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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21강. 인간의 실상 (롬 3:9-18)

by coroa 2022. 8. 3.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1강. 인간의 실상 (롬 3:9-18)

롬 3:9-18=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毒)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 본문은 인간이 어떤 자인가를 적나라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을 보면 인간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깔아뭉개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정의하기를 썩은 송장이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엄청 기분 나쁜 이야기입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입술로는 독사의 독(毒)을 내 품고 있으며!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악하고도 흉악한 짐승입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입만 열면 죽이는 것을 쏟아낸다고 말입니다.

마치 궂은 날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듯이 인간 속에서 썩은 냄새가 풍겨 나와서 진동을 하고 악한 행동들이 서슴치 않고 나온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하나님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누군들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인식이 이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자는 신자(信者)이고!

동의하지 않는 자는 불신자(不信者)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동의를 이끌어내고자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 라는 것을 통고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실상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수치를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수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가리는 짓을 하였습니다.

그 속엔 수치가 그대로 있는데 치마로 살짝 가려놓은 일을 행하였습니다.

이건 속임입니다.

 

아담의 이러한 행동 하나가 인간이 어떤 자인지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인간이 어떤 자인가?

본질이 속이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기(詐欺) 치는 자들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일컬어 거짓의 아비라고 합니다.

죄인의 아비가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 아비를 닮아서 거짓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모든 삶에 묻어져서 나옵니다.

 

우리의 신앙 속에 그대로 녹아져 있어요.

예수님은 이런 거짓(위선)을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외식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말을 들었고 지옥에 들어가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외식이란? 마음에도 없는 것을 겉으론 있는 척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사기를 치는데 인간들끼리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인간들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속고 속이고 역사로 점철이 되어 온 것입니다.

흔히들 역사를 승자(勝者)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이는 승자들이 자기를 포장해 놓은 것이 역사란 말입니다.

 

승자들이 어떻게 승자가 되었습니까?

속임과 살인과 폭력으로 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럴 듯하게 포장을 해 놓았습니다.

 

우리 역시도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도 우리 인생을 거짓으로 포장을 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인생 자체가 거짓 인생인 것입니다.

 

우린 눈만 뜨면 거짓으로 자기를 치장하는 일을 도모합니다.

자신을 괜찮은 자로 포장하기에 바쁩니다.

죄인 아닌 자로 위장하기에 바쁩니다.

 

속으로는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습니다.

우린 너무도 이러한 위선과 거짓에 익숙해져 있고 자연스러워요.

그래서 이러한 속임이 우리의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녹아져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냉정하게 살펴보세요.

쉽게는 예수를 안 믿으면서도 믿는 척 하잖아요.

정확하게 말해서 믿어지지도 않는데 믿어지는 것처럼 속이고 있잖아요.

속이고자 하여도 이러한 것이 삶으로 그대로 드러나고 있어요.

마치 포도나무에서 포도 열매가 열리듯이 우리의 삶 속에서 믿음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으로 살지 않아요.

다만 믿음으로 사는 척 할 뿐입니다.

실제로 믿어지지도 않으면서도 믿는 척 하잖아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러고 있어요.

어느 시대나 인간은 항상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는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이런다고 합니까?

유대인들입니다.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이러합니다.

 

누굴 속입니까?

하나님을 속이고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뻔뻔스럽게 말입니다.

 

왜? 거짓말을 할까요?

무엇 때문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할까요?

이는 얻어 낼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한마디로 속으로는 호박씨를 까면서 겉으로는 아양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숨기고 있는 포장지를 확 뜯어내는 일을 하십니다.

거짓을 폭로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상을 알려주십니다.

물론 자기 백성들에 한해서 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너희는 썩은 놈이라고 알려줍니다.

사기(詐欺) 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이제 그만 자수하여 광명을 찾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 앞에 그렇다고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핑계를 대고 자기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결국 내가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합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상을 그대로 들추어 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의인을 죽인 증거물이에요.

인간의 옳음을 남기고자 하나님을 죽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앞에 서면 사기꾼이라는 것이 들통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은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자신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빛 앞에서 자신이 부정당하기 때문에 빛이 싫은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옳은 자로 큰 소리 치면서 사는데 괜히 빛이 와서 자존심을 상하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빛에 대한 적개심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빛을 없애 버렸습니다.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신이 부정당하고 무시당하는 겁니다.

“넌 틀렸어!”

“넌 가짜야!” 라고 하면 화가 납니다.

 

스스로 다 안다고 하는데!

“니가 뭘 알어!”

“니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네 까짓 것이 뭘 안다고 아는 척 하느냐!” 라고 하면 뚜껑이 열립니다.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해 보세요.

그럼 늙어서 되갚음을 당합니다.

자식 자존심 상하게 하면 안 되어요.

그러니 늙어서 자식들에게 따뜻한 밥 한 술이라도 얻어먹으려면 자식을 부정하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해요.

항상 내가 옳은 자로 있고 싶어 합니다.

내가 신(神)이고 싶어 해요.

 

모든 우주의 중심에 내가 있어요.

