 삶이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길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종이에요.

종이란? 주인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란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종의 마음으로 살지 말고 주인의 마음을 품고 살으란 말입니다.

 

품으란 말은 이미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란 말은 이미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럼 성도는 누구 인생을 살게 되는가 하면 예수님의 인생을 살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성도들 안에 와 계신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인생을 살아가도록 간섭을 하십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알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고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조각가가 조각을 하듯이 새길 것은 새기고 제할 것은 제하는 일을 하세요.

물론 우리 몸은 여기에 반발을 하지만 말이에요.

 

우리 몸이 죄의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생을 온전히 살아내지를 못해요.

원리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 원리가 역사 할 때마다 계속하여서 우리를 죄인의 자리로 끌고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원리대로 살아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암튼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런데 죄가 그 영광을 가려 버린 것입니다.

죄가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습니다.

죄가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할 자들을 자기를 위하여 살도록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원리를 바로잡아 주는 일을 하십니다.

원래 인간을 창조한 목적을 위하여 죄를 없애는 일을 하세요.

예수님을 보내서 원래의 인간으로 새 창조를 하시라고 하신 것입니다.

 

새 창조가 되려면 먼저 옛 것이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것으로 창조가 됩니다.

마치 헌 건물을 헐고 새 건물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일을 누가 하시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세요.

 

어떻게 하시는가 하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피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냥 피가 아니고 구속케 하는 피라고 하지요.

 

구속(救贖)이란? 제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 받는다는 말입니다.

 

죄가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값아 주어서 면제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죄 값을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부터 예수님에게 빚을 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빚을 진 자를 일컬어 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죄인과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이걸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화목 제물이라는 말은 양쪽을 화목케 하는 제물이란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누구를 위한 화목제물인가요.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케 하는 제물입니다.

 

화목(和睦)이란 말은 불화(不和)를 전재로 하는 말입니다.

원래는 화목 했는데 중간에 어떤 사건 때문에 불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 원인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불화케 만들었어요.

그럼 불화의 원인인 죄를 제거 해야겠지요.

 

이러한 불화의 원인인 죄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자신의 죽음으로 했습니다.

의인이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형식으로 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 피를 들고 하나님과 죄인 중간에 서서 화목케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바탕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어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화해의 손길을 내 미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뻐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에요.

 

이걸 잊으면 안 되어요.

이걸 잊으면 자기 꼬라지로 나와요.

자기 행함으로 나온단 말입니다.

 

이 시대 죄가 뭔 줄 아세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업적을 들고 나오는 것이에요.

 

흔히들 목사님들이 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잖아요.

그럼 교인들은 자기 행함에서 착한 삶을 만들어 내고자 합니다.

자기 안에 본성적(本性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선악(善惡)의 법 속에서 악(惡)은 억제하고 선(善)을 장려하여서 살고자 애를 씁니다.

 

그리곤 그 선을 들고 나 착하지요!

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에요.

자기 영광이에요.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에게 없어요.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어요.

영광(榮光)이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하나님의 아름다운이란 무엇인가요?

그건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서 자기백성들을 구속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한 사람을 한 알의 밀알처럼 제물로 죽여서 많은 자기 백성들이라는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은 오직 화목 제물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 이외 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지 않아요.

이렇게 되면 성도의 신앙에 포카스가 어디에 맞추어져 있어야 할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피를 기리고 찬양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겠지요.

 

이 사실을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약의 성도들의 표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해 내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 속에는 성도의 구원 이야기가 씨눈처럼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성도의 구원사 전 과정을 보여주는 축소판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속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비밀이 숨겨져 있으니 잘 이해하세요.

먼저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부터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후손(後孫)이라는 말을 기억하세요.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지요.

 

바울은 신약에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이라고 했어요.

조상(祖上)이란 대표입니다.

조상이라는 말은 우두머리 즉 임금이란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에 조상으로 삼았어요.

대표주자로 세웠다는 말입니다.

그럼 그 후손들은 자동적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운명을 적용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 백성이 되었나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입니다.

부르심에 의해서 되었습니다.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조건과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잘나고 못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구원은 아브라함의 잘나고 못남과 상관이 없이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선택했다는 말은 책임지겠다는 말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 시대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불안해하는 것도 부르심과 선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안 믿어지기 때문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겠는데 믿어지지가 않아서입니다.

