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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8강. 부끄럽지 않은 복음 (롬 1:16-17)

by coroa 2022. 4. 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8강. 부끄럽지 않은 복음 (롬 1:16-17)

-.정낙원 목사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인간은 상대적인 가치로 희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타인을 통하여서 자기를 검증한단 말입니다.

내가 남 보다 높으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내가 남보다 낮으면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남 보다 더 큰 집에 살면 잘 산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작은 집에 살면 못 산다고 생각합니다.

 

혼자 있을 땐 아무렇지 않다가도 누구를 만나면 즉시로 자기 검증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행복하냐! 불행하냐!

이렇게 되면 인간이란 타자를 통해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행복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행복이란 자기만족입니다.

인간은 만족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부끄러움이 나옵니다.

바울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바울이 이 말은 반어법으로 하는 말입니다.

 

반어법(反語法)이란? 의미를 반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반어법으로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이 됩니다.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은 반대말입니다.

자랑스러움이 없으면 부끄러움도 없고 부끄러움이 없으면 자랑스러움도 없습니다.

마치 검은 색이 없으면 흰색을 모르고 흰색이 있음으로 검은 색이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흰색과 검은 색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는 색입니다.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이러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만 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복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여도 난 아니란 뜻입니다.

난 복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 말 속에는 복음 속에는 인간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부끄러운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세상에 비쳐진 복음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숨기고 싶다는 뜻입니다.

 

왜? 부끄러울까요?

자랑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복음이 자랑스럽지 않을까요?

이는 인간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데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은 세상적 가치기준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 있고 잘 되어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힘이 있으면 드러내 자랑하고 싶고, 힘이 없으면 수치라 생각하여 감추고 싶어 합니다.

이건 힘의 지배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럼 복음이 부끄럽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예수가 인간들에겐 매력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랑 할 만 것이 못되고 도리어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것이란 말입니다.

 

그 당시 사회적인 배경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왜? 예수 믿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할까요?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바램과 세상 가치와 반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12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회당에서 채찍질 할 것이고, 나 때문에 총독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곤 이 동네에서 핍박하면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합니다.

 

이건 제자들이 바라는바가 아닙니다.

제자들은 도리어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영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와 정 반대의 상황 속으로 제자들을 파송합니다.

이건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 아니고 슬퍼하여야 할 일입니다.

 

당시에 예수를 믿는 자들은 매 맞고 핍박당하고 쫓겨 다니곤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출교 당하고 옥에 갇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욕 먹는 일이야 다반사이고, 핍박은 밥 먹듯 당하고, 수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자랑스러울 일이 아니지요.

 

동족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숨어 지낸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드러내 놓고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도리어 예수 믿는다는 것을 감추어야 할 판입니다.

인생을 망치는 일인데 이게 무슨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부끄러운 일이지요.

 

당시 예수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에게 속한 자란 뜻입니다.

이는 그 당시의 정서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하(卑下)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 입장에선 복된 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의미로서는 조롱의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속된 말로 “예수쟁이”란 말입니다.

“쟁이” 라는 말은 천하다는 뜻의 비속(卑屬)어입니다.

옛날에는 특정인들을 비하하여 부를 때 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그런 뜻으로 불러졌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 고백 속에는 복음이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의인화(擬人化)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하찮게 여긴단 말입니다.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는 실패자입니다.

유대교 입장에선 예수님은 율법을 허무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어요.

군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겐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민족으로부터 이단이라고 하여서 버림 당한 그런 예수를 메시야 라고 믿는다는 것은 더 더욱 미친 짓이었습니다.

바보에요.

유대인들 입장에선 그렇단 말입니다.

 

바울 자신을 다메섹 이전 시대로 예로 들어 봅시다.

알다시피 바울은 다메섹 이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하면 예수는 죄인입니다.

바울은 예수쟁이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일말의 양심에 가책도 없었어요.  

그러던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루아침에 돌변했어요.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합니다.

메시야라고 합니다.

이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제의 동지들에게 예수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을 본 바울의 옛 친구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 미쳤냐!

야~ 너 왜? 그러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정신 차려 임마!

아니 믿을게 따로 있지!

믿을 것이 없어서 이단을 믿느냐!

죄인들과 어울리는 그런 인간을 메시야라고 믿는단 말이냐!

 

바울의 친구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도 예전엔 바리새인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어요.

스스로를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 예수가 진짜이고 바리새인이 가짜라고 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예수는 이단이라고 죽여야 한다고 하던 자가, 하룻밤 사이에 아니다 예수가 정통이고 바리새인이 이단이라고 하니 바리새인들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 아닙니까?

 

야! 이 놈이 드디어 돌았구나!

돌지 않고서야 어찌 예수를 따른단 말인가!

바울의 예전 친구들 입장에선 바울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겠어요.

물론 바리새파라는 조직의 배신자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 때는 친구이고 한 형제였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하는 것 속에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섞여 있는 겁니다.

분노가 조롱과 핍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건 예수님의 일가친척들을 보아도 그 정서를 잘 알 수가 있어요.

예수님의 형제들을 보세요.

예수님을 창피하게 생각했잖아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겠어요.

 

이건 바울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에요.

바울도 이 사실을 잘 알아요.

예전에 바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으니까요.

 

바울은 알다시피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모르는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보았어요.

그러니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예수님은 당연히 천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 조롱이 야! 저 예수는 세리와 창기들의 친구래! 라는 말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선 세리와 창기는 저주 받은 자들이에요.

인간 취급을 안 했어요.

개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개 같은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렸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고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율법에 반(反)하는 행동들을 서슴지 않고 행하였습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저주 받은 자의 행동이었어요.

 

이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했어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는 것은 율법을 폄훼하고 유대인들의 망신을 시키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는 것이 창피했어요.

실제로 예수님의 친 형제들도 예수님이 죄인들과 어울리는 행동을 미친 짓으로 보았잖아요.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 지킴은 유대인들의 자긍심이었습니다.

