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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18강. 할례와 율법 그리고 표면과 이면 (롬 2:23-29)

by coroa 2022. 7. 2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8강. 할례와 율법 그리고 표면과 이면 (롬 2:23-29)

롬 2:23-29=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26 그런즉 무 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 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 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28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정낙원 목사

 

복음이란?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은 슬픈 소식과 반대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기쁨이 기쁨 되려면 반드시 슬픔이 있어야 하겠지요.

기쁨과 슬픔은 서로 상대적인 것입니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혹은 천국과 지옥처럼 서로 대조(對照)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슬픈 소식이 먼저 바탕을 깔고 있어야 합니다.

즉 “나쁜 소식”이 먼저 주어지고 난 후에 “좋은 소식”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편의상 나쁜 소식을 “죽는 것”이라고 하고, 좋은 소식을 “사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럼 이걸 다시 언약으로 말하면 “두 언약”이 있겠지요.

나쁜 언약과 좋은 언약!

죽이는 언약과 살리는 언약이 있겠지요.

그렇다면 순서상으로 본다고 하면 죽이는 나쁜 언약이 먼저 주어지고, 살리는 좋은 언약이 나중에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기쁜 소식이 되니까요.

예를 들어 기쁜 소식이 먼저주어지고 나쁜 소식이 나중에 주어지면 그건 나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기쁜 소식은 항상 나중에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나혼인잔치에서 나중 포도주가 처음 포도주 보다 낫다고 했지요.

이건 모세가 준 율법이라는 포도주보다 예수님이 주신 은혜라는 포도주가 더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가짜가 먼저 나타나고 진짜가 나중에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가인이 먼저이고 아벨이 나중이고!

이스마엘이 먼저이고 이삭이 나중이고!

레아가 먼저이고 라헬이 나중이고!

표면적 유대인이 먼저이고 이면적 유대인이 나중이고!

적 그리스도가 먼저이고 그리스도가 나중에 오세요.

 

우리도 옛 사람이 먼저이고 새 사람이 나중이에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는 가짜이고 예수 안에서 거듭난 내가 진짜에요.

항상 첫 것은 폐하여지고 나중 것이 남아요.

이 모두가 창세전 언약을 바탕으로 역사가 전개되어지기 때문이에요.

이해가 되시지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언약 자체는 좋고 나쁨이 없어요.

다 좋은 것이에요.

다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편의상 나쁜 언약과 좋은 언약이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고 들으세요.

 

그럼 인간 입장에서 보면 나쁜 언약은 무엇이고 좋은 언약은 어떤 것일까요?

나쁜 언약이란? 죽이는 언약이고!

좋은 언약이란? 살리는 언약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나쁜 언약은 슬픈 소식이 되고, 좋은 언약은 기쁜 소식이 됩니다.

슬픈 소식은 죽는다는 말이고, 기쁜 소식은 산다는 소식입니다.

 

이걸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으로 보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성경에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을 일컬어 율법이라고 하고, 새 언약을 일컬어 은혜라고 합니다.

율법은 죄 아래 가두고 죽이는 언약이지만, 은혜는 죄에서 해방시키고 살리는 언약입니다.

이걸 세상 법정으로 비유하여서 말하면 옛 언약인 율법은 감옥에 집어넣고자 하는 검사 역할을 한다면, 새 언약인 은혜는 감옥에 안 들어가게 하는 변호사 역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인 율법은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여 죽이는 언약이지만, 새 언약인 은혜는 죄를 덮어주고 살리는 언약인 것입니다.

 

이 두 언약은 이미 창세전에 주어졌어요.

창세전 언약 안에는 바로 이 두 언약이 담겨져 있어요.

창세전 언약이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어지는 언약입니다.

쉬운 말로 죄에서 구원 받는 언약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죽음에서 살아나는 언약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살아나려면 먼저 죽음에 처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죽어 있어야 살려 낼 것이 아닙니까?

누가 죽이는가 하면 마귀가 죽입니다.

무엇으로 죽입니까?

선악과로 죽여요.

 

언약으로 말하면 옛 언약인 율법으로 죽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죽이는 언약인 율법이 먼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와 생명과로 예표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선악과는 죽이는 과실로서 율법과 같고!

생명과는 살리는 과실로서 은혜와 같습니다.

 

뱀이 선악과로 사람을 죽였는데 예수님은 생명과를 죽은 자를 살려 내십니다.

마귀는 율법으로 사망에 가두었는데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죽음 안에 갇혀 있던 자기 백성들을 빼내시고 살려 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 아래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빼내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이 두 언약이라는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야기 전개가 죄 아래서 죽은 자를 예수님이 살려낸다는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성경의 결론은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천국은 은혜의 나라입니다.

결국 사망이 예수라는 생명을 삼켰는데!

그 사망에 삼킴 당한 예수라는 생명이 도리어 사망 속에 들어가서 그 사망 속에 있던 자기 백성들을 다 살려내는 방식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걸 예수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에는 누가 가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갑니다.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져 있다가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으로 살아난 자들이 갑니다.

즉 천국은 율법으로 죽었다가 은혜로 살아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세세토록 자신을 살려 주신 어린 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면 창세기에서 창조된 세계가 흑암과 공허라는 죽음으로 뒤 덮여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흑암에서 빛으로, 공허에서 채움으로 창조가 됩니다.

즉 죽었던 것을 하나님이 살려내는 모습으로서 성경의 이야기가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곤 성경을 닫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으로부터 생명을 살리심을 받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세세토록 어린 양을 찬미(讚美)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걸 우리 인생으로 비유하면 지옥으로 던져 놓았다가 천국으로 인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지옥으로 시작이 되어서 친국으로 끝이 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바뀌는 것으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조금 어렵다고 낙망하지 말고 기다리세요.