이처럼 인간은 자아(自我)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누가 자기 존재를 부정하면 본능적으로 적개심이 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자기 존재감이 상실이 되면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정당하면 극단적인 행동이 폭력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에 대한 폭력으로는 자해(自害)하거나 자살로 나타나고!

타인에 대한 폭력은 무력으로 상대를 가해(加害)하거나 아니면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자기를 부정하는 예수님을 죽였듯이 우리도 자기 존재감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부정당하고 존재감을 상실하면 가룟 유다처럼 자살을 해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폭력을 행사하였고!

가룟 유다는 자기 자신에게 자살이라는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남에게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자살을 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입니다.

자신의 옳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하거나!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고자 자신을 죽임으로서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의(義)가 강한 사람일수록 자기 부정을 용인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틀어 역사를 살펴보면 잘난 사람들이 자살을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역사에요.

자화상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으로 나타나면 상대를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누군가 자기보다 낳다고 생각이 되어지면 그를 포용하고 함께 가는 것이 아니고 해칩니다.

질투심이 생겨서 내어 좇고 영광을 혼자 차지하고자 합니다.

신앙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나 가룟 유다가 자살을 한 것이나 모두가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니 가룟 유다나 유대인들은 우리 죄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화상(自畵像)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을 가지고 우리 인간의 실존을 고발하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가룟 유다나 유대인들과 같은 본성(本性)들이 그대로 들어 있어요.

언제 튀어 나올지 몰라요.

자기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스프링처럼 튀어나옵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고 한다면 우리도 반드시 예수를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유대인이고 가룟 유다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자에요.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에요.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의 속을 확 뒤집어 놓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어요.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면 예전에 자신이 바리새인으로서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자신은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했잖아요.

이건 바울만 아니고 모든 바리새인들이 그랬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유대인들이 속 뒤집어지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자아도취에 빠져서 꿈꾸고 있는 자들에게 찬물 끼얹는 소리를 하고 있어요.

점 잖은 것 좋아하네!

네 놈들이 사기꾼이고 도적놈이라고 합니다.

흠 없는 것 좋아하네!

네 속에 악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바울의 이 말은 지금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야! 정낙원이!

넌 사기꾼이고, 도적놈이고, 살인자라고 합니다.

 

아니~ 이렇게 순순하게 복음을 잘 전하는 나에게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에게 말이에요?

그래서 전 지금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동의 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나를 아무리 봐도 좋은 놈은 아니란 것입니다.

내가 사기꾼이고, 도적놈이고, 살인자가 맞습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 할 수가 없어요.

사실이니까요.

 

내 안에 이러한 것들이 가득차 있음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전하는 것은 복음은 전부 무오한 것처럼 주접을 떨고 있으니 사기치고 있는 것이 맞고!

복음 전한다는 것을 빙자하여서 영광을 탐하고 밥 빌어먹고자 하니 도적놈이 맞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저주를 퍼 붓고 있으니 살인자가 맞습니다.

 

하지만 입술로는 맞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뭔가 개운치 않는 것은 왜? 일까요?

왜? 쿨하게 “주여 나 죄인 맞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세요!” 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을까요?

뭔가 핑계를 대어서 자기 합리화를 시키고자 함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고 하면서도 쉽사리 동의하고 싶어 하지 않고자 하는 이 못된 심보는 어디에서 생기는 걸까요?

바로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정한다고 하면서도 이런 저린 핑계를 대고 아니라고 외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복음 복음하여도 결국엔 자기 가치 챙기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복음 전하는 내가 자랑스럽고!

복음 아는 내가 자랑스러워요!

결국 복음으로 내 가치를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면 의절(儀節)을 해 버리잖아요.

바른 말을 해 주면 감사하게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도리어 화를 내고 급기야는 돌아서서 갈라져버리잖아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면서 죽고 못 산다고 죽이 척척 맞던 사람도 바른 말을 해 주면 기분 나빠해요.

내가 널 언제 보았느냐고 돌아서 버리잖아요.

그만큼 우리는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그 복음으로 살지 않아요.

그러니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복음은 지식이고, 복음이 지식이다 보니 신앙이 관념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죽은 복음이고 죽은 신앙이에요.

우리는 복음 보다는 내 자존심이 중요해요.

그래서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이나 모임이나 조직은 없어졌으면 합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교회는 망해야 된다고 하고!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 목사는 타락했으면 하고!

나를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은 망했으면 하잖아요.

 

복음보다 내 자존심이 더 중요하고!

교회보다 내 명예가 더 중요합니다.

오로지 “나” 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리지 못해요.

자기 부정당함을 용납 할 수가 없어요.

 

솔직히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다 옳은 말씀이잖아요.

바른 말이잖아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듣기 싫다고 옳은 말을 하는 예수님을 죽였어요.

감사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반대로 악을 행하였다구요.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면 지금도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건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도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말을 하게 되면 죽임 당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해요.

 

바울은 말세에 고통당하는 때가 오는데 그 징조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자기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둔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자기를 알아주는 목사를 찾아다닌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알아주는 교회로 옮겨가고!