들어서 알기는 알겠는데 막상 삶에 적용을 하고자 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가 되는 것입니다.

믿고 싶어도 안 믿어지니까 인간의 본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꼬라지에 울다가 웃다가 하는 것입니다.

 

선택과 부르심은 하나님 자신과의 약속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리라” 는 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한 것입니다.

 

복을 주는 주체가 하나님이에요.

아브라함은 그냥 받으면 되어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스스로가 아브라함을 복에 사람으로 지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잘남과 못남!

아브라함의 순종과 불순종이 영향을 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초부터 아브라함의 잘남과 못남 순종과 불순종의 조건으로 약속을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렇게 불순종 하였는데도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고 지켜진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고 하고 이런 구조를 은혜라고 합니다.

또한 종이 아니고 아들이라고 해요.

종은 법적 관계이지만 아들은 사랑의 관계에요.

 

종은 일을 위해서 고용이 된 자에요.

그러므로 종은 일하지 않으면 책임추궁을 당하게 됩니다.

종에겐 유업이 없어요.

종은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일을 시키고자 값을 주고 사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들은 달라요.

아들은 사랑의 관계에요.

사랑이란? 한 몸이에요.

한 몸이기 때문에 잘잘못으로 인하여 잘려 나갈 수가 없어요.

말 안 들으면 두들겨 패고 고쳐서 사용할지언정 잘라내지는 않아요.

 

아들은 일을 위하여 고용된 자가 아니에요.

아버지의 유업을 이을 자에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으로 경영수업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집안을 다스려가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버지의 혹독한 간섭이 따르게 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일컬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자란?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을 자란 말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가려면 아버지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길은 이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가는 코스에요.

 

그럼 구약 이스라엘의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과정을 신약에서 성도들의 구속사로 살펴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언약의 후손이지만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이건 마치 성도가 죄 아래서 출생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백성이라 할지라도 율법 아래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이건 마치 아브라함 후손들이 애굽에서 태어난 것과 같아요.

정한 때가 되면 예수님이 찾아내세요..

아버지의 나라를 유업을 이어야 할 자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빼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갈 4:1-10=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잘 보세요.

아들이 어렸을 동안에는 청지기 아래 두었다고 하지요.

이 청지기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 생활이 반드시 필요해요.

율법을 알아야 은혜를 알 수가 있어요.

 

이건 마치 죽음을 알아야 생명을 아는 것과 같아요.

죽지 않으면 살아남이 없어요.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죄에서 건져지는 구원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지옥에 넣어 놓고 나중에 천국으로 빼내 주시는 것입니다.

천국을 위해서 지옥에 넣어 버린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려고 율법 아래 잠시 가두어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은혜라는 것은 구원을 받고 나면 알아요.

율법이 있으므로 해서 은혜가 더욱 빛이 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율법을 귀하게 여겨요.

무 율법주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율법에 종이 되고자 해요.

율법주의로서의 율법에 종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종이 되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암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위해서 그 후손들을 애굽에서 태어나게 합니다.

그리곤 거기서 죽도록 고생을 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애굽에서 출생을 하였지만 그 속에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창세전 언약을 품고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노릇을 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창세전 언약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의 예표에요.

 

창 15장을 봅시다.

 

창 15:13-20=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지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가나안 땅에서 약속을 합니다.

무슨 약속을 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방에 가서 종노릇하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입니다.

 

언약(言約)이란? 묵시(黙示)성을 담고 있어요.

지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는 것은 묵시적 사건이에요.

그러므로 현재 언약을 체결하는 가나안 땅은 곧 천국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이라는 묵시적 사건을 체결하는 의미에서 가나안 땅은 천국과 같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는 것은 곧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하는 것과 같단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자 보세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 간에 언약을 하실 때 자기 백성이 아직 없었지요.

언약 속에만 있었어요.

이 언약을 바탕으로 자기 백성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후손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언약을 하실 때에는 아직까지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제 이 언약을 근거로 이삭이 태어나고 그 후손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전 언약을 보여주고 있는 언약인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이 뭔가요.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는 것이잖아요.

