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강해)12강.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믿음 (히 11:23)

by coroa 2022. 3. 24.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강. 두려움을 이기게 하는 믿음 (히 11:23)

-.정낙원 목사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브리서를 살펴 오면서 느끼는 것은 인간의 상식과 생각으로는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상식으로 알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나 그 시대 가치관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노아가 먹고 사는 일보다 방주를 짓는 일이나!

아브라함이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나!

이삭이 장자와 차자를 뒤 바꿔서 축복하는 일이나!

야곱이 손자를 자기 자식으로 삼고 축복하는 일이나!

멀쩡히 잘 사는 동네를 떠나라는 것이나!

히브리서 11장에서 기록된 것은 하나 같이 정상적으로 되어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께서 작정을 하고 인간의 생각에 어깃장을 놓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우(右)하면 하나님은 좌(左)하고, 인간이 좌(左)하면 하나님은 우(右)하는 식입니다.

아주 나쁘게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인간이 잘 사는 꼴을 못 보는 가학자처럼 보입니다.

가학(加虐)이란? 남을 괴롭히면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정신 분석한 적으로 “새디스트”와, “메조키스트”가 있습니다.

흔히들 새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이라고 합니다.

새디즘은 “가학”을 말하고, 마조히즘은 “피학”을 말합니다.

새디즘은 상대를 때림으로 희열을 느끼고, 마조히즘은 매를 맞음으로 희열을 느낍니다.

 

얼핏 생각하기를 아니 어느 인간이 매를 맞으면서 희열을 느끼느냐 라고 의문을 제기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주로 성 도착증 환자에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영적인 세계에도 이런 증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학을 당하면서도 그게 신앙인줄 알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사도바울의 증거를 들어 봅시다.

 

고후 11: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교인들 위에 군림하였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이 교인들 위에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재물을 빼앗거나 뺨을 때려도 용납한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은 실제로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가 있습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종처럼 다스려도 교인들이 그것을 기뻐해요.

특히 큰 교회 다니는 교인들은 당회장 목사의 종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목사가 욕을 해도 감사하게 여기고 아멘 합니다.

돈 가지고 오라고 하면 군말 없이 갖다 바칩니다.

 

특히 할머니들은 목사가 반말을 하고 등짝을 때리며 욕을 해 주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요.

기분 나쁘지 않느냐 라고 물으면 도리어 주의 종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 주기 때문에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쯤 되면 매 맞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마조히즘 환자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 분석학자가 말한 말이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인 맞는 셈입니다.

이게 벌써 2천 년 전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후서가 성경에 있다는 것은 교회가 있는 곳엔 이런 일들이 늘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그들의 신앙을 책망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있다는 것도 어느 시대나 교회가 있는 곳엔 바울과 같은 종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진짜 복음을 전하는 목사인 바울이 교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거짓 목사들이 영광을 받았다는 것도 교회 안에서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거짓 목사는 대접받고 참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외면당하였습니다.

 

이게 죄 아래 놓인 이 세상에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싫어하고 생명을 죽이는 마귀를 좋아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싫어 보이고, 마귀가 하는 일이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애굽에 터를 잡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을 가나안으로 떠나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 입장에선 싫은 이야기입니다.

꼭 하나님께서 괴롭히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인간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고 살리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괴롭히는 분이 아니고 지극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에게 패망하고 포로로 잡혀 가는 것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렘 29:4,5,7,1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합니다.

너희들 보기에 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망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너희들은 재앙이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실상은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아무 걱정 말고 평안히 살다가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을 두들겨 패면서 너를 사랑해서 그런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만고불변의 법칙은 부모의 사랑을 자식들은 미움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훈계를 자식들은 잔소리로 듣습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것으로 들립니다.

흔히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몸에 나쁜 약은 입에 달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인간도 부모가 간섭하는 말을 좋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식에게 잘못된 말을 하는 부모도 없습니다.

다 자식을 위해서 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위함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부모와 상의하지 않고 꼭 자기와 같은 친구들에게 상의해서 일을 저지릅니다.

친구는 자기 수준과 같기 때문에 동조해 주는 것입니다.

친구는 스승이 될 수가 없어요.

친구는 나를 죽이는 데로 끌고 가지만 스승은 나를 살리는 데로 끌고 가요.

최고의 스승은 부모인 겁니다.

 

부모 이상의 스승은 없어요.

왜냐하면! 부모는 항상 생명을 살리는 쪽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죄인에게 있어 최고의 스승이자 부모는 하나님뿐입니다.

마귀는 망하는 길로 가는데 동조해주는 친구이지만, 하나님은 망하는 길로 가면 채찍질해서 생명의 길로 끌고 가는 부모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겐 괴로운 모습으로 다가 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선 분명히 사랑을 주셨는데 인간은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고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을 주었는데 인간은 저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이 갭(틈)을 좁혀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깊이 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엡 3:14-19=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한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을 좀 헤아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철이 좀 들라는 말입니다.

 

성도가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신앙생활을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내가 신앙생활 잘하면 구원받고 못하면 탈락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에 깨달은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해 주면 되는 것이고, 안 해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마음대로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조건으로 인하여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곧 인간 쪽의 결과로 인하여 구원이 취소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를 믿음으로 되어진다고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의 의(義)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가 없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의(義)를 주셔서 의로워지는 것이지, 내가 의(義)를 만들어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의(義)를 만들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주어진 의(義)로 사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의(義)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받은 의(義)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어진 구원으로 사는 것입니다.

천국 가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 아니고, 천국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천국 안에서 사는 것이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 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것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난 죽은 자라는 겁니다.

나는 없는 자란 말입니다.

왜? 그런가요?

 

내 행위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행위로 이미 결과가 완료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산 조건으로 인하여 결과가 번복되지 않습니다.

즉 인간의 행위 속에서 천국 갈 짓이나 지옥 갈 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을 내 행위로 판단하지 않고 예수님의 약속으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난 하나님 앞에서 없는 자와 같습니다.

오로지 예수 안에서만 내가 있는 겁니다.

결국 나라는 독자적인 나는 죽었고, 예수 안에 있는 나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난 죽은 자란 말입니다.