율법 지킴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고, 율법신앙은 유대민족의 정통성을 지켜주는 보루였어요.

비록 로마의 압제 하에 있지만 율법을 지킨다는 자긍심만큼은 대단했어요.

 

바울 역시도 바리새인으로 율법 아래 있을 땐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죄인들과 어울리는 자를 메시야 라고 따르느냐 입니다.

이건 같은 유대인으로서 창피한 일이 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 믿는 자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일에 앞장을 선 것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의 신앙을 걸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운다는 이름으로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율법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예수쟁이들을 죽여도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예수쟁이들은 율법도 모르는 하나님 앞에 이단이므로 그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렇게 사명감이 투철하던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달라집니다.

야! 이 예수가 진짜다!

이 예수가 바로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예수를 믿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외칩니다.

난 복음이 자랑스럽다!

난 예수가 자랑스럽다!

이 복음이야 말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이 뭡니까?

좋은 소식이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에겐 좋은 소식이 아니고 나쁜 소식이었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겐 민족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이단 괴수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행여 자기 집안에 누구 하나라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난리가 났어요.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발각이라도 되면 출교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유대교에선 예수는 악질 이단입니다.

 

유대교로부터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아요.

모든 사회 활동이 제약을 받고 심지어 동네에서 쫓겨나고 가산까지 적몰 당하였어요.

그런데 누가 난 예수가 자랑스럽다! 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없어요.

 

이러한 유대인들의 정서가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 9:18-22=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경이 예수님을 통하여서 눈을 뜨게 되었어요.

소경의 부모 입장에선 얼마나 기쁠 일입니까.

그런데 드러내 놓고 기뻐 할 수가 없었어요.

오죽했으면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뜬 소경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했겠어요.

 

그러니 예수님에 의해서 눈이 떴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예수를 시인하면 출교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인정한다는 것은 간첩을 숨겨주는 것과 같아요.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입니다.

 

나사로를 보세요.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님에 의해서 살아나자 유대인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가족을 핍박하잖아요.

 

유대인들에겐 예수가 죽은 자를 살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 조직이 와해되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자기들 조직이 붕괴되는 일이라면 있는 사실도 거짓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이단으로 몰아서 죽여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부활을 하자 로마 군병들을 매수해서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예수의 시체를 훔쳐 갔다고 소문을 퍼뜨려 달라고 했어요.

그만큼 예수는 유대인들에겐 감추고 싶은 저주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종교는 인간의 안위에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 조직의 해(害)가 되느냐 유익이 되느냐만 셈을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나 조직이나 동일합니다.

내 편이냐! 아니냐! 만 중요합니다.

철저히 자기중심에서의 이분법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이 시대 교회를 위시하여 그 어느 집단이나 조직이든 자기하고 다르면 이단이라고 쫓아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그 집단에 있으려면 다른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하는 말에 동조하고 그들이 하는 일에 무조건 예! 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조직에서 살아남아요.

설령 다르다고 하여도 다르다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눈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누가 다른 말을 하는지 철저히 감시해요.

완전히 공산주의와 같아요.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과 어울려서도 안 되어요.

그럼 불순분자로 몰려요.

그러니 설령 만난다고 하여도 쉬쉬하고 숨기는 겁니다.

다른 말을 하면 조직에서 자아비판을 당하든지 축출 당하여야 합니다.

 

이게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의 작태에요.

자칭 십자가 전한다고 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사이비 집단이 되고 말았어요.

 

이단의 특징이 조직 강화하는 겁니다.

자기들 힘으로 조직을 지키고자 해요.

이게 자기하고 다른 자들을 축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단들일수록 복음을 강조해요.

그런데 하는 짓들은 반(反) 복음 적인 짓을 해요.

꼭 바리새인들과 같아요.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하고 다른 말을 하면 죽이고 다 쫓아내고 있잖아요.

이들에겐 자기들 편이냐 아니냐만 있어요.

 

이게 이단들의 특징이에요.

얼마나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자기가 심판하겠어요.

그냥 둘 수가 없어요.

그냥 두면 자기 조직이 붕괴 될까봐 불안한 겁니다.

그러니 자기들이 심판을 해 버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랬어요.

그 유대인들의 후손이 바로 이 시대 자칭 자기들만 복음 안다고 하면서 자기하고 다르면 쫓아내는 자들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도 복음 복음하면서 말이에요.

 

항상 기억하세요.

어느 시대이고 항상 정통이고 가장 하나님 말씀을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이단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아버지 명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착실하게 살았던 맏아들이 아버지를 탄핵하는 이단이었고,

하나님 말씀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지키고 살았던 바리새인들이 이단이었듯이,

지금도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맏아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짓거리를 하고 있어요.

안다는 것으로 남을 죽이고 심판한단 말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선 예수님은 유대교의 배신자이고 민족의 반역자입니다.

자기 조직을 해치는 자였어요.

제거 대상입니다.

그러니 누가 너 예수 믿느냐 라고 물으면 아니 라고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어요.

 

소경의 부모가 그러했어요.

속으로는 예수를 인정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예수를 인정하면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예수를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그 조직 안에서 먹고 살자면 힘을 가진 자들의 말을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힘의 논리로 다스려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연히 힘을 쫓아서 살게 되어 있어요.

강함이 곧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힘 있음은 사는 것이고, 힘 없음은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진리는 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인간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뭡니까?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일 속에 인간이 지향하는 가치가 담겨져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을 봅시다.

 

창 11:1-5=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인간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성과 대를 쌓아서 하늘에 닿고자 함입니다.

흩어짐을 면하자고 합니다.

왜? 흩어짐을 면하고자 합니까?

이는 인간의 힘은 수(數)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있지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무엇이든지 모으고자 합니다.

재물도 모으고, 사람의 숫자도 모으고자 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이 올림픽이에요.

올림픽 정신의 뭡니까?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잖아요!

