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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롬.강해)20강. 차려진 밥도 못먹고 밥상을 걷어찬 등신들 (롬 3:1-8)

by coroa 2022. 7. 2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20강. 차려진 밥도 못먹고 밥상을 걷어찬 등신들 (롬 3:1-8)

롬 3:1-8=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찌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정낙원 목사

 

옛말에 일하지 못하는 목수가 연장을 나무란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실력 없음을 인정하지 않고 핑계를 댄다는 뜻입니다.

왜? 연장을 나무랍니까?

그래야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이 우리들 신앙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우리는 누가 자기와 다른 말을 하면 틀렸다고 합니다.

자신은 틀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이는 항상 자신은 옳은 자리에 세워놓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항상 자신 중심에서 판단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편견(偏見)이란?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말입니다.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가 하면 자기 쪽으로 치우쳤어요.

그래서 난 항상 옳고 남이 틀렸어요.

난 항상 피해자이고 남이 가해자에요.

 

이러한 사고가 우리 인생사 모든 곳에 스며들어 있어요.

세상 살아가는 것에도 스며들어 있고!

신앙생활 속에서도 스며들어 있어요.

 

이러한 편견이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 독선으로 흘러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종교적 편향이에요.

극단적인 종교적 편향에 사로잡힌 자들을 일컬어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자신들 집단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편향에 사로잡히면 할 말이 없어요.

막무가내입니다.

내가 옳다고 하면 남에 말을 듣고자 하지 않아요.

우이독경(牛耳讀經)이에요.

 

비록 틀렸다 하더라도 틀렸다고 인정하지 않아요.

인정하게 되면 자기가 부정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상대를 틀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급기야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해 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을 살모사 새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모사(殺母蛇)란? 어미를 잡아먹은 뱀이란 뜻입니다.

인간을 낳아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세요.

 

그런데 인간이 예수님을 죽였어요.

왜? 죽였는가 하면 인간을 틀렸다고 하고 죄인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기분 나쁘게 자꾸만 바른 말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듣기 싫은 겁니다.

듣기 싫으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죽인 것입니다.

이걸 예수님은 빛이 어둠이 비취되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우리 신앙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누가 나의 신앙에 대하여 바른 말을 해 주면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고 배척해요.

듣기 싫어해요.

 

이처럼 인간들은 자기에게 옳은 말을 해 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죽여 버리는 악당들이에요.

우리는 모두가 이러한 이단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자기편을 끌어 모으는 당(黨) 짓는 일을 일삼는 것입니다.

 

왜? 나만 옳고 남은 틀렸다고 생각할까요?

편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왜? 행여라도 내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지는 않는지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왜? 내 생각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는 못할까요?

이는 모두가 자기를 기준으로 한 선악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특징은 자기 사랑으로 가득 찼어요.

자기 사랑으로 살아요.

그래서 나는 항상 선한 자에요.

내가 하는 일은 항상 옳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 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신앙도 자기 색깔 맞추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생각을 같이 하는 자들과 사귐을 갖습니다.

그 속에서 위로받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 집단 속에서 옳은 자로 잘난 자로 살고 싶은 겁니다.

결국 자기 존재감 챙기기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불편해 합니다.

이질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으면 괜히 찜찜하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다르면 그 사람을 축출해 버립니다.

 

이게 교회 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한 주(主)를 섬기면서도 각양의 교파(敎派)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파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달라요.

서로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다르면 이단이라고 해서 강단 교류도 못하게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당시에 유대인들은 여러 분파(分派)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엣세네파와, 쿰란공동체와, 열심당과 같이 각양의 신앙관을 가진 자들로 분파(分派)를 형성하여서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어 있었어요.

 

이들은 모두가 유대인들이에요.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요.

그런데 교리(敎理)가 다 달라요.

꼭 이 시대 교파와 교단들과 같아요.

교파들마다 신앙의 색깔이 다르잖아요.

 

그러니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모습이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과 똑 같습니다.

분파가 생긴다는 것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도 서로가 서로를 이단이라고 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러니 어느 시대나 영적인 상황은 동일한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예수님이 오셨을 때의 모습이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지금이 예수님 때라고 생각하세요.

이처럼 혼돈 된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12제자들을 사분오열된 분파 속에서 불러내십니다.

부르시고 따로 두십니다.

영적으로 출애굽한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도 분파주의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또 다른 하나의 분파에 불과했어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분파를 만든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 자신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존에 모든 인간들을 모두가 한 통속으로 봅니다.

 

수 많은 분파로 갈라져 있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모두가 한 영역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권세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어둠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어둠에 속하였다는 말은 죽은 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인간들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예수님 혼자 그렇게 정의하신 겁니다.

인간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이런 바탕에서 인간을 판단하시고 심판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세상의 실존이 이렇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난 빛이라고 합니다.

내가 곧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합니다.

인간들이 믿거나 말거나!

사실이 이렇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자들은 창세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이 된 성도들입니다.

거부하는 자들은 창세로부터 예비 된 캄캄한 곳으로 들어갈 자들입니다.

숫자가 많고 적음은 상관이 없어요.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에 동의하는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가 있고 마귀로부터 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의 이런 정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옮음이라고 찬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유대인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것도 동의하여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마귀적인 신앙이라고 하여야 예수님께 속한 성도에요.

 

그런데 우리의 신앙을 보면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들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잖아요.

나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잖아요.

내가 틀렸다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잖아요.

 

내가 속한 교회!

내가 속한 조직!

내가 신봉하는 교리!

내가 지향하는 신앙이 옳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유대인들처럼 나만 옳다고 하고 있어요.

 

인간에겐 나만 다 앎이 없어요.

우리가 안다고 하는 그 앎이란 지극히 부분적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고 담아내는 것에는 티끌 같은 것이에요.

 

피조물은 피조물만큼만 하나님을 알아요.

