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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강해/요한복음 강해

♣(성경강해)118강. 가이사와 예수 (요 19:12-18)

by coroa 2022. 2. 4.

 

하늘빛사랑 https://blog.daum.net/day7

엡 1:4-6
④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1)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⑥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18강. 가이사와 예수 (요 19:12-18)

-.정낙원 목사

 

요 19:12-18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 히브리말로 가바다 이란 곳에서 재판 석에 앉았더라 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17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18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거부하고 죽였을까요?

이는 예수를 메시야로 알아보는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의 아들 됨의 증거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 3장 2절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만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 누구인가요?

이는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럼 어떻게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는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어지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들만 예수를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말처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란 것이 맞지요.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자기편끼리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아요.

하나님께서 믿게 해 주는 사람만이 믿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심판 성을 담고 있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은 사람과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구원주이지만 이방인에게는 심판주입니다.

 

귀신들이 예수님이 오시자 난리를 칩니다.

왜? 난리를 치는가요?

왜? 벌써 왔느냐고 합니다.

 

귀신들은 알아요.

예수가 오면 심판이 일어난다는 것을!!

그러니까 왜? 벌써 와서 자기들을 심판하느냐고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이건 마치 창세기 1장 3절에서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에 있던 빛들만 쏙 빠져 나오면 어둠은 그대로 어둠으로 남고 그 속에서 빠져나온 자들만 빛에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이게 심판입니다.

 

빛에 속한 자들만 예수를 알아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 속에 예수를 알아보는 믿음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오직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성도만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을 사람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창세전에 이미 숫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144.000명이라고 합니다.

 

144.000명이란? 숫자적으로 딱 144.000명이란 말이 아니고 영생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은 일정한 숫자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먹구구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정한 시나리오대로 구원을 하신다는 뜻입니다.

 

144.000명이라는 숫자 속에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44.000명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봅시다.

성경에 나오는 숫자에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늘에 사람들이 땅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은 삼위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서 3으로 나타나요.

그리고 땅은 동서남북(東西南北) 천하 만물로 4로 나타나요.

 

3이라는 하나님이 4라는 땅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면 12로 나타나게 되어요.

하늘에 수(數)인 3과 땅에 수(數)인 4를 곱하면 3x4=12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12는 구원 받은 성도를 상징해요.

 

이게 구약에서는 12 지파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12 사도로 나타났어요.

그럼 구약의 성도인 12 지파와 신약의 성도인 12 사도를 곱하면 12x12=144가 되지요.

이렇게 되면 144는 신 구약의 성도를 상징하게 됩니다.

 

그런데 144라는 신구약의 성도들을 오고 오는 모든 세상의 땅에 충만 수인 1.000을 곱하면 144.000명이 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지요.

그러니 1.000 이란 수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는 충만 수를 말해요.

이러면 구약과 신약의 성도를 상징하는 144를 1.000에 곱하면 144x1.000=144.000명이 됩니다.

 

144.000명은 모든 시대 온 세상의 구원 받은 성도를 총칭하고 있는 숫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에서 하늘 예루살렘 성을 보면 12 문이 있는데 거기에 12지파의 이름이 있고 또한 12 기초석이 있는데 거기엔 12 사도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곧 12 지파와 12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 예루살렘 성은 신구약의 구원받은 성도로 지어진다는 말이에요.

이걸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는 12 지파로 나타나고 신약의 성도는 12 사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모르니까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기들이 144.000명이라고 무식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풀이하여서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무식한 소리에 하나님께로 나지 않는 자들은 훅~ 하고 넘어가요.

미혹당해요.

자기들만 특별한 선민이라는 말에 훅~ 하고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성경의 진의(眞意)를 알아야지요.

144.000명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아는 자들은 안 넘어가요.

 

다시 설명합니다.

 

하늘에 일이 땅에서 이루어지면 3x4=12로 나타나고,

12가 신약과 구약으로 나타나니까 12x12=144가 되고,

144가 모든 시대 속에서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온 세상에서 일어나니까 144x1.000=144.000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44.000명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총칭인 것입니다.

총칭이면서도 굳이 144.000명이라는 숫자로 쓰는 것은 이는 곧 구원 받을 자들은 이미 창세전에 숫자로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을 성도는 창세전에 이미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를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부르신다고 합니다.

그럼 자기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온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구원 받을 성도는 이미 정해졌습니다.

그 숫자가 정해져 있습니다.

그 수(數)가 차면 예수님이 오십니다.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계 6:9-11절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11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사도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어떤 탄원을 하는가 하면 자기들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이들이 이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조금 기다리라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너희들처럼 죽임 당하고 올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수(數)가 차기까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하얀 면사포를 입혀주고 신부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숫자가 다 차면 어린양의 결혼식이 올려 질 겁니다.

 

지금 우리가 번호표를 뽑고서 그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저들처럼 죽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성도들의 운명입니다.

 

죽임 당한다는 말은 복음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아무나 죽이지 않아요.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만 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고 복 중에 복인 것입니다.

이걸 아셔야 해요.

 

예수가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엄청난 일인지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게 깨달아져야 세상이 작아 보여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엄청난 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복인지 모르고 있으면 안 되어요.

믿음을 받으면 이러한 사실들이 믿어져요.

창세전 언약도 믿어지지만 그 창세전 언약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완성이 되어지고 나에게 적용이 되어서 주어지는지가 믿어집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설레지 않나요?

이런 말씀에 설레지 않는다고 한다면 뭔가 수상한 겁니다.

천국 이야기를 하면 기뻐야지요.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려 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란? 이 세상 바깥에 있는 보이지 않는 나라인 묵시에 속한 것들을 말해요.