죽은 자는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습니다.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으니 천국인 것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자기가 인생을 책임지면 근심 걱정을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지옥입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서는 사나 죽으나 성공하나 실패하나 이미 천국 가기로 확정이 되었으니 마음으로 염려할 것이 없으니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원리가 이렇다는 것과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다릅니다.

그건 자기가 믿음으로 풀어가야 할 몫입니다.

원리는 아는데 그 원리대로 잘 안 살아지니 사는게 전쟁인 것입니다.

 

이게 말과 같이 쉽지 않으니 맨 날 악악대며 싸우는 겁니다.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그래서 성도의 일생은 상처투성이인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어요.

12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런 삶을 살았어요.

 

죄는 항상 우리 몸을 볼모로 활동을 합니다.

마치 암 덩어리 같아요.

암은 내 몸이 살아 있으면 활동을 하지만 죽으면 암도 죽어버려요.

육신이 죽으면 죄도 죽어요.

그러니 죄라는 놈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성도의 몸도 살리려고 합니다.

 

여러분 귀신이 누구에게 들어가 활동을 합니까?

산 사람의 몸이지요.

죽은 놈에겐 귀신이 살 수가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귀신은 산 자의 몸 속에서 기생을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은 살아 있는 육신을 볼모로 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산 사람에겐 마귀가 죽음으로 왕 노릇하지만, 죽은 사람에겐 죽음으로 왕 노릇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살고자 하면 귀신이 물귀신처럼 달라붙고, 죽고자 하면 이젠 이 놈 몸뚱이에선 살기 틀렸구나 하고 포기해요.

 

살고자 하면 두렵고 죽고자 하면 평안해요.

두려움은 항상 살고자 하는 데서부터 기인이 됩니다.

어른들처럼 돈에 대해서 살아 있으면 돈에 대한 갈급함이 생기지만, 어린아이처럼 돈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갈급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두렵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목사가 목회하는데 응용하면 교회를 붙들고자 하면 걱정이 되는데 까짓것 교회 없으면 어때 복음만 전하면 되지 라고 하면 편해요.

복음 전함도 교인들을 붙여 주면 하고, 안 붙여 주면 안하면 됩니다.

교회 부흥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잠이 안 오는데 교회 포기하면 잠이 잘 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첫 걸음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난 죽었지! 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 나는 단독자로 사는게 아니고 예수 안에서 사는 자이지! 라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런 믿음이 들어요.

이걸 놓치면 그때부터 세상에 있는 근심이라는 근심은 다 몰려 와요.

 

여러분 죽은 사람이 근심 하는 것 봤어요.

죽은 사람은 자식 걱정하고 마누라 걱정 안 해요.

반대로 죽은 자식이나 죽은 마누라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거나 자식이나 마누라가 죽었다는 것은 내게 없다는 것입니다.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자식이고 마누라고 교회이고 목회이고 걱정하는 것은 자기 안에 그것들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자식도 없고 마누라도 없고 교회도 없으면 걱정할 일이 없어요.

내가 다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문제가 되는 겁니다.

 

제가 복음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마음 상태가 그랬어요.

복음을 알기 전엔 가족도 교회도 교인도 다 내가 챙겨야할 짐이었어요.

교회도 꾸려 가야하고!

가족들 믿음도 간섭해야 하고!

교인들 믿음까지 다 챙겨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들겠어요.

모두 내가 해야 하는 것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하나 같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습니다.

내 믿음 하나도 챙기지 못하는데 남에 것 까지 챙겨야 하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눈만 뜨면 이런 것들이 나를 짓눌러요.

내 스스로 우겨쌈을 당하여서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복음을 깨닫게 되었어요.

복음을 깨닫고 보니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았어요.

자식도 내 자식이 아니고!

마누라도 내 마누라가 아니고!

교인도 내가 간수할 교인들이 아니고!

교회 역시 내가 세워가야 할 교회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겁니다.

 

자식도 내 소유물이 아니고!

마누라도 내 소유물이 아니고!

교인도 교회도 내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부 내 것이라고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전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인 것이었어요.

 

솔직히 내가 애쓴다고 해서 되어질 일이 하나도 없잖아요.

괜히 짊어지고 낑낑거렸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겁니까?

지금이니 어리석다고 하지 그 땐 사명감이었어요.

깨닫고 보니 전부 쓸데없는 고민만 한 가득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오고 나니 하나님께서 다 관리하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 염려가 안돼요.

 

믿음이 오고 난 후 나타난 현상이 첫째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복음을 몰랐을 땐 남의 시선을 무척 의식했어요.

남들이 뭐라고 할까?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나니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내 자존심이었던 것입니다.

자존심이 살이 있으니 주변에 눈을 의식하고 산 것입니다.

자존심을 어디 버려야 하겠다고 해서 버려집니까? 본능인데!

 

그런데 복음이 내게 덮치고 나니 자존심이 사라지더라고요.

물론 이런 상태도 복음이 나를 장악 할 때만 그래요.

복음에 장악당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는 것이 의식이 안 돼요.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어지고 얼마나 편한지 몰라요.

 

복음이 장악하면 나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가 되어 없는 자가 됩니다.

죽었다는 것은 내가 책임질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했어요.

복음 안에서 죽지 않으면 세상에 대하여 살아나기 때문에 근심과 걱정이 엄습해요.

 

성도는 평생 이 싸움을 하며 살게 되어 있어요.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을 눈앞에 어른거리게 합니다.

마치 저녁 퇴근 후 귀가 길에 불고기 냄새가 코를 유혹하듯이 잠자던 육신의 소욕을 유혹합니다.

그러면 금새 마음과 생각이 그것들을 붙잡으려고 좇아가요.

 

여러분 육신의 소욕은 성령 받았다고 믿음 있다고 죽는게 아닙니다.

다만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언제든지 냄새만 풍기면 깨어나 쫓아갑니다.

그러다 성령이 뒤통수 때리면서 너 지금 뭐하는데! 라고 하면 아차! 내가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놓쳤네! 내가 지금 뭣하고 있는거야? 라고 돌이키게 됩니다.

물론 그 때 뿐이지만!

 

그럼 속으로 그래요.

아이구! 이 인간아! 인간아! 니가 그러고도 목사 맞나!

