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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7강. 눈 뜬 소경 (롬 2:17-24)

by coroa 2022. 7. 20.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7강. 눈 뜬 소경 (롬 2:17-24)

롬 2:17-24=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정낙원 목사

 

인간은 선악(善惡)의 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선악의 법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 기준에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하는 일은 항상 정의롭고 선한 것이고 정당하다고 여깁니다.

나는 옳고 항상 남이 틀렸어요.

결국 나 외는 다 틀렸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겠어요.

 

내 말이 진리이고!

내가 하는 행동이 선(善)이고!

내가 하는 일이 옳음입니다.

똑 같이 범죄를 저질러도 내가 하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남이 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탄핵을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는 옳은 자로 남기고자 합니다.

 

만물의 중심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위하여 존재하고, 만물도 나를 위하여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만물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이게 인간의 사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일컬어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이란? 딱히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자기 밖에 모르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죄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KBS 2TV에 나오는 1박 2일이라는 프로그램 중에서 복불복이라는 게임입니다.

 

강호동이가 힘주어 외칩니다.

나만 아니면 돼~ ~ ~

남이야 엄동설한 바깥에서 자다가 얼어 죽든지 말든지 나만 따뜻한 방안에서 자면 됩니다.

남이야 쫄쫄 굶든지 말든지 나만 배 부르면 됩니다.

 

그래서 나만 아니면 돼!~ ~ ~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사람들이 즐깁니다.

결국 유유상종이란 말입니다.

나도 나만 아니면 돼!~ ~ ~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죄인의 모습입니다.

맞습니다.

우린 무슨 일을 하든지 나만 아니면 됩니다.

불행은 나만 아니면 되고 행운은 나만 이어야 합니다.

철저히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중심으로 우린 일평생 남과 나를 판단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두 세 사람만 모여도 네 편 내 편으로 가르고!

무슨 일을 하여도 옳으냐 그르냐 로 판단을 합니다.

이는 자기 안에 선악의 법이 본능적으로 판단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거나 미달하여도 판단을 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옛 말에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욕하면서 자신도 그 욕 먹을 짓을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대인이 그러합니다.

남에게는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도 나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서 판단 기준이 바뀝니다.

쉬운 예로 차를 운전해 보면 내가 바로 유대인들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보행자’ 일 때는 보행자 입장에서 판단하여서 차가 보행자를 비켜 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내가 ‘운전자’ 일 때는 운전자 입장에서 판단하여 보행자가 차를 비켜서 가기를 바래요.

아주 이율배반적이지요.

 

내가 신호 대기를 하다가 신호가 바뀐 줄을 모르고 지체를 하여서 뒤에서 빵빵 거리면 그럴 수도 있지 이 사람아! 그럽니다.

이번엔 반대로 내가 뒤에서 서 있다가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앞 차가 가지 않으면 빵빵 거리면서 뭐하는 거야! 정신을 다른데 팔지 말고 운전에 신경 써야지! 라고 합니다.

완전히 자기 기준이지요.

 

이게 인간들이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이걸 죄 문제로 접근을 해 보면 우리는 죄를 알고도 죄를 지으면서 살아갑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도 그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죄를 몰라서 짓는 것이 아니고 죄인 줄을 뻔히 알고서도 짓는 것이 인간입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 없이 사는 이방인들을 비방하고 참소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이나 인간이 죄인이라는 근본에는 차별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 자체가 인간을 죄인 만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앞에 서면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킨 자도 죄인이고!

율법을 안 지킨 자도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속엔 의(義)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죄인이라는 신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건 마치 선악과를 먹으나 안 먹으나 그 속에 영생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것과 같습니다.

영생은 생명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생명과를 먹지 않으면 선악과를 먹으나 안 먹으나 동일합니다.

 

지금 율법이 그러합니다.

율법 속엔 영생이 없습니다.

영생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율법은 선악과와 같고, 생명과는 예수님과 같습니다.

 

그러니 율법적으로 완전하다고 하여도 예수 안 믿으면 영생 없는 것은 동일합니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 믿으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안 믿으면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한 아담 안에 있기 때문에 차별이 없이 그 놈이 그 놈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인간은 다 한 통속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지킨 자도 죄인이고,

율법 없이 사는 자도 죄인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받은 유대인도 죄인이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도 죄인입니다.

 

유대인은 율법이 너는 죄인이라고 고발을 하고,

이방인은 양심이 너는 죄인이라고 고발을 합니다.

율법이나 양심이나 둘 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고발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은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고, 이방인은 양심으로 죄인으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죄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뭐라고 합니까?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왜?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침을 받지 않느냐고 합니다.

율법 앞에서 먼저 자기 자신이 비췸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 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을 율법의 요구를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하는 겁니다.

이에 바울은 남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왜? 정작 본인에게는 그러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무슨 그런 개 같은 법이 있느냐 에요.

 

남에게는 도적질 말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고 하면서 자기도 그러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먼저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이 적용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나에게 준 것은 나를 겨냥한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 율법으로 정죄를 받고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려고 율법을 주셨어요.

 

그럼 우리는 그 율법으로 내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율법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自覺)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율법을 받은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착각이에요.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율법을 받은 것이 자랑 일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받은 것으로 자랑한다는 것은 어리석음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으로 자랑을 일삼은 유대인들을 소경이고 어리석은 자의 훈도(訓導)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이 시대로 적용하면 우리가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 할 수가 없어요.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는 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그리고 남과 차별을 해요.