이건 죄 아래서 태어났다가 예수님 피로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죄 아래서 난다 함은 죽은 자란 말입니다.

이걸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으로 보면 흑암이고 공허이고 깊음이에요.

없음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흑암과 공허와 깊음 속에서 창조를 하시지요.

이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불러낸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죄에서 의(義)로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이걸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고 해요.

 

성경이 말하는 창조란? 무엇을 만든다는 의미보다는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어요.

그러므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말은 없는 것을 만든다는 의미보다도 타락에서 의로 구원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물 자체가 창세전 언약을 모티브로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만물의 다스려짐 속에는 구원사적인 의미들이 씨눈처럼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한다면 성도가 먼저 죽음에 가두어져 있어야 하겠지요.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 예수님의 피로 구속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 아래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그대로 아브라함 후손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분명히 애굽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 속엔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외적 조건으로는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을 구분 할 수가 없어요.

다른 것은 단 하나 애굽인들 속에는 언약이 없지만 이스라엘 속에는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언약이 담겨져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에서 죽고 사는 것으로 갈라집니다.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은 애굽에 장자가 죽는 사건 속에서 살아나지만 언약이 없는 애굽인들은 모두가 죽어요.

 

그럼 아브라함 언약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언약을 할 때는 그 후손들이 한 명도 없었지요.

후손이 없는 상태에서 언약을 합니다.

이건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창세전 언약을 세운 것과 같아요.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이 언약을 위해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뭐라고 했나요.

아브라함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된다고 했지요.

거기서 고난당한다고 하였지요.

 

이것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이 죄악 가운데 태어나서 죄의 종 노릇하면서 살 것을 예표하고 있어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이런 언약을 세우셨거든요.

우리는 그 창세전 언약에 따라서 죄 아래서 태어나고 죄에 종노릇하고 있었어요.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불러내 주신 것이에요.

 

암튼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을 근거로 애굽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종노릇하게 됩니다.

언약에 의해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따지고 보면 애굽에서 종 노릇 할 수가 없는 민족이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요셉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요셉은 전 세계의 가뭄으로 다 죽어 갈 때 애굽을 살려낸 총리였어요.

 

요셉은 가뭄 속에서 애굽인들을 구해 내었고 그 가뭄 때에 온 세계의 땅을 다 매입을 하여서 바로에게 바친 충신 중에서도 으뜸 충신이었어요.

요셉은 마치 우리나라의 고구려 역사 속에 나오는 광개토대왕과 같이 만주 벌판을 점령하여 땅을 넓혀 놓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요셉의 식솔들은 애굽에 있어서 주류(主流)에 속한 사람들이에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낸 애국자의 가문에 속한 후손들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애국자의 후손이에요.

어느 나라이고 애국자의 후손들은 국가에서 책임지고 돌보아 주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애국자의 후손으로 대접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접을 고사하고 모진 고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이는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가 되려면 이스라엘이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어야 해요.

 

종노릇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은혜를 원수로 갚은 놈들이라고 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를 징치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을 멸망시킬 명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스라엘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 고생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성도들의 운명이에요.

우리의 인생도 우리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흘러가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괜히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는 자로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예수쟁이들을 싫어해요.

괜히 미워해요.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친근하고 절간에 가는 것이 편해요.

 

이상하게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성질을 내고 교회 오라고 하면 싫어해요.

이건 본능적으로 그래요.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언약처럼 말이에요.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가 되려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핍박을 해 주어야 해요.

괜히 미워해 주어야 해요.

그러니 애굽 사람들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절간에 스님들도 언약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무당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어요.

다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 집에 혹시 스님이 찾아와서 시주를 달라고 하더라도 적개심을 갖지 말고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사신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라고 하면서 차라도 한잔 대접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괜히 재수 없다고 소금뿌리지 말고!

 

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백성답게 좀 넉넉해지세요.

구원 받은 자 답게 관대하란 말입니다.

그들과 사귐을 가지란 말이 아니고 그들도 창세전 언약을 위하여 쓰임 받고 있다고 생각하란 말이에요.

 

우리가 싸울 것은 혈과 육이 아니에요.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악한 영들이에요.

미운 것은 마귀이지 그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막말로 말해서 우리도 그들과 같았어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시기 전 까지만 해도 이방인으로 살았어요.

