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6강. 함께 나눌 신령한 은사 (롬 1:8-13)

by coroa 2022. 4. 2.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6강. 함께 나눌 신령한 은사 (롬 1:8-13)

-.정낙원 목사

 

롬 1:8-13=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 됨이로다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에덴동산을 떠나온 인간들은 제일 먼저 한 일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할까요?

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저주에 대한 반발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품에서 쫓겨난 후 자기 생명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신세로 전락을 했습니다.

 

누가 지켜주지 않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 힘을 가지고자 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본능적으로 힘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이 세상은 강한 자만 살아남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두 세 사람만 모여도 서로 힘을 모아 강함으로 스스로를 지키려고 합니다.

이건 복음을 알건 모르건 동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항상 인간이 쌓은 그 힘이 종국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에겐 힘을 소유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힘을 삼고자 모이면 흩어버리십니다.

왜냐하면! 힘을 소유하면 반드시 그 힘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이 힘을 소유치 못하게 하려고 힘을 빼는 일을 하십니다.

물론 우리들은 여기에 반발을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안에 내제되어 있던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본성적인 죄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하여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어 가실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로 모이고자 하고 하나님은 흩으십니다.

사도행전에 역사를 보아도 그러합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돌아옵니다.

스가랴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의 영을 부어주시니 일순간에 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갑자기 수만 명이나 되는 하늘나라 백성들이 살아났습니다.

교회라는 모임이 형성 됩니다.

그래서 일곱 집사를 세우고 교회의 조직을 만들고 틀을 만들어 갑니다.

이제 큰 힘을 가진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큰 환란을 일으켜서 모인 무리들을 다 흩어버리십니다.

결국 흩어짐으로 본다면 바벨탑 사건과 같은 일이 재현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흩으셨을까요?

이는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이란 떠나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입니다.

물론 흩어버리심 속에는 온 세상에 복음을 증거하여야 하는 것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속엔 인간은 힘을 갖게 되면 그 힘으로 반드시 복음을 가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흩어버리심도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흩으심으로 하나님은 이 땅에 있는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참 교회는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들어갔음에도 이 세상에 땅을 유업으로 주지 않고 네가 가야할 본향은 하늘에 있다고 알려 준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흩으심은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믿음에 조상인 아브라함도 약속에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갔음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처럼 장막 생활을 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믿음에 조상입니다.

믿음에 조상이란? 모든 성도의 조상이란 뜻입니다.

 

조상이란? 하나의 기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런 인생을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 속에는 우리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성도는 아브라함과 같은 모습으로서의 삶을 이 세상에서 살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도 아브라함이 나그네로서의 장막생활을 하였듯이 성도들도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떠나야 하는 외로운 일입니다.

 

전 우리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이미지 그림”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을 연상합니다.

하늘에 떠있는 샛별을 보고 사막을 여행하는 한 길손이 바로 제 자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 볼 것은 오직 하나 깜깜한 밤에 하늘에 떠 있는 샛별 되신 주님입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길에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장이 되셔서 그 나라로 무사히 인도하실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구름 기둥이 앞서서 머물고 진 칠 곳을 알려 주시고 떠날 것을 인도하셨듯이 예수님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이런 인도하심을 받고 왔습니다.

앞으로도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둔하여서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늘 주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을 느끼고 자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홀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기 때문에 갖가지 사건과 사고들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게 닥친 사건은 모두가 하나님이 벌리신 것임을 믿고 순응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란? 예수를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아픔이 우리 몸에 그대로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하늘 예루살렘의 성전에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왜? 보석이라고 할까요?

이는 고난이라는 강한 시련의 불 속에서 구운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그럽니다.

너희를 시련하려고 하나님은 불같은 시험들을 주신다고!

시련이란? 불순물을 빼내기 위하여 용광로에 철을 넣고 제련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린 본성적으로 세상과 짝하고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마음에 품고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시련이고 불 같은 시험인 겁니다.

 

인간의 본성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 합니다.

어디라도 정착하고자 합니다.

교회이든 집단이든 그곳에 뿌리를 박고자 합니다.

거기서 안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떠나라고 합니다.

우리가 머뭇거리자 강제로 사건을 일으켜서 빼내십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고 난 후 아! 거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구나! 를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을 떠나오고 난 후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갈대아 우르 라는 곳이 죄악의 도시이고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르는 곳임을 알았습니다.

롯도 소돔과 고모라에서 빼내심을 입고 자기가 거한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의 비가 쏟아지는 곳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고 그동안 정들었던 부모친척 고향을 떠나 타관객지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는 것과 같습니다.

힘 없는 모습으로 힘이 지배하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땐 그래도 일가친척이라는 방패막이가 있어 안심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이라는 낯선 곳에서는 그 누구 하나도 아브라함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 자신을 이리로 불러낸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나요.

그러니 나그네로 하루 하루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넘나드는 불안하고 고된 삶인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차라리 하나님은 만나지 않음이 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고 난후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꿈이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우리를 간섭하면 아픕니다.

우리 꿈이 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이끌림을 당하게 되면 외롭습니다.

하나님은 가시와 담으로 막아 놓고 하늘을 열어 주십니다.

밧모섬의 요한처럼 죽음에 던져 넣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부디 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깊이 알아가시길 기도합니다.

 

인간이란? 사회성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아픔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본성적 외로움을 달래기 위하여 의지할 대상을 찾습니다. 모이면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을 방패로 삼아 안주하고자 합니다.

그 안에서 자기 존재감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찾아 친구를 만들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그토록 로마로 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몇 번이고 로마에 가고 싶었지만 번번이 길이 막히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발 날 로마로 좀 보내 주세요! 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의 이 한마디 고백 속에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신자의 외로움과 또한 복음을 가진 자의 사랑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함에는 자신이 깨달은 신령한 은사를 서로 나누고 싶어서입니다.

이건 가르치고자 함이 아니고 자기가 받은 은사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신령한 은사를 나누는 것에 국한 하지 않고 그들을 통하여 안위 받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신도 복음 전하면서 지치고 고단한 몸과 마음을 위로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도의 외로움을 감지 할 수가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전 이 바울의 기도를 보면서 나의 기도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그냥 글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살아서 내 몸뚱아리에 새겨지는 것을 느낍니다.

말씀이 새겨질 때마다 내 입에선 단내가 나는 아픔에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욥의 고백처럼 하나님이여! 어찌 하여 나로 하여금 침 삼킬 틈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절규가 나옵니다.

 

그냥 성경 속에 남의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점 점 더 뼈저리게 깊이깊이 내 삶에 각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한 그 고난을 조금이나마 맛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복음에 참예코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압니다.

하지만 아픕니다.

외롭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위로 받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로부터 안위 받고자 하는 이 마음은 곧 저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린 입술로는 복음 복음 합니다.

하지만 그 복음이 함유하고 있는 내용은 잊고 삽니다.

복음 속에는 죄 사함의 기쁨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아픔도 있습니다.

새 사람으로서의 삶도 있지만 옛 사람의 버려짐도 있습니다.

새 사람의 삶이란 결국 옛 사람의 버려짐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옛 사람의 죽으심이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은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위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성령 안에서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는 역(逆)으로 옛 사람은 죽어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라는 아담의 몸을 가지고 새 사람이라는 예수님 마음으로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는 늘 두 사람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충돌이 일어납니다.

우리 본성과 다른 낯선 삶을 강요받기 때문에 우리 몸은 늘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보다 산다는 것이 훨씬 어렵고 고달픕니다.

죽음은 한 순간의 두려움이지만 산다는 것은 살아 있는 한 늘 염려와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다는 것이 죽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힘이 든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부인하는 아픔이 있기 때문에 고난인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 힘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서 함께 감당케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고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겠습니까.

그럴 때마다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이겼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그만큼 아픔이고 고난인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누군가로부터 위로받고 싶어집니다.

동무를 찾습니다.

동무는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는 자기 몸과 같은 사람입니다.

동무(童舞)란? 춤을 함께 추는 자란 말인데 이는 자기의 고민이나 아픔을 다 말하여도 다 이해해 줄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에 이런 동무 한 사람만 있어도 행복합니다.

특히나 복음에 관한 사람이라면 금상첨화이겠지요.

 

바울은 이 동무를 그리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 동무들이 로마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서 만나고 싶은 겁니다.