난 복음 아는데 당신은 모르지 하면서 말이에요.

 

이걸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복음으로 살지 않으면 복음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동일하다고 합니다.

복음을 준 것은 복음으로 살라고 준 것이지 복음을 알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머리로 암기하고 습득하여서 지식으로 쌓아 두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은 복음으로 살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복음 복음하면서도 복음으로 살라고 하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런 사람에겐 가르쳐 주어도 몰라요.

복음을 받은 사람은 그 복음이 주는 생명으로 살아요.

이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요.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달라요.

믿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사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복음으로 사세요! 라고 하면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아요.

복음이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복음으로 살게 하세요.

그러니 복음에 사로잡힌 사람은 복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달라고 하지 않아요.

 

이건 마치 음식을 먹어본 사람에겐 맛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것과 같아요.

함께 음식을 먹은 사람에게는 음식 맛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잖아요.

야! 맛이다!

그럼 그래 이 집 음식 맛이 참 좋네! 라고 합니다.

이처럼 음식을 먹은 사람은 맛을 남에게 묻지도 않아요.

 

어떤 분들은 십자가 정신으로 사세요! 라고 하니!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요! 라고 물어요.

복음 전하지 말고 복음으로 사세요! 라고 하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요.

나 복음 전하는데요! 라고 합니다.

복음 전한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누가 복음을 모르면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복음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지 양식으로 먹은 것이 아니에요.

복음의 맛을 모르니까 복음으로 모든 사람들을 다 정죄하고 판단하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맛은 정죄와 심판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토해져 나와요.

그 안에서 법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은혜와 긍휼이 나와요.

복음을 맛보지 못하니까 복음 전한다고 하면서 정죄와 심판이 난무하는 법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꼭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과 같아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어요.

그런데 율법을 먹지 못했어요.

먹는다는 말은 제대로 안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알았다고 한다면 남을 판단하지 못해요.

 

율법을 먹었으면 “주여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할 텐데!

율법을 먹지 않고 구경만 하니까 율법으로 온 사람을 다 난도질 하는 것입니다.

나 율법 안다!

너는 모르지!

그러면서 온 세상을 다 정죄하고 하나님처럼 심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생명이에요.

생명을 먹은 사람은 생명을 사랑해요.

생명을 귀히 여기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복음을 먹은 사람에게는 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나와요.

정죄와 심판이 나오지 않아요.

 

그러므로 복음 안다고 하면서 정죄와 심판이 나온다는 것은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앞에서 내 자신이 정죄당하고 심판 당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받음에 감사함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 용서 받음에 대한 감사함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유출이 되어요.

 

그러므로 복음을 먹고 사는 성도는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가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하고 참아주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으로는 복음 복음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니까 살려야 하는 복음으로 도리어 죽이는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모르니까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처럼 나는 저 놈하고 다르지요! 라고 하고 있잖아요.

율법 앞에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가 나와야 하는데 말이죠.

이걸 오늘 본문에서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의 훈도라고 하는 겁니다.

 

훈도(訓導)란? 길잡이란 말입니다.

이런 길잡이를 따라가면 둘 다 구덩이에 빠져요.

어리석은 선생을 따라가니까 자연히 어리석은 짓을 하게 되고 복음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단의 스승을 두면 모두가 이단이 되는 것과 같아요.

어차피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서 그렇게 됩니다.

그 중에서 눈을 뜬 자들은 이단에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자기 백성은 하나님이 빼내 주세요.

 

암튼 오늘 본문은 과거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고 지금 이 시대 복음 안다고 하면서 꼴값을 떨고 있는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시대이고 항상 성경을 받은 사람에게 말하고 있어요.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단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는 내용이 나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내가 모든 성경의 수신자(受信者)에요.

이걸 놓치지 마세요.

그래야 성경이 하나님이 나에게 준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내가 있어야 해요.

 

비판당하는 대상이 나여야 하고!

저주 받는 대상이 바로 나이고!

또한 용서 받고 구원 받는 대상이 바로 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할 때 비로서 성경은 나의 양식이고 나의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로 책망 받는 유대인이 되고!

내가 바로 구원 받는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보세요.

 

그들이 예수를 죽였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靈)”을 부어 주셔서 주여 내가 바로 예수를 죽인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예수를 죽인 죄인으로 만들고서는 그들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靈)”을 부어 주셔서 긍휼이 여기는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 누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으리요!” 라고 탄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을 봅시다.

 

롬 11:32-36=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보세요.

하나님이 유대인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불 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시고서는 율법으로 죄인을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 하지 않고, 율법대로 산다고 자부 하던 자들에게 예수님을 거치는 반석으로 보내서 기어코 살인자로 만들어서 죄인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곤 성령을 보내서 너희가 이 예수를 죽였다고 하자!

어찌할꼬! 탄식하게 만들어서 거기에 하나님의 긍휼이 덮쳐서 용서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이 놀라운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다 담아 낼 수가 없고 측량조차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뉘라서 알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을 꾸미시고!

하나님이 일을 진행하시고!

하나님이 일에 열매까지 다 따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은가요!

이러한 말씀 앞에 꼬꾸라져야 하는데도 놀라지도 않아요.

