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11강.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 (롬 1:18-19)

by coroa 2022. 4. 9.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강.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 (롬 1:18-19)

-.정낙원 목사

 

롬 1:18-1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있습니다.

그런데 의인은 그 의(義)를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의(義)는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야지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게 이 의(義)가 믿어지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이 믿어지게 해 주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믿음에는 우리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보는 믿음도 하나님이 주셔야 하고!

설령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안다고 하여도 그 메시야를 내 마음으로 믿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라야만 믿을 수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게 해 주시고!

입으로 시인하여 믿는 것도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힐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지요.

우린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끌려 갈 뿐입니다.

 

참 쉽지요.

이게 성도의 신앙생활에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잘 이해가 되면 신앙생활이 쉽고 가볍지만 이 원리가 이해되지 않으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영적(靈的)인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적인 일에는 철저히 하나님에 의하여 종속이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는 일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알아서 능동적(能動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해 주시면 질질 끌려갈 수 밖에 없는 수동적(受動的)입니다.

이걸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으라고 하면 예~ 하고 믿고!

믿지 마!

그러면 우리는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믿음에 현 주소이고 예수 믿기입니다.

이를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께서” 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되지만 예수를 안 믿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 안 믿는 것이 우리 마음대로 된다고 했으면 전 지금 여기에 이런 말씀을 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예수를 믿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모두가 지금까지 예수 믿어 오면서 수없이 절망하고 후회하고 아파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곁에 있었으면 멱살집이를 해도 수십 번은 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를 믿는 일에는 내 뜻에 반(反)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이 꺾일 때마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납니다.

 

우린 신앙의 이름으로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 하지 상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 영웅이 되고 싶어 하고!

자기 이름을 내고 싶어 하고!

세상에서 신해진미를 먹어가면서 화려하게 잘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머리가 되고 싶지 꼬리가 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바램과는 반대로 인도하십니다.

자꾸만 꼬리가 되도록 밀어낸단 말입니다.

뭔가 좀 해보려고 하면 틀어지게 만들고!

뭔가 좀 된다 싶으면 허물어지게 해 버립니다.

그러니 입만 열면 감사보다는 하나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라고 나오느니 한숨이고 원망입니다.

 

여러분은 안 그런지 몰라도 전 여기까지 그렇게 끌려 왔어요.

원치 않는 길로 미끄러져 왔단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만약에 내 믿음을 관리를 했을 것 같으면 예수를 벌써 패대기쳤을 겁니다.

믿음을 갖다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내가 이럴 줄 알고 믿음을 나에게 맡기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관리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 믿음을 관리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내 던지지도 못하고 지금 여기 이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난 된 것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한 바울의 그 말 같지 않은 고백이 아멘으로 나의 고백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이고 은혜인가요.

 

저는 이 은혜를 깨닫고 얼마나 감사하고 안심이 되었는지 몰라요.

아! 나는 창세전에 이미 예수 믿을 수밖에 없는 팔자로 태어났는가 보다!

그러니 난 천국에 갈 수 밖에 없구나!

참으로 놀랍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0장은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불러내서 우리로 데리고 간다는 비유입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도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목자가 앞서서 양의 이름을 부르면 그곳이 푸른 초장이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든지 졸졸 따라가게 됩니다.

 

난(모든 성도) 예수를 몰랐는데!

예수에 대하여 관심조차 없었는데!

어느 날 예수가 믿어지게 되었고 지금 이 자리 여기까지 왔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뭔가에 홀린 것처럼 끌려 왔습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우리)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주셨어요.

옜다! 여기 영생 있다 받으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린 예수님이 던져 주신 그 영생을 공짜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주셨어요.

 

그리곤 그 영생을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영원히 멸망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이 하나님 손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그 누구라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잖아요.

 

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난 가만히 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예수를 믿어지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그 믿음을 하나님이 관리 하십니다.

왜? 관리를 할까요?

우리가 지켜 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예를 들어봅시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와서 야! 내가 너를 복에 조상 만들어 줄게! 그럽니다.

아브라함은 졸지에 복에 조상이 되고 말았어요.

자기의 원함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다고 해도 변하지 않아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을 했으니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지켜내세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잘못해서 그 약속이 안 지켜지면 하나님만 사기꾼이 되잖아요.

그러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하나님이 반드시 믿게 해서 믿음에 조상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런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란 말입니다.

예수가 믿어진다고 하면 염려를 붙들어 매세요.

하나님이 그 믿음을 반드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배짱으로 산 사람이 바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입니다.

 

딤후 4:17-18=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고전 1: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보세요.

“주께서” 바울의 곁에 서서 지킨다고 하지요.

“주께서” 사자의 입에서 건진다고 하지요.

“주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서 천국에 넉넉히 집어넣어 준다고 하시잖아요.

“주께서”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고 하잖아요.

 

이 모든 것을 “주께서” 하세요.

우리 힘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이 다 하신다고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웃기는지 아세요.

사자 입에 집어넣었다!

빼냈다! 한다는 겁니다.

이건 병 주고 약 주는 꼴입니다.

죽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천당과 지옥으로 오르내리게 한단 말입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아주 경끼하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우리를 청룡열차에 태워 까무러치게 해 놓고선 주님은 밑에서 깔깔거리고 웃고 계시는 것과 같아요.

말이 좋아 곁에서 지키는 것이지 이건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아나는 일입니다.

온탕에 들어갔다! 냉탕에 들어갔다! 하는 일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에요.

바울의 고백처럼 우겨쌈을 당하는 일이고!

꺼꾸러뜨림을 당하는 일이고!

날마다 욕 먹는 일이고!

만물의 찌끼처럼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일입니다.

 

이런 수욕을 당하면서 우리가 어찌 예수를 믿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에 우리 더러 예수를 믿을지 말지 선택하라고 했으면 우린 이미 옛날에 믿음에 파선하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의지나 각오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일에는 우린 무기력해요.

주께서 해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우리 믿음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금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곁에서 지켜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 놓으면 한 시간도 안 되어서 믿음을 팔아먹을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곁에 서서 믿음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만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 감당 할 수가 없는 힘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셔야지만 지켜지는 그런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믿음을 받은 성도를 보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그래요.

야! 정낙원이는 좋겠다!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이 잠시라도 떠나지 않고 항상 그 곁에서 지켜주실까!

부럽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날 이렇게 들들 볶으려면 믿음이고 뭐고 다 가져 가세요! 라고 하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 줄 아세요.

우린 눈만 뜨면 철없는 이이들같이 부모에게 장난감 안 사준다고 징징거립니다.

 

이러려면 왜? 날 낳았느냐고 지랄을 떨어요.

장난감 안 사주면 밥 안 먹겠다고 하고 있어요.

웃어야 할까요!

울어야 할까요!

우리가 그렇게 철이 없다니까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우리가 이럴 줄 알고 하나님하고 예수님 두 분이서 약속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빼 놓고 말이에요.

