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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22강. 그 입 다물라 (롬 3:19-20)

by coroa 2022. 8. 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2강. 그 입 다물라 (롬 3:19-20)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정낙원 목사

 

지난 시간에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한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모두가 죄 아래서 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라 함은 쉬운 말로 본질 자체가 죄로 구성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온 몸과 마음이 썩었어요.

그러므로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의(義)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서 선하다 또는 악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들의 이런 행동은 선(善)이고! 저런 행동은 악(惡)이다!

이건 의(義)이고! 저건 죄(罪)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 자체를 악한 자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인간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을 내 품는다고 했습니다.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이건 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죽이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망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에서는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영생하시는 분입니다.

생명에게서 죽음이란 악입니다.

생명과 죽음을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 자와 죽은 자는 함께 살 수가 없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죽으면 보이지 않도록 땅에 묻어 버립니다.

산 자와 격리를 시킵니다.

 

산 자에게 있어 죽은 자는 함께 있으면 산 자로 하여금 부패케 하는 해로운 것입니다.

마치 귤 상자에 썩은 것이 하나 있으면 그 주변에 있는 것들도 썩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썩은 귤은 상자에서 골라내어 버립니다.

이처럼 생명의 세계에서 죽음이란 버려져야 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으면 동네에서 보이지 않는 먼 곳에 가져다가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보여 주셨어요.

에덴동산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산 자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죽은 자는 살 수가 없어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 밖으로 좇아 내버렸습니다.

산 자들이 살아가는 곳으로부터 멀리 격리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장망성이라고 합니다.

무덤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5장에 보면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에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무덤 같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그럼 그 속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창세전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이 된 생명책에 녹명이 된 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일컬어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했어요.

예수님의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요.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의 음성을 듣는 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귀를 주셨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귀를 받은 성도는 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먹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영접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합니다.

그리고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교회에 말을 하지요.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어디에 말씀 하신다고 했습니까?

무덤이라고 했지요.

요한복음이나 요한계시록은 사도요한이 쓴 책이에요.

동일 저자에요.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무덤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였고!

요한계시록에서는 교회에 있는 자들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이 시대 교회가 무덤이란 말이 됩니다.

 

자 이걸 정리 해 봅시다.

 

예수님이 오셔서 어디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셨지요.

그럼 율법이 무덤이란 말이지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죽은 자란 말이지요.

 

이러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율법 아래 있는 유대교가 무덤이었고!

이 시대는 유대교처럼 인간의 행함을 신앙으로 가지고 있는 교회가 무덤인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럼 이 시대 복음을 어디에 전해야 할까요?

교회에요.

인간의 행함을 신앙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회에 복음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행함을 가르치는 자들이 누구인가요?

성화주의자들이에요.

 

그래서 지금도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그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들을 자들이 있어요.

이들이 바로 목자의 음성을 알아먹는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이 된 예수님의 양들이에요.

 

지금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양들이 있어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받은 자들이 있어요.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져요.

 

이처럼 지금도 성령이 교회 안에서 창세전에 구원 주시기로 작정이 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찾아내는 것은 속된 말로 하면 철저하게 서로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수의 백성들에게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무덤 속에서 불러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백성들은 반드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귀는 들음으로서 복이 있고!

너희 눈은 봄으로서 복이 있다고 하셨어요.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하나님의 일임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창세로부터 아버지께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어요.

복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으로 들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인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율법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에게는 들려집니다.

율법 아래서 죽은 자들이 살아납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 속에서 불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진 자기 백성을 건져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율법 아래 죽은 자들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자들은 자신은 죽은 자라는 것을 알아요.

자기가 죄인임을 안다는 말입니다.

 

암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에요.

송장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부패하고 죽은 것이에요.

인간이 선(善)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썩은 것이고!

인간이 악(惡)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썩은 거에요.

 

설령 인간이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남을 살리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행하였다고 하여서 하나님은 그것을 선(善)이라 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를 악(惡)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뿜어내는 것은 모두가 썩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인간들 세계에서는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남을 살리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 선(善)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에요.

모두가 썩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을 완전히 무력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의 입을 막아 버리는 말씀입니다.

 

우린 우리의 선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랑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거들떠보지 않아요.

다시는 그런 것을 내 앞에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인간들 행함으로 나오지 말라는 거에요.

 

네가 잘났든지!

네가 못났든지!

그건 너희 기준이니 그 기준으로 나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 들고 나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준 것이 있어요.

예수를 믿는 믿음을 주셨어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을 주셨어요.

그 제물이 바로 창세전에 예비된 한 몸인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줄 제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예수님의 죽음을 앞세우고 나올 수 있는 믿음을 주셨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공로를 앞세우고 담대하게 아버지 앞으로 나아옵니다.

 

마치 야곱이 리브기가 만들어준 별미를 들고 아버지께 장자의 축복을 받으러 나간 것과 같아요.

야곱은 별미를 들고 아버지 앞에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서이다! 라고 나아갔어요.

그래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어요.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만들어준 새 언약이라는 별미를 앞세우고 하나님께 아버지의 맏아들 예수로소이다! 라고 나아가야 해요.

 

이것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기준입니다.

그 기준으로 나오라는 거에요.

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이 뭡니까?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것만 받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예수님만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 하나님 앞에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제시한 이 기준을 붙잡지 않으면 저주의 대상이에요.

 

죄인이 하는 일은 모두가 죄(罪)가 되고!

의인이 하는 일은 모두가 의(義)가 되어요.

우리는 죄인이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죄(罪)가 되고!

예수님은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것은 모두가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 동의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나의 어떠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과 어떤 관계 안에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믿는 그 믿음을 내어놓으시라고 합니다.

그럼 나는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내가 지금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내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오직 예수님의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선 할 말이 없습니다.

선하게 살았든지, 악하게 살았든지 입을 닫아야 합니다.

할 말이 없어야 해요.

 

그런데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기가 한 것으로 말이 많잖아요.