예레미야의 탄식처럼 마음들이 돌 보다 더 단단해져 있어서 그래요.

말씀이 반석을 쳐서 깨트리는 방망이처럼 다가오는데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어요.

 

어떤 말을 들어야 놀랍니까?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산다고 해야 놀랍니까?

돈벼락을 맞아야 놀랍니까?

그건 놀랄 일이 아니고 가슴을 치면서 곡(哭)을 해야 할 판이에요.

돈 벼락을 맞으면 주여! 어찌하여 이러한 저주를 저에게 주십니까? 라고 말이에요?

물론 꿈 같은 이야기이지만 말이에요.

 

우린 돈 벼락을 맞으면 감당 핳 수가 없어요.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어요.

돈 벼락 맞으면 하나님을 다 떠나요.

떠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돈 벼락을 맞으면 “주여 어찌하여 종을 시험 하시나이까” 라고 탄식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이지만 말이에요.

 

인간은 자기 육신의 안락함을 이길 수 있는 장사가 없어요.

인간은 육신이 안락해지면 그만 그 안락함에 취하여 하나님도 잊고 천국도 잊고 세상에 푹 빠져서 죽어요.

그러므로 돈 벼락 맞는 것이 신앙적으로는 복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감(感)이 좀 잡히십니까?

 

돈 벼락을 맞으면 그 속에서 푹 빠져서 죽어요.

마치 냄비 속에 담겨져 있는 개구리가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데 그 밑에 가스 불이 물을 서서히 데우고 있는데도 모르는 것과 같아져요.

물이 따뜻해져서 온 몸이 나른해지니까.

아! 좋다~ 그러다가 푹 삶겨서 죽어요.

 

인간도 세상 부귀영화에 빠지면 개구리처럼 되어요.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의 증거에요.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이미 모세가 예언을 했어요.

 

신명기 31장을 봅시다.

 

신 31:19-22=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20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한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神)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21 그들이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날에 나는 그들의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22 모세가 당일에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쳤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차 될 일을 알려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나님이 일러준 것을 노래로 지어서 백성들에게 가르칩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부르면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어기고 다른 신(神)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등 따습고 배부르면 하나님을 떠난다는 말입니다.

요즘말로 돈 벼락 맞으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은 이 다른 신(神)을 재물이라고 하였고!

바울은 “배(腹)” 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등 따습고 배 부르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땅에서 먹고 사는 일을 좇아가는 자들을 일컬어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어요.

 

이를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돈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주시지 않았어요.

두 벌 옷도 주지 않고 전대도 가지지 못하게 하였어요.

요즘 말로 의식주(衣食住)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았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에 있겠어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이런 개 같은 경우를 하셨단 말입니다.

그 흔한 땅 한 평도 주지 않았어요.

세상에서 어찌 살라고 말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무슨 놈에 사랑이 이런가요?

 

지금 모세가 꿈이 부풀어 있는 자들에게 아주 악담을 퍼 붓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반드시 배부르면 하나님을 버리고 저주 받게 된다고 말이에요.

내가 불 보듯이 다 안다고 하면서!

내가 상상하는 바를 아노라! 고 노래 부르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럽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는 복음을 주시고!

마귀가 사랑하는 자에게는 돈을 준다고!

마귀는 돈을 주어요.

돈으로 하나님을 잊게 하고 떠나게 만들어요.

 

돈은 일만 악의 뿌리에요.

돈 있으면 맨 날 전쟁하고 돈 없으면 평화로워요.

집안이든 교회이든 절간이든 돈 때문에 시끄러워지고 반목과 갈등이 일어나요.

 

그래서 제가 돈 벼락을 맞으면 곡(哭)을 하고 주여! 이것만은 거두어 주소서! 라고 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진의를 아시겠습니까?

그렇다고 억지로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은 등 따습고 배부름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알아도 육신의 본능은 이기지 못해요.

그러니 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해 달라고 금식하고 철야하며 기도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냥 현재 내게 주신 바를 분복(分福)이라 생각하면서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며 사시란 말입니다.

 

더 나아지고자 하지도 말고!

더 낮아지고자 하지도 말고!

부(富)하면 부(富)한대로 감사하며 살고!

빈(貧)하면 빈(貧)한대로 감사하며 사시란 말입니다.

 

애써 부자(富者)되고자 하지도 말고!

억지로 재산 팔아서 다 교회에 바치려고도 하지 말고 주신바 족한 줄을 알고 사세요.

그냥 처한 환경이 다 하나님의 뜻이려니 하고!

돈에 힘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사세요.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탐심이고 악이에요.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 라고 생각하시고!

여호와는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가난케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아프게도 하시고, 싸매기도 하세요.

그러니 내가 처한 환경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에 이런 환경을 주셨다고 생각하시고 사시면 되어요.

 

바울이 그러잖아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내가 풍부에도 처해 보았고!

가난에도 처해 보았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 바라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므로 넉넉하게 이길 수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가난하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복음 받은 것으로 감사하며 사세요.

복음 속에는 이 세상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들어 있어요.

세상 가치관을 초월하게 하는 힘이 있다구요.

복음 안에 이런 능력이 있어요.

그러니 복음을 맛본 성도는 이 능력으로 살아요.

