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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15강. 유월절 피를 믿게 한 믿음 (히 11:28)

by coroa 2022. 3. 2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5강. 유월절 피를 믿게 한 믿음 (히 11:28)

-.정낙원 목사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28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는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온 애굽에 장자가 죽일 때 그 죽음으로부터 살아날 수 있었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름하여 유월절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는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이 유월절 사상이 성경의 중심사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지가 피로서 구원을 받는 사건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신약의 십자가와 같아요.

 

오늘 상고할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히 11: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28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지난 시간 모세가 바로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을 내어 놓으라는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예 여기 있습니다! 얼른 데리고 가십시오!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호와가 누구관대 그런 망발을 하느냐 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차원에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바로는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애굽 사람을 죽이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장자를 죽인다는 것은 대를 끊어서 다 몰살 시킨다는 말입니다.

끝장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고 온 애굽이 다 죽는다는 뜻입니다.

온 애굽이란? 온 세상을 말합니다.

이스라엘도 애굽에 있기 때문에 죽음에서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언약으로 생겨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언약 백성을 애굽인들과 같이 죽이면 안 되잖아요.

그럼 하나님 백성에 특별한 은혜가 없어지게 되지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다녀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모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 방법이 참으로 특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대신에 어린 양을 죽이는 것입니다.

어린 양을 인격으로 말하면 언약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흠 없는 다른 사람을 대신 죽이는 겁니다.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죄인을 살려 낸다는 뜻입니다.

 

결국 죄인과 의인을 맞바꾸는 셈이 되지요.

이건 마치 노아 언약과 같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부정한 짐승들이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죽음에서 살아날 길을 알려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합니다.

그러면 죽음에 천사들이 그 피를 보고 넘어가 그 집을 죽음이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알려 줍니다.

그런데 이 말 같지 않은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 이 유월절 예식을 행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 살아났습니다.

 

이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게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이렇게 살려 낸다는 것을 유월절을 통하여서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유월절 예식 속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자기 백성들을 죽음의 저주로부터 어떻게 구해 내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이 대신 죽어줌으로서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삶 속에는 대신 죽어준 제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대신 죽어준 제물의 생명 안에서 사는 것이 됩니다.

독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어린 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흠 없는 양이 죽는 제사 제도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제사 제도를 주셨다는 것은 제물의 희생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케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를 상번제라고 합니다.

 

민 28: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찌니라 3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 4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

 

아침 저녁에 제물로 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하루의 삶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산다는 것 자체가 희생제물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아! 나는 죽어야 마땅한데!

여기 나 때문에 희생당한 어린양 때문에 사는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진정한 믿음과 신앙이란? 어린양 때문에 산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제사는 감사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겁니다.

제사가 목적이 아니고 자신들 대신 희생당한 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분께 감사하는 겁니다.

 

행여 자신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사 지내서 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산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말씀에 순종하든 하지 않든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제사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안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구원이 된 자들에게 율법이 주어졌고 그 율법 속에 제사 제도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유월절 정신을 잊어선 안 됩니다.

유월절 정신을 잊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이 아니란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 안에서 살아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마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마귀라고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당연히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산다는 의미를 가리겠지요?

제사에 신경 쓰게 하고 정작 제사 속에 담김 의미를 놓치게 만드는 겁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교회 열심히 충성하게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잊게 만드는 겁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없으면 애굽 사람과 똑 같이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가리는 일을 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 안에서 산다는 것을 잊게 만듭니다.

어린 양 밖에서 살라고 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안에서 산다는 것을 잊게 하는 것은 독자적으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즉 어린 양의 피 없이도 스스로 의로워지도록 하는 겁니다.

대신 죽어준 분에 대하여 잊게 만드는 겁니다.

 

신약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는 것이 바로 인간이 의로워지려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서 거룩해 지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봉사하게 하는 겁니다.

제사를 열심히 지내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 속에 긍휼을 싹 빼버리고 제사를 지냈다는 의식만 남게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제사는 의식에 있지 않고 제물의 희생정신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제사를 지내야만 하고, 나는 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가를 알아야 하고, 이런 죄인을 위해서 흠 없는 어린 양이 대신 죽어 주셨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이 정신이 빠지면 제사라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제사 정신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대신 죽어 준 제물 때문에 산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이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열심이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여서 나무란 것이 아니고 제사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대신 어린 양을 죽여서 용서 해 주셨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약을 사는 성도라고 한다면 유월절 어린 양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말하지 않아도 유월절 어린 양의 실체는 예수님이십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로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서만 죄사함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안다면 신앙생활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살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자랑하고 사는 쪽으로 맞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이지! 인간의 착함이 아닙니다! 라고 외쳐야 하겠지요.