예수님이 약속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금도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못하고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베드로를 밀 까불듯이 하여도 예수님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도 뻔뻔스럽게 천국에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린 베드로가 받은 그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꼬라지는 이래도 말이에요.

꼬라지가 이래도 의인이에요.

예수님에게 찜 당했기 때문에 의인입니다.

 

의인이란? 내가 잘나서 의인이 아니고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의인인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역설적 논리로 믿음을 받았으니 의인이고, 창세전에 선택을 입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믿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꼬라지와 상관없이 믿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내 꼬라지를 보지 마세요.

내 꼬라지가 어떻든 믿음을 받았으면 의인입니다.

우린 이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부어지는가 하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쏟아진다고 합니다.

불의(不義)란? 의(義)에 반댓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부어지는가 하면 의(義)가 없는 자에게 부어진다고 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에게 부어진다고 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불의(不義)로 의(義)를 막는 자라는 말입니다.

진리란?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것은 인간의 의(義)로 예수님의 의(義)를 막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럼 의(義)가 무엇이고 불의(不義)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요.

 

불의(不義)란? 의(義)가 아니란 말입니다.

쉬운 말로 인간도 아닌 것이 인간 행세를 한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꼴값을 떤다고 합니다.

죄가 뭔 줄 아세요.

꼴값 떠는 거에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까분단 말입니다.

의(義)도 아닌 것을 가지고 의로운 척 한단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義)는 예수님 안에만 있습니다.

앞서 말했잖아요.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복음은 예수님이니까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는 것이지요.

 

그럼 불의란? 예수님 밖을 말합니다.

예수님 바깥은 몽땅 불의가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 안 믿는 것이 불의에요.

죄란? 예수 안 믿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무 감상적으로 쉽게 이해를 하는데 이건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만 인정하고 나머진 다 가짜라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에요.

인간으로 말하면 예수만 인간이고 난 인간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도 예수 앞에선 가짜란 말입니다.

내가 가짜란 말은 난 죽어도 싸다는 말입니다.

자아(自我)가 있는 인간이 어떻게 이 말에 동의를 하겠어요.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을 받지 않으면 이러한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아야 예~ 저는 가짜고 예수님만 진짜입니다!

난 없어도 되는 인간입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됩니다!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결국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것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에 의(義)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아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걸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새 언약이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 함은 옛 언약을 배경으로 하는 말입니다.

옛 언약은 행위 언약이지만 새 언약은 은혜 언약입니다.

 

은혜란 행위의 반대어입니다.

행위가 인간에게 속한 것이라면 은혜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은 믿을 일이지 우리가 어찌 할 일이 아닙니다.

 

옛 언약 하에선 율법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었지만,

새 언약 하에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란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우리가 우리 인생을 반듯하게 흠 없이 책임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 인생을 책임질만한 위인들이 못 되어요.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다짐을 하고 각오를 하여도 공염불에 불과해요.

우리는 우리에게 의지가 있다고 해서 그것을 결과로 도출해 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이 주어지고!

예수를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고!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걸 한마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 복음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義)란? 옳음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라고 했으니 하나님 앞에 옳음이 됩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만 옳은 자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옳은 자란? 참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예수님만 참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예수 이외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짐승입니다.

예수님만 사람이고 나머진 모두가 짐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人子)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를 말합니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범죄하였어요.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면 짐승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죄인은 사람이라 하지 않고 짐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 아래서 태어 난 자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인 것입니다.

이분법으로 말하면 “죄인을 짐승”이라 하고, “의인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짐승의 혼(魂)은 땅으로 내려가고 사람의 혼(魂)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이는 짐승은 지옥으로 가고 사람은 천국으로 간다는 말입니다.

죄인은 지옥으로 갑니다.

그러니 땅에서 난 자들은 전부 땅 감옥인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엔 사람이 없어요.

사람은 하늘에 있어요.

 

죄가 없는 하늘로서 내려온 자만 인자(人子) 즉 진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서 오셨으니 예수님만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진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만 옳다고 인정한단 말입니다.

 

이걸 의인이라고 합니다.

의인에게서 나오는 행함을 의(義)라고 해요.

의인만 천국으로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인을 믿는 자도 의인으로 간주를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예수가 믿어지는 믿음을 주어서 믿게 해 주셨습니다.

 

아주 간단해요.

하늘로서 온 사람을 믿으면 하늘로 가고!

땅에서 난 자를 믿으면 땅으로 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땅에서 난 자를 아비라 하지 말고 선생이라 하지 말라고 했어요.

너희 아비는 하늘에 있고 너희 선생은 그리스도라고 했단 말입니다.

 

땅에서 난 자는 믿을 것이 못 되어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라요.

인간의 본성은 카멜레온처럼 자기 유익을 따라서 수시로 가면을 바꿔 써요.

지금은 간이라도 빼줄 것 같다가도 언제 등 뒤에서 칼을 꽂을지 몰라요.

목사도 마찬가지이고 교인도 마찬가지에요.

 

지금 은혜 받았다고 방방 뛰다가도 언제 소금 맞은 지렁이처럼 축 늘어질지 몰라요.

그러니 지금 은혜 받았다고 방방 뛰는 것을 신앙 있음으로 믿었다가 언제 실망할지 모르고 배신당할지 몰라요.

이건 목사나 교인이나 동일해요.

그래서 목사도 믿지 말고 교인도 믿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실족당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미리 말씀해 주셨잖아요.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선 죄인입니다.

죄인이라 함은 그 속에 의(義)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 속에 의(義)가 없다 함은 인간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영웅호걸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석가모니나 공자나 마호메트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 조금의 교훈을 얻기 위하여 본받을 선생은 될 수는 있어도 구원자는 아닙니다.

이들의 청렴한 삶이나 고매한 성품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의(義)가 나오지 않아요.

그러므로 이들을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그 인간의 인품과 사상이 아무리 고결하고 심오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습니다.

땅에서 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부패로 돌아가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죄인이란 증거가 바로 이 사람들 모두가 죽어 무덤에 갇혀 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사망 권세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에 가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상을 진리라고 믿어선 안 됩니다.

이들의 가르침을 구원의 도로 삼으면 안 되어요.

다만 이들의 가르침은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조금의 유익은 얻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땅에 없고 하늘에만 있습니다.

진리는 하늘에서 온 분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나온 것을 진리라 하지 않고 철학이라고 합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는 곳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 진리가 됩니다.

땅은 변해요.

땅에서 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철학이에요.

 

철학(哲學)이란? 인간을 연구하고 분석한 것을 학문으로 집대성 한 것입니다.

철학으로 인간의 심리나 사고는 알 수가 있어도 구원에 이르는 길은 알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길은 인간 세상 밖에서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 자체가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몽땅 죄라는 우물에 빠져 있습니다.

독자적으로 그 우물을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우물 바깥에 있는 사람에 의하여서만 건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을 돕는 자! 즉 보혜사라고 합니다.