 

한마디로 강인한 인간이 되자는 겁니다.

성경에선 이런 인간을 일컬어 “니므롯” 이라고 하고 또는 “네피림”이라고도 합니다.

일명 용사라고 해요.

 

세상은 용사를 원해요.

그래서 가장 강한 자에게 금메달을 주면서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드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금메달을 따 보세요.

부(富)와 명예(名譽)가 한꺼번에 오잖아요.

 

이런 올림픽 정신이 사람들에겐 성공주의를 낳게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고!

으뜸이 되어야 하고!

보다 많이 모으고

보다 많이 넓히고

보다 많이 움켜잡아야 합니다.

 

이 모두가 인간의 이름을 내고자 함입니다.

인간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 목적을 인간에게 두겠다는 뜻입니다.

내가 곧 신이다!

내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창조 목적을 정면으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없던 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라고 합니다.

아담이란? 흙이란 말입니다.

흙을 티끌이라고 하는 것은 없는 자 즉 무가치한 자란 말입니다.

 

여기서 없는 자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란 뜻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닌 자들을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이름이 없어요.

그냥 개똥이 소똥이에요.

 

이름이란 존재를 뜻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이름이 없어요.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으니 자기를 위한 존재가 필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을 아담이라고 한 겁니다.

그냥 훅 불면 날아갈 먼지란 말이에요.

먼지란? 없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죄가 자기 이름을 내라고 만들었습니다.

없음을 있음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죄가 없음으로 살아야 할 자를 있음으로 살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없음으로 살 때는 하나님 이름을 위하여 살았는데, 있음이 되고 난 후 부터는 하나님 이름은 갖다 버리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가 역사하는 곳엔 반드시 인간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사울왕이 자기 전적(戰績)비를 세우지요.

왜? 자기 전적비를 세웁니까?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함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힘으로 전쟁에서 이기곤 자기 힘으로 이긴 것으로 치부했어요.

하나님 이름을 새겨야 할 곳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이게 죄에요.

 

그러므로 죄인이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이름을 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자기 이름을 내는데 이용 대상입니다.

이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죄가 몰고 온 결과입니다.

 

구원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우리 원래의 자리는 없음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은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합니다.

지체는 이름이 없어요.

몸만 이름이 있어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14장을 보면 시온 산에 섰는 144000명의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천국엔 우리 이름이 없어요.

오직 예수 이름뿐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이름을 삭제시키는 일입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불신앙은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낸다는 것은 곧 힘을 축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눈만 뜨면 힘을 좇아갑니다.

 

우리들도 자식을 키워도 영웅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1등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보다 학원에 보내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 가야 세상에서 출세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세상에선 하나님보다 돈이 더 힘을 쓴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망하고 돈 없으면 자살을 해도, 믿음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은 없어요.

돈 달라고 기도를 해도, 돈 가져가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로지 “있음” 입니다.

오로지 힘입니다.

세상에선 보이는 힘이 진리에요.

 

예수님 초림 당시에 유대인들에겐 로마로부터 벗어날 힘이 필요 했습니다.

그래서 눈만 뜨면 힘 있는 메시야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어요.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야가 와서 로마를 응징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게 얼마나 이율배반적인 악(惡)인 줄 아세요.

자기들은 힘이 없어서 로마의 식민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럼 자기들이 힘을 가지면 그 힘으로 뭘 할까요?

이방인을 지배 할 것 아닙니까.

그럼 자기들이 로마하고 똑 같은 짓을 할 것 아닙니까.

 

자신들은 남을 지배하는 것은 괜찮고, 자신들이 지배당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리잖아요.

이 무슨 해괴한 논리입니까.

나는 남을 때려도 괜찮고 남이 나를 때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나요.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이런 짓을 하잖아요.

자신들은 남을 정죄하고 심판해도 괜찮고 남들이 자신들을 비판하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입니까.

 

이게 선민사상에 물든 자들의 논리에요.

이걸 엘리아이즘이라고 합니다.

엘리야처럼 나만 남았다고 꼴값을 떨고 있는 겁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하였듯이 나만 복음 안다고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이 숨겨 놓은 7천 명이 있다는 것을 몰라요.

 

교회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교회 부흥시키기 위해서 이웃교회 교인들을 빼내오고 있잖아요.

남에 교회야 죽든 말든 자기 교회만 크면 된다는 겁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메시야가 와서 남의 나라를 정복시켜 달라는 것과 똑 같아요.

자기들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으뜸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것과 동일해요.

그러니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고 마귀 교회인 겁니다.

마귀 교회이니 힘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유대교와 똑 같아요.

로마를 이길 메시야를 보내 달라고 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식민지로 사는 것도 힘이 없어서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힘을 가진 메시야가 와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 시켜 주기를 바랐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교인들은 통곡의 벽 앞에서 자기 옷을 찢어 가면서 애타게 메시야가 오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정통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존재와 자신이 처한 환경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지 않고 세상적 관점에서만 보고 있는 겁니다.

자기중심으로 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하여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겠지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지로 만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지요.

왜? 하나님이 이런 그림을 그려 놓았을까요?

이는 언약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언약을 위하여 생겨난 민족입니다.

이건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므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다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하심이 들어가 있습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것도 언약을 위해서입니다.

이런 그림은 구약 모세 시대 때 미리 보여 주셨어요.

 

그러니 지금 유대인이 로마의 식민지로 있는 것은 구약 이스라엘이 바로의 압제에서 종노릇하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종 노릇한 것은 아브라함 언약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한 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끄집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바로에 종으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끄집어냅니다.

이는 장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 낼 것을 시청각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식민지는 영적인 것의 표상입니다.

이는 언약의 후손들이 마귀로부터 억눌림을 당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로마로부터 압제 당하는 것은 언약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적인 메시야 관을 가지면 안 됩니다.

세상적 메시야 관은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메시야입니다.