즉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이는 믿음이 실상을 보게 하고 보지 못한 것을 증거케 한다는 말입니다.

 

실상이 뭔가요?

보이지 않는 나라입니다.

 

성도가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전에 언약 하신대로의 구원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인가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이라 함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을 통칭합니다.

 

하나님이 될 수도 있고!

창세전 언약일 수도 있고!

예수님에 관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묵시에 속한 일들입니다.

 

묵시와 역사는 상대적인 나라입니다.

역사(歷史)는 “보이는 나라” 이고!

묵시(黙示)는 “보이지 않는 나라” 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상대적이에요.

상대적이라 함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빛과 어둠처럼 서로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나라를 설명하고자 보이는 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보이는 나라가 나왔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보이지 않는 나라가 실상이고 보이는 나라는 허상인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나라가 원본이고 보이는 나라는 복사본이 되는 것입니다.

 

복사본은 진품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상을 가지고 실상을 알려주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보이는 역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말합니다.

 

편의상 하나님을 화가(畵家)라고 합시다.

 

화가의 머릿속에는 창세전 언약이라는 멋진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화가의 머릿속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실제합니다.

이렇게 실제 하는데 보이지 않는 것을 묵시라고 합니다.

 

화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일을 합니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도화지에다가 그리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은 묵시에 속한 것이고, 도화지에 그려진 그림은 역사에 속한 것입니다.

 

화가가 묵시라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역사라는 도화지를 만든 겁니다.

이제 도화지에다 자기 머릿속에 있던 묵시의 그림들을 하나 둘씩 그려 나갑니다.

예를 들어서 그 그림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그림이라고 합시다.

 

그러자면 먼저 자기 백성들이 죄에 가두어져 있어야 하는 그림을 먼저 그리겠지요.

그 다음에 예수가 와서 죄 아래 가두어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그림을 그리겠지요.

화가는 자기 머릿속에 있던 것들을 역사라는 현실에다가 다 그리고 나서는 그 그림을 벽에다 걸어 놓고 감상을 합니다.

 

야! 멋지다!

훌륭해!

그러면서 흐뭇해합니다.

이걸 모든 일을 마치고 안식 하신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는 묵시를 거슬러 올라가는 형국을 띠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묵시에서는 이미 완성품으로 있던 것을 역사라는 도화지에다 그렸기 때문입니다.

역사라는 도화지에 그려지는 그림들은 이미 묵시 속에 있던 온전한 것들입니다.

 

묵시 속에서는 그림이 완성품으로 있어요.

그걸 시간의 흐름과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라는 도화지에 그릴 때는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점진적으로 심층적으로 나아가는 수순으로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이 과거 현재 미래 시제로 이루어져 가는 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화가가 그림을 시작하였으면 다 채워 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을 하였으면 이미 완성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왜냐하면! 화가가 그림을 그리다가 중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완성시키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묵시를 역(逆)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식을 띠고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태초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 속에 있던 그림을 역사에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걸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창조가 있어야 종말이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묵시가 먼저이고 역사가 나중이기 때문에 묵시가 역사보다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역사 속에서는 아브라함이 예수님보다 앞서 살았지만 묵시 안에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역사는 종말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을 봅니다.

 

히 1:10-12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 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태초에 주께서 땅에 기초를 두셨다고 합니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멸망 할 것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멸망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종말이 이미 창조 보다 앞서 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멸망시키고자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종말이 창조를 앞서는 것이 맞지요.

묵시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작과 끝이 있는 역사 속에서는 이걸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 구조가 과거 현재 미래로 진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는 말은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 할 수도 없어요.

이것은 믿을 일이지 설명 하여서 이해시킬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을 영(靈)에 속한 일이라고 합니다.

 

영에 속한 일들은 인간들이 감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묵시라는 영의 세계가 인간 세상 바깥에 있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는 창조의 세계이고 역사는 피조의 세계입니다.

 

피조 세계에서는 창조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창조 세계는 위에 있고 피조 세계는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위는 감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하늘에 일이 비밀인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들이 창조주가 하는 일을 안다고 하여도 그것은 고작해서 인간들 상식으로만 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안다고 하여도 그건 육적 수준에서의 앎인 것입니다.

땅 수준에서의 앎일 뿐입니다.

이것은 아는 것이 아니고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늘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창조가 되기 전에 있던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인간 세상 바깥에 있는 묵시에 속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역사 바깥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그 믿음으로 역사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들을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땅에 속한 이야기로만 이해하지만!

믿음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해서 펼쳐 가시는 모든 일들은 하늘에 속한 일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계시(啓示) 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역사를 화가의 그림으로 비유해서 말했지요.

역사라는 그림이 화가의 머릿속에서 나왔다고 하였잖아요.

그럼 도화지에 그려진 역사라는 그림은 진품이 아니고 복사본이겠지요.

진품은 화가의 머릿속에 있잖아요.

 

그럼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 그림을 통해서 화가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아! 저 화가는 이런 그림을 가지고 있구나!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나타난 그림은 화가의 머릿속에 있는 사상(思想)을 보여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을 통해서 화가의 마음을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역사가 그러해요.

보이는 역사는 보이지 않는 묵시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럼 역사는 복사본입니다.

진품은 묵시에 있어요.

 

이러면 우리는 역사라는 복사본을 통해서 묵시라는 진품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묵시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어야 합니다.

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구나!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을 다스리고 있구나! 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 할 때 역사를 통해서 묵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받으면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요.

역사라는 그림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묵시적 사건으로 읽어내게 되어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된단 말입니다.

