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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강해)12강. 금수와 버러지 같은 인생 (롬 1:18-25)

by coroa 2022. 4. 11.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강. 금수와 버러지 같은 인생 (롬 1:18-25)

-.정낙원 목사

 

롬 1:18-25=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不義)로 진리(眞理)를 막는 자들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모두가 불의에 속한 자가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한다는 말입니다.

 

이건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우리 생각은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이 네~ 이 놈! 하고 벌(罰)을 내린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을 열면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고 진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안 믿는 자에게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심판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준으로 심판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죄가 없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옳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용서하고 누구든지 예수 밖에 있으면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선 내가 착하냐! 악하냐! 는 심판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 자체를 죄인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이 착함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죄이고, 악함이라고 내어 놓는 것도 죄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인간의 착함이냐! 악함이냐! 는 일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선행(善行)이나 악행(惡行)과 같은 인간의 조건으로 신앙의 근거로 나아오는 것 자체가 진노 받을 불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은 죄인이므로 인간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산 자”이고 죄인은 “죽은 자”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가치가 다릅니다.

산 자의 세계에선 살아 있어야 가치로 여깁니다.

죽은 것은 무가치합니다.

 

산 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이므로 무가치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인 인간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주시고 그것을 들고 나오라고 합니다.

 

이를 “여호와 이레” 라고 합니다.

 

“여호와 이레” 란? 여호와께서 친히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받으실 제물을 친히 준비하십니다.

그 제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십니다.

그럼 자기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제물을 들고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제물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창세전에 예비 된 여호와 이레로 준비된 제물로서의 “한 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님께 바쳐질 어린 양이란 말입니다.

그럼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어린 양을 들고 나아갑니다.

 

그러니 자기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제물이 있습니다.

자기백성은 그 제물을 의지하고 나아갑니다.

그럼 무엇을 들고 나아가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 백성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제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수라는 그 제물을 의지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워요.

억지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신앙생활을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만 받으세요.

하나님이 인간의 것을 받지 않는 것은 정성(精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의(義)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 속엔 하나님이 바라는 선(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인간의 착함이 선(善)이 되고 의(義)가 될 수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선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는 선(善)과 의(義)는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근본은 하나님의 선(善)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의(義)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기 이전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선 정성보다 앎이 우선입니다!

열심보다 앎이 먼저입니다!

항상 어느 시대이고 그릇된 열심과 그릇된 정성이 하나님을 배척하였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망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를 드리니까 문제가 된 것입니다.

차라리 제사를 안 지냈으면 미안한 마음이라도 있었을 터인데!

그 제사 지낸 것이 있어서 모가지가 뻣뻣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망합니다.

인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다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죄 아래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죄가 알려준 정보로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은 죄 아래서 아는 하나님을 가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즉 우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펴면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돌하면 우리가 죽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죽이든지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죽여요.

 

우리가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죽여 버려요.

하나님이 피해자(被害者)가 되고,

우리가 가해자(加害者)로 남게 되어요.

이렇게 생겨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이 의인을 죽인 사건이에요.

죄인이 하나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십자가 앞에 서면 죄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구원과 심판을 하십니다.

 

구원이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구원이 용서이고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도 구원 속에 하나님의 용서하심이라는 은혜만 오롯이 남게 하고자 함입니다.

신앙이란? 이 은혜에 감사하고 이 은혜 안에서 살고 이 은혜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모두가 인간은 죄인이라서 하나님에 대하여 소경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인간을 일컬어 어둠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어두움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여도 그 신앙은 헛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신앙생활이란? 열심에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로 남게 됩니다.

인간들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들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 “바꾸었다” 는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을 썩어질 것으로 바꾸었다” 는 말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 영광이고!

썩어질 것은 금수와 버러지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주 영광이고!

금수와 썩어질 버러지 형상은 피조물의 영광입니다.

창조주의 영광은 생명이고!

피조물의 영광은 죽음입니다.

 

그러니 생명과 죽음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이 있나요?

그래서 소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경이니 참과 거짓을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만물을 다스려야 하는데 만물을 숭배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죄(罪)가 몰고 온 결과입니다.

죄가 이처럼 어리석음으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죄가 몰고 온 어리석음이 우리들 신앙생활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게 되는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니 만물 속에는 하나님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만물 속에 하나님을 알만 한 것을 담아 놓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잖아요.

 

그런데 죄가 이를 가려 놓은 겁니다.

그러니 만물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물만 보았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만물을 숭배하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만물을 보고서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만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게 죄인이에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되어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인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는 마음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알 수가 있는데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 자식을 기껏 키워 놓았더니 이 새끼가 어미 애비를 몰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어 봅시다.

 

바울이 로마서를 누구에게 쓰고 있습니까?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쓰고 있어요.

우리에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도 나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어요.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하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이 우상이 되었고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마음이 어두워 졌을까요?

모두가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두우니 자연히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죄인을 소경이라 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 말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여기 이 세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말입니다.

이걸 흔히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 되었다는 말로서는 충분하게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인식론(認識論)으로는 무(無)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세상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하지만 다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지(感知) 할 수 없는 세계란 뜻입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세계란 인간 세상 밖에 세상을 말합니다.

인간이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이름하여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기에 대한 힌트가 나옵니다.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聖)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보지 못합니까?죄 때문입니다.

 

죄가 만물 속에 담긴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볼 수 없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럼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만물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감지(感知)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성도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감(交感)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야 성도입니다.