예수님만이 돕는 자에요.

보혜사입니다.

 

땅에서 난 자는 돕는 자가 될 수 없어요.

땅에서 난 자는 같이 죄라는 우물에 빠져 있어요.

그러니 우물 밖으로 빼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도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어찌 돕는단 말입니까.

돕겠다고 하는 놈은 사기꾼이에요.

 

이걸 우리의 신앙에 적용해 봅니다.

우리의 구원은 땅에서 하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늘에서 이끌어 주어야 땅을 벗어 날수가 있어요.

그러니 우리의 구원자는 하늘에 계신 분이라야만 합니다.

 

은혜니, 구원이니, 축복이니, 은사니, 영생이니, 천국이니 하는 영적인 것들은 전부 하늘로부터 거저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따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몰지각한 목사들이 이러한 것들을 주겠다고 합니다.

자기 말을 들으면 은혜도 받고, 축복도 받고, 은사도 받고, 구원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미혹당하면 목사를 추종하게 되어요.

그 목사에게서 무슨 영험한 능력이라도 나오는 줄 안단 말입니다.

이건 미혹이고 사기에요.

 

하늘에 것들은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에요.

영적인 일은 땅에 속한 목사가 어찌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목사가 유능하고 천사의 말을 해도 하나님께서 각자의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소귀에 경 읽기에요.

 

목사가 교인의 마음을 뚫고 들어가서 은혜를 줄 수 없단 말입니다.

마음을 뚫고 들어가는 것은 마음을 지으신 분만이 하실 수가 있어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느 목사에게 가면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목사는 보혜사가 아니에요.

돕는 자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를 돕는 자는 예수님이고 성령이세요.

성도 안에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 하세요.

 

목사의 본분은 난 가짜이고 진짜는 예수님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교인들 눈에 목사가 보이면 안 되어요.

목사는 교인들에게 예수만 소개하고 자신은 교인들 눈에서 사라져 주어야 해요.

교인들 눈에는 예수님만 보여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붙잡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교인들 눈에 예수님 이외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비켜주어야 해요.

이게 목사가 할 일입니다.

 

목사가 신령하면 안 되어요.

예수님이 신령하여야 합니다.

목사가 신령하게 되면 교인들이 목사를 믿어요.

목사에게 무슨 영험한 능력이라도 나오는 줄 알고 목사를 추종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교주에요.

 

하나님께서 왜? 바울을 비참한 모습으로 끌고 다니신 줄 아세요.

사도들을 하나같이 망한 자로 살게 하셨는지 아세요.

사람들이 사도들을 믿고 따를까봐서입니다.

죽은 자도 살리고 남에 병을 고치는 바울이 왜? 자기 병은 고치지 못하였는가요?

왜? 하나님은 바울을 약하게 하셨는가요?이 모두가 사람들로 하여금 바울을 바라보지 말고 연약한 바울을 들어 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은 누가 신기한 능력을 행하면 그를 신(神)으로 추대하고자 해요.

이게 죄인들이 신관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독사에 물린 사람을 고쳐주고 병자를 고쳐주자 그곳의 원주민들이 바울을 신(神)이라고 하면서 제사를 지내고자 했어요.

 

이 때 바울은 큰일 날 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이 병은 내가 고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쳐 주었으니 날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고 했어요.

베드로와 요한도 오순절 성령을 받고 앉은뱅이를 고치자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니 얼른 그들이 시선을 예수에게 돌리잖아요.

 

그러니 진짜 바울과 베드로처럼 성령을 받은 목사들은 교인들의 시선을 자기에게 쏠리지 않도록 극도로 경계를 하게 되어요.

하지만 가짜들은 자기가 예수의 자리에 앉아서 교인들을 자기 수하(手下) 부리듯이 합니다.

주종관계를 형성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자기를 추종하게 만든단 말입니다.

이게 거짓 선지자들이에요.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더 좋아해요.

그러니 추종하는 세력들을 몰고 다니면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붙잡힌 목사들은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가지치기를 해 주세요.

우리 스스로 이러한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 주는 겁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게 만들고 배신당하게 만들어요.

이 모두가 사람을 의지하고자 말고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게 주님의 사랑이에요.

 

목사는 중매쟁이이지 신랑이 아니에요.

신랑은 예수님입니다.

교인들이 문제가 생기면 자기들이 예수님하고 지지고 볶고 하게 하여야지 목사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식으로 비춰지면 안 된단 말입니다.

 

기도를 해도 모르게 하여야 해요.

내가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떠벌리면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럼 그 사람은 주님을 안 보고 목사를 바라본다니까요.

그렇게 되면 그 교인을 죽이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로 비유를 합니다.

전 과거에 기도를 참 많이 했어요.

많이 할 정도가 아니라 엄청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자연히 가족이나 친척들이나 주변에 지인들이 기도 부탁을 하는 겁니다.

이 때는 나도 은근히 내가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을 떠벌리고 다녔어요.

나는 당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내나 자식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아빠 기도해 주세요.

그러면 이상하게 응답이 나타나요.

문제가 해결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만 생기면 제가 마치 하나님 보좌를 움직이는 해결사라도 되는냥 행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은혜를 받고 복음을 알고 나니 그 동안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었다는 것이 깨달아진 겁니다.

무당 노릇을 했다는 것이 깨달아지더라고요.

제가 마치 압살롬처럼 다윗에게로 가는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결국 내가 압살롬처럼 반역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내가 혹여라도 집안이나 일가친척의 문제로 여보 당신이 기도 좀 해 보세요! 라고하면 내가 무당이냐고 버럭 화를 냅니다.

문제가 있으면 자기들이 하나님하고 지지고 볶고 하면서 해결을 보아야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은 죽었느냐고 하면서 왜? 나에게 부탁을 하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이건 기도하기 싫고 안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눈을 주께로 돌리고자 함입니다.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에요.

 

물론 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들이 알게는 하지 않아요.

제 의도는 자신들이 하나님과 부대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깊이 알아가라는 뜻이에요.

내가 그들과 하나님 중간에 끼여서 행여라도 그들의 눈에서 예수님을 멀어지게 하고 가릴까봐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은 제가 의도적으로 교인들 의식에서 자꾸만 빠져 나가도록 해요.

아내나 자식들에게도 아빠가 목사라는 것이 프리미엄이 되지 않도록 해요.

예수님이 보여야지 제가 보이면 안 되니까요.

이건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에요.

기도는 하되 기도한다는 티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세요.

 

그 누구도 예수를 가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중보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린 다 땅에서 났어요.

하늘에서 오신 분만이 중보자가 될 수가 있어요.

그러므로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만이 중보자이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늘로서 오셨기 때문에 하늘로 끌어당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 할 수 있으려면 죄 바깥에 있어야 합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영역에 속한 분이라야만 죄인을 구출하고 견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 세상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 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에겐 의인이 없습니다.