자신들에게 선(善)이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선한 행위가 있다고 하잖아요.

 

자신에게 선한 행위가 있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할 수가 없어요.

모든 인간은 썩었다는 것을 수용하게 되면 자신의 착한 행위가 무가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자기가 의(義)라고 행한 것이 무가치 한 것으로 부정당하면 참지를 못해요.

반발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을 하여도 자기 존재를 남기고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흔적을 우리 몸에 남기고자 하는데!

죄는 우리 몸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도록 역사를 합니다.

죄가 하나님을 이용하여서라도 자기 흔적을 남기도록 해요.

 

이 죄성이 바벨탑을 통해서 잘 나타내 주었어요.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을 때 뭐라고 했나요?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지요.

이는 자기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린 우리 이름을 남기고자 살아가고 있어요.

저도 정낙원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누가 내 이름에 손상을 가하면 반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우리의 이름을 삭제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새기는 일을 하세요.

우리가 무엇을 하여도 거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새기십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해요.

 

그런데 우린 이러한 처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아요.

반발해요.

왜냐하면!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충돌을 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내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본성이고!

성령의 소욕은 예수님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본성이에요.

 

그러니 우리 안에서 내 이름을 내고자 하는 본성과 예수님의 이름을 새기고자 하는 두 본성 간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우리의 행함도 좀 끼워 달라고 합니다.

예수 믿는 나도 좀 인정해 달라고 해요.

그럼 성령은 넌 꺼져! 라고 합니다.

이 모두가 끝까지 자기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죄성 때문이에요.

 

이 죄성은 우리 몸이 죽는 날 까지 사라지지 않아요.

마치 문방구 앞에 있는 두더쥐 게임 기계의 두더쥐와 같습니다.

망치로 두들겨 패면 머리를 잠시 접어 넣었다가도 금새 또 올라오는 것과 같이 올라옵니다.

기어코 내 이름을 내고야 말겠다고 합니다.

죄성은 밭에 잡초처럼 뽑아도 뽑아도 또 올라옵니다.

이 몸이 죽을 때까지 올라와요.

 

죄인의 본성은 무엇을 하여도 어디에 있어도 자신이 중심으로 서 있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고 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가 선악과가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하는 성질이 들어가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인간은 어디서든지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왕이 되고 싶어하고!

교회에서도 왕이 되고 싶어하고!

어떤 모임에서든지 내가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해요.

 

자식을 키워도 자기 이름을 위하여 키웁니다.

자식을 왜? 그리 사랑합니까?

자식은 나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이상과 꿈을 자식에게 심어 놓고 그리고자 합니다.

자식 속에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자 해요.

자식들을 달달 볶는 것도 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에요.

자식에게서 그것이 그려지지 않을 때 화가 납니다.

 

자식은 또 다른 나에요.

나의 확장이고 연장이에요.

그래서 자식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의 희비(喜悲)를 같이해요.

 

자식이 일류 대학에 들어가면 부모도 일류 대학생이고!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면 부모도 대학에 떨어진 것이 되어 속상해 합니다.

자식이 자기 망신을 시킨 것으로 생각해서 꼴보기 싫어합니다.

그러다가 그 자식이 돈이라도 많이 벌어서 성공하게 되면 자식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이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인이에요.

죽은 자란 말입니다.

썩은 것만 토해내는 자들이에요.

그러므로 인간이 토해 낸 것은 땅에 보이지 않게 묻어야 할 것들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것들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자기 주제도 모른 채 자기 흔적을 남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레위기에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부정한 자로 여겼어요.

그래서 아이를 낳으면 속죄제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이건 아이를 낳은 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란 뜻입니다.

 

속죄제란? 죄를 짓고 드리는 제사에요.

하나님 앞에서 아이를 낳은 것은 죄인 하나를 더 생산을 하였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되어요.

그래서 그 죄값으로 속죄제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실이 이 지경인데도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는 일을 하십니다.

어떻게 알려 주는가 하면 우리 인간들과 다른 인간상을 제시해 주어서 알게 합니다.

난 이런 인간을 원한다는 것으로 알려 주십니다.

 

십계명 속에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상이 들어가 있어요.

율법 속에 참 인간상이 들어가 있어요.

그러니 율법은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또한 지금 우리 인간들은 어떤 자들인가를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계명을 묻자 계명을 한마디로 정의해 주셨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말하는 인간대로 살면 한마디로 정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한 몸이란 말입니다.

원래 인간은 한 몸이었어요.

이웃이나 “나” 나 예수님이 창조를 하셨으니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나온 한 몸이에요.

한 몸이기 때문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원리적으로 죄가 없으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걸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왔지요.

그럼 원래 한 몸이지요.

그런데 둘이 되었어요.

이게 결혼을 통해서 다시 하나가 됩니다.

 

결혼을 통해서 자식을 낳습니다.

이 자식들이 인류를 형성합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에서 나왔어요.

그럼 한 몸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둘로 만들어 버렸어요.

각자 개체로 만들어 버렸어요.

나와 너는 다르다고 만들어 버렸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아담이 낳은 자식들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에요.

각각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나와 너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하려고 십계명이라는 율법을 주었습니다.

이는 원래의 모습에서 어그러진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함이에요.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지금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고발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므로 율법이 말하는 것은 그 바탕에 역설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너희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지금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로 창조가 되었는데 죄 때문에 안 하고 있으니 반어법(反語法)으로 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하나 됨이에요.

둘이 하나가 될 때 사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너희는 원래 하나로 창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고 합니다.

누가 둘로 만들었는가 하면 죄에요.

그 죄를 들추어내고자 하나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나의 영(靈)을 만드셨어요.

그런데 죄가 “나”와 “너”라는 둘로 만들어 버렸어요.

“나”와 “너”로 둘이 되면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몸은 철저하게 자기를 위하여 살도록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 몸 위주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건 죄의 몸에 본능이에요.

 

그래서 죄인의 세계에서는 남을 해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에 것을 빼앗아야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이름 하여 전쟁이에요.