 

죄가 하나님을 볼 수 없도록 눈을 멀게 하였다고 한다면 죄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보는 눈을 뜨게 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하게 천당에 간다는 그 차원을 훨씬 뛰어 넘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 것은 가난한 신앙입니다.

이 땅에서도 천국으로 살아야 합니다.

천국은 죽어서 나중에 가는 곳이 아니고 현재 여기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구원 속에는 엄청난 것이 담겨져 있습니다.

구원을 받으면 만물과 소통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소통한다는 말은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아니~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라고 하면서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 못한다면 허울뿐인 성도입니다.

이런 신앙을 관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니 실상은 죽은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잃어버린 것을 다 찾아 주셨습니다.

 

아버지도 찾아 주셨고!

천국도 찾아 주셨고!

영생도 찾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도 찾아 주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도 찾아 주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린다는 것은 만물 위에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로 만들어 놓았다고 했지요.

죄가 만물 위에서 살아야 할 자를 만물 안에 가두어 놓았어요.

그러니 죄인은 만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 가운데 허우적거리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만물 밖으로 꺼내 주셨습니다.

삼층 천에서 만물을 내려다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젠 만물에 가두어지지 않고 만물 위에서 만물을 살고 있게 된 것입니다.

 

만물 위에서 만물을 산다는 의미는 세상 가치에 매몰당하지 않고 산다는 말입니다.

세상 가치를 초월하여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세상에 가두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를 산 사람들이 사도들이고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세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성령이 성도를 세상 밖으로 끌고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비록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 사람 아닌 자로서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을 봅시다.

 

요일 2:12-17=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도요한이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성도들아!

너희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젠 흉악한 자를 이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것을 되찾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찾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가 뭘 몰고 왔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하였다고 하였지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가득 들어 있는데 그걸 읽어내는 눈을 상실하였다고 하였잖아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니 태초에 계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태초를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흉악한 자를 이기게 되었다고 하잖아요.

흉악한 자가 무엇으로 괴롭힙니까?

세상 것으로 괴롭혀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괴롭힌다고 하지요.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인간들은 만물 속에 가두어 버렸어요.

그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영원한 것을 잊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마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일평생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쫓아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 속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밖에 있어요.

예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니 세상 것으로부터 이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린 예전에 예수를 몰랐을 땐 세상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세상 것에 얽매여서 살았습니다.

세상 것으로 희노애락의 근거를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난 후로는 세상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이젠 세상 것으로 인하여 희노애락 하지 않습니다.

만물 밖에 있는 태초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세상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잃어버렸던 만물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이젠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핍박하지 아니할 터인데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나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이걸 만물 가운데 살지만 만물 바깥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 바깥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한 자들을 세상 바깥으로 건져주었습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이 만물 가운데 속한 자들을 만물 바깥으로 건져 주셨잖아요.

그럼 마귀는 역(逆)으로 예수님이 만물 바깥으로 건져 놓은 자들을 다시 만물 안으로 끌어 들이는 일을 하겠지요.

 

이건 구원을 취소시킨다는 말이 아니고 가치관을 땅에 것에 매어 두겠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그 누구도 취소 시킬 수가 없어요.

심지어 우리 자신도 우리가 은혜로 얻은 구원을 취소하지 못해요.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 행위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셨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지지 않아요.

 

그래서 마귀도 우리를 지옥으로 보낼 수가 없어요.

다만 천국 백성을 지옥으로 살게 할 수는 있어요.

지옥으로 살게 한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으로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좇아가게 한단 말이에요.

쉬운 말로 부잣집 아들을 끄드겨서 거지로 살게 할 수 있단 말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 것으로 붙잡아서 세상에 종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건져 낸 것을 다시 세상 것으로 유혹하여 빠지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 육신은 세상 것이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오는 유혹에 연약해요.

마귀는 이걸 노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걸 알기 때문에 광야에서 예수님도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으로 시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 할 때 무슨 말을 하셨나요?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 라고 했지요.

이건 흙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뱀에게 흙을 근거로 살아가도록 하였습니다.

흙에다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천국(天國)이란? 하늘에 있는 나라란 뜻이고!

지옥(地獄)이란? 땅에 있는 감옥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뱀을 종신토록 흙을 먹게 한 것은 땅이라는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땅을 지옥(地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뱀의 근거지에요.

그러므로 뱀은 어찌하든지 인간을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땅에 것으로 붙잡아 둡니다.

땅에 것에 붙잡히면 마음은 무관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다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뱀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인간을 땅에 붙잡아 둡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광야에서 주리실 때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이것으로 시험하셨어요.

누가복음 4장을 봅시다.

 

눅 4:1-13=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고 나자 성령이 임하십니다.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동시에 받았어요.

예수님의 물 세례란? 의인이 죄인으로 연합하는 세례에요.

이건 죄 없는 분이 죄인에게 연합하여서 죄인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는 세례에요.

 

이것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 죽는 죽음이에요.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어요.

이게 세례에요.

 

성령 세례는 물 세례와 반대로 죄인을 의인 속으로 끌어당기는 세례에요.

이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와 연합하기 위해서에요.

물 세례는 죽이는 세례이지만, 성령 세례는 살리는 세례에요.

 

그러니 성도는 예수님과 연합된 자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같이 죽었고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을 하실 때 함께 부활을 한 것입니다.

그 증거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게 하세요.

 

예수님이 물 세례와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찾아옵니다.

왜? 찾아옵니까?

 

네가 진짜 하나님 아들이 맞는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마귀에게 붙여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묻습니다.

 

야! 예수야!

너 진짜 하나님 아들이 맞느냐!

