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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7강. 복음에 빚진 자 (롬 1:14-15)

by coroa 2022. 4. 5.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강. 복음에 빚진 자 (롬 1:14-15)

-.정낙원 목사

 

롬 1:14-15=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엔 산 자와 죽은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누가 산 자이고, 누가 죽은 자입니까?

 

성경엔 예수에게 속한 자를 산 자라고 하고, 아담에게 속한 자를 죽은 자라고 합니다.

예수를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하고, 아담은 땅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은 땅에 속한 죽은 자의 조상이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산 자의 조상입니다.

성경은 이 두 조상들의 후손에 관한 이야기들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이걸 언약으로 보면 아담은 옛 언약을 상징하고, 예수님은 새 언약을 상징합니다.

옛 언약은 법이고, 새 언약은 은혜입니다.

법은 죽이는 것이지만, 은혜는 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이 있습니다.

옛 언약은 율법이라고 하고, 새 언약은 복음이라고 합니다.

옛 언약은 죽음 아래 가두는 언약이라고 한다면,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입니다.

두 언약을 에덴동산의 두 과실로 본다면 옛 언약은 먹으면 죽는 선악과를 상징하고, 새 언약은 먹으면 영생을 얻는 생명과를 상징합니다.

 

두 언약과 두 과실을 의인화(擬人化) 하여서 보면 죽이는 옛 언약과 선악과는 아담을 말하고, 살리는 새 언약과 생명과는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법으로 정죄당하고 죽음을 당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은혜로 용서하심을 입고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죽고,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무조건 삽니다.

 

조상은 후손이 결정하지 못합니다.

후손은 다만 조상의 결정에 따라 낳아지는 것뿐입니다.

제가 정(鄭)씨로 태어난 것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조상의 결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후손이 되는 것에는 인간의 조건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후손은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낳아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죽은 자와 산 자는 아담의 후손이냐! 예수님의 후손이냐! 로 판가름 납니다.

 

아담과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롬 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행위와 상관없이 죄인(罪人)이 되었습니다.

아담이라는 조상(祖上)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모든 성도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나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의인(義人)이 되었습니다.

예수라는 조상(祖上) 때문입니다.

 

그만큼 조상이 중요합니다.

산 자를 조상으로 두고 있으면 내 조건과 상관없이 산 자로 인정받고, 죽은 자를 조상으로 두고 있으면 내 착함과 상관없이 죽은 자로 인정받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죄란? 인간의 행실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조상에 속하였느냐 로 결정이 됩니다.

누구 안에 있느냐로 판단을 하십니다.

그 사람의 행실이 어떠함과는 무관합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아담 안에 착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예수 안에 나쁜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담 안에 악(惡)한 자가 있을 수 있고, 예수 안에 선(善)한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악하냐! 선하냐! 착하냐! 나쁘냐! 로 판단치 않습니다.

오직 누구 안에 있느냐 로만 판단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이 세상에 제시한 산 자와 죽은 자의 판단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동의하면 신자이고 동의하지 않으면 불신자입니다.

이 내용이 성경 전체의 중심사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후손과 예수의 후손을 이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걸 창세기에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으로 말했습니다.

가인과 아벨처럼!

에서와 야곱처럼!

이스마엘과 이삭처럼!

각자 조상의 운명을 뒤집어쓰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후손은 조상의 운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어 있습니다.

조상의 운명을 후손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조상이면 아담의 운명으로 살고, 예수가 조상이면 예수의 운명으로 살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정한 운명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아담은 죽은 자의 조상입니다.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아담의 후손들에겐 죽이는 옛 언약인 법이 심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 자의 조상입니다.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후손들에겐 살리는 새 언약인 은혜가 심겨져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법으로 살고, 예수님의 후손은 은혜로 삽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서도 법으로 난 자가 있고, 은혜로 난 자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으로 낳고, 이삭은 약속으로 낳습니다.

육은 법이고, 약속은 은혜입니다.

 

한 교회 안에도 육으로 난 자가 있고, 약속으로 난 자가 있습니다.

법에 속한 자가 있고, 은혜에 속한 자가 있습니다.

이 둘 간에는 항상 충돌이 일어납니다.

 

말이 충돌이지 실상은 일방적입니다.

법에 속한 자들이 은혜에 속한 자들을 핍박합니다.

육으로 난 자들이 약속으로 난 자들을 공격합니다.

 

약속으로 난 은혜에 속한 자들은 힘없이 죽임 당합니다.

죽임 당함으로서 은혜에 속하였음을 증거합니다.

반대로 법에 속한 자들은 핍박하고 공격함으로서 스스로 법에 속하였음을 드러냅니다.

이는 각자 그 속에 있는 것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은혜에 속한 자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은혜 아래 있는 자는 이렇다 라고 증거해 주셨습니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걸 신앙적으로 말하면 어설프게 안 복음이 그릇된 신앙을 낳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잘못된 지식은 반드시 잘못된 신앙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아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진짜 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기들 이외는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고 그들은 우리를 이단이라고 합니다.

 

우린 이단이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합니다.

자기하고 다르게 말하면 무조건 이단이라고 합니다.

마치 자기 혼자 복음을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처럼 심판하는 것입니다.

 

자기만 정통이라고 하는 이런 사고가 바로 이단적인 사고에요.

그러므로 나만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남을 심판하는 그가 바로 이단입니다.

남들을 서슴없이 정죄하고 심판하여 이단이라고 하는 내가 바로 복음을 모르는 이단이에요.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섣불리 남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아요.