 

역사에서 역사를 보면 그건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이방인들이 보는 역사관이에요.

성도는 역사에서 묵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묵시로 보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나 지혜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가지고 묵시를 보려면 묵시를 보는 눈이 필요 합니다.

그 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역사에서 묵시를 보는 눈을 주신 것입니다.

그 눈이 바로 “일곱 영”이신 성령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을 봅시다.

 

계 5:6절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하나님 나라에 보니까 “일곱 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곱 눈”이 온 땅에 보내심을 입었습니다.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그 “일곱 눈”을 일컬어 “일곱 영”이라고 합니다.

“일곱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왜? 성령을 일곱 눈이라고 할까요?

이는 역사 속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창조를 7일 만에 했지요.

그러니 일곱은 창조의 수(數)인 것입니다.

 

묵시가 역사에서 하신 날이 일곱 날이에요.

그래서 일곱 영은 하나님이 역사에 벌리신 일을 증거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에다가 묵시를 설명하고자 일곱 영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일곱 눈이신 성령이 성도 안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는 일을 하세요.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성도는 역사라는 그림을 통해서 묵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읽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역사에서 묵시로 살아요.

이걸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종말론적 삶이란? 염세주의자들처럼 은둔하고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노아가 방주 짓는 삶입니다.

노아는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 바깥으로 인도 해 줄 배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 배가 역사가 홍수로 쓸려 내려갈 때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방주가 거룩한 산으로 인도 하였습니다.

 

노아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 준 방주가 신약에 오면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십니다.

노아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노아처럼 장차 오는 종말로부터 구원해줄 예수그리스도라는 방주 만드는(믿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성경이 어렵지 않아요.

왜? 그런 줄 아세요.

성령이 계시의 영으로서 깨달아지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일곱 눈이 되어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시는 하늘에 일을 보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몰라도 되어요.

한글 성경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낼 수가 있어요.

성경은 일곱 눈이신 성령이 보여주고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안 나와도 성경을 깨닫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그러니 신학이니 히브리어 헬라어를 모른다고 기죽지 마세요.

 

성령이 보여주지 않고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신학공부를 많이 하고 고상한 말을 하고 혀 꼬부라진 소리로 히브리어 헬라어를 해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아는 일에는 까막눈이에요.

소경이에요.

그냥 자기도 모르는 말을 지껄이는 거에요.

 

이러한 것을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알아요.

속지 않아요.

저 소리가 성령의 음성인지 아니면 자기 말인지 대번에 알아먹어요.

 

그러니 누가 신학을 말하고 원어를 가지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현혹되지 마세요.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 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아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신학이니 또는 히브리어나 헬라어와 같은 세상 학문을 가지고 잘난 척 꼴값을 떠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걸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죽이는 자들이 누구인가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입니다.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누구입니까?

히브리어 헬라어를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그 당시에는 히브리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국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국문학자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들이 율법사와 서기관들입니다.

당시에 율법사와 서기관들은 히브리어를 연구하는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박사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몰랐어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박사들이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예수를 모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까막눈이란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육적으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니 영적으로 소경이었던 것입니다.

 

우습지 않나요?

히브리어로 기록이 된 성경을 히브리어 박사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그럼 누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된 성경을 해석 할 수가 있을까요?

이는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경을 히브리어로 해석하지 않고 창세전 언약으로 해석해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석을 해요.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주구장창 창세전 언약을 말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창세전 언약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박사이면서도 창세전 언약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를 보고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아니야 우리의 왕은 가이사(Gaesar) 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는 사건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자기 왕은 가짜라고 배척하고 남에 왕을 진짜라고 영접하게 되어요.

진짜 하나님은 배척하고 가짜 하나님을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봅시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일컬어 “보라 너희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반발을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느냐?

우리의 왕은 “가이사(Gaesar)” 라고 합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알다시피 “가이사”는 로마 황제의 칭호입니다.

애굽에 왕을 “바로” 라고 불렀듯이 로마의 황제를 “가이사”로 불렀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통령과 같은 칭호입니다.

알다시피 애굽에 바로 왕이나 로마의 가이사 황제나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이나 로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마귀의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럼 “바로 왕”이나 가이사 황제“는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마귀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자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자기 왕이라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건 하나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서슴지 않고 우리의 왕은 예수가 아니고 가이사 라고 합니다.

이는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마귀 백성입니다” 라는 것을 스스로 자증하고 있는 셈인 것입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보낸 것은 그들을 죄에서 구원키 위함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모르고 있어요.

자기들이 지금 죄 아래 팔려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구원을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너희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이게 중요한데!

 

창세전 언약을 보면 “두 언약”이 나옵니다.

언약이 두 개란 말이 아니고 창세전 언약 속에 두 언약이 쌍둥이처럼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호두 속에 쌍둥이 알로 채워져 있듯이 말이에요.

 

창세전 언약 속에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어요.

옛 언약은 “죽이는 언약”이고,

새 언약은 “살리는 언약” 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이루실 분이 누구신가 하면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도 두 예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둘이란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두 사역”이 있단 말입니다.

어떤 사역인가 하면 자기 백성을 죄인 되게 하는 사역을 하시는 예수가 있고!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살리는 예수가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는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세요.

이것은 옛 언약인 율법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면서 율법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발전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임 당함으로서 자기 백성들을 모두 죄 아래 가두어 버렸어요.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셨단 말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성령으로 오셨어요.

성령으로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되신 예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은 새 언약의 사역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고 나자 제자들이 이 사실을 증거하기 시작 하였습니다.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했습니다.

성령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죄 아래 가두어진 자들을 건져 내서 살려주는 일을 하세요.

