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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13강.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밀어 넣는 믿음 (히 11:24-26)

by coroa 2022. 3. 25.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3강.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밀어 넣는 믿음 (히 11:24-26)

-.정낙원 목사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신앙의 근본은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주체가 누구냐의 본질에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는데 이는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혈과 육으로는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주는 것이지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나의 주시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믿어집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이는 나중에 생각해 보고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겠다는 사고의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고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은 인간의 의지 밖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은 인간이 믿고 싶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믿기 싫다고 해서 인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면 반드시 믿게 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해서!

“예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 예수를 믿는 주체가 자신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것을 자기가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전도하는 것을 보면 마음 문 열고 예수를 영접하세요! 라고 합니다.

마음만 열고 예수를 영접하면 당신도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를 영접 하세요! 라고 전도를 합니다.

C.C.C와 같은 전도단체에서 영접 기도를 시키는 것은 인본주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 유형은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전도 법입니다.

이건 마치 보험설계사가 좋은 보험에 들라고 권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마치 천국에 가기 위해서 좋은 보험에 가입해 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펴면 하나님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해 놓았다고 합니다.

도리어 이 백성이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는 아무나 믿을 수 없도록 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예수를 믿는 것은 성도가 결정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믿음이 성도로 하여금 예수를 믿도록 주관하고 있다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당신은 예수님이 믿어지십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당신은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믿어지십니까? 라는 말은 믿게 해 주는 분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믿게 해 주시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흔히들 성령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기 행위가 아니고 하나님의 행위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믿어지게 해 주시는 믿음이라야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보존이 됩니다.

성도가 믿음을 주관하면 성도의 조건에 의하여서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은 완료 상태가 아니고 미완료 상태로 남아 늘 자기가 관리를 해야 하는 것으로 남게 되고 맙니다.

믿음을 잘 관리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 잘못 관리한 사람은 지옥에 가야하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이런 믿음은 끝까지 가 보아야 천국에 가는지 지옥에 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얼마나 불안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이 바로 이 시대 많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믿음은 성도가 관리하는 것으로 가르칩니다.

말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 뚜껑을 열고 보면 믿음이라는 또 다른 행함을 믿음이라고 붙잡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여도 성도에게 행하여야 할 것을 강요하게 됩니다.

목사들이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니 이렇게 하십시오! 라는 식으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목사에게 어떻게 할까요? 를 묻거나 큐티를 하여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찾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지! 라는 것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합니다.

곧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갇히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이러고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에 대한 구원의 은혜에 풍성하심을 맛 볼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어우러져야할 신앙생활이 도리어 슬픔과 곤고와 짐스러움으로 남게 됩니다.

아들처럼 아버지와 사랑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종처럼 수고로움으로 한숨만 쉬게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판단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이 감사와 기쁨인가 아니면 수고와 슬픔인가를!

 

성경은 우리더러 무엇을 하라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라면 수고와 슬픔과 짐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구나! 를 알게 되면 감사와 기쁨과 쉼이 됩니다.

 

성경을 열면 창조 이야기로 운을 떼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는 말입니다.

창조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잖아요.

거기에 피조물이 애쓰고 노력하고 보탠 것이 없어요.

피조물은 다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박수만 치면 되요.

마치 어린아이들이 우리 아빠 최고! 라고 박수치듯이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셨다는 것은 피조물에게 알려 주고자 함입니다.

성도의 구원론으로 말하면 너희들이 이렇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겁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피조물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성경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서 인간 쪽에서 무엇인가를 하여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을 대하는 접근자체가 육적인 것으로서 잘못된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일을 하면 얼마나 하고 또 했다고 한들 그 일이 온전한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인간들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육에 눈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그런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악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고 합니다.

죽은 자라 함은 성도에겐 “독자적인 나” 라는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독자적인 나 가 없다는 말은 성도 단독자로서는 행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앙생활면에서 적용을 하면 내가 기도하고, 내가 전도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열심내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주께서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를 섬기는 모든 일은 내가 한 일이 아니고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은사라고 합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란? 믿음이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이런 일을 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 개인이 한 일이 아닌 겁니다.

 

이걸 베드로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했습니다.

 

벧전 4:9-11=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란 말은 성도가 하는 모든 일은 곧 예수님이 하셨다는 말입니다.

전 이걸 인형극으로 표현을 합니다.

인형 속에 손이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분명히 인형이 움직였지만 실제론 인형 속에 손이 인형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인형은 손이 움직일 때만 액션이 나옵니다.

손이 없으면 인형은 죽은 겁니다.

인형의 살아 움직이는 행동은 안에 있는 손에 의하여서입니다.

그러므로 인형의 움직임은 모두가 손의 움직임인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식으로 말하면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를 한번 들어 봅시다.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20절에서 자신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은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옛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사울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을 지켜야 할 사람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킬 사람이 죽었으니 율법은 그 사람에겐 죽은 문서가 되는 겁니다.

마치 죽은 놈에게 법을 들이 댈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19절에서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킬 존재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난 율법과 상관없는 자란 뜻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은 사람에겐 율법 또한 죽은 것입니다.

율법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율법이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명령합니다.

 

바울은 과거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에 대하여 시퍼렇게 살아서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자기는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함께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만나기 전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바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개명(改名)을 하였다는 것은 다른 인간이란 말입니다.

율법은 율법 아래 있던 사울에게는 추상같이 닦달 할 수가 있지만,

믿음 안에 있는 바울에겐 닦달할 수가 없어요.

 

바울은 율법의 영역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영역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안은 율법과 상관없는 영역입니다.

예수 안은 율법이 침노 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입니다.

 

예수 안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율법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너! 왜? 안식일 안 지키고 십일조 안했어! 라는 게 없습니다.