이는 자기 민족을 위한 메시야가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을 세상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메시야가 아니고 마귀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유대인에게 너희가 세상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받아도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을 받지 않으면 여전히 죄의 종으로 죽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갖가지 기적을 행하면서 죄사함에 대하여 이야기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을 마치시고 제일 먼저 한 일이 문둥병자를 고치는 일을 했습니다.

문둥병은 죄를 상징하는 병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을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으라고 했어요.

 

알다시피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입니다.

문둥병이 병이라고 했다면 의원에게 가라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문둥병을 병으로 보지 않고 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것은 곧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바로 그 제사장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단지 정치적인 메사야로만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힘없이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자 십자가에서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기만당하였다고 생각했어요.

저렇게 힘없는 놈을 우리가 잠시나마 메시야라고 따랐던 것이 창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개심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힘의 논리로 접근하면 유대인들처럼 죽이게 되어 있어요.

 

바울은 십자가의 원수를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은 배(腹) 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신은 배(腹)라고 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로 예수를 따른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떡 주는 메시야입니다.

 

떡은 곧 힘입니다.

떡은 곧 돈을 상징해요.

그러니 돈이라는 힘을 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힘을 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세상 힘에 무기력하게 짓밟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창피합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육적 가치로 보니 부끄러운 겁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역설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창조의 원리이고 세상 나라는 피조의 원리에요.

창조와 피조는 가치관에서부터 살아가는 원리까지 정 반대입니다.

 

창조 세계는 주는 원리이고, 피조 세계는 받는 원리입니다.

창조주는 피조물을 돌보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도움을 입고 삽니다.

이처럼 창조 세계의 원리와 피조 세계의 원리는 달라요.

 

창조 세계의 힘은 약한 자를 위하여 죽는 것이에요.

하늘나라에선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습니다.

내 것을 남에게 내어 주는 곳입니다.

힘을 나를 위하여 쓰지 않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쓰는 곳이에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고 섬깁니다.

이게 하늘나라의 원리에요.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세상 나라에선 어리석게 보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가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해요.

받아먹으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 됩니다.

마치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만나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여야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나라에요.

강하신 창조주가 약한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 바로 이 원리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가 높은 자이고, 섬김 받는 자가 낮은 자에요.

 

천국에서 왕 노릇 한다고 하니 군림하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아니에요.

왕은 군림하는 자가 아니고 백성을 돌보는 자에요.

이게 하나님 나라에서의 왕이에요.

자기 목숨을 버려 남을 살리는 것이 천국의 왕이에요.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오신 메시야는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강한 메시야로 온 것이 아니고 힘없는 메시야로 오신 것입니다.

이 원리를 벗어나고자 하면 그게 바로 죄에요.

 

세상은 죄 아래 가두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나라는 하늘나라와 역설적으로 섬기는 자가 낮은 자에요.

섬김 받는 자가 높은 자에요.

그래서 세상에선 서로가 높은 자들이 되어서 남으로부터 섬김을 받고자 합니다.

 

이게 부흥신학입니다.

부흥신학이 기복신앙을 낳았어요.

기복신앙이란? 예수 믿으면 하나님께 복 받고 잘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집집마다 “주여 종의 집에 복을 주옵소서” 라는 부적을 가게나 집에다 붙여 놓게 만든 겁니다.

 

이게 고지론을 낳았어요.

고지(高地)론이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공해서 높은 곳에 오르자는 말입니다.

이 고지론 사상이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니 나중은 창대 하리라” 는 부적을 교인들 집에 붙이게 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성공해야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고 한다는 사상입니다.

고지론은 인본주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걸 지금 교회들이 가르치고 있어요.

어느 개그맨이 말한 것처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 되고 말았어요.

자본주의 논리가 교회나 교인들을 삼키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나 절간이나 똑 같아요.

교회 안에는 십자가를 세워 놓았고, 절간에는 부처님 앉혀 놓은 것 하나만 달라요.

목사와 스님이라는 이름만 달라요.

교인과 보살이라는 이름 하나만 달라요.

목사는 가운을 입었고 스님은 가사장삼을 걸친 것만 달라요.

 

그 입에서 증거되는 내용은 목사나 스님이나 똑같아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높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토시하나 틀리지 않아요.

인간의 본성과 본능은 예수를 믿건 부처를 믿건 대동소이해요.

신을 찾아 온 목적은 다 똑같아요.

 

절간이나 교회가 이 고지론 사상에 물들었어요.

그러니 절간이나 교회마다 부흥을 외치고 신자들 가슴마다 성공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꿩 잡는 것이 매라고 성공만 하면 모든 것이 선으로 치부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만 하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라는 힘을 빌려서 세상을 정복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 사람들 위에 군림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고로 젖어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헐벗고 주리고 힘없이 죽어가는 예수는 수치스러워요.

가난하면 저주에요.

복음과 함께 고난 받는 신앙은 폐기처분 한 자가 오래입니다.

 

지금은 복음과 함께 영광을 받자는 신앙이 교회 강단을 차지하였습니다.

외쳐지는 것마다 성공이고, 부흥이고, 으뜸입니다.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게 복음 사상에도 그대로 침투해 있어요.

복음을 가지고 으뜸 노릇을 하고자 하잖아요.

복음을 안다는 것으로 잘난 자로 남고 싶어 하잖아요.

이게 고지론이에요.

 

복음을 알면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데 도리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왕노릇 하고자 합니다.

복음을 가지고 죽고자 하지 않고 살고자 한단 말입니다.

이런 복음은 없어요.

 

복음을 말하면서 높아지고 잘난 척하고 큰소리치고자 하는 것은 반 복음 적인 것입니다.

그런 복음은 거짓 복음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복음이 아니고 인간의 지식으로 습득해서 얻어진 복음이에요.

예수의 복음이 아니고 마귀의 복음이에요.

그러니 복음으로 왕 노릇하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나라는 나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요.

죄가 이런 구조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죄가 장악하면 반드시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십계명을 보세요.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요.