그래서 성령을 “살려주는 영”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순서가 먼저 죄 아래 가두는 것이고 나중에 건져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예수님을 미끼로 삼아서 유대인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 아래 가두는가 하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내었는데 그들이 거부하는 것으로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너희 왕이라고 하잖아요.

그러자 유대인들이 우린 그런 왕을 둔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런 놈은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런가요.

이는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바라는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강한 왕을 원하고 있어요.

로마에서 해방 시켜줄 아주 강력한 메시야를 원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눈에는 유약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찮아 보여요.

그런데 자기들의 왕이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건 유대인들에겐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아주 강한 부정으로 저런 놈은 죽여야 한다고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적개심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실망이 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유대인들의 바람과는 상반된 모습으로 일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소원을 외면하는 식으로 일을 하세요.

왜냐하면! 이들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이들을 죄 아래서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유대인이 바라는 모습으로서의 왕이 아니라 그들이 바라는 것의 정반대의 모습으로서의 왕으로 보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강한 왕을 바랐는데 하나님은 초라하고 힘없는 왕을 보냈어요.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꿈을 깨트리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니에요.

하늘에 속한 자들이에요.

그런데 땅을 지향하고 산단 말입니다.

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면 줄수록 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이들이 소원을 들어주지 않고 도리어 소원을 빼앗아 가는 왕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유대인의 소원과는 반대편에 서서 일을 하셨어요.

그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죄라는 것을 고발하는 식으로 일을 하셨어요.

 

이는 너희는 세상 사람과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알려주시고자 함입니다.

너희는 땅에 기운으로 땅에 정착하고 살아가는 민족이 아니고 도리어 땅을 떠나야 할 민족이라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이방인과 동등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가치로 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하심도 세상 차원으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도 세상 차원으로 이해하여서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는 것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구원도 세상 차원으로 이해하여서 로마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왕도 세상적 기준에서의 힘 있는 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이 시대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이 시대 교인들도 복을 땅에 것으로 가늠하잖아요.

돈 잘 벌고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었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병에서 고침 받거나 어려운 일에서 벗어나면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잖아요.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 육신을 근거로 복을 판단하고 구원을 판단하고 있어요.

이는 육에 속한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가치로 판단하여서 교인들로 하여금 가난하면 저주 받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난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느냐?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살아야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이게 마귀의 논리에요.

유대인들이 지금 마귀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깨트려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하여서 하나님을 우상 섬기듯이 섬기게 된단 말입니다.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하나님으로 믿게 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유대인들의 가치관도 바꿔주는 일을 하시면서 죄가 어떤 식으로 역사를 하는지도 알려 주시는 일을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는 일을 하시고도 있어요.

 

예수님은 세 가지 일을 동시 다발적으로 멀티 플레이를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가두어서 죄인 되게 하시는 일을 하시고!

둘째로는, 세상 가치관을 죽이고 하늘에 가치관을 심어주는 일을 하시고!

셋째로는, 죄가 어떤 식으로 역사하고 마귀는 어떻게 미혹을 하는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에요.

복합적인 사건이 응축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해요.

육적인 해석과 영적인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왕도 두 가지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육적인 측면에서와 영적인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건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이 세상 자체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가 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 속에 보이지 않는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그림자와 실체라고 합니다.

 

그림자는 실상이 아니고 실상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천지 창조가 이렇게 되어 있어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지요.

 

천지(天地)란? 하늘과 땅이에요.

하늘과 땅은 전혀 다른 세계에요.

그러니 서로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묵시를 알려 주고자 역사를 만들었다고 했지요.

이걸 그대로 역사 속에 창조를 했어요.

그러므로 역사 속에서도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요.

하늘은 묵시를 상징하고 땅은 역사를 상징해요.

역사를 가지고 묵시를 설명 하듯이 땅을 가지고 하늘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지옥을 가지고 천국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같아요.

이처럼 하늘과 땅이나 천국과 지옥은 서로가 서로를 드러내주고 있는 상대적인 것들이에요.

 

구원도 마찬가지에요.

먼저 버려짐이 있어야 해요.

버려짐이 없는 구원은 가짜에요.

구원 자체가 죄로부터 건져짐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을 죄 아래 버려지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놈들이 죄 아래 가두어져 있음에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지켰다는 것으로 의인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가지고 죄인 만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예수를 죽이게 만들어서 결국 율법으로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을 벌이신 것입니다.

역설적이지요.

 

그래요.

복음은 항상 역설적으로 주어져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인간들 눈에는 역설적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 발달 할수록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냐?

세상 적으로 똑똑한 놈들이에요.

어느 시대나 똑똑한 놈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였어요.

세상의 학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천하고 무능한 자들을 들어서 세상에 지혜를 무가치하게 만드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똑똑한 자들이었어요.

최고의 학문을 소유한 자들이었어요.

반대로 예수님이나 제자들은 학문을 접하여 보지 못한 무식한 자들이에요.

세상 학문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 가치로 늘 무시당하고 업신여김 당하였어요.

제자들이 무식해서 무식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학문으로 보면 무식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잘나고 똑똑한 놈들이 신학으로 성경을 곡해 하고 있어요.

원어라는 학문으로 성경을 곡해하고 있어요.

이런 자들이 특징은 설교를 어렵게 하여서 자신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배설물로 버렸던 것을 가지고 선생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원어가 무엇인줄 아세요.

성령의 감동이에요.

왜? 그런가요?

성경을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령의 감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원어 해석인 것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히브리어나 헬라어라는 원어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최고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세상 학문에 속한 원어가 제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그 안에 일곱 눈이신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학이라는 학문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신학으로 하나님의 뜻을 곡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똑똑함과 무식함은 상대적이면서도 역설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하나님은 서로 상반된 세상을 만드셨어요.