그래서 우리가 안다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럼에도 다 아는 척 교만을 떠단 말입니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제한적으로만 알았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 주셨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증거를 거부했습니다.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는 예수님을 죽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지극히 미미한 한 부분이라는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다 아는 척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자신들이 신앙만이 옳은 신앙이라고 절대화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차별성을 둔 것은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행함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분명히 이방인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방인에게 없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어요.

할례도 행하였어요.

 

외적(外的)으로 보면 분명히 달라요.

그래서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율법도 없고 할례도 행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유대인은 율법도 있고 할례도 행하였어요.

 

그래서 외칩니다!

야! 율법도 모르는 이 더러운 개 같은 이방인들아!

우리는 너희와 다르단 말이야!

그러니 우리는 너희를 이단이라고 욕을 해도 되지만 너희는 우리에게 욕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꼭 이 시대 우리들과 같지요.

우리도 그러잖아요.

나는 남을 비판하고 이단이라고 해도 되지만 남은 나를 비판하고 이단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지금 그런 개 같은 경우를 하고 있어요.

 

이에 바울이 일갈합니다.

그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느냐!

너희나 이방인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는데!

너희도 예수 안 믿고 이방인도 예수 안 믿잖아!

그러니 하나님 앞에선 너희도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진 자나 율법을 갖지 못한 자나 다 동일한 죄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율법 지킴을 가지고 사람을 옳고 그름으로 나눈 적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 속에는 하나님이 바라는 의(義)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없는데 어떻게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가지고 나는 옳은 자라고 자랑 할 수가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나 율법 지켰으니 착하지요! 라고 자랑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켜도 착한 사람으로 보지 않아요.

왜냐하면! 율법은 죄인이라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넌 죄인이란 말입니다.

넌 틀린 자라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죄인인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도 죄인이고 율법을 안 지켜도 죄인이에요.

왜냐하면! 애시당초 율법은 인간들을 죄인으로 드러내게 하려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올바로 지키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서 죄인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는 의인이라고 말 하고 있어요.

 

이건 완전히 헛다리짚은 겁니다.

율법을 안 지킨 것이 되고 만단 말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지 않고 도리어 의인으로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난 틀린 자라는 것으로 드러나야 해요.

“주여 난 죄인입니다!”

“나 죄인 맞네요!”

그러니 “주여 살려 주세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도리어 “주여! 나 착하지요!”

“복 주세요!”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어리석음을 모르고 있어요.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하여서 죽였어요.

자신들만 옳고 나머진 다 틀렸다고 했단 말입니다.

이건 마치 밥 먹으라고 준 밥상을 걷어 차 버린 꼴입니다.

먹고 배부름을 얻으라고 밥상을 차려 주었더니 자기 입맛에 안 맞는다고 걷어 차 버린 꼴이 되고 말았어요.

 

만약에 율법 속에 의(義)가 있으면 율법 지킴을 자랑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 속엔 의(義)가 없습니다.

그러니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나는 너 보다 낫다고 하면 안 되지요.

그건 바보에요.

 

이 시대 언어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고 해서 의가 되지 않아요.

의는 예수 믿음 속에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으면 안 되어요.

그럼 유대인들과 같아져요.

유대인이 율법을 지켰는데도 바울이 너희는 죄인이야 라고 한 것처럼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도 바울은 너희는 죄인이라고 해요.

 

이렇게 말한 꼭 그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말란 말이냐 라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속에 하나님이 바라는 의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둔 의는 예수님 속에만 있어요.

그러니 예수 믿으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로 할 일이 있어요.

그 역할이 있단 말입니다.

무슨 역할인가 하면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역할을 해요.

율법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듯이 하나님 말씀이 죄인으로 드러나게 해요.

 

히브리서 4장 12절을 보세요.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 말씀이 양날 가진 검으로 우리를 해부한다고 하잖아요.

영과 혼과 심령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잖아요.

발가벗긴다고 하지요.

이는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言行心思)를 죄로 드러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하는 역할이 우리를 해부해서 죄를 까발리는 것이에요.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켜도 죄인이고 안 지켜도 죄인이에요.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란? 일차적인 의미로 보면 너는 죽일 놈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생명의 근원을 잘라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는 죽일 죄인이라고 할례를 행하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도리어 할례 행한 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이런 착각이 어디에 있나요.

 

그래서 바울이 에라이~ 이 등신들아!

할례의 의미도 모르면서 할례를 행한 것을 어찌 자랑할 수가 있느냐!

할례는 육신에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마음에 할례를 받았다고 한다면 육신에 할례 받음을 자랑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창피한 일이란 것입니다.

 

할례란? 의식이 아니고 정신에 있어요.

그러므로 비록 몸에 할례를 행하였다고 하여도 마음속으로 할례 정신을 모른다고 하면 할례를 받은 자나 안 받은 자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를 바가 없어요.

둘 다 죄인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모두가 죄인이에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데 유대인이면 무엇합니까?

할례를 받으면 무엇합니까?

율법을 가지고 있으면 뭣합니까?

소경인데!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우린 달라!

왜냐하면! 우린 할례를 받았거든!

우린 율법을 가지고 있거든!

그러고 있어요.

이 등신들이~

 

아주 쉬운 예로 듭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러 오라고 자동차를 한 대 주었어요.

요즘 말로 교회에 오라고 준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 자동차를 타고 교회에 오지 않고 놀러 다니고 있어요.

 

이방인은 걸어서 놀러 다니고 있고!

유대인은 자동차 타고 놀러 다니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동차가 없는 이방인들에게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자동차를 받았다!

너희는 없지!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왜? 자동차를 주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동차를 주신 의도와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이방인들에게 우리 차 있다고 자랑하고 있어요.

이거 죄라고 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듭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만나는 지도를 주었어요.