자기를 긍정해 주는 집단을 찾아다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주변에서 심심찮게 듣는 말들이 있지요.

교인들이 하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함께 교회에 다니다가도 다툼이나 이해관계에 부딪치면 저 인간 꼴 보기 싫어서 교회 옮긴다고 하는 말들입니다.

장로나 권사와 같은 임직 자들을 뽑을 때 투표에 떨어지면 교회를 옮기잖아요.

 

누구라도 바른 말을 해 주면 고맙게 생각하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인간은 바른 말을 듣고자 하지 않고 자기 귀에 달콤한 말을 듣고자 해요.

그래서 아무리 친한 친구이고 흉금 없이 터놓고 지내던 사이라도 귀에 거스리는 말을 하면 내가 너를 언제 보았느냐 라고 안면몰수를 해 버리는 것입니다.

백 마디 좋은 소리를 하다가도 한 마디 싫은 말을 들으면 얼굴색이 변하잖아요.

좋은 말 백 마디를 싫은 말 한 마디에 함몰시켜서 서로 헤어지는 극단으로 치닫잖아요.

 

그래서 성경은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품안에 있는 아내도 믿지 말라고 하겠어요.

그만큼 인간은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들이에요.

 

이처럼 인간들은 복음 복음하여도 그 바탕에는 자기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들은 누구를 만나고 교제를 하여도 자기를 옳다고 인정 해 주는 바탕에서 사귐을 갖고 교제를 합니다.

나를 긍정해 주지 않으면 참석하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이든 큰 조직이든 작은 모임이든 내가 부정당하면 등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복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음도 내가 긍정되어지고 인정이 될 때이지!

내가 부정당하고 내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가차 없이 버려버립니다.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는 것도 자기 긍정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하나의 핑계일 뿐이에요.

 

교인들이 단골가게 찾아다니듯이 교회를 옮기는 것도 다 이런 사고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내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에요.

복음이 아니에요.

나 이외 신(神)이 없어요.

 

내가 신(神)이에요.

하나님도 나를 인정해 줄 때 하나님으로 대접을 받지 나를 부정하면 국물도 없습니다.

이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나를 하나님보다도 더 소중한 신(神)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모두가 “나” 라는 신(神)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피 흘리는데 발이 빠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이 빠르다” 는 말은 본능적으로 행한다는 말이에요.

생각할 겨를도 없어요.

즉시로 행해 버려요.

 

미움은 한참 생각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즉각적으로 나타나요.

미우면 욕부터 먼저 나와요.

이성보다 본능이 우선이에요.

 

그래서 누구라도 나를 부정하면 밉고 죽이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드는 것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생각이 들면 죽여야 해요.

살려두면 계속해서 미움이 내 안에서 발동을 해서 나를 괴롭혀요.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것도 이러한 마음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부정하는 예수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요.

 

나를 부정하는 예수가 곁에 있으면 내가 늘 불편해요.

불편한 것을 곁에 두고서는 잠이 안 와요.

없애야 해요.

그래서 예수님을 몇 시간 만에 재판을 끝내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은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에요.

내가 옳음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폭력을 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들만이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加害者)가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다 가해자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죄인으로 봅니다.

죄인으로 본다 함은 죽은 송장처럼 무가치한 자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가치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유대인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대단치 못하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자기 주제도 모른 채 말씀을 지키겠다고 덥석 물어 버렸어요.

결국 말씀이 그들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어떤 것인가요?

전부 하라! 하지 말라! 는 명령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라! 하지 말라! 는 것이 전부 인간의 본성에 반(反)하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합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유익이 무엇이냐? 라고 따졌습니다.

이에 바울은 유대인의 유익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어째서 유대인들이 인간의 본성과 반(反)하는 말씀을 받은 것이 유익한 것이냐?

이 비밀을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해서 알려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가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담은 말씀을 받은 것이 유익이 되는 것인지를 유대인들의 실패를 통해서 보여주셨어요.

 

어떻게 보여주셨습니까?

이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인간은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말씀 앞에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말았어요.

이게 복이란 것입니다.

 

그럼 묻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이 복이고 유익이 되느냐 입니다.

그건 창세전 언약의 수순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보면 죄인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죄인을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이 되려면 먼저 죄인으로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죄인에게만 적용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구원을 베풀고 싶어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먼저 유대인에게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아느냐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율법을 받은 것이 무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냐 라고 퉁퉁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을 주어도 그것이 복인 줄 모르고 있으니 어찌 소경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소경이지요.

 

이스라엘은 언약을 보여주기 위하여 선택을 입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럼 창세전 언약이 이스라엘 속에서 시행이 되려면 이스라엘이 먼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야하는 상황이 일어나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의 죽음으로 구원해 낼 수가 있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인임을 알려주는 언약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이름 하여 율법입니다.

 

창세전 언약 속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 있고! “죄에서 건져내는 언약”이 있습니다.

“죽이는 언약”이 있고! “살리는 언약”이 있습니다.