이러한 것은 인간의 모든 삶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쉬운 예로 운동 경기를 보세요.

우리 편이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 상대편을 이겨야만 합니다.

지금 선거철인데 내가 당선되기 위해서 상대방을 떨어 뜨려야 해요.

우리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 상대방 교회에 있는 교인들이 우리 교회로 빼 내와야 해요.

 

이게 인간들 세상이에요.

인간들 세상 자체가 전쟁터에요.

뺏고 빼앗기는 전쟁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인간이 산다는 것 자체가 전쟁이에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십계명 속에 그대로 나와 있어요.

도적질이나 살인이나 사기 치는 것이나 남에 아내를 탐내는 것들은 모두가 내 몸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것들입니다.

너희가 이런 자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이런 괴물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어서 역설적으로 나는 이런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서로 물고 뜯는 그런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십계명을 삶으로 풀어내면 한마디로 말해서 사랑이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은 한 몸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를 한 몸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십계명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첫째로는, 하나님은 나는 한 몸인 인간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해 주고 있어요.

둘째로는, 그런데 너희는 지금 두 몸으로 살고 있다고 고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계명 속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상과 지금 현재 인간들이 어떤 자들인가를 보여주는 이중적인 계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건 신약의 말씀도 동일해요.

신약의 모든 말씀이 구약의 율법과 같이 하라! 하지 말라! 는 명령법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는 말입니다.

난 이런 인간을 원하는데!

지금 너희는 이런 인간이 아니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말씀으로 너희들은 지금 다른 인간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서로 사랑하는 자로 만들었는데 너희는 지금 서로 싸우는 자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말씀을 주어서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내가 원래 만든 인간들과 얼마나 다른 인간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율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요.

율법이란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러니 앞으로 하나님 말씀이나 율법이나 동의어(同義語)로 들으세요.

 

그럼 본문을 다시 봅시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먼저 율법이 말합니다.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을 한다고 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누구인가요?

죄인들이에요.

우리 모두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법은 그른 자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은 죄인에게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죄가 없는 의인에게는 법을 줄 필요가 없어요.

의인은 법이 필요가 없어요.

 

바른 사람인데 무엇 하려고 법을 줍니까?

옳은 사람은 법이 없이도 잘 살아요.

그래서 의인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법은 부모님 잔소리와 같아요.

부모가 자식에게 언제 잔소리 합니까?

말을 안 들으면 잔소리하잖아요.

말을 잘 들으면 잔소리 하지 않아요.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는 것은 공부 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잔소리가 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말을 안 듣기 때문에 잔소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義)에 나라입니다.

의(義)에 나라란? 죄가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에서는 법이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율법은 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죄인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보세요.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고 하지요.

범법(犯法)함이란?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왜? 죄를 범한 죄인에게 법을 주었겠어요.

이는 죄를 고발하고자 함입니다.

이 놈들이 죄를 짓고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넌 이런 죄를 지었다고 알려주려고 법을 준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의 정답은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거울처럼 내 꼬라지가 어떤 것인지 보아야 하는 것이에요.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율법을 제대로 지킨 것이에요.

 

죄를 깨달아서 어쩌게요.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왜? 예수를 믿음으로서만 구원이 되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이 약속하신 자손을 붙잡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임무가 죄인이 예수님을 붙잡게 하는 것이에요.

 

약속하신 자손이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예수라는 이름 속에는 예수님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시는지 잘 나타나 있어요.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이십니다.

약속하신 자손이신 예수님은 죄 아래 있는 자를 구원하려고 오셨어요.

 

그럼 자기 백성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겠지요.

그래야 건져 낼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죄에 가두어지게 되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율법이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구원주가 되어서 건져내 주세요.

 

창세전 언약에 보면 자기 백성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지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와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주잖아요.

건져 낼 때 그냥 건져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죽음으로 건져 냅니다.

즉 예수님의 목숨과 자기 백성들이 목숨을 맞 바꾼단 말입니다.

이걸 대속(代贖)이라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대속 제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속 제물이란? 우리 죄를 속량해 주려고 대신 죽어주신 분이란 말입니다.

이걸 이사야 53장에서 말해주고 있어요.

 

사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에요.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건 창세전 언약을 겨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어요.

“우리”란 “한 무리”를 뜻합니다.

지금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하지요.

“우리” 라는 “한 무리”가 바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되는 자기 백성들이에요.

 

지금 이사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창세전 언약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성취하는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언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성 하셨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고!

그가 죽은 것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갔다고 하지요.

우리의 슬픔을 담당했다고 하잖아요.

이 얼마나 감사한가요.

 

이런 말씀 앞에 가슴이 쿵쾅 쿵쾅 뛰어야 해요.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핑 돌아야 해요.

설레야 한단 말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를 대신 처리하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몽땅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우린 그의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얻었어요.

이게 복음이에요.

 

복음은 우리가 뭘 하는 것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에요.

나는 예수님의 대신 죽음 때문에 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바탕에 이 정신이 묻어 나와야 해요.

먹는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고 있다는 이 사실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바울은 이런 삶을 나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신앙생활이 감사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감사치 못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거나 아니면 그가 안다고 하는 것이 다른 복음일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이원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관념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안다고 하면 반드시 감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자기 부인이 동반이 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실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에요.

십자가 속에 뛰어 들어가 예수님이 당하신 아픔을 체휼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의 삶이 죄를 안 짓고 완벽하고 온전하게 산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성향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밀려 들어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봅니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지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산 자들을 예수를 위해서 살게 한다고 하지요.

 

그러니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 대신에 죽게 하시고 이젠 역(逆)으로 우리를 예수님을 대신하여 살게 하세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고 고백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런 고백적 삶이 세상에서는 예수님처럼 대접을 받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고 입술로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면 세상이 미워해요.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고난이 따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로 대신 살게 한다는 말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이걸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예수님과 자기 백성을 맞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은 약속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율법이 완성이 되어요.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요구가 충족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면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이 우리를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내시도록 율법이 죄에 가두는 일을 해 주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았다는 말은 넌 죄인이라는 것을 깔고 있어요.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이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의로운 척하고, 잘난 척 한 것이 얼마나 무식한 소치인줄 알겠지요.

