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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23강.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 (롬 3:19-22)

by coroa 2022. 8. 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3강.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 (롬 3:19-22)

롬 3:19-22=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정낙원 목사

 

오늘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를 살펴볼까 합니다.

율법 외에 한 의(義)란? 율법에 의(義) 말고 다른 의(義)란 말입니다.

율법 외에 다른 의(義)가 되려면 율법에 의(義)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율법 외에 다른 의(義)라고 말할 수가 있어집니다.

‘율법에 의(義)’는 인간의 의(義)를 말하고, ‘하나님의 한 의(義)’는 하나님의 의(義)를 말합니다.

 

의(義)란? 옳음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에 의(義)란?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인간들 세계에서는 인간들 기준으로서의 옳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 기준으로서의 옳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옳다고 하는 의(義)가 있고,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의(義)가 있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의(義)를 의(義)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 세계에서의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규정한 의(義)가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함을 받으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규정한 의(義)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자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천사들에게 에덴동산의 문(門)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쉬운 말로 천국 문에 서 있는 천사들은 이 하나님의 의(義)를 검사해요.

마치 극장에 들어가는 입구에 검표원이 서 있는 것과 같아요.

극장에 들어가려면 그 극장에서 인정하는 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잖아요.

 

검표원은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아요.

외모는 판단 대상이 아니에요.

오로지 표만 보아요.

극장에 들어가는 조건은 잘 생긴 얼굴도 아니고, 좋은 학벌도 아니고,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니고, 권세자도 아니에요.

오직 하나 그 극장에서 발행하는 표만 있으면 됩니다.

표가 극장에 들어가는 능력입니다.

 

이처럼 천국에도 천국에 입장 할 수 있는 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 표가 바로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인간들이 율법을 지켜서 만든 의(義)는 천국에서는 소용이 없어요.

무가치해요.

 

주일학교에서 많이 부른 노래가 기억나지요.

 

♪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

 

맞아요.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그 어떤 조건으로도 갈 수가 없어요.

오직 믿음으로만 가요.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의(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는 ‘율법에 의(義)’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라고 합니다.

 

율법에 의(義)란? 율법으로 만들어진 의(義)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는 글자 그대로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義)라는 말입니다.

‘율법의 의(義)’에 바탕에는 인간의 행함이 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바탕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율법에 의(義)’는 내가 만드는 의(義)이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는 공짜로 주어지는 의(義)입니다.

내 공로로 천국에 가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공로로 천국에 가느냐!

결국 행함으로 구원을 받느냐!

은혜로 구원을 받느냐! 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의거하면 이 세상에는 ‘율법에 의(義)’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 즉 두 가지 의(義)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두 의(義)는 서로 다릅니다.

둘 다 같다고 한다면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한 의(義)’를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한 의(義)를 알려면 먼저 율법에 의(義)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 의(義)”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를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한 의(義)라고 할 때는 “율법에 의(義)”와 “하나님의 한 의(義)”는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있겠지요?

동류일 것 같으면 다른 의(義)라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서 다르다는 말을 할 때에 “알로스”와 “헤테로스” 두 가지로 말하고 있어요.

문자적으로는 “다르다” 라는 말은 같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알로스”는 같은 “동질(同質)”의 다름을 말할 때 사용하고!

“헤테로스”는 전혀 다른 “이질(異質)”의 다름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알로스” 는 본질적으로는 같은데 서로 떨어져 있을 때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도와 성도는 모두가 예수그리스도의 한 몸에 지체들입니다.

각각의 지체마다 독립적이지만 예수라는 한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는 의미에서는 다 같습니다.

비록 “나”와 “너”가 다르지만 예수 안에서는 하나에요.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에는 다르지만 예수 안에서 한 형제라는 의미에서는 같아요.

이건 “알로스” 적인 “다른” 이에요.

 

“헤테로스” 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는 같아요.

하지만 영적(靈的)인 의미에서는 신자는 예수 안에 있고 불신자는 마귀 안에 있어요.

인간이라는 의미에선 같지만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전혀 달라요.

본질이 서로 하나 될 수가 없도록 완전히 달라요.

이건 “헤테로스” 적인 “다른” 이에요.

 

“율법에 의(義)”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이처럼 달라요.

같이 섞일 수 없는 전혀 다른 의(義)에요.

“헤테로스” 적인 의(義)에요.

 

죄인과 의인은 전혀 달라요.

죄인은 죽은 자이고 의인은 산 자에요.

생명과 사망은 본질이 전혀 다른 이질적(異質的)인 것입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서로 배척하게 되어 있어요.

이는 둘이 하나 될 수가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義)’는 죄인들이 만들어 낸 의(義)에요.

하지만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는 의인이 만들어 낸 의(義)에요.

‘율법에 의(義)’는 죄인인 죽은 자들의 의(義)이지만!

‘하나님의 한 의(義)’는 죄가 없는 의인인 산 자의 의(義)에요.

 

지난 시간 하나님께서 인간을 정의하기를 모두가 죽은 자라고 했지요.

송장이라고 하였지요.

인간들이 하는 짓은 모두가 죽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한 의(義)’는 이 땅에 없는 의(義)에요.

왜냐하면! 이 땅에 있는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오직 하나님 나라에만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의(義)’는 하나님 나라에서 오신 분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한 의(義)’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부터 공짜로 주어지는 의(義)에요.

 

이렇게 되면 이 땅에서 의(義)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충돌이 일어나겠지요.

자기에게 의(義)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의(義)를 거절하게 되어 있어요.

이들이 누구였는가 하면 ‘율법에 의(義)’를 가지고 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 초림 당시는 율법주의자들이었어요.

 

‘율법에 의(義)’와 ‘하나님의 한 의(義)’는 하나 될 수가 없어요.