지도를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나 지도 있다!” 라고 자랑하고 있어요.

예수를 만날 생각을 하지 않고 지도만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이방인도 예수를 쳐다보지 않고 있고!

유대인도 예수를 쳐다보지 않고 있어요.

이방인도 예수를 못 만났고!

유대인도 예수를 못 만났어요.

 

예수를 못 만나기는 지도를 받은 유대인이나 지도가 없는 이방인이나 동일합니다.

이러면 지도가 있으나 없으나 똑 같아요.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지도를 가지고 있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꽝이에요.

 

율법을 가지고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고!

율법이 없이도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가요.

예수를 모르면 모두가 한 통속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안 믿으면 다 같다고 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하나님이 이 땅에 정답을 하나 주셨어요.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주신다는 정답입니다.

그럼 유대인도 예수 믿어야 하고!

이방인도 예수 믿어야 해요.

 

율법 안 지켜도 예수 믿으면 옳은 자이고!

양심적으로 살지 않아도 예수 믿으면 옳은 자에요.

반대로 율법을 지켜도 예수 안 믿으면 틀린 자이고!

양심적으로 살아도 예수 안 믿으면 틀린 자에요.

정답은 예수 믿음이에요.

 

그러니 예수 안 믿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어요.

둘 다 죄인이에요.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도 예수를 안 믿으면 이방인과 똑 같아요.

율법을 준 것은 예수 믿으라고 준 것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했어요.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지요.

 

이걸 바울은 율법대로 산 것이 율법 지킴이 아니고!

율법이 지향하는 예수님을 만나야 율법 지킴이 된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고 마음에 할례가 진정한 할례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 복음 아는 것으로 비유해도 그 맥(脈)은 동일해요.

 

미리 못을 하나 쳐 놓고 이야기 합니다.

제가 왜? 이 시대 복음 안다고 하면서 잘난 척하는 자들을 책망하는가 하면!

성경은 항상 현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에요.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해요.

그러므로 성경 이야기는 과거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적 사건을 현재화 하여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꼴값을 떨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유대인들처럼 꼴값을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있던 자들이 지금도 있기 때문에 현재적 사건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현재 상황에 맞추어서 적용하여서 설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유대인들이 지금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엔 유대인들이 율법 안다고 꼴값을 떨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복음 안다고 꼴값을 떨고 있잖아요.

 

그래서 복음 안다고 까불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말하면서도 율법을 모르는 것과 같아요.

복음을 지식적으로 안다고 해서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안다!

십자가를 안다!

예수를 안다! 고 하는 그 “안다” 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다” 라고 하는데 이는 부부간에 침실에서 한 몸이 되고 난 후에 서로 아는 것과 같은 앎을 말해요.

경험된 것을 말해요.

 

이건 이론이나 지식이 아니에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서 알아진 앎이에요.

책으로 배워서 알아진 앎이 아니에요.

경험으로 알아진 앎이에요.

 

이건 마치 음식을 먹어보고 난 후에 맛을 안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음식을 먹어보지 않고 맛을 안다고 하는 것은 지식이에요.

지식으로 말하는 맛은 올바른 맛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맛을 말 할 때는 먹어 보고 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나!

십자가나!

예수님도 이와 같아요.

성령이 그 안에 오신 성도는 마치 음식을 먹어본 사람과 같이 알아요.

이렇게 알아진 것은 삶으로 나타나요.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마치 율법을 손에 쥐고도 율법의 본질을 모르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같아요.

그래서 설교 제목을 밥상을 걷어찬 등신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밥을 먹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다가 결국 밥상을 걷어차 버린 꼴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짓을 이 시대 일부 몰지각한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하고 있어요.

 

말은 천사의 말인데 하는 짓은 야차와 같이 들개처럼 행동하고 있어요.

이걸 야고보는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난다고 했어요.

이런 샘물은 없어요.

그러니 말과 삶이 다른 것은 신앙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앎이란? 삶으로 나타나야 진정한 앎이 되어요.

삶으로 나타나지 앎은 죽은 겁니다.

이걸 지식이라고 해요.

지식은 학습으로 배워서 알 수가 있어요.

이건 각양의 책을 통해서 이사야의 예언처럼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외워서 머리에 담는 거예요.

 

그래서 논리를 만들고 체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곤 복음이라고 내어 놓아요.

이렇게 알아진 복음으로 온갖 정죄와 비판을 하면서 변론을 즐기고 분쟁을 일으키고 다툼을 즐기는 것입니다.

책으로 공부하고 배워서 알아진 것을 남을 죽이는데 힘으로 써 먹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으로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지식이에요.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복음은 학습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사로 주세요.

은사로 주어진 복음은 머리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 담아져요.

새 언약을 마음에 새겨준다고 하지요.

이는 언약이 가슴 속에서 살아서 역사를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로 주어진 산 복음은 심장이 뛰듯이 복음이 살아서 움직여요.

행함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로 알아진 복음은 반드시 생명의 활동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해요.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으로 나타나요.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된단 말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관념이고 지식이에요.

지식은 이상이지 현실이 아니에요.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은 현실 속에서 십자가를 그려내는 아픔이 없어요.

이걸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귀의 믿음이라고 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나 복음 안다고 나댈 것이 아니라 복음을 삶으로 풀어내면서 살아져야 해요.

복음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요.

살아있는 복음은 반드시 예수님의 운명으로서의 삶으로 살아지게 하세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복음이 그렇게 몰고 가세요.

 

이건 온전하고 완전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마음으로서의 살아짐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담고 있는 그 정신으로서의 삶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에요.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의외로 이런 귀신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 많아요.

이들이 복음 복음하면서 하나님 영광을 가리고 있어요.

마치 유대인들처럼 율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에게 모독당하게 한 것과 같아요.

복음 안다고 하면서 욕 먹을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이 변론을 좋아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다툼을 즐겨요.

