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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히브리서 강해

♣(히브리서 강해)14강. 세상을 이기게 하는 믿음 (히 11:27)

by coroa 2022. 3. 26.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4강. 세상을 이기게 하는 믿음 (히 11:27)

-.정낙원 목사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브리서 11장에는 약 20여회의 믿음으로 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이렇게 역사를 하였고!

어떤 사람에겐 믿음이 저렇게 역사를 하였다는 식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각 사람들에게 섹션(부분)별로 증거하는 것은 믿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다르다는 말이 아니고 믿음의 역사는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듯이 믿음이 역사하는 것도 그 시대마다 환경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는 마치 성령의 은사가 다양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일을 흉내 내고 누구를 본받고 닮자 라고 하는 것은 비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은 정형화된 틀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노아에게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아브라함에게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야곱에게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요셉에게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모세에게 요구하는 것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본받으세요!

닮으세요!

그러면 안 되겠지요.

저 사람이 저렇게 해서 은혜를 받았으니 나도 저 사람처럼 해서 은혜를 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은혜를 받는 비결을 고정화 시켜 놓는 것이 되어요.

성경은 이렇게 고정화 된 것을 법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러한 법을 앞세워 신과 거래하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십일 금식 기도하고 은혜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삼시세끼 거르지 않고 밥 잘 먹고 잠만 자다가 은혜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은혜 받는 비결입니까?

금식하여야 합니까?

아니면 잠을 자야 합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그때 그때 다르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십일 금식 기도해야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면 모든 신자들을 다 사십일 금식기도 시켜서 은혜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사십일 금식기도 하는 인간에겐 꼼짝없이 은혜를 주어야 합니다.

그럼 사십일 금식 기도는 하나님 은혜를 따내는 수단으로 고정화 되고 맙니다.

만약에 내가 은혜 받고 싶으면 사십일 금식기도를 하면 되니까요.

 

실제 순복음 교단에서 초신자들을 반 강제적으로 사흘씩 금식기도 시켜서 방언을 받게 하는 것은 전형적인 우상 숭배의 모습입니다.

사흘 굶어 혀 꼬꾸라지는 소리를 하니 방언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미혹당한 교인들은 이게 방언인줄 알고 밤새도록 룰루랄라 따따따따 하면서 방언 기도했다고 흐뭇해합니다.

 

이 사람들은 무슨 이상한 것만 있으면 은사라고 하고 이상한 꿈만 꾸어도 계시 받았다고 난리들입니다.

이 무슨 코메디입니까?

여러분 사람이 굶으면 헛 소리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러한 일들이 실제 한국교회 안에서 교단을 초월하여서 경쟁적으로 비일비재하게 자행되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빼앗아 오기 위해서 우리 교회는 저쪽 교회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내세웁니다.

 

우리교회는 일 년 365일 철야한다.

우리교회는 금요일 밤마다 산기도 간다.

우리교회는 성경 통독에다 성경 필사까지 한다.

우리교회는 직거래 장터를 한다.

우리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문화센터를 개설했다.

우리교회는 이러 저러한 기관과 이런 저런 프로그램이 있다.

 

우리교회는 은사 받는 비결,

방언 받는 비결,

은혜 받는 비결,

축복 받는 비결이 있다고 자랑을 합니다.

우리교회에 오면 은혜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를 말하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아요.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주고 강퍅케 할 자에겐 강퍅케 하십니다.

평생 강도짓만 하던 사람에게 은혜를 주니 천국에 가고, 평생 율법대로 살았던 바리새인들을 강퍅케 해서 지옥에 가게 하십니다.

그러니 어떤 법칙을 가르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모습들입니다.

 

이 시대 교회들이 앞 다투어 경쟁하듯이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을 재현시키고자 하는 것은 교회를 우상의 전당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갖가지 종교적 이벤트를 만들어서 교인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초월적 사건들의 이름을 갖다 붙여서 뭔가 신비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 도하 작전” 이라든가!

“여리고 성 함락” 이라든지!

