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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16강. 모두가 한 통속인 인간 (롬 2:12-16)

by coroa 2022. 7. 1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6강. 모두가 한 통속인 인간 (롬 2:12-16)

롬 2:12-16= “무릇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정낙원 목사

 

오늘은 모든 인간은 한 통속이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한 통속이란? 모두가 다 똑같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어요.

그러므로 “너” 나 “나” 나 모두 다 아담 안에서 난 똑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의 지구 안에서 살고 있어요.

영역적인 입장에서 보면 한 지구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똑 같은 자들입니다.

땅에서는 “네” 나라와 “내” 나라가 구분이 되지만 하늘에서 보면 “네” 나라나 “내” 나라나 같은 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다 한 통속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들 세상을 죄 아래 가두어진 세상이라고 합니다.

의(義)에 나라인 하늘나라에서 보면 이 세상은 죄(罪)의 나라에요.

온통 죄가 안개처럼 땅을 뒤 덮고 있어요.

그러므로 땅에 있는 모든 자는 다 죄라는 안개에 뒤 덮여 있는 죄인인 것입니다.



땅에서 난 자는 죄라는 구조(構造)를 벗어 날 수가 없어요.

모두가 죄에 가두어져 있어요.

그래서 차별이 없는 한 통속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땅에서 난 자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이방인들과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어째서 너희들은 이방인과 다르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까?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거예요.



그도 그럴 만합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만 율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차별성을 두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의인이고!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그럴듯하지요.

한 쪽은 율법을 받았고, 한 쪽은 안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율법을 받은 놈이나 율법을 받지 않은 놈이나 하나님 앞에선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 아래서 태어났기 때문에 다 같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죄인이란? 딱히 어떤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죄 아래서 출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죄 아래서 출생을 하였으면 율법을 받은 자나 받지 않은 자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하지 말란 말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죄인 아니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죄인임을 들추어내려고 주었어요.



율법에 기능이 뭔가요?

죄를 고발하는 기능이잖아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두기 위함이잖아요.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어요.



죄와 율법은 한 세트에요.

죄가 있는 곳에 율법이 주어졌어요.

죄가 없으면 율법을 주실 필요가 없어요.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졌다는 말은 너희는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죄 아래서 난 자들에게는 율법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라는 것으로 죄인이다 아니다 를 판단 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 동일한 인간들인데 한쪽은 율법을 받았고 한 쪽은 안 받았을 뿐입니다.

왜? 한 쪽은 주었고 한 쪽은 안 주었을까요?

그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무슨 의도인가 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가지고 모든 인간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을 온 인류의 샘플로 뽑아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속에 표면적(表面的) 유대인과 이면적(裏面的) 유대인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靈的) 유대인과 육적(肉的) 유대인이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온 세상을 가지고 말하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다릅니다.

유대인은 선택 받은 자들이고!

이방인은 선택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의 샘플로서 뽑혀진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유대인과 이방인은 차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대표해서 표본으로 뽑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온 인류의 샘플로서 뽑혀진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있는 자도 망하고, 율법 없는 자도 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 없이 망한 자가 있고, 율법 있이 망한 자가 있다고 하지요.

이 말을 그대로 직역하면 모든 인간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았다고 해서 의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죄인이고 죽은 자에요.



그러므로 율법이 있어도 망하고, 율법이 없어도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아도 죄인이고 안 받아도 죄인이란 말입니다.

결국 인간은 죄인으로서 망할 존재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율법이 있다고 하자!

이방인은 양심이 있잖아!

율법이나 양심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우째서 같다고 할까요?

이는 죄를 고발하는 기능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없는 자는 양심이 증거가 되어서 죄를 고발하고 있고,

율법을 받은 자는 율법이 죄를 고발을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이 율법을 지킨다거나 또는 이방인이 양심상 거리낌이 없이 살았다고 하여도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율법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개 같은 자라고 경멸하고 죄인이라고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비판하는 근거를 하나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라는 행위를 가지고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선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고 율법을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너희는 죄인이다”

“너희는 모두 죽었다” 라는 것을 고발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죄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대로 살아서 인간다워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미 틀린 놈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에 비추어 보아서 너희가 이렇게 틀린 자들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를 말해 주었어요.



요한복음 5장을 봅시다.