그건 하나님께 맡기게 되어요.

 

왜? 그런 줄 아세요.

내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담아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혜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티끌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깨달아지면 정죄하고 심판하던 입을 닫게 되어요.

 

마치 곡식이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갈수록 입이 닫혀요.

이게 깨달아지면 바울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왜? 나온 줄 아세요.

자신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이 저주 받은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잠시 교만하여 넘어지게 해 놓고선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붙여 놓더라는 겁니다.

그리고선 나중에 교만한 이방인을 잘라내고 유대인을 다시 접붙인다는 것을 알았던 겁니다.

 

유대인을 넘어지게 한 것은 이방인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걸 누가 알았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잘난 척하던 유대인들을 잠시 넘어지게 해 놓고 이방인을 긍휼히 여겨 구원을 했는데 글쎄 이 이방인들이 자기 주제를 모르고 넘어진 유대인들처럼 또 복음 안다고 교만을 떠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 안다고 잘난 척하는 이방인을 잘라내고 교만하다가 잘려 나갔던 유대인들을 다시 긍휼히 여겨서 접붙임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로마서 11장의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고 엄위에 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인자(仁慈)란 긍휼이고, 엄위(嚴威)란 교만입니다.

한마디로 복음 안다고 교만치 말라는 겁니다.

복음 안다고 교만한 것은 역설적으로 복음을 모르는 소치란 겁니다.

진짜 복음을 아는 사람은 교만 할 수가 없어요.

복음 자체가 긍휼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장의 접붙임 내용을 지금 식으로 말하면 복음 안다고 교만을 떨면서 남을 깔보고 다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을 잘라내고 우리가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을 구원시킨단 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구원은 긍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잘려 나간 바리새인들처럼 그러고 있잖아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가지고 율법을 모르는 자들을 업신여기고 무시했어요.

이건 마치 우리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모르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지금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자랑으로 여기고 있잖아요.

그러니 교만하여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겁니다.

이건 복음을 알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붙잡고 있지 않다는 증거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은 그 복음으로 살라고 주신 것이지 그 복음으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라고 준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우린 복음으로 살지 않고 남을 심판하고 있어요.

긍휼로 구원은 얻은 성도는 절대로 남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 않아요.

누가 복음을 모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신도 긍휼을 입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용서 받은 자는 남도 용서합니다.

복음을 은혜로 알게 된 자는 절대로 복음 안다는 것으로 남을 무시하지 않아요.

복음을 안다고 자랑하면서 남을 심판하는 자는 복음에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에요.

복음 속엔 긍휼이 담겨져 있지 남을 정죄하거나 심판하는 것이 없어요.

 

우리는 흔히 복음을 모르는 교회를 일컬어 기존교회니 기성교회니 라고 합니다.

우리와 차별성을 두고 있어요.

그래서 툭하면 기성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깔보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교만한 말인 줄 아십니까?

 

우리도 본시 그들 속에 속하였어요.

거기서 빼내심을 입었어요.

나도 그들 중에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들과 차별성을 두고 그들을 무시하고 있어요.

 

심지어 한 가족 속에서도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분리해서 대해요.

혼자 독야청정한단 말입니다.

이건 복음을 아는 자의 자세가 아니에요.

이걸 오늘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보세요.

바울은 유대교에서 빼내심을 입었어요.

그럼에도 바울은 자기 동족들을 깔보거나 조롱하지 않았어요.

항상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빚진 자로 살았어요.

 

바울은 자기가 지옥에 가더라도 자기 동족들이 복음 알기를 기도했어요.

이건 마치 예수님이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위하여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것과 같아요.

바울에게도 그들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모든 자에게 빚진 자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복음에 빚진 자에 대하여 살펴볼까합니다.

복음에 빚진 자는 어떤 자세로 살게 되어 있는지에 대하여 상고해 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율법아래 있는 자이든 율법을 모르는 자이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낮은 자로 다가가 섬겼어요.

왜냐하면! 자신도 그들 속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그들 속에서도 얼마든지 자기처럼 빼내심을 입을 형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참아주면서 긍휼로 다가갔어요.

바울을 핍박한 자들은 거의가 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조폭들을 동원해서 핍박했어요.

그럼에도 바울은 도리어 그들을 축복하고 용서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자신은 그들보다 잠시 먼저 주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처럼 자신은 아침에 부르심을 입었고, 그들 속에서도 낮이나 오후에 부르심을 입을 형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복음을 바로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받았다고 해서 절대로 복음 모르는 자들을 무시하거나 적대시하지 않았어요.

항상 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할 자로 다가갔습니다.

 

이 시대 우리들하고 완전히 달라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하는 짓들이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 줄을 아셔야 합니다.

복음 안다고 나대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긍휼의 마음이 안 나오는 것에 대하여 회개하여야 해요.

 

이런 마음이 안 생긴다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가짜일 확률이 높아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종교 놀음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십자가를 말하지만 그건 지식을 쌓는 것일 수도 있어요.

지식은 교만케 하고 사랑은 덕을 세워요.

 

그러므로 남을 무시하는 그 복음이 지식일 수가 있어요.

그러니 아는 것하고 사는 것이 다른 겁니다.

입술로는 예수를 말하지만 하는 짓은 마귀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용서 받은 자의 삶이 나오지 않고 바리새인들처럼 심판자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모습이 요한계시록 3장에서 말하는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과 같아요.