만나서 복음의 교제도 나눌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안위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일생 복음으로 인하여 고단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고단함을 잠시나마 동무를 만나서 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도 피차 안위함을 위하여 로마교회에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안위(安慰)함”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쉼파라칼레오” 라는 단어는 “서로 위로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바울 혼자 위로받고자 함이 아니고 로마교회 성도들도 위로하고자 함입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듯이 같은 하늘 아래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외롭고 힘든 일이기 때문에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 위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바울의 이러한 마음을 이번에 사건을 통하여서 더욱 더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자칭 세상에서 가장 복음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하고 논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것을 보면서 과연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

저들이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일까?

저들이 입만 열면 주술처럼 말하는 십자가는 도대체 어떤 의미의 십자가일까?

그동안 쌓아온 연민 때문인지를 모르지만 불쌍한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람이 너무 황당한 일을 당하면 분노가 나오지 않고 헛웃음만 나오는 것 있지요.

제가 제일 가슴이 아팠던 것은 이러한 답답한 마음을 툭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너무도 서글펐습니다.

복음 안에서 흉금을 터 놓고 교제할 동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억울함을 토설하고 싶은 동무가 없다는 것이 더 서글펐습니다.

그러니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밝혀 본들 그것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고 그냥 당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내가 무슨 성인군자도 아닌데 주님께 판단을 맡기고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가 나오니 웬 조화입니까!

주께서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그 어리석음을 드러나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니 분노가 일어나기보다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앞서는 겁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누구로부터 위로받고 싶었어요.

그런데 위로 받고 싶은 동무가 없는 겁니다.

아! 주님!

주님께 아픔 마음을 토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외로움을 주셔서 그 외로움으로 주님을 찾게 하심을 또 깨달았습니다.

결국 넌 날 찾고 또 찾으라는 것 밖에 해답이 없습니다.

 

주님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어찌하여 나로 이렇게 수욕을 당하게 하십니까!

원망도 해 보지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묵묵히 도살당하는 양처럼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의지할 분은 주님뿐이구나! 를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전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바울의 심경을 너무도 잘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아!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쓰게 하시려고 이런 일들을 벌리셨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저는 바울의 이 고백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외로움과 고단함을 절절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의 이 외로움은 주님이 이 세상에서 겪은 외로움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참으로 외로운 길입니다.

아프고 쓸쓸한 길이에요.

그 누구도 대신 해 줄 수가 없는 그런 길을 걸어가게 되어 있어요.

우린 이럴 때면 어김없이 주여 언제 오시렵니까!

주님을 더욱 더 소망하게 된 답니다.

이게 성도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외로우면 누군가에게 그 외로움을 덜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서 그들도 예수 때문에 당하는 아픔과 외로움들이 있으니 서로 피차 안위 받고자 한 것입니다.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손을 맞잡고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암튼 바울은 로마교회에 신령한 은사도 나누어주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었습니다.

그럼 바울이 로마교회에 나누어주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합시다.

본문 15절을 보면 그 신령한 은사가 무엇인지가 정확하게 나옵니다.

 

롬 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간절하게 로마교회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신령한 은사가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분명히 로마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해주고 싶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교회라고 하면 이미 복음을 받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를 알려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로마 교회에 복음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아니지요?

분명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미 로마 교회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 교회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11절을 보시면 그 첫 번째 이유가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교회 성도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 입니다.

“견고케 하기 위함” 이라는 말은 뭔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속에는 믿음을 견고케 하는 다른 어떤 것이 담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 속에 풍성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로마교회 성도들이 아직 연약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 담긴 풍성한 은혜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 속에 담겨있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어 그들의 신앙이 더욱 더 견고케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견고케 한다는 말은 “스테에리조오” 라는 말인데!

이는 “공고히 세우다”

“굳건하게 다지다”

“강하게 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미 받은 것을 더 든든하게 뿌리를 내리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로마교회가 복음에 연약하다는 말이 됩니다.

연약한 기반 위에 세워진 집처럼 복음의 초보에 머물러 있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이 복음을 이해하는 깊이와 로마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깊이가 다를 수 있음을 알 수가 있어집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이해하는 것에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알다시피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로마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 때 회심을 한 로마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로마로 돌아가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니 로마 교회는 사도들이 아닌 일반 신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겨난 교회에요.

 

만일 로마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다면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갈라디아 교회처럼 유대 율법주의가 많이 섞였을 것이고!

만약에 이방인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면 그 당시 창궐한 영지주의 영향으로 교리적인 부분이 아주 미약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팽배하던 때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를 보면 이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전반부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에 의(義)가 아니고 믿음으로 난 의(義)를 말합니다.

그리고 12장 이후 후반부에는 믿음에 의(義)를 가진 자들은 어떻게 살게 되어 있는가를 말해주는 삶에 부분입니다.

 

그럼 로마교회 안에는 그 당시에 교회를 어지럽혔던 두 이단 사상이 침투해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두 이단 사상이 뭔고 하니 갈라디아교회에 잠입하여 어지럽혔던 유대 율법주의이고 또 하나는 각 교회마다 독버섯처럼 퍼졌던 영지주의 사상입니다.

 

유대 율법주의는 예수 믿기 플러스 율법 지킴으로 온전해 진다는 사상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로에다 인간의 행함을 끼워 넣는 사상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알미니안 주의이고 일명 성화주의입니다.

바울은 이걸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성도의 삶을 부패케 하는 영지주의 사상도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대로 라면 믿음에 인간의 행함을 끼워 넣는 것도 경계해야할 다른 복음이고 이단이지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성도의 삶을 간과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다른 복음인 이단입니다.

 

영지주의란? 영과 육을 분리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영(靈)은 거룩한 것이고, 육(肉)은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여 교리적인 지식을 쌓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곤 반대로 육체는 더러운 것이라 하여 쾌락주의로 일관했습니다.

 

마치 이 시대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죄인에게서 나오는 것은 다 죄이니 막 살아도 되고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는 사상과 동일한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어느 시대이고 항상 있어 왔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이런 사상이 팽배해서 사도들은 이들과 피 흘리는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성도들의 삶을 깊숙이 간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이 부분이 너무도 간과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요하게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육신을 볼모로 역사합니다.

죄인의 몸은 죄를 그려내는 도화지입니다.

죄가 그리는 그림이 바로 자기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방탕과 방종이라고 합니다.

죄인의 몸은 자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이 복음을 그 당시 편만하게 퍼진 헬라의 철학적 사고로 복음을 공교하게 이해하여 영(靈)과 육(肉)을 분리하여 인간의 쾌락을 합당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죄 짓고 사는 것을 부끄러운 줄 모르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마음대로 막 살아도 괜찮다고 멍석을 깔아 준 것입니다.

 

죄 지어도 괜찮다고 하니 마음에 찜찜한 것들이 사라졌어요.

마음에 부담감을 해소시켜 주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교회마다 이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어요.

그래서 사도들이 교회마다 이러한 것은 마귀적인 것이니 따르지 말 것을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이런 자들이 있어요.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죄이기 때문에 우리 행위에 신경 쓰지 말고 막살아도 되고 꼴리는 대로 살아도 예수님 십자가 피만 바라보면 된다고 하는 자들이 있어요.

막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처럼 육체의 소욕대로 살게 하는 멍석을 깔아 주는 것과 같아요.

이런 말을 들은 교인들은 이게 무슨 엄청난 복음의 비밀인줄 알고 덥석 물어요.

 

그러니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것이 무슨 복음에 합당한 것인 줄 알고 죄에 대한 부끄러움도 모르고 도리어 당당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악한 것이라고 지적하면 행위주의자라고 매도해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초대교회 안에서도 있었어요.

물론 지금도 있구요.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지금 하는 일은 이미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막 살아도 되고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사상이 일어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반드시 이런 자들이 일어나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이것을 악이라고 고발 하다가 매를 맞는 성도들도 일어나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처럼 돌 맞아 죽는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주의 일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다는 것으로 남게 되는 겁니다.

성경이 오고 오는 모든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영원힌 진리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음이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은 막 살아도 되고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는 그 무리들 속에도 적지만 이건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따르지 않는 성도들이 있어요.

반면에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인간들이 더 많지만 말이에요.

그러니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와 같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고 자칭 사도라고 하면서 잘난 척 하는 무리들 속에서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2천 년 전 그 교회의 모습이 지금도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세운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횡행 하였는데 일반인들이 세운 교회라고 한다면 그것도 이방 나라의 중심지인 로마에 세워진 교회일 것 같으면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바울은 이제 막 생긴 로마 교회를 이러한 거짓 사상으로부터 공고히 세우고 굳건하게 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교리적으로 연약하고 불순물이 섞여 있을 지도 모르는 로마 교회에 말씀을 더욱 깊이 가르쳐서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해 주고 싶어서 로마 교회로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마귀는 항상 선악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달콤한 것으로 미혹합니다.