요 5:39-47=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고 한다면 나를 믿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신앙이 틀렸음을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괴변(怪變)이고 청천벽력(靑天霹靂)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할까요?

이는 모세가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글도 믿지 아니 하는데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글이란 율법을 말합니다.



그럼 위에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율법을 받고도 예수 안 믿기는 이방인과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너희는 율법을 받고도 나를 믿지 않고 있지 않잖느냐 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은 유대인들로서는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 라고 따질 수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믿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눈만 뜨면 율법대로 산다고 살았어요.

그러니 예수님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 할 수가 없지요.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같은 존재에요.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고 따랐습니다.

유대교는 구약 성경을 경전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모세 오경을 으뜸으로 취급을 합니다.

그러니 모세의 말을 안 믿는다는 것은 상상 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여도 예수님은 너희는 모세의 말도 믿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일방적인 말씀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정의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무슨 근거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다고 할까요?

무슨 일이든지 대화가 되려면 상대가 납득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유대인들로서는 도무지 납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신주단지처럼 지키고 있는 모세의 율법을 예수님은 안 지켰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물론 유대인들이 율법에 특심한 줄을 압니다.

그럼에도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으리라는 말은 곧 모세의 율법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쉬운 말로 모세의 글을 쫓아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것은 곧 모세의 글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건 사도 바울 자신이 경험한 일이에요.

바울은 율법에 특심하였는데 그 율법으로 예수를 죽였여요.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배척을 했어요.

율법을 따라 갔는데 예수가 나온 것이 아니고 마귀가 나왔어요.



그래서 모세의 글을 가지고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때를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고 했어요.

모세의 글을 믿었는데 마귀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글을 믿지 않은 것이 되지요.



이렇게 되면 율법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다만 예수를 만났느냐 못 만났느냐만 남습니다.

예수를 만났으면 모세의 말을 믿은 것이 되고!

예수를 못 만났으면 모세의 글을 안 믿은 것이 됩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만났으면 율법을 지킨 것이 되고 예수를 못 만났으면 율법을 안 지킨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나 예수님의 논리가 그래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처럼 율법 가지고 예수를 못 만났으면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위에 요한복음의 말씀을 보면 유대인도 모세의 글을 인용하고 있고, 예수님도 모세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성경을 믿었고, 예수님도 성경을 믿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성경이란 구약 성경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도 모세 오경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을 지칭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유대인은 서로가 모세를 가지고 자기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서로 자기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도 서로 모세에 대하여 안다고 하고 있잖아요.



위에 말씀을 직역하면 유대인들의 주장은 우리는 율법대로 살았기 때문에 “모세를 믿는다” 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주장은 너희는 나를 몰라보니까 “너희는 모세를 믿지 않았다” 고 합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하면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믿지 않고 죽이려는 것을 보니 모세의 글도 믿지 않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걸 신약 식으로도 적용 할 수가 있습니다.

즉 너희가 바울의 말을 믿었다고 한다면 예수를 믿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말과도 같습니다.

바울의 말이나 모세의 말은 동일합니다.

둘 다 예수를 만나게 하는 “길잡이”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율법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어요.

모든 성경은 예수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에요.

성경의 끝에 가면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나 말씀대로 살았어요” 가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똑같아요.

모세의 글이든 바울의 글이든 예수를 만나야지 그 글을 지키면 안 되어요.



무슨 말인고 하니 모든 말씀을 통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의를 붙잡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성경이 주어진 목적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모든 성경은 나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모세의 글을 읽어도 예수가 나오고 바울의 글을 읽어도 예수가 나옵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예수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를 만나고 있는가요?

아니면 성화가 나오는 가요?

바울의 글을 읽고 성화나 개혁이 나오면 안 되어요.

그건 바울이 말하는 의도가 아니에요.

만약에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다면 유대인이나 우리나 동일합니다.



그럼 어떨까요?

유대인들과 우리는 다를까요?

아니면 유대인들과 같은 짓을 우리도 하고 있을까요?

애석하게도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 말씀 말씀하면서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하였지 예수의 의(義)로 나아가지 않아요.

그러니 말씀대로 살았다는 자랑만 난무하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틀린 것이지요.

결국 유대인이나 우리는 말씀을 가지고 헛다리짚은 것에는 동일한 자들입니다.



유대인들도 열심히 하나님을 말씀대로 살았는데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였듯이!