니가 그러고도 복음 전한다고 하냐?

이 등신아! 라면서 속 사람이 탄식을 해요.

주여! 또 헛짓했네요!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합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날마다 내 몸뚱아리 하나 놓고 전쟁을 하는 겁니다.

육신이 이기면 마음은 지옥이 되고, 성령이 이기면 천국이 됩니다.

성령은 나를 십자가 앞으로 끌고 가 내 존재는 예수 안에서 죽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남에 눈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지게 됩니다.

 

자기가 책임질 것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예수 안에서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겐 십자가가 관념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말하면서 근심 걱정을 하는 겁니다.

십자가는 능력이지 관념이 아닙니다.

관념은 머릿속에서 십자가를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 십자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믿음이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지게 만듭니다.

완벽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도 결국 믿음이 지향하는 쪽으로 한 걸음씩 내 딛게 된다는 뜻입니다.

늘 넘어지면서 자기 한계를 분명히 알고 주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요.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고 했어요.

 

잠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일곱 번 넘어진다는 것은 늘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일어난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그를 일으켜 세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식을 키워보면 이런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자식은 실수한 것을 가지고 부모 앞에선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부끄러운 일을 하여도 금새 잊고 다시 헤헤거립니다.

이게 자식 이예요.

자식에게만 이런 뻔뻔스러움과 능글맞음이 있어요.

이런 자식을 보면 겉으론 욕하면서도 속으론 흐뭇해합니다.

 

만약에 자식이 실수하였다고 방구석에 쳐 박혀서 두문불출하고 식음을 전폐하면 그것같이 속상하는 게 없어요.

부모는 자식이 늘 실수투성이라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실수해도 크게 탓하지 않아요.

그런데 실수하였다고 인생 다 산 것같이 고민 고민하며 우울해 하면 화가 나서 죽이고 싶어요.

 

성도가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교만이 무슨 잘못을 한 것으로 자책하거나 창피한 일이 있다고 해서 교회에 안 나오는 거에요.

이게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인가 하면 어린아이가 바지에 오줌 눴다고 가출하는 것과 같아요.

어린아이가 바지에 오줌 누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오줌 누고 나면 엄마에게 빨리 옷 갈아입혀 달라고 하는 것이 어린아이다움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죄인이 죄 짓는 것이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죄인의 행위로 구원치 않고 예수님의 행위로 구원하는 겁니다.

죄인이 완벽하다면 예수님이 죽을 필요도 없고 예수를 믿을 필요도 없어요.

자기가 완벽하게 살아서 구원받으면 되요.

스스로 당당하게 말씀대로 살아서 천국가면 되니까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구질구질하게 용서해 달라느니 구원해 달라느니 하지 않아도 되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하시는 것은 인간에게서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죄인에게 의로움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 잘못입니다.

갓난아이에게 똥오줌 가릴 것을 기대 한다면 그 엄마는 정신이 잘못된 겁니다.

 

이와같이 성도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자기가 뭔가를 책임지고자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자기인생을 책임지려고 하지마세요.

그렇다고 스스로를 방탕과 방임에 정신 줄 놓고 살란 말이 아닙니다.

늘 육신의 소욕과 싸우되 넘어지더라도 주저 않지 말고 다시 일어나라는 겁니다.

실수해도 하나님 앞에 뻔뻔스럽게 나오는게 좋은 신앙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만난 사람은 하나같이 다 자기가 책임질 인생이 없이 살았다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사람들이 다 그런 사람들입니다.

신약에선 12제자들이 다 그랬어요.

이들이 완벽한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도 우리와 동일한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음에도 실수하고 넘어진다는 것은 그들도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만 성경에 이들의 넘어짐과 실수를 세세하게 기록해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12제자에겐 큰 성령을 주고 우리에겐 작은 성령을 주고 그런 것이 없어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모두에게 차별이 없이 동일합니다.

 

성령이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니 세상이 안 보이고 누가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안 들린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 눈엔 오로지 예수님의 피 밖에 안 보여요.

남에 시선을 의식하고 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요.

한마디로 거침없이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세상에 대하여 눈이 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복음 밖에 안 보이게 만든 겁니다.

자기가 책임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상태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러므로 이젠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어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죽음에 벌벌 떨던 바울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이젠 예수 안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울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자기 백성들을 죽음에서 벌벌 떠는 그 죽음에서 놓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져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을 죽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만 두려움으로 역사를 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은 두렵지가 않아요.

 

솔직히 말해서 죽었으면 하는 사람에겐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고 반가움이 됩니다.

살아야한다는 사람에게만 죽음이 저승사자처럼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백성들이 일평생 죽음에 벌벌 떠는 옛 사람을 죽이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 주겠다고 오신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을 일컬어 새로운 피조물이다 혹은 거듭난 성도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아요.

실패가 두렵지가 않아요.

남에 시선이 두렵지가 않아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로 나타납니다.

아까 말했듯이 내가 책임질 인생이 없다는 식으로 나타난단 말입니다.

 

이는 오순절 성령강림 이전의 제자들과 성령이 임하고 난 후의 제자들이 모습을 보면 잘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객기를 부린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술 취한 사람처럼 사람 눈치 안보도록 겁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고 난 후에 완전히 달라졌어요.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기를 위한 삶이 없었어요.

즉 자기 관리를 하지 않았어요.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산다는 것을 말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12제자들이나 바울과 같이 두려움 없이 산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부모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자식을 석 달 동안 몰래 키웠다는 내용입니다.

 

히 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아니 부모가 자식을 지키는 것이 무에 그리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기록하였을까요?

언뜻 보면 상식적인 말 같은데 상식적이 아니기 때문에 기록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부모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입니다.

어느 부모가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한다고 해서 덥석 내어주겠습니까?

여자에게 가장 강한 것이 모성애(母性愛)입니다.

 

모성애(母性愛)란?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흔히들 죽음보다 강한 것이 모성애라고 하잖아요.

모성애(母性愛)는 인간 세상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하나님 사랑의 예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성애도 자기 목숨 앞에선 자기 생명을 지키는 쪽으로 본능은 움직입니다.

아무리 자식이 귀하다 하여도 자기 목숨만큼은 아닙니다.