 

하지만 복음을 맛보지 못하고 지식으로 복음을 알면 그 복음 안다는 것으로 조직을 만들어서 각양의 후원금을 받아 챙기는 식으로 돈 벌이하는 수단으로 이용을 해요.

남에게는 세상 것 버리라고 하면서 자신은 도리어 복음으로 돈 벌이를 한단 말입니다.

꼭 92년도 예수님 재림한다고 하면서 교인들에게는 교회에 재산 바치라고 하고선 자신들은 그 돈으로 빌딩을 산 휴거파 목사들과 같아요.

 

이 시대 누가 이런 짓을 합니까?

바로 복음 복음하고, 십자가 십자가하는 자들이 그래요.

초림 때는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그랬고!

지금은 복음 전한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로 그래요.

 

과거에는 율법이 돈벌이 수단이 되었고!

지금은 십자가가 돈 벌이 수단이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것은 오고 오는 세대 속에 항상 있어 왔어요.

지금도 있어요.

그러니 오늘 본문이 말하는 유대인들과 같지요.

소경인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모순이지요.

눈을 떴으면 소경이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눈 뜬 소경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명히 보아요.

그런데 무얼 보고 있는지를 몰라요.

 

듣기는 들어요.

그런데 그 말에 의미를 몰라요.

말 귀를 못 알아먹는단 말입니다.

 

그러니 안다고 하는 그 앎은 공부하고 학습으로 알아진 지식이고!

복음이 배워서 알아진 지식이다 보니 복음을 아는 것과 그 복음이 삶 속에서 십자가 정신으로서 살아내지는 것이 없는 관념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이원론 사상이라고 하고 영지주의라고 해요.

 

이걸 지난 시간에 설교를 하면서 예증으로 삽입한 내용 중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의 글을 열심히 지키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다는 것으로 말씀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논리는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모세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어디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거명하면서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모세의 글인 율법이라는 모든 글 속에서 예수님을 말하고 있어요.

율법을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율법이라는 지도(地圖)를 하나 주었어요.

그 지도를 따라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도만 가지고 자랑했어요.

그 지도가 지시하는 것을 따라가지 않았어요.

 

나 지도 있다!

너희는 지도가 없지!

나 복음 안다!

넌 모르지!

그러면서 말이에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소경이라고 합니다.

소경이란? 보지 못하는 자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보지 못하는 소경인가 하면 예수를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라는 “한 몸” 을 보내기로 작정을 하셨습니다.

한 몸으로 오실 분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는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백성들은 한 몸으로 오신 분의 희생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창세전 언약입니다.

 

그러니 창세전 언약이라는 복음은 인간의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한 몸 안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한 몸의 행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義)가 주어집니다.

그러니 의(義)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공짜로 주어져요.

 

이를 알리려고 선지자들을 보내서 증거케 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한 몸으로 오실 분의 삶을 선취(先取)적으로 살았어요.

이걸 증인 또는 증거자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시다.

 

히 1:1-3=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이 옛적부터 선지자들로 하여금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인가요?

“한 몸”으로 오실 “하나님의 제물” 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입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 하셨다고 하지요.

이건 삶 속에서 실제화 되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성신(聖神)이 선지자들을 끌고 헌 몸으로 오실 분의 삶을 미리 살도록 간섭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선지자들의 행동 하나 말 하나 하나가 다 계시인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삶으로 장치 오실 “한 몸”을 증거하였어요.

하나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 선지자들을 보내서 한 몸을 위한 정지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글인 구약의 율법을 일컬어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 라고 했습니다.

 

히 10:1절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장차 오는 좋은 일이란? 짐승의 제사를 대신할 한 몸을 말합니다.

짐승의 제사는 한 몸으로 드려지는 제사의 사진과 같아요.

사진은 실물이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에요.

그러니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한 몸이 올 때까지 예표적으로 드려지는 한시적인 제사인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의 글입니다.

그럼 모세의 글인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는 실상이 아니므로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율법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경을 다 말해요.

 

예수님이 그러셨지요.

모세의 글과 시편과 선지자들의 글!

즉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이걸 히브리서에서는 율법이라고 해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으로 드려지는 것은 온전케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장차 온전케 하는 한 몸의 제사를 안내하는 “길라잡이”입니다.

이를 바울은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모세의 글인 율법에서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다만 예수라는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선생 역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한 몸으로 오시는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짐승의 제사는 기뻐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림자이고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알맹이가 아니고 껍데기입니다.

알맹이는 한 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여 이제 내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바라던 그 알맹이인 내가 한 몸으로 왔습니다!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기록을 한 “한 몸”인 “나” 라고 하잖아요.

 

히브리서 10장을 봅시다.

 

히 10:5-7=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애초에 한 몸을 예비하셨어요.

그래서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번제나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창세전에 언약한 한 몸을 원한다는 겁니다.

이 한 몸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을 해 놓았어요.

여기서 두루마리 책은 모세의 글을 말합니다.

 

모세의 글은 한 몸이신 예수님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모세의 글을 통해서 예수를 만났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가지고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눈을 뜬 소경인 것입니다.

 

오호라 통재라!

이를 어찌 하여야 할까요?

야속하지만 이 환상을 깨트려 주어야지요.

