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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10강.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롬 1:16-17)

by coroa 2022. 4. 8.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0강.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롬 1:16-17)

-.정낙원 목사

 

롬 1:16-1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성경을 열면 제일 먼저 “태초에” 라고 운(運)을 뗍니다.

이는 태초가 역사에 침범을 하였다는 말입니다.

태초란? 세상 밖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서 세상 밖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밖을 하늘나라 라고 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세상을 역사(歷史)라 하고 하늘나라를 묵시(黙示)라고 합니다.

묵시는 역사에서 보면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묵시는 세상 밖에 있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는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고자 함입니다.

묵시에 속한 일들을 역사라는 캔버스에다가 그림을 그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묵시는 실상이고 역사는 허상입니다.

묵시는 실상으로서 영원한 것이지만 역사는 모형으로서 용도가 다하면 철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성도라고 한다면 세상을 가지고 태초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이야기를 가지고 태초 이야기로 읽을 수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야 성경을 올바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나라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 밖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 입장에서 보면 하늘나라 이야기는 생소한 이야기입니다.

생소하다는 말은 낯설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묵시를 영(靈)이라고 하고 역사를 육(肉)이라고 합니다.

 

영(靈)과 육(肉)은 실상과 모형으로서 존재양식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육(肉)인 역사 입장에선 영(靈)인 묵시에 관한 이야기들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아주 생경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밖 묵시에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선 예수님 이야기인 복음을 일컬어 생소한 방언이라고 합니다.

방언이란? 낯선 언어란 말입니다.

복음은 이 땅에선 낯선 방언입니다.

 

그럼 예수님 이야기는 세상에서는 낯선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 인간의 이성으로 감지(感知)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나!

예수님이 하는 모든 행동은 인간들 입장에서 보면 기이합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사람들이 서기관들과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는 기이하다고 했어요.

기이(奇異)하다는 것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이야기란 말입니다.

그래요.

예수님은 율법사나 서기관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달랐어요.

이건 유대인으로서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성경을 해석하는 법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는 성경 해석은 서기관이나 율법사와 같이 허락 된 자 이외는 그 누구도 침범 할 수가 없는 신성불가침(神聖不可侵)한 것이었어요.

지금처럼 아무나 해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반드시 서기관이나 율법사들이 해석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여야만 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점(點) 하나만 더하거나 빼도 전혀 다른 말이 됩니다.

그러니 전문가가 아니면 해석을 금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규칙을 벗어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어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도 않았어요.

히브리어를 모르면 성경을 해석할 자격이 없어요.

성경을 강론할 자격도 없는 분이 서기관들과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유대인들이 묵과 할 수가 없는 범법행위입니다.

 

기존에 하던 성경 해석의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볼 때는 이단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서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누구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이단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입장에서는 이단입니다.

이걸 역(逆)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이단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물론 인간들은 받아들이지 않지만 말이에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내가 저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면 저 사람 쪽에서 보면 나도 이단이에요.

내가 이단이라고 하는 그 사람도 나를 보고 이단이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단이라고 하면 서로가 이단이 되는 셈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서 죽였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도 이단이라는 뜻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만 하여도 유대인은 정통이었어요.

스스로 유대교 신앙이 정통 신앙이라고 여겼습니다.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죽임으로서 예수님과 유대교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단이 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유대교 신앙이 이단으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내심으로 유대교가 이단임을 폭로시킨 것입니다.

유대인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얼마나 밉겠어요.

 

유대교 신앙은 율법 신앙입니다.

율법 신앙은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는 신앙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서 의로워진다고 해요.

그러니 율법 신앙은 인간의 행함으로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였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의 요구에 합당하게 행하면 선하며 의롭다고 여기고 율법의 요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악하고 불의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율법 지킴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근본을 뿌리째 부정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서는 의(義)가 나올 수 없다고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義)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 외에 다른 의(義)에 있다고 합니다.

다른 의(義)란? 예수님에게 있는 의(義)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이라 규정하고 죽은 자라고 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죽은 자이기 때문에 쏟아내는 것마다 다 죄이고 부패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아무리 고상하고 의롭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선 배설물이라고 합니다.

이건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발끈하고 분개합니다.

예수님의 말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반발합니다.

넌 뭔데!

니가 뭔데! 율법 신앙을 부정하느냐고 죽여 버렸어요.