애굽에 사고방식으로 애굽 사람으로 살았어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욕하거나 비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야 해요.

사도 바울이 이런 마음으로 살았어요.

성령 받은 성도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잠정적 신자들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긍휼로 대할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은 비록 예수를 모르고 살고 있지만 언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서 그 분들도 예수를 믿을 수 있게 될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도 과거에 예수 안 믿었잖아요.

복음 몰랐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가 믿어지는 은혜를 입었잖아요.

복음이 깨달아지기 시작을 하였잖아요.

 

그러니 지금 예수를 안 믿고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언젠가는 하나님이 은혜가 임해서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이 깨달아지는 그 날이 올 것이라는 마음으로 대하셔야 합니다.

잠정적 신자로 보시란 말이에요.

 

예수 안 믿는 사람들과 척을 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복음이 깨달아지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여야 해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요.

 

다시 이스라엘 이야기를 해 봅시다.

이스라엘은 언약 백성입니다.

언약 백성이라 함은 언약 때문에 생겨난 백성이란 말입니다.

언약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에 언약을 위한 환경으로 이끌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이지만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바로의 종 노릇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이방 나라에서 객이 되어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잘 살아도 언약을 위한 것이고 못 살아도 언약을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을 봅시다.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요셉이 죽은 후에 한 동안 이스라엘은 잘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요셉을 모르는 왕이 등극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왕이 인종차별 정책을 씁니다.

 

애굽인과 비 애굽인을 구분하여서 차별을 하기 시작을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졸지에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하고 맙니다.

주인에서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찾지 않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등 따습고 배 부를 때는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힘들고 어려우니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동안 등 따습고 배 부를 때는 자기 정체성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냥 애굽인처럼 살았어요.

하지만 고난을 당하자 자기 정체성을 찾기 시작을 합니다.

안 찾던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 시대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먹고 살기 어려울 땐 교회에 죽치고 살아요.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고 말씀보고 교회 일을 합니다.

봉사하고 충성을 합니다.

 

그러다가 먹고 살만 하면 교회를 등한시 합니다.

좋은 직장 들어가 보세요.

교회 안 오잖아요.

이젠 교회 오라고 소리쳐도 안 와요.

 

우리는 내 배가 고프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내 배가 부르면 하나님과 멀어져요.

이게 인간이에요.

그래서 육신에게 편안함이란 하나님을 떠나는 지름길이에요.

 

죄인에게는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저주에요.

자기 몸뚱이를 이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우리 스스로 등 따습고 배 부름을 멀리할 재간이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안 되니까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도 다 하나님의 간섭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늘 일어납니다.

마치 요셉을 모르는 왕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종노릇하게 하듯이 우리 삶에 어렵고 힘든 사건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걸 징계라고 합니다.

이 징계가 있어야 아들이에요.

가정에서든지 내 일신상에서든지 내 주변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면 징계라고 보세요.

그래서 제가 자칭 성도라고 하면서 뺀질거리고 신앙생활을 등한시하는 사람에게 징계가 임하지 않으면 불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지만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성도일수록 삶이 고달파요.

세상 일이 잘 풀리는 것이 아니라 꼬여요.

일을 꼬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이에요.

 

하나님의 사랑 법은 우리하고 달라요.

우리는 사랑하면 편하게 해 주는데 하나님은 사랑하면 불편하게 만들어요.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육신이 편안함을 이겨 낼 수가 없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편안하면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힘들어야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는 족속들이에요.

아주 더러운 족속이에요.

이스라엘과 똑 같아요.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은 우리의 자화상인 것입니다.

우리도 구약 이스라엘이 걸어갔던 그 전철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그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가 인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난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리곤 하나님을 찾게 만드십니다.

이 모두가 아브라함 언약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너무 힘이 들어 하나님을 찾으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권념(眷念)하시지요.

권념하신다는 말은 생각하여서 돌아본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4백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신 것을 이룰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4백 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에 대한 언약을 했잖아요.

네 후손이 이방 나라에 갔다가 객이 되어 종으로 살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럼 아브라함 후손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방 나라에 가서 정한 기간인 4백 년 동안 종살이를 하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의 때가 되었어요.