“일천번제를 드리자” 라든가 라는 행사를 만들어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바 되게하여 종교적 집단 최면에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흉내 내는 것은 그 사건을 신비화 시켜서 교인들의 이목을 붙잡아 두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어지지 않으니 어떤 행사를 통해서 신과 접촉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접신 행위입니다.

교인들을 종교적인 행사에 참여함으로서 신과 하나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것이지 종교적 행사를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에 나와 있는 사건들을 재현하고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에요.

이러한 것들은 신앙에 유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을 우상화하게 만들어 버려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동일한 사건을 반복하여 일하시지 않아요.

즉 인간들이 예측이 가능하도록 일을 하시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의 우상성을 잘 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일을 고정화 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떤 일을 고정화 하고자 합니다.

신이 일하는 것을 예측 가능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신을 인간 쪽에서 필요에 따라서 움직이고자 합니다.

 

이를 우상성이라고 합니다.

우상은 고정된 신을 말합니다.

정해진 법칙에 들어가면 반드시 복을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신을 만나는 날도 정한 날자가 있고,

정한 시간이 있고,

정한 장소가 있고,

정한 사람이 있고,

정한 행동을 하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를 지금 식으로 말하면 주일날, 11시에, 00교회에서, 교회가 정한 봉사와 충성을 하고, 당회장 목사의 말씀을 들어야 복이 온다는 식입니다.

부목사가 설교하는 것보다 당회장 목사가 설교를 하여야 은혜가 더 오고 복이 더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도사가 심방을 하면 시큰둥하고 당회장이 심방하면 광영으로 생각하는 것도 다 이런 우상적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주일성수와 십일조와 성전과 주일 대 예배와 다른 예배로 구분하는 것과 또 목사도 담임목사와 부목사로 구분하는 모든 것들은 우상숭배적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 안에선 날에 구분도 없고,

시간에 구분도 없고,

장소에 구분도 없고,

목사에 구분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성령을 마시고 한 주님 안에 거하기 때문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성도 또한 고급신자와 저급신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 또한 고급 믿음과 저급 믿음이 없습니다.

신자이냐! 아니냐!,

믿음이냐! 아니냐! 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겐 고급 믿음을 주고, 어느 사람에겐 저급 믿음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날은 복 받는 날이고, 어떤 날은 저주의 날이 없습니다.

예수 안에선 날과 달과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들이 성경에 나타난 사건을 재현시키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고정화 시켜서 교인들을 자기 교회에 붙잡아 두고자 하는 사술(邪術)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일을 이벤트화 하는 것은 그만큼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다는 증거입니다.

 

지금은 방주를 지을 필요도 없고,

홍해나 요단강을 건널 필요도 없고,

애굽을 떠날 이유도 없습니다.

 

또한 일천번제를 드릴 필요도 없고,

성전을 지을 이유도 없고,

주일날만 예배드릴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방주 짓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홍해를 건너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출애굽 하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성전을 짓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일천번제를 드리는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제사지내는 것이에요.

 

구약에 나타난 모든 것은 모두가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였다는 것은 구약적 모든 신앙을 완성하였다는 말입니다.

 

구약적 신앙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셨다는 것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신앙을 도말시키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겐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타난 일들을 흉내 낼 필요도 없고 반복하고 재현 시킬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하라고 가르친다면 그는 예수를 만나지 못한 구약 옛 언약 사람입니다.

 

옛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 밖에 있는 마귀입니다.

마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잖아요.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그 사람도 마귀입니다.

그러니 마귀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종교적 행사를 좋아하는 것은 이러한 일들을 행함으로서 내부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뭔가 알지 못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신을 달래는 차원에서 신이 벌렸던 일들을 재현하여 신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두려움이 왜? 왔고 그 두려움은 어떻게 해소하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람에겐 왜? 두려움이 엄습할까요?

두려움의 근원을 알아야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어집니다.

그럼 두려움의 원인을 추적해 보기로 합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자 갑자기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하나님이 두렵지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하나님이 두려워졌다는 것은 곧 선악과 속에 두려움의 원인이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왜? 선악과를 먹자 두려움이 엄습하였을까요?