우리도 열심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는데 예수님으로부터 나는 너희를 모른다는 말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확대 해석하여서 적용을 한다면 우리나 유대인이나 동일한 것이 되고 또한 더 나아가서 우리나 이방인이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이 됩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우린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너희가 언제 나를 사랑 했느냐고 말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러면 참으로 난감 합니다.

마치 정치인들에게 청탁을 하려고 뇌물을 주었는데 돈을 준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에 보면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에이~ 이 더러운 도적놈들아!” “너희들은 내 것을 도적질 했다” 고 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아니~ 하나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 것을 도적질 했습니까?”
“우린 한 번도 십일조를 떼어 먹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 백성들은 단 한 번도 십일조를 떼어 먹은 적이 없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분명히 백성들은 꼬박 꼬박 하나님께 드렸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받았다고 합니다.

배달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어찌 된 영문입니까?



이는 곧 십일조의 의미를 모르고 드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라는 그릇에다가 의와 인과 신을 담으라고 했습니다.

의와 인과 신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의와 인과 신은 빼 버리고 십일조라는 그릇만 드렸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안 받았다고 하고 백성들은 드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고부간에 갈등이 심한 시 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밥 얻어먹는 것과 같아요.

며느리는 분명히 밥상을 차려드렸어요.

그러나 시어머니는 안 먹었다고 해요.

왜냐하면! 시 어머니가 아들 집에 간 것은 밥 얻어먹으러 간 것이 아니고 시 어머니 대접을 받고자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밥상만 홀라당 차려주고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선 난 시어머니에게 밥상 차려주었다고 합니다.

물론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그러나 그건 밥상이 아니라 거지 동냥만도 못한 모멸이에요.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난 십일조 안 받았다고 하는 말씀이 그런 뜻이에요.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했느냐!

돈 속에 너희들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달라고 했지!

이 말뜻을 못 알아먹으면 백날 십일조 해도 소용없어요.

하나님은 안 받았다고 합니다.



이사야 1장을 보세요.



사 1:10-15=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찌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소돔 고모라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야! 이 저주받은 새끼들아! 그러는 거에요.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런 말을 하겠어요.

이 더러운 제물을 다시는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성전 마당만 밟는다고 합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다시는 성전에도 오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성전 문을 확 닫아 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이걸 이 시대 버전으로 해석해 봅시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언제 예수를 믿었느냐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 우리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가 언제 내 말씀대로 살았느냐고 합니다.

우린 분명히 예수를 믿었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유대인들과 예수님 간에 나누는 대화와 같습니다.

뭐가 문제일까요?

이 문제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태복음 7장 21-23절의 말씀과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그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좇아내고 갖가지 교회에 봉사와 충성과 헌금을 하였습니다 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난 너희들을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게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니다! 너희는 예수를 안 믿었다고 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믿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 열심히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합니다.



지옥을 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라고 할까요?

이는 속았기 때문입니다.

찰떡 같이 믿었는데 아닌 겁니다.

그러니 분해서 이를 뿌드득 뿌드득 갈게 되는 것입니다.



속았기 때문에 이를 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몸 바쳐서 사랑 했는데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니 이가 갈리는 것입니다.

중간에 어떤 놈이 내 열심과 충성과 사랑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우리의 열심과 충성을 가로채는 이 놈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엉터리로 만드는 그 놈을 찾아내서 능지처참을 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속지 않습니다.



다시 요한복음을 더 상고해 봅시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영생 얻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오지 않느냐 입니다.

영생을 얻고자 성경을 상고 하였다면 나를 믿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영생을 얻고자 했다면 예수님을 만나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상고하였지만 예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을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이는 예수님의 말씀과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을 해석하는 데에 어떤 갭(차이)이 있다는 뜻입니다.

뭔가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지(感知)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문자 그대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말하는 액면 그대로를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살인을 하지 않았고!

도적질을 하지 말라고 하여서 도적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해서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두가 모세의 글이 시킨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주장은 모세의 이러한 모든 글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니 언제 모세가 예수에 대하여 증거를 했습니까?

모세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고!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였고!

간음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대로 행했어요.

살인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고!

도적질하지 않았어요.

그게 모세의 글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의외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장대로라고 한다면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했고!