약속대로 아브라함 후손들은 가나안으로 불러 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언약을 기억하사 출애굽을 시키신 것입니다.

 

출애굽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오지요.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왔다는 말은 어린 양이 대신 죽음으로서 살아났다는 말입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에요.

그러니 출애굽 시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것은 창세전 언약을 성취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사건은 장차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의 모형이에요.

 

지금은 비록 모형적인 사건이지만 실체가 오기 전까지는 모형을 실체로 믿어야 해요.

모형 속에서 실체를 읽어내면 되어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형을 가지고 실체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모형을 실체화 하여서 살아요.

실체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고 실체처럼 귀하게 여긴단 말입니다.

 

모형은 사진과 같아요.

사진은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진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진을 가지고 있다가 실체를 만나면 사진은 앨범에 간직한 채로 실체와 살아요.

아니면 지갑에 넣고 다녀요.

실체를 만났다고 해서 사진을 아무렇게나 취급하지 않아요.

귀히 여겨요.

그 사람이 너무도 좋기 때문에 사진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는 사진과 같아요.

교회의 실체는 천국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천국 백성은 교회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잖아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고 모이기를 더욱 더 힘쓰라고 하잖아요.

모여서 천국 백성으로서 서로 섬기고 나누고 교제하여야 합니다.

이 땅에서 성령 안에서 천국에서의 삶을 맛 보아야 합니다.

 

복음 안다고 나 교회 안 갈래 그러지 말고!

복음 전하는 교회가 없다고 하면서 꼴값을 떨지 말고!

언제부터 복음 알았다고 시건방을 떱니까?

 

복음 알면 교회 갈 필요가 없고 집구석에서 놀라고 하는 복음은 없어요.

그건 공교하게 지은 말이에요.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뱀의 독이 들어 있어요.

 

그러니 그런 독을 마신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것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 아는 자들이 아니에요.

이들이 안다고 하는 복음도 관념이고 지식이에요.

 

지식은 교만케 해요.

이런 자들은 처음 형편보다 더 나빠요.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뻔 했어요.

어쭙잖게 어디서 괴이하고 악독한 뱀에 독이 섞인 것을 복음이라고 듣고 미친 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허상이고 그림자에요.

실체는 하늘에 있어요.

나도 허상이고 내 실체는 하늘에 있어요.

그림자와 실체는 나타나는 모양이 다를 뿐이지 같은 것이에요.

잘 이해하고 들으세요.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있는 것입니다.

실체가 귀하기 때문에 그림자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실체가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그림자인 몸 된 교회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섬기는 것은 잘못이지만 귀히 여기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이 땅의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참 교회는 하늘에 있어요.

이 세상에 있는 교회는 허상이고 그림자에요.

교회에 다니면서 허상인줄 알고 다니면 되어요.

실상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섬기면 되어요.

 

무엇이든지 귀히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귀한 것이고 천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천한 것이 되어요.

귀하고 천한 것은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져요.

그림자도 실체를 보게 해 주는 것으로 보면 귀한 것으로 보여져요.

감사함으로 섬기면 되어요.

 

중요한 것은 그림자이냐 실체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입니다.

먹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고 먹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고!

날을 지키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고 날을 지키지 않는 것도 주를 위한 것이에요.

 

그러니 이러한 것으로 다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림자를 실체라고 하면 책망하여야 하지만 그림자를 그림자로 알고 실체에 대한 고마움으로 붙잡고 있다고 한다면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라고 한 것도 그림자를 통해서 실체를 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을 기념하라고 한 것입니다.

기념이란 이미 경험된 사건을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사건을 거쳐 온 사람만이 기념 할 수가 있어요.

결혼을 하여야지 결혼기념일을 지킬 수가 있어지지요.

 

요즈음 TV에 나오는 이런 광고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회사에서 사표를 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아 부럽다!

취직을 해야 사표를 쓸 것이 아니냐! 라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기념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경험을 해 보아야 기념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유월절을 기념 할 수 있는 사람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에서 건져진 사람만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림자는 실체가 있는 사람이라야 가지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에 있는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야 땅에 있는 교회도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없는 것을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있는 것을 토해내는 것이에요.

주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고!