이걸 빛이 어둠에 비치니 자기 행사가 악함으로 빛을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아담의 군상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죄(罪)관을 무너뜨리고!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의(義)관도 무너뜨리고!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생명과 죽음에 의미도 새롭게 정의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새로운 죄를 말하고,

의를 말하고,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서 알려 줍니다.

복(福)과 저주(詛呪)에 관하여서도 새롭게 말씀하십니다.

인간들이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복이 아니고 저주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기존에 틀을 완전히 깨트려 버립니다.

이걸 경천동지(驚天動地)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옛 언약을 폐하고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건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옛 언약이라는 규칙으로 잘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옛 언약인 율법 신앙으로 잘 돌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옛 언약이라는 율법 신앙을 깨트려 버립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반(反) 율법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율법을 허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허무는 자라고 해서 율법에 근거하여 죽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허문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습니다.

잘못된 것을 허무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선한 일이지 악이 아닙니다.

 

도리어 잘못된 것을 그대로 두고 몰라라 방치하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것이 옳은 일이지 어찌 몰라라 하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의 눈에는 유대인들의 신앙이 틀렸기 때문에 틀렸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신앙이 틀린 줄을 모릅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는 유대인들에겐 예수님이 율법 신앙을 허무는 것은 악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동이 반(反) 율법적이고 율법을 폐기하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일은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고 율법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온 몸으로 다 받아 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완성하신 것이지요.

 

율법의 요구가 뭔가요?

누구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 아래서 났어요.

 

죄란? 비(非) 거룩이고, 불(不) 온전입니다.

그러니 죄 아래서 태어나는 인간은 다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다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셨어요.

자기백성들이 율법에 의하여 정죄 받아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온 몸으로 받아서 십자가에 대신 죽었어요.

 

이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누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백성들은 받아들일 것이고, 자기 백성이 아닌 자들은 거부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인간으로 나누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을 옳다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부정하는 사람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는 행동이나 말씀이 율법을 세우고 완성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유대인들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고 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고 믿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로워진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유대인들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대교처럼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로워진다고 하는 자들은 이단으로 보입니다.

저들의 눈에는 예수님과 같은 사고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와 “저희”로 나누고 갈라버립니다.

“너희”와 “저희”는 다릅니다.

너희란? 예수님 편에 속한 백성을 말합니다.

저희란? 예수님의 반대 편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예수 편이고, “저희”는 유대인 편이고 마귀 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허락하였고 저희에게는 감추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천국에 비밀이 허락이 된 자들이 있고 감추어진 자들이 있습니다.

천국을 보는 자와 천국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일컬어 천국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했어요.

그럼 예수님을 천국으로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로 구분이 됩니다.

서로가 보는 눈이 다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눈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집니다.

동일한 것을 서로 상반되게 해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들 간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이 분쟁은 클라이막스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영적 전쟁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태어납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다 함은 죄가 주는 정보를 가지고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판단하는 것은 모두가 틀린 판단입니다.

죄가 주는 정보로 판단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들 중에서 얼마에게 다른 눈을 갖게 하셨습니다.

물론 자기 백성들입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판단하는 눈을 주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영안(靈眼)을 열어 주신 겁니다.

 

오늘은 이 다른 눈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성도가 어떻게 다른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째서 우리는 유대인들과 다른 안목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를 상고해 보기로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본문 그대로를 보면 “두 믿음” 이 있습니다.

먼저 “믿음으로” 라는 믿음이 있고, “믿음에” 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도 믿음이고, “믿음에” 도 믿음입니다.

둘 다 믿음입니다.

 

쉬운 말로 “믿음으로” 는 목적지를 향해서 “인도하는 믿음”이고, “믿음에” 는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하는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 “믿음으로” 는 “능동적”이고, “믿음에” 는 “수동적”입니다.

“믿음으로” 는 앞에서 끌어주는 것이고, “믿음에” 는 뒤에서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걸 직역하면 “믿음이 믿음에 이르게 한다” 는 말이 됩니다.

믿음이 질질 끌고 믿음에 본체에게 골인시켜 준다는 말입니다.

 

헷갈릴 수가 있으니 잘 이해하세요.

어떻게 하든지 쉽게 설명하고자 하니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설명으로든지 깨달으면 되니까요.

 

다시 말합니다.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라는 믿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믿음”을 말하고!

뒤에서 말하는 “믿음에” 라는 믿음은 “우리 안에서 반응으로 일어나는 믿음”을 말합니다.

앞에서 말하는 “믿음으로” 는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인지(認知)하는 지식”이라고 한다면!