하나님은 야! 유대인들아~

너희들은 죄인이야! 라고 율법을 주었는데 유대인들은 그 율법으로 우리 잘났지요! 했어요.

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요.

 

그럼 왜? 죄인에게 율법을 주었습니까?

입을 막게 하려고 주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주둥이를 닫게 하려고 주었어요.

 

왜? 주둥이를 닫게 하려고 할까요?

그야 떠드니까 그렇지요.

자기가 죄인인 줄도 모르고 잘났다고 떠들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알면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 이 놈들은 착하게 산 것을 근거로 기고만장하면서 자기가 죄인 인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말이 많은 것입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고 떠든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주둥이를 닫게 하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율법을 통해서 네가 지금 그렇게 잘났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네 꼬라지를 알면 할 말이 없을 것이란 거에요.

그래서 인간이 어떤 꼬라지인지 알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 율법을 준 목적을 바로 안다고 하면 율법을 지키려고 덤빌 것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다른 인간인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야! 내가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야 할 인간이구나!

진즉이 지옥에 가야하는데 지금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 범사에 감사가 되겠지요.

불평 할 수가 없겠지요.

주둥이를 나불거릴 수가 없겠지요.

 

왜? 주둥이를 나불거릴까요?

자기 뜻대로 안 살아진다는 겁니다.

왜? 내 인생을 이렇게 고달프게 하느냐고 악악대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자기가 어떤 자이고 지금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복을 주었는데도 그걸 모르니 원망하고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이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바로에게 종노릇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바로의 종에서 해방을 시켜주었습니다.

출애굽을 시켜주었어요.

 

그럼 광야 길에서 감사하여야 하겠지요.

매일 같이 만나를 주면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하여야 하잖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 놈에 인간들은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을 일삼았어요.

눈만 뜨면 불평했어요.

틈만 나면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주둥이를 닫게 하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애초 지킬 수도 없는 것을 말이에요.

왜? 지킬 수도 없는 것을 주었을까요?

그들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너희는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야 이 놈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지요.

그러니 하나님은 율법을 주어서 주둥이를 닫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알게 하시려고 지키지도 못할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들로 가득 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지키겠다고 덥석 물었어요.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이 계약을 어기면 죽는다는 증거로 피로 언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서로 지켜야 하는 쌍무(雙務) 언약이에요.

어기는 쪽은 죽는다는 언약이에요.

 

하나님께서 쌍무 언약을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죽음에 가두기 위한 포석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모세가 율법을 받아오기도 전에 이미 그 계약을 어기고 말았습니다.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여호와라고 하면서 우상숭배를 했어요.

첫 계명을 어기고 말았어요.

첫 계명을 어겼다는 것은 다 어겼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계약이 파기 되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온 십계명이 적힌 두 돌 판을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깨어진 두 돌 판을 갈아서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먹입니다.

이건 이제부터 너희들은 계약대로 저주를 머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약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3천명이 죽었습니다.

이 때 모세가 중재에 나섭니다.

이 백성들 대신 자기가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합니다.

 

이에 하나님이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이스라엘을 용서해줍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모세의 운명 속으로 귀속이 된 것입니다.

모세가 이들의 생명이에요.

이스라엘은 모세의 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모세의 말을 안 들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서 새로운 계약서를 써줍니다.

모세를 다시 시내 산으로 불러 올려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십계명을 줍니다.

이걸 모세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모세가 다시 받은 언약은 새 언약과 같은 것입니다.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하실 일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주신 십계명을 법궤 속에 보관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그 돌 판을 담고 있는 법궤 뚜껑 위에 피를 뿌리라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 피를 보시고 용서 하신다고 했어요.

 

자신들이 어긴 율법이 담김 돌 판 위에다가 피를 뿌리라는 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흠 없는 분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가까이는 자기들 대신 모세가 자기 목숨을 담보로 중보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장차에는 여호와 이레로 오신 예수님이 대신 죽으심으로 죄 사함 받을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법 궤 위에 피를 뿌리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자 함이에요.

그럼 이스라엘은 십계명을 보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이 모세의 죽음으로 대신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두 번 받아온 두 돌 판은 두 언약과 같아요.

 

처음 받아온 돌 판은 옛 언약이고!

두 번째 받아온 돌 판은 새 언약인 것입니다.

옛 돌 판은 죄인으로 가두어서 죽이는 언약이고!

둘째 돌 판은 모세의 생명으로 살리는 언약이에요.

 

돌 판에 적힌 내용은 같아도 그 의미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달라요.

이스라엘은 비록 처음과 같은 내용의 돌 판을 보관하고 있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모세의 생명으로 대신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잊으면 죄가 되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잊고 율법을 지키기에 바쁩니다.

율법대로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줄 알았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건 아니지요.

지켜야 하는 것은 이미 깨어진 것이잖아요.

지금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둘째 돌 판은 하나님이 모세와 계약을 한 것이에요.

모세의 생명을 담보로 맺은 것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대로 산다고 하여도 그걸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계약을 맺을 때 모세가 대신 이스라엘을 책임져 주는 것으로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대로 사느냐 못 사느냐와 상관없이 모세의 말을 듣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볼 때마다 자기들의 죄를 깨달아야 했어요.

우리는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구약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신앙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온 이스라엘이 이 신앙을 붙잡고 있었어요.

율법을 지킨 것이 옳은 신앙인 것으로 자랑되어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그게 아니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듣지 않았어요.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율법의 본질적인 것을 알려 줍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죄의 한 부분이고 그 뿌리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나타난 살인이니 도적질이니 간음이니 하는 것들은 나무의 잎사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근원은 마음이라고 말해줍니다.

 

살인의 근원은 미움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고!