그리고 범사에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 것이 아닙니까?

아까 여러분이 마귀라고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라고 물었지요.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일을 하겠지요.

 

이건 이미 예수님 당시에 보여 주었어요.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들의 신앙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의 신앙이 어땠습니까?

제사로 긍휼을 가렸지요.

율법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가렸지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망한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망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더 추가하여서 지켰습니다.

율법으로 제사를 지내면서도 그 제사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제사라는 의식에만 관심을 두었지 제사 속에 담긴 의미는 간과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 라는 말입니다.

제사의 본질적 의미는 없고 제사라는 의식만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난 죄인입니다! 라는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은 찾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난 어린 양의 피로서 삽니다! 라는 감사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리어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다는 안타까움과 정성이 부족하다는 후회만 있었습니다.

조그만 더 하면 율법대로 살 수가 있었는데! 라는 아쉬움만 있었습니다.

 

마치 이 시대 성화주의자들의 탄식과 같은 것들입니다.

경건주의를 외치는 성화주의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고, 성경보지 않고, 경건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후회는 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산다는 감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앞서 서두에 살펴본 솔로몬 영재 사관학교의 십계명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함은 잊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없는 겁니다.

진짜 솔로몬 영재 교육을 하려면 너희들은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고 가르쳐 주어야 해요.

공부 잘해서 출세하면 뭣 하느냐?

 

그런 것 잘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같은 악당들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알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의인을 만들면 안 되고, 죄인임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독교 교육인 겁니다.

이건 교육을 떠나서 신앙생활의 전반에 흘려 넘쳐야 할 내용입니다.

 

죄를 고발해 주지 않고 예수님의 피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 아무리 교회에서 성경구절을 바라바리 적어서 교육을 한다고 하여도 다 마귀의 교육일 뿐입니다.

마귀는 인간의 죄를 감추려고 해요.

그래서 예수님의 피를 가리게 합니다.

피에 대한 감사함을 놓치게 만듭니다.

 

진짜 구원 받은 성도는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나 같은 인간은 지옥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짜로 구원받은 교인들은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마땅히 천당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아는 성도는 망해도, 아파도, 고난당하여도, 그래! 나 같은 죄인이 이런 일을 당하여도 싸지! 라고 하고 그 속에서도 감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의인이고 마땅히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이비 교인들은 이런 일들이 닥치면 하나님!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하여야 합니까?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이런 실패를 하고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고 아파야 합니까? 라고 합니다.

 

이런 놈들은 항상 자기는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삶에 감사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어찌 감사가 되겠어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살면 그 어디라도 천국으로 살고,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면 그 어디라도 지옥으로 살게 됩니다.

이 세상엔 천국 같은 환경이나 지옥 같은 환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 모든 것이 천국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면 모든 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찬송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때문에 내가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아니고 나의 악함을 깨닫고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깊이 깊이 깨닫고 이런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신 예수님에 피흘리심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주를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어요.

주님을 사랑해 보세요.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사랑해 보세요.

그 대상을 생각만 해도 행복해요.

예수를 믿으면서도 행복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무엇을 뜯어 낼 궁리만 하니 예수님이 좋지가 않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종교생활은 예수님을 좋아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은 나를 드리지만, 좋아하는 것은 빼 내려고 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좋아야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이 좋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이 좋으면 예수님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아니 예수의 종이라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지, 어떻게 예수를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합니까?

예수님을 죽인 세상에서 어떻게 잘 살려고 하느냐 말입니다.

이 세상은 예수를 죽인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라고 하는 겁니다.

성공해서 뿌리박고 살려고 하지 말고, 미련없이 떠날 자세로 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예수를 이용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보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하여서 이 땅에선 부자처럼 배터지게 잘 먹고 살다가 나중에 지옥으로 데리고 가게 할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니 죄가 장성하고 급기야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 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죄인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감사하게 살았어요.