지식으로 습득한 것이니까 잘난 척 행세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만나면 누가 더 많아 아느냐 경쟁하는 겁니다.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은 변론을 좋아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다투는 자라고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교회마다 이렇게 변론을 일삼고 분쟁을 일으키고 다투는 자들을 경계 시켰어요.

변론을 좋아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은 복음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으로 죽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했어요.

 

왜? 복음으로 변론하고 분쟁하고 다툽니까?

배워서 알아진 지식이기 때문이에요.

지식은 반드시 많이 아는 자와 모르는 자 간에 차별성이 생겨요.

열심히 공부 한 놈과 빈둥거리고 놀던 놈은 돌아오는 것이 달라요.

열심히 공부 한 놈은 상석에 앉고, 빈둥거리고 노는 놈은 말석에 앉아요.

 

복음은 차별이 없게 하는데!

지식으로 알아진 것이기 때문에 차별을 두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지식은 반드시 습득한 자와 습득하지 못한 자간에 차별이 나게 되어 있어요.

이 차별이 바로 변론으로 나타나고 분쟁으로 나타나고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식을 많이 습득한 자들은 노력으로 알아진 아는 값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르는 자들을 업신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를 봅시다.

 

딤전 1:4-7=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디모데전후서는 바울의 유언장이에요.

바울의 마지막 서신서에요.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믿음에 아들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의 유언은 곧 예수님의 유언과 같아요.

예수님이 바울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일명 목회서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변론을 피하라고 합니다.

왜? 변론이 일어나느냐 하면 신화(神話)와 족보(族譜)에 착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 사상이 만연하였어요.

이러한 자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헬라파 유대주의자들이 교회 안에 침투하여서 각종 분란을 일으켰어요.

이들은 철학으로 무장하여서 공교한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고 있는 겁니다.

철학을 하게 되면 인간의 심리를 알아요.

그러니 철학으로 알아진 지식으로 복음을 혼합하여 그럴 듯하게 각색하여서 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미혹당한 자들의 삶이 에베소서에서는 방탕과 방임과 방종으로 나타난다고 했어요.

그래서 신앙이 아는 것 따로 삶 따로 이원론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두 양태로 나타났어요.

쾌락주의로 나타나는가 하면 아니면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나타났어요.

쾌락주의로 나타나면 방탕과 방종과 방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금욕주의로 나타나면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페하는 식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이단이라고 하였어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신화와 족보에 착념치 말라고 한 것은 당시의 영지주의자들은 모든 만물에 영(靈)이 있다는 믿었어요.

이게 범신론(汎神論)으로 나타났어요.

이건 그리스 신화를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늘에도 신이 있고!

바다에도 신이 있고!

바람을 다스리는 신이 있고!

비를 다스리는 신이 있어요.

 

이런 범신론(汎神論) 사상은 인간이 범죄하고 난 후 나타난 사상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자 인간들이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섬기기 시작했어요.

감추어진 하나님은 보이는 하나님으로 끌어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형상화하여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불러내시고는 십계명을 주십니다.

이 때 하나님을 형상화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는 곧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형상화 하여서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형상화 하여 심기지 말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형상화 하여 섬기는 하나님은 다른 신이라고 알려 줍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산 아래서는 아론을 중심으로 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이는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여호와라고 섬겼어요.

이러한 사고가 이스라엘 백성들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계속하여서 우상 숭배 신앙이 기승을 부린 것입니다.

사사기가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어요.

이건 죄인은 우상을 섬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적 신앙은 우리도 가지고 있어요.

모든 인간들이 이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신관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느 시대이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사상을 진리처럼 가르쳐 왔고 또 가르치고 있어요.

구약은 이스라엘 박성들 속에서 가르쳐 졌고 신약은 교회 안에서 가르쳐 졌어요.

초대교회 안에도 이 사상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어요.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윤리성과 도덕성을 담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이 교회마다 난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상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어요.

 

교회가 분쟁이 일어나고 변론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 사상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은 가문(家門)도 중요시 여겼어요.

하나님께서 특별한 가문을 통해서 일을 하신다고 믿었어요.

이게 왕족이니 제사장 가문이니 하면서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도 복음을 몰랐을 땐 가문을 중요시 여겼어요.

바울은 자신을 베냐민 지파라고 하면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라고 하지요.

이는 왕족(王族)이란 말입니다.

가문을 자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말리엘 문하생으로서 바리새인 중에서도 최고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어요.,

예수를 몰랐을 땐 이러한 것이 자랑거리였어요.

이게 신화와 족보에요.

 

이러한 신화와 족보는 바울 자신이 과거에 신주단지처럼 자랑하던 것들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것으로 변론하고 다툰다는 것은 곧 아직 그리스도 밖에 있다는 증거에요.

바울이 옛날에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것을 신앙으로 내어놓거나 자랑하는 자들은 진리에 서 있지 않는 아직 복음을 모르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딤전 6:3-5=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20-21=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21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보세요.

변론하고 언쟁을 좋아하고 다투는 자들은 교만하여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하지요.

한마디로 개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한단 말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라고 했어요.

 

이들은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로로 삼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가문을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도적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진리도 모르는 자에요.

마음이 마귀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마귀 짓을 일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귀한 복음으로 변론하고 언쟁하고 투기와 분쟁과 훼방으로 다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진리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도리어 사망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놈들은 믿음에서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자들로부터 돌아서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을 이 시대로 적용해 보면 복음 안다고 교만한 자들이라고 볼 수가 있어요.

복음 안다고 얼마나 꼴값을 떱니까?

그 당시에도 교회 안에 이런 자들이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이야 오죽 더 많지 않겠어요.

이 시대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자칭 복음 안다고 설치는 자들이에요.

 

너 복음 알아!

몰라!

모르면 내게 한 수 배워!