죄인에게 달콤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복음을 영지주의로 해석해 버리는 것입니다.

머리에는 십자가를 안다는 지식을 쌓아서 죄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주고 육신의 쾌락은 막 살아도 된다고 함으로서 면죄부를 주어 방탕과 방임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연약한 자들을 미혹하여서 온통 집을 엎드러지게 하는 자들이라고 했어요.

집안을 엎드러지게 한다는 것은 그나마 지켜온 신앙을 파멸 시킨다는 말입니다.

기성교회는 복음이 없다고 나왔는데 더 지독한 이단사상에 물들고 만 겁니다.

이를 두고 성경에선 처음 형편보다 나중 형편이 너 나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영지주의적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죄에 대한 감각을 더 무뎌지고 죄와 싸울 의욕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갈수록 게을러지고 성품이 무례하고 강포하고 패악하고 심령이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방임하니 죄인이 죄 짓는데 뭐 어때! 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뭡니까?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안다고 하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 싶어 합니다.

이 말은 로마교회가 알고 있는 복음에 깊이가 얕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얕다는 것은 복음을 이해하는 깊이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복음 속에 담긴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어린아이 때는 어린아이 같이 생각하고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행동하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일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 사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이 생명의 자람같이 더 풍성하게 깊어가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마다 은사로 가르치는 자들을 세워서 성도들을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케 하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4장을 봅시다.

 

엡 4:11-15=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보세요.

하나님께선 교회 안에 여러 은사자들을 세운다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목사나 교사같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가르치는 자로 세운다고 합니다.

이들을 세우는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세워가기 위함입니다.

이는 성도의 신앙이 마치 어린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처럼 예수를 알아가는 일에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이 나아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케 한다는 말은 “카타르티스모스” 라는 말인데 이는 “서로 붙잡아 든든하게 선다” 는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혼자 세워가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연합으로 세워간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성도를 일컬어 하나님의 집에 벽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유니온 크라이스트” 또 교회를 일컬어 “유니온 처치” 라고 하는 것도 예수그리스도라는 몸에 붙어 있는 지체로서의 연합체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개인주의를 허용하지 않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신앙고백은 각자 개인적인 것입니다.

이건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을 한 성도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이 된 자로서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걸 흔히 교회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등한시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에요.

절대로 옳은 신앙이 아니에요.

그래서 전 교회에 가라고 그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옳은 신앙은 반드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행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교회 안에 성령으로 목사라는 성경을 가르치는 은사자를 세워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서 서로 협동하며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교회는 어머니와 같다고 하였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칼빈의 말을 잘 이해하세요.

교리적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에요.

이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곡해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이단 사설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봉사를 하게 한다는 “디아코니아” 라는 말은 “서로 섬긴다” 는 말이에요.

이는 교제하는 것을 말해요.

교회는 이 세상 속에 하나님 나라에요.

그러니 성도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고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외로운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라는 하나님 나라를 세워서 서로 돌아보고 위로하고 사랑하고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치고 곤한 심신을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성도 간에 서로 돌봄으로서 위로받고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내가 교회인데 교회 갈 필요가 뭐 있느냐! 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가르침이 무슨 복음인줄 알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어요.

이러한 것이 일어나는 것은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공교하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자기가 배운 철학으로 성경을 공교하게 해석하여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아주 사악한 뱀 사상입니다.

성도에게 어찌 하든지 교회에 가라고 하여야지 가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 진의가 어떻든지 이설(異說)이에요.

이런 이설(異說)을 바울은 사람의 궤술이라고 하였고 간사한 유혹이라고 했어요.

 

이러한 것을 내어 쫓으라고 목사를 세웠다고 합니다.

보세요.

목사를 세운 이유는 또 다른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풍조에 떠 다니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잖아요.

제 말로 듣지 말고 성경을 상고하세요.

 

여기서 사람의 궤술이라는 말은 “퀘이베이아” 라는 말로서 이는 야바위꾼들이 주사위를 던져서 속임수를 쓰는 것을 말해요.

왜? 속임수로 사기를 칩니까?

이는 돈을 뜯어내기 위함입니다.

 

이를 바울도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어요.

 

롬 16:18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보세요.

거짓 선지자들은 공교하게 지은 말로 순전한 사람들을 미혹하여서 자기 배를 채운다고 하지요.

배를 채운다는 것은 복음 전한다는 핑계로 돌아다니면서 돈 벌이 한다는 말입니다.

순전한 사람들이 속는 겁니다.

여기서 순전한 사람이란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자들을 말해요.

지금도 이런 자들이 있어요.

 

성경을 보면 이런 것에 안 속는데 성경을 안 보고 자기 선생의 말만 들으니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그러하다고 눈에 보여줘도 안 들어요.

이 모두가 성경은 안 보고 어느 특정한 사람의 신학이라는 독(毒)을 마셔서 미혹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른 말을 해주면 도리어 욕을 하는 겁니다.

당신이 뭔데 기분 나쁘게 하느냐! 라고 덤벼요.

 

그리고 유혹이라는 말은 “파누르기아” 라는 말인데 이는 “교활하게 유도한다” 는 뜻입니다.

아주 그럴 듯하게 논리를 개발하여서 사람을 꼬드기는 겁니다.

이걸 제가 아까 죄 짓는데 부담감을 덜어주는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라고 했어요.

막 살아도 된다!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교회 갈 필요가 없다!

죄인은 어떻게 살아도 죄이니 예수 피만 바라보면 된다! 고 가르치는 것이에요.

이걸 궤술 즉 “궤이베이야” 라고 하고 교활하게 유도한다는 “파누르기아” 에요.

 

그러니 어린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에 바람에 떠 다니는 부평초처럼 흘러 다녀요.

그게 진리인줄 알고 따라다녀요.

풍조에 밀린다는 “클뤼도니조베노이” 는 조타 장치가 없는 배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을 말해요.

 

당시 교회 안에 이런 거짓 복음이 참 복음으로 둔갑하여 가르쳐 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령으로 목사들에게 가르치는 은사를 주셔서 연약한 성도들을 공고하게 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당시 교회 안에도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서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의 궤술이란? 인간의 학문으로 공교하게 복음을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철학으로 복음을 해석하여 성도들의 몸과 마음을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게 하고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옛 사람으로서의 삶을 그대로 살아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나 죄에 대한 아픔이 없고 거리낌이 없이 살게 하는 공교하게 만든 복음이 바로 사람의 궤술이고 간사한 유혹입니다.

 

이걸 일컬어 영지주의 뱀의 독(毒)이라고 합니다.

비록 작은 양(量)이지만 뱀의 독(毒)을 마시게 되면 그 독(毒)이 서서히 온 몸에 펴져서 사람을 마비시키듯이 공교하게 만든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이 뱀의 독(毒)처럼 서서히 그 사람의 몸과 영혼을 파멸케 합니다.

이단 사설은 적은 누룩처럼 번져요.

마약처럼 강해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그 위험성을 몰라요.

달콤하니 따르는 겁니다.

그러나 서서히 그 독(毒)에 취하여 신앙양심의 감각과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게 되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교회에 성령의 은사로 가르치는 목사를 세워서 성도들을 돌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단이라고 해서 다 틀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의 다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서 그 중에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아주 강력한 독소적인 말을 심어 넣습니다.

마치 발람처럼 입술로는 이스라엘을 축복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자극케 하는 미인계를 써서 그들을 음행케 하고 이방신을 섬길 수 있는 길을 터 놓는 것과 같아요.

 

인간을 사로잡을 만한 강한 독소란 다름 아닌 인간의 행실을 긍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를 지어도 예수의 피만 바라보면 된다고 하면서 인간의 부패한 삶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죄악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감각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몸으로 죄 짓는 것을 합당하게 하고 육신의 소욕과 싸움이 없게 하는 것은 뱀의 독(毒)이고 사람의 궤술입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 안이든 성경 바깥 교회사를 통틀어서 보아도 죄는 항상 인간의 행실을 더럽게 하였고 성령은 인간의 죄를 금지케 하였어요.

어느 시대이고 성령은 항상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못하게 하였지 막 살도록 하지 않았어요.

자기 꼴리는 대로 살게 하지 않았어요.

그 어디에도 없어요.

반대로 항상 이단들은 육신의 소욕대로 사는 것을 방치하였어요.

그러므로 막 살아도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십자가를 안다고 할 수 없어요.

그건 영지주의 이단이에요.