주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불어 내실 것입니다.

 

이게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럼 성도의 신앙생활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가 되는지 밑그림이 보일 것입니다.

먼저 죄 아래 갇히는 일들이 일어나겠지요.

그리고 그 죄에서 건짐 받는 사건 속으로 휘말리게 되는 것으로 그려지게 될 것임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이 일을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창세전에 이러한 그림을 그리시겠다고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예수님이 작정하신 창세전 언약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그림과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그리고자 하시는 그림을 그려 나가실 것입니다.

그럼 성도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의 그림들이 그려집니다.

무엇으로 그리시는가 하면 죽이고 살리는 두 언약을 가지고 그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때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그림이 그려질 것이고!

때론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는 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림을 시작하신 예수님이 끝까지 완성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지려면 명암(明暗)이라는 서로 상극인 구도가 있어야 하듯이 성도의 구원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자기도 있고 생명의 푸른 초장이라는 상극인 구도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의 구원을 3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고 하는 과거(過去) 시제와,

“구원을 이루라” 는 현재(現在) 시제와,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미래(未來) 시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으로 본다면 구원은 완료(完了)입니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나리오 자체가 구원 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완료인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대로 되어지기 때문에 이미 완료가 된 것이나 다름없어요.

언약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에요.

 

그러나 이 시나리오를 역사 속에서 그려나가기 때문에 현재 이루어가고 있는 모습으로서의 현재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현재 속에서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구원을 얻었고!

구원을 이루고 있으며!

구원을 이루어 가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이걸 “이미와 아직” 이라고 해요.

 

이미 구원은 시작 되었고 아직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고 불 완전하다는 말이 아니에요.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는 이미 영생 안에 들어 왔으면 영생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행해 가고 있어요.

 

반드시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집니다.

아직 시나리오가 남아 있지만 완성으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속극이 시작이 되고 횟수를 거듭 할수록 그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듯이 성도의 구원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그래야 거짓 목사들에게 구원을 빌미로 속임 당하지 않아요.

이 시대 많은 목사들이 구원을 미완료로 두고서 성도를 겁박하고 자신의 말에 복종하도록 하고 있어요.

마치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식으로 공갈을 치고 있어요.

그러므로 구원론에 대하여 확실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속지 않습니다.

비록 성경에서 구원을 과거 현재 미래시제로 쓰고 있지만 창세전 언약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완료가 되었어요.

 

시작된 구원은 중간에 취소되지 않으니 안심을 하세요.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취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애당초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삼층 천에서 이미 완료된 구원 안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보았어요.

하지만 바울의 육신은 아직 역사 속에서 구원을 이루고 있고 이루어가고 있어요.

이걸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산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묵시에 있던 바울이 역사라는 곳에 잠시 출장을 왔다고 보시면 되어요.

 

우리 모두가 묵시에서 역사로 잠시 출장을 왔어요.

출장이 끝나면 다시 묵시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본향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완성된 구원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죽음조차도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보았던 삼층천에서의 자기 모습을 믿음으로 보고 있어요.

하나님은 이 믿음을 성도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성도는 이게 믿어져요.

그러므로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이러한 구원은 이미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통해서 예표적으로 보여주었어요.

그래서 구역 이스라엘을 기능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구약의 이스라엘은 성도의 구원을 기능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어가시고 어떻게 구원해 내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역사는 죄로 인하여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다가 빼내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이게 “70 이레”에요.

 

70 이레는 요한복음 강해 “75강.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70 이레” 를 참고 하세요.

상세하게 설명을 해 놓았으니 보시면 눈이 확 뜨일 것입니다.

70 이레는 우리가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가 구원되는 이야기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 하셨다고 한다면 이미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절대로 포기되어지지 않으니 안심을 하셔도 됩니다.

하나님은 중도에 결코 자신의 언약을 철회하시거나 포기 하시지 않아요.

 

그 어떤 방해가 있고 장애물이 있다고 하여도 미완으로 남겨지지 않고 분명하게 완성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할 때 하나님은 거짓말 할 수가 없고 자기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식언(食言)치 않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 만 되는 것입니다.

“예” 가 된다는 말은 반드시 언약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언약은 우리가 심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심어 놓았어요.

그러므로 언약이 심겨진 성도는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지키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언약대로 이루어가세요.

누가 이루시느냐?

하나님이 이루어가십니다.

 

성도는 반드시 천국으로 가서 어린 양을 세세토록 찬미하게 되어 있어요.

프로그램이 그렇게 내장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환란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으로도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가 없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럼 이 창세전 언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려지는지를 상고해 보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과 할례 이야기가 나옵니다.

율법과 할례가 창세전 언약과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율법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율법은 옛 언약으로서 죽이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 버립니다.

죄 아래 가두어 둔 것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끄집어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마귀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어 두라고 했어요.

그럼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가 죄와 사망 가운데 가두어 놓은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십니다.

창세전 언약대로 자신의 죽음으로 구해 내십니다.

 

이 세상은 예수님의 활동 무대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역사는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을 펼쳐 보이는 마당입니다.

역사를 축약하면 우리 자신입니다.

내가 곧 예수님이 창세전 언약을 그리는 도화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을 가지고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언약을 그려내십니다.

언약이 그려질 때마다 우리 몸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이 툭툭 터져 나오는 아픔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이에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이 성도의 몸에서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바울은 “예수의 흔적”이라고 했어요.

이 흔적이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에요.

성도라고 한다면 반드시 이 흔적들이 새겨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이 흔적들이 새겨지는 환경 속으로 밀어 넣으세요.

 

그럼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 몸을 가지고 언약을 그려내실까요?