 

그래서 바울도 유대인들의 이러한 환상을 깨트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 비늘을 제거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전에 바울 자신도 율법 아래 있을 때 이 비늘에 가려서 천지 분간을 못하고 까불락 대다가 예수님에게 된통 혼이 났잖아요.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유대인들이 율법이 뭔지도 모르면서 선생 노릇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문자만 붙잡고 있었어요.

그 문자를 지킨다고 싸웠어요.

 

문자는 그 의미를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의 기호(記號)에요.

문자는 나타난 껍데기란 말입니다.

그러니 문자를 붙잡으면 안 되어요.

그럼 문자가 담고 있는 내용을 놓쳐버립니다.

 

문자는 사진과 같아요.

사진은 실체가 아니고 허상이에요.

사진을 가지고 실상을 만나야 해요.

실상이 왔는데도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어요.

 

사진은 실상이 오기까지 필요한 것이고 실상이 오면 폐기 되어야 합니다.

실상이 왔는데도 사진이 돌아다니면 이젠 실상을 가리는 것이 되고 말아요.

그럼 악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실상을 앞에 두고 사진을 들고서 실상을 가리는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문자가 담고 있는 내용을 보지 못하였어요.

이걸 말라기 선지자는 “절기의 똥” 이라고 했습니다.

똥이란? 양분이 없는 찌꺼기란 뜻입니다.

 

이걸 예레미야는 “겨” 라고 했어요.

겨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에요.

겨는 훅~ 불면 날아가 버려요.

잔뜩 먹은 것 같아도 금방 푹 꺼져요.

힘을 주지 못해요.

 

율법 지킴은 항상 곤고해요.

배가 고파요.

어제까지 지키다가도 오늘 안 지키면 죽어요.

그러니 율법 아래에서는 항상 지켜야지만 산다는 것에 쫓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아무리 화려하게 지켰다고 하여도 오늘 안 지키면 겨처럼 훅하고 날아가요.

어제의 공로는 어제 한 날로 끝이에요.

 

그러니 율법으로 드려지는 제사는 항상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드려야 해요.

이걸 상번제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는 장차 오는 한 몸으로 단번에 드려지는 제사로 거룩함을 얻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짐승의 제사는 온전케 하는 제사가 아니고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제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으로 드려지는 짐승의 제사를 지내면서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짐승의 제사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이걸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라고 합니다.

 

짐승의 제사는 껍데기이고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알맹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짐승의 제사만 드렸지 그 속에 의(義)와 인(仁)과 신(信)이 없었어요.

그러니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만 드린 겁니다.

똥만 드린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붙잡고 있는 율법 지킴이 그러합니다.

아무도 양분이 없는 똥이고 겨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도 영생을 얻지 못하고 고민하고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어쩜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과 똑 같아요.

이 시대 교인들에게 물어 보세요.

지식적으로는 다 알아요.

말로는 예수님도 울고 갈 정도로 잘 알아요.

 

예수도 알고!

천국도 알고!

복음도 알아요.

새 언약도 알아요.

그러나 그 앎이 삶에서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해요.

 

세상에 신천지에서도 새 언약을 말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젠 새 언약을 말한다고 하여도 다 믿을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하기사 신천지가 아니라도 예수의 피를 팔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 인간도 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암튼 십자가를 말하면서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은 전부가 동일해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자기 유익을 구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그가 아는 것이 지식이고 추상이라서 그래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반 복음적으로 관념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마르다 처럼 나중에 죽어서 부활하여 가는 그런 천국 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는 것 따로! 삶 따로! 관념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지난 토요일 아침 일찍 롯데 호텔에서 극동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10주년 기념 조찬 예배 모임에 참석을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의 권유 때문입니다.

작년에도 부탁을 했는데 그 때는 거절을 하여서 이번에는 거절하기가 미안해서 참석하겠다고 해서 함께 갔습니다.

이 분은 극동 방송에서 설교를 하는 분인데 혼자 가기 멋 적으니 같이 가서 그냥 아침만 먹고 오자고 부탁을 하길래 그럼 함께 가자고 하여 참석을 했습니다.

 

방송국에서 이러한 모임을 가지게 된 동기는 6천 평이나 되는 극동방송국 사옥을 짓는데 헌금을 하라는 것입니다.

벽돌 1장에 천 원이고 10장에 만원이랍니다.

1평 헌금이 400만원이라고 해요.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여서 돈을 훔쳐 내기 위한 자리에요.

그래서 행사의 목적을 후원하는 분들을 초청해서 감사패도 주고 박수 쳐주고 격려를 하는데 이건 사람들의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것이에요.

 

후원을 하는 분들이 이름을 호명(呼名)하면서 치켜세우는 것은 인간들의 영웅 심리를 이용하는 미끼에요.

칭찬을 마약처럼 주입하고서 기분을 몽롱하게 붕~ 띄워 놓고는 앞으로 더 많은 후원을 해 달라고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박수치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후원을 하겠다고 작정 약정서를 써서 내더라고요.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극동방송에서 하는 말이 복음을 위해서 선교 헌금을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아요.

그저 “복음 전하자” 는 것을 전해요.

 

복음 전하자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예수가 복음이에요.

이 사람들은 예수를 팔아서 사옥을 짓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는 다만 사옥을 짓는데 필요한 수단일 뿐이에요.