 

이러한 이야기가 성경에 버젓이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은 그 당시에도 이런 사상이 난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사도들에게 감동을 주어서 성경을 쓰게 하신 한 겁니다.

이러한 것들과 싸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봅시다.

성경을 왜? 주셨는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딤후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합니다.

무엇하기 위함이라고 합니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왜? 교훈하고 책망합니까?

이는 인간이 어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고발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책망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알다시피 사도들은 모두가 십자가 이후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은 죽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들입니다.

 

그럼 사도들이 서신서 속에는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성경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들이 뱉어낸 말씀이잖아요.

 

중요한 말이니 잘 들으세요.

 

구약과 신약을 비교합니다.

구약에 아브라함을 선택하지요.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은혜 언약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율법이라는 행위 언약을 주지요.

왜? 은혜 언약을 받은 자들에게 행위 언약을 줍니까?

 

이는 행위 언약을 통하여서 은혜 언약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은 지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고발하고 은혜를 드러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했어요.

그러라고 율법을 준 겁니다.

 

이게 신약에서도 그대로 주어져요.

신약의 성도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구원이 주어집니다.

이건 은혜입니다.

새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처럼 은혜 언약이에요.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구원이 주어진 언약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 언약이라는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사도들의 성경이 주어집니다.

사도들이 쓴 성경도 율법처럼 인간의 행함을 추구하고 있어요.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고 하고 있어요.

행위 언약과 같아요.

왜?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구약의 율법과 같이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할까요?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구원 받은 것이 은혜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실존을 고발해서 너희가 이런 죄인임에도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이나 신약이나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다루어 가시는 방법에는 동일해요.

구약에도 은혜 언약 아래서 율법이 주어졌듯이!

신약에도 은혜 언약 아래서 사도들이 서신서가 주어졌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가요.

 

구약은 육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복음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영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복음이에요.

구약은 신약의 예표에요.

시청각 자료에요.

 

그러니 사도들의 서신서는 구약의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살으라는 율법을 주셨듯이 신약에서도 새 언약 안에 있는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어떤 정신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책망하고 교훈하여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라는 것은 개과천선하는 변화와 성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알아가는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미를 깊이 알고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이란? 개과천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날마다 그 은혜의 깊이를 알아가고 넓이를 알아가고 높이를 알아가고 길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단편적이지 않습니다.

 

흔한 말로 나 예수 믿으면 되잖아! 로 끝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죄의 깊이를 알아가고!

자신의 철저한 무기력함을 깨닫고!

왜? 예수의 피 여야만 하는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는 반드시 죄를 통하여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은혜 언약 속에 모세의 행위 언약을 주신 것은 모세의 행위 언약을 통하여서 아브라함의 은혜 언약을 드러내게 하심입니다.

모세 언약을 가지고 아브라함 언약을 드러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엄청 중요한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창세전 언약이라는 은혜로 구원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은혜로 구원 된 것을 알게 하시려고 행위 언약을 주세요.

지키라는 행위 언약이 아니고 지키지 못함을 알게 하여 우리의 구원이 은혜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구원을 시켜 놓고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는 서신서들을 주신 겁니다.

서신서를 볼 때마다 우리 죄를 고발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욱 더 바라보게 만들어요.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낱낱이 해부하여 우리 안에 죄를 다 까발려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못 들게 만들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자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욱 더 또렷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상관없이 산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정말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관념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보아야 야! 이거 정말 안 되는구나! 를 알 수가 있어요.

해 보지도 않고 안 되는구나! 를 아는 것과 실제로 해 보고 안 되는구나! 를 아는 것은 천지차이에요.

그래서 저는 율법 신앙이라도 해 보라고 하는 겁니다.

왜? 율법 신앙이 예수를 죽일 수박에 없는지를 알라고 합니다.

 

율법신앙을 해 보세요.

얼마나 우리 행위가 아름다운가!

내 행위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를 챙기게 되는지를 알게 되어요.

내 행위가 부정당하면 난 어떻게 반발을 하는지 알아야 해요.

그래야 아! 율법대로 살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일 수 밖에 없었구나! 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율법 아래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을 폼으로 주지 않았어요.

심심해서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고 하지 않았어요.

말씀 지켜서 의로워지라고 행동 강령을 주신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 말씀 앞에서 우리 꼬라지를 들추어내고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하나님 말씀은 살아서 우리의 혼 영과 심령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했어요.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발가벗긴다고 했어요.

발가벗겨서 예수 앞으로 인도한다고 했어요.

그러니 말씀을 통하여서 예수를 만나게 하려고 사도들의 서신서들이 행위 언약처럼 말씀을 지킬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말씀을 앞 세워서 일을 하세요.

말씀을 앞 세워서 우리 죄를 고발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편에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였던 겁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말씀을 가까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어떻게 주어졌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죄의 깊이를 더 많아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알아야 감사케 되구요.

은혜를 모르고 감사한다는 것은 허구에요.

 

생명이란? 반드시 죽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모르고서는 생명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선악과는 생명과를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 신앙을 모르고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신앙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았다는 것이 귀한 복음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용서 받음이 은혜로 남기기 위해서 말씀으로 우리 몸에서 죄를 끄집어내는 일을 하십니다.

왜? 우리 몸으로는 안 되는지를 알게 하시려고 적극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킬 것을 명령하여서 우리 안에서 죄를 끄집어내시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우린 온전 할 수가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서만 구원이 주어진 것에 감사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살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위하여 순종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을 알게 하기 위하여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려고 순종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아주 역설적이지요.

 

바울은 복음 속에 담긴 이러한 역설의 의미를 로마교회에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앞부분에서는 교리적인 것을 언급하고 후반부에서는 삶을 언급한 것입니다.

로마서를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은 로마교회 안에도 아직 이러한 역설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사단의 궤계가 어떤 것인지 또한 구원받은 성도가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것들을 함께 나누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교리적인 문제와 삶에 자세를 알려 주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믿음과 삶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로 교회 안에 가르치는 자들을 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폭들이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럼 사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깨닫고 이해하는 깊이가 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그 깨달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삶에 담아내는 폭이 다를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나누어줄 신령한 은사인 복음을 나누어 주겠다는 말은 이들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알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으니 그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신령한 은사라고 합니다.

은사란? 하나님께서 거저 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은사란? 선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선물을 모두에게 동일한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으로 주셨어요.

고린도전시 12장을 보면 은사에 대하여 나왔습니다.

 

고전 12:3-1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8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먼저 은사를 왜? 주셨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섬기라고 주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걸 놓치고 있어요.

 

복음을 안다는 것은 분명하게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럼 그 복음으로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에 유익을 위해서 복음을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럼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아주 악한 것입니다.

그 교회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은사로 안 우리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서 복음은 이런 것이다! 라고 증거하야지요.

그들이 복음을 모르는 어둠이기 때문에 복음을 아는 우리가 빛으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저 교회는 복음전하지 않으니 갈 필요가 없어! 그러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복음 없는 교회에 갈 필요가 없으니 집에서 mbc 라디오를 듣겠다고 합니다.

이건 왜? 은사로 복음을 주셨는지를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깨닫는 은사를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 복음으로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그 알아진 것으로 자기 죄 짓고 사는데 면죄부로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나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는 겁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는데 이는 교회를 위해서라고 하잖아요.

교회를 위해서 은사로 복음을 아는 목사를 세웠다는 것은 그 교회가 아직 복음에 미약하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저 교회는 복음을 모르니 나 안 갈래!

그러지 말고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아는 우리가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복음을 들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복음을 깨닫게 한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에요.

그러니 교회를 위하여 봉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사는 교회를 위한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마세요.

 

하나님은 교회에 유익을 위해서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사들을 주신 겁니다.

 

어떤 사람에겐 지혜에 말씀의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겐 지식의 말씀에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겐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고!어떤 사람에겐 능력 행하는 은사를 주셨고!어떤 사람에겐 예언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겐 영 분별의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겐 각종 방언하는 은사를 주셨고!

어떤 사람에겐 방언 통역하는 은사를 주셨어요.

그런데 이 모든 은사를 한 성령께서 주신 것들이라고 하지요.

 

이게 중요해요.

이 부분이 이해되지 않으니 각 사람마다 자기 신앙이 최고라고 우기는 겁니다.

자기가 아는 복음만이 진짜이고 남은 다 가짜라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싸우는 이유는 이 은사를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받은 은사만이 진짜라고 쌈박질을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 파다!

게바 파다!

아볼로 파다!

그리스도 파다! 나누어서 싸움질을 한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요.