 

죄 아래 가두고 죽이는 언약을 옛 언약이라고 하는데 이를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에서 건져 내서 살리는 언약이 있는데 이를 새 언약이라고 하고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니 죽음이 먼저이고 살려내는 것이 나중인 것입니다.

죄 아래서 나는 것이 먼저이고! 죄에서 건짐 받는 것이 나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죄 아래 가두는 옛 언약을 먼저 주셨습니다.

죄 아래 가두는 언약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죄인 만드는 언약이에요.

 

율법 속에는 의인(義人) 되는 것이 없어요.

무조건 죄인(罪人) 되게 하세요.

그래서 율법은 아무리 완벽하게 지킨다 하여도 그 속에서는 의(義)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 붙들면 안 되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율법은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고 안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는 기가 막힌 묘수(妙手)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 앞에 서면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즉 죄 아래 가두어지게 된단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서 죄 아래 가두어져야만 해요.

그래야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집니다.

용서가 주어지게 되어요.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29-36=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합니다.

이는 긍휼을 베풀기 위함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1장은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이 참 감람나무인 예수님에게 접붙임 당하여서 구원받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이 접붙임 이야기를 유대인의 넘어짐과 이방인의 구원이야기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중에서 얼마가 넘어졌는데 하나님은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 붙였다고 합니다.

접 붙임 당한 이방인은 전적인 은혜로 구원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이 빠진 자리에 이방인을 은혜로 채우시고!

그 다음에 빠져 나간 유대인들을 다시 이방인처럼 은혜로 찾아오신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죄 때문에 잘려나갔다가 은혜로 붙임 당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잘려 나갈 때는 죄로 인하여 잘려 나갔는데 찾아 올 때는 긍휼로 찾아옴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찾아옴을 당한 자들은 모두가 은혜로 찾아옴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찾아옴을 당한 자들에게는 불순종과 긍휼이 함께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잘려나갔다가 은혜로 부르심을 입게 된 것이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선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긍휼로 구원을 해 내신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율법이라는 말씀을 주어서 그들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린 것은 긍휼을 베풀고자 하심입니다.

죽여 놓고 살려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살리기 위해서 먼저 죽인 것과 같아요.

 

쉬운 말로 용서를 해 주시고자 넘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용서란? 반드시 잘못을 바탕으로 깔고 역사를 합니다.

잘못을 모르면 용서가 성립이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용서해 주고 싶어도 자기의 잘못을 모르면 용서가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용서가 일을 하기 위해서 잘못을 지적하는 일을 먼저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주어서 잘못을 들추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대인에게 하나님 말씀이 주어진 것은 엄청난 특혜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유익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이걸 몰랐어요.

그러니 우리가 율법을 받아서 덕을 본 것이 무엇이냐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성경을 잡지책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 살펴보고 갑시다.

바울의 증거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봅니다.

 

딤후 3:14-17=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고 하지요.

성경이 뭐라고요?

“구원에 이르는 지혜”라고 합니다.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지요.

 

그럼 누가 예수를 믿습니까?

죄인이 믿지요.

 

그럼 누가 우리를 죄인으로 알려 줍니까?

성경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직역하면 성경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를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따라가면 예수를 만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무진장 중요해요.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걸 몰라요.

이들은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해요.

 

그러나 성경이 자증(自證)하기를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 라고 했어요.

성경은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성경을 따라가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는 말이에요.

성경의 끝에 가면 예수를 믿는 믿음이 나와야 해요.

그래야 성경을 올바로 본 것이 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성경이 율법처럼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해 주기 때문입니다.

죄인으로 고발을 해서 죄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대로 산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 내용을 지켜낸다는 뜻이 아니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自覺)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 가장 큰 미혹이 바로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말은 그럴 듯하지만 이건 뱀의 말이에요.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던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자들을 유대교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신앙의 바탕을 깔고 있어요.

그래서 모든 신앙의 초점을 말씀을 지키는데 두었어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을 저주 받은 자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도리어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을 독사새끼라고 했습니다.

지옥에 가라고 했다니까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신앙을 이 시대 개혁주의 성화론자들이 하고 있어요.

 

이들은 신앙을 은혜에서 행위로 몰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행위만 자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바라는 바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들의 피로서 자기 백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의 내용이거든요.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기 백성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 예수님 피가 발라진 한 민족을 만드는 겁니다.

 

이걸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보여주셨어요.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모두가 어린 양의 피를 뒤집어쓰고 나왔어요.

그러니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은 피의 민족인 겁니다.

어린 양의 피로 생겨난 민족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애굽이라는 죄의 나라에서 꺼내 오셨어요.

그러므로 구약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를 모르면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어린 양의 피를 모르는 자를 일컬어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율법에 의미를 모르는 자를 표면적 유대인이라고 했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모르는 자는 육에 속한 자에요.

 

육에 속한 자는 신자가 아니에요.

교인이에요.

교인의 특징이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예수가 자랑스럽지가 않아요.

예수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자랑스러워요.

 

그래서 하나님은 어느 시대이고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어서 죄인을 만드는 일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게 하십니다.

성령이 이러한 일들을 행하세요.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성경을 주어서 죄인으로 만들어 버려요.