의인은 세상 바깥에 있습니다.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만 의인입니다.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간들이 여기에 동의하건 말건!

인간들이 믿거나 말거나!

성경의 증거는 예수님만 의인이고!

예수님만 의인이기 때문에 예수님만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을 한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이 그르다고 하는 것을 그르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일한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판단만 옳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람이 망하는 이유를 단 하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없어서 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임하는가요?

하나님의 의(義)가 없는 자에게 임합니다.

 

의(義)에 반대말은 불의(不義)라고 했습니다.

불의란? 의(義)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의(義)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義)가 없어요.

우리 인간들이 말하는 의(義)가 아니에요.

 

불의(不義)란? 어원적으로 말하면 “아니 불(不)”에 “옳을 의(義)”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의(義)가 아니란 말입니다.

왜? 의(義)가 아니라고 할까요?

죄인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의(義)가 아니에요.

죄에요.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기 행함에도 옳음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의 착함을 의(義)라고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선 의(義)가 아닌데도 의(義)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망한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킨 것을 의(義)라고 여겼습니다.

의(義)라고 가르쳤어요.

백성들을 그 가르침을 진리처럼 따랐습니다.

 

이게 바로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그건 의(義)가 아니거든!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에서 나온 그 어떤 착함도 의(義)라고 인정하지 않거든 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럼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도리어 화를 냅니다.

유대인들이 발끈합니다.

왜? 우리의 정성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왜? 우리의 아름다운 착한 삶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느냐고 신경질을 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렇게 되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의(義)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열심이어서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義)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건 의(義)가 아니고 똥 덩어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의(義)가 아니라 불의(不義)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까지 의(義)라고 여긴 모든 것을 배설물이라고 버려버렸습니다.

심지어 자기 가문이나 학식이나 선민사상까지도 빌어먹을 것이라고 했어요.

 

의(義)란?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의(義)란? 하나님의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의(義)에 상태입니다.

처음 창조가 된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처음 창조 된 세상이 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이는 창조된 만물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에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흔적을 기뻐하십니다.

창조가 된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정성과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기쁨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흔적만 고스란히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흔적이 손상 되지 않고 지켜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온 정성을 들여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산물입니다.

피조물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담겨져 있어요.

그래서 만물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지렁이는 기어 다니도록 만들었습니다.

메뚜기는 뛰도록 만들었습니다.

새는 하늘을 날도록 만들었습니다.

고기는 바다를 헤엄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우주 만물은 마치 큰 캔버스에 그림 하나 하나를 채워놓은 것과 같습니다.

아! 여기엔 새를 그려야겠다!

아! 여기엔 고기를 그려야겠다!

이쪽엔 메뜨기를 그려야겠구나!

 

하늘엔 새가 날고!

바다엔 물고기가 헤엄치고!

들엔 각양의 짐승이 뛰어다니고!

광야엔 예쁜 꽃들이 만발하고!

그리곤 이것들을 다스릴 사람을 만들었어요.

 

어디보자!

빠진 게 없나!

휴! 다 되었구나!

그리곤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우주 속에 하나 하나가 채워지고 그려질 때마다 얼마나 보시기에 좋았겠어요.

이게 의(義)에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나무를 가지고 의자를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의자 속에는 여러분의 생각이 담겨져 있잖아요.

여러분의 땀과 정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품(作品)이란? 내 수고와 정성과 혼이 담겨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작품은 작가의 정성이기 때문에 돈으로 환산 할 수가 없어요.

그건 그 사람의 가치에요.

그래서 작품은 정가(定價)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이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어서 평범한 의자는 식상해서 의자를 약간 기울게 만들었다고 합시다.

일부러 기울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작가의 마음을 모르는 어떤 사람이 의자가 기울어진 것을 보고 에이~ 이건 아니지! 라고 하면서 반듯하게 해 놓았다고 합시다.

그럼 작품을 만든 작가의 기분이 좋을까요?

나쁠까요?

당연히 나쁘지요.

화가 납니다.

 

왜? 나쁩니까?

작가의 창조성을 손상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약간 기울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약간 기울어진 것이 보기에 좋아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꼭 기울도록 만들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만드셨어요.

하나님이 일부러 지렁이를 기어 다니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지렁이에게 전부 의족(義足)을 만들어서 걷게 만들었어요.

이게 죄에요.

하나님이 다 생각이 있어서 기어 다니도록 만들었는데 인간이 기어 다니지 말고 걸으라고 해 놓았단 말입니다.

 

요즘 김장철입니다.

김장은 일 년 양식입니다.

여러분이 김장을 했어요.

적당하게 간을 맞추고 맛을 내게 정성을 다해서 했습니다.

 

그런데 옆집 여편네가 와서 싱겁다고 소금을 왕창 뿌려 놓았어요.

여러분은 기뻐할까요?

화를 낼까요?

당연히 화를 내지요.

 

에이~ 못된 여편네 같으니라구!

꼴도 보기 싫다고 하면서 쫓아냅니다.

그리고는 그 여편네를 앞으로 다시는 집안에 들이지 않을 겁니다.

 

마귀가 이런 짓을 했어요.

하나님이 만든 아담과 하와에게 죄라는 소금을 왕창 뿌려 놓았어요.

하나님이 먹으려고 하니 짜서 못 먹게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야~ 너희들 맛이 왜? 이렇게 변했냐?아담과 하와가 뱀이 그랬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뱀도 저주해서 쫓아내고!

맛을 잃어버린 아담과 하와도 쫓아내 버렸어요.

 

죄란? 뭐냐!

하나님이 만든 것을 변형시키는 겁니다.

섞는 거에요.

섞이면 원래의 맛이 사라져요.

죄란? 원래의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흔적에다 인간의 것을 섞는 일을 해요.

살살 꼬셔서 섞으라고 해요.

지금 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공로에다가 자기 공로를 섞으라고 해요.

믿음을 행함으로 둔갑시켜 놓았어요.

 

예수 믿는 것을 의(義)라고 하고 있어요.

나 예수 믿잖아!

예수 믿는 자기행위를 의(義)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걸 불의라고 합니다.

 

불의가 뭐라고요?

의(義)가 아닌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어디에 있다고 했나요?

예수님 안에 있다고 했지요.

 

그런데 마귀는 아니야! 너희들 행함에도 의(義)가 있어! 라고 미혹합니다.

이 미혹(迷惑)에 걸려들면 예수님의 공로에다가 자기 공로를 섞게 되어요.

예수 믿는 자기 자신도 인정해 달라고 한단 말입니다.

나 예수 믿었잖아요! 라고 한단 말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조차도 우리 스스로 할 수가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죄인의 한계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를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 믿는 나를 자랑할 수가 없지요.

예수를 믿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미혹하면 “나 예수 믿었잖아요!” 라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게 죄라고 했습니다.

불의라고 했어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이 없으면 꽝이라고 하지요.

내가 내 몸을 불 사르는데 내어주고 천사의 말을 하고 구제하고 봉사를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잖아요.