뒤에서 말하는 “믿음에 이른다” 는 것은 앞에서 예수님이 메시야 라는 것으로 “인지한 것을 수용하여 받아들이는 행함” 인 셈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예수가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겁니다.

이 믿음을 받지 않으면 예수를 믿을 수가 없어요.

안 믿어져요.

 

믿음이라는 선물을 받으면 예수가 구세주임이 믿어집니다.

그냥 예수가 아니고 “내 구주” 로서의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게 무진장 중요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내 구주라는 것이 안 믿어져서 죽인 겁니다.

 

“내 구주” 란 말은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 이란 말입니다.

“내 구주” 라는 말 속에는 나는 독자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음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안 되니 당신께서 구원 해 주세요” 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구주” 라는 말 속에는 자기 부인이 담겨져 있어요.

난 안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받으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소서” 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소경 거지 “바디매오” 를 통하여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8장입니다.

 

눅 18:35-43=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웅성 웅성 합니다.

그러자 그 틈에 있던 바디매오 라는 소경 거지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여보시오!

왜? 이리 소란스럽습니까?

이에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 가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러자 바디매오 라는 소경 거지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는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는 말은 메시야란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분이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이건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소경에서 있어 일차적인 구원이란 소경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은 구원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구원이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디매오를 가지고 누가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지 시청각 자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경이 예수를 알아본다는 것은 소경의 실력이 아닙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에 실력이 아닙니다.

이건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하나님께서 하신 고백이었듯이 바디매오의 고백 또한 하나님께서 하신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나 바디매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보고 구주로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소경인 바디매오와 주변에 눈을 뜬 많은 사람들 간에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눈을 뜬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냥 “나세렛 예수” 라고 하는데, 소경인 바디매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 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릅니다.

이는 영(靈)과 육(肉)의 차이에요.

 

“다윗의 자손 예수” 라는 말을 언약(言約)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다윗 언약을 따라서 오신 메시야” 라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 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그냥 육적으로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은 촌 놈이란 말입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유대인들이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르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라고 비아냥거린 적이 있지요.

그러니 지금 “나사렛 예수” 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촌 놈 이라고 비아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하(卑下)해서 부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그런데 소경인 바디매오는 예수를 촌 사람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로 보고 있어요.

다윗 왕권을 회복할 메시야로 보고 있습니다.

이건 아주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더욱 더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하였던 것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시끄럽다고 하면서 꾸짖고 잠잠히 하라고 했어요.

이건 앞도 보지 못하는 병신이 천지(天地)분간도 못하고 촌 놈을 메시야 라고 한다고 핀찬을 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꾸짖는다는 말은 시끄럽다 이 놈아!

자기 주제도 모르는 놈이 누굴 보고 메시야 라고 하느냐! 라는 책망의 말입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욱 소리 질러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 고 합니다.

이 말은 “내 구주여 나를 구원해 주세요” 라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은 구원해 달라는 말이에요.

 

아니 어떻게 소경인 사람이 예수님이 눈을 뜨게 해 줄 구원자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멀쩡히 눈을 뜬 놈들은 예수님을 촌 놈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앞을 못 보는 소경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바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비밀(秘密)입니다.

 

바디메오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디매오 속에 믿음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눈을 뜨게 해 주시고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놀랍지요.

 

멀쩡히 예수를 안다고 눈을 뜬 놈들은 예수를 호기심으로 따라 다녔어요.

기적을 맛보고 떡을 얻어먹고자 따라 다녔어요.

육신적인 것을 해결 받고자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눈을 감은 소경인 바디매오는 영적인 메시야로 보고 영접을 했어요.

이건 바디매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허락이 되었고 눈을 뜬 자들에겐 천국의 비밀을 감추어 버린 것입니다.

 

만약에 눈을 뜨고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면 주여 떡을 주세요! 라고 하지 않고 주여 구원해 주세요!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세상 것을 구했어요.

주여 떡을 주세요!

주여 병을 고쳐주세요! 라고 했어요.

 

정작 구하여야 할 “주여 나를 구원해 주세요!” 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소경과 눈뜬 자들이 동일한 예수를 서로 다른 안목으로 바라보았을까요?

이는 믿음에 문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차이입니다.

 

믿음이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아닙니다.

지적 능력이 아니라 함은 내가 알아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이해하여서 긍정하느냐 부정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은 예수가 메시야 라는 것을 아는 영적인 일에는 소경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데에는 인간적인 조건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소용이 없습니다.

많이 배웠든지, 못 배웠든지!