그러니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새 언약을 붙잡도록 한단 말입니다.

성경을 졸졸 따라가면 누가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와요.

 

이걸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불순종가운데 가두어 놓고 긍휼을 베푼다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성경을 받은 것이 엄청난 유익이라는 것을 알겠지요.

그럼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경을 어떻게 대할까요?

귀하게 대하겠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성경을 그렇게 여기고 있나요?

아니지요.

우리들은 성경은 주일날 교회 와서 설교 시간에 본문만 찾아서 읽혀지는 것으로만 사용하고 있잖아요.

 

지금은 성경책이나 찬송가가 없어도 스크린에 다 비춰주어요.

이제는 성경이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성경이 점점 감추어지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마귀가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작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약의 유대인이나 신약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어요.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잖아요.

성경의 소중함을 알아야 하는데 우린 점점 성경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어요.

말씀 듣는 일에 게을러지고 있어요.

유대인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멀리하면 죄에 대하여 둔감해져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됩니다.

거울이 없으면 자기 얼굴을 살필 수가 없듯이 말씀이 없으면 자기 주제를 몰라요.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어 버려요.

그러므로 우린 늘 성경을 통해서 책망을 받아야 해요.

그게 복이에요.

 

그래서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고 하였습니다.

복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늘 가까이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복을 받은 성도는 성경을 가까이 해요.

말씀 듣기를 사모한단 말입니다.

 

말씀 듣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신앙이에요.

모이기를 싫어하고 말씀 듣기 싫어한다는 것은 복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은 성도는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게 되어 있어요.

주야(晝夜)로 말씀을 묵상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을 받았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복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늘 묵상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깨달아야 구원이 은혜로 남고 감사가 되지요.

이처럼 하나님은 은혜를 알려주시려고 먼저 말씀으로 우리를 죄인으로 몰아가는 일을 하십니다.

 

이건 마치 새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 목욕을 시키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어서 그 말씀으로 너희들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엄청난 복을 받았어요.

지금은 성도들이 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 복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 말씀을 귀히 여겨요.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길잡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잘 보세요.

하나님 말씀이 살아 있는 칼이라고 하지요.

칼이 살아서 움직이면 닿는 곳마다 속에 있는 것들이 터져 나오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 안에 뭐가 있다고 합니까?

썩은 것이 있다고 했지요.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했잖아요.

죄를 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간섭을 하면 우리 안에서 죄가 토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수술하는 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디를 수술한다고 합니까?

혼과 영과 관절과 심령 골수라고 하지요.

또한 마음에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안과 바깥의 모든 것을 다 해부한다는 말입니다.

즉 속 마음에서부터 겉의 행동 하나하나까지 다 해부하여서 죄로 드러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움직이는 양날 가진 검이 되어서 인간의 영과 혼과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말씀 앞에 서면 인간의 언행심사(言行心思) 모두가 낱낱이 해부되어서 죄로 들추어져요.

죄로 들추어진다는 말은 어떤 것이 죄라고 알려준다는 의미도 되지만 그 보다 더 원초적으로 말해서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어떤 생각이나 행동이 죄이다! 라고 하기 보다는 더 크게 인간 자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세요.

이렇게 되면 인간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밝혀지게 됩니다.

 

어떻게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거역하는 자라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 폭로가 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그 실존이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거울이라고 합니다.

 

거울 앞에 서서 “아! 나는 죄인이구나!”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자이구나!” 를 알게 됩니다.

“나는 죽은 자이구나!”

“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져야 살 수 있는 자”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말씀을 주어서 너희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유대인들이 이 깊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어요.

 

하나님이 왜? 말씀을 주셨는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자기들의 생각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생각으로 하나니 말씀을 이해하면 어찌 되는지 아세요.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요.

 

말씀을 지킬 주체를 자기로 두어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을 받으면 인간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난 자들은 언약의 주체를 자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말씀도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의 주체는 예수님이에요.

애초에 하나님은 창세 전에 언약의 주체를 예수님에게 두었어요.

그러므로 모든 언약은 예수님이 지키는 것입니다.

옛 언약이든 새 언약이든 예수님만이 그 언약을 이루시는 주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언약의 주체를 자신들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야하는 것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를 만나도록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자기 치장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주여 난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여 예수님을 붙잡아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 나 율법대로 살았으니 착하지요” 라고 하면서 예수를 죽여 버렸어요.

이런 황망할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율법의 정답을 너희는 죄인이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의 정답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답이 지켜야 하는 것으로 나왔으면 지킬 수밖에 없어요.

본인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어요.

곁에서 아무리 아니라고 하여도 안 들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기에 바빴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용도를 몰랐어요.

지키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신앙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치달았습니다.

이게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건 자기들이 잘못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바울이 자기들이 잘못해 놓고서는 하나님보고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의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우리가 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더 드러나게 된 것이니 우리도 잘한 것으로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하여튼 못 말리는 족속입니다.

이게 죄인이에요.