 

여기서 사랑은 예수님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예수님께서 성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말해요.

이걸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구제하고 봉사하고 순교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행위 자체는 귀한 거에요.

다만 그 행위가 누구 것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구제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순교하는 주체가 누구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네 안에 예수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이러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자기가 했다고 하지 않아요.

예수 믿고! 복음 전한다는 것을 의(義)로 삼지 않고 자랑하지 않아요.

모두가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해요.

 

그러니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은 이러한 행위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이러한 행위를 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으면 말짱 꽝이란 말입니다.

예수가 빠지면 내 행위가 되기 때문에 이걸 불의라고 해요.

예수님의 의(義)를 가리기 때문에 불의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고 주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이 시대 복음을 곡해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복음을 알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마치 신앙인냥 자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교회 다닐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교회에 안가니 봉사도 안하고 헌금도 안하고 온갖 안하는 투성입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에도 이런 것 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어요.

잘 새겨들으세요.

 

마테복음 23장을 봅시다.

 

마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지금 예수님이 그릇된 율법 신앙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예를 들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지킴을 나무라지 않았어요.

다만 율법 지킴 속에 담겨져 있어야 할 신앙 즉 율법에 정신이 없음을 나무라는 것입니다.

 

율법 정신을 한마디로 하면 긍휼이고 사랑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에겐 이 긍휼과 사랑이 빠져 있었어요.

그래서 외식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외식이란? 알맹이가 없고 껍데기만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없고 율법을 지켰다는 행위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여된 행함을 신앙으로 붙잡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릇이라고 하면 그 속에 담겨 있을 음식은 의와 인과 신이란 말입니다.

의와 인과 신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의와 인과 신을 담아서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라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일조 속에 담겨진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십일조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십일조를 왜 해야 하는지 알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행하고 라는 이것이란? 의와 인과 신이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저것이란? 십일조에요.

십일조가 그릇이라고 하면 의와 인과 신은 음식이에요.

그러니 의미만 제대로 알고 행한다면 둘 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에선 십일조가 연보로 바뀌었어요.

연보는 물질적인 개념보다 사랑이고 마음이에요.

그럼 연보도 마찬가지에요.

연보 속에 의와 인과 신이 담겨져 있어야 해요.

나 연보 했다!

그러면 안 되고 그 연보 속에 주여 감사합니다! 가 담겨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연보란 정한 액수가 없어요.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하면 되지만 연보는 십분의 0.5가 될 수가 있고 십분의 10이 될 수도 있어요.

풍성하게 다 바칠 수도 있고 인색하게 파리똥만큼 바칠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만큼 마리아처럼 옥합을 깨트릴 수도 있고 시몬처럼 발 씻을 물도 안 줄 수도 있어요.

 

연보는 강제성이 없어요.

많이 깨달으면 많이 할 것이고 적게 깨달으면 적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행함은 곧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해 볼 수가 있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가 헌금해라 봉사해라 구제해라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자신이 깨닫는 것만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강제로 십일조를 법으로 받아 냈어요.

그러니 그 속에 의도 없고 인도 없고 신도 없는 빈 그릇만 드리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보면 이런 제물은 헛된 것이라고 하면서 다시는 가져 오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지겹다고 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사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 자체를 나무란 것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제사를 나무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행함이란? 사랑을 표현하는 수단이에요.

사랑이란? 추상적인 것입니다.

이 추상을 실상으로 옮겨 놓는 것이 행함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에요.

믿음은 추상이에요.

믿음이 어떻게 생겼습니까?

믿음이 몇 근이나 됩니까?

믿음 몇 근 주세요.

그러면 안 되지요.

 

믿음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라고 하면 안 되지요.

믿음은 형체가 없어요.

눈에 안 보이고 손에 안 잡혀요.

그런데 믿음이 있어요.

영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을 수 없어요.

그러나 분명히 있어요.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보이는 것은 역사에요.

이 세상이에요.

보이지 않는 것은 묵시에요.

영이라고 합니다.

영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있어요.

 

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역사에요.

역사는 묵시를 담아내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묵시가 역사를 통해서 가시적으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같아요.

 

말씀은 보이지 않아요.

만질 수도 없어요.

추상이에요.

그런데 그 말씀이 실상으로 나타났어요.

우리 눈으로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바 되게 나타났어요.

그 분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세요.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에요.

사랑은 보이지 않아요.

추상이에요.

그런데 실상으로 나타났어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면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이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린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고 보고 만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서 말합니다.

성령은 보이지 않아요.

만질 수가 없어요.

그런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셨어요.

 

성령은 영이세요.

우리 몸은 육이에요.

육을 일컬어 역사라고 합니다.

육은 역사에 속하였어요.

그럼 아까 역사는 묵시를 표현해 내는 캔버스와 같다고 했지요.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영이신 성령이 우리 몸이라는 역사 속에 침투해 오셨어요.

그럼 역사라는 우리 몸은 묵시라는 성령을 그려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몸을 가지고 그려내세요.

이걸 행함이라고 해요.

그래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하잖아요.

 

그러니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성령이 추구하는 것을 표현해 내게 되어 있어요.

이 표현이 없으면 그 믿음 자체가 죽은 겁니다.

가짜란 말이에요.

 

믿음이니 성령이니 예수를 동의어로 보세요.

그러니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할 때 삶으로 표현이 되지 않는 신앙은 가짜란 말입니다.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어요.

 

귀신은 속이는 자에요.

그러니 귀신의 믿음이란? 행함이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를 관념이라고 해요.

또는 지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지금 성도 안에 와 계세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신단 말입니다.

그럼 그 예수님을 어떻게 압니까?

이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뭔가 행하게 하세요.

 

예수님이 나~ 여기 있다고 하면서 툭툭 간섭을 하신단 말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주장하세요.

그럼 우리 몸에서 우리의 원함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속성들이 툭툭 터져 나와요.

이름하여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맺게 하기 때문에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맺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맺게 하셨어요.

성령이나 예수님이나 동의어로 보세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성령이 하신 일이고 성령이 하신 일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에요.

어차피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몸에서 창세기의 창조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창조주가 되셔서 영에 속한 일들을 우리 몸으로 표현을 해 내신단 말입니다.

이걸 새로운 피조물의 삶이라고 해요.

이 예수님이 하신 삶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 예수님이 일으키신 것이 없으면 헛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수가 그 안에 없어도 얼마든지 종교적인 삶을 살아 낼 수가 있어요.

순교도 하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해요.

그러나 그 일들을 행함의 주체를 인간이 가지고 있어요.

내가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공로가 사라지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해요.

알아주면 하고 안 알아주면 안 해요.

이걸 사람의 영광을 구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몸으로 행한 것은 자기 영광으로 챙기고자 해요.

이건 본능이고 본성이에요.

자기가 행한 것을 의(義)로 여긴단 말입니다.

기쁨으로 여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선 인간의 선행을 상(賞)을 주어서 기리는 것입니다.