모세의 글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가 죄인인줄 알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도리어 예수님에게 넌 어디서 성경을 배웠기에 그런 말을 하느냐?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정통적인 해석을 한다고 믿었어요.

틀릴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글대로 라면 유대인들이 말이 맞아요.

예수님이 틀렸어요.

예수님이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하지만 결과를 보면 유대인이 틀렸고 예수님이 맞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손을 들어 주셨단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서 우리도 넘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역사는 거울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의 자화상이에요.

그럼 우리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우리를 향한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우리도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보았듯이 오늘날 성도들도 그와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이해하게 되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같은 해석을 하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은 신앙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세는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증거 했는가요?

어떻게 예수 믿으라고 했나요?

알다시피 모세는 율법 속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구약 성경 어디에도 예수를 믿으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럼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예수님이 무엇을 근거로 모세의 글을 믿었더면 나를 믿었으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위에 언급한 39절을 봅시다.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모세의 글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모세의 글인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는 그 “내게” 라는 “나” 는 누구입니까?

“나” 란 예수님입니다.



그럼 언제 모세가 예수님을 증거했나요?

어떻게 증거 했는가요?

없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인 율법은 보면서도 “예수”는 보지 못했어요.



율법은 지켰는데 그 속에서 예수를 보지 못했어요.

모세는 율법 속에 예수를 담아 놓았는데 유대인은 그 예수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게 비밀입니다.

육의 한계입니다.



육이란? 문자입니다.

문자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기호(記號)입니다.

그러니 문자라는 기호를 통해서 그 뜻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글은 안다는 것은 그 글이 담고 있는 의미를 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 아이가 엄마의 말을 안 들어서 엄마가 화가 나서 “니 맘대로 해!” 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럼 아이는 엄마의 말을 분석하여야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



엄마의 표정과 억양과 감정을 통해서 그 말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엄마의 표정과 감정과 억양을 통하여서 “니 맘대로 해!” 라는 말을 읽어야 합니다.

그럼 엄마의 마음은 역설적으로 “니 맘대로 하지 말라” 는 뜻입니다.

엄마 말을 들으란 말입니다.



아! 내가 엄마 말을 안 들으니까!

엄마가 화가 나서 니 맘대로 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럼 엄마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이제부터 “엄마 말씀 잘 들을게요!” 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니 맘대로 해!” 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하신 “니 맘대로 해!” 라는 말은 엄마의 마음을 전달하는 하나의 기호(記號)인 것입니다.



모세의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하나의 기호입니다.

모세가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을 해하지 말라!



이러한 말들은 이러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는 이런 자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받았어요.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려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장차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보내시고자 함입니다.



모세는 너희는 이런 죄인이라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그 메시야가 오면 너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모세의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모세는 율법을 통해서 예수를 만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문자만 보았지 그 문자 속에 담고 있는 내용을 읽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의 글을 보면서도 모세가 지목하는 영생을 주는 “그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글 속에 예수를 담아 놓았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소경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자신들이 소경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너무도 모세의 말씀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소경이라고 하자 도리어 성질을 냈어요.



이러면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본인들이 다 알고 본다고 하는데서야 어찌 가르칠 수 있단 말입니까?

안다고 하는 자들에겐 가르쳐 주면 욕을 먹어요.



지금도 동일합니다.

바울의 글이 모세의 글처럼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길잡이입니다.

바울의 글을 읽으면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유대인들처럼 문자대로 지키고자 하면 예수를 놓쳐버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덤비면 안 되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이전에 내가 과연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는 인간이냐를 먼저 아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제사보다 긍휼을 배워야한단 말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자기 주제를 알고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긍휼을 구하는 것이에요.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너희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도리어 사랑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바빴습니다.

지금 우리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사랑 하겠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을 잘못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있었지만 그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들 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만 있었지 자기들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러다 보니까 자기들의 사랑을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한 결과가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10장을 봅시다.



롬 9:30-10: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잘못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를 주시려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들 의가 있으니 거절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자랑한 의가 바로 모세의 글을 지킨 것이에요.



모세는 너희는 의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율법을 주었는데 이스라엘을 율법으로 의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와서 의를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한 것입니다.



이걸 사랑으로 말해 봅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랑은 다 더러운 옷이요!

죄인들에게나 유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너희는 너희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으로 온 나를 영접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글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모세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이 없음을 알아야 하는데 믿고자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바빴지 하나님 사랑을 받을 겨를이 없어요.