네가 만약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면 세상 것을 움켜잡으라고 합니다.

이게 무진장 중요한 시험이에요.

 

자 보세요.

예수님이 삼십년 동안 목수로 살았어요.

쉬운 말로 만물 가운데 가두어져 살았어요.

이건 마치 우리가 죄 아래 가두어져 산 것과 같아요.

 

그러다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님을 요단강으로 불러내서 세례요한으로부터 물 세례를 받게 함으로서 사생애를 마감시킵니다.

예수님의 물 세례는 예수님 자신에게는 사생애를 마감하는 세례에요.

이건 우리 옛 사람이 죽는 것과 같아요.

 

그리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거듭납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시작이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땅 사람이 하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대신하여서 이러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습 속에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는 것은 곧 우리가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하늘에 사람이니까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네가 진짜 하늘에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땅에 것으로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고 하는 거에요.

 

하늘에 사람이기 때문에 땅에 것으로 시험을 치는 것입니다.

“야! 너 하늘 사람이 맞느냐!”

“그럼 내가 땅에 것을 준다고 하여도 싫다고 하여야 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넘겨 준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세상(흙)에 속한 것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뱀을 저주 할 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고 했잖아요.

이건 땅에 것을 넘겨 준 것이에요.

 

지금 마귀가 그걸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쫓겨 날 때 하나님이 나에게 세상 것을 주어서 땅에 속한 죄인을 다스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땅에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에게 나에게 절을 하라고 하는 거에요.

그럼 천하만국의 부귀영화를 다 주겠다고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이 하늘에 속한 분임을 알아요.

그러니 너 하나님 아들이 맞느냐 라면서 땅에 것으로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 속에는 하늘에 사람이라고 한다면 땅에 것을 초개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담겨져 있어요.

마귀는 지금 예수에게 아무리 굶어서 죽게 된다고 하여도 사자가 풀을 먹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아들들이 먹는 흙을 먹을 수는 없지 않느냐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 아시고 하늘에 방법으로 응수합니다.

야! 내가 아무리 배가 고파도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떡을 바꿔 먹을 수 있겠느냐!

차라리 죽고 말지!

그러는 것입니다.

이에 마귀가 허!~ 그 놈 참 신통하네! 하고서 예수님을 떠났어요.

너 진짜 하나님 아들이 맞구나! 하면서 말이에요.

 

지금 하나님이 마귀를 예수님에게 보내서 시험하게 하신 이유를 알겠습니까?

왜? 땅에 것으로 하늘에 사람을 시험하는지 아시겠어요.

뱀이 주는 것을 먹겠다고 하면 그건 뱀 새끼이지 하나님 자녀가 아니에요.

하나님 자녀는 뱀에 음식을 먹지 않아요.

그래야 하나님 자녀에요.

 

여기서 또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고 갑니다.

그럼 목사님!

성도는 떡을 안 먹고 뭘 먹고 삽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이건 성도가 떡을 안 먹는 다는 것이 아니고 삶에 목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거에요.

예수님도 떡을 잡수셨어요.

육신은 떡을 안 먹으면 죽어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마귀가 돌을 떡이 되게 하라고 하자!

싫어! 난 하나님 말씀 먹을래! 라고 하였다고 해서 예수님은 떡을 안 먹고 하나님 말씀만 먹고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은 육신의 양식이 아니에요.

육신의 양식은 떡이지 말씀이 아니에요.

성경 말씀 달달 외운다고 해서 배가 부르지 않아요.

 

예수님께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것은 하늘나라 백성은 삶에 목적이 세상에서 붙박이장처럼 콱 박혀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지 밥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걸 모르면 목사들에게 속아서 돈 다 빼앗겨요.

잘 이해하세요.

 

살아가는 이유를 양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자녀가 먹을 양식이 따로 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 언약이에요.

성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요.

그러니 떡을 열심히 먹되 내가 왜? 떡을 먹고 사는지 그 이유를 아시란 말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하신 것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너 왜? 사는데!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너 왜? 돈 버는데!

너 왜? 직장 다니는데!

너 왜? 밥 먹는데!

그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먹는다고 하여야 해요.

 

마귀가 야! 예수쟁이가 돈을 버느냐 라고 하면!

그래 나 예수 때문에 돈 번다고 하세요.

돈 벌어서 열심히 예수님 증거하고자 한다고 하세요.

돈을 버는 목적을 분명히 말하란 말입니다.

 

괜히 예전에 1992년도 10월 28일 날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하던 자들처럼 예수님이 재림 하시니 직장도 그만 두고 자식들 학교도 안 보내고 그러지 마세요.

직장 생활 하다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시면 그대로 올라가면 되잖아요.

 

예수님이 그러잖아요.

두 사람이 밭에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두 사람이 매를 갈고 있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맡겨진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세요.

 

직장인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직장생활 하시고!

주부는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아이 키우고 집안 살림살이도 하시고!

학생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학교도 다니세요.

 

괜히 직장도 그만 두고, 학교도 그만 두고, 교회에서 밤새워 목이 쉬도록 악다구니 쓰면서 기도한다고 하지 말고!

그건 지랄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니에요.

또 거리로 나서서 돼지 멱따는 소리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건 발광하는 거예요.

 

살아가는 것을 등한시 하여 교회에 죽치고 불로~ 불로 하는 것은 지랄하는 것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불로~ 불로 하는 것은 발광하는 것이에요.

그러니 지랄 발광하지 마세요.