상(賞)을 주어서 선행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칭찬 듣는 재미로 행해요.

그래서 종교에서는 인간의 착함을 드 높이고 그 뜻을 기리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인간들이 죽을둥 살둥 하거든요.

 

이번에 서울 시장에 당선이 된 000이라는 사람이 있지요.

이 사람이 얼마나 사악한지 인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서 인용을 합니다.

메스컴에 보도된 내용을 그대로 옮깁니다.

 

이 사람은 시민운동을 한답시고 후원금을 받아 내는데 1년에 1천억 원을 후원금으로 받아낸다고 해요.

어떻게 받아 내는가 하면 돈 나올 구멍을 먼저 찾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레이다에 걸리면 찾아가서 반 공갈을 쳐요.

 

어떻게 공갈을 치는가 하면 자기에게 후원을 안 하면 악덕 기업주라고 매도시켜 버린다고 해요.

자기는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후원금을 내면 선한 일이 되고 안 주면 악한 일이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낸 것은 강탈이지 후원금이 아니에요.

 

이건 협잡꾼이지 시민운동가가 아니에요.

시민운동이 되려면 시민 자발적으로 모금이 되어서 운영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1년에 1천억 원이라는 후원금을 걷는다는 것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해 버렸어요.

이 사람은 시민운동을 핑계로 호의호식하면서 자기 이미지 관리를 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일컬어 성경에선 광명의 천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짓을 교회에서 목사들이 하고 있어요.

교인들을 칭찬해서 울궈 낸단 말입니다.

그러니 교인들은 칭찬을 받고자 마음에도 없는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하면 할수록 자기 의(義)를 축적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자기 의(義)를 빼내는 싸움을 하는 것이지 자기 의(義)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 의(義)가 쌓이면 쌓일수록 예수님의 의(義)는 사라져요.

성도의 몸에선 예수님의 의(義)가 드러나야만 합니다.

나는 망하고 예수가 흥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성령이 안에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성령이 계신 사람은 그 일을 행한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했다고 하지 않아요.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내가 했다고 하는 사람은 종교인이고!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하는 사람은 신자에요.

 

야고보 사도는 지금 이걸 묻고 있는 겁니다.

야~ 정낙원이 네가 설교 한 것이 누구 것이냐!

그럼 저는 “주께서 하셨습니다” 라고 한단 말입니다.

제 실력이 아니고 “주의 은혜가 증거케 하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럴 땐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 것이 되어요.

그렇지 않고 제가 열심히 준비하여서 했습니다.

제가 공부해서 했습니다 라고 하면 이건 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불의에요.

 

쉽게 말할게요.

의(義)란? 예수님이 하신 것을 말하고!

불의란? 예수님이 빠진 모든 것을 말해요.

 

마귀가 노리는 노림수는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하여서 자기 것으로 챙기게 한단 말이에요.

행함의 주체를 자기가 행사하게 한단 말입니다.

행한 것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에요.

그런데 내 공로를 담으면 악(惡)이 되고 불의(不義)가 되지만 예수님의 공로를 담으면 선(善)이 되고 의(義)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책망을 한 것은 십일조를 드리면서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담아서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그 출처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서 출발하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사랑이 빠진 제사가 되어요.

사랑이 빠진 제사는 헛것이에요.

다른 말로 예수님이 행하게 하셔서 한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없으면 불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의 신앙생활 전부에게 적용하세요.

교회에서 봉사하고 헌금하고 구제하는 것에다 적용하여야 해요.

주님의 사랑이 강권해서 교회에서 봉사하고 구제하면 주님이 행하신 일이에요.

이렇게 주께서 행하게 하셔서 하는 일엔 우리 공로가 없어요.

그러니 주께서 하게 하신 일을 하면 할수록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나는 소모품으로 사용이 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비록 소모품으로 사용이 되어도 주께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기에 소모 되면서도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이런 신앙이 없다면 뭔가 복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곡해 하여서 나 복음 알아요 하면서 빈둥거리고 놀고 있어요.

 

어떤 분들이 그래요.

교회가 복음 전하지 않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가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라고 물어요.

그럼 전 가라고 합니다.

가서 받은 은혜로 섬기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 보고 하는 것이지 사람 보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고마워서 지나가는 거지에게도 밥을 퍼 주듯이 하란 말입니다.

비록 복음을 모른다 하여도 그 속에서 내가 받은 은혜로 은혜 받은 자로서 섬기란 말이에요.

사람들이 복음을 안다 모른다 따지지 말고 주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란 말이에요.

왜? 내가 맞다 틀리다 판단을 합니까?

우린 판단 할 자가 아니라 판단 받아야 할 자들이에요.

 

로마서 14장을 봅시다.

 

롬 14:1-18=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 되니라 15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지금 바울이 교회 안에 말하고 있어요.

교회 안에는 연약한 자도 있고 강한 자도 있어요.

바울은 지금 그 당시에 교회 안에서 다툼이나 분쟁이 일어나는 먹고 마시는 것과 주의 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에 대하여 믿음이 없어서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우상이란 없다!

하나님만이 신이다!

그러니 그런 것 따질 필요 없이 먹으면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 안이 안식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맞느냐!

바울은 예수를 믿는 것이 정답이니 이런 것 가지고 다투지 말고 각자 믿음에 분량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모두가 주를 위한 것이 아니냐 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서 그러는 것이고!

먹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주님의 은혜로 그러는 것이 아니냐!

주일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도 주를 위한 것이고!

안 지켜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주님을 위한 것이 아니냐!

본질은 주님이니 주님을 생각하고 한다고 하면 그건 다투고 나무랄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구태여 내가 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따지지 말란 말입니다.

지금은 연약해서 깨닫는 것이 둔할 수 있느니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 라는 일로서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말란 말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주께 받은 은혜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면 된다는 거에요.

하나님 나라는 어떤 일을 하느냐 안하느냐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것이므로 범사에 감사함으로 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섬기면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어 보기 좋으니 그런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복음을 아네! 모르네!

따지지 말고 내가 받은 은혜에 감사함으로 섬기면 그 자체로 주님의 행하심으로 하는 것이니 주께서 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주께서 그 사람을 교회에 보내셨는데 왜? 내가 맞다 틀리다 하느냐 말이에요.

그러니 나의 편견으로 보지 말고 받은바 은혜로 대하세요.

 

그 이외는 생각하지 마세요.

마음에 감동이 되면 하고 안 되면 안 하면 되어요.

억지로 하지 말고!

그래서 신앙생활이 주의 은혜로 하면 아주 편하고 간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까딱하면 오해해요.

 

그러므로 복음 안다고 하면서 저 교회는 복음도 없는데 라고 하면서 집구석에서 빈둥거리고 놀면서 교회 오지도 않고, 놀러 다니고, 골프나 치러 가고, 등산이나 다니고, 낚시나 다니고, 육신의 쾌락을 쫓아다닌다고 한다면 그건 복음을 올바로 깨달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복음을 빙자하여서 자기 육신의 정욕을 채우고 있는 악한 것입니다.