우리들은 스스로 나는 복음을 다 안다는 것으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주접을 떨고 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엔 소경에다가 벌거벗고 있어요.

그래서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헐벗고 곤고하고 가련해서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꼴불견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소경이고 벌거벗음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온갖 패악 질은 다 하면서 복음 안다고 교만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입에서 확 토하여 내친다고 하겠습니까.

한마디로 빛 좋은 개살구들이에요.

예수 맛이 안나요.

말은 번지르르한데 막상 먹고자 하면 땡감처럼 텁텁해서 우엑~ 하고 토해내고 싶어요.

 

우리의 일가친척 형제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지 않나요.

그럼 우리는 뭔가 잘못된 신앙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형제들과 일가친척들은 비록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았어요.

항상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였어요.

이게 긍휼을 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저는 처음 복음을 알았을 땐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내가 아는 복음을 말하지 않으면 다 복음 모르는 자라고 판단했어요.

심지어 부모 형제 일가친척까지 에게도 말이에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깊이가 더해 갈수록 누구를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깨닫고 보는 것이 너무도 제한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 지혜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다 읽어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내 모습이 너무도 작고 초라하게 보여지는 겁니다.

내가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이는 겁니다.

성경을 덮으면 내가 잘나 보이는데 성경을 펴면 한 없이 못났음을 느껴요.

남을 정죄하고 심판 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바로 정죄당하고 심판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 내가 그 동안 참으로 철없이 나댔구나!

복음이라는 완장을 차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었구나!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발목만 잠기고서 온 몸이 잠긴 것처럼 까불고 있었구나!

천지분간 못하고 나댔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마치 욥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을 때는 온 우주를 논하고 하나님의 일하심까지 논했는데 막상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하나도 안 것이 없어서 자기 주둥이부터 닫게 된 것과 같아요.

내 자신이 가련하게 보이는 겁니다.

불쌍해지는 겁니다.

야! 주께 받은 은혜는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내가 은혜라는 안약을 사서 발라보니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니 예전처럼 칼로 무 자르듯이 못하겠는 겁니다.

 

이러한 것이 깨달아지니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일들이 참으로 악하고 철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좀 더 진중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요.

물론 지금도 동일하지만 말이에요.

 

옛 말에 자식을 키우는 사람은 남에 자식 잘못된 것을 보고 나무라지 못한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내 자식도 남에 자식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린 생각하기를 남에 자식은 다 잘못 되어도 내 자식 만큼은 그러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바램이지 실상에선 그렇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다 같아요.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다 거기서 거기에요.

 

우리의 신앙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안다는 것도 다 거기서 거기에요.

조금 깊이 알고 조금 얕게 아는 차이에요.

동일한 죄인이고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우린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요.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요.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어 가면 다 똑같아요.

그러니 복음 안다 모른다 로 가늠하고 차별하면 안 되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아진 복음은 모두가 성령의 은사로 깨달아진 것이기 때문에 나만 안다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복음 안다는 것으로 잘난 척 할 수 없단 말입니다.

공짜로 주어진 복음을 가지고 잘난 척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어요.

복음을 깨닫게 해 준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린 감사하기 보다는 그 복음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고 있어요.

도리어 섬기고 봉사하여야 하는데 우린 거드름을 피우고 나대고 있잖아요.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신앙생활도 그래요.

복음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오십보 백보에요.

그런데 우린 오십보와 백보를 가지고 차별하고 우열을 나누어요.

 

로마서 14장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고 강한 자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채소만 먹는 믿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날을 경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업신여기거나 차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차별하는 그들도 하나님이 다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알고 모르고의 차별성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안다 모른다 를 가지고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말씀을 이해하는 폭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다 받으셨어요.

많이 알고 적게 알고가 구원의 기준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건 각자 분량의 차이에요.

 

그러니 이러한 것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누가 자신이 말씀을 많이 아는 것으로 남을 깔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은혜 아래 있는 자가 아니고 법 아래 있는 자에요.

한마디로 아담 안에 있는 자란 말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고 업신여기고 깔보는 겁니다.

 

천국은 복음 알아서 가는 곳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곳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만큼 복음을 몰랐어요.

그럼에도 하나님 은혜로 구원을 받았어요.

지금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많아요.

 

예수를 믿고 사는 신앙생활이란? 말씀을 많이 아는 것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자기가 죄인인줄 알게 되어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요.

그리고 예수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러니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주를 사랑하는 겁니다.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요.

그러니 각자 받은 은혜대로만 감사하면 되어요.

각자 깨달은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어요.

 

어린아이나 결혼한 자식이나 부모에 대한 사랑은 같아요.

그 표현이 조금 다를 뿐이지 엄마 아빠를 사랑하는 것은 그 질적인 면에서는 다를 수가 없어요.

사랑이란? 마음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에요.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누구는 조금 더 깨달을 수도 있고 누구는 적게 깨달을 수도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볼 수 있는 눈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열어서 보여주셔야지만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을 다 알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도 지극히 제한 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지극히 제한 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마치 모두를 다 아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상대를 넘어뜨리면 자신이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을 폄훼하고 헐뜯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남에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처럼 넘겨짚어서 온갖 심판을 다 해버립니다.

저 사람은 이럴 것이다! 라고 판단해 버리잖아요.

 

가장 무서운 것이 철 모르는 아이들이 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철 모르는 아이는 칼로 자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남을 헤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습성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고 죽이는 일에 빨라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잠간이지만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은 엄청난 인내와 아픔이 동반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에요.