죄인임을 알면 문둥병 걸려서 산다고 하여도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천국엔 나사로처럼 자기 삶에 불평하지 않고 사는 자가 갑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사랑하지 않아서 화를 냅니다.

아들에 죽으심을 헛되이 돌리는 것 때문에 화를 발하십니다.

 

지옥에 누가 갑니까?

강도입니까?

살인자입니까?

사기꾼입니까?

술 쳐 먹고 바람피운 놈입니까?

 

정답은 예수 안 믿는 놈이 갑니다.

 

죄가 뭡니까?

 

도적질입니까?

성경 안 보는 겁니까?

거룩하게 살지 않아서입니까?

 

정답은 예수 안 믿는 것이 죄입니다.

 

이 시대 경건주의를 표방하는 성화주의자들은 살인하고, 도적질하고, 강도짓하고, 사기치고, 술 먹고, 바람피우는 것을 죄로 여깁니다.

상대적으로 이런 일을 안 하면 죄가 아닌 줄 알아요.

이런 것은 세상이 정한 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짓 안 해도 죄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하루 종일 바둑 두는 사람하고, 강도짓 한 사람하고 누가 죄인입니까?

살인마가 죄인입니까?

그를 욕하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죄인입니까?

예수 안 믿으면 다 똑같은 죄인입니다.

 

하루 종일 집안에서 잠만 자는 사람과, 하루 종일 도박한 사람하고 누가 죄인입니까?

세상에선 바둑 두는 사람은 착하고, 강도 짓하는 사람은 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선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으로 죄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 로 만 죄인이다! 아니다! 로 판단하십니다.

강도짓을 해도 예수 믿으면 의인이고, 수녀라도 예수 안 믿으면 죄인입니다.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죄다 의다 판단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두 부류로 판단하십니다.

아담 안이냐! 예수 안이냐! 입니다.

아담 안에 있으면 성인군자도 지옥 갈 죄인이고,

예수 안에 있으면 강도 살인마라도 천국에 갈 의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윤리 도덕적으로 깨끗하면 거룩하다고 여기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면 비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제가 묻습니다.

여러분은 바퀴벌레에게 있어 무엇이 거룩이고 착함입니까?

여러분은 바퀴벌레에게 거룩함과 착함을 구분을 하십니까?

 

바퀴벌레를 가지고 윤리를 따지고 도덕을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퀴벌레의 윤리 도덕과 인간의 윤리 도덕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선 죄인은 바퀴벌레와 같습니다.

그러니 죄인의 윤리와 도덕은 하나님 앞에선 무가치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너 어떻게 그렇게 거룩하고 착하느냐! 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럽니까?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은 그 자체가 악이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선 타락이고 죄입니다.

아담은 어디까지가 의이고 어디까지가 불의가 없어요.

모두가 불의입니다.

 

죄인에게서 뭔가 의미를 두고자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 안에서 바라보면 예수 밖의 인간은 이미 죽은 자입니다.

송장들입니다.

하나님은 산 개가 죽은 송장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죽은 송장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아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죽은 송장은 다 똑 같이 보기 싫어요.

 

못생겨도 산 자라야 의미를 두어요.

산 자란?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산 자로 보고, 예수 밖에 있는 자는 모두 죽은 자로 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산 자들은, 예수 밖의 죽은 자들에게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죽은 송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바퀴벌레에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밖에 있는 인간들은 같은 아담 안이라는 동일한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인간들의 행실에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바퀴벌레 세계에도 윤리가 있고 도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바퀴벌레 세계의 윤리와 도덕을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이는 종자가 다르고 다른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바퀴벌레 세계에도 그들만이 정해 놓은 규범이 있습니다.

그 규범을 어기면 바퀴벌레들이 정해 놓은 법에 따라 제재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바퀴벌레들이 정해 놓은 규범을 어긴다 할지라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사람이 바퀴벌레 한 마리 죽였다고 제재를 받지 않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밖에 사람들이 정해 놓은 규범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다른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은 생명의 영역이고, 예수 밖은 죽음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 있는 영역은 생명의 영역이고,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영역은 죽음의 영역인 것과 같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 안에는 강도라 할지라도 심판이 없습니다.