이는 서로를 가지고 서로를 설명하고자 함입니다.

 

하늘은 땅으로 설명이 되어지고!

천국은 지옥으로 설명이 되어져요.

영생은 죽음으로 설명이 되어져요.

의(義)는 죄(罪)로 설명이 되어져요.

거룩은 부정으로 설명이 되어요.

 

버려짐이 있어야 되찾음이 성립이 되어요.

죄 아래 가두어지는 것이 있어야 건져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영생은 죽음이 없으면 설명 할 수가 없어요.

 

하늘도 마찬가지에요.

땅이 없으면 설명이 불가능해요.

검은 색이 있어야 흰색이 설명이 되어져요.

흰색만 있으면 흰색을 설명 할 수가 없어요.

 

천국도 마찬가지에요.

지옥이 있어야 천국이 설명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둘은 서로를 드러내 주는 상반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묵시를 설명하고자 역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알려주기 위해서 보이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보이는 세상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면 보이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나왔어요.

이걸 묵시에서 역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이걸 몰라요.

자기가 묵시에서 나온 것을 모르고 있어요.

역사가 전부인줄 알고 있단 말입니다.

이게 죄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묵시에 속한 분을 역사에 보낸 겁니다.

그 분이 누군가 하면 예수님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이 예수님이 묵시에서 오신 분 인줄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를 왜? 모르는가 하면 예수님도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냈는데도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예수가 아니고 가이사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그렇게 만든 겁니다.

결국 그 죄로 인하여 예수를 죽이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왕이 나오잖아요.

 

가이사와 예수에요.

가이사도 왕이고 예수도 왕이에요.

이 둘은 그림자와 실제에요.

 

가이사는 보이는 세상 나라에 왕이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왕이에요.

그러니까 가이사는 예수를 드러내 주는 상대적인 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짜 왕이고 가이사는 가짜 왕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가짜 왕을 진짜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건 부모도 마찬가지에요.

땅에 부모가 있고 하늘에 부모가 있어요.

땅에 부모를 통해서 하늘에 부모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비는 하늘에 있다고 하셨던 겁니다.

 

지난 주간에 한국교회에서는 어버이 주일로 지켰습니다.

어버이 주일만 되면 상투적으로 하는 말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에서 장수하고 복을 받는다고 설교합니다.

 

이는 성경을 문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땅에 있는 부모를 섬기면 복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 부모는 하늘에 부모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에요.

땅에 부모를 통해서 하늘에 부모를 알아야 해요.

 

땅에 부모를 둔 것도 하늘에 부모를 알라고 두셨어요.

그럼 땅에 부모를 통해서 하늘에 참 부모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계시 전달자로서의 부모이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바탕에서 부모를 공경 할 때 참 부모 공경이 되는 것입니다.

 

참 부모를 설명하지 않고 땅에 부모만 설명하게 되면 땅에 부모가 하늘에 부모를 가리는 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놓치지 말아야 해요.

부모를 공경하지 말란 말이 아니고 부모의 의미를 알고 공경하란 말입니다.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은 하늘에 있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림자를 붙잡으면 안 되어요.

그런데 지금 유대인들이 그림자로 주어진 땅에 왕인 가이사를 자기들의 왕이라고 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가짜인 땅에 왕으로 인하여 진짜인 하늘에 왕이 가려지게 되어요.

 

다시 말합니다.

이 세상은 모형입니다.

무엇의 모형인가 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일들 속에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만물 가운데 하나님을 알만한 신성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안이 열리면 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제가 과거에 복음을 모르고 은혜를 받지 못하였을 때는 무슨 일이든지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였지만 그건 립 서비스였어요.

실제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 보여요.

심지어 어느 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조차도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요.

 

그래서 저는 창세전 언약을 알고 난 후 누구를 만나더라도 그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게 되는 습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세시고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된다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성경을 보세요.

사도들이 복음을 증거하는데 다양한 사건들이 일어나지요.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좋은 사람도 만나고 나쁜 사람도 만납니다.

 

그래서 바울이 서선서마다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어떤 사람은 귀하게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사귀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이 증거하는 사람들 중에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어요.

 

지금도 동일해요.

지금 제가 만약에 사도행전을 쓰라고 한다면 저도 어떤 사람은 귀하게 여기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상종하지 말라고 할 것입니다.

바울을 간섭하신 하나님이 지금 저도 간섭하고 계세요.

 

그러므로 바울의 이야기가 그냥 지나간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현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옛날이야기로만 들렸어요.

그러니 성경을 보아도 그냥 지식적으로 아! 그런가 보다 라고 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사실로 믿어져요.

 

믿음이 뭐냐?

추상을 실상으로 깨달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명으로 보여지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식이 지혜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에요.

지식과 지혜는 달라요.

이게 또 어려운 말인데!

 

쉬운 말로 지식은 음식의 재료와 같고 지혜는 그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서 실제로 양식으로 먹는 것과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지식은 많은데도 신앙이 가난한 것은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고 지혜로서 하나님 말씀을 음식으로 만들어서 배부름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율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비유해 봅니다.

지식은 율법과 같고 지혜는 그 율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해요.

율법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으면 죽이는 독(毒)이 되지만,

율법을 지혜로 올바르게 사용하면 살리는 약(藥)이 되어요.

 

복음도 동일해요.

잘 사용하면 스스로에게 유익을 주고 남에게도 생명을 주는 약이 되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스스로도 죽이고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고 해악을 주는 독이 되어요.