다만 사랑한다는 측면에서 자식의 목숨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숨과 목숨을 맞바꾸는 일이라면 주저 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존 본능이 모성애를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의 부모가 임금의 명을 거역하고 석 달 동안 숨겨서 키울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때문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석 달 동안 몰래 키웠던 그 현장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긴 내용이니 간략하게 편집해서 살펴봅시다.

 

출 1:8-10=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그 신민에게 이르되 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지혜롭게 하자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갈까 하노라 하고 15-16=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자와 부아라 하는 자에게 일러 가로되 16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 여든 죽이고 여자 여든 그는 살게 두라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 모든 신민에게 명하여 가로되 남자가 나거든 너희는 그를 하수에 던지고 여자 여든 살리라 하였더라

 

2:1-2=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2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요셉이 죽고 나자 요셉을 모르는 왕이 등극하여 애굽에 혈통 보존 정책을 폅니다.

비 애굽 출신은 전부 종으로 삼아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비 애굽 출신이므로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종들을 영원히 붙잡아 두기 위해서 종들이 힘을 키우지 못하도록 남자는 죽이고 여자만 살리라는 명을 내립니다.

이 때 모세가 태어납니다.

위 본문이 그 시대 상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 부모의 믿음을 논하기 전에 왜? 이런 일들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는지부터 먼저 잠간 살펴봅시다.

이러한 일들을 당하게 된 것이 모두가 이스라엘이 자초한 일입니다.

 

지난 시간 요셉이 죽을 때가 되어서 그 형제들에게 애굽을 떠날 것을 권고 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요셉은 죽기 전에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애굽을 떠날 것을 권고 하였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죽고 난 후에도 애굽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은 그곳에 살기 좋아서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셉이 죽고 나서 살기가 어려웠을 것 같으면 스스로가 애굽을 떠나 왔을 것입니다.

요셉의 권유가 아니라도 애굽을 떠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권유에도 애굽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애굽이 살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몸 편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인간인데!

어찌 그 편안한 애굽을 떠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의 권고를 무시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산술적으로 보면 요셉이 애굽에 총리가 될 때가 30세입니다.

30세에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장차 닥칠 엄청난 기근을 준비합니다.

그래서 7년 동안 풍년이 들었을 때 온 나라에 곡간을 지어서 곡식을 보관케 합니다.

그리고 7년 흉년이 시작이 되자 야곱이 2년을 버티다가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갔다가 요셉이 살아서 애굽에 총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요셉의 권유로 아직도 흉년이 5년이나 더 남아 있으므로 애굽으로 이주를 시킵니다.

 

그러면 야곱에 식구들이 애굽에 이주한 것은 요셉의 나이가 39세 때가 됩니다.

그리곤 요셉은 110세에 죽었습니다.

그럼 요셉의 형제들이 애굽에선 산 세월이 약 70년을 산 것입니다.

70년 동안 총리대신의 가족으로서 호가호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가 애굽으로 이주한지 430년 만이라고 했으니 요셉이 죽기 전에 애굽을 떠나라고 한 후에도 약 360년을 더 살았다는 말이 됩니다.

참으로 더럽게도 말을 안 듣고 오래 살았습니다.

360년을 더 살았다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을 죽을 때까지 안 들어 쳐 먹는 죄인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의 권유대로 그 때 떠났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어디 인간이 예나 지금이나 좋게 말해서 알아 쳐 먹는 존재입니까?

갈 때까지 가서 결국 망하고 마는 종자가 아닙니까?

그래서 죄인인 것입니다.

 

이제 요셉이 왜? 그토록 애굽을 떠나라고 유언 했는지?

하나님이 왜? 권고하셨는지 그 이유를 애굽에 종노릇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아! 우리 조상 요셉이 우리가 이렇게 애굽에 볼모가 되어 종노릇 할 것을 미리 아시고 떠나라고 했구나!

 

그럼에도 우리가 미련하여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달콤한 것을 먹고자 고집을 피우다가 이 노릇을 자초했구나! 를 알게 된 것입니다.

종살이 하면서 뒤 늦은 후회를 해 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사 애굽에 종노릇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합니다.

 

출 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애굽에서 잘 살 땐 요셉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할 때는 콧방귀를 끼더니 이젠 아브라함의 약속을 기억해서 살려 달라고 합니다.

마치 탕자가 수중에 돈이 남이 있을 땐 아버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더니 수중에 돈이 떨어지고 남에 집 머슴을 살다고 보니 아버지가 생각 난 것과 같습니다.

 

이게 어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입니까?

우리 역시도 잘 살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인간의 본성상 잘 살면 하나님 찾을 인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렵고 힘들 때 찾는 것이 죄인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인식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 신이란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백성이나 지금 우리나 다 동일합니다.

똑 같은 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일을 하십니다.

이걸 히브리서 12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징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좌우지간 인간은 매로 다스려야 하는 종자들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개판(짐승)이 됩니다.

지금 이 시대 젊은 부모들이 자식을 키우는게 아니고 짐승을 키우고 있어요.

그러니 이놈들은 남에 눈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공공장소인 식당에서도 뛰어다니고 기차 안에서도 뛰어다니고 백화점에서도 뛰어다니면서 지랄을 떠는 겁니다.

 

부모라는 인간은 그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인 줄 알고 뻔히 보고도 그냥 내 버려둬요.

그 버릇없음이 나중엔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인 줄도 모르고 방자하게 키우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런 놈들 보면 주의 이름으로 안수해 주세요.

부모가 왜? 남의 아들을 때리느냐고 따지만 하나님이 그러라고 했다고 하십시오.

성경에 보면 자식을 초달하지 않는 부모는 부모가 아니라고 했다고 하십시오.

 

암튼 죄는 인간을 이처럼 쇠고집을 부리게 합니다.

그리곤 기어코 저주받게 만듭니다.

죄는 어떻게 하든지 인간을 저주 받는 길로 몰고 가야 되요.

그게 죄의 성질입니다.

 

그런데 의(義)는 인간을 불구덩이에서 빼내는 겁니다.

죄인이 순순히 안 나오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몽둥이질을 하는 겁니다.

몽둥이질을 해서 쫓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은 자진해서 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모두가 얻어터진 흔적들로 가득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어요.