창세전 언약대로 죽였다 살려 내는 방식으로 그려내세요.

그래서 예수님이 “산 영(靈)”들이 있는 곳에 “살려주는 영(靈)”으로 오신 것입니다.

“산 영(靈)”이란? 죽은 자를 말해요.

그리고 “살려주는 영(靈)”이란? 죽은 자를 살려 내는 분이에요.

 

이 세상은 에스겔 37장의 해골골짜기에요.

예수님이 살려주는 생기가 되어서 살려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를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듣는 자는 다 살아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예수님이 활동하는 무대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靈)으로서 일을 하시기 위해서 먼저 죽이는 일을 누군가가 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마귀가 동원이 됩니다.

마귀가 검사처럼 율법을 가지고 인간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먼저 행하게 됩니다.

그럼 예수님이 보혜사로 오셔서 마귀가 사로잡고 가두고 죽인 것을 살려내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성경은 죄에 가두고 죽이는 옛 언약이라는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그 다음에 죄에서 끄집어내고 살려내는 새 언약이라는 은혜가 나중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전 언약의 순서가 죽이는 언약인 율법이 먼저 주어지고, 살리는 언약인 은혜가 나중에 주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구약을 율법이라고 하고, 신약을 은혜라고 하고!

구약은 죽이는 이야기로 전개가 된다고 하면, 신약은 살리는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여기까지 이해가 되시지요.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하는데도 모르면 곤란합니다.

성경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자기 피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준다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니 자기 백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살까 염려할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단 한 알갱이라도 버리지 않고 다 찾아내십니다.

반드시 찾아서 천국으로 울러 매고 가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야기를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내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자기 양을 반드시 찾아내세요.

그래야 구원에는 목자의 공로만 오롯이 담겨져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애쓰고 힘쓸 문제가 하나도 없어요.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댓가로 얻어 내는 것이 아니에요.

만약에 구원을 위하여 뭔가 하여야 한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놈은 마귀의 수하입니다.

 

그런 놈은 쫓아내야 합니다.

마귀라는 놈은 구원의 주체를 자꾸만 인간이 행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를 밀어내고 인간을 주인공으로 만들고자 해요.

그래서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이걸 다른 복음이라고 해요.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쉽게 설명합니다.

창세전에 야곱과 에서는 자기 운명을 타고 납니다.

이미 복중에 짓기 전에 팔자가 결정이 났어요.

야곱과 에서는 각자 가야 할 길이 결정이 난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납니다.

각자 타고난 그 길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세요.

 

야곱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자입니다.

에서는 누구인가요?

하나님으로부터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자입니다.

작정이 되었다는 것은 그렇게 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사랑 받을 짓을 해서 사랑 받는 것이 아니고!

에서가 미움 받을 짓을 해서 미움 받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야곱이나 에서의 행위를 근거로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하지 않았어요.

야곱과 에서를 가지고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고자 하는 도구로 창조를 하신 것입니다.

 

그릇이란 말이에요.

디모데후서 2장을 보면 큰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다고 하지요.

그릇마다 용도가 달라요.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어요.

하나님이 토기장이로서 어떤 사람은 긍휼을 담는 그릇으로 창조를 하였고!

어떤 사람은 진노를 담을 그릇으로 창조를 하셨어요.

 

긍휼의 그릇에겐 긍휼이 계속하여 부어지고!

진노의 그릇으로 지음 받은 자는 진노 받을 짓거리를 해요.

진노 받을 그릇은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두면 바로처럼 강퍅하게 살아요.

죄인을 간섭하지 않으면 강퍅함이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걸 잘 이해하세요.

절간에 스님들이 예수를 안 믿어서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 가기로 작정이 되어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를 못 믿고 절간에서 스님 노릇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가 예수를 믿어서 찬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 가기로 작정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게 해서 천국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심이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은혜인 것입니다.

믿음도 은혜이고!

구원도 은혜이고!

천국도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공짜로 간단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그릇이에요.

하나님이 야곱은 귀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었고, 에서는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든 것뿐입니다.

이걸 “긍휼의 그릇”이라고 하고, “진노의 그릇”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긍휼을 담고자 만들었고, 에서는 진노를 담고자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야곱에게는 긍휼을 담는 일을 하시고, 에서는 하는 짓마다 진노를 쌓는 일만 골라서 하는 것입니다.

 

둘 다 똑 같은 짓을 해도 야곱에겐 은혜로 대하고, 에서는 법으로 대해요.

야곱에겐 용서가 부어지고, 에서에겐 법이 부어져요.

용서는 귀히 쓰임 받는 긍휼의 그릇이고, 법은 천히 쓰임 받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이걸 간섭하느냐 마느냐로 나타납니다.

야곱은 간섭하고, 에서는 간섭하지 않아요.

 

야곱이나 에서는 둘 다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둘 다 죄가 지배해요.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죄가 야곱의 욕망대로 살라고 주장을 하니까 하나님이 그럼 안 되지!~ 하면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에서는 그냥 죄가 주장하는 대로 내 버려두었어요.

그러니 에서는 자기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는 것입니다.

죄인이 자기 뜻대로 살면 어찌 되겠어요.

하나님의 원수 노릇만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에서는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먹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입니다.

에서에겐 장자권이란 팥죽 한 그릇만도 못해요.

내 배가 우선이지 하나님의 언약은 뒷전이에요.

이게 에서의 가치관이에요.

 

구약의 장자권은 신약에서의 구원권과 같아요.

장자란? 맏물입니다.

맏물은 하나님 것이에요.

이 맏물이 바로 십일조인 것입니다.

십일조가 누구냐 구원 받은 성도에요.

 

그래서 맏물들이 모이는 곳을 일컬어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장자들이 모이는 곳이에요.