우리들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암튼 죄가 뭐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 의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인간의 샘플로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걸 “기능적 선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은 기능적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유대인을 가지고 인간의 실존을 폭로케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를 대신하여서 먼저 이 일을 하였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은 유익입니다.

이방인들은 말씀이 없어서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데 유대인만 알아요.

 

이제 하나님 말씀으로 죄인 된 심정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거울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자기가 죄인임을 몰랐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을 볼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울이라는 말씀을 주어서 “네 죄를 알렸다! 라고 하셨는데!

유대인들은 “나 거울이 있다!”

“너는 거울이 없지!”

거울 있음을 자랑만 하였지 자기 얼굴을 보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라이~ 이 등신들아!

거울을 받고도 자기 얼굴에 똥이 묻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거울이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느냐! 라고 책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모른다고 한다면 율법을 받은 자나 율법을 받지 않은 자나 차별이 없어요.

정답을 쓰지 못할 바에는 말씀을 받은 놈이나 말씀을 받지 않은 놈이나 뭐가 다릅니까?

다를 바가 없지요.

정답을 모를 바에는 구태여 유대인이다 이방인이다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둘 다 모르긴 매 일반이기 때문입니다.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의 의미를 모르면 육신적으로 할례를 받으나 안 받으나 차이가 없어요.

할례의 의미도 모른 채 아무리 몸뚱이에 할례를 행하면 무엇합니까?

율법이나 할례는 모두가 인간의 실존을 알려주고자 준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준 것이에요.

그럼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올 수 없음을 알아야지요.

인간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지요.

그러라고 율법을 주었고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인간에게는 의(義)가 없고 예수님에게만 의(義)가 있음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의(義)가 아니면 그 누구도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율법으로 자기 의(義)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에 대항을 하였습니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려고 율법을 주었더니 죄를 감추는 일을 하고만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은 불의한 자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유대인의 불의를 가지고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의(義)를 드러내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들을 은혜로 용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만천하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불의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통회 자복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택한 백성들에 한하여서이지만 말입니다.

 

암튼 유대인들 속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시행되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치 않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고서 그 뜻대로 살지 못함으로서 불의한 죄인으로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을 용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게 되는 계기로 삼아 버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불의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동시에 얻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만들어 버렸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속된 말로 일석이조(一石二鳥)를 얻은 셈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산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그것으로 죄인으로 드러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곤 율법대로 산다고 한 것이 바로 죄라는 것으로 밝혀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나중에 성령이 임하자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義)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겁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축복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유대인이 율법으로 넘어진 것이 실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입니다.

큰 틀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것이 맞아요.

넘어뜨린 것은 세우고자 함입니다.

죄를 고발한 것은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로 불러내기 위해서 법으로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도구로 이스라엘을 잘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에 의(義)를 드러내게 하는 도구로 사용당하는 것이 유대인에게는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표본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통해서 모든 인간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서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을 가지고 하나님께 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또한 그 누구라도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천국에 올 수 있는 의(義)를 얻게 된다는 것을 복음으로서 세상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분문은 뭐라고 합니까?

또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그렇다고 유대인이 헬라인보다 낫지 않다고 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입니까?

 

앞에서는 유대인의 유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다르다고 해 놓고서는 뒤에서는 다 똑 같다고 합니다.

모순처럼 들리지요.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요?

하나님 말씀을 받은 것이 다르고!

모든 인간은 죄인인 한 아담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는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유대인들만 받았다는 것에는 이방인과 다릅니다.

 

바울의 증거는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죄 아래 있다 함은 죄의 영역에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죄의 나라라고 합니다.

 

죄의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선(善)이라고 하는 것도 죄이고!

악(惡)이라고 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건 마치 북한에 사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그 곳에 사는 사람은 자연히 공산주의자입니다.

그 사람이 착해도 공산주의자이고 악해도 공산주의자입니다.

민주주의 진영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죄의 나라 라고 합니다.

그로해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봅니다.

유대인도 죄인이고 이방인도 죄인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의(義)가 없다는 차원에서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하늘에만 있습니다.

의(義)에 나라인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어요.

그러니 예수 외에는 모두가 다 죄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의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자도 없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다 한 가지로 치우쳤습니다.

 

어디로 치우쳤습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는 무지함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모른 채 인간의 본성으로 알아진 선악관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을 소경이라고 합니다.

소경이라 함은 보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가요?

첫째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소경인 것입니다.

 

소경이 왜? 무서운가 하면 자기가 아는 것을 진리로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소경은 소경으로서의 보는 관(觀)이 있습니다.

소경으로서 판단하는 기준이 있어요.

 

이 기준으로 하나님을 판단해요.

소경으로서 아는 하나님이 누군가 하면 마귀에요.

우상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갑니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이 육신은 날마다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어떤 하나님을 조합해 내는가 하면 자기를 위한 하나님으로 만들어 냅니다.

 

이걸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이 우상성은 죄 아래서 난 육신이라는 몸이 있는 한 버려지지 않아요.

육신은 죽는 날까지 자기 신(神)을 만들어 내요.

그러니 우리가 죽을 때까지 날마다 우상은 만들어지고 그 우상은 십자가 안에서 깨어집니다.