이는 선악과 속에 선(善)과 악(惡)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 요소가 있어 이를 갈라내는 심판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란? 옳고 그름입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엔 모든 것이 좋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자 좋고 나쁨으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자기들이 벗은 몸이 나쁨으로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까지만 해도 벌거벗었음이 나쁨인 줄 몰랐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후 벌거벗음이 하나님 앞에서 나쁨으로 보인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두려워진 것입니다.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선과 악에 대하여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선악은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 옳고 그름의 심판 기능을 갖게 되면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면 세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다스리지 않고 자기중심으로 다스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하나님과 대결 구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다스리지 않고 자기들이 보기 좋은 대로 다스리니 자연히 하나님과 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이 되고서야 어찌 두렵지가 않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선악의 사람이 죽지 않고서는 해소 되지가 않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사람이 죽어야 비로서 선악의 법이 주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은 선악의 사람을 죽이고자 하십니다.

선악의 사람을 죽임으로서 선악의 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는 선악의 법에 사로잡힌 사람을 죽이고 선악의 법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도에게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역사를 합니다.

죽은 송장에겐 죽음은 죽은 것이에요.

죽음은 산 사람에게만 살았어요.

죽음은 생명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물러서지 않고 죽이려고 집요하게 쫓아다녀요.

그러니까 살고자 하면 할수록 죽음도 산 것을 죽이기 위해 그림자처럼 쫓아옵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여서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일생에 죽음에 종노릇하는 자기 백성들을 놓아 주시려고 오신 겁니다.

어떻게 놓아 주시는가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죽임으로서 놓아주세요.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선악의 법에 매여 죽음에 두려워 떠는 사람을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선악과 상관없는 사람으로 다시 살리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애기 위함입니다.

 

마귀는 선악의 법으로 두려움을 줍니다.

마귀는 선악의 법으로 넌 틀렸으니 죽어야 할 놈이라고 인간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악의 법 아래서 죽어가는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 사건으로 살려 내십니다.

자기백성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서 마귀의 손에서 건져 내십니다.

 

이는 마치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 애굽을 떠나게 하고 믿음이 임금을 무서워하지 않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다시피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에게 붙잡혀 일평생을 종노릇하며 살았습니다.

죽음에 쩔쩔매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빼내오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볼 내용은 믿음이 어떤 식으로 애굽을 떠나게 하고 임금을 무서워하지 않게 하는가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백성들을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 방법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토록 보존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과 정 반대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살기 위해서 죽음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목숨을 죽음에 넘겨주어서 살라고 하십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겐 너무도 역설적이고 해괴한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이 방법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죽음을 가진 생명은 죽음에 넘겨주어 죽어줌으로서만 이길 수가 있지, 살고자 하여서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살려고 하지 말고 죽기 위해 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지요.

맞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선문답 같아서 믿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넘어 갑시다.

 

두려움이란? 두려워할 대상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살아 있는 자에게만 두려움이 됩니다.

죽은 자에겐 죽음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기 때문에 죽음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죽고자 하면 죽음이 힘을 쓰지 못하지만, 만약에 살고자 한다면 죽음은 크나큰 능력으로 너희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말해주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백성들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일을 단행하십니다.

믿음이 오면 자신이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마귀가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평범한 말이지만 살아야 된다는 집착이 강할수록 죽음에 두려움은 더 크게 작용을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난 죽어야 해? 라고 하면 죽음이 두렵지 않아집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에겐 죽음은 두렵고 싫은 것이지만,

죽고자 하는 사람에겐 죽음은 반가운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이란?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여요.

사도 바울은 삼층 천을 보고 와서 빨리 죽기를 소원했습니다.

왜? 빨리 죽기를 바랐을까요?

그야 천국에서 빨리 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삼층 천을 보고 온 바울은 이 세상을 직장 생활하는 사람들이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 세상은 직장이고 천국은 집입니다.

 

직장 생활하는 사람에게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집으로 가는 퇴근시간입니다.

출근과 동시에 퇴근이 기다려집니다.

회사에 출근하면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이는 사랑하는 가족을 둔 사람들의 본성입니다.