어떻게 말하나요?

자기가 살고자 남을 해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요.

 

자기가 살고자 하나님을 이용하잖아요.

우상숭배에요.

자기가 살고자 남을 죽여요.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해서 남에 것을 빼앗아요.

 

오로지 나 에요.

그러니 죄인의 세상에선 누가 누구를 섬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섬김 받고자 하지 섬기지 않아요.

아니 섬길 수가 없어요.

섬기면 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묻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섬김을 받고 있을까요?

섬기고 있을까요?

 

여러분 가정에서 해답을 찾아보세요.

가정은 하나님의 원리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요.

 

그럼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가 하는 일이 뭡니까?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합니까?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지요.

 

자식이 부모를 섬깁니까?

부모가 자식을 섬깁니까?

부모가 자식을 섬기지요.

 

자식은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고 살아요.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부모가 벌어 준 돈으로 학교 다니고!

부모가 돈 벌어서 산 집에서 공짜로 살고!

부모가 산 차를 타고 다니고!

부모가 사 준 옷을 입어요.

 

자식은 자기 수고로 살지 않아요.

전부 부모의 수고로 살고 있어요.

그럼 누가 누구를 섬기고 누가 섬김을 받고 있나요?

부모가 자식을 섬기고, 자식은 섬김을 받고 있어요.

이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달라요.

가정에서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어도 몰라요.

이 원리가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어요.

우린 하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어요.

 

그럼에도 교회에선 하나님을 섬기라고 배웁니다.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고 있음에 감사케 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으니 신앙생활이 기쁨이 아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이 기쁘지가 않고 복음이 자랑스럽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는 모두가 복음을 곡해하여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세상 나라의 원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강한 자가 되어서 섬김 받아야 성공한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세상을 정복하라고 가르치고!

부모는 자식에게 세상에서 강한 자가 되라고 가르쳐요.

그래서 눈만 겨우 뜨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보내는 겁니다.

생존경쟁의 밀림으로 밀어 넣고 있어요.

그러니 아이들이 전사(戰士)로 자라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는 싸움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져 주는 곳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자는 강한 자로 서 있지 않고 약한 자 위치에 서 있어요.

약한 자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강함을 약한 자를 섬기는 것으로 사용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가슴으로 복음을 받아 심장에 예수님이 새겨진 성도는 예수님처럼 종처럼 낮은 자로서 섬깁니다.

 

그러나 지식으로 복음을 알고 머리로 예수를 믿는 자는 자기가 최고인줄 알고 나댑니다.

복음을 지식으로 무장한 자들은 항상 남을 가르치려고 하고, 으뜸 노릇하고 싶어 해요.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여 강한 자가 되고자 해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힘에 원리에 민감해요.

모두를 경쟁상대로 보아요.

 

그래서 타인에 대하여 부정적이에요.

부정적이란 말은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마음에 쫓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못남을 감추기 위해서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그 사람을 부정함으로서 드러내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매사가 비판적이고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좋은 소리를 안 해요.

항상 자기만 옳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마음에 쉼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사람이 만족하면 여유가 있고 긍정적이 됩니다.

반대로 부족하면 부정적이 되어요.

부족하기 때문에 자꾸만 남을 부정적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복음을 처음 알고 난 후에 나타난 현상이 굉장히 부정적이었어요.

나와 다르면 이단이라고 했어요.

현실 교회를 부정적으로 보았어요.

다른 교회는 다 틀렸고 나만 옳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만나는 사람마다 나만 복음 알고 다른 목사들은 다 복음을 모르는 자라고 정죄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저에게 그러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가 부정적으로 말하는 그 사람들을 데리고 천국으로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에게 아니 하나님 저 사람들은 복음도 모르는 이단인데 어떻게 천국에 데리고 간단 말입니까?

 

천국에 가면 복음 아는 내가 가야지요.

그랬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네가 다 틀렸다고 하는 저 아이들을 가만히 두면 다 지옥에 갈 것 아니냐!

그러니 나 라도 저들을 데리고 가야하지 않겠느냐? 라는 겁니다.

 

너는 복음 안다고 천국에 간다고 하고!

저 사람들은 복음 모른다고 지옥에 가야한다고 하니!

너 한데 저 사람들을 맡겨 놓으면 다 지옥으로 보낼 것 아니냐!

그래서 내가 저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는 겁니다.

 

전 그 말에 화들짝 놀랐어요.

아니 내가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천국으로 데리고 간다고 하면 나는 뭔가!

내가 바로 하나님 앞에 이단이라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 아닙니까.

이건 내가 복음을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걸 깨닫게 해 주시더라고요.

 

결국 내가 이단이면서 남을 이단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복음 안다고 하는 내가 정작 복음의 내용을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복음을 이론적으로 머리로만 알았지 가슴으로 품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관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뱉어지는 것이 복음이 아니고 반 복음적인 언사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것인데 나는 복음을 핑계로 전부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지식으로 알아진 복음에 특징이에요.

그러니 입만 열면 부정의 말들이 뱉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목사님은 왜? 그렇게 부정적이세요? 라고 하면 복음 속엔 부정적인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내 자신을 돌아 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내 행동을 복음으로 합리화 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었어요.

나만 옳고 남은 다 틀렸다고 하는 정죄하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복음이라는 껍데기만 붙잡고 있었던 겁니다.

복음에 알맹이를 먹어서 배부름을 얻고 넉넉해 져 있어야 하는데 전 복음을 먹지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바로의 꿈처럼 내가 파리한 소같이 되어서 살찐 소들을 잡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감사하면서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데 나는 매사에 부정적으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패악질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정작 정답대로 살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했던 것입니다.

 

남들이 다 은혜 받고 있는데 나는 내 기준으로 저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마귀가 준 것이야 라고 판단했어요.