 

그냥 자기가 처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세요.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사랑에 빚진 자로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섬기고 봉사하고 사세요.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말씀을 듣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밥숟가락만 빼면 일도 안하고 성경을 보고 기도를 하고 컴퓨터에 앉아서 설교 듣는다고 죽치고 있어요.

그게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건 말씀 듣는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어떤 목사는 자기들 집단에서 행하는 강의에 참석하고 수련회에 참석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그래서 자기교회 교인이 가게를 오픈했는데 수련회도 참석하지 못할 것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구요.

이게 바로 이원론 사상이에요.

이런 말 한마디 속에 그 사람의 신앙관이 다 담겨져 있어요.

 

신앙생활이란? 들은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시고는 양을 이리 가운데로 파송하시지요.

양을 이리 가운데 파송하는 것은 이리 가운데 가서 물어뜯기면서 예수님의 아픔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이리 가운데 왔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양이 이리 가운데 오신 것과 같아요.

우리가 이리에요.

우리가 예수를 뜯어 먹었어요.

 

우리가 예수를 뜯어 먹었는데 그 예수가 우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린 지금 예수로 살고 있는 거에요.

이런 사람들이 성도에요.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말씀이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양으로 오셔서 이리에게 죽임 당하였어요.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자신이 이 세상에서 당한 운명 속으로 밀어 넣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주시곤 그리고 이리 가운데로 밀어 넣고 계시잖아요.

말씀을 들었으니 이제 가서 그 말씀대로 풀어내라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이에요.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책상머리 앉아서 땅콩 까먹으면서 영어단어 외우듯이 말씀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같이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건 이리 속으로 가서 잡아먹힐 때 앵앵거리지 말고 잘 잡아먹히기 위해서 예방 접종 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 속에 말씀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어둠 속으로 보내심을 입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다 그랬어요.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그리곤 죽으러 보냈어요.

 

요한계시록 10장 11장을 보세요.

 

계 10:7-11=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1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보세요.

천사가 요한에게 작은 책을 먹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먹을 땐 달콤한데 배에 들어가니 씁니다.

이건 말씀을 듣는 것은 재미있고 쉬운데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은 쓰디쓴 고난이고 죽을 일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는 것은 쉬워요.

고난이 없어요.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 삶에서 풀어 질 때는 엄청난 아픔이 동반 되어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고난인 것입니다.

 

천사가 작은 책을 먹이고선 뭐라고 합니까?

다시 예언하라고 하지요.

다시 예언한다는 것은 예전에 한 것을 다시 하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누가 했나요?

예수님이 하셨어요.

사도들이 했어요.

 

그런데 어디서 다시 예언을 합니까?

성전에서 합니다.

이들을 두 증인이라고 합니다.

 

계 11:1-9=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6 저희가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 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7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8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작은 책을 먹으니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지요.

여기서 갈대는 캐논이에요.

말씀이에요.

 

무슨 말씀인고 하니 새 언약이라는 말씀이에요.

새 언약을 가지고 옛 언약 교회로 보내는 것입니다.

가서 척량하라는 것입니다.

이건 심판하라는 말이 아니고 증거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 증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증인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증인이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자에요.

그래서 먼저 작은 책을 먹이는 것입니다.

새 언약이라는 말씀을 듣게 하신 겁니다.

 

두 증인이 누구냐 하면 성령을 받은 성도가 다 두 증인이에요.

그러니 우리 모두가 다 두 증인들이에요.

우린 모두가 작은 책을 먹었어요.

예수님의 피에 복음을 들었어요.

 

하나님이 듣게 하시고 먹게 하셨어요.

먹이시곤 보냅니다.

어디로요.

성전으로 보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로 보내는 것입니다.

 

교회에 가면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예배하는 자들도 있고!

성전 밖 마당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즉 교회에 가면 복음 아는 사람도 있고, 복음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누가 복음을 아느냐 모르느냐 따지지 말고 가서 복음을 받은 자로서 섬기면 되어요.

 

두 증인들이 어떻게 하고선 외칩니까?굵은 베옷을 입고 외치지요.

굵은 베옷은 죽은 시체가 입는 옷이에요.

이건 가서 죽은 자처럼 있으라는 겁니다.

결국 죽임 당합니다.

 

그런데 두 증인들이 죽은 곳이 어디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죽은 곳이라고 하지요.

예수님이 어디서 누구에게 죽임 당하셨는가요?

자기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죽임 당했잖아요.

 

그럼 지금 두 증인들이 어디 가서 누구에게 죽임 당하여야 합니까?

교회에 가서 형제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죽임 당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낼 때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냈는가요?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이 보내셨지요.

결국 두 증인들은 예수님과 같은 신세가 되어서 죽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임 당하는 것을 말씀이 배에서 쓰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해요.

예수를 믿는 도리인 신앙(信仰)을 생활(生活)이라는 삶으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책상머리 앉아서 컴퓨터에 앉아서 말씀 듣고 복음 안다고 주절거리는 것이 얼마나 신앙생활을 관념으로 하고 있는 것인 줄이나 아세요.

십자가 도는 주둥이로 읊조리는 것이 아니에요.

삶으로 풀어내는 것이에요.

 

그래서 말씀을 양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었으면 그 힘으로 살아야지요.

밥은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에요.

예수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신앙생활이 피 튀기는 전쟁이고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싸움인 것입니다.

싸움엔 얻어터지고 깨어지고 맞는 아픔들이 있어요.

이걸 간과치 마세요.

이 싸움을 맨 정신으로 할 수가 없으니 성령을 주셔서 새 술에 취한 사람처럼 만들어서 다시 예언하다가 맞아 죽게 하는 것입니다.