야곱처럼 장자권을 받은 자들이 모이는 곳이란 말입니다.

야곱이 어떻게 장자권을 관심 갖게 되는가요?

이는 믿음이 야곱으로 하여금 팥죽보다 장자권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야곱은 팥죽을 버리고 장자권을 택한 것입니다.

이건 야곱의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야곱을 칭찬할 것이 아니고 야곱을 장자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지요.

우리도 야곱처럼 간섭당하고 있어요.

 

에서는 장자권 속에 담겨진 구원의 비밀(秘密)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장자권을 소홀히 여긴 것입니다.

반대로 야곱은 본능적으로 장자권의 비밀을 알았어요.

그래서 장자권을 얻기 위하여 팥죽을 버린 것입니다.

팥죽을 버렸다는 것은 살아가는 목적이 구원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각자의 그릇대로 상요하는 것입니다.

에서는 간섭하지 않고 유기시켜 버렸지만 야곱은 집요하게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와 같은 가치관으로 살지 못하도록 간섭을 하세요.

그게 야곱의 뜻대로 살아지지 않도록 재물을 빼앗고 세상의 영광을 차압해 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이 질려 버려요.

돌아 버린다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정말 이럴 것입니까? 라고 한다구요.

제발 날 배 버려두세요! 라고 한다구요.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에 어쩌냐! 난 너를 달달 볶기 위해서 선택을 했는데!

이러면 우와~ 미쳐버립니다.

이게 성도의 인생이에요.

 

야곱은 자기 뜻대로 인생이 살아지지가 않아요.

그러니 야곱이 죽겠다고 악악대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야곱은 망한 인생을 살았고 에서는 성공한 인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성경은 야곱은 천국에 갔다고 하고 에서는 지옥에 갔다고 합니다.

 

야곱과 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이야기로도 응용하여 볼 수가 있어요.

유대인은 하나님의 간섭으로 산 민족이고 이방인은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의 삶이 고난의 연속이고 버려지고 아픔 당하는 모습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모습들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야곱은 간섭하고 에서는 방치 하였어요.

이 모두가 야곱의 의지와 상관없이 야곱은 귀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귀히 사용되는 그릇으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천히 쓰는 그릇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천하게 개 밥그릇처럼 자기 마음대로 굴러다니도록 내 버려두신 것입니다.

 

긍휼의 그릇에겐 계속하여 긍휼이 쏟아지고, 진노의 그릇에겐 계속하여 진노가 쏟아져요.

야곱은 긍휼의 그릇이고, 에서는 진노의 그릇입니다.

그럼 야곱에게 긍휼이 퍼부어 지려면 야곱의 삶에 모습이 긍휼을 입어야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겠지요.

이게 엄청 중요해요.

 

긍휼이 뭔가요?

불쌍히 여기는 거잖아요.

누구를 불쌍히 여깁니까?

못난 자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에게 긍휼이 임해요.

잘난 놈에게는 긍휼이 필요가 없어요.

스스로 잘하니까 불쌍히 여겨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에서는 스스로 사냥도 잘하는 아주 멋진 놈으로 살아가고 야곱은 마마보이처럼 엄마 주변을 매도는 못난 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에서가 훨씬 잘났어요.

야곱은 열등해요.

우리는 내 자식이 에서이기를 바라지 야곱이기를 바라지 않아요.

야곱이면 속 터져서 못 키워요.

한숨만 쉰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바로 야곱이에요.

속 터지는 자식이란 말입니다.

지질이도 말을 안 듣고 속만 썩이는 못난 자식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주심으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인간이에요.

그렇게 못났어요.

 

우리가 그렇다니까요.

우리는 한시라도 하나님이 보살피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그러니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돌보고 계세요.

야곱과 같은 성도는 하나님이 사사건건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증인이에요.

야곱의 일생이 그 증거에요.

야곱의 증언이 어떻던가요?

 

야곱이 바로 앞에서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지요.

여기서 험악하다는 말은 자기 뜻대로 살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시달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일종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말이에요.

 

비꼬는 거에요.

얼마나 교활한 놈입니까?

기껏 하나님이 간섭을 해 주었더니 하는 말이 에이~ 더러워서 못 살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돌로 쳐 죽일 놈이 있나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놈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인간이에요.

 

이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잠시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 내니 어찌 가만 두겠어요.

그러니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간섭을 하시는 것입니다.

용서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죽여야 하니까 용서로 살살 달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요하신 사랑을 읽어야 해요.

하나님의 사랑은 마치 엄마가 갓난아이 돌보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마치 어린아이가 밥을 입에 넣지도 못하고 다 흘리고 있으니 곁에서 엄마가 한 숟가락씩 떠먹이듯이 보살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랬어요.

용서가 계속해서 퍼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간섭을 받고 있어요.

하나님의 간섭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말이 간섭이지 고난인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환란이고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이를 알고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복음 때문에 당하는 환란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당하는 징계로서의 고난도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우린 죽을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하여서 간섭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간섭의 결과로 가게 되어요.

나중에 천국에 가면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되어요.

이런 반풍수 같은 인간을 천국으로 끌고 온다고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이 쓰리고 아프고 아리셨는가를 알고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잘 믿고 싶지요.

그런데 그렇게 되던가요?

잘 안 되지요.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안 살아지지요.

그게 은혜에요.

오잉!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

 

우리가 마음 먹은대로 잘 살아지면 하나님의 긍휼이 퍼부어지지 않아요.

잘 안 살아지기 때문에 은혜와 용서하심이 계속하여서 부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불신앙 속에서 부어져요.

그러니 뚱딴지같은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야~ 그럼!

우리 맘대로 살아도 되겠네!