도적질은 근원은 탐심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간음의 근원은 음욕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미움이나 탐심이나 음욕은 본능적인 것입니다.

육체로 조절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에요.

본성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제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죄인에게 있어 죄란 내가 죄를 안 짖겠다고 해서 안 지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죄인에게서 죄 짓는 것은 지극히 자연적인 것이에요.

죄인이 죄 안 짓는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예수 믿으면 죄 안 짓고 산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예수 믿어도 육신의 본성은 변하지 않아요.

다만 다른 법이 하나 들어온 것이에요.

이걸 성령의 법이라고 합니다.

이 성령의 법이 육신의 법과 충돌을 일으켜요.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갖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 안 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도 이젠 이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예전에 없던 마음입니다.

예전에는 죄를 지어도 상한 심령이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이젠 하나님 말씀에 반(反)하는 것을 행하면 상한 마음이 생겨요.

 

이건 죄를 몰랐을 때보다 마음이 더 불편해요.

찝찝하단 말입니다.

성령이 심기를 불편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죄를 멀리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몸은 여전히 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는 우리 몸과 마음 전부를 장악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것은 죄이고 어떤 것은 죄 아닌 것이 없어요.

다 죄에요.

내 자체가 죄 덩어리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죄가 되는가요?

이는 인간은 자기가 행한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챙기고자 하는 본성 때문입니다.

이걸 아까 자기 흔적 남기기라고 했어요.

이건 인간의 본능이고 본성이에요.

본능과 본성은 우리 의지나 각오로 이기지 못해요.

 

죄를 알려면 나를 창조한 창조의 목적을 보면 알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죄란? 목적에서 빗나간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골로새서 1장을 봅시다.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누가 있었습니까?

우리를 만드신 분이 있었지요.

우리를 만드신 분이 누구라고 합니까?

“그” 라고 하지요.

 

여기서 “그”란 예수님을 말합니다.

만물을 “그” 이신 예수님이 만들었어요.

예수님이 나를 만들었어요.

 

왜? 만들었는가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에요.

이게 중요해요.

이것은 죄를 드러내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아요.

 

죄란? 창조의 목적에서 이탈 된 것을 말해요.

그럼 창조의 목적이 누구를 위해서라고 했나요.

예수님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기준으로 죄관이 생기는 것입니다.

 

죄를 아주 쉽게 말할게요.

 

나를 생각하는 것이 죄에요.

우리는 나를 위하여 창조가 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창조가 되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한 목적이 뭣이라고요?

예수님을 위해서예요.

이걸 잊지 마세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누구를 위하여 구원을 했느냐 이면 예수님을 위해서예요.

창조와 구원은 동일한 의미에요.

그럼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어요.

 

야! 정낙원이~

너 누구를 위해서 구원했는지 알어?

그럼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서입니다! 라고 말해야 해요.

 

나를 위해서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위해서 하셨어요.

이게 우리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를 위해서 창조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를 위하여 살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로 바뀌었어요.

죄가 이걸 바꿔버린 것입니다.

 

죄가 나를 위하여 살도록 해 놓았어요.

그러므로 죄인은 무엇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도 나를 위해서 믿어요.

그래서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얼 해도 나를 챙겨요.

나를 위해 하나님을 찾게 하고 나를 위해 이웃을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사기를 치는 것들은 모두가 나를 위해서 저질러지는 것들이에요.

인간들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는 나 때문에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내 자체가 죄에요.

죄가 나를 가지고 노는 겁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나 아닌 것이 없어요.

온통 나에요.

 

나도 나를 위해 살고 있고!

남편이나 아내도 나를 위해 있고!

자식도 나를 위해 있고!

교회도 나를 위해 있고!

예수도 나를 위해 있어요.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난 죄 안 지을 거야! 라고 하는 것도 죄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여기서 죄를 안 짓겠다고 하는 것도 “나” 라는 주체에요.

그래서 “나는 죄 안 짓는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주체로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곤 그 죄 안 지었다는 것을 가지고 자기 가치를 챙기고자 합니다.

인간이 죄 안으면 죄 안 지은 것으로 잘난 척하게 되어 있어요.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우리 자신을 살펴보세요.

우린 모두가 이 원리로 살아가고 있어요.

 

제 자신에게 적용하면 그대로 드러나요.

복음 전하는 나를 가치 있게 보잖아요.

그래서 “나는 복음 전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매사에 우리는 이런 사고로 살아가고 있어요.

 

“난 너하고 달라!”

“난 안했어!”

“난 안 그랬어!” 라고 하잖아요.

항상 상대와 비교해서 자기 의(義)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게 바로 죄에요.

 

난 말씀대로 살았어! 라는 것이 죄에요.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그 바탕에 누가 있나요.

내가 있어요.

그러니 난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지 않았으면 주둥이를 닫을 텐데!

내가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난 말씀에 순종했다고 주둥이를 놀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뭔 줄 아세요.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난 말씀대로 살았어! 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말씀대로 살게 하셨습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나는 빠지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안 되어요.

항상 내가 끼어들어요.

그래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죄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우리 몸의 구조 자체가 나와 예수님을 한 몸으로 여기지 못해요.

나는 나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에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이 몸뚱이는 안 되어요.

 

그래서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새 몸을 입고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나는 없어요.

예수와 한 몸으로서의 내가 있어요.

 

지금은 성령이 이 원리를 잠시 잠간 동안 맛을 보게 해 주십니다.

성령이 순간 순간 툭툭 간섭하시면서 깨닫게 하세요.

그럴 땐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늘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몸이 그렇지가 않아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서 안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만들어서 구원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능력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예수가 믿어지게 해 주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내가 뭘 하겠다고 하지 않아요.

또한 내가 했다고도 하지 않아요.

자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건 내 의지를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뭘 하겠다고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냥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요.

물론 우린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거역하는 일이 다반사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늘 상한 심령이 일어나고 반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꼬라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원수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제발 신앙을 수학 공식 외우듯이 하지 마세요.