 

두 증인들이 성경 달달 외우고 있지 않았어요.

달달 외우고 나면 하나님께서 보내실 것입니다.

작은 책을 먹이시곤 보내잖아요.

이게 신앙생활의 원리에요.

 

그렇다고 지금 당장 가라는 말이 아니에요.

말씀이 차면 그 안에서 달음질을 할 때가 옵니다.

그럼 그 때에 가세요.

말씀이 가만있지 않고 여러분들이 죽을 자리로 끌고 갈 것입니다.

 

에스겔을 보세요.

작은 책을 먹이고선 전갈에게 보낸다고 하잖아요.

자기 백성이 전갈이라고 합니다.

아프게 하는 자들이란 말이에요.

누가요?

 

교회 교인들이 그래요.

그러니 우린 가기 싫은 겁니다.

그래서 말씀만 받아먹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노는 겁니다.

가서 말해 보아야 알아듣지도 못하고 욕을 하니까 그게 싫은 거에요.

그러니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옷에 피 한 방울 안 묻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피 묻은 옷을 입고 오신다고 하지요.

피 묻은 옷은 전쟁터에서 입는 옷이에요.

전쟁하는 군사의 옷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어요.

군인의 몸은 상처투성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피 묻은 옷을 입고 전쟁터에 있는 자기 군사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옷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있어요.

싸우지 않고 집구석에 있으니 옷이 반짝 반짝 빛이 나요.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자기 집안 식구들에게도 영향을 끼치지 못해요.

자기 가족 하나 사랑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식구들이 예수라고 하면 고개 잘래잘래 흔드는 겁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 복음하는 집단 속에 가득해요.

복음 복음하면서 선생이 되어서 전부 변론하고 논쟁하고 쌈박질만 하고 있어요.

이 모두가 복음을 지식으로 습득해서 그래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워요.

예수가 머릿속에 있으면 교만하고 예수가 가슴 속에 있으면 사랑과 덕이 나와요.

그 사람이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 사람의 삶을 보면 대번에 알 수가 있어요.

잘 분별하세요.

 

제가 복음 안다고 하면서 집에 빈둥거리지 말고 가까운 교회로 가라는 말은 저 교회는 복음 안 전하는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나요! 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칭 복음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요.

교회나 사람들에게 거치는 자로 있는 자들이 많이 있어요.

혼자 복음 다 아는 척 하면서 온갖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말씀을 듣게 하시면 그 말씀을 씨앗으로 심을 때가 옵니다.

어느 날 말씀이 나를 부인하게 하고 낮아지는 자리로 내려가게 할 것입니다.

그 때와 기한은 하나님이 정하시니 우린 알 수가 없습니다.

 

이건 여러분들에게 억지로 행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복음이 덮쳐오면 그 복음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함입니다.

말씀이 차면 예레미야처럼 마음이 격동하여서 가만있지 못하고 외칠 때가 옵니다.

그럼 그 때 가서 전하면 됩니다.

억지로 하지 마세요.

억지로 하는 것은 자기 의(義) 쌓는 일이지 복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감사하면서 살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교회라고 생각하고 여러분이 계신 그 곳에서 하나님과 화목 된 자로서 화목의 사신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자 답게 남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토하면서 사세요.

이것 이상 더 좋은 신앙생활이 없어요.

 

신앙생활을 교회생활로 국한 시키지도 마세요.

모든 삶에서 하세요.

가정에서 직장에서 범사를 교회생활처럼 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의 삶을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위해서 살면 다 성(聖)이고, 예수님을 잊고 살면 다 속(俗)된 것이에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술을 팔아도 내가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면 다 성(聖)이 되는 것이고, 목사 노릇을 해도 밥 처먹기 위해서 하면 다 속(俗)된 것이에요.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하세요.

 

이걸 모르면 어떤 사람들은 술 팔면 나쁜 것이기 때문에 식당도 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교회에 장로 권사가 되면 전부 기독교 서점을 합니다.

아니 기독교 서점은 거룩하고 식당은 부정합니까?

누가 그러던가요.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직업을 가지고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하지 않아요.

그 속에 예수가 있으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여도 성(聖)이라고 하고, 그 속에 예수가 없으면 목사 노릇을 해도 속(俗)된 것이 되어요.

그 속에 살아가는 이유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 기독교 서점 백날 해도 속(俗) 된 것이고!

반면에 술집을 하여도 살아가는 이유가 주님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성(聖)스러운 것이 되어요.

제발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고 정신 좀 차리세요.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내가 사는 이유를 분명히 알면 되어요.

범사에 주님을 생각하고 살면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광신자들처럼 집단으로 모여서 은둔 생활하는 것이 아니에요.

또 어떤 특정한 사람을 쫓아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아니에요.

그건 이단 사설이라는 쥐약을 먹고 지랄하는 것이지 신앙생활이 아니에요.

 

그러니 마귀가 야! 너 신자라고 하면서 돈 벌면 되느냐 라고 하면!

그래 내가 신자이기 때문에 돈을 번다고 하세요.

왜? 돈 버는데!

그러면 우리 가족 열심히 주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라고 하시고 교회에 연보하고 그래도 남으면 복음 전하는 사람을 도우려고 한다고 하세요.

무슨 말인지 말 귀를 좀 알아먹으세요.

 

다시 마귀가 어떻게 시험하는지를 살펴봅시다.

 

아까 예수님이 우리를 어디에서 어디로 건져 주셨다고 했나요?

땅에서 하늘로 빼내 주셨다고 했지요.