주께로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다시 유월절 이야기를 해 봅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유월절을 지키게 하고선 광야로 빼냅니다.

그럼 어떻게 유월절이 지켜지는지 살펴봅시다.

 

아브라함 언약을 보면 아브라함 후손들이 이방의 객이 되어 종살이 한다고 했지요.

이방나라가 괴롭힌다고 하였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빼내 오실 때 이방 나라를 징치(懲治)한다고 하십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 댓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애굽을 징벌하기 위한 명분을 얻고자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내 백성을 괴롭혔느냐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면서 애굽에 장자를 다 죽이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죽음을 집행하는 천사들에게 알려 줍니다.

누구든지 그 집 문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지 않는 집에 장자는 다 죽이라고 합니다.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집안에 문을 닫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애굽에 각 집에 장자들을 다 죽인다는 것은 애굽 전역을 멸망시킨다는 뜻입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은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그냥 살려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죽음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합니다.

그리곤 더 이상 애굽에 있지 말고 떠나라고 합니다.

 

죽음에 천사들은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보지 않고 오직 피만 봅니다.

피가 있으면 살고 피가 없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미 알려 주었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이 비밀을 알려주라고 했어요.

그럼 모세의 말을 들은 백성들은 다 어린 양의 피를 발랐습니다.

 

이렇게 되면 피가 발려진 백성과 피가 발려지지 않은 백성으로 구분이 됩니다.

지금까지는 아브라함 후손이냐 아니냐 로 구분을 했는데 이젠 어린 양의 피로 합니다.

출애굽하여서 광야로 나온 백성들은 피에 만족이 된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하면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봅시다.

 

출 12:37-51=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38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39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 삼십년이라 41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42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4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유월절 규례가 이러하니라 이방 사람은 먹지 못할 것이나 44 각 사람이 돈으로 산 종은 할례를 받은 후에 먹을 것이며 45 거류인과 타국 품군은 먹지 못하리라 46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며 47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 48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지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나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먹지 못할 것이니라 49 본토인에게나 너희 중에 우거한 이방인에게나 이 법이 동일하니라 하셨으므로 50 온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대로 행하였으며 51 그 같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하신 언약대로 출애굽을 시킵니다.

광야로 나온 자들은 모두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중다한 잡족들도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 중에서도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출애굽한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신약으로 오면 이방인 구원으로 이어져요.

이방인들도 이젠 어린 양의 피로 이스라엘로 편입이 된 것입니다.

그럼 어린 양의 피로 새로운 민족이 생긴 것입니다.

어린 양 피 안에서 새로운 민족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부터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보지 말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참 아브라함 후손과 아닌 자들을 구분하라고 합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어린 양의 피를 발랐으면 아브라함 후손으로 인정을 하고 반대로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여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으면 이방인으로 간주하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피가 발라진 민족과 피가 없는 민족으로 구분이 됩니다.

피가 발라진 사람은 하나님 백성이고 피가 발라지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결국 온 세상은 어린 양의 피를 기준으로 두 쪽으로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피를 바른 자와 피를 바르지 않은 자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피로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유월절을 규례로 지키도록 합니다.

이는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바탕에는 어린 양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규례로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유월절 정신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라는 모형을 통해서 장차 실체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아요.

우리도 예수님의 피로 율법으로부터 빼내심을 입었어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졌어요.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간과함을 받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피를 잊어선 안 되어요.

예수님 피를 기념하여야 합니다.

 

화목의 근거가 예수님의 피에 있어요.

 

이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이것이 성경은 모든 이야기에요.

모든 성경은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에게 말합니다.

야! 이 놈들아!

너희들 때문에 죄 없는 내 아들이 죽었다!

이 사실을 아느냐!

 

너희들이 살고 있는 그 근본 바탕에는 내 아들 예수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이미 노아 시대에 흠 없는 제물이 죽음으로서 땅이 복을 받고 사는 것으로 미리 알려 주셨어요.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에 죄를 먹고 마시면서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법 대로 하면 벌써 열두 토막이 더 났을 것인데 예수님이 화목 제물로 죽어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죄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러한 사실을 알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관념이 아니라 실제여야 합니다.

지적 동의가 아니고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부디 예수님의 피 안에서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들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축복의 자리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사는 바탕에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 피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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