어린아이든지, 어른이든지!

소경이든지, 눈뜬 자이든지!

목사이든지 평신도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인간의 이성 밖에 문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했습니다.

억지로 풀지 말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건 역설적으로 성경은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럼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는 것은 예수님을 인간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다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는 것 속에는 성경을 다 알지 못한다고 하여도 구원 받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몰라도 되니 가만 두라는 겁니다.

괜히 어쭙잖은 지식으로 알고자 하다가 엉터리로 해석해서 그르칠 수가 있으니 덮어두라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깨닫게 해주면 깨달아지고,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몰라요.

그러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억지로 해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데 필요한 것은 다 알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천국은 믿음으로 갑니다.

우리가 성경을 다 이해하여야 가는 곳이 아닙니다.

성경을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이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가는 곳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서 낙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읽다가 이해되지 않으면 그냥 덮어두라고 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 내용을 반드시 알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것입니다.

어차피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만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사건 중심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사건은 논리적이지 않아요.

연속적이지도 않구요.

 

한 사건 사건마다 하나님의 계시(啓示)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건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어요.

그러니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벌리신 사건 속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건마다 마다에 예수님의 흔적들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많이 만났느냐 적게 만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믿어지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지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럼 되었어요.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으니까요.

 

한마디로 예수가 믿어지면 된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진다면 안심하세요.

믿어지는 것만큼만 믿으면 됩니다.

억지로 믿으려 하지 마세요.

믿어지는 것만큼 하나님이 믿어지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행동을 하다가 어른이 되면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는 때를 따라서 깨닫고 행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 만큼만 깨달으면 됩니다.

내가 어린 아이로 있다가 부르심을 받으면 그 상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10살 때 예수를 믿다가 죽는다고 한다면 10살 만큼의 믿음으로 구원 받아요.

10살 만큼의 믿음으로도 천국 가는데 지장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10살 때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10살짜리로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믿게 해 주는 믿음이기 때문에 차별이 없어요.

믿음은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천국은 이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것이지 얼마나 많이 알고 믿어야 가는 것이 아닙니다.

쉬운 말로 믿음이란? 얼마나 크냐 적으냐 라는 양적(量的)인 것이 아니라 어떤 믿음이냐 라는 질적(質的)인 문제란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억지로 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에 쥐가 나도록 끙끙 거리면서 해석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걸 확대 해석하면 억지로 예수를 믿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애쓰고 노력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그냥 믿어져요.

그러니 그냥 믿어지는 것만큼만 믿으면 됩니다.

이게 “믿음에서 믿음으로” 입니다.

 

믿음을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선물(膳物)이란? 어원적으로 사랑을 담아서 드리는 물건이란 뜻입니다.

물건이란? 실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믿음을 선물이라고 했으니 그럼 믿음도 추상이나 관념이 아니고 실체가 있는 실제란 말입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에 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실상이라고 합니다.

어떤 실상인가 하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실상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어떻게 실체로 나타나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경인 바디매오는 그 누구도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바디매오는 보았습니다.

무엇으로 보았습니까?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바디매오는 믿음을 실체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실상으로 믿음이 투사되어 나타내 보여준 것입니다.

이게 선물로 받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은 실체가 있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바디매오에게 “믿음으로” 라는 믿음을 선물로 주니까 그 믿음이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하는 “믿음에” 이르도록 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믿음에 실체인 예수님에게 골인한 겁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경인 바디매오에게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알아보는 믿음을 선물로 주었어요.

그러자 바디메오는 그 “믿음으로” 를 가지고 예수가 자기 눈을 뜨게 해 줄 구원자라는 것으로 믿고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고백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보고 고쳐준 것이 아니에요.

바디매오 속에 있는 믿음을 보고 고쳐주었어요.

 

그래서 바디매오를 칭찬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알려 준 것입니다.

지금도 그 믿음으로 구원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받은 자들을 찾아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개의치 않아요.

바디매오는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조롱을 하여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그랬을 겁니다.

여기저기서 소경이 뭘 안다고 나대느냐고 욕하고 조롱 했을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평신도가 뭘 안다고 나대느냐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바디매오는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는 그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중복 되더라도 “믿음으로 ~ 믿음에” 이른다는 것에 대하여 조금 더 상고해 봅시다.

 

믿음에는 두 믿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걸 기관차(機關車)와 객차(客車)로 비유합니다.

유치하다고 생각지 말고 잘 이해하세요.