그런데 그 은사들은 모두가 한 성령이 주셨습니다.

그럼 성령의 일하심은 어떤 정형화 된 것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나와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각 사람마다 다르게 역사를 해요.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는 이것이다! 라고 정형화 시킬 수가 없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게 되어 있다는 것엔 동일합니다.

그러니 모든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향하게 되어 있어요.

이에서 벗어난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에요.

그건 거짓 영이에요.

 

지금 바울이 그러잖아요.

모든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것인데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유익을 지향하게 되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나 복음 안다고 하면서 내 꼴리는 대로 살거야! 라고 하든지 아니면 내가 교회이니 교회 갈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집구석에서 빈둥거리고 논다는 것은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란 뜻이 되는 것입니다.

제 말이 아니고 바울의 말이에요.

 

전 지금 누가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받은 성도는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이 성령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판단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그건 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발 무슨 말씀을 들어도 자기 식으로 편집해서 듣지 마세요.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듣지 말란 말입니다.

쓴 소리라 할지라도 좀 들으세요.

자기하고 다르다고 내치지 말고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요.

 

그런데 인간들은 생래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못된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자기하고 같은 색깔 맞추기를 하고자 하는 겁니다.

자기하고 다르면 이단이라고 해요.

 

그래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영(靈)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 할 수가 없고 성령(聖靈)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主)라 시인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라도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나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한 지체이기 때문에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바울은 은사를 우리 몸에 지체로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은 입이고!

어떤 사람은 손이고!

어떤 사람은 발이고!

어떤 사람은 오장육부라는 겁니다.

온 몸에 지체가 같은 것이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한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들을 주셔서 서로 돌아보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럼 은사를 받은 사람은 누가 어떻느냐! 를 따지지 말고 자기가 받은 은혜로 섬기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섬기지는 않고 자기하고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어요.

자기 색깔로 다른 사람의 색깔을 구분해서 맞느냐! 안 맞느냐! 따지고 있단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이런 사람들을 보면 가련하고 불쌍해요.

 

지금 그런 짓들을 누가 하고 있는가 하면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러고 있어요.

그들이 말하는 복음은 누가 판단할까요?

성경에서 판단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의 스승으로부터 판단 받아요.

그럼 그 스승은 누가 판단합니까?

없어요.

자기 스승은 다 안대요.

자기 스승의 말로 성경을 판단해요.

그러니 그 집단에 속한 자들은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스승의 영(靈)을 받아서 그래요.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을 말할게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삼으세요.

자칭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성령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인지 분별하여야 하잖아요.

 

우리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주셨어요.

그럼 성경이 우리를 판단하여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성경이 그러한가 늘 상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에서 성령을 받은 성도들과 비교해 보아야지요.

그들과 같으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맞고 다르면 자칭 성령인 겁니다.

가짜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으로 거듭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에요.

그럼 성령으로 거듭 난다 함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 난다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합니다.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해요.

자신의 그 어떤 행위에서도 의가 없음을 알아요.

그러므로 늘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용서 받은 자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바울은 살아가면서 자기 죄를 깊이 깊이 알아갔어요.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난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라고만 하지 않았어요.

이런 죄인이 용서 받았음에 감사하고 살았어요.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빚진 자라는 자세로 섬기고 살았어요.

 

바울이 죽도록 충성한 것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음을 자각하는 바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냥 난 예수 피로 구원 받았다고 자기 꼴리는 대로 살지 않았어요.

죄인 중에 괴수가 용서받음의 은혜가 너무도 크기에 성도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였던 것입니다.

그 헌신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기인된 것임을 알고 감사했어요.

그래서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 속엔 나 용서 받았다는 것만 들어가 있지 않고 용서 받은 자로서의 삶도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쓸 때 처음 1장에서 11장까지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을 기술을 하고 있고, 12장 이후 후반부에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전체가 바울이 로마교회에 주고자 한 신령한 은사에요.

복음이란 말입니다.

로마서 속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있고 성도는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삶도 있어요.

그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복음이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이 살아가는 것도 복음 인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안에 믿음도 있고 성도들이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살아가는 삶도 있는 겁니다.

 

신령한 은사란 복음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복음 속엔 로마서의 내용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도 있지만 참 감람나무에게 접붙임 당하여 의롭게 된 자들은 이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뜻으로 로마서 11장에서 접붙임 이야기를 하고 난 후 12장부터는 성도의 삶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삶은 성령의 은사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 예배라고 했어요.

성도의 삶도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산다고 12장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누가 성령 받은 자들인가를 성경에 기록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을 통하여서 비교해 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엔 성령을 받은 성도들이 삶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이 성경에 기록된 성령을 받은 성도들과 같을 때 성령 받은 성도라고 인정 할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이건 누구 목소리가 크냐의 싸움이 아니에요.

우리가 아무리 목소리 높여서 이긴다 하여도 성경이 우리 손을 들어주지 않으면 꽝이에요.

그러므로 성경의 증거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칭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에 나온 성도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면서 성령 받았다고 한다면 그건 자기가 만든 성령이지 하나님이 주신 성령이 아니에요.

 

지금 이 시대는 자칭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성경 속에 나온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자들이 너무도 많아요.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 중에 수두룩해요.

입으로 난 성령 받았다고 한다고 해서 다 성령일 순 없어요.

그 삶에 모습이 성경 속에 성령 받은 성도들의 모습과 같아야 한 성령을 마신 자라고 인정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봅시다.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 오셨는지를 보면 성령 받은 성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어요.

구약에 성령 받은 성도들을 대표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거론된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이끌림 당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 믿음이 신약에선 성령과 같아요.

 

그러니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 앞에 “믿음으로” 라는 말 대신 “성령으로” 라는 말을 대신 사용하여도 무방해요.

믿음으로 산 것이나 성령으로 산 것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나 성령이 주체가 되어서 이들을 이끌고 다닌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자기 인생이 그리스도께 차압당하고 부인되어지는 인생을 살았어요.

예수의 영(靈)이 그들 속에서 예수의 삶을 살도록 간섭하신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은 한약 달이듯이 달이면 누가 나오는가 하면 예수님이 나와요.

역(逆)으로 예수님의 삶을 확 풀어 헤치면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나와요.

말이 참 우스운데,,,,

 

그럼 신약은 어떠합니까?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교회가 생겨나지요.

그러자 성령 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합디까?

날마다 모이고!

서로 돌아보고!

사랑하고!

나누고 하지요.

 

지금까지 모으고 살았는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지금까지의 모습과 정 반대인 모은 것을 내어 놓지요.

성령 받기 전에는 내 몸뚱이 하나 챙기려고 모았어요.

남에게 줄줄 몰랐어요.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자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하여 모았던 것을 교회를 위하여 내어 놓습니다.

이건 아주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이건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나오더라는 겁니다.

성령이 이렇게 만들더라는 거에요.

그러니 성령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으로서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나를 위하여 살게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살도록 합니다.

연약한 성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 주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복음을 안다고 하는 어떤 사람들은 자기는 노후준비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헌금할 수 없다고 해요.

이게 아주 복음에 자유하다는 뜻으로 당당하게 말한단 말입니다.

 

물론 헌금 안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제가 지적하는 것은 마치 헌금 안하는 것이 복음에 합당한 것이라고 하는 그 행태를 비판하는 겁니다.

은혜 받아 보세요.

사람이 주머니를 풀게 되어 있어요.

 

하기사 이 은혜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이 말을 알 까닭이 없지요.

은혜를 안 받으니 아깝고 모으는 겁니다.

은혜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감사를 모르지요.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고 섬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오직 성령을 받은 성도에게만 국한되어 있어요.

그러니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 봉사 할 엄두도 내지 마세요.

 

헌금도 하지 말고!

교회 오지도 말고!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은혜를 받지 않고 하는 것만큼 손해입니다.

은혜 받지 않고 하게 되면 나중에 한 것만큼 보상을 챙기게 되고 그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적개심이 들어요.

그러니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교회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마십시오.

 

어디 감히 성령도 받지 않았으면서 교회에 오고!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를 하려고 하고!

헌금을 하려고 합니까!

떼끼!

아무 것도 하지 마세요.

이방인이 성전에 들어오면 죽이듯이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 교회 일을 하면 죽여요.

영적으로 죽인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는 헌금은 그건 창기가 번 돈이에요.

하나님은 이런 돈을 가지고 오지 말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받지 않아요.

목사는 좋아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안 받아요.

 

이건 복음을 안다는 것도 동일해요.

은사로 받은 복음이 있고 지식으로 배운 복음이 있어요.