 

복음을 지식으로 가지고 있으면 말쟁이가 되어요.

변론하고 논쟁하고 다투고 정죄하고 심판하게 되어요.

복음을 법으로 사용하게 된단 말입니다.

 

법은 죽이는 것이에요.

법에서 생명이 나오지 않아요.

복음은 분명히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지식으로 있으면 마치 죽지 않은 씨처럼 생명의 싹을 내지를 못해요.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씨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씨를 복음이라고 합시다.

복음 속에는 생명이 있어요.

 

그런데 씨 속에 생명이 언제 나타나는가 하면 씨가 죽어야 나타나요.

씨가 죽지 않으면 씨 속에 생명이 나타날 수가 없어요.

씨가 죽지 않고 씨 그대로 있으면 씨가 곧 생명을 가리는 악이 되고 말아요.

이러한 것을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고 합니다.

 

달란트는 땅에 묻어두는 것이 아니고 사용하는 것이에요.

씨는 가만히 두는 것이 아니고 죽어서 싹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은 지식으로 습득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 앎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살아냄이 없는 복음은 소용이 없어요.

그것은 죽은 복음이에요.

 

복음 속에는 생명이 있어요.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 복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이고 관념이에요.

복음이 믿음에 화합을 일으키면 생명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지식으로만 남으면 복음을 가리는 악이 되어 버려요.

율법도 좋은 것인데 잘못 쓰면 죽이는 독으로 작용을 하듯이 복음도 마찬가지에요.

복음이 믿음에 화합을 일으키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만 지식으로 사용하게 되면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예수님께서 차라리 보지 못한다고 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느니 라는 말씀과 같아요.

즉 차라리 복음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복음을 안다고 하니 그저 죄가 있느니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복음하면서 복음을 가리는 일을 하게 된단 말입니다.

 

복음이 믿음으로 화합을 하면 행함이 나와요.

예를 들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믿음으로 화합을 일으키면 말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밥을 사주거나 옷을 입혀주거나 하는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말씀을 생명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걸 말씀이라는 씨가 죽어서 형제 사랑이라는 싹을 낸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걸 행함이라고 해요.

이러한 것을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하지 지식 있는 자가 되라고 하지 않아요.

지혜로 집을 세우지 지식으로 집을 세우지 않아요.

지혜가 겉으로 나타나는 행함이라고 한다면 지식은 감추어진 씨와 같아요.

그러니 지식과 지혜가 둘이 하나가 될 때 어떤 사건들이 현상화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걸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을 한다고 해요.

그러니까 행함이 그 사람의 믿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오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달음질을 해요.

무슨 말인고 하니 말씀이 담고 있는 사건을 우리 몸에서 일으킨단 말입니다.

이걸 그리스도로 산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런 삶을 살았어요.

초대교회 성령을 받은 모든 성도가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는 삶을 살았어요.

신앙을 생활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믿음이 성도들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예수로 산다고 합니다.

 

믿음이 우리 몸을 가지고 예수님의 일을 하세요.

믿음이 오면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도구로 사용이 되어진다는 것이 믿어져요.

그러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게 됩니다.

이럴 때 신앙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가 되어요.

하나님의 일하심이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내 몸에서 나타나게 된단 말입니다.

 

이걸 사도 요한은 태초에 있는 말씀을 우리가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바가 된다고 하였어요.

추상적인 하나님을 실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느냐 하면 믿음으로 보아요.

믿음으로 믿어지게 된단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럼 우리 인생사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와 같아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는 모든 것을 감독의 뜻에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대사 하나에서부터 행동 하나까지!

옷을 입는 것도 감독의 뜻에 의한 것이고!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도 감독의 뜻에 의한 것이고!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도 감독의 뜻에 의하여 결정이 됩니다.

 

감독은 철저하게 시나리오대로 배우를 단장하고 연출합니다.

배우는 그 감독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요.

이게 감독과 배우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예수를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드라마를 계획하셨습니다.

이름하여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입니다.

이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는 우리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의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 언약이라는 시나리오에 따라서 이리저리 간섭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주인공 편에 서서 출연을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주인공을 핍박하는 악당 편에 서서 출연을 하고 있습니다.

각자 맡겨진 배역에 따라서 연기를 합니다.

 

이게 우리 인생이라는 역사입니다.

물론 세상 역사이기도 하구요.

예수님은 우리의 역사를 가지고 당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십니다.

 

세상 역사 속에 저와 여러분의 역사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이 당신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인생을 살게 하신단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인생을 사는 자가 없습니다.

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는 일에 동참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두가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은 예수님 한 분을 위하여 존재하고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나 천사도 예수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고!

절간에 스님이나 교회의 목사도 예수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습니다.

참 복음을 전하는 목사도 거짓 복음을 전하는 목사도 예수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어요.

진짜 신자도 가짜 신자도 예수를 위하여 존재해요.

 

악인은 악한 날을 위하여 사용하고!

선인은 선한 날을 위하여 쓰임 당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다스려 가세요.

마치 감독이 악당과 주인공을 가지고 한편의 영화를 찍어가듯이 말이에요.

 

이 세상은 창세전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형 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의 왕도 모형이에요.

 

누구의 모형인가 하면 하늘에 왕을 보여주는 왕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늘에 왕과 세상의 왕인 두 왕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세상에 속한 왕이고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왕이에요.

 

알다시피 세상은 실상이 아니고 허상이에요.

그럼 가이사는 가짜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짜 왕을 진짜라 하고 진짜 왕인 예수를 가짜라고 하고 있습니다.

허상을 실상으로 알고 있단 말입니다.