 

바울이 삼층 천을 가보니 자기가 쉴 곳이 이미 마련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빨리 죽어서 거기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건 베드로도 보았어요.

베드로가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보고서 여기서 초막을 짓고 살자고 했듯이 바울도 그만 삼층 천에서 그대로 눌러 앉아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울이나 베드로를 세상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가서 일하다가 오라고 보냈습니다.

바울은 살아도 늘 천국을 그립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곳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 겁니다.

 

아! 빨리 죽고 싶어!

예수님 나 언제 죽일건데요!

빨리 죽이면 안 됩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죽여주세요! 라고 했어요.

세상에 빨리 죽여 달라고 청탁을 하고 있어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니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했겠어요.

도리어 죽음 앞에 알짱거리면서 너 날 빨리 죽여라 라고 했어요.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날 빨리 십자가에 죽이라고 약 올린 것과 같아요.

물론 예수님이 빨리 죽고자 약을 올리진 않았어요.

 

다만 죽으면 어쩔까라고 두려워하고 노심초사하면서 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피해가려고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의 목숨을 버리고 다른 목숨을 받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 10: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보세요.

예수님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해서 지금 있는 목숨을 버린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은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가 예수님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버렸다고 하는 겁니다.

 

이건 예수님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에요.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말이에요.

바울이나 12제자들도 이런 자세로 살았습니다.

 

그러니 바울이나 12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까?

바로 믿음으로 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12제자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고 나자 천국이 보이고 부활이 보이고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님이 버젓이 살아서 일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옥에 가두고 매질을 하여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능력을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임하자 바로 왕과 같은 거대한 유대교라는 사단의 회(會)가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바로 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녀라고 했어요.

독사 새끼들이라고 했어요.

결국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모세 시대 바로 왕과 같은 소속이라는 말입니다.

 

율법이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여 모든 사람들을 압제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율법 아래 쩔쩔매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면서 믿음이 생기니 율법으로 참소하는 유대인들이 두렵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이 믿어지니까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믿음이 오자 유대인들에 대한 두려움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어요.

도리어 믿음이 예수님과 같이 죽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고 타협할 이유가 없지요.

 

전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개인적으로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판단하는 기준이 하나 있는데 죽음을 어떻게 보느냐를 가지고 가늠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고 나니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삶에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죽음이 두려워지지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 죽음에 대한 설교를 할 땐 굉장히 기분이 업(up)이 되어서 오버를 잘합니다.

군인이 제대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신이 나는 겁니다.

지난번 집사님 누님의 장례식에서 죽음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신이 났어요.

찬송에 힘이 붙고 마치 제 자신이 주님의 품으로 가는 것 같은 희열을 느꼈어요.

 

지금까지 많은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때마다 죽음이 안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감사하게 되어요.

그런데 장례식에 참석하신 집사님의 형제분들이 다 기뻐하세요.

이런 장례는 처음이라고 해요.

 

돌아가신 집사님 누님의 형제분들이 목사님 설교를 듣고 보니 죽은 것이 슬픈 일이 아니라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안식으로 말합니다.

왜? 죽음을 안식으로 말하는가요?

이는 죄인의 삶은 수고와 슬픔뿐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 90:3-11=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 임이니이다 ~ ~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죄인이 살아가는 날은 주의 분노 중에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이는 죄인은 오래 살수록 수고와 슬픔을 많이 겪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죄로 주어진 수고와 슬픔뿐인 삶은 오래 사는 것이 복일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수고와 슬픔으로 오래 산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이는 마치 제대하여야 할 군인에게 연장케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군인이 제대하는 것은 복된 일이지 저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군인에게 있어 집이란? 천국과 같습니다.

성도는 죽으면 군인이 제대하여 집으로 가는 것과 같이 천국으로 갑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에 감동으로 의인의 죽음을 침상에 쉬는 것이라 했습니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2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의인이 죽는 것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화액(禍厄)이란? 큰 불행을 말하는데 이는 불같은 고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더 큰 고난 전에 데려간다고 합니다.