교인들 수중에 돈을 뜯어내기 위하여 예수는 잠시 차용한 것뿐이에요.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예수 이야기를 하여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예수를 이야기하지 않아요. 예수를 몰라요.

하나님만 알아요.

그러니까 말 끝마다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하지 예수라는 말은 귀를 씻고 들어볼래야 들어 볼 수가 없어요.

설교하는 목사도 마찬가지이고 기도하는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어떻게 그렇게 예수를 쏙 빼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관심사가 전부 세상이에요.

그러니 누가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모두가 하는 레퍼토리가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여출일구(如出一口)하게 온통 하나님께 충성하여 복을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믿으면 죽어요.

지옥에 가요.

예수를 믿어야 해요.

예수 믿어야 천국에 갑니다.

하나님 믿다가 망한 자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만 보았지 예수를 보지 못하였어요.

그러니 입만 열면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즉 여호와 여호와라고 하였어요.

그 여호와가 예수님인줄 몰랐어요.

이걸 눈 뜬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극동방송에서는 “복음 전하자” 를 전하고 있어요.

예수라는 복음을 전해야지!

“복음 전하자” 를 전하면 안 되어요.

“복음 전하자” 가 복음이 아니고 예수가 복음이에요.

예수를 전해야지요.

“예수님의 피” 를 전해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 이용해서 바벨 탑 같은 사옥 지으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전하시란 말이에요.

 

“전도 하자” 가 복음이 아니에요.

복음은 예수님이에요.

그러니 복음 전하자 라고 말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세요.

 

이런 말을 하면 반드시 그래 당신 말대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사옥을 짓자고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 제가 그럽니다.

예수는 6천 평 짜리 사옥 없어도 전해져요.

 

제가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극동 방송국은 복음 전하자는 방송국이지 복음을 전하는 방송국이 아니에요.

복음 전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하는 곳이지 복음을 증거하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니 예수이야기를 못하는 것입니다.

제 느낌이 그렇다는 겁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모르는데 어찌 예수를 전한단 말입니까?

예수를 알고 십자가 도를 안다고 하면 6천 평 사옥을 짓는데 선교 헌금이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의 주머니에 있는 돈을 뜯어내려고 수천만 원씩 들여서 호텔에서 그 지랄을 하지 않아요.

수천만 원씩 들여서라도 남는 장사가 되니까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이걸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짓을 예수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이 하였어요.

하나님을 빙자하여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데 이용하였어요.

율법으로 배부름을 채웠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강도라고 한 것입니다.

 

역사는 돌고 돌아 늘 그 자리인 것입니다.

옛날에 하던 짓을 지금도 하고 있어요.

옛날에는 율법으로 하였다고 하면 지금은 십자가로 하고 있어요.

십자가가 또 다른 율법이 되었어요.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핑계 삼아 돈 벌이 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도 유대인들을 욕하면서 유대인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눈뜬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은 곧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인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나에게 경고하는 있음을 알아야 해요.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마디로 마치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고 있는 형국입니다.

자기도 욕을 하면서 남에게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데도 남의 눈에 티를 보고 나무라는 것과 같아요.

 

유대인들이 왜? 이런 짓을 할까요?

이는 자신들의 율법 지킴이라는 행위 때문입니다.

차라리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면 좋을 뻔 하였어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율법 지킴이 곧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권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남을 억누르는 힘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자신도 율법으로 판단을 받아야 하는데 말이죠.

유대인들은 자신이 율법에 판단을 받기 보다는 이방인과 철저히 차별을 하였습니다.

 

자신들은 복을 받은 선민이고 이방인은 저주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자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마치 판관(判官)이라도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판단 받아야 할 자가 남을 판단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에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경고 합니다.

너희들이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이방인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율법대로 사는 것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또 오해 할까봐 집고 넘아 갑니다.

율법대로 산다는 것은 율법의 지향하는 것을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율법대로 사는 것이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곧 율법이 지향하는 예수를 믿어야 의롭다 인정을 받는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서 의롭다 인정받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율법을 지키고 산 바리새인들은 의롭다 인정을 받았어야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새끼라고 했어요.

지옥으로 가라고 했다니까요.

그러니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주 한 것입니다.

뭔 말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중요한 것은 죄인이 과연 율법대로 살 수가 있느냐 입니다.

율법대로 살 수가 없다고 한다면 율법을 받으나 안 받으나 똑 같아요.

그러니 율법을 받은 것을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예로 들어서 도적질과 간음과 우상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남에게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우상숭배 하지 말라! 고 가르치면서 도적질을 하고 간음하고 우상숭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도적질과 간음과 우상숭배는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도적질과 간음과 우상에 대한 개념과는 달라요.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도적질을 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어요.

분명히 안 했다고요.

그러니 도적질 안하고, 간음 안하고, 우상숭배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말씀대로 산 것이 맞지요.

 

그러나 바울의 증거는 달라요.

인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도적놈이고 간음자이고 우상숭배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증거는 율법이 도적질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너희가 도적놈이고 간음자이고 우상숭배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이 살고자 하니 우상 숭배하는 것이고!

하나님 이름을 팔아서 백성들 주머니를 강탈하니 도적놈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음을 받은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 간음한 자인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정의한 인간이에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이런 자들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도적이고 창기라고 합니다.

이걸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알다시피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 진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를 드러내려고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곧 너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리려고 율법을 주었어요.