 

이러면 유대인도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믿는 자들이 진짜 유대인이 되는 것입니다.

혈통적 유대인은 가짜에요.

영적으로 낳아진 자가 영적 유대인입니다.

 

혈통적 유대인에게는 예수님은 왕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에겐 가이사가 왕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혈통적 유대인도 가짜이고 가이사도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유유상종인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유대인이나 가이사나 허상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죄 아래서 태어났어요.

죄 아래서 태어난 자는 다 허상이에요.

가짜란 말입니다.

 

우리도 두 사람이 있어요.

땅에 속한 사람이 있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어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있어요.

아담 안에서 난 자가 있고 예수 안에서 난 자가 있어요.

 

우리의 옛 사람인 땅에 속한 사람은 가이사 라는 세상의 왕을 원해요.

왜냐하면! 가이사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사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보다 가이사를 달라고 합니다.

 

예수는 하늘이 왕이에요.

그러므로 하늘에 것을 주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하늘에 것은 필요가 없어요.

도움이 안 된단 말입니다.

우리 육은 예수가 준다고 하는 것은 거절하고 가이사가 주는 것을 원해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그에 나라와 그에 의(義)를 구하라고 합니다.

 

이건 마치 사십일을 굶은 사람에게 떡을 구하지 말고 말씀을 구하라는 것과 같아요.

사십일을 굶은 사람에겐 떡이 필요해요.

육신의 배를 불리는데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우리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은 떡이지 말씀이 아니에요.

 

이 떡은 누가 주는가 하면 세상 왕이 주어요.

마귀가 준단 말입니다.

마귀는 사십일을 주리신 예수님을 찾아와서 떡을 주겠다고 하였어요.

가이사가 마귀에요.

마귀는 세상의 왕이에요.

 

가이사는 떡을 주는 왕이고 예수는 말씀을 주는 왕이에요.

가이사는 먹고 입고 마실 것을 주어요.

그러나 예수는 돈도 떡도 밥도 안 되는 그 나라에 의(義)를 주어요.

 

우리 몸뚱이는 떡으로 살아요.

떡을 주는 자가 나의 신이고 나의 왕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떡을 주는 가이사를 우리의 왕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가이사가 우리의 왕이라고 하잖아요.

예수는 우리 왕이 아니라고 하잖아요.

떡을 주지 않는 왕은 왕이 아니므로 죽이라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놓아 주려고 하는 빌라도에게 당신이 예수의 편을 드는 것을 보니까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구나! 라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다 나도 가이사의 충신이다!

그러면서 군중들의 마음을 만족키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린 여기서 왜? 군중들이 가이사를 왕으로 모시고 사느냐를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유대인 이 나쁜 놈들!

그러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유대인을 통하여서 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세히 따져 보세요.

우리가 유대인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요.

똑 같아요.

우리도 유대인들과 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유대인들이 이러한 모습은 자기 조상들이 하던 짓들이에요.

자기들의 조상들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사무엘 시대에 우리도 이방인들처럼 왕을 달라고 데모를 했어요.

이들이 왜?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하는지 살펴봅시다.

 

사무엘상 8장을 봅시다.

 

삼상 8:1-8절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왕을 달라고 합니까?

열방과 같이 왕을 달라고 합니다.

그 당시 왕이란? 백성들을 지켜주는 자에요.

 

그러니 지금 우리를 지켜주는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은 못 믿겠다는 거에요.

 

인간은 물질계에 살고 있어요.

물질계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이는 세계를 말해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물질계를 형이하학(形而下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상상계에 살고 있어요.

상상계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의 이성으로나 지혜로는 감지 할 수 없는 묵시세계를 말해요.

보이지 않는 묵시를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합니다.

 

형이하학(육, 肉)에서는 형이상학(영, 靈)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에 계시는 분이에요.

그러니 육으로는 보이지 않지요.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인간들은 없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계에 속하였기 때문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있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신(神)을 원하고!

눈에 보이는 복(福)을 원하고!

눈에 보이는 왕(王)을 원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면 믿음이 필요가 없어요.

이는 육신이 감지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감지하는 것은 믿을 대상이 아니고 느낄 대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감지하는 분이 아니에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받지 않으면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래서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이게 우상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서 믿는 신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이라는 말이 참 형상을 본 떠서 만든 인형이라는 뜻입니다.

 

참 재미있지요.

왜 참 형상을 본(本)을 떠서 만들까요?

이는 진짜를 가짜로 대체하기 위해서에요.

 

왜 진짜를 가짜로 대체하여 만듭니까?

이는 진짜가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진짜가 감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 불안해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가짜를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래요.

진짜 왕은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열방들은 보이는 왕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열방처럼 보이는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서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을 받으러 올라가자 금 송아지를 만들고 이가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섬긴 것과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금송아지를 만들었나요?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겐 모세는 보이는 신과 같은 존재에요.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안 내려 오는 겁니다.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신을 만든 겁니다.

 

금송아지는 보이지 않는 모세를 대신하는 신이에요.

이걸 우상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상이란? 인간이 감지하는 신을 말해요.

 

인간이 감지하는 신은 곧 형이하학적 신이에요.

이방인들은 이러한 형이하학적인 신을 섬기고 있어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신을 형상화하여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신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열방처럼 보이는 왕을 달라는 것은 곧 다른 신을 찾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8절에서 하나님은 이 백성들이 지금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지금까지 나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김 것 같이 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믿음이 없으면 우상을 찾게 되어 있어요.

보이는 왕을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어요.

이렇게 되면 결국 믿음에 문제로 귀결되어 집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이는 신을 찾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믿음을 받은 성도는 보이는 신을 신이라 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왕을 구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겐 보이는 것으로 가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늘 백성이에요.