그럼 마귀는 어떤 식으로 일을 할까요?

하늘에 있는 자를 땅으로 끌어당기는 식으로 일을 하겠지요.

 

뱀에게 걸려들면 하늘을 잊게 됩니다.

뱀은 땅만 보이게 만들어요.

땅에 것으로 하늘을 가려요.

 

성도에게 있어 죄란?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잊으면 자연히 하늘에 대한 관심도 잃어버려요.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 신앙의 싸움은 땅에 지체를 죽이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義)에 싸움으로 가면 내 의(義)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義)를 붙잡는 식으로 싸움이 일어나요.

반면에 이것이 삶으로 나타나면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을 쫓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성도는 두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중요하니 다시 말합니다.

 

마귀는 인간의 의(義)로 예수님의 의(義)를 가리게 합니다.

인간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게 합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가리게 해요.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지를 가리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심 때문입니다.

이건 양보할 수 없어요.

 

의(義)에 문제로 접근을 할 때는 사자처럼 사납게 싸워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로서만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지키셔야 합니다.

누가 인간의 행함에서 의(義)가 나온다고 하면 아니야! 하나님 앞에 의(義)는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야 라고 진돗개처럼 물고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자세에 대하여서는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싸움을 하셔야 합니다.

이 싸움은 만만치 않아요.

우리가 늘 넘어지는 것이 이 싸움입니다.

그만큼 우리 육신이 강해요.

 

성도는 일평생 이 두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마귀는 세상 것으로 성도의 눈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관심사를 땅에 붙잡아 두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죄가 어떻게 하였다고 했나요?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었다고 하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세상 살아가는 수단으로 이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처럼 숭배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상으로 전락하게 되면 신앙은 외식으로 변합니다.

자기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관심사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살아가는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선지자들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사 1:1-6=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이 탄식합니다.

너무도 답답해서 하늘과 땅에게 말합니다.

내가 자식을 키웠더니 이 새끼들이 다 떠났다고 합니다.

소나 나귀도 자기를 키워준 주인의 은혜를 아는데 이 놈들은 모른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은 뭘 바라고 키우지는 않습니다.

자식이기 때문에 키웁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부모의 은혜를 몰라주면 섭섭합니다.

이건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해요.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고 하지요.

이건 하나님 마음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니까 섬김이 외식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의무적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열심히 절기를 지키고 제사를 드리지만 그 속에 사랑이 없어요.

 

이걸 온 몸이 병들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 몸뚱이는 썩고 병들고 냄새가 풀풀 납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어떤지를 모르고 있어요.

 

죄 구덩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자기가 어디에 처해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 가슴이 더 미어지는 것입니다.

한숨만 나옵니다.

이게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낳아준 인간들이 하나님을 몰라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싫어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게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욱 더 가슴이 아픕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자기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곧 자기 백성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세상 이야기로 듣지 말고 우리 이야기로 들어야 합니다.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사야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습니까?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이상이라고 하잖아요.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해서 이 말을 하고 있어요.

 

유다와 예루살렘은 곧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소나 나귀만도 못하다고 하지요.

소나 나귀는 자기에게 밥을 주는 주인은 알아보는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몰라보고 있어요.

 

우리가 곧 소나 나귀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자기에게 밥을 주는 주인도 몰라보는 배은망덕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온갖 은혜를 다 받고 살면서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색욕거리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어요.

색욕거리니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한다는 말은 신앙을 이용하여서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꿈꾼단 말입니다.

 

삶에 지향성이 전부 땅으로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라고 은혜를 주셨는데 우린 그 은혜로 땅을 향해 치닫고 있어요.

땅 강아지처럼 흙만 퍼 먹고 있어요.

하나님을 땅 강아지처럼 흙만 퍼 먹고 살아가는데 이용하고 있어요.

 

어리석은 부자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하고 그저 땅에 것만 모으고 있어요.

돈을 쫓아가고 육신의 쾌락을 쫓아가고 있어요.

이처럼 우리들이 하나님에게 온갖 것을 다 얻어먹고 살면서도 하나님을 모르고 있어요.

마치 자기 것으로 사는 줄 착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만물 속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담겨져 있다는 말을 지금 식으로 이해하면 이건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린 몰라요.

이제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눈만 떠지면 이러한 것이 깨달아져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된단 말입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물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주께로 나왔지요.

 

만물이 주께로 인하고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그럼 당연히 만물 속엔 주님 것이 담겨져 있겠지요.

그럼 만물에 속한 우리는 만물을 통해서 주님을 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보지 못하고 있어요.

보지 못하니 영광 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 탄식을 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그 은혜를 모르느냐고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 받고 살면서도 모르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 라는 중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 분의 책을 보면 만물을 다 주님으로 표현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 분은 성경에 나오는 해도 예수요! 달도 예수요! 꽃도 예수요! 풀도 예수요! 돌도 예수요! 나무도 예수요! 바람도 예수요,,,라는 식으로 만물을 다 예수라고 표현했어요.

 

이건 범신론(汎神論)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만물이 다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전 그 말에 동의해요.

 

제가 은혜를 받기 전(前)과 받고 난 후(後)의 안목(眼目)이 그러해요.

은혜를 받기 전에는 만물을 보아도 하나님을 몰라보았어요.

소경이었어요.

 

그런데 은혜를 입고 보니 만물이 다 하나님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숨결을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상하게 여길는지 몰라도 전 들풀과도 이야기하고, 새 하고도 이야기하고, 심지어 지나가는 바람하고도 이야기해요.