 

사 1:5-6=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다고 했어요.

얼마나 얻어 터져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라고 탄식합니다.

맞아도 정신 못 차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해서 그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도 수많은 매질을 당하여서 온 것입니다.

매 맞은 흔적이 여러분 뜻대로 살아지지 않고 요 모양 요 꼴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매질을 안했으면 여기 있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 성공해서 지금쯤 골프치고 나서 남자들은 룸싸롱에서 아가씨들 끼고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놀고 있을 것이고, 여자들은 명품 산다고 백화점에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예수님 십자가 피를 알겠어요.

턱도 없어요.

세상에 쾌락 맛이 어떤데 십자가 피 맛을 보겠어요?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알고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요만큼이라고 깨닫고 감사하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쉬지 않고 족치고 또 족쳤기 때문입니다.

망한 것이 하나님이 간섭한 증거입니다.

 

성도는 살아 온 것만큼 하나님의 간섭을 많이 받은 것입니다.

즉 많이 맞았다는 말입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 늙을수록 맞을 일이 적게 남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빨리 죽는다는 것이 복이지요.

죄인이 빨리 죽는 것은 축복입니다.

은혜가 임하면 죽음이 기다려져요.

 

암튼 애굽의 학정 가운데서 모세가 출생하였습니다.

모세가 여자였으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되는데 이놈이 고추를 달고 나온 겁니다.

이때는 아들이 기쁘지 않아요.

세상에 아들이 기쁘지 않던 시절도 다 있었습니다.

어이쿠! 야! 이놈아!

왜? 하필이면 고추를 달고 나오느냐!

그냥 엄마 뱃속에다 고추는 떼 놓고 나오든가 하지 않고!

모세를 보고 그 부모는 자식 낳은 기쁨은 없고 걱정이 태산입니다.

 

옆집에선 아들 낳은 부모들은 임금의 명이 두려워서 아들을 나일 강에 빠트립니다.

그 핏덩이를 강물에 던지면서 다 네 팔자가 그런 걸 어쩌누 하면서 버렸습니다.

만약에 모든 부모가 다 아들을 모세 부모처럼 살렸다고 한다면 굳이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아들을 살렸다 라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석 달을 숨겼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부모들은 다 아들을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버젓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부모들은 임금의 명이 두려워서 아들을 죽었습니다.

자기 목숨 부지하려고 아들을 나일 강에 버린 것입니다.

당시 임금의 명령에 따르지 않은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부모는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고 거역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세를 숨겨서 키웠습니다.

모세의 부모에게서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났을까요?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모세의 부모에게 임하니 임금이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살린 겁니다.

결국 모세는 믿음으로 살아난 자입니다.

모세 부모가 살린 것이 아니고 믿음이 모세를 살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임금의 명령에 따라서 아들을 죽인 수많은 부모들은 믿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모세의 부모도 믿음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다른 부모들처럼 모세를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모세의 부모에겐 믿음이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겁 없이 임금의 명을 거역하고 모세를 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맞아요!

믿음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도나 개나 다 받으면 선물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선물은 선택으로 주어집니다.

지금도 아무나 내가 원한다고 십자가 피가 복음이라는 것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부모처럼 하나님께서 믿음을 준 사람에게만 복음이 들려지는 것입니다.

믿음 받은 증거가 모세의 부모처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세상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시대 임금의 명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 세상 임금이 누구입니까?

마귀이지요.

마귀가 무슨 명을 내리겠습니까?

마귀는 거짓 목사들을 가지고 일을 하니 거짓 목사들이 무슨 명을 내리는가 보면 마귀의 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억할 것은 구약은 신약에 그림자이고 모형입니다.

그림자와 모형이란 말은 실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실상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구약과 같은 동일한 모습으로서의 사건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교회 다닌다고 감옥에 가두지도 않습니다.

옛날 같이 예수 믿는다고 목 잘리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다고 불이익 당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 모세의 부모에 믿음이 지금 이 시대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한마디로 말해서 영적 의미에서 동일한 성격을 담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과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중요하니 잘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모세의 부모에게 믿음이 임하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자식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택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자식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되더란 말입니다.

 

모세는 모형입니다.

누구의 모형입니까?

예수님의 모형이지요.

 

잘 보세요.

믿음이 모세의 부모에게 이 아이를 살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보다 모세의 생명을 구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걸 신약으로 해석하면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자기 목숨은 버리고 예수님을 살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주체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그 하나님의 약속에 실상은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세의 부모는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모세의 부모를 성도라고 한다면 성도가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목숨 걸고 지킨 것이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입니다.

복음이지요.

 

복음이 뭡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성도가 죄사함 받는다는 것이잖아요.

왜? 예수의 피로 구원 받는 것이 복음인가요.

이는 그 당시 구원관은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었어요.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라고 한 것입니다.

자신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고 자랑하겠다고 했어요.

 

십자가의 피가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믿음이 와야만 압니다.

믿음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 십자가 피만 보여요.

 

그럼 이 시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자기 목숨보다 더 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이 시대 바로 왕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바로 왕이라고요.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럼 묻습니다.

누가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못하게 합니까?

절간에 스님들입니까?

아니에요.

이들은 예수의 피에 관심이 없어요.

 

그럼 세상 사람들입니까?

아니지요.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십자가 피 전한다고 성질 내지 않습니다.

무관심해요.

그들은 예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 너희들이 십자가를 전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아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전하지 못하게 하는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 목사들이지요.

바울이 그랬지요.

거짓 선지자들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한다고 했지요.

 

그럼 거짓 선지자들이 교회 밖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지요.

왜?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까요?

 

이건 구약서부터 거짓선지자들이 뭘 했는지 보면 압니다.

에스겔 34장을 보면 양 털 깎아 자기 배불리고 양 잡아먹는 놈들이라고 했어요.

예수님도 거짓 선지자를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한 것은 양을 잡아먹기 때문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이 교인들을 통해서 자기 이익을 챙긴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 시대 교인들을 통해서 이익을 챙기는 거짓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이지요.

성도는 양이고 목사는 양 잡아먹는 이리에요.

그럼 이 시대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가 누구인지 드러났습니다.