이런 것 안했다고 시비 걸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건 모두다 예수님이 하셨어! 라고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다 하셨다고 합니다.

다 예수님이 했으니까! 감사하고 살면 돼! 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야호! 신난다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내 대신 다 하셨다고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어리석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다 하셨는데 그럼 이제부터 놀면 되겠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안합니다.

교회에 오지도 않고, 성경도 안 보고, 기도도 안하고, 봉사도 안 하고, 헌금도 안하고, 이것도 안 하고 저것도 안하고 만고 땡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살라고 십자가에 죽은 줄 알아요.

 

그런데 말이죠?

이게 얼마나 웃기는 짬뽕인가 하면 예수님이 다 하셨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겁니다.

성도라고 한다면 난 없고 이젠 예수 안에 자기가 있어야 하는 자인데도 예수 안에 자기는 없고 자기 안에 자기만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몸 편한 대로 사는 겁니다.

 

성도를 일컬어 예수님 것이라고 하잖아요.

예수님 것이라는 말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자기 것이지 어찌 예수님 것입니까?

예수님의 것이라면 예수님의 필요에 의하여서 사용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예수님께서 성도를 자기 핏 값으로 사 놓고서 성도 마음대로 살라고 하겠습니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 올씨다.

아니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줄 아세요?

예수님은 우리 마음대로 살라고 십자가에 죽지 않았어요.

꿈 깨세요.

그건 우리의 착각입니다.

 

성도에겐 자기 것이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을 예수님에게 차압당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선 성도를 가지고 자기 몸을 세우는 일을 하십니다.

자기 몸을 세우는데 필요하게 사용하신단 말입니다.

 

주님께서 필요하면 재물도 사용하고! 시간도 사용하고! 건강도 사용합니다.

열심히 돈 버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알아서 사용하십니다.

열심히 건강 만들어 놓으세요.

예수님이 필요하면 사용하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전토나 자식이나 아비나 어미나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지요.

이는 예수님의 제자는 모든 인생이 예수님께 귀속 당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도 내 부모가 아니고,

자식도 내 자식이 아니고,

전토도 내 전토가 아니고,

내 자신 조차도 내 것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선 안식일만 지키면 되었는데 예수 안에선 모든 날이 안식일입니다.

율법 아래선 십일조와 약간의 헌물만 내면 되었는데 예수 안에선 몽땅 예수님 것입니다.

성도를 일컬어 종이라고 하는 것은 종의 모든 것은 주인의 것입니다.

종에겐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비록 자기 자식일지라도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 것들이 버젓이 있어요.

돈도 내 돈이고,

자식도 내 자식이고,

전토도 내 전토입니다.

 

시간도 내 시간이고,

날도 내 날입니다.

나도 내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하나님께서 우발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켜서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이 하나님에 것인지 아니면 내 것인지를 확인을 합니다.

 

마 25장에 보면 양과 염소 비유가 나오지요.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난 예수다 그런 모습으로 계시지 않고 아주 볼품없는 작은 자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히고 매 맞고 하는 모습으로 있어요.

이런 자를 일컬어 지극히 작은 형제라고 했어요.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것은 그 당시 복음을 전하는 순회 전도자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니 가진 것이 없고 굶고 헐벗고 옥에 갇히며 살았어요.

그런데 양과 같은 성도들에겐 그들이 예수님으로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것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돌본 겁니다.

 

이걸 이 시대로 표현하면 복음 증거하는 자들을 돕는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데 있어 교회가 어려우면 십일조가 아니라 십에 십을 다 할 수도 있어요.

신약에서 십일조라고 말하지 않고 연보라고 하는 것은 연보는 정해진 액수가 없어요.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또 신약에선 안식일이라 하지 않고 주의 날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날이 주님 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 안식일입니다.

일곱째 날은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중에서 일곱째 날입니다.

일곱이란 말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 둘, 셋, 넷,,,,,이라는 숫자는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세계에서만 사용이 되어지는 말입니다.

역사란? 수평적으로 쭉 늘어진 선과 같이 시작과 끝이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합니다.

이는 역사에 속한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역사 밖 일곱째 날에 속한 분입니다.

 

일곱째 날이란? 묵시세계를 말합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지요.

그리곤 여호와의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속한 날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몇째 날이더라 라고 하지 않고 그냥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 겁니다.

더 이상 날이 없어요.

이걸 영원세계 또는 묵시세계 또는 하늘나라 라고 합니다.

 

예수 안을 영이라고도 하고 또는 천국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묵시세계라고 합니다.

그럼 성도는 예수 안에 있는 자이므로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라는 의미가 없어요.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이라는 날에 의미가 없어요.

모든 날이 곧 주의 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주일날만 교회 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올 수도 있어야 해요.

여러분 초대교회 성령이 임하고 나니 매일 모였지요.

그리고 자기 재산을 다 교회에 내어 놓지요.

성령이 임하고 보니 자기라는 존재는 없고 예수 안에서 자기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덮치니 육에서 영으로 변환이 일어나니 눈에 보이는게 없었어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겁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니 이 땅은 한줌 밖에 안 되는 작은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보였어요.

그래서 재산도 시간도 몸도 마음도 몽땅 예수님 복음을 위해 바친 겁니다.

 

그 당시엔 겁나는게 없었습니다.

죽는 것도 두렵지 않았어요.

그게 바로 묵시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라서 그런 겁니다.

물론 나중에 제정신 돌아오고 보니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잠간 맛보기로 보여준 겁니다.

 

이런 일들이 성도가 살아가면서 간헐적으로 우발적으로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발적으로 일으키십니다.