가까이 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의(義)’는 자연스럽게 ‘율법에 의(義)’를 부정하고 그건 의(義)가 아니라고 고발하는 형식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 의(義)’는 ‘율법에 의(義)’가 틀렸다고 해요.

“그건 의(義)가 아니야!”

“그건 의(義)가 아니고 죄(罪)야!” 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처럼 ‘율법에 의(義)’와 ‘예수님의 의(義)’는 서로가 다름을 드러내는 상대적인 의(義)에요.

이건 마치 빛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둠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한 의(義)’를 준비해 두셨어요.

창세전 언약을 보면 예수님의 피로 자기 백성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진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애초에 죄인은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도록 시나리오를 짜 놓았다는 말입니다.

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인간을 창조했어요.

 

중요하니 예수님에 의(義)를 창세전 언약적인 차원에서 살펴봅니다.

 

그럼 모든 성경을 푸는 열쇠인 창세전 언약을 살펴봅시다.

이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들어도 기분 좋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또 들어봅시다.

 

에베소서 1장입니다.

 

엡 1: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經綸)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성도의 구원을 말하기 전에 먼저 찬송을 하면서 운을 뗍니다.

너무도 기쁘고 황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福)을 주셨다고 합니다.

 

무슨 복(福)인고 하니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복입니다.

이 복을 언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서 자기 백성들이 의로워지는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어떤 언약인가요?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언약입니다.

한마디로 죄인이 의롭게 되는 언약이에요.

 

자기백성이 어떻게 의로워진다고 했나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로워진다고 했지요.

그럼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 들어 있음이 밝혀졌지요.

이건 매우 중요한 말이니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님의 죽음 속에서 발생이 된다고 하였어요.

이걸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고 합니다.

즉 죄 없는 분이 피를 흘려 주셔야지만 죄인의 죄가 사해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의(義)’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죄 없는 의로운 분의 희생으로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의(義)’는 인간 쪽에서 생산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되겠지요.

만약에 인간 쪽에서 ‘하나님에 의(義)’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면 구태여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롭게 해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인간들이 율법대로 살아서 의(義)를 만들면 되니까요.

 

그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義)가 주어질 필요도 없어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의(義)가 주어진다는 것은 곧 인간의 행함으로는 ‘하나님의 한 의(義)’를 만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는 ‘율법에 의(義)’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그럼 ‘하나님의 한 의(義)’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에 의(義)’가 어떤 식으로 발생이 되는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율법에 의(義)’를 알아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도 알 수가 있어요.

 

그럼 ‘율법에 의(義)’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봅시다.

‘율법에 의(義)’는 무엇을 근거로 만들어집니까?

인간의 행함입니다.

 

율법이 뭔가요?

“하라!”

“하지 말라!” 로 되어 있지요.

 

“하라!”

“하지 말라!” 는 무엇은 근거하여서 하는 말입니까?

인간의 행함이지요.

무지하게 중요하니 잘 들으세요.

 

“하라”는 것도 행함이고!

“하지 말라”는 것도 행함이에요.

인간이 반응하여야 하기 때문에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사랑하지 않든지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행함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도 행함이에요.

내 쪽에서 반응을 하여야 하기 때문에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행함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담고 있는 비밀이에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율법을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고 율법을 안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난다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법망에서 빠져 나갈 수가 없어요.

피조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 날 수가 없어요.

하나님 말씀이 곧 법이에요.

 

하나님 말씀이 떨어 졌다는 것은 곧 법에 가두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법적 효력을 갖고 있어요.

반드시 그 말씀에 따른 결과가 도출이 되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창조(創造)하고 합니다.

 

창조(創造)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결과를 말해요.

 

창조(創造)라는 말 자체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물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창조 그러면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있는 것을 없게 하시는 것도 창조에요.

 

예수님께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지요.

무엇으로 저주 합니까?

말씀으로 하셨어요.

그러자 즉시로 무화과나무가 말라 죽었어요.

 

이게 창조에요.

무화과나무를 있게 하는 것도 창조이고!

살아 있던 무화과나무를 죽게 하는 것도 창조에요.

피조물은 창조에 속하였어요.

 

피조물의 창조는 하나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에게 하나님 말씀이 떨어졌다는 것은 곧 피조물의 행함을 동반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거기에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순종으로 반응을 하든지 불 순종으로 반응하든지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 몸은 그 말씀을 지키든지 안 지키든지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 말씀에 연결이 되어 있어요.

벗어 날 수가 없어요.

이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요.

 

율법이 뭔가요?

하나님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율법 속에는 인간의 행함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으면 우리는 그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반응을 하여야 합니다.

 

율법은 한마디로 명령(命令)이에요.

 

쉬운 말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게임 그만 하고 공부 해!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그럼 아이는 아버지의 말씀에 반응을 해야 합니다.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게임을 계속하든지,,

이처럼 아버지의 말씀이 떨어지면 그 말을 들은 아이는 반드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을 하든지 불순종을 하든지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법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에요.

하나님 말씀이 살으라고 하면 살고, 죽으라고 하면 죽어요.

피조물은 그 말씀에 반응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말씀으로 지은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뚱아리는 하나님 말씀이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싫다고 하든지! 아니면 좋다고 하든지! 답을 내어 놓게 되어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죄인들은 자신의 반응한 것으로 죄다 아니다 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에 “예” 라고 순종으로 반응을 했으면 의(義)라고 생각을 하고!

“싫어요” 라고 불순종으로 반응을 했으면 죄(義)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율법대로 살았으면 “나 상(賞) 주세요!” 라고 하고!

세리와 창기들처럼 율법대로 못 살았으면 “나 벌(罰) 받을게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게 문제이고 죄에요.

 

이게 무지무지하게 중요해요.

인간들이 상(賞)과 벌(罰)을 무슨 근거로 판단합니까?

자기 행함이지요.