하지만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집안은 성인군자라도 심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애굽인이냐! 하나님 백성이냐! 로 판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애굽인이라 할지라도 문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으면 하나님 백성으로 간주하여서 죽음에 재앙을 넘겼고,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할지라도 문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지 않으면 죽음에 천사가 들이닥쳐서 장자를 죽였습니다.

 

신앙의 싸움은 피 안이냐! 피 밖이냐! 의 문제이지, 내가 얼마나 착하느냐! 안 착하느냐! 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행동으로 신앙을 가늠하는 것은 예수 밖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엔 인간의 행동을 가지고 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종교적인 말을 하고 종교적인 냄새가 풍기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산다는 것을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정한 기준의 착하게 사느냐! 악하게 사느냐! 는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렸습니다.

이는 마치 육식을 좋아 하느냐 채식을 좋아하느냐 와 같은 차이일 뿐입니다.

예수 믿어도 술 먹을 수가 있고, 안 먹을 수가 있어요.

무엇을 먹느냐 안 먹느냐는 기호의 문제이지 믿음에 문제는 아닙니다.

 

이건 마치 교회에 오는데 걸어오는 것과 차타고 오는 것과 같아요.

어는 것이 죄이고 어느 것이 의입니까? 라고 묻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교회에 왔다는 것입니다.

중국음식점에 가서 짜장면을 먹는 것이 믿음입니까?

짬뽕을 먹는 것이 믿음입니까?

이건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 세상에서의 삶을 가지고 의다 아니다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기호의 문제이지 진리 문제는 아니란 말입니다.

진리는 예수 믿는 겁니다.

 

술이 좋은 사람은 술을 먹을 것이고, 술이 싫은 사람은 술을 안 먹을 것입니다.

그러니 술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로 신앙이냐 아니냐 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 밖에선 술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로 착함과 악함을 따져요.

그건 예수 밖 죽은 송장들이 사는 세상에서의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은 죽은 송장들의 규범을 가지고 논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랬지요.

 

고전 8:7-13=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보세요.

바울은 자신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고 했지요.

이는 성도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판단 받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건덕상 누가 우상의 제물이라고 하면 아! 그렇냐! 난 몰랐네! 라고 그 사람을 위해서 안 먹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없으면 고기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이 정한 규범을 어기지 않고자 하는 것은 신앙 차원이 아니라 그런 것들 때문에 예수님이 욕먹는 것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한 규범으로 예수쟁이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눈총 받는 짓을 안 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정 술이 먹고 싶으면 남들 다 잘 때 혼자서 먹고 자라고 합니다.

괜히 난 그런 것 따지지 않아! 라고 하면서 술집에 가서 쳐 먹다가 믿음이 연약한 성도 눈에 뛰어서 남 상처주지 말고!

당신의 행동으로 인하여 연약한 사람이 상처를 받으면 그건 죄가 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살라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하여 구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도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입니다.

그러니 내 잘난 믿음으로 연약한 지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하면 안 되겠지요.

믿음이 연약한 성도에게 시험을 들게 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내 즐거움과 기쁨도 포기할 줄 알아야 믿음으로 사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기 먹는 것 때문에 누가 상처를 받는다면 영원히 고지 먹지 않겠다고 했어요.

이 얼마나 형제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욕먹을 개차반으로 살지 마세요.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삶을 살지 말란 말입니다.

물론 손가락질 당하는 삶을 산다고 해서 구원이 취소 되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애미 애비가 욕을 먹습니다.

성도에게 애미 애비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이지요.

 

세상 적으로 착하게 살았다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 적으로 악하게 살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화를 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세상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세상에서나 통용 될 뿐이지 하나님 나라에선 무가치합니다.

 

욥기에 보면 이런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욥이 왜? 고난을 당합니까?

욥은 아무 이유 없이 고난당했어요.

이유라고 한다면 너무 하나님께 대하여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욥에 신앙을 칭찬하니 마귀가 그건 모두가 하나님께서 욥을 만사형통하게 해주니 그런 것이지 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게 아니다 라고 하면서 내기를 해 가지고 생긴 고난입니다.

욥은 졸지에 자기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마귀가 내기하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자식이 죽고 마누라가 도망가고 자기 몸은 병들고 한마디로 한 순간에 쑥대밭이 되는 고난 속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욥에 친구들이 욥이 당하는 고난을 인간의 행함 쪽에서 접근을 하는 겁니다.

위로해 주는 척 하면서 염장을 지릅니다.