나는 알기 때문에 너를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할 수가 있어!

그러니 넌 나를 선생으로 모시고 배워!

그런단 말입니다.

 

언뜻 들으면 당연한 것 같지요.

그러나 당연치 않아요.

이러면 은혜성이 날아가요.

 

복음은 은혜에요.

은혜란 내가 배워서 깨달은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셨어요.

그러니 나 복음 안다고 자랑 할 수가 없지요.

모르는 사람을 무시 할 수가 없어요.

 

은혜란 차별성이 없어요.

복음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다고 해서 모르는 사람을 무시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기 노력으로 습득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았기 때문에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랑 하려면 거저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여야지요.

그러니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절대로 복음 안다는 것을 나는 너보다 더 우월하다는 식으로 힘으로 사용하지 않아요.

 

아니 사용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걸 허락하지 않아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은혜로 복음을 알게 해 준 성도는 복음으로 변론하거나 다투거나 분쟁하지를 않아요.

 

그러니 복음으로 변론을 하거나 분쟁을 일삼는 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처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자들과는 상종하지 마세요.

이런 자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다툼이 있어요.

자기네들끼리도 맨 날 갈라낸다고 하면서 아웅다웅 으르렁거려요.

 

이 모두가 복음이 지식이다 보니 잘난 척 하는 겁니다.

지식이다 보니 복음으로 섬기지 않고 남을 가르치는 선생 노릇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만해서 그래요.

바울은 이런 자들은 믿음에 서 있지 않는 자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가짜란 말입니다.

 

바울의 증거를 더 들어봅시다.

디모데후서 2장입니다.

 

딤후 2:23-26=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변론을 어리석음이라고 하지요.

무식한 짓이라고 하지요.

왜? 변론을 어리석고 무식한 짓이라고 합니까?

이는 안다! 모른다! 라는 것으로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기 때문입니다.

변론 한다는 것 자체가 외모로 차별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복음은 인간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요.

차별하지도 않구요.

그러므로 진짜 복음을 아는 성도는 변론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않고 참아주고 이해하고 눈 높이에 맞추어서 가르친다고 합니다.

누가 변론을 걸어도 피하고 다툼을 일으켜도 휩싸이지 않아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온유한 마음으로 참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바울도 이러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각 사람의 분량에 따라 대하였어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처럼 대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대하고!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처럼 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자이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빚진 자라는 마음으로 대하였어요.

이게 복음을 바로 아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복음을 왜? 그렇게 어렵게 전하느냐고 하니!

어렵게 전해야 복음에 가치성이 드러난다고 해요.

그러면서 글을 어렵게 써야 그걸 또 주해하면서 가르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건 스스로 자기가 아는 복음은 지식이라고 드러내는 말이에요.

복음을 빙자하여서 나는 이렇게 많이 안다는 것을 자랑하면서 지적 유희를 즐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만이에요.

 

복음에 가치성은 말의 현란함에 있지 않아요.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복음을 시장 통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말씀하셨어요.

어느 특정인들만 아는 철학적인 용어로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흔히 많이 배운 식자(識者)들만 사용하는 그런 고급스러운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어요.

시장 통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복음을 증거하였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전하였다는 말입니다.

 

물론 복음은 아무리 쉽게 가르쳐도 육에 속한 자는 알아듣지 못해요.

반면에 어렵게 말해도 영에 속한 자는 알아들어요.

그러니 구태여 어려운 말로 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서 할머니까지 다 알아들을 수 있게끔 전해야 해요.

 

복음을 어렵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스승 노릇하고자 하는 꼼수가 있어요.

그러니 나 보다 더 잘하는 사람 있으면 나와 봐!

교만으로 시건방을 떠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교만이 어디에 있나요.

 

복음은 거저 받았어요.

그러니 거저 주어야 해요.

혼자 다 아는 척 선생 노릇하고자 하지 말란 말입니다.

이 세상에 선생은 없어요.

성령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세요.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선생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땅에 있는 자를 선생이라 칭하지 말라고 했어요.

너희 스승은 하늘에 있다고 했어요.

성령이 오시면 다 알게 해 주세요.

그러므로 은사로 복음을 알아진 사람들은 복음 아는 것으로 잘난 척 하지 않아요.

혼자 다 아는 척 하지 못해요.

어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알기 쉽도록 쉽게 전하고자 애써요.

마치 엄마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가르치듯이 설명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복음은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에요.

목사가 복음으로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서 선생 노릇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안다면 섬기는 자세로 전해야 해요.

날 따라 올 테면 따라 와!

그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누구라도 복음으로 우쭐대고 잘난 척 하면 그건 지식이라고 보세요.

그런 자는 주의 종이 아니에요.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표면적 유대인들이에요.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에요.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으뜸 노릇을 하고 상좌에 앉아서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옛 사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안다고 하면 육신으로 행한 것을 자랑 할 수가 없지요.

나는 할례 받았다!

너는 안 받았지! 라고 자랑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외모로 판단하는 겉 사람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겉 사람이 죽었으니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자신도 나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남도 외모로 판단하지 않아요.

인간의 행함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할례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신앙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난 이제부터 내 몸에 의미를 두지 않겠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제부터 오직 하나님의 언약에만 관심을 두고 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겠습니다!” 라는 말과 같아요.

 

그러므로 할례를 하였든 안 하였든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할례 정신으로서의 삶이에요.

이러한 정신이 없다고 하면 할례를 행한 것이나 안 한 것이나 동일해요.

도낀 개낀이란 말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없으면 복음을 아나 모르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반드시 복음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는 자들이 유대인들처럼 발끈해요.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복음 아는 것으로 선생 노릇하고 상좌에 앉아서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율법 지킴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니 화가 나는 겁니다.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 것으로 잘난 척하고 살아왔어요.