 

에덴동산에는 율법이 없었어요.

율법은 에덴동산 바깥 세상에 주어졌어요.

죄가 없는 곳에는 법이 필요가 없어요.

 

법이란? 죄를 드러내고자 만들어진 것이에요.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율법을 준 것은 그들 속에 죄를 끄집어내고자 주신 것이에요.

율법은 죄를 끄집어내고자 하는 미끼란 말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오해 하였어요.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죄인으로 취급하였어요.

 

그리하여 같은 동족이라고 하여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개 같은 이방인처럼 취급을 하면서 상종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상종하지 않던 세리와 창기들이 누구입니까?

같은 동족들이고 유대인들이었어요.

 

그들이 비록 세리 짓을 하고 창기 짓을 하여도 유대인이라구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어요.

율법대로 산 자들만 유대인으로 인정했어요.

그래서 항상 율법 지킴을 근거로 사람을 나누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까?

유대인은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아브라함 후손이에요.

창기라고 하여도 아브라함 후손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요.

그럼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유대인 대접을 받아야 해요.

 

그러나 세리와 창기는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하기까지 하였어요.

이렇게 되면 유대인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행위로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행위로 유대인으로 남기도 하고 절려 나가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을 땐 율법이 없었어요.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30년 후에 주어졌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초림으로 오셨을 때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근거로 유대인이다 아니다 를 구분하는 것은 틀린 것이에요.

그건 바리새인들이 일방적으로 정한 기준이에요.

 

바리새인들은 지금 자기들이 정한 기준으로 하나님이 정한 기준을 깨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와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대하고 계세요.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어요.

그냥 은혜로운 부르심으로 되었어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은혜를 법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도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서도 말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엉터리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착각은 유대인들은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죄란? 인간이 어떤 존재인줄 모르고 말씀을 지키겠다고 한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 주제를 알라고 주셨어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는 본성(本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율법을 말하면서 율법이 금하는 짓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실제로는 율법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을 업신여기고 있어요.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지키지 못한다고 한다면 율법을 받은 자나 못 받은 자나 동일해요.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선 율법을 받은 것의 의인이 아니고 율법대로 사는 것이라야 의롭다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이라는 미끼를 유대인들에게 던지니까 확 물어 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물었는가 하면 율법으로 율법을 금하는 일을 하면서 물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 귀담아 들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완벽한지 입이 쩍 벌어질 지경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놀라셔야 해요.

잘 이해하셔야 해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근거로 죽였어요.

율법엔 살인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럼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 살인하지 말아야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로부터 율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살인을 하고 말았어요.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건 율법 자체가 자기모순에 걸려들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어요.

살인하지 말라고 해 놓고선 율법을 어기면 죽이라고 했다구요.

이건 모순이에요.

 

그러니 율법대로 살면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율법을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고!

율법을 안 지켜도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죄인으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아주 기가 막힌 하나님의 지혜에요.

 

생각해 보세요.

율법을 누구에게 주었나요?

죄인에게 주었어요.

죄인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안 되어요.

순종이 안 되는 자에게 순종 하라고 합니다.

이게 모순이에요.

 

그러므로 율법 자체가 죄인에게는 모순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살인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 살인하지 말라!

간음 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할 수 밖에 없는 자에게 도적질 하지마!

그래 놓고선 율법대로 안 살면 죽여라!

 

어쩌란 말인가요?

율법대로 하면 죽이지 말아야 하고!

율법대로 하면 죽여야 합니다.

모순이지요.

 

예수님이 여기에 희생 제물로 등장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예수를 죽였어요.

유대인들 눈에는 예수님이 율법을 어기는 것으로 보였어요.

그래서 율법대로 율법을 어기는 자는 죽여라 는 그 율법에 순종한다고 예수를 죽였어요.

그런데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말았어요.

오호라~

이를 어찌하오리까!

 

율법을 어기는 예수를 안 죽이면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죽이라고 한 율법을 어기게 되고!

예수를 죽이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예수는 살려주어도 율법을 어기게 되고!

예수를 죽여도 율법을 어기게 되어 있어요.

이건 빼고 박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이게 율법이에요.

율법에 얼씬 거리면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율법을 주었다는 것은 모든 입을 막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고자 함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서 율법에 가두이게 된 것입니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었어요.

아주 의미심장하지요.

 

이게 하나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에요.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반드시 우리는 난 죄인입니다! 라고 항복하고 두 손을 들게 되어 있어요.

말씀대로 살아도 죄인으로 드러나고 말씀대로 안 살아도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의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 날 수가 없게 하고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올무에요.

아직까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항복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담고 있는 그 비밀을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경이에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겠다고 덤벼들면 이미 하나님이 처 놓은 덫에 걸려든 겁니다.

죄인은 반드시 하나님이 던진 미끼를 물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것으로 서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개혁주의 성화주의자들이 여기에 걸려 든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들은 꿈에도 몰라요.

자신들이 지금 유대인들처럼 소경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성화한다는 것으로 유대인들처럼 남을 판단하고 자고하고 자만하고 자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율법(하나님 말씀 지킴)을 붙잡으면 반드시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율법 속에는 생명이 나오지 않고!

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지켜도 죄인이고!

안 지켜도 죄인이에요.

 

그럼 율법 앞에 어찌 하여야 합니까?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여야지요.