마 25장에 양들이 이런 우발적 사건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 성도들에게 그래요.

평상시엔 교회에 관심이 없었는데 갑자기 교회에 관심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우발적으로 교회를 돌아보라고 일으킨 사건이니 그 때는 외면치 말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성도나 목사가 굶는다고 생각되면 도우세요.

어느 교회이냐를 따지지 말고 어느 교회 교인이나 목사라도 그 누가 생각나거들랑 아! 하나님께서 도우라고 생각나게 하신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도우세요.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만든 거니까요.

 

솔직히 우리가 살면서 누구를 생각한다는 것이 마음먹은 대로 나지 않잖아요.

생각이란 하나님께서 나게 해 주어야지 내가 생각해야지 생각해야지 해도 안 됩니다.

기도하다가 갑자기 어떤 목사님이 생각나거든 전화라도 하던가 아니면 문자라도 보내세요.

더 좋은 것은 용돈이라도 보내드리면 더 좋겠지요.

 

그리고 교회에 갔는데 문득 꽃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나면 사다가 놓으세요.

누구 시키지 말고 그런 생각이 나는 사람이 하세요.

교회가 더럽다 그러면 청소 하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청소 하라고 더러운 것이 보이게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 내게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면 주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하세요.

 

그러니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겐 자기 마음대로 사는게 없어요.

늘 성령께서 간섭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서 뭔가 움직이게 합니다.

그게 헌금하는 것일 수도 있고, 봉사하는 일일 수도 있고, 전도하는 일일 수도 있어요.

신앙생활엔 정해진 틀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면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믿음으로 때로는 노는 것도 주의 일 일수가 있고, 믿음으로 때로는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주의 일일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도는 자기 인생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계세요.

이처럼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난 없는 자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인물들이 모두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신약에선 12제자를 비롯한 사도 바울이 그랬어요.

 

무슨 말하다가 여기까지 왔는가요?

그렇지요.

율법 아래 죽었다는 것을 말하다가 여기까지 왔지요.

 

다시 돌아가서 성도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에 응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율법에 요구에 응할 필요는 없는데 율법의 간섭은 늘 받아야 할 이유는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어려운 말인데 이러면 오늘 본문이 굉장히 길어지는데 어찌하나?

잠깐만 살펴봅시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율법으로 정죄하진 않아요.

그런데 율법으로 하는 일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으로 넌 이런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알다시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하잖아요.

성도는 죄에서 구원받은 자입니다.

그럼 죄가 뭔 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죄사함 받았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 아닙니까.

 

성도에게 있어 율법은 은혜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율법 폐기론도 아니고 율법 무용론도 아닙니다.

율법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일점일획도 떨어질 수가 없어요.

죄인이 있는 한 율법은 있어야 해요.

 

그러니 성도는 율법을 통하여서 아! 내가 이런 죄인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주셨구나! 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 라고 깨닫게 하겠지요.

이 깨달음이 바울처럼 복음에 빚진 자가 되어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 성도는 모든 말씀으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하여금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이 되겠지요.

율법을 지키기 위한 지킴이 아니고, 나의 나 된 것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보아야 하는 겁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기 죄를 깊이 아는 것만큼 하나님의 은혜는 깊어지게 됩니다.

이 은혜가 나로 하여금 봉사하게 하고, 헌금하게 하고, 전도하게 하고,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에게 이것해라 저것해라 강요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강요는 이미 율법적 행위가 됩니다.

성도가 행하는 봉사와 헌신과 헌금과 형제 사랑은 사랑의 역사이고, 믿음의 수고이지, 자기 행함이 아닙니다.

 

사랑은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누가 교회를 돌보고 형제를 사랑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면 아! 주의 은혜가 저 사람을 장악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감사하세요.

그 사람을 칭찬하지 말고!

(그래도 칭찬해 주세요. 인간이기 때문에 알아주면 기분이 좋잖아요.)

 

성도는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는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율법대로 살고자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면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고 하면서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율법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율법 아래 살아 있는 사람을 성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여전히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갈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보세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하잖아요.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은 구원 받지 못한 자란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분명히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은 율법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자입니다.

 

또 반복하는 셈이 되는데!

그래도 합시다.

 

믿음으로 사는 자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란 말입니다.

내 생명으로 살면 하나님 말씀을 늘 지켜야 하는데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내가 지킬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예수님이 지킨 것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성도란?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죽을 때 함께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 하실 때 함께 부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옛 사람이 아니고 새 사람인 것입니다.

 

옛 사람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이 살아서 항상 이것해라 저것해라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새 사람은 율법 밖에 있기 때문에 요구할 것이 없습니다.

성도는 은혜라는 동네에 사는 자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간섭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의 요구에 따라다닌다면 그 사람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자신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 대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말이 어려운가요?

쉽게 말해서 마귀가 너 왜? 말씀대로 안살아? 라고 하면,

예수님이 다 했어! 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산다는 말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목사가 당신은 왜? 하나님 말씀대로 안삽니까? 라고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잖아요! 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이렇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목사는 율법 아래 있는 자로서 저주 아래 있는 것이 되고, 그 목사에게 예수님이 다 하셨잖아요! 라고 하는 성도는 믿음 아래 있는 구원 받은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인간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믿어지게 해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성도는 이런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고 술술 믿어집니다.

이것을 믿어야지! 라고 하면 안 됩니다.

믿어야지! 라는 것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으니 자기가 믿겠다고 하는 자기 의지입니다.

 

성도는 “믿어야지!” 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 입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가 아니라 “믿어지는 것으로 사는 것” 입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전혀 다른 말입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느냐!

믿음이 성도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느냐?

어느 말이 맞습니까?

한번 답을 해 보세요.