 

실제로 말을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낀단 말입니다.

들풀을 보고서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느끼고, 새를 보고서도 하나님께서 기르시고 입히신다는 것을 느껴요.

그러니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라고 소리쳐요.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보니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생긴 것입니다.

만물뿐만 아니라 인간사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었어요.

과거엔 하나님을 보는 안목이 없는 소경이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을 보는 눈을 떴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으니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지요.

너희들이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의 표적은 보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이를 역(逆)으로 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입은 자는 시대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이 간섭하심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이 믿어진단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특별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 가두어 두지 않아요.

또한 특별한 사건 속에 가두어 두지 않아요.

 

예전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분해서 판단했는데 이젠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님이 온통 나를 사로잡고 계신다는 것이 깨달아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젠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짐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하여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날 아프게 하는 사람도!

날 기쁘게 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나고 헤어지게 한 것이란 것이 쬐끔 보여진단 말이에요.

 

그러니 이젠 신앙생활을 따로 구분해서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 일상 모두가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어요.

옛날엔 신앙생활을 특별하게 하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젠 모든 일상사가 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으로 여겨져요.

 

이건 제가 온전하고 무흠하게 산다는 뜻이 아니에요.

전 죄인 중에 괴수에요.

예전엔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남에 말로 추상적으로 들렸는데 이젠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 깨달아지고 내 마음에서 터져 나와요.

그러니 제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립 써비스가 아니라 내 본 마음이에요.

 

전 온전치도 무흠하지도 않아요.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온전함과 불완전함과는 상관없이 내가 주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죄를 짓고 살면서도 주님을 의식하고 살아요.

그러니 이젠 신앙생활을 어디서 어디까지 구분하고 나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집에서 TV를 보아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고!

서재에서 성경보고 설교 준비를 하여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고!

찬송가를 불러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고!

유행가를 불러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를 내도 주님과 함께 하고 있으며, 감사해도 주님과 함께 하고 있어요.

전 그렇게 믿고 살아요.

남들이 아니라고 하여도 어쩔 수가 없어요.

전 그렇게 믿고 사니까요.

 

신앙생활이 뭔가요?

글자 그대로 신앙(信仰)을 생활(生活)하는 것입니다.

신앙(信仰)이란? 어원적으로 직역하면 바라보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에요.

이걸 삶으로 풀어내는 것을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신앙(信仰)과 생활(生活)을 하나로 묶어서 말하면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란? 믿고 바라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믿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 안에 만 하나님의 의(義)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것을 믿어요.

 

그리고 이 믿음을 근거로 천국을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저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분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서 내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고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잘하든 못하든 상관치 않고 난 죄인일 수밖에 없고!

나에게서는 선(善)이 없으며!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범사를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보는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승철이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그 사람” 이란 노래가 있어요.

그 가사 중에 보면 너무도 복음적인 것이 담겨져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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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날 웃게 한 사람

그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그 사람! 따뜻한 입술로 내게 심장을 찾아 준 사람

그 사람! 지울 수 없는데

그 사람! 잊을 수 없는데

그 사람! 내 숨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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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보세요.

 

“그 사람! 날 웃게 한 사람!”

 

예!

예수님이 절 웃게 해 주셨어요.

율법 아래서 소망 없던 저에게 은혜 아래로 불러 주시곤 소망을 주셨어요.

그러니 이젠 웃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 날 울게 한 사람!”

 

맞아요.

예수님이 절 울게 하셨어요.

애통하는 마음을 주셨고!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셨어요.

또한 하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니까 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 따뜻한 입술로 내게 심장을 찾아 준 사람!”

 

맞아요.

예수님이 저에게 입 맞추어 주어서 죽었던 내 심장을 살아서 펄떡 펄떡 뛰게 해 주셨어요.

이제 살아가는 의미를 찾아 주셨어요.

성령이 내게 임하니 살아가는 기쁨이 생겼어요.

내가 왜? 목사가 되었고!

지금 이 시대 이 자리에 있는지 알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해 주셨어요.

 

“그 사람! 지울 수 없는데!”

 

맞아요.

전 예수님을 지울 수가 없어요.

내 심장 속에 각인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연합이 되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숨결을 느껴요.

내 삶에서 예수를 지울 수가 없어요.

지워지지가 않아요.

 

“그 사람! 잊을 수 없는데!”

 

맞아요.

전 예수님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게 생명을 주신 분인데 어찌 그 분을 잊겠어요.

내게 사랑을 알게 해 주시고!

내게 은혜를 알게 해 주신 분이고!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해 주신 분이고!

그런 내가 그 분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는데 어찌 잊겠어요.

못 있어요.

 

“그 사람! 내게 숨 같은 사람!”

 

예!

예수님이 저에게 숨을 주셨어요.

예수님은 저에게 호흡입니다.

예수님은 내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내게 숨을 쉬게 하셨어요.

저는 예수님 숨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저에겐 “그 사람” 이 바로 “예수님” 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 노래가 우리 귓전에서 잔잔하게 여울처럼 울려 퍼지고 맴돌아야 해요.

“그 사람”이 눈에 보이고!

“그 사람”의 손길이 손에 잡히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 때문에 우리 자신이 행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을 빼앗기지 마세요.

 

가사가 정말 멋있지요.

얼마나 훌륭한 신앙고백입니까?

물론 이승철씨는 이런 의도로 부른 것이 아닐거에요.

 

그러나 저는 비록 흔히들 말하는 세속적 음악이라 할지라도 전 그 속에서 복음적인 것으로 취하여서 은혜를 받아요.