 

이게 인과응보(因果應報)사상이에요.

원인에 의한 결과를 도출하는 사고입니다.

모든 인간은 이 사고로 신앙생활을 해요.

그래서 복 받을 짓을 하라고 하고, 벌 받을 짓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도 이런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목사들이 이렇게 가르쳐요.

그래서 교회마다 무슨 무슨 비결(秘結) 신앙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복 받는 비결이니!

은혜 받는 비결이니!

은사 받는 비결이니!

 

비결(秘結)이란? 행한 대로 받는 것을 말해요.

내 쪽에서 문을 여는 것입니다.

복에 문을 열든지!

은혜의 문을 열든지!

은사의 문을 열든지! 내가 필요하면 열면 되어요.

 

이 모두가 예수를 믿어도 인간의 사고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의 신앙이 이방인들과 똑 같은 인과응보식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행함의 결과로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는 열심과 충성을 동원하고!

게으르고 나쁜 짓이라도 하면 나 이러다가 벌 받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복 받는 짓을 하고 난 후에 좋은 일이 생기면 그럼 그렇지 하고!

반대로 벌 받을 짓을 하고 난 후에 좋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면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게 모두가 인과응보식 사고에서 비롯된 신앙이에요.

 

물론 하나님께서 징계하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지고 상을 주고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에요.

죄인들에게서 나오는 행함은 하나님께서 상을 주고 벌을 행하는 것이 아니에요.

욥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賞)을 주고 벌(罰)을 준다고 한다면 우리의 행함에서 복을 받을 선이 있고 벌을 받을 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에게서는 선이 나오지 않아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악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에 결과를 가지고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면서 복을 주거나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아~ 이 말도 또 오해를 할까봐서 겁이 납니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오해 할까봐서 못하겠어요.

 

만약에 우리의 행함에 결과로 복이 오거나 저주가 온다고 하면 그럼 복과 저주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복 받을 짓을 하면 꼼짝없이 복을 주어야 하고!

우리가 벌 받을 짓을 하면 저주를 퍼부어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의 결과에 의하여 복을 주든지 벌을 주든지 결재만 해야 하는 인간에게 종속이 되고 말아요.

이건 아닌 것 같지요.

맞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에 희비(喜悲)하는 분이 아니에요.

이건 잠시 후에 욥을 가지고 이야기 할게요.

 

그럼에도 이 시대 대 다수의 교인들의 사고 속에는 복 받을 짓과 벌 받을 짓이 정해져 있어요.

자기가 정한 기준이 있어요.

목사들도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에게 복 받을 짓을 하라고 하고, 벌 받을 짓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교인들은 자기 행실로 복 받을 짓고 벌 받을 짓을 구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사고가 바로 죄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죄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자신이 반응한 것을 근거로 죄다 아니다 라고 판단을 한다고 하였지요.

말씀에 순종했으면 의(義)라고 생각하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죄(罪)라고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의(義)와 죄(罪)가 내 행함의 결과로 판가름이 되지요.

 

이게 바로 율법 신앙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 신앙 자체를 죄라고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교인들이 이게 죄인 줄 몰라요.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반응한 것을 의지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몰라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산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이 죄인 줄을 몰라요.

해괴하게 들리지요.

이러면 성화주의자들은 대번에 아니 성도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이 무엇이 죄냐 라고 따집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의로운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행위는 예수님이 발생한 것뿐이에요.

우리는 죄인이에요.

죄인에게서는 의로운 행위가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도 예수를 믿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못 살아도 예수를 믿어야 해요.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공로이지 우리의 행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았다는 믿음이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우리의 행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것을 의로운 것이라고 의지하고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는 성화주의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자들이 그러잖아요.

성도가 왜? 거룩하게 살지 않느냐? 라고 하잖아요.

이들이 말하는 거룩이란 결국 인간의 행실을 두고 말하고 있어요.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거룩이다 부정이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선악과가 주는 죄관이에요.

이걸 성경은 죄라고 해요.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하지요.

이건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죄 아래 태어났어요.

그러므로 선악과가 주는 죄관과, 의관과, 심판관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마귀적인 것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행실을 근거로 판단해요.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 진다고 하는 것이 바로 마귀가 주는 의관이에요.

잘 이해하세요.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다 죄인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주둥이를 닫으라고 했잖아요.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러셨어요.

율법을 주어서 주둥이를 닫게 하셨다구요.

 

주둥이를 닫으란 말은 하나님은 율법을 근거해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에요.

예수로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예수도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세요.

 

중요한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도 그걸 의(義)라고 하지 않아요.

그냥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살 뿐이에요.

순종했다고 자랑하지 않아요.

또한 율법을 어겼다고 죽네 사네 하지 않아요.

율법을 지켜도 예수를 믿고 율법을 안 지켜도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요.

성도는 예수를 믿음으로 사는 자이지 율법(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 사는 자가 아니에요.

 

율법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하나님이 율법을 왜? 주었다고 했습니까?

죄 아래 가두고 온 입을 막게 하고 심판하기 위함이라고 했지요.

 

그럼 성화주의자들이 나 하나님 말씀을 지켰으니 의롭지요! 라고 하는 것은 반칙이지요.

아니 주둥이를 닫으라고 하나님 말씀을 주었는데 도리어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으로 주둥이를 나불거리고 있잖아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 지킨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나 잘했으니 상 주세요! 그러고 있어요.

이 등신들이! 어휴~

 

하나님은 율법에 반응한 것을 가지고 신앙이라고 나아오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해요.

 

하나님은 왜? 율법에 반응한 것을 죄라고 합니까?

그건 죄인에게서 발생 된 것을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자체가 죄인이에요.

그러므로 죄인에게는 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죄에요.