결국 나는 복음에 배부름을 얻지 못하고 파리한 소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배고픔에 빠진 아이처럼 엄마 젓꼭지를 물어뜯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건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적개심을 복음을 핑계 삼아 기존 교회들에게 화풀이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이에요.

이 얼마나 가난한 신앙입니까.

 

난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보시기엔 가련하고 눈멀고 발가벗고 곤고하고 헐벗어 가난했던 겁니다.

다행스럽게 하나님이 내 눈에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해 주셔서 눈이 떠진 겁니다.

야! 내가 바로 이단이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이단이 아니라 내가 반 복음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 속에 잠기지 못하고 내가 복음과 겉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내 안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반 복음 적인 것들이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죽이면 내가 사는 줄 알아요.

남을 넘어뜨리면 내가 서는 줄 알아요.

남을 부정하면 내가 옳은 자가 되는 줄 알아요.

다른 목사를 비판하면 그 교회 교인들이 다 내게로 오는 줄 알아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내가 틀리면 그 누구를 넘어 뜨려도 내가 옳음이 되지 않아요.

다른 목사를 비판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음으로 살면 됩니다.

내가 복음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눈만 뜨면 남을 헐뜯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과 상관없는 모습인 겁니다.

 

내 옳음은 남을 부정한다고 해서 인정되는 것이 아니에요.

옳음은 남을 부정하지 않아도 옳음으로 있고, 그름은 남을 부정해도 그름으로 드러나요.

그러니 내 옳음을 위하여 남을 그름으로 내 몰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내 옳음으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우린 그러지 않아요.

꼭 내 옳음을 남을 부정함으로서 증명을 받고자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가지고 맨 날 쌈박질이나 하는 겁니다.

파리한 소처럼 남을 물어뜯어서 죽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남이 죽으면 나도 죽어요.

남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어요.

한국교회 속에 나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니 한국교회가 죽으면 나도 죽는 겁니다.

 

이건 마치 선(善)과 악(惡)이 있는데 사람들은 악을 축출하면 선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선과 악은 하나에요.

악이 죽으면 선도 죽어요.

 

그러니 악을 죽일 것이 아니라, 선이 악을 감당하여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선이 악 속에서 살아요.

이게 십자가에요.

선이 살기 위해서 선이 악을 대신하여 죽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도에요.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이고 우린 죄인입니다.

의인이신 예수님은 선(善)이고, 죄인인 우린 악(惡)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으셨어요.

이걸 생명이 사망에게 삼킨바 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이신 선이 사망인 악을 대신하여 죽은 겁니다.

 

왜? 선(善)이신 예수라는 의인이, 악(惡)인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습니까?

이는 자신의 죽음으로 죄인을 살려내기 위함입니다.

의인이 죽은 그 자리에 죄인이 살아났어요.

의인이 죄인 속에서 살고자 죄인에게 잡혀 먹힌 것입니다.

 

왜? 의인의 죽음으로 죄인을 살려 냅니까?

이는 죄인 속에 자기 생명을 담아 두기 위함입니다.

의인이 죄인에게 먹혀 줌으로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함입니다.

이게 생명의 원리입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찾으러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이 이 땅에 죄인으로 있어요.

예수님이 죄인을 위하여 죽은 것은 자기 몸이기 때문에 죽은 겁니다.

 

예수님의 백성은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나왔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왔으니 예수의 몸인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 몸이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결국 자신의 몸을 살려낸 겁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인 자기백성을 살려 내려고 예수님 자신이 죽은 것입니다.

 

이걸 한 말의 밀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 알이 죽는 것은 그 속에 있는 수많은 밀알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 안에는 수많은 자기 백성이 있어요.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는 것입니다.

 

내가 한국교회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면 한국교회의 아픔을 나도 감당하여야 합니다.

한국교회를 죽일 것이 아니라 살리는 일을 하여야지요.

비판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에요.

죽이고 잘라내는 것은 쉬워요.

간단해요.

 

그러나 살리고 치료하는 것은 엄청난 아픔이 있어요.

살리고 치료하는 일엔 내 희생이 있어야 하고 내 죽음이 있어야 해요.

내가 죽어야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살립니까?

울어주는 것 밖에 없어요.

내가 그들 속으로 뛰어 드는 것입니다.

 

주여! 저 놈들을 다 불태워 버리세요! 가 아니라,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가 나와야 해요.

내가 저들 대신 죽게 하소서가 나와야 한단 말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 차라리 나 하나 지옥 보내고 저 무지한 동족들을 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울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복음을 아는 자이고 강한 자에요.

자기 목숨과 원수의 목숨을 바꿔치기 하는 것이 복음이에요.

 

강한 자는 남을 배척하지 않아요.

참아주고 용서하고 포용해요.

그만큼 여유가 있거든요.

 

마치 배가 부르면 너그러워지듯이 그래요.

배가 고프면 패악이 나오고 배가 부르면 관용이 나옵니다.

관대함이나 관용은 배 부른 자에게서만 나옵니다.

복음에 넉넉함이 있어야 나와 다름도 포용 할 수가 있어요.

 

예수를 먹은 자는 배 부른 자입니다.

자기 안에 예수가 있는 사람은 남을 잘라내고자 하지 않아요.

다 보듬고자 합니다.

그만큼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선 너희가 부끄러워하는 그 복음은 실상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는 죄인을 살려내는 능력이 있어요.

 

유대인들은 예수가 세리와 창기들과 노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단이라고 죽인 겁니다.

유대인들은 절대로 세리와 창기들과 놀 수가 없어요.

세리와 창기들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두를 담아 내셨어요.

예수님은 그들의 짐을 대신 져 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었어요.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셨으면 세리와 창기들과 놀았겠어요.

 

이건 마치 성도가 시주하러 오신 스님에게 대접하는 것과 같아요.

속된 말로 스님과도 사귐을 가질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복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단도 다 포용할 수가 있어야 해요.

이단을 인정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에요.

바울은 이 능력으로 살았어요.