지식으로 배워서 알아진 복음을 소유하게 되면 반드시 그 앎으로 마귀 짓을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넘어지게 만들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 복음을 지식으로 배우면 반드시 그 복음으로 사람을 죽여요.

 

그러니 이 시대 자칭 복음을 알고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의 모습과 초대교회 성령 받은 성도들의 모습과 비교해 보세요.

얼마나 다른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받고 너무나 기뻐서 날마다 모였어요.

그런데 이 시대 자칭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나 복음 안다 그러곤 교회를 안가요.

이게 모두가 뱀의 독(毒) 같은 사람의 궤술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에요.

 

성경이 해답이에요.

그 누구도 성경을 앞설 순 없어요.

제발 베뢰아 교인들과 같이 성경을 상고하세요.

목사의 말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나 하고 갑시다.

복음 속에는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교리에요.

그 어떤 것으로도 이 교리를 침해 받아서는 안 되어요.

이건 목숨 걸고 싸워서 지켜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출몰한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할 때는 인간의 행위에선 의(義)가 나올 수가 없다!

만약에 율법으로 의로워 지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만약에 이러한 사상을 전하는 자는 다른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해면 알미니안 성화주의자들을 말합니다.

성화주의자들은 행함에 의(義)가 있다고 말해요.

전 여기에 반대하는 겁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그 행함에선 의(義)가 나오지 않아요.

 

여기서 말하는 의(義)란? 죄사함을 주는 의(義)를 말해요.

구원을 위한 의(義) 말입니다.

이 죄사함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 피 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은 성도의 행함을 구원과 결부시켜서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그따위로 예수 믿으면 지옥 간다고 합니다.

구원 못 받는다고 합니다.

이건 아니에요.

 

구원은 우리 조건과 상관없어요.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산물이에요.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주의자들은 성도의 행함을 구원과 결부시켜 말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교회를 세워놓고 운영하여야 하는데 교인들이 움직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교회가 돌아가려면 교인들이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전도도 하고 충성도 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날 잡아 잡수! 하고 복지부동인 겁니다.

그러니 화가 나서 이들에게서 열심과 충성과 돈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성화라는 것을 교묘하게 교리화 하여서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없는 상급론을 말하면서 성화교리를 마치 의로운 것처럼 가르친단 말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의 열심도 없으면서 자기 열심으로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열심들이 자기 의(義)가 되어서 잘난 척하게 된단 말입니다.

교회에서 장로를 세우고 권사를 세워도 이 행함을 기준으로 세우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으면서도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했으면 반드시 자기가 흘린 땀의 댓가를 찾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무슨 일을 하여도 그 끝에 자기 의(義)를 챙기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교회에서 자기의 행함을 근거로 힘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성도의 행함에 의(義)가 있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저는 이 부분을 동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義)는 오직 예수님 피에서만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화주의에 대한 반박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 밖에 없다고 강설하는 겁니다.

바울도 그러했어요.

 

그런데 바울은 다른 서신서들을 보면 일테면 고린도서와 같은 곳에선 십자가 피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들이 삶을 말하고 있어요.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과 달라요.

고린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각 사람을 따르는 무리들이 서로 나누어 분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 파다!

게바 파다!

아볼로 파다!

그리스도 파다! 라고 나누어서 서로의 스승의 지식이 우월하다는 식으로 편당을 지어서 교회의 연합을 헤치고 성도 간에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냐!

십자가 속에 무슨 인간의 지혜가 끼어들 틈이 있느냐!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은 예수님인데 왜? 바울을 말하고, 게바를 말하고, 아볼로를 말하느냐고 책망하는 겁니다.

 

언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느냐!

베드로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느냐!

아볼로냐!

아니지 않느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난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도는 세상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사로 알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선생이 더 많이 배웠느냐 라는 것은 십자가 앞에선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난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한 겁니다.

 

십자가 안에는 세상 학문도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세상 학문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선생이 더 우월하다는 식으로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지 말라는 뜻에서 나는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안에선 바울이나 게바나 아볼로나 다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지혜로 복음 전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내가 도리어 내 지식으로 복음 전할까봐서 두려워하였다고 하고 있어요.

그러니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와 고린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그 말하는 의미가 달라요.

 

그리고선 아주 몸서리 쳐질 정도로 성도의 삶에 대하여 책망을 했어요.

심지어 복음에 합당치 않게 사는 놈들은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고 했어요.

내가 가면 그 놈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다니까요.

어디 거룩한 교회에 이방인들도 행하지 않는 그런 몹쓸 짓을 하는 자들을 방치해 두느냐!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게 하니 그런 자들을 도려내라고 했어요.

하지만 원수 같이는 하지 말고 사랑으로 권면하라고 했어요.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네 번 정도 편지를 했어요.

우리 성경엔 고린도 전 후서 두 번인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는 더 있어요.

 

고린도후서 7장을 보면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엄청난 핍박을 당하고 있을 때 디도가 와서 고린도교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번 보고 갑시다.

 

고후 7:5-17=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6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의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너희를 인하여 범사에 담대한 고로 기뻐하노라”

 

일전에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보고서 화가 나서 편지로 엄청난 책망을 했어요.

그런데 그 책망한 편지 내용은 성경에 없어요.

하지만 그 책망으로 인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를 하였어요.

디도가 지금 그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지난번에 선생님께서 고린도 교회에 심한 꾸중을 하였잖아요.

그런데 그 꾸중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듣고 회개하였다고 알려 준 겁니다.

이에 바울이 한 숨을 돌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난번 편지로는 너무 심한 꾸중을 하였기 때문에 늘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지난번에 혹독하게 책망을 할 때는 내가 너무 심하게 하였는가 싶어 후회하였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책망이 도리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채찍이 되어서 악에서 돌이키게 되었다고 하니 너무도 기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책망한 것은 회개를 일으키게 하는 근심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서 도리어 감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 감정으로 했으면 그건 인간의 책망이라서 반발심을 일으켜 역행을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서 난 책망은 도리어 그 책망을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악에서 돌이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 너무 심하게 나무란 것 때문에 혹시나 하고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다 회개 하였다고 하니 너무도 기쁘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말한 나는 십자가 이외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다고 하는 말씀을 전가의 보도처럼 아무데서나 써먹어요.

바울은 성도의 옳은 삶을 도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말하는데 이걸 곡해하고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데 적용하고 있어요.

이런 걸 성경에선 하나님 말씀을 도적질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십자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갈라디아서에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하는 십자가의 의미와 고린도 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 의미는 다른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의(義)를 말하기 위한 십자가이지만!

고린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는 그 의(義)를 받은 자들이 어떻게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한 십자가인 겁니다.

그런데 자칭 복음 안다고 하는 자들이 이걸 구분 못하고 아무데나 십자가를 부적처럼 사용하고 있어요.

 

바울은 지금 너희들 꼴리는 대로 살지 말라고 십자가를 말하는데 이 무식한 사람들은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우매합니까?

그러면서 십자가 안대요.

 

제가 설교를 하면서 항상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해요.

인간의 행함에 의미를 둘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 이외는 그 어떤 것도 의(義)가 되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말을 하고 있고!

반대로 십자가를 이용하여서 자기 사욕을 좇는데 합리화 하면서 약용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여기에 치중하고 설교하고 있어요.

이 말을 해야 할 당위성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을 하다가 동네에서 쫓겨났지만 말이에요.

고린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를 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은혜 받은 자들은 이렇게 살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행위를 말한다고 내치고 있는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살으라 저렇게 살으라고 하는 것을 행위주의라고 비난 합니까?

그렇지 안 잖아요.

그건 바울의 책망이 의(義)를 만들어 내라는 열심을 끄집어내기 위한 책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동일해요.

성도의 삶을 말할 때 무슨 의(義)를 도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가 성도의 삶을 말하는 것은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십자가 운운 하면서 마치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엄청난 복음에 합당한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마치 십자가 복음에 합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멀쩡히 은혜 받아서 잘하는 사람들을 자기 의(義) 쌓는다고 하면서 넘어지게 하니 바울처럼 그게 아니라고 책망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책망에 발끈하고 행위주의라고 몰아 부치고 결국엔 자기들 하고 다른 복음이다! 라고 쫓아내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고발하니 기분 나쁜 겁니다.

그 동네 속에서도 제 설교를 듣고 은혜 받는 사람이 많아요.

그들은 아무렇지 않아요.

그런데 꼭 안 하는 것들이 주동이 되어서 반발을 하는 겁니다.