욥아! 너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선 착한 자에겐 상주시고 악한 자에겐 벌 주시는 분이 아니냐?

욥에 친구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선악 개념으로 욥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서 아는 하나님은 착한 자에 상주고 악한 자에겐 벌주는 상선벌악하는 하나님입니다.

욥에 친국들이 이 기준으로 지금 욥을 공박하는 겁니다.

 

이는 마치 한국교회 경건주의 성화주의자들이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선이다 악이다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 했냐? 안했냐?

주일 지켰냐? 안 지켰냐?

봉사 했냐? 안 했냐?

술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라는 것으로 신앙이 있냐? 없냐? 로 싸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욥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난 잘못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욥에 친구들은 잘 생각해보라고 하고 욥은 아니다 라고 하고 이런 논쟁이 34장까지 지루하게 이어져 옵니다.

욥도 자기도 모르게 친구들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그러자 이 광경을 쭉 지켜보던 젊은 친구 엘리후가 나타나서 양쪽 다 책망을 합니다.

 

욥 35:1-8=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엘리후의 말을 들어 보세요.

야! 이 병신들아!

하나님께서 죄인이 죄를 짓는다고 무슨 영향을 받겠으며 죄인이 착하게 산다고 한들 그게 무슨 영광이 되겠느냐!

이미 죄인인데!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 죄인들에게서나 왈가왈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죄인들의 행동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인간이 바퀴벌레의 행동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과 같아요.

욥과 그 친구들은 마치 바퀴벌레들이 자기들 행동을 가지고 인간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냐! 안 받을 것이냐! 로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엘리후가 나타나서 양쪽 다 틀렸다고 싸잡아서 욕을 하는 겁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오셔서 유대인들의 죄관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 로 논쟁하고 있었어요.

너 율법 몇 개 지켰어! 따지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은 율법 가지고 죄다 아니다 따지는 그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전혀 다른 죄관을 가지고 인간들을 책망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행함을 가지고 죄다 아니다 책망하지 않고 예수 안이냐! 예수 밖이냐! 로만 책망하십니다.

예수 안은 무조건 정죄함이 없고, 예수 밖은 무조건 정죄입니다.

예수 안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천국에 가지만, 예수 밖은 무조건 지옥행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기관차가 경부선으로 끌고 가면 그 뒤에 달린 객차는 부산으로 가게 되어 있고, 호남선으로 끌고 가면 자기의지와 상관없이 광주로 끌려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안은 기관차가 천국으로 끌고 갑니다.

그럼 기관차에 끌려가는 객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가는 방향성엔 영향을 주지를 못합니다.

객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객차 안에서 일일 뿐입니다.

객차 안에서 술을 쳐 먹든지, 노래방에 가든지, 아니면 게임을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성경을 보든지 기도를 하든지 그건 개인 취향대로 하면 됩니다.

 

물론 남들 잠자는데 술 쳐 먹고 노래한다면 죽싸게 얻어터질 겁니다.

얻어맞아서 죽어도 천국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가 설령 세상에서 죄를 짓고 감옥에 간다고 하여도 천국 가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로 천국과 지옥을 판단하지 않고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로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짜 구원받은 성도라면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로 판단하지 말란 말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강도도 신앙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 밖에 있으면 목사도 불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발려진 집안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 안에서 일괄처리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을 따지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선 우린 없는 자입니다.

아까 말했잖아요.

하나님은 예수 안이냐! 아담 안이냐! 로만 판단 한다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치장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자기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만의 내가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예요.

예수 안에 있는 나는 더 이상 내 행동에 책임질게 없어요.

예수님의 것으로서의 나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몸에 지체로 부름 받은 성도는 독자적인 나가 없어요.

예수님의 몸으로서의 나만 있는 겁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로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독자적인 나로 살아지지가 않아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몸에 붙여놓았습니다.

지체가 몸에서 떨어져 나와서 독자적으로 돌아다니면 그건 죽은 겁니다.

 

여러분! 팔 다리가 뚝 떨어져서 혼자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지요.

설령 떨어져 돌아다닌다면 그건 죽은 놈의 것이지 산 놈 것이 아닙니다.

 

이걸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죽은 가지라고 말한 것과 같아요.