거짓 목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짓 목사를 삯꾼이라고 했습니다.

삯을 바라고 하는 자가 바로 거짓 선지자이고, 모세 시대로 말하면 바로 왕입니다.

교회를 먹고사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목사가 바로 예수님 십자가 피를 가리는 자들입니다.

왜? 목사들이 십자가 피를 가릴까요?

 

지금부터 중요하니 정신 바짝 차리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율법의 요구 때문이지요.

율법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지요.

그럼 죄의 삯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그럼 율법의 요구란? 죄인은 죽으라는 것입니다.

왜? 죄인이 죽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자기 백성들 때문에 죽은 겁니다.

그러니 자기백성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못해서 죽어야 하는데 내 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겠지요.

 

성령을 자기백성들에게 보내 주신 것은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자기도 죽었다는 것을 믿어요.

 

이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룬 것입니다.

아까 율법의 요구가 뭐라고 했지요.

죽음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죽은 놈에게 율법을 들이대며 지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이미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심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죄 값을 다 치렀잖아요.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 성도는 율법도 죽은 것이 됩니다.

더 지키고 자시고 할 율법이 없어요.

왜요? 율법과 함께 죽었기 때문이지요.

죽은 자에겐 율법이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자기 백성들하고 같이 죽었어요.

예수님이 자기 호적에 올라간 백성들과 같이 죽은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가셔서 자기호적에 올려진 백성들 이름을 몽땅 내어 놓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아버지 뜻대로 내가 이놈들 대신 죽었습니다.

 

그러니 여기 내 호적에 올라간 이놈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 가지고 공갈치면 안 됩니다.

너 왜? 율법 안 지켰어! 라고 공갈치지 말란 말입니다.

알았지요.

알았다.

 

그런데 마귀라는 놈이 장난을 칠 텐데!

그럼 우째노!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찌 할 건데!

내가 성령을 내 백성들에게 보내서 내가 자기 대신 죽었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면 안 됩니까?

아! 그런 방법이 있었나!

 

예수님께서 아버지 곁에 계신 성령님에게 성령님 이리와 보이소!

내가 명단을 줄 테니 이 명단 속에 있는 성도들 한데 가서 내가 너희들 대신에 율법에 요구를 다 이루었으니 누가 율법 가지고 너희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 예수님이 다 했다! 라고 말하라고 하이소.

그냥 그렇게 말만 하지 말고 성령님이 그 아이들 속에 들어가서 믿어지게 하이소!

알았다.

그럼 이제 얼른 가서 내가 시키는 대로 하이소!

 

그래서 성령님이 자기 백성들 속에 오셔서 이 사실이 믿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은 성령이 와 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으로 이 사실을 맛 본 사람들이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12제자들과 120성도들입니다.

12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나니 메뚜기 뛰듯이 온 동네 다니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합니다.

 

이 때 사울이라는 바울이 율법에 미쳐 있을 때인데! 아니 어떤 놈들이 조상 대대로 지켜 오던 율법을 없이 한단 말인가? 라고 분기탱천 해 가지고 예수쟁이를 잡으려고 뛰어 가다가 앞에 예수님이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들이 박고 죽어 버린 겁니다.

 

바울이 예수를 만나고 나고 보니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 지려고 하는 것이 헛다리짚고 있다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율법 지켜서 의로워 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서 의로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반대로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놈들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서만 된다고 증거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적으로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서만 죄가 사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다 도말 하였다고 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입니다.

 

그러니 이젠 율법 식으로 하나님을 섬길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고 외치고 다닙니다.

유대인들이 가만히 듣고 보니 기가 칠 노릇인 겁니다.

 

아니 엊그제만 해도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떠들고 다니던 놈이 하루아침에 변절을 해서 이젠 율법을 지키면 안 된다고 하고 있으니 이젠 철천지원수가 된 겁니다.

저 놈을 가만히 두다간 자기들이 굶어 죽게 생겼어요.

그래서 이제 바울을 죽이기로 작당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한 것은 단 하나 율법으로는 의로워지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율법 지켜서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배워 왔는데 바울의 말대로 율법을 지켜도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누가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교회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것 원하지 않고 예수 믿는 것을 바란다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걸 예수님께서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무튼 백성들이 율법을 안 지키면 손해 보는 것은 율법 때문에 이익을 보던 자들입니다.

율법 때문에 이익을 보던 자들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니 제사장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기승을 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사장들이 모세 시대로 말하면 애굽에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임금처럼 백성들에게 예수 믿지 말고 율법 지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지요.

 

알다시피 율법 속에는 갖가지 제사와 헌물들이 있습니다.

제사와 헌물이란? 지금 식으로 말하면 돈입니다.

율법 안엔 제사장(목사)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모두가 민중들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지내 줘야 먹고 삽니다.

율법대로 십일조도 바치고 잘못하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지내 주어야 해요.

제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제사장들의 주머니가 두둑하게 채워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율법지킴을 왜? 고수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율법지킴이 곧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지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율법이 하거든요.

제사장들이 율법을 가지고 너 이것 잘못했지! 저것 잘못했지! 하면서 온갖 죄를 들춰주어야해요.

그러면 백성들은 아이쿠 잘못 했습니다! 라고 제물을 끌고 와서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엔 백성들이 율법에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신음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돌아다니면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식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성전도 안식일도 십일조도 제사장도 없다고 합니다.

이젠 예수 믿는 성도가 바로 제사장이고!

성령을 받은 성도가 바로 성전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늘에 사람인 성도에겐 모든 날이 주일이고!

구원받은 성도 자체가 십일조라고 합니다.

 

지금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들입니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서 죽인 것입니다.

왜? 죽였습니까?

자기들 밥줄을 끊어 놓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시대 이런 설교를 하면 누가 제일 싫어하겠습니까?

바로 교회라는 직장에서 월급 받아먹고 사는 목사들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성전도 없다!

안식일도 없다!

제사장도 없다!

십일조도 없다! 라고 하면 교인들이 교회에 오겠습니까?

안 오겠지요.

교인들이 교회에 안 오면 헌금을 안 하잖아요.

헌금을 안 하면 목사는 어디 가서 월급 받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교회에서 월급 받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아요.