 

열차는 추진력(推進力)을 가지고 앞에서 이끄는 기관차와 수동적으로 뒤에서 끌려가는 객차가 있습니다.

이걸 믿음으로 말하면 기관차처럼 앞에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끌어 주는 “믿음으로” 라는 믿음과, 객차처럼 끌려가는 “믿음에” 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앞에서 기관차처럼 말하는 “믿음으로” 라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믿음을 선물로 받으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은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게 하는 믿음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지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바디매오처럼 말이에요.

이 믿음을 받으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을 자기 백성들에게만 알려준다고 했지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비밀(秘密)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를 못합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요 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신이 만든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자신들을 창조하신 주인을 몰라봅니다.

몰라본다는 것은 소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럼 함께 아들인 자들이 알아봅니다.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영접케 해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 것은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하나님 아들들을 찾기 위함입니다.

예수라는 맏아들을 보내서 성도라는 아들들을 찾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들인 성도들은 하나님 아들인 예수를 알아보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들로 오신 겁니다.

 

쉬운 말로 형을 보내서 동생들을 찾아오라고 한 것입니다.

형은 동생을 알아보고 동생도 형을 알아보아요.

이걸 요한복음 10장에서 목자와 양으로 비유할 때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게 되어 있어요.

믿음이 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아들로 오셨다는 것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알다시피 아담이 범죄한 후로 하나님은 숨어 버렸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아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은 죄인에겐 숨어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만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분이란 말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옳은 관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만 하나님과 옳은 관계 안에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난 자들에게 의(義)를 주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의(義)가 뭐라고 했나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라고 했지요.

올바른 관계란 말은 서로가 같을 때만 이루어집니다.

서로가 다르면 올바른 관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서로의 삶이 다르면 올바른 관계가 형성 될 수가 없습니다.

 

올바른 관계가 형성 되려면 같아야 합니다.

가치관도 같아야 하고!

생각도 같아야 하고!

살아가는 방식도 같아야 합니다.

 

성경에선 이런 관계 안에 있는 것을 아버지와 아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봅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의(義)을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관계 안에 있는 것으로 말을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사람 속에 죄를 심어 놓았습니다.

마치 컴퓨터에 악성 바이러스를 심어 놓은 것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심어 놓은 겁니다.

인간 속에 죄가 심겨지고 나자 하나님과의 옳은 관계기 그른 관계로 깨어져 버렸습니다.

의(義)에서 불의(不義)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불의를 죽음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냅니다.

이는 생명과 죽음은 본질이 다르므로 하나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인데 아담은 죽은 자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함께 상종하며 관계 할 수가 없습니다.

 

상종하는 관계(關契)란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묶여져 있다는 말입니다.

생명과 죽음은 이질적(異質的)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산 것은 산 것끼리 묶어야 하고 죽은 것은 죽은 것끼리 묶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아하던 사람도 죽으면 멀리 묻어 버리는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서로 배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불의(不義)에 관계라고 합니다.

 

피조물에게 있어 죽음이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원래 흙에서 났습니다.

흙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창조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온 것입니다.

반대로 죽음이란? “있음에서”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있음”을 “없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되었는데 선악과를 먹고 나서 유(有)에서 무(無)가 되고 말았어요.

 

죄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무(無)란?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산 자의 세계에선 죽은 자는 버림의 대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죽은 자는 수(數)에 칠 가치가 없어요.

그래서 구약에선 하나님과 단절된 이방인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고 다 죽여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수(數)에 칠 가치가 없는 것은 죽은 자란 말입니다.

죽은 것은 불에 태워버릴 쓰레기에요.

그래서 죄인을 불 구덩이인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죄인이 가는 지옥을 불 구덩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죄가 이처럼 죽음을 몰고 왔습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케 하였어요.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들은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살아 날 수도 없습니다.

생명을 알아 볼 수도 없습니다.

이는 생명을 알아 보는 눈을 상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에게 아무리 살 길을 알려 주어도 모릅니다.

예수라는 생명의 근원이 왔는데도 몰라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땅에 왔음에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이유도 다 죽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믿게 해 줄 때만이 가능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심과 함께 자기백성에겐 예수를 믿을 수 있는 은사도 함께 주셨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만 예수를 알아보는 “믿음으로” 라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이걸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선 아버지께서 이끄신다고 했어요.

살펴보고 갑시다.

 

요 6:44-45=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요 6:65-69=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합니다.

이 떡을 먹으면 그 속에 영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수군거립니다.

 

미친놈!

아니~ 우리가 자기가 누군지 다 아는데!