남에게 영광 받는 재미로 살아왔어요.

그래서 철저히 율법적 행위로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별했어요.

자신들은 이방인과 다르다고 우쭐했어요.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도 받았고!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표시로 할례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너희들은 율법도 없고 할례도 없지!

그러니 우린 너희와 다르다고 합니다.

 

인간이면 다 같은 인간인줄 아느냐?

아니야!

우리는 너희와 달라!

그러면서 교만을 떨었어요.

 

그런데 바울이 미친 놈 지랄하고 있네!

너희들이 율법이 뭔지도 모르고!

할례 정신을 모르는데!

그걸 가지고 있으면 뭘 하느냐?

그러니 네 놈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 똑 같은 놈들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 버전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누가 십자가를 안다고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자 곁에 있던 바울이 미친 놈 지랄하고 있네!

십자가 정신도 모르면서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놈이 어떻게 십자가 정신에 반(反)하는 변론을 일삼고 분쟁하고 다투고 싸우는 짓을 하고 있느냐! 라고 힐난하는 것과 같아요.

 

십자가는 나를 죽은 자로 만들어요.

죄인의 자리에 앉힌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남을 정죄하고 판단할 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 긍휼의 마음이 나와야지 남보다 잘났다고 교만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 시대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면서 업신여기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몰랐던 것처럼 십자가를 모르고 있다는 소치에요.

이렇게 되면 결국 십자가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나!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안다고 나대는 사람이나 똑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남을 판단 할 수가 없어요.

남을 판단하는 주둥이를 닫게 되어 있어요.

십자가 앞에 서면 내 코가 석자라는 것이 보여요.

그러니 남의 신앙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겁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므로 십자가를 알면 남을 무시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남을 무시하고 있잖아요.

그것도 복음 안다는 것으로 무기를 삼아서 말이에요.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입니까?

 

그러니 복음 복음하고 십자가 십자가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도 자기 행함으로 힘을 삼아서 남을 판단하고 있고!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우리들도 십자가를 안다는 것으로 힘을 삼고 남을 판단하고 있으니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리를 지금 식으로 말하면 십자가를 모르는 놈들도 잘난 척 하고!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놈도 잘난 척하는데 뭐가 다르냐 에요.

그 놈이 그 놈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우리에게 책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면 자칭 십자가를 안다고 하는 우리들도 유대인들처럼 뚜껑이 열립니다.

자기가 부정당하니 화가 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그러잖아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바울 네 말대로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한다면 그럼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고!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유대인이라고 해서 별 볼 일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럼 하나님이 할 일이 없어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였느냐? 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게 없는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율법이 있으나 없으나 똑 같다고 하니 도저히 받아 들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주장은 우리가 이방인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었고 할례를 행하게 한 것이 아니냐에요.

그런데 너는 똑 같다고 하니 자신들을 수용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에 적용해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교회에 다니나 안 다니나 다 똑 같다는 말과 같아요.

그럼 이 말 뜻을 모르는 교인들이 “그럼 교회 다닐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항의하는 것과 같아요.

 

이건 아니지요.

교회에 다니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왜? 교회에 다니는지 그 의미를 알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그 의미는 알고자 하지 않고!

그럼 교회 가지 말자! 라고 하면 안 되지요.

 

어떤 사람들은 “성도가 교회입니다!” 라고 하니까!

그럼 “교회 갈 필요가 없네!” 라고 해요.

성도가 교회라는 말은 교회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잖아요.

이런 사고가 영지주의 사고에요.

 

이런 자들이 있어서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성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어요.

더욱 더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다니까요!

왜? 이런 말을 합니까?

당시에도 복음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이용하여서 쾌락을 즐기고 있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항상 이런 자들은 있어 왔어요.

 

“성도가 교회입니다!” 라는 해서,

그럼 교회 다닐 필요가 없네! 라고 하면 안 되고!

그럼 교회 다니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야지요.

하나님께서 교회에 다니라고 하는 것에는 무슨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뜻을 좀 알려 주세요! 라고 하여야지요.

 

왜? 예수를 믿어야 되는지!

왜? 율법 지킴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없는지!

왜? 예수 안에서만 의롭게 되는지!

왜? 예수님의 피 흘리심 속에서만 구원의 능력이 나오는지!

알려 달라고 하여야지요.

 

무식하면 남 탓을 해요.

인간이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꼭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켜요.

항상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해요.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이 틀렸지 자기는 옳다고 해요.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틀렸지 자기들은 틀리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자기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겁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율법과 할례의 의미를 모르면 표면적 유대인이고!

율법과 할례의 의미를 알면 이면적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으면 육신의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육신은 껍데기이고, 마음이 알맹이라고 했습니다.

 

껍데기는 알맹이를 채울 때 의미가 있습니다.

껍데기의 가치는 알맹이의 여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알맹이를 담고 있으면 껍데기가 가치가 있지만 알맹이가 없으면 껍데기는 무가치 합니다.

불태워질 것들입니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는 속임이 되어요.

사기(詐欺)를 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그러고 있어요.

 

유대인이라는 혈통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고 사기(詐欺)를 치고 있어요.

진짜 하나님의 선민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들인데 말이죠.

그런데 유대인들을 율법을 지키고 육신에 할례를 받은 것을 가지고 자칭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꼴값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은 사기(詐欺)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할례의 의미를 모르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 유대인이나 율법도 모르고 할례를 행하지 않은 이방인이나 다를 바가 없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3장 1절에서 항의합니다.

그럼 유대인들의 유익이 무엇이고!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개뿔도 아니란 말이냐?

 

그러자 바울이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왜? 유익이 없느냐!

수많은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 무엇이 축복입니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얼굴에 흠이 있는 자가 거울을 받은 것과 같아요.

자기 얼굴에 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복이에요.

거울이 없는 세상에서 거울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에요.