교인들이 교회에 오든 안 오든 신경 쓰지 않아요.

실제로 헌금 하지 않아 보세요.

교회에 안가도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돈이라도 척척 내는 사람이 교회에 안와 보세요.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립니다.

돈 많은 사람이 이사라도 가 보세요.

멀어서 교회에 못 온다고 하면 한 달에 한 번 나와도 좋으니 십일조는 자기 교회에 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은 제물에 관심이 있었지 실제로 군중들 신앙엔 관심이 없었어요.

그 증거가 자기들도 지키지 못할 법들을 만들어서 지키라고 했거든요.

자기들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요.

그러면서도 율법이라고 지키라고 한 것은 법을 어겨야 제물을 갖다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놈들을 내어 좇고 상을 뒤집어엎으면서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니 뚜껑이 열린 겁니다.

예수를 그대로 두었다간 자기들 밥줄이 다 끊기게 생긴 겁니다.

그래서 작당을 한 것이 이단이라고 하여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면서 이젠 하나님께 뭘 갖다 바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받는 것이라고 하면 길길이 날 뛰는 겁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교회를 건들거나 십일조와 주일 성수 건들면 용서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게 밥줄이거든요.

 

이들은 세상에 살면서 잘못하는 것은 육신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이해 해 줍니다.

이런 것은 모두가 예수의 피로 용서 받는다고 그래요.

그러면서도 주일성수 십일조는 절대로 빼 먹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건 하나님 것 도둑질하는 것이 되니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린다고 공갈을 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들은 언제든지 당할 수 있어요.

가정마다 이런 일이 없는 가정은 없어요.

그러면 좋은 일을 당하면 하나님 앞에 잘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 잘못했기 때문에 저주 받았다고 합니다.

적당히 성경 구절 인용해서 말하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요.

그러면 교인들은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으니 그런가 보다 라고 듣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십자가 피를 증거하는 목사들이 그건 사기라고 합니다.

그러 말은 목사들이 공교하게 지어낸 말들이니 듣지 말라고 합니다.

교인들이 술렁거립니다.

그럼 답은 하나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놈들을 이단이라고 하여 교계에서 추방시키는 겁니다.

 

마치 애굽에 임금이 남자가 나면 나중에 덤빌까봐서 죽이고자 하듯이

교회를 부정하고!

목사를 부정하고!

주일을 부정하고!

 

십일조를 부정하는 이런 목사나 성도들을 살려두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지요.

교인들에게 전염 시키면 어찌합니까?

그래서 신앙에 있어서 정통신앙에 어긋나는 염병 같은 이단이라고 정죄하여서 교단에서 제명하고 쫓아내는 겁니다.

 

노골적으로 십자가 피를 전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내 놓은 이론이 십자가 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의 성화된 삶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갈라디아 지역에 다니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던 거짓 선지자들처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는 행함도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율법 아래선 성화가 있어도 믿음 아래선 성화가 없어요.

 

행함은 잘하고 못하고 우열이 있을 수 있지만 믿음은 덜 믿고 못 믿고 가 없어요.

믿어지면 믿음이 잇는 것이고 안 믿어지면 믿음이 없는 겁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믿음을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어지면 안심이 되는데 안 믿어지니 뭔가 자기 쪽에서 안심 될 만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리고 행함은 강요할 것이 아니에요.

교회오고 싶어 하는 사람에겐 강요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 해라!

저것해라!

강요하는 것은 하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하기 싫은 사람을 왜? 강요합니까?

속된 말로 예수 믿기 싫다는데 왜? 예수 믿게 하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믿음을 받은 사람은 그 믿음이 알아서 움직이게 합니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해요.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합니다.

교회와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오고!

헌금을 해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하고!

봉사를 해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해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엔 억지가 없어요.

억지는 믿음이 아닙니다.

강요하고 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행함을 가르치는 것은 교인들로부터 뜯어내야 할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금 받아 내야 하듯이 뭔가 받아 내야 할 것이 잇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 시키는 겁니다.

여러분도 알지만 누가 시켜서 하면 짜증나요.

집안에 청소도 스스로 해야 신이 나지 누가 시켜서 하면 신경질 나요.

 

교회 다니는 것도 스스로 해야지 누가 하라고 강요하면 짜증납니다.

결국 예수의 피가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행함으로 예수님의 피를 가리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가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의 부모와 같이 믿음을 받은 자들이 일어납니다.

목숨 아까운줄 모르고 겁 없이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 예수의 피를 가리느냐고 하면서 그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현대판 모세의 부모들입니다.

예수의 피 하나 사수하려고 자기 신앙의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목사를 직업으로 생각하는 삯꾼들은 모든 말씀을 행함 쪽으로 설교를 한다는 것입니다.

행함 쪽으로 설교를 하면 아! 저 놈은 마귀 구나 하세요.

거짓 목사들은 오늘 본문을 가지고 여러분도 모세의 부모에 믿음을 본 받읍시다! 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본받고, 노아를 본받고, 요셉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고,,,,,

뭔가 본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모세의 부모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바로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지 모세의 부모가 아닙니다.

하지만 거짓 목사들은 모세의 부모에 초점을 맞추어서 인간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몰고 갑니다.

여러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겨 내세요 라고 합니다.

 

항상 거짓은 화려함으로 거짓을 가려요.

그러므로 거짓 신앙은 겉보기엔 엄청 믿음이 좋은 것 같이 위장을 해요.

그러나 속은 믿음이 없어요.

속에 텅텅 비어 있을수록 겉으로 있는 척 위장을 하는 겁니다.

 

진짜 속이 꽉 찬 사람은 위장하지 않아요.

나 속이 꽉 찼다! 라고 자랑하지 않아요.

원래 돈이 없는 놈이 돈 있는 척 하고, 무식한 놈이 유식한 척 하는 겁니다.

 

믿음이 없을수록 믿음! 믿음하고!

안 믿어질수록 믿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해요.

두려울수록 두려움을 쫓아내고자 난 안 두렵다! 난 안 두렵다! 라고 합니다.

두려움은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오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 내십시오! 라는 말은 내가 이겨내야 하는 것이지만, 믿음이 오면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말은 믿음이 두려움을 사라지게 해 준다는 말입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쫓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본능입니다.