법은 잘라내고 죽이지만 은혜는 붙이고 살려내는 일을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법이 앞섭니다.

속된 말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하듯이 우리들도 은혜로 다가가기 보다는 법으로 먼저 판단해 버립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보다는 먼저 심판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린 늘 마귀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벼락 맞지 않고 버젓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린 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배워가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들입니다.

궁극적으로 한 몸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돌아보고 사랑해야할 대상들입니다.

 

한 몸이란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자란 말입니다.

어느 하나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프고 어느 하나가 영광을 받으면 온 몸이 영광을 받습니다.

이게 한 몸이에요.

그런데 우리 죄인들은 영광을 받는 것보다 아픈 일이 더 많습니다.

아픈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쉬운 말로 팔이 부러지면 그 팔이 온전하게 낫기까지 온 몸이 합심해서 아픔과 불편함을 감수하여야 한단 말입니다.

누가 자기 팔이 부러졌다고 잘라내는 사람은 없어요.

자기 몸에 지체이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팔에 깁스를 하고 견대로 목에 걸고 온 몸이 불편을 감수하고 낫기까지 인내하면서 고치는 겁니다.

이게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성도를 대하는 자세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한 겁니다.

이는 몇 번이냐가 아니고 끝까지 용서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고 계속하여 용서를 받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죽을 때까지 죄를 짓고 살아요.

또한 용서 받고 있어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용서하심의 능력으로 우리를 늘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이 용서하심으로 산다는 것을 형제를 용서함으로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옛 말에 남에 자식 한 명은 못 키워도 내 자식 열 명은 키운다고 했어요.

계모는 한 아이를 못 키우지만 친 엄마는 열 자식을 키운다는 말입니다.

이는 생명을 낳아 본 사람만이 생명의 가치를 알고 인내하고 키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남에 자식은 법으로 대하지만 내 자식은 사랑으로 대하기 때문에 키우는 겁니다.

 

사랑 안엔 심판이 없어요.

오직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은 사랑으로 키우기 때문에 열이고 스물이고 키우는 겁니다.

 

우리가 복음을 대하는 자세도 이러하여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용서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허다한 죄를 덮음 받고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모든 신앙의 바탕엔 이 사고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얼마나 깊이 있게 아느냐에 따라서 신앙생활도 달라집니다.

남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집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평생 동안 깊이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에 의미를 내 몸속에 가득히 채워가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내가 이미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리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대 주제는 믿음으로 난 의(義)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만 있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믿음으로 난 의(義)의 대척점에 율법에 의(義)를 두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義)와 믿음에 의(義)는 서로가 서로를 드러나게 해 줍니다.

 

이는 마치 빛과 어둠이 서로를 드러내고, 검은 색과 흰색이 서로를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에 의(義)는 인간들의 의(義)이고, 믿음에 의(義)는 예수님의 의(義)입니다.

율법에 의(義)는 인간들이 노력으로 만들어 내는 의(義)이지만, 예수님의 의(義)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의(義)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의(義)가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이 둘을 바탕으로 나누이게 됩니다.

기독교에서 흔히들 말하는 세상 종교란? 인간의 가능성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합니다.

인간자체를 부정한 자로 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내어놓는 의(義)라고 하여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선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 질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율법에 의(義)와 믿음에 의(義)는 서로 충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충돌을 경험한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로마서를 쓰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바울은 스스로를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예수를 핍박한 자이고 포행한 자이고 악행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케 되었습니다.

회심케 된 후 이젠 역으로 자신이 과거에 자랑하던 율법에 의(義)를 버리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난 의(義)를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폐기한 것이 아니에요.

율법으로 난 의(義)를 폐기한 겁니다.

이걸 오해하지 마세요.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가 아니에요.

율법도 신령한 것이고 귀한 것이며 복음이라고 했어요.

 

이 시대 그릇된 율법 관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많아요.

그래서 무 율법주의로 가고 있어요.

이게 막사는 것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율법은 항상 살아서 우리 죄를 고발해 주어야 해요.

우리 죄가 고발당할 때마다 예수님의 피가 더 돋보이게 되는 겁니다.

율법이 예수님을 더 드러나게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확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신 겁니다.

이는 죄인이 있는 한 율법이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범법함으로 더한 것이에요.

 

죄와 율법은 한 셋트에요.

죄인이 있는 한 율법은 죄를 고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의 몸으로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율법은 항상 살아서 죄를 고발해 주는 복음 역할을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복음이라 함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은 반드시 옛 언약을 통하여서 빛이 나게 되어 있어요.

옛 언약이 없는 새 언약은 없어요.

이건 법을 모르면 은혜를 모르는 것과 같아요.

죄를 알아야 용서를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항상 복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드러나게 하려면 반드시 율법이 복음을 드러내는 역할을 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젠 새 언약 시대이니 옛 언약은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새 언약 시대이기 때문에 옛 언약이 더 필요한 겁니다.

새 언약의 귀함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옛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복음을 아는 성도는 율법을 더 귀하게 여겨요.

율법을 더 지키고자 한단 말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인간에게선 의(義)가 안 나온다는 것을 알고자 함이에요.

 

새 언약을 아는 성도는 율법지킴으로 의(義)를 만들고자 하지 않아요.

의(義)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안에만 있다는 것을 확증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율법을 지키고 살았던 겁니다.

율법적 의식을 지켰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 정신으로 살았어요.

다만 율법에서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설파 하면서 말이에요.