누가 자기에게 이단이라고 하여도 씨익 웃었어요.

악악 대고 싸우지 않았어요.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포용하였어요.

 

바울은 자기하고 다른 말 한다고 해서 다 쫓아내지 않았어요.

누구에게라도 만유를 품은 주님의 마음으로 대하였어요.

자기하고 다르다고 해서 쫓아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없다는 말입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니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에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하고 다르다고 쫓아내는 것은 복음을 능력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능력이에요.

힘이에요.

그 어떤 것도 다 수용할 수 있는 파워에요.

그래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꺾이지 않고, 꼬꾸라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가두어지지 않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살았어요.

바울은 차라리 내 동족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내가 지옥으로 가겠다고 했어요.

이건 바울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었잖아요.

이게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세상 나라는 섬김 받는 자가 높은 자인데 하늘나라에선 섬기는 자가 높아요.

예수님은 왕이신데 종이 되어 섬겼습니다.

이는 높은 자이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관대함인 겁니다.

가진 자에게만 있는 여유로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사로잡히게 되면 세상에 강자(强者)로 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버림 당하는 약자(弱者)로 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주는 배부름으로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져 주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너희들 천국을 상속으로 받았잖아!

그러니 세상에서 고생 좀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메시야를 힘이 없는 모습으로 보내신 겁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모습으로 와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위에 계시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에 희비하지 않을뿐더러 세상 힘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아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는 이미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증거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이 메시야 되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사람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고 하신 겁니다.

사람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면 되었지 뭐가 아쉬워서 인간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느냐 입니다.

 

우리 신앙도 이러하여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알고 내가 주님을 알면 사람들의 평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나를 구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목사가 내 신앙을 인정해 준다고 해서 기뻐할 일이 아니에요.

그 목사가 날 구원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목사 눈치 볼 필요가 없지요.

내가 정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짜 예수를 만난 성도는 자기 안에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증거가 확실하면 사람의 증거를 구할 필요가 없어요.

누가 날 알아주지 않아도 낙망하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성도의 능력이에요.

 

이제 사람들은 복음을 왜?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며,

바울은 왜? 복음을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있는지를 간략하게 다시 정리하고 마칩시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타나서 자신을 계시합니다.

자신이 하늘로 왔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초월적인 사건들을 일으킵니다.

기적을 행하심으로 나는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 갖가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힘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역설적으로 힘이 없음을 보이십니다.

세상에서 지는 모습으로 자신을 던집니다.

힘을 자신을 살리는데 사용하지 않고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는 쪽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힘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아주 무기력하게 말이에요.

 

이건 유대인들이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로마와 싸우길 바랬습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는 열심당원입니다.

민족주의자에요.

 

가룟 유다는 예수의 힘을 빌려서 로마로부터 해방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어요.

민중봉기를 일으킨 것이 아니고 힘 없이 죽었어요.

그러자 군중들의 마음은 이내 적개심으로 바뀝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가 원하던 것에 미치지 못할 땐 금방 긍정에서 부정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존경하는 마음이 적개심으로 돌변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통하여서 자기를 투사하여서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는 자가 강할 때 자신도 강하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믿을 땐 반드시 그와 자신을 동일시하여서 봅니다.

자신이 따르던 사람이 망신을 당하면 자신도 망신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야인시대란 드라마에서 김두한이와 구마적이 맞짱을 떠서 구마적이 깨어지자 그 수하들이 길길이 날뛰면서 김두한이를 죽이고자 한 것과 같아요.

 

이게 교회나 집단 속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어요.

자기가 추종하는 목사가 망신을 당하면 자기도 망신당함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옹호하는 것입니다.

 

누가 자신이 추앙하는 목사를 공격이라도 해 보세요.

자신이 흑기사가 되어서 대신 싸우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단에게서 흔히 볼 수가 있어요.

교주가 무너지면 조직이 와해되기 때문에 교주를 철저히 지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복음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힘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니 진짜 복음이라고 한다면 그 목사가 무너진다고 해서 복음이 무너집니까?

그 조직이 와해된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습니까?

아니잖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복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아요.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지키고자 할 필요가 없어요.

복음은 복음 자체가 지켜냅니다.

교회가 문을 닫고, 조직이 무너지고, 목사가 죽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으로 계시고 복음은 여전히 복음으로 남아요.

 

복음이나 하나님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스스로 지켜요.

이걸 알면 목사가 무너지든 조직이 무너지든 신경 쓰지 않아요.

 

인간의 힘으로 복음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은 그건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복음 안에 들어가 있지 않고 복음 바깥에서 복음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 복음으로 인하여 자기가 얻을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복음으로 인한 유익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고 하자 막아 선 것은 예수님이 죽으면 자신이 지금까지 따라다닌 것이 헛것이 되기 때문에 죽지 못하도록 말린 겁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공든 탑이 무너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에겐 예수님은 항상 강한 분으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휘하에서 자신의 존재감도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지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훤히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없이 십자가에 죽은 겁니다.

베드로의 실체를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은 곧 모든 인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걸 정치판으로 인용하면 마치 박근혜를 추종하는 자들과 같아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어야 자기도 뭔가 한 자리 해 먹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박근혜가 좋아서가 아니라 박근혜를 이용하여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이겐 인간의 심리에요.

 

만약에 박근혜가 대통령 출마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아래 추중하는 세력들이 극도로 흥분하고 지금까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합니다.

적개심이 들어요.

자기 꿈이 다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이 기적을 행할 땐 자신도 기적을 행하는 자 속에 두고서 보았습니다.

이건 제자들도 동일했어요.

예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 할 땐 으쓱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힘없이 죽자 자신도 힘 없는 자로 전락하고 만 겁니다.

이게 싫은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물끄러미 보고 계신데도 그 면전에 대고 저주하고 부인하였던 겁니다.

나 저 인간 모른다고 말이에요.

다른 제자들도 다 그랬어요.

그리곤 도망을 간 겁니다.