자기 꼬라지를 보고 치장을 할 수가 있게 되었잖아요.

그러니 엄청난 유익이지요.

 

율법이 뭐라고 했나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구원자 되신 예수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지요.

이게 엄청난 은혜에요.

 

어째서 율법을 받은 것이 엄청난 특권인가요.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알다시피 인간은 죄인입니다.

딱히 무슨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의 조상을 두어서 죄인이에요.

인간 자체가 죄 덩어리에요.

죄 덩어리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죄에요.

 

그래서 죄인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린 무덤이라는 말은 죽음만 토해낸다는 말이에요.

인간이 착함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죽은 것입니다.

악하다고 하는 것도 죽은 겁니다.

 

인간이 말하는 선(善)도 죽음이고, 악(惡)도 죽음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정의에요.

 

그러나 인간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들의 선악관(善惡觀)으로 판단했어요.

인간들은 인간 기준으로 정해 놓은 착한 일과 악한 일이 있어요.

그래서 착한 일을 하면 착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악한 짓을 하면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고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악이에요.

그러나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게 아니라는 차원에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인간은 이런 인간이라고 알려 줍니다.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상을 제시한 것입니다.

율법으로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이 어떠한 인간인지를 제시하여서 너희들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알려주고자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인간이란? 율법대로 사는 인간이에요.

한마디로 십계명대로 사는 인간이에요.

예수님은 십계명을 간단하게 말했어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하여야 하는가 하면 자기를 버리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건 죄인들에겐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죄인의 본성과 반(反)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위에 말한 것과 반대로 움직여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해요.

 

죄인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이지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버리는 자가 아니에요.

이웃보다 자기를 사랑해요.

자기 사랑을 위하여 이웃을 이용하는 자이지!

이웃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자가 아니에요.

 

내 입에 밥을 넣기 위해서 이웃의 입에 있는 밥을 빼앗아 먹는 자이지!

내 입에 있는 밥을 빼서 이웃의 입에 넣어주는 자가 아니에요.

그러니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이게 인간이에요.

 

자 보세요.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 준 것이라고 했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율법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해서 죄를 짓지 않았으면 율법을 주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죄를 죄 되게 들추어내려고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이 되어요.

그래요.

율법은 죄를 들추어내려고 주어졌어요.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죄가 밝히 드러나야 해요.

죄가 드러나야 율법을 바로 지킨 것이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도리어 죄를 숨기고 있었어요.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야 하는데!

도리어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자기가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틀렸어요.

완전히 헛 다리 짚은 겁니다.

바울은 지금 이걸 틀렸다고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어서 죄를 들추어내서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고자 하셨어요.

세상에 모든 인간들은 율법이 없으니 자기가 죄인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껏 안다고 하여도 양심(良心)으로 알아진 것입니다.

인간의 양심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양심이에요.

인간의 양심은 죽이는 법인 선악의 법으로 판단을 해요.

이 선악의 법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죄라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아는 죄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 아는 죄는 달라요.

이렇게 되면 유대인은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 되어요.

율법을 받은 것이 유익이지요.

이방인들은 알 수 없는 죄관을 가지게 되었잖아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를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알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러니 엄청난 유익이지요.

 

이방인들은 기껏해야 남에게 해코지 한 것을 죄라고 알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잖아요.

이웃에게 해코지 한 것이 죄가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라는 것을 알 수가 있잖아요.

 

이건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죄관이에요.

하나님이 이런 죄관을 유대인에게만 알려 주셨어요.

그러니 유대인이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특혜이고 유익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이 유익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 율법 지킨 것을 의(義)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과 우리 유대인이 뭐가 다르냐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비아냥거릴 것이 아니라 춤을 추어야 할 판이에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개뿔이나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 라고 빈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범죄한 후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죄인은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쫓아냈어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그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어요.

하나님의 뜻을 몰랐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셨어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알려 주셨어요.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다는 것은 만남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겁니다.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축복이고 영광입니까!

 

신명기 4장을 봅시다.

 

신 4:32-40=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었느냐”

 

자 보세요.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면서 읍소합니다.

얘들아~ 너희들이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한번 살펴보아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해 보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 역사를 한번 쭉~ 훑어보라는 겁니다.

 

세상에 어느 민족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산 사람이 있느냐?

어떤 민족이 불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을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을 만나고도 살아 남은 민족이 있느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나타내 보이셨어요.

그런데 죽기는커녕 도리어 버젓이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어요.

이건 놀라운 은혜에요.

죄인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뿐 더러 하나님을 만나고도 산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엄청난 사건이지요.

 

이렇게 되면 온 세상 만국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민족은 오직 이스라엘뿐이에요.

세상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을 일컬어 “제사장 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나라란? 제사장 역할을 하는 나라란 말입니다.

제사장이 어떤 분이가요?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주는 사람이에요.

다른 말로 중보자에요.

이스라엘은 마치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는 비서실장과 같아요.

 

죄인은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요.

하나님은 제사장을 통해서 말씀해 주세요.

그러니 세상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독점적으로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지도와 같은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과 같아요.

어떻게 만나는가 하면 진짜 제사장인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요.

그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열린 셈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인 유대인에게 하나님 말씀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제의 손길을 내민 것이에요.

알다시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이 되었다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의 손길을 내미신 것입니다.

화해의 손을 내 밀었어요.

이건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신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손을 내 민 것은 곧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 해 주겠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너는 이제 용서 받은 자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사람이라는 표시로 율법을 주시고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란? 하나님의 백성 된 표식(標式)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복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을 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바울은 아담의 혈통을 끊어내고 하나님의 혈통으로 거듭나게 해 주었는데 왜? 복이 아니냐!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는 신약적 의미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할례로 거듭나게 했다 함은 이젠 이스라엘을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하심으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어떤 죄로부터 용서받았는가를 알라고 율법을 주셨어요.