“남을 판단 할 것이 아니라 주여 내가 누굴 판단하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아닙니다!”

“내 코가 석자입니다!”

“날 살려 주세요!” 라고 하여야지요.

 

율법이 던져지면 예수 안으로 도망을 쳐야 되어요.

그래야 율법을 바로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으로 도망치라고 율법을 주었어요.

예수 안에 들어가야 율법을 지킨 자가 된다구요.

그런데 유대인들을 예수 안으로 도망치기는커녕 예수를 죽이고 말았어요.

오호라 통재라!

이런 어리석음이 있나요.

 

그래서 하나님이 에라이~ 이 등신들아!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모독을 당한다고 합니다.

너희들은 나를 욕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지금도 선무당처럼 지식으로 복음을 아는 자들이 사람을 잡고 있어요.

어쭙잖은 놈들이 꼭 복음을 가리고 있어요.

그러니 바울이 율법을 지키거나 안 지킨 것을 가지고 따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 다 틀렸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할례고 지랄이고 떠들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할례의 의미를 모르면 헛것이란 말입니다.

할례에 대하여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아야 하니 오늘은 생략합니다.

 

오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악하고 마칩시다.

 

율법은 죄를 고발하기 위하여 주셨어요.

그래서 율법대로 살아보라는 명령법으로 주셨어요.

너희들이 과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인지 없는 자인지 주제를 한번 파악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 받은 것을 자랑하였지 실제로는 그 율법대로 온전하게 살지를 못하였어요.

그러면서 율법 없는 이방인을 업신여겼어요.

바울은 이걸 소경 짓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못 살면서 다른 사람을 보고 못 산다고 하면 안 되지요.

 

유대인들의 착각은 율법을 받은 것이 의가 되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모든 민족들 속에서 오직 이스라엘만 율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들고 다니면서도 율법에 의미를 몰랐어요.

이는 마치 이 시대 많은 교인들이 성경을 들고 다니면서 성경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지도와 같습니다.

율법은 영생 얻는 길을 알게 하는 지도입니다.

 

지도는 목적지를 찾아가도록 주신 것이지, 지도를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지도를 가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를 만나지 못했어요.

 

유대인들은 율법 받은 것만 자랑하였지 정작 율법으로 예수님을 배척했어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동일합니다.

쉬운 말로 유대인들은 좋은 참고서를 가지고도 시험은 빵점 맞은 것과 같아요.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자랑하는 유대인에게 헛 똑똑이라며 “바보들의 선생”이라고 비웃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늘 돌고 돌아요.

이러한 유대인들의 오류를 지금 이 시대 성도들이 답습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모든 초점을 말씀을 지키는 쪽으로 맞추고 있습니다.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엔 관심이 없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러다보니 말씀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종교적인 행함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신앙의 초점이 자신의 행함에 맞추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행함으로 남게 되면 예수의 피로 주어지는 죄사함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사라지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남아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구원받음에 대한 감사와 찬송은 사라지고 탄식만 난무하게 되어요.

신앙이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찬양하며 예수님의 업적을 자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잘못된 가르침으로 예수 믿음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고 말았어요.

예수님의 피로 죄를 용서받음에 대한 기쁨은 없고 지킬 것만 남아있어요.

세리와 같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교회가 도리어 힘자랑하는 강도의 굴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왕 노릇되어야 할 교회가 인간의 행함만 자랑되어지고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자신을 반듯하게 교정시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얻어진 구원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앙의 포카스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심에 약속을 믿는 것에 맞추어져 있어야 해요.

 

예수님이 하신 약속이란?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에요.

 

마귀는 항상 인간이 말씀을 지키라고 미혹을 합니다.

마귀는 말씀을 지킴으로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허사로 만들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예수님의 피에서만 영생의 능력이 나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그 피를 가리고자 합니다.

 

이성적으로 들으면 성도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새 언약 하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 것만 받으시겠다는 말이에요.

이건 역설적으로 인간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들과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 하고만 상대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 때문에 모독을 당하시고 계세요.

지금도 성화하려는 교인들 때문에 모독당하고 계세요.

 

암튼 오늘 본문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에요.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눈뜬 소경 짓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남을 판단하면 무조건 유대인과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복음 안다는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나면 안 되고 감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해요.

구약시대 출애굽을 할 때 죽음에 천사들이 들이 닥칩니다.

그런데 집에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으면 넘어 가고 피 바름이 없으면 죽였습니다.

 

그럼 피 바름을 가지고 피 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깔 볼 것이 아니라 감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야~ 나도 저들처럼 죽임 당하여야 하는데!

어쩌자고 나에겐 이런 피 바름에 은혜를 주셨는가!

감사하여야지요.

 

그러라고 피 바름의 비밀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주여 고맙습니다! 라고 하여야지요.

그게 피 바름에 은혜를 입은 자가 토하여 내어야 할 것입니다.

이걸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讚美)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친미의 제사를 드리라고 피 바름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찬미의 제사는 드리지 않고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어요.

정작 감사하여야 하는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하는 짓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발 남 신경 쓰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세요.

그리고 감사하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누구이며! 내가 어떤 은혜와 사랑을 입고 있는지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어리석은 자였고 소경이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이제 눈을 뜨게 해 주셨으니 눈 뜬 자로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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