교회마다 강단에서 목사들은 왜? 믿지 않느냐고 닦달을 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믿겠다고 아우성입니다.

믿음은 우리더러 믿으라고 강요할 것이 아니 우리 스스로는 예수를 믿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를 지내라고 할 것이 아니라 긍휼을 구하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바울도 그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 지킴을 가지고 이방인과 차별을 하고 있으니 그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 지킴 속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안 믿으면 율법을 지킨 놈이나 안 지킨 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은 애초부터 지킴에 목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인간은 율법을 지키나 안 지키나 상관없이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안 짓고와 상관없이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죄인에게는 죄를 짓는다 안 짓는 다는 말은 의미가 없어요.

죄를 지어도 죄인이고 안 지어도 죄인이에요.

이는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에게서 죄다 아니다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범죄한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출생을 합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죄인입니다.



유대인도 죄인이고, 이방인도 죄인입니다.

율법을 지킨 자도 죄인이고, 안 지킨 자도 죄인입니다.

인간의 행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죄인입니다.



인간들의 본성은 선악의 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타고난 선악의 법으로 선과 악을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두 세 사람만 모이면 인간의 조건으로 차등을 두게 되고 그 차등으로 서열화 합니다.



인간의 조건으로 큰 자와 작은 자로 나누고 착한 자와 악한 자로 나누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으로 이방인과 차별의식이 강했어요.

요즘 말로 일등국민 이등국민으로 나누는 것처럼 사람을 차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인간의 외적인 조건이나 어떤 공로를 따라 취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처사에 누가 반발을 할까요?



바로 말씀대로 살았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요즘 말로 복음 안다고 나대는 인간들입니다.

자기에게 뭔가 남다른 것이 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유대인들입니다.

자기 조건으로 나오는 자들이 유대교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스스로 율법을 받았기 때문에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은 율법을 지키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이 시대 나는 복음 아니까 구원 받았어!

그러는 것과 같아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자랑 할 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 복음 안다고 하면서 온갖 자랑을 다 하고 다녀요.

날을 깔보면서 말이에요.

이건 복음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에요.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용납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율법도 모르는 개 같은 이방인들과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거룩한 백성들을 동일시하느냐고 반발을 했어요.

그러나 성경의 증거를 보면 유대인들의 이러한 주장도 율법에 비추어 보면 틀렸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정신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말로 복음을 아는 것이 의인이 아니고 복음대로 사는 것이 의인이란 말입니다.

십자가를 안다고 의인이 아니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자가 의인이란 말입니다.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없으면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지식이에요.

그건 사기(詐欺)에요.



이 시대 이런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복음으로 조폭 집단처럼 조직을 키우고 있어요.

목사라고 하는 자들이 복음 핑계대고 교회라는 조폭집단을 만들어서 보스 노릇하고 있어요.

무슨 말인지 귀 담아 들으세요.



그럼 어떻게 율법의 정신대로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율법을 정의하기를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남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건 피조물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피조물은 자기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에요.

죄인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라고 합니다.

사랑이 뭐냐?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타(利他)적인 것이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율법을 받았습니다.

즉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럼 그렇게 살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와 반대로 살았어요.

율법 지킨 것을 가지고 남을 깔보고 업신여기고 폄훼했어요.

그것도 율법을 지킨 것으로 말이에요.

이 얼마나 율법 정신과 모순입니까?



율법 정신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인데 유대인들은 도리어 이와 반하는 것으로 남을 깔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지요.

도리어 율법을 지키지 않음이 됩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자신들이 잘못을 몰라요.



진짜 율법정신을 안다고 하면 긍휼이 나와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야 한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에겐 긍휼의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어요.

그것도 율법을 지켰다는 것 때문에 말이에요.



이런 것을 일컬어 차라리 율법을 몰랐다면 더 좋았을 뻔 하였다고 합니다.

차라리 율법을 몰랐으면 남을 판단이나 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 꼴랑 율법을 지켰다는 것 때문에 망하고 만 것입니다.

그것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꼴불견이겠어요.



예수님이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한다고 했나요?

율법의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어김없이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완벽하게 지키려면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율법대로 산 삶이에요.



그럼 누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없어요.

이렇게 되면 예수님만 율법의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어김없이 지키신 분이 됩니다.