약아 빠진 소리 하지 마세요.

징계라는 몽둥이는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죽 싸게 얻어터지고 질질 끌려가게 되어요.

 

우수갯 소리로 천국에 KTX 타고 갈래요!

비 포장 도로를 완행버스 타고 서서 갈래요!

순종하면 KTX 타고 편안히 앉아서 가고!

불순종하면 완행버스 타고 서서 가요.

 

그런데 KTX 타고 가는 사람이 없어요.

다 완행버스 타고 덜덜 거리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갑니다.

왜냐하면! 우린 야곱이기 때문입니다.

더럽게 말을 안 들어 처먹는 야곱이라서 야곱처럼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이리저리 질질 끌려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하는 짓이 하나님께 매 맞을 짓만 골라서 하고 있어요.

다 빼앗길 것을 움켜잡고 있어요.

결국엔 야곱처럼 20년 동안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쌓아온 재물을 얍복 강에서 다 빼앗기고 맙니다.

몸도 병신이 되고 말아요.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에는 의지 할 것이 하나도 없도록 만드세요.

이게 간섭이에요.

 

성도의 인생이 왜? 안 풀리는지 아세요.

하나님이 간섭하기 때문이에요.

뭔가 좀 해 보고자 하여서 이제 괜찮은가 싶은데 예상치 않는 일들이 벌어져서 공든 탑이 무너지듯이 무너지지요.

그게 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긍휼을 쏟아 붓기 위해서 간섭하신 결과에요.

 

우리 뜻대로 되면 그건 에서에요.

에서에게는 긍휼이 부어지지 않아요.

혼자서도 잘하는데 뭣하러 긍휼을 부어줍니까?

긍휼은 못난 놈에게 부어지지 잘난 놈에게는 부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이 땅에서 성도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이 못난 놈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빤질거리고!

말도 안 들어 처먹고!

실수투성이고!

속 썩이는 놈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모습이 아니고 더럽게 말 안 듣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그렇게 예수 믿고 있잖아요.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에게 점수를 한 번 매겨 보세요.

몇 점이나 줄 것 같습니까?

전 10점도 안 될 것 같아요.

그러니 저는 늘 “아버지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끊일 날이 없어요.

늘 불쌍히 여겨 달라고 징징거린 다구요.

은혜 달라고 앵앵거려요.

 

제가 아주 쬐끔 깨닫는 것이 있어요.

과거 율법 아래 있을 땐 엄청 잘났다고 생각했어요.

믿음이 좋다고 여겼어요.

그 당시에는 에서처럼 혼자서도 잘했어요.

그러니 긍휼이 필요가 없었어요.

 

율법 아래서 목회를 할 때는 누가 속을 썩이면 속에서 저주가 퍼부어졌어요.

아휴~ 저걸 그냥 확! 잘라내고 쓸어버리고 싶었어요.

본능적으로 법이 튀어 나왔어요.

그 땐 내가 긍휼을 몰랐거든요.

내가 긍휼을 받지 못하니 긍휼이 나오지가 않지요.

그래서 법으로 목회를 하였어요.

 

그런데 은혜를 입고 난 후로는 달라졌어요.

내 뜻대로 목회가 안 되도록 간섭을 당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미운 줄 몰라요.

야속하고!

속상하고!

미치겠더라고요.

그 때 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전 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하나님을 엄청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내 목회 방침이 엉클어지고 나니까 내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미움이 봇물 터지듯이 나오고 내 안에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것이 보이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내가 하나님의 원수구나!

아~ 내가 긍휼을 입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알았어요.

 

내가 바로 야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내가 못난 놈이라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이 때부터 감사가 나오더라구요.

아! 내 인생 내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여기까지 간섭을 해 왔구나 를 알게 되니까 이상하게 배짱이 생겨요.

실패가 두렵거나 창피하지가 않아요.

도리어 감사가 나와요.

이건 예전에 율법 아래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에요.

 

이제 은혜를 입고 복음을 조금 알고 나니 누가 속을 썩이면 이상하게 불쌍한 마음이 들어요.

어이구~ 오죽 하면 저럴까!

저게 다 자기 마음이 아니지!

어디 신앙생활이 내 마음 먹은 대로 되나요?

안 되잖아요.

마음 먹은 대로 안 살아진다는 것을 아니까 불쌍히 여겨지는 겁니다.

주여 참아 주소서! 가 된다니까요.

 

옛 날 같으면 속을 썩이고 말 안 듣는 교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고것 참 고소하다!

아이구~ 속 시원하다고 했는데!

이젠 하나님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마세요! 라고 한다니까요.

교인들의 아픔이 내 아픔으로 다가와요.

물론 아주 작지만 말이에요.

 

과거엔 너는 너고 나는 나였어요.

교인들이 타인(他人)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전부 인과응보(因果應報) 차원으로 바라보고 그것 잘 되었다고 고소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젠 달라요.

긍휼이 나온다구요.

불쌍한 생각이 든다구요.

물론 아주 쬐금이지만,,,,,

그러니 하나님께 주여! 살짝 손만 대고 빨리 깨닫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게 된다구요.

이상하지요.

 

이건 제가 긍휼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긍휼을 입고 보니 긍휼이 조금씩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긍휼을 퍼부어주니까 잘라내는 것이 아니고 참아지고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놀라운 사건이에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도는 사사건건 하나님으로부터 간섭을 당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간섭 당함이 아픔으로 나타나요.

그러니까 야곱은 사사건건 간섭을 받고 에서는 간섭 없이 편안하게 살아요.

인간 쪽에서 보면 에서가 복을 받은 자처럼 보이고 야곱은 저주 받은 자처럼 보여요.

아주 역설적이에요.