 

자신들을 가르치는 스승은 가만히 있는데 전 아니라고 하니 뿔따구가 나는 겁니다.

그러니 왜? 당신은 우리 스승과 다르게 말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우리 스승은 꼴리는 대로 살으라고 하는데 왜? 당신을 그러지 말라고 하느냐!

우리 스승은 우리가 교회이니 교회 갈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왜? 당신은 교회 가라고 하느냐!

성경이 뭐라고 하는 지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꼭 자기들 선생 어록을 가지고 따지는 겁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남의 신앙을 판단할 심판자가 아니에요.

우리도 성경으로 판단 받아야 할 자들이에요.

우리가 십자가 지지 않았어요.

그러니 우리 판단을 받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세요! 라고 말해도 안 들어먹어요.

성경을 보라고 하면 화를 내요.

사도들이 뭐라고 했는지 살펴보라고 하면 짜증을 낸다니까요.

 

제 바램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퍼부었던 그 책망으로 인하여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한 것처럼 회개하기를 바랄 뿐이에요.

십자가 십자가하면서 반(反) 십자가 정신으로 살고 있으니 안타까운 겁니다.

 

그러니 제 설교를 볼 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좀 생각하고 보세요.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설교 보지 마세요.

그러면 제 설교가 걸림돌이 되어서 넘어져요.

좀 생각을 하고 읽으세요.

이해가 안 되면 제발 댓글을 달지 마세요.

 

전 율법 신앙과 성화주의에 이를 가는 사람이에요.

과거 수십 년 동안 그 수렁에 허우적거렸어요.

그런데 행위를 가르치겠어요.

좀 이해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 밖에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은사로 주어서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남을 위해 살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반드시 자기 몸을 부인하는 모습으로서의 삶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건 우리가 원치 않아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우리가 원치 않는 길로 인도 하세요.

나를 날마다 죽이는 쪽으로 인도 한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 한다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합니다.

 

성령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가지 않고 집구석에서 라디오를 듣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 몸뚱이를 위한 성령이지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성령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성령은 가짜이지요.

이런 사상을 가르치는 사람의 영이지 결코 그리스도의 영일 순 없어요.

 

성령은 반드시 나를 부인하게 만들어요.

강한 자가 약한 자들의 짐을 대신 지고 각자 받은 은혜로 섬기게 하세요.

과거 이방인으로 살 때의 습성을 멀리하고 죄를 멀리하고 싸우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세요.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성령을 받은 성도치고 그 누구라도 꼴리는 대로 산 사람이 없어요.

성령이 그렇게 살도록 가만 두지 않았어요.

 

그러니 일단 막 살아도 된다!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교회 갈 필요가 없다! 라고 하는 자들은 성령과 상관없는 자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아니 성경 속에 성령을 받고서 꼴리는 대로 살라고 말을 한 사람이 없잖아요.

꼴리는 대로 막 산 사람도 없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 성령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영이겠지요.

그러니 성경과 다른 말을 하지요.

이런 자들은 십자가 피를 색욕거리로 삼는 자들이에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색욕거리란? 자기 육신의 이익에 자료로 삼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미워하고 싫어해요.

그래서 성령은 육신의 소욕과 전쟁을 해요.

그러니 그 안에 성령이 있는 성도는 자연히 세상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건 구약이든 신약이든 오고 오는 교회사 속에서 성령 받은 성도들이 살아온 모습들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에서 이들을 일컬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2장이 말하는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은 구약의 성도들을 말하지만 신약의 성도들도 이들과 방불한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았어요.

모두가 한 성령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세요.

구약의 성령이 다르고!

신약의 성령이 다르고!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임한 성령이 다르고!

지금 이 시대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이 다르지 않아요.

다 한 성령이에요.

그러므로 한 성령을 마신 사람들은 시대를 달리해도 살아가는 모습들은 다 동일해요.

물론 살아가는 시대의 환경을 다르지만 삶에 방식은 같단 말입니다.

 

죄에 대한 반응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나!

가치관이나!

자기를 부인하고 성도를 섬기고 교회에 봉사하고 자기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모습으로서의 삶들은 다 한결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동일한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각 교회 안에서 이러한 섬김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께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감사하며 섬기고 있는 겁니다.

자기 의(義)를 쌓는 것이 아니고 받은 은혜가 너무도 크고 감사하기 때문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은 자비를 들여서 복음을 알게 하려고 책을 구입해서 주고!

자신의 집을 개방해서 복음 증거의 장을 삼고!

어떻게 하든지 복음 하나 전하기 위해서 밥도 사주고 섬기는 분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분을 일부 몰지각한 인간들이 자기 의(義) 쌓는다고 힐난을 해요.

이를 인간의 의(義) 쌓기라고 힐난하는 그 사람은 자기 안에 주께 받은 은사로 섬기는 기쁨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런 것이 없으니 자기 식으로 판단하는 겁니다.

자신은 주께 받은 은혜가 없으니 섬기는 집사님이 하는 일이 자기 의(義) 쌓는 것으로 보이지요.

그러니 남이 봉사하고 섬기면 그건 자기 의(義) 쌓는 것이라고 하여 일하는 소의 발목 힘줄을 끊는 악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서 이러한 섬김의 모습이 나타나면 기뻐하고 격려하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빈정거려요.

빈정거린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 기쁨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그 사람이 자기 의(義) 쌓고자 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왜? 자기가 판단하는데요.

본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여 섬긴다고 하는데 왜? 자기가 그건 아닌데 라고 합니까?

이 얼마나 못된 짓입니까?

이런 자들이 자칭 복음을 안다고 떠벌리고 있어요.

 

제가 볼 때는 그 집사님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 함께 감사하고 함께 기뻐하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므로 누가 성령 받았다고 하거든 이러한 믿음에 사람들의 본을 가지고 비교해 보세요.

비교해서 성경에 기록된 성도들이 살았던 삶과 다르면 그건 거짓 영을 받은 자들이에요.

아무리 십자가를 말하고 복음을 말하고 예수를 말해도 그 속엔 성경에 나와 있는 성도들의 모습과 다르면 그건 가짜에요.

제발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하세요.

 

이처럼 성령을 분별하는 것은 아주 간단해요.

 

성령이 아니면 예수의 삶을 살아낼 수가 없어요.

아무리 살아내고자 하여도 살아 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령은 육신의 소욕과 반대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육신은 자기를 긍정하려고 해요.

성령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하는데 육신은 나를 남보다 나아야 해요.

성령은 낮은 자가 되어 섬기라고 하는데 육신은 높은 자가 되어 대접받으라고 해요.

성령은 자기를 비워 남의 종이 되라고 하는데 육신은 상전이 되라고 해요.

성령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지 말라고 하는데 육신은 육신의 소욕대로 살고자 해요.

그러므로 성령이 없는 사람은 이런 삶을 살아 낼 수가 없어요.

 

성령의 열매는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비하고 양선하고 오래참고 관용하고 절제하고 남을 사랑하며 생명을 살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육신의 열매는 패역과 강포와 악함과 시기와 질투와 분냄과 더러운 말과 분쟁과 같이 남을 헤치는 모습으로 나타나요.

 

그러니 그 속에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입술로는 예수를 말하고 성령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여도 그와 반(反)하는 모습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꼴리는 대로 사는 겁니다.

자기 꼴리는 대로 산다는 것은 그 속에 성령이 없다는 반증입니다.

내 꼴리는 대로 살 겁니다! 라고 하는 것은 난 성령 안 받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이에요.

그런 사람하고 말해 무엇 하겠어요.

말하면 도리어 물어요.

 

아니 십자가 백날 알면 뭣 합니까?

아무리 고상한 십자가 도를 알면 뭣하나요?

그것이 자기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 앎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도리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겁니다.

말씀을 들을수록 자신을 점점 더 패역하게 하고 심령은 갈수록 바로처럼 강퍅해지고 목이 곧아지고 파멸의 구덩이로 빠트리고 있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을수록 반(反) 예수가 되어가는 겁니다.

 

이게 모두가 지난 시간에 말한 생명의 젖이 나오지 않는 공갈 젖꼭지를 빨고 있기 때문이에요.

예수라는 생명의 젖을 먹지 못하고 사람의 지식으로 만든 공교한 말을 들으니 마귀의 본성들이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예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의 생명이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하는 짓들이 마귀 짓을 하는 겁니다.

 

아니!

성도는 예수님이 그 안에 계세요.

성령이 계시다구요.

왜? 계십니까?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옛 사람의 습성인 마귀 짓은 못하게 하고!