 

바울은 율법 아래 있을 때에 예수를 이단이라고 해서 죽이러 다녔어요.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보니 율법으로 난 의(義)는 하나님 앞에 저주거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적극적으로 자기 동족들에게 율법으로 난 의(義)를 버리라고 합니다.

자기 동족뿐만 아니라 온 세계 모든 족속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빚진 자란? “오페일레테에스” 라고 하는데 이 말은 강제성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미 확정된 판결을 집행한다는 말입니다.

만약 빚을 갚지 않으면 강제적으로 받아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추징금을 내라는 확정 판결을 받았어요.

그럼 국가에서는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진 빚을 강제로 추징하는 일을 합니다.

이는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살아 있는 한 계속 되어요.

자발적으로 납세하지 않으면 강제로 추징을 합니다.

 

바울이 지금 자신을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은 이 말이에요.

그래서 자신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친다고 한 것입니다.

난 평생 동안 복음이라는 빚을 갚아야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엄청 무서운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베드로에게 했어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간다고 하신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간다는 말은 베드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어디로 끌고가는가 하면 예수님의 증인의 길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저주하여도 용서해 주었어요.

베드로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어요.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라는 빚을 진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가서 네가 원치 않는 길로 띠 띠고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강제적으로 그 빚을 받아 내겠다는 말입니다.

베드로 스스로가 할 수 없으니 성령을 보내서 하게 하신 겁니다.

이게 빚진 자에요.

 

지금 바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졌어요.

자신은 예수쟁이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거나 죽인 자에요.

스데반을 죽인 자에요.

그러니 마땅히 자신은 저주 받아야 할 몸입니다.

그런데 용서 받았어요.

이건 하나님에게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빚을 받아내는 일을 하세요.

어떻게 받아 내는가 하면 자신이 과거에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한 것처럼 역(逆)으로 하세요.

예수님이 바울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봅시다.

 

사도행전 9장입니다.

 

행 9:13-16=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어집니다.

이에 사울을 아나니아 라는 선지자에게 보냅니다.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안수해서 사울의 눈을 뜨게 해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아니~ 주님! 이 놈이 어떤 놈인데! 눈을 뜨게 해 준단 말입니까?

이 놈은 아주 악명 높은 자입니다.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죽인 자입니다.

그러니 죽이십시오! 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선택한 이유를 말해줍니다.

그래 네 말대로 이 놈은 악명 높은 내 원수이다!

그래서 내가 죽이지 않고 이렇게 살려 두는 것이다.

살려서 이 놈이 나를 핍박한 것처럼 그대로 이 놈에게 되돌려 주려고 한다!

이제부터 이 놈은 나 때문에 수많은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 빚을 받아내려고 선택을 하였다고 알려 줍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과거 바울이 율법에 의(義)를 붙잡고 있을 때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성도들을 핍박했잖아요.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로는 정반대로 변했지요.

이젠 아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증거하기 시작하잖아요.

그러자 율법 아래 있는 자기 동족들과 친구들의 원수가 되었어요.

이제 자신이 핍박 받은 구조 안으로 들어 온 겁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원수처럼 대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했어요.

이는 자신도 그들 속에 있다가 빼내심을 입었거든요.

자신만 빼내심을 입었으니 그들에겐 빚진 거나 다름없는 겁니다.

한 마디로 자기 동족들에게 미안한 겁니다.

저들도 하나님께서 다메섹에 나를 찾아와서 율법에서 빼내 주셨듯이 자기 동족들도 하나님이 자기처럼 빼내시면 율법에서 빼내 진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그 일을 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어요.

이는 예수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사는 자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를 핍박하던 자를 용서해서 이젠 예수를 증거하는 자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탕감 해 준 빚을 이젠 강압적으로 빼앗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을 그리스도의 고난 속으로 밀어 넣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살게 하여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던 겁니다.

자기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열심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이걸 안하면 자기에게 화가 미친다고 했어요.

이게 빚진 자에요.

 

이걸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사람들로 이해하면 쉬울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에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스스로 원해서 그런 삶을 산 사람이 없어요.

모두가 믿음이라는 끈에 개 목줄처럼 묶여서 끌려 다닌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 11장의 주어(主語)는 “믿음으로” 에요.

믿음이 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누구는 어떻게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했어요.

그 허다한 증인들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있다고 했어요.

 

지금 바울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난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용서를 다 받아 내시더라!

어떻게 받아 내는가 하면 자신을 예수의 자리로 밀어 넣고 자신이 과거에 예수를 핍박했듯이 이젠 자신이 예수의 자리에 앉게 하여서 남에게 핍박을 받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핍박들을 당하게 하더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을 저주하지 못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저주하지 않고 용서로 다가오셔서 사도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서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저주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용서하게 하시더라는 겁니다.

 

바울이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을 용서한 것은 바울의 실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인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서를 보세요.

이 간증을 하잖아요.

 

이게 구원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어째! 우리하고 영 다르지요.

우린 내가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남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고 조롱하잖아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종이 아니라 상전이 되어서 온 사람들을 다 판단하잖아요.

핍박을 안 당하고 도리어 남을 핍박하잖아요.

그러니 우린 복음을 머리로만 알았지 가슴으로 먹은 것이 아니란 것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가 안다는 복음은 지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관념으로 흐르는 겁니다.

아는 것은 많은데 그게 삶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이걸 귀신의 믿음이라고 해요.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복음은 지식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추상적이고 머릿속에 관념으로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관념이니 내 가족 하나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는 겁니다.