유대인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를 드러내고자 주신 것이에요.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음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율법 지켰다는 자랑이 나오면 안 되고 죄 용서받은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해요.

 

이건 지금도 동일해요.

성도에게 성경을 주셨어요.

그럼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가 어떤 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과연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자인지!

아니면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는 자인지!

 

우린 말씀 앞에서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 말씀을 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지금은 성경이 율법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죄인인줄 모르고 있어요.

그런데 유대인에게만 죄인임을 알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느 민족이 너희들같이 이렇게 큰 복을 받았느냐? 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그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까불고 있단 말입니다.

남을 무시하고 시건방을 떨고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라이~! 이 등신들아!

너희는 차라리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보다도 더 못한 놈들이라고 맹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율법에 걸려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율법으로 예수를 만나서 살아나야 하는데 도리어 율법에 걸려서 예수를 죽이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살라고 율법을 주었는데 도리어 그 율법으로 죽었어요.

이건 율법을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틀렸느냐?

그건 아니란 것입니다.

너희들이 등신짓을 해서 망한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 시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넘어진 것은 너희가 잘못해서 넘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실함에는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무식해서 율법에 넘어진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 시킬 수가 있겠느냐! 라고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속된 말로 이방인들은 율법이라는 지도가 없어서 천국에 못 가는데!

너희들은 그 좋은 율법이라는 지도를 갖고도 지옥 가느냐 에요.

이런 황망할 때가 있습니까?

이런 것을 두고 자기 머리 나쁜 것을 생각지 않고 남 탓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식해서 율법을 모른 것을 하나님에게 전가시키면 안 되지요.

그건 억지에요.

 

하나님은 유대인에게 율법으로 예수를 만나 영생을 얻으라고 주셨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유대인 중에 일부가 율법으로 예수를 만났어요.

율법에 의미를 알고 있는 자들이 있었어요.

물론 제자들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안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성공한 것입니다.

모두가 다 예수를 못 만났을 것 같으면 율법이 틀렸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중에서도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은 율법으로 예수님을 만났어요.

 

표면적 유대인들 속에 이면적 유대인들이 있었어요.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 속에 마음에 할례를 행한 자들이 있었다구요.

물론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지만 말이에요.

그러니까 율법이 제 역할을 다 한 것이 되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 틀리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부 무식한 자들이 율법을 오해하여 넘어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다수가 넘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지만 구원을 받았어요.

율법으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옳은 것이 되지요.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은 곧 마귀가 그를 주관하고 있다는 증거에요.

죄인의 특징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죄인을 일컬어 목이 곧은 자라고 합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겁니다.

 

교만이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이러한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어요.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성도는 자기 잘못을 인정해요.

회개한단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기 잘못을 회개하지 않아요.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해요.

항상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켜요.

마귀는 회개가 안 되어요.

죽어도 회개하지 않아요.

 

요한계시록 16장을 봅시다.

 

계 16:8-11=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으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니 9 사람들이 크게 태움에 태워진지라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하며 또 회개하여 영광을 주께 돌리지 아니하더라 10 또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으니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11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더라”

 

보세요.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을 훼방한다고 하지요.

자기 혀를 깨물지언정 회개하지 않고 있지요.

지옥을 일컬어 이빨을 뿌드득 뿌드득 간다고 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밀양(密陽)”이라는 영화를 보면 ‘전도연’이가 자기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고 용서 받았다고 하자 돌아 버린 것과 같아요.

자기가 용서해 주어서 폼 한번 잡아 보려고 면회를 갔는데!

이 사람이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고 용서받았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뚜껑이 열린 겁니다.

 

아니~ 내가 용서해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 할 수가 있느냐!

하나님 자기가 뭔데 살인자를 용서하느냐 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복수를 한다는 의미로 그 영화 속에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장로님을 꼬셔서 간음을 행합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쳐다보고 눈알을 부라리면서 하나님 보았지요!

이빨을 뿌드득 갈아요.

봤지!

나 이런 여자야! 라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덤비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당신을 용서치 않겠다는 것이 죄인의 고집이에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것이에요.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비록 절간에 가서 비는 한이 있어도 예수는 안 믿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회개가 안 되어요.

 

회개란? 예수 믿는 겁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자면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기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걸 회개라고 해요.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회개란?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해요.

탕자처럼 “내가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라고 나오는 것이 회개에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아요.

말씀 앞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요.

 

그리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에 감사해요.

이게 회개해요.

 

암튼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넘어짐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일부가 넘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사라졌다고 할 수 없어요.

 

인간이 잘못해서 넘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유대인들이 넘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더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놈들은 그럼 죄를 더 짓자고 합니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더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 않느냐!

내가 악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드러나게 될 것이 아니냐 라고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음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죄를 짓는 것은 죄가 아니라 의(義)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지요.

지독한 놈들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틀렸다고 하니까!

여기에 반박하는 거예요.

바울아~ 너의 논리대로 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드러나자면 죄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 죄인 역할을 자기들이 하고 있으니 우리더러 잘못했다고 책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째 그럴듯하지요.

 

그러자 바울은 바로 그런 생각이 죄라고 합니다.

끝까지 난 잘했다고 우기면서 나는 죄인 아니라고 우기는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마귀가 장악하고 있으니 잘못했다는 말을 못한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여서 하나님의 판단이 틀린 것으로 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이게 죄에요.

 

우리 안에는 이러한 것이 없나요.

나는 잘못을 순순히 시인하는 편인가요?

아니면 끝까지 핑계를 대는 편인가요?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요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고 있지 않나요?

 

우린 이러한 말씀 앞에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내가 바로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러라고 지금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내 자신을 점검하는 기회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어쩜 이토록 고집이 셉니까? 내가 바로 목이 곧은 자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소서! 예수님의 피로 나를 덮으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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