율법은 죄 없는 예수님만 지킬 수가 있어요.

우리 인간들은 지킬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들은 도리어 율법 앞에서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하여야 해요.



스스로 “나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서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야 옳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율법 몇 가지를 지킨 것을 가지고 온갖 교만을 다 떨었어요.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일을 지금 우리가 그대로 하고 있어요.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남을 업신여기고 주접을 떨고 있잖아요.

다른 사람들을 보고선 복음을 아네! 모르네! 하면서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하는 짓거리들을 옛날에 우리 조상들도 그 짓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조상에 그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역사는 우리를 보여주는 자화상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깨닫고 고치는 것이 아니고 그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이게 우리의 실존입니다.

인간의 한계에요.



인간은 율법을 받은 자나 안 받은 자나 동일해요.

그 놈이 그 놈이에요.

율법을 받은 놈은 율법을 받아서 망하고!

율법을 안 받은 놈은 율법을 안 받아서 망해요.



어째서 율법을 받은 자나 율법을 받지 않은 자나 동일할까요?

이는 율법이나 인간의 양심이나 동일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율법을 받은 자에게는 율법이 죄를 고발하지만!

율법을 받지 않은 자들에겐 양심이 죄를 고발한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양심을 동일한 의미로 말하고 있어요.



어째서 양심이 율법과 같은 것입니까?

그야 양심이나 율법 둘 다 죄를 고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째서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율법을 주었습니까?

그냥 이방인들처럼 양심으로 죄를 고발하면 되잖아요.



그럼에도 유대인들에겐 율법을 주어서 죄를 고발하게 하시고 이방인에게는 양심으로 죄를 고발하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자기 백성과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의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달리 대우하고 계신 것입니다.



양심이 율법 역할을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알다시피 율법이란? 옳고 그름을 판단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 이건 맞다! 틀리다! 라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모든 인간에게 있어요.

유대인에게도 있고 이방인에게도 있어요.

인간은 선악의 법 아래서 태어납니다.



선악의 법이란? 선과 악을 판단하는 법을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생래적으로 양심상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본능이에요.



무엇을 어떻게 본능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까?

그건 자기 유익을 위하여 남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게 유익이 되느냐! 아니면 손해가 되느냐! 를 알아요.

무슨 일을 하여도 셈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셈법이 곧 율법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정의를 남을 사랑하는 사랑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우리 양심이 이걸 즉각적으로 감지해요.

내가 지금 남에게 유익을 주는지, 아니면 손해를 끼치는지 알아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율법의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어떤 일을 가지고 이리 저리 생각하고 주판알을 퉁기듯이 계산기를 두들기면서 자기 안에서 변명이나 송사를 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행동을 변명하고 송사를 해요.

그러니 인간들은 어떤 일을 하여도 스스로의 선악의 법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도 결국 양심의 법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난 율법 모르는데요!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양심이 율법 역할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슨 일을 앞두고 고민을 하게 되어요.

할까! 말까! 고민을 한다는 것은 곧 양심이 송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고 나면 스스로 변명을 하잖아요.

난 그럴 수밖에 없었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어! 라고 말이에요.



결국 자기 유익을 구하는 쪽으로 변명을 하고 송사를 하잖아요.

이게 인간이에요.

그러니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선악(善惡) 간에 자기가 행한 것으로 판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양심대로 살아도 죄인이고!

율법을 지켜도 죄인이에요.

예수 안 믿으면 다 죄인이에요.



그러니 인간의 외적 조건으로 따지지 말고 우리 모두가 죄인이니 “우리 예수 믿읍시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나도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습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죄 사함을 내가 따 낸 것이 아니니까 자랑 할 것이 없지요.

감사하여야지요.



신앙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감사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음 모른다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야!~ 나는 어쩌자고 예수가 믿어지는가 감사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심오한 것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현란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개과천선(改過遷善)하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주님을 사랑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덮쳐오지 않으면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게 덮쳐온 하나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너와 내가 다를 수 없고 우린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서만 살아가는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처럼 난 너희와 달라 라고 꼴값을 떨지 말고!

주여! 오늘도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진 그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주 받아야 마땅한 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있음에 감사케 하옵소서. 항상 용서 받았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시고 사람과 사람 간에 차별을 두지 말게 하시고 긍휼을 입은 자로서 긍휼을 베풀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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