 

죄인에게서 죄다 아니다 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에요.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와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죄 아닌 것이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정의하세요.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 외에 한 의(義)만 있어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는 예수님 안에만 있어요.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고 예수님 바깥에는 모두가 죽음이에요.

예수님에 것을 붙잡으면 의(義)이고, 예수님에 것을 안 붙잡으면 불의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 이외는 모두가 다 죄에요.

 

쉬운 말로 합니다.

인간 입장에서는 바퀴벌레는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놈이에요.

이 놈은 사람들 눈 앞에 얼씬 거리면 안 되어요.

 

사람들은 바퀴벌레의 모든 것을 백해무익한 악(惡)으로 규정해요.

그런데 어떤 바퀴벌레가 노숙자들에게 밥 퍼 주는 사랑을 하고 빈민가에서 고아와 과부들을 돌 본 자신의 착한 행동을 근거로 인간 앞에 나와서 나 착하지요! 라고 합니다.

분명히 바퀴벌레 세계에서는 착한 삶이 맞아요.

 

중요한 것은 바퀴벌레의 의(義)에 기준과 인간의 의(義)에 기준이 달라요.

그래서 인간이 바퀴벌레의 착함을 착함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에요.

인간은 바퀴벌레의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바퀴벌레는 자기 행함을 의지하여서 사람들 앞에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죽음이에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퀴벌레와 같은 죄인이에요.

저주 받아 사라져야 할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행함으로 나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행함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다 아니다 논하는 것 자체가 죄에요.

그것은 죽을 짓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런 바퀴벌레 짓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성화주의자들이 그러고 있어요.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나 의롭지요 라고 하고 했다구요.

이걸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로 비유하셨어요.

 

어떤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버지에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고 충성 했습니다!

나는 저기 세리와 창기 같이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나 착하지요!

상 주세요! 라고 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찌 했습니까.

에라이~ 이 독사 새끼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했어요.

왜? 그토록 율법을 잘 지키고 착하게 산 성인(聖人)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까?

이는 이 놈들은 자기가 누군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몰라서에요.

 

하나님 앞에서 죄란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면 자기 행함을 근거로 희비하게 되어 있어요.

조금 착하게 살았다고 하면 기고만장하고 좀 잘 못 살았다고 하면 주눅이 들어요.

이게 바로 죄란 말입니다.

 

또 오해 할까봐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킨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그걸 의(義)로 붙잡고 있는 것이 문제에요.

자기 행함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알면 자기에게 기대를 걸지 않아요.

자기 행함에 의미를 두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건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착하게 산 것도 하나님 앞에선 셈 거리가 아니고 악하게 산 것도 하나님 앞에선 셈 거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욥기 35장을 봅시다.

 

욥 36:1-8=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이 이야기가 왜? 나오게 되었는지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자 욥에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이 당하는 그 고난의 원인을 욥의 행실에서 찾는 것입니다.

욥에 친구들에 주장은 니가 잘못했으니까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욥에 고난을 접근하는 자체가 틀렸어요.

욥은 자기 잘못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잘못해서 고난을 주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는 일하심 속에서 욥에 고난이 필요한 것이었어요.

하나님은 욥을 사단에게 말할 때 경건한 자라고 칭찬을 했어요.

경건한 자인 욥이 자기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고난당하는 것은 죄 없는 예수님이 고난당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욥에 친구들은 의로운 욥에 고난을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인간들 입장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욥에 친구들은 선악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욥에 친구들은 복과 저주가 인간의 행함에 결과로 주어진다는 상선벌악 하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욥에 친구들은 욥이 당한 고난을 인과응보(因果應報)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에게 찾아와서 네가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이므로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욥은 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욥도 친구들의 논리에 말려들었어요.

그래서 욥도 급기야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이러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하나님께 항변하기에 이릅니다.

이 때 엘리후라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서 욥과 그 친구들 모두를 싸잡아서 패대기를 쳐 버립니다.

 

야! 이 등신들아!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희는 땅에 있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인간들의 행동 하나 하나에 따라서 희비(喜悲)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들의 착함도 하나님에겐 유익이 되지 않고 인간들의 악함도 하나님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인간들의 착함이나 악함은 인간들 세계에서나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간의 행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무가치한 죄라고 일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으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 무지랭이가 하나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게 살았든지 악하게 살았든지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해야 하는 일은 창조주에게 감사하는 일이에요.

죄인이 자기 행위로 상주세요! 벌 주세요! 라고 할 처지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괜히 어쭙잖게 그 꼴랑 착함으로 거룩하게 살았다고 꼴값 떨지 말란 말입니다.

 

이걸 우리 구원으로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를 보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행위를 보시고 구원을 하셨어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우리 행위로 나아가지 말고 예수님의 행위를 들고 나가란 말입니다.

이걸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믿음으로 살지 않고 우리 행위로 살고 있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고 살고 있다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만 자기 꼬라지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맨 날 자기 꼬라지에 따라서 울다가 웃다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안 믿고 자기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지만 머리도 식힐 겸 한번 보시고 참고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MiOdzvOGjeQ&feature=related

 

박칼린 선생이 무엇을 지적하고 있나요?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노래하는가요?

 

노래하는 사람은 자기 기교를 사용하고자 해요.

그러자 박칼린 선생은 자기 기교를 부리지 말고 노래가 담고 있는 것을 표현하라고 하잖아요.

노래는 입으로 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표정으로 감정으로 그 의미를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지요.

노래가 담고 있는 것을 그림처럼 그리라고 하잖아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 것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가 담고 있는 것을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면서 삶으로 그려내는 거에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고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 이만큼 똑똑하지 라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먹고 예수님 마음으로 사는 것이에요.

마치 노래 속에 담겨진 것을 표정으로 감정으로 그려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박칼린 선생처럼 말씀하세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내어 놓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어 놓으라고 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예수님을 주셨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았다는 복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용서 받은 것을 삶으로 그려 내라고 하세요.