 

복음은 자체적으로 자정 능력이 있어요.

 

진짜와 가짜를 갈라내는 능력이 있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복음은 복음으로서 참과 거짓을 구분해 낸단 말입니다.

참 신자와 가짜 신자를 가려내요.

복음을 이용하는 자인지 복음을 사랑하는 자인지 구분을 해요.

그러니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더 주님을 사랑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듣고 점점 더 패역해지고 자기 육신의 쾌락을 좇아가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증거되는 현장에는 반드시 두 부류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복음이 떨어지면 어떤 사람에겐 구원의 능력으로 작용을 하고 어떤 사람에겐 저주의 능력으로 작용을 하게 되어요.

구원을 얻는 사람이 복음을 들으면 점점 더 모이기를 힘쓰고 섬기고자 하지만 멸망 받을 자가 복음을 들으면 모이기를 폐하고 그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시험 들게 하고 거치고 넘어지게 한단 말입니다.

 

한 사람의 일어서고 넘어짐은 주께 맡기고 복음을 아는 나는 감사함으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섬기고 봉사하면 됩니다.

주님께 하듯 하란 말입니다.

복음을 양식으로 먹으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로 여기고 그 속에서 감사케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은 감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육신 편하게 빈둥거리고 놀러 다니라고 주신 것이 아니에요.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 꼴값 떨라고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지 않았어요.

감사하고 섬기라고 깨닫게 해 주셨어요.

 

제발 복음을 지식을 쌓듯이 하지 마세요.

복음은 양식이에요.

밥 처 먹었으면 일해야지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게으른 것은 그건 밥만 잔뜩 처먹고 집구석에서 방바닥을 뒹굴고 있는 식충이에요.

역설적으로 복음 안다고 남을 무시하고 자랑하는 것도 복음 정신에 반하는 매 일반이에요.

이런 자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누구에게 임한다고 합니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했지요.

불의가 뭐라고 했나요?

의(義)가 아닌 것을 의(義)라고 우기는 것이라고 했지요.

너무도 중요하니 잔소리 같지만 다시 설명합니다.

 

인간의 행함이 의(義)가 아닌데도 의(義)라고 여기는 것이 불의에요.

예수 믿는 것이 의(義)가 아닌데도 의(義)라고 우기는 것이 불의이고 죄에요.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은 내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우린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예수를 믿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이 나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해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입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서 믿습니다!” 라고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 예수 믿는데요!” 라고 하면 안 되어요.

그럼 예수 믿는 것이 자기 행위로 남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을 자기 행위로 붙잡고 있어요.

복음 아는 것을 자기 능력으로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 “나 예수 믿잖아요!”

“나 복음 전했잖아요!” 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깔보게 되어요.

난 믿었는데! 넌 안 믿었지!

난 복음 아는데! 넌 모르지!

그런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예수 믿잖아요!” 라는 말은 곧 자기 의(義) 챙기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 예수 믿었잖아요!”

“나 복음 전했잖아요!”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라고 모가지를 세우고 나온단 말입니다.

이게 바로 “나는 예수 믿었다” 또는 “나는 복음 전했다” 라는 행함에 의지하고 있는 불의에요.

 

내가 주체(主體)가 되어 있기 때문에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주체가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믿게 해 주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 예수 믿었잖아요!” 라고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셨잖아요!” 라고 하여야 옳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믿게 해 주셔서 믿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 예수 믿잖아요” 그러지 않아요.

주여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입니다! 라고 해요.

어찌하여 저 같은 무지랭이에게 예수가 믿어지고 복음이 깨달아지는 은혜를 주셨나이까!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 감사함이 너무도 커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고 열심을 내게 된단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새겨들으세요.

 

지금 수많은 교인들이 “나 예수 믿잖아요!” 라는 행위를 붙잡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 믿고 복음 아는 것으로 교회와 사람에게 덕을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거치는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알았으면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섬겨야 하는데 아무 것도 안하고 주둥이로만 나불거리고 있어요.

 

도리어 복음 안다는 것으로 선생 노릇하고 있어요.

마치 답안지를 채점하는 시험관처럼 남에 신앙을 판단하고 있어요.

이게 다 복음 안다는 것을 학습으로 습득하여 지식으로 쌓아서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복음도 자꾸 들으면 복음 아는 척 흉내를 내요.

복음을 자꾸만 들으면 스스로 복음 안다고 착각하게 되어요.

착각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복음을 힘으로 행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이런 사람은 차라리 복음을 몰랐으면 더 좋을 뻔 했어요.

복음이 독(毒)이 되고 만 겁니다.

말씀을 좌우에 날선 검이라고 하지요.

이는 양날 가진 검을 말하는데 잘못 사용하면 남도 다치고 자신도 다쳐요.

그래서 예수는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빙거이지만 어떤 이에겐 멸망의 빙거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도 동일해요.

잘못 사용하면 그 말씀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말씀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해요.

심판하는 기능도 있고 생명을 살리는 기능도 있어요.

그래서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잘못 사용하면 자신을 죽이는 칼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복음으로 인하여 처음 형편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차라리 복음을 몰랐으면 좋았을 뻔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요.

복음을 자기 정욕을 쫓아가는데 이용하는 자들이 수없이 많아요.

복음으로 자기가 부인되는 갓이 아니고 도리어 복음 아는 것으로 자기를 긍정하고 왕 노릇하고 있어요.

 

그러니 복음으로 인하여 도리어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알면 되었지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그래요.

어차피 죄인인데!

죄인이 뭘 하나 안하나 죄인데 구태여 뭘 할 필요가 있느냐! 라고 하면서 교회도 안 가고 봉사도 안하고 헌금도 안하고 아무 것도 안하고 놀러 다녀요.

부어라 마셔라!

즐기는 겁니다.

육신이 이끄는 대로 쾌락을 쫓아가고 있어요.

이들을 영지주의자들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시대 영지주의 신앙을 복음을 지식으로 소유하여서 힘으로 삼는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는 척 잘난 척 한단 말입니다.

 

복음을 지식으로 소유하면 누가 누가 더 많이 복음을 아는가 라고 경쟁하게 되어요.

그러니 복음 아는 것을 힘으로 자랑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힘이 자연적으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업신여김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복음 아는 자신은 자랑스럽고!

복음 모르는 사람은 안 돼 보이는 겁니다.

에이! 바보들!

복음도 모르는 것들이 그런단 말입니다.

 

복음은 살아가는 능력입니다.

복음을 능력으로 사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어요.

너무도 감사해서 기쁨으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면서 헌신하게 된단 말입니다.

율법 아래선 의무로 억지로 했지만 복음을 깨닫게 되면 자발적으로 행하게 되어 있어요.