 

그래서 제가 성도들에게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데도 아무 문제가 없으면 두렵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가슴이 철렁해요.

혹시 에서가 아닌가?

사생아인가?

 

그래서 혹여라도 고난이 닥치면 감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집안에 도둑이라도 들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냈다고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건 우리의 관심을 하나님에게 돌리고자 하나님이 간섭하신 일이므로 감사하여야 할 일이라고 합니다.

괴변(怪變)처럼 들리지요.

인간이란 문제가 생기고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야 그나마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고 아프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찾으면 그건 복이고!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평안하여서 하나님을 잊으면 그건 저주에요.

복과 저주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느냐 멀리하느냐로 가늠하는 것이지!

삶이 힘이 드느냐!

아니면 편안 하느냐! 로 판단하지 않아요.

 

성경이 말하는 복과 저주는 육신의 편안함으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느냐 떠나느냐로 말을 합니다.

그러니 삶이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야곱처럼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면 그건 복입니다.

이상하게 성도는 고난 속에서 감사가 나와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징계를 가하는 것입니다.

이건 육에 속한 사람은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어요.

성도는 두 언약을 동시에 적용을 받기 때문에 죽고 살아나는 일들이 늘 교차하여서 일어나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다시 율법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앞으로도 율법에 대하여서는 많은 말을 할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율법을 이야기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말도 있지만 반복되는 말이 더 많을 것입니다.

사실적으로 본다면 성경 전체가 옛 언약과 새 언약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늘 같은 밥을 먹는 것처럼 동일한 이야기를 듣더라도 맛나게 잡수시기를 바랍니다.

 

따지고 보면 성경 전체가 동의어(同義語) 반복으로 기술되어 있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다양한 사건으로 다양한 이야기로 말해주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 같은 이야기에요.

그러니 같은 말을 한다고 짜증내지 마세요.

 

앞서서 복음은 반드시 저주를 바탕으로 하여서 나타난다고 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는 반드시 죄를 바탕으로 깔고 행하세요.

먼저 인간의 죄를 들추어내고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이게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고 일하시는 방법이에요.

 

그래서 출애굽한 백성들에게 먼저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 가운데 가두어 버려요.

전부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어버립니다.

죽음 안에 가두어 버린단 말입니다.

 

그게 모세의 두 돌 판 사건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받기도 전에 이미 우상숭배하지요.

그래서 모세가 두 돌 판을 깨트리잖아요.

돌 판이 깨어졌다는 말은 계약이 깨어졌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받기 전에 율법대로 살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만약에 율법을 어기면 죽겠다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어요.

그래서 주어진 것이 십계명이라는 율법이에요.

그런데 이들은 계약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이미 계약을 깨트려버렸어요.

 

이렇게 되면 모두가 계약대로 죽어야 합니다.

이제 죽음에 가두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있어 율법은 죽음에 가두는 언약인 것입니다.

율법을 들여다보면 우린 저주 받은 자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걸 모르고 있는 겁니다.

지켜야 할 것으로 보고 있는 거에요.

아니에요.

이미 예전에 깨어졌어요.

 

이젠 율법대로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아요.

이미 깨어진 계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당초 율법을 지키라고 주시지 않았어요.

은혜를 드러내려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에요.

 

자 보세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후손입니다.

아브라함 후손이라서 하나님 선민이 되었어요.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선민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태어나고 애굽에 교육을 받았고 애굽에 사고로 신을 섬겼어요.

 

애굽에 사고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하는 사고에요.

신(神)과 거래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신(神)과의 법적 관계 안에 있는 것이에요.

애굽에 사고는 복 받을 짓을 하면 복을 받고, 저주 받을 짓을 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에요.

원인에 의하여 결과가 주어진다고 하는 신앙이에요.

 

그러니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인과응보 식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성경에선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게 죄에요.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섬기게 되면 맨 날 거래하고자 합니다.

그건 법이지 은혜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 사고를 깨트려주시려고 죄인으로 드러내고자 율법을 주신 겁니다.

애당초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을 주신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여 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어서 죄 아래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죄 아래 가두어 놓고 너희는 원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이런 은혜를 입었어요.

이 은혜가 바로 할례 속에 담겨져 있어요.

아브라함에게 있어 할례는 율법과 같아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하게 하신 것은 불순종을 바탕으로 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불순종의 죄가 까발려지고 난 후에 주어진 것이 바로 할례에요.

 

오늘 본문에 율법과 할례를 이야기 하지요.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따지고 있잖아요.

바울은 지금 율법과 할례를 동일선상에 두고 말하고 있어요.

이는 둘 다 같은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모세 언약 속에 있는 것이고!

할례는 아브라함 언약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할례가 나중에 모세 언약 속으로 들어왔어요.

둘 다 동일한 의미가 담겨져 있어요.

 

그럼 아브라함에게 할례가 어떻게 주어졌는지 살펴봅시다.

최초의 할례는 아브라함에게 행하였으니 아브라함이 행한 할례를 통해서 진정한 할례의 의미를 알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입니다.

 

창 17:1-16=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16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이 때는 아직 율법이 없던 때입니다.

그러니 할례가 율법 역할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에 조상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그 후손들에게 준다고 하십니다.

 

17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 때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람이 75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부모 친척 아비 집을 떠나옵니다.

그럼 17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난 것은 부르심을 입은 지 24년이 지난 때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17장까지가 아브람의 24년 동안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기근을 맞아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 사래가 애굽에 바로에게 겁탈을 당하는 사건도 일어나고!

아브라함의 식솔들과 조카 롯이 사로 다투다가 분가를 하고!

또한 롯이 전쟁의 포로로 잡혀 갔다가 아브람이 다시 찾아오는 일도 일어납니다.