 

1번) 성도가 믿음으로 산다면 성도가 주체가 되고 믿음은 성도에게 종속이 됩니다.

이러면 성도가 믿음을 주관하는 주체가 되지요.

 

2번) 믿음이 성도로 하나님 자녀로 살게 한다면 성도가 믿음에 종속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이 성도를 주관하는 주체가 됩니다.

 

답은 2번) 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을 가지고 이 사람들을 본받자고 한다거나 이들처럼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소경이고 잘못된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본받자고 하는 것은 곧 율법 아래 있다는 증거입니다.

 

서두에 왜? 장황하게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이 전부 인간 쪽에서 믿습니다! 라고 자기 의지로 쫓아간 것이 아니고 믿음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믿든 믿지 않든 개의치 않고 믿음이 기관차처럼 인간을 이리저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끌고 다닌 것입니다.

 

오늘본문도 믿음이 모세를 이끌고 갔음을 증거 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산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또한 우리더러 이렇게 살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모세를 이렇게 살게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본문 내용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출애굽기를 살펴봅시다.

 

출 2:11-15=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본문을 잘 보세요.

모세가 하루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하는 노역장에 순찰을 나갔습니다.

순찰 도중에 애굽 사람과 히브리인 사이에 시비가 붙어서 히브리인이 애굽인에게 얻어맞자 이를 지켜보던 모세가 격분하여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똑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엔 히브리인들 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너희들은 같은 동족인데 왜 싸우느냐 라고 말리자 어저께 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을 보고 자기들도 죽일까봐서 바락 바락 덤빕니다.

 

결국 바로가 모세가 애굽인을 쳐 죽인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가 모세를 죽이고자 찾으니 모세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습니다.

출애굽기의 내용을 보면 모세가 스스로 바로 공주의 아들 됨을 포기한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를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바로 공주의 아들을 버리게 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모세가 누리고 있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할 성도가 바로 공주의 아들이 되어서 호의호식하는 것을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그 지위를 박탈시킨 것입니다.

아주 무시무시한 말씀이지요.

 

지금 히브리서가 그러잖아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에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기게 했다고 하잖아요.

바로공주의 왕자라는 것과 그리스도의 고난과 맞 바꿔치기 한 겁니다.

누가?

믿음이(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제가 늘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아픔으로 다가와요.

마치 고슴도치 어미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꼭 껴안는 것 같아요.

수염이 많은 아빠가 자식이 귀엽다고 볼에 뽀뽀를 하면 아이는 따갑다고 아빠 싫어! 아빠 미워! 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아니! 어느 아버지가 자식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때 아버지가 영광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버지가 영광을 받는 일인가요?

 

알다시피 예수님은 이 땅에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려고 오셨어요.

애초부터 자기백성들을 대신해서 죽으려고 보내심을 받고 오셨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행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빨리 죽게 하는 것이 사랑이 되지요.

죽어야 할 자는 죽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죽을 자는 살려두는 것은 저주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70년을 살게 만든 것이 사랑이라고!

지금 모세를 애굽에 왕자에 지위를 박탈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물론 모세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 들이고는 여러분 자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사랑은 인간의 생각과 역설적으로 다가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계세요.

 

우린 이런 하나님을 싫어해요.

우린 늘 낯선 하나님과 조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감격스럽지가 않고 늘 불평과 원망인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인간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천국으로 인도해 들이신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하나님 사랑입니다.

 

모세에게 있어 귀로만 듣던 하나님이 자기 삶에 개입한 것입니다.

개입을 하는데 이상하게 개입을 하셨습니다.

돕는 분이 아니라 망하게 하는 분으로 개입한 것입니다.

 

어떻게 망하게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오늘 본문으로 살펴봅시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를 망하게 하는 주체가 바로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를 "믿음이" 라고 보세요.

그리고 “믿음이” 를 “하나님이” 라고 해 보세요.

그러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에 왕자의 신분에서 쫓겨나게 하셨다는 말이 되지요.

아주 고약한 하나님이지요.

이런 하나님을 지금 저와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섬기고 있어요.

 

그러니 육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고 하면 섬길 자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마귀는 아주 자상하고 복 주는 가짜 하나님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준 겁니다.

이름하여 우상입니다.

마귀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을 지금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어요.

교인들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목사에게 복채를 주고 보챕니다.

아주 우습지요.

그래요.

이 시대 교회를 보면 참 재미있어요.

 

퀴즈한번 낼까요?

 

1번) 모세가 애굽에 왕자의 신분을 버린 것은 모세가 믿음이 좋아서이다.

2번) 모세는 애굽에 왕자를 버리기 싫었는데 하나님이 강제로 쫓아냈다.

 

정답은 2번이지요.

하나님이 쫓아 낸 겁니다.

 

그럼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면 어떤 설교가 되겠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모세를 애굽에 왕자의 자리에서 쫓아내게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라면 모세처럼 망하게 하여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성도가 그 어떤 환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으니 감사하고 사세요! 라고 해아겠지요.

 

그렇지 않고 만약 여러분 모세를 본받읍시다.

모세는 하나님을 위해서 애굽에 왕자의 자리도 과감히 버렸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물들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선교 하는데 내어 놓으십시오.

 

자 여기 모세를 보십시요.

모세는 하나님께 장차 받을 상을 바라보고 현재 가진 것을 모두 버렸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정녕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모세와 같은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나를 바치는 것입니다! 라고 설교를 하고 있잖아요.

교인들도 이런 설교를 들어야 은혜 받았다고 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은 내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라고 설교를 한다면 그 놈은 거짓 목사입니다.