예수를 먹고 예수로 살라고 하세요.

내 꼬라지를 보지 말고 예수님이 하신 것을 믿음으로 살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나를 보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용서 받은 자로 살라고 하신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를 분석하고 있어요.

새 언약으로 살아야 하는데 새 언약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있어요.

그러니 아는 것은 많은데 그 앎이 삶화 되어서 예수의 생명의 흐름으로 토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글자 그대로 신앙하는 것을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예수로 사는 것이에요.

복음은 논문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복음에 대하여서 예수에 관해서는 너무도 잘 아는데 복음으로 살고 예수로 사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건조하고 맛대가리가 없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자로서의 따뜻함이 묻어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관대함이 없는 것입니다.

가슴이 겨울철 보일러가 꺼진 방바닥처럼 냉골이고 찬바람이 쌩쌩 불어요.

가까이 하기가 싫어요.

예수가 주둥이에만 있지 가슴에서 묻어나오지 않아요.

이 모두가 예수를 구경만 하였지 먹지를 못해서 그래요.

 

이걸 맛 잃은 소금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하지요.

예수를 안 믿고 예수를 알면 말쟁이가 되어요.

그럼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러워요.

그 속에서 생명이 안 나오고 비판과 정죄와 논쟁만 쏟아져 나와요.

 

말이야 천사의 말을 하지요.

그런데 그 속에 사랑이 없어요.

그러니 그 좋은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죽이는 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상처를 주고 시험 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차라리 나지 아니함만 못하다고 했어요.

차라리 복음을 몰랐으면 주둥이나 닫고 있을 터인데 그 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식이에요.

우리가 먹고 배부름을 얻어야 할 밥이라구요.

예수님을 밥으로 먹은 사람은 그 배부름으로 살아요.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배가 부르면 여유가 생기고!

여우가 생겨야 관용이나 관대함이 나와요.

이건 오로지 밥을 먹고 배가 불러야만 나와요.

밥을 연구하면 안 나와요.

 

밥을 먹지 않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구경만 하면 신경질이 나고 성질머리가 강퍅해져요.

그러니 복음 안다고 하면서도 맨 날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논쟁으로 편을 가르고 쌈박질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들과 화목하지 못하고 부부간에도 화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예수쟁이들은 꼴도 보기 싫다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수가 머릿속에만 있고 가슴 속에 없으니 주둥이로는 예수가 어떻고 복음이 어떻고 줄줄 외우는데 그것이 삶으로 토해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왜?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습니까?

그렇게 맛대가리가 없습니까?

 

이게 전부 공갈 젓꼭지를 빨아서 그래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이기 때문이에요.

복음이 지식이면 신앙이 관념으로 흘러요.

그럼 예수와 따로 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무엇을 할까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들아! 너희들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 라고 묻고 있는데!

우리는 그딴 것에는 관심이 없고 사람의 외모로 판단하기에 바쁩니다.

그리고 무엇을 믿을까는 없고 어떻게 살까 라고 고민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이 이런 짓을 하고 있어요.

자기 딴에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랑을 한단 말이에요.

교회에 충성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며 착하게 산 것을 의롭다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이걸 자랑으로 붙잡고 있다는 것은 저주 받을 죄인 줄도 모르고 말이에요.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막 살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대로 산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하나님 말씀을 주신 것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주신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지난 시간 율법이 무슨 일을 한다고 했나요?

죄를 드러내게 한다고 했지요.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지요.

 

그러니 율법대로 살면 자랑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주둥이를 닫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나는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율법이 하는 일이에요.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고 했잖아요.

 

범법함이란? 죄를 지었단 말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었어요.

죄 안 지었으면 율법을 주시지 않았어요.

그러니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셨어요.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나 잘했지요! 라는 것이 성립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율법 속에는 나 잘했지요! 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속에는 오로지 넌 죄인이라는 것만 있어요.

 

죄인은 율법을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고 율법을 안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율법이 가진 함정이에요.

그러니 인간은 율법 앞에 서면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곰곰이 잘 생각하세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여러분의 신앙은 유대인들처럼 흘러가게 됩니다.

그럼 바리새인들처럼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 지옥에 가요.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새끼라고 했어요.

지옥에 가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산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처럼 살라고 했어요.

그들의 의(義)를 본 받으라고 했어요.

하지만 천국에는 바리새인들보도 더 나은 의(義)가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이건 천국엔 착하게 산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천국엔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義)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의(義)는 인간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義)에요.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본 받으라는 말은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고자하는 정신을 말해요.

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은 귀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저주 한 것은 율법 지킨 것을 의(義)로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 지킴 속에서 나오지 않아요.

율법 지킴 속에서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만 나와요.

율법의 정답은 “입을 닫고 주여 나는 죄인이군요!

“나는 지옥 가야 할 종자이군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이걸 겨냥하고 율법이 주어졌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나 율법 지켜서 의롭지요!”

“나 천당 보내 주세요~!” 라고 했어요.

입을 닫아야 하는데 도리어 주둥이가 열려서 개구리처럼 시끄럽게 개골~ 개골~ 거리고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에라이~ 이 독사새끼들아! 라고 하면서 패대기를 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법은 죽음이에요.

왜냐하면! 법은 죄인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법을 준 것은 그것을 지키면 상(賞)을 주려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법은 아무리 잘 지켜도 상(賞)이 주어지지가 않아요.

법 속에는 상(賞)이 없어요.

벌(罰)만 있어요.

법 자체가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는 벌이에요.

우리의 행동이 어그러졌기 때문에 법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지켜도 벌이고 안 지켜도 벌이에요.

왜냐하면!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왜? 그렇게 이해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율법이 범법함을 인하여 주어졌다고 했잖아요.

그럼 율법을 잘 지키면 “주여 나 죄인입니다” 라고 하게 되어야 하잖아요.