 

15장에 보면 하나님이 나타나서 아브람에게 12장에서 하신 약속을 그대로 합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겠다고 하면서 아들을 안 주실 바에는 차라리 자기 집안에 있는 종들 중에서 똑똑한 놈인 엘리에셀을 후사를 세우겠다고 빈정거립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니다!

내가 아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약속을 짐승의 피로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시고자 짐승을 쪼개 놓고 하나님이 그 쪼갠 고기 사이로 통행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거신 겁니다.

이건 하나님의 죽음으로 언약을 이루신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사래가 아들을 낳을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감감 무소식입니다.

사래의 나이는 점점 들어가자 초조해지고 아브람의 믿음이 떨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사래와 의논한 끝에 사래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과 동침하게 하여서 아들을 낳고 맙니다.

자기 힘으로 후사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이 놈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아들을 낳자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주인인 사래 알기를 우습게 압니다.

그래서 사래가 아브람에게 저 년과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해서 아브람이 그들을 내어 좇습니다.

이 때가 아브람의 나이가 86세 때입니다.

인간적으로 후사를 잇고자 낳은 자식이 사래에게는 화근이 되어 고민 중에 있을 때입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이 다시 찾아옵니다.

그게 17장의 내용입니다.

17장에서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납니다.

나타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 이라고 하시면서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기 입장에서 보고는 조급하여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맙니다.

그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나타나셔서 아브람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름을 바꿔 주십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삭제하고 “아브라함”으로 개명(改名)을 시키고!

“사래”를 지우고 “사라”로 바꿔줍니다.

이름을 바꿔 준다는 것은 새로 태어난 다른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는 옛 사람은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리는 일입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은 부모가 준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이름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부모입니다.

 

아브람은 옛 사람이고, 아브라함은 새 사람입니다.

옛 사람은 옛 언약 안에서 난 자이고, 새 사람은 새 언약 안에서 난 자입니다.

옛 언약 안에서 난 자는 죽어야 할 자이고, 새 언약 안에서 난 자는 유업을 이를 자입니다.

새 사람은 옛 사람의 죽음의 바탕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게 합니다.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고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옛 사람의 죽음을 할례를 행하게 하심으로서 고백케 하신 것입니다.

 

고자란? 생산 할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자식을 생산 할 수가 없는 자입니다.

할례를 통하여서 아브라함은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었어요.

다른 말로 남자가 여자가 된 것입니다.

씨를 주는 자가 아니라 씨를 받아야 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게 성도입니다.

성도는 여자입니다.

남자는 예수님이에요.

여자가 남자로부터 씨를 받아서 아이를 생산함으로서 남자가 됩니다.

이걸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거듭남이란? 땅 사람은 죽고 하늘에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늘에 사람은 이제 남자입니다.

이제부터 남자가 되어서 여자인 땅에 들어가서 생명을 줍니다.

이 때 주어지는 생명은 자기 것이 아니고 하늘에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입니다.

 

이걸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에게 적용하면 이름이 바뀌고 난 후 할례를 받고 옛 사람 아브람으로서의 씨를 주던 자는 죽어 버립니다.

그리고 새 사람 아브라함으로서의 씨를 주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난 후에 낳아지는 자식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언약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낳아진 자가 바로 이삭입니다.

바울은 이 이삭을 일컬어 그리스도라고 했어요.

그리스도는 이 언약을 따라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의 자식은 단 한명인데 이는 곧 그리스도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암튼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은 아브라함이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낳은 것이 됩니다.

여기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약속으로 난 이삭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이를 언약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의 할례입니다.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아브람을 책망하는 말입니다.

전능하다는 말은 언약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은 나는 내가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데!

너는 왜? 내 약속을 믿지 못하고 네 힘으로 이스마엘을 낳았느냐고 책망하는 내용입니다.

네가 만약 내가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내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인간인 아브람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할례입니다.

하나님이 할례를 통해서 아브람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받은 할례는 곧 불순종을 깔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용서받은 자로서의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라고 불러질 때마다 난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이고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할 때마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할례가 곧 아브라함의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유대인들과 이방인은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을 하다가 갑자기 율법과 할례 이야기를 들고 나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선민 된 증거를 율법 받음과 할례 행함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함으로서 이방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이 아니 너희가 율법 속에 있는 할례를 받았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율법을 지켰을 때 유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율법을 지키면 할례도 유익한 것이 되지만!

만약에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할례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아니~ 너희들은 율법을 말 하면서도 그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우린 할례 받았기 때문에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다 엉터리가 아니냐 입니다.

율법도 다 못 지키는 놈들이 할례를 받았다고 그게 무슨 자랑거리냐 에요.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할례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할례도 율법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할례가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듯이!

만약에 율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율법의 요구대로 산다고 하면 그럼 그 사람들은 할례 받은 것이 되지 않겠느냐 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육신의 할례를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마음 속으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고 마음에 할례가 할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는 것이지 육신에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에 할례란 어떤 것입니까?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하면 유대인들이 표면적인 것을 들고 나오면 안 되지요.

진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외적 조건으로 사람을 차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할례라는 외적 조건으로 이방인과 차별하고 선민이라고 꼴값을 떠는 것은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게 하신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인간의 조건으로 하나님을 들먹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을 보고 뭐라고 하겠느냐?

아니 자기들도 우리들과 똑같은 짓거리를 하고 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냐 에요.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란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표면적(表面的)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가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는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인간의 외적(外的) 조건을 가지고 따지지 않아요.

인간의 외적 조건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성도는 나 율법 지켰다!

나 할례 받았다!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거듭난 성도는 나 복음 안다고 자랑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은 유대인이 율법 안다고 자랑하는 것과 같아요.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아직 복음을 모른다는 의미에요.