왜? 거짓 목사이고 마귀의 종입니까?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르치지 않고 인간이 해야 할 것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좌우지간 어떤 설교를 듣더라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하면 옳은 설교가 되고,

인간이 뭔가 하여야 한다는 식으로 끌고 가면 나쁜 설교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시각으로 지금 기독교 TV에서 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분별해서 보세요.

그럼 대다수가 엉터리임으로 밝혀질 곳입니다.

기독교 방송이 아니고 불교 방송이에요.

 

거짓 목사는 마귀의 종이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이런 놈은 교회에서 내어 쫓아야 합니다.

이런 자는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무슨 말씀이든지 인간이 지켜야 할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만약 모세 스스로가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버린 것이라면 여러분 모세를 본받으세요! 라는 말이 성립이 됩니다.

그러나 모세의 의지와 상관없이 믿음이 끌고 간 것이라면 모세를 본받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든지 믿음이 이끌면 모세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주님의 손에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여러분 뜻대로 안 살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 주어(主語)가 되어서 모세를 바로의 공주에 아들 됨을 포기하고 하나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을 좋게 여기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느 인간이 고난을 좋아하겠습니까?

고난 좋아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여러분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목동 노릇할 때 기쁨으로 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모세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를 갈고 살았습니다.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을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남자 아이들이 다 죽을 때 믿음으로 살려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어서 천국 가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늘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면서 궁시렁 거리면서 따라갑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궁시렁 거리면서 질질 끌려갑니다.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여기까지 순순히 잘 따라 왔는지를 살펴보세요.

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간섭했기 때문에 여기에 앉아 이런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았으면 전부 세상과 간음하고 있을 겁니다.

부자처럼 산해진미 먹어가면서 불구덩이가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셔서 사업에 실패하고, 병들고, 직장에서 쫓겨나서 마치 거지 나사로처럼 되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겁니다.

누가 짜장면 한 그릇 사 줘도 천사가 사준 것이라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라고 먹고 사는 겁니다.

 

저 역시도 여러분 한 사람이 교회 나오니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만약 제 뜻대로 목회성공을 하여서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면 여러분처럼 말 안 듣고 뺀질거리는 인간들은 상종하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를 생각해 보세요.

이것도 신앙생활이라고 하고 있는지를?

부끄러운 줄 아세요.

 

입은 살아가지고 뭐라고 하면 한 마디도 안지고 따박 따박 대꾸하잖아요.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미꾸라지 마냥 요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버젓이 예수 믿는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 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맞아요.

대단해요.

그건 모두가 믿음이 미꾸라지 같은 저와 여러분을 끌고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모세와 저와 여러분을 한번 비교해 봅시다.

얼마나 미꾸라지 같은 인간인지 살펴봅시다.

조금 전에 말했지만 모세는 하나님을 안 믿었어요.

이는 모세의 일생을 보면 잘 나타나 있어요.

 

그럼 성경을 봅시다.

 

출 3:7-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목동 생활 한지 40년 만에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빼내 오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내가 미쳤습니까?

그 놈들을 빼네? 오게!

아니! 내가 왜? 지금 와서 그놈들을 빼내러 가야 하는데요!

난 그 놈들 생각하면 지금도 이를 갈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아니! 하나님도 알잖아요.

40년 전에 내가 애굽에 왕자로 있을 때 지네들을 구출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애굽 놈을 쳐 죽였잖아요.

그런데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걸 바로에게 일러 바쳐요.

 

그래서 날 쫓겨나게 만들어요.

그 때 그 놈들이 바로 왕에게 고자질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이스라엘을 구출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 마음도 모르고 그걸 바로에게 일러바쳐서 나로 하여금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난 못갑니다.

내가 지금 바로에게 맞아 죽을라고? 갑니까?

정신 나갔어요.

안 갑니다.

아니 못갑니다! 라고 대 드는 겁니다.

하나님께 노골적으로 안 간다고 말을 하지는 않지만 안 가려고 온갖 핑계를 대는게 그겁니다.

 

어떤 핑계를 대는지 4장을 봅시다.

 

출 4:1-17=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6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흰지라 10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마음에 기뻐할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 입에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라고 하니 그 놈들이 하나님이 누군데 라고 하면 뭐라고 합니까?

그 놈들이 내 말을 믿을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안 믿습니다!

 

이건 기적을 보여 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을 간파하고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과 손이 문둥병이 걸렸다가 낫는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자 이번엔 말을 할 줄 몰라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잘 나지도 못했으니 잘난 놈 보내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지게 작대기를 들고 이놈에 새끼! 라고 후려칩니다.

 

야! 이놈아!

네 입은 누가 만들고,

네 눈은 누가 만들고,

네 귀는 누가 만들었느냐?

그건 다 내가 만든 게 아니냐?

내가 말하게 해 주면 될 것이 아니냐?

정 의심이 가면 말 잘하는 네 형 아론을 부쳐 주면 될 것 아니냐! 라고 화를 냅니다.

그래도 못 믿겠으면 지팡이 보고 날 믿어라!

 

우리 생각엔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라고 하면 예! 하고 간 줄 생각하지요.

그럴 것 같으면 믿음이 이끌고 자시고 할 것 없어요.

믿음이 이끌었다는 것은 안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믿음이 간섭하시는 것은 안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도를 소 코뚜레 하듯 해서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신앙이 요만큼이라도 와 있는 겁니다.

 

그러니 모세를 본받읍시다! 라고 하는 설교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속에 본받을 만한 인물이 없어요.

본받을 만한 인물이라면 굳이 믿음이 그들을 끌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말을 해도 안 들으니 믿음이 강권적으로 밀어붙인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안 가려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왜? 이런 항의를 하느냐 하면 과거를 잊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40년 후에 찾아와서 그들을 구출해 내라고 합니다.