두려움은 죄가 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죄를 지적하잖아요.

율법으로 죄가 지적당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 보려고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거짓 목사들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다 지켜주셨습니다! 라는 것이 안 믿어지기 때문에 율법이 주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교회에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인간이 지켜야 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아까 살펴보았지요.

율법은 살아 있는 놈에게 능력을 발휘하고 죽은 놈에겐 힘을 못 쓴다고,,

율법은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에겐 집요하게 일점일획도 버리지 말고 다 지키라고 몰아붙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살아 있는 교인들은 율법이 몰아치는 그 두려움에 벌벌 떱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저주를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너 말씀 안 지키면 죽어! 라고 협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지키면 지킬수록 자유하는 것이 아니고 더 얽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오면 모든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보여요.

이걸 사도요한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했어요.

 

요한일서 4장을 봅니다.

 

요일 4:17-18=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 안엔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그러니 온전한 사랑을 받은 성도는 두려움이 없어요.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신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두렵지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다른 말로 믿음입니다.

 

사랑은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서 작동을 합니다.

부부간에 살면서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를 믿지 못하면 불안해요.

이걸 의부증 또는 의처증이라고 해요.

 

의부증이나 의처증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못 믿어지니 항상 불안 한 겁니다.

곁에 있어도 이 인간이 지금 누구를 생각하고 있지! 라고 의심을 합니다.

그러니 본인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겠습니까?

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폭하는데 끝내는 폭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믿음이 없으니 자기 몸을 학대 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그 말씀들을 지켜 내려고 하니 학대하지 않고 베기겠어요.

못 버팁니다.

 

그러니 남들 다 자는 야심한 밤에 잠도 자지 못하고 교회 가서 철야하면서 기도해야 하고, 남들은 맛있게 밥을 먹는데도 금식한다고 몸을 학대 하는 겁니다.

이거라도 해야 조금 안심이 되지 이런 것을 안 하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나 믿음을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다 행하신 것으로 보이니 율법 앞에서도 안심하는 겁니다.

말씀을 가지고 공갈을 치는 거짓 목사들의 말에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가리느냐고 따집니다.

 

다른 교인들은 철야기도 나아라고 하면 군말 없이 예하고 나오는데, 믿음을 받은 성도는 도리어 성령 안에서 늘 기도하고 있는데 왜? 철야 기도를 해야 하는데요 라고 따집니다.

금식하라고 하면 다른 교인들은 목사가 시키는 대로 금식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는데 왜? 금식을 해야 합니까? 라고 따지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말을 하는 성도가 있다면 빨리 도려 내야해요.

가만 두었다가 다른 교인들에게 전염 되면 큰일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졌다고 몰아쳐서 교인들에게 어울리지 못하게 하고 출교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받은 성도는 모세의 부모처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거짓 목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목숨 걸고 싸운 것이 뭡니까?

율법 외에 다른 의(義) 이지요.

율법 외란 율법 말고 란 뜻입니다.

율법 말고 다른 의(義)란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의(義)입니다.

 

율법의 의(義)에다 예수를 믿는 의(義)를 플러스 시킨 것이 아니고 율법 말고 오직 믿음입니다.

12제자들이나 바울이 이 율법 외에 다른 의(義)인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다가 모두 그 당시 기득권층으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당하고 죽임 당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성령에 붙잡혀서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다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조차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스데반을 보세요.

죽어가면서 얼마나 행복해 했습니까?

 

얼마나 행복했으면 죽어가면서도 여유만만하게 자기를 죽이는 자들에게 용서한다고 말하고 죽겠어요.

뭐 이런 인간이 있습니까?

그런데 있어요.

믿음 받은 성도가 이런 인간들입니다.

 

여러분 제일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 뭐야 하면 때리는데 히죽거리는 것입니다.

때리면 아프다고 하거나 살려 달라고 해야 하는데 희죽거리면서 웃어요.

그러면 때리는 사람이 뚜껑이 열립니다.

어쭈구리!

네가 날 우습게 본다 이 말이지!

그래 죽어 봐라!

그럼 스데반 같은 사람은 고맙다! 친구야! 날 천당 보내 줘서!

 

교회사에 보면 로마의 황제 네로가 돌아버린 이유가 성도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콜로세움에 사자를 풀어 놓고 기독교인들을 잡아먹게 했는데 팔 다리가 잘려 나가는데도 찬송하고 있어요.

아니 죽어가면서 찬송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그게 어디 인간입니까?

 

이렇게 되면 성도들이 네로를 놀리고 있는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 버린 것입니다.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로마 사내에 불을 지르고 지랄을 떨다가 죽은 겁니다.

 

여러분 거짓 목사들이 공갈을 치거든 놀고 있네! 라고 하면서 웃으세요.

당신이 복음을 알어!

당신이 예수님 십자가 피를 알어! 라고 웃으세요.

 

예수님이 당신 같은 사람을 일컬어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 하였도다! 라고 했어! 라고 하세요.

그러면 십중팔구 게거품 물고서 돌아 버릴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처럼 두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구약시대 모세의 부모는 믿음에 붙잡혀서 모세를 지켰습니다.

믿음이 바로 왕의 명령도 우습게 여기게 했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믿음이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바라보게 합니다.

누가 이단이라고 하여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사수하게 됩니다.

성령이 십자기 피를 지키게 해 주십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외곬수 같이 십자가 피만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융통성도 없습니다.

타협도 안 합니다.

오로지 예수의 피 뿐입니다.

그러다 예수님과 같이 이단으로 몰려서 죽임 당합니다.

믿음이 이들로 하여금 타협하지 않게 하고 예수의 피만 증거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저와 여러분을 모세의 부모처럼 겁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대가 예수의 피만 증거하고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을 받은 성도입니다.

믿음이 여러분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붙잡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미리 겁 먹거나 두려워하지 마세요.

성령이 그때 그때 하실 말과 어찌해야 할지를 간섭해 주실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게 하는 그 믿음이 여러분에게 항상 머물러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우리를 지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믿음이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해 오심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까지 넉넉히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남은 삶을 우리를 마귀로부터 이겨주신 예수님의 피만 자랑하고 증거하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