복음이 지식이다 보니 신앙생활이 반(反) 예수적이고 반(反) 바울 적인 것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로 용서로 다가갔는데 우린 칼을 들고 죽이러 다가가잖아요.

그래서 우린 가짜라고 하는 겁니다.

 

우린 그 귀한 복음을 가지고 한 사람도 살려내지 못하고 있어요.

도리어 만나는 사람마다 죽이고 있어요.

가까이는 내 가족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들 내 부모 형제를 복음 모른다고 깔보고 있어요.

그들에게 복음에 빚진 자로서 인내하며 사랑으로 다가간 적이 없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댕댕거릴 줄만 알았지 참아주고 이해하고 용서하지 않아요.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를 진짜 만난 사람들은 절대로 잘난 척하지 않아요.

지식으로 담고 있는 자들이 잘난 척해요.

예수를 진짜 만난 사람은 자신을 예수의 자리로 내려가 섬기게 되어 있어요.

예수를 만난 사람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자가 아니고 용서하고 참아주는 사람이에요.

 

이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스스로에게 솔직해 지세요.

남에 눈치를 살피지 마세요.

이건 자존심 문제도 아니에요.

 

신앙은 내 자신의 문제에요.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가지고 계셔야 해요.

남들이 나를 구원해 주지 않아요.

목사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아요.

 

왜? 사람의 눈치를 살핍니까?

사람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은 그 안에 증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겁니다.

누가 칭찬하거나 인정해 주면 그게 무슨 하나님의 판단이라도 되는 냥 정신 줄을 놓고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진리라도 되는 냥 분별없이 수용하고 따르고 있어요.

 

자기 안에 증거가 없으면 사람들 눈치를 보고 흔들리게 되어 있어요.

누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합니까.

똑 같은 죄인 주제에 누가 누구를 판단 한단 말입니까.

그러니 사람들의 판단에 신경 쓰지 마세요.

사람들의 판단이 나를 구원하지 않아요.

제발 성경의 판단을 받으세요.

 

바울도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왠 줄 아세요.

자기 판단도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자기 신앙조차도 판단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빚진 자로서 살았을 뿐이에요.

그러니 누가 무슨 말을 하여도 신경쓰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만 간 겁니다.

 

이게 예수를 바로 만난 사람들의 특징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 과거에 내 믿음을 남에게 판단 받으러 다녔어요.

이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누가 진짜라고 하면 기분이 좋아서 그들과 사귐을 가졌어요.

그러나 이내 곧 곤고가 찾아 와요.

왜냐하면! 내 안에 증거가 아니고 사람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아무리 내 신앙이 맞다고 하여도 내 안에 증거가 없으면 늘 흔들려요.

남들은 내 신앙이 최고라고 하지만 난 아니에요.

늘 곤고했어요.

당시엔 각양의 은사들을 행하면서 열심과 충성은 특심했어요.

 

이 때는 내가 나를 믿었어요.

내 열심과 충성과 내 경험을 믿었어요.

그러니 뭔가 내게 경험된 것이 있으면 좋은데 없으면 금새 불안 한 겁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면 늘 보던 환상이 안 보여 보세요.

금새 불안해 진다니까요.

전 성경을 엄청 많이 읽고 기도도 엄청 많이 했어요.

거기다가 열심과 충성도 대단했어요.

 

그럼에도 내 안에 허전하고 곤고한 겁니다.

이는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내가 내 것을 증거로 가지고 있으니 늘 불안 한 것이었어요.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어요.

 

그러니 내 스스로가 가짜라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내 믿음 없음이 드러나면 억지 춘향이 노릇하는 것도 나중에 짜증이 나요.

여러분 스스로를 한 번 속여 보세요.

이건 미쳐요.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한 겁니다.

곤고하던 것이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렸어요.

은혜가 덮쳐와서 그 동안의 내 신앙을 확 바꿔 버린 겁니다.

어둡던 내 맘에 빛이 비췬 겁니다.

두려움이 싹 가셨어요.

 

이제 증거가 생긴 겁니다.

주(主)가 나를 알고 내가 주(主)를 아는 그 증거가 생긴 겁니다.

그러니 이젠 누구에게 내 신앙을 점검 받을 필요가 없어요.

누구의 판단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젠 받은 은혜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합니다.

신화와 족보란? 인간의 조건을 말해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나는 어느 교단에 속하였다!

나는 어느 조직에 속하였다!

인간들이 이런 것으로 다투고 변론하는 겁니다.

 

다 자기만 옳다고 하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남은 다 틀렸다고 해요.

자기만 정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만 복음 알고 남은 다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만 복음 전하고 다른 교회는 복음 전하지 않는다고 해요.

그래서 눈만 뜨면 변론하고 다투는 겁니다.

온 교회를 다 간섭하고 모든 교인들 신앙을 다 관리하고자 해요.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 마귀적인 다툼만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건 모두가 율법의 선생들이 되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율법이 뭡니까?

지킨 자는 의롭고 안 지킨 자는 불의하잖아요.

이건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삼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겁니다.

이걸 율법의 선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율법 아래선 항상 다툼과 변론이 일어나요.

이를 역(逆)으로 말하면 다툼과 변론을 좋아하는 자는 율법 아래 있는 자란 뜻입니다.

그 속에 법이 자리 잡고 있으니 맨 날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쌈박질만 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에겐 복음 안다는 것이 법이에요.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겁니다.