신앙을 성경 공부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세요.

성경을 배우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고 배운 성경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에요.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다 이해하지 못하여도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가면 되어요.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진리를 득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진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세우신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되어 있어요.

자신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종국에는 내가 미워져요.

그래서 스스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율법이 오면 내가 죄인인줄 깨닫게 되고 나를 하나님의 심판 아래 두게 한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은혜를 받은 성도는 스스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자기 주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단 말입니다.

자기가 저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알게 된단 말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져요.

그러니 자진해서 자기 주둥이를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 자기 주둥이를 닫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를 보세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면서 숯불로 주둥이를 지지지요.

 

욥을 보세요.

하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 주둥이를 닫잖아요.

요 놈에 주둥이 하고서 쳐요.

 

베드로를 보세요.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잖아요.

 

바울을 보세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잖아요.

 

이 모두가 자기 입을 닫는 것이에요.

이처럼 하나님을 바로 만나게 되면 자기 실존을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어 있어요.

성경은 이걸 겸손이라고 합니다.

주여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게 되어 있어요.

 

이처럼 자기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죄인의 자리에 앉는 것이 겸손이에요.

이걸 모르면 교만이구요.

자기 주제를 알면 겸손이고 모르면 교만이에요.

 

이걸 선악과 사건으로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에게 금지 한 것이 딱 하나 있었지요.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했을까요?

 

그건 피조물인 인간이 선악을 알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너는 선악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 속에는 너는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어요.

인간이 선악을 판단하게 되면 인간 중심에서의 선악으로 판단하게 되어요.

 

그럼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가 훼손이 되어요.

하나님의 법이 무너지게 되어요.

하나님은 창조의 법으로 판단하세요.

창조의 법으로 선과 악을 판단해요.

 

그런데 만약 피조물이 판단하는 권세를 갖게 되면 피조물의 법으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에 창조주의 마음을 몰라요.

피조물의 마음 밖에 몰라요.

그래서 피조물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만든 창조의 세게를 판단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이 좋도록 판단을 해 버려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가 된 세상이 피조물이 좋도록 되어 버려요.

그럼 주객이 전도가 되어요.

이게 죄에요.

 

쉬운 예로 듭니다.

지금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선거를 한다고 치열하게 싸웁니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이에요.

 

진보 입장에서는 보수주의는 사라져야 할 악이라고 합니다.

이건 보수 입장에서도 동일해요.

둘 다 자기의 생각으로 상대를 판단하기 때문에 서로를 용납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만 옳다고 하고 있어요.

 

나라를 반쪽으로 갈라 주면 조용 할까요?

까짓거 그렇게 합시다.

삼국시대 만들어 주면 될 것 아닙니까?

 

삼국시대 만들어 주면 안 싸울까요?

아니에요.

또 싸워요.

 

인간은 싸우는 재미로 살아가는 존재들이에요.

적이 없으면 심심해서 못 살아요.

그래서 서로 붙어서 쌈박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걸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 객관적 입장에서 판단해 보세요.

어느 한 쪽을 편들어 줄 수가 없겠지요.

이걸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자식들이 한 놈은 진보이고 한 놈은 보수라고 생각해 보세요.

 

서로가 죽이겠다고 으르렁 거립니다.

여러분이 부모라고 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두 놈 다 다리를 몽둥이로 분질러 놓지 않겠어요.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불효에요.

 

지금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진보와 보수가 되었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법에 가두어진 죄인이 된 아담의 후손들은 서로 만나면 자신들만의 선악의 법으로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쌈박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피조물이 행사하는 선악의 법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절대로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신(神)이 되어 버렸어요.

여기서 신(神)이란?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되었단 말입니다.

 

이런 놈을 에덴동산에 두면 에덴동산도 자기 맘대로 재 개발을 할 것이에요.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흐르는 4대 강을 막아서 운하를 건설한다고 할 것이며!

동산을 불도저로 밀고 아파트를 짓는다고 할 것이며!

여기 저기 파 헤쳐서 자기 마음에 들도록 다 고챠 벼릴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에덴동산이 안 되고 아담이 보기 좋은 동산이 되고 말아요.

 

이걸 어찌 두고 보겠어요.

그러니 쫓아내야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이 세상으로 쫓아내 버렸어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이제부터 세상을 자기 좋은 대로 만들기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야 할 것을 자기가 좋도록 만들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짓을 하고 있어요.

산과 들을 다 파헤치고 있잖아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그대로 두지 않고 다 뜯어 고치고 있잖아요.

 

이게 인간의 역사에요.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인간을 편하게 해 주는 것으로 발전을 해 왔고 앞으로도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으로 발전을 거듭해 나갈 것입니다.

세상을 온통 자기가 보기 좋도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창조 목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장차 이 세상을 불 태워 버리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 목사들이 교회에서 행하고 있어요.

자기가 보기에 좋은 교회를 만들고 있어요.

목사들이 교회를 자기 사조직을 만들고 있어요.

교인들은 조직원으로 세뇌시키고 있어요.

 

목사들은 교인들이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처럼 듣기를 바라잖아요.

그러니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인간의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교회가 아니고 조직 단체가 되고 말았어요.

 

만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만드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내 자신도 마찬가지에요.

 

만물이든 교회이든 내 자신이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가 의(義)에 상태에요.

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야 해요.

내가 보기에 내가 좋으면 안 되어요.

그럼 나는 예수를 위해서 살고자 하지 않고 나를 위해서 살도록 한단 말입니다.

성령의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나를 위해 살던 나를 이제는 나를 위해서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죄는 나는 나를 위해서 살게 하는데!

성령은 아니야!

너는 너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서 살어!

그런단 말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후 인간은 독자적인 선과 악이라는 판단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행동도 판단을 해 버립니다.

자기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이건 옳은 행동이고!

저건 나쁜 행동이라고 규정을 해 놓았어요.

그래서 그 규정대로 살고자 해요.