목수 아들 주제에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한다면서 조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를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끌어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알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만이 예수가 산 떡이라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미친 놈이라고 욕을 하면서 떠나갑니다.

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갈래!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말하기를 아니 우리가 주님이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아는데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사온데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라고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예수님에게 이끌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입니다.

“믿음으로” 라는 말은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보고 믿게 하는 “원인(原因)”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으로” 라는 원인이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가 예수를 영접하는 “믿음에” 라는 행함을 낳은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키는 것도 아니에요.

믿음을 위해선 우리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됩니다.

 

예수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아는 것도 우리 실력이 아니고, 그 예수를 생명의 떡이라고 영접하는 것도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자랑 일수가 없는 것은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믿어지도록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다는 것을 자랑 할 수 없어요.

자랑 할 수가 없다는 말은 남과 차별 할 수도 없고 우월감을 가질 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자들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그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자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 것인지를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으로 살펴보기로 합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가 주(主)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그 예수를 주(主)로 믿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안다고 하면 어떻게 살까요?

당연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살겠지요.

예수 믿는 자기를 자랑 할 수가 없겠지요.

또한 복음 아는 것을 자랑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이나 혹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해요.

도리어 그들을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바울처럼 신자나 불신자 모두에게 빚진 자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게 하나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삶에 자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입니다.

주어(主語)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에요.

믿음으로 말미암아가 주어라는 말은 믿음이 나를 끌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음에 끌려 다니는 것을 일컬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 이라고 합니다.

 

이걸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은 믿음이 질질 끌고 다녔어요.

전부 믿음이 갖가지 사건 속으로 밀어 넣었어요.

 

그러다보니 하나같이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전부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았어요.

뭔가에 홀린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성도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이끌어주심으로 된 것이 되려면 인간의 노력이나 이성으로는 믿을 수 없어야 하겠지요.

불가능성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래야 하나님이 이끌어 주셔서 된 것으로 남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믿음 속에는 역설적으로 우리 힘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당장 예수고 뭐고 다 때려 치워야 하는데 그 때려치움이 안 된단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안 믿기가 안 된단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들면 안 믿으면 되잖아요.

그런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도 안 되지만!예수를 안 믿는 것도 안 되어요.

그래서 “불가항력적 은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도록 은혜를 주시면 반드시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도 우리 노력으로 안 되듯이 예수를 안 믿는 것도 우리 힘으로 안 된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원치 않는 길로 띠 뛰고 간다고 했어요.

띠 뛰고 간다는 것은 포로를 쇠 사슬에 묶어서 끌고 가는 것을 말해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이 그래요.

마치 포로들이 쇠 사슬에 묶여서 질질 끌려가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슬에 묶여서 끌려가게 되어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고 합니다.

또한 의인은 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관하세요.

예수가 믿어지도록 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 간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하여야 합니다.

바울이 이 고백을 하였어요.

 

갈라디아서 2장을 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삽니다.

어떻게 사는가 하면 예수 안에서 삽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산다고 하십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 때문에 산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바울처럼 자신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겠지요.

 

쉬운 말로 “예수님 덕에 삽니다” 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려 주셔서 삽니다” 라는 고백이 나타나야 해요.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하박국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으로 가 봅시다.

 

합 1:1-4=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하박국은 B.C 607년경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남쪽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이방인들처럼 살았어요.

왜냐하면! 그들을 괴롭히던 앗수르가 멸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앗수르가 흥왕 할 때는 너무도 힘이 드니까 하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하였어요.

 

그런데 자기들을 위협하던 앗수르가 망하자 이제 해방이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겁니다.

어려움이 사라지자 율법이 해이하여지고 급기야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하기에 이르렀어요.

쉬운 말로 등 따습고 배부르니 하나님을 다 떠나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육신이 편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인간은 몸뚱이가 편하면 그만입니다.

배고프고 어려우면 주여~ 주여! 하다가도!

배부르면 나요~ 나요! 해요.

내 배가 부르면 하나님도 귀찮아요.

 

지금 하박국 시대가 그랬어요.

자신들을 괴롭히던 앗수르가 망하고 자기들을 괴롭히는 자들이 없고 등 따습고 배부르니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사라진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율법이 해이해 지고 신앙을 다 팔아 먹게 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좀 혼쭐을 내야 하는데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들이 형통하고 반대로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거에요.

한마디로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들이 바보처럼 되고 만 겁니다.

등신짓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도 잘 사는데 의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얼마나 등신 같아요.