 

더 큰 고난이 오기 전에 침상에서 편히 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데려 가신 것입니다.

야곱이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하지요.

이제 험악한 세월을 그만 살고 쉬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은 사는 것만큼 수고와 슬픔이 많습니다.

이런 수고와 슬픔을 끝내고 쉬게 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주 안에서 죽는 것이 복인 줄을 모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대로라면 성도가 죽는다는 것은 복이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에 눈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죽음을 끝으로만 보지 하나님의 나라 침상에서 쉬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믿음에 문제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죽음이 두렵지가 않지만 믿음이 없으면 죽음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믿음으로 바로 왕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 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모세는 평생에 애굽을 두 번 떠났습니다.

첫 번째 떠남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애굽 사람을 죽이고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간 사건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떠남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떠남은 출애굽 사건을 말합니다.

 

처음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친 것은 바로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간 것은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이 발각되어서 바로에게 죽임 당할까봐서 두려워서였습니다.

살고 싶어서 도망친 겁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 위하여 바로 왕을 찾아왔을 때에는 바로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믿음이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바로가 두려웠는데 지금은 두렵지 않은 것은 믿음이 모세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를 믿음이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라고 바로 왕 뒤에 하나님이 떡하니 서 계신 것을 보게 하였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하나님이 바로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바로는 애굽에 왕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세상 권세를 거머쥐고 인간을 죽음으로 다스리는 세상 신입니다.

바로 왕은 마귀라고도 할 수가 있고 세상 자체라고도 할 수가 있어요.

 

성도는 두 가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첫째는,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둘째는, 세상 살아가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야합니다.

 

율법의 요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벗어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나도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벗어납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대신 이루어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벗어납니다.

 

하지만 더 고민스러운 것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갖가지 아픔들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아프게 하는 것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입니까?

가난입니까?

질병입니까?

권력입니까?

마귀입니까?

 

아까 두려움은 죽음에서 기인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음 문제를 해결하면 이러한 것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살고자 할 때 두려움으로 작용합니다.

 

사도요한은 이러한 것을 한마디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주는 것이고 마귀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을 두렵게 하는 배후엔 마귀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마귀가 세상 것을 가지고 사람을 괴롭힙니다.

 

실패로 괴롭히고,

가난으로 괴롭히고,

먹고 사는 일로 괴롭히고,

병으로 괴롭히고,

죽음으로 괴롭힙니다.

 

한마디로 살고자 함으로서 죽음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모세가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성도 또한 세상 것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서 동일한 사건을 다르게 판단하게 됩니다.

똑같이 죽을병에 걸려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안함과 두려움으로 맞게 됩니다.

 

그럼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기에 세상을 이기게 하느냐 살펴보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알다시피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거부하고자 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 현현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빼내 오라고 사명을 주실 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몇 번이고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모세를 붙잡고 바로 왕 앞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지난번엔 믿음이 애굽에 왕자 신분을 박탈시키더니만 이번엔 믿음이 하기 싫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을 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곧 장자라고 하시면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이에 모세는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출 4:20-26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4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그런데 느닷없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고자 합니다.

그 때 마침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으로 던지면서 당신은 나에게 “피 남편”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고자 하는 이유는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입니다.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는 곧 남자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십보라는 지금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아들을 죽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러 가는데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의미가 할례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가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겐 이스마엘과 이삭이라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육에 아들이고 이삭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스마엘은 할례 전에 아브람 때 낳은 자식이고, 이삭은 할례 후 아브라함이 되어서 낳은 자식입니다.

 

그럼 아브람과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바로 할례사건입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 15:12-18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16 네 자손은 사 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장차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노릇 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 올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때는 아직 아브람에게 아들이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6장에 가면 아브람이 아들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하갈을 통하여서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리곤 1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책망하시면서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전능한 하나님이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을 시키고 할례를 행하도록 하십니다.

 

창 17:1-15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4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 ~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하나님의 언약을 할례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영원한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는 할례가 곧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할례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자식을 생산 할 수 없다는 생식의 단절을 말합니다.