가지 스스로가 나무로부터 이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붙여준 가지가 아니고, 자기가 붙잡고 있는 가지를 말하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은 지옥에 가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준 사람이라야 천국에 갑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어 주게 해준 믿음은 내가 버릴 수가 없어요.

믿게 해주는 능력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농부가 잘라내기 전에는 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질 염려가 없지요.

 

그런데 농부 되신 하나님은 한번 붙여 놓으면 다시 잘라내지 않아요.

왜냐하면! 붙여 놓은 것이 하나님의 신실함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하나님은 식언치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치 않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아요.

붙였다! 잘랐다!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야! 정낙원이 널 구원해 줄게!

그러면 끝난 겁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줄게! 라는 말씀이 곧 완료이고 창조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중간에 취소가 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해 준다고 하면 내가 싫다고 해도 변하지 않아요.

이미 내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고래 등에 꽂힌 작살처럼 콱 박혀서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게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75세 때 사래가 65세 때 찾아가서 아들을 준다고 했어요.

약속을 그들 속에 심어 놓은 겁니다.

이제 그 약속은 생명의 씨앗처럼 아브람과 사래 몸속에 콱 박혀 있어요.

어디를 가든지 이 약속은 빼내지지 않아요.

 

그런데 25년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와서 아들을 준다고 합니다.

이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포기했어요.

자기들 꼬라지를 보니 자식 낳는다는 것은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들을 준다고 하자 서로 얼굴 마주보면서 아주 꼬깝게 비 웃어버립니다.

 

속으로 그랬어요.

아니 지가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우리 꼬라지를 보고도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나!

그러면서 하나님 약속을 안 믿었어요.

 

저 같으면 준다고 했다가도 기분 나빠서 취소 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배알도 없이 비웃음당하면서 약속을 밀어 붙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믿지 않았음에도 이삭이 태어났어요.

이삭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안 믿었음에도 하나님의 약속 자체가 인간의 순종 여부와 상관없이 성취해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도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고 그 주어진 약속이 성도의 순종여부와 상관없이 일을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약속이 우리의 동의 여부를 묻지도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 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내 몸에 심어 놓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구원에 확신을 이야기 합니다.

난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고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에 확신은 신빙성이 없어요.

믿을게 못돼요.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지 하나님 약속이 아닙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지옥에 간 것은 그들이 확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 안 믿어서 지옥에 간 것이 아니예요.

그들은 누가 뮈라고 해도 천국에 간다고 확신 했어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지옥에 보냈어요.

왜? 그렇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약속을 심어 놓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천국에 간다고 한 겁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혼자 하나님 아들이라고 행세하고 다닌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 새끼들만 천국에 데려가지 남에 새끼들은 데려가지 않아요.

천국이 텅텅비어도 안 데려가요.

 

유대인들이 천국에 간다고 확신 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율법을 지켰거든요.

요즘 식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녔거든요.

누가 뭐라고 해도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 믿는 줄 알아요.

이건 마치 안상홍 증인회와, 여호와의 증인들과 안식교 교인들이 천국 간다고 믿는 것과 같아요.

 

그런데 지옥에 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지네들 생각이지 하나님 뜻이 아니예요.

천국은 내가 확신한다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하나님이 약속을 심어 놓아야 갑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심겨 졌는지! 안 심겨 졌는지! 어떻게 압니까?

알 수 있는 길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심어 놓은 사람은 하나님이 늘 간섭 한다는 겁니다.

이상하게 인생이 자꾸만 꼬여요.

뭐가 잘 안돼요.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인생사가 내 뜻대로 안 풀려 가요.

 

예수님이 베드로보고 그랬지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맞아요.

하나님의 약속이 심어진 성도는 자기가 원치 않는 길들로 가게 되어 있어요.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심겨진 성도들은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자꾸만 하나님이 간섭을 해요.

귀찮게 하고 망하게 하고 욕을 먹게 해요.

안 되는 길로만 끌고 가요.

좁은 길로 몰아 부치는 것이 보여요.

 

하나님이 간섭하면 우리 일상에서 자꾸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을 일으켜요.

우리기 지금 히브리서 11장을 강해해 오면서 깨닫는게 뭡니까?

믿음이 간섭한다는 것이잖아요.

 

노아가 홀로 방주를 짓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모두가 미쳤다고 합니다.

남 안하는 짓을 혼자 하고 있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고자 한 것이 어디 제 정신이고 정상적인 행동입니까?