 

성도는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게 되어요.

정과 욕심을 탐욕 또는 탐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탐심을 신약에서는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 우상을 성령이 날마다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일을 행하세요.

어떻게 행하는가 하면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죄를 이기는 모습이 아니라 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이걸 바울이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고백을 하였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안에 두 법이 있음을 말합니다.

한 법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법이고 또 다른 법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하는 법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법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법을 이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성령이 바울의 눈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향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알려 주시기를 바울아 네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하셨는데!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우리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는 것으로 하셨다고 합니다.

성령이 성도들에게 이 사실이 믿어지게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결코 그 어떠한 것으로도 정죄함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두 법이 있어요.

한 법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이고!

또 다른 법은 육신의 소욕으로 살고자 하는 법이에요.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자 하는 성향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온전하게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고자 하는 성향이 일어난다는 말이에요.

이건 예전에 없던 법이에요.

성령이 그 법을 성도 안에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두 법이 충돌하는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영적으로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탐심은 날마다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냅니다.

죄인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알아도 사라지지 않아요.

 

내가 죄를 안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지 않아요.

그러니 아는 것과 사는 것을 다릅니다.

여기에 성도의 갈등이 일어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 라는 탄식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걸 상한 심령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상한 심령이 일어나는 사람은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에요.

이 때 마다 성령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고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서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죄책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 개과천선(改過遷善)이 되는 줄 알아요.

천사가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요.

반대로 내가 더 악당임을 깊이 알아가게 되어요.

나쁜 짓을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선이 없다는 것을 심도 있게 알게 된단 말입니다.

 

이건 여러분 스스로가 잘 알 겁니다.

본성이 사라지던가요?

안 사라지지요.

이게 사라지면 안 되어요.

그럼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본성이 바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이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성령이 본성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을 땐 죄가 이끄는 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본성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거듭나게 할 때 한번만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필요가 없어요.

거듭나고 난 후에는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해 주신다고 해요.

 

그래서 십자가를 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아직도 십자가에 머물고 있느냐!

이제는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한데로 나아가야 하지 않느냐!

예수님처럼 온전해져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그래서 온전해지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라고 물으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해요.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걸 죄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논리를 따르면 예수는 믿을 대상이 아니고 본(本) 받을 대상이에요.

예수님이 믿어야 할 주(主)가 아니고 닮아야 할 선생인 겁니다.

이러면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오로지 열심과 충성과 노력만 있을 뿐입니다.

 

아니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예수를 닮고 본받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닮아야 하고!

얼마나 본받아야 합니까?

 

쉬운 말로 몇% 성화를 하여야 합니까?

50%입니까!

60%입니까!

100% 입니까!

 

성경은 “아버지가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몇 % 온전하고!

몇 % 거룩하라는 말이 없어요.

 

하나님 같이 온전하라고 하고!

하나님 같이 거룩하라고 하고 있어요.

 

그럼 우리가 과연 하나님처럼 온전할 수가 있으며!

거룩할 수가 있느냐 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더 있어요.

어느 기간 동안 온전하고 거룩하여야 합니까?

 

10년 입니까?

30년 입니까?

50년 입니까?

일평생 입니까?

 

이런 말을 하면 최선을 다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가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고 아버지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하라고 하면 최선이 어디까지 입니까?

무엇이 최선을 다하는 건가요.

그리고 그 최선은 누가 판단합니까?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여야 예수를 닮고 본받아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서 닮으라고 하고 본 받으라고 하여야 닮고 본받을 것이 아닙니까?

이러면 뭘 그렇게 따지냐! 라고 해요.

 

아니 안 따지게 생겼습니까?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도 없고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믿는다고 하는데도 영 안 된단 말입니다.

 

자칭 예수님을 본받고 닮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약을 올려보세요.

지랄을 해요.

입에도 담지 못할 온갖 욕을 하면서 게 거품을 물고 죽인다고 덤벼들어요.

 

아니 이런 것이 예수님 닮기입니까?

예수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예수님을 제쳐놓고서라도 스데반을 보세요.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향하여 도리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어요.

성령 충만을 받은 스데반이 그랬다구요.

 

그런데 어째서 성령 충만 받아서 예수님을 닮고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온전하고 거룩하여야 한다고 하는 고매하신 분들께서 어찌 그리 험한 욕을 하고 사람을 죽이겠다고 지랄을 떠십니까?

그 고매한 성화에 흠이라도 가면 어쩌실려구요.

십년 쌓은 공든 탑이 무너지면 어쩌시려구요

 

아마도 이 분들은 스데반이 받은 성령하고 다른 성령을 받았나 보아요.

성령이 다른가 보아요.

그러니까 성령 충만으로 산다고 하면서 스데반과 다른 모습이 나타나지요.

다르니까 도리어 유대인들처럼 스데반을 죽이는 짓을 하고 있지요.

 

아무리 보아도 이건 아닌 것 같지요.

그래요.

이건 아니에요.

 

이렇게 살다가 망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자칭 하나님을 닮고자 한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던 자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입만 열면 거룩을 외치고!