그 규정대로 살지 않으면 죄를 지었다고 자책을 해요.

이게 죄에요.

 

내가 뭔데 나를 판단합니까?

나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세요.

하나님은 나의 행동을 가지고 이건 의롭고 저건 불의하고 판단하지 않아요.

너 예수 믿느냐! 안 믿느냐만 물어요.

예수님의 의(義)가 있느냐 없느냐를 물어요.

 

그런데 우리는 눈만 뜨면 우리의 행동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살아요.

이런 것은 선이고!

저런 것은 악이라는 식으로 말이에요.

자기가 정한 기준에 따라서 살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이런 기준으로 율법도 대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정한 기준으로 율법을 선과 악으로 규정했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정한 법에 따라서 선한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면 이것이 선한 일로 의(義)가 되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겼어요.

결국 자기가 만든 법이 근거가 되어서 자신을 평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범에 의해서 세리와 창기들은 죄인이라고 하였어요.

우린 너희와 달라!

오죽 했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도 하나님이여 나는 저 세리와 갖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이 기준에 의해서 예수님도 죽였어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 법에 가두어져 있어요.

그러니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법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동 여부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잘한다 못한다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착하게 살았다고 하면 뿌듯한데!

그렇지 않고 자기 생각에 악하게 살았다고 하면 주눅이 드는 겁니다.

이건 자기 행함으로 사는 것이지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피조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가 되었어요.

창조 자체가 은혜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없는데서 있게 되었어요.

그러므로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에 은혜 아닌 것이 없어요.

다 은혜에요.

 

우리는 살만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행위대로 판단을 했다고 한다면 우린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해요.

그럼에도 이렇게 버젓이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대하시기 때문에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면서도 이렇게 멀쩡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란?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란? 행함의 반대에요.

댓가 없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욕 되게 하는 것이 댓가에요.

행함이란 말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해서 착하다 라고 하면 이건 착하게 산 것의 댓가에요.

은혜는 나는 악한 일을 했음에도 나의 행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하심으로 산다고 할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행함을 보지 않고 은혜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이게 창조 섭리에요.

창조 자체가 피조물의 조건을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이 은혜를 행위로 바꿔버렸어요.

이 사상이 성도다운 삶으로 정형화시켜 놓았어요.

일명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답다” 라는 말은 정형화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목사다워야지!”

“성도가 성도다워야지!”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성도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합니다.

 

“다워야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는 말은 정해진 규범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규범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이 드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목사다움이 어떤 것인가요?

성도다움이 어떤 것인가요?

 

그럼 여지없이 어떤 규범이 나옵니다.

그 규범을 들여다보면 선악의 법에서 기인된 것들이에요.

지극히 세상 적이에요.

윤리와 도덕이에요.

 

“욕을 하면 안 된다!”

“술을 먹으면 안 된다!”

“사기 치면 안 된다!”

“살인 하면 안 된다!”

“간음 하면 안 된다!”

“도적질 하면 안 된다!” 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윤리와 도덕은 인간이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건덕상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욥기서에서 엘리후가 욥과 그 친구들에게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으로 접근하는 것이 죄라고 책망을 할 때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건 아무렇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성도 안에는 성령이 와 계세요.

성령이 간섭을 하세요.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난 막 살거야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이러한 짓을 하나 안 하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이러한 죄성들을 품고 사는 자들이에요.

우리 안에는 이러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어요.

그러니 하나 안 하나 죄인이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드러내고 있고 어떤 자는 숨기고 있을 뿐이에요.

 

그러므로 이러한 행동 지침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어요.

이러한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 앞에 의(義)가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서 의(義)가 아닌 것을 신앙의 본질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요.

 

그럼 진짜 의(義)를 가리는 속임이 되고 말아요.

진짜 의(義)는 예수님 안에 있어요.

인간의 의(義)가 예수님의 의(義)를 가리게 된단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걸려들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행함으로 예수 앞에 나오기를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선 자기 의(義)로 힘써 하나님의 의(義)를 힘써 거부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짓을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하고 있어요.

성화주의자들은 인간의 반듯한 삶 속에다가 의(義)가 있다고 속이고 있어요.

그래서 의롭게 살라고 하잖아요.

의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여지없이 인간의 행동 지침이 나옵니다.

이건 사기에요.

거짓이란 말입니다.

 

의롭게 살라고 하면 안 되고 예수 안에서 의로운 자로 살라고 해야지요.

믿음으로 살라고 하여야 해요.

의로운 자로 살라고 하면 자신을 의롭게 해 주신 그 예수를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심에 감사하며 살게 된다구요.

여기에 무슨 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나는 성화 했습니다! 라고 자기 자랑이 있겠어요.

할 수가 없어요.

 

위에 열거한 것대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의롭다 하지 않아요.

만약에 위에 언급한 것대로 산 것을 의롭다고 한다면 절간에 다니는 불자(佛者)들이 교인들보다 훨씬 더 의로운 자들이 될 것입니다.

불자(佛者)들은 바탕에 인간 존엄사상이 깔려 있어서 측은지심이 있어요.

그래서 착하게 살려요 해요.

불자들이 훨씬 인간다워요.

인정머리가 있다구요.

 

그런데 교인들은 죄인이라는 것을 핑계 삼아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아주 교활해요.

자기가 죄를 짓고 불리하면 죄인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하고!

자기가 죄를 안 짓고 유리하면 성도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고 지랄을 하잖아요.

 

성도라고 한다면 법이 나오면 안 되어요.

은혜가 나와야 해요.

은혜로 대하고 은혜로 살라야 해요.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어요.

은혜란?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 겁니다.

 

그렇다고 어떤 행동을 옹호해 주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 행동을 가지고 에라이~ 지옥에나 갈 놈이라고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란 말입니다.

믿음이 있네! 없네!

죽일 놈! 살릴 놈! 판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피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에요.

하나님은 죄인의 행동 하나 하나를 가지고 죄다! 아니다!