이건 미치지 않고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 치고 자기가 원해서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멀쩡히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믿음이 간섭해서 마른하늘에 홍수가 온다고 방주를 짓게 하고 왕궁에서 광야로 쫓겨나게 만들고 하는 겁니다.

 

믿음이 간섭하면 아파요.

하나님은 약속을 심어 놓은 성도에게 믿음을 주어서 좁은 길로 끌고 갑니다.

좁은 길은 인간 스스로가 걸어갈 수가 없는 길입니다.

도망가고 싶은 길입니다.

 

인간은 넓은 길로 가고 싶어 하지, 좁은 길로 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밀어 넣지 않으면 절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파요.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예수 안 믿고 싶지, 예수 믿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니 믿는 것이지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게 아니에요.

 

여러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까지 호락호락하게 쉽게 가지 않았어요.

광야 길은 너무 너무 힘든 길이기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따라간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의 소욕과 반하는 길이므로 울면서 가는 길입니다.

인간들 스스로가 갈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끌고 밀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 할 때 천사들이 도운 것은 십자가 길은 육신으로는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는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천사가 도운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생깁니다.

사람들은 천사가 도우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사가 도우면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는 길이기 때문에 도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아주 역설적인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심어 놓은 자기 백성들에게 천사를 보내서 십자기 길로 가도록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감상주의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가는 젓 나는 두 암소와 같이 울면서 가는 길입니다.

그것도 끝에 가면 제물로 죽임 당합니다.

 

그래서 전 하나님의 약속이 심어진 성도와 자기가 믿는 척 하는 것을 분별하는 기준이 그 사람에게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가로 가늠합니다.

복음 때문에 고난당하는 일들이 우발적으로 일어나면 아! 하나님이 저 사람을 간섭하는구나! 라고 생각해요.

 

유월절 피로서 살아난 사람들에겐 유월절 어린양은 그냥 어린양이 아니에요.

그들에겐 어린양의 피는 생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생명처럼 자식들에게 가르쳤어요.

아주 생생하게 말입니다.

자손들이 어떻게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살아난 것인지 아주 리얼하게 가르쳤습니다.

 

이건 마치 6.25 전쟁을 경험한 세대와 같아요.

6.25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북한은 동족이 아니에요.

생존을 위협하는 적입니다.

북한을 인권이니 휴머니즘이니 하는 식의 감상주의로 접근 하지 않아요.

항상 생명을 해치는 악으로 접근을 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경험한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실제로 십자가를 경험한 성도는 십자가 이외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아요.

십자가를 가리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를 않아요.

이런 것은 십자가를 경험한 성도만이 갖는 고집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십자가를 가리는 인간은 자기를 포함하여서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가리는 일에 친구도 형제도 동족도 양보하고 인정을 베풀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예수를 따르는 길을 부모와 자식과 전토와 자기 생명까지 버려야 한다고 한 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그만큼 생명의 문제는 대충 대충 타협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는 것을 대충 대충 삽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생명이지 이상이고 도가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을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 간에도 복음 문제에 있어서는 냉정한 겁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은 복음 앞에선 냉정 할 수밖에 없어요.

 

애굽에 장자가 죽어나가 자빠지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어요.

출애굽을 할 때 그 급박함을 생각해 보세요.

애굽 전역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애굽을 떠나 온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유월절의 어린 양에 피를 대충 대충 농담으로 가르쳤겠느냐 이 말입니다.

혹여라도 자식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우습게 여긴다면 가만있었겠느냐 이 말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십자가 피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십자가 피 안에 있는 생명을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인 겁니다.

본인이 십자가 피를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화화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의 특징이 뭔가 하면 십자가 피만 증거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십자가 피는 자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앞에선 그 어떤 양보나 타협이나 관용도 없어요.

 

신앙생활은 취미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생명과의 전투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란 말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생명으로 먹은 사람은 생명으로 지키고자 합니다.

우리도 십자가 피에 의미를 안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 공로를 해치는 것으로부터 싸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때문에 의로워진다는 것을 사수하여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좋은 신앙생활입니다.

 

부디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 안에서 얻은 생명 안에서 세상이 주는 그 어떤 두려움으로부터도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서 구약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구원이 되었듯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 때문에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깨닫고 사나 죽으나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며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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