그러니 반 복음 적으로 자기도 판단 받아야 할 자가 잘났다고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잠언에서에는 이런 것을 육선이 가득한 집에서 다투면서 사느니 차라리 채소를 먹더라도 다툼이 없는 초막에서 살겠다고 했어요.

신앙생활은 구원 받음에 감사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이지 쌈박질하는 것이 아니에요.

쌈박질은 서로 잘났다고 하니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에요.

평화란 차별이 없는 곳이란 말입니다.

거긴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노는 곳이에요.

네가 못나고 내가 잘났다고 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에요.

평화가 되려면 “너도 죄인이고 나도 죄인이다” 라고 하여야 합니다.

 

이런 정신은 십자가 안에만 있어요.

십자가 앞에서 너도 나도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 할 때 차별이 없고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남과 차별성을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은 아직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복음으로 다투고 변론하고 쌈박질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밖에 있기 때문에 남과 차별하고 우열을 정하는 것입니다.

 

다툼이 있는 곳엔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요.

알다시피 율법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내가 가진 것이 옳고 네가 가진 것이 틀리다고 하여도 이건 율법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십자가 밖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경계의 목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누굴 비판하거나 정죄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도 나도 동일한 죄인이고 이러한 죄인이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용서를 입은 자이기 때문에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설령 틀린 사람을 보더라도 그를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보단 나도 그와 같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달았어!

그러니 그러한 사람을 보면서 자신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하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그를 보듬고 사랑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정 반대로 행하고 있어요.

난 아는데 넌 모르지 하면서 복음 안다는 것을 힘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이건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에요.

그러니 하나님의 경륜인 사랑을 이루기보단 변론과 다툼과 싸움만 하는 겁니다.

 

여기서 오해 할까봐 못을 하나 쳐 놓고 갑시다.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고 하여서 모든 이의 사상을 다 받아 들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어요.

그러니 누구에게 속고 미혹 당할 일이 없어요.

그러니 누구든지 수용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그들도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내가 복음을 알면 이단도 교제 할 수가 있어요.

그들에게 마음을 닫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희도 구원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대하면서 섬기는 자세가 되어요.

 

그러나 우리는 나와 다르면 배척하고 물리 칠 줄만 알아요.

우린 이게 신앙인 줄 알아요.

그러나 아니에요.

신앙생활이란? 변론하고 다투고 싸우는 것이 아니고 용서 받은 자로서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린 정작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안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한다고 나대고 있어요.

 

그래서 이건 아니라고 한 동안 복음을 곡해하는 자들이 있어 쓴 소리를 하였어요.

복음 안다는 것으로 하늘을 찌를 만큼 교만하기에 이건 아니다 라고 말해주고자 한 겁니다.

자기 집단 이외는 복음 전하는 곳이 없다고 합니다.

이는 결국 자기 집단만 구원이 있고 다른 곳엔 구원이 없다는 말이에요.

이게 바로 이단들의 사고이거든요.

 

그래서 그게 아니라고 했어요.

행여 쓴 소리를 하면 그릇된 사고에서 돌이키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이에요?

결국 소귀에 경 읽기 라는 것만 알았어요.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귀를 막은 것도 하나님이시고 귀를 여는 것도 하나님이시니 돌이키는 자는 돌이키고 강퍅한 자는 그대로 강퍅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을 봅시다.

 

계 22:10-12=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장은 성경의 마지막 장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당부와 경고를 하고 계십니다.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두라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내 꼴리는 대로 살겠다 혹은 막 살겠다 라고 하면 그대로 두라는 겁니다.

본인이 그렇게 살겠다는 데서야 누가 말립니까?

그러니 하나님도 가만 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래요.

그냥 너는 너 받은 은혜대로 살라고 합니다.

본인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그 누가 와서 말해도 안 들어요.

예수님이 오셔서 말해도 안 들어요.

 

한 사람의 일어섬과 넘어짐은 주께 맡기고 우린 우리가 받은 은혜로 살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주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업신여기지 않았어요.

그들도 전도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섬기는 자세로 가까이 갔어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자에요.

빚을 졌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갚아야 할 의무를 가진 자들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빚을 받아 내시려고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주신 겁니다.

 

신앙생활은 새 사람으로서 빚진 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몸으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세요.

우리 몸으로 행할 수 없던 것을 예수님이 오심으로 행하세요.

결국 우리 몸은 예수를 증거하는 도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도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이란 없다고 해요.

그러나 이건 십자가를 반쪽만 알고 있는 것이에요.

 

성도는 옛 사람으로서는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맞아요.

하지만 성령으로 새 사람으로 살아났어요.

아담 안에서는 죽은 자이지만 예수 안에서는 산 자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옛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셨지만 성령은 새로운 피조물로 살리는 일을 하셨어요.

 

그러므로 성도는 죽은 자가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산 자에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의에 대하여서는 산 자에요.

이젠 예수의 피로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된 자로서 적극적으로 의(義) 가운데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걸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로 살펴봅시다.

창조 사역을 보면 갈라내는 창조와 채우는 창조 두 구분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날부터 셋째 날 까지는 갈라내는 창조를 하세요.

빛과 어둠을 갈라내고!

궁창 윗 물과 궁창 아랫 물을 갈라내고!

바다와 육지를 갈라내고!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갈라진 공간에 채우는 일을 하세요

하늘을 채우고 바다를 채우고 땅을 채우는 일을 하세요.

나머지 사흘은 채우는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걸 십자가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구원이란?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는 것입니다.

이건 첫 번째 갈라내는 창조에 속한 일입니다.