율법을 지키면 자기가 죄인인줄 알게 되는데 “어찌 상 주세요!” 라고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없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상 주세요! 라고 했다구요.

이 등신들이 말입니다.

 

죄인은 율법 앞에 서면 두려울 수밖에 없어요.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지켜도 두렵고 안 지켜도 두려워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율법을 주었어요.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실 육체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요.

한마디로 죽인단 말입니다.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는 말은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를 몰랐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지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에 급급했어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지요.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방법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생은 영생하시는 분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따 내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이건 율법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자칭 의로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켰다는 그 행함으로 뱀처럼 목을 곧게 세우고 잘난 척 기고만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의인이라고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결국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율법과 점점 멀어지고 만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의도에서 벗어나고 만 것입니다.

 

이걸 가만 두면 안 되겠지요.

넘어지게 하여야겠지요.

그냥 가만히 두면 하나님의 뜻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어서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을 해 주시려고 율법을 주었는데 이 놈들이 죄 아래 가두어지지 않고 미꾸라지 마냥 빠져 나갔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서 율법에서 빠져 나온 놈들을 다시 율법 속으로 집어넣도록 하신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으로 만드는가 하면 율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함으로서 죄인으로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였어요.

결국 하나님의 의도대로 율법으로 예수님을 죽여서 죄인으로 가두어지고 만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니 자기들이 예수를 죽인 죄인이라는 것으로 드러났어요.

그러니 어찌할꼬! 탄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율법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였는데 나중에 보니 그 예수는 죄 없는 분으로서 죽이지 말았어야 하는데 죽였으니 자신들이 잘못되었다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비로서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보니 주둥이를 닫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게 받은 사람은 주둥이를 닫아요.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는 증거에요.

 

이 시대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사람들이 무슨 근거로 주둥이를 나불거립니까? 전부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하고 있잖아요.

헌금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구제하고 심지어 복음 안다는 것으로 큰 소리치고 있잖아요.

상대적으로 이러한 것이 없으면 주눅이 들어서 아무 소리 못하고 있잖아요.

모두가 자기 행함을 의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곧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겁니다.

말씀에 겉돌고 있다는 말이에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스스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유대인들처럼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율법에 근거해서 예수를 죽이게 함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신 목적을 이루시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살리고자 율법을 주셨잖아요.

애초부터 자기 죄를 깨닫게 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고자 하셨어요.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의(義)를 주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잖아요.

 

그런데 오순절 성령을 받고 보니 자신들이 율법으로 예수를 죽인 것은 의(義)를 이룬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죄인으로 드러나고 말았잖아요.

결국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의도대로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고 나자 이제는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한 의(義)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義)를 붙잡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선 성공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을 살펴보아야 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의(義)”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義)’는 이미 창세전에 계획이 된 의(義)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드시기 전에 자기백성들이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만물은 이 언약에 의해서 창조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을 봅시다.

 

벧전 1:16-20=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명령(命令)하십니다.

무엇을 명령하셨는가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어떻게 거룩해 집니까?

우리는 거룩하라고 하면 우리 행실에서 거룩을 찾고자 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와 행실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거룩의 조건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건 거룩이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거룩하라고 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으니까 주어지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거룩하라는 이 말은 지금 너희가 거룩하지 않다는 말을 전제로 하고서 주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미 거룩할 것 같으면 거룩하라고 명령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에게 주어질 때는 항상 역설적(逆說的)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고발하는 차원에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성경은 법과 같습니다.

 

법은 그른 자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라고 했지요.

그럼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다는 말은 너희는 죄인이다 이 말이에요.

죄인이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에게 주어질 때는 항상 우리의 거역을 들추어내는 형식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너희는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는 살인자라는 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너희는 감사하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 하라는 말은, 너희는 내 말을 거역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항상 우리 안에 있는 부정(否定)을 끄집어내는 일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대하게 되면 반드시 본래의 뜻에 반(反)하게 되어 있어요.

문자적으로 보면 순종하자고 하잖아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을 주신 의도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의도가 여기에 있어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성경이 비록 인간의 언어체계를 그대로 사용하여서 기록을 하였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인간의 언어로서 말을 하지만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육에 속한 사람에게 성경을 주어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인간의 생각으로 해석 할 수 밖에 없어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기록하였다는 것은 성령만이 해석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긍극적으로는 성령으로 오신 분만이 해석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누가 성령으로 오신 분인지 알아야지요.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신 분이 누구인가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셨어요.

 

이렇게 되면 모든 성경은 예수님만이 해석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는 성경해석만이 하나님이 바라는 해석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유대인들이 해석하던 방식과 전혀 다른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산상보훈을 보세요.

 

마태복음 5장을 봅시다.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잘 보세요.

옛 사람에게 말한바,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지요.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르노라고 하지요.

예수님은 옛 것을 폐하면서 말씀하시지요.

옛 날에는 저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을 한다고 하잖아요.

 

쉬운 말로 너희는 성경을 그렇게 해석을 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해석법을 알려주고 계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성경을 해석해 온 것은 다 틀린 해석이 되고 말아요.

 

예수님은 지금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해석하는 것마다 기존에 해석을 죄라고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은 오직 예수님만 할 수가 있어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케 한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게 하시고자 하신 것이에요.

반대로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고자 함이에요.

 

이렇게 하신 것은 모든 만물을 예수님 안에서 온전케 되게 하고자 함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이 만물의 주(主)가 되는 것입니다.

만물은 예수님 안에서 온전케 됩니다.

이를 예수 안에서 섰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를 몰랐어요.

육적으로 해석했어요.

문자적으로 해석했어요.

인간입장에서 해석을 하였단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인간 입장에서 해석을 하게 되면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주체(主體)로 등장해요.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실 주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말씀(율법)을 주었는데 유대인들은 오해를 하여서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켜야 하는 주체로 행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을 오해하였다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말이에요.