의다! 아니다! 라고 판단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물론 성도가 세상이 금하는 일을 하면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을 수는 있어요.

하나님 망신을 시킬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은혜로 주신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아요.

우리의 구원이 행위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위로 취소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은혜로 구원을 하였기 때문에 끝까지 은혜로 구원을 지켜주세요.

 

구원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것이지 우리 힘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 우리의 어떤 행동으로 인하여 죽일 놈이니! 살릴 놈이니!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란 말입니다.

난 아직 안하고 있을 뿐이에요.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은데 참고 있을 뿐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주어진 구원은 우리의 행실로 끊어지지 않아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로도 취소당하지 않아요.

그래서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방인들의 눈 때문에 막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몰라요.

하나님이 말하는 죄관을 몰라요.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기준으로 판단을 합니다.

이방인들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이에요.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성도를 판단해도 자기들의 기준인 윤리 도덕으로 판단해요.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윤리와 도덕적인 삶을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성도의 그릇된 삶을 보고서 에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놈들이 그러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욕하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에 막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죄관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동 하나 하나를 가지고 비판 정죄하여서는 안 되어요.

권면하고 책망은 할 수 있으되 심판은 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누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셔야 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성도는 긍휼의 마음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누가 어떤 잘못을 한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으로 보는 사람은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심판 할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을 하면 성화주의자들은 누가 성도의 행함을 의라고 하느냐!

다만 성도다운 모습으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 라고 대꾸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자신들이 바라는 성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다워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판단 받아야 할 기준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에요.

본인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 사람의 행동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어요.

연약하여서 넘어 질 수도 있는 것이고!

아니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드러내고자 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판단 할 자들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도 판단을 받아야 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일어서고 넘어짐은 주님께 맡기고 그러한 것을 나의 반면교사로 삼으면 됩니다.

내 안에도 그러한 죄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남이 어떤 죄를 지으면 욕을 하는 그것이 우리 안에도 있어요.

다만 환경이 허락하지 않아서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에요.

우리 안에 죄성들이 꿈틀거리고 있어요.

이 놈은 여건만 허락이 되면 튀어나와요.

 

그러므로 나도 언제든지 살인 할 수가 있고!

도적질 할 수가 있고!

간음할 수도 있고!

사기 칠 수가 있어요.

지금은 단지 그런 환경이 아니라서 나타나지 않을 뿐이에요.

 

이러한 것들은 환경만 조성이 되면 언제든지 나타나요.

어떤 사람은 나타님으로 살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그 안에 품고 살고 있을 뿐이에요.

하나님 말씀이라는 MRI로 찍으면 다 나타나요.

 

그러니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그 사람이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은혜를 입은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조만 간에 남에게 욕을 하던 그것이 자기도 행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남에게 판단 한 것이 부메랑처럼 되돌아 와서 자기를 판단 하게 할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감추어 놓았던 것들이 봇물 터지듯이 나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그렇게 하고 말 것이에요.

하나님이 반드시 죄인이라는 사실을 들추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남을 참소하면 하나님은 그 참소를 본인이 당하게 되는 사건 속으로 밀어 넣고 주둥이를 닫게 하실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자신도 동일한 죄인임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옛말에 자식 키우는 사람은 남에 자식 욕하지 말라고 했어요.

남에 자식의 잘못을 욕하던 그 짓을 내 자식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에 자식 잘못을 가지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라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남에 자식이 했으면 내 자식도 해요.

내 자식이나 남에 자식이나 그 놈이 그 놈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남에 자식에게 손가락질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그래요.

너나 나나 동일해요.

남이 잘못하면 나도 잘못해요.

남이 죄를 지으면 나도 죄를 지어요.

난 안해!

그따위 소리 하지 마세요.

 

오늘 본문에서 그런 말 하는 자는 주둥이를 재봉틀로 박아 버린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잘못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러지 말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주둥이를 재봉틀로 확 박아 버릴 때가 올 것입니다.

당신이 창세전에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아야 할 성도로 선택을 입은 자라고 한다면 말이에요.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발가벗기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들추어내실 것입니다.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의지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알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만약에 그럴 일도 없겠지만 혹시라도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천국에 가면 완장을 차고서 모든 사람을 정죄 할 텐데 그걸 어찌 두고 본단 말입니까?

천국은 이런 자들이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찌 이를 허락하겠어요.

 

그러니 이 세상에서 주둥이를 닫도록 그 안에 있는 죄성들을 하나 둘씩 끄집어내서 주둥이를 국방색 실로 꿰매서 할 말이 없도록 만들어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 죄를 끄집어내서 죄를 짓게 해서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로서는 천국에 못가요.

탕자로서 천국에 가요.

우린 모두가 탕자에요.

하나님이 탕자로 만듭니다.

 

아니지요.

말은 바로 합시다.

우리는 애초에 탕자로 태어났어요.

 

그런데 맏아들처럼 위장하고 있어요.

그 쥐꼬리만한 자기 착함을 가지고 의로운 척 한단 말입니다.

개뿔이나 성화 된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성화 하였다고 꼴값을 떨고 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꼴란 성화를 묵사발 내는 방식으로 사랑을 베푸실 것입니다.

이러한 것도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오직 창세전에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성도들에 한해서입니다.

자기 백성에게만 이런 혜택도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영화롭게 하고자 하세요.

그리스도의 의(義)만 남게 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의(義)라고 생각하던 것들을 다 죄라고 고발해서 토해내게 하십니다.

나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는 지금도 말씀이 율법이 되어서 우리 죄를 고발하여서 하나님 앞에 입을 닫도록 하십니다.

누구를 정죄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낱낱이 해부당하여서 정죄 당하여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세요.

 

이 하나님의 일하심과 사랑을 아셔야 합니다.

많이 알아서 많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많이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깊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더 깊이 알아 가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실존이 어떤 것인가를 발가벗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지나친 의인도 되지 말게 하시고 지나친 죄인도 되지 말게 하옵소서! 많이 탕감 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하셔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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