섞여 있는 것을 갈라낸다는 것은 죄와 사망가운데서 빼내심을 입는 것과 같아요.

이걸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의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일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 계신 사흘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이 무덤 속에 들어가서 무덤 속에 있는 자기백성들을 건져 내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게 사흘간 창조인 겁니다.

 

그리곤 예수님은 사흘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곤 성령을 보내서 죄와 사망이라는 무덤에서 건져낸 자기 백성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듭니다.

이 때 성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제 성령이 성도의 몸에 사흘간의 채우는 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흘은 우리 성도의 전 일생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안에서 사흘간에 하늘에 신령한 것으로 채우고 예수님의 것으로 채우는 창조의 일을 행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때부터 시작이에요.

죄로부터 갈라내는 것은 십자가이고, 채우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후의 삶이에요.

신앙생활의 본질은 죄와 사망에서 나와 의(義)와 거룩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죄를 이기고 살아가는 것이에요.

 

신앙생활이란? 예수 안에서 산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罪)에 종노릇 하던 자가 이젠 의(義)에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걸 하라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신 겁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그러지요.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테인데 그러면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킨다고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고 하셨어요.

 

이건 죄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면 가능하게 하신답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지켜집니다.

예수님이 성도 안에서 지켜 내세요.

예수님이 우리 몸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세요.

 

예수님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해 내신단 말입니다.

스데반이 원수를 용서 한 것은 스데반이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신 겁니다.

스데반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했어요.

우리도 스데반이 받은 그 성령을 받았어요.

그럼 스데반이 받은 동일한 성령을 받은 성도도 스데반과 같은 일을 할 수가 있어요.

바울이 자기를 핍박한 자들을 용서하였듯이 성도도 용서가 되어요.

 

이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세요.

이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이 우리 몸을 성전 삼아 계신 것입니다.

이건 퍼펙트하게 늘 이렇게 사느냐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예전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 몸에서 일어난단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우리 몸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행하는 모든 삶은 예수님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이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부인이 되어지는 겁니다.

내가 비워지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차지하시는 겁니다.

내가 부인되고 비워지니 고난인 겁니다.

 

이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다고 했어요.

우린 모두가 이 싸움을 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께서 그렇게 몰고 가세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 고난인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서 비우고 빼앗기는 삶을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옛 계명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옛 계명은 내가 지키는 것이지만 새 계명은 예수님이 지키세요.

그래서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법에 보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고 했어요.

 

레 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

 

소금은 변치 않는 언약을 상징합니다.

이 시대 변치 않는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소제물이란? 성도의 삶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모든 삶 속에서 예수님의 의(義)가 묻어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봉사를 해도 예수님의 의(義)가 나오고!

헌금을 해도 예수님의 의(義)가 나오고!

전도를 해도 예수님의 의(義)가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의(義) 안에서 한다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하게 하신 것이란 말입니다.

이걸 성경에선 믿음이 일으킨 행함이라고 합니다.

혹은 성령의 열매라고도 해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 공로가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 일컬어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친다고 하는 겁니다.

난 예수님의 의(義)로 삽니다! 를 고백하고 사는 것이 소제 물에 소금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선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일컬어 영적예배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예수님의 생명이 프로그램 칩처럼 내장이 되어 있어요.

성령이 예수님과 한 몸으로 만드셨어요.

이제부터 성도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존재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고 너희를 영접치 않는 것은 나를 영접치 않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성도를 예수님과 한 몸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들 속에는 예수님의 삶이라는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도에겐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연관된 사건들을 툭툭 터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너희는 네 것이 아니고 예수님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럴 때마다 성도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겐 예수님의 프로그램이 내장이 되어 있으니 예수님의 운명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예수님과 연관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의 운명 속으로 밀어 넣고 다스려 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세상에서의 운명은 인간들에게 버림당하고 죽어야 하는 운명입니다.

예수님의 팔자가 그래요.

 

이는 인간들의 배후에 있는 마귀를 들추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지옥에 갈 사람들은 악마가 심어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속한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성도는 늘 마귀로부터 얻어터지는 겁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게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팔자입니다.

하나님이 천국에서 살 사람은 이 땅에서 예수 때문에 고난당하도록 해 놓았어요.

이걸 빚진 자라고 하는 겁니다.

바울이 어떻게 빚은 갚았는지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4장입니다.

 

고전 4:9-13=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말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당한 고난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연고라고 합니다.

자신은 그 많은 핍박을 받아도 그리스도의 연고로 참아주고 용서하고 축복한다고 했어요.

모두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게 빚진 자의 삶이에요.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예수의 증인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증인이란? 예수의 삶을 강제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자란 뜻입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그렇게 몰고 가세요.

이를 원치 않는 길로 인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지금 로마서를 쓰면서 자신을 빚진 자로 고백하는 것은 복음이 바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빚진 자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빚진 자로서 이 복음을 로마교회에도 전하기를 소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의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여야 합니다.

난 아는데 넌 모르지 꺼져!

그러지 말고!

 

이해하고 참아주면서 그 사람을 통하여서 나도 하나님 앞에선 저랬었는데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로 삼으세요.

그럼 그 사람을 사랑하다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깨닫고 감사케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악당이 용서 받았다는 것을 늘 잊지 마십시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자가 이렇게 은혜를 입고 삽니다.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인데도 우린 늘 잊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눈을 밝혀서 하나님의 그큰 은혜를 더 많이 알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빚진 자로서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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