 

조금 전에 죄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은 법이라고 했지요.

법은 죄를 드러내고자 주어진 것이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베드로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은 지금 자기 백성들이 비 거룩한 상태로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러니 거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우리더러 거룩해지라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의 행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존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지금 비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비 거룩을 죄라고 합니다.

너희가 지금 죄 가운데 가두어져 있다고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거룩해 집니까? 라고 물어야지요.

 

베드로가 우리 대신 알려줍니다.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가 하면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미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라고 하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만물을 만들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었다가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이를 말세(末世)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때까지 자기 백성들을 죄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말세가 되어서 예수님을 보내서 창세전부터 미리 알려준 대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피를 흘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은 자기 공로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죄인이 거룩해지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라고 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란? “예수님의 의(義)”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란? 예수님이 만드신 의(義)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의(義)’를 어떻게 만드셨는가요?

자신의 죽음으로 만드셨어요.

 

창세전에 아버지와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으셨어요.

그러니 아버지가 바라는 의(義)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죽으심으로 만들어진 의(義)에요.

죄 없는 의인이 죄인을 대신하여서 죽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의(義)가 되어요.

 

그럼 이 땅에서는 이 의(義)를 만들 수가 없겠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의(義)는 기껏해야 율법에 의(義)에요.

죄인의 의(義)란 말입니다.

죄인의 의(義)는 하나님 앞에서는 의(義)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義)’는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만 있어요.

그리고 이 의(義)는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공짜로 주세요.

이 ‘예수님에 의(義)’는 차별이 없어요.

모두가 동일하게 은혜로 받은 것이므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이 하나님의 의(義)인 예수님의 의(義)가 누구에게 주어지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의(義)’가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의(義)가 없는 자에게 주어지겠지요.

의(義)가 있는 자에게는 의(義)를 줄 필요가 없잖아요.

한마디로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는 자에게는 주어질 필요가 없어요.

 

이걸 바리새인들과 세리와 창기들로 비교해 보세요.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몰랐어요.

자신들은 율법대로 살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의(義)’를 준다고 해도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어요.

그런 의(義)는 저기 저 세리와 창기들에게나 주라고 했어요.

 

그런데 세리와 창기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았어요.

자신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래서 누가 자신들을 개 같은 죄인라고 하여도 한마디도 대꾸할 수가 없었어요.

율법 앞에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들에게 의(義)를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의(義)’는 죄인에게 주어지는 의(義)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는 죄인을 의인되게 해 주는 의(義)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義)’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의(義)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의(義)’는 죽은 자를 살려주는 의(義)에요.

죽은 자에게 주어지는 의(義)에요.

그럼 예수님의 의(義)가 일을 하려면 먼저 죄 아래 가두고 죽이는 일이 우선 되어져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의(義)’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의(義)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상대적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바탕으로 일을 해요.

산 자에게는 생명이 주어질 필요가 없어요.

생명은 죽은 자에게만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어서 살려내시려고 한다면 자기 백성들이 죽어 있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살려 낼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먼저 죄 아래 가두고 죽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죄에 가두고 죽이셨는가 하면 율법으로 하셨어요.

율법을 주어서 너희는 죄 아래 가두어졌다고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가두는 옛 언약이 먼저 주어진 것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에요.

그 다음에 살리는 새 언약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죽이는 옛 언약인 율법이 주어지고 난 후에 살리는 새 언약인 은혜가 주어졌어요.

 

새 언약은 반드시 옛 언약을 바탕으로 일을 하세요.

그래서 옛 언약인 율법을 먼저 주어서 죽음에 가두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걸 상징적으로 예수님을 앞서서 세례 요한을 먼저 보내심으로 보여주셨어요.

세례 요한을 일컬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하지요.

주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예수님이 일을 하실 수 있게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일을 하시려면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예수님이 죽은 자들을 살리는 일을 하실 것이 아닙니까?

그럼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하실 일을 예비한다는 말은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 놓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끄집어내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라고 합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예수님 앞에 보내서 율법으로 다 죽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죽이는 세례인 물세례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율법으로 죽여 놓은 바탕에서 일을 하셨어요.

 

이를 창세기 1장에서 창조 사건으로도 예표적으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지요.

그런데 2절을 보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지요.

한마디로 죽음에 모습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혼돈과 공허한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흑암 중에서 혼돈과 공허한 세상이 질서로 창조가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창조의 일을 누가 합니까?

하나님 말씀이 하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잖아요.

기존에 죽었던 세계가 생명으로 살아나잖아요.

 

이걸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해주고 있어요.

 

요 1:1-5=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도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라는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어요.

하나님이신 하나님과 말씀이신 하나님 두 분이 계신 셈이지요.

이를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지요.

“그”가 누구인가요?

‘말씀이신 하나님’이지요.

예수님이에요.

 

창세기 1장에 나타난 말씀이신 하나님이세요.

창세기 1장을 보면 혼돈과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중에 있는 죽은 세상을 말씀이 떨어지자 두 쪽으로 쫙 갈라지지요.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고!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갈라지고!

바다와 땅으로 갈라지지요.

 

이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을 갈라내는 것의 모형이에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모습이 어떻다고 합니까?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지요.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몰라보더라고 하잖아요.

이건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과 같아요.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그런데 그 생명을 못 알아보아요.

이건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 1장의 창조 사건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구속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 사건을 통해서 구원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란? 죄에서 속량해 주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죄사함 받는 이야기에요.

구속이 되려면 먼저 죄에 가두어짐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죄에 가두어주어야 해요.

죄에 가두는 일을 율법이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예수님이 창조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길을 예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율법은 마치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을 일컬어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율법과 선지자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모두가 죄를 고발하는 일을 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왜? 죄를 고발합니까?