 

어쩌면 모세의 생각 속엔 광야 40년 동안 목동 노릇하면서 애굽은 다 잊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까마득하게 잊었던 기억하기 싫은 그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동족으로부터 배신당한 그 기억을 말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자 한 것은 과거 애굽의 왕자로서의 모세가 아닙니다.

지금은 누가 보아도 볼품없는 목동입니다.

그것도 나이 80이 된 노인네입니다.

 

모세의 생각엔 젊었을 때,

애굽의 왕자 신분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이 일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구출해 내고 싶어도 구출해 낼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리 핑계대고 저리 핑계대서 꽁무니를 빼고 있는 겁니다.

 

모세의 항변 속에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속내가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의 왕자로서 힘이 있어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할 때는 하지 못하게 하다가,

이제 아무런 힘이 없어 할 수 없을 때 찾아와서 하라는 것은 무슨 심보냐 이 말입니다.

젊고 권세 있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거지같이 되고 늙어서 시키는 저의가 무엇이냐 이 말입니다.

 

모세는 아직까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모세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방법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하지 못할 때 나타난 겁니다.

 

하나님께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떨기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나무입니다.

떨기나무란? 가시 넝쿨나무를 말해요.

키가 큰 나무가 아니고 넝쿨로 수북히 쌓여 있어요.

가시넝쿨은 화목조차으로도 가시 때문에 사용하지 않아요.

그냥 광야 메마른 땅에 살다가 죽어가는 효용가치가 전무한 나무입니다.

 

가시떨기 나무는 죄인을 상징해요.

죄인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입니다.

맛 잃은 소금은 거름에도 쓰지 못하고 사람들 발에 밝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은 거지 발가락 사이에 때만도 못한 존재들입니다.

 

모세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런 존재란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떨기나무 같은 자에게 불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불입니다.

 

분명히 가시떨기 나무는 연소가 되어야 함에도 타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렇게 사용하겠다고 하는 계시사적인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보잘 것 없는 늙은 목동인 모세를 불쏘시개로 사용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다 늙은 노인네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 라는 것은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인간들은 능력이 사람의 힘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상식은 젊음을 힘으로 상징하고 늙음을 힘없음을 상징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나이 80세인 늙은 촌로(村老)가 바로 왕 앞에 나섰습니다.

바로 왕에게 하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 놓으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웃기는 그림입니까?

이건 말이 안돼요.

 

뭔가 대등한 입장에 사람이 와서 내 백성 내어 놓으시오! 라고 하면 듣는 바로 왕도 이해가 가겠는데 다 늙은 영감이 지팡이 하나 달랑 들고 와서 여보시오! 내 백성들을 내어 놓으시오!

얼른 내어 놓으시오! 라고 한다면 얼마나 웃기느냐 이 말입니다.

이게 무슨 코미디입니까?

지금 모세가 바로 왕 앞에서 하는 일이 개그 콘서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모세가 하는 말이 난 하나님 이름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건 더 웃기는 말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이 없으면 이런 인간을 보낸단 말입니까?

골리앗 같은 장수를 보낸다면 좀 고려해 보겠지만 이건 거지깽깽이 같은 영감탱이를 사자(使者)라고 보내서 자기 백성들을 구출해 내겠다고 합니다.

 

싸움도 격이 맞아야 하는 것이지 이건 격이 안 맞아요.

그러니 바로가 모세에게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관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겨 쳐 먹었는데 너 같은 인간을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라고 보냈느냐?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상판대기 좀 보자고 망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이 제 정신이냐!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너 같은 거지깽깽이를 사자로 보냈지 그 말입니다.

바로나 모세나 하나님을 모르기는 매 일반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과 인간이 일하고자 하는 방법은 다릅니다.

인간들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가 없도록 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생각은 죄로 인하여 틀렸다는 것을 고발하기 위해서 역설적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강한 자를 들어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를 들어서 일을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봅시다.

 

고전 1:25-29=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천하고 약한 자들을 들어서 쓴다고 하지요.

그 이유는 사람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는 하나님 앞에선 어리석음 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아무리 출중한 지혜라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선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선 무가치한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벌 없는 어부들을 제자로 삼은 것은 지식 있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의 지혜의 어리석음을 공격하기 위함입니다.

 

복음은 성령의 지혜로만 이해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아는 데에는 세상 학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많이 배웠다고 복음을 잘 알고 못 배웠다고 복음을 덜 알고 하지 않습니다.

 

신학박사 교수라고 해서 복음을 더 알고!

일학무식한 할머니라고 해서 복음을 모른다고 무시 할 수가 없는 것은 복음은 성령의 지혜로만 알아지기 때문입니다.

신학박사 교수라도 성령이 깨닫게 해주 않으면 유대인들의 지혜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배우지 못한 할머니라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면 바울처럼 복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가치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하는 것은 틀린 것이 됩니다.

즉 성공해야 하나님이 영광 받는다는 말은 다 거짓입니다.

그것은 모두 마귀의 말입니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고 실업자라고 해서 영광 가리는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대통령이라도 하나님 앞에선 죄인이고 실업자도 죄인입니다.

죄인은 등급이 없어요.

모두가 동일한 저주를 품고 사는 죄인일 뿐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부흥에도 동일합니다.

교회가 부흥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가 부흥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누가 된다는 논리 역시 애굽식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에 방법으로 일하지 못하게 하려고 광야로 몰아낸 것입니다.

 

모세가 만약 40년 전 애굽에 왕자의 신분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였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능력으로 구출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하나님으로 섬길 겁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마는 우상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힘을 빼앗고자 광야로 몰아낸 것입니다.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애굽적 사고를 뽑아내려고 광야로 몰아 낸 것입니다.