생식기가 잘라졌다는 것은 생식 불능이라는 겁니다.

결국 할례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선 죽은 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할례와 동시에 이름을 바꿔 주신 것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새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지어 주셨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 아들이란 뜻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아들이 되느냐 하면 할례를 통해서입니다.

 

남자의 생식기를 자른다는 것은 육이 죽었다는 징표입니다.

이제부터 낳아진 자식은 육에 자식이 아니고 할례 언약 안에서 태어난 자식이란 뜻입니다.

할례 언약 안에서 태어난 자식은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겁니다.

 

암튼 할례는 아브람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할례로 아담의 후손인 데라의 아들로서의 아브람은 죽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아브라함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아브라함이 되어서 낳은 자식이 바로 이삭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아브람이 죽고 아브라함으로 부활하여 낳은 자식인 셈입니다.

그럼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모두가 할례 후에 태어난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죽었다가 살아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뜻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하나님의 장자 곧 아들들을 데려 오라고 보낸 겁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인 하나님의 아들을 데리려 가는데 미디안에서 낳은 자기 아들과 부인을 데리고 갑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하시는 말씀이 내 백성을 이 산에서 나를 섬기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출 3:1-12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호렙 산은 다름 아닌 시내 산입니다.

시내 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나서 십계명을 받는 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호렙 산에서 나타나셔서 하는 말이 모세야! 네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들을 이 산으로 데리고 와서 나를 섬기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자기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갔다가 다시 호렙 산으로 데리고 올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내와 자식에게 내가 갔다가 다시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야 맞습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온 가족이 애굽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호렙 산으로 돌아오느냐 이 말입니다.

 

이는 모세의 가족도 이스라엘에 합류키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애굽에 버려졌다가 다시 찾은바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이란? 버려졌다가 다시 찾은바 된 것을 말합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버려졌다가 다시 찾은바 되는 것이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 하실 때 네 후손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다가 사대 만에 돌아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버려졌다가 다시 찾겠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죽었다가 다시 살린다는 뜻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언약의 흔적이 바로 할례입니다.

몸에 할례 흔적이 없으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할례는 옛 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는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모세는 자기 가족들을 애굽에 버렸다가 다시 찾는 일을 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아들은 이방여인인 십보라에게서 낳은 자식입니다.

모세의 자식이면서도 아직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아내 십보라나 그 아들은 하나님 앞에선 이방인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창 17장에서 할례 언약을 주실 때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행하면 이스라엘 백성으로 간주한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스라엘이냐 하면 몸에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다른 말로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이스라엘입니다.

 

할례를 신약에선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그럼 할례 받음은 신약식으로 말하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자를 말합니다.

믿음이 오면 이 사실이 믿어집니다.

 

그런데 모세는 할례 받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식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세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알다시피 지금 모세는 할례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을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식은 할례를 받지 않았어요.

그 자식은 구출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몸에 할례로 인하여 죽음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모세를 죽이고자 한 겁니다.

그러자 십보라가 얼른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노를 거두시고 모세를 살려줍니다.

 

모세는 십보라가 아들에게 행한 할례 때문에 살아난 겁니다.

이에 십보라가 아들의 양피를 모세에게 던지면서 당신은 내게 피 남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피 남편이란 말은 죽었다가 살아난 남편이란 뜻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이 말입니다.

결국 아들의 할례로 인하여 모세 가족은 모두가 죽었다가 살아난 겁니다.

 

이제 모세의 가족은 비록 이방인이지만 할례를 통하여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옛 사람은 죽었고 이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이미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결국 모세가 가족을 미디안 광야에 두지 않고 이스라엘로 데리고 온 것은 이스라엘과 같은 할례언약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모세 가족은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을 함으로서 하나가 됩니다.

 

모세는 아들의 할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하던 모세는 길 숙소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할례로 죽음과 상관없는 모세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젠 모세에겐 애굽이나 바로 왕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 죽음의 두려움에 떨던 모세가 아닙니다.

죽음과 상관없는 모세입니다.