이는 예수님이 일을 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한 의(義)’인 ‘예수님의 의(義)’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다 죽여 놓았어요.

완전히 어둠에 가두어 놓았어요.

마치 창세기 1장 2절의 모습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집니다.

죽음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흑암 속에 갑자기 빛이 나타납니다.

대 반전(反轉)이 일어나기 시작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인간의 절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서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킨 자도 죄인이고 율법을 안 지킨 자도 죄인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죽은 송장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까지 인간을 철저하게 묵사발을 내 놓았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8절에서 3장 20절까지 인간은 죄 아래서 다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들 다 죽었어!”

“이제 끝났어!”

“저주만 남았어!” 라고 했습니다.

절망 가운데 가두었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21절에서 대 반전(反轉)이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그러나” 를 “데” 라고 합니다.

이건 반전(反轉)이에요.

지금까지 이야기를 다 덮어버리는 말씀이에요.

 

“그러나(데)”가 엄청 중요해요.

이게 없으면 진짜로 절망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 뒤집어엎는 “그러나” 가 주어집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개역성경에서는 로마서 3:21절에 “그러나” 가 빠져있어요.

이건 결정적인 실수에요.

하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분명하게 “데(그러나)”가 있어요.

“그러나” 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전부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나” 가 삽입됨으로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대 반전으로 전환시켜주십니다.

이제 살 길이 생겼다고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제 소망이 생긴 겁니다.

살아 날 길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나서 차별 없이 거저 주어진다”고 합니다.

 

어떻게 살 길이 생겼는가 하면 예수를 믿음으로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절망을 예수님이 모두 거두어 가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어서 우리가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대 반전(反轉)입니까!

드디어 복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췬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생명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율법과 선지자로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렇게 구원이 주어질 것을 구약에서 이미 이야기 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율법 속에 씨눈처럼 율법 외에 한 의(義)를 담아 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럼 율법 속에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어떻게 증거가 되었는지 살펴봅시다.

 

이걸 알려면 율법이 어떤 배경에서 주어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과연 율법 속에 의(義)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율법 속에는 처음부터 의(義)가 없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은 율법에 의(義)를 담아 놓았으면 의(義)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은 애초에 율법 속에 의(義)를 담아 놓지 않았다고 한다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고 한다는 것은 첫 단추부터가 잘못 끼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율법이 누구에게 주어졌습니까?

아브라함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지요.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으로 생겨난 백성이지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실 때 일방적으로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의 행함과 상관없이 하셨어요.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삼년 된 제물을 반으로 쪼개 놓고서 하나님이 홀로 지나가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목숨을 담보로 하셨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의 목숨을 담보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십니까?

이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에는 창세전 언약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 언약은 예수님의 목숨으로 자기백성이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죄인이 예수님의 의(義)로 의롭게 되는 언약입니다.

 

아브라함 언약도 이 창세전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홀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죽음을 담보로 한 언약으로 생겨난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바탕에는 인간의 행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습니다.

 

이러한 은혜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언뜻 보면 율법은 은혜와 상반 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무조건 적인 것이지만 율법은 조건 적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율법이 과연 은혜와 상충하는 것인가요?

은혜를 가리는 것인 걸까요?

 

아니에요.

율법 속에는 은혜가 담겨져 있어요.

죄인이 의로워지는 것이 담겨져 있단 말입니다.

 

어떻게 죄인이 의로워지는가요?

그게 바로 흠 없는 제물이 죽음으로서 죄인이 의롭게 되는 제사입니다.

죄인은 제사로 죄에서 사함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흠 없는 제물의 죽음으로서 주어지는 제사는 하나님의 한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 속에 제사 제도를 주셨다는 것은 곧 율법을 어길 것을 염두에 둔 포석입니다.

죄인을 살리기 위한 조치에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 율법 속에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제사를 담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죄를 고발하고 율법 속에 담긴 제사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은 없고 제사를 지킴으로서 의로워지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애당초 율법 속에는 너희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깔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죄 지을 것을 알고서 죄를 대속하는 제사 제도를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 속에 은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율법 지킴이 아니고 제사에 있어요.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있어요.

말씀을 통해서 죄를 깨닫고 예수님에게 나아가게 한단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봅시다.

 

갈 3:21-22=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義)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율법 속에는 살게 하는 의(義)가 있었다면 애초부터 율법을 지키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그리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의 후손에게 주시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약속의 후손인 성도에게 주려고 율법을 주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율법 속에는 죄인으로 가두는 것도 있지만 제사를 통해서 그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 것도 들어 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 속에 이미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내재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 속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하나님의 한 의(義)’란 바로 흠 없는 제물의 희생으로 죄인이 속량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어요.

그건 율법을 주신 목적에서 위배가 되어요.

율법이란? 법(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심판을 선포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잖아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의(義)를 만들 수 없다고 했어요.

 

율법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이에요.

그럼 하나님 말씀은 의(義)를 만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죄 아래 가두고 나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약속을 받은 자기 백성들을 대신하여 죽어서 그 죄에서 건져내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해 주셔서 그 믿음을 의(義)로 여겨 주신다는 말입니다.

 

죄인을 하나님 말씀인 율법으로 죄 아래 가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려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죄 아래 가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의 자손에게 주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어서 의롭게 되는 살 길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義)’는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증거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질 때부터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는 주어지기로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약속하신 그 의(義)가 자기백성들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 이라고 탄성을 자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살았다는 겁니다.

이제 소망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소망이 율법적 행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만든 의(義)가 아니라 공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복음을 안다 모른다 차별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구원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린 어 엄청난 은혜를 입었습니다.

율법 외에 다른 ‘하나님의 한 의(義)’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며 사시길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어둠 속에 빛이 비치고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져 주시는 하나님의 한 의(義)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그 의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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