 

이걸 하박국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눈에는 하나님이 이상한 겁니다.

하나님이 잠자고 있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하는 일이 불공평하다고 보았어요.

불공평한 현실을 보고 탄식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왜? 세상이 이렇게 악한데도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느냐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불평하는 하박국에게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지 세상보고 사는게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다 생각이 있으니 잠자코 있으라고 합니다.

잠시 후면 내가 앗수르보다 더 강하고 무자비한 놈들인 바벨론을 들어서 율법을 떠난 저 패역한 놈들을 작살을 내겠다고 하십니다.

 

이에 하박국은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부흥케 해 달라는 말은 하루 빨리 주의 뜻대로 해 달라는 말이에요.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다 심판을 하고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만 남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하신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한마디로 하나님께 맡기고 살란 뜻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넌 나만 믿으라는 말입니다.

이에 하박국이 알았습니다! 라고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만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고 합니다.

이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입니다.

 

하박국이 부흥케 해 달라는 것은 이 시대 무식한 목사들이 교회 부흥을 외치는 슬로건으로 내 거는 말씀이 아니에요.

도리어 교회를 망하게 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짜들은 다 잘라내고 진짜들만 남게 해 달라는 말씀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꺼꾸러 사용하고 있어요.

교회 부흥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박국이 왜? 이런 말을 하였는지는 모르고 그냥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으니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아무 것에다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관~ 이에요.

 

부흥이란? 양적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질적 제련을 말해요.

진짜만 남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마치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다 걸러 내려고 쇠를 제련하듯이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다 작살을 내 달라는 말이에요.

 

그럼 이 시대 교회 안에 강대상 벽에다가 “주여 수년 내 부흥케 하옵소서” 라고 플랜카드로 걸어 놓은 것이 얼마나 무식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알겠지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할 말이 없어요.

이게 이 시대 기독교에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불평하는 하박국에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이 말씀은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악인들이 득세를 하고 형통하는 것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너는 나만 믿고 살라는 말입니다.

의인이라고 한다면 세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이에요.

하박국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인생살이가 우리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하지 말고 다 하나님 뜻이려니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복음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바울은 지금 복음으로 사는 자가 바로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복음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따지지 않고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지요.

다른 말로 율법을 지킨 자나 안 지킨 자나 따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복음을 의인화 하면 예수님이에요.

그럼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지요.

그 예수님 안에 있는 의(義)에서 구원의 능력이 나옵니다.

 

바울은 지금 율법과 복음을 대비하여 말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믿음입니까?예수그리스도의 의(義)를 믿는 믿음이에요.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을 지켜서 얻는 의(義)가 아니고 예수님이 거져 주는 주는 의(義)에요.

율법에 의(義)는 인간의 행함을 근거로 하지만 율법 외에 다른 의(義)인 예수님에 의(義)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주어지는 의(義)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있는 의(義)는 인간의 조건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義)를 믿는다는 말은 내 행위를 안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고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하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가 율법 외에 다른 의(義)를 말하고 있어요.

율법에 의(義)가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주어지는 의(義)를 말해주고 있어요.

율법에 의(義)를 부정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의(義)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행함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서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믿도록 믿음을 주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미암아” 가 중요해요.

“말미암아” 라는 말은 앞에 있는 주어(主語)에 종속된 말입니다.

 

그럼 말미암아 앞에 누가 있나요?

주어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가 있지요.

 

이 “믿음으로” 는 어떤 믿음인가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해 주는 믿음이지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믿음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럼 의인은 하나님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해 주신 그 믿음으로 살겠지요.

예수 안에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겠지요.

이걸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義)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나는 예수님의 의(義)로만 삽니다!” 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내 행위를 안 보고 예수님만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는가요?

 

이 시대 많은 성도들이 믿음 믿음 하면서도 정작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인 줄 몰라요.

 

믿음이란? 내 행위의 반대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내 행위를 안 보고 예수님의 행위를 본다는 말이에요.

예수님에 것을 의지하고 붙잡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믿는 것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성도가 믿는 것이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자기 죄 때문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성도를 의인이라고 하니 마치 의(義)를 행하는 사람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의(義)는 성도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도가 비록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몸은 여전히 죄 아래 갇혀 있습니다.

몸이 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가 주신 의(義)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의롭게 살으라는 말은 우리더러 의(義)를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의(義)로 살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살라는 말은 내가 비록 죄의 몸으로 살고 있지만 예수님의 의(義)로 덮어 주심 때문에 산다는 것을 믿고 살라는 말이에요.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에요.