하기 싫은 새 사람의 습성인 예수의 마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또 다른 옛 사람이라는 놈이 이를 방해한단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이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몸이 하나님 뜻대로 안 움직이니 하나님 뜻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 죄는 고발당하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 몸이 순순히 예수님의 뜻에 순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성도는 늘 상한 심령일 수밖에 없고 애통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반드시 정죄를 통하여서 나타나요.

 

그러니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죄는 더 드러나는 겁니다.

은혜 받으란 말은 네 죄를 많이 알라는 말과 같아요.

죄를 알아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감사가 되지요.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 속에 담겨진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들을 알게 하려고 로마교회에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서 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말 속에는 로마교회가 아직도 십자가 속에 담겨진 풍성한 은혜를 다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마음은 비단 로마교회뿐만 아니에요.

온 세상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염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온 세계에 성도들에게 이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알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입니다.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지금 온 족속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온 족속이란?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기도를 합니까?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속 사람이란? 새로운 피조물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새 사람을 말합니다.

 

왜?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해 달라고 기도할까요?

이는 새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能力)이란? “뒤나미스” 라는 말로서 이는 그 어떤 고난이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힘을 말합니다.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감당 할 수 없는 것을 이기게 하는 힘입니다.

이게 로마서 8장에서 나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롬 8:36-39=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종일 죽임을 당케 되는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건 원수들로부터 사면초가(四面楚歌)에 쌓였다는 말입니다.

온갖 핍박과 조롱과 아픔을 당한 것입니다.

고린도서에 증언을 빌리면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만물의 찌끼 같은 멸시를 당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하여 모멸감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자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이라는 존재를 쓰레기처럼 만들어 버렸어요.

이런 수욕을 어떻게 인간이 감당 한단 말입니까?

사람이 자살을 하는 것은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부정당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살로서 자기 자존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도들의 자존심을 깡그리 무너뜨려 버립니다.

넌 쓰레기라고 합니다.

내 아들이 이 세상에서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였다는 것을 사도들의 몸에 손수 새겨서 체휼케 하신 것입니다.

 

봐라!

내 아들의 아픔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 맛을 알라고 예수님이 당하셨던 그 고난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이를 인간은 감당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이 고난을 감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저도 지금 이 맛을 미미하지만 맛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를 알고 바울은 온 세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감당케 할 힘을 달라고 말입니다.

이 힘이 어디서 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으로 강건케 해 달라는 말은 아직 강건치 않다는 말입니다.

연약한 자도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교회 안에도 이런 분들이 있었어요.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교회에 가서 바울이 받은 은사로 섬기고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현란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말을 하고!

무슨 큰 비밀을 깨달아 도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큰 능력을 행하는 일도 아니에요.

 

신앙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알고 감사하고 사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도 끝내 외면하는 그 아버지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 아픔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아들의 절규를 들으면서도

아들아! 이는 네가 감당하여야 할 몫이라고 하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그저 죽어가는 그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이 깊디 깊은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문밖에 서서 기다리는 아비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탕자를 누가 책이라도 할까봐서 동구 밖까지 버선발로 쫓아가 안고 돌아오는 이 아비의 마음을 좀 알란 말입니다.

 

돌아온 자식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어디 몸 상한데는 없느냐!

밥을 제 때 챙겨 먹었느냐!

아들의 몸부터 먼저 챙기는 것이 아비의 사랑이에요.

 

맏아들처럼 저 놈 왜 받아 들었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 복음 아는데 너 모르지 하고선 내치는 그런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신앙이 죄인을 용서하는 이러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과 그 긍휼의 마음을 깊이 많이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가난해요.

마음이 좁아져 있어요.

하나님의 자비가 용서가 사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러니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고 그저 만나면 물어뜯고 죽이고 있어요.

 

철없이 복음을 쬐끔 깨달은 것으로 모든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심판 해 대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절규를 자기 몸 속 깊이 아로새기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그리 녹록하지 않아요.

 

비울은 이 사랑을 알았기에 온 세계 족속들을 위하여 이 큰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 기도는 우리 주님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안에서 이 기도를 하고 계세요.

 

곡식이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알아 갈수록 입은 닫고 주머니는 풀게 되어 있어요.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을 긍정하라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된단 말입니다.

 

누구를 비판하고 정죄하기 보단 그를 이해하고 보듬고 그래 나를 밟고 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기를 바라게 되어요.

누가 자신을 비난해도 아직 철 없어서 그러니 어찌 하겠는가!

이해하고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철없는 자식을 키우는 것은 속이 새까맣게 타 들어가는 아픔을 겪는 것이듯이 우리의 신앙 또한 그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연약한 자를 받되 그를 비판하지 말고 그의 짐을 대신 져 주라고 하신 겁니다.

이 일을 감당 하라고 성령의 은사를 주셨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신앙생활이란? 나 잘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내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죄인을 용서하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에 깊이를 많이 알아 갈수록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이런 것들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입니다.

 

엡 4:1-4=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잖아요.

왜? 온유하고 겸손하고 오래참고 용납을 합니까?

이는 각 사람마다 믿음을 담아내는 분량들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폭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는 것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으면 나와 다르다고 잘라내지 말고 서로 용납하고 오래참고 기다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사람이 되어가라는 것입니다.

 

우린 모두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어요.

우리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 나와 다르다고 잘라내지 말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니라고 하는 그 사람도 주께서 피 흘리고 부르신 형제에요.

 

이 일을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입니다.

 

빌 2:12-18=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왜?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바울 안에서 예수님 자신을 그리셨어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과 같이 찢기고 상하고 버림당하는 아픔들을 당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주께서 바울 속에 자기 소원을 두고 행하신 결과에요.

왜? 그런가요.

이는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자랑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걸 지난 시간에 불에 타던 나무를 건져내 멋진 작품을 조각한 조각가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예수의 형상으로 잘 조각을 하였기 때문에 바울도 자기 자신을 너희를 위하여 죽임 당하는 제물처럼 희생당한다 할지라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린 모두가 이 자리로 가도록 부르심을 입었어요.

주께서 우리를 그 자리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자리에 가기까지 우린 많은 아픔을 당할 것이고 끝없는 죄들이 터져 나오겠지요.

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도 하루아침에 이런 자리에 오지 않았어요.

수많은 실수와 넘어짐 속에서 왔어요.

그러므로 지금 막 세워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 은혜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속에 담겨진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성경을 읽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읽어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내 안에 있게 하여 내 자신이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관제와 같이 부은바 되어도 기뻐하고 기뻐하는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미 여러분 속에서 이 일을 시작하셨어요.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여기까지 오면서 주께서 우리를 다듬으신 흔적들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전에 나와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주께서 여러분 속에서 자기 소원을 두고 행하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나타나지는 것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랑인 것입니다.

이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또 빚으시고 계십니다.

이 손길을 느끼시고 아! 나는 내 홀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시는구나! 를 아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한 순간도 우리를 잊은 적이 없어요.

떠난 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셨고 우리가 웃을 때 함께 우셨습니다.

우리가 둔하여 깨닫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우리가 깨닫든 못 깨닫든지 주님은 한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묵묵히 우리 안에서 당신의 형상을 아로새기고 계십니다.

 

마치 엄마가 자식이 알든 모르든 그 자식을 먹이고 입히기 위하여 손이 부르터 가면서 묵묵히 엄마의 일을 하시듯이 우리 주님도 우리 안에서 엄마처럼 우리를 다듬어가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머리로 득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가슴으로 받아 몸으로 토해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십자가는 삶이에요.

머릿속에 있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손과 발로 움직여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싸움을 게을리 하지 마세요.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여러분도 세미한 음성 속에서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느끼시기 바랍니다.

 

제발 주님을 좀 맛 보세요.

맛 보고 배부름을 얻으세요.

귀로만 듣던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맛보고 은혜 속에 강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바울처럼 신령한 은사를 연약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주님의 열심을 품고 살아갈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말로는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처럼 다 아는 척 하면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나타나는 모습들은 자기가 어떤 자인지 보지 못하는 소경이고 발가벗고 가련하고 곤고하고 불쌍해서 볼 수가 없어요.

오죽했으면 주께서 확 토하여 내치고 싶다고 하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을 남에 소리로 듣지 마시고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들으세요.

그리하여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앙생활이란? 도를 깨우치는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은 자로서 예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발 십자가 도가 관념이 아니라 피와 살이 되어 우리 삶 속에서 나타나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이 자기 안에 있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고 함께 안위 받고자 하는 이러한 마음이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게 하옵소서. 모든 자에게 빚진 자로서 주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