40년 동안 바로의 왕궁에서 배운 애굽에 사고방식을 광야 40년 동안 빼내고자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힘으로 빼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빼 낸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 권세나 명예로 하나님 일을 하겠다는 것은 애굽적 사고방식이며 비 신앙적인 생각입니다.

성도는 인간적 힘이 하나님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돕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일을 방해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류역사 속에 기독교가 흥왕 할 때 가장 타락하였던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온 유럽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를 중세 암흑시대라고 하였겠습니까?

이 시대 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힘을 소유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하여야 하는데 도리어 세상을 다스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악을 고발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세상 속에 푹 빠져서 함께 어울리고 있어요.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힘을 가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점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에게 세상의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이는 힘을 의지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돈을 믿습니다.

교회들이 돈이 없어서 하나님 일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갖가지 이름의 헌금으로 돈을 뜯어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돈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여서 주인이라고 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주인도 돈입니다.

하나님이 돈에게 밀려 난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과거 모세를 광야로 몰아내서 힘을 빼게 하셨듯이 자기백성들의 힘을 빼는 일을 하시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에 모세를 간섭해서 애굽에 왕자에서 쫓겨나게 하셨듯이,

신약엔 성도를 간섭해서 의지하고 믿고자 하는 힘을 빼앗아 가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세상 적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되고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했다가 혼이 났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봅시다.

 

고후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바울이 자기 병을 좀 고쳐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화를 냅니다.

 

바울의 건강한 몸조차도 자랑거리가 될까봐서 하나님께선 바울의 몸에 병을 주었다고 합니다.

아니! 복음 전하는 자가 건강한 몸으로 전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걸림이 된다고 몸에 병을 주셨어요.

 

병이 몸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된다고 합니다.

이는 곧 인간은 강해지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병을 안 고쳐 준다고 합니다.

아프게 해 놓고선 하나님이 관리를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인간은 조금이라도 믿을 구석이 있으면 하나님을 안 찾는 존재들입니다.

여러분도 문제없으면 기도 안 하잖아요.

무슨 문제가 생겨야 기도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들이 의지하고 믿을 만한 것들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모세와 같이 고난의 길로 몰아가십니다.

모세 스스로가 고난의 길을 가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고난의 길로 내 몹니다.

 

그런데 고난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영광인 거예요.

죽은 줄 알았는데 눈 떠 보니 천국인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가 보니 고난이 천국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게 되면 비로서 고난이 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가 한 일을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라고 하고 이를 큰 재물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재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재물이란? 천국에서의 영생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고난이 아니고 영광인 거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어요.

 

고난은 예수님의 흔적을 몸에 많이 담고 새겨 넣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잘사는 것이 보화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 보화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에 흔적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발생시키는 겁니다.

우리가 뜻한바 대로 살아지지 않게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면 우리 역시 모세처럼 하나님을 믿네! 안 믿네! 라고 성질을 부립니다.

교회 다니네! 마네! 합니다.

 

결국엔 다시 붙잡혀 와서 못 다한 공부를 시킵니다.

그동안 몰랐던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담김 엄청난 비밀들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왜? 그리스도의 고난이 애굽에 보화보다 더 큰 축복인줄을 알도록 가르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세상 영광보다 더 귀한 것인 줄 알아가게 하십니다.

 

십자가 넘어서 애굽을 바라보면 애굽은 멸망 받을 곳이라는 것이 보여요.

십자가 넘어서 바라보면 애굽은 불타버릴 곳입니다.

십자가 안에만 불타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서 애굽에 보화는 배설물이라는 것이 보여집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다 마귀가 준 것임도 보여집니다.

 

십자가에서 보면 애굽에 보화가 영생 앞에선 무가치함을 압니다.

애굽에 보화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믿음이 영생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이것이 깨달아 질 때 오직 십자가 만! 오직 십자가 만! 이라고 외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는 오직 십자가만 전하기로 작정 했다고 한 겁니다.

율법으로 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서만 의가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일평생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 증거하다가 죽은 겁니다.

십자기 이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어요.

율법 아래서 얻은 학벌도 가문도 명예도 지식도 열심도 다 버렸어요.

그래서 스스로 난 이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전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간섭하셨듯이 지금도 성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피만이 진정한 보화 라는 것을 깨닫도록 일을 쉬지 않고 벌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는 분이 아닙니다.

차라리 포기하면 편한데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니 신앙생활이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엔 목회 성공보다 예수님의 피가 더 귀하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십자가 피를 아는데 까지 엄청난 수업료를 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기까지 수많은 세월이 걸렸습니다.

십자가 속에 담긴 엄청난 축복들을 지금도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도 계속 십자가 속에 담긴 비밀을 알아가는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이 수업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 됩니다.

우리 육신은 십자가 보다 애굽에 보화에 눈길을 두고자 하는 본성이 버려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부딪치고 터지면서 참 복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엔 하나님 뜻을 깨닫는 것이 더뎠습니다.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면 항상 지나고 난 다음에 뒷북치듯이 깨닫습니다.

사건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아졌어요.

아! 하나님이 그랬구나! 를 알게 되었어요.

아! 하나님이 그래서 그랬구나!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이제는 터지기 전에 아! 뭔가 또 터지겠구나! 감을 잡아요.

 

복음을 아는 사람이 복음에 반하는 길로 나아가는데도 문제가 없으면 이상합니다.

저건 아닌데!

저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그러면 틀림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건이 터져요.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데도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버리운 자식들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식에게 징계를 한다고 했어요.

인간은 잘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뜻대로 살 수가 없어요.

그러니 여러분 뜻대로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마세요.