죄인이라 함은 죄의 몸으로 사는 자란 말입니다.

죄의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마귀로부터 참소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의(義)에 옷을 입혀 주셨어요.

의(義)에 옷을 입혀 주셨으니 속은 죄인인데 겉은 의인이에요.

이건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복을 받는 것과 같아요.

 

아버지는 어! 이 놈 봐라! 목소리는 야곱인데 옷은 에서의 옷을 입었구나!

이 놈 믿음 대단 한데!

그래서 아버지는 옷의 향취를 맡고 축복을 합니다.

그러니 야곱은 야곱으로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고 장자인 에서로 받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비는 에서의 옷을 보고서 축복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아요.

우리는 야곱이에요.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아야 할 자에요.

그런데 우리에게 예수님의 의(義)에 옷을 입혀 준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지 않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예수를 보시고 구원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 안이에요.

이걸 놓치면 안 되어요.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새 언약이에요.

새 언약은 하나님과 예수님 두 분이서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하고만 상대를 하세요.

하나님은 예수님만 의롭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그랬어요.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의롭다고 인정해 주기로 했어요.

예수 밖은 무조건 죄인이고 예수 안은 무조건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기로 약속을 했어요.

이게 새 언약이에요.

 

이걸 믿어지게 하려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믿음을 주어서 하나님과 예수님이 세운 새 언약을 믿어지게 하셨어요.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새 언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야곱이 에서의 옷을 입고 당당하게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 로소이다” 라고 나아온 것과 같아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아버지의 맏아들 “예수” 로소이다” 라고 나아가요.

이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오직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이 가능해요.

그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받은 사람은 자기 꼬라지를 보지 않아요.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 대신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마귀는 자꾸만 자기 행위를 보게 하고 성령은 예수님의 약속을 믿게 하세요.

그러니 믿음으로 살면 평안을 얻는데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야~ 내 꼬라지가 이래서 되겠나!

그럼 자신을 자꾸만 꾸미고 모자라면 자학하게 되어요.

이건 신앙이 아니고 종교에요.

 

신앙은 예수를 바라보게 하지만 종교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어요.

자기에게 의미를 두는 사람은 지금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은 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에요.

자신이 추구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매진하고 또 매진을 하여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여기엔 안식도 없어요.

이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인간의 본성은 자꾸만 자기 자신을 믿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믿음을 주어서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예수 안에 머물게 하세요.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의인이에요.

나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의(義)로서 의인으로 간주하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간과하심이라고 해요.

간과하심이란? 간주해 준다는 말입니다.

죄인인데 예수 때문에 의인으로 간주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은 이 간주해 주심으로 산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의(義)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의(義)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의(義)를 증거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자이므로 의(義)를 행하고자 하지 말고 의(義)를 증거해야 합니다.

그 의(義)는 예수 안에 있어요.

그럼 성도는 “나는 예수 때문에 삽니다” 라고 늘 고백하게 되어 있어요.

이걸 일컬어 “예수의 증인”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왜? 예수 때문에 살 수 밖에 없는지를 알아야 하겠지요.

우리는 하나님께 늘 나는 왜? 의(義)를 만들 수가 없고 예수님의 의(義)로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대답하기를 너는 죄인이기 때문이라고 알려주십니다.

결국 믿음으로 살려면 내가 왜? 죄인이며, 또한 왜? 예수의 죽으심만이 의(義)가 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신앙의 싸움은 나는 왜? 죄인일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의(義)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왜? 죄인인가를 들추어내는 일을 말씀이 하세요.

우린 말씀 앞에 서면 우리 실존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폭로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는 자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말씀 앞에 서면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되어 있어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발생된 의(義)가 복음이 되지만, 내가 죄인임을 모르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나와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의(義)가 자랑스럽지가 않아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점점 더 죄를 자각하게 하십니다.

죄인으로 더 드러나게 하세요.

 

바울은 점점 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아갔어요.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예수 안에서 산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은 날마다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산다고 고백하였어요.

이는 자기 의(義)는 날마다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님의 의(義)만 남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깊이 알아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깊이를 아는 것만큼 비례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감사가 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많이 탕감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고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일이 아니고 사귐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나의 모든 것보다 주 예수가 귀하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서로만 됩니다.

 

우린 이 “믿음으로” 를 받아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사랑하는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이 믿음을 선물로 받음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복을 받은 자로서 감사함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 주심에 늘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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