그래서 제가 유행가를 부르면서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전 드라마를 보면서도 많은 은혜를 받아요.

드라마 속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을 많이 들어요.

아! 하나님께서 내가 미련하여서 깨닫지 못하는 것을 저런 드라마를 통해서 나를 깨닫게 하시는구나! 라고 받아요.

그러니 만사가 저에겐 배척하고 버릴 것이 아니라 도리어 취하고 감사할 것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보고 감사하게 받으면 버릴 것이 없어요.

이게 만물을 통해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성도들의 자세여야 합니다.

제발 여러분의 삶을 성(聖)과 속(俗)으로 이분법적(二分法的)으로 나누어서 구분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신 분이에요.

우리 모든 삶 속에서 함께 하시는 분이세요.

그러니 만물 속에서 우리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시고 은혜를 보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시면 되어요.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서 말하고 있어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철따라 옷을 갈아입으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비를 내리고 눈을 뿌리면서 말씀하고 있어요.

 

야! 정낙원이 내가 여기 있다!

내기 지금 눈을 뿌리고 있어!

너~ 아니!

그럼 전 흩날리는 눈을 보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 보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은 눈을 감아도 있고 눈을 떠도 있잖아요.

산에 가도 있고!

바다에 가도 있고!

집에 있어도 있고!

마트에 가도 있고!

온통 머릿속에 가득하고 마음속에 충만하잖아요.

 

지나가는 사람을 보아도 “그 사람” 이 생각나고!

백화점에서 예쁜 옷을 보아도 야! 이것 “그 사람” 에게 입히면 예쁘겠다!

맛난 음식을 먹어도 야! 이거 “그 사람” 이 좋아하는데!

좋은 곳에 구경을 가도 야! 여기 “그 사람” 하고 왔으면 좋겠다!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하여도!

사랑하는 “그 사람” 이 생각나잖아요!

 

사랑하는 사람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서 함께 하잖아요.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은 만물 속에 있는 겁니다.

사랑하면 만물 속에서 그 사랑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거든요.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계세요.

그런데 우리가 몰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감각이 문둥병자와 같이 잃어버려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이 감각을 되찾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봐라!

내가 만유 가운데 있지 않느냐!

넌 무얼 보느냐!

내가 산을 짓고 바다를 짓고 들에 백합화를 기르고 하늘에 새를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린 들풀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셔야 하고 새를 보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알아야 합니다.

 

야! 저 나는 새를 돌보시는 그 하나님이 지금 나를 돌보시고 계시는구나!

야! 저 이름 없는 들풀을 기르시는 하나님이 지금 나를 기르시고 계시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만물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만물 위에서 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골방에서 염불 외우듯이 주문하는 것이 아니에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에요.

그냥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렇게 가난한 것이 아니에요.

 

우겨쌈을 당하여도 허~허~ 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허~허~ 하고!

욕을 먹어도 허~ 허~ 하고!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망한 것 같지만 망한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진 부자라는 것을 알고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회복하셔야 합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셔야 해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셔야 한단 말입니다.

모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셔야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의 머릿속에 사랑하는 사람으로 충만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케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을 담아 놓은 것이 이런 거에요.

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이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범사에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 보세요.

모든 게 감사해요.

아!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아! 저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구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간섭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제발 신앙생활을 맛대가리 없게 하지 마세요.

좀 넉넉하게 하세요.

댕댕거리지 말고!

땡감처럼 텁텁하게 하지 마세요.

 

좀 달콤하게 하세요.

남에게도 좀 나긋나긋하세요.

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그렇게 맛대가리가 없습니까!

 

이건 복음에 절여지지 않아서 그래요.

복음이 자기 안에서 소금처럼 녹아서 맛을 내야 하는데 녹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따돌림 당하고 버려지고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실제로 느끼시고 맛을 보셔야 합니다.

지식으로 쌓아두지 말고 경험하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스킨십을 하란 말이에요.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풍성하게 누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라는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맛이라도 알아야 누구에게 말 할 것이 아니에요.

맛도 모르면서 우째 말할 겁니까?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고 남에게도 종교적인 사기를 치는 거에요.

 

하나님과 희노애락을 나누세요.

좋으면 좋다고 하고!

싫으면 싫다고 하고!

기쁘면 기쁘다고 하고!

울고 싶으면 우세요!

 

일주일에 한 번 교회당에 와서 하나님 찾지 마시고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세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도 그 사람이 예수님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지 말고!

제발 예수님을 감지하는 촉을 가지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읽어내는 눈을 뜨세요.

그리고 주님을 느끼세요.

그 달콤한 사랑을 맛 보세요.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슬퍼하시나요?

성도는 희비를 선별하여 누릴 권한이 없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에요.

기쁜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고!

슬픈 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에요.

 

비바람도 하나님이 불게 하셨고!

햇빛도 하나님이 비추게 하셨어요.

흐린 날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화창한 날도 하나님이 허락하셨어요.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이 허락 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감사거리를 찾지 마시고 범사에 감사하세요.

순풍에 돛단 듯이 인생이 펼쳐져도 감사하시고!

역풍에 배에 물이 들어와 난리칠 일이 생겨도 감사하세요.

 

순풍 속에도 예수님이 계시고!

역풍 속에도 예수님이 계세요.

만물 속에 충만 하신 그 하나님을 보세요.

 

우린 만물 속에 계신 하나님을 보는 눈을 가졌어요,

그러니 그 눈으로 범사 속에서 하나님과 스킨십을 하시면서 감사하면서 사세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물 가운데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범사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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