그건 잘되는 것이 아니라 떨어뜨리기 위해서 높이 올리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 안가서 하나님이 심방을 오실 겁니다.

그러면 엄청난 아픔을 당할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커가면서 병치레하면서 크듯이 성도의 신앙도 매를 맞아 가면서 커 갑니다.

커 간다는 말은 하나님을 많이 알아 간다는 뜻입니다.

 

많이 맞으면서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와 그 속에 담긴 풍성한 은혜들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은 복이고 영광인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 손에 붙잡힌 종들마다 말로는 형언할 수없는 수 많은 고난들을 당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깊이 깊이 알아가기 위한 사랑의 교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사람들 치고 인간적으로 팔자 피게 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미리 첨벙 뛰어 들어서 먼저 보여주며 살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에 왕자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양을 친 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맛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맛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쓴 잔을 맛보게 하십니다.

 

십자가는 구경거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관념이 아니고 현실입니다.

십자가는 동화가 아니고 사실입니다.

성도의 신앙도 지식이 아니고 삶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이 되게 하시려고 믿음이 예수님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두 마리 젓 나는 암소와 같이 새끼를 버려두고 정이 그리워 울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서도 종국에는 법궤가 제 자리로 찾아가는 곳까지 쉼 없이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 겁니다.

종국엔 법궤가 스스로 자리를 잡으면 자신은 제물로 바쳐집니다.

이게 성도의 운명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질 때 비로서 성도는 쉼을 얻습니다.

아! 여기가 바로 내가 쉴 곳이었는데 난 너무 돌아서 왔구나! 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배기 십자가 위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난 여태껏 엉뚱한 애굽에서 주님을 찾았구나! 를 알게 됩니다.

 

생명의 길은 십자가 안에 있는데 난 이제껏 애굽에 왕궁에서 찾았구나! 를 알게 됩니다.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마치 어린아이가 구구단 하나 하나 외워 가듯 하면서 알아 갑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종국엔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나님 알아서 하라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법궤를 매고 벧세메스로 올라간 암소처럼 세상 수고를 그치게 하고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지고 고생하였다고 하시면서 주님의 안식으로 초대하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고 보니 만사가 다 감사한 거예요.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육신은 그리 만만치가 않아요.

마치 두더지 게임 하듯이 틈만 나면 고개를 치밀어요.

애굽에 보화를 쫓아가라고 해요.

그러면 믿음은 또 우리를 십자가에 끌고가 죽입니다.

이게 일평생 반복합니다.

 

신앙생활은 일평생 육신의 소욕과 싸워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나이가 하루아침에 먹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도 하루아침에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겪었던 인고의 세월만큼이나 긴긴 세월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그 세월이 사십년이든 오십년이든 반드시 모세를 찾아갔듯이 하나님께서 한 알갱이라도 잊지 않으시고 다 찾아 가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천국에서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전 과거 저희 부모님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아버님이 어머니에게 임자! 그러면 엄마가 알아서 물을 떠 오고,

임자! 그러면 잿떨이를 가져다주고,

임자! 그러면 등 긁어 주고 하는 일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어떻게 임자! 그러면 엄마가 알아서 척척 해 주는지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내와 34년을 살아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젠 제가 여보! 그러면 아내가 알아먹어요.

신기하지요.

이게 하루 이틀에 통달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이젠 숨소리만 들어도 알아요.

오랜 세월 서로 부대끼면서 눈과 눈이 말하고 호흡과 호흡이 말하는 경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도 성도와의 교제를 이렇게 해 나가시고자 부단히도 쉬지 않고 일을 해 나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잊고 살아도 하나님은 잊지 않고 하나하나 당신께서 세우신 계획표대로 차근차근 체크해 가십니다.

그리고 진행해 가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예기치 않는 일들이 발생하거들랑 아! 하나님께서 면회하고자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면 반드시 그런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역사로 기록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뒷방 영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때도 하나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일을 하십니다.

 

꿈으로도 일하시고,

사건으로도 일하시고,

우리 가정사 구석구석 간섭하시면서 일하십니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마누라 내 남편 내 가족 하나하나를 간섭하시면서 일하십니다.

 

여러분의 자식이 아픈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여러분 사업이 망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여러분 자식이 대학에 떨어진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남편에 직장에서 짤린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부모가 죽고, 아내가 죽고, 자식이 죽고, 사고가 나고,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사무엘상 2장을 봅시다.

 

삼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죽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살아났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망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흥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성공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실패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빚쟁이가 찾아왔습니까?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빚쟁이가 안 찾아 왔습니까? 하나님이 안 보냈습니다.

강도를 만났습니까? 하나님이 만나게 했습니다.

강도를 안 만났습니까? 하나님이 안 만나게 했습니다.

자식이 속을 섞입니까? 하나님이 그랬습니다.

자식이 속을 섞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속 섞이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개판으로 하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참아 준 겁니다.

조만간 집구석에 불이 나고 갖가지 강도들이 들이 닥칠 것입니다.

사건 사고가 일어날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런 분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잊고 사는데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요.

그럼 당신은 하나님 자녀가 아닙니다.

남에 자식이기 때문에 방기하는 겁니다.

 

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창한 것으로 찾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숨 쉬고 살아가는 세세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숨 쉬고 사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내가 숨을 멎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나 죽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런 고백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랜 세월 터지고 또 터지고 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사십에 하나 감한 태장을 맞고 옥에 갇혀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것을 깨닫고 찬송과 기도를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영생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부디 이 깨달음이 날로 날로 알알이 영글듯이 깊어져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낙엽하나 떨어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이고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다 하나님이 기르시는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손길임을 알게 하시고 사나 죽으나 앉으나 서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으로 깨닫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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