요즘식으로 말하면 성화를 부르짖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에라이! 이 독사 새끼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이 모두가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에 소경이라서 그래요.

오늘 본문 식으로 자기 주제도 모르고 깨춤 추고 있는 자들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거룩해야 한다고 하고 온전해야 한다고 주접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쥐어짜면 똥 밖에 안 나오는 것들이 말이에요.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목구멍에서 썩은 것들만 토해내면서 말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인간은 한마디로 썩은 송장이라고 하잖아요.

이걸 평토장한 무덤이라고 합니다.

 

썩은 송장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슨 선이 있고 의가 되겠어요.

썩은 송장은 차라리 안 내어 놓는 것이 선이에요.

내어 놓으면 악이에요.

송장은 그냥 무덤 속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름다움이지 나와서 설치고 다니면 온 세상에 썩은 냄새를 풍기면서 오염을 시켜요.

 

죄인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여야지!

죄인이 “주여 내가 거룩하고 온전해 지겠나이다!” 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건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죽으심을 욕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지고 거룩해 질 수가 있다고 하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어요.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죽었다 깨어나도 거룩해 질수가 없고 온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는 주님의 피로 덮어주시는 용서가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라고 하여야 합니다.

 

죄인이 구하고 찾고 두드릴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와 긍휼이에요.

주님의 은혜에 품에 감싸이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의(義)를 덧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산다고 했어요.

주 예수를 믿으셔야 살아요.

괜히 어쭙잖게 예수님 닮는다고 하다간 큰 코 다쳐요.

 

그럼에도 우리는 눈만 뜨면 자아 확장을 꿈꾸어요.

자기 의를 쌓고자 한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하는 그 믿음의 자리에 자기 행함을 끼워놓고자 한단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가 그 하나님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서 입신양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어요.

이걸 탐심이라고 하고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이게 죄인의 실상이에요.

이 실존을 감추려고 하지 마세요.

우린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지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뿐이에요.

말씀이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우리 몸뚱아리는 안 되어요.

 

마음으로는 주를 위하여 죽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내 몸 뚱아리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고 내 탐욕을 위해서 이웃을 죽이고 있어요.

우리의 정과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날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우리의 정과 욕심을 얻고자 만들어내는 다른 하나님 관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늘 죄인으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용서하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이 우상으로 알아진 하나님을 가지고 진짜 하나님을 죽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소경은 눈에 뵈는게 없어요.

그래서 무섭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잖아요.

 

이 겁 대가리 없는 무식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났잖아요.

인간이 하나님을 이단이라고 판단해 버리고 죽여 버렸어요.

세상에~

 

하나님으로부터 판단 받아야 할 자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판단해 버렸어요.

그것도 하나님을 향하여 넌 죄인이고 가짜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이게 인간들의 실상이에요.

우리들의 실상이란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의미에서 하나만 살펴보고 마칩시다.

유대인들이 바라보는 인간관과 하나님이 바라보는 인간관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선민과 이방인으로 구분하였어요.

그래서 율법을 받은 자기들은 의인이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은 죄인이라고 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하게 하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한 아담 안”에 있는 자로서 “모든 인간은 한 통속”이라고 규정한다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다 죄 아래 있다고 정의해 버립니다.

 

죄의 지배권 아래 있다는 말은 곧 죄를 이길 수 없는 처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율법대로 산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에요.

죄는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살아있어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는 겁니다.

 

만약에 율법을 지켜서 죄가 사해진다고 하면 율법대로 산 자들은 죽지 말아야 해요.

죄가 없으면 죽지 말아야지요.

죽음이 죄의 삯으로 주어진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죄가 없으면 죽지 말아야지요.

 

그러나 율법을 받아온 모세도 죽었고!

율법대로 살았다고 큰 소리치던 유대인들도 죽었어요.

유대인들이 율법도 없는 자는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하던 이방인들도 죽었어요.

 

죽음 앞에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어요.

그럼 죄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죽습니까?

죄 때문이에요.

 

죄가 뭔가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럼 율법대로 산 유대인들도 죽었다는 것은 곧 그들이 율법대로 산 것이 역설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의 논리대로 자신들이 율법을 지킨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이라고 한다면 자신들은 죽음을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죽었어요.

 

죽었다는 것은 죄를 이기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죽은 것입니다.

 

그럼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이나 율법 없이 산 이방인이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은 것에는 동일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 놈도 죽고 율법을 모르는 자도 죽었다는 것은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누구를 차별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죄인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그 은혜를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자기 구원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찬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자에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가 죄인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 용서 받은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하세요.

 

그러니 차별로 살지 말고 구별됨으로 사세요.

나는 너와 다르다고 하지 말고!

나와 너는 동일한 죄인인데 내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였다고 증거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자랑되어야지 나는 너와 다르다는 차별이 자랑되어지면 안 됩니다.

차별엔 자기 잘남이 나타나지만 구별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이 나타나요.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부디 남을 차별하지 말고 구별된 자로서 감사하며 사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받아야 할 자를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남을 여생을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자랑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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