 

복음 속에는 우리의 자랑거리가 들어가 있지 않아요.

오로지 감사만 담겨져 있어요.

복음에 감사하는 자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성도에요.

그 안에 성령이 계신 거듭난 자에요.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성도라고 한다면 율법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할례를 통해서 “난 죽은 자입니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이게 이면적 유대인이에요.

즉 영적 유대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할례 속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이라는 은혜성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 용서하심을 믿음으로 된 의(義)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된 의(義)란? 아브라함의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주어진 구원을 말합니다.

 

로마서 4장을 봅시다.

 

롬 4:11-12=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義)를 인(印)친 것이니 이는 무 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義)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 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 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義)를 인(印)친 것이라고 하지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는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한 것을 할례로 표식을 했다는 말입니다.

먼저 너는 내 것이라고 불러 놓고서는 하나님이 자기 것이라는 의미로서 할례를 행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종을 사 가지고 와서 자기 소유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도장을 찍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할례를 할례 받기 전 즉 무 할례시에 너는 내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印)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무 할례시에 의롭다고 하신 그 의(義)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인(印)친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냥 은혜로 구원 된 것을 확증해 주는 차원에서 할례를 행하였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행한 할례는 구원받은 백성의 표식 차원에서 행하게 하신 것이에요.

이걸 율법 속에 담아 놓았어요.

그럼 이스라엘도 동일하다는 말입니다.

너희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증거로 할례를 행하게 한 것입니다.

할례를 해서 의롭게 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의롭다 인정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이에요.

 

이건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달라요.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 백성이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게 아니고 너희가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유대인과 바울은 완전히 반대로 말하고 있어요.

 

이건 신약 식으로 말하면 성도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같아요.

세례를 베풀어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성도이기 때문에 세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 됨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도 저주를 받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은혜로운 부르심에 의한 의(義)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효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다고 하여도 두들겨 팰지라도 구원에서는 잘라내지를 않는 것입니다.

 

율법대로 못살아도 잘라내지 않아요.

아브라함 후손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은혜로 구원되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함이 목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율법이 죄를 고발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되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으면서 “야!~ 우리가 이런 못난 죄인임에도 아브라함처럼 은혜로 구원해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할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됨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걸 마음에 할례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음에 할례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요.

그래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지켜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 말하면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의로운 자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처럼 말씀을 지켜서 의로워지라는 것이 아니에요.

의(義)는 예수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성도는 말씀 지킴과 안 지킴과 상관없이 이미 의로운 자에요.

그러니 성화주의자들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의로워지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과 같은 사고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었어요.

이걸 역으로 말해보세요.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안 지켰으면 어찌 될까요?

자랑하지 않겠지요.

 

지금 유대인들이 율법 지킴을 자랑하고 있지요.

율법 지킴을 자랑한다는 것은 곧 율법을 안 지키면 자랑도 날아간다는 것을 깔고 있어요.

그럼 결국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자기 행함에 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건 아니에요.

 

바울은 지금 이걸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이방인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나 할례의 그 본질적인 의미도 모르면서 껍데기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서 시 건방을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매하고 어리석은 짓입니까?

바울은 지금 이걸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라이~ 이 등신들아!

율법이나 할례의 정신도 모르면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주접을 떨고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지 몸에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고 마음에 할례가 할례이고!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란? 신약적 의미로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할례 정신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할례 정신을 안다면 율법 지킴을 자랑해서는 안 되고 은혜를 자랑하여야 합니다.

우린 율법대로 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다고 자랑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은혜성이 드러나잖아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 앞에서 율법 지킴을 자랑하므로 하나님의 은혜 성을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유대인들이 율법 지킴을 자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모독당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성이 날아가요.

 

율법 지킴이 신앙이 되면 곧 은혜성을 날아가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구원을 훼손하게 되어요.

아주 이상하지요.

이 이상한 비밀을 알아야 마음에 할례를 받은 성도에요.

 

신앙은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면 예수님 나오게 되어 있어요.

“주여 내가 죄인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겨 주세요” 가 나온단 말입니다.

이걸 아셔야 해요.

 

바울의 증거는 너희들이 율법 지킴을 자랑하는 것은 결국 할례 정신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란? 표면적으로 했느냐가 중요치 않고 그 정신을 아느냐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할례 정신을 안다면 율법 지킴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자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율법 지킴을 자랑하는 것은 곧 은혜에서 떨어진 표면적 유대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할례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할례를 할례로 보지 않고 마음에 거듭남을 할례로 보십니다.

육신의 할례를 자랑하는 자는 표면적 유대인이고,

할례 정신으로 살아가는 자는 이면적 유대인입니다.

 

할례 정신을 안다는 것은 은혜로 구원되었음을 알고 그 은혜를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복음을 안다고 하면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주여 감사합니다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간 시간마다 제발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복음이 주는 기쁨으로 감사하면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을 모르더라도 정죄하거나 깔보지 말고 내게 복음을 알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나를 자랑하지 말고 복음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란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가짜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한다고 하면서 지옥에 가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외식이란? 마음에도 없는 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뜻도 모르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나 할례의 진정한 뜻을 모르면 결국 자기가 행한 행위를 자랑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자는 즉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행함을 자랑하게 되어 있어요.

 

복음 안다고 꼴값 떠는 놈들은 다 유대인들이에요.

복음을 알면 감사가 나오지 자랑이 나올 수가 없어요.

복음 아는 것에 감사하세요.

 

부디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과 기를 여시고 복음이 들려지게 하시고 마음으로 믿어지고 깨달아지게 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합니다.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율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늘 말씀을 분별케 하시고 내 자신이 말씀 앞에서 해부 당하여 주의 긍휼을 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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