도마뱀 꼬리자르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그 당시 유대인들이 정서였어요.

그러니 누구라도 선뜻 나 예수 믿는다 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저런 못난 인간과 함께 했다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강한 부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자 군중들은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힘을 빌려서 로마에서 해방 받고 싶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가 기적을 동원해서 로마를 응징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로마도 예수를 예의주시 했습니다.

혹시 민중 봉기라도 일으켜 로마 정부를 전복이라도 시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없이 잡히고 맙니다.

꿈이 산산이 부서집니다.

로마 군인들도 괜히 쫄았네 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롱합니다.

 

빌라도는 조롱하는 의미에서 예수의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패를 써 붙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 왕은 저런 힘 없는 놈이 아니고 가이사 라고 합니다.

우린 저렇게 무능한 놈을 왕으로 둔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지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예수쟁이들이 나타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합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야란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를 핍박하던 자들이 아니~ 메시야가 그렇게 힘 없이 죽냐!

그러면서 조롱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는 실패자입니다.

그런 실패자를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란 말입니다.

이게 그 당시 백성들이 바라본 예수님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난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원수도 사랑하는 능력이 복음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울 자신도 이 복음의 능력으로 죄인 중에 괴수인 자가 사도가 되었어요.

 

바울은 지금 그럽니다.

 

날 봐라!

내가 누구냐!

예수쟁이들을 잡아 죽인 자가 아니냐!

이런 죄인의 괴수에게 복음이 덮쳐왔다!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하는 능력이 복음이라고 합니다.

 

나는 예전에 바리새인으로 있을 땐 다 잘라내고 쫓아냈는데!

이젠 그 누구도 원수로 여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유대인에겐 유대인처럼 대하고,

이방인에겐 이방인처럼 대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 아래서 대하고,

율법 없는 자에겐 율법 없는 자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비를 주시고 햇빛을 공급하시듯이 자신도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복음이 주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고!

내가 모든 것을 빼앗긴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를 욕하면 그를 위하여 축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복음 안에서의 여유로움이고 관대함입니까!

복음은 넉넉합니다.

복음은 원수까지도 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습니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세상에서 망한다고 하여도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세상 너머에 있는 삼층천을 보고 살았습니다.

삼층천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살았어요.

그러니 관용으로 살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그렇게 가난합니까?

무엇이 그리 불안합니까?

왜? 그리 쫓깁니까?

제발 복음을 누리십시오.

 

제발 탕자 비유에서 맏아들처럼 살지 마세요.

맏아들은 아버지를 법으로 알고 한 번도 양을 잡고 소를 잡아서 잔치를 해보지 못하였어요.

죽도록 종처럼 일만 했지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어요.

그리곤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왜? 나에겐 소나 양을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지 않느냐고?

 

이에 아버지가 말합니다.

얘야~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그럼 내 마음대로 친구들을 불러서 먹고 마시지 않고 뭐 했느냐!

너는 내가 네가 친구들을 불러서 소나 양을 잡아먹는다고 나무라는 아비로 보았느냐!

어찌 아비의 마음을 그렇게도 모르겠느냐!

에이구~ 이 불쌍한 녀석아!

넌 언제쯤 이 아비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친구들을 불러서 소를 잡고 양을 잡아 진치를 하려므나!

 

그러나 맏아들은 그 마음에 아비의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어서 지금도 종처럼 죽도록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나오는 것이 동생을 죽이라고 하는 법인 겁니다.

 

지금 우리가 맏아들처럼 살고 있어요.

복음 복음하면서 복음 안에서 살고 있지 못하고 있어요.

복음에 대하여서는 박사들인데 정작 그 복음이 주는 넉넉함은 맛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하고 다르면 이리처럼 물어뜯는 것입니다.

복음 모르는 자들은 다 쫓아내는 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 어찌하여야 합니까.

 

우린 복음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아요.

그런데 우리 속엔 예수가 없어요.

말은 현란한데 그 말 속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공허해요.

건조해요.

심령이 싸늘해요.

그러니 나오느니 강포이고 악독이고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패악인 겁니다.

맏아들처럼 가난하기 이를 데가 없어요.

 

신앙생활이란? 내가 뭘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얼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고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구나! 를 알고 감사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난 이것 지키고 저것 지켰다는 것으로 나오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세요.

나 복음 안다고 나오지 말고 복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나 이런 사람이라고 나오지 말고 난 이런 은혜를 입고 삽니다! 를 고백하세요.

오늘도 이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라고 간증하시란 말입니다.

 

예전에 굶어 죽은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할머니가 굶어서 죽었는데 그 집안을 살펴보니 현금이 수억 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는 돈을 모을 줄만 알았지 사용 할 줄을 모르고 산 겁니다.

결국 헛 산 거에요.

왜? 돈을 모읍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굶어 죽었어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할머니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요.

복음을 알지만 그 복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어요.

맏아들처럼 말입니다.

복음 속에 담긴 풍성한 것을 마음껏 맛보고 나누고 즐기며 살아야 함에도 우린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어요.

 

전부 복음을 구경만 하고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가 걸려서 파리한 소처럼 살고 있어요.

네피림처럼 남을 죽이는 용사가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속에서 항상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악함과 악독이 뱀의 알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의 생명이 없는 이 현실을 어찌 받아 들여야 합니까?

 

복음을 수능시험 문제 외우듯이 하지 말고 복음을 먹으세요.

말씀을 구경하지 말고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세요.

먹고 배불러서 원수까지도 다 보듬을 수 있는 그런 넉넉한 여유로움으로 사세요.

이러한 것이야 말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부디 이 복음이 주는 풍성함 속에서 배부름으로 넉넉하게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율법 아래 가두어져 있던 자에게 복음이 덮쳐와 자유케 하심을 감사합니다. 예수 안에 만유가 품어져 있음을 보게 하시고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배부름을 얻게 하셔서 복음을 자랑케 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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