 

죽음에 종노릇하는 모세는 할례로 인하여 죽었고 죽음과 상관없는 자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를 죽음에 넘겨주고 죽음과 상관없는 자로 살려 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니 죽음에서 건져 내는 방법이 바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옛사람을 죽임으로서 죽음에서 건져내는 장식입니다.

쉽게 말해서 죽을 놈을 살려 주는게 아니고 아주 죽여 버림으로서 살게 만듭니다.

 

아까 할례를 뭐라고 했습니까?.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했잖아요.

옛 사람은 죄 아래 있는 사람이므로 죽음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이 있는 새사람이라야만 합니다.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내기 위해서 오는 길목에서 할례 때문에 죽고 살아나는 경험을 한 것은 모세 자신도 이미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된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선 모세는 죽음을 두려워 할 모세가 아닙니다.

40년 전 바로 왕이 두려워서 도망 갈 때의 그 모세가 아닙니다.

바로 왕을 두려워하던 그 모세는 아들의 할례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할례로 인하여 살아난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모세입니다.

할례가 모세로 하여금 애굽의 두려움과 바로 왕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선 믿음이 모세를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한 겁니다.

 

죽음은 죄가 있는 곳에 넘실거립니다.

죽음은 죄인에게 너 죽을래? 라고 겁을 줍니다.

그러면 죄인은 죽지 않으려고 죽음에게 쩔쩔 맵니다.

 

죄 아래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럼 믿음은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법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게 하십니다.

믿음이 마귀가 너 왜?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아? 라고 하면 예수님이 대신 지켜 주셨잖아! 라고 하게 하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서도 살고자 하지 않고 죽고자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산 자가 아니라 죽은 자로 살게 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세상의 평가가 두렵지가 않은 겁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실패자로 보아도 난 실패자가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서 성공한 자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실패하였다 할지라도 실패자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승리한 자입니다.

 

그럼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킨 것을 성도의 삶에 적용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마귀의 권세로부터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사람 아닌 것처럼 살아야 비로서 출애굽한 것이 됩니다.

세상사람 아닌 것처럼 살게 하는 것은 바로 세상에 대한 정과 욕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하심으로 세상으로부터 끄집어내십니다.

 

앞서서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기게 한다고 했습니까?

세상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함으로 이기게 하십니다.

믿음이 오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것이 믿어집니다.

 

믿음이 뭐냐?

세상에 대하여 죽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무덤덤해 집니다.

이걸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전 솔직히 복음을 알기 전엔 남에 눈을 많이 의식하고 살았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라는 것을 굉장히 의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목사다움의 품위를 지키려고 조심하였습니다.

당시엔 목사가 세상 일 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도 수치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누가 교인이 얼마냐 라고 물으면 거짓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 보니 교인이 없는 것도 아르바이트 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무슨 대수냐?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는데!

믿음이 모든 시선과 가치관으로부터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니 이기는 겁니다.

믿음이 오면 성도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됩니다.

어떻게 죽은 자가 되느냐 하면 가치관이 바꿔버립니다.

 

믿음이 없을 땐 세상에서 실패가 두렵고 죽음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오면 세상이 작아 보입니다.

십자가 너머 영생을 보기 때문에 세상이 작게 보이는 것입니다.

 

12제자나 바울이나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십자가 너머의 부활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감사하게 됩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가 믿음이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세계를 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땅에 것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늘에 것을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믿음이 오면 육에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영에 일을 생각하게 합니다.

믿음은 모세로 하여금 두려움을 없애 주셨듯이 지금도 성도로 하여금 세상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 담대하게 해 줍니다.

 

성도는 이 믿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히브리서에선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맞습니다.

믿음이 오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안목입니까?

아니면 돈 없음입니까?

그도 아니면 실패한 것 같은 인생입니까?

 

하지만 거지 나사로 같이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믿어지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예수가 믿어진다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안목과 가치관에 희비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담대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만물의 찌기 같고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살았지만 슬퍼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그 안에 삼층천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당신을 조롱한다고 하여도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실패자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공한 자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그 어떠한 형편에 처한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 안에서 승리자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하늘빛사랑 blog https://blog.daum.net/day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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