그런데 하늘에 왕은 보이지 않아요.

이건 믿음으로 자신들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일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해요.

그러할 때 담대함이 생기고 감사가 나와요.

세상을 이기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하늘에 가치관으로 살게 된단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에요.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이란? 약속을 믿음으로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약속은 현재가 아니고 미래에 속한 것이에요.

지금 하는 일은 약속이라고 하지 않아요.

나중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약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살라는 말은 우리 힘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약속의 땅에서 사는 것입니다.

 

약속은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지만 믿을 수가 있어요.

가나안 땅은 약속으로 사는 땅이에요.

다른 말로 믿음으로 사는 곳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리는 것이 바로 보이는 것이에요.

 

이걸 왕에게 적용해 보세요.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믿고 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왕은 믿음으로만 볼 수가 있어요.

믿음이 없으면 왕은 없는 것과 같아요.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반드시 보이는 왕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묵시로 사는 자들이에요.

묵시를 방해하는 것이 현실이에요.

현실 속에서는 거대한 세상의 네피림만 보여요.

네피림들 속에서 자신들을 보면 풍전등화와 같아요.

 

쉬운 말로 여러분이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하였다고 합시다.

우리 눈에는 환경만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그 환경을 조성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럼 환경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게 되어요.

다 내게 필요해서 이런 환경을 주셨구나 라고 하게 된단 말입니다.

그럼 환경을 두려워하거나 그 환경으로 인하여 낙망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안 보이고 환경만 보인다면 어찌 될까요?

불안하고 그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럼 그 환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신을 찾겠지요.

 

우리를 어렵게 하는 환경이 가난이라고 합시다.

그럼 우리는 돈을 찾게 되어요.

돈이 우리의 신이 되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힘이 생기고 믿음직한데 돈이 없으면 불안해요.

결국 돈이 나의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던 겁니다.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면서 돈을 우리를 다스리는 주인의 위치에 두셨던 것입니다.

돈이 신이고 왕이에요.

그래서 우리도 현실 속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들 식으로 말하면 지금 여기가 지옥인데 천국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냐!

죽어서 가는 천국 말고 여기에 천국을 달라고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으니까!

이 땅에서 잘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이사를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이사가 보이는 천국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보이는 지옥을 주지만 가이사는 보이는 천국을 주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본성적으로 가이사가 좋지 예수가 좋을 수가 없어요.

지금도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 예수하지만 마음으로는 가이사를 외치고 있어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우리는 눈만 뜨면 육신을 편하게 해 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세상에서 성공하여서 잘 살게 해 달라고 하고 있잖아요.

이방인들처럼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왕을 구하고 있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달라고 한 것은 자기들을 보호 받기 위해서에요.

왕이 좋아서가 아니라 왕을 통해서 자기 유익을 구하고자 한단 말입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아요.

 

이게 인간들이 바라는 왕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신 하나님은 인간들의 유익을 위한 왕이 아니에요.

철저하게 자기 뜻을 위하여 다스려요.

 

인간들이 바라는 왕과 하나님이 주신 왕은 달라요.

인간들이 바라는 왕은 자기들을 지켜주고 자기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왕입니다.

나를 흥하게 해 주는 왕이에요.

유대인들이 바라는 왕은 자기들의 세계를 지켜주고 확장해 주는 왕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왕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은 우리 세계를 허물고 깨트리는 왕이에요.

우리를 흥왕케 해 주는 왕이 아니고 도리어 반대로 우리를 쇠하게 하는 왕이십니다.

 

내가 믿는 신은 누구인가?

내 소원을 들어주는 신인가?

아니면 내 소원을 빼앗아 가는 신인가요?

 

나는 지금 어떤 신앙생활을 하는가요?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고 있는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고 있는가요?

솔직히 여러분 스스로를 확인해 보세요.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시고는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나는 예수 때문에 망해도 좋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보낸 우리의 왕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침 뱉고 조롱하고 때리고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겉 사람은 후패하고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을 알아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지 실제는 아니에요.

실제는 겉 사람을 살찌우고 싶어해요.

그러니 입술로는 예수를 좇지만 실상은 가이사를 좇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누구의 화상이 그려져 있나요.

 

가이사의 화상인가요?

예수님의 화상인가요?

속이지 마시고 스스로를 진단해 보세요.

 

내가 지금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가 아니면 가이사를 왕으로 모시고 사는가요?

우리의 신앙이 허구이고 허상이라는 것이 고발 당하셔야만 해요.

그리하여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해요.

 

우리의 신앙을 추인 받고자 하지 마세요.

성경 어느 한 말씀도 우리의 신앙 있음을 추인해 주지 않아요.

도리어 믿음 없음을 고발하고 있어요.

말씀 앞에서 낱낱이 발가벗겨져야 한단 말입니다.

 

언감생심 천국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해요.

우린 천국이라는 상석에 앉을 자들이 아니고 지옥이라는 말석에 앉아야 할 자들이에요.

우리가 내 한 몸 살자고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라고 내어준 빌라도이고!

우리가 내 소원을 안 들어준다고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야 해요.

그리할 때 내가 산다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이런 악당이 지금 이렇게 등 따습고 배부르게 산다는 것이 감사로 나타나게 되어요.

신앙의 끝에는 감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부디 우리 모두의 신앙의 끝자락에 감사의 제사가 드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눈을 여기고 귀를 열어서 내가 예수를 죽인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마귀를 왕으로 섬기고 사는 자들임을 알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임을 알게 하시고 내가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알고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호와의 정하신 날"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말라기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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