 

복음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깔보고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통하여서 내가 복음을 깨닫는 것에 대하여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야! 어쩌자고 나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였는가!

나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저 사람들처럼 복음을 몰랐을 터인데!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너무도 감사하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복음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남게 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 믿고 복음 아는 것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남아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 믿고 복음 아는 것은 감사하는 것이지 자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 믿는 것이 엘리트의식이 되면 안 되어요.

복음 아는 것이 엘리트주의로 흐르면 안 되어요.

이건 아주 무서운 독약(毒藥)이에요.

신앙에 엘리트주의는 금물입니다.

 

나만 복음 안다!

우리 교회만 복음 전한다!

우리 목사님만 복음 안다!

이게 바로 유대주의 선민사상이에요.

이 사상에 빠지면 다 배척하고 혼자 독야 청정한다고 합니다.

 

엘리트주의에 빠지면 자긍심에 빠져요.

엘리트주의를 성경식으로 말하면 엘리아즘이라고 합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납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고하고 자만하고 자긍하여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모두가 복음을 지식으로 쌓아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교만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는 다 틀렸고 우리교회만 옳다고 한단 말입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은혜성이 있고!

긍휼히 여김을 받은 감사가 있나요.

자기 자랑으로 자기 의(義)로 가득 넘치잖아요.

이게 바로 불의(不義)에요.

 

불의가 뭐라고 했나요?

의(義)가 아닌 것을 의(義)라고 우기는 것이라고 했지요.

내가 복음을 알고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의(義)가 아니에요.

의(義)는 하나님이 믿게 해주는 믿음 안에 있어요.

 

하나님이 하신 것만 의(義)에요.

하나님이 하신 것만 의(義)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엔 의(義)가 없음으로 드러나야 해요.

예수 믿는 것조차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아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을 하였어요.

 

복음을 깨달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고!

복음을 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고!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습니다.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어요.

바울은 자기 안에 예수님의 흔적만 남겼어요.

이게 하나님의 의(義) 안에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제발 예수 믿고 복음 아는 것을 자랑하지 말고 감사하세요.

감사는 빚진 자가 탕감 받고 하는 거에요.

용서 받은 자가 하는 것이에요.

탕감 받고 용서 받은 주제에 뭬가 그리 자랑스러운가요.

감사할 뿐이지요.

 

신앙생활은 감사하는 것이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랑은 내가 하였다고 할 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요.

모두가 예수님이 다 하셨어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자랑해야지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자랑하는 우리가 할례당이라고 했습니다.

할례당이란? 거듭난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자랑하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흔적 지키기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훼손당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타락을 섞임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 훼손당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에는 하나님의 일하심만 순수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순수함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거룩이란? 섞임이 없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은 이 거룩성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 율법으로 섞이는 것을 금하게 하신 겁니다.

 

밭에 두 가지 종자를 뿌리지 말라고 하였고!

두 가지 직조로 된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고!

두 종류의 짐승과 겨리해서 밭 갈지 말라고 하였고!

유대인과 이방인간에 혼인을 금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의(義)란? 하나님의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기분이 좋은 상태를 의(義)에 상태라고 합니다.

죄 아래서 하나님이 언제 기분이 좋았습니까?의로운 제물이 불의한 것의 죄를 대신 대속을 할 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의로운 제물이 태워지는 제사를 하나님이 흠향 하셨다고 합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정결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흠향하십니다.

 

흠향(歆饗)이란? 기쁘게 받았다는 뜻입니다.

왜? 정결한 짐승의 제사를 흠향하십니까?

이는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부정한 자가 속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義)로 자기 백성들이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기뻐하시느냐 하면 의인이 죄인의 죄를 대속하여 죽을 때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겠다고 하자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들아 고맙다!

네가 나를 기분 좋게 해 주는구나! 라고 했어요.

그리고 자기백성들이 예수의 죽음을 근거로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세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하나님이 왜? 기뻐하십니까?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죄 아래 갇혀 있는 자기 백성들이 다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예수님의 죽음 속에 의(義)가 있나요?

이는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이기 때문입니다.

의인 속에서는 의(義)가 나와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는 것입니다.

 

의(義)란? 옳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의(義)라고 했어요.

내가 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은 내 뜻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것보다 그에 나라와 그의 의(義)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먹고사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에게도 하나님의 의(義)가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의(義)는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에 떨어진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생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義)가 없어서입니다.

생명과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들어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선악과로 생명과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선악과를 보는 순간 이미 게임을 끝난 겁니다.

인간의 속성은 선악과를 보는 순간 빠져 들게 되어 있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데 어찌 눈길을 돌린단 말입니까!

 

선악과 속에는 인간의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 긍정이 들어가 있고!

자기 자랑이 들어가 있고!

자기 세계가 들어가 있습니다.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인간이 어찌 자기 영광을 포기한단 말입니까!

안 돼~요.

 

마귀는 인간의 행실을 의(義)와 불의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미혹당한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의로운 행실을 주문하게 됩니다.

죄란? 예수를 안 믿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인간에게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라고 합니까?

불의로 진리를 막는 저주 받을 자라고 하지요.

여러분! 세상에서 인간을 어떻게 봅니까?

만물의 영장이니 하면서 좋게 보지요.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저주받을 자로 보고 있어요.

 

성경을 열고 닫으면 인간의 가치를 극과 극으로 대조가 됩니다.

성경을 닫으면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둡니다.

그러나 성경을 열면 인간의 무가치하다고 합니다.

 

성경이 인간이 어떤 자인가를 들추어내는 빛과 같습니다.

빛이 어둠을 드러내듯이 성경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내 줍니다.

피조물은 창조주이신 말씀 앞에서 낱낱이 해부가 되어집니다.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인간의 안과 밖을 수술한다고 하지요.

혼과 영은 속을 말하고 관절과 골수는 겉을 말합니다.

그러니 인간이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말씀 앞에서 낱낱이 죄로 고발이 되어진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백성에게 성경을 주신 것은 그 말씀으로 자기 주제를 파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더 절망하라는 거에요.

자기에게 의미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

말씀 앞에 해부당하고 예수라는 대 제사장에게 도피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고발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린 이 사랑을 받았어요.

말이 사랑이지 육적으로는 내가 부정당하여야 하는 아픈 사랑이에요.

 

그러나 신앙은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부정당할수록 비참해지는 것이 아니고 기뻐요.

내 꼬라지가 한 없이 부족하고 볼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감사 할 수가 없어요.

주여! 감사합니다! 가 된다니까요.

죄가 고발당할 때마다 예수님이 기뻐하세요.

당신의 옷자락으로 우리를 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더 드러나려면 말씀을 더 가까이 하여야지요.

미녀는 거울을 항상 가까이 두고 살아요.

복을 받은 사람은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말씀이 늘 우리 마음속에서 달음질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구나 를 아시고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기도 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의가 무엇이고 불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자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음이 어찌 그리 감사한지요. 오직 주님